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5-21 21:21:41
빙벽 안에서 길을 잃어도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 리뷰
DIRECTOR. 안소니 첸
CAST. 주동우, 류호연, 굴초소 외
SYNOPSIS. 연길에서 가이드 일을 하고 있는 나나(주동우)는 휴대폰을 잃어 홀로 고립된 여행객 하오펑(류호연)을 샤오(굴초소)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한다. 다음 날 상하이로 향하는 비행기를 놓친 하오펑은 나나, 샤오와 함께 어울리기 시작하고 그들이 함께한 7일 동안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세 사람의 세계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난다.
POINT.
✔️ 믿고 보는 주동우!
✔️ 겨울 도시, 얼어붙은 정서가 제목 그대로 깨지는 모양이 아름답게 표출되는 영화입니다.
✔️ 위로라는 단어 없이 전해지는 위로. 삶에 지친 어른아이, 긴 밤이 이어지는 고요한 곳에서 홀로 침잠하고 싶을 만큼 지친 사람들에게 아주 조용하고 나직하게 다가갈 영화입니다.
✔️ 배경이 연길이다 보니 한국인인 우리에게 익숙한 아이템이 많이 나와요. 진라면 순한맛부터 시작해서. 근데... 제가 아는 이야기가... 왜 여기서 나와?

길눈이 어두운 나는 용산CGV에서 나와 역으로 내려갈 때마다 발걸음에 약간 자신이 없다. 실제로 생각한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내려올 때가 많다. 유일하게 길을 정확히 택하는 때는, 늦은 시간에 나와 몰 안의 모든 매장이 다 닫혀 있을 때다. 그럴 때면 나는 조금도 헷갈리지 않고 거침없이 지하철 타는 데까지 내려간다. 모든 게 단절되어 길만 남은 세상에서는 헷갈릴 소지가 적다.
가끔은 단절 속에서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핸드폰이 없고 시계가 멈추고 낯선 길에서 낯선 기후를 마주할 때. 온통 얼어 붙을 겨울의 도시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곳의 밤은 길기에 마음의 바닥면을 들여다볼 시간도 길다. 겨울 밤에 끌어안고 싶은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도 그렇다.

영화는 얼음에 톱질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겨울왕국>의 오프닝과도 겹치는 장면이지만, 거기서 느껴지던 흥겨움은 여기 없다. 이들의 등 뒤로는 끈이 매달려 있다. 밟고 선 자리를 깨뜨린다는 건 그런 의미다. 자르고 밀고 찍고 싣는 동안 나 자신을 빠뜨리고 말 수도 있는, 위험한 일.
그래서 사람들은 쉬이 자기 밟고 선 자리를 깨뜨리지 못한다. 설령 그걸 깨야만 그 안에 얼어붙은 상처를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해도. 그저 조용히 살아갈 뿐이다. 씩씩해 보였던 가이드는 아픈 발을 문지르고, 남들이 다 춤추고 즐거워하는 자리에서 얼음만 씹는 남자는 조용히 죽음을 생각하면서.
가이드와 손님이 된 두 사람이 간 곳, '조선족 전통 마을'에서 상모를 돌리고 떡메를 치고 장구와 북을 치며 일을 하고 있는 건 모두 노인들이다. 마치 일의 무게와 의미를 생각지 않는 사람들처럼 묵묵히 일하는 노인들과 달리, 가이드 옆에 조용히 앉는 이상의 행동을 하지 못하는 하오펑은 마치 동력기가 고장난 동체처럼 힘이 없다. 그는 여럿이 한 식탁을 채우는 한국 식당의 식탁에도 도무지 어울리지 않고,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듯한 업의 현장을 벗어나기 무섭게 가이드 나나 또한 "다시 태어나도 못 살" 시계를 찬 "고급 인력" 하오펑과 같은 표정이다. 어쩌면 거친 현대사의 굴곡을 헤쳐온, 그래서 묵묵히 일하는 삶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기성 세대가 이해하기 어려운 표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고장난 동력기로 날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마침내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비행기를 놓친다는 우연한 단절로 그들의 고장난 동력이 현실에 선명하게 가시화될 때, 그렇게 트랙을 벗어날 때, 마침내 여행은 시작된다.

나나의 친구 샤오까지 셋이서 방학 같은 날들을 이어간다. 얼음을 씹는 대신 설산을 달리고, 넘어서는 안되는 국경선 코앞을 더듬거려 보고, "그냥 가면 돼!" 하면서 페달을 밟아보고, 깨질 듯 말 듯 미끄러운 얼음판 위를 걸어본다. 추운 도시의 태양은 수직으로 작열하는 법 없이 비스듬한 높이로 떠서 은근한 빛을 더해준다. 그러나 아무리 방학을 즐기는 아이라도 개학의 존재감을 이기지는 못한다.
그 시간 동안 이들의 관계는 무어라 언어로 규정하기 전에 빠른 속도로 얽혀 버린다. 나나는 "넌 친구야 관광객이야?" 묻지만, 그런 경계는 언제 정해지는 걸까. 중국과 북한의 국경선 인근을 더듬더듬 돌아다니는 세 사람처럼, 우리 또한 한 나라의 국경처럼 더듬거리며 그 선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다만 나라의 국경선과 달리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국경선은 보이지 않아 더 어렵다. 나와 타인의 경계선도, 나와 나를 가르는 선조차도.

어차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겨울의 밤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헤맨다'는 감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세 사람은 미친 듯이 돌아다닌다. 세 사람이 부지런히 다니는 연길의 도시는 우리 관념 속 연길보다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어쩐지 더 스산하다. 어떤 도시들은 긴긴 겨울 밤이 되면 부지런히 빛을 두른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렵다는 듯이. 네온사인은 '사랑해'라고 불이 방방 들어와 있지만, 밤이 새도록 도시에 앉아 있어도 세 사람의 마음에 불빛이 들어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동물원의 동물들도, 공원의 조각상들도 받는 불빛을 이들은 받지 못한다.

