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1-07-15 08:32:32
소리를 따라 움직이는 갑을관계
<콰이어트 플레이스 2>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괴생명체의 공격으로 일상이 사라져 버린 세상에서 남편이자 아버지인 '리(조 크래신스키)'의 희생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은 '에블린(에밀리 블런트)', '마커스(노아 주프)', '리건(밀리센트 시몬스)'. 갓 태어난 막내까지 소리 낼 수 없는 사투를 이어가던 네 가족은 집을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고요함만이 무겁게 깔린 가운데 그들은 자신만의 은신처에 숨어 지내던 과거 이웃 '에밋(킬리언 머피)'을 만나지만, 깊은 상실감에 빠진 그는 도와달라는 이들의 요청을 거절한다. 이에 리건은 자신이 파악한 힌트를 조합해 안전한 장소를 찾기 위한 여정에 나서고, 더 큰 위험을 마주한다.
2018년에 개봉한 존 크래신스키 감독의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신선한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를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힘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규칙 덕분에 이전까지의 공포영화와는 차별화된 환경을 조성하는 게 가능했고, 그 안에서 가족애로 무장한 주인공들이 펼치는 명료한 생존기는 모두를 몰입시킬 수 있었다.
3년 만에 돌아온 속편 <콰이어트 플레이스 2>는 조금 다르다.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여전하다. 단, 그 규칙이 활용되는 방식이 달라졌다. 전편에서 주인공들을 옭아매고, 그들을 위기로 밀어 넣었던 그 규칙은 이제 기존의 질서가 무너진 보다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위계를 세우는 강력한 힘이자 도구로 작동한다. 구체적으로는 영화 안에서나 현실에서나 크게 다르지 않은 갑과 을의 관계를 전복시킨다.
우선 <콰이어트 플레이스 2>는 리건과 다른 이들, 리건과 사회와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괴생명체가 등장한 세상에서 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는 리건은 큰 핸디캡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본인이 소리를 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괴생명체의 습격으로부터 가장 취약하다. 당장 그녀의 시점인 장면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먹먹함은 그 어떤 때보다 강렬한 공포로 다가온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괴생명체가 등장하기 전부터 등장인물들 중 가장 약자라고 할 수 있다. 사회언어학자 데이비드 모랜드(David Morand)는 권력과 언어 예절에 관한 연구에서 언어적 행동에 따라 권력관계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대화에 참여할 때 평등하거나 불분명한 권력관계에 놓인 상황이라면 언어적으로 더 확실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수화를 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말을 걸고,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리건은 거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명백한 약자다. 야구 경기를 구경하는 오프닝 장면에서 리건과 에밋의 대화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또한 그녀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약자다.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정보를 수용하고, 가공하여 자신의 고유한 의견을 생성하는 프로세스가 타인에 비해 부족하다는 의미다. 이는 역사적으로 글자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약자였고, 인쇄술의 발달로 교육기회가 늘자 문맹이 줄면서 시민혁명이 촉발되었던 이유다. 최근에 백신 접종 예약 시 인터넷이나 모바일 환경에 익숙하지 못한 중년층이 고생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만 귀를 통해 듣는 것은 그 어떤 수단보다도 기본적이고 직관적인 정보 수용 방식이라는 점에서 특히나 큰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귀는 존재 자체로 소통 과정을 방해하는 잡읍(noise)인 것이다. 이는 괴생명체가 막 지구를 습격한 오프닝 장면에서 리건이 항상 아버지의 보호 아래에서 지시를 받아야만 움직이는 이유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2>는 바로 이러한 리건의 약점을 강점으로 전환시키며 그녀를 약자에서 강자로 바꾸고, 먹이사슬의 최상단에 올려놓는다. 우선 공간적 배경이 집과 그 근방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확장된 결과, 말을 해서도 소리를 내서도 안 되는 규칙의 중요성은 더 강조되고 그녀의 발언권은 오히려 강화된다. 리건의 입장에서는 불공평한 환경이 비로소 동등해진 것이기에, 그녀는 누구보다도 주도적으로 상황을 이끌어나간다. 그녀가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마커스가 듣던 라디오 음악이 피난처를 암시하는 힌트라는 사실을 추론해낸 뒤 동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은신처를 떠나 피난처를 찾으러 나서고, 다시 은신처로 데려가려는 에밋에게도 끝내 자신의 의견을 관철한다.
이 관계의 역전은 리건의 보청 장치 노이즈가 활용되는 방식에도 멋지게 반영되어 있다. 사실 전편에서도 보청 장치의 잡음은 괴생명체들에게 약점으로 작용했고, 리건의 가족은 이를 무기로 활용했다. 다만 이 시점까지 노이즈는 괴생명체로부터 벗어나고 시간을 벌기 위해 수동적으로 활용되는 도구였다. 그러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위에 선 리건은 이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녀는 라디오를 통해 그 잡음을 가능한 한 멀리 퍼뜨리면서 이를 괴생명체를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다르게 활용하고,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주도권을 잡는다. 듣지 못하고 말 못 하는 이가 세상에 처음으로 먼저 외치는 소리에 지구를 구할 가장 강력한 힘이 주어지는 것이다. 특히 보청 장치의 노이즈가 그녀를 세상과 단절시켰던 귀를 상징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이러한 전개는 인상적이다. 사회적 약자의 약점을 강점으로 치환하는 아이디어의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등장인물의 구성을 들여다봐도 <콰이어트 플레이스 2>는 흥미롭다. 전편과 달리 괴생명체를 주도적으로 물리치는 이들은 모두 청소년, 학생이고 그들에게 보호받는 이들이 성인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청소년이나 학생은 아직 경험과 경륜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만 여겨지는 경우가 흔하다. 꼭 십 대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리가 1편에서 아버지 리가 가족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이번 영화의 오프닝에서는 리건을 보호하기 위해서 열심히 뛰고 구른 이유이기도 하다. 에블린이 두 아들들이 안전한 지를 계속해서 확인하는 것, 유사 부녀관계를 이루는 에밋이 리건의 목숨을 수차례 구해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후반부에 이르러서 리건과 마커스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한다. 리건은 본인이 음악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라디오 음악이 피난처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점을 추론해낼 수 있었고, 그 추론을 뚝심 있게 실행으로 옮긴다. 이처럼 소통의 의지와 희망을 잃지 않는 그녀는 가족을 잃고 실의에 빠져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에밋이 세상을 향해 다시 문을 열도록 마음을 고쳐 먹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끝내 리건은 에밋을 괴생명체로부터 구해내고, 마커스도 남은 가족을 보호해낸다. 괴생명체로부터 지구를 되찾을 가능성과 그 세상을 채워나갈 미래도 지켜낸다. 그 결과 가족애와 기성세대의 희생을 통한 구원으로 끝맺은 전편과 달리 신세대의 성장과 발전을 통해 희망적인 미래를 암시하는 결말은 명백한 대조를 이루며 강렬히 뇌리에 남는다. 많은 속편들이 전편과의 차별점을 두려는 시도를 하곤 하는데, <콰이어트 플레이스 2>는 기능적으로나 메시지적으로나 그 과제를 훌륭히 수행해낸 셈이다.
이처럼 장애인과 청소년이라는 사회적 약자에게 놓인 두 개의 갑을관계를 뒤집는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콰이어트 플레이스 2>가 전편에 비해 전통적 호러 영화보다는 호러 영화의 요소가 삽입된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로 느껴지는 이유다. 단지 집과 그 주변만을 오가던 동선이 더 넓어지고 주인공 가족 외에 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서가 아니다. 기존의 질서와 체계가 사라진 공허한 세계(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질서와 체계로 채우는 과정을 짜임새 있게 제시한 덕분이다.
물론 아쉬운 점도 적지 않다. 우선 새로운 등장인물 중 에밋을 제외하면 생산적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없다. 부둣가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한 의문을 풀어내기도 전에 휘발적인 위기를 만든 후 바로 퇴장해버린다. 괴생명체가 없는 섬사람들의 행적도 세계관과 따로 노는 듯 보일 정도로 지나치게 안일해 보이는 측면이 있어서 몰입을 저해한다. 장르 영화의 관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여부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전편에서 괴생명체의 약점이 너무 명확하게 드러난 나머지 그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 어느 정도 예측이 된다는 점도 만족도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 이상 신선하지도 않을뿐더러, 호러 영화를 표방하는 작품치고 그렇게까지 강렬한 스릴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살펴본 메시지와 주제의식 외에도 눈여겨볼 가치가 있는 대목들이 즐비하기에 <콰이어트 플레이스 2>가 매우 잘 만들어진 후속 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괴물들의 괴력을 묘사하며 어떻게 전 지구가 그토록 빨리 초토화되었는지, 전편이 남긴 의문을 해소하는 오프닝 시퀀스의 흡입력은 대단하다. 그중 <칠드런 오브 맨>을 떠올리게 하는,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자동차 장면은 압권이다. 서로 다른 공간으로 주인공들이 흩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겪는 공통된 장면을 이리저리 이어 붙이면서 극의 간장감을 유지하는 편집도 눈을 사로잡는다. 결말의 쾌감을 극대화하는 데도 도움을 주면서 동시에 자칫 난잡해질 수도 있는 영화에 끈끈한 통일감과 안정감을 불어넣는다.
A(Acceptable, 무난함)
폐허 속에서 역전된 권력관계가 선사하는 묘미와 쾌감
- 2022-01-26 15:38:56테사
이 영화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나네요!
- 2021-07-16 09:57:31뚜리
아직 영화를 안봤는데, 이번주말에 꼭 봐야겠네요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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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ㄷㄷㄷㄷ 이 영화가 천만 관객을 찍을수 밖에 없는 이유.보시면 압니다.[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 크리미널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배급사)의 사용 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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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메인 예고편
누가 봐도 아름다운 부부 가후쿠와 오토.
우연히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가후쿠는 이유를 묻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2년 후 히로시마의 연극제에 초청되어 작품의 연출을 하게 된 가후쿠.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를 만나게 된다. 말없이 묵묵히 가후쿠의 차를 운전하는 미사키와 오래된 습관인 아내가 녹음한 테이프를 들으며 대사를 연습하는 가후쿠. 조용한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점점 마음을 열게 되고, 서로가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눈 덮인 훗카이도에서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서로의 슬픔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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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거북
붉은 거북
미카엘 두독 두빗 감독 장편 애니메이션. 두빗 감독은 이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전에 몇 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청소부 톰', '수도승과 물고기', '아버지와 딸', '차의 향기'가 그것인데, 이 작품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두빗 감독의 공통점은 모든 작품에 대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에서 '대사'는 오히려 작품을 이해하는데 방해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대사가 필요한 작품이 있고, 대사 없이 인물의 행동과 반응만으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과거 무성 영화에서 소리 없이 서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도, 대사보다는 인물의 행동과 반응이 더 직관적이거나 상징적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사 없는 영화는 상징과 은유가 강하다. 대사로 전달할 수 없는 서사와 감정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압축하고 인물과 자연의 변화를 동기화한다. 단편 '아버지와 딸'은 이 영화 '붉은 거북'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두 작품은 단편과 장편의 길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주제를 담고 있으며, 매우 깊은 상징과 은유를 내재하고 있다.
