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산2024-10-17 21:36:12
영화 '쑤저우강', 환상과 현실에 얽힌 두 개의 사랑
영화 <쑤저우강> 리뷰
영화 <쑤저우강(蘇州江)>은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의 흐름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두 개의 사랑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쑤저우강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도시인 소주(蘇州)에서 상하이의 황포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강입니다. 쑤저우강의 물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는 마치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유영하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로우예(婁燁) 감독은 1965년 생으로 상하이가 고향입니다. 이 영화는 3O대 중반에 익숙한 장소에서 찍은 감독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비디오 촬영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보고 들은 사실에 영감을 받아 시나리오를 쓴듯합니다. 영화는 이름도 얼굴도 나오지 않는 비디오 촬영기사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화자(話者)의 시선은 관객이 무대 뒤를 엿보는 듯한 느낌을 주며, 그로 인해 영화는 어딘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감독은 영화를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영상을 구성했습니다. 핸드헬드 촬영으로 흔들리는 영상이 주는 불안정한 감각은 등장인물들의 혼란을 관객이 느끼게 하며, 영화 전체에 미묘한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게 감정을 표현해 내는 배우들의 연기는 관객들을 영화에 빠져들게 합니다.
여주인공 저우쉰은 1인 2역(메이메이와 무단 역)을 맡아 두 개의 사랑 이야기를 서로 다른 캐릭터로 풀어냅니다. 각기 다른 두 인물을 연기하면서도 두 사람의 공통된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여, 두 사랑 이야기가 결국 하나로 연결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1인 2역의 여주인공을 보며 두 사람이 결국 같은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화자(話者)는 우리의 생각을 깹니다.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은) 하나도 안 닮았다."라고 말하며 상황을 모호하게 남겨둡니다.
남자 주인공 자홍성(마다 역)은 쑤저우강의 탁류처럼 혼란스러운 청춘의 내면을 절제된 연기로 담아냅니다. 말보다 눈빛과 몸짓으로 많은 것을 전달하며, 이루지 못한 사랑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씨네랩의 영화 크리에이터로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아 좋은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시사회 이후 정성일 평론가가 진행한 라이브러리 톡도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영화는 아날로그 필름 원본을 디지털로 변환해 24년 만에 고품질 영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스크린을 통해 쑤저우강의 풍경과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를 경험하면 감동은 배가될 것입니다. 핸드헬드 촬영으로 전달되는 불안하면서도 환상적인 감정을 극장에서 직접 느껴보시기를 권합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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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을 바꾼 그 날의 기억 저 끝에 매듭진 모두의 역사
어떤 기억으로부터 멈춰버리는 시간이 있다. 누군가와 행복한 한때였거나, 숨어버리고 싶었던 부끄러운 감정, 슬프지만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한 다짐의 의지, 그 어떤 것이라도 좋다. 우리는 지워버릴 수 없을 감정과 경험을 모조리 쓸어 담아, 일 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는 숫자에 모아두었다. 여전히 시간은 흐른다. 두 개의 시간 사이 새롭게 만들어진 일들을 차곡히 보관해 둔 상자만이 이정표처럼 멈추어 서 있다. 그곳을 출발점 삼아 우리는 다시 숫자를 세고 기억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모두가 하나의 배만을 바라보던 그 날 우리는 또 하나의 상자를 만들었다. 4월에 멈춘 채 많은 일이 담기었던 기억의 날로부터 어느덧 7년이 지났다. 다큐멘터리 영화 〈당신의 사월〉은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세월호의 가족들로부터 시선을 돌려 이제 모두의 세월호가 된 기억에 관해 이야기한다. 아픔의 역사를 가장 개인적인 일상에서 끌어올린 영화는 모두가 경험한 서사의 얼개로 관객의 지난 7년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나 또한 누구도 피할 수 없던 7년 전 그날에 서 있던 자신을 다시 떠올려 보기로 했다.