자신을 가다듬지 못하고 어른이 된다는 것, 발 밑의 얼음을 깨뜨리지 못하고 그 안에 갇힌 상처를 그대로 둔 채 여기까지 살아왔다는 것은 어쩌면 변죽을 울리는 요령만 좋아진다는 뜻이 아닐까. 기타 치며 여유작작 노래 부르는 법도 잊고, "그냥 하면 되지!" 하는 마음도 잊고, 눈물 대신 택하는 방법들만 늘어 간다는 것. 상처를 직면할 여유는 없고, 세상의 벽은 계속 높게만 느껴지고, 이제는 눈물에도 마중물이 필요해져 버려 생의 발걸음을 떼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 것. 내가 밟고 선 얼음을 차마 깨지 못했는데, 얼음판 째로 둥둥 떠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나이는 먹었는데 당황스러울 만큼 모르겠는 것들만 가득한 어른들은 그렇게 멈춰 버린 시계처럼 부유한다. 이 영화는 연길의 추운 겨울 밤을 배경으로 그 차가운 청춘들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빙벽 안에서 길을 잃어도 볕 들 날이 있다. 나 자신과도 화해가 잘 안되고 타인과의 경계선은 더욱 어려운 어른아이들에게로. 이들이 헤매는 빙벽의 미로는 차가복 막막하기만 하지만, 그 안에도 빛이 있다. 얼음은 빛을 투과하니까.
작은 것에도 착잡함이 올라오지만, 또 서로의 작은 것에도 위안을 입는다. 작은 빛으로도. 그러다 보면 어느새 얼음에 금이 가고, 상처를 직면할 힘이 생길 것이다. 원하는 곳에 닿지 못했다 해도, 꽁꽁 얼어붙어 있던 빙벽은 서로의 작은 빛으로 조금씩 녹아내린다. 그 물이 길러낸 나무들은 충분히 아름답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 지점에서 등장한, 우리가 아는 어떤 이야기의 등장이다. 연길이라는 도시의 특수성을 생각해서 백번 이해해 보려고 해도, 영화 바깥의 현실과 뒤엉키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만드는 과정에서 국경선을 조금 더 세밀히 더듬었더라면, 그래서 나와 타인의 경계를 좀더 알아갔더라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영화가 주는 겨울 도시의 고요한 아름다움에서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있을 테고,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 지점은 영화 바깥에서 더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다.

어린 날의 꿈은 너무 쉽게 떠나버리고, 우리는 여전히 빙벽 안에 있는 것만 같다. 샤오의 이모처럼, '조선족 전통 마을'의 노인들처럼 묵묵히 생을 대하지 못하는 우리는, 그럼에도 생에 다시 힘을 낸다. 어둠 속에 있다 해도 나란히 앉아 온기를 주고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빙벽 안에서 길을 잃은 채로도, 작은 빛을 머금고 자라난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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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2020)> 리뷰
고백한다. 뉴욕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도(어쩌면 그렇기 때문일지도) 나는 이 도시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다. 우뚝 솟은 마천루에 온갖 신경을 빼앗기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어쩐지 내 안의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것만 같은 세계적인 도시. 괜히 맥북이나 고풍스러운 책 한 권을 들고 센트럴 파크에 앉아 있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곳.
온갖 정보가 발달해 사실 뉴욕 지하철은 한국의 것보다 못하고, 뉴욕이든 서울이든 결국 서양화된 도시이기에 생각보다 ‘그럴싸한 건’ 없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음에도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적 이미지는 내게서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영화 속 주인공 조안나(마가렛 퀄리)는 어떨까.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가 개봉한 시점에서 고작 몇 년 지나지 않았던 시절의 미국에서 자란 조안나는, 더군다나 작가 지망생이기까지 하다. 좁은 플랫에서 원고와 싸우고, 카페에서 글을 쓰는 친구들과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청춘을 개척하고픈 열망을 지닌 청춘. 그에게 뉴욕이 어떤 의미였을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나 역시 일정 부분 그런 꿈이 있기에, 더욱더.
조안나가 뉴욕에 있게 된 건 우연과 운명의 합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안나가 이토록 오래 머물게 될 줄은, 조안나도 그의 친구 제니(세아나 커스레이크)도 짐작하지 못했으므로. 잠시 머물고자 했던 뉴욕이었으나 조안나는 안정적이되 심심하기만 한 버클리에서 뉴욕으로 아예 거처를 옮긴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던 듯 보이나 그는 빠르게 적응한다. 다만, 많은 이들이 오가는 대도시는 이방인에게 열린 공간이지만, 열려있다는 것이 늘 환대의 의미와 동일하진 않다는 것을 조안나가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듯 마이 뉴욕 다이어리(원제: My Salinger Year)는 주인공 조안나의 여정을 따라가는 성장 드라마다. 평범한 건 싫고, 특별해지고 싶다는 치기 어린 소망을 품은 주인공이 마주한 뉴욕이라는 흥미로운 공간. 그는 새로운 사랑을 찾기도 하고, 일자리를 구하기도 하지만, 그의 이름으로 렌트를 구한 집은 어딘가 어설프고, 작가를 꿈꾸는 그가 하는 일은 팬레터에 기계적으로 답장을 보내는 일에 불과하다. 이윽고 조안나는 결심한다. 진심이 담긴 팬레터에 'JD 샐린저 씨는 팬레터를 받지 않습니다, ' 따위의 무의미한 대답을 타이핑하는 일을 지속할 수 없다고. 그러자 언뜻 잔잔해 보였던 일상에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조안나가 일하게 된 곳은 마가렛(시고니 위버)의 작가 에이전시다. 마가렛은 조안나를 고용하는 순간부터 단호하게 말한다. 작가(지망생)는 자신의 비서로 고용하지 않는다고. 조안나는 김이 샐 법도 한데, 복도에 걸린 애거서 크리스티나 스콧 피츠제럴드의 사진에 전율을 느낀다. 실망도 하지만, 조안나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마가렛이 자신을 알아봐 주고 좋은 기회를 마련해 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아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조안나는 자신이 읽어본 적도 없는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매혹된 이들에게 경직된 답장을 쓰던 중 그들의 진심에 성심성의껏 답하기 시작한다. '홀든'이라는 주인공의 이름도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제법 그럴싸하게 쓰기도 하고, 절박해 보이는 학생에겐 교훈적인 답장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답장을 받은 이가 뉴욕 사무실까지 찾아와 되묻는다. 내 진심이 담긴 편지를 멋대로 읽어본 당신의 답장이 규격화된 답장보다 더 나을 이유가 무엇이냐고.
