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0932023-08-23 15:06:18
영화 유체이탈
12시간마다 몸이 바뀐다.
12시간마다 몸이 바뀐다면 어떨까요?
여기, 주인공은 자신이 모르는 몸으로 변하면서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신박한 스토리 소재와 화려한 액션이 돋보였던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영화 유체이탈자
그럼, 영화 유체이탈자 리뷰 시작해 볼게요!
기본 정보
장르 : 액션, 스릴러, 미스터리, 판타지, 느와르, 범죄, 드라마
감독 / 각본 : 윤재근
출연진 : 윤계상, 박용우, 임지연
개봉일 : 2021년 11월 24일
평점 : 7.50
스트리밍 : tvN , NETFLIX, 쿠팡
기획 의도
"누가 진짜 나인지 모르겠어요"
교통사고 현장에서 눈을 뜬 한 남자.
거울에 비친 낯선 얼굴과 이름,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 바뀌었어, 낮에도 바뀌더니 밤에도 또"
잠시 후, 또 다른 사람의 몸에서 깨어난 남자.
그는 12시간마다 몸이 바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기 시작한다.
그가 12시간마다 몸이 바뀌었던 사람들,
가는 곳마다 나타나는 의문의 여자까지,
그리고, 이들이 쫓고 있는 한 남자,
진짜 나를 찾기 위한 본능적 액션이 시작된다.
여담
영화 유체이탈자는 초반 신선한 설정을 잘 나타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이다.
영화는 원래 2020년 개봉 예정이었으나,
1년 후인 2021년도에 개봉되었다.
후기 및 결말
영화 유체이탈자 결말
강인아(윤계상)은 메인 빌런인 박실장(박용우)의
거래 정황을 포착해 검거 예정이었으나,
이 과정에서 정체불명의 약이 터지면서
이안의 몸에 들어가게 되면서 사건이 발생된다.
여기저기 몸이 바뀐 이안의 진짜 몸은
병원에 있었고, 백상사가 숨을 거두게 되자
그의 영혼이 진짜 몸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 유체이탈자의 초반 이야기 스토리와
짜임새와 연출 능력은 아주 좋았지만,
갈수록 아쉬운 스토리가 맘에 걸린다.
연진이로 아직도 핫한 인물
임지연의 또다른 연기력을 볼 수 있는 영화
윤계상의 1인 7역이라고 해도 아쉬울 게 없었던
영화 유체이탈자, 킬링타임 영화로 딱 좋은
영화라 추천드리고 싶다.
한줄평 : 화려한 액션과 연출력이 매력적인 영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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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죽이는 나의 사랑, <피터 본 칸트>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피터 본 칸트 Peter von Kant, 2022
프랑스, 드라마, 85분
감독: 프랑수아 오종
나를 죽이는 나의 사랑, <피터 본 칸트>
사랑은 난감하다. 입으로 소리 내어 발음하면 달콤한데,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땐 한없이 어렵다. 솔직한 만큼 씁쓸하다. 좋으면서도 아프고, 모르는 척해도 다 알 것만 같고, 낯설다가도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해진다. 영원한 사랑, 불멸의 사랑, 조건 없는 사랑, 헌신적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 사람들은 틈만 나면 사랑에 조건을 붙인다. 그리고 누구나 사랑을 원한다. 사랑은 그 힘을 받아 스스로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 변화해 인간의 외면은 물론 내면까지 바꿔 놓는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건,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어 동시에 한계 없이 존재하는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이란 사실이다. 사랑은 개인의 영역에 들어가는 순간 권력을 과시하고 무한한 힘을 발휘한다. 특별한 조건? 필요 없다, 나만 좋으면 된다. 그다음 당신도 좋다면, 난감해도 사랑이란 걸 할 수 있다.
결과는 각자 감당하면 되는 일이고.
<피터 본 칸트>엔 사랑이 쏟아진다. 말로, 눈으로, 손짓과 발짓을 포함한 몸짓은 물론이고 인물들의 침묵마저도 전부 사랑을 얘기한다. 무엇이 사랑이고, 사랑이 아닌지 구분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스토리가 품은 반전도 인물이 숨긴 배신도 아니다. 천재 감독, 피터의 파격적인 짝사랑과 절절한 외사랑, 그리고 모두를 죽이고 다시 피어날 끝사랑, 그야말로 '사랑'이다.
아주 사적인 피터만의 사랑, 영화 제목이 '피터 본 칸트'인 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얘기다.
영화 <피터 본 칸트> (스틸컷, 다음)
쓰레기를 반복적으로 찍어내기 바쁜 할리우드(?)와는 다른 차원의 예술 작품을 만든다고 자부하는 영화감독 피터는 거대한 창이 세 개나 달린 저택에서 어시스턴트 칼을 두고 새 작품을 위해 대본을 집필 중이다. 하지만 그는 대본 집필에 열성적이지 않다. 자신의 성공을 질투해 끝나버린 사랑, 즉 이별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한층 예민해져 뭐든 듣고 보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칼에게 더 날카롭고 무례하게 이래라저래라 한다. 칼은 자신의 고용주를 남몰래 사랑한다. 피터를 향해 있는 칼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피터에겐 그냥 눈알 따위로 보이는 게 슬플 뿐이다. 해서 칼은 매일 무표정한 얼굴로 피터의 손과 발이 되어 집 안을 누빈다.
한때 자신의 뮤즈였던 시도니가 찾아오자 피터는 대본에 녹여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사랑에 대한 본인의 철학과 상념을 열정적으로 토해낸다.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술과 담배, 마약으로 본격적인 이야기 장을 만들고 각자의 사랑을 주고받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너무나 개인적인 견해이자, 누군가의 생각으로 모두의 가슴에 와닿는 명언이 아니다. 딱 내뱉는 순간 흩어지는 물거품이다. 영양가 있고 포만감도 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그들이 내쉬는 담배 연기만큼이나 가볍고 허하다. 마치 헛배가 부른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언제나 나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옳으며 진리라고 강조한다.
영화 <피터 본 칸트> (스틸컷, 다음)
자신감 넘치는 시도니는 자부심까지 넘치는 피터에게 무명 배우 아미르를 소개한다. 방금 전까지 사랑을 험담했던 피터는 아미르를 보자 사랑에 빠진다. 이때의 카메라 동선이 흥미롭다. 피터와 아미르가 처음 만나 악수를 하는 장면이 정말 빠르게 지나가는데, 그 찰나의 순간 피터의 눈이 반짝인다. <피터 본 칸트>는 아미르와 피터가 사랑에 빠지는 지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동선도 매우 간결하고, 무척 간단하다. 의미를 두지 않는 컷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오래 음미하며 볼 컷도 아닌 것이다. 피터와 아미르의 사랑이 모두가 예상한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걸 미리 보여준 정도랄까.
