CINELAB2025-02-26 12:18:09
2월 5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에밀리아 페레즈> 자크 오디아르 감독, 첫 내한 성사됐다!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13개 최다 후보의 주인공 <에밀리아 페레즈>를 연출한 자크 오디아르 감독이 한국 개봉을 맞아 첫 내한이 성사되었습니다.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난 3월 중순 영화의 개봉에 맞춰 한국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여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갱단 보스와 아무것도 몰랐던 그의 아내, 새 삶을 선물할 변호사가 엮이게 되는
파격적이고 화려한 뮤지컬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오는 12일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 신작, 추가 세부 사항 공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공개되었습니다.
해당 작품에서 보니와 클라이드 같은 역할을 맡게 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테야나 테일러가
시민운동가로서 알라나 하임, 레지나 홀의 캐릭터가 소속되어 있는 반정부 그룹에 가담하게 되고,
악역을 맡은 숀 펜은 백인 우월주의 그룹에 합류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번 신작은 PTA의 가장 상업적인 시도로 여겨지며, 러닝 타임은 약 3시간으로 알려졌습니다.
애초 <One Battle After Another>는 2025년 8월 8일 극장 개봉 예정이었으나,
가을 개봉으로 변경되거나, 9월 베니스 영화제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데이미언 셔젤, 에빌 나이벨의 전기 영화 감독 예정

<바빌론>의 상업적 실패 이후, 차기작 소식이 들리지 않던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스턴트맨 에빌 나이벨 전기 영화를 연출할 예정입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 작품은 1974년 아이다호 스네이크 강을 오토바이로 뛰어넘으려 했던
나이벨의 야심찬 도전을 다룬다고 합니다. 그는 오토바이 스턴트로 유명한 미국의 퍼포머, 엔터테이너였지만, 자신을 비판하는 책을
쓴 남성을 야구 방망이로 폭행한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경력을 무너뜨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찰리 카우프만 신작,
에디 레드메인&테사 톰슨 출연 확정

이도 게펜의 단편 소설 ‘Debby's Dream House’을 각색한 작품인 찰리 카우프만의 차기작에 에디 레드메인과 테사 톰슨이 출연할 예정입니다.
이번 베를린국제영화제 EFM에서 비밀리에 소개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사람들을 위해 꿈을 제조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악몽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합니다.
이번 작품은 2025년에 제작을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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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y the Fourth Be With You!
디즈니는 5월 제4회 ‘May the Fourth Be With You’(<스타워즈>의 명대사 중 하나인 ‘may the force be with you’와 발음이 비슷해서 만들어진 5월 4일 스타워즈의 날)를 앞두고 있다.
5월 4일에는, 5월 매주 금요일에 개봉하는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스타워즈: 배드 배치(Star Wars: Bad Batch)>의 방송이 시작된다. 이 시리즈는 <스타워즈: 클론 전쟁>의 스핀 오프 작품으로서, 클론전쟁 시즌 7에서 등장했던 클론 포스 99을 주연으로 하며, 오더 66, 클론전쟁 종전 이후를 배경으로 한다.
<마이티 덕: 게임 체인저스>, <빅 샷> 그리고 <하이 스쿨 뮤지컬: 더 뮤지컬- 더 시리즈>의 새로운 에피소드가 5월 14일부터 개봉할 예정이며, <마이티 덕>의 후속 시리즈는 5월 28일에 시즌 마지막을 장식할 예정이다.
또한 이번 달에는 디즈니의 차기 블록버스터인 <크루엘라>를 볼 수 있을 예정이다. <크루엘라>는 ‘101마리의 달마시안’의 악당인 크루엘라에 관한 이야기이며, 크루엘라 역을 맡은 엠마 스톤과 함께 5월 28일 개봉할 예정이다. 이 디즈니 실사 영화는 재능은 있지만 밑바닥 인생을 살던 ‘에스텔라’가 남작 부인을 만나 충격적 사건을 겪게 되면서 런던 패션계를 발칵 뒤집을 파격 아이콘 ‘크루엘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트리밍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디즈니+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현재 디즈니+의 한국 상륙 날짜는 2021년으로 영화 <블랙 위도우>와 함께 출시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하단은 디즈니+에서 5월에 상영될 작품이다.
5월 4일
<스타워즈: 배드 배치> (에피소드 1)
5월 7일
<마이티 덕: 게임 체인저스> (에피소드 7)
<빅 샷> (에피소드 104)
<스타워즈: 배드 배치> (에피소드 2)
<완다가 간다> (시즌 1, 2)
<리틀 야구왕 앤디(Everyone’s Hero)>
<플리카 2(Flicka 2)>
<와일드 하츠 캔 비 브로큰(Wild Hearts Can’t Be Broken)>
<판타스틱 4 – 실버 서퍼의 위협>
5월 14일
<하이 스쿨 뮤지컬: 더 뮤지컬- 더 시리즈> (에피소드 201)
<스타워즈: 배드 배치> (에피소드 3)
<마이티 덕: 게임 체인저스> (에피소드 8)
<빅 샷> (에피소드 105)
<특수 요원 오소> (시즌 1, 2)
<특수 요원 오소: Three Healthy Steps> (시즌 1)
<엑스맨 – 최후의 전쟁>
<Life Below Zero> (시즌 15)
<Race to the Center of the Earth>
5월 21일
<Inside Pixar: Unpacked><Unpacked: About Time>
<Unpacked: Everybody Loves a Villain>
<Unpacked: The Squint Test>
<Unpacked: Inner Drive>
<Unpacked: No Small Roles>
<마이티 덕: 게임 체인저스> (에피소드 9)
<빅 샷> (에피소드 106)
<하이 스쿨 뮤지컬: 더 뮤지컬- 더 시리즈> (에피소드 202)
<스타워즈: 배드 배치> (에피소드 4)
<빅 시티 그린즈> (시즌 2)
<Mickey Mouse Mixed-Up Adventures> (시즌 1)
<Fury Files>
<Ice Road Rescue> (시즌 5)
<러닝 와일드 위드 베어 그릴스(Running Wild with Bear Grylls)> (시즌 6)
<팅커벨(Tinker Bell and the Legend of the NeverBeast)>
<Akashinga: The Brave Ones>
5월 28일
<크루엘라> 프리미어 엑세스
<런치 패드>
<마이티 덕: 게임 체인저스> (에피소드 10)
<하이 스쿨 뮤지컬: 더 뮤지컬- 더 시리즈> (에피소드 203)
<스타워즈: 배드 배치> (에피소드 5)
<빅 샷> (에피소드 107)
<Bluey Shorts> (시즌 2)
<데칼코마니, 아빠와 나(Sydney to the Max)>, (시즌 3, 에피소드 1-8)
<Kingdom of the Polar Bears>
<위키드 튜나(Wicked Tuna)> (시즌 10, 에피소드 1-7)
씨네랩 에디터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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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벗어날 탈(脫)
불일부이(不一不二), 오프닝부터 기이한 거문고 소리와 함께 전면에 떠오르는 한자어는 아리송하다. 불교 철학에서 출발한 위 구절은 ‘너와 나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 (다르게 말해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라는 뜻이다. 의미를 풀어보니 이해가 더 복잡해진다. 두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임을 짐작케 한다.
