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 K2023-05-25 03:23:20
비에른 안드레센의 삶의 이면, 인간 그 자체를 바라보다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 리뷰
배우, 비에른 안드레센.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주연 배우로 유명한 배우이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 밖에 안드는 외모로, 그는 스타덤에 올랐지만, 그런 그의 삶이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통해 그에게 붙은 별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 그러나 그의 삶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런 그를 응시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이다.
영화의 제목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은 당시 베니스에서의 죽음 영화에서의 유명세로 붙은 별명이다.
다만 이 다큐를 통해 비에른 안드레센 배우에게 붙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 이라는 별명은 정말 평생을 따라다는 별명이자 낙인이었다는 생각이 들게한다.
어린 나이에 얻은 인기다 보니 당연히 좋은 의도만으로 접근하는 이들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은 어느 정도 감이 잡혔지만, 정말 어린 나이에 아동학대급으로 방송에 출연했다는 사실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또한 비에른 안드레센의 가정사도 가슴 아프게 관객들에게 전해진다.
이 다큐멘터리는 비에른 안드레센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다큐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베니스에서의 죽음과 지금의 안드레센 배우가 바닷가에서 번갈아서 보여지는 후반부 장면은 정말 인상깊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과 비에른 안드레센 배우에 관심이 있다면 강력히 추천하는 영화.
*이 글은 원글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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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당신을 채울 수 없다는 것, 영화 <님포매니악 1,2>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포스터를 보면 뭐 이런 영화를 다 만들었네 싶을 수도 있다. 또 영화의 결말을 보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다. (결말 밖에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그러나 두가지 '뭐 이런게 다 있다'는 평을 하는 느낌은 영 다르다. 포스터는 마치 이런 영화를 보면 내가 '님포매니악'이 된 것처럼 볼까봐 걱정이 들 수도 있겠다. 예전보다야 나아졌지만 성에 개방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건 여전히 어색함이 더 크다. 그러나 주의할 건 포스터가 보여주는 게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원초적 본능>과 그런 면에선 맥락이 같다. 화끈하고 질펀한 걸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오히려 보면 볼수록 허전하고 쓰라리다.
제목은 아무 잘못이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이 영화를 못살게 군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바닥에 널부러진 조와 우연찮게 길바닥에서 만난 샐리그먼이 밤새 이야기하는 것이 영화의 전부다. 다만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그녀는 스스로를 님포매니악(여성 색정증 환자)라고 불렀고 그는 스스로를 무성애자라고 칭한다는 것. 섹스 중독자와 섹스가 1도 동하지 않는 두 사람의 섹스에 대한 대화.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이 만나면 이렇게 차분한 대화가 가능하다니 신기하다. 조의 일대기는 꽤 길고 복잡하다. 그녀의 생이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그녀는 차를 마시며 침대에 누워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샐리그먼은 그녀의 '경험'을 그래서 자신의 '지식'으로 공감하고 이해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낚시, 음악 등 각종 지식으로 맞장구를 친다. 때때로 이야기가 끊어지면 그들을 둘러싼 방의 인테리어, 벽에 남아있는 자국, 방의 구조, 조명 등으로 다시 이야기가 시작됐다. 만담이라기엔 잔잔하고 대담이라기엔 독백이 길고, 독백이라기엔 응하는 사람이 있는 독특한 밤이었다. 샐리그먼의 뜬금없고 박학다식한 지적 공감은 자칫 19금썰 혹은 사랑과 전쟁이 될 뻔한 한 이야기를 꽤 담백하고 흥미롭게 탈바꿈해준다. 다른 남자였다면 이렇게 클래식 평론하듯이 말하진 못했겠지. 그는 영화를 끝까지 흥미롭게 만드는 존재인데 그건 차차 얘기하는 것으로.
영화의 부제를 짓는다면 <님포매니악: 어느 고독한 여자의 이야기>라고 붙이고 싶다. 주인공 조는 성보다는 사람을 탐닉하고, 쾌락보다는 외로움을 채우려 애썼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부제를 지어본 건 갑자기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가 떠올랐기 때문. 주인공 외의 등장인물, 심지어 관객들마저 주인공과 자기 자신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할 것이다. 암만, 우리는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처럼 살인자도 아니고, 조처럼 님포매니악도, 섹스중독자도 아니니까. 그러나 정말 전혀 다른가. 외로움과 공허함이 비슷해서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면 이상한걸까. 조는 유일하게 사랑했던 제롬에게 속마음을 보여준 적이 있다. 자신의 모든 구멍을 채워달라고 하면서. 애틋한 말이었다. 늘 내 빈 곳을 누군가 채워줄 수 없다고 수없이 회의적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에 더 슬펐다. 정말 섹스로, 혹은 제롬같은 누군가가 내 안의 모든 빈 곳들이 채워진다면 같은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든 걸 걸고서.
조를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모르고 시작하는 바보가 어딨나. 그녀도 알고 있었다. 욕구란 끝이 없고 만족을 느끼는 만큼 허전함 역시 크다. 맛있는 음식들, 아는 맛이지만 그 맛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이는 사람들. 바깥에서 사먹는 음식 중에서 나에겐 떡볶이가 늘 그렇다. 치킨도, 피자도, 그 무엇 보다도. 정말 아는 맛이지만 집집마다, 가게마다 다르다. 내 입맛에 찰떡인 떡볶이를 찾아 헤매는 것이 숙명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떡볶이 비유는 너무 가볍나.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는 사랑에 대한 욕구도 있겠다. 외로워서, 궁금해서, 이유가 뭐든간 다신 사랑하지 않겠다면서 그 달달하고 몽글거리던 날이 그리워 다시 찾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이 사랑에 함몰되어 있는 동안 조에겐 섹스가 그랬을 것이다. 아는 즐거움이었지만 즐거웠고 쉼없이 필요했다. 하루에 7-8명 정도 되는 사람들과 만나 늘 그 사람들에게서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 그건 분명 본인도 많이 노력해야하는 고된 일정이었다. 아는 맛의 끝을 보고 싶었던 것, 그게 조와 우리의 작은 차이점일 것이다.
유부남이 아내와 함께 찾아왔다(feat. 질척거림)
그녀를 철면피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끝에 갈수록 그런 생각은 잦아든다. 죄의식이나 자책감 따위는 저버린 듯이 말했지만 그녀는 아주 오래 자신의 삶을, 자신의 선택을 '죄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와 '미끼'가 되어 누가 더 기차에서 많은 사람과 잤나 내기하느라 유부남을 유혹할 때도, 사랑하지도 않는 유부남이 자신 때문에 20년지기 아내와 아들 셋을 버리고 왔을 때도, 음성사서함에 올라온 수많은 남자들과 만날지 말지를 주사위를 굴려 결정할 때도, 그녀에게 닥친 불감증이라는 위기에 다시 쾌락을 되찾기 위해 폭력적인 남자에게 몸을 맡기고 아이와 남편을 버릴 때도. 그녀가 사랑한 제롬이 자신과 함께하는 여자아이와 엮이게 되어서 질투심에 총으로 쏘려고 했을 떄도. 그게 다 죄라면서.
그녀가 여러 사람을 만났던 것은 그녀가 사랑한 대상이 섹스가 주는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과 흥분은 섹스에 필요한 기본적 요소였고 사랑마저도 그녀에게 섹스를 완성해주는 비밀의 레시피였다. 그럼에도 샐리그먼에게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변명을 늘어놓으며 배수진을 친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들릴 이야기는 부도덕하고, 저는 나 좋자고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못돼 처먹은 사람이에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서도 아닌데. 죄라고, 부도덕하다고, 못된 사람이라는 인식은 전부 스스로에게서 나온다. 정말 못된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인간의 본성을 위선이라고 말하는 건 그런 그녀가 위선적이라는 것에부터 출발 한 것은 아닐까.
