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04-13 07:57:23
나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완성도는 '없다'
〈나는 여기에 있다〉 리뷰
3★/10★
누군가의 장기를 이식받은 사람이 공여자 성격의 일부까지 함께 전해 받는다면? 우리 삶을 깊이 있게 드러내거나 성찰케 하는 질문은 아니지만 장르 영화 한 편은 적당히 채울 수 있을 만한 물음이다.
〈나는 여기에 있다〉는 이 질문을 동력 삼아 나아가는 영화다. 폐 이식을 받은 ‘선두’와 심장을 이식받은 ‘규종’. 폐 이식 후 악화된 몸 상태로 위태롭게 형사 생활을 이어가던 선두는 어느 날 사건을 하나 맡는다. 평소에는 존재감도 없던 규종이 동료들과 술자리를 하던 중 갑자기 칼로 누군가를 찌른 사건이었다. 선두는 사건을 해결하려 할수록 점차 몸 상태가 악화되고, 규종의 악행은 점점 더 과감해진다. 그리고 두 남자가 사실은 같은 남자의 장기를 이식받았고, 그 남자는 선두가 검거한 살인자라는 사실도 밝혀진다. 영화는 같은 남자의 장기로 삶을 이어가는 선두와 규종의 필연적 대결과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좇는다.
그러나 연출이나 각본에 따라 흥미로울 수도 있었을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나는 여기에 있다〉의 시도는 철저히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개연성을 위해 억지로 끼워넣은 장면이 제법 보이고, 영화가 모성을 활용하는 방식과 규종의 범행 동기는 매우 작위적이다. 몇몇 조연 배우의 연기는 저들이 과연 전문 연기자인지(혹은 감독이 아무런 디렉팅을 하지 않았는지)를 의심케 한다. 배역과 상황에 맞지 않는 의상과 소품도 자주 눈에 띤다. 긴장감을 고조시켜야 할 장면에 바닷길 풍경과 갯벌 액션신을 반복해서 활용한 이유도 모르겠다. 예산의 문제일 수도, 감독의 취향을 수도 있으나 어떤 경우든 일부 삭제하는 게 좋았을 듯하다.
요컨대 〈나는 여기에 있다〉는 장르 영화가 취할 법한 그럴듯한 아이디어 빼고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영화다. 제목이 품은 선언적 야심은 그 어디에도 다다르지 못한 채 길을 잃었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
- 때때로 우린 자신에게 '쫄?'을 시전해야 한다
줄거리
대출회사에서 상담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칼 알렌. 그는 아내와 이혼한 뒤로 우울하게 지내며 매사에 부정적이게 변했다. 친구가 만나자고 해도 NO, 동료가 함께 어울리자고 해도 NO. 뭐든지 NO라고만 외치는 칼. 홀로 비디오를 보며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친한 친구의 약혼 파티마저 깜빡한 칼은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우연히 만난 옛 친구에게 권유받은 대로 '인생역전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기로 한다. 강연을 하는 테렌스는 긍정적인 사고 회로를 위해 칼에게 무조건 YES!를 외치라고 말한다. 그는 규칙에 따라 뭐든지 YES라고 대답해 보기로 결심한다.
지루하고 한심했던 지난날과 달리 뭐든지 YES!라고 외치니 즐겁고 활기가 넘치는 나날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조금씩 무작정 YES가 아니라 NO라고 외쳐야만 하는 순간들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감상 포인트
1. 갑분 튀어나오는 어색한 한국말에 당황 주의.
2. 내 인생에는 NO와 YES 중에 무엇이 더 많았을까?
3. 다 보고 나면 왠지 YES라고 외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감상평
최근에 너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작품만 봤다. 귀신, 좀비, 범죄... 뇌가 피와 광기에 절여진 황도가 되기 전에 기분을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웬만해선 일부러 찾지 않는 코미디를 보기로 했다. 하지만 흔한 코미디는 보기 싫었다. 짐 캐리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 선택했다.
"무조건 예스라고 하라 했잖아요."
"핵심은 그게 아냐. 타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여는 첫 단계인 셈이지.
시간이 지나면 의무감이나 서약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러나 '예스'라고 말하는 거야."
사실 영화 [예스맨]이하고자 하는 말은 테렌스의 입에서 이미 다 나왔다. 더 해석하거나 파고들 여지가 없다. 다만 우리는 칼이 변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 테렌스의 '예스'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전까지 칼은 타인과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미 친하게 지내고 있던 친구마저도 멀리할 정도였다. 그는 아내와의 이혼 때문에 상처받았고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갔다. 그것이 그를 불행하게 만든 시발점이다. 그런데 심지어 직장에서의 승진도 무산되었다. 과거는 그의 발목을 잡았고, 현재는 즐겁지 않으니, 당연히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나 설렘은 없었다.
칼은 인생에 싫증이 났고, 모든 의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 말이 맞았다는 것을 영화가 증명하고 있다. 영화에서 칼은 친구나 동료가 함께 어울리자고 하는 것을 모두 거부한다. 어쩌면 그들은 칼을 도와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칼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 아내와 마주치는 바람에 자신의 구질구질한 상황을 못 박는 것 밖에는.
하지만 테렌스는 칼의 앞뒤 사정을 따져 묻지도 않고 그냥 무조건 '예스'를 외치라고 한다. 그건 따스한 위로도, 마음을 담은 격려도 아니다. 그런 것 따위는 사람을 움직이게 할 수 없다.
테렌스는 칼에게 '쫄?'을 시전한 것이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칼은 억지로 이를 악물고 '예스'를 외친다. 아무도 안 보고 있었다면 더 이상 예스맨이 될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는 상황이 꼬이는 것을 보며 자조적인 웃음을 짓다가, 마지막에 찾아온 행운에 놀란다.
"예스는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오고 삶의 진짜 기회는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온다."
테렌스의 자극으로 시작한 일이 새로운 경험과 즐거운 추억을 남겨준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비록 조금 억지스럽긴 하지만, 그가 예스맨으로 변했기에 중요한 일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것들을 발판 삼아서 칼은 점차 세상에 발을 딛고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이전과 삶이 달라져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상처를 치유하려고 시도했기에 삶이 달라진 것이다.
테렌스의 말처럼, 무조건 예스라고 외쳐야만 하는 건 아니다. 때로 상처받고 슬프고 지칠 때도 있겠지만, 우리 옆에는 분명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거절하는 것은 자신을 더 깊은 우울의 수렁으로 빠트리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에게 '쫄?'을 시전할 필요가 있다. 감상적인 말이나 이성적인 판단보다 더 큰 자극을 주어 움직이게 해야 한다. 움직이지 않고 멈춰있으면 늪에서 나올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일단 움직이고 나면 새로운 희망이 보일지도 모른다. 예스맨이 된 칼처럼!