4월 16일 인천항에서 제주로 가는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포털의 메인 뉴스가 나의 첫 기억이었다. 강의 내내 뉴스 페이지를 몇 번이고 새로 고치며 스마트폰만 들여다보았다. 동아리방의 친구들은 대부분 우려와 안타까움, 그리고 약간의 무관심을 첨가한 자신만의 기분을 안고 분 단위로 변하는 상황에 관해 몇 마디씩 거들었다. 방송사마다 특보를 내보냈고 같은 구도의 항공 사진과 실시간 영상을 틀어주었다. 한결같은 화면에도 은근히 달랐던 목소리 안에는 재난상황의 정확한 전달 대신 피해자의 보험료와 자극적인 인터뷰가 담겨있었다. 생긴 지 불과 3년밖에 안 된 종합편성채널의 존재는 여전히 적응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나를 더 무섭게 만들었던 건 전원 구조 자막을 띄운 지 몇 시간도 안 되어 그와 정반대의 소식을 접하고, 탑승자의 숫자가 늘어나고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그 어처구니없던 무지의 혼란, 그리고 점점 해가 지는데도 배 안에 사람들이 갇혀 있다는 뉴스가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SNS에서는 실시간 피드로 현 상황을 평가했고, 사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분노로 타임라인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배는 검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골든 타임, 민간 잠수부, 컨트롤 타워, 팽목항, 에어포켓. 낯선 단어들이 종일 눈과 귀를 맴돌았다. 누군가의 절규와 분노, 죽음의 절망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비현실적인 일상에 야속한 숫자 카운트만 늘어갔다. 악화일로에 치달은 현장을 바라보는 제삼자의 슬픔과 두려움은 어느새 분노와 무력감이 되었다. 국가와 정부는 신뢰를 잃었고 의심은 쌓여갔다. 죽어가는 이들 앞에서 애써 상황을 축소하고 몰아가려는 노골적인 행태에 평정심을 잃은 피해자들은 거리로 나왔다. 언론은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갔고, ‘피해자다움’이라는 가이드라인에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언제든지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국가가 손을 놓아버린 현실에 절박한 연대의 외침은 평범한 일상을 앗아간 이들을 반정부 종북 세력으로 몰아갔다. 이념적 갈등을 부추긴 이들은 세월호라는 단어에 수십 겹의 프레임을 덧씌웠고, 생존과 진실을 향한 필사적인 투쟁은 격화되었다. 누군가는 평범한 일상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다른 누군가는 가족을 잃고 불의한 사회에 저항하는 운동가가 되어 있었다. 그 악순환의 끝에는 곡기를 끊은 광화문광장의 부모를 향한 증오의 말과 폭식 투쟁. 정치적 공방에 휩쓸려 분열된 피해자들에 가해진 또 다른 상처가 있었다. 그때는 지겹다는 말이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터져 나온 혐오와 광기의 시대였다. 나는 누군가가 예상치 못한 비극으로 일상이 바뀌는 사회를 바라지 않는다. 삶의 이정표가 바뀌는 순간을 단지 우연과 운명으로 넘어가기에는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너무도 크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극과 전진은 너무도 자연스레 수레바퀴의 빗살처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불안과 공포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세월호 피해자의 공허한 외침을 들은 이 모두에게 앙금이 되었다. 시간은 지났고 누군가는 처벌을 받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치유가 아니란 사실은 자명했다. 분노는 곧 죄책감과 미안함이 되었고, 사람들은 광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국정농단 행위는 국가적 참사에서도 예외가 없었고 부당한 권력과 죽음을 끝내기 위해 시민들은 청와대로 향했다. 누구보다 큰 상처를 받았을 세월호 가족들은 시민들에게 도시락과 촛불을 건네며 감사와 응원을 보냈다. 비극으로 송두리째 바뀐 누군가의 삶을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이들은 함께 기억하고 싸우기로 했다. 100만 명이 모이고, 청와대가 움직였다. 거대하게 보였던 국가권력이 시민의 힘으로 끌려 내려진 순간이었다. 영화를 보며 2018년 추웠던 겨울 광장 앞을 다시 떠올렸다. 모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던 그 공간에는 시민들의 열기와 알 수 없는 해방감이 존재했다. 다 함께 같은 목소리를 냈던 그 연대를 떠올리면 외롭고 그리워졌다. 각자의 목소리가 얽혀 하나로 이어졌던 시간이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의 감정에서였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호의 오늘은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강력한 명령처럼 우리를 붙잡는다.
출처 | 다음 영화
7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진상규명은 진행 중이다. 세월호 가족들은 자신의 반대편에서 들었던 말을 고스란히 같은 쪽 사람들에게 듣고 있었다. 새로운 권력이 등장한 이후, 세월호 가족들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있던 자리에 이제는 공수가 바뀐 시민단체가 모여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뱉어내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민주주의는 태생적으로 모두에게 같은 크기의 힘을 쥐여준다. 그렇기에 타협과 관철의 시간은 길고 느리게 흘러간다. 변하는 듯 변하지 않는 현실을 직면한 그들에게 지난 4년은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아직 기억의 상자는 채워지고 있고, 그들의 삶도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에게 물었다. 때로는 뒤로 후퇴하고, 때로는 멈춰있는 진실과 시간 앞에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사회적 참사로 평범한 시민이 투사가 되었다.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우리는 촛불을 들었다. 모두의 마음에 깊이 들어온 아픈 사월은 자연스럽게 잊히고 있다. 고통을 망각하는 생물학적 반응을 이기는 해답은 끊임없이 기억하고 버티는 것이다. 광장에서 마이크를 잡았던 선생님은 매년 학교에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행사를 주최한다. 통인동이 열렸던 그 전율의 순간을 체감했던 카페 사장님은 손님에게 세월호 리본을 건네준다. 진도의 참극을 목전에서 바라본 어부는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텐트를 옮겨 놓았다. 각자의 방식대로 끈질기게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 당사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 사람의 아픔에 온전히 다다를 수 없다. 그래서 영화는 누구도 아닌 당신의 기억 속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모두의 기억이 된 사월의 세월호는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의 기억 속 매듭지어 놓은 세월호의 리본은 여전히 단단하게 묶여있을 것이다.
【7주기 기억추모행사】
* 온라인 행사 *
<4월의 기억마스크> 펀딩 : ~4/16
<사이버 추모관> 운영 : 4/5~4/30 (416remember.net)
<기억의 물결> SNS 프로필 '노란 리본' 달기 캠페인 : 4/1~4/30
* 오프라인 행사 *
<기억식> 안산+온라인 : 4/16
<세월호 기억관> 개관(광화문 광장) :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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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더라는 자리에 대하여
김남길과 손예진 주연의 해적을 정말 재밌게 봤던 터라 이번 영화 <해적: 도깨비 깃발> 역시 괜찮겠거니 했는데 잘못된 기대였다. 영상미와 영화음악은 박진감 넘치고 압도적이었으나 다른 부수적인 것들이 그 재미를 깎아내린 작품이었다.
