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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유2025-09-09 10:09:01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유무

<머티리얼리스트>를 보고서

<내 이름은 김삼순>이 흥행을 일으켰을 때 나는 고작 중학교 2학년이었다. 어린 내 눈에는 삼순이의 감정선을 따라기가 어려웠지만, 당시 어렴풋이 느낀 공포감은 이러했다. 30대 미혼여자의 삶은 삼순이처럼 곤욕을 겪는 일들이 많을지도 몰라 라는. 그 후로 20년이 지나 30대 중반이 된 나는 생각한다. 삼순이보다 벌써 4살이나 더 먹었지만 여전히 삼순이처럼 심장이 딱딱해지지 못해 마음이 아픈, 소녀도 여자도 아닌 그 어중간한 상태의 나를. 마음은 소녀 같지만 어른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면 앞서 닥칠 고난들을 막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매우 잘 아는 나이. 그러나 삼순이의 그 유명한 대사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라는 이 말을 끝내 다시 하고 말고야 사랑이란 것에 대해.

 

 

실력 좋은 커플매니저 루시는 자신이 성사시킨 커플의 결혼식에서, 신랑의 형인 해리를 만나게 된다. 유니콘이라 부를 정도로 외모, 재력 그 모든 것이 완벽한 그의 대시를 받는 루시. 그러나 같은 날 루시는 현실적인 문제로 결국 헤어지고만 전 남자친구 존과 마주하면서, 그녀는 사랑과 현실 앞에서 선택에 기로에 놓인다.

 

영화 <머티리얼리스트>는 사랑의 '속성'을 그린 영화이기보다도, '사랑'그 자체에 대해 다룬다. 뜨거운 키스를 나누면서도 해리의 아파트를 곁눈질하고 마는 루시를 미워할 여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여럿이서 함께 지내는 좁디좁은 아파트에서 젊은 날 뜨겁게 사랑하던 전 남자친구와의 재회는 애틋함보다도 반가움이 더욱 앞선다. 존과 헤어지고 나서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루시는 엄연히 연애와 사랑을 구분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연애가 어떤 이행조건과도 같다면 사랑은 제멋대로 조절하기가 힘든 상태와도 같다. 30대가 되면 소개팅이 더 이상 설레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내 또래들은 꽤나 공감할 것이다.

 

 

연애가 이행조건과도 같다면 결혼은 흡사 계약과도 같다. 서로의 외적, 내적 컨디션을 고루 따져가며 적합한 남녀를 매칭해 보았을 때 언제나 상처받는 쪽은 늘 그 속에서 '사랑'을 꿈꾸는 이들이다. 루시와 존의 관계에서는 존이 그러했고, 해리와 루시의 관계에서는 양쪽 모두가 그러했다. 나는 언제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키고자 하는 의지'라고 말하곤 했다. 현실적인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놓지 않고 유지하려고 애쓰는 의지력. 이 문장을 영화 <머티리얼리스트>에 대입해 보면 서로 간의 사랑이 없음을 깨달은 루시와 해리의 대화가 사뭇 이해된다. 그렇다. 그들 사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없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결국 사랑을 택한 루시도, 사랑에 기대하고 마는 소피도, 사랑을 믿는 존도, 사랑을 꿈꾸는 해리도 아닌 '사랑' 자체이다. 흔히 말하는 30대 어른 연애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어른의 사랑이란 '뜨겁지 않고 적절히 미적지근하며 이해타산을 따져가고 적당히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또 그 선택에 후회 없이 뛰어들며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일련의 선택을 할 줄 아는 것이 어른의 연애라고 말하고 싶다.

 

이 영화를 같이 본 친구와 나는 서로 툭 터놓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각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이이다. 반복되는 소개팅이 지겨운 것은 서로가 서로를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알려하다기보다는, 어떤 연애적 결함이 없는지를 파악하는 과정에 질렸기 때문이다. 나를 잘 아는 또 다른 친구는 내게 말했다. '상처받지 않아도 다시 사랑하는 삼순이 같아.'라고. 무려 12년 전에 쓴 글을 발견했다.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라는 삼순이의 대사가 너무도 공감된다고. 20대의 나와 30대의 나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사랑을 기대하며 울며 잠드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다시 일어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스스로를 다잡는 나의 차이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커플매칭 시스템에 호되게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커플매니저인 루시를 통하여 사랑을 찾는 소피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적당히 염세적으로 현실을 볼 줄 알면서 내가 꿈꾸고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아는 소피도, 어른이니까.

 

 

작성자 . 사서 유

출처 . https://brunch.co.kr/@librarianyu/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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