'아버지와 딸'에서 아버지는 어린 딸을 두고 떠난다. 그가 배를 타고 떠나는 장면은 무수한 신화의 변주다. 기독교에서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노래도 있는데, 이때 요단강은 죽음의 강을 뜻하고, 요단강을 건넌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어린 딸을 두고 떠나는 것이 몹시 안타깝지만,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딸은 너무 어렸고, 자신을 두고 떠난 아버지가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으며 날마다 강가로 나온다.
딸은 자라고, 친구들을 사귀고, 연인을 만나며,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함께 아버지가 떠난 강가를 찾는다. 더 시간이 흘러 남편도 죽고, 아이들은 모두 자기의 삶을 찾아 떠나고, 딸은 다시 혼자 아버지가 떠난 자리를 찾아온다.
노인이 되어 허리가 굽은 딸은 아버지가 떠난 강이 이제는 물이 말라 모래톱이 드러난 곳을 걸어들어간다. 한참을 걸어간 딸이 발견한 건 아버지가 타고 떠났던 작은 배였다. 딸은 모래에 반쯤 잠긴 작은 배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고, 걸을 때마다 조금씩 젊어지면서 평생을 그리던 아버지를 만난다.
작품에서 보이는대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지만, 작품 전체가 하나의 메타포이며, 신화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는 어린 딸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 아마도 어머니는 더 먼저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 혼자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면서 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아버지는 '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은 서양 종교에서 남성으로 현현한다. 또한 많은 경우 '아버지'로 불리며, '아버지'와 '신'은 동격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린 딸은 어리석은 인간이다. 아버지 즉 신의 보살핌 없는 인간은 세상에서 늘 힘들고 괴롭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렇기에 더욱 아버지(신)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이 아버지(신)를 만날 수 있는 건 그가 살아 있을 때는 가능하지 않다. 그가 요단강을 건널 때, 즉 아버지가 계신 저 강(바다) 너머로 향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딸이 노인이 되어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멀리 떠난 줄 알았던 아버지(신)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붉은 거북'의 해석도 상징과 은유를 바탕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마땅하다. 이 작품은 장편이지만 서사는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가 거의 없다. 따라서 서사를 이해하고 풀어나가기 위해서라도 상징과 은유의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남자는 바다에서 표류하다 작은 무인도에 닿는다. 남자는 곧 '인간' 또는 '인류'다. 바다는 현실의 세계가 아닌, 신화와 은유의 세계다. 또는 원초의 세계, 원시의 상징이다. 바다에서 무인도에 도착한 남자는, 현실의 세계에 발을 딛는다. 남자는 '신'의 자식이지만 '신'은 아니며,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다. 남자는 원초의 바다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세상에 발을 딛지만, 현실은 고통스럽고, 외롭고, 괴롭다. 남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사방은 망망한 바다만 놓여 있을 뿐이다.
남자는 무인도에 자라고 있는 대나무를 모아 뗏목을 만든다. 그는 저 무한의 바다를 건너 자신이 처음 있던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향'을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바다에 뗏목을 띄우고 나아가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뗏목은 부서진다.
다시, 조금 더 큰 뗏목을 만들어 바다로 나가는 남자. 두번째도 뗏목이 부서진다. 저절로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물밑에서 무언가 의도적으로 뗏목을 부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남자는, 아주 큰 뗏목을 만든다. 크고 튼튼한 뗏목은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다시 바다로 나간다.
여기서 '뗏목'은 이동수단이지만, 남자가 그리는 '이상향'으로 가는 사상의 도구이기도 하다. 그 뗏목이 부서지는 건, 남자의 신념, 사상, 정신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의미다. 뗏목은 폭풍을 만나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알 수 없는 물체가 뗏목을 일부러 부수기 때문인 걸 알 수 있는데, 부서진 뗏목 주변에서 만난 동물이 '붉은 거북'이다.
붉은 거북은 무얼까. 남자가 다시 무인도로 돌아와 외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그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 - 바다 - 로 나가려 몇 번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한 뒤로 분노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바다에서 섬으로 올라오는 붉은 거북.
많은 거북 종류는 해변의 모래밭에 알을 낳아 묻는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북은 모래를 헤집고 올라와 바다를 향해 기어간다. 이 붉은 거북도 해변에 알을 낳기 위해 올라온 것은 아닐까. 이 현실적 해석은 이어지는 상징과 은유와 섞이면서 환상으로 환유한다.
남자는 해변으로 올라온 붉은 거북을 보고 분노가 폭발한다. 그 붉은 거북이 자기가 만든 뗏목을 부순 바로 '그' 붉은 거북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하지만 그 붉은 거북이 남자의 뗏목을 부순 거북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남자는 거북의 머리를 대나무로 내려치고, 거북을 뒤집어 놓는다. 복수한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남자는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한다. 붉은 거북을 살리려 바닷물을 떠 끼얹기도 하지만, 붉은 거북이 회생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붉은 거북이 죽었다고 여긴 남자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데, 갈라진 거북의 껍질 안에 젊은 여성이 누워 있었다. 남자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지만, 붉은 머리의 여성은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실제의 존재였다. 남자는 여자를 살리려고 그늘을 만들어주고, 숲에 있는 작은 연못에서 물을 떠와 여자에게 물을 먹여주고 지극하게 보살핀다. 비가 내리는 날, 여자는 긴 잠에서 깨어난다.
여자는 자기를 감싸고 있던 거북 껍질을 바다로 돌려보낸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만들고 있던 뗏목을 바다로 떠나 보낸다. 여자는 더 이상 바다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거북 껍질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고, 남자는 그 여자와 함께 살기 위해 자신도 더 이상 바다로 나가,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붉은 거북이자 붉은 머리의 여성은 남자의 또 다른 자아이면서 욕망의 현현이다. 남자(인류)는 진화를 통해 점차 문명을 갖게 되고,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며 적응해 살고 있는 존재다. 그는 늘 마음 속 깊은 곳에 원초의 고향 - 자연 - 으로 돌아가고픈 본능을 지니며 살아간다. 회귀 본능은 사라질 수 없으며 다만 현실의 욕망이 더 클 때, 본능을 누르며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남자와 여자는 함께 살아간다. 세월이 흐르고,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가 자라고, 세 사람의 삶은 변함 없이 평온하고 따뜻하다. 소소하지만 중요한 사건들, 아이가 바다에 빠졌지만, 본능적으로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그리고 알 수 없는 문명의 물건이 해변에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는 소년.
아이는 자라서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된다. 남자와 여자는 나이 들어가고, 아무 변화가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의 삶이 파괴되는 재해가 일어난다. 바다에서 해일이 몰려오고, 그들이 살던 숲이 거의 다 파괴되고 세 사람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성장한 아들은 좁고 답답한 섬에 머물러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멈춰 선 파도에 올라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새로운 문명 사회를 발견한다. 아들은 부모를 설득해 바다 건너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겠노라고 말하고, 부모는 성장한 아들을 막지 못한다. 아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섬을 떠나고, 섬에는 다시 두 사람만 남는다.
세월이 더 많이 흐르고, 두 사람은 이제 백발 노인이 된다. 삶은 변함 없지만, 시간(역사)은 남자를 죽음으로 이끈다. 남자가 숨을 거두자 여자는 남자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서서히 붉은 거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느리게 몸을 돌려 바다로 나간다.
붉은 거북은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바다로 나갔다. 남자(인류)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또는 붙들린 삶을 살았고, 육체가 소멸하자 욕망은 다시 원초의 바다, 이상향으로 돌아간다. 현실에서 자신의 존재를 살아움직이도록 추동하는 힘은 '욕망'이었다.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며,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인간은 욕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존재이면서도 그로 인해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실에서의 삶이 끝나면, 인간의 욕망도 자연스럽게 원초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불교적이다. 죽은 남자의 손등을 어루만지던 여자가 다시 붉은 거북으로 변해 바다로 돌아가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주제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긴 시간이 조금도 아깝거나 지루하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부드러운 선과 파스텔톤의 가라앉은 채색, 간결한 선과 최소한의 움직임, 작은 섬과 망망대해, 바람, 대나무 숲, 모래톱, 일렁이는 파도와 포말, 하늘을 나는 새, 붉게 물드는 노을,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풍경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세 사람의 삶은 인류의 초기, 원시적 삶을 살았던 힘들지만 순수했던 시기를 떠올린다.
좁게는 개인의 인생을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넓게는 인류, 신화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이 작품은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없지만, 말보다 더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더 근본적인 질문과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은 많은 사람이 보고 함께 이야기 하길 바라는 몇 안 되는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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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딩드레스로부터 도망가기
결혼식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신부의 웨딩드레스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그리고 결코 빠지지 않는 장면이 그 드레스가 어떤 드레스인지 설명하는 장면이다. 유명 브랜드의 신상 드레스라거나(ex.<신부들의 전쟁>), 유명한 디자이너가 주인공만을 위해 디자인한 드레스라거나(ex.<섹스 앤 더 시티>).. 제니퍼 로페즈의 신작 영화 <샷건 웨딩>에서도 어김없이 드레스가 주인공이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달시(제니퍼 로페즈 분)가 필리핀의 한 섬에서 치르는 결혼식에서 입는 드레스는 신랑 톰(조쉬 더하멜 분)의 가족에게서 전통적으로 물려 내려온 드레스다. 설정 덕분에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 이 웨딩 드레스는 달시의 행동을 영화 내내 제약하는 장애물이다. 애초에 본인이 고른 것도 아닌, 신랑의 가족에게서 받은 드레스라는 점부터 이 웨딩 드레스는 달시에게 작용할 가부장제를 비유한다. 신랑의 어머니 캐롤(제니퍼 쿨리지 분)에 따르면 이 드레스는 캐롤이 입었고, 신랑의 동생인 지니가 이어서 입었다. 달시의 웨딩드레스는 달시를 숨도 쉬기 힘들 만큼 조이면서 캐롤과 지니가 겪었고, 겪고 있으며, 겪어야 할 가족 내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대놓고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달시의 결혼식은 인질극으로 변모한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톰과 설전을 벌인 후 혼자 신부대기실에 돌아온 달시는 과자를 먹으며 어떻게든 웨딩드레스를 벗으려 애쓴다. 말 그대로 숨쉬기 힘들 만큼 조여오는 웨딩드레스의 코르셋은 달시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톰조차 이 드레스를 벗기지 못한다는 점인데, 와중에 톰은 드레스의 불편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시에게 주어질 여성으로서의 역할은 달시의 숨통을 조이지만 톰에게는 당연한 것이며, 달시가 호흡 곤란을 호소함에도 원인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눈 앞에 문자 그대로 생명의 위협이 다가와도 달시는 드레스로부터 탈출하지 못하는데 이는 톰과의 설전에서 집어던진 결혼반지와 상반된다. 달시는 쉽게 반지를 뽑아 톰에게 던지지만 톰은 가볍게 잡아내며 결국에는 그 반지를 달시에게 도로 끼우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도 달시는 드레스에서 온전히 탈출하지 못하는데, 이는 아무리 달시가 발버둥쳐도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시사하는지도 모른다.