피터는 자신이 가진 부와 권력, 자존심, 자부심까지 전부 이용해 아미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감독과 연인의 위치를 능숙하게 바꿔가며 적재적소에 아미르에게 꿈과 사랑을 모두 잡을 수 있다고 유혹한다. 나의 차기작은 아름다운 너를 위한 영화이며 우린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정복도 할 수 있기에 반드시 함께 해야한다고 말한다. 무명 배우 아미르는 피터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아미르에게 요구되는 건 사랑뿐이고, 완벽하게도 그는 피터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었다. 그에게 사랑은 꿈을 위한 조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혼했고 아내가 호주에 살지만, 아직 세상에 자기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그에겐 가정은 우선순위가 아니었을뿐더러 최우선의 고민거리도 될 수 없었다. 반면 피터에게 아미르의 사랑은 삶의 연료로 필요했다. 전부와 일부의 줄다리기, 피터와 아미르의 사랑은 처음부터 다른 선상에서 출발해, 서로 다른 길 위를 달린다.
영화 <피터 본 칸트> (스틸컷, 다음)
먼저 식어버린 건 아미르다. 호텔 생활을 하는 아미르를 자기 집에 살게 한 피터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을이 된다. 아미르는 별다른 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당연하게 갑이 됐다. 피터가 먼저 을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미르는 피터의 헌신적인 사랑과 자신의 쌓여가는 업적으로 인해 소위 말해 버릇없는 애가 됐다. 자신이 모든 걸 조정할 수 있고, 뭐든 해도 괜찮다고 믿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귀중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이 된 것이다. 그와 같이 속물적이고 세속적이지만, 그보다 더한 것을 바라는 피터는 애원과 원망을 섞어가며 다시 아미르의 마음을 잡으려 한다.
아내를 만나러 가겠다는 아미르와 추잡스러운 몸싸움까지 벌인 피터는 자기 돈까지 건네며 흔한 연인의 사랑싸움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 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한다. 다시 그에게 이별, 아니 버림 이후의 시간이 온 것이다. 피터의 성공을 질투해 헤어지게 된 전 연인의 이야기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피터는 늘 그런 유형의 사랑을 해 온 남자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상대의 일부만 갖는 그런 사랑. 그것이 자신의 예술을 돋보이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줬을 것이다. 결국 피터는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집에 놀러 온 딸과 엄마 그리고 친구 시도니에게 분풀이하기 시작한다. 딸의 사랑을 콧방귀 뀌며 비웃고, 돈을 빨아먹는 기생충, 노력이란 걸 해본 적 없는 흉측한 늙다리 창녀, 할리우드 쓰레기나 찍는 배우라 욕하며 마지막까지 아미르의 전화를 기다리다 쓰러진다.
영화 <피터 본 칸트> (스틸컷, 다음)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사람이 된 채 차라리 죽고 싶다며 오열하는 피터를 진정시키는 건 그의 엄마다. 사랑에 가슴 아파하는 아들을 가엽게 여기는 그녀의 손길에 피터는 아이처럼 안겨 운다. 사랑은 늘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엄마의 조언에 자신이 그동안 누리고 취했던 사랑이 잘못됐음을 시인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조건 없는 사랑이라면서 소유를 위한 사랑에서 벗어나겠다고 다짐까지 한다. 이후 그토록 기다렸던 아미르의 전화를, 감정이 배제된 냉철한 전 연인으로서 받는다. 꼭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엔 배움이 없다. 배움을 가장한 태움이 있을 뿐이다. 피터는 처음부터 자기 사랑에 대해 타인의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불신도 의심도 필요치 않았다. 그에게 사랑이란 자기 작품과 같고, 가장 열정적이며 아름다운 불꽃이다. 언제든 발화되어 주변의 것을 다 태우고 끝나는 삶이다. 따라서 피터에게 필요한 건 다른 불꽃이다. 그는 조건 없는 사랑을 원하는 척, 그 사랑을 줄 수 있는 척 칼에게 향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본 칼에게 진짜 사랑을 고백하는 것처럼 너에 대해 말해달라고 속삭인다. 맹목적인 숭배를 받기 위해 아미르에게, 그 전의 아미르와 같았던 이들에게 썼던 방식을 또 답습하는 것이다.
칼은 대답으로 그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그리곤 지금까지 살았고 앞으로도 평생 살 것만 같았던 피터의 집에서 제 발로 떠난다. 미친 고용주를 견디지 못한 걸까? 드디어 한계가 온 걸까? 아니다, 칼이 원한 사랑이 아니었을 뿐이다. 피터의 엄마가 말한 사랑처럼, 피터의 딸이 처음 남자 친구에게 느끼는 사랑처럼, 본인만이 설명할 수 있기에 가장 솔직하게 원할 수 있는 '나'의 사랑과 다르기 때문이다.
감히 예상하건대, 칼이 원한 사랑엔 분명 '동등'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 <피터 본 칸트>(스틸컷, 다음)
텅 빈 집 안에서 홀로 아미르의 테스트 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피터, 그는 자신을 죽이는 사랑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다. 몇 번이고 스스로를 죽이더라도, 자기가 바라는 아름다운 사랑을 또 꿈꿀 것이 분명하다.
그게 피터이자, <피터 본 칸트>다.
관객은 칼의 시선으로 피터를 열심히 관찰하다 나중에서야 제삼자로 그에게서 완전히 멀어진다. 아미르와 시도니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가까워졌다가, 찰나의 순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리를 둔다. 지독한 일인칭 이야기는 사실 수많은 예시 중 하나에 불과하고, 칼의 이탈에 명백한 이유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상 피터의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피터, 아미르, 시도니는 사랑에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야만 삶이 진행되는 인물들이다.)
"모든 이가 사랑하는 것을 죽이네."
시도니의 노래 중 한 구절이며, <피터 본 칸트> 속 세 사람의 사랑 해석본이다.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보자면, '사랑하고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은 반드시 사랑하는 것을 죽이면서 사랑을 한다.' 정도가 되겠다
이야기를 이끄는 압도적인 분위기와 빨려들 수밖에 없는 음악이 본 영화의 매력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고 시도니를 보여주는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피터에게 전화하라고 시킨 시도니의 모습은 <피터 본 칸트>가 유일하게 가져간 긴장감이자, 뼈 있는 반전이며 풍자의 대상을 끝까지, 정확하게 겨눈 한 방이다.
p.s <피터 본 칸트>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1972)를 오마주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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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은 죽도록 살고 싶었어요
한국 관객으로서 숱하게 봐온 봉준호 필모그래피의 장면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영화. <설국열차>로 이미 놀라움을 안긴 바 있지만 더 커다란 스케일, 행성 단위의 SF로 돌아온 봉준호 감독의 <미키17>에서는 순간 번뜩이는 장면 가운데서 봉준호 감독이 쌓아온 노하우의 정수가 돋보인다. 할리우드식 SF의 흥행 구도를 반영하는 플롯과 봉준호 감독의 개성이 섞여 ‘새로운 익숙함’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야심차게 시작했다가 망해버린 마카롱 가게, 이후 사채업자에게 당할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 지구를 떠나 개척지 ‘니플하임’ 행성으로 향한 미키. 그러나 번듯한 기술도 자격도 없는 그가 지원한 ‘익스펜더블’은 그가 두려워 도망친 죽음을 숱하게 반복하는 직업이었다.
뭐 어때, 다시 복제될 거잖아? 말 그대로 실험용 쥐가 되어 구르고 또 구르는 미키. 방사능, 유독 가스, 바이러스 실험에 이르기까지 복제인간이라는 명목 하나로 그는 죽고 또 죽는다. 니플하임 행성에서 단 한 명 있는 익스펜더블인 미키는 그 행성 가운데 유일하지만 누구보다 유일하지 않은 존재다.