조안나 래코프라는 이름이 소녀의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이라고 했다. 빈정거림이 분명한데도 조안나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는다. 자신은 허락되지 않은 대화에 끼어든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가 사라지고 조안나는 복도를 걷는다. 조안나의 소망 중 하나가 '특별해지는 것'이었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그는 뉴욕이라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작가라는 단독자가 되고자 버클리의 삶을 버렸고 버클리에서 만났던 남자 친구와는 연락을 줄였다. 그러나 조안나의 손에 남은 건 무엇인가? 그는 등단한 시인이라는 것을 감췄고 영혼에 반하는 일을 주 업무로 삼았다. J.D. 샐린저가 그에게 당신은 작가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시인이라고 얼떨결에 대답했던 조안나는 하루에 15분씩 자신만의 글을 쓰긴커녕 타인의 삶을 흉내 내어 답장하는 일만 지속하고 있었으며, 상사인 마가렛에겐 조안나라는 유능한 비서로 인식되기보단 '샐린저에게 익숙한 환경'으로 인식될 뿐이었다.
조안나가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뉴욕에 와서조차 오래도록 읽지 않았다는 건 적지 않게 흥미롭다. 업무를 진행하며 왜 샐린저의 팬들이 이 책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궁금했을 법도 한데 말이다. 그러나 이 지점이야말로 지금껏 조안나의 성장이 지연된 이유일 것이다. 그는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그 심장부로 파고들지 않았다. 워싱턴으로의 짧은 귀향과 돈(더글라스 부스)의 부재를 경험한 후에야 조안나는 자신이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니얼(콤 피오레)의 죽음을 통해서야 조안나는 인간 마가렛을 알게 된다. 작가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것과, 뉴욕에서 일상을 이어가는 것은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 진 모르겠으나 작가라는 꿈을 이뤄주진 못한다. 꿈은 외면을 모방하는 것만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이므로.
타인의 마음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 깊은 곳까지 살펴본 조안나는 우울을 떨치고 나아갈 동력을 얻었다. 친구 제니가 뉴욕을 떠나는 것을 배웅하며 연인이었던 돈과 동거한 공간을 떠나지만, 그것이 버클리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후임자가 나타날 때까진 맡은 업무를 모두 하겠다고 말한 만큼, 조안나의 출근은 순식간에 중단되지 않는다. 하지만 카메라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원고를 소중히 든 조안나를 똑똑히 비춘다. 뉴요커 건물에 도착한 조안나의 원고가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우리는 모르지만, 감독은 스크린을 통해 조안나를 작가로 호명했다. 그렇기에 관객은 알 수 있다. 샐린저가 말했듯 조안나는 이제 매일같이 자신만의 글을 쓸 것이라는 걸. 꿈에 그리던 모습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자전적 에세이를 바탕으로 하기에, 영화의 마지막은 너무나 당연한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러닝타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은 영화 곳곳에 녹아 있는 인간적인 유머와, 90년대의 뉴욕을 겪어본 적 없는 나까지 향수에 젖게 만드는 따뜻한 스크린의 색감 때문이 아닐지. 무시무시하고 악랄한 악역이나,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의 끔찍한 사건 없이도 인간은 성장할 수 있다. 그저 조금만, 조금만 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한다면, 우리 역시 조안나처럼 20대를 따스하고 애틋하면서 한편으론 엉뚱하고 우습기도 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할 수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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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의 나에게, <태어나길 잘했어>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태어나길 잘했어>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몸과 마음이 커 버린 지금,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할 것인지. 또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어린 시절의 나를 마주한 그 순간 어떤 반응을 보일지.
특히 유난히 더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던 시기의 나를 만난다면 어떻게 대할지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 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중, 때마침 이 영화가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 영화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마주한 '춘희(강진아)'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춘희는 어릴 때부터 다한증이 있어서 손에 땀 마를 날이 없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외삼촌과 외숙모의 집에서 살게 된 춘희는 발을 편히 뻗을 수도 없는 좁은 공간인 '다락방'에서 지낸다. 그곳에서 춘희는 조금은 외롭지만 씩씩하게 커 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른 춘희'의 몸과 마음은 모두 컸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옛 기억들이 남아 있다. 외삼촌과 외숙모가 자꾸 어린 춘희에게 눈치를 주던 것, 자신을 이 집에서 외지인으로 취급하는 친척들, 땀이 많은 춘희의 손을 구박하던 학교 선생님 등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렇게 마음 속에 꾹꾹 숨어 있던 기억들은 '어른 춘희'가 '어린 춘희'를 마주한 후,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영화는 뜨거운 불에 손을 갖다 대는 어린 춘희(박혜진)로 시작한다.
다한증을 갖고 있던 춘희는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손과 발에 땀이 많아서 학교 선생님과 손을 잡고 춤연습을 하다가 땀이 많다는 이유로 구박받기도 하고, 땀으로 인해 집안 곳곳에 발자국이 찍혔을 때에는 외삼촌과 외숙모, 외사촌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다. 춘희는 그런 자신의 손에 스스로 상처를 낸다.
- 우리는 이 집에서 외지인이잖아.
춘희는 외숙모에게서 직접적으로 외지인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이 집에서 춘희에게 구박과 눈치를 주지 않는 유일한 사람은 할머니였다. 방바닥에 찍힌 춘희의 발자국을 아무 말 없이 닦아주는 사람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항상 부모님이 먼저 세상을 떠나 이 집에서 외지인 취급을 받는 춘희를 안쓰럽게 바라보곤 했다.