톰과 함께 해적에게 발각된 달시는 결국 같이 손목을 묶이는 신세가 된다. 반지를 집어던지고도 톰에게서 달아나지 못한 달시는 결국 드레스를 입은 채 톰과 함께 도망다니기 시작하는데, 코믹하게 그려지지만 이 모든 것을 가부장제의 비유로 본다면 무시무시한 장면이다. 편한 바지를 입은 톰은 도망다니면서도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다. 하지만 달시의 드레스는 계속해서 찢어지고, 달시의 머리에 얹어진 비싼 가발은 달시가 달리기 어렵게 만든다. 결국 가발을 벗어던지면서도 비싸다는 이유로 버리지 못하고 톰의 주머니에 쑤셔넣는 달시는 종국에 그 가발이 구원하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톰이라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아마도 불편한 구두를 신고 있었을 달시는 어느 순간 맨발이 되고, 결국 해적에게서 부츠를 벗겨내 신지만 드레스로부터는 여전히 도망치지 못한다.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달시의 드레스는 영화 내내 제니퍼 로페즈의 신체를 눈요깃감으로 활용하는 도구로 변모하고, 카메라는 노골적으로 드레스의 가슴선 위로 로페즈를 잡아 관객으로 하여금 로페즈의 나신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부엌에서 해적의 공격을 막아내던 톰과 달시는 자신들을 묶고 있던 끈을 끊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톰의 출혈을 수반하게 되고, 이는 톰의 신체적 약화로 이어지는 대신 달시의 약점(기절)을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 가부장제의 미약한 상징으로부터 탈출하면서도 달시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신체적인 자유를 얻는 대신 혼절하여 무방비로 노출되고, 톰의 도움이 없이는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처럼 비유된다. 이전 장면에서 용감하게 짚라인을 타고 수류탄을 적기에 던져 해적을 물리친 달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을 감안하면 이 장면이 상징하는 바는 다소 노골적이다. 톰은 달시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가부장제에 속박하기 위해 해적을 물리치며, 이 과정에서 약간의 출혈 정도는 감내한다. 달시는 결국 드레스의 일부를 찢어내지만 온전히 달아나지는 못하고, 결국 톰과 함께 가부장 그 자체를 상징하는 양가 가족들과 하객을 구하기 위해 풀장으로 돌아온다.
영화 내내 달시는 단곗수가 적은 계획을, 톰은 단곗수가 많은 계획을 선호하는 양상을 보인다. 달시가 입은 웨딩드레스는 입는 데도, 벗는 데도 많은 단계를 요구하는 데다 드레스 이외에도 머리와 화장 등 수많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달시가 단순한 계획을 선호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결혼식에서조차 신랑에 비해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 신부인 달시는 나머지 계획은 단순하길 바랄 수밖에 없다. 반면 탈착이 자유로운 정장을 입은 톰은 단순해 보이는 자신의 역할이 단조롭다고 느낀다. 또한 복잡한 단계를 거쳐 가부장제 속으로 달시를 끌어들여야만 달시가 쉽게 떠나지 않을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마치 단순한 계획을 선호하던 달시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 계획의 단계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주지만, 실상은 단계가 몇이든 이미 가부장의 덫에 걸려든 달시에게 필요한 계획은 단 한 단계뿐인지도 모른다. 결혼을 포기하고 웨딩드레스를 벗어던지는 것이다.
마침내 풀장에 도달한 톰과 달시는 그 곳에서 놀랍게도 결혼의 실체를 목격한다. 이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결혼이 모두 이상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과정에서 서로를 상처입히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달시와 톰은 결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달시는 해적을 처단하는 영광마저 야구선수인 톰에게 돌린다. 아무도 보지 못할 때에는 적재적소에 수류탄을 던졌던 달시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는 수류탄을 톰이 쳐내도록 던지는 장면은 결혼제도 안에서 모든 영광은 신랑을 향할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바다 위로 가서야 톰과 달시는 그나마 동등하게 마지막 적과 겨룰 수 있게 되지만 목격자는 본인들과 망자뿐이다.
헐리웃에서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웨딩 로맨틱 코미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며 이성연애를 찬양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세지들을 읽어내는 관객이 있다면 언젠가 웨딩드레스는 폐기될지도 모른다. 다 찢고서야, 그리고 해적의 부츠를 빼앗아 신고서야 해변을 자유롭게 달리는 달시의 모습은 결혼식이라는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은 여성의 희생을 은유적으로 보여주지만 읽어내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 이미지 출처는 모두 다음 영화입니다.
*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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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성서사의 관점으로 본 〈탑건: 매버릭〉
오랜만에 속편으로 돌아오는 옛 영화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는커녕 옛 추억마저 갉아먹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탑건: 매버릭〉은 오히려 전편(〈탑건〉(1986))보다 훨씬 뛰어난 완성도와 서사를 선보인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영화적 체험’, ‘영화관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극대화하는 정말 재미있는 블록버스터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가 훌륭한 상업영화라는 것과는 별개로, 〈탑건〉과 〈탑건: 매버릭〉은 남성서사의 관점으로 살펴볼 때 다른 의미에서 흥미로워지는 영화다. 〈탑건〉은 남성판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할리우드 버전이라 할 만하다. 매버릭은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반항적 기질과 즉흥적 성격으로 동료‧조직과 자주 마찰을 빚는다. 훌륭한 전투기 조종술로 매번 의심과 회의의 눈초리를 돌파하긴 하지만, 자기 고집대로 비행을 하다가 동료 파일럿 구스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자 큰 충격을 받기도 한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같은 고전 작품이든 할리우든 영화든, 통제되지 않는 말썽쟁이 캐릭터가 여성인 경우 결말은 늘 비슷하다. 완전히 길들여지거나, 세계와 불화하여 파국을 맞이하거나. 하지만 같은 말썽쟁이임에도 성별만 다른 매버릭은 그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는다. 매버릭은 비행을 멈추기는커녕 조직으로부터 네 잘못이 아니니 비행을 멈추지 말라는 독려를 받는다. 결말에 가서는 내내 라이벌 구도에 있던 또 다른 남성 인물에게 인정받기까지 한다. 완벽한 ‘내부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주인공의 콜 네임이 영단어 ‘maverick’이라는 데서부터 예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개성이 강한[독립적인] 사람’이라는 뜻의 이 단어를 이름으로 쓰는 매버릭에게는 ‘말괄량이’로 불리는 여성들과는 처음부터 다른 결말이 예정되어 있던 것이다.
〈탑건〉이 여성과는 다른 길을 걷는 남성 말괄량이의 사회 진입기를 다룬다면, 〈탑건: 매버릭〉은 어느새 은퇴할 나이가 된 매버릭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이를 유산의 형태로 후대에게 상속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영화의 기본 설정에서부터 드러난다. 매버릭과 그의 팀은 인간 파일럿보다 무인 조종이 가능한 전투기를 더 선호하는 해군 제독 때문에 위기를 맞는다. 매버릭이 예산을 뺏기지 않고 계속 비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
그에게 주어진 미션은 후배 파일럿 교육이다. 적이 관리하는 우라늄 농축 시설을 폭격할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젊은 파일럿들을 교육하라는 임무가 그에게 주어진다. 〈탑건〉의 속편이 나온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짐작했듯, 매버릭이 교육해야 하는 사람 중에는 그와 함께 비행하다 목숨을 잃은 구스의 아들 루스터도 있다. 루스터는 절차적 문제는 없었더라도 매버릭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다고 생각하기에 내내 매버릭과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영화는 둘이 어떻게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며 화해하는지를 좇는다. 결혼하지 않은 매버릭이 아버지를 잃은 루스터와 유사 가족을 형성하여 ‘아버지-아들’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한때 말썽쟁이였던 한 남자가 어떻게 조국의 위대한 자산이자 누군가의 훌륭한 아버지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를 증명해내는 것이다. 톰 크루즈의 열정과 영화의 완성도에는 기꺼이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딸을 남기지 못하고 사그라진 말괄량이 여성들을 생각하면 어딘가 씁쓸해진다.
〈탑건: 매버릭〉에서 흥미로운 또 다른 지점은 주인공들이 폭격해야 하는 적이 누구인지에 관한 구체적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적이 NATO 규정을 위반해 위협이 된다는 언급이 스치듯 나올 뿐이다. 적군의 인종‧국적을 추측할 만한 단서도 없다. 적이 강력하고 악할수록 주인공의 ‘선함’이 부각된다는 점에서 이는 꽤 흥미로운 지점인데, 영화는 화려한 볼거리와 탄탄한 연출, 무엇보다 매버릭과 루스터의 ‘아버지-아들 되기’ 서사에 집중함으로써 적군 얼굴의 빈자리를 채운다. 작전에 성공한 후 기지로 되돌아갈 때, 매버릭과 루스터가 설원 위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진심을 확인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요컨대 ‘탑건’ 시리즈는 다소 길어 보이는 35년의 시리즈 공백을 오히려 영화적 자원으로 활용하여 관객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시리즈의 공백을 한 남성의 생애주기에 맞춰 마치 매버릭이 은퇴할 나이가 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남성서사를 상업 블록버스터와 버무린 것이다. 수십 년을 거슬러 속편을 제작할 탄탄한 역사를 지닌 할리우드의 필모그래피, 그리고 말썽쟁이였으나 끝내 모범시민으로 거듭난 남성 캐릭터는 부러움과 씁쓸함을 동시에 자아낸다. 언젠가 도래할 비非 남성 캐릭터의 귀환 또한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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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우리는 극장에 가야 하는가!
