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4-08-23 15:23:16
다시 부활한 코스믹 호러
- <에이리언 로물루스>(2024)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 누구도 선택할 수 없다. 우리는 부모의 DNA를 이어받아 작은 존재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한 길을 걷게 된다. 태어난 순간부터 먹고, 자라며, 배우고,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는다. 이 과정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적용된다. 학자들은 이것을 종족 유지라는 학문적 개념으로 설명하지만, 사실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그 누구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살아가는 본능에 의해 우리는 존재하며, 계속해서 그 본능을 이어갈 뿐이다.
이러한 생명체의 본능적인 삶은 영화 <에이리언 로물루스>에서 더욱 극적으로 묘사된다. 이 영화는 단순한 SF 호러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인조인간, 그리고 에이리언이라는 세 가지 다른 존재가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명확한 본능을 지닌 존재는 바로 에이리언이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폭력적인 행동을 하며, 다른 이들을 해치고 자신을 지키려 한다. 이 점에서 그들의 삶은 극도로 본능적이며,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들이 그저 생존을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영화의 주인공은 10대 인간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식민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환경은 무척 열악하다. 부모들은 일하다 죽거나 병에 걸리며, 아이들은 희망 없는 삶 속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 그 중심에는 레인(케일리 스패니)이 있다. 레인은 부모를 잃고 나서, 이 우울한 행성에서 벗어나 태양이 떠오르는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기를 꿈꾼다. 이 여정에서 레인과 인조인간 동생 앤디(데이비드 존슨),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은 버려진 회사의 함선을 타고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 함선에 숨어있던 에이리언들이 그들의 여정에 큰 위협으로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변화한다.
[첫 번째 감정] 인간 레인의 희망

레인은 직접 태양이 떠오르고 지는걸 보고 싶어한다. 종일 비가 내리는 식민행성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장면이다. 부모의 죽음이후 열심히 일하는 시간을 채워 다른 행성 이주를 꿈꿨지만, 정부에서 그것조차 허가하지 않는다. 레인의 희망은 태양이다. 태양을 볼 수 있는 어딘가로 가는 것이 그에게 남아있는 작은 희망의 조각이다. 레인은 자신이 왜 태어나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하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일 것이다. 왜 살아가야하는가.
그 의문이 레인을 움직이게 만든다. 레인 뿐 아니라 그녀의 친구들도 그 암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버려진 함선에 가려고 한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태어난 삶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드는 방법은 조금 위험한 일이라도 시도를 해보는 것이다. 레인 역시 고민하지만 그 일을 해보려고 한다. 태양을 꿈꾸는 그녀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레인에겐 동생이 있다. 기능 오류로 버려져있었던 인조인간 앤디다. 레인에겐 정말 동생같이 챙겨줘야하는 존재이고, 레인이 힘들어보이면 시덥잖은 농담을 던지며 레인에게 위로를 준다. 인조인간 앤디 역시 자신이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에겐 명확한 목표가 있다. 바로 레인을 위한 선택과 행동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감정] 인조인간 앤디의 미안함

앤디는 스스로를 인간과는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함을 자주 느낀다. 그의 몸이 고장나고, 움직이지 못할 때마다 레인이 그를 리부트해 주는 장면이 반복되는데, 이는 앤디가 자신의 한계에 대해 느끼는 미안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중반부에서 앤디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더 강력한 인조인간이 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적인 감정은 점차 사라진다. 앤디는 점차 기계적인 존재로 변해가지만, 그의 본질적인 존재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레인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며, 그 목적이 그를 움직이게 만든다.
앤디의 이러한 존재는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등장했던 인조인간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의 철학적인 고민과도 닮아 있다. 데이빗은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인간과 인조인간의 경계가 어디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던 존재다. 앤디 역시 인간적인 감정과 기계적인 존재 사이에서 갈등하며,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를 탐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의 미안함과 혼란은 단지 기계적 오류를 넘어서, 그가 가지는 존재의 이유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앤디가 다시 원래의 고장난 앤디로 돌아왔을 때, 우리가 좀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건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적인 느낌 때문일 것이다. 마치 가족처럼 레인을 생각하고 챙기는 그의 모습은 자신의 존재가 무엇이든, 자신이 태어난 그 자체가 바로 가족을 위해서라는 아주 단순한 결론에 도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인조인간이지만, 이 영화 안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다.
[세 번째 감정] 에이리언의 본능
이 영화에서 가장 순수한 본능을 가진 존재는 에이리언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단지 태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다른 생명체를 공격하고,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싸운다. 에이리언들은 자신들이 왜 태어났는지,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하다. 살아남고, 더 많은 생명을 빼앗아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 그들은 극도로 폭력적이고 잔인한 존재지만, 그것은 그들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이 에이리언들을 바라볼 때, 그들의 폭력성에 경악할 수 있지만, 사실 그들 역시 생명체로서 자신을 지키고, 생존하기 위해 싸우는 존재다. 이 점에서 에이리언들의 존재는 인간과도 일맥상통한다. 인간 역시 생존을 위해 싸우고,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며,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이러한 본능적인 생존에 대해 인간과 에이리언의 경계를 허물며, 우리가 그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에이리언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지만, 그들이 가진 본능은 그 자체로 생존의 이유를 설명한다. 반면 인간은 그 존재를 넘어 더 위대한 존재가 되고자 하며, 때로는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 역시 결국에는 에이리언의 본능과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진화하고자 하는 욕망, 더 강력한 존재가 되려는 욕구는 결국 더 큰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시도에 불과할 수 있다.