마늘을 까서 사촌 오빠에게 갖다 주며 돈을 벌던 춘희는 어느 날, '주황(홍상표)'을 만나게 된다.
- 저는 좀 쩔어 있어요.
땀에.
춘희가 주황을 만난 모임에서 자신을 소개하며 한 말이다.
한편, 주황 역시 춘희처럼 어린 시절에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주황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자주 폭력을 행사하여 말까지 더듬게 되었다.
훗날 춘희가 주황에게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나면 어떻게 했을 거냐는 질문에 주황은 어린 자신을 꼭 안아주었을 거라고, 그리고 폭력을 쓰던 아버지에게 한 번쯤은 대들었을 거라고 대답한다.
춘희와 주황은 이렇게 상처를 지니고 있는 서로를 보듬어주며 따뜻하게, 조금은 유치하게 연애를 시작한다.
- 춘희 씨 손에 꽃이 폈네요.
주황은 춘희 그 자체를 사랑해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안 좋아한다고, 어쩐지 최근에 답지 않게 행복한 일들만 일어났다고 말하는 춘희를 주황은 사랑한다.
춘희의 손에 있는 상처도 그에게는 예쁜 꽃이다.
주황은 이렇게 춘희에게 봄날에 핀 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춘희 역시 주황에게 봄처럼 따뜻한, 봄날에 핀 꽃처럼 화사한 사람이었다.
한편, 길을 걷다 벼락을 맞은 뒤로 춘희에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 있다.
바로 '어린 시절의 춘희'.
어린 춘희를 마주한 '어른 춘희'는 외삼촌 집에서 눈치보며 외지인처럼 살던 옛날 기억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이 감정들을 넣어두고 지내던 춘희는 어느 날, 어린 춘희에게 말한다.
왜 자꾸 나타나서 옛 생각나게 만드냐고.
왜 눈치 없어서 주변 사람들이 자꾸 널 싫어하게 하냐고.
왜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같이 안 죽고 살았냐고. 부모님이랑 같이 죽었어야 했다고.
모진 말을 들은 어린 춘희는 그렇게 떠난다.
떠나서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스멀스멀 떠올라 춘희를 계속 외로움 속에 살게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춘희가 사촌오빠에게 울분을 토함으로써 세상 밖으로 완전히 나오게 된다.
외삼촌네 가족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 집에 어린 춘희를 두고 아파트로 이사갔다.
어릴 때 춘희에게 자신들이 이사가면 이 집은 춘희 네 꺼야, 라고 말하던 그들은 훗날 '어른 춘희'에게 이 집을 내놓았으니 나가서 다른 집을 구하라고 얘기한다.
이 집에서 살며 꿋꿋이 집을 지키고 있던 춘희가 열쇠를 바꾸자 다른 집에서 살고 있는 사촌오빠가 오히려 열쇠를 왜 바꿨냐고 화내기도 한다.
이런 일들로 인해 감정들이 쌓이고 쌓였던 춘희가 마침내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 집은 내가 지켰다고. 그 집은 우리 엄마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고.
왜 자신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냐고. 좀 더 잘해줄 수 있었지 않냐고.
왜 (맘껏 발을 뻗을 수도 없는) 다락방을 줬냐고. 다른 방 줄 수도 있었지 않냐고.
그리고 영화는 뜨거운 불에 손을 갖다 대려는 어린 춘희를 막고, 네 잘못이 아니라며 꼭 안아주는 춘희로 끝난다.
둘은 서로를 꼭 안아준다.
-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우리 잘못이 아니야.
그렇게 어른 춘희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듬어준다.
외로운 기억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그 상처들을 버텨내고 있는 어린 자신을 안아준다.
- 생일인 봄에 하얀 눈이 내렸지.
그 눈처럼 앞으로 하얗고 반짝거리는 일만 일어날 거라고 했잖아.
그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그래도 너를 통해 세상에는 하얗고 빛나는 것보다 더 많은 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앞으로 우리가 서로 꼭 안아줬던 걸 기억하면서 다양한 색깔로 살아갈 거야.
이 영화를 모두 보고, 춘희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을 즈음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어린 춘희가 나타난 이유는 맘 속 한구석에 계속 응어리 져 있던 어른 춘희의 답답함과 외롭고 아픈 기억을 해소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
어느 생일날 반짝이는 눈을 본 어린 춘희처럼
반짝이는 벼락이 갑자기 어른 춘희에게.
따라서 마지막에 춘희와 춘희가 서로를 꼭 안아준 것도 쌍방향의 위로가 아닐까.
'어른 춘희'는 어린 춘희에게 네 잘못, 우리 잘못이 아니라면서 토닥여 주었고,
'어린 춘희'는 어릴 적 기억을 안고 살아가던 어른 춘희가 앞으로 이 감정을 조금은 해소한 채로 살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춘희의 이름은 원래 '기쁠 희'이어야 하는데 잘못 등록해서 '계집 희'가 되었다고 한다.
춘희는, 아마 그녀는 잘 모르겠지만, 스크린 너머의 관객에게도 미소와 기쁨을 주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선물 받은 신발을 자신이 신지 않고 노숙자에게 선뜻 건네는 그녀는 따뜻한 사람이다.
행복해야 마땅한 사람이다.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미워하곤 했다.
어릴 때는 왜 그렇게 답답했어 가지고. 왜 그렇게 바보 같았어 가지고.
그래서 춘희가 어린 춘희에게 왜 그랬냐고 질책하는 장면을 보며 마냥 미워했던 어린 내 자신이 떠올랐다.
영화 속에서의 어린 춘희의 얼굴에 어린 시절의 내 얼굴이 겹쳐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미안해졌다.