-
- [클럽 제로] 중세 시대가 문화의 암흑기인 이유
싸패와 소패
만약 웨스 앤더슨 감독님이 독기를 품고 인간의 잔혹성을 영상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암울한 상황과 반대하는 아름다운 영상미가 계속해서 인지부조화를 일으키게 만든다. 초현실주의 사진작가들이 보여주던 괴상한 순간들을 관찰자의 시점에서 정확히 보여준다. 관객과 주인공 일행은 점점 그녀의 설득과 집요함에 물들기 시작한다. 미학적인 황금비를 충실히 지키며 거짓의 탈이 완벽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수학적으로 계산된 화면 구성은 진짜 광기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루누이가 희대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미인의 숨통을 노렸듯, 영화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가치를 교수대 위에 매단다. 날카롭지만 쉽게 베이지 않는 무거운 칼 같다.
무너지다
인간은 쉽게 무너진다. 더 단단하고 큰 육체를 탐하다 불법 주사기에 손을 댈 수 있고, 더 완벽한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인간에게 생사의 실험을 자행하기도 한다. 영화 속 학생들은 각자만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문제점은 그들을 약하게 만드는 약점이자 사라지길 바라는 아픔이다. 예를 들어, 발레리노 남학생은 당뇨병을 앓고 있다. 그래서 정체불명의 약을 먹어야만 계속해서 춤을 출 수 있다. 트램펄린 선수인 여학생은 무거운 체중 때문에 더 높이 뛰기가 힘들다. 그래서 살을 빼야만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학생들은 저마다 이유를 가지고 영양사 선생님 ‘미스 노백’을 찾는다. 인간의 욕망은 약점을 보완하는 선량한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인간은 쉽게 무너진다. 그럴수록 욕망은 더욱 거대해진다. 결국 칠흑보다 깊고 어두운 구멍을 가슴에 남긴다. 학생들은 쉽게 무너졌다.
방아쇠
영화를 보며 말도 안 되는 논리와 지극히 철학적이고 공생주의적 부모들의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스 노백’은 그저 트리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의 역량에 따라가기 벅찬, 부모의 모난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미스 노백’을 만나고 폭발하기 시작한다. 1차적인 가해는 이미 집안에서 일어났다. 모델인지 체중 조절을 위해 음식을 먹지 않는 엄마와 강제로 음식을 먹이기 위해 윽박지르는 아빠 사이에서 여학생은 침묵한다. 음식을 먹는 시간,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는 사랑이 없었다. 반대로 매번 사랑이 가득 담긴 음식으로 성대한 저녁을 차려주는 집도 있다. 문제는 극진한 사랑에도 건강함은 없었다. 모든 부모들이 아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힘겨워하는지 묻지 않는다. 그저 아이가 있기에 부모로 존재할 뿐이다. 최악은 부모 노릇마저 ‘미스 노백’에게 전가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아이들은 더 이상 부모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았다.
동굴 그리고 막장
주변 환경과 사회 전반적인 풍토는 분명 각 개인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린 싸이월드에 감성 넘치는 글을 남겼고, 부끄럽다며 인스타에 옛 사진으로 관심을 돌린다. ‘미스 노백’의 선을 넘는 일방적인 주장과 불합리한 논지에 대해 불만을 느끼는 학생도 존재한다. 그녀를 마치 선지자처럼 떠받드는 학생들은 ’반 미스 노백‘지지자들을 경멸한다. 신봉자들은 진실을 외면하면서 진실한 목소리를 가진 타 학생을 무시한다. 오히려 당신들도 믿음을 갖고 깨달아야 한다고 다그친다. 재밌는 사실은 ‘나도 틀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심어준 당사자는 ‘미스 노백’이라는 점이다. 나 자신은 틀렸다고 믿지만 결코 다른 사람들의 조언과 진심 어린 사랑에는 인색하다. 어딘가 무너진 존재는 가장 먼저 시야를 좁힌다. 그래야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지금 한국에게 필요한
얼핏 보면 영화는 봉건 사회에서나 볼 법한 무조건적인 신앙과 강제적인 비건 강요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수히 많은 풍자가 역류하며 과연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까지 도달한다. 영화 후반부에는 더 이상 학생들이 한창 성장하며 아프고 다시 일어날 십 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소화의 개념을 가진 로봇으로, 이목구비를 가진 짐승으로만 보였다. 그토록 잔혹하게 아이들을 바꾼 작은 씨앗이 무엇이었는지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해서 기쁘다. 고지식한 척, 깨어 있는 척, 가치관에 혼란을 주는 모든 사람에게 추천한다.
-
- 특별한 시선으로 특별하지 않음을 말하다.
<디어 에반 한센(Dear Evan Hansen)>, <나, 다니엘 브레이크>, <말아톤>, <7번방의 선물>과 같이 장애를 겪고 있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영화는 비록 상업영화에 비해 현저히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국내외 영화계에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앞서 예시를 든 영화들처럼, 장애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들은 흔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해당 인물이 어려움과 고난을 겪게 되는 모습을 통해 ‘사회적 약자인 주인공의 고난→ 조력자 혹은 특정 사건과 만남→ 주인공의 극복/ 희망’과 같은 클리셰를 사용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러한 영화의 전개는 관객에게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혹은 상상해보지 못한 상황을 이해하고, 몰입해볼 기회를 제공하며,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인물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행방식은 영화의 전반을 중심인물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 때로는 영화의 중심인물이 아닌 주변 인물들이나 그들이 겪는 사건, 영화 전반에 걸쳐 숨겨져 있는 의도와 영화의 주제에 대한 이해도와 관심도를 하락시킨다는 단점을 보이기도 하며 ‘주인공의 고난과 극복’이라는 전형적이고 반복적인 클리셰에 관객이 흥미를 잃게 될 가능성 또한 있다. 이런 ‘사회적 약자’라는 같은 소재를 가진 영화들의 어떤 공통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 속에서 영화 <나는 보리>가 갖는 시선은 특별하다. <나는 보리>는 농인을 바라본다. 소수가 아닌 다수로서, 장애인 가족이 아닌,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한 가족으로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소통하는 존재로서, 그리고 농인과 청인을 다르지 않은 시선에서 말이다.
