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4-18 15:01:15
[레터박스] 선정 영화 25선
시네필, 힙스터들의 성지 'LETTERBOXD'
시네필, 힙스터들의 성지 ‘레박’을 아시나요?
높은 수준의 리뷰를 볼 수 있는 영화 평론, 데이터 사이트 ‘LETTERBOXD’
imdb는 영미권 위주의 영화들이 높은 평점을 받는 반면 LETTERBOXD는
글로벌 영화들, 예술영화, 고전영화, 애니메이션 등 가리지 않고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많은 비공개 계정을 갖고 있다고 하며 영화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도
비공개 계정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죠.
힙스터들이 주목한 영화 'BEST25'는 어떤 영화들일까요? 같이 만나보아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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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할 때 나는 나에게 최악의 사람이 된다.
개인적인 관심뿐만 아니라 업무 특성상 국내외 영화제의 선정작들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배우 정재영의 뛰어가는 짤과 비슷해서 익숙했을 수도 있지만, 근래 봐온 다수 영화제에서 계속해서 본 탓도 있었을 것이다. 국내에선 2021년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한 이 작품을 언젠간 꼭 보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접한 개봉 시사회 소식에는 바쁜 시기가 맞물려 고민이 많이 되었다.
시사회 당일에는 퇴근을 하고 용산 아이파크몰 CGV 근처 자리가 있는 라멘집에 갔다. 함께 간 지인과 라멘을 먹으며 라멘 이름에 대해 얘기를 했다. 소유는 간장, 시오는 소금. 일본에는 단일 소스를 베이스로 한 음식들이 꽤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고 다양한 재료를 섞어 깊은 맛의 요리들이 주인 것 같다는 얘기였다. 식사를 마치고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가 무슨 얘기를 담고 있더라도 분명히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전작 <델마>와 <라우더 댄 밤즈>들이 모두 다수의 영화제에 선정되어서가 아니라 단일의 맛이 아닌 깊은 맛을 담고 있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프롤로그-12개의 장-에필로그의 순으로 구성된다. 의학을 공부하던 율리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삶을 살기로 한다. 삶의 방향뿐만 아니라 사랑 또한 율리에의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파티에서 만난 악셀과 사랑에 빠져 그와의 관계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닫고 성장하기도하지만 점점 어긋나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국내에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유미의 세포들>이 떠오른다. 유미라는 주인공의 연애를 포함한 성장기를 담아내며 귀여운 세포들을 이용해 유미의 내면을 대변해주는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웹툰)가 많은 사랑을 이유는 유미의 작고 섬세한 감정들을 세포들을 통해 보여주었기에 주인공에게 감화될 수 있었던 점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는 귀여운 세포들은 없지만 판타지적인 연출을 통해 주인공 율리에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 있게 만든다. 예를 들면 율리에가 마약버섯을 섭취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세 가지의 의미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첫 번째는 악셀과의 만남에서 본인 스스로 관계 또는 삶에서 주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율리에의 상황이 변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었다는 것, 두 번째는 율리에의 무의식, 혹은 율리에를 압박하는 것들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 세 번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유미의 세포들>이 세포들을 통해 주인공에게 이입시켰다면 약물에 취한 율리에가 경험한 환각을 최대한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도입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프롤로그, 에필로그 외에 12장의 구성은 시간의 흐름을 담은 서사적 이야기 같으면서도 동시에 일어나는 일의 파트를 나눈듯하기도 하다. 악셀을 만나고, 함께 하게 되고, 헤어지는 과정 중에 진행되는 가족 이야기는 비교적 평행한 시간 같이 느껴진다. 결론적으로 판타지적인 연출과 인물의 삶을 파트별로 나눈 구성은 율리에의 삶에 더욱 이입시키는 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그냥 누군가의 삶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삶에 위로가 된다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영화들이 더욱 와닿았던 것 같다.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또한 율리에의 삶을 통해 위로가 되기도 했다. 본론에서 비교했던 <유미의 세포들>과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분명히 다르다. 주인공이 마주하는 상황들과 삶에 대한 고민의 깊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다.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율리에의 삶을 ‘경험’할 수는 있었지만 율리에가 느꼈을 ‘감정’에 대해서는 다소 부족했다는 점이다. 감독은 보여주고자 했었으나 아쉬움이 남는 것인지, 감독의 의도인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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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치 있는 코미디 <드림>이 재미없는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엄마의 사기 범죄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축구 선수 '홍대'(박서준). 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화를 참지 못해 대형 사고를 내고, 경기 출전 금지 징계를 맡는다. 이에 홍대는 홈리스 풋볼 월드컵 감독을 맡아 이미지를 개선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선수 선발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현실에 찌든 다큐멘터리 PD '소민'(아이유)은 없는 듯 있는 각본을 들이대며 실력이 아닌 사연 순으로 선수를 뽑자고 협박 아닌 권유를 한다. 골문 안으로 공을 보내는 법도 모르고, 체력은 엉망이며, 반칙만 잘하는 선수들도 도움은 안 된다. 그렇지만 홍대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에게도, 소민에게도, 선수들에게도 월드컵 출전이라는 꿈은 소중하니까.
<드림>, 익숙하지만 어색하다
<스물>과 <극한직업>으로 흥행 감독 반열에 오른 이병헌 감독. 그의 무기는 신선함이었다. 한국 코미디 영화의 공식을 파괴하는 도전 정신 덕분에 그의 이야기는 설령 뻔해도 새로웠다. 쉴 새 없이 쏘아붙이는 웃음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2010년 홈리스 월드컵을 모티브로 삼은 <드림>에서도 그의 장기는 유효하다. 빠른 템포로 주고받는 홍대와 소민의 티키타카는 살아 있다. 조연 한 명 한 명으로부터 코미디를 뽑아내는 실력도 여전하다. 홍대와 '범수'(정승길), 범수의 애인 사이에서 발생한 삼각관계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전반부는 부자연스럽다. 쏟아지는 대사는 재치가 있지만 재미가 없다. 마치 자기 스타일을 과시하려는 집착 또는 강박 같다. 후반부는 정반대다. 웃음 대신 신파가 중심이다. 전반전은 웃음, 후반전은 감동이라는 한국 영화 공식을 차용했다.