미워하면 안됐는데. 어린 나는 그 상황을 견디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영화 속의 춘희처럼 나도 속으로 어린 나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어릴 적 맘 속에서 바래왔던 멋진 어른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나 자신도 어린 나를 답답해해서 미안하다고.
어렸잖아. 그리고 그 상황이 너무 혹독했는걸.
이 글의 초반에 어린 시절의 나를 마주하면 어떤 말과 행동을 할 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했다.
이 영화를 본 뒤 내가 내린 답은 그냥 같이 놀아주고 싶다, 였다.
그냥 그 외로운 순간을 견뎌내는 것을 벅차하던 어린 내가 힘든 시간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도록 같이 즐겁게 놀아주고 싶다.
잠깐이라도 아무 걱정 없이 웃는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다.
나는 작은 기억으로도 유독 오랜 시간을 사는 아이였다. 그리고 지금 역시 그렇다.
만약 내가 영화 속의 춘희처럼 어린 시절의 나를 마주한다면 그냥 같이 놀아주고,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
네 잘못이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너의 말과 행동, 너의 모습에서 상황의 그릇됨을 찾지 말라고.
그냥 조금 날이 서 있고, 위태롭고, 절실한 그런 세상 속에 던져졌던 것뿐이라고.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리고 헤어지기 직전, 영화 속의 춘희처럼 꼭 안아주지 않을까 싶다.
잠시라도 만나서 반가웠다고.
이 영화의 포스터 뒷면에는 최진영 감독님의 인삿말이 적혀 있다.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한없이 외로웠던 춘희에게 손을 내미시고, 기꺼이 곁을 내어주신, 춘희의 소중한 친구가 되신 겁니다.
그러니깐 행여 외롭고 지치더라도 춘희 역시 어디선가 그대들을 응원하는 친구로 존재할테니 너무 슬퍼 말아요.
잘 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태어나길 잘했어요!!'
이 봄이 떠나기 전, 모두들 태어나길 잘했다고 말해주는 따스한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를 꼭 관람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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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사이의 공기
나에겐 청각장애인 사촌언니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낼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아빠와 큰아버지는 꽤 나이차이가 큰 편인데다가, 아빠가 당시로써는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한 편이라, 나의 큰아버지의 자녀들(세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 과 아빠의 자녀인 우리 남매 또한 나이차이가 많이 났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막내 언니가 이미 대학생이었으니까. 아빠와 큰아버지는 애틋한 형제지간은 아니었던지, 사촌형제들은 명절에나 겨우 만났다. 차례를 준비하느라 부산했지만, 집 안의 막내였던 어린 나는 언니들의 방에 숨어들어 대학생들이 보는 멋진 책을 펼쳐 놓고 구경했다. 그러면 세상과 동떨어진 듯, 아무말 없이 구석에서 책을 보던 큰 언니가 초등학생도 볼 만한 이런 저런 책을 꺼내 내 옆에 놓아주곤 했다.
유달리 말이 없고, 방에서 책만 보던 큰언니가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유치원 때 쯤이었다. 어쩌면 더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해줬을 수도 있지만, ‘들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내가 정확히 인지한 게 그 즈음일 지도 모르겠다. 후천적인 장애라고 했다. 열병이라고 했던가… 일년에 한 두번 가는 큰 집은, 현실과 다른 공간처럼 느껴지곤 했다. 적막과 무거운 공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어린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이 공기 속에 쌓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막연히 눈치를 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청력을 잃은 딸을 둔 큰 어머니는 아이들의 작은 일에도 예민한 것 같았고, 상실을 겪은 큰 언니는 슬퍼 보였다. 어쩌면 장애를 가진 사람은 불행할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장애를 가진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금기된 것 처럼 입 밖으로 꺼내지 않던 분위기였다. 어느날 막내 언니와 큰 언니가 수화로 격렬하게 (아무 말이 없는데도, 저렇게 격렬할 수 있구나. 하고 엄청 놀랐던 기억이 선명하다) 대화하며 낄낄거리며 웃던 모습을 보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같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다음 명절엔 큰언니와 얼굴을 맞대고, 나도 낄낄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음 만남은 오지 않았다. 언니는 그 사이 같은 장애를 가진 형부와 이른 결혼을 했고, 자신의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이다. 언니가 큰 집으로 오는 날 나도 외갓댁으로 가니, 언니의 결혼 이 후엔 거의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 몇년 후 큰언니네 가족이야기가 친척들 사이에 화두에 오르게 되었다. 언니는 결혼하고 바로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청각 장애가 없었던 이유였다. 둘이서만 아이를 돌보던 때였는데, 이 아기의 말을 어떻게 배우게 할지 온 가족이 모여 고민했다고 한다. 지금 처럼 어린이집이나, 놀이방 같은 기관에 마음껏 보낼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고, 언니네 가족은 많은 시간을 농인들 커뮤니티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큰어머니는 자주 언니네 집에 머물렀고, 가끔 막내 언니가 다니러 갔고, 친가의 가족들이 함께 아이를 돌보았다. 조카는 여러 가족의 도움으로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아이는 영재 판정을 받게 되었다. 아니 거의 천재에 가깝다고 했다. 주변에서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이를 농인 부모와 계속 살게 하는게 맞나? 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지만, 아이와 부모를 떼놓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쩌면 언니도…조금 고민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이 아이의 미래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누구네가 맡아서 키우면 어떠냐.’ ‘그래도 할머니가 그냥 같이 사는게 낫지 않나?’ 백 가지 경우의 수들이 가족들 간에 논의 되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초등학교를 입학한 어린 그 아이는 그냥 엄마아빠와 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되어줄거라고.’