삶이 고귀하고 살인이 금기시되는 이유는 누구나 한 번 꺼지면 되살릴 수 없는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삶의 연속성을 끊어버리는 살인 행위는 그 자체로 끔찍한 죄악이다. 그러나 죽음에서 벗어난 삶의 연속성을 가지는 자가 바로 익스펜더블이다. 그들은 고통을 느끼고 죽음을 맞이하지만 기억은 이어져 새로운 몸으로 프린트된다. 마치 인형을 찍어내는 공장처럼 프린트되는 미키. 그는 언제든 죽어도 상관없는 소모품이자 대체품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멀티플 사건은 반복되는 죽음에 나름 적응하며 체념하던 미키에게 다시금 살고자 하는 욕망을 일깨워준다. 죽은 목숨인 줄 알았으나 원주 생명체 ‘크리퍼’의 도움을 받아 생존한 미키. 그 사실을 모른 채 본부에서 18번째 미키가 복제되며 미키가 두 명이 되는 멀티플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또 다른 내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면서 미키는 ‘연속하는 나’가 아닌 ‘분리된 나’로서 변화된 속성을 띠게 된다. 즉 미키17 그 다음 미키18이 아닌, 미키17과 미키18이 된 것. 이들은 같은 기억을 공유하면서도 다른 태도와 행동을 보인다. 그러자 그들의 죽음은 단순한 대체품의 죽음이 아닌 고유한 한 사람으로서의 죽음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한다. 평소 같았다면 실험 약의 부작용 다음에는 그냥 죽여 달라고 했을 미키이지만, 숨을 헐떡이며 죽기 싫다고 외친다. 고유한 개체로서의 존엄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지도자 마샬은 누구보다도 그 대체품을 유용하게 소모하는 순혈주의자다. 그가 개척하고 싶어 하는 새로운 이상향은 과학 기술을 활용해 태어난 불량 식품 같은 인간이 아닌 순수한 ‘번식’을 통해 태어나는 인간이다. 저녁 식사에서 여성 캐릭터 카이를 향해 건강한 가임기 여성이라며 예찬하는 마샬 부부. 카이는 묻는다, 자신이 자궁으로 보이냐고.
결국 지도자 마샬 부부의 눈에 그들은 모두 먹음직스러운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한 번 음미한 후 먹어 치운 뒤 또다시 구매하면 그만일 뿐인 소스인 것이다. 익스펜더블의 목숨은 비싼 카페트보다 하찮고, 새로운 행성에서 인류의 정착을 위해 가임기 여성은 번식을 위해 힘써야 할 자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온갖 과학의 수혜는 누리면서도 그 과학으로 탄생한 복제인간은 혐오하고 순혈 인간을 유용한 장기로만 칭송하는 그들 지도자들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명백한 적대 세력이자 가장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난다.
반면 니플하임 행성에 거주하는 생명체 ‘크리퍼’는 작은 구성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로,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인간 공동체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집단이다. 극중 쉽게 쓰다 버려지는 미키와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작은 베이비 크리퍼 하나를 위해 온 구성원 전체가 그를 구하기 위해 응답한다. 인간의 이기로 인해 인질로 잡힌 베이비 크리퍼, 그리고 그 울음 소리에 하나로 모여 응집하는 크리퍼 무리는 자연스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속 오무의 행진을 연상케 하며 외형 또한 흡사하다.
어떤 존재든 소모품으로 취급하며 짧은 생각으로 폭정을 일삼다 가장 하찮게 여기던 존재인 익스펜더블에게 죽임을 당하는 마샬, 그리고 작은 생명 하나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구해낸 원주 생명체 크리퍼. 그들 집단의 대립과 결말은 명확하고 알기 쉽게 두 갈림길로 나뉜다.
씁쓸한 뒷맛을 남기던 기존 필모그래피의 결말을 기대했다면 다소 의외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모든 것이 내 탓이오 하고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사실은 죽기 싫다고, 살고 싶다고 말하는 미키가 행복해질 기회를 얻는 꽉 닫힌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인력과 자본이 투입된 할리우드 영화에서 불가피하게 고려해야 했을 신중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키의 악몽 속 경고의 메시지를 통해 이 영화의 결말은 비로소 완성된다. 악몽 속 미키18의 희생이 무색하게 새롭게 프린트되고 있는 마샬. 영화는 주인공의 행복한 결말과 함께 엄중한 경고를 들이민다. 과학 기술과 마비된 윤리의식 아래 마샬과 같은 지도자는 프린트로 찍어내듯 지금도, 그다음에도 동일한 모습으로 반복해 출현할지도 모른다고. 공교롭게 영화를 관람하면서도 현실의 많은 사회적 이슈가 오버랩되는 만큼, <미키17>이 SF적 상상력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다름 아닌 휴머니즘이자 사회를 향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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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탈리스트 | 위로, 또 앞으로 나아가는 건축가의 삶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 사촌 '아틸라'(알레산드로 니볼라)의 집에서 지내며 미국 사회에 적응하려던 찰나, 그는 아틸라의 아내 '오드리'(에마 레어드)의 모함에 빠져 쫓겨난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냉혹한 현실을 견뎌내던 라즐로. 그런 그에게 아메리칸 드림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사업가 ‘해리슨’(가이 피어스)이 야심 찬 건축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
건축가로서 재기할 기회를 잡은 라즐로는 열성적으로 프로젝트에 임하고, 빛의 경계를 넘나들며 브루탈리즘 양식이 돋보이는 대담하고 혁신적인 건물 설계안을 완성한다. 이에 더해 유럽에 있던 아내 '에르제벳'(펄리시티 존스)과 '조피아'(래피 캐시디)도 미국으로 건너올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자 라즐로는 찬란한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해리슨의 감시와 압박, 주변의 비난이 거세지면서 라즐로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한다.
환상과 허상을 딛고 우뚝 서다
브래디 코베 감독의 <브루탈리스트>는 개봉 전부터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제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과 국제비평가연맹상을 받고,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여우주연상을 포함해 10개 부문 후보로 선정됐으니까. 영화 내적으로는 근래 보기 드문 15분 간의 인터미션을 포함한 3시간 34분 51초짜리 장편 영화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키웠다.
영화 외적인 뉴스도 <브루탈리스트>를 향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제작 과정에서 AI를 활용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 주연 배우인 에이드리언 브로디와 펠리시티 존스의 헝가리어 발음을 보정하는 데는 AI 음성 변조 기술을 사용됐고, 건축 도면 생성에도 AI 기술이 활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AI 기술로 인해 촉발된 미국의 작가 조합 파업과 배우 조합 파업 여파가 남아있는 가운데 논쟁에 불을 붙이는 뉴스였다.
하지만 <브루탈리스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바로 제목 그 자체였다. 215분의 러닝타임이 '브루탈리즘'이라는 과거의 건축 사조에 어떤 의미와 서사를 부여하고 쌓을지 의문이었으니까. <브루탈리스트>는 위로, 또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한 건축가의 품위 있는 서사시를 통해 호기심을 완벽히 충족시켜 준다.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과 허상의 폐부를 찌르는 고전을 펼쳐 보이기 때문. 단지 약간의 과욕이 옥에 티일 따름이다.