젊은 여자 둘이 기차에 타면
모르는 사람에게 한두번 해본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샐리그먼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는 자신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된다. 샐리그먼은 그녀에게 '날개가 있는데 좀 날면 어떤가'라며 여성으로서, 욕구를 가진 인간으로서 조를 긍정적으로 해석해주었다. 조가 남자였다면 이 모든 건 지금보다 큰 문제가 아니었을거라면서. 젊은 여자 둘이 기차에 타면 눈을 맞추고 웃기만 해도 남자와 잘 수 있지만 젊은 남자 둘이 그러면 똑같이 가능하겠냐면서. 아이를 버리고 자신을 택한 건 그녀의 남편 제롬도 마찬가지였다고 말이다. 하다 못해 질투심에 눈이 멀어 제롬에게 총을 쏘려다 실패한 것 역시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그를 죽일 생각이 없어서 총을 제대로 장전하지 않은 것이라고 답해준다. 그러니 죄책감 갖지 않아도 된다고.
한마디 더해 '혼자 박수칠 수 있던가'라고 곁들여주고 싶었다. 그녀를 함부로 말할 수 있겠나.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이건 단독범행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의 착각아닌가. 자기 자신 좋자고 다른 사람 마음 아프게 했다는 말. 그녀만 좋자고 했나, 상대방도 좋자고 했지. 그 사이에 상처가 있었다면 그건 둘의 책임이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다. 그녀가 추구하는 섹스는 혼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근데 그 섹스가 그녀 말대로 쉬웠다. 그건 그녀가 사람 환장하게 하는 팜므파탈이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늘 응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이상해하는 사람들보다 그녀에게 이끌리듯 응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녀를 싫어하는 건 여자들이었다. 그 이유가 신기했다. 자기 남자들을 건드릴까봐. 그녀를 거절하려던 철벽 같던 유부남도 있었다. 똑같이 신기했다. 그녀를 피하려던 이유가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끊으려고도 해볼만큼 해봤거든요
조가 변하려고 결심할 수 있었던 건 청춘을 다바쳐 쾌락을 좇아 해볼 만큼 해보았기 때문이다. 억지로 누가 섹스 중독을 고쳐보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은 다르다. 몸이 아프게 되어 '못'하게 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섹스 때문에 사랑하던 제롬과 극단으로 치닫고 상처를 받아서일 수도 있겠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자고 올 땐 보이지 않던 게, 눈 앞에서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여자와 그가 자는 걸 보면서 제대로 상처받았을 것이다. 제롬은 그녀의 이야기 중에 유일하게 F, G, K, B 같은 이니셜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였다. 그리고 처음 만난 샐리그먼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하지 않았나. 자신이 그렇게 견딜 수 없었던 욕구 없이도 사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편견 없이 보아주는 사람이 있고,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사회는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녀 역시 사회를 받아들일 수 없다 생각했는데 그런 그녀에게 친구가 생긴 것이다. 처음으로.
그러나 그 스펙타클한 조의 연대기보다도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몇 분에서 볼 수 있다. 샐리그먼은 아주 대단한 역할을 맡게 된다. 처음으로 믿을 수 있는 친구, 외로움과 중독을 벗어나보겠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보고 다짐하는 조를 짓밟아 버린다. 역설적이게도 님포매니악이던 조가 섹스 없이 있는 힘껏 살아보겠다고 말한 그 직후, 평생 섹스와 담 쌓고 살아온 무성애자 샐리그먼이 그녀와 섹스하고 싶어진 것이다. 이걸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욕망의 전이?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그가 정말 그녀에게 상처를 준 건 수많은 남자들이랑 자지 않았냐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는 그녀 앞에서 '남자'가 되었다. 과거 그녀가 자동문처럼 가리지 않고 남자들과 잤다고 해서 지금 이순간, 그와 거리낌없이 잘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와 그녀는 방금 전 이야기 하듯이 '인생 최초의 친구'가 아니었던가. 그는 믿을 수 있는 친구 대신 욕망에 가득한 어느 남자가 된 것이다. 방금까지 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사랑하던 제롬을 죽이지 않아서, 안도하던 조는 망가졌다. 총은 제대로 작동했고, 친구라 부르던 셀리그먼이 그 총을 맞았다. 어쩌면 그녀는 살인자가 되었겠다. 혹은 급소가 아닌 곳에 총알이 박힌 채 그가 신음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총소리에 가장 많이 아파할 사람은 조일 것이다. 동이 텄고 문이 닫혔다.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녀의 표정은 조금 일그러져 있을까.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그녀의 평생을 바친 단 하나의 실험, 단 하나의 목표가 얼마나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지. 누구도 그녀의 구멍을 채워 줄 수 없었다. 채우려 애쓸수록, 기대하면 할 수록, 그녀에겐 짙은 외로움이 피어나는 구멍들이 커질 뿐이었다.
* 섹스 중독자와 님포매니악이 무엇이 그렇기 다르기에 조는 거듭 강조를 했나. 의미상 여성이란 점을 부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남성 색정증은 사티리어시스라는 다른 표현을 쓰고 있으니까. 단어 중 님프는 영화에서 유충이란 뜻으로도 설명되었다. 실제로 낚시를 할 때 이 님프를 본따 님프 낚시를 하기도 한다고. 미끼가 되어 사냥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녀가 스스로를 섹스중독자라고 칭하며 중독을 끊으려 할 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마음을 바꾸는데 그 때 그런 생각이 스쳐가지 않았나 한다. 자신이 여성으로서, 섹스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남들과 다르다고. 그게 그녀를 흔하고 광범위한 섹스중독자가 아니라 '님포매니악'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라고.
* 조의 아버지의 '소울 트리'. 내 나무 찾기 이야기가 은근히 흥미롭다. 조도 절벽 위에서 그 나무를 찾게 된다. 아직 그런 느낌이 드는 나무를 찾지는 못했는데 나무를 찾았을 때 기분이 기대된다. 꽃을 들자면 제비꽃은 가능할 것 같다. 왠지 모르게 매년 반갑고 애틋하다.