영화 <코다>를 보며, 나는 조카를 생각했다. CODA는 농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한다. (Children of deaf adult) 이영화는 베로니카 폴랭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농인인 부모와 역시 농인인 오빠 사이에 유일한 청인인 영화 주인공 루비 로시는 새벽 3시에 아빠와 오빠와 함께 배에 올라타 귀가 들리지 않는 그들의 귀와 입이 되어주며 물고기를 잡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어느 날 루비는 짝사랑 하던 마일스를 따라 자기도 모르게 합창단에 지원한다. 루비가 합창단에 가입 한 후, 음악 선생님은 루비의 재능을 알아보고, 버클리 음대를 목표로 도움을 주지만, 루비는 자신의 부재로 힘들어질 가족때문에 고민한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 노래를 듣는다는 것의 행복과 기쁨을 모르는 가족. 그리고 가족이 이해 하지 못하는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루비. 아빠를 위해 간절히 노래하는 루비의 목을 손으로 감싸고 노래를 듣는 아빠는 목청의 진동과 떨림으로 , 루비의 노래를 느낀다. 들리는 사람들과 들리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공기와 이해,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 영화를 보며, 각자 나름의 행복을 찾아 살아 가고 있을 나의 먼 가족을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누구나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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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묻어둔 죄책감에 커지는 불안함
아이가 태어난 뒤 7일이 세 번 지날 때까지 21일간 산모의 건강을 도모하고 집 안에 삿된 것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음양오행의 동양 사상, 더 멀게는 단군신화에서도 언급된 삼칠일이라는 금기의 신성기간을 통해 내재된 불안감과 죄책감을 파고드는 심리 미스터리 한국 독립 영화 세이레 리뷰입니다. 서현우, 류아벨, 심은우, 박강 감독이 함께한 언론·배급 시사회에서 먼저 접할 수 있었고 기자분들의 질문과 준비된 진행을 통해 관람 이후 좀 더 디테일한 장면 속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독립·저예산 영화가 많아진 현재 좋은 선택으로 즐거운 감상하셨으면 좋겠네요. :)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영화 세이레 줄거리
자기한테 상갓집에서 뭔가 붙어 온 거야
얼마 전 아기가 태어난 우진과 해미 부부, 구전으로 내려오는 민간 신앙을 많이 믿는 장모님의 영향으로 아내 역시 그 말을 따라 현관문에 금줄도 치고 금기사항을 철저히 지키지만, 그런 미신이 우진은 썩 이해되지 않습니다. 초보 아빠로 회사 다니며 틈틈이 육아도 돕고 바쁘게 보내던 어느 날, 과거의 연인 세영의 부고 문자가 도착합니다. 가야 할지 고민하는 그에게 해미는 아기가 태어난 집에서 장례식 가는 게 아니라며 반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녀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악몽도 꾸고 아기가 아프게 되면서 아내가 말한 미신에 대한 불안감을 날로 커지는데...
예고편│ Trailer
영제: Seire│감독·각본: 박강
출연진: 서현우, 심은우, 류아벨 외 多│장르: 드라마, 스릴러, 미스터리
상영 시간: 102분│국가: 한국│등급: 15세 관람가
제작: K'ARTS│배급: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개봉일: 2022년 11월 24일
수상 이력: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수상
# 영화 세이레 평점
불안과 두려움으로 잠식되는 정신
마음의 안정을 줘야 하지만 왠지 모를 서늘함이 느껴지는 집이지만, 비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동서 관계가 바로 앞 집에 살아서인지 아기를 낳았다는 기쁨에도 남모를우울함도 있고 아내 역시도 약간은 우위에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보입니다. 이런 외적 압박감은 분명 우진을 억누르는 요소로 보이며 진행되지만 반복된 악몽의 원인은 죄의식에 따른 불온감과 이를 숨기는 불안감에 따른 것임을 차차 알려줍니다. 여기에서 유독 새빨갛지만 속은 검게 썩은 사과나, 마주하게 된 쌍둥이 예영의 사소한 습관과 행동은 꿈과 현실을 분간치 못하는 현 상황을 확연히 드러내주며 관객에게 끝까지 긴장감과 혼란을 주는 효과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진의 시선을 따라 줌인과 줌아웃을 반복하는 카메라 움직임은 서서히 죄어오는 인물의 심리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혼란으로 초대하는 서현우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다채로운 작품 활동을 펼치며 여러 모습을 소화한 서현우는 이번에도 좋은 연기력을 선보입니다. 서서히 옥죄여오는 세영의 존재는 현실과 환상 사이에 놓인 과대망상 환자처럼 행동하는 그의 눈빛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관객을 초대합니다. 그의 시선에 담긴 이해할 수없이 이어지는 착각과 착시는 혼란을 가중시키고 발단이 무엇이었는지 궁극적인 궁금증을 일으킵니다. 숨겨둔 과거의 행위와 현재 상황에 대한 죄의식과 책임, 그리고 지금의 가정이 부서질까 두려워하는 불안과 두려움까지 형언할 수 없는 미스터리함이 눈빛으로 전달됩니다. 더불어 1인 2역의 류아벨과 뭔가 서늘함을 풍기는 심은우의 서포트 또한 좋아서 연기와 분위기가 더 맛깔났던 것 같기도 합니다.
우진의 전사에 대해 디테일하게 나오진 않지만,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잘못이 현재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인이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법한 민간 토속신앙, 미신이라 여겨지는 삼칠일을 활용해 그러한 믿음의 형태가 묻어둔 죄책감을 가중시키고 팽팽히 조여오는 심리를 펼쳐냈기 때문이죠. 어쩌면 믿음을 떠나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막연함이 끝나지 않은 죄의식의 도화선을 건드려 서서히 한 인간을 잠식해가는 매우 독특한 설정이라 생각됩니다. 이래서 죄를 짓고 살면 안 된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
한 줄 평 : 깊은 곳에 남은 죄의식이 불러들인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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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자 감정, 정말 이게 다인가요?
6★/10★
물, 불, 흙, 공기 4개 원소가 ‘함께’ 살아가는 엘리멘트 시티. 이곳에 불끼리 모여 살다가 재난이 발생해 삶의 터전을 잃은 앰버네 가족이 이주해온다. 가족은 불을 주 손님으로 하는 가게를 꾸려 생계를 이어왔고 앰버네 가족은 여기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앰버는 엘리멘트 시티 공무원으로 일하는 웨이드(물)을 만난다. 둘은 처음에는 '불법’ 증축된 앰버의 가게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지만 이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결국에는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물은 불을 꺼뜨리고, 불은 물을 증발시킨다. 둘은 이 난관을 넘을 수 있을까?