불치병에 걸려 삶의 막바지에 선 영목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108배에 매진한다. 죽음을 맞기 전, 마치 열반의 경지에 이르려는 듯 여자친구의 애닳은 전화에도 굴하지 않고 단지 절을 할 뿐이다. 숭고하게 절을 하고, 물잔을 비우고, 산책을 하고, 단상을 기록하며 번뇌를 지우기 위해 노력한다. 무겁게 생각하지 않으려하지만 도리어 생각이 많아지는 역설을 발견하는 나날이 지속되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산책을 하다가 홀린 듯 나무 더미 속 공간으로 기어들어가 붉은 꽃 한 송이를 보게 된다. 그 날 이후 영목은 붉은 옷의 형상을 목격하기 시작한다. 신경이 쇠약해져 헛것을 보게 된 걸까, 혹은 부다의 현현인가. 공포에 휩싸인 영목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박차를 가한다.
지우는 작가다. 애니메이션으로 입문했지만 이내 그만두고 그림을 그린다. 전시를 앞두고 있지만 번아웃이 온 탓에 마감기한에 쫓기고 있다. 영감을 기다리다가, 예전에 그렸던 애니메이션이나 내보라는 기획자의 독촉 전화를 받고는 자신이 애니메이션을 그만 둔 이유를 반추해보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부터 끝을 두려워한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왜 모든 것은 끝내 멈추어야 하는가? 왜 모든 이야기는 끝이 나야 하는가? 과거 남자친구와 함께한 니스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들춰보다가 어렴풋이 답을 찾고 다시 애니메이션을 그리기 시작한다.
서보형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영화인 벗어날 탈은 실험적이다. 전형적인 영화 구조에서 벗어나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병치시켜 풀어내다가, 종국에는 이어버린다. 죽음을 연료삼아 깨달음으로 나아가기위해 노력하지만, 죽음(미지의 형상)을 두려워하는 영목. 멈춤을 두려워하여 영원히 유예하려고 하지만, 사진(정지한 것)에서 생명을 포착하고 애니메이션(움직이는 것)을 다시 그리게 된 지우. 서로가 두려워하는 것을 열망하고 열망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먹고 먹히는 관계. 영화는 순환하며 점에서 거대한 고리 모양의 구조를 띠고 있다. 마치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대비되는 것을 나란히 보여주면서 다름을 부각하고 있다. 여자와 남자, 상승과 하강, 멈춤과 움직임 그리고 물과 불. 영목(남성)과 지우(여성)은 각각 수직운동과 정지-움직임을 반복하며 삶(물)과 죽음(불)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러나 가장 짜릿한 지점은 서로 다른 개념이 접합되는, 말하자면 불일부이가 실현되는 때이다. 영목과 지우가 만나는 순간, 죽은 줄만 알았던 해변의 사나이가 영목으로 환생한 순간, 저승사자 같은 빨간 옷의 여인이 지우로 치환된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치 영혼을 주고받듯 성스럽게 입을 맞추며 이어진다.
지우의 애니메이션 속에서 두 사람이 합쳐지는 장면은 불일부이를 더욱 명료하게 나타낸다. 이야기 속에서 한 남성은 한 여성의 자궁으로 기어들어가 잉태된다. 남성의 모습에서 꽃을 찾으러 나무 더미 세상으로 기어들어가는 영목이 겹쳐진다. 지우는 둥그런 베개를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출산해내는 연기를 하는데, 마치 지우가 영목을 출산한 것처럼 느껴진다. 서로 대비되는 것을 좇던 두 인물이 결합하게되니, 영목은 죽음을 연료삼아 추구했던 깨달음보다 삶의 기쁨이 더 중요함을 깨닫고, 지우는 끝의 두려움을 극복하여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을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삶과 죽음이 구분되지 않고 이어지니 만물은 서로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는 뫼비우스의 띠가 완성되는 것이다.
2018년 제작한 단편영화 <탈날 탈(頉)>에서 확장된 <벗어날 탈(脫)>은 정해진 포맷 안에서 제작한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4대 3비율을 사용하며, 남녀 한 명씩만 등장시키고 거문고 음악을 사용할 것. 가히 제한된 조건 속에서 창의력이 극대화된 경우라 할 만하다.
4:3, 정확히는 1.375:1(아카데미 비율)의 화면비를 사용하면서 회화적 연출이 두드러진다. 수직운동을 반복하는 영목의 움직임을 담기에 탁월했다.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수행에 정진하거나, 몸을 꼿꼿이 편 채로 좌선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났다. 또한 프리즈프레임을 활용하여 회화적 특성을 부각하면서도, 1초 24번 이하로 프레임을 분절하여 달리는 지우의 모습을 간격있게 표현한 장면은 움직임을 중시하는 지우의 특질을 강조하는 것에서 나아가 움직이는 이미지(Moving Pictures)라는 영화 매체의 본질까지 환유한다.
박우재 음악감독의 거문고 연주는 혼란스러운 극의 분위기를 선율로서 충실하게 표현한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른 채 무작정 구도하는 마음, 미지의 형상과 조우하여 혼란스러운 마음에서 영목과 지우가 만나 하나로 이어지는 장면까지. 작은 단위로 특정 비트를 표현하는 것에서 발전하여 하나의 선율로서 장면을 뒷받침하기까지 다양하게 기능한다.