*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욕망과 외로움을 어떻게 대할지가 아닌가 싶다. 욕망과 외로움의 방법론. 욕망의 끝을 알기 위해, 외롭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확실한 건 몸을 직접 내던지는 건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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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정말 모든걸 내려놓고자 해
이 영화의 엔딩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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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어느 한 한인민박이었다. 내 앞에는 홍대에서 명예교수를 했던 분이 앉아있었다. 와인이라는 걸 살면서 세번째로 먹어본 날이었다. 어. 나이가 어떻게 되지? 스물셋이요. 군대는? 먼저 해야 할게 있어서요. 왜 한인민박에 왔어? 가격이 싸서요. 돈 아껴서 여기저기 돌아다녀야죠. 프라하 어때? 일단 사람이 많네요. 넌 무슨 사연이 있는 사람 같아보여. 있다면 있죠. 없는 사람이 있나요. 멋쩍게 웃었다. 왜 유럽에 왔어? 왜 유럽에 왔냐는 말을 들었다. 음.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같은 말을 두번 들었다. 달라진다는게 뭐지? 별거 없어요. 뭔가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후회하는 일이 많아서요. 아. 후회. 뭐를 후회하는데? 그냥. 좀 더 잘 살지 못한 것?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14시간에 환승까지 하며 비행기를 탄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전직 교수는 나에게 계속 물었다. 영어는 좀 하나? 좀 한다고 생각해요. 그럼 된거 아냐? 혼자 돈 모아서. 살면서 해본 적 없는걸 도전하겠다는건데. 유럽에 와서 의사소통에 무리 없으면 괜찮은거지 뭘. 하하. 아직 토익 시험 본 적 없는걸요. 교수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현재를 사는데 무리가 없는데 왜 과거를 마음에 품고 있냐 이 말이야. 아이 뭐. 그럴수도 있는거죠. 그럴수도 있는거죠? 음. 너 내 동생같아서 말해주는건데. 후회는 네 삶을 갉아먹을거야.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와인 반 잔을 들이켰다. 내 삶을 갉아먹는다고.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어떤 건 마음에 품고 사는게 더 나은 것 같더라구요. 그래. 다 좋아. 20대 청춘 다 괜찮은데. 이별해야 할 때를 아는 것도 멋진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부분이지. 네 하는 이야기 들어보면 알아. 이미 잘 하고 있으니까. 여기 온 것만으로도 네가 원하는건 다 얻었다는 뜻이니 걱정하지 마라. 너 20대의 나같아서 말해주는거야. 분명하게 말해주고 싶은 건 생각이 많은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때도 있지만 역효과도 있다는 거 알아둬라. 네가 해준 이야기가 너의 삶의 좋은 방향이 될거라고 생각해. 그냥 단순히 유럽 여러나라를 다니는게 여행의 목적은 아닐테지. 생각해봐. 이별해야 할 때가 언제고 또 무엇과 작별해야 할지. 다시 받아들여야 할 건 무엇인지.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이별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터널 선샤인>의 각본을 쓴 찰리 카우프먼이 감독을 맡았다.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하기엔 사실 영화는 매우 불친절하다. 그래서 내가 쓴 감상을 이야기하기 위해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쓰고 싶다. 연기 잘하는 배우는 다 나왔다. 제시 플레몬스, 제시 버클리, 토니 콜렛, 데이빗 듈리스가 주인공을 맡았다. 우선 찐따연기라면 헐리웃에서 둘째가면 서러운 제시 플레몬스가 이번에도 어딘가 기가 죽은 남자 역할을 300% 어울리게 소화해냈다. 하지만 더 눈에 띄는 연기를 한 배우가 있다. 토니 콜렛이다. 이 영화의 역할과 <유전>과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의 어머니 연기는 결이 다른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배우는 이걸 성공해낸다. 주변에 있을 또 다른 어머니상을 완벽하게 보여줬다. 이에 대한 이유는 극에서 제이크의 부모가 가져야 할 역할 때문이다. 이 영화가 주는 메세지 상 어머니와 아버지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조금 있어야 한다. 이 여배우는 그런 역할 구분을 무의미하게 극을 장악하며 '이 영화가 대체 뭐지?'라는 혼란을 가중시키는게 크게 기여한다.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제이크가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를 소개하는 신이다. 케이크에 대해 말하다가 이명이 있다는걸 스스로 여자친구에게 털어놓는데, 이 부분에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하는 대화에는 두서가 단 1도 없다. 예를 들어보면 케이크가 손가락을 닮았다고 말하고, 귀에 이명이 있다고 답한다. 그러고 이명이 재미없다고 답한 다음, 거지같은 일은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 다음 이명 증상에 대해 말한다. 이후에 왜 귀가 불편한지 일관성있게 말할까? 아니다. 이것에 대한 이유에 우주의 비밀과 주식 시장 정보가 관련있다고 답한다. 이런 식으로 대체 뭔 소리지 싶을 대화를 감정연기와 표정으로 공포 분위기로 만들어버린다. 이 영화가 당연히 가져야 할 연출 지점 중 하나는 개연성의 붕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에서 오는 부작용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로 유지된다. 물론 다른 배우들도 연기가 좋았지만 난 이 부분에 있어 토니 콜렛이 엄청났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다시 돌아가서, 토니 콜렛의 연기에 대해 말하며 애초부터 이 영화는 말이 안되야 한다고 썼다. 배우들이 이걸 완벽하게 이해하고 감독도 각본을 이 개연성의 붕괴를 위해 각본을 만든 것 같다. 즉 난 플롯이 왜 불친절한지와 이 영화의 메세지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우선 전자를 생각해봤다. 이 영화가 왜 불친절한지에 대한 이야기다. 제이크가 누구인지에 대해 먼저 쓸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제이크가 누구냐? 학교에 근무하는 노인 경비원이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물리학도로서 이름을 날리고 싶었다. 지나가다 본 예쁜 여학생에게 반해 연애도 해보고 싶었고 건강한 부모님과 함께 하하호호 웃으며 살고 싶었다. 모든 인생이 다 그렇지만 완벽하게 모든 걸 다 이뤄주진 않는다. 사실 이 인물은 영화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도 이런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에게 이 영화가 주는 서늘한 공감이 오래 갔던 이유가 있다. 영화의 전체 줄거리때문이다. 엔딩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이 영화 전부가 제이크의 망상이다. 제이크는 꽤나 오랫동안 이 꿈(망상)을 꾸며 살았다. 그냥 단순히 '좋은 부인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가 아니라, 여자친구의 외모부터 시작해서 이름, 전공학도, 여자친구의 성격과 우리 부모님과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상상을 꽤나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난 이게 제이크의 일생이 꽤나 비극적이었고,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기에 망상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상이 깊어지니까 점점 자세해지는 것이다. 이런 가정이 진행될수록 사람은 비참해진다. 왜? 현실이 아니니까. 망상이 구체적일수록 초라한 현실이 대비될 뿐이다. 이에 마찬가지로 제이크의 엄마 대화같이 인물들이 대사를 하는 순서가 두서없고 일반적인 서사를 따르지도 않는 이유도 감독 찰리 카우프먼이 이 비참함이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 인물이 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또 논리순서에 맞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정리 할 필요도 없고 한다 해도 아무 쓸모 없다. 왜? 보여줄 일이 없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거다. 영화가 이것을 의도한 이유는 분명하다. 개인의 내면이 어디까지 붕괴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라는게 나의 생각이다. 어차피 주인공은 우리와 대화 할 생각이 없었다. 할 필요가 없을만큼 이미 제이크는 무너져있었던 존재였다. 매일을 망상 덕에 하루하루를 살던 사람에게 대화가 필요할까.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자아가 붕괴된 인물이 갖는 혼란스러움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영화가 어떤 인물에 대해 고유의 방식으로 표현하며 이를 통해 보편성을 획득했던 방법이 여기에 있다. 만약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어차피 이런 상상을 해봤다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무엇에 대해 후회하며 늘 가정을 만들었다. '아. 이 때 이러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았을텐데'식의 상상이다. 그게 두서가 있었나. 아니었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처럼 원인과 결과를 분류하지도 않았고 그럴려고 해본 적도 없다. 