영화 <해적: 도깨비 깃발> 시놉시스
가자, 보물 찾으러!
해적과 의적, 그리고 역적
사라진 보물! 찾는 자가 주인이다!
자칭 고려 제일검인 의적단 두목 무치와 바다를 평정한 해적선의 주인 해랑. 한 배에서 운명을 함께하게 된 이들이지만 산과 바다, 태생부터 상극으로 사사건건 부딪히며 바람 잘 날 없는 항해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왜구선을 소탕하던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왕실의 보물이 어딘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해적 인생에 다시없을 최대 규모의 보물을 찾아 위험천만한 모험에 나서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라진 보물을 노리는 건 이들뿐만이 아니었으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역적 부흥수 또한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든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해적: 도깨비 깃발>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영화의 분위기 다 살린 bgm과 영상미
음향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준 영화 <해적: 도깨비 깃발>. 이 작품은 음향이 반을 먹고 들어간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bgm을 잘 쓴 작품이었다. 배우들의 안타까운 연기력을 보면서 산만해질 때마다 긴박함, 웅장함, 서늘함 등 다양한 영화 속 분위기를 자아내고 국악의 다채로운 매력을 영화 속에서 즐길 수 있어서 굉장히 좋았다. 더불어 한국의 CG가 정말 많이 발전했다는 사실도 한 번에 느낄 수 있었다. 해저 지진으로 인해서 바다 속으로 빨려들어갈뻔한 마지막 장면을 보면 손에 땀이 다 날정도로 엄청난 생생함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바다라는 특성상 CG작업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텐데 티가 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웅장한 바다의 모습을 잘 보여줬다는 점은 칭찬할만했다.
왜 그랬을까,,, 대사 톤이 왜 그럴까
하지만 너무나도 안타까웠던 한효주와 권상우. 한효주의 삑사리 나는 듯한 대사톤과 권상우의 혀짧은 발음이 유독 거슬리는 작품이었다. 정말 차리리 표정 연기와 bgm만 남기고 대사를 다 없애버렸을면 참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효주와 권상우가 입을 열 때마다 몰입이 방해가 돼서 왜 감독을 오케이컷을 했는지 보는 내내 궁금하고 답답했다. 권상우의 발음 문제는 그동안 많이 지적되어 왔던 문제기에 어느정도 감안은 했지만 사실 한효주가 이렇게 대사톤이 어색했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어서 그동안 그렇게 거슬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이 작품에서 유독 튄다는 느낌을 받을까? 무엇이 문제일까? 영화를 보며 의도치 않은 배우의 연기력에 대해 고심을 했던 순간이었다.
대가리라는 자리가 원래 그래
“단주라고 챙겨주는 거 하나 없잖아! 고생만 다하고!” 번개섬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을 아는 막이가 사람들을 향해 단주가 되어서 부려먹기만 하는 선원들을 향해 하는 말이다. 단주 해랑이 막이에게 임시적으로 단주의 자리를 내어주면서 권력욕과 감투욕이 있었던 막이는 세상 행복해한다. 하지만 단주라는 자리는 생각보다 쉬운 것이 아니었다. 단주에 올랐다고 해서 사람드리 무조건 따르고 위신을 세워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잘난 맛에, 그리고 자신의 이득만 취해서도 안되고, 선원들의 가족까지 생각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단주라는 자리만 가지면 자신이 원하는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막이는 생각보다 넘쳐나는 책임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단주자리를 내려놓으려 한다. 그와 반대로 의적대장과 단주였던 무치ㅘ 해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부하를 먼저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따르는 리더는 그 방법이 다를지라도 마음만큼은 자신의 부하들의 안전과 행복을 지극히 바라고 노력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리더라는 자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배우들의 연기력에 한숨이 나오긴 했지만 타임킬링용으로 그리고 영화음악을 즐기는 용도로는 나쁘지 않을 작품 <해적: 도깨비 깃발>. 하지만 개연성이나 연기력이 중요한 분들에게는 딱히 추천하지는 않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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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란하기만 한 뇌신의 사랑법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타노스와의 전쟁이 끝난 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합류한 천둥의 신 '토르(크리스 헴스워스)'는 새로운 동료들과의 모험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 공허함을 달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주의 모든 신들을 몰살하려는 신 도살자 '고르(크리스천 베일)'가 등장하고, 토르는 그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급히 뉴아스가르드로 돌아간다. '킹 발키리(테사 톰슨)'와 전 여자 친구이자 부서진 묠니르를 휘두르는 '마이티 토르'가 된 '제인(나탈리 포트만)'과 재회하여 고르의 습격을 막아낸 토르. 그는 '제우스(러셀 크로우)'를 비롯한 신들의 도움을 얻어 고르의 복수와 더 많은 신들의 죽음을 막기 위한 새로운 모험에 나선다.