로베르 브레송은 시네마토그래프를 ‘움직이는 이미지와 소리를 가지고 하는 글쓰기.’라고 표현했다. 영화는 태동 이래 끊임없이 존재론적 위협을 받아왔다. ‘제7의 예술’로 명명되며 독립된 예술로서 지위를 공고히하는가 했지만, 회화, 문학, 연극, 음악, 무용의 특징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레송의 표현은 독자적인 영화의 정의를 정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벗어날 탈>은 회화의 특징을 끌어들이면서도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승화시켜 시네마토그래프로서 구현해내었다는 점이 신선하면서도 반갑다. 이미지(쇼트)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역학과 탁월한 사운드를 잘 버무려 영화의 본질을 존중하면서도, 인접 예술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저변을 확장한 실험적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이후 3년 만에야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익숙하지 않은 불교 교리를 영화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표현의 한계가 직관적 동요를 이끌어내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나, 정신적인 것을 시각화하여 필름 위에 환원해냈다는 점만으로도 괄목할 만하다.
원을 그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벗어날 탈>은 부서지면서 생겨날 것을 권한다. 멸(滅)의 끝은 생(生)의 시작이고, 생의 끝은 곧 멸의 시작이니 매끈하게 이어진 마음으로 사는 것이 진정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순환의 길 위에서 마음을 기울일 것은 바라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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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빈의 부모에 대하여
이 글은 영화 [매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배우자를 먼저 잃은 자에 대한 단어는 있어도. 자식을 잃은 부모를 뜻하는 단어는 없다고 했다.
자식을 먼저 잃은 슬픔은 마치 창자가 끊어진 슬픔과 같아서 단장지애. 라고 부른다고 하지만. 이마저도 간접적으로나마 마음을 표현할 뿐 그들의 마음을 정형화할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영화 [매스]는 겉으로 봤을 때는 총기 사고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피해자의 부모와. 사건의 가해자 부모가 만난 것처럼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결국 모두 피해자들이 만나 서로를 위로하는 과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절대 돌아오지 않을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는 순간도. 한 사건을 통해 용서에 다다르는 이야기도 담담하게 그리고 있는 네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오히려 끊어진 창자가 다시 이어지는 것이 쉽지 않을까. 하고 느낄 정도다.
피할 수 없는 문제 같았던 방, 그리고 제목의 이유;갑갑하고도 현실적이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의 주 무대( 혹은 거의 모든 무대)는 교회에 있는 한 방이다.
초반 부분을 꽤 집요하게 그 방에서 일어날 대화와 방의 "적합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 봐도 이 방이 가지는 의미가 꽤 클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방은 그 어떤 상담 장소보다도 좁고. 답답해 보인다. 물리적인 환기를 위한 창문도. 심리적인 환기를 위한 피아노도 놓여있지만. 실제로는 눈물을 닦을 티슈마저도 사치(혹은 사족)처럼 보이는 공간이다. 덕분에 불안함과 함께 신중함이 공존한다.
이 공간에서 이뤄지는 일들을 담은 영화의 제목이 왜 매스(Mass)여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어떤 것의 물리학적인 무게(1)를 뜻하긴 하지만, 미사(2)도 상징한다. 또한 스펠링은 다르지만 엉망진창(Mess)을 의미하는 단어(3)와도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은 재미있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자신의 아들이 일으킨 실질적인 사건으로 인해 생긴 마음의 무게(1)는 살아남은 자들의 남은 삶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3). 피할 수 없는 책임과 동시에 죄의 승화를 이뤄야 하는 곳은 뜬구름을 잡는 천국이나 화려한 장소가 아니어야 함은 당연했고, 그곳에서 이뤄지는 네 사람의 대화(2)야말로 스스로에 대한 구원도 함께 이룰 수 있는 공간이어야 했을 것이다.
영화의 제목과 장소, 그리고 실질적인 주제까지도 맞아떨어지게 하기 위해 고심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답답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장소가 얼마나 제대로 된 선택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반지의 유무로 알 수 있는 부부의 뒷날들;상실을 견뎌내는 힘.
사진 출처:다음 영화
가해자와 피해자 측으로 분류되는 두 부부는 외적인 모습에서부터 많은 것을 달리한다. 아니, 반대의 성향을 보인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옷차림도, 금전적인 여유도. 혹은 오고 가는 단어나 말투도.
그러나 그 들을 가장 다르게 만드는 점은, 가해자 측의 부부는 반지를 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린다와 리처드는 묘하게 시선이 제대로 맞부딪치지 못하고. 상대방의 반응을 기대하며 던진 문장들이 이어지지 않고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쩌면 방어막을 한껏 두른 말만을 내뱉는 리처드에 대한 원망의 시선조차도 리처드는 받아주지 않는다.
이는 게일과 제이가 그 "사고"이후의 삶을 서로에게 의지해 살아왔지만. 린다와 리처드는 어쩌면 상처를 잊기 위해 현실적인 문제에 더 매달렸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
그 어떤 방법을 썼다 해도 상처를 잊을 수 있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을 수 있기에 무엇이 더 나은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단지 그들 모두 잊기 위해. 혹은 극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음에는 이견이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과로는 용서를 얻을 수 없다;용서를 구하는 방법.
사진 출처:다음 영화
최근 많은 공인들의 사건 사고가 일어났다.
그들이 일으킨 죄는 음주 운전일 때도 있고. 때론 학교폭력일 때도 있다. 뭐 더 심하게는 성범죄이기도 했고. 그 죄가 무엇이건 간에 우리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그들이 사과하는 방식임과 동시에 용서를 구하는 태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끔 보면 내가 사과했으니 된 거 아니냐.라는 말을 돌리고 돌려 성명문, 혹은 입장문이라는 종이 쪼가리 하나로 "퉁치려는"성향을 보일 때가 있는데. 사과는 한다고 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속 편한 그들에 비하면 이 영화는 참 답답해 보인다.
가해자의 부모는 우리도 어쩌면 피해자라며 용서를 구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과를 윽박지르며 협박처럼 쓰지도 않는다. 그저 피해자의 부모가 달랠 수 없는 마음을 토해내고 용서로 이르는 길에 묵묵히 함께 따라간다.
비록 이 사건의 당사자들은 죽음으로 인해 시시비비를 직접 가릴 수는 없고. 린다와 리처드 역시 피해자라고 봐도 무방하지만. 타인과 함께 자신을 용서하는 여정이 얼마나 길고 힘든지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또한 용서는 가해자 측에서 원할 때 꺼내주는 "맡겨놓은"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이 영화는 잊지 않았다.
이런 균형을 잃지 않은 덕에 영화는 양쪽의 입장 모두를 이해하게 한다.