과거 F1 유망주였다가 불의의 사고 이후 프리랜서 드라이버가 된 소니(브래드 피트). 24시간 데이토나 경주 등 운전만 할 수 있다면 어디든 가는, 그리고 경기가 끝나면 홀연히 떠난다. 미련 없이. 그러던 어느 날 과거 콤비를 이뤘던 루벤(하비에르 바르뎀)이 찾아온다. 이유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레이싱팀 APXGP에 영입 제안을 하기 위해서다. 실력도 바닥, 순위도 바닥, 자산도 바닥인 상황에서 루벤은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소니에게 제안한 것. 이후 그는 경기가 펼쳐질 영국으로 넘어가 이 약체팀에 합류한다. 하지만, 꼴찌는 이유가 있는 법. 머신에도, 팀에도 그리고 함께 레이스를 뛰어야 하는 스타 드라이버 조슈아(댐슨 이드리스)에도 문제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소니는 이 팀을 구원하고, 진정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노장은 죽지 않는다. 브래드 피트, 제리 브룩하이머, 한스 짐머 등 왕년의 할리우드를 주름잡았던 이들이 뭉쳤다. 과거를 풍미했던 이들의 장점이 오롯이 담긴 <F1 더 무비>는 과거의 향취가 물씬 풍긴다. 마치 이들이 과거 영광을 얻었던 시기의 에너지와 노하우를 연료 삼아 계속해서 질주해 나가는 모양새다. 여기에 스탠퍼드 대학교 기계공학과 출신으로 작품마다 메탈 사랑을 보여주는 조셉 코신스키의 연출은 계속해서 작품을 피트인 시켜 추진력을 갖게 한다. 그래봤자 뻔한 이야기라 치부할 수 있지만, 영화는 그 뻔함이 엔진을 가열시키는 주 동력이다. 알고 봐도 빠져드는 그 맛. 이제는 그리워 음미하고 싶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그 맛을 상기시켜 준다는 것만으로 영화는 그 의미가 있다. 영화 산업이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시점에서.
<F1 더 무비>의 스토리는 특별할 게 없다. 과거 인생의 쓴맛을 본 후, 사라진 주인공이 자신의 못다 한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서킷에서 달리는 내용이다. <탑건: 매버릭>에서 매버릭(톰 크루즈)을 소환했던 것처럼, 감독은 왕년에 잘 나간 기대주 소니를 데려온다. 나이는 많지만 서킷에서 싸울 줄 알고, 어떻게 하면 개인이 아닌 팀이 승점을 따낼 수 있을지에 도가 튼 승부사. 문제는 그가 늙었다는 점이다. 구단주와 비슷한 나이이니 조슈아는 물론, 팀원 모두 놀라 자빠지는 건 이해가 간다. 마치 월드컵 공격수가 부재해 황선홍 감독을 그라운드로 복귀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 (감독님 죄송합니다. 대전하나시티즌 사랑합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최하위이자 오합지졸 팀을 하나로 묶는다. 경기 전 팀원들과 함께 런닝을 하는 등 올드한 방법을 통해 원 팀을 만들고, 서킷 위에서 호흡을 맞추는 조슈아와도 의견 다툼이 일어나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거친 조율을 하면서 그를 한단계 성장시킨다. 그리고 그토록 원하던 자신의 꿈도 이루게 된다.
<탑건> <나쁜 녀석들> <더 록> <아마겟돈> 등 만들었다 하면 성공했던(뭐 지금도 유지되지만) 제리 브룩하이머 특유의 단순하지만 직관적인 플롯을 이 작품에도 사용한다. 특히 노하우가 많은 중년 남자 캐릭터와 신참 캐릭터가 한 팀을 이뤄 사건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더 록> <아마겟돈>)는 소니와 조슈아를 통해 재현된다. 제리 브룩하이머는 마치 소니처럼 스스로 세운 성공 공식을 또 한 번 영화에 주입한다.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한 영화를 많이 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스토리의 빈틈이 많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인데, 이를 메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한스 짐머의 음악이다. F1 머신 엔진처럼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음악으로 틈을 메우고, 이를 동력 삼아 서킷에서 벌어지는 박진감 넘치는 장면들을 살리는 데 주력한다. 한스 짐머 또한 자신의 노하우를 충분히 발휘해서 이 영화에 멋진 음악을 선사한다.
역시 중요한 건 비주얼이다. 왜 이 작품을 극장에서 봐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알리기 위해 기획된 영화라는 생각이 계속 들 정도로 그 매력은 서킷에서 펼쳐진다. F1 머신의 엔진 굉음, 서킷을 달릴 때 들리는 타이어 마찰음, 승리를 위해 중력에 굴복하지 않고 운전을 이어 나가는 드라이버들의 괴성과 표정 등은 그 자체로 시청각을 압도한다.
조셉 코신스키 감독이 가장 크게 둔 주안점은 역시나 리얼리티다. 실제 서킷에서 달리는 F1 머신을 촬영한 그의 뚝심은 브래드 피트와 댐슨 이드리스가 직접 운전대를 잡게 했다. 더불어 실제 F1팀이 제작에 참여해 진짜 레이스카를 사용했다고. 사실감 넘치는 영상을 얻기 위해 초소형 고성능 카메라를 차량 내부에 장착해 관객이 실제로 탑승한 것 같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 덕분에 질주하면서 헬멧 사이로 보이는 이들의 일그러지는 얼굴과 고통을 오롯이 만끽할 수 있다.
이런 영상미를 통해 조셉 코신스키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원팀이다. 개인이 아닌 팀으로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가고 끝내 이루는 이 진부하고도 가슴 벅찬 이야기는 또 한 번 우리에게 큰 감동을 안긴다.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브래드 피트에게 기인한다. 환갑을 넘은 나이에도 이렇게 섹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영화 속 그의 모습은 오랫동안 스크린에서 그를 봐왔던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경의를 표한다. 극 중 소니는 <머니볼>의 빌린 빈 단장과 오버랩 되는 부분이 있다. 자신이 진짜 좋아했던 일에서 실패를 맛보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하지만 꼭 돌아가서 매듭지어야 하는 곳(서킷, 야구장)으로 가서 끝내 성공을 거두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빌리 빈 보다는 소니가 더 섹시하고 마초적이다.
중요한 건 소니의 철학이다. 인생이 도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똑같은 자리에 앉아 카드를 받고 배팅하는 것처럼, 그는 죽음을 담보로 매번 F1 머신에 몸을 싣고 살아남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 그가 이토록 인생을 향해 돌진하는 이유는 과거를 바꾸고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서이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서킷에서 달리고 싶다는 그 말. 다소 오글거리는 이 대사를 그가 하면 멋짐이 폭발한다. 그리고 낭만이 느껴진다. 1990년대 이 낭만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보여줬던 그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이를 길어 올려 다시 관객에게 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멋지다. 우승컵을 들기보단, 상금을 갖기보단,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자동차로 도전하는 소니의 모습은 어쩌면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배우를 넘어 제작자로서도 역할을 다하는 그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마치 소니가 브래드 피트이고, 브래드 피트가 소니인 것처럼 말이다. 우연의 일치일지 몰라도 그의 제작사 플랜B가 제작에 참여했다.
<포드 V 페라리>보단 무게감이 덜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관객을 약 2시간 동안 좌석과 한 몸이 되게 만들어 엔딩크레딧까지 보게 만든다. 스토리가 뻔하든, 캐릭터가 평면적이라도 해도 상관없다. 결국 이 영화는 관객을 극장으로 오게끔 한 일차적 목적을 완벽하게 수행하기에는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잔뼈 굵은 이들은 절대 죽지 않았다. 힘든 몸을 이끌고 다시 서킷에 오르는 소니처럼 말이다.덧붙이는 말: F1을 몰라도 이 영화는 크게 상관없다. 알고 보면 더 좋겠지만, 모르고 봐도 진입장벽이 높지 않다. 아니 아예 없다고 본다. 스포츠 드라마이면서 우정, 속죄, 팀워크 등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하는 중요한 것들을 더 집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F1 경기가 궁금하다면 그때 가서 공부해도 늦지 않다.
사진 출처: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평점: 3.5 / 5.0
관람평: 고민 말고 올라 타자! 빵형님이 알아서 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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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트 듀얼> 마지막 순간까지 신중히 찾아야 할 진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4세기 프랑스, 유서 깊은 카루주 가의 부인 ‘마르그리트(조디 코머)’는 남편 ‘장(맷 데이먼)’이 집을 비우자 불시에 들이닥친 장의 친구 ‘자크(아담 드라이버)’에게 강간당한다. 자신의 범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자크는 그녀에게 침묵을 강요하지만, 마르그리트는 감내해야 할 불명예를 각오하고 용기를 내어 그의 죄를 고발한다. 한때 자크와 친우이자 전우였지만 세금 징수, 영지 소유권, 호칭과 계급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던 장은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재판을 요구하며 그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관계가 된다. 그런데도 대영주 '피에르(벤 애플렉)'의 권력을 등에 업은 자크가 강력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자 마르그리트의 재판은 장과 자크 중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결투 재판으로 결정되고, 마르그리트는 장이 패배할 경우 함께 사형에 처해지는 운명에 놓인다.
2-3 년에 한 편씩 신작을 내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리들리 스콧 감독. 비주얼리스트로도 유명한 그는 <블레이드 러너>, <에일리언> 시리즈, <마션> 같은 SF 작품부터 전쟁 영화인 <블랙 호크 다운>, 여성 영화인 <델마와 루이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명작을 만들었다. 그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글래디에이터>, <킹덤 오브 헤븐>, <엑소더스> 등으로 대표되는 시대극이다. 리들리 스콧의 사극은 과거의 사건과 시대상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항상 현재를 반추할 수 있는 질문들을 던져왔기 때문이다. 그가 선보이는 화려한 볼거리에는 늘 자유의 평등의 가치, 종교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성찰처럼 도발적일 수도 있는 사유가 깃들어 있었다. 이는 에릭 재거의 원작을 영상화한 <라스트 듀얼>이 눈길을 사로잡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결투 재판을 섬세하게 다루며 하나로 답을 단정할 수 없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라스트 듀얼>에서 가장 눈에 먼저 띄는 특징이라면 역시 그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장과 자크가 결투를 준비하는 장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이내 시점을 과거로 되돌렸다가 후반부에 다시 결투 장면으로 돌아온다. 이때 과거 시점에서는 한때 절친이었던 두 남자가 왜 결투 재판까지 펼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 과정이 총 세 명의 시선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이다. 세 명의 주인공은 각자 경험한 진실을 말한다. 1장인 "장 드 카루주가 말하는 진실"은 장의 입장에서 자크와의 불화가 어떻게 마르그리트의 강간으로 이어졌는지를, 2장인 "자크 르 그리가 말하는 진실"은 강간을 저지른 것을 마음 한 켠으로는 인정하면서도 끝끝내 사랑의 표현이라고 합리화하는 자크의 입장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인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은 피해자인 마르그리트의 시점에서 일련의 사건을 복기한다.