성공적으로 돌아온 코스믹 호러
영화를 연출한 페데 알바레즈는 <맨 인더 다크>와 같은 작품을 통해 관객의 심리를 자극하는 스릴러와 호러 장르에서 뛰어난 감각을 보여준 감독이다. 이번 <에이리언 로물루스>에서도 그는 긴장감 넘치는 연출과 강렬한 비주얼로 에이리언 시리즈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알바레즈는 공포의 본질을 깊이 탐구하며, 단순한 시각적 충격을 넘어 심리적인 공포를 강조하는 연출을 통해 관객을 몰입시킨다. 그의 연출 스타일은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단순한 공포 영화에서 벗어나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깊이를 담고 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알바레즈가 기존의 에이리언 시리즈에 대한 존경을 담아, 그 설정들을 재구성하면서도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는 점이 돋보인다. 그는 에이리언의 원초적인 공포를 유지하면서도, 우주적 공포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성공적으로 표현해냈다. 기존 시리즈의 코스믹 호러 요소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며, 관객에게 새로움과 익숙함을 동시에 전달했다.
케일리 스패니가 연기한 레인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 자신의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그녀의 연기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을 감성적으로 표현하며, 관객이 그녀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도록 만든다. 인조인간 앤디를 연기한 데이비드 존슨 역시 기계적인 존재와 인간적인 감정을 동시에 표현하며, 그의 캐릭터에 깊이를 더했다. 이들의 연기는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단순한 생존 영화가 아니다. 인간과 인조인간, 그리고 에이리언의 대립을 통해 생존의 본질과 그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인간이 결코 에이리언의 위협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극악의 존재로부터 오는 공포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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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이미 지구는 종말하고 있는 걸 알고 있는 너희들을 위해
스포일러 있습니다!
감독 : 라두 주데
출연진 : 일린카 마놀라케. 니나 호스 외
내 속에는 내가 너무도 많아
이 영화의 주인공 안젤라는 루마니아의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다. 오늘도 취재에 여념이 없는 안젤라. 여기저기서 오는 전화에 정신이 없다. 시내 밤낮을 누비는 안젤라. 직장 상사가 전화로 쪼아대고 있다. 누구는 열심히 일 안 하나? 일상의 대부분을 운전하는데 쓰고 있다. 안젤라가 이렇게 열심히 사는 이유는 직장에서 산업 안전 영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는 손가락이 없고 또 어디를 다쳤고 하는 사연이 안젤라의 귀에 들어온다.
사실 안젤라는 이런저런 일들에 관심이 없다. 모름지기 일을 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함이다. 손가락 다친 남자에게 ‘안전모는 똑바로 썼냐’라는 질문만 할 뿐이다. 쌓이는 스트레스들. 안젤라가 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은 ‘부캐’를 만드는 것이다. 안젤라는 며칠 전부터 틱톡에서 조회수를 꽤나 끄는 소셜 미디어 스타였다. 닉네임은 보비타. 안젤라는 머리가 대머리가 되고 눈썹이 진해지는 필터를 사용해서 우악스럽고 혐오스러운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영화는 안젤라/보비타를 설명한다. 그리고 안젤라가 직접 에세이를 쓴 것처럼 그녀의 일상을 조명한다.
유려하지 않은 수필을 쓰듯
이 영화를 만든 감독 라두 주데는 전작 <배드 럭 뱅잉>부터 에세이 같은 시네마를 고수했다. 수필 같은 시네마라는 뜻은 일반적인 스토리텔링을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이 일반적인 이라고 함은 1,2,3막으로 구성되거나 기-승-전-결로 짜인 이야기를 뜻한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해선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는 주인공이 있어야 한다. 그럼 인물에게 투영된 욕망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영화들은 이 문제에 부지런했다.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와 해준의 욕망은 분명하다. 서래는 살인 용의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해준은 권태로운 일상이 지겨웠다. 하다못해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도 주인공의 욕망은 분명하다. <물안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고 있는 청춘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우리의 하루>에서 시인 의주는 건강하게 살고 싶지만 외로운 건 싫은 욕심이 많은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쓰는 이야기 구조를 쓰지 않는 홍상수 감독마저도 이 ‘욕망’이라고 한 것에 집중한 것이다.
<배드 럭 뱅잉>과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는 주인공의 욕망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주인공의 욕망은 인물들이 자기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자 <배드 럭 뱅잉>에는 부부끼리 찍은 포르노가 인터넷에 유출되고 난 다음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후자는 일이 너무 많아 스트레스 심한 직장인 안젤라가 중심이다. 이런 기본적인 설정을 생각해 보면 감독이 주인공의 욕망을 안일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영화에서 포르노사이트를 고발하거나 직장상사에게 응징하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당연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상 감독의 분신으로서 제작자의 욕망을 보여주기 위해 설정됐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라두 주데의 영화와 에세이가 공통점을 가진다. 에세이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담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어떤 경우에는 주인공이 ‘나’가 아닌 작가의 지인일 수도 있다. 라두 주데는 이 접근법을 사용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위해 이야기의 흐름을 자유롭게 풀어쓰는 것이다. 이 감독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상황을 구현하기 위해 활용된다. <배드 럭 뱅잉>의 형식이 그랬고, 이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상황을 보여주고 이 세계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중심으로 영화를 전개하는 것이다.