1. 경계를 허무는 시선
‘코다(CODA:Child Of Deaf Adult)’는 농인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하는 용어로, 2020년에 개봉한 김진유 감독의 <나는 보리>는 ‘코다(CODA)’인 소녀 ‘보리’의 일상과 그런 보리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을 담은 영화이다. 김진유 감독은 실제 농인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코다(CODA)’로, 영화<나는 보리>는 김진유 감독의 유년기를 바탕으로 한 자전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때문에 <나는 보리>의 주인공이자, ‘코다(CODA)’인 소녀 보리는 김진유 감독의 어린 시절이 투영되어있는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보리>의 주인공인 11살 ‘보리’는 어린 시절 김진유 감독처럼 농인인 부모님을 대신해 은행 업무를 보고, 음식을 주문하고, 물건을 구매하는 등 주로 가정 내에서 아이보다는 어른들이 하게 되는 일들을 도맡아 한다. 영화 속 “나는 누나 귀 안 들리는 거 싫어. 치킨 못 먹어.”라는 농인 동생 정우의 대사를 통해서, 아침에 혼자 알람을 듣고 일어나 가족들을 깨우고 등교하는 보리의 모습을 통해서, 보리가 “내일 할아버지 집에 갈거야.”라는 갑작스러운 엄마의 말에도 따라나서 엄마와 동생의 몫까지 기차표를 구매하고, 택시 앞자리에 탑승해 길을 안내하고, 수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농인인 엄마 사이에서 수화를 통역해주는 장면을 통해서 보리의 가족들이 생활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보리에게 맡기고 의지하고 있으며, 보리가 가족들 사이에서 어떠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보리가 이러한 책임들을 도맡음으로써 결코 불행하다거나 힘겹다거나, 가족들이 보리에게 과도하게 의존하여 보리가 없이는 아예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불리하고 힘든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 영화에서 보리네 가족은 따스함과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넘치는 화목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떻게 보면 가족 구성원 내에 농인이 없는 일반 가정보다 더욱 화목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는 은정이가 자신의 부모님은 항상 바쁘고 매번 걸려오는 전화와 부모님의 심부름은 다 자신의 몫이라고 투덜대며 보리를 부러워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화목하고 따뜻한 가족의 묘사는 농인인 부모님과 청인인 자녀로 구성되었지만, 보통의 가족들처럼 따뜻하고 화목했던 김진유 감독의 가정환경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화목한 가족 내에서도 왠지 모르는 소외감을 느끼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보리’이다. 들리지 않는 부모님 혹은 동생 정우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다수에 속하는 청인 ‘보리’ 말이다. 이러한 설정은 <나는 보리>가 농인의 문화와 세상을 특별하지 않게 바라봄으로써 가지는 미덕을 돋보이게 해준다. 보리는 가족들 사이에서 생활하며 느끼는 알 수 없는 소외감에 매일 아침, 자신도 부모님과 동생처럼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기도 하며, 심지어는 소리를 잃기 위해 MP3를 최대 음량으로 키워 이어폰을 귀에 바짝 꽂은 채 음악을 듣거나 물에 귀를 자주 담그면 청력이 감퇴한다는 TV 속 해녀의 인터뷰를 보고 직접 바다에 뛰어들기도 한다. 이러한 보리의 행동과 소외감은 일반 청인 관객들이 보기에 이질적이고 쉽게 공감할 수 없으며 한편으로는 충격적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이런 보리의 심리와 행동, 영화의 설정이 <나는 보리>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낸다.
가족 내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존재로서, 사회적으로 우리가 흔히 다수라 말하는 청인에 속함에도 보리가 농인으로 사는 삶을 원하는 모습을 통해 <나는 보리>는 장애인은 약자, 청인은 일반인이라고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이분법적 사고와 농인의 삶을 남다르게 바라보고 불편할 것이라 섣불리 동정하는 우리의 선입견을 깨트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보리>에는 농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하지 않기를 바라는, 있는 그대로의 농인을 보여주고 싶은 감독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 보리는 물품을 구매하고, 음식을 주문하고, 은행 업무를 보는 등 흔히 보호자가 해줄 법한 일들을 모두 맡아 하는데, 이렇게 가족들의 생활편의를 도울 뿐 아니라 보리는 사회로부터 가족들을 보호하기도 한다. 이는 보리가 동생 정우의 축구경기 출전과 엄마와 함께 옷을 사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동생 정우 역시 농인인데, 정우는 축구 실력이 뛰어남에도 귀가 들리지 않아 경기 수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로 출전선수가 아닌 후보 선수로 지목된다. 이에 정우가 후보선수라는 것을 알게 된 보리는 이장님인 아버지를 둔 친구 은정이를 통해 정우가 축구경기에 출전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보리가 엄마와 단둘이 옷가게를 방문한 장면에서 보리는 옷가게의 직원들이 자신과 엄마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와 비하를 서슴지 않고, 옷 가격 또한 원가보다 높게 책정해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후 보리는 잘못된 거스름돈을 점원에게 돌려주며 엄마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자신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있었을 뿐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행동과 말을 했는지 다 보고 들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보리는 가족의 도우미와 더불어 보호자의 역할도 소화한다.
그렇다면 청인인 보리는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가족들의 도움 없이도 모두 스스로 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보리가 가족을 돕듯, 보리 또한 가족의 도움과 관심,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영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보리는 불꽃놀이를 보러 가족과 함께 시장에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부모님의 손을 놓친다. 안내방송을 해도, 전화를 걸어도 들을 수 없는 부모님과 동생이기에 이들을 찾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보리는 막막하기만 하다. 이 순간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밝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보리는 처음으로 11살 제 나이 또래처럼 어린아이 같은 울음을 터뜨린다. 영화는 이렇게 가족 내에서 보호자의 역할을 하는 보리 또한 가족들의 보살핌과 도움이 필요하며, 우리가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는 농인도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큰 힘과 도움이 되어 주는 존재라는 걸 알려준다. 다음 소주제에서 더 언급하겠지만, <나는 보리>와 유사한 작품으로 미국에서 개봉한 <코다>라는 음악 영화가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코다(CODA)’인 주인공 소녀가 “지금까지 가족 없이 뭘 해본 적이 없어요.”라며 망설이는 모습을 통해 <나는 보리>와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자신이 가족들을 도와야 하지만 역으로 자신도 가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는 청인과 농인이 모두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기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강한 존재이기도 함을 보여주는데, 결국 <나는 보리>가 이야기하는 바는 이러한 영화의 장면들과 보리의 아빠가 보리에게 반복해서 뱉는 말을 통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들리든, 들리지 않든 우린 똑같아.” <나는 보리>가 바라보는 청인과 농인은 연약한 존재이자 때론 강한 존재로서 장애의 유무와 관계없이 그저 똑같은 한 사람일 뿐이다.