이때 영화는 마르그리트의 시점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듯한 연출을 선보인다.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이라는 부제목이 나온 후 글자가 사라지는 가운데 화면에는 "진실"만이 잠시 남는다. 이는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중 마르그리트가 영주의 부인이라는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직접 가축을 돌보거나 세금을 징수하는 등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여성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마르그리트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지 못하던 시대에 구조적 한계마저 극복하며 자신의 권리와 명예, 그 목소리까지도 마침내 되찾은 이상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경우 <라스트 듀얼>은 중세의 사건을 통해 근 몇 년간 주목받았고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이끌어 낸 미투 운동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투가 끝난 직후 마르그리트의 표정을 보면 그녀가 이 작품 속 진정한 승리자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맞이했데도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데다가 허무하기까지 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어째서일까? <라스트 듀얼>이 엄연히 사극이기 때문이다. <왕좌의 게임>에서 명예와 충성심을 고집하는 존 스노우의 언행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작중 중세적 세계관에서는 그 언행이 세력을 구축하는 기반이 될 수 있듯이,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인물들의 행동은 표면적인 의미와 다른 함의를 가질 수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부당해도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또 다른 것이다. 따라서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 역시 반드시 현실이 아닐 수 있고, 장과 자크처럼 자신이 경험한 진실로서 현실의 한 파편에 불과할 수 있으며, 이 경우 그녀의 표정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마르그리트가 강간을 당한 직후 장이 "마지막으로 정을 통한 남자가 외간 남자이게 둘 순 없지"라고 말하며 잠자리를 강요한 것이 단적인 예시다. 현재 관점에서 볼 때 장의 행동은 명백한 강간이다. 하지만 중세시대에 장의 행동은 오히려 마르그리트를 보호하는 것이다. 만약 그날 밤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는데 마르그리트가 임신한다면, 장은 그녀를 보호할 방법이 없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기사인 그는 마르그리트의 아이가 자크의 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마르그리트와 잠자리를 가졌기에 그는 훗날 태어날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이고, 그녀의 명예와 진실을 지킬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설령 그것이 보호할 의도였다고 해도, 본래 무뚝뚝한 성정인 것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강압적이었던 장의 잠자리 요구는 엄연히 강간이다. 설령 보호라 해도 당사자인 마르그리트를 상처 입힌다는 점에서는 중세의 시대적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한 셈이다. 이에 더해 재판을 열기 위해 일부러 강간과 관련해 소문을 내는 것 역시 현시점에서 보면 명백한 2차 가해지만, 봉건제가 유지되던 중세 프랑스에서는 최선이자 동시에 필요악에 가까운 선택이나 다름없다. 이는 부부가 그날 밤을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이유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르그리트가 장의 영지를 돌보는 장면들도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이 반드시 현실과 등치 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일견 장의 어설픈 영지 경영을 현명하고 유능한 마르그리트가 잘 챙겨주는 장면 같다. 하지만 중세 시대임을 고려하면 이 역시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마르그리트는 씨암말의 씨를 가려 받으려는 장의 명을 어긴 하인에게 말들을 자유롭게 풀어줘도 된다는, 남편의 말과 반대되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중세의 말이 품종, 용도에 따라 급격한 가격차이를 보이는 것을 고려하면, 정해진 용도에 따라 말을 키우려는 장의 선택을 무시한 마르그리트의 선택은 오히려 큰 손실을 초래할 위험한 행동이다. 전쟁에 나선 남편 대신 세금을 거두는 장면도 유사하게 이해할 수 있다. 장은 몇 달간 전쟁에 나가 금화 300닢을 받아오는데, 이는 작중 마르그리트가 살림을 가꾸어 늘린 재정을 상회하는 수치다.
영화는 이처럼 마르그리트의 진실이 현실과 어긋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마르그리트는 중세의 재판이 얼마나 끔찍한지 모른 채 고발에 나섰다. 자신의 재판이 자신과 남편의 목숨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결투로 이루어지는 것 외의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이는 마르그리트가 분명 영리하고 지혜롭지만, 그녀의 현실 역시 그녀의 주관대로 구성되었던 경우가 많았음을 암시한다. 마치 사건의 전말을 모두 담은 듯했던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조차도 온전한 진실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3장의 도입부 연출은 마르그리트의 진실과 별개인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실이 따로 존재함을 보여준다. 또한 마지막 순간 그저 무기력할 뿐인 그녀의 표정은 그녀가 알고 있었던 진실과 알지 못했던 현실의 충돌로 인한 충격에 압도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피해받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자, 더 나아가 현실과 진실 사이의 괴리를 시대적 관점에서 조명한 작품이다. 시대적, 사회적, 구조적 한계를 마주한 여성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모든 사람의 진실은 왜곡될 수 있기에 사건의 전모가 쉽게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도 함께 전한다. 이는 세 주인공의 시선에 따라 작중 그 어떤 사건도 동일하게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두드러진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결투 재판 시퀀스는 이처럼 보다 폭넓은 해석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만약 <라스트 듀얼>이 첫 번째 해석대로만 이루어지는 작품이라면, 이 작품이 마지막 결투를 스펙터클로써 보여주는 태도는 꽤나 어색해 보인다. 물론 프랑스 왕의 태도에서도 보이듯 결투 재판이 당시 시대에 유희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의 용기를 지지하는 것만이 영화의 주제였다면, 결투를 펼치는 두 남자의 시선에서 현장감을 살리며 박진감 있게 연출하는 대신, 마르그리트의 시점을 중심으로 결투를 건조하게 다루는 것이 더 주제에 부합하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투 장면은 마르그리트의 관점뿐만 아니라 그 결투에 임하는 두 남성의 시선, 그중에서도 특히 장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이는 결투 재판의 처절함과 승리에 대한 의지를 충실히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오락적으로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지막까지 누구의 시선과 진실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은 채 세 주인공의 시선을 공존시킨다는 측면에서 더욱 인상적이다.
<라스트 듀얼>의 함의는 제작 비하인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의 제작 및 각본에는 리들리 스콧 감독 외에도 맷 데이먼, 벤 에플랙, 그리고 여성 감독이자 각본가로도 활동 중인 니콜 홀로프세너가 참여했다. 맷 데이먼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데이먼과 애플렉이 남성의 시선을, 홀로프세너는 마르그리트의 시선을 담당해 각본 작업을 진행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 사건을 둘러싼 당사자들의 시각과 관점, 심정과 그들의 변화를 다채롭게 녹여낼 수 있었던 데는 이처럼 직간접적으로 미투 운동과 성추문 관련 이슈를 경험했던 이들과의 협업이 큰 역할이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월에 개봉했던 <라스트 듀얼>은 리들리 스콧이라는 이름값에 비해 초라한 흥행을 기록했었다. 이 작품이 지닌 품격과 가치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부당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비록 극장에서의 흥행은 참패했지만, 다행히도 디즈니 플러스에서 공개되었으니 OTT를 통해서라도 노장의 시선과 사유가 담긴 <라스트 듀얼>이 온전히 공유되고 평가받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시대를 넘나드는 거장의 통찰력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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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이와 이경의 눈부신 성장 로맨스
“우리는 마시고 내쉬는 숨 그 자체였다”
태생적인 갈색톤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로 놀림을 당해 온 평범한 고등학생 이경이 우연하게 날아온 축구공에 맞아 안경이 부러지며 축구선수 수이와의 첫 만남이 시작된다. 미안한 마음에 수이가 매일 같이 이경을 찾아 딸기우유를 건네며 둘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묘한 사랑의 감정을 키워 나간다. 시간은 흘러 고3의 여름, 둘은 서로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지만 수이는 부상으로 인해 더 이상 축구 선수의 꿈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이경은 평범한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서울로 상경한 두 사람은 각자의 삶을 이어가며 사랑을 지속하지만 조금씩 어긋나고 뒤틀리는 관계에 이별을 맞이한다. 최은영 작가의 단편집 ‘내게 무해한 사람’에 수록된 동명 소설을 원작을 옮긴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그 여름은 수이와 이경이라는 두 여고생의 뜨거운 여름날에 시작된 반짝이는 청춘의 순간을 전한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된 사춘기 소녀의 첫사랑과 뒤이어 따르는 성장이라는 주제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관객들의 정서적 공감을 이끄는 형식으로 강렬하기보단 천천히 젖어드는 작은 떨림이 존재했다.
애초에 애니메이션이라는 정보만을 인식한 채 시사회에 간 거라 예상치 않은 퀴어(LGBT) 장르가 한국, 그것도 애니메이션 극장판으로 나왔다는 것에 조금 놀랐지만, 앞서 언급한 잔잔한 여운이 남는 매력적인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다. 사랑이라는 주제가 인종, 성별과 관계없이 대중들의 공감을 일으킨다는 건 이미 해외의 여러 수작들로 증명된 바이고 특히 첫사랑은 늘 설렘과 두근거림을 상기시켜주지 않는가? 묘한 눈빛과 감정, 소소한 손길이 닿는 베스트셀러 바탕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러한 강점들을 잘 살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이 떠오를 만큼 인물, 시골과 서울 등을 묘사한 한국 애니메이터들의 발전된 그림체는 학창 시절부터 20대 초반을 지나치는 시간을 담은 빛바랜 사진첩처럼 추억을 선사하며 말랑말랑한 분위기를 더욱 그럴싸하게 꾸며준다. 여기에 메인 테마곡 정우의 ‘그 여름’, 선우정아의 ‘도망가자’, 브론즈 with 미노이의 ‘HARU’ 등의 노래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두 사람의 상황과 이어지는 감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며 섬세한 작화만큼이나 감성적 터치로 관객에게 여운을 남긴다.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그 여름은 그렇게 성장과 첫사랑이라는 감정을 두 소녀의 풋풋한 감정을 시작으로 20대의 이별까지 그린다. 시종일관 담담한 기조는 격렬한 감정의 파고보다 한 방울로 시작된 호숫가의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온다. 누군가에게 평범했을지도 모르고, 혹자에게는 특별했을지도 모를 추억을 떠올려보라는 듯 말이다. 깔끔하고 담백한 연출과 누군가의 마음을 훔쳐본 듯한 스토리는 매력적이지만, 슬픔을 억누르고 상대방의 행복을 빌며 애써 웃음 짓는 이별의 순간도,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만큼 중요한 것이기에 60분가량의 짧은 분량에서 후반부 이별을 맞이하는 두 사람을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여 비싸진 티켓값에 관객이 선뜻 선택할지 의문이 남는다. 멋지게 표현된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으테니 말이다.