마치면서
우리는 영화 [케빈에 대하여]에서 부모의 잘못된 훈육과 어쩌고가 아이를 어떻게 망치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쩌면 가해자와 부모 모두 똑같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것에서는 또 다른 영화인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가 겹치기도 하지만. 영화는 교묘하게 언급한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점들을 피해 간다. 그와 동시에 다루지 않은 점들을 잘 다루고 있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방은 너무도 간결하다. 덕분에 배우들의 연기에 푹 빠져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손을 떨기도 하고 눈물을 훔치기도 하며 영화를 보게 한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에서 느꼈던 아쉬움이 많이 풀리는 순간.
그 어떤 부모도 자신의 부모가 잘못되기를 바란 적이 없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의 책임은 과연 어디까지인가에 대해 알 수 있어서 많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이 글의 TMI]
1. 영화 보는 내내 눈물이 좔좔
2.네 분의 연기 진짜 진땀이 줄줄 날 정도였음.
3.아니 복숭아 언제 나오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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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품을 사고 내 이야기를 하고, <3000년의 기다림>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3000년의 기다림 Three Thousand Years of Longing, 2022 제작
호주 외 / 판타지 외 / 108분
감독: 조지 밀러
기념품을 사고 내 이야기를 하고, <3000년의 기다림>
삶은 나아가는 것이다. 나아가야 하는 '일'이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그게 사람이자, 인간을 대표하는 개인으로서 갖는 숭고한 의무다. 거창한 의식이기도 하고 과제도 맞지만, 그렇다고 과하게 무게 잡거나 겁먹을 필요는 없다. 삶과 삶을 잇는 방식을 찾는 건 내 몫이니까. '각자의 몫'에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관한 수단과 방법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는 것만 잘 알고 있으면 된다. 그래야 타인에게 나를 공유해도 쉽게 꺾이지 않고 그와 함께 할 수 있다. 인생은 내가 '어떻게' 하고 있다는 걸 내 옆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바쁘게 흘러간다. 공유가 공존이 되는 지점이다. 필요한 건, 헤쳐 나가기 바쁜 마음에 지치지 않는 활력을 주는 것이다. 활력, 이미 우린 오래전부터 그것을 탐구하고 또 원해 왔다. 적당히 행복하고 충분히 여유 있는 삶을 사는 '알리테아'마저도, 사실은 진심으로 가슴 깊숙이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것처럼. 지니가 말했듯, 갈망이 없는 인간은 없다. 인간에게 갈망은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내면의 주머니이자 삶의 수단과 방법이다.
영화 <3000년의 기다림>은 그것을 '이야기'라고 말한다.
출처: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다음)알리테아는 서사학자로 수많은 이야기를 해석하고 풀어내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전시하듯 설명하며 살고 있다. 모든 이야기에서 하나의 공통된 이야기를 찾는 일을 홀로 진행하고 있는데, 이는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직업적 쾌락이자 참견쟁이 옆집 할머니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안전장치다. 겉으론 냉철하게 이야기가 가진 한계를 논하지만, 자기 일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며 이야기를 귀히 여긴다. 다만 쉽게 흥분해 자신을 이야기 홍수에 던지지 않을 뿐이다. 현재 그녀는 자기 의지대로 삶의 항로를 정해 흘러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원하는 기억과 원하지 않는 기억을 구분해, 후자를 상자에 넣고 봉인한 뒤 앞으로의 희망과 현재의 기쁨만을 누리고 사는 사람, 그게 바로 알리테아다.
정령 지니의 등장은 우연을 가장한 영화적 필연이다. 그걸 알면서도 우린 딴지 걸지 않는다.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라 인식한다. 영화가 가진 본연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3000년의 기다림>이란 창구로 보면 새롭다. 영화가 감동과 즐거움을 위한 영상이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걸 경험하기 때문이다. 알리테아가 기념품을 사는 순간, 우린 영화를 산다. 그녀가 유리병을 씻을 때 우린 지니를 피부로 느낀다. 영화가 이야기로 읽히고 들리고 보이는 시작점이다. 그럼 어떤 이야기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다. 지혜가 될 수도, 경고, 위로, 나아가 동반자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이야기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필수 요소임을 영화(이야기)가 다시 한번 친절하게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더구나 <3000년의 기다림>엔 거부할 수 없는 묵직하면서도 유연한 리듬이 있다. 그냥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살아 숨 쉬는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것과 같다. 모든 현상을 이성적으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대에 감성이 충만한 동화는 환영받을 수밖에 없다. 흔히 얘기하는 '옛날 옛적에-' 감수성이 병 속에서 나온 지니의 거대한 발바닥으로 실체화되다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우연인가.
출처: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다음)
정령 지니의 등장으로 알리테아는 자신이 단칼에 끊어냈다고 자부하던 악몽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 과거를 잊는 게 그녀의 진짜 갈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알리테아는 끝까지 고집스럽게 결혼, 유산, 이혼이란 간단한 키워드로 자기의 어둠을 나열한다. 별것이 아닌 건 아니지만, 이미 넘어온 파도이며 다신 넘을 일 없는 파도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 자신의 고통을 단 몇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그녀는 분명 여기에 존재하는 인간이지만, 그 누구도 알리테아를 아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자, 이름이 있지만 아무도 진짜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여인. 알리테아는 스스로 이야기를 쓰지 않겠다고 결정했기에 여전히 고여있다. 지니는 차가운 이성으로 무장한 그녀에게 자신의 장대한 흔적들을 쭉 늘어놓는다. 늦은 밤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듯이, 정적인 언어에 말맛을 추가하고 그때 그 감정을 흠씬 버무린다. 인간이 가진 갈망에 대해, 그 갈망에 빠진 인간을 사랑한 초월적인 존재에 대해, 그리고 마침내 알리테아에게 요구한다, 나의 이야기를 위해 소원을 빌어 너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라고.
알리테아는 정령에게 사랑을, 아니 시바와 제페르를 향한 그만의 정열을 소원한다. 지금까지 살아있고, 존재하는 사랑의 역사를 통째로 원한 걸 보면, 그녀의 진짜 소원은 외로움과 허무, 고통을 말끔히 잊게 해줄 충만한 사랑임이 틀림없다.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정도로 헌신적인 그의 사랑은 알리테아에겐 악몽을 담는 또 다른 상자였다. 그날 밤, 지니는 소금 통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알리테아와 런던으로 떠난다.