실제로 두 영화의 형식이 흥미롭다. <배드 럭 뱅잉>에서 1부는 주인공의 일상만 보여주고 대단한 문제해결 과정을 묘사하지 않는다. 2부는 이야기의 흐름만 본다면 1,3부와 관련이 없다(하지만 영화 내적으로는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 3부는 영화의 엔딩을 연이어 보여준다. 직선적인 이야기로 볼 수 있을까? 아니다.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는 주인공 안젤라가 처한 상황을 미디어의 병폐를 묘사하기 위한 준비물로 사용한다. 가령 안젤라 서사에서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인물이 있다. 1부에서 주인공 안젤라는 흑백처리되어 있다. 반대로 1970년대로 돌아가 안젤라와 입장이 비슷했던 택시기사가 등장한다. 여기서 이 택시기사가 굳이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다. 이 택시기사가 등장해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감독이 루마니아의 노동 실태를 꼬집으며 ‘과연 50여 년이 지난 지금 어떤 것이 변했는가?’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렇게 라두 주데는 영화 안에 넣고 싶은 것들을 최대치로 욱여넣었다. 현상을 꼬집기 위해 인과관계가 확실한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대신 곁가지를 중심에다 붙였다. 이 곁가지가 문제 원인을 얼마나 통렬하게 조롱하고 있느냐가 영화 형식의 핵심이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들어 니나 호스가 맡은 마케팅 디렉터 역할이 후반부에 등장한다. 줌(zoom) 비대면 화상회의를 진행한다. 이 화상회의는 매끄럽지 못했다. 화면이 일그러진다. 이 인물은 심지어 중요하지도 않다. 단순히 웃기려고 이 인물을 넣은 것일까? 아닐 것이다. 또 영화 포스터에 등장하는 보비라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 안젤라는 필터를 통해서 보비라로 변신한다. 이 변신한다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혐오 발언을 굳이 반복해서 넣은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보비라가 혐오 발언을 분출하는 플랫폼은 또 어디인가? 틱톡이다. 이런 요소들이 이야기의 문제해결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설정은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또 차 운전하는 모습은 수도 없이 나온다. 하이라이트로 기능하는 엔딩신도 이와 비슷하다. 심지어 중반부에 들어가는 십자가라는 소재도 글쓴이는 개연성을 뭉개버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와 이게 여기서 들어가네' 싶어서 감탄했다. 온갖 요소들이 들어가되 그것들이 이야기에서 소모적이지 않은 것이다.
안전모는 끼셨나요
영화가 담고 있는 두 가지 현실이 흥미롭다. 첫 번째로 틱톡이다. 보비라가 왜 틱톡커인가라는 점에서 더 자세한 걸 살펴보면 깊게 알 수 있다. 이 카메라는 안젤라가 여성인 걸 숨기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 숨기는 과정이 절대 정교하지 않다. 필터가 풀렸다가 적용됐다가 번갈아가며 묘사한다. 사회문제에 대해 저열한 메시지를 뿜어대는 인물이더라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비라가 하는 여성 혐오적 메시지도 틱톡에 최적화되어 있다. 만약 보비라의 멘트가 120분짜리 장편영화로 만들어진다고 가정하면, 100명쯤 봐도 많은 축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자세한 것을 따지기 이전에 기본적인 인과관계만 봐도 영화의 핵심을 알 수 있다. 보비라가 왜 틱톡커일까? 안젤라가 일하다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니까 분출하고 싶어서다. 이 인과관계만 봐도 틱톡커라고 설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불에 기름 뿌리듯 커지는 일상생활의 스트레스가 자극적인 메신저와 이어진다는 걸 보여준다. 사회 구조가 서로 이어져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 '틱톡커'라는 비유는 안젤라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방식에서도 적용된다. 하이라이트 신에서 안젤라는 피해자 가족의 이야기를 자기 마음대로 편집하고 조종한다. 우리가 아는 정보마저도 어떤 이의 이해관계를 위해 곡해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안젤라가 '나 보비라야!' 하면서 지나간다. 영화에서 보비라가 저열한 메시지를 드러낸다는 점을 본다면 전문가의 손을 거친 뉴스마저도 맹신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걸 암시한다. 영화에서 십자가가 등장하는 이유나 뤼미에르의 영화가 삽입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여과 없는 순수한 자료처럼 보이지만 현대사회의 많은 것들은 이해관계에 의해 편집됐다는 관점이다.