“열여덟 여름에 처음 만났다”
갈색 눈동자를 가진 평범한 학생 '이경' 여름의 햇살을 닮은 고교 축구선수 '수이' 열여덟 살의 여름, 예기치 못한 사랑에 빠진 '이경'과 '수이'는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며 스무 살을 맞이한다. 대학에 진학한 '이경'과 달리 '수이'는 바로 사회에 뛰어들고, 낯선 행복과 사소한 오해 속에서 둘은 새로운 계절을 마주하게 된다.
예고편│Trailer
원제: The Summer│감독: 한지원│원작: 최은영 작가의 동명 단편 소설
출연진: 윤아영, 송하림 외 多
장르: 애니메이션, 드라마, 멜로/로맨스│상영 시간: 61분
국가: 대한민국│등급: 12세 관람가
제작: (주)레드독컬처하우스│배급: 판씨네마(주)
평점: 평론가 7.0
개봉일: 2023년 6월 7일
한 줄 평 : 비로소 깨닫는 첫 사랑이 남긴 계절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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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ㄷㄷㄷㄷ 이 영화가 천만 관객을 찍을수 밖에 없는 이유.보시면 압니다.[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 크리미널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배급사)의 사용 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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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메인 예고편
누가 봐도 아름다운 부부 가후쿠와 오토.
우연히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가후쿠는 이유를 묻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2년 후 히로시마의 연극제에 초청되어 작품의 연출을 하게 된 가후쿠.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를 만나게 된다. 말없이 묵묵히 가후쿠의 차를 운전하는 미사키와 오래된 습관인 아내가 녹음한 테이프를 들으며 대사를 연습하는 가후쿠. 조용한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점점 마음을 열게 되고, 서로가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눈 덮인 훗카이도에서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서로의 슬픔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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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거북
붉은 거북
미카엘 두독 두빗 감독 장편 애니메이션. 두빗 감독은 이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전에 몇 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청소부 톰', '수도승과 물고기', '아버지와 딸', '차의 향기'가 그것인데, 이 작품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두빗 감독의 공통점은 모든 작품에 대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에서 '대사'는 오히려 작품을 이해하는데 방해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대사가 필요한 작품이 있고, 대사 없이 인물의 행동과 반응만으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과거 무성 영화에서 소리 없이 서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도, 대사보다는 인물의 행동과 반응이 더 직관적이거나 상징적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사 없는 영화는 상징과 은유가 강하다. 대사로 전달할 수 없는 서사와 감정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압축하고 인물과 자연의 변화를 동기화한다. 단편 '아버지와 딸'은 이 영화 '붉은 거북'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두 작품은 단편과 장편의 길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주제를 담고 있으며, 매우 깊은 상징과 은유를 내재하고 있다.
'아버지와 딸'에서 아버지는 어린 딸을 두고 떠난다. 그가 배를 타고 떠나는 장면은 무수한 신화의 변주다. 기독교에서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노래도 있는데, 이때 요단강은 죽음의 강을 뜻하고, 요단강을 건넌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어린 딸을 두고 떠나는 것이 몹시 안타깝지만,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딸은 너무 어렸고, 자신을 두고 떠난 아버지가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으며 날마다 강가로 나온다.
딸은 자라고, 친구들을 사귀고, 연인을 만나며,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함께 아버지가 떠난 강가를 찾는다. 더 시간이 흘러 남편도 죽고, 아이들은 모두 자기의 삶을 찾아 떠나고, 딸은 다시 혼자 아버지가 떠난 자리를 찾아온다.
노인이 되어 허리가 굽은 딸은 아버지가 떠난 강이 이제는 물이 말라 모래톱이 드러난 곳을 걸어들어간다. 한참을 걸어간 딸이 발견한 건 아버지가 타고 떠났던 작은 배였다. 딸은 모래에 반쯤 잠긴 작은 배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고, 걸을 때마다 조금씩 젊어지면서 평생을 그리던 아버지를 만난다.
작품에서 보이는대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지만, 작품 전체가 하나의 메타포이며, 신화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는 어린 딸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 아마도 어머니는 더 먼저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 혼자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면서 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아버지는 '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은 서양 종교에서 남성으로 현현한다. 또한 많은 경우 '아버지'로 불리며, '아버지'와 '신'은 동격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린 딸은 어리석은 인간이다. 아버지 즉 신의 보살핌 없는 인간은 세상에서 늘 힘들고 괴롭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렇기에 더욱 아버지(신)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이 아버지(신)를 만날 수 있는 건 그가 살아 있을 때는 가능하지 않다. 그가 요단강을 건널 때, 즉 아버지가 계신 저 강(바다) 너머로 향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딸이 노인이 되어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멀리 떠난 줄 알았던 아버지(신)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붉은 거북'의 해석도 상징과 은유를 바탕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마땅하다. 이 작품은 장편이지만 서사는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가 거의 없다. 따라서 서사를 이해하고 풀어나가기 위해서라도 상징과 은유의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남자는 바다에서 표류하다 작은 무인도에 닿는다. 남자는 곧 '인간' 또는 '인류'다. 바다는 현실의 세계가 아닌, 신화와 은유의 세계다. 또는 원초의 세계, 원시의 상징이다. 바다에서 무인도에 도착한 남자는, 현실의 세계에 발을 딛는다. 남자는 '신'의 자식이지만 '신'은 아니며,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다. 남자는 원초의 바다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세상에 발을 딛지만, 현실은 고통스럽고, 외롭고, 괴롭다. 남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사방은 망망한 바다만 놓여 있을 뿐이다.
남자는 무인도에 자라고 있는 대나무를 모아 뗏목을 만든다. 그는 저 무한의 바다를 건너 자신이 처음 있던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향'을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바다에 뗏목을 띄우고 나아가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뗏목은 부서진다.
다시, 조금 더 큰 뗏목을 만들어 바다로 나가는 남자. 두번째도 뗏목이 부서진다. 저절로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물밑에서 무언가 의도적으로 뗏목을 부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남자는, 아주 큰 뗏목을 만든다. 크고 튼튼한 뗏목은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다시 바다로 나간다.
여기서 '뗏목'은 이동수단이지만, 남자가 그리는 '이상향'으로 가는 사상의 도구이기도 하다. 그 뗏목이 부서지는 건, 남자의 신념, 사상, 정신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의미다. 뗏목은 폭풍을 만나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알 수 없는 물체가 뗏목을 일부러 부수기 때문인 걸 알 수 있는데, 부서진 뗏목 주변에서 만난 동물이 '붉은 거북'이다.
붉은 거북은 무얼까. 남자가 다시 무인도로 돌아와 외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그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 - 바다 - 로 나가려 몇 번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한 뒤로 분노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바다에서 섬으로 올라오는 붉은 거북.
많은 거북 종류는 해변의 모래밭에 알을 낳아 묻는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북은 모래를 헤집고 올라와 바다를 향해 기어간다. 이 붉은 거북도 해변에 알을 낳기 위해 올라온 것은 아닐까. 이 현실적 해석은 이어지는 상징과 은유와 섞이면서 환상으로 환유한다.
남자는 해변으로 올라온 붉은 거북을 보고 분노가 폭발한다. 그 붉은 거북이 자기가 만든 뗏목을 부순 바로 '그' 붉은 거북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하지만 그 붉은 거북이 남자의 뗏목을 부순 거북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남자는 거북의 머리를 대나무로 내려치고, 거북을 뒤집어 놓는다. 복수한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남자는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한다. 붉은 거북을 살리려 바닷물을 떠 끼얹기도 하지만, 붉은 거북이 회생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붉은 거북이 죽었다고 여긴 남자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데, 갈라진 거북의 껍질 안에 젊은 여성이 누워 있었다. 남자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지만, 붉은 머리의 여성은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실제의 존재였다. 남자는 여자를 살리려고 그늘을 만들어주고, 숲에 있는 작은 연못에서 물을 떠와 여자에게 물을 먹여주고 지극하게 보살핀다. 비가 내리는 날, 여자는 긴 잠에서 깨어난다.
여자는 자기를 감싸고 있던 거북 껍질을 바다로 돌려보낸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만들고 있던 뗏목을 바다로 떠나 보낸다. 여자는 더 이상 바다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거북 껍질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고, 남자는 그 여자와 함께 살기 위해 자신도 더 이상 바다로 나가,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붉은 거북이자 붉은 머리의 여성은 남자의 또 다른 자아이면서 욕망의 현현이다. 남자(인류)는 진화를 통해 점차 문명을 갖게 되고,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며 적응해 살고 있는 존재다. 그는 늘 마음 속 깊은 곳에 원초의 고향 - 자연 - 으로 돌아가고픈 본능을 지니며 살아간다. 회귀 본능은 사라질 수 없으며 다만 현실의 욕망이 더 클 때, 본능을 누르며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남자와 여자는 함께 살아간다. 세월이 흐르고,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가 자라고, 세 사람의 삶은 변함 없이 평온하고 따뜻하다. 소소하지만 중요한 사건들, 아이가 바다에 빠졌지만, 본능적으로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그리고 알 수 없는 문명의 물건이 해변에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는 소년.
아이는 자라서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된다. 남자와 여자는 나이 들어가고, 아무 변화가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의 삶이 파괴되는 재해가 일어난다. 바다에서 해일이 몰려오고, 그들이 살던 숲이 거의 다 파괴되고 세 사람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성장한 아들은 좁고 답답한 섬에 머물러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멈춰 선 파도에 올라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새로운 문명 사회를 발견한다. 아들은 부모를 설득해 바다 건너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겠노라고 말하고, 부모는 성장한 아들을 막지 못한다. 아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섬을 떠나고, 섬에는 다시 두 사람만 남는다.
세월이 더 많이 흐르고, 두 사람은 이제 백발 노인이 된다. 삶은 변함 없지만, 시간(역사)은 남자를 죽음으로 이끈다. 남자가 숨을 거두자 여자는 남자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서서히 붉은 거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느리게 몸을 돌려 바다로 나간다.