출처: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다음)
하지만, 모든 이야기 끝엔 무시무시한 경고장이 붙는다. 이를 서사학자 알리테아가 모를 리 없다. 점차 몸이 약해지는 지니를 보며 그녀는 깨닫는다. 이 이야기의 진짜 끝을 말이다. 이 세계가 버거운 지니에게 필요한 건, 알리테아로부터의 자유뿐이다. 정령의 이야기는 정령이 주인공이다, 알리테아의 소설 주인공이 그녀 자신인 것처럼. 그리고 주인공은 언제나 자기 의지로 마지막 선택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결정한다.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어디든 당신이 있던 곳으로 가 자유롭게 살라고 소원을 빈다.
다시 그녀의 어둠, 지하 공간이 등장한다. 지니의 흔적을 봉인한 상자를 들고 지하로 내려가는 알리테아. 지니의 상자가 지하에 선반에 자리한 순간, 한 챕터를 마무리하듯 불이 딱 꺼진다. 그 힘찬 신호탄으로 두 인물의 이야기는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다. 알리테아는 이제 안다, 어떤 것이든 상자에 평생 봉인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오랜 머뭇거림 끝에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그녀는 글을 쓰며, 자신을 찾아오는 지니와 순간순간을 함께한다. 그의 기운을 느끼고 그의 사랑을 온전히 받으면서, 그것이 앞으로 펼쳐질 자기 삶의 충분한 원동력임을 선언한다.
출처: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다음)
이야기는 이야기로 끝난다. <3000년의 기다림> 역시 3000년의 기다림으로 끝난다. 거대한 대서사시로 느껴지는 이 웅장함과 원대함이 서늘함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힘을 아는 자에겐 거부할 수 없는 숨결로 남는다. 소원을 빌고 싶은 마음을 앞지른 설렘과 카타르시스 덕이다.
삶, 활력, 소원, 이야기. 뒤집어도 무방하다. 이야기, 소원, 활력, 삶.
<3000년의 기다림>은 전부 다른 우리의 노선을 존중하면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 하나를 끄집어낸다. 삶의 탄생과 죽음, 그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웅덩이까지 단 하나의 줄로 꿸 수 있는, 끊기지 않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줄기 바로 계속 되뇌고 읊조렸던 '이야기'다. 결국 삶과 이야기는 하나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죽음에서 벗어나 죽지 않는 이야기로 계속 살아 숨 쉬는 것이다. 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인간에겐, 잠들지 않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풀어낼 인간이 필요하다. 이 인물 혹은 이야기, <3000년의 기다림>과 같은.
그녀와 그처럼, 우리도 언제 어디서든 기념품을 사고 내 이야기를 하면 된다.
어떤 이야기든 좋다, 다만 다시 시작할 마지막이 오면 끝에 꼭 이 말을 덧붙이자.
"내 이야기는 실화다. 하지만 동화라 해야 믿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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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임슬립물 영화 모음.zip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다들 한 번씩은 과거로 가거나 미래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오늘은 그러한 타임슬립을 소재로 한 영화를 추천드릴까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씨네랩이 추천하는 타임슬립물 영화 모음집!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٩( ᐛ )و
미래를 걷는 소녀
Tokyo Girl, 2009
ⓒ 네이버 영화
synopsis
SF작가를 꿈꾸는 평범한 여고생 미호는 어느날 빌딩 계단을 내려가던 중, 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린다. 신기하게도 핸드폰은 광채에 감싸인 채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후 그녀는 잃어버린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보고 간신히 연결되지만, 상대와는 전혀 대화가 통하질 않는다. 전화 반대편 목소리의 주인공은 미야타 토키지로라는 1912년을 살고 있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것이다. 점차 이 불가사의한 상황을 이해해가는 두 사람은 핸드폰 너머로 서로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사이 마음이 통하기 시작한다. 당대 최고작가인 나츠메 소세키 문하생인 토키지로는 100년후 를 살고 있는 미호에게 자신의 미래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부탁하게 되는데....
cine pick!
전화를 매개체로 이어지는 현대의 소녀와 근대의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잔잔하지만 지루함은 없으며, 감동적이고 슬픈 영화이다.
오렌지
orange, 2017
ⓒ 네이버 영화
synopsis
평범한 고등학생 '나호'에게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10년 후의 나.
편지에는 16살의 자신이 곧 전학을 오게 될 '카케루'를 좋아하게 되고
그가 1년 후 사고로 죽게 된다고 예고한다. 누군가의 장난일거라고 가볍게 넘기는 '나호'.
하지만 편지에 적힌대로 일상이 흘러가자, '나호'는 자신의 첫사랑 '카케루'를 지키기 위해
미래의 나로부터 온 메시지를 따르기 시작한다.cine pick!
만화가 원작인 영화이고,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인기있는 야마자키 켄토 배우가 출연한다.
이들의 애틋한 우정 이야기, 사랑 이야기로 보는 내내 심장이 저릿하고 여운이 길게 남는 영화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The Girl Who Leapt Through Time, 2006
ⓒ 네이버 영화
synopsis
평범한 고등학생 콘노 마코토는 우연한 사고를 계기로 시간 이동이 가능한 타임 리프 능력을 얻게 된다.
하지만 마코토는 과거로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일이 점점 꼬여간다는 것을 느낀다.
cine pick!
필승 조합인 일본 애니메이션과 청춘.
영화 이후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여운이 남는 영화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
Secret, 2007
ⓒ 네이버 영화
synopsis
예술학교로 전학 온 상륜(주걸륜)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피아노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인다.
학교를 둘러보던 중, 신비스러운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오는 옛 음악실을 발견하게 되고, 그곳에서 샤오위(계륜미)를 만난다.
그들은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둘 사이에는 애틋한 마음이 싹튼다.
그러나 상륜이 샤오위를 더 알고 싶어할 때마다 그녀는 비밀이라고 일관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만 짓는다.
그러던 어느 날, 샤오위는 상륜이 같은 반 여학생 칭요와 뽀뽀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그의 곁에서 사라지는데…
cine pick!
국내 개봉 사실이 알려지기 전부터 포털 사이트를 점령하며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풋풋하고 한 편으로는 가슴이 아린 영화이다.
동감
Ditto, 2000
ⓒ 네이버 영화
synopsis
개기월식이 이루어지던 날, 스며든 달빛과 함께 낡은 무전기에 수신호가 울린다.
다른 시간 속에 놓여진 두 사람은 무전을 통해 매일 밤 이야기를 나누며
같은 사랑을 품게 되는데…cine pick!
그 시절의 감성이 느껴지는 풋풋함과 순수함이 가득 담긴 영화이다.