남에게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보통 그런 미련들은 나 혼자서 마음을 키우고 있었다. 영화의 엔딩이 되어 이 각본이 갖는 강력한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낀 이유도 이 지점에 있다. 아. 이거 내 머릿속을 영화로 옮긴거구나. 찰리 카우프먼은 좀 다른 방식으로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구나. 난해한 영화지만 주인공의 엔딩신에서의 선택은 분명한 이유도 이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이렇게 감독은 삶에서 생기는 후회를 이렇게 멋지고 불친절하게 표현했고, 이에 대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너 이러는거 나도 알아. 그래서 네가 끝내고 싶은건 무엇인데? 이렇게 묻는거다. 이 질문에 대해 말하는 건 또 다른 결이 있다. 난 이게 영화가 주는 메세지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끝내고 싶은건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영화의 갈등이 어디에서 왔을까와 같다고 생각한다. 여자 주인공에게 끝내고 싶은건 연인관계다. 여자친구는 이 관계를 끝내고 싶었다. 또 얼른 마무리하고 집에 가고싶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런 고민으로 영화가 시작해서 주인공 제이크가 마무리지은 선택지로 마무리된다. 이는 처음과 끝의 대비가 '여자주인공이 끝낸 것의 결과가 제이크의 처지와도 같다'라는 암시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여주인공이 반복해서 하는 독백도 감독이 갈등의 원인(연인관계에서의 결별)과 끝내고 싶은게 무엇인가(영화의 메세지)를 동격으로 놔둔 것의 근거라고 생각한다. 독백에 이런 내용이 있다. 여자친구는 제이크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이에 관련한 혼잣말을 하면서 같은 계단을 반복하며 돈다. 이 독백의 근원지는 어디냐? 제이크와의 관계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제이크의 여자친구는 실존하는 존재인가? 아니다. 제이크가 어느 날 봤던 여자 중 한명을 망상으로 발달시킨것이다. 그러니까 제이크의 연애(끝내고 싶은 것)를 주인공 스스로의 자아존중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의 의문점(끝내고 싶은건 무엇인가)이 분명해진다. 제이크가 끝내고 싶었던 건 후회와 미련일것이다. 그리고 이 인물은 이 감정에 지배됐으며 그걸 끝내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를 골랐다. 즉 제이크가 겪는 갈등 그러니까 내적 혼란은 본인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난 감독이 이걸 이야기했다고 생각한다. 비극적인 이야기다. 그럼에도 난 감독이 따뜻함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이 해결책 제시를 통해 영화의 메세지는 간단하다. 네 후회와 미련을 이 인물에 투영해서 이제 그만 끝내버리라는 뜻이다. 이에 대한 근거도 있다. 어느 부분은 망상이고 남자, 여자주인공이 나온다. 반면에 어느 지점이 끝나고 주인공의 선택을 보여줄 때 할아버지의 모습이 직접 나온다. 나는 이것이 망상/현실을 감독이 구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앞 문단에서 '왜 감독이 플롯을 복잡하게 설정했는가'와도 이어진다. 이게 만약 네 이야기가 맞다면, 네 후회와 미련과 닮아있다면 내가 그냥 끝내버리겠다. 난 이렇게 받아들였다. 차 타고 시작했던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탐방하는 여행이 차 안에서 정리된다는 것도 이에 대한 다른 근거가 될 수 있다. 이 영화를 시작했던 이유와 작품 내부에서 마무리 된 것이다. 후회와 미련이 자아안에 가득했던 사람이 행복해진다는건 애초에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감독 찰리 카우프먼은 이를 가치관으로 받아들여 관객을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시켰다. 그리고 이 인물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영화 엔딩으로 보여준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작품을 만든 의도다. 난 놓친게 너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때 나는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타인의 기준이 내것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 이유로 사람들을 상처주기도 했으며 이런 내 자신이 격하게 싫을 때도 많았다. 그런 생각에 빠질때마다 한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난 근본적으로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자기혐오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끝이 없어진다. 이 생각을 멈추는 법은 간단하다. 이런 후회와 미련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선택지같은건 없다는걸 깨닫는거다. 또, 여기에 같혀있다가는 앞으로는 못 나아갈 것 같다는 위기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다. 시간을 돌린다는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내가 선택할 선택지는 무엇인가. 영화가 말하는게 맞다. 이것들은 애초부터 불필요한 망상이다. 눈 안에서 고립될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엔진을 키고 달리는게 우리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자세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다 본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아니 사실 확실하게 답해야 한다. 날 괴롭히던 것들과 이별해야 할 때가 됐다. 이제 그만 끝낼 때도 됐다.
할말이 많은 영화라 글을 길게 썼다. 난 이 영화에 그정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영화를 차갑고 서늘하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많던데, 나는 <이터널 선샤인>이나 <아노말리사>와 같이 이 작품이 공감과 위로를 전해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어마어마하게 불친절한 영화다. 그럼에도 난 이 영화를 본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으며 처음 완주하고 한 일주일 내내 여운이 남았던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프라하에서의 경험이 생각나는 작품이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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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범도 화들짝 놀라는 전쟁 같은 사랑
"나는 상상했었지 나의 곁에 있는 널~" 나는 아이패드로 유튜브 영상 하나를 보고 있다. 그 전설적인 듀엣 송 <사랑보다 깊은 상처>이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는 엄청 어렸을 때다. 2010년대쯤 자료화면으로 풋풋했던 박정현과 임재범이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때는 가사가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사랑했던 사람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내가 변했다고 백날 웅변해도 그 사람이 뇌가 있는 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노래를 비롯한 많은 대중가요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고 있다. 사랑은 참 여러모로 사람들을 얄궂게 만든다. 사랑이 없었으면 이 많은 사람들이 아플 일도 없고 꿈꿀 일도 없을 것이다. 막는다고 해서 막아지는 일도 아닌데 사람을 행복하게도 우울하게도 만든다. 거의 자연재해와 걸맞은 느낌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런 사랑의 속성을 깨달아 글로 쓴다고 쳐도 그게 나와 뭔 상관이 있는가? 싶다. 사랑과 연애라는 키워드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결국 '과연 나는 대체 뭘 하고 살았는가'라는 질문으로 결론을 낼 수 있다. 말 그대로, 과연 나는 뭘 하고 살았을까? 자기 계발이랍시고 동분서주했던 건 기억에 남는데 누구를 사랑해보거나 받았던 적은 없다. 170 좀 안 되는 작은 키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남들 바지통 줄이거나 화장 처음 시도해볼 때 나는 방구석에 누워서 정말 아무것도 안 했으니 그때 치러야 했던 대가를 26살의 내가 치르고 있는 것이다. 영화와 책으로 채울 수 있는 인생의 유효한 경험들이 쌓이고 쌓인 건 맞는데 정작 실전에는 약하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위로를 하면 행복해지는 나. 사랑에 치인 지인들에겐 대체 뭐라고 말하지? 지인들에게 알맹이 없는 공수표로 보이지는 않을까? 언젠가 나도 누군가를 사랑할 날이 올 텐데. 내가 주변 지인들에게 하는 말처럼 익숙한 것에 섬세한 걸 놓치고 살면 안 될 텐데. 막상 내가 그런 입장이 되면 나 역시 그럴 것 같아서 가끔 두렵기도 하다. 근데 뭐 어떤 영화의 제목처럼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되는 게 사람 심리겠지.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 영화가 있다. 등장인물을 실제로 만나면 단 1마디도 섞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안녕, 이방인? 주인공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넨다.