위로, 또 앞으로 나아가기
<브루탈리스트>는 프롤로그, 제1막, 인터미션, 제2막, 에필로그로 나뉘어 있다. 그중 프롤로그와 제1막 '도착의 수수께끼'는 라즐로가 미국에 정착하는 시기를 다룬다. 전반부는 이미지 두 개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이미지다. 뉴욕에 도착한 배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보는 라즐로. 이때 카메라는 그의 시점에서, 아래에서 위로 자유의 여신상을 비춘다. 자연히 여신상은 거꾸로 뒤집혀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오프닝 크레디트를 장식하는 직진의 이미지다. 라즐로는 버스를 타고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로 향한다. 이때 카메라는 버스 안에서 밖을 비추되, 버스 전면부로 보이는 풍경을 고정적으로 보여준다. 그 덕분에 목적지를 향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이미지와 움직임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이 둘을 합치면 제1막의 서사,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상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자는 미국에 건너온 이민자들이 갈망하는 구원을 상징한다. 나치의 압제에 시달리다가 자유의 땅에서 새출발할 수 있다는 희망을 눌러 담은 셈이다. 이 이미지는 여러 형태로 변형된다. 해리슨의 의뢰로 라즐로는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 설계를 맡는다. 이때 그는 유독 높이에 집착한다. 그에게 하늘에 가까워지는 것은 그 자체로 구원에 다가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처음 본 미국 하늘에서 자유의 여신을 만났듯이.
후자는 이민자의 진취성을 상징한다. 희망이 현실로 이뤄지려면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 라즐로가 사촌에게 배신당한 후에도 기어코 건축가로서 재기한 것처럼. 이는 라즐로가 설계한 커뮤니티 센터 구조와도 맞닿아 있다. 이 건물은 그의 수용소 생활을 상징하는 작은 방들 안에서 높은 천장을 올려다볼 때 하늘이 드러나는 구조가 핵심이다. 과거를 주춧돌 삼아 현재로 나아가고, 그 위에서 미래를 꿈꾸는 직진과 상승의 이미지로 가득한 셈이다.
인터미션이 만든 고전
이처럼 아메리칸 드림을 현실에서 이룰 듯한 제1막의 감흥은 인터미션 직전에 정점에 달한다. 라즐로는 모두에게 잊혔던 자기 커리어와 명성을 되찾고, 자신을 신뢰하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기는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고, 유럽에서 떨어져 지내던 아내 에르제벳과 조카딸 조피아도 미국으로 데려올 연줄까지 갖춘다. 삶이 원래 궤도로 돌아와 비상하는 바로 그 순간 인터미션이 주어지기에 그의 감격과 환희는 긴 여운을 남길 수 있다.
인터미션 동안 라즐로의 결혼식 사진을 보여주는 연출도 여운을 극대화한다. 이 사진은 아내와 조카딸의 이민 작업에 필요한 서류다. 라즐로의 아메리칸 드림을 완성할 가족이라는 마지막 조각인 셈이다. 그래서 인터미션은 감질난다. 거의 현실이 된 그의 아메리칸 드림이 보여줄 제2막이 궁금하니까. 이는 절반만 봐도 <브루탈리스트>를 고전으로 확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인물의 삶에 푹 빠지는 '시네마'다운 경험은 흔치 않기 때문.
다른 의미로도 인터미션은 인상적이다. 인터미션 덕분에 라즐로의 감정선은 제1막의 끝과 제2막의 시작에서 극명히 대조되며, 아메리칸 드림의 그림자를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밝은 미래를 확신한 라즐로. 하지만 아내와 조카딸을 기차역에서 재회한 순간 그의 기대는 부서진다. 하체가 마비된 아내와 실어증에 걸린 조카딸은 그가 상상한 가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 그가 애써 외면하던 현실이 가족의 모습으로 등장한 셈이다.
환상 뒤에 숨은 허상
제2막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은 라즐로가 목도한 현실,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구체화한다. 허상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이중성이다. 미국인은 이민자를 환영하는 듯하나, 그들이 주류 사회에 동화되지 않으면 차별한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라즐로가 겪는 고초가 방증이다. 일례로 커뮤니티 센터 내에 교회를 짓기로 합의한 후에도 지역 사회는 라즐로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의도를 불신한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의 횡포다. 라즐로와 해리슨의 관계 변화가 대표적이다. 처음에는 라즐로가 해리슨보다 우위에 있다. 라즐로는 해리슨이 애걸한 끝에 그가 제안한 커뮤니티 센터 프로젝트를 수락한다. 하지만 건설 프로젝트는 필연적으로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고, 선의로 시작된 후원자와 수혜자 관계는 점진적으로 수직적인 위계 관계로 비틀린다. 그렇게 해리슨은 돈을 목줄 삼아 라즐로를 통제하려 한다.
왜곡된 관계는 다른 영역에서 갈등을 초래한다. 라즐로 가족은 해리슨 가족으로부터 인격적 모욕을 당한다. 라즐로는 만찬 자리에서 해리슨에게 구두닦이 취급을 당하고, '해리'(조 앨윈)는 조피아에게 추근거린다. 가치관도 충돌한다. 철로 사고로 인해 부상자가 발생했을 때, 라즐로는 예술가로서 프로젝트를 강행하려 한다. 그에 반해 해리슨은 회사 이미지가 악화될 것을 우려해 공사 현장 직원을 모두 해고하고 프로젝트를 중단한다.
환상 뒤에 숨은 허상은 건축적으로도 암시된다. 제1막에서는 빛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뇌가 중점이었다. 커뮤니티 센터에 교회를 설계할 때 라즐로는 햇빛을 어떻게 십자가 모양으로 다듬을지를 고심했다. 마치 아메리칸 드림의 빛을 보여주는 듯하다. 반면에 제2막에서는 건물의 그림자 안에 깃든 추악함이 두드러진다. 공사가 재개된 후, 채석장 동굴 안 터널에서 해리슨은 술과 마약에 취한 라즐로를 강간한다. 그 이후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라즐로와 제1막 끝에서 환희에 찬 그를 비교하면 이보다 극적인 추락도 없다.
브루탈리즘이 마련한 구원의 길
아메리칸 드림의 이중성이 밝혀지는 과정을 쫓다 보면 제목 '브루탈리스트'의 의미도 서서히 분명해진다. 사전적으로 브루탈리즘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재건 과정에서 등장한 건축 사조를 뜻한다. 이전의 모더니즘이 추구하던 기능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게 특징이다. 적은 수의 창문과 기하학적 구조를 외장 없이 노출된 콘크리트 건축물로써 표현하는 양식이다.
극 중 라즐로는 브루탈리즘 양식의 특징을 구원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는 위양을 꾸미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특성을 솔직함의 미덕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는 재개된 커뮤니티 센터 건축에 열과 성을 다한다. 자신의 상처와 절망, 구원을 향한 희망, 그의 탈선과 집착까지도 숨기지 않은 채로. 아메리칸 드림의 '잔인함(brutal)'에 '브루탈리스트(brutalist)'답게 맞서는 셈이다.