붉은 거북은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바다로 나갔다. 남자(인류)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또는 붙들린 삶을 살았고, 육체가 소멸하자 욕망은 다시 원초의 바다, 이상향으로 돌아간다. 현실에서 자신의 존재를 살아움직이도록 추동하는 힘은 '욕망'이었다.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며,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인간은 욕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존재이면서도 그로 인해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실에서의 삶이 끝나면, 인간의 욕망도 자연스럽게 원초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불교적이다. 죽은 남자의 손등을 어루만지던 여자가 다시 붉은 거북으로 변해 바다로 돌아가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주제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긴 시간이 조금도 아깝거나 지루하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부드러운 선과 파스텔톤의 가라앉은 채색, 간결한 선과 최소한의 움직임, 작은 섬과 망망대해, 바람, 대나무 숲, 모래톱, 일렁이는 파도와 포말, 하늘을 나는 새, 붉게 물드는 노을,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풍경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세 사람의 삶은 인류의 초기, 원시적 삶을 살았던 힘들지만 순수했던 시기를 떠올린다.
좁게는 개인의 인생을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넓게는 인류, 신화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이 작품은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없지만, 말보다 더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더 근본적인 질문과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은 많은 사람이 보고 함께 이야기 하길 바라는 몇 안 되는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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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딩드레스로부터 도망가기
결혼식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신부의 웨딩드레스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그리고 결코 빠지지 않는 장면이 그 드레스가 어떤 드레스인지 설명하는 장면이다. 유명 브랜드의 신상 드레스라거나(ex.<신부들의 전쟁>), 유명한 디자이너가 주인공만을 위해 디자인한 드레스라거나(ex.<섹스 앤 더 시티>).. 제니퍼 로페즈의 신작 영화 <샷건 웨딩>에서도 어김없이 드레스가 주인공이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달시(제니퍼 로페즈 분)가 필리핀의 한 섬에서 치르는 결혼식에서 입는 드레스는 신랑 톰(조쉬 더하멜 분)의 가족에게서 전통적으로 물려 내려온 드레스다. 설정 덕분에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 이 웨딩 드레스는 달시의 행동을 영화 내내 제약하는 장애물이다. 애초에 본인이 고른 것도 아닌, 신랑의 가족에게서 받은 드레스라는 점부터 이 웨딩 드레스는 달시에게 작용할 가부장제를 비유한다. 신랑의 어머니 캐롤(제니퍼 쿨리지 분)에 따르면 이 드레스는 캐롤이 입었고, 신랑의 동생인 지니가 이어서 입었다. 달시의 웨딩드레스는 달시를 숨도 쉬기 힘들 만큼 조이면서 캐롤과 지니가 겪었고, 겪고 있으며, 겪어야 할 가족 내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대놓고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달시의 결혼식은 인질극으로 변모한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톰과 설전을 벌인 후 혼자 신부대기실에 돌아온 달시는 과자를 먹으며 어떻게든 웨딩드레스를 벗으려 애쓴다. 말 그대로 숨쉬기 힘들 만큼 조여오는 웨딩드레스의 코르셋은 달시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톰조차 이 드레스를 벗기지 못한다는 점인데, 와중에 톰은 드레스의 불편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시에게 주어질 여성으로서의 역할은 달시의 숨통을 조이지만 톰에게는 당연한 것이며, 달시가 호흡 곤란을 호소함에도 원인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눈 앞에 문자 그대로 생명의 위협이 다가와도 달시는 드레스로부터 탈출하지 못하는데 이는 톰과의 설전에서 집어던진 결혼반지와 상반된다. 달시는 쉽게 반지를 뽑아 톰에게 던지지만 톰은 가볍게 잡아내며 결국에는 그 반지를 달시에게 도로 끼우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도 달시는 드레스에서 온전히 탈출하지 못하는데, 이는 아무리 달시가 발버둥쳐도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시사하는지도 모른다.
톰과 함께 해적에게 발각된 달시는 결국 같이 손목을 묶이는 신세가 된다. 반지를 집어던지고도 톰에게서 달아나지 못한 달시는 결국 드레스를 입은 채 톰과 함께 도망다니기 시작하는데, 코믹하게 그려지지만 이 모든 것을 가부장제의 비유로 본다면 무시무시한 장면이다. 편한 바지를 입은 톰은 도망다니면서도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다. 하지만 달시의 드레스는 계속해서 찢어지고, 달시의 머리에 얹어진 비싼 가발은 달시가 달리기 어렵게 만든다. 결국 가발을 벗어던지면서도 비싸다는 이유로 버리지 못하고 톰의 주머니에 쑤셔넣는 달시는 종국에 그 가발이 구원하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톰이라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아마도 불편한 구두를 신고 있었을 달시는 어느 순간 맨발이 되고, 결국 해적에게서 부츠를 벗겨내 신지만 드레스로부터는 여전히 도망치지 못한다.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달시의 드레스는 영화 내내 제니퍼 로페즈의 신체를 눈요깃감으로 활용하는 도구로 변모하고, 카메라는 노골적으로 드레스의 가슴선 위로 로페즈를 잡아 관객으로 하여금 로페즈의 나신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부엌에서 해적의 공격을 막아내던 톰과 달시는 자신들을 묶고 있던 끈을 끊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톰의 출혈을 수반하게 되고, 이는 톰의 신체적 약화로 이어지는 대신 달시의 약점(기절)을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 가부장제의 미약한 상징으로부터 탈출하면서도 달시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신체적인 자유를 얻는 대신 혼절하여 무방비로 노출되고, 톰의 도움이 없이는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처럼 비유된다. 이전 장면에서 용감하게 짚라인을 타고 수류탄을 적기에 던져 해적을 물리친 달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을 감안하면 이 장면이 상징하는 바는 다소 노골적이다. 톰은 달시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가부장제에 속박하기 위해 해적을 물리치며, 이 과정에서 약간의 출혈 정도는 감내한다. 달시는 결국 드레스의 일부를 찢어내지만 온전히 달아나지는 못하고, 결국 톰과 함께 가부장 그 자체를 상징하는 양가 가족들과 하객을 구하기 위해 풀장으로 돌아온다.
영화 내내 달시는 단곗수가 적은 계획을, 톰은 단곗수가 많은 계획을 선호하는 양상을 보인다. 달시가 입은 웨딩드레스는 입는 데도, 벗는 데도 많은 단계를 요구하는 데다 드레스 이외에도 머리와 화장 등 수많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달시가 단순한 계획을 선호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결혼식에서조차 신랑에 비해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 신부인 달시는 나머지 계획은 단순하길 바랄 수밖에 없다. 반면 탈착이 자유로운 정장을 입은 톰은 단순해 보이는 자신의 역할이 단조롭다고 느낀다. 또한 복잡한 단계를 거쳐 가부장제 속으로 달시를 끌어들여야만 달시가 쉽게 떠나지 않을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마치 단순한 계획을 선호하던 달시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 계획의 단계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주지만, 실상은 단계가 몇이든 이미 가부장의 덫에 걸려든 달시에게 필요한 계획은 단 한 단계뿐인지도 모른다. 결혼을 포기하고 웨딩드레스를 벗어던지는 것이다.
마침내 풀장에 도달한 톰과 달시는 그 곳에서 놀랍게도 결혼의 실체를 목격한다. 이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결혼이 모두 이상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과정에서 서로를 상처입히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달시와 톰은 결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달시는 해적을 처단하는 영광마저 야구선수인 톰에게 돌린다. 아무도 보지 못할 때에는 적재적소에 수류탄을 던졌던 달시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는 수류탄을 톰이 쳐내도록 던지는 장면은 결혼제도 안에서 모든 영광은 신랑을 향할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바다 위로 가서야 톰과 달시는 그나마 동등하게 마지막 적과 겨룰 수 있게 되지만 목격자는 본인들과 망자뿐이다.
헐리웃에서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웨딩 로맨틱 코미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며 이성연애를 찬양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세지들을 읽어내는 관객이 있다면 언젠가 웨딩드레스는 폐기될지도 모른다. 다 찢고서야, 그리고 해적의 부츠를 빼앗아 신고서야 해변을 자유롭게 달리는 달시의 모습은 결혼식이라는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은 여성의 희생을 은유적으로 보여주지만 읽어내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 이미지 출처는 모두 다음 영화입니다.
*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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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성서사의 관점으로 본 〈탑건: 매버릭〉
오랜만에 속편으로 돌아오는 옛 영화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는커녕 옛 추억마저 갉아먹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탑건: 매버릭〉은 오히려 전편(〈탑건〉(1986))보다 훨씬 뛰어난 완성도와 서사를 선보인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영화적 체험’, ‘영화관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극대화하는 정말 재미있는 블록버스터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가 훌륭한 상업영화라는 것과는 별개로, 〈탑건〉과 〈탑건: 매버릭〉은 남성서사의 관점으로 살펴볼 때 다른 의미에서 흥미로워지는 영화다. 〈탑건〉은 남성판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할리우드 버전이라 할 만하다. 매버릭은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반항적 기질과 즉흥적 성격으로 동료‧조직과 자주 마찰을 빚는다. 훌륭한 전투기 조종술로 매번 의심과 회의의 눈초리를 돌파하긴 하지만, 자기 고집대로 비행을 하다가 동료 파일럿 구스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자 큰 충격을 받기도 한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같은 고전 작품이든 할리우든 영화든, 통제되지 않는 말썽쟁이 캐릭터가 여성인 경우 결말은 늘 비슷하다. 완전히 길들여지거나, 세계와 불화하여 파국을 맞이하거나. 하지만 같은 말썽쟁이임에도 성별만 다른 매버릭은 그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는다. 매버릭은 비행을 멈추기는커녕 조직으로부터 네 잘못이 아니니 비행을 멈추지 말라는 독려를 받는다. 결말에 가서는 내내 라이벌 구도에 있던 또 다른 남성 인물에게 인정받기까지 한다. 완벽한 ‘내부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주인공의 콜 네임이 영단어 ‘maverick’이라는 데서부터 예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개성이 강한[독립적인] 사람’이라는 뜻의 이 단어를 이름으로 쓰는 매버릭에게는 ‘말괄량이’로 불리는 여성들과는 처음부터 다른 결말이 예정되어 있던 것이다.