이방인(Starnger)이 Closer가 되다
부고 전문 기자 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길을 걷고 있다. 사람 바글바글한 미국. 남자는 왠지 반대편에 머리가 붉은 여자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서로의 눈을 마주치게 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눈빛을 마주칠 때, 앨리스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지만 남자와 여자는 이 계기로 서로 대화하게 된다. 무슨 일 해요? 남자는 부고 란 담당 기자라고 한다. 빨간 머리의 여자는 낯을 그렇게 가리는 타입이 아닌 것 같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사고 난 곳 근처를 산책하는 두 사람. 댄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한다. 어느새 직업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는 두 사람. 남자는 '내가 글재주가 없어 부고란의 기자가 되었다'란 말을 한다. 그렇게 하나, 둘 대화를 나누며 친구가 된 주인공. 잠깐 만난 사이더라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시간이 지나 댄은 앨리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소설에 들어갈 이미지를 찍기 위해 아나의 스튜디오를 찾은 댄. 댄은 아나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나를 꼬시려고 노력하는 댄. 어찌어찌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댄은 아나에게 앨리스가 온다고 말한다. 아. 이 댄이라는 놈은 애초부터 아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댄과 앨리스는 연인관계였다. 여자 친구가 있는데도 아나에게 꼬리를 친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시작부터 15분까지의 이야기다. 15분만 봐도 정신 나갈 것 같은 전개다. 글로 풀어써서 그렇지 실제로 보면 주드 로가 맡은 댄이 정말 신기할 정도로 뻔뻔하다. 영화는 댄만큼이나 뻔뻔하다. K-아침 드라마에 나올법한 이야기를 시종일관 밑어붙힌다. 눈치가 없는 게 너무 당연해서 이게 맞나? 싶을 정도다. 아마 사랑의 극단적인 예를 모아놨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세상 찌질이 같은 (우리) 이야기
이름은 그 사람을 규정하는 정체성의 의미와도 닮아있다. 만약 누군가의 이름을 속여서 타인의 마음을 얻는다고 하면 그건 '자기 정체성을 숨긴다'라는 뜻과도 닮아있다. 자기 정체성을 숨겨서 얻고 싶은 게 뭘까? 사랑은 타인에게 내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애초부터 애정이나 관심이 없으면 남이 있건 말건 신경 쓸 일이 없다. 근데 굳이 그렇게까지 타인에게 관심을 받고 싶은 이유는 그 사람을 괴롭혀서라도 찌질한 내면을 해소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영화는 사랑의 극단적인 상황을 맞물려놓고, 어떤 행동의 원인을 '이름을 속여서 사람을 꼬시는'정도의 덜떨어짐으로 귀결짓는다. 그렇게 해서 상대에게 내 존재를 인정받으려 하는 것이다. 이 '남을 흔들어 내가 통제할 수 있음'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행위는 극 내내 제시된다. 극단적인 상황의 연속이라 '난 적어도 저러지 않지'라고 생각하기 쉽다.(나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행동의 한 방향만 틀면 우리 모습이라 딱히 반박하기 어렵다. 극본은 인물 간의 갈등과 사랑의 속성을 비틀며 '네 사랑 이야기도 이의 일부다'라고 지적한다.
나는 상상했었지 너의 곁에 있는 날
이 지구 상에 있는 수많은 사랑 노래들은 헤어진 전 연인과의 재회를 바라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옛사랑과의 재회는 기적 같은 일이 맞다. 그 사람과 함께 있던 행복한 시간이 다시 오길 바라는 것이다. 아프기도 아프지만 행복했던 시간도 있으니 '조금만 더 성숙했다면' 더 나았을 거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근데 가끔 우리는 솔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 다시 만나고 싶은 걸까? 그 사람에게 오롯이 나라는 존재가 유일무이하다는 짜릿함때문은 아닐까? 그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채워진다는 착각은 참 사람을 비참하게도 만든다. 사실 애초부터 그런 건 없는데 말이다. 원래 우리 다 외로운 존재라서 사랑을 찾고 있는다. 이미 다 알면서 사랑에 빠지는 게 우리 인간이라는 걸 모두 다 알면서도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는 끝을 향해 달려간다. 영화는 이 사랑의 단맛과 짠맛을 같이 느끼게 해 준다. 그 사람 잘 알거라 생각했다. 이름을 집요하게 묻고. 그 사람의 행동의 원인을 다 알 거라고 믿고. 행복 회로가 돌아가서 사람은 행복한 것이다. 내가 딱 아는 사람이 있다는 그 오해가 우리를 기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지만 사실 어떤 것의 진위여부도 확신할 수 없는 게 결국 우리가 아는 사랑의 속성이었다. 영화는 잔인할 정도로 이 착각에 대해 집요하게 판다. 이 사람이 나쁜 놈인걸 아는데 '차 좀 타 줘 자기야'라고 말하는 이중성이 모든 인물에게 다 나타난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끔. 그래서 영화는 '결별-재회'의 모티브가 계속해서 반복된다.
로맨스 영화계의 불닭볶음면
난 기본적으로 매운 걸 못 먹는다. 설사가 심해서도 있고 땀이 많이 나서도 이유가 된다. 근데 그렇게 매운 걸 알면서도 가끔 당길 때가 있다. 이 영화는 불닭볶음면 같은 영화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두 번 물어도 사랑에 빠질 수 없었던 나'의 이야기나 <라라 랜드>의 꿈과 사랑의 역설에 대한 이야기는 로맨스 영화계의 정석 같은 느낌이다. 미워도 꼭 잘됐으면 하는 마음. 그래도 그 사람 덕에 행복했다는 고마움을 일깨워는 육개장 같은 영화인 셈이다. 이 영화는 어디에도 없는 매움으로 가끔 생각나게 만든다. 그리고 또 이런 영화도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하다는 느낌을 들게 만든다. 그렇게 나에게 상처 준 이가 미워서 거리를 둔다 치자.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필요하다. 뭐 다른 즐거운 기억 그딴 거 필요 없다. 영화는 이 사랑에 의한 마음의 흉터를 색다르게 묘사한다. 그러려면 또 잘 안다는 착각 속에 빠져서 오해하고, 또 싸우고, 찌질해지고, 타인을 안다고 믿었지만 결국 아니었고. 그렇게 지루한 과정의 연속인 게 인생의 과정 아니겠어? 지나간 인연에게 바치는 감사함은 분명히 아니지만 영화는 다른 측면에서 우리의 시야를 넓게 도와준다.
무려 18년 전 영화
이 영화를 다시 보며 느낀 게 있다. 나탈리 포트만이 정말 미인이라는 것이다. 머리색을 빨간색부터 분홍색까지 가지각색으로 헤도 소화하는 소화력이 대단하다. 주드 로도 새삼 미남이란 것을 또 느꼈다. 이 두 배우의 젊은 시절 비주얼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가치는 충분할 듯. 또 18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캐릭터 설정을 창의적으로 잘했다. 어떤 이들에게 대입해도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 정도다.
사랑에 실패할 예정인 모든 이들에게
우리가 세상을 떠날 거라는 건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랑에 빠져 결혼에 골인한다 쳐도 그게 성공이 아닐 수도 있다. 영원한 건 없으니까. 그래도 항상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바보 같은(나 포함) 것이 우리 모습 아닌가. 이런 우리에게 상처의 치유와 화풀이에 대해 세 번 네 번 생각하게 만든 로맨스 영화다. 본 적이 없는 분들에게 강력하게 추천드린다.
#왓챠영화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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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니 데이 인 뉴욕(A Rainy Day in New York/ 2018/ 미국)
(이미지 출처: 네이버이미지)
<뉴욕, 뉴욕>
개츠비와 애슐리는미국 뉴욕주 북부에 위치한 인문학의 명문, "야들리대학교" 캠퍼스 커플이다. 둘은 학교신문사에서 기자로 활동하다가 만났다. 야들리대학교를 좋아하는 개츠비의 어머니는 자신처럼 아들이 훌륭한 문학가가 되기를 원한다. 그뿐 아니라 피아노를 가르쳤고 뉴욕의 모모한 미술관에는 꼭 가도록 챙기면서 예술적 소양을 길러주었다.