사실 신파는 문제가 아니다. 스포츠와 성장이라는 익숙한 소재를 잘 살려낼 수만 있다면 적절한 선택이다. 하지만 정작 감동과 눈물은 공허하다. 그러다 보니 앞선 코미디와 잘 조화되지 않는다. 의아한 대목이다. 이병헌 감독은 단순히 잘 웃기기만 하는 감독이나 작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연민과 공감에 바탕을 둔 웃음
그의 필모그래피를 추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주인공을 향한 연민이다. 주인공을 연민하는 관객은 자기 현실을 그에게 은연중 투영한다. 그러다 보면 코미디는 일회성 웃음이 아니다. 현실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웃으면서 털어버리자고 격려하는 치유의 장이다. 영화관 밖 현실은 힘들어도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아픔도 별일 아니라며 웃을 수 있다는 것. 이병헌 표 코미디의 진가다.
<스물>은 이십 대 남성의 고민을 자연스럽게 풀어냈다. 기껏 간 학교에서 뭘 할지 모르는 대학생,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재수생, 대학 진학도 포기한 채 꿈을 찾아 방황하는 백수까지. '헬조선'이라는 말이 한창 유행하던 당시 사회적으로 정해진 트랙대로 사는 데 지친 청년들의 솔직한 심정을 담았다. 주인공들의 바보 같은 연애사와 한심한 행동에 관객들이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다. 병맛 넘치는 섹드립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성과다.
<극한직업>도 마찬가지다. 작중 가장 웃긴 대목을 하나만 꼽으라면 치킨집 장면을 고를 수 있다. 위장만 하려던 형사들이 정신 차려보니 실제로 치킨집을 운영하며 좌충우돌하는 모습. 이 또한 남 일이 아니기 때문에 웃겼다. 문과를 나오든 이과를 나오든 종착역은 치킨집이라는 자조적인 유머가 퍼져 있는 사회였기에 가능한 웃음이었다. 즉, <극한직업>은 그저 형사물에 코미디만 버무린 게 아니었다. 승진은 막히고 생활고를 겪는 직장인의 비애를 치킨집을 배경으로 한 코미디였다. 그래서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인기를 끌 수 있었다.
연민과 현실이 사라진 <드림>
그런데 <드림>에서는 연민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전작과 달리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인데, 정작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않다. 홈리스 월드컵에 나간 선수들을 보자. 그들은 투혼을 보여줬고, 인기 팀에 뽑히면서 좋은 성과를 냈다. 흘린 땀과 피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문제는 그 후다. 그들의 변화를 보여줄 때 영화는 편의적이다. 모든 문제가 손쉽게 해결된다. 집이 없어 딸과 함께 밥도 못 먹던 아버지는 호주 유학을 떠나는 딸과 행복한 미래를 기약하며 이별한다. 계란빵 하나도 사치인 남자친구는 애인과 계란빵을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게이라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 아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알 수 없다.
러닝타임이 지날수록 소민이라는 캐릭터가 붕 뜨는 이유도 같다. 첫 등장은 좋다. 그녀는 예상을 빗겨 나가는 염세적인 대사와 행동으로 무장해 이병헌 표 티키타카의 재미를 잘 살려낸다. 하지만 카메라는 정작 그녀의 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계약직 PD의 일상은 대사로만 나온다. 이번 다큐멘터리가 마지막 기회인 이유도 잘 보이지 않는다. 가족사나 선수로서의 굴곡이 모두 묘사된 홍대와는 다르다. 스포츠 영화로 장르가 바뀐 후반부에서 소민은 카메라를 든 관찰자일 뿐이다.
그러니 화려한 조명과 현란한 카메라 워크로 무장한 결말은 어색하다. 홍대는 관중이 가득한 그라운드에 축구 선수로 복귀한다. 멋진 플레이를 연달아 보여주는 홍대는 이날 경기에서 의심할 여지 없는 주인공이다. 관중석에는 홈리스 선수들과 가족이 열렬한 응원을 보낸다. 그 옆에는 소민이 연예인처럼 세팅한 채 앉아 있다.
인위적이다. 현실적인 맥락이 보이지 않는다. 고민 하나를 해결하자마자 곧장 주인공에게 입대라는 고비를 던져주던 전작과는 다르다. 마치 꿈같은 성공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신파를 사용해도 감동은 크지 않다. 연민이 없는 웃음도 입가를 순식간에 떠난다.
재치는 있지만 재미는 없는 이유
영화도 어색함을 아는 눈치다. 감추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우선 리듬이 부자연스럽다. 아무리 찰진 티키타카가 장점이라지만 너무 빠르다. 물론 빠른 템포가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넣기는 한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다. 모든 캐릭터를 다 챙길 수는 없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일례로 홍대는 사고를 치고, 다큐멘터리 출연을 결정하고, 소민을 만나고, 팀원들을 설득한다. 이 장면들은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인물의 감정선은 생략되거나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홍대, 범수, '인선'(이현우) 정도만 예외다.