영화가 담고 있는 다음 현실은 '안전모는 끼셨나요?'다. 영화가 기묘하게 품고 있는 남 탓이 있다. 이 영화가 지적하는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노동자들의 착취 문제다. 실제로 안젤라가 취재하는 첫 번째 가족은 추가근무 동안 손가락을 다친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답으로 '안전모는 끼셨나요?'라고 답한다. 손가락을 다쳤는데 안전모를 꼈나 묻는 것도 웃기지만, 아무도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다. 이 부분이 영화의 핵심이다. 문제의 원인과 잘못된 해결이 영화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16시간 동안 일만 하는 안젤라에게 '커피나 마셔라'라고 답하는, 현재 노동시장에서 벌어질만한 일들을 빠짐없이 묘사한다. 이 모티브를 염두하고 영화를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이 모티브는 이야기의 동력으로서 난잡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난잡할 수밖에 없는 극의 분위기가 산만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세부적인 걸 찾아본다면 집착에 가깝게 감독이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다. 4k/휴대폰 액정/카메라/방송국/소셜 미디어 가릴 것 없이 '문제의식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거나 '모두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망가지고 있다'는 조롱이 영화를 만든 것이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지만 영화의 색다른 측면에서의 연출력이 뛰어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글쓴이는 이 영화의 형식만으로도 작품의 가치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웃긴 건 덤이었다.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는 10월 11일 오후 4시 30분에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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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칠갑 가스라이팅에서 탈출해 혁명적 갓생 살기
7★/10★
시작은 사소했다. 그러나 그 사소한 시작이 모든 걸 바꾸었다. 부동산 전문 변호사 렌필드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돈을 벌고자 드라큘라 백작을 만난다. 하지만 비서가 돼달라는 드라큘라의 제안에 솔깃해 이를 받아들인다. 렌필드의 일을 간단하다. 햇빛을 쬐면 안 되는 드라큘라의 거처를 마련하고 그가 계속 강한 힘을 가진 불멸의 존재로 남을 수 있게 ‘먹이’를 공급하는 것.
렌필드는 나름의 ‘양심’을 발휘해 사람들을 괴롭히는 ‘나쁜 사람’만 고른다. 하지만 드라큘라는 ‘순결한’ 피를 원한다. 드라큘라의 힘을 나눠받아 기쁘게만 살아오던 렌필드가 자기 존재와 행위에 의문을 품는 최초의 순간이다. 그러던 중 렌필드는 거대 범죄 조직에게 가족을 잃은 열혈 형사 퀸시를 만나 우연히 생명을 구하는 일의 가치를 깨닫고 드라큘라의 욕망과 자기 욕망을 조금씩 분리해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드라큘라는 유능한 비서인 렌필드를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다. 나아가 범죄 조직과 공조해 지금처럼 몰래 도망 다닐 필요 없이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고용주와 노동자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이 임박한 것이다.
피가 낭자한 B급 고어 액션과 코미디를 버무린 영화 〈렌필드〉는 영화 그 자체로서의 재미도 충분하다. 독특한 콘셉트의 영화를 소화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매우 인상적이다(특히 드라큘라로 분한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가 그렇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고어 액션과 코미디가 자아내는 쾌감과 웃음에 고용주와 노동자,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의 노사 관계 전반에 관한 의미 있는 질문과 통찰까지 새긴다. 적극적인 메시지 독해 없이 봐도 즐겁겠지만, 영화에 담긴 의미까지 살펴본다면 재미가 더 커질 것이다.
먼저 렌필드가 생명 구하기의 가치를 깨닫고 느끼는 최초의 감동에 주목해보자. 이전까지 렌필드는 자기 욕망을 완전히 잊은 상태였다. 즉 고용자 드라큘라의 욕망이 곧 그의 욕망이었다. 때문에 구체적인 업무 지시가 없어도 자기가 먼저 일을 찾아 적극적으로 ‘직업적 소명’을 다했다. 물론 고용자와 노동자의 욕구가 일치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자본주의 사회가 모두 ‘돈’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듯이 말이다. 문제는 이 공동의 목표가 공공에게 해가 될 때다. 자본주의가 이윤을 내려면 누군가의 노동을 착취하거나 환경을 파괴해야 하듯이, 렌필드가 드라큘라를 만족시키려면 누군가의 생명을 헤쳐야만 한다. 이는 렌필드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요컨대 누군가를 죽여 드라큘라에게 갖다 바치는 렌필드에게는 생명의 소중함을 자각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퀸시의 진정성 어린 감사 인사로 렌필드의 가치관에 균열이 인다. 드라큘라의 먹잇감이 사실은 소중한 존재였다면? 그리고 사실은 자신이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데 더 큰 행복을 느낀다면? 더불어 자신의 노동 없이는 드라큘라의 악행이 지속될 수 없는 것이라면?
문제는 렌필드의 각성이 즉각적인 실천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드라큘라의 가스라이팅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이 렌필드에게 삶의 의미와 힘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렌필드에게 자신이 준 힘이 달콤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그러다 끝내 렌필드가 돌아오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자 또 다른 사람을 구해 렌필드의 일을 맡긴다. 새로운 행복을 찾은 렌필드는 자꾸만 흔들리고 약해진다. 드라큘라 없이는 자신이 정말 보잘것없는 존재라면? 자신이 그저 누군가로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존재일 뿐이라면? 각성 이후 방황하는 렌필드를 붙잡아주는 건 퀸시다. “그(드라큘라)와 맞서기 전엔 자유로워질 수 없어요.”