<토르>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인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우주로 떠난 토르의 후일담을 다룬 작품으로, 전작인 <토르: 라그나로크>의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다시 한번 메가폰을 잡았다. 그래서인지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전작과 유사한 스타일을 유지한다. 이별했던 애인과 무기와의 재회가 낳은 토르의 개그와 유머는 오프닝 로고를 포함해 적재적소에 힘을 준 올드락과 어우러지며 전반적으로 경쾌한 분위기를 불어넣는다. 전작에서 장족의 발전을 보여줬던 액션씬도 여전히 호쾌하다. 토르의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살린 장면들은 물론이고, 분리도 가능해진 묠니르를 활용한 망치 액션도 인상적이다.
또한 색상을 명징하게 대비하는 만화적 연출도 눈에 띈다. 특히 그림자 영역(shadow realm)에서의 전투씬이 압권이다. 화려한 색감으로 무장한 토르와 마음 가득한 절망을 표현한 듯 명암의 대조만 남은 고르의 대결은 두 캐릭터의 능력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면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런데 이 모든 장점이 한 데 모였는데도 <토르: 러브 앤 썬더>의 몰입도는 떨어지고, 토르의 이야기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으며, 심지어 토르라는 히어로의 존재감도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왜냐하면 스타일은 화려할지 몰라도, 10여 년 간 쌓아 올린 토르라는 슈퍼히어로의 캐릭터성과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토르: 러브 앤 썬더>의 가장 큰 특징은 MCU의 히어로 중 네 번째 솔로 영화가 나온 첫 사례라는 사실이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도 삼부작으로 시리즈를 끝내고 퇴장한 가운데, 유독 토르만 다시 한번 솔로 영화로 돌아온 것이다. 이는 전작인 <토르: 라그나로크>를 기점으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을 거치며 토르라는 캐릭터가 성장할 수 있는 다른 방향성이 제시되었기에 가능했다. 그간 아스가르드의 왕자인 토르는 오딘의 후계자로서 아스가르드의 왕위에 올라야만 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왕위의 무게감이 주는 책임감과 부담을 견뎌야 하는 역경과 시련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토르: 라그나로크>를 기점으로 토르는 왕이 되어야만 하는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 왕이 아닌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 정체성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수호자이고, 다른 하나는 신이다. 아스가르드의 멸망인 라그나로크를 막기 위해 수르트를 처치한 것, 사카아르 행성에 갇혀 있던 와중에도 아스가르드로 되돌아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것, 한쪽 눈을 잃어가면서까지 아스가르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헬라에게 저항한 것. 이 모든 것은 토르가 왕으로서 한 일이 아니었다. 단지 아스가르드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가 끝내 아스가르드의 왕좌에 앉은 것 역시 같은 연장선상이다. 토르는 오딘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아스가르드를 보호하는 수호자였기에 왕이 되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그가 타노스를 향한 복수심에 불탄 것도, <엔드게임>에서는 끝내 아스가르드를 지키지 못했다며 깊이 절망한 것도 그가 왕이기 이전에 아스가르드의 수호자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천둥의 신으로서의 정체성도 확립해 나간다. 왕위 계승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던 시리즈의 첫 두 편과 달리 전작인 <라그나로크>에서 유달리 그가 신이라는 사실이 강조된 이유다. 헬라는 그에게 왕의 자격보다도 그가 무슨 신이냐고 묻고, 오딘은 그가 망치의 신이 아니라 천둥의 신이라고 일갈하며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그래서 묠니르를 잃은 대신 토르는 뇌신으로서 각성해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활용하게 된다. <엔드게임>에서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가 마침내 마음을 다잡고 타노스와 맞서는 순간, 러닝타임 내내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던 천둥의 신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타노스와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발키리에게 아스가르드의 왕을 맡긴 채 우주로 떠날 수 있었다. 더 이상 왕이 아닌 토르는 수호자이고 신으로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탐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4편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래서 <토르: 러브 앤 썬더> 속 토르는 수호자로서, 또 신으로서의 여정을 지속하고, 새로운 캐릭터와의 만남을 통해 두 정체성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한다. 우선 수호자로서 토르는 제인과의 재결합을 통해 수호자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자격이 사랑임을 깨닫는다. 사실 토르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함께 전우주를 돌아다니며 여러 외계 행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나서지만, 항상 상실감에 시달린다. 그들을 지켜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토르에게 제인은 다르다. 이미 모든 가족과 친구를 잃은 토르에게 그녀는 그가 지킬 수 있고, 지켜야 할 이유가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토르와 제인의 재회는 자연스럽다. 즉, 제인을 향한 사랑은 수호자로서 토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된다. 그가 묠니르에게 그녀를 지켜달라고 부탁했기에 제인이 마이티 토르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도, 홀로 고르를 상대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제인을 보호하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수호자로서 토르의 서사를 로맨스와 결부시킨다.
한편 신 도살자인 빌런 고르와의 서사는 토르가 신으로서의 자격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된다. 이때 <토르: 러브 앤 썬더>에서 강조되는 신의 자격 역시 보호와 사랑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먹을 음식과 마실 물조차 없어 딸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신에게 헌신했던 고르. 그러나 정작 신이 그들을 보호하거나, 자신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분노하여 신 도살자가 된다. 이러한 고르의 분노는 인간과 신 사이에 상호 호의가 있어야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고대인들의 믿음을 연상시킨다. 고대 종교적, 신화적 질서 안에서 신은 인간에게 삶과 세상을 베풀고, 인간은 신이 베푼 세상에 대한 감사함과 그 세상을 앞으로도 유지해줄 것에 대한 기대를 헌신으로서 보답하며, 이에 신은 다시 인간들에게 호의를 베푼다.* 영화는 고르를 통해 이 질서를 신의 사랑과 사랑하는 이들을 보호하는 책임으로 재해석한다.