2. 다르고도 같은 소녀들– 영화 <코다>의 루비, <나는 보리>의 보리
<나는 보리>의 보리와 유사하게 ‘코다(CODA)’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있는데, 바로 2021년 미국에서 개봉한 <코다>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 보리와 루비는 모두 코다 중에서도 가족 내에서 유일하게 소리가 들리는 자녀 'OHCODA’이자, 미성년자 코다 ‘KODA’에 속한다는 점, 그리고 영화가 청인과 농인의 화합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나, 두 영화 속 소녀의 가정 환경이나 농인의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 그리고 인물의 선택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나는 보리>에서 보리의 관심이 가족들과 보내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과 학교, 친구들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면, <코다>의 루비는 졸업과 성인을 앞둔 나이로 진학과 가족의 생계 등 자신의 삶과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을 고민하는 데에 몰두한다. 두 영화에서 내가 가장 주목했던 차이는 보리는 가족들과 동일시 되어 자신도 소속감을 느끼기를 바라는 반면, 루비는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한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단순히 졸업 학년과 11살이라는 인물의 나이 차이 때문에 나타난 차이 만은 아닐 것이며, 두 소녀의 가정 환경과 제작자(감독)의 배경과 우리 사회에 깊게 자리 잡은 문화적 배경 또한 영화의 관점과 주인공의 선택에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루비의 가족은 아빠와 오빠가 운양하는 어선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가는데, 일정치 않은 수입과 틈만 나면 중간에서 이익을 떼가는 중개업자들 때문에 루비의 진학비용 걱정은 물론, 늘 생활비 걱정을 안고 지낸다. 또한, 루비의 가족은 가족 내의 강한 유대와 결속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루비의 엄마가 식사할 때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나 가족의 일에는 꼭 모두가 함께 자리하게 하는 장면을 통해 루비의 엄마가 가족의 소통과 결속을 강조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거 알아? 엄마도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해.”라는 루비의 대사와 “들리는 년들은 나랑 말 안 해.”라는 엄마의 대사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 사실 엄마의 이러한 행동은 청인과의 교류는 두려워하며 피하고, 농인에 공감할 수 있는 가족 내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유지하려는 엄마의 방어기제이다. 그리고 이렇게 가족 내의 유대를 강조하는 엄마의 행동과 자신도 부양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저절로 심어지게 되는 루비네 가정의 분위기와 환경은, 루비가 가족에게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반면, 보리의 가족은 루비네 가족과 같은 입장으로, 농인으로서 겪는 불편함과 어려움이 분명 있음에도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의 본보기라고 표현해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따뜻한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나는 보리>에서 보리의 부모님은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수술비조차도 전혀 상관없다며 정우와 보리의 귀를 위해선 큰 비용지출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코다>에서는 가족의 생계수단이던 낚시도 <나는 보리>에서는 보리 아빠의 오랜 취미이자, 어린시절부터 아빠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준 존재, 아빠와 보리가 속마음을 교감하게 되는 시간과 배경으로 나타난다. <코다>는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이며 원작 영화인 <미라클 벨리에>는 프랑스에서 제작되었고, <나는 보리>는 우리나라의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국내에서 제작되었다. 이에 루비와 보리의 선택 차이에는 우리나라보다 비교적 이른 나이의 면허취득과 독립을 맞이하는 서양의 문화와 개인주의, 그리고 한국의 가족공동체 정신과 협동, 한국의 ‘정’이라는 이데올로기 또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가정과 사회에 대한 루비와 보리의 관점과 선택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두 영화 모두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농인과 청인의 경계를 허물고, 화합과 이해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은 같다. <코다>의 경우 영화의 후반부. 음악 영화답게 음악을 통해 주제를 드러낸다. 루비의 오디션과 대학 진학을 내내 반대하던 루비의 부모님은, 교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루비의 모습과 루비의 노래에 환호하는 관객의 모습, 그리고 그 누구보다 노래를 사랑하는 듯한 루비의 태도를 보고 오디션 당일 아침, 직접 운전을 해 오디션장까지 함께 간다. 오디션장에서 루비가 부르는 노래는 “Both sids now”. 앞서 말했듯, 영화의 메인 사운드 트랙이자 주제를 나타내고 있기도 한 이 루비의 오디션 곡은 “하려던 일들이 많았지만 구름이 내 앞을 막았지. 이제 구름을 양쪽에서 보게됐어. 위와 아래에서”, “이제 사랑을 양쪽에서 보게 됐어. 주는 쪽과 받는 쪽에서”, “이제 인생을 양쪽에서 보게 됐어. 이기는 쪽과 지는 쪽에서”와 같이 성장하며 주변에 있던 것들에 대해 달라진 이해와 시선에 대한 가사를 담은 곡으로, 루비가 ‘코다(CODA)’로서 살아가며 때로는 농인인 가족이 자신의 인생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때로는 농인 가족 속에 속한 유일한 청인이 자신이 소외된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던, 때로는 다른 가족들과 다른 자신의 가족이 부끄럽고 이해할 수 없었던 루비가 이제는 농인과 청인의 입장 양쪽 모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가족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노래한다. 그뿐만 아니라, 오디션 현장에 몰래 들어온 가족들을 위해 루비는 노래를 부름과 동시에 가사에 맞추어 수화를 하는데, 이 장면을 통해 영화 <코다>는 루비의 성장과 이해, 농인과 청인의 교류와 화합을 완벽히 실현시킨다.
<코다>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이해와 화합에 중심을 두었다면 <나는 보리>는 서로 간의 이해와 더불어 ‘코다(CODA)’로서 살아가는 보리의 자아정체성 확립과 농인과 청인과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농인도 청인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점을 더 강조해 말한다. <나는 보리>의 미덕은 바로 이렇게 농인 가족이 등장하지만, 비장애인 가족과 다르지 않은 보편적 정서를 다룬다는 점에 있다. 다름보다는 같음을 느끼게 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게 한다. 실제로 나는 보리의 김진유 감독은 “처음부터 장애를 어떻게 다루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리의 감정에 집중했고, 그 감정선을 따라 보리 가족의 모습을 묘사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기존의 장애를 다룬 영화와 차별점을 갖게 된 것 같다.”라며 특별한 의도를 담기보단 오히려 그저 농인을 향한 시선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뿐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영화 <나는 보리>의 후반부에서, 보리는 시장에서 구매했던 부적인 ‘악마의 눈’을 바다에 던지는데, 이러한 보리의 행동을 통해 일시적이지만 농인의 입장을 직접 체험해보고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경험해본 보리가 더 이상 가족에 대한 타인의 차별적인 시선이나 편견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으며 ‘코다(CODA)’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시선이 어떻든, 자신에게는 그 누구보다 평범하고 소중한 가족의 의미를 확립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나는 보리>는 보리가 도로와 바다 사이 좁은 방호벽 같은 길 위를 양팔을 벌린 채 균형을 잡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배우들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며 마무리되는데, 도로도 바닷가도 아닌 사이 도로 방호벽 위를 조심조심 걸어가는 보리의 모습을 통해 농인과 청인 사이에 놓여있는 ‘코다(CODA)’ 보리의 정체성과 농인과 청인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완성한다.