스포츠 영화로 바뀐 후반부에서도 무리수를 둔다. 홈리스 월드컵 경기를 묘사할 때 영화는 경기 자체의 연출보다는 해설자의 멘트에 더 집중한다. 실제로 경기 내용은 코미디에 가깝게 묘사된다. 반면에 해설자는 이 경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감동적인지를 하나하나 직접 알려준다. 스포츠 영화라면 경기 자체가 감정을 끌어올리고 해설은 그 순간을 짚어주는 조력자여야 하지만, 역할이 바뀌어 있다. 장항준 감독의 <리바운드>가 경기 내용을 충실히 묘사해 선수들의 감정 변화를 보여준 것과는 상반된다.
이는 현실적인 맥락과 공감할 여지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을 타개하려는 고육지책이나 다름없다. 전반부에서는 현란한 말솜씨로, 후반부에서는 눈물로 문제를 가리는 셈이다. 작중 웃음과 울음 모두 다소 가볍고 공허한 이유다. 그러다 보니 <드림>은 아쉬움이 크다. 이병헌 감독의 재치는 여전하나, 전작과 같은 재미는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Poor 형편없음
연민이 사라지고 현실을 놓치자 재미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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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상한 퀴어 로맨스'로 사랑의 조건을 질문하다
7★/10★
1972년 독일 쾰른. 칸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영화감독 피터가 귀찮은 듯 침대에서 일어난다.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이다. 새로운 영화의 제작이 결정되었는데도 그렇다. 곧 그 이유가 밝혀진다. 피터의 영화로 데뷔한 후 지금은 할리우드 스타가 된 친구 시도니와 대화하며, 피터는 얼마 전 동성 애인과 헤어진 후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백한다. 영화의 예술성에 심취하여 세상의 모든 속물을 비웃는 피터는 자신의 사랑 역시 영화와 같아야 한다고 믿는다. 즉, 피터는 지금 ‘비련의 여주인공’ 상태다.
시도니는 그런 피터에게 호주에서 온 배우 아미르를 소개한다. 노동계급 출신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잘 풀리지 않는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 유럽으로 건너온 아미르는 단숨에 피터를 사로잡는다. 복잡한 사연과 그로 인한 깊은 슬픔. 무엇보다 아름다운 육체와 매혹적인 얼굴. 아미르는 피터의 외로움을 달래줄 최적의 인물로 보인다.
피터는 곧바로 작업을 건다. 물론, ‘작업’은 제삼자의 용어다. 피터는 언제나 사랑에 진심이기에 그가 자기감정을 ‘작업’과 같은 경박한 언어로 부를 일은 없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영향력 있는 영화감독이 배우 지망생에게 끈적한 눈빛을 보내며 ‘너는 재능이 있어. 내가 꽃피워줄게’라고 말한다면, 이건 사랑이 아닌 거래 제안에 가깝다. 나의 영향력과 너의 매력을 교환하자는 거래 말이다. 하지만 ‘사랑에 진심’인 피터는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과 아미르가 그 모든 걸 초월해 진정한 사랑에 다다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둘은 곧 연인이 된다. 하지만 피터 마음대로 되는 건 여기까지다. 아미르는 영리하고 영악하다. 자신과 피터의 관계가 사랑의 외피를 두른 거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항상 자기 곁에 있어 달라는 피터의 구걸에 가까운 친밀성 요구에 적당히 거리를 두며 늘 피터를 불안하게 한다. 피터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미르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그러나 매번 불평하면서도 아미르를 떠날 수는 없다. 10대 청년마냥 사랑의 열병에 몸과 마음이 잔뜩 달은 피터가 아미르에게 완벽히 종속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피터 본 칸트〉는 사랑에 관한 성찰과 질문을 던진다. 먼저 두 사람이 마주한 조건을 보자.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나이 든 남자와 매력 자본을 지닌 젊은 여자의 이성애 관계는 젠더에 따라 권력이 불균등하게 배분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의 형태다. 이러한 교환 관계는 공정하지 않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돈과 명예를 얻기가 쉽지만, 여성이 가진 자원(매력 자본)은 그 반대여서다. 교환하는 자원의 불균등한 가치와 지속성으로 인해, 남자는 여자의 매력 자본을 양껏 소진시킨 후 새로운 대상을 물색하러 떠난다. 때문에 사랑의 불안증에 시달리는 건 대개 여성이다.* 더 젊고 예쁜 여성이 나타나 자기 자리를 뺏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터 본 칸트〉에서는 반대다. 돈 많고 영향력 있는 피터가 대개 이성애 관계에서 여성의 몫이었던 비련을 떠맡는다. 퀴어적 비틀기로 인해 가능한 일이다. 중년의 배 나온 백인이자 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남자가 상실의 우울감에 젖어 손에 술잔을 들고 슬픈 음악에 맞춰 홀로 느릿느릿 춤을 추는 장면은 압권이다. 피터는 아미르와 자기 사이에 놓인 관계의 조건을 성찰하지 못하고 자기감정을 사랑이라 부른다. 영화는 시종일관 이런 피터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피터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를 종종 일깨워줌으로써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풍자의 재미가 생겨난다. 상대를 권력관계에 따른 조건의 교환물로만 ‘소유’하고자 하면서도 이를 진정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무능한 존재/관념에 대한 풍자 말이다. 영원히 사랑과 비련의 주인공으로 남고자 하는 피터는 끝내 자신의 사랑 관념을 성찰하는 데 실패한다. 그리하여 권력관계에 기인한 친밀성 교환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어리석고 딱한 사람의 표상으로 박제된다. 폭주 후 엄마 품에 안겨 자장가를 들으며 잠자는 피터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이는 유아기적 퇴행이다. 우리 중 몇이나 여기서 자유로울까?