영화에서 각 원소가 상징하는 바는 명확하다. 물은 백인이고 흙과 공기는 물(백인)과 적당히 어울릴 수 있는 존재의 은유이며, 불은 물과는 만나서는 안 되는 유색인의 은유다. 영화는 서로 만났을 때 큰일이라도 날 줄 알았던 물과 불의 접촉에서 파생되는 긍정적인 변화를 강조하며 인종 간 화합을 요청한다. 이민자 가족의 설움과 분노를 중간중간 녹여내기도 한다. 캐릭터도 매력적이다. 적당한 완성도를 가진 영화다. 하지만 ‘인종 간 접촉(그리고 사랑)을 통한 변화’라는 메시지는 2023년에 말하기에는 다소 고루하다. 인종에 따라 서로 다른 위계화된 공간에 살아가고, 그 경계를 넘는 일이 금기였던 시대에나 적합한 메시지다.
영화에서 앰버는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다. 영화는 ‘다혈질’인 앰버가 감성적이고 다정한 웨이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며 성격이 바뀌어가는 과정이 나온다. 그러나 유색인/소수자인 앰버의 화가 고작 편견 없는 백인 기득권과의 사랑으로 해소될 리가 없다. 앰버의 화에는 인종 정의의 복잡한 맥락이 담겨 있을 테니까. 그러나 영화는 여기에 주목하면서도 이를 제대로 해소하지는 못한다. 2023년에 인종 간 공존과 사랑을 이야기하려면 메시지와 질문이 조금 더 치밀하게 고민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언가 비밀이 숨겨 있을 듯 암시되다가 어느새 ‘해소’되고야 마는 소수자 감정(분노)을 더 밀도 높게 풀어냈다면 어땠을까 싶다. 이민자 2세가 부모에게 느끼는 애정‧존경과 부담감의 공존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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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팜 스프링스>, 여름의 열기를 식힐 수 있는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영화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팜 스프링스>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
<팜 스프링스>는 타임루프 세계관에 갇힌 나일스(앤디 샘버그)와 세라(크리스틴 밀리오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세라의 여동생의 결혼식이 열리는 날, 팜 스프링스 리조트는 사랑과 신나는 열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타임루프 세계관에 갇혀 '오늘'만을 살아가는 나일스는 이미 셀 수 없을만큼 많은 결혼식을 겪은 상태이다. 수많은 '오늘 결혼식'의 경험으로 앞으로 이어질 모든 사건들을 아는 나일스는 능숙하게 결혼식 축사를 얘기하고, 파티를 즐긴다. 하지만 우연한 사고로 인해 세라가 이러한 나일스의 세상에 개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일 없이 사는' 두 남녀의 썸머 코믹 로맨스가 시작된다.
우연히 나일스의 타임루프에 함께 갇히게 된 세라는 '오늘만 살게 된 시공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여러 시도를 해보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나일스도 '오늘'에서 벗어나고자 많은 시도를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고, 현실에 순응해서 살아가고 있던 것이었다.
현실을 인정한 세라는 나일스와 함께 파란만장하고 유쾌한 '오늘'을 살아나간다.
많은 '오늘'을 함께한만큼 둘이 나눈 이야기도 많았는데,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도 이 중 하나였다.
'오늘 하루가 반복되는 일'의 영향을 받은 나일스는 '현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도 흘러가고 있고, 결국 남는 것은 '현재'이기 때문이다.
반면 세라는 그 사람에 대해 더 알 수 있기에 다른 사람의 '과거'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이 장면을 보고, 이 대사를 들은 순간 잠시 나는 영화의 내용에서 벗어나 '나는 과거와 현실 중 어느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였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이 생각은 계속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누군가의 '과거'에 더 중점을 두는 것 같다.
이 이야기의 또다른 주요 인물은 나일스와 함께 타임루프 세계관에 갇힌 로이(J.K. 시몬스)이다.
로이는 세라가 타임루프 세계관에 갇히기 전, 여러 번의 '오늘'을 겪고 있던 나일스와 파티에서 만났다.
나일스와 함께 술을 마시며 신나게 놀던 로이는 '오늘 같은 날이 계속되었음 좋겠다'라는 말을 했고, 나일스는 술김에 오늘만 살게 해줄 수 있다면서 타임루프 세계관에 갇히게 되는 동굴 속으로 로이를 안내했다.
술이 깬 로이는 이 사실에 분노했고, 여러 번의 '오늘'이 반복되는 동안 계속 나일스를 죽이면서 복수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죽으면 또다른 '오늘'이 시작된다. 빠져나갈 수 없는 무한의 굴레인 것이다.
세라가 타임루프 세계관에서 빠져나가기로 결심하고 떠난 후, 혼자 남은 나일스는 세라의 빈 자리를 크게 느끼고 상실감을 겪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동안 자신을 죽이기 위해 찾아왔던 로이를 '직접' 찾아간다.
로이는 현실에 적응하고 본인만의 '안식처'를 찾아 살고 있었다.
로이의 안식처는 바로 아내와 두 딸이었다. 하지만 두 딸이 커 가는 모습을 로이는 영영 보지 못한다.
왜 이제 자신을 죽이러 오질 않느냐는 나일스의 질문에 로이는 이렇게 답한다.
- 상황은 변하는거야. 우선순위도 변하는거고.
그리고 세라의 빈 자리를 크게 느끼고 있는 나일스에게 말한다.
너의 안식처를 찾아보라고. 사람은 누구나 안식처를 가지고 있다고.
이러한 로이의 대사는 영화 속 상황에도 적합하지만, 동시에 우리 현실에도 적용되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타임루프'라는 소재 자체는 현실과 어울리지 않지만, 영화 속 인물이 건네는 대사들은 대부분 현실과 매우 어울렸고 적합했다.