3. 보리가 보여주는 농인의 세상
<나는 보리>에서 보리는 가족들과 같아지고 싶다는 마음에 농인이 되기 위한 노력 중 하나로, 물에 귀를 자주 담그면 잘 들리지 않는다는 TV 속 해녀의 말에 직접 바다에 뛰어들며, 이상 없이 무사히 구조되었음에도 보리는 이후로 계속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척, 자신도 농인이 된 척 행동하는데, 이렇게 농인으로서 생활하는 동안 보리는 농인을 향한 사회의 시선을, 가족들이 농인으로서 겪었을 어려움과 외부에서 받았을 차별들을 경험하게 된다. 앞서 <나는 보리>의 미덕은 농인 가족이 등장함에도 비장애인 가족과 전혀 다른 바 없이 느껴지는 보편적인 정서를 다룬다는 점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영화 전반에 걸쳐 경계를 허물고, 보편적인 정서를 다루지만, 보리가 직접 농인의 입장으로 살아가는 생활들을 담음으로써 일상 속에서 농인이 겪게 되는 불평등한 차별과 시선 또한 짧은 내에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 또한 <나는 보리>의 또 다른 미덕이라고 볼 수 있다.
보리가 가족들처럼 농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친구들은 학교에서 이전과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인다. 보리와는 상의 없이 보리에게 화장실 청소 당번임을 통보한다던가, 은정이와 보리가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보리를 투명인간처럼 쏙 빼놓고 은정이에게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식으로 말이다. 학교와 또래 친구들 내에서뿐만 아니라 보리는 주변 어른들에게서도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부모님 대신 정우와 농인이 된 척하는 보리를 데리고 병원에 간 고모가 ‘착한 거짓말’이라는 명분으로 병원에 다녀온 후 엄마, 아빠에게 수술하게 되면 정우가 앞으로 축구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전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또한, 엄마가 함께 간 옷가게에서는 보리와 엄마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몰래 점원들끼리 상의하여 더 높은 가격으로 옷을 판매하는 것을 보게 되며, 지나가는 보리를 본 동네 어른들이 “어린 것이 딱해서 어떡해.”라며 들리지 않게 된 보리를 안타까워하며 안쓰러운 시선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보리가 농인인 체를 하며 겪게 되는 주변의 변화와 상황들은 우리가 영화 밖 현실사회에서 농인을 바라보는 태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우리 사회는 흔히 장애를 섣불리 안타깝다는 식으로 바라보거나 ‘힘들겠다’라는 식으로 동정 같은 공감을 한다. 작은 시선, 별 의미 없는 말 한마디일 수 있지만, 때로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툭툭 나오는 시선과 말들은 당사자의 마음에 꽂히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 11살 소녀가 특별히 큰일 없이 지나가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차별을 경험하도록 한 것에도 농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김진유 감독의 바람과 유년 시절 감독이 겪었던 감정, 그리고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이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진유 감독은 “제가 만났던 농인 부모 중 60% 정도가 자녀가 농인으로 태어나길 바랐다. 농인이라는 것 자체가 불편하지 않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인터뷰한 바 있는데, 이를 통해 사회에서 우리가 농인을 볼 때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감독이 영화에서 보리가 직접 농인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농인이 일상 속에서 빈번하거나 흔하게 겪게 되는 어려움을 보여주고, 그 어떤 가정보다 따뜻하고, 온전하고,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를 그림으로써 현실에서의 농인을 향한 특별한 시선을 제거하고자 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4. <나는 보리>에 대한 글을 마치며
영화 <나는 보리>는 농인의 삶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코다(CODA)’라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와 존재를 알리고, 이런 ‘코다(CODA)’ 소녀를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단순히 농인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농인과 청인,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는 경계를 허물고 농인 가족이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가족임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보리가 농인이 되고 싶어 하는 바람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편적인 사고에서 전환된 시각과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나는 보리>의 김진유 감독은, “장애인 가족도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는 식의 묘사도 하고 싶지 않았고,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농인 가족의 평범한 일상과 자신이 살았던 모습만을 보여줘도, 대중이 농인을 조금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라고 인터뷰에서 생각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감독의 애정 어린 시선이 영화 <나는 보리>와 그것을 보는 관객에게도 통한 것일까. <나는 보리>의 보리네 가족은 보는 사람의 마음도 더불어 따뜻해질 정도로 그 누구보다 화목하고 행복해 보이며, 영화를 통해 그들의 삶과 ‘코다(CODA)’로서 살아가는 보리의 삶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더 이해하고, 그들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
- 4등 (2015)
영화 <4등>의 중심 인물은 모두가 피해자다. 이미 첫 아시안 게임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다가오는 아시안 게임의 유망주로 떠오르는 젊은 수영 천재 ‘광수’, 수영이 좋아서 시작했으나 매번 4등만 하는 ‘준호’, 기자이자 준호의 아버지인 ‘영훈’, 악착같은 준호의 어머니인 ‘정애’. 간략한 소개로만 보아선 이들이 무슨 피해자인지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영화속 이들을 지긋이 바라보면 그들이 어딘지 말도 안되는 선택을 하며, 그 선택의 원인을 좀처럼 찾을수 없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속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 중력을 행세하는 힘의 주체는 대체 무엇인가? 쉽게 보이지 않는 이 희미한 중력장의 실체는 영화속 인물들을 하나 하나 정리하다보면 발견할 수 있다.
1-1. 광수
가장 먼저, 광수의 경우는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태릉으로 출발하는 날 그의 오래된 고향의 폐건물에 들러서 광수는 불법 도박을 하고 있는 고향 선배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폐건물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 하지만, 광수의 뒤에 떨어진 말. “내일 가도 되잖아, 너 천재잖아”라는 그 말이 광수를 다시 도박판으로 불러들인다. 서울로 떠나려던 광수는 뒤를 돌아보며 입맛을 다시고 뒤돌아서더니, 다음 컷에는 어느덧 광수가 도박판에서 도박을 하고 있는 컷으로 이어진다. 광수는 이 지점에서 어촌 마을의 도박에 빠진 ‘형님’들이 만들어 놓은 덫에 빠진 셈이다.
광수는 몇날며칠을 도박에 빠져 태릉선수촌에 늦게 들어가게 되고, 뒤늦게 들어간 광수를 본 선수촌 코치는 대걸레 자루로 광수에게 체벌을 가한다. 대걸레 자루로 백 대. 그 체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광수의 몸은 분명 곤죽이 되고 말 것이다. 광수는 저항하고, 저항은 코치의 심기를 건드린다. 곧 체벌은 감정적인 폭력으로 변질되고, 광수는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선수촌을 떠난다.