친밀성을 물질과 별개인 ‘순수한 것’으로 보는 통념은 경계해야 한다. 현실에서 친밀성이 작동하는 방식은 그보다 훨씬 정교하고 복잡하다. 하지만 불평등한 자원의 교환을 ‘사랑’이라 부르는 형태 또한 경계해야 마땅하다. 〈피터 본 칸트〉는 평등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위해 젠더/섹슈얼리티를 비튼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여성의 매력이 압도적으로 강렬한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남성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사회구조적으로 사랑에서 유리한 위치에 자리하는 것과 달리, 여성은 개인의 매력으로만 이 구도를 반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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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칸토>, 대들 수 있는 자녀가 온 집안을 구한다!
# 뭘 해도 부족하기만 한, 전혀 특별하지 않은 자녀
<엔칸토 : 마법의 세계>가 제기하는 문제제기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어떤 자녀가 진짜 영웅이 될 수 있는가
자녀는 언제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주인공,
뭘 해도 늘 가족들 기준에 못 미치는, 가문의 '아픈 손가락', '미라벨'!마법의 힘이 유전되는 '마드리갈' 패밀리 중에서 유일하게 마법 능력을 받지 못한 '미라벨'
마법의 힘으로 만들어진 마을 '엔칸토'와 그 엔칸토를 이끌고 가는 '마드리갈 가문'.
마드리갈 가문에 태어난 아이들은 어느 시점이 되면 모두 자기만의 '마법의 힘'을 갖게 된다.
이런 대단한 가문에서 유일하게 '마법의 힘'을 전해 받지 못한 '미라벨'.
미라벨의 두 언니, 엄청난 힘을 가진 '루이사'와 손으로 온갖 아름다운 꽃과 식물을 만들어내는 '이사벨라'
특히 미라벨의 친언니 '루이사'와 '이사벨라'는 특출 난 마법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미라벨의 비교 대상이 된다. 친언니들뿐 아니라 미라벨은 대단한 마법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엄마, 친척들과 끊임없이 비교를 당하며 집안의 아픈 손가락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의 멋진 미라벨! 언제나 기죽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씩씩하게 살아간다!
이렇게 씩씩하고 당찬 미라벨이 유일하게 눈치를 보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마드리갈 집안의 가장, '아부엘라', 할머니다!
마드리갈 가문의 가장, 할머니 '아부엘라'
오래전 갓난아이 셋을 안고 남편과 함께 강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던 '아부엘라'(할머니).
도망가는 피난민들을 위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아부엘라의 남편이 군인들을 막아섰고,
군인들은 아부엘라의 눈앞에서 남편을 죽인다.
절망에 빠진 순간, 아부엘라는 강에서 '마법'을 선물 받는다.
그 마법으로 '엔칸토'라는 마을이 세워지고, 그때부터 아부엘라는 마법의 힘으로 마드리갈 가문과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며 살아간다.
마드리갈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일정 나이가 되면 모두 특별한 '마법의 능력'을 받게 되었고,
마법의 능력을 받는 의식은 할머니 아부엘라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그 의식에서 마법을 받는 것에 실패한 자녀가 바로 '미라벨'.
할머니 눈에 미라벨은 '가장 약하고, 부족하며, 전혀 특별하지 않은 자녀'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할머니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하는 미라벨은, 할머니 앞에만 서면 작아지곤 하였다.
# 강력한 권위에 유일하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자녀!
그러던 어느 날, 마법으로 지어진 마드리갈 가문의 집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집에 금이 가면서, 가족들의 능력도 약해진다.
마법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집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것, 마법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을 눈치챈 유일한 사람이 바로 미라벨!
미라벨은 할머니와 가족들에게 경고하지만, 아무도 미라벨의 말을 믿지 않는다.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할머니는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주는 미라벨을 비난한다.
하지만 마법은 정말로 사라지고 있었고, 미라벨만이 그 사실을 직시하고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미라벨이 가족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일은 꼬이고, 집은 점점 망가져 갔다.
마법이 사라지면서 점점 무너지는 마드리갈 '집'과 '엔칸토'
할머니는, 마법이 사라지는 이유가 바로 '미라벨'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미라벨의 삼촌 '브루노'는 앞으로 일어날 안 좋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예지력이 있었다.
오래전 '브루노' 삼촌은 마법의 능력을 통해 언젠가 마드리갈 집이 무너지고,
그 무너지는 집 가운데 '미라벨'이 서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가족들에게 늘 안 좋은 소식을 전하며 미움을 사던 브루노도 그 예지를 본 이후 집안에서 사라진다.)
그러한 <브루노 삼촌의 예지 + 미라벨의 설치고 다니는 모습>이 결합하여,
미라벨은 마법을 파괴하는 주범으로 여겨지며, 할머니의 비난을 받게 된다.
미라벨 때문에 집이 무너지고 마법이 사라진다고 믿는 할머니
할머니는 모든 것을 미라벨 탓으로 돌린다.
벽의 금들은 너와 함께 시작됐어.
브루노도 너 때문에 떠났어.
루이사는 힘을 잃었고, 이사벨라는 통제불능이야. 너 때문에.
네가 능력을 못 받은 이유는 모르겠다만,
그게 가족을 괴롭힐 핑계는 안 되는 거야!할머니는, 미라벨이 자격지심으로 가족들을 괴롭힌다고 몰아세운다.
집이 무너지는 것도, 마법이 사라지는 것도, 다 미라벨 때문이라고!
미라벨은 그때 깨닫는다!
끝까지 제가 못마땅하신 거죠?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머니 눈에 루이사는 힘이 모자라고,
이사벨라는 늘 완벽하지 않겠죠.
브루노 삼촌도 할머니가 나쁜 면만 봐서 떠났어요.
삼촌도 저도 우린 이 가족을 사랑해요.
가족을 생각하지 않는 건 할머니라고요.할머니는 늘 자녀의 '부족한 모습, 모자란 모습'에 더 집중했다는 것!