이처럼 〈렌필드〉는 꽤나 과격한 혁명을 주창한다(렌필드와 퀸시가 문자 그대로 드라큘라를 몽둥이찜질하는 장면을 보라). 렌필드가 자본주의로 피폐해진 노동자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힐링 산업’을 전유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집단 상담 치료에서 권태롭고 무기력하게 반복될 뿐이던 ‘동반의존자(codependent)’라는 말이 자본주의 노사 관계를 거스를 노동자 연대로 탈바꿈되는 장면 말이다. 렌필드가 드라큘라에게 받은 힘을 바탕으로 그와 싸움을 벌이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내재적인 것이든 학습한 것이든 세상을 뒤엎고 선한 자기 욕망을 실천할 힘이 있다. 다만 자본주의 가스라이팅을 거스를 계기가 마련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의 역능과 욕망을 새롭게 정향하려는 B급 고어 코미디의 시도가 당신에게도 무언가를 촉발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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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미 박스오피스를 부활시킨 영화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주도하는 ‘북미’ 박스오피스 시장이 돌아왔습니다. 덕분에 할리우드 주요 영화 스튜디오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고 하는데요! 미국의 현충일, ‘메모리얼 데이’는 북미 주요 국경일로써, 가장 큰 수익을 내는 공휴일 중 하나로, 이번 연휴를 노리고 개봉한 두 편의 블록버스터 영화로 인하여 극장이 오랜만에 매우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본 기록이 북미를 비롯한 전세계 박스오피스 시장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 이유는, 이번 박스오피스 수익이 팬데믹 이전의 박스 수익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2>의 전편인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2018년 4월 개봉 당시 5020만 달러의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하였는데요. 이는 제작비 1700만 달러의 알려지지 않은 영화의 예측하지 못한 흥행이었기에, 제작사는 곧바로 속편 제작에 착수하였고, 전편보다 훨씬 큰 제작비인 6100만 달러를 투자하여 2편을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극장 매출을 개봉 일주일 만에 벌어들인 것이죠.
<콰이어트 플레이스 2>와 같은 날 개봉한 디즈니의 <크루엘라>의 경우, 북미에서는 자사 OTT 플랫폼인 디즈니+와 동시 개봉을 택했는데요. 디즈니+에서 극장 티켓가보다 비싼 30달러에 대여되고 있는 <크루엘라>는 OTT와 극장으로 관객이 양분된 상황 속에서, 오프닝 스코어 2130만 달러 (약 237억 원)을 기록하며 분전하였습니다.
현재, 약 75%의 극장이 가동되고 있는 북미 시장은 극장 좌석 수가 제한된 상황 속에서도 힘겹게 극장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한 미디어 분석가에 의하면 “본 연휴를 맞아 개봉한 두 편의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2”, “크루엘라”)는 관객들의 대작에 대한 꺼지지 않은 관심을 다시 한 번 알아볼 수 있는 계기였다”고 하는데요. 국내에서도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가 개봉 2주 만에 관객 수 200만에 육박하는 기록을 써가고 있는 걸 보면, 개봉이 연기되고 있는 블록버스터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이 기세를 몰아 <컨저링 3: 악마가 시켰다> (6.4 북미 개봉), <인 더 하이츠> (6,11 북미 개봉), <히트맨의 보디가드 2> (6.16 북미 개봉),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6.25 북미 개봉) 등 매주 각 영화사의 텐트폴 영화들이 줄지어 개봉될 예정인데요.
북미뿐 아니라, 전 세계 박스오피스가 가장 활발한 ‘여름’ 시장이 올해는 정말 ‘활발’할 수 있길 바라며,
오늘 하루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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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이 스토리'지만 장난감 이야기가 아닌
MZ세대들의 어린시절을 함께한 추억의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는 픽사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던 만큼 픽사 특유의 감동과 재미가 가득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손꼽히고 있는데요. 픽사의 스토리 아티스트가 공개했던 픽사 애니메이션 규칙 22가지를 보기만 해도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단순 오락'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꿈과 희망을 선사해준 픽사가 이번엔 추억을 선사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픽사의 프랜차이즈 <토이 스토리>, 그 중에서도 우주 전사 '버즈 라이트이어'에 관한 이야기가 2022년 세상에 공개된다고 합니다.
2020년 12월, 픽사가 <라이트이어>의 개봉일(2022년 6월 17일)과 함께, 버즈 역을 맡을 성우는 '크리스 에반스'가 될 것이라고 공개하며 큰 화제를 불러모았는데요. 그로부터 10개월이 지난 지금, 픽사가 <라이트이어>의 티저예고편을 공개하여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우주전사라는 캐릭터 설정에 걸맞는 SF 컨셉 애니메이션 <라이트이어>는 토이 스토리 1편부터 4편까지 '버즈' 역의 성우를 맡아온 '팀 앨런'이 아닌,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 '크리스 에반스'가 성우를 맡았는데요. 팀 앨런이 아닌 버즈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상징적인 목소리를 대체한 이번 애니메이션에서는, 목소리뿐 아니라 캐릭터의 크기 및 전반적인 컨셉까지 많은 수정을 거친 것으로 보입니다. <라이트이어>는 단순 장난감이 아닌, 버즈 라이트이어 캐릭터에 모티브라 볼 수 있는 실제 우주 비행사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요.