실제로 제2막의 후반부는 솔직한 고백의 향연이다. 라즐로는 아내가 미국에 도착한 이후로 숨겨왔던 마약 투여 사실을 고백한다. 에르제벳은 해리슨이 라즐로에게 저지른 만행을 그의 가족과 사업 관계자들 앞에서 폭로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마침내 아메리칸 드림 앞에서도 솔직해진다. 환상과 허상을 모두 거두어 내고 현실만 직시한다. 그래서 그들은 조피아가 이민 간 이스라엘로,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그들의 선택은 종교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 특히 라즐로와 해리슨의 대비가 눈길을 끈다. 유대인이라서 배척받은 라즐로는 구원받지만, 해리슨을 비롯해 그를 배척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했으니까. 라즐로는 자신의 건축물이 그랬듯이 신 앞에서 떳떳해졌다. 그 솔직함은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릴 정도로 높아진 명예로 보답받았다.
반면에 독실한 개신교도라던 해리슨은 죄악을 숨기려다가 파멸했다. 그는 라즐로를 강간했다는 진실이 밝혀지자 커뮤니티 센터 교회의 그림자 속으로 실종된다. 그 순간 햇빛 대신 달빛으로 만들어진 역십자가는 그의 비극적 최후를 암시한다. 이 대조적인 결말에 다다르면 <브루탈리스트>를 호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민자라는 보편성과 유대인 건축가라는 특수성의 접점을 이렇게까지 깊고 다층적으로 파고들기는 어려울 테니까.
시대의 반영 또는 과욕
다만 에필로그는 옥에 티다. 이민자 서사와 유대인 서사 사이에서 절묘하게 잡았던 균형을 잃어버리기 때문. 라즐로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열린 본인 회고전에 조피아와 함께 참석한다. 그 자리에서 조피아는 라즐로의 건축세계를 설명하는 연설을 한다.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의 디자인은 라즐로가 지냈던 강제수용소를 재현한 것이고, 그의 건축 세계에서는 과정보다는 목적지가 중요했다고.
얼핏 듣기에는 조피아의 연설이 라즐로가 추구한 건축 세계의 핵심만 짚어주는 듯하다. 하지만 화자가 라즐로가 아닌 조피아라는 점을 생각하면 연설의 뉘앙스가 미묘해진다. 극 중 조피아는 유대인들이 조상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 민족 국가를 건설하는 게 신의 사명이라고 믿는 강성 시오니스트로 묘사됐기 때문. 그녀의 신념은 라즐로와 에르제벳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의 이민을 강행할 정도로 굳건하다.
이 맥락에서 조피아의 연설은 다양한 종교적, 역사적, 예술적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던 <브루탈리스트>의 이야기를 유대인 정체성과 시오니즘 이데올로기 안에 가두는 것처럼 느껴진다. 구원을 원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시오니즘을 추구하는 이야기로 탈바꿈하는 셈이다. 특히 영화의 시작과 끝에 라즐로가 아니라 조피아가 등장하기에 시오니즘 메시지는 더욱 강조된다.
물론 주인공을 유대인으로 설정한 이상 시대상을 반영한 불가피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추구한 시오니즘이 2025년에도 끝나지 않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유발한 현실을 고려한다면, 에필로그는 <브루탈리스트>의 유일한 오점이 아닐까 싶다. 에필로그에서 욕심 한 숟갈만 덜어낼 수 있었다면 보편성까지 갖춘 명작이자 고전으로 기억되리라는 점에 두말할 여지가 없을 테니까.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유대인 이민자의 과거와 현재가 지어 올린 아메리칸 드림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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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이건 콘서트가 아니라 시네마잖아!’ 라고, 아이맥스 상영관을 걸어나오면서 생각했다. 다른 가수들이 같은 시도를 해본다면 과연 그녀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영화관은 무엇이 될 것인가. 영화의 제목이 ‘투어’라는 아이러니에도 불구하고, <테일러 스위프트 : 디 에라스 투어>는 영화에 관한 길고 긴 질문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 원천은 분명히 개인적인 팬심과는 다른 것이었다. 상영관 안에서, 테일러 스위프트는 무대가 아닌 스크린 위에 이미지와 목소리, 내러티브를 마음껏 펼쳐 놓았다. 그리고 가사에 따라붙는 제스처와 디자인을 관객의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마치 시네마처럼!
테일러 스위프트의 음악은 알게 모르게 나를 키웠다. 마일리 사이러스, 케이티 페리, 셀레나 고메즈, 아리아나 그란데와 함께 십대인 내게 유튜브로 보고 듣는 팝송의 매력을 처음으로 알려 주었고, 완벽히 꾸민 세트장에서 칼군무를 추는 2010년대 아이돌과는 달리 드라마를 함께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파티 걸’이 아니라 솔직한 마음들, 가령 방에 틀어박혀 짝사랑하는 소년이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원하는 마음, 그리고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경험하게 되는 두근거림을 노래하는 소녀였다. 그럼에도 내겐 그녀는 재능으로 충만한 채 연애담을 쓰고, 인기 많은 배우와 가수를 사귀고, 다리에 수백 억의 보험을 들어 둔, 금발의 비쩍 마른 팝스타였다. 스위프트가 마침내 디바로 거듭난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그녀는 아름다움과 무해함으로 무장한 스무 살 걸그룹 멤버들과는 달리 무대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십대에 컨트리 앨범으로 데뷔한 이후 스위프트가 대중에게 얻은 관심은 의심의 형태였다. 십대 소녀가 앨범을 혼자서 쓰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레드카펫에서 성추행을 당했지만 자신이 돈을 위한 재판을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 최소 금액을 걸고 소송을 해야 했고, 수상소감 도중 동료 가수가 난입해 ‘이 상은 비욘세가 받았어야 한다’고 소리치는 모욕까지 겪어야 했다. 연애담을 가사에 썼다가 연인을 이용한 사랑 노래밖에 쓸 줄 모른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수많은 남성 가수들이 같은 소재로 낸 앨범에 쏟아지는 찬사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그녀는 루머에 대응하던 끝에 결국 1년간 음악계와 모든 미디어에서 사라졌고, 자신의 경력 전부를 걸고 완전히 새로운 장르로 돌아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앨범(Reputation)은 홍보도, 방송 출연도, 그 어떤 설명도 없이 가공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 행보를 통해 테일러 스위프트가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사라지지 않은’ 여성 아티스트였다. 그녀는 언론과 대중이 만들어낸 수많은 해프닝을 새로운 장르에 도전할 기회로 삼았다. 그리고 해명 대신 가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동료들 사이의 갈등이나 연애사가 너무나 많은 대중에게 노출되는,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매우 큰 심리적 부담감을 수반하는 상황 자체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만들었다. 그 세계관은 첫번째부터 마지막 트랙, 앨범과 앨범을 엮는 서사가 되면서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많은 대중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쌓은 경력과 영향력을 정치적 발언을 하기 위한 연단으로 삼기도 했다. 기타와 피아노,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 뿐만 아니라 대중의 관심을 이용해 자신의 삶 자체를 세계관으로 변환하는 것까지가 그녀의 빛나는 재능이다. 그 재능으로 그녀는 30대가 되어도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끝없이 성장하는 여성 아티스트가 되었다.