이는 고르의 분노가 향하는 대상이자, 고대의 대표적인 인격신인 토르와 제우스의 갈등 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작중 신 중의 신으로 등장한 제우스는 고르를 사전에 제압하기 위해 지원군을 보태 달라는 토르의 부탁을 거절한다. 제우스는 신들을 사랑했고 또 믿었던 인간의 분노가 낳은 재앙은 외면한 채 자신의 목숨만 부지하려 한다. 쿠키영상에서 그는 인간들이 토르와 같은 히어로만 사랑하고 정작 신은 사랑하지 않는다며 토르에게 복수하려 하는데, 이는 자업자득이기도 하다. 고르에게 납치된 아이들의 믿음에 응답한 토르와 달리 제우스는 사랑에 따르는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호자이자 신으로서 토르의 존재 의의는 이제 사랑에 달려 있게 된다. 모든 신을 죽이려는 찰나에 고르가 토르의 사랑을 보고 예상외의 마지막 선택을 한 것, 토르에게 다시금 지켜야 할 가족인 '러브(인디아 로즈 헴스워스)'가 생긴 것이 이를 방증한다. 또한 이는 아스가르드의 왕 대신 수호자와 천둥의 신으로서의 성장을 완결시킨 토르의 후일담 제목이 '러브 앤 썬더'인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작중 마침내 수호자와 신으로서의 정체성을 꽃피운 토르보다 그의 성장을 돕는 두 조역, 제인과 고르의 서사가 더 빛난다는 점이다. 이는 전작의 유쾌한 분위기는 유지했지만 정작 웃음 뒤에 슬픔을 숨기는 토르의 캐릭터성을 살리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간 토르라는 캐릭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상실감'이었다. 가족과 고향, 무기와 친구,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잃어버리면서 그는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신이라는 완벽함 대신 인간성을 갖게 되었다. 그렇기에 어떤 일에도 무너지지 않는 진취적인 태도, 거기서 기인한 그의 유쾌함과 웃음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가슴 깊이 남아있는 아픔과 흉터, 상실감을 애써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는 그의 모습이 개그로 표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엔드게임>에서 뚱보가 된 토르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동시에 상처 입은 그의 내면을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잘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제우스가 토르의 옷을 벗기는 개그 장면에서도 그의 등에 로키의 죽음을 기리는 문신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러브 앤 썬더> 속 토르에게서는 그의 웃음 뒤에 자리 잡고 있을 아픔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토르는 그저 염소들에게 시달리고, 묠니르와 스톰브레이커의 삼각관계 안에서 동일한 개그를 반복할 뿐이다. 감독판을 원한다는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과 크리스 햄스워스 언급대로 많은 장면이 편집된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MCU의 대표 캐릭터에게 기대할 법한 무게감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그의 성장을 돕는 제인과 고르의 진중한 이야기는 전반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고,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크리스천 베일의 연기를 만나 탄생한 고르는 조커를 연상케 할 정도로 섬뜩하고, 제인과의 로맨스는 그나마 토르가 진지해지는 순간이기에 오히려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신의 서사를 완결 짓는 결정적인 순간에 정작 토르의 존재감은 부족해진다. 그로 인해 영화의 전개와 구조는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느껴지고, 이는 아이들에게 토르의 힘을 나눠주는 장면처럼 영화의 유쾌함이 유치함의 선을 자주 넘나드는 문제로 이어진다.
MCU에게도 어벤져스 원년 멤버인 토르의 실패는 큰 타격일 수 있다. <토르: 러브 앤 썬더>는 토르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매듭지음과 동시에 다시 한번 세계관의 확장을 시도한다. 헤라클레스를 비롯한 더 많은 신들과 발할라라는 새로운 배경을 등장시키면서 그 스케일을 더욱 키우는 두 개의 쿠키 영상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페이즈 4 이후 커지는 세계관에 비해 각 영화의 완성도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토르: 러브 앤 썬더>도 피하지 못한 이상, 이러한 선택이 과연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이는 과거 케빈 파이기의 발언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비법을 묻는 언론의 질문에 대해 "세계관을 걱정하지 마라. 영화를 걱정하라(don't worry about the universe. Worry about the movie")"라고 답한 바 있다. 과연 지금의 마블은 작품 하나하나를 걱정하고 있는 걸까? 적어도 <토르: 러브 앤 썬더>는 그렇지 않다는 심증에 확신을 더해준다.
D(Dreadful, 끔찍한)
유쾌함과 경박함 사이에서 방황하는 천둥의 사랑
*Byron E. Shafer et al, Temples of Ancient Egypt.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97),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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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타리에 갇힌 사람들
킹덤 : 아신전
줄거리
조선을 뒤흔든 좀비 사태, 그 시작에는 아신이 있었다!
울타리에 갇힌 사람들
숨은 의미 찾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해석이니 원치 않는 분들은 영화 감상 후 읽어주세요*
조선의 북녘 끝자락, 압록강을 바라보는 자리에 위치한 번호부락.