힘이 센 루이사도, 완벽한 이사벨라도, 나쁜 미래를 보던 브루노 삼촌도..
가족을 위한다며 가족에게 행한 할머니의 행동은, 사실 진짜 가족을 위한 사랑이 아니었다고!
그래서 미라벨은 외친다!
할머니가 집을 부수고 있어요. 기적은 할머니 때문에 죽어가는 거라고요!!
그 누구도 할머니에게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말,
어느 누구도 감히 할머니에게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말,
미라벨은 유일하게 할머니에게 대들었다!
# 부모의 잘못에 맞서고 다시 부모를 감싸안는 자리, 마법의 탄생!
집은 무너진다.
철저하게.
집도 사라지고, 마법도 사라진 후, 할머니는 깨닫는다.
그리고 미라벨에게 고백한다.
난 기적을 받았다. 두 번째 기회라는 기적을.
그걸 잃을까 봐 너무 두려워서 누굴 위한 기적이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지.가족을 지키기 위해 얻었던 마법의 힘,
그 마법의 힘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정작 그 마법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잊어버렸다는 고백.
할머니는 깨닫는다.
기적은 자녀들이 받은 마법이 아니라 바로 자녀들 그 자체라는 것.
미라벨은, 할머니의 고백을 조용히 듣고 깨닫는다.
이제야 알겠어요. 할머니는 집을 잃고 모든 걸 잃으셨죠.
모든 괴로움을 혼자 견뎌오신 거예요.
우린 할머니 덕분에 구원받았고,
할머니 덕분에 기적을 받았고,
할머니 덕분에 가족이 됐어요.
그 어떤 게 무너져도 함께라면 고칠 수 있어요.어느 순간 집안의 '빌런'이 되어버린 할머니,
그러나 그러한 할머니는 혼자 모든 괴로움과 책임감을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왔으며,
가족의 탄생과 유지, 평화를 지켜왔다.
미라벨은 할머니의 상처를 알아보고, 할머니의 마음을 위로한다.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 할머니를 감싸 안는다.
마법을 잃은 마드리갈 가문은, 엔칸토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시 집을 세운다.
그리고 다시 세워진 집에 미라벨이 문고리를 거는 순간, '마법'은 되살아난다!
이것이 미라벨이 가진 진짜 마법의 힘이었다!
모두가 기존의 권위에 억눌려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유일하게 나서 그 강력한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부모의 잘못을 모른척하지 않고,
그 잘못한 것을 넘어서 감춰져 있던 부모의 진심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을 감싸안는 용기.
이것이 가장 어렵고 힘든 마법.
세상의 법칙이 가진 부정적 모습에 의문을 제기하고 탓할 수 있는 용기,
거기에 더해 그 너머의 긍정적 가치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미라벨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 마법은 무너진 한 집안을,
마을을,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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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같은 일은 사실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는 편
쫑알쫑알
쫑알쫑알. 주인공 잭의 집에는 소음이 잦아들지 않는다. 말 겁나 많다. 수다 떠는 아이들. 잭에겐 아이들이 세 명 있다. 부인까지 다섯 명인 가족. 남편의 직업은 대학교수다. 히틀러를 연구하고 있는 아버지 잭. 학교에 출근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내는 전업주부로 별다른 직업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인문학자인 아버지를 둔 때문인가. 잭의 가족은 사이가 다들 좋지만 대화할 때마다 ‘왜?’에 집착하며 말꼬리를 잡고 있다. 이 ‘왜?’라는 질문은 거의 불안감으로 이어진다. 아마 답을 정해놓고 서로 질문을 하고 때문은 아닐까. 인생은 예상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그런데 항상 부정적인 일은 내가 생각한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에 잭의 가족은 항상 ‘왜?’를 물으며 산다.
그날은 다른 날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아버지 잭은 동료 교수의 부탁을 받았다.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말에 열변을 토하고 집에 온 날이었다. 가족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만약에? 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며 살고 있었다. 갑자기 사고가 일어난다. 독극성 물질이 탄 차량에 추돌사고가 일어나 미국이 위험에 빠졌다. 당황하는 사람들. 공기에 길게 노출되면 생명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도망쳐야 할 것 같다. 끔찍한 재난. 건강상의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에 잭 가족이 위축되는 것이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만약에?'의 가능성이 현실이 된 지금 잭 가족은 처해있는 문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잭은 과연 그와 그의 가족을 둘러싼 불안함에 맞대응할 수 있을까?
제목 값 톡톡히
영화에서 귀가 트였던 건 소음 연출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소음을 묘사한다. 영화에서 중요한 단어는 '만약에' 그러니까 불안이다. 또 군중이라는 키워드다. 둘의 종속관계를 이야기해보면 '불안하기 때문에 군중이 된다'라는 의미와 상통한다. 일단 주인공 잭에게 의미가 있는 세팅은 두 인물이다. 히틀러를 연구하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팬이라는 설정이다. 전자는 나치라는 군중을 이끌어 전 세계를 비극에 몰아넣었던 인물이다. 후자는 자기를 지지하는 군중으로 만든 인물이다. 이 둘 아니어도 군중을 만들 수 있는 집단은 계속해서 묘사된다. 일단 영화에서 언론이 굉장히 중요하게 묘사된다. 자동차로 가득 찬 도로를 봐도 군중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학생들도 군중이다. 이 인물들은 불안하지 않기 위해서 함께 모인 것으로 보인다.