개츠비는 문학가로 이름을 떨친 어머니가 속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가을마다 맨해튼의 집에서 파티를 열며 두 아들들이 꼭 참석하기를 원하나 순종적인 형과 달리 애슐리는 어머니의 '허세 가득한 버젓함'이 싫어 파티를 피할 궁리만 한다.
어머니의 파티가 열리는 주말, 애슐리는 예술 영화감독 롤란 폴라드를 뉴욕 맨해튼에서 인터뷰할 기회를 얻는다. 진작에 주말을 뉴욕에서 지내며 애슐리에게 여러 명소들을 구경시켜주고 싶었던 개츠비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며 함께 보내게 될 특별한 주말에 마음이 설렌다.
그러나 뉴욕에 도착하여 애슐리가 롤란 감독을 만나게 되자마자 일은 걷잡을 수 없이 꼬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영화에 대한 평가에 매우 엄격한 롤란. 그의 신작은 애슐리가 보기에 훌륭하지만 롤란에게는 성에 차지 않는다. 시사회에서 완성된 영화를 보고 우울했던 그는 인터뷰 도중에 사라지고 만다. 시나리오 작가 테드에게 남겨진 애슐리는 어쩌다 테드 아내의 불륜 사건에 휘말려 개츠비와의 저녁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만다. 아내로부터 불륜이 사실임을 확인하게 되어 옥신각신하던 테드는 롤란이 있을 만한 곳의 주소를 애슐리에게 건네며 택시를 태워 보낸다.
주소대로 영화 스튜디오로 찾아간 애슐리. 간발의 차이로 롤란은 놓치고 그대신 매력적인 배우 프란시스코를 만난다. 그는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며 애슐리에게 접근한다. 프란시스코와 함께 있던 애슐리는 파파라치들에게 노출되어 방송을 타게 된다.
프란시스코가 초대한 영화인들 파티에 간 애슐리. 그 자리에서 롤란과 테드, 프란시스코 등 세 사람 모두와 어울리며 애슐리는 꿋꿋이 인터뷰를 이어간다.
한편 애슐리와 함께 지내려고 세웠던 계획이 모두 무너지자 개츠비는 맨해튼을 거닐며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난다. 뒷담화 킹 트롤러는 의대에 다닌다고 했고 영화학교에 진학한 조쉬는 길에서 학교 영화를 촬영 중이었다. 배우 구하기가 여의치 않아 이웃 친구들을 동원하여 만드는 영화에는 고교시절 개츠비의 여자친구였던 에이미의 동생, 챈이 출연 중이었다. 챈은 언니와 개츠비가 사귈 때 여느 남학생들과 많이 달랐던 개츠비를 몰래 좋아했었던 후배. 남자 배우가 궁했던 차에 급하게 캐스팅된 개츠비는 몇 번의 NG 끝에 화끈한 키스 장면까지 해치운 뒤 챈과 헤어져 형의 집을 방문한다. 그리고 엄마에게 자신이 뉴욕에 왔음을 비밀로 해달라고 약속하고 형 대신 포커게임을 하기로 한다.
비가 세차게 내려 택시를 잡은 개츠비와 거의 동시에 같은 차에 오른 챈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동행한다. 챈은 의상디자인을 공부하는데 그림 속 옛날 인물들의 의상에 관심이 많았던 것.
그런데 미술관에서 개츠비는 파티에 참석하려고 뉴욕에 온 삼촌 부부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아 어쩔 수 없이 어머니에게 전화로 애슐리와 함께 파티에 가겠다고 알린다.
형대신 포커게임을 한 개츠비는, 언제나처럼 또 이겨서 수 만불을 손에 쥔다.
애슐리가 프란시스코와 함께 있는 장면을 TV로 보고 낙심한 개츠비는 애초에 그녀와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던 칼라일호텔의 바에 들러 혼자 술을 마신다. 그러다가 에스코트 서비스를 하는 금발 미녀를 만나 거금을 주고 어머니의 파티에서 애슐리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집을 찾은 개츠비. 그의 어머니는 한눈에 금발의 미녀가 창녀임을 알아채고 내보낸다. 그리고 개츠비를 불러 가족의 비밀을 알려주는데 개츠비는 충격을 받는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반감에서 놓여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문 닫을 시간에 칼라일 바를 다시 찾아 피아노를 치는 개츠비 앞에 비에 흠뻑 젖은 애슐리가 나타난다. 그렇게 토요일은 둘의 계획과 관계없이 전혀 로맨틱하지 않게 날아가고 말았다. 일요일 아침, 센트럴파크에서 애슐리의 원대로 마차를 타던 개츠비는 느닷없이 무언가 깨달은 듯, 특종 기사를 쓰게 되어 의기양양한 애슐리에게 돈을 쥐어주고 자기는 뉴욕에 남겠으니 혼자 학교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둘이 헤어지자 다시 비가 내리며 뉴욕은 안개 속으로 잠긴다.
노래하는 시계탑 아래에서 저녁 6시에 낭만적인 생각에 잠겨 서성이는 개츠비 앞에 그의 마음이 닿아있는 한 여성이 나타난다.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비내리는 뉴욕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스크린에 담은 우디 앨런 스타일 영화이다. 우디 앨런의 다른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배우들이 히스테리컬하게 쏟아내는 대사로 가득하다. 그런데 그 대사는 노골적일 정도로 솔직하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이는 롤란은 애슐리가 그의 감정을 편하게 해주기를, 테드는 그녀가 그를 이해하고 그에게 영감을 줄 뮤즈가 되기를, 프란시스코는 육체적으로 그에게 쾌락을 주기를 매우 솔직하게 요구한다.
챈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애슐리의 형은 약혼자에 대한 불만을, 애슐리 어머니는 가족의 비밀을 태연하게 애슐리에게 알린다.
영화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그가 싫어하는 것은 명확하게 안다.) 또 당당하게 주장하지도 못하며 우물쭈물하는 것은 애슐리 뿐이다.
애슐리는 학교신문 기자 일이나 문학 공부에는 시큰둥하고 오히려 승률이나 내기, 포커 게임과 술집에서 연주될 법한 피아노곡 연주에 매우 능하다. 그가 흠뻑 빠져 있던 애슐리가 그와의 연애보다 저널리스트로서의 성공에 열심을 내는 것에는 그러려니 할 뿐이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폭탄 같은 고백에 비로소 그는 문학과 별로 맞지 않으며 어머니 같은 야망도 없는 자기 자신에게 눈을 뜬다. 그리고 같은 예술적 소양을 지니고 있고 유대 문화를 배경으로 한 챈에게 마음이 향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당하면 우리는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아울러 엄청난 충격을 준 대상을 원망하며 자기 연민에 함몰되고 말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딛고 일어설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할 형편을 맞는다.
애슐리의 선택은 후자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그런 결정을 한 애슐리는 어쩌면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혹은 보이는 이상으로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있다가 잠깐 돌아와 보낸 주말 동안 그는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된 후 그 깨달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부쩍 성장한 것 같다.
이 영화의 볼 거리는
첫째, 뉴욕이다. 불안과 신경증적인 고민이라는 성장통이 비와 안개에 젖은 아름다운 뉴욕에서 일어나고 잦아든다.