1-2. 어머니 정애
정애는 아들 준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아들 준호는 매번 4등만 하고, 정애는 준호의 성적이 아쉽기만 하다. 정애는 준호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기꺼이 악역이 되고자 한다. 준호에게 일부러 밉살스럽게 ‘4등’이라고 부르는 모습, 준호에게 대놓고 “엄마가 싫지? 그러면 수영할 때 엄마가 뒤에서 쫓아온다고 생각하고 해 봐”라는 식의 말들을 하며 준호의 성공을 위해서 기꺼이 악역을 자처한다. 정애가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첫째로 아들이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고, 둘째는 정애가 열정을 부을만한 것이란 이제 아들밖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극심한 교육열로 유명한 한국사회 수많은 어머니의 초상을 담은 것이 영화 <4등> 속에서 그려진 정애의 모습이다. 특히나, 그 자식에게 거는 간절함의 깊이는 사회적인 계급과 지위가 낮을수록 짙어진다. 출산과 육아후 전업주부로서 아이들의 삶만을 좇는 정애에게는 사회적 지위가 없다. 그녀가 사회속에서 온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로지 아이들의 교육밖에 없다. 이는 한국사회의 구조, ‘여성’에게 부과되는 독박육아와 강력한 사회적 단절의 탓이다. 이런 구조 탓에 어머니 정애는 자기 자신에게서 더이상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닫고 두 아들을 다그친다. (자신처럼)구질구질하게 살기 싫으면, 노력해서 성공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1-3. 아버지 영훈
아버지는 수영 천재이자 유망주인 광수를 만나고 이 유망주를 일찍이 알아보고 친해진다. 영훈은 광수의 성적을 묻고 광수가 높은 기록을 세웠다는 대답을 듣고는 광수에게 기대를 걸며 명함을 건네준다. 그때까지만해도 그는 광수에게 호의적이다. 기자인 그가 수영 유망주와 친해지고자하는 목적은 어느정도 알 법하다. 그리고 이런 가벼운 인간관계는 작은 균열에도 쉽게 무너져내린다는 사실 또한 충분히 알 법하다.
광수가 태릉을 박차고 전화를 건 것은 ‘영훈’의 번호였다. 광수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한다. 대걸레 자루로 100대를 맞으라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자신이 있어서 늦게 간 겁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1 주일 늦었습니다. 그리고 광수의 절박한 전화를 받은 영훈의 대답은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겠지”였다. 그리고 이런 영훈은 후에 자신의 아들 준호가 새로운 수영 코치 광수에게 체벌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광수를 찾아가 그에게 아이에게 체벌을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를 통해서 영훈은 분명하게 체벌에는 반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체벌에 반감을 갖고 있는 영훈은 광수의 전화를 외면하는데, 이 행동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란 영화를 통해서 다 알 수 없기에 추론만 가능할 뿐이지만, 가장 높은 가능성을 가진 이유를 제시해보자면, 영훈이 광수를 두둔한다고 하여 이득이 될 것이 없다는 점이다. 앞으로 자신의 업으로 한 집안을 이끌어가야 할 영훈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 비주류의 물결에 몸을 떠맡기라는 선택은 어렵다. 영훈에게는 일단 제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할 의무가 있고, 그 의무는 전적으로 영훈에게만 짊어져 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영훈은 다소간에 뻔뻔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역시 그 기형적인 한국 사회의 구조탓이라고 하겠다. 여성에게는 독박육아가, 남성에게는 생계유지의 의무가. 한쪽 성별에게 주어지는 전적인 의무들이 그 의무를 짊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제멋대로 헤집고, 망쳐놓는다.
1-4. 준호
“형. 1 등하면 무슨 기분이에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4등 준호는 1등을 해낸 초등 수영부 선수에게 자신이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묻는다. 이런 준호는 광수의 과거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준호는 그저 수영이 좋아서 시작했고, 엄마는 성적이 나오지 않는 준호탓에 애가 타서 새로운 코치 광수에게 준호의 지도를 맡긴다. 그리고 광수는 준호에게서 재능을 발견한다. 광수는 재능있는 준호를 키우고자 체벌로 엄하게 가르치며, 어린 준호는 당연히 맞는 게 싫다. 하지만, 준호는 가정으로 돌아와 어느순간 자신의 동생에게 자신이 받은 체벌을 그대로 재현하며 동생의 울음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치 광수처럼.
역설적으로도 준호는 새로운 코치인 광수에게 ‘엄하게’ 교육을 받으면서, 성적은 점차 좋아진다. 하지만 성적과는 반대로 준호는 점차 코치의 체벌이 두려워 수영에서 느꼈던 순수한 흥미와 즐거움을 점차 잃게되고, 급기야 광수의 체벌 탓에 더 이상 수영을 하지 못하겠다며 아버지에게 고백하고, 수영장을 떠난다.
2. 기성 사회의 구조와 구조속의 피해자들.
이 네 명의 중심인물을 정리하다보면, 영화가 그려낸 그들의 삶은 도덕적 딜레마에 의한 긴장의 장력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선 광수는 태릉으로 떠아냐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박장에 남고, 모욕적이고 감정적인 체벌이 싫어 태릉을 떠났으면서 체벌을 대물림하며, 정애는 자신이 악역을 맡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악행을 중단하지 않고, 영훈은 타인의 고통은 외면하더라도 자기 자식의 고통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준호는 마찬가지로 체벌이 싫었으면서 체벌을 대물림하고 권위적으로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갖게 된다.
앞서 정리한 바와 같이 이 도덕적 딜레마들은 모두 어떤 원인에서 부터 발생하고 있는데, 이 인물들의 사례를 통해 귀납적으로 접근하면 그 원인을 밝혀볼 수 있을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영화속의 모든 문제는 불합리한 기성 사회의 구조에서 비롯된다. 어촌마을의 기성세대인 ‘형님’들이 만들어 놓은 도박판에 어쩔수 없이 빠져드는 광수, 그리고 잘못은 체벌을 통해 몸속에 교훈을 새겨야 한다는 기성의 교육 방식, 양심적인 비주류에 휘말리면 생계를 보장할 수 없는 사회속에서 생계를 위해 뻔뻔해져야 했던 영훈, 이 사회속에서 이젠 자신이 무엇도 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자식들은 무엇이라도 근사한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정애.