게다가 아름다운 OST로 귀까지 사로잡는다.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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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가 자랑스럽게 생각할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독일인 부부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에델)와 헤트비히 헤스(산드라 휠러)다. 세계 2차 대전 중이다. 일에 충실하는 루돌프 회스. 아예 집 옆에 일터가 있을 정도로 일에 진심이다. 조용한 일상.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사니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사는 집 옆에 있는 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고, 루돌프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것이다.
우선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건 가까스로 다 읽은 한나 아렌트의 책 두 권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개념 ‘악의 평범성’에 대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누구나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인 함의를 품고 있다. 바로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 중요한데, 생각하거나 관심 갖지 않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 보면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녀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한 남자를 조명한다.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은 재판 중에서 당당하게 “나는 조직이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남자의 궤변에 격분한다. 하지만 서서히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아이히만이 우리 평범한 사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이 아이히만의 모습을 포착하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사유(Thougtlessness) 하나만으로도 평범한 직장인이 역사에 남는 전쟁범죄자가 된 것이다.
이 ‘악의 평범성’을 제시한 것은 후대에 엄청난 파급력을 낳는다. 당연하다. 원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잖아? 이긴 자들은 승자의 입장에서 상대방, 그러니까 악의 근원을 “이 집단이 이래서 문제야!”로 퉁칠 수 있다. 아니면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라고 규정하면 쉽다. 잔다르크가 마녀로 지목당해 화형 당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종교라는 잣대가 명확하다. 또 서양의 기독교나 동양의 맹자가 인간에겐 원죄/악한 본성이 있다고 해석한 것도 악이라는 개념이 특정한 상황 하에 만들어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리고 그게 되게 대단한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인류 역사상 히틀러 같은 존재는 흔하지 않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 보면 악은 특정한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이를 전적으로 거부한다. 특정한 무언가가 있기에 대단하다던가 굉장히 특이한 게 아니다. 그냥 전적으로 평범한 사람일 뿐, 생각 없이 산 것의 총합체라고 정의한 것이다. 물론 한나 아렌트 이전의 역사가들이 악에 대해 이렇게 규명한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그 악의 형태가 구현되고 있다. 가령 영화에서 온갖 비명소리가 들리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회스 부부의 모습은 분명한 악이다. 아니면 유대인의 코트를 빼앗아 입는 헤트비히의 모습 역시 분명한 악이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무사유’의 과정을 두 측면에서 보여준다. 어떻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이 보여주듯, 조직에 흘러가는 남자(루돌프)와 타인에게 무관심한 여자(헤르비히)를 통해서. 또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가 역설하듯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을 강조한 방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다.
가장 먼저 탐구해야 할 인물은 루돌프 회스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루돌프 회스가 조직 내에 꽉 박혀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영화 연출을 통해 보여준다. 이 연출은 꼭 필요했다. 왜? 루돌프 회스가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역사적인 상황과 결부시켜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래야 이 영화가 비판하고자 하는 악의 속성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영화는 이를 위해 건조하게 그의 직장인으로서의 일상을 보여준다. 가령 외부 협력업체가 와서 회스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 속 두 남자는 그냥 대표자들끼리의 대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그가 직장인으로 얼마나 자기 하는 일에 투신하는지를 묘사한다. 좀 필요 없어 보이는 전화 장면이 여러 번 들어간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기에 특별한 설정이 영화에서 빛을 발한다. 아우슈비츠 옆에 사무실이 있고 거기서 산다는 특징은 가정적이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루돌프 회스의 모습을 보여주기 쉽다. 열심히 일하고 난 다음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아버지 회스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악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루돌프라는 인물에게 가장 첫 번째로 수행해야 하는 과제는 직장인으로서의 업무나 가정의 안녕이 아니다. 나치라는 조직이다. 나치의 일원으로서 소속됐다는 한 가지 사실이 이 사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 왜? 초반부터 영화가 이 인물의 내면을 이미지로 강조하고 있다. 루돌프 회스가 누군가에게 축하받는다. 그런데 그 축하를 해주는 사람들이 나치 조직원들이다. 얼핏 보면 회색 옷 입은 사람이 떼거지로 몰려들어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된다(심지어 배경도 회색 저택이다). 영화가 고의적으로 카메라를 멀리 떨어트려서 누가 루돌프 회스인지 알 수 없게끔 묘사하는 것이다. 축하받는 사람과 하는 대상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명백하게 수신자와 발신자가 정해진 행동을 흐려놓겠다는 감독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개인보다 조직을 강조한 것이다.
또 이 인물이 직장인으로서의 활동반경과 쉴 수 있는 집의 바운더리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옆에 산다는 것도 이상한데 거기서 일을 한다는 건 더 기괴하다.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이 조직에 잡아먹힌 루돌프의 모습을 보여주는 설정이 되는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루돌프가 전출을 가니 마니 하는 설정이 들어간 것도 흥미롭다. 사실 이 에피소드 자체가 굳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안 간 거라서 굳이 알 필요도 없고, 갈등이 격정적이지도 않다. 영화의 기-승-전-결이 이 전출 여부를 두고 쌓아 올린, 소위 ‘빌드업’ 한 것도 아니라 맥 빠지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일이 이 가족에게 끼친 영향이 중요하다. 조직이 루돌프 회스의 가족공동체를 해체시킬 정도로 주인공(회스)에게 절대적이었다는 의미다. 나치와 히틀러의 말이라면 뭐든 다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엔딩신에서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내면의 무언가를 갖고 있지만 결국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 역시 인물의 이런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무의식이 영화의 플롯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루돌프의 내면을 보여주는 연출은 후반부에서 다시 반복된다. 초반 루돌프가 축하받는 장면과 후반부 나치 조직원들끼리 회의하는 장면은 수미상관처럼 반복된 것 같다. 왜? 회의를 주체하는 장면을 가장 첫 신에선 보여주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부감 숏으로 화자를 숨긴 것이다. 이다음 장면을 보면 영화 안의 회의 주제에는 회스가 제시한 근거가 중요하게 설정되어 있다. 다음 장면은 회스가 자기 의견을 역설하는 장면을 넣으면서 회의의 끝을 분명하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루돌프 회스가 회의에서 중요하다는 것만 묘사하고 그 안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루돌프 회스가 이 당시 나치라는 조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도 근거를 찾을 수 있으나, 영화 초반부를 생각해 보면 수미상관처럼 조직 안의 루돌프 회스를 강조하기 위함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사운드의 힘만 믿은 게 아닌 비주얼의 힘이 조직에 휩쓸리는 루돌프의 모습을 보여줬다.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는 연출인 것이다.