공개된 예고편을 통해, 우리는 위험하고 대담한 우주 임무를 떠나는 '버즈'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데이빗 보위의 'starman'에 맞춰 버즈는 우주 행성을 탐험하고, 미션을 수행하기 위한 나날을 보내는데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버즈'의 우주복이 '수트'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출처 : 트위터 계정(@ChrisEvans)
때문에, 이 티저 예고편은 많은 혼란을 야기하였는데요. 게다가, 크리스 에반스가 작년 12월 "이건 장난감 '버즈 라이트이어'가 아닙니다"라는 트윗을 남겼기에, 혼란이 가중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과연, <라이트이어>는 <토이 스토리>의 스핀오프가 아닌, 아예 새로운 영화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MCU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전혀 다른 캐릭터들이 출연해도 연속된 시리즈로 여겨지고, 결국 모든 것이 타래로 연결되듯, <라이트이어> 역시 <토이 스토리>의 파생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픽사 스튜디오의 피트 닥터 감독은 토이 스토리가 처음 제작될 당시, 버즈 라이트이어를 블록버스터 급의 서사를 가진 캐릭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그 캐릭터 뒤에 숨겨진 서사를 풀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기에, 지금 <라이트이어>라는 스핀오프작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 <라이트이어>는 버즈 라이트이어 캐릭터에 대한 솔직한 SF 액션 영화이며, 이는 <토이 스토리>의 주인공인 '앤디'가 버즈 라이트이어가 꿈꾸던 바를 상상 속에서 이어나간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라이트이어>가 <토이 스토리>와 연결된 내용이 아니더라도, 이 영화는 작품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인데요. 우리가 알던 '버즈 라이트이어' 장난감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실망할 이유는 전혀 없어보입니다. 최근, 많은 디즈니 실사 애니메이션이 시대에 맞는 변화를 택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또다른 희망을 심어주었듯, <라이트이어> 역시 미래의 청년들을 위한 또다른 애니메이션이 되어줄 예정이니까요.
2022년, <토이 스토리>의 새로운 시작을 열어줄 <라이트이어>의 개봉을 기다리며
오늘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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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메이크하며 바뀐건 시대랑 소품, CG뿐?
리뷰하기에 앞서, 본 영화는 1984년 영화인 '초능력 소녀의 분노'를 리메이크한 영화이다.
제작사는 블럼하우스인데 1933년 영화 '투명인간'을 리메이크 겸 재해석해 만든 '인비저블맨'이 정말 만족스러운 공포영화였기에 이번 작품을 기대한 부분이 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제로 감상해보니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우선 리메이크를 하면 팬들은 재해석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사이코'가 혹평을 받은 이유가 말 그대로 원작을 똑같이 따라갔기 때문인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파이어스타터도 필자가 1984년 작품을 안 봤지만 "대체 현대로 리메이크하면서 뭐가 바뀐거지?" 이런 생각이 든다.
원작 줄거리를 보니 캐릭터 일부 추가되고 전개가 좀 바뀌고 했는데, 후술하겠지만 줄거리가 아쉬웠어서 괜히 바꿨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외에 바뀐 거는 솔직히 시대가 바뀜에 따라 추가된 소품들(CCTV가 사용된 연출, 스마트폰 얘기 등), CG가 사용됐다는 거 정도밖에 없어보인다.
그리고 줄거리는 상당히 아쉽다.
등장인물들이 가진 초능력을 너무 편의적으로 전개하는데 남발되고, 특히 마무리는 대체 뭐지 싶을 정도로 주인공과 등장인물의 행동에 납득이 안 간다.
후속작 제작 의사가 있다는 얘기는 이미 알고 있으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개인적으로는 억지로 떡밥 남기는 거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라 아쉬움이 컸다.
그리고 볼거리도 나쁘진 않지만 그렇게까지 훌륭한 것도 아니다.
저예산으로 잘 뽑아내는 블럼하우스 답게 CG는 괜찮게 나와서 보는 맛은 있다.
그런데 영화의 볼거리를 담당하는 방화 능력이라는게, 지금 와서 보면 꽤 진부하다.
공중부양, 변신 같이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능력과는 다르게 어떻게보면 그냥 불일 뿐이기 때문이다.
막말로 영화에서의 방화 능력을 직접 보고 싶다면 그냥 어따가 기름 좀 붙고 라이터로 불 붙이면 된다.
방화가 무슨 불을 뿜어내고 손에 불이 나오고 그런게 아니라, 그냥 말그대로 소환 시키는 거라, 수많은 초능력물들이 나온 현대에 봐서는 꽤진부하게 느껴진다.
필자의 평을 보면 흔히 말하는 '망작'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그 정도 까지는 아니다.
그래도 가끔씩 선사하는 볼 거리가 괜찮고, 줄거리도 급전개나 편의적인 전개가 보일 뿐이고 마무리가 황당한거지 처참한 수준까지는 아니기 때문에.
러닝타임도 1시간 반 정도로 짧아서 킬링 타임용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든다.
보면서 따분하거나 지루하지는 않다만, 강력히 추천하기는 어렵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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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 북유럽 복수극의 창조적 파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중동으로 파견되어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덴마크군 군인 '마르쿠스(매즈 미켈슨)'. 그는 아내와 딸 '마틸드(안드레아 하이크 가데버그)'가 열차 충돌 사고에 휘말렸고, 아내가 끝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다. 좀처럼 아내와의 사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지내던 그의 앞에 어느 날 아내와 같은 열차 칸에 탔던 통계학자 '오토(니콜라이 리 카스)'가 등장한다. 그는 데이터 분석가 '에멘할러(니콜라스 브로)', 해커 '렌나르트(라르스 브리그만)'와 함께 분석한 자료를 근거로 열차 충돌 사고가 계획된 범죄였음을 알려준다. 이에 분노로 가득 찬 마르쿠스는 직접 범인들을 심판해 아내의 복수를 이루려 한다.