둘째, 호화 캐스팅이다. 캐릭터를 스크린 위에 살아나게 하는 그들의 연기가 빛난다.
셋째, 배경 음악이다. 비와 잘 어울리는 풍성한 재즈 선율은 모든 것의 첨단인 뉴욕이 매우 올드하게, 감성적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아들과 어머니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강한 유대감을 보이는 유대문화이다. 모계사회처럼 어머니를 중심으로 움직여지는 가정과 자녀교육이 우리문화와 비슷하여 흥미롭다. 영국인에게 직접 들었는데 영국의 전통에 따르면 아들은 어머니보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 돈독하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보고나면 요즘 긴 장마로 매일 만나게 되는 비가 지루하거나 귀찮지 않게 느껴진다. 오히려 무언가를, 깨달음이나 신선한 만남을 기대하게 만든다. 역시 노장은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았다(©2020.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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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인간의 온기
푸른 장벽 Green Border
Director
아그네츠카 홀란드 Agnieszka HOLLAND
Cast
Jalal ALTAWIL, Maja OSTASZEWSKA, Behi Djanati ATAI, Mohamad Al RASHI, Dalia NAOUS, Tomasz WŁOSOK
Program Note
2021년 하반기 벨라루스가 중동에서 흘러 들어온 난민들을 인접한 폴란드로 보내면서, 푸른 숲으로 우거진 국경 지대에서 양국의 군인들과 중간에 낀 난민들이 충돌하게 된다. 거장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최신작 <푸른 장벽> 은 철저한 조사에 기초해 다큐멘터리적 접근을 취함으로써, 때로는 현실이 픽션보다 참혹할 수 있음을 짐작케 한다.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영화를 만들지는 않지만 우리 세상 모든 면이 정치적”이라 했던 감독의 말처럼,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정치적 판단을 하게 된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새우등 터지는 난민, 그들을 도우려는 인권 단체, 그들을 두려워하면서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주민, 그들을 몰아내야 하는 국경 수비대의 다양한 시점을 통해 우리가 선택을 내리는 순간, 그 희미한 선악의 경계를 반추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 짧은 에필로그에 이르러, 불과 일 년 후 폴란드의 또 다른 국경에서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박가언)
*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가장 인상 깊은 영화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리뷰를 쓸 수 없어, 며칠 동안 새문서를 열어 놓고 커서가 깜박거리는 빈 종이를 쳐다보고만 있어야 했다. 씨네랩 크리에이터 중 한 분이 하셨던 말처럼 언제쯤 글이 애정의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게 될까. 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써야지 누가 되지 않을까? 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난민의 인권에 대한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재정착이 필요한 난민은 140만 명 이상에 달하며, 특히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남수단 등의 내전으로 인한 난민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엔 난민에 대한 영화도 다수 제작되고 있어, 난민이라는 소재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조국을 떠나 새로운 나라로 떠나는 과정에서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황을, 감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밀도 있게 만든 영화가 있었던가? 떠올려 보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보았던 <하얀 천국> 역시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탈출기를 다루고 있었다. 아내를 잃은 뒤, 일곱 살 난 딸을 홀로 키우는 사무엘이 이탈리아의 오두막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아프가니스탄을 떠나온 체흐레의 여정을 돕게 된다. 영화에서는 선과 악이 분명했다. 난민을 잡으려는 자와 돕는 자. 악인은 광기 어릴 만큼 인간성이 없는 모습이었고, 추격전은 너무도 가슴 떨리는 스릴러에 가까웠다. 영화는 누군가를 도우며, 스스로 구원받는 사무엘과 스스로의 삶으로 굳건히 나가는 체흐레. 관객은 마침내 각자의 해피엔딩을 맞은 두 주인공을 응원하게 만들었었다.
시리아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곳에서 온 난민들이 유럽을 가기 위해 벨라루스 국경으로 향하고, 유럽의 첫 관문은 벨라루스에서 철조망 하나를 넘으면 되는 폴란드가 된다. 하지만 이곳을 지나 다른 유럽으로 가는 것은 쉽지 않다. 폴란드 정부는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국경수비대를 배치하여 보수적인 정책을 멸치다. 폴란드로 넘어왔다. 드디어 유럽이다.라는 기쁨은 잠시 국경수비대에 의해 다시 벨라루스로 보내지고 그곳에선 폭력이 난무한다. 부상자가 발생하는 일이 빈번하고, 때때로 사망자도 나온다. 영화는 벨라루스와 폴란드 사이의 국경, Green Border에서 일어 나는 일을 다루고 있다. 흑백영화지만, 그래서 참혹한 실상에 몰입이 되었다. 영상미가 아닌 상황에 집중하도록 만들어 주어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누리의 가족이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들의 안녕을 바라며 초조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때로 현실을 담담히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충격이 될 수도 있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괴로웠던 것은 영화 <하얀 천국>에서는 이탈리아에서 눈 덮인 산을 넘어가면 된다는 어떤 목표 지점이 있었던 것과 달리, 이 국경에서는 벨라루스에서 폴란드로, 폴란드에서 벨라루스로 공깃돌을 던지듯 난민을 주고받는 것이 무한 반복으로 되풀이된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지, 방법이 보이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에 난민과 관객을 함께 던져 버린다. 영화가 한 시간쯤 진행되었을 때, 나는 이 참담한 현실을 한 시간 반이나 더 지켜봐야 한다는 게 너무 괴로워서 눈물이 났다. 고작 한 시간으로 이렇게 참담한 마음인데, 벨라루스 국경의 난민은 , 지금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저 가족은 어떨까.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탈출하던 난민의 말처럼 그저 자신의 죄는 ‘최악의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인데.
영화는 절대적인 악인을 찾기 힘들다. 수비대도, 활동가도 모두의 상황이 이해가 되고, 모두의 상황이 안타까운 지점을 섬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많은 이를 잃어 천 번 죽는 기분이어도, 결국 인간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을 향한 애정임을 말하고 있다. 주어진 일과 해야 하는 일과 마음이 시키는 일 그 지점 사이에 있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작은 온기가 모여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푸른 장벽의 깊은 숲의 냉혹한 현실에서 나아가도록 실낱 같은 희망이 되어준다. 오늘 국경에서 난민을 추방하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수비대도 곧 아버지가 되고, 자신이 눈 한번 감으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검은 마스크와 군복을 천천히 옷을 벗고, 맨 몸으로 거울 앞에 선 자기의 얼굴을 마주하고 임신한 아내 옆에 웅크려 눕던 장면을 통해 영화는 말하고 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벗으면 우리는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여권이나, 옷으로 규정 되는게 아닌 온기를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야 한 다는 것을.
Schedule
10월 7일 09:30 영화의 전당 중극장
10월 9일 12:30 CGV 센텀시티 6관
10월 12일 15:30 영화의 전당 중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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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우마와 싸우는 두 사람의 이야기
누군가가 눈 앞에서 죽음을 목격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이런 죽음을 목격하는 것 자체가 보통의 삶에서 흔하게 마주하는 장면은 아니다. 꼭 죽음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사고를 목격하는 것도 그것을 목격한 개인에게는 큰 타격을 준다. 개인의 머릿속에 남아서 계속 그 장면을 반복해서 떠올리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생성된 트라우마는 꽤 오랜 기간 당사자를 괴롭힌다. 옆에 있는 사람들의 위로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만큼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은 개인에게는 큰 싸움이자 전투와도 같다.