두 번째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은 루돌프의 아내 헤트비히 회스다. 이 인물이 이 영화에 차지하는 물리적 비중은 굉장히 많다. 하지만 그 비중치고 영화 안에서 유효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인물은 플롯 전면이 아닌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이야기를 담당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근거는 간단하다. “내가 이 집을 가지려고 17년 동안 고민해 왔다!”라는 대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강조하고 싶은 것. 이 인물의 동선이다. 이 인물은 집 밖에 멀리 나가지 않는다. 루돌프가 타 지역으로 나가거나 헤트비히 어머니가 그녀의 집으로 도착한 것과는 대비된다. 전업 가정주부인 것으로 보이는 헤트비히. 남편 루돌프에게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는 말을 듣는다. 후반부 루돌프와의 갈등에서도 이 사람은 집 밖에 나가기 싫다. 남편을 속여서라도, 유대인들 고용해서라도 만든 집이니 만큼 애착이 강한 것이다. 이렇게 집에 박혀있는 헤트비히.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면 자기 집 안에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능통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 인물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인물은 집안사정에 그렇게 밝은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관심이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첫 번째 근거. 이 사람이 집 안에 일어나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증거는 대놓고 드러난다. 이 영화의 사운드 지분 중 크다고 볼 수 있는 아기의 울음소리도 그 예시 중 하나다. 그냥 ‘왜 이렇게 울까?’ 한 마디면 엄마로서의 역할이 끝나나? 후반부에 남자 형제들끼리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다투다 형이 동생을 장난으로 가두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기서 동생이 울고불고 소리 지르지만 어머니 헤트비히는 알아채지 못한다. 중후반부 폴란드 소녀가 사과를 수용소 근처에 묻는 장면이 있다. 그때도 이 헤트비히는 인기척을 느끼지만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강가에 재가 떠다니는 것도 헤트비히가 아이들을 씻는 장면은 있지만 원인을 예방한 다 던가 하는 진단이 없다.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취해있기만 하지 실질적으로 ‘일 잘한다’라는 말을 듣기엔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영화 후반부에 묘사되는 루돌프 회스의 불륜은 이 인물(헤트비히)의 무능력함을 암시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어디 다른 곳에서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루돌프의 집 근처에 있는 사무실에서 불륜이 이어진다. 루돌프의 아이가 “아빠 땀 냄새나!”라고 말할 정도로 이 남자의 불륜은 이 가정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남편이 속였기 때문에 불륜을 저지른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루돌프 회스는 실제로도 가정적이지 않은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헤트비히 의 대사 “오래전에 (전출이) 결정 난 것으로 보이는데 왜 말하지 않았냐”라는 말은 과연 그녀가 남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이 집안이 화기애애하다는 시각적인 만족감에 도취되어 가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자각하지 못한다는 건 그녀의 분명한 패착이다. 마치 나치 독일과 히틀러가 집권하고 난 다음의 모습이 1차 대전 전후의 독일을 재건하고 있다고 믿었을 독일인들처럼 말이다. 글쓴이가 헤트비히가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인들을 비유하고 있다는 건 여기에서 온다. 나의 행동이 독일의 재건을 위해서라는 자기기만, 가정에 착실한 어머니라는 자기기만이 나치당의 지지자들과 헤트비히에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이 비유에 의미를 부여하니 영화 안의 두 대사가 더 와닿는다. 유대인 학살이 기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은 채, “너희들(유대인)은 나 덕에 편하게 사는 거야”라며 남편이 널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고 폭언을 하는 것. 그녀가 가진 모순을 이 영화가 폭넓게 묘사하는 것이다. 또 후반부에 루돌프가 헤르비히에게 “우리의 성과”라는 식으로 “우리”를 강조하는 것이 흥미롭다. 당연하다. 자국민들을 속인 나치의 군인들도 당연히 문제가 있지만, 심정적 동조자로서 학살에 ‘무관심’과 ‘자기기만’으로 참여한 당시 독일인들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단지 일상만 보여주는 줄 알았는데 그 이면에 담긴 의미가 무시무시한 좋은 각본의 힘이다.
두 캐릭터 말고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중요한 것은 카메라와 사운드다. 우선 카메라. 이 영화가 카메라로 일상을 담는 방식이 특별하다. 그냥 일상적인 걸 담으면 모르겠는데 어디에서 훔쳐보는 것처럼 화면을 담았다. 실제로 검색해 보면 어렵지 않게 이 영화의 촬영 기법을 찾을 수 있다. 세트장을 만들고 카메라를 많이 설치한다. 대신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이건 중요하다. 억지로 드라마를 배격했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대놓고 있다. 그럼 그건 대놓고 영화다. 배우들이 서로 얼굴 보면서 연기한다. 감정의 이입을 유발하고 곡진한 무언가를 탐구한다는 것. 이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 대치되는 부분이다. 관심을 떼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응집성을 위해서라도 감정이입을 유발하면 하고 싶은 걸 보여주기 어렵다. ‘얘 나쁘지?’가 되는 순간, 인물의 표정이 보이는 순간 비명의 의미가 옅어진다. 영화가 그은 선을 스스로 넘는 것이다. 촬영 구도만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명확하게 만드는 연출이었다.
하지만 이 카메라를 활용한 연출 중에 정말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시각적인 것으로 사방이 막힌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다. 모든 샷에서 벽이 강조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벽이 필요하지 않은 장면에서 굳이 벽을 보여준다는 게 핵심이다. 중후반부에 어떤 남자가 벽 너머의 풀숲에 어떤 것을 뿌리는 장면이 있다. 일반적인 카메라워킹이라면 벽을 등지고 찍는 게 맞다. 그런데 굳이 이 장면에서 벽과 남자, 풀숲이 같이 등장한다. 벽을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읽힌다. 더 나아가 청각적인 요소는 벽과 충돌하며 영화에 균열을 낸다. 남자가 숲에 무언가를 뿌리는 장면에서 들리는 소리. 어떤 남자가 비명인지 절규인지 질문인지 모를 소리를 지른다. 곧바로 총성이 들린다. 카메라는 여기서 총에 맞는 사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벽만 보여준다. 마치 소리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그 대신 관객들은 상상력이라는 게 있어서 벽과 소리만 보여줘도 이 상황이 어떤 일인지 대충 예상할 수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사운드를 강조하는 이유? 아니 그 이전에 사운드를 어떻게 강조했을까? 벽의 이미지를 강하게 보여줘서 이 영화 안에 쳐져있는 벽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본 사람에게 벽의 의미는 간단하다. 무관심이라는 벽이다. 계속해서 안에 있는 야채니 꽃이니 라일락이니 수영장이니 하는 것들을 보여주지만 무관심이라는 벽이 인물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벽의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닿고 있다. 악의 평범성을 이 영화가 사운드와 카메라의 존재로 보여준 것이다. 이 벽의 존재 덕에 카메라는 무엇을 찍을지에 대한 고민도 끝냈다. 분명한 악에 대해서는 카메라로 찍고 희생자들은 사운드를 통해 표현한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악에 익숙한 악인이 되는 셈이다. 이 맥락에서 열 카메라로 표현한 소녀를 설명할 수 있다. 악이 아닌 무언가의 존재, 그러니까 유대인에게 사과를 주는 따뜻한 마음이 이 영화의 카메라에 담기지 못한 선의가 된다. 사운드만 부각되는 것이 아닌 촬영에 의한 연출이 영화의 주제를 강조했다.