여기까지가 덴마크의 국민배우 매즈 미켈슨이 주연을 맡은 앤더스 토마스 옌센 감독의 영화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의 줄거리다. 사실 줄거리만 보면 이 작품은 리암 니슨의 대표작인 <테이큰> 시리즈나 최근에 개봉한 <캐시트럭>을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복수극이다. 이들 영화 속 주인공은 자신 혹은 사랑하는 이의 신체나 정신을 파괴할 정도로 강력한 범죄를 경험한다. 이후 주인공은 자신의 피해를 되갚아 주기 위해서 범인을 추적하고 계획을 세운다. 마지막으로 그는 범인과 대결하고 피비린내 나는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하지만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를 앞서 언급한 예시들과 동일한 범주에 놓는 것은 부적절하다. 영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는 복수의 결과를 보여주기보다는 일반적인 상업 영화 속 복수극의 단계를 뒤틀어 복수의 이면과 본질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이를 위해 옌센 감독은 복수극의 공식을 파괴하는 네 장의 카드를 꺼내 보인다.
첫 번째 카드는 복수극의 단축과 서스펜스의 실종이다. 작중 복수의 계획과 범인의 추적은 막힘 없이 진행된다. 마르쿠스는 직접적인 범인으로 판단한 이를 이렇다 할 저항 없이 죽인다. 범인이 속한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라는 이름의 갱단 구성원과 보스가 누구인지, 그들의 집합 장소와 시간을 알아내는 작업도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궁극적인 범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갱단 보스와의 대결도 총알이 그의 머리에 꽂히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고 깔끔하게 끝난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숙명의 대결은 없다. 그 결과 영화는 러닝타임을 30분가량 남겨둔 상태에서 이미 마르쿠스의 복수를 일단락시킨다.
두 번째 카드로 영화는 일단 복수가 끝난 극의 전개를 해피엔딩과 새드엔딩 중 어느 것에도 도달하지 못한 충격과 혼란 속에 빠트리면서 복수의 이면과 의미에 대한 고찰을 풀어놓는다. 성공적인 복수를 자축하던 찰나에 마르쿠스와 동료들은 지나치게 수월히 진행된 복수가 열차 충돌 사건과 무관한 이를 죽이고, 관련 없는 갱단을 공격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들의 복수는 완벽한 헛발질이었고, 더 나아가 그들의 위치를 복수의 주체로부터 아무 이유 없이 봉변을 당한 갱단의 복수 대상으로 뒤바꿨을 뿐이다.
그 순간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마르쿠스의 반응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깊이 절망한다. 단지 자신이 잃은 것을 되갚아 주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에게 복수는 구원을 얻기 위한 속죄 행위이기 때문이다. 중동 파견 군인이라서 아내와 딸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미안함, 그리고 그들이 사고가 발생할 기차를 타는 원인을 직간접적으로 제공했다는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던 그. 그의 입장에서 성공한 복수의 아이러니한 실패는 아내와 딸에게 사죄하고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길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더해 그가 복수만을 바라보며 아등바등한 모든 시간이 무의미하다는 진실도 그의 절규를 더 비참하게 만든다. 사실 마르쿠스의 복수극은 명백한 팩트(fact)가 아닌 한 가지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모든 사건에는 우연이 아닌 인과관계가 존재하며, 그 인과관계를 파악하면 특정 사건을 예측할 수 있고 동시에 특정 사건의 원인도 밝혀낼 수 있다는 가설이다. 그래서 오토, 렌나르트, 에멘할러는 마르쿠스에게 수상한 탑승객의 행적이나 갱단의 보스와 관련된 이슈 등을 근거로 내밀며 단순한 사고로 보이는 열차 충돌 사건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으로 예정되었던 테러라고 주장할 수 있었고, 이는 그가 복수에 나서는 방아쇠가 된다.
따라서 그들의 총알이 과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을 깨닫는 순간, 열차 충돌 사건이 테러가 아니라 의도가 섞이지 않은 우연이 낳은 사고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복수는 역으로 그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복수는 본질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현재에 전복하는 행위이기에 과거의 사건들이 현재 상황에 영향을 끼쳤다는 근거가 있어야만 복수의 대상이 특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는 마르쿠스의 절규를 통해 복수극을 지탱하는 전제를 파괴하고 기존 복수극의 전개와 구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의미심장하게 연출되었던 자전거 도둑 사건이나 값비싼 샌드위치를 그냥 버려버리던 수상한 남자 등도 이 시점부터는 전부 아무 의미 없는 맥거핀이 되어버린다.