특히 누군가의 사고를 보고 경험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끔찍한 일들을 종종 목격한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와 간호사들도 있고, 특히나 재난 상황에서 누군가를 구해야 하는 소방관들은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 자주 놓인다. 큰 불 속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며 불을 끄다가도 미처 구하지 못한 인원들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그런 과정에서 소방관 동료가 죽거나 여러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소방관도 생겨난다. 여러 가지 심리 상담 등에도 불구하고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소방관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두 인물의 이야기
영화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은 그런 사고의 트라우마 속에 갇혀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공수 소방대원 한나(안젤리나 졸리)는 과거 큰 산불 진화 작업에서 산불에 갇힌 세 소년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주변 동료들 앞에서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사고 당시를 떠올리며 고통스러워하고 눈물을 흘린다. 영화는 그 앞에 또 다른 트라우마를 가진 소년 코너(핀 리틀)를 등장시킨다. 코너는 눈 앞에서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걸 목격하고 킬러들을 피해 도망치고 있는 인물이다. 회계사였던 코너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비리를 알게 되었고, 그 증거를 죽기 전 코너에게 넘긴다. 그래서 코너는 숲으로 도망치고 숲에서 산불감시를 하던 한나를 만나게 된다.
영화는 한나가 가진 트라우마와 코너가 가진 트라우마가 만나 같이 그 트라우마를 희석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전혀 모르는 사이였던 두 사람이지만 첫 만남 이후 왠지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는 코너의 눈을 한나는 한눈에 파악하고 그를 안심시키는데 사실 여기에 특별한 방법은 없다. 그저 조용히 손을 내밀어 도움을 주고, 천천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의 이야기도 하게 된다. 영화 중반 이후 그들은 서로가 가진 트라우마를 바라보고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그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애쓴다.
한나와 코너 이외에도 지역 보안관 에단(존 번탈)이 등장한다. 코너와 친척관계에 있는 그는 한나와 같은 지역에 거주하고, 과거에 연인관계였던 인물이다. 그는 한나의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인물로 한나가 하는 여러 가지 기행들을 막으면서 도움을 주려 하는 인물이다. 배우 존 번탈이 연기하는 에단은 무심해 보이지만 주변 사람을 아끼고 챙기려 하는 착한 인물이다. 존 번탈이 가장 잘하는 연기 패턴이기도 해서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의 주변부에서 보이지 않게 챙겨주는 인물을 잘 묘사하고 있다.
흩뿌려진 이야기가 합쳐지며 만들어지는 긴장감
사실 영화의 초반부에는 각 인물들의 이야기가 흩뿌려져 있다. 한나의 이야기와 코너의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전개되지만, 에단과 그의 아내 이야기 그리고 두 킬러의 이야기가 각각 보이면서 각 인물들에 대한 소개를 함과 동시에 각 캐릭터들의 과거와 성향들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영화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이 인물들을 한 지역의 장소로 서서히 모이게 한다. 마치 산불이 조금씩 나무들을 태워 나가서 산불이 없는 곳을 포위해가는 것처럼 각 인물들은 자연스럽게 숲으로 들어오고 서로 서서히 가까워진다. 그 과정에서 긴장감은 서서히 달아오르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순간부터 추격전이 시작된다. 그 추격전은 두 킬러로 인해 발생한 것이지만 이들이 일부러 만든 산불도 각 인물들을 조여들며 긴장을 만들어낸다.
감독 타일러 쉐리던은 <시카리오:암살자들의 도시>(2015)와 <시카리오:데이 오브 솔다도>(2018)의 각본을 썼다. 액션을 아무 의미 없이 나열하기보다는 각 캐릭터의 특성을 이용해 보는 관객을 옥죄어 스릴을 유발하는 이야기를 잘 쓰는 각본가였다. 그는 2016년 영화 <윈드리버>를 연출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아주 건조한 듯 보이지만 울분으로 가득 차 있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일종의 복수극을 보여줬다. 역시 긴장감을 서서히 높여 폭발하듯 벌어지는 액션 장면이 인상적인 영화였다. 이번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은 감독의 스타일대로 서서히 긴장을 끌어올려 폭발하듯 벌어지는 액션 장면이 그대로 포함되어 있고 전작들에 대비해서 스케일을 키워 좀 더 대중적으로 접근한 영화라는 느낌이 든다.
트라우마와 대결하는 듯한 클라이맥스 추격 장면
무엇보다 <윈드리버>의 주인공들 역시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인한 심리적인 고통을 보여줬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트라우마를 가진 두 인물을 등장시키고 그들이 서로 힘을 합해 그 트라우마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한나와 코너가 한 킬러와 대결하는 장면은 마치 이 둘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와 대결을 벌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한나는 구하지 못했던 산불 속 소년들의 모습을 코너에게서 보고, 코너는 미처 구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한나에게서 본다. 그런 부분들이 더욱 그 둘이 상대방을 구하려고 애쓰게 만든다.
한나 역할을 맡은 안젤라나 졸리는 감성적인 연기와 액션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배우다. 자신이 가진 트라우마로 인해 눈물 흘리던 한나의 모습을 보여주던 그는 부모를 잃고 겁에 질려있는 소년 코너를 보고 그를 지키려는 액션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그가 흘리는 눈물과 진심으로 코너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은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끌어안는듯한 느낌을 준다. 완전히 겁에 질린 소년 코너를 연기하는 핀 리틀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완전한 상실감과 공포심에 사로 잡힌 코너의 모습을 움츠러든 몸과 불안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두 킬러 잭(에이단 길런)과 패트릭(니콜라스 홀트)이 등장한다. 이 둘이 영화 초반 보여주는 행동에는 인정사정이 없다. 목격자는 과감히 처리하고, 증거를 남기지 않는 완벽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악역의 총명함이 사라지고 점점 바보 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물론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지지는 않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실소를 자아내게 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이 두 킬러가 보여주는 후반부의 모습이다. 오히려 갑자기 바보가 된 두 킬러보다 산불이 더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어쨌든 영화는 스릴러 영화로서 기본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한다. 그리고 트라우마를 가진 두 인물을 등장시켜 그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비록 두 인물의 트라우마가 완전히 사라지기는 어렵겠지만 영화의 말미 한나의 대사처럼 어떤 후련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을 보는 인물 또한 약간의 시원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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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와 당신의 이야기 영화 후기 / 로맨틱 멜로 드라마 / 믿고 보는 강하늘 / 특별출연 미쳤다!! / 학원담임 김성균도 짱 멋짐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지만, 엔드크레딧 직전 숨넘어가는 반전씬이 있습니다.
폭풍오열은 아니어도 밀려온 감동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을듯 합니다~#강하늘, #천우희, #로맨스, #멜로,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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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만에 돌아온 슈퍼배드 4 / 메가 미니언즈의 탄생 / 미니언즈 없는 슈퍼배드는 없다!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슈퍼배드 4" 후기입니다.
*메가 미니언즈의 재롱이 담긴 쿠키영상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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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쿵푸팬더 : 용의 기사> 공식 예고편
수상한 족제비 한 쌍이 위험천만한 네 개의 무기를 노리자, 포는 집을 떠나 지구를 누비는 여정에 나선다. 구원과 정의를 위해! 그 와중에 고지식한 영국 기사 '방랑자 블레이드'와 파트너가 되는 포.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두 전사는 마법의 무기를 찾아 위험에 빠진 세상을 구하는 대모험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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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청춘적니> 30초 예고편
17살, 빈 교실에서 우연히 마주친 '링이야오'에게 첫눈에 반한 '뤼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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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 속 누구보다 빛났던 너, 세상 끝에서 다시 함께하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