또 불안이라는 소재는 극에서 노아 바움백의 창의성이 부여된 지점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부부터 끝까지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초반부 그레타 거윅이 맡은 '바바'는 불안한 일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냥 아무 일도 없이, 권태로 지속되는 삶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바. 바바는 이 주인공 가족 중에서 가장 불안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겉으로 드러내는 빈도수는 적지만 이를 연출이나 연기에서 힘을 주는 지점이 있다. 바바가 불안함에 떠는 방식은 능동적인 불안이라고 칭할 수 있다. 불안하기 때문에 직접 행동으로 옮겨서 해소하려고 하는 문제 해결 방식이 극에서 반복된다. 이는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핵심 소재와 가장 큰 관련이 있다. 또 빈도수가 가장 많은 불안에 떠는 인물은 잭과 바바의 아이들이다. 정말 하루도 쉴 틈 없이 계속 같은 패턴의 이야기만 반복한다. 이는 영화에서 두 부부와 관련된 기저에 깔린 불안을 묘사하는데 효과적이다. 아이들 캐릭터가 하는 말을 들으면 되게 말장난 같아도 어느 정도는 기괴한 이미지를 풍기던 것이 이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두 인물과는 다르게 잭이 겪는 불안은 지식인형 불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 편으로는 이성에 근거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불안함의 실체가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이에 대한 인물의 이중적인 태도를 묘사하려고 한 시도가 보인다. 환영 연출이 그에 대한 근거라고 생각한다.
소재가 갖는 힘
영화에서 긍정적으로 말하고 싶은 부분은 소재가 갖는 힘이다. 영화에서 주제를 나타내는 키워드로 불안과 군중이 뽑혔다면 이야기 전개를 위한 소도구로는 역시 '알약'과 '죽음'을 꼽고 싶다. 전자 알약은 영화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주원인이 된다. 알약을 먹는 모습을 보고 엄마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의심하는 아이들. 아닌 척 하지만 이런 아이들을 지켜보며 아내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의심하는 남편. 그리고 왜 아내가 알약을 먹을 수 없었는가? 에 대한 이야기까지. 후반부에는 남편이 이 알약을 왜 얻고 싶어 했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한다. 이는 알약이라는 소재에 대한 이해도와 상상력을 적절하게 잘 구현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영화의 강점이라 생각이 든다.
또 죽음이라는 키워드는 이중적인 느낌이 있다. 죽음이 뭘까? 여러분도 알고 글쓴이도 알다시피 사람의 삶을 마감하는 일이다. 이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좋을 리가 없다. 아직 우리 삶엔 남은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인물의 속성은 극에서 서스펜스가 되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제시한다. 또 반대로 코미디로 작동하는 부분도 있다. 극에서 인물들은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왜? 이는 독성 물질이 공기 중에서 떠다니는 것과 관련이 있다. '혹시나'가 실제가 되어버린 상황. 이 덕에 부정적인 생각이 그대로 이뤄질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인물들이 과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글쓴이 입장에선 재밌었다. '너도 저 입장에 처하면 저렇지 않을까요?' 아니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인물들이 겪고 있는 불안이 과연 이 상황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하는 의문점이 든다. 환경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이 인물들은 그냥 원래부터 그런 변화에 예민한 사람인 것이다.
섬세한 손길
극에서 좋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영화의 섬세한 연출 덕이었다. 영화 초반부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잭이 동료 교수의 초대를 받고 강의에서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촬영이나 대사를 주고받는 방식이나 엘비스 프레슬리와 히틀러의 공통점을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연출이 돋보였다. 두 인물이 각기 다른 갈래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이 둘의 차이점이 군중들의 차이점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장점을 가진다. 또 영화 전반적으로 인물의 의사소통 방식이 '만약에'를 전제로 깔고 있다는 것은 각본가의 집중력이 나타나는 부분이었다. 시각적인 묘사가 아니더라도 인물들의 대사로 극의 긴장감을 이끄는 뚝심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섬세한 연출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바바 캐릭터의 묘사 방식이다. 바바라는 캐릭터는 마음씨가 약한 캐릭터다. 사실 마음 약한 캐릭터는 길거리에 나가도 흔히 찾을 수 있는 인물의 특성이다. 그러나 왜 이 인물이 마음씨가 약하나? 와 영화의 핵심 소재를 흡착한 방식은 확실히 색다르다. 정말 엉뚱하지만 철저하게 인물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그레타 거윅의 역량이 돋보인다. 감독 출신이라 그런가? 그러나 섬세한 터치가 아쉽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잭 캐릭터다. 잭의 감정선이 극후반부에 갑작스럽게 마무리된다고 생각들 기도 했다. 아주 조금의 설명이라도 더 붙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또 극에서 아이러니를 다루는 방식도 좋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아이러니는 여러 종류가 있다.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 대한 아이러니, 가족관계에 대한 아이러니, 재난을 대응하는 방식에 대한 아이러니, 군중의 속성에 대한 아이러니까지. 영화에서 끝없이 제시되는 아이러니는 이야기에서 계속해서 반복된다. 이 영화의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 아마 여기일 것으로 보인다. 이 역설을 '작위적이다' 혹은 '자연스럽다'라고 느낄지가 극 관람에 주요 포인트가 생각해본다. 작위적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영화의 감상 난이도가 올라갈 것이다. 또한 후반부에 좀 극단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서히 쌓아 올린 아이러니는 극후 반부의 특정 장면을 통해 해소된다. 아이러니가 겹겹이 쌓여있는 것을 영화에서 반복되는 한 소재로 주파한 것이다. 이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다섯 명의 얼굴이 기억나는 이유기도 하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