애매한 위치만큼이나 마을 사람들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도 애매하다. 그들은 100년 넘게 조선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조선인에게는 여진족이라 불리고, 여진족에게는 동족을 배신한 무리라고 손가락질당한다. 추성훈이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이라 불리고, 한국에서는 일본인이라 불린다던.
아신전은 킹덤에서 내내 언급되던 '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금 끄집어낸다.
타합은 성저야인이 모여 사는 번호부락의 대표자이자 백정이다. 도축을 하는 백정은 천민 계급 중에서도 멸시당하던 계급이었다. 고기를 사러 온 조선인은 타합이 자신들의 짐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싫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대는 물론이고, 아이가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게 한다. 이 짧은 장면에서 번호부락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흙이 묻은 고기를 집어 드는 타합의 손에 피가 흐른다.
그것은 조선인의 것도, 여진족의 것도 아니다.그들은 영원히 조선에 섞일 수 없다. 그리고 섞이지 못함은 죄가 된다. 어떻게든 곁다리를 걸쳐보려 해도, 공물을 바치고 온갖 충성을 다해도 타합에게는 관직 하나 내려지지 않는다.
그들은 조선인과 여진족 사이에 고립되어 존재를 부정당한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타합은 결국 파저위에게 ‘피를 배신한 밀정’이라고 낙인찍혀 죽임 당하고 번호부락은 몰락한다. 어떻게든 조선 땅에 머물고 조선인으로 인정받고자 노력했던 시대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홀로 남은 아신은 ‘독한 년’ 소리를 들어가며 그저 묵묵히 살아남는다.
아신은 아버지와 달리 ‘파저위에 대한 복수’를 목표로 설정한다.
조선에 속하고 인정받는 일 따위는 그녀에게 관심 밖의 일이다. 그저 복수 외에 그녀는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노예를 자처해 아무 대가 없이 궂은 일을 해도, 사람들에게 험한 꼴을 당해도 저항 한 번 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에게 ‘사람 대우’ 받기를 포기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타합이 첫 장면에서 돼지를 썰던 것, 아신이 돼지우리를 거처 삼아 자던 점을 생각하면 고통이 대를 이어 계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호 부락은 끝끝내, 죽어서까지도 애도조차 받지 못하는 ‘오랑캐 마을’ 일뿐이다. 추파진에게 타합과 아신의 희생은 지극히 당연하고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사실 아신은 계속 괴물이었다.
가족과 마을을 잃은 날, 아신의 마음에는 분노의 싹이 텄다. 저 대신 복수를 해달라고 민치록을 찾아갔으나, 민치록 역시 자신이 복수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신은 꾹꾹 눌러 담아 참아오던 분노를 터트린다. 복수를 시작한다.
“조선땅과 여진 땅에 살아있는 모든 걸 죽여버리면, 나도 당신들 곁으로 갈 거야.”
괴물로 변한 번호부락 사람들은 아신의 내면을 그대로 표출한다.
추파진 군사들이 아신이 마을 사람들의 시체를 모조리 묻고 왔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실은 아신이 생사초를 먹였다가 모두 괴물로 변한 상태였다. 그 사실이 마지막에야 드러나는 이유도 아신의 심경변화에 있다. 그녀는 산짐승을 잡아다 주며 그들을 보살펴왔다. 하지만 그들이 원한 것은 사람의 피와 살이었다.
마찬가지로 아신은 조선이 파저위에게 복수를 해줄 것이란 헛된 희망과 믿음으로 자기 내면의 분노를 다스리고 있었다. 남들 눈에는 그저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제 나름대로는 분노가 튀어나오지 않게 참는 것뿐이었다. 결국 그녀가 원했던 것은 번호부락을 몰락에 빠트린 모두의 피와 살이었던 것.
음식을 나눠먹고 웃음이 가득하던 번호부락은 더 이상 없다. 아신 역시 안다. 행복했던 그 시절은 그저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뜨거운 분노와 차가운 복수심뿐이다.
아신은 생사초를 먹지 않았으나, 결국 피와 살을 취하는 괴물이나 다름없다.
번호부락의 ‘번호’는 ‘울타리 번’, ‘오랑캐 호’ 자를 쓴다. 이를 의역하면 ‘북방 경계에 울타리를 이루고 사는 오랑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번호부락이라는 단어조차 그들을 오랑캐로 낙인찍고, 그들을 울타리에 가둬 북방에 고립시키며, 조선인과의 선을 긋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묻고 싶다.
아신을 괴물로 만든 것은 과연 누구냐고.
진짜 울타리에 갇혀있던 것은 누구였느냐고.
피의 역사, 그 시작
감상평
이창과 서비를 만난 아신을 기대했는데, 내심 아쉬웠다. 하지만 킹덤 프리퀄이라니 재미없을 수가 없다. 이쯤 되니 작가 양반 진짜… 이 모든 걸 설계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빨리 킹덤 3도 내놔요.
아, 올 때 시그널 2도 같이…어쨌든 킹덤은 ‘피’라는 단어가 늘 관통한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다.
이창과 아신의 만남이 기대되는 이유도 그렇다. 쉽게 비유하자면 해원 조 씨가 슬리데린 같이 적법한 혈통, 순수 혈통을 중요시하는 편이라면 이창은 그리핀도르 타입이랄까.