이 점이 이 영화의 여러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세라가 다시 나일스를 찾아온다. 그리고 함께 이 타임루프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한다.
사실 그 동안 세라는 이 타임루프가 양자물리학과 관련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공부하러 간 것이었다.
'오늘이 무한히 반복되는' 타임루프의 이점을 이용하여 세라는 전문가보다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었고, 직접 실천하기 전 실험까지 마친 상태였다.
(세라가 영화 속에서 나일스에게 이것저것 설명했지만 사실 나는 한 번에 명확히 이해하진 못했다.
세라는 이과인 것 같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세라와 나일스의 의견은 갈린다.
세라는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나일스는 현재의 타임루프 굴레에 남으려고 한다.
나일스가 계속 남아있으려는 이유는 '진짜 현실'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나일스가 '과거'와 정상적인 시간 속에서 펼쳐질 '미래'들을 회피하려고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모습은 마치 과거나 미래, 혹은 현실마저도 회피하려는 내 모습 같다고도 생각하였다.
나는 가끔씩 지난 일들, 혹은 내가 마주한 현실이나 마주할 일들이 두려워서 무작정 회피하곤 한다. 숨곤 한다.
사실 회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없는데 말이다.
그 일이 무엇이든 일단 부딪혀보는 것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일이든, 내 눈앞에 펼쳐진 일이든, 앞으로 일어날 일이든, 뭐든.
결국 나일스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세라를 따라 이 세계관에서 벗어나고 '진짜 현실'을 마주하기로 결심한다.
진짜 이 타임루프에서 벗어나기 전, 계속 자신을 보면 질릴 수도 있다는 세라의 말에 나일스는
이미 우린 질릴만큼 봤다고, 난 괜찮다(좋다)
라고 대답한다.
나는 이 나일스의 대사가 유독 더 좋았다. 그냥 좋았다.
그리고 당신(나일스)과 함께라면 덜 지루할 것 같다는 세라의 말에 나일스는
기준점이 낮으니 됐다
라는 대답을 한다.
상대방의 기분까지 좋아지는 긍정적인 말을 한다는 것이 바로 나일스의 장점인 것 같다.
그가 가진 긍정적인 분위기는 스크린 바깥의 관객인 나에게도 와 닿았다.
참 밝고 무해한 인물이다.
정말 '밝고 무해한 웃음'을 주는 영화였다.
웃음코드가 나랑 엄청 잘 맞았는데, 특히 나일스와 세라가 함께 무한히 반복되는 '오늘'을 즐기며 살아가는 장면이 다 웃겼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영화관을 빠져나온 내게
과거와 현실 중 나는 어느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지,
혹시 나는 지난 과거를 회피하고 있진 않은지에 대한 깊은 성찰의 기회를 남겼다.
영화가 끝나고 집을 가는 길에서 계속 이 두 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예측할 수 없는 내용이 펼쳐지는 로맨스 코미디 영화 <팜 스프링스>는 다가오는 19일에 개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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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넷' 영화리뷰 및 과학해설(*스포없음)
영화 보기 전 봐도 좋은 영상"이 영상 그대로 여사친에게 설명해주면
여친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근데...난 여사친조차 없넹......이게 나라냐!!!!!"
- 테넷 과학 리뷰 제작 후기 by 건데
- 테넷 스태프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제작: 크리스토퍼 놀란, 에마 토머스
각본: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존 데이비드 워싱턴, 로버트 패틴슨, 엘리자베스 데비키 외
장르: 액션, 스릴러, SF, 첩보[2]
제작사: 신카피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촬영 기간: 2019년 5월 19일 ~ 2019년 11월 12일
개봉일: 2020년 8월 26일
음악: 루드비히 고란손
주제곡: 트래비스 스캇 - The Plan
편집: 제니퍼 레임
촬영: 호이트 반 호이테마
개봉 포맷: 2D · 4DX (2.20:1)[A]
Dolby Cinema (2.20:1[A] Dolby Vision|Atmos)
IMAX (1.90:1 / 2.20:1) 용산 IMAX 레이저 로고 (1.43:1 / 2.20:1)
상영 시간: 150분
제작비: 2억 500만 달러-시놉시스
당신에게 줄 건 한 단어 ‘테넷’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시간의 흐름을 뒤집는 인버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세상을 파괴하려는 사토르(케네스 브래너)를 막기 위해 투입된 작전의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 인버전에 대한 정보를 가진 닐(로버트 패틴슨)과 미술품 감정사이자 사토르에 대한 복수심이 가득한 그의 아내 캣(엘리자베스 데비키)과 협력해 미래의 공격에 맞서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아야 한다!
#테넷리뷰 #테넷해석 #테넷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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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해피엔드> 메인 예고편
점멸등이 일렁이는 근미래의 도쿄. 음악에 빠진 고등학생 ‘유타’와 ‘코우’는 친구들과 함께 자유로운 나날을 보낸다. 동아리방을 찾아 늦은 밤 학교에 잠입한 그들은 교장 ‘나가이’의 고급 차량에 발칙한 장난을 치고, 분노한 학교는 AI 감시 체제를 도입한다. 그날 이후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감독: 네오 소라 -출연: 쿠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 하야시 유타, 시나 펭, 아라지 -개봉: 2025년 4월 30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공동배급·제공: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류이치사카모토오퍼스 #네오소라 #Neo무비 #해피엔드 #Happyend #4월영화 #영화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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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루시드 드림> 예고편
제작자에게 잔소리를 듣던 감독은 조명사고로 인해 쓰러지게 되고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여러 장르의 꿈을 꾸게 된다.
기쁜 날을 빙자해서 돈을 사기 치려는 세계, 분노로 직장 상사를 죽이는 범지진, 사랑으로 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엄마, 기사가 실종되는 노선을 운행하게 된 아총의 공포가 즐거움으로 뒤바뀌는 꿈.
감독은 이 네 가지의 꿈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