태어난 이상 사람들은 다 죽게 되어있다. 예외는 없다. 영원한 건 없으니까. 걱정이 많은 우리. 어떤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삶이 허무해진다. 어차피 다 죽을텐데. 그런데 영화는 이 허무한 명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한다. 그 반대로 이 두려움과 허무함에 대응하는, 우리 일상의 한 구석을 확대해서 묘사한다. 일상은 프라이드 치킨같은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먹는 것 자체로도 행복할 수 있는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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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의 탈을 쓰고 윤리적 딜레마를 다루는 블랙 코미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섬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최첨단 교도소에서 자타가 공인한 천재 과학자 '스티브(크리스 헴스워스)'는 실험에 자원한 재소자들에게 행복, 번뇌, 성욕, 복종 등의 여러 감정을 조절하는 여러 신약을 테스트한다. 자칫 비인간적일 수도 있는 이 실험은 죄수들이 주립 교도소에 갇히는 대신 자원해서 참여했다는 점, 그리고 상대적으로 많은 자유가 그들에게 주어진 다는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음주 운전으로 아내와 친구를 사망에 이르게 한 죗값을 갚기 위해 실험에 자원한 '제프(마일즈 텔러)'는 프로젝트의 목적과 주체에 의문을 품는다.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약물을 주입하도록 시키는 스티브를 보면서 의구심이 피어난 것이다. 해당 실험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자 제프의 의심은 더욱 커지고, 사랑을 싹 틔워가던 '리지(저니 스몰렛)'에게 약물을 주입하라는 스티브의 명령에 그는 마침내 반발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스파이더헤드>는 조지 선더스의 단편 소설 <Escape from Spdierhead>를 영상화한 작품으로, <트로: 새로운 시작>, <오블리비언>, <온리 더 브레이브>에 이어 올해 <탑건: 매버릭>까지 연출한 조셉 코신스키 감독의 작품이다. 줄거리나 예고편만 봐도 느껴지듯이 <스파이더헤드>는 과학 기술 발전의 명암 중 암을 집중적으로 묘사하는 영화다. 비인간적 실험을 진행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해당 실험이 인류의 발전을 위한 필요악이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자유 의지 박탈당한 이들이 저항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나 이 영화를 SF 작품으로 규정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블랙 미러>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SF 스릴러의 분위기를 풍기던 초반부가 지나가면 <스파이더헤드>는 과학 연구 윤리를 매개로 '무엇이 옳은 행위인가'에 대해 보다 일반적인 윤리적 논쟁이 벌어지는 블랙 코미디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각기 다른 삶의 가치를 지닌 두 인물이 있다. 우선 제약사 주인이자 실험의 기획자인 스티브는 철저한 공리주의자다. 공리주의자는 효용의 극대화를 옳은 행위라고 본다. 개개인의 행위에 깃든 본래 가치와 무관하게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 행위는 많이 이루어질수록 좋다는 것이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한 개인의 행동이 직접 초래한 결과와 그의 간접적인 개입이 유발한 사건의 결과가 구분되지 않는다.
실제로 공리주의자는 모든 사람에게 결과의 책임을 부여한다. 본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물론, 다른 개인이 초래한 부정적 결과를 막지 못한 책임까지도 요구한다. 이는 개인에게 지나치게 과한 도덕적 부담을 주고, 개인을 의도와 계획을 지닌 주체로 고려하지 않으며, 그들의 정체성을 추상화하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그 결과 공리주의자 개개인은 자신의 신념이나 판단력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대신, 효용의 극대화라는 기준을 충실히 따르며 자기 자신을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시킨다. 그래서 공리주의를 따르는 개인은 효용 극대화의 통로이자 수단에 불과해진다.
실제로 스티브는 실험에 자원한 모든 죄수들을 동등하게 대한다. 그들의 죄가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졌든 간에 그들은 사회적 이익을 감소시키는 범죄를 저질렀고, 따라서 의도적인 범죄와 실수의 차이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자신들의 죗값을 씻겠다는 도덕적인 이유로 실험에 자원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이러한 그의 관점에서 보면 범죄자의 인권은 말살해도 마땅하며, 처벌 대신 승인한 인권침해 실험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이 통제를 따를 수 있게 되면 더 큰 선의와 대의를 추구할 수 있게 될 것이며, 평화와 화합이라는 가치를 전파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가 모든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심지어 사랑하는 이를 해치는 일까지 하게 만드는 약물인 B-6을 개발하는 데 총력을 다하는 이유다. 그 과정에서 제프의 죄책감을 자극해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으며, 자기 자신에게도 약물을 주입한다. 그렇게 죄수들과 제프, 그리고 본인까지도 수단으로 이용한다.