<테일러 스위프트 : 디 에라스 투어> 또한 그녀의 이 파란만장한 세계관 안에 있다. 이 영화의 특별한 점은 단순한 ‘공연 실황 영상’과는 달리 영화적 장치를 적극적으로 차용했다는 것, 그리고 박스오피스를 뒤흔드는 높은 성적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촬영의 완성도와 박스오피스 성적, 지금까지 영화를 평가하는 지표로 작용했던 이 두가지 조건을 이 콘서트 필름은 모두 성공적으로 만족했다. 하늘을 날아서 관객들의 머리 위로 스타디움에 입장하는 오프닝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영화는 음향과 촬영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서서히 카메라의 존재를 잊게 만드는 기묘한 힘을 발휘한다. <테일러 스위프트 : 디 에라스 투어>는 테일러 스위프트가 쌓아올린 서사, 그것을 바탕으로 창조한 매력적인 세계관과 음악, 그리고 또 한번 성장한 그녀의 퍼포먼스 실력과 연출이 한데 모여 자그마치 세 시간의 러닝타임을 빈틈없이 채운다. 영화는 그라운드석부터 4층까지 옮겨 가며 객석에 함께 있는 듯한 음향을 들려주었다가도 가수의 코앞까지 다가간다. 심지어는 지금까지 할리우드에서 완전한 성공을 거둔 적 없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 바로 다양성을 카메라에 담는 데에 성공했다. 공연 자체와 영화 모두의 완성도 높은 연출, 가수의 성장을 그대로 보여 주는 여러 장르의 앨범, 끊임없이 흐르는 히트곡들이 맞물리면서 <테일러 스위프트 : 디 에라스 투어>는 그야말로 영화관만이 줄 수 있는 스펙터클과 감동을 전달한다. 그래서 OTT 서비스에 던져온 회의적인 시선과 극장의 가치를 굳게 믿는, 어쩌면 다소 보수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새로운 장르의 탄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1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벌어들이면서 거장 감독인 마틴 스코세이지의 신작보다 높은 성적을 낸 이 영화는 앞으로 어떤 현상을 불러올까? 많은 가수들이 OTT 서비스를 통해 콘서트 실황 영상을 공개했고, 개중에는 <아리아나 그란데 : 익스큐즈 미, 아이 러브 유>처럼 다큐멘터리와 결합한 형태도 있다. 또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한 <올리비아 로드리고 : 네가 있는 집으로>와 같이 앨범 제작기와 라이브 세션을 함께 담은 형태도 있다. 그러나 <테일러 스위프트 : 디 에라스 투어>는 새로운 형식적 요소를 시도한 것에 그치지 않고 영화계에 경제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기록을 남겼다. 또 접근성이 매우 좋은 장소에 100여명 이상의 관객이 모여 공연을 즐기는 모습은 어떤 가수라도 탐이 날 법하다. 누가 이런 시도를 또 할 것인지, 어떤 기대와 우려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차치하고, 이 궁금증을 통해서 대번에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테일러 스위프트가 자신이 이루어낸 성과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영화를 통해, 관객은 그녀가 관심과 자산을 더 나은 음악과 퍼포먼스에 쏟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 한편 그녀는 ‘팝 컬쳐’, ‘셀럽 문화’에서 과감히 탈출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선망의 이미지가 넘치는 이 시대에 자신의 얼굴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있는 아빠들, 우정 팔찌를 교환하는 소녀들이 모이도록 했다. 그렇게 <테일러 스위프트 : 디 에라스 투어>는 새로운 문화 현상을 이끌어냈다. 박스오피스에 찍힌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시대 팝스타 중 누가 이 시도를 하고, 또 누가 영화관을 경유해 이런 형태의 경제적, 문화적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테일러 스위프트의 이 영향력은 수만 명의 관객들이 ‘내가 그 년을 유명하게 만들어 줬으니까 I made that bitch famous’라는 가사를 연호하며 그녀를 희롱했던 가수가 발휘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감히 예상해 본다. 또 그녀의 공연은 폭력과 광기를 ‘쿨한 것’처럼 연출해 어린이 관객이 목숨을 잃는 사고로 변했던 콘서트는 해낼 수 없는 무형의 성과라고 감히 예상한다. 그녀는 ‘전 남자친구들의 이야기는 그만 쓰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아티스트도, 뱀 이모티콘으로 트위터를 도배했던 수많은 대중들도 발휘할 수 없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힘이 세진 기분이에요, 마치…소파이 스타디움을 매진시키는 느낌?’이라며 너스레를 떨 만큼, 다시 말해 겸손을 떨 필요도 없을 만큼의 큰 성공을 거둔 뒤에도 그 선함을 믿는 예술가로 남았다. 그래서 수만 개의 시선 앞에 그녀가 등장하는 떨리는 순간부터 카메라가 다시 하늘을 날아 스타디움을 나갈 때까지 펼쳐지는 모든 시대들(eras), 이야기를 감상하면서 마음 속으로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다. “맙소사, 테일러가 또 해냈잖아! Oh my gosh, she nailed it again!”
* <테일러 스위프트 : 디 에라스 투어>가 국내 개봉하고 이 글이 쓰인 지 약 한달 후인 12월 6일, 타임(TIME)지는 그녀를 ‘2023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그녀는 타임지 표지를 두 번 장식한 역사상 첫번째 여성이 되었고, 타임지는 기사를 통해 그녀가 스타 가수 그 이상의 성과를 냈음을 강조하며 이렇게 썼다.
“예술가로서 테일러 스위프트의 문화, 비평, 상업적 성과는 너무나 많아서 논하는 것 자체가 요점을 벗어나는 것 같다. 팝 스타로서 그녀는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마돈나 같은 희소성 있는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음악가로서 그녀는 밥 딜런, 폴 매카트니, 조니 미첼에 비견된다. 사업가로서는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로 추산되는 제국을 쌓아올렸다. 그리고 연애사, 패션 등 모든 것이 낱낱이 평가당하는 여성 셀럽으로서 그녀는 지속적인 관심을 통제해 왔고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스티브 닉스는 “저는 테일러에게 유명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조언을 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녀에겐 필요 없는 거에요.”) 그런데 올해는 무언가 변했다. 그녀의 행보에 관해 논하는 것은 거의 정치나 기후에 관해 논하는 것 같다. 매우 널리 쓰이는 언어와 같아서 말하기 위한 맥락조차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녀는 그렇게 세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Swift's accomplishments as an artist-culturally, critically, and commercially—are so legion that to recount them seems almost beside the point. As a pop star, she sits in rarefied company, alongside Elvis Pres-ley, Michael Jackson, and Madonna; as a songwriter, she has been compared to Bob Dylan, Paul McCartney, and Joni Mitchell. As a businesswoman, she has built an empire worth, by some estimates, over $1 billion. And as a celebrity —who by dint of being a woman is scrutinized for everything from whom she dates to what she wears-she has long commanded constant attention and knows how to use it. ("I don't give Taylor advice about being famous," Stevie Nicks tells me. "She doesn't need it.") But this year, something shifted. To discuss her movements felt like discussing politics or the weather—a language spoken so widely it needed no context. She became the main character of the world.
– from article ‘2023 Person of the Year : Taylor Swift’ written by Sam Lan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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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실라 | 별의 중력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궤도를 찾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군인 아버지를 따라 서독에서 학교를 다니는 평범한 고등학생 소녀 ‘프리실라 볼리외’(케일리 스패니). 그녀는 우연한 기회로 서독 미군 기지의 파티에 참석하게 되고, 당대 최고의 팝스타인 ‘엘비스 프레슬리’(제이콥 엘로디)를 만난다. 군 복무에 치이고, 어머니와도 사별해 스트레스를 받던 엘비스는 평범하게 자기만 바라봐주는 프리실라와 대화를 나눌수록 점차 마음을 뺏긴다.