〈탑건〉이 여성과는 다른 길을 걷는 남성 말괄량이의 사회 진입기를 다룬다면, 〈탑건: 매버릭〉은 어느새 은퇴할 나이가 된 매버릭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이를 유산의 형태로 후대에게 상속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영화의 기본 설정에서부터 드러난다. 매버릭과 그의 팀은 인간 파일럿보다 무인 조종이 가능한 전투기를 더 선호하는 해군 제독 때문에 위기를 맞는다. 매버릭이 예산을 뺏기지 않고 계속 비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
그에게 주어진 미션은 후배 파일럿 교육이다. 적이 관리하는 우라늄 농축 시설을 폭격할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젊은 파일럿들을 교육하라는 임무가 그에게 주어진다. 〈탑건〉의 속편이 나온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짐작했듯, 매버릭이 교육해야 하는 사람 중에는 그와 함께 비행하다 목숨을 잃은 구스의 아들 루스터도 있다. 루스터는 절차적 문제는 없었더라도 매버릭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다고 생각하기에 내내 매버릭과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영화는 둘이 어떻게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며 화해하는지를 좇는다. 결혼하지 않은 매버릭이 아버지를 잃은 루스터와 유사 가족을 형성하여 ‘아버지-아들’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한때 말썽쟁이였던 한 남자가 어떻게 조국의 위대한 자산이자 누군가의 훌륭한 아버지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를 증명해내는 것이다. 톰 크루즈의 열정과 영화의 완성도에는 기꺼이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딸을 남기지 못하고 사그라진 말괄량이 여성들을 생각하면 어딘가 씁쓸해진다.
〈탑건: 매버릭〉에서 흥미로운 또 다른 지점은 주인공들이 폭격해야 하는 적이 누구인지에 관한 구체적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적이 NATO 규정을 위반해 위협이 된다는 언급이 스치듯 나올 뿐이다. 적군의 인종‧국적을 추측할 만한 단서도 없다. 적이 강력하고 악할수록 주인공의 ‘선함’이 부각된다는 점에서 이는 꽤 흥미로운 지점인데, 영화는 화려한 볼거리와 탄탄한 연출, 무엇보다 매버릭과 루스터의 ‘아버지-아들 되기’ 서사에 집중함으로써 적군 얼굴의 빈자리를 채운다. 작전에 성공한 후 기지로 되돌아갈 때, 매버릭과 루스터가 설원 위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진심을 확인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요컨대 ‘탑건’ 시리즈는 다소 길어 보이는 35년의 시리즈 공백을 오히려 영화적 자원으로 활용하여 관객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시리즈의 공백을 한 남성의 생애주기에 맞춰 마치 매버릭이 은퇴할 나이가 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남성서사를 상업 블록버스터와 버무린 것이다. 수십 년을 거슬러 속편을 제작할 탄탄한 역사를 지닌 할리우드의 필모그래피, 그리고 말썽쟁이였으나 끝내 모범시민으로 거듭난 남성 캐릭터는 부러움과 씁쓸함을 동시에 자아낸다. 언젠가 도래할 비非 남성 캐릭터의 귀환 또한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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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우리는 극장에 가야 하는가!
과거 F1 유망주였다가 불의의 사고 이후 프리랜서 드라이버가 된 소니(브래드 피트). 24시간 데이토나 경주 등 운전만 할 수 있다면 어디든 가는, 그리고 경기가 끝나면 홀연히 떠난다. 미련 없이. 그러던 어느 날 과거 콤비를 이뤘던 루벤(하비에르 바르뎀)이 찾아온다. 이유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레이싱팀 APXGP에 영입 제안을 하기 위해서다. 실력도 바닥, 순위도 바닥, 자산도 바닥인 상황에서 루벤은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소니에게 제안한 것. 이후 그는 경기가 펼쳐질 영국으로 넘어가 이 약체팀에 합류한다. 하지만, 꼴찌는 이유가 있는 법. 머신에도, 팀에도 그리고 함께 레이스를 뛰어야 하는 스타 드라이버 조슈아(댐슨 이드리스)에도 문제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소니는 이 팀을 구원하고, 진정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노장은 죽지 않는다. 브래드 피트, 제리 브룩하이머, 한스 짐머 등 왕년의 할리우드를 주름잡았던 이들이 뭉쳤다. 과거를 풍미했던 이들의 장점이 오롯이 담긴 <F1 더 무비>는 과거의 향취가 물씬 풍긴다. 마치 이들이 과거 영광을 얻었던 시기의 에너지와 노하우를 연료 삼아 계속해서 질주해 나가는 모양새다. 여기에 스탠퍼드 대학교 기계공학과 출신으로 작품마다 메탈 사랑을 보여주는 조셉 코신스키의 연출은 계속해서 작품을 피트인 시켜 추진력을 갖게 한다. 그래봤자 뻔한 이야기라 치부할 수 있지만, 영화는 그 뻔함이 엔진을 가열시키는 주 동력이다. 알고 봐도 빠져드는 그 맛. 이제는 그리워 음미하고 싶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그 맛을 상기시켜 준다는 것만으로 영화는 그 의미가 있다. 영화 산업이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시점에서.
<F1 더 무비>의 스토리는 특별할 게 없다. 과거 인생의 쓴맛을 본 후, 사라진 주인공이 자신의 못다 한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서킷에서 달리는 내용이다. <탑건: 매버릭>에서 매버릭(톰 크루즈)을 소환했던 것처럼, 감독은 왕년에 잘 나간 기대주 소니를 데려온다. 나이는 많지만 서킷에서 싸울 줄 알고, 어떻게 하면 개인이 아닌 팀이 승점을 따낼 수 있을지에 도가 튼 승부사. 문제는 그가 늙었다는 점이다. 구단주와 비슷한 나이이니 조슈아는 물론, 팀원 모두 놀라 자빠지는 건 이해가 간다. 마치 월드컵 공격수가 부재해 황선홍 감독을 그라운드로 복귀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 (감독님 죄송합니다. 대전하나시티즌 사랑합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최하위이자 오합지졸 팀을 하나로 묶는다. 경기 전 팀원들과 함께 런닝을 하는 등 올드한 방법을 통해 원 팀을 만들고, 서킷 위에서 호흡을 맞추는 조슈아와도 의견 다툼이 일어나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거친 조율을 하면서 그를 한단계 성장시킨다. 그리고 그토록 원하던 자신의 꿈도 이루게 된다.
<탑건> <나쁜 녀석들> <더 록> <아마겟돈> 등 만들었다 하면 성공했던(뭐 지금도 유지되지만) 제리 브룩하이머 특유의 단순하지만 직관적인 플롯을 이 작품에도 사용한다. 특히 노하우가 많은 중년 남자 캐릭터와 신참 캐릭터가 한 팀을 이뤄 사건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더 록> <아마겟돈>)는 소니와 조슈아를 통해 재현된다. 제리 브룩하이머는 마치 소니처럼 스스로 세운 성공 공식을 또 한 번 영화에 주입한다.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한 영화를 많이 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스토리의 빈틈이 많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인데, 이를 메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한스 짐머의 음악이다. F1 머신 엔진처럼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음악으로 틈을 메우고, 이를 동력 삼아 서킷에서 벌어지는 박진감 넘치는 장면들을 살리는 데 주력한다. 한스 짐머 또한 자신의 노하우를 충분히 발휘해서 이 영화에 멋진 음악을 선사한다.
역시 중요한 건 비주얼이다. 왜 이 작품을 극장에서 봐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알리기 위해 기획된 영화라는 생각이 계속 들 정도로 그 매력은 서킷에서 펼쳐진다. F1 머신의 엔진 굉음, 서킷을 달릴 때 들리는 타이어 마찰음, 승리를 위해 중력에 굴복하지 않고 운전을 이어 나가는 드라이버들의 괴성과 표정 등은 그 자체로 시청각을 압도한다.
조셉 코신스키 감독이 가장 크게 둔 주안점은 역시나 리얼리티다. 실제 서킷에서 달리는 F1 머신을 촬영한 그의 뚝심은 브래드 피트와 댐슨 이드리스가 직접 운전대를 잡게 했다. 더불어 실제 F1팀이 제작에 참여해 진짜 레이스카를 사용했다고. 사실감 넘치는 영상을 얻기 위해 초소형 고성능 카메라를 차량 내부에 장착해 관객이 실제로 탑승한 것 같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 덕분에 질주하면서 헬멧 사이로 보이는 이들의 일그러지는 얼굴과 고통을 오롯이 만끽할 수 있다.
이런 영상미를 통해 조셉 코신스키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원팀이다. 개인이 아닌 팀으로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가고 끝내 이루는 이 진부하고도 가슴 벅찬 이야기는 또 한 번 우리에게 큰 감동을 안긴다.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브래드 피트에게 기인한다. 환갑을 넘은 나이에도 이렇게 섹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영화 속 그의 모습은 오랫동안 스크린에서 그를 봐왔던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경의를 표한다. 극 중 소니는 <머니볼>의 빌린 빈 단장과 오버랩 되는 부분이 있다. 자신이 진짜 좋아했던 일에서 실패를 맛보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하지만 꼭 돌아가서 매듭지어야 하는 곳(서킷, 야구장)으로 가서 끝내 성공을 거두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빌리 빈 보다는 소니가 더 섹시하고 마초적이다.
중요한 건 소니의 철학이다. 인생이 도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똑같은 자리에 앉아 카드를 받고 배팅하는 것처럼, 그는 죽음을 담보로 매번 F1 머신에 몸을 싣고 살아남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 그가 이토록 인생을 향해 돌진하는 이유는 과거를 바꾸고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서이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서킷에서 달리고 싶다는 그 말. 다소 오글거리는 이 대사를 그가 하면 멋짐이 폭발한다. 그리고 낭만이 느껴진다. 1990년대 이 낭만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보여줬던 그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이를 길어 올려 다시 관객에게 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멋지다. 우승컵을 들기보단, 상금을 갖기보단,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자동차로 도전하는 소니의 모습은 어쩌면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배우를 넘어 제작자로서도 역할을 다하는 그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마치 소니가 브래드 피트이고, 브래드 피트가 소니인 것처럼 말이다. 우연의 일치일지 몰라도 그의 제작사 플랜B가 제작에 참여했다.
<포드 V 페라리>보단 무게감이 덜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관객을 약 2시간 동안 좌석과 한 몸이 되게 만들어 엔딩크레딧까지 보게 만든다. 스토리가 뻔하든, 캐릭터가 평면적이라도 해도 상관없다. 결국 이 영화는 관객을 극장으로 오게끔 한 일차적 목적을 완벽하게 수행하기에는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잔뼈 굵은 이들은 절대 죽지 않았다. 힘든 몸을 이끌고 다시 서킷에 오르는 소니처럼 말이다.덧붙이는 말: F1을 몰라도 이 영화는 크게 상관없다. 알고 보면 더 좋겠지만, 모르고 봐도 진입장벽이 높지 않다. 아니 아예 없다고 본다. 스포츠 드라마이면서 우정, 속죄, 팀워크 등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하는 중요한 것들을 더 집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F1 경기가 궁금하다면 그때 가서 공부해도 늦지 않다.
사진 출처: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평점: 3.5 / 5.0
관람평: 고민 말고 올라 타자! 빵형님이 알아서 해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