반면에 제프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지극히 칸트적인 이유로 스티브의 실험에 반대한다.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이며, 타인들이 수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윤리 법칙을 만들고 이를 지킬 자유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존엄한 존재이고, 따라서 인간은 수단으로 사용되면 안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프에게 약물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다. 사회적 맥락에서 다수의 효용을 극대화할 목적을 위해 인간을 도구로 활용하는 기제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자유의지를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스티브의 신념에 비해 더 직관적으로 동의하기 쉬운 제프의 서사에 영화가 의도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야기를 덧붙인다는 점이다. 영화는 제프와 리지가 범죄자들이지만 결코 나쁜 인물은 아니라고 묘사한다. 제프의 교통사고는 한순간의 치기 혹은 실수였을 뿐이고, 리지가 딸을 살해한 것 역시 의도적인 살인이 아니라 과실치사였다면서 그들의 선함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 경우 본래 선한 인물인 이들의 자유의지를 핍박하는 스티브와 그의 신념을 악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제프와 리지의 과거사는 그 자체로 그들의 항변과 비판의 반례가 된다. 어찌 되었건 술에 취한 채 운전을 하기로 결정한 제프의 자유의지, 한여름에 아이를 차에 태운 채 출근하기로 한 리지의 자유의지가 그들의 비극과 범죄를 유발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프의 서사에 윤리적 정당성이 깃들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존재하며, 이는 작중 선인과 악인을 명확히 구분하고 옹호하거나 비난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블랙 코미디로서 <스파이더헤드> 특유의 기괴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곧 제프의 입장은 직관적으로 옳다고 느껴진다. 사람을 도구로 쓰지 말라는 주장에 반대하기란 쉽지 않다. 과학 기술의 급격한 발달에 대한 경계심이 나날이 높아지는 형국에서는 시의적절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메신저 때문에 메시지에 잡음이 생기다 보니, 역으로 극단적인 공리주의자인 크리스의 괴변은 더 인상적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에 의해 보육원에 버려졌고 이후 단 한 번도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는 스티브의 개인사가 간결하게 제시되면서 오히려 그의 광기에 설득력이 더해준다. 피실험자들 중 사망자가 나와도 그저 웃으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크리스 햄스워스의 소름 끼칠 정도 생생한 연기도 큰 몫을 해낸다. 이러한 제프와 스티브 사이의 불균형은 영화의 분위기를 살려내기 위해 의도된 측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작자인 조지 선더스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기존의 도덕적 가치관을 포함한 여러 기준점이 뒤틀려버린 미래의 기묘함을 글로 표현하는 데 탁월했기 때문이다. 약물에 취한 스티브가 마주하는 최후도 이러한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이는 스티브의 조수인 마크의 역할이 중요성에 비해 제한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작중 스티브의 악행, 도를 넘은 광기, 극단성은 그의 논리에 내포된 자유의지의 침해라는 취약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때 스티브의 악행을 외부에 고발한 마크는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미 논변의 정당성을 잃은 제프보다도 스티브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울 수 있는 캐릭터다. 스티브의 연구에 자발적으로 합류했기 때문에 자신의 신념에 따라 연구를 포기하고 스스로 연구 윤리를 어긴 책임을 다하는 그는 스티브의 진정한 안티테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마크의 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직관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쉽사리 반박하기 어려운 스티브의 신념에서 비롯된 딜레마와 그로 인한 불쾌함이 덜 부각되고, 이는 블랙코미디로서의 매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 그래서 <스파이더헤드>는 적은 인물에게만 초점을 맞춘 채 그들의 심리적인 갈등을 부각하는 데 집중한다.
문제는 조셉 코신스키 감독이 전작에서 보여줬던 단점들을 반복한 나머지 영화가 전반적으로 지루하다는 점이다. 특히 <오블리비언>과 유사한 문제점을 답습한 것이 눈에 띈다. <오블리비언>에서 코신스키 감독은 여러 가지 복선을 던지면서 초반부를 다소 길게 끌다가, 특정 사건을 분기점으로 후반부에 급전개를 선보인 바 있다. <스파이더헤드>도 마찬가지다. 실험 과정과 제프의 생활상을 오가면서 서서히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제프와 스티브의 갈등이 외면적으로 분출되는 순간 절정에 도달한다.
그런데 <스파이더헤드>의 원작이 애초에 단편이었던 관계로, 긴장감을 끌어올려야 할 초반부의 에피소드들은 필요 이상으로 늘어지면서 공허하다. 한정된 공간에서 몇 안 되는 등장인물만으로 전개되고, 화면 전환의 속도도 빠르지 않아서 매 장면마다 분량에 비해 정보량이 적은 느낌이 들다 보니 더욱 그렇다. 또한 후반부는 과하게 압축되어 주인공들의 심리적 흐름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 위 문제들이 한데 모인 결과 윤리적 딜레마를 지적하는 영화의 통찰은 결코 깊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블랙 코미디로서 목표 달성에 실패한 셈이다.
따라서 <스파이더헤드>는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제작진과 배우들의 조합에 비해 알맹이가 부족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참신한 소재로 눈을 사로잡지만, 그 시선을 2시간 동안 고정시키지 못하는 수많은 넷플릭스 영화들의 전철을 그대로 따른다. 결국 <스파이더헤드>는 팝콘 무비로서, 또 조셉 코신스키 감독과 마일즈 텔러의 <탑건: 매버릭>과 크리스 햄스워스의 <토르: 러브 앤 썬더> 사이를 잇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데 그치고 만다.
P(Poor, 형편없음)
소재만 그럴싸한 수많은 넷플릭스 영화의 전철을 착실히 따르는 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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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어웨이 후기 / 라트비아 감독의 1인제작 애니메이션 / 뛰어난 영상미 / 잔잔하고 평화로운 애니 / 소년의 성장영화
영화직관하는남자 영직남의 "어웨이"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네요~ 엔드크레딧도 1인 제작이라 그런지 엄청 짧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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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크루엘라>
디즈니 클래식 애니메이션 <101마리 달마시안>의 광기 어린 악녀이자 디즈니 역사상 가장 독보적인 빌런 ‘크루엘라’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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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씨 비스트> 공식 티저 예고편
아카데미 수상 감독 크리스 윌리엄스(《모아나》 《빅 히어로》 《볼트》)의 신작, 《씨 비스트》가 지도의 끝자락, 진짜 모험이 시작되는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칼 어번, 재리스 에인절 하터, 재러드 해리스, 마리안 장바티스트, 댄 스티븐스, 캐시 버크 출연. 무시무시한 괴물이 바다에 출몰하던 시대에는 바다 괴물 사냥꾼들이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그중에서도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위대한 사냥꾼 제이컵 홀랜드. 그런데 그의 전설적인 배 안으로 메이지 브럼블이라는 여자아이가 몰래 숨어들면서, 제이컵은 뜻밖의 동행을 떠안고 말았으니. 그렇게 한배에 탄 둘은 미지의 바다를 향해 대장정의 항해를 떠나는데. 이들은 어떤 역사를 쓰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