결국 나이 차이도, 부모님의 반대도 극복하고 엘비스와 연인이 된 프리실라. 전역한 뒤 미국으로 돌아간 엘비스와의 장거리 연애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녀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엘비스의 집에서 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프리실라의 인생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엘비스에게 프리실라는 '오직 자신만 바라보고 기다려야 하는' 소중한 여자친구였으니까.
유명인의 아내에 주목하라
여성 서사의 핵심은 제도의 모순과 비합리성의 부각이다. 시대와 사회의 한계 안에서 바스러진 여성들의 비극을 보여주며 변화를 촉구해야 하니까. 그런데 최근 여성 서사 영화에서는 한 가지 색다른 트렌드를 볼 수 있다. 단순히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는 대신, '유명인의 아내'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작품이 많아졌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속 펠리시아, <차이콥스키의 아내>의 안토니나 등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들의 접근법은 기존 작품과는 다소 다르다. 관음증적 욕구를 적극 활용한다. 마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대중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연예인의 가십을 생산하듯이 유명인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이야기를 먼저 내세우며 관객의 시선을 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유명인의 아내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명인의 아내가 겪은 비극을 소비하기 쉽게 만들어 메시지의 파급력을 높이려는 시도인 셈이다.
사랑이 아닌 관계에 주목하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매혹당한 사람들>을 연출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신작 <프리실라>도 이 조류를 타고 있다. 작년에 개봉한 <엘비스>가 엘비스 프래슬리의 음악 세계와 영향력을 펼쳐 보였다면, <프리실라>는 그 대척점에 있다. 엘비스의 아내 프리실라가 직접 쓴 회고록을 바탕으로 여성을 옭아맨 일방향적인 관계를 드러내려 한다. 그 이야기가 설령 현실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더라도 개의치 않은 채로.
<프리실라>는 구성부터 그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영화는 로맨스로 시작한다. 최고의 팝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를 동경하는 소녀 프리실라. 그녀가 서독에서 군복무 중이던 엘비스를 어떻게 만나고, 연애를 시작하고, 사랑을 키워 나가는지를 훑는다. 인간 소녀 벨라가 뱀파이어 에드워드를 만나 사랑을 키워나간 <트와일라잇>을 연상시키는 하이틴 로맨스다.
하지만 <프리실라>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프리실라가 미국으로 건너간 다음부터다. 엘비스의 명성을 빌리되 정작 아내의 이야기가 중심이듯이, 달달한 로맨스로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후 본론으로 넘어간다. 로맨스와 멜로의 외양을 취했지만, <프리실라>를 정작 로맨스나 멜로 영화라고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작부터 어긋난 관계
그래서 <프리실라>는 프레슬리 부부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 자체를 묘사하기보다는 두 사람의 관계 변화에 주목한다. 사랑이라는 관점보다는 한 여성이 결혼 생활에서 겪은 여러 풍파와 심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누가 힘을 갖고 우위를 점하는지를 드라마틱한 사건 대신에 미묘한 변화를 통해 드러낸다. 그 끝에서 영화는 두 사람의 일방향적인 관계를 폭로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엘비스는 프리실라를 철저히 통제했고, 그 과정에서 프리실라는 서서히 자신을 잃어간다. 어찌 보면 시작부터 어긋난 관계였다. 타국 땅에서 군복무 중에 어머니를 잃은 엘비스는 마음의 평화가 필요했다. 때마침 앞에 등장한 평범한 여학생 프리실라는 바로 그 쉼터였다. 온갖 소문에 시달리고, 팬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커리어를 쌓기 어려운 가운데 자기만 바라봐주는 프리실라와 함께하면 안식을 누릴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는 그녀를 자기가 원하는 이미지에 가둬버렸다. 아르바이트도 하지 못하고, 친구를 사귀거나 초대하지도 못하도록. 그러면서 정작 프리실라가 필요로 하는 것은 주지 않았다. 평범한 부부 생활도, 데이트도, 일상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를 위해 대기하고 자기 욕구에 맞춰주기를 바랐다. 때로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행동과 언사, 다른 여자 연예인과의 스캔들까지도 묵묵히 견뎌내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
이러한 비대칭적 관계는 그들의 부부 생활에만 국한되지 않아서 더 흥미롭다. 왜냐하면 프리실라를 통제하는 엘비스 역시 통제받고 있었으니까. 엘비스가 매니저인 파커 대령과 통화할 때 그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는 장면처럼. 프리실라를 시작으로 연쇄적인 통제와 일방향적 관계를 드러내는 이 대목은 감독 본인의 자전적인 경험을 투영한 대목 같기도 하다. 소피아 코폴라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문가, 코폴라 가문의 일원이니까.
그러면서도 <프리실라>는 중심을 잃지 않는다. 사유를 확장할 수 있는 암시와 복선을 제공하면서도 스포트라이트를 언제나 프리실라에게 맞추기 위해 명확히 선을 긋는다. 의도적으로 인간 엘비스만을 부각해 프리실라의 비극에 더 힘을 주려 한다.
그 일환으로 <프리실라>는 엘비스의 화려한 무대 매너나 공연을 딱 한 시퀀스에서만 등장시켰다. 엘비스의 음악도 철저히 외면했다. OST로도 활용하지 않는다. 스타 엘비스가 등장하면 그의 이야기에 더 힘이 생기고, 당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한 이야기로 가지가 더 뻗어 나갈 테니 그 싹부터 자르는 셈이다.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
이에 더해 <프리실라>는 이야기를 애써 극적으로 꾸미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명성에 비해 영화의 톤은 의외로 건조하다. 프리실라가 이혼을 결심하는 순간까지의 감정 변화는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엘비스의 가스라이팅 속에서 주체성을 잃어가는 프리실라의 모습을 외양의 변화만으로 보여준다.
패션이 대표적이다. 프리실라의 옷은 엘비스의 취향대로 나날이 화려해진다. 화장도 진해지고, 머리에도 힘이 잔뜩 들어간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모습은 갑갑해진다. 철저히 엘비스에게 맞춰진 채로 그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함과 공허함만이 강해진다. 반면에 청바지에 흰 티를 자연스럽게 입은 그녀는 엘비스에게 이혼을 당당히 요구한다. 스타의 화려함을 벗어던지자 마침내 자기만의 궤도를 찾은 셈이다.
또 감독 특유의 세련된 연출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프리실라 프레슬리’가 아닌 ‘프리실라 볼리외’가 되겠다는 그녀의 선택에 힘을 실어준다. 엘비스와의 행복한 한때를 보여줄 때는 옛날 필름 효과를 활용하고, 라스베이거스 여행 장면은 감독의 전작인 <블링 링>을 순간 연상시킬 만큼 화려하다. 하지만 이 장면들은 매번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엘비스의 저택과 대조를 이루면서 프리실라의 심경을 시각적으로 전달해 준다.