영화 <4 등>속 인물들을 통해서 “어떤 사물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구조주의 이론에 따라 잘못된 기성의 구조속에서 상처받는 이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어쩔수 없이 잘못된 구조를 따르기 위해 자신들의 개별적인 의미와 신념을 잃고, 사회 주류의 신념과 구조를 따르는 이들의 삶이 멀리에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사회적 지위와 계급이 낮을 수록 구조의 요구와 강요에 더욱 순종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글이 기성 사회를 만든 기성 세대들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 아픔은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시대적 상처이며, 일반적인 역사적 기류에 의한 것이지 특정한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감정적으로 기성의 세대를 비판하는 것이아닌 기성의 사회 구조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되돌아보며 무엇을 고쳐나가야 할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3. 구조속에서 잃어가는 것들
영화 <4 등>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현재까지 앓고 있는 상처를 재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이며, 몇몇 사람들에게는 지난한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의 처지와 영화속 불합리한 상황들을 동일시 여겨볼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 <4 등>속 인물들은 구조에 의해서 요구된 악역을 어느정도 떠맡는다. 이를 통해 관객은 상처를 지닌 자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역설적인 비인간성을 영화속에서 목격하며, 이 영화가 마냥 통렬한 사회비판의 영화로만 다가오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아마도 비판만을 담은 영화였다면 아쉬움이 많이 남았을테지만, 영화 <4등은> 사회구조의 문제성에 대한 비판만을 하지 않고, 더 나아가 한 줄기의 희망을 예술적으로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그 때문에 <4 등>은 조금 높게 평가하고 싶은 영화다.
구조속에서 잃어가는 것은 개별체의 순수한 특성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의 지문과 홍채가 다르듯이 인간이 가진 개별성은 인간 종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별적인 인간이 모인 사회의 다양성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때때로 ‘구조’는 구성원들에게 특별한 지위와 책무를 떠맡기거나 강요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순수한 특성, 개별성과 주체성을 잃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강요와 구조가 정의한 개체성에서 탈피하여 자신만의 순수한 개체성을 추구할 때 아름답게 빛난다. 영화 <4등>에선 그 아름다움을 묘사하는데, 사회적 구조 속에서 정당화되는 체벌이 두려워 수영장을 떠난 준호가 다시금 수영을 하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로 늦은 새벽에 수영장을 찾아와 홀로 어둡과 차가운 물속에서 빛을 따라 헤엄치는 장면에서 그렇다.
이 씬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어둑한 새벽, 어둑한 물속에서 감감히 출렁이는 빛의 주변을 헤엄치는, 절대적인 어둠속 희미한 빛의 주위로 떠도는 여리고 어린 피사체의 모습이 씬에 아름답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본래 밝기만 해서는 그 밝음의 정도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인지라, 어둠속에서의 그 희미한 빛을 향해 헤엄치는 준호의 모습은 그 어떤 희망적인 언어보다도 강렬한 희망의 언어로 읽힌다. 비록 그 빛이 준호를 수영장에서 꺼내올리는 빛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카메라에 담긴 영상은 그 결과로만 축약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4 등>은 이렇게 구조속에서 피해받는 이들의 고통과 초상들을 보여주는 한편으로는,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사회구조 내의 개별적 존재로서의 정체성에서 탈피하여 개별적인 존재를 추구하는 과정이 지닌 순수함의 미학을 카메라에 담아내며 희미하지만, 희미하기 때문에 강렬한 희망의 메세지를 유려하게 그려내어, 작금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비판의 메세지와 함께 영화의 미학적인 추구 또한 충실히 따르고 있는 꽤나 괜찮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
- 불친절로 난해한 <서스페리아>
무용단에서 벌어지는 일이 궁금
맨 처음에 나온 패트리샤 (클로이 모레츠) 관련 내용은 이해하기가 어려워 먼 내용임이라는 생각이 시작부터 나왔다.그러고 수지 역을 맡은 다코타 존슨이 등장하여 무용단에 대한 내용이 이어지는데 블랑 (틸다 스윈튼)과 수지가 어떠한 연결고리가 될지 점차 궁금해졌다. 그리고 무용단에 있었던 패트리샤에 관한 내용 또한 이어졌으나 중간에 나온 정치적? 내용이 사실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수지에 대한 내용이 꿈과 중간 어머니에 관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녀의 탄생 비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꿈을 통해 한 장면만 똭똭 팩트로 보여주어서 자세히 나오지 않아 그녀와 어머니가 어떠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끝까지 알 수 없었다.
이 무용단과 패트리샤의 노트를 통해 그녀들이 마녀라는 것을 알게 되어 수지도 같은 동급이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후반에 보여준 급 각성?은 생각지도 못했고 곰곰이 생각하면 그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이 부분은 통쾌감이 있어 좋았는데 그 뒤로 보여준 닥터 할아버지 이야기는 별로였다.
틸다 스윈튼이 1인 3역
생각해보니 틸다 스윈튼이 다 역했다고 하던데 그 다 역이 누구였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못 찾았다.
할아버지 목소리가 좀 특이했다고만 생각했지 틸다 스윈튼이라고 생각도 못 했고,3번째 인물은 후반에 나오는데 아마도 다들 못 찾지 않을까 싶다.
틸다 스윈튼은 1인 3역으로 전혀 다르게 나왔고 난 블랑 역이 독특했었고 그 중심으로 보여주었기에 제일 기억에 남은 것 같았다.
틸다 스윈튼에 이어 기억난 배우가 있었는데 수지 역을 맡은 다코타 존슨이었다.
꿈을 통해 보여준 그녀의 어머니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게 만들었지만 무용 장면과 숨소리가 뭐랄까 성적인 느낌이 들어서 묘하게 야한 느낌이 들었다. 나만 그런지 몰라도, 후반에 나온 공연 장면에서 숨소리와 시각적이 묘하게 다가왔다.깜툭튀 같은 공포가 아니라 묘하고 기괴하며 고어 같은 느낌인 영화였다.
그 속에서 보여준 상징, 은유가 있어 딱 보는 순간 해석이 어렵지만 내용 또한 불친절하기에 난해하여 호불호가 크다.
개인적으로 몰입해서 볼 수 있었지만 <마더>처럼 불쾌하지는 않았고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주면서 닥터 할아버지 이야기 보다 수지에 대한 이야기를 더 넣었더라면 이해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은데,<서스페리아> 보면서 아무래도 난해한 느낌은 들 수밖에 없었고 그 통쾌한 장면 이후에 보여준 내용은 길게 느껴지면서 지쳐갔었다.
-
- 체실 비치에서, 사랑은 콤플렉스를 마주하는 순간
도미닉 쿡.
사랑은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다.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를 마주하는 순간이자 모르는 세계를 열어주는 몇 없는 문이며 인생 전체를 흔들 수 있는 폭풍이다. 같은 사람과의 관계라 할 지라도 어느 시기에 만나느냐에 따라 사랑은 전혀 다른 세기와 모양으로 휘돈다. 우리는 폭풍이 지나간 뒤에야 '그러면 좋았을 걸.' 하며 황량한 길을 서성인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도 '그러면 좋았을 일' 따위는 하지 못할 것이다. 이후의 나와 이전의 나는 다른 존재인 이유에서다. 지금 차분한 마음으로 폭풍의 흔적을 돌아보는 나는 폭풍 안에 있던 언젠가의 나를 완전히 헤아릴 수 없다.
인생의 크고 작은 바람과 함께 이전의 나는 계속해서 소멸해왔다.