마땅히 권력을 잡아야 할 핏줄이 없다고 믿는 이창이니만큼, 마땅히 죽어야 하는 핏줄 또한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창이 아신과 대립하더라도, 분명히 아신을 괴물로 여기지만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선다.
아신전은 피의 역사, 그 시작을 향해 간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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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별의 슬픔을 아이 같지 않게 이겨내는
제12회 스웨덴영화제 개막식 & 개막작 <코미디 퀸> & 관객과의 대화
이번 주 수요일에 스웨덴영화제 개막과 함께 개막작 <코미디 퀸>을 본 후 시네마 토크가 진행됐다. 이날 무료 포토 부스가 있었다고 하는데, 시간이 촉박했던 나는 사진을 찍지 못했다. 다른 분들의 사진을 보니 개막식을 기념하기에 좋아 보였다.
영화제의 개막식은 처음이라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는데, 주한스웨덴대사 다니엘 볼벤과 한서문화예술협회장님, 영화사 백두대간 대표이사님의 축하 인사가 진행됐다. 이번 스웨덴영화제의 선정 영화를 다 본다면 스웨덴이라는 나라의 퍼즐을 다 맞춰볼 수 있을 거라는 백두대간 대표님의 말씀이 인상 깊었다. 예전부터 퀴어문화를 다루던 스웨덴 영화의 역사와 최근에 주목받기 시작한 최초의 추상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의 생애, 워낙 유명한 즐라탄의 전기, 스웨덴의 가정사부터 정치까지 정말 다양한 주제의 영화들이 선정되어 있어서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칸영화제 수상작이 2개나 포함되어 있으니 작품성은 말할 게 없을 것 같고. 스웨덴과 한국의 문화를 이야기하는 자리는 처음이라 더욱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코미디 퀸>은 13살이지만 성숙하게 슬픔을 이겨내려는 소녀 사샤의 이야기이다. 스웨덴영화제 대표 포스터에서 워낙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는 소녀여서 이런 슬픔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영화 중후반부에는 이곳저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릴 만큼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죽음을 선택한 사람의 주변 사람들이 겪는 깊은 슬픔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었고, 누구보다 성숙하게 슬픔을 이겨내려는 사샤의 모습에 감탄하기도 했던 영화였다.
+ 개인적으로는 아기자기한 스웨덴의 가정집을 보는 것도 재밌었다. 사샤의 개그 영감 노트도 굿즈로 팔아줬음, 좋겠다는 생각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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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과 안톤쉬거의 동전
예술은 꾸준히 변화해 왔다고 생각한다. 미술, 시, 소설, 건축, 조각 등 옛 과거부터 존재했던 예술들이 꾸준히 발전하고 시대에 맞게 변화하며 현대적인 예술들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가장 복합된 예술은 바로 영화라고 생각한다. 시각적인 미를 부여할 수도, 청각적인 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극문학을 좀더 현실성있게 실감나게 만들 수도 있고, 대사 하나하나만으로도 인간의 감정을 표현 할 수 있다. 가장 복합적으로 감독이 의도함에 따라 많은 것들을 시사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림, 시, 극문학, 영화 등의 형태는 단지 예술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수단이 변한다고 해서 시대를 거슬러 일맥상통하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 속의 '이야기'는 그 예술이 만들어진 시대를 반영하고 그 시대의 흐름을 끌고 간다. 가장 강력한 형태의 이야기는 바로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비극은 대부분의 시대에 존재해 왔다. 위에서 말했듯이 시대를 거슬러 일맥상통하는 가장 강력한 이야기가 비극이라는 뜻이다. 디테일은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시대의 아픔과 불안함을 표현하는 방식이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수 많은 비극들이 뛰어난 평가를 받아왔다. 나는 그 중 '멕베스'를 가장 선호한다. 가장 고전적이고 통상적인 요소들을 가지면서도 인간의 심리들을 여러 캐릭터들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비극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현대로 와서 가장 최근의 작품들 중 최고의 비극은 이제부터 이야기 할 코엔형제의 2007년도 작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생각보다 단순하다.연쇄살인마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과 우연히 마약상들의 돈가방을 발견한 사냥꾼 르웰린 모스(조쉬 브롤린)의 돈가방을 향한 추격전과 그 흔적을 쫓으며 사건을 조사하는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의 액션 스릴러 및 추격극 정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한 상업적 목적의 추격극이 아니라는 것을 이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그리고 영화의 첫 나레이션과 살해 장면에서 주는 압박감에서 부터 느낄 수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사냥감과 사냥꾼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안톤 쉬거는 동기없는 살인마이다. 그는 소 도축기와 비슷한 작동을 하는 공기총을 들고 자신만의 규칙에 맞춰서 자신의 길 앞에 놓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해해 나아간다. 그의 사냥감은 무작위로 자신의 앞에 놓이게 되고 그는 '동전 던지기'라는 자신만의 규칙 속에서 하나하나 사냥해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안톤 쉬거 본인 또한 자신이 누구를 죽이게 될지 모르는 혼돈 속에서 산다. 반면, 르웰린 모스는 전통적인 사냥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수 많은 무리의 가젤 중 자신이 고른 한 마리만을 선택해서 사냥하고 그 사냥감을 놓쳤을 때도 피의 흔적을 따라서 끝까지 추적한다. 그는 영화의 초반 자신이 쫓던 사냥감을 따라가다가 마약상들의 전투 흔적을 보고 거기서 돈가방을 찾게 된뒤 한순간에 자신이 이제는 사냥감임을 직감했다. 르웰린은 과거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으로서의 경험들을 살려서 자신을 쫓는 누군가에게서 달아나기 위한 움직임들을 보인다. 