마지막 순간 드는 의문
다만 부작용도 있다. 우선 극적인 사건이 많지 않고, 프리실라의 불안이 점진적으로 누적되는 과정을 다루다 보니 영화가 전반적으로 심심하다. 미묘한 감정선을 잠시라도 따라가지 못하면 전개가 급하다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그들의 결혼이 본격적으로 삐걱거리는 대목이 후반부에 집중되어 있으니까. 영화를 보고 나면 미끼여야 할 두 사람의 연애시절이 본론보다 뇌리에 더 많이 각인될 정도다.
무엇보다 <프리실라>가 프리실라를 활용하는 방식 역시 의문이다. <프리실라>는 의도적으로 현실의 맥락을 외면한다. 프리실라의 일생 중 비대칭적 관계, 일방향적 관계라는 모티브에 충실한 장면만 취사선택했다. 일례로 프리실라도 이혼 전에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은 누락됐다. 이혼 후에도 엘비스 프레슬리의 자산을 활용해 회사를 경영했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다.
이 대목은 양날의 검이다. 명확한 주제를 보여줄 수 있어서 장점이지만, 그로 인해 영화의 메시지와 화법이 충돌할 수 있으니 문제다. 엘비스가 프리실라를 자기가 원하던 여자친구와 아내의 이미지에 가두었듯이, <프리실라> 역시 실제 프리실라를 보여주는 대신 가상의 프리실라 안에 그녀를 가둔 것은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이는 후반부를 다소 성급하게 전개한 이유로도 볼 수 있다. 그녀와 엘비스의 관계에서 이혼은 온점이 아니라 쉼표였는데, 영화는 쉼표 다음의 이야기를 안 보여주려고 일부러 페이지를 빠르게 넘겨버린 셈이다. 만약 이혼 후 프리실라가 엘비스와의 관계를 영리하게 활용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엘비스의 새장에서 벗어난 그녀의 주체성을 더욱 강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형식과 내용의 충돌 가능성 또한 없었을지 모른다.
Acceptable 무난함
첫사랑에 유명인을 더한 대인관계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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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시간과 장소, 영화
씨네랩의 초대를 받아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된 리뷰입니다. :)
서늘하고 건조한 헬싱키의 풍경이 유머와 사랑으로 따뜻하게 물든다.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낯선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지는 두말할 나위 없는 로맨스 영화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감정의 진폭은 절제되어 있다. 이름도 모르는 여자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여자는 남자의 연락을 오매불망 기다린다. 카우리스마키 감독 특유의 아주 덤덤한 말투와 무표정한 얼굴로. 설사 감독의 웃음 코드와 맞지 않을지는 몰라도 이 영화가 사랑스럽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안사(알마 포이스티)는 다소 피곤한 표정으로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에 스티커를 붙이고 분류한다. 경비원의 눈길은 시종일관 안사를 향한다. 그 눈빛은 애정과 호감이 아닌 감시의 눈이다. 경비원은 직원들이 스티커를 붙이고 제품을 폐기하는 모습을 경직된 모습으로 응시한다. 결국 안사는 폐기 제품을 챙기고 노숙자에게도 음식을 나눠줬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사회에 만연한 비정규직의 서러움은 동료들과 함께 매니저에게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끝난다. 안사는 곧바로 다른 일을 찾아 나선다. 삶의 어려움은 근무 환경의 팍팍함만이 아니다. 안사는 전기세 고지서를 보다가 콘센트를 뽑고 이내 차단기까지 내려버린다.
홀라파(주시 바타넨)는 우울과 과음의 순환에 빠진 건설 현장 노동자다. 노후된 장비로 작업을 하다 사고를 당한 홀라파는 높은 혈중 알코올 농도를 빌미로 해고당한다. 고독을 좋아하지만 사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홀라파는 술을 통해 우울한 현실을 잊는다. 동료 한네스는 이런 그를 이끌고 가라오케로 향한다. 그곳은 노래를 부르고 들으며 현실의 고단함을 잠시 뒤로 하는 곳이다. 가라오케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안사와 홀라파는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흘러나오는 동안 사랑에 빠진다. 세레나데와 함께 안사와 홀라파의 얼굴 클로즈업이 짧게 교차되며 서로를 향한 마음을 드러낸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여지없이 사랑은 시작된다.
안사와 홀리파의 사랑은 무미건조하면서도 따뜻하다. 겨우 전달한 번호를 적은 쪽지는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서로의 이름도 모른다. 연락할 방도가 없기에 무작정 영화관 앞에서 상대를 기다린다. 빠른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현실이 무색하게 이 영화의 사랑은 느리다. 안사는 타인을 걱정할 줄 아는 사람이다. 고주망태로 버스 정류장에 잠든 홀리파가 불량 청소년들에게 에워싸인 것을 보고 다가가고, 그의 얼굴을 고쳐주고 쓰다듬어준다. 그의 사랑은 안락사를 당할 뻔한 강아지에게도 이어진다.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내일의 삶이 곤궁해지지만 자신과 다른 존재에게 관심을 쏟고 보살피려는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시대적 배경은 안사의 새로운 직장인 ’캘리포니아 펍‘에 걸린 달력에서 알 수 있듯이 2024년이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80년대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데, 인물들이 TV는커녕 라디오로 뉴스와 음악을 듣고 유선 전화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디오에서 시종일관 흘러나오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의 속보는 퇴보한 현대를 충분히 설득한다. 감독은 전쟁의 여파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마저 뛰어넘으려 한다. 분명 배경은 헬싱키지만 각 가게에는 특정 나라의 도시 이름이 쓰인다. 초점 없는 눈으로 연거푸 맥주만 들이켜는 사람들이 모인 ‘캘리포니아 펍’의 사장은 마약 거래를 하다 적발된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카페’의 음료는 과연 알록달록하다. 두 사람의 첫 데이트 장소인 낡은 극장은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시대의 영화가 모여있는 곳이다. 두 사람은 짐 자무시의 좀비영화 <데드 돈 다이>를 함께 보고 나온다. 극장에는 로베르 브레송과 장 뤽 고다르의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다. 극장에서 나온 사람들은 브레송과 고다르를 언급하며 소감을 전한다.
무엇보다 영화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영화인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음악은 사랑의 시간이요, 영화는 사랑의 장소임을 일깨운다. 나라와 나라를 넘나들며, 시간을 초월하여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영화와 음악임을 유쾌하게 고백한다. ‘채플린’이라는 강아지와 함께 두 사람이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모던 타임즈>가 연상되는 마지막이다. 자본주의의 굴레 속에서 하나의 사랑을 찾는 망명자를 대변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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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듄(DUNE)' 리뷰 - 영화 세계관 및 스토리 요약정리(*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동명의 원작소설 기반 분석 해석
- 베네 게세리트, 초암공사, 퀴사츠 헤더락 등 정리
- 영화 정보
장르: 스페이스 오페라
감독: 드니 빌뇌브
각본: 에릭 로스, 존 스페이츠, 드니 빌뇌브
원작: 프랭크 허버트의 듄(1965)
제작: 드니 빌뇌브, 케일 보이터. 메리 페어런트,조 카라치올로 주니어
주연: 티모시 샬라메, 제이슨 모모아 외
촬영: 그레이그 프레이저
음악: 한스 짐머
촬영 기간: 2019년 3월 18일 ~ 2019년 7월 26일
제작사: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워너브라더스
수입사: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2020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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