추억한다는 것은 애도하는 일이다. 한때 연인이었던 누군가과 나였던 누군가의 죽음을. 애틋해질 수밖에 없다.
1. 다른 취향
로큰롤을 좋아하는 남자와 클래식밖에 모르는 여자. 나는 예전에 이 둘은 절대 연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호감은 생길 수 있겠지만 연애로 이어지기에는 공감대가 너무 없으니까. 취향은 그 사람의 살아온 삶과 깊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부유하고 엄숙한 가정에서 자란 플로렌스와 서민 가정이자 장애를 가진 어머니를 돌보며 자란 에드워드. 그들의 삶을 구구절절 나열하며 이 둘은 다르다 말하기 뭐하니 작가는 로큰롤과 클래식으로 대변해버린 것이다. 다른 취향, 본질적으로는 다른 환경을 가진 그들의 끝은 예견되어 있었던지도 모른다.
특히나 에드워드는 자신의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는 가족에 질려했다. 그러니 그는 더더욱 자신의 기분을 헤아려주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와 연애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타인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길 바란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섹스 후 뛰쳐나가 버린 플로렌스를 그는 몰아세웠다. 왜 나를 창피하게 만드냐며. 플로렌스는 공허했을 것이다. 연애는 결핍을 채우는 행위가 될 수도 결핍을 마주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다른 취향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더 내부에 본질이 있다면 연인 사이에 이러한 본질을 마주하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적어도 상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하는 태도는 지녀야 할 것이다. 서로를 모르는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공허하다.
2. 새드엔딩일까
애매하다. 연인이 헤어졌다고 해서 새드엔딩이라 말하는 것은 섣부르다.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는 각자 큰 트라우마가 있었다. 아마도 에드워드에게는 뇌손상을 입은 어머니가, 플로렌스는 친척에 의한 성적 학대의 기억이 트라우마일 것이다. 트라우마는 나약한 인간에 깊숙이 박힌 못이다. 깊숙하다고 하여 그 못을 뽑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못이 뽑히는 순간 그 자리를 채워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처음부터 완전히 채우지 못한다면 벽을 든든히 지탱해주면서 조금씩 채워나가면 된다. 플로렌스는 꽤나 우직하게 에드워드를 받쳐줬지만, 에드워드는 플로렌스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성추행 트라우마라는 못을 발견하지도 못한 채 플로렌스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가 잘한 것은 아니나 밉지도 않다. 대단히 현실적이다. 오히려 플로렌스보다 더 마음이 가기도 한다. 대부분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빠져 남의 속내까지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말을 하면 분명 도와줬겠지만 먼저 손을 뻗기란 쉽지 않다.
플로렌스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해피엔딩일 수도 있다. 자신과 공통된 취미를 가진 남성과 가정을 꾸려 자식을 셋이나 낳았다. 트라우마를 어느 정도는 극복했을 것이다. 원하던 공연 홀에서 원하던 애니스모어 사중주단 구성 그대로 은퇴공연을 마쳤다. 객석에는 꽤나 그리워했을 옛 애인이 약속한 좌석에서 브라보를 외치며 그를 축복했다. 에드워드를 다시 마주한 그 날은 뭉클하고 싱숭생숭 했겠지만 그래도 그의 전체적인 인생을 돌아봤을 때 에드워드 없이도 꽤 괜찮은 이후를 살았다. 물론 이것은 감독이 에드워드의 시각으로 후반부를 구성했기에 플로렌스의 겉모습만 훑고 판단한 것일 수 있다.
반면, 에드워드는 그렇지 않다. 대학시절 역사학 수석을 할 만큼 학업능력이 우수했던 그는 종일 담배를 문 허름한 레코드샵 사장이 되었다. 엄마 선물을 산다고 가게에 들른 꼬마가 플로렌스의 딸인 걸 알자 쓸쓸한 얼굴로 그의 친구들에게 그의 커플이 헤어지던 날을 이야기했다. 더 나이가 많이 들어서는 라디오에서 소개된 플로렌스의 은퇴 공연을 혼자 보러 갔다. 그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잘 지냈군요. 혹시 우리도 잘 지낼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너무 많이 어렸을까요.
그들 중 누군가는 꿈을 이뤘다. 그들은 철없던 시절 했던 약속을 용케 떠올렸고 지켰다. 극의 초반부터 커플은 위태로웠으니 그들이 헤어졌다고 하여 이 엔딩이 새드엔딩이라 말하기도 힘들다.
다만 운명이라는 것. 진짜 운명이라는 게 있고 우리는 그저 무력한 존재라면, 얼마나 많이 사랑했는지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새드엔딩이다.
3. 왜 플로렌스는 배를 타고 있었을까
실제로 움직이는 배는 아니었다. 해변 위에 장식마냥 세워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떠한 의미를 형성하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배에 플로렌스가 타고 있는 것처럼 연출했다. 해변 신의 후반부로 갈수록 에드워드는 등을 돌리고 플로렌스는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남자에게 묻는다. 다시 돌아가자고. 하지만 에드워드는 결국 플로렌스를 떠나보내고 만다. 그녀는 말하자면 에드워드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는 십 수년이 지나 레코드샵 사장이 되었을 때도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반면, 배에 타 있던 플로렌스는 에드워드에 관계의 해결책을 말해보거나(그것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더라도)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기도 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다 했지만 연인과의 관계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녀도 상심했을 것이다. 다만 이별 후에는 더 쉽게 털고 나아갈 수 있는 강자의 입장이 되었다. 플로렌스는 나아갔다. 자신의 꿈을 향해, 발전을 향해 항해했다. 플로렌스에게 그 장면은 기회가 아니라 전환점에 가깝다.
-
-
- 영화 캐시트럭 후기 / “제이슨 스타뎀” 2년만에 컴백 / 아들을 잃은 마피아 아버지의 복수 / 믿고 보는 “가이 리치” 감독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캐시트럭”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
- 쿠팡플레이 <왜 오수재인가> 메인 예고편
‘오수재를 다시 만났어’ 10년 전 운명이 뒤틀렸던 공찬의 과거 속 유일하게 자신을 믿어준 변호사 오수재 로스쿨 겸임교수와 학생으로 다시 만난 그들의 이야기
-
- 영화 <그랜드 투어> 메인 예고편
2024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타부' 미겔 고메스 감독 작품 그랜드 투어 메인 예고편 "넋이 나간 것만 같은 연인의 황당무계한 사랑의 여행을 내내 홀린 듯이 보게 될 것이다”
- 정성일 평론가
영국 공무원 에드워드는 약혼녀 몰리가 온다는 소식에 결혼을 피해 싱가폴로 도망친다. 몰리는 에드워드를 쫓아 싱가폴, 방콕, 사이공 등에 이르는 그랜드 투어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