이 영화의 사운드는 영화의 핵심을 담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단란한 가족들의 일상 속 비명이 틈입한다. 이 비명이 가지는 임팩트는 영화를 본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의견을 말할 것 같다. 비명도 비명 나름이다. 어떻게 기괴한 소리만 다 골라서 삽입했는지 이런 요소들도 다 감독의 감각이 크게 주요한 것으로 보인다. 전작 <언더 더 스킨>에서 외계인(스칼렛 요한슨)이 지구인들과의 교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 사운드로 치환된 셈이다. 이 선택은 아주 좋았다. 학살의 진상을 원초적인 방식으로 다가가게 한다. 원초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우리 일상 속에서 비슷한 것만 보면 생각난다는 의미다. 이 의미는 중요하다. <헤어질 결심>에서 감정적인 임팩트로 관객에게 큰 효과를 낸 것과는 다르게 신기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청각을 아주 잘 활용했다. 이 영화 예술의 근본에는 무성영화라는 게 있다. 이 말은 즉슨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시각적인 걸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인지심리학에서 인류는 시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연구도 있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라는 예술이 가진 두 특징을 과감하게 무시하며 청각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하지만 영화가 청각적인 것을 활용하는 방식의 화룡점정은 오프닝과 엔딩에 있다. 이 영화의 청각적인 요소에는 뭐가 담겨 있을까? 비명이다. 유대인들의 절규가 담겨있다. 오프닝을 본다. 오프닝은 검은색 화면인 채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 첫 장면부터 청각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힘을 꽉 주는 것이다. 이 기점으로 영화의 청각적인 것에 대해 연이어 생각해 보면 이후에 비명소리가 들린다. 대신 시각적인 부분이 청각적인 장면과 먼저 시작하지 않는다. 그럼 비명소리가 이 이야기의 이전에 깔려있다는 의미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으로 날아간다. 루돌프가 헛구역질을 한다. 현대의 박물관 노동자가 건물을 닦는다. 닦는 소리가 부스럭거린다. 그리고 다시 영화의 시점으로 돌아와 루돌프 회스가 어둠으로 걸어간다. 시점이 세계 2차 대전 한가운데로 돌아간 것이다. 그다음이 엔딩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오프닝처럼 청각적인 요소만 부각한다. 영화 후반과 초반이 비명소리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간이 직선으로 흘러가는 일상이다. 이 영화는 일종의 타임라인인 것이다. 영화의 과거와 미래, 오프닝과 엔딩이 청각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영화 안에서 비명소리가 청각적인 요소로 강조된다는 것. 그렇다면 영화의 과거와 미래를 이 감독이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는 곧 비명과도 같았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악인들이 시선을 돌리지 않아 만든 비극이 홀로코스트라고 말한 셈이다.
괴물 같은 영화다. 음향, 촬영, 각본, 연출 모든 부분에서 한 부분의 극점에 다다른 능력을 보여줬다. 심지어 산드라 휠러를 위시로 한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히 뛰어나기까지 하니 무결점의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꼽자면 극의 재미를 부각한 영화가 아니라서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위험부담(?)에도 글쓴이가 장점으로 확신하는 것이 있다. 정말 필요한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이 영화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만큼 징글징글하고 강박적으로 관객에게 질문한다. 사실 이 사람들이 왜 인간 근처도 가지 못하는지는 영화가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하는 부분은 곧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도 이어진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관계성에 대해 언급했다. 정치적인 행위부터 시작해 불멸하게 남는 여러 기록까지, 또 공/사적인 공간의 필요성까지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다 함께 살아가는 것에서 온다고 역설했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 <인간의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아주 속 깊게 우려낸 사골국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대화하는 사소한 것들, 공간들, 하녀의 움직임부터 루돌프 회스의 동선과 공간까지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조건>의 목차처럼 느껴진다. 충격적인 영화다. <액트 오브 킬링>과 함께 과거의 비극이 단지 과거에만 국한될 것이 아닌, 날카롭고 깊은 인사이트를 보여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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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타니안 영화 후기 / 911테러 혐의자들에 대한 충격적인 대우 / 관타나모 다이어리 원작 / 실화바탕 /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 수상작 /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언제나 멋있다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모리타니안” 후기입니다.
엔드크레딧과 병행하는 실제 인물들의 감동적인 쿠키영상이 있습니다.#911테러, #관타나모수용소, #실화바탕, #베네딕트컴버배치, #조디포스터, #골든글로브여우조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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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악녀 크루엘라, 패션계를 접수하다!
101달마시안을 새롭게 재해석한 디즈니 영화 크루엘라가 상영중이죠.
엠마 스톤이 크루엘라 역을 맡아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어요.
정말 기대 이상으로 잘 어울려서 너무 멋지고 또 이상하게도 보이기도 해요.
과거 영화와는 다르게 악녀의 길을 가기 보다는 주변 사람들을 챙기며 조금은 다른 길을 가려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크루엘라의 머리가 흑과 백으로 딱 나뉘어 있는 것처럼 기묘하게 균형감이 살아있는 영화에요.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 하세요^^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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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벨파스트> 메인 예고편
가족과 이웃, 음악이 있어 행복했던 사랑스러운 한 가족의 찬란한 이야기 #벨파스트 3월 23일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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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 메인 예고편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끝
미혹의 선율에 몸을 맡기다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게 된 '카린'
이루지 못한 꿈 때문에 지독한 갈증을 느끼던 그녀는
처음 맡게 된 제자 '앙티'의 천재성에 사로잡혀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