그는 나름 변칙적이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생각했지만 사실 쉬거에게 항상 추격을 당하고 있었다. 러닝 타임 두시간 동안 별것 없어보이지만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고요한 추격전이 이어지고 우리는 충격적인 결말을 마주하게 된다.이 영화 최고의 장면을 뽑으라고 한다면 누구나 주유소에서의 쉬거와 한 노인의 대화와 동전던지기를 뽑을 것이다. 그 장면은 연출, 촬영 등등 정말 많은 부분에서 완벽하지만 가장 완벽한 부분은 대사라고 볼 수 있다. 단 한장면으로 안톤 쉬거가 어떠한 법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살인마인지를 소개해낸다. 그는 모든 것을 운에 맡긴다. 마치 영화 다크나이트 속의 투페이스가 던지는 동전과도 비슷하다. 운명 그 자체를 동전의 양면에 비유하면서도 전혀 예측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크나이트 속의 투페이스의 동전등 다른 영화 속 동전던지기에서는 사실 결과를 어느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상황의 맥락을 통해 자신의 무엇이 걸린 동전 던지기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톤 쉬거의 동전은 다르다. 영화를 보는 우리와 쉬거 본인은 무엇이 걸린 동전 던지기인지 알지만, 게임에 참가하는 타인은 그 동전이 무엇때문에 돌고 있는 것인지 자신 인생에 중요한 무엇이 걸린 건지 전혀 알 수 없다. 감독은 이런 무작위성의 동전이야말로 정말 인생과 같다는 것을 말한다. 종종 운명은 무심결에 찾아온다고들 한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 순간까지도 우리는 운명이 찾아왔는지 인지 못할 때가 있다. 아마 극중의 주유소 캐셔는 나중에 현상수배전단지에 찍힌 쉬거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던진 동전던지기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한 동전 던지기 였으며, 자신은 운명적으로 목숨을 건졌음을 그제서야 깨달을 것이다. 운명은 불규칙적으로 찾아온다. 안톤 쉬거 본인 자체가 동전 던지기와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 불규칙적으로 행동하고 예측이 불가능한 그렇기에 르웰린, 에드 등 과거의 예측 가능한 범위의 범죄만을 생각하고 그 시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쉬거를 쫓을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의 의미를 쉽게 알아차리기가 쉽지 많은 않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노인이란 실제로 나이들고 나약한 노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과거의 영광에만 젖어 시대를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을 모두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과거 텍사스의 광활한 벌판을 혼자서도 통제하던 회상에 젖은 보안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첫 살인 장면또한 불규칙적이고 신세대적인 살인 동기를 지닌 쉬거를 자신이 통제 가능하다고 믿은 한 보안관의 죽음이었다. 영화 속에서 수많은 노인들은 나태하고 나약하게 비춰진다. 과거 드넓은 황야에서 말한마리 타고 다니면서 강도 혹은 도둑을 잡던 시대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 시대에 위대한 보안관들덕에 얻은 평화에 안주한채 늙어버린 노인들은 심지어 현역 보안관인 에드마저도 상황을 쫓으며 사건을 재구성할 수는 있지만 앞서가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며 그저 신세대의 희생양이 될 뿐이었다. 실제 노인이 아니더라도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저격총으로 가젤 사냥을 즐기는 퇴역군인 르웰린 또한 구시대적인 미국의 추종자일 뿐이기에 영화의 끝에 그런 결말을 맞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박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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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주 최신개봉영화(특송, 하우스 오브 구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청춘적니, 클리포드 더 빅 레드 독)
[WEEKEND CHOICE MOVIE] 2022년 1월 2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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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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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사람, 나도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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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윤시내가 사라졌다> 메인 예고편
전설적인 가수의 실종으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한 가운데,
20년 간 이미테이션 가수 ‘연시내’로 활동해온 순이(오민애)는
‘윤시내’와 함께할 뻔한 꿈의 무대도, 일자리도 잃어 좌절에 빠진다.
한편, 사람들의 관심이 고픈 유튜버 ‘짱하’(이주영)는
라이브 방송 중 우연히 찍힌 엄마 ‘연시내’ 영상의 조회수가 떡상하자
대박 콘텐츠를 꿈꾸며 ‘윤시내’를 찾는 여정에 따라 나서는데…
동료 가수 ‘운시내’(노재원)와 함께 가시내, 윤신애, 윤사내까지 모두 만나며
사라진 ‘윤시내’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한 동상이몽 두 모녀는 과연 ‘진짜’를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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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러브, 데스 + 3부> 공식 예고편
5월 20일 공개 예정, 오직 넷플릭스에서. 에미상 수상에 빛나는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러브, 데스 + 로봇》이 제3부로 돌아왔다. 팀 밀러(《데드풀》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데이비드 핀처(《마인드헌터》 《맹크》)가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작품. 공포와 상상, 아름다움이 한데 섞인 새로운 9개의 에피소드에서 고대 악마를 발견한 사건부터 희극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의 종말까지, 특유의 재치와 독창적인 시각 효과가 돋보이는 판타지, 호러, SF 장르의 놀라운 단편들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