대신 옌센 감독은 복수극의 의미가 없어진 자리에 한 편의 힐링 드라마를 채워 넣는 세 번째 카드를 꺼낸다. 그 중심에는 마르쿠스와 함께 복수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오토, 렌나르트, 에멘할러 삼인방이 위치한다. 그들은 마르쿠스와 계획을 세우고 범인을 찾아다니는 동안 예상치 못한 기행을 하나씩 저지르면서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마주한다. 원하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신체적 콤플렉스에 시달린 이, 헛간에서 가정폭력을 경험한 피해자, 자신의 실수로 가족을 떠나보낸 아버지까지. 여기까지만 보면 그들이 처한 상황은 아내와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분노로 삭히지 못해 폭력을 자제하지 못하는 마르쿠스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아픔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르쿠스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서로에게, 또 한 팀을 이룬 마르쿠스와도 자신들의 상처를 공유한다.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고, 아닌 척 서로 신경 써주며 웃음과 유머로 고통과 상처를 보듬어 안으며 마치 가족과도 관계를 이룬다. 이는 삼인방 서로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렌나르트와 에멘할러는 자신들이 받은 심리치료를 바탕으로 아버지 마르쿠스와의 관계가 무너지진 마틸드의 콤플렉스를 발견하고 치유해주며, 오토는 엄마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그녀의 죄책감을 덜어준다.
영화에서도 언급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슬픔의 5단계' 안에서 삼인방과 마르크스의 차이는 더 분명해진다. 삼인방은 상실과 슬픔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새롭게 살아가는 법, 즉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보듬어주는 방법을 깨우치고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중 마지막인 '수용' 단계로 넘어가 있다. 반면에 마르쿠스는 여전히 절망과 슬픔 같은 강렬한 감정을 느끼며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우울' 단계에 머무르는 데 그친다. 다만 그 역시 마지막에는 오토에게 안겨 울면서 자신이 외면하던 과거와 진실을 받아들이고,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구해주면서 온전히 상처와 고통을 나누고 서로 보호하는 관계에까지 이른다. 이는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가 이미 지나간 과거를 붙잡고 형체 없는 대상을 쫓는 복수극 대신, 현실의 아픔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면서 보다 나은 미래를 다짐하는 힐링 드라마로 거듭나려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카드로 영화는 덴마크, 곧 북유럽권의 고유한 정서를 부각하며 분량의 절반 가량을 맥거핀으로 만드는 플롯을 매끄럽게 다듬는다. 그 독특한 분위기는 비장함과 황량함, 그리고 이를 버텨내는 일상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뛰어난 북유럽 범죄소설에 주는 유리열쇠상을 '해리 홀레' 시리즈로 수상한 노르웨이 작가 요 네스뵈가 2014년 방한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작품이 "북유럽 특유의 슬픈 감성"을 담고 있으며, 그 감성은 "커다란 재난이 일어나서 겪게 되는 슬픔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축적된 슬픔"이고, 사람들이 "그 슬픔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소설에 주로 담는다고 밝힌 것이 단적인 예시다. 이러한 북유럽 고유의 감성은 일 년 내내 춥고 거친 황량한 환경에서 생존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심성적 측면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동일한 정서는 북유럽 신화에서도 느낄 수 있다. 북유럽 신화는 신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세계의 종말인 라그나로크에서 대부분의 신이 사망하는 결말을 맺는다. 신보다 운명이 더 우위에 있고, 신이라 해도 세계의 운명을 극복할 힘은 없다. 단지 운명과 현재를 받아들이면서 견뎌낼 뿐이다. 다만 북유럽 신화는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 라그나로크를 피한 몇몇의 신과 단 한 쌍의 인간이 새롭게 황금시대를 만들 것이라고 노래하며 종말 그 너머에 있을 미래에 대한 작은 희망만큼은 간직한다. 이처럼 운명에의 순응과 실낱같은 기대가 담긴 신화는 신과 운명에 저항하는 영웅을 사랑하는 그리스 신화 및 비극의 전통과 뚜렷이 구분된다.
영화는 이러한 감정들을 주인공들의 서사에 깊숙이 녹여낸다. 성당 장례식에서 모든 비극은 우연이라는 추모사를 모두 부정하며, 신과 산타클로스 따위는 없다던 마르쿠스가 태도를 바꾸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피에타 상처럼 동료의 품에 안기는 그는 아내의 죽음을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연에 가까운 확률이 빚어내는 현실과 운명에 순응한다. 그러면서도 세계의 멸망 속에서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희망과 낙관을 버리지 않는 신화처럼, 마르쿠스와 동료들은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날에 프렌치 호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각자의 슬픔과 아픔을 딛고 지금보다 따뜻한 미래를 다짐한다. 이처럼 북유럽만의 감성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마무리와 함께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는 복수극이라는 껍질을 깨부수면서 한 편의 진중하고 따뜻한 힐링 드라마로 온전히 탈바꿈한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플롯의 공식과 장르의 관습을 깨부수는 노르딕 복수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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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이 가득한 범죄 액션 / 마약 브로커 야당 / 믿고보는 배우들 / 유해진, 강하늘, 박해준
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야당" 후기입니다.
*엔드크레딧 전 쿠키영상 하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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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보리] 리뷰:청각장애를 넘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따뜻한 영화
#나는보리#영화리뷰#청각장애인
청각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장애로 인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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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모범가족> 티저 예고편
"내가 가족을 지킬게" 그 돈을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죽은 자의 돈때문에 처절하게 얽힌 《모범가족》 8월 12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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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숏버스 이별행> 메인 예고편
웃음과 눈물이 번진 이별 기억...
위로가 필요한가요?
전남친의 집을 찾아간 ‘진아’
무대에서 폭발한 밴드 보컬 ‘혜승’
백수 남친과 아직도 못 끝낸 ‘혜수’
새로운 시작을 꿈꿨던 ‘미영’
네 편의 단편영화와 함께하는
이별 여행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