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05-05 23:46:39
[JIFF 데일리]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공간
영화 <럭키, 아파트>
SYNOPSIS.
안정된 주거 환경을 꿈꾸던 레즈비언 커플 선우와 희서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작은 아파트를 마련한다. 하지만 선우가 불황으로 일자리를 잃고 다리까지 다치게 되면서 전적으로 희서가 대출금과 이자를 떠안게 되자, 둘 사이는 삐걱대기 시작한다. 집에서 쉬게 된 선우는 일자리를 찾지만 쉽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악취로 두 사람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한다.
PROGRAM NOTE.
한 동성 커플의 갈등이 한국 사회의 구조 안에서 발현되는 과정을 담은 <럭키, 아파트>는 한국 퀴어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작품이며, 소수자를 대하는 우리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뛰어난 사회 드라마다. 제약회사 직원인 희서와 계약직으로 일하다가 직장을 잃은 선우는 9년 차 동성 커플이다. 객관적으로 경제적 차이가 나는 상황이지만 서로 크게 티를 내진 않는다. 하지만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면서, 아파트 구매 자금 대부분을 부담한 희서와 기여도가 거의 전무한 선우 사이 갈등은 점차 커지기 시작한다. 아래층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는 커플의 간극을 더욱 키운다. 냄새의 근원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선우가 아파트 가격 하락의 주범으로 찍히며 동 대표 등 주민들과 갈등을 겪는 반면, 직장에서 겪는 성차별로 스트레스를 받는 희서는 커플 관계가 주변에 알려질까 두려워하며 선우의 행동을 비판하고 둘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처한다. <럭키, 아파트>의 또 다른 미덕은 갈등과 배제라는 이야기 속에 사랑과 연대라는 희망의 싹을 집어넣는 점이다. 아래층에 살던 할머니의 사진을 갖고 싶어 하는 친구분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무단침입까지 감행하는 선우는 “왜 그랬냐”는 희서의 질문에 “남 일 같지 않아서”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감동적인 대사는 아름다운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태원>(2016), <시국페미>(2017), <우리는 매일매일>(2019) 같은 여성주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강유가람 감독은 첫 극영화에서도 놀라운 역량을 보여준다. (문석)

몇 년 전 <이태원>을 보고 받았던 충격이 생생하다.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도 들여다볼 수도 없는 세상의 이야기를, 이토록 섬세하게 연출하여 가져다 주는 영화라니. 강유가람 감독의 이름을 그렇게 알았고, 그 후 다큐멘터리 작품만 만나다가, 첫 극영화 연출작이라고 해서 고민 없이 선택했다. 그리고 역시나 이번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았다.
공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영화는 희서와 선우가 나란히 앉아 있는 푸른빛 자동차에서 시작하여, 이내 푸른빛 침구와 소파가 놓인 두 사람의 아파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부동산 문제는 한국 사회의 머리 아픈 과제이자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기회여서 도무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이고, 이 영화 속에도 집값을 우려하는 사람들이나 대출이자에 한숨 짓는 희서를 통해 그런 문제의 면면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아파트에서 내게 가장 먼저, 가장 깊이 각인된 것은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집안일에 필요한 도구들은 정갈하고 생활감 있는 위치에 표현되고, 운동 기구도 깔끔히 놓여 있으며, 설거지하는 선우 뒤로 걸려 있는 와인잔 같은 것들은 두 사람이 각자의 삶과 함께하는 삶, 일과 관계의 낭만까지 허투루 하는 구석 하나 없이 열심히 사는 사람들임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집은 사는 사람을 드러내니까.
그런데 그 공간에 자꾸 퍼지는 냄새가 있다. 쓰레기를 비우고 박박 문질러 닦고 락스를 부어 봐도 사라지지 않는 냄새. 문제를 올곧게 직면하며 정공법으로 해결하려는 선우와, 적당한 불편함을 삼키면서 피할 수 있는 갈등은 최대한 피해 가려는 희서의 방법은 냄새를 두고도 계속 부딪게 된다. 시작부터 두 사람의 갈등은 진작 지나간 일, 이미 어쩔 수 없는 일들을 논하고 있고, 우리 모두 가까운 사람과 싸워 봐서 잘 알듯 그건 필연적으로 '탓'이 된다. 쌓이는 쓰레기를 내어 버리고 바닥을 박박 문대어 닦듯, 좋지 않은 감정도 주기적으로 그래 주어야 하는데, 두 사람에겐 그럴 여유가 없다.

자격: 더 필요한 자에게 더 문턱이 높은
아파트는 한국 사회에서 공간인 동시에 거의 어떤 정체성의 일부처럼 기능하고 있다. 어느 동네 산다는 것으로도 모자라 어느 아파트에 산다는 것을 꼬리표로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 중 일부는 집값 하락에 대한 우려를 심어주는 '부적절한' 입주자를 걸러내고 싶어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임대주택이 단지 내에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차별하면서, 차별이 아니라 차이라고 말한다든지. 이들에게 아파트는 자본으로 거래한 재화보다는 오히려 봉건시대의 성직이나 성기사직처럼 거의 부여받은 자격에 가깝다.
주거지의 위치나 입지뿐 아니라, 주거지를 획득하기 위한 과정 또한 마찬가지로 자격을 요한다. 고공행진이라는 말을 쓰기도 머쓱할 정도의 매매 비용으로 인해, 노동소득만으로 매매할 준비가 되는 사람이 거의 없이 사회에서, 빚도 재산으로 인지하는 이 사회에서, 대출 또한 일정한 자격을 필요로 한다.
사실 고정비를 줄일 필요성이 더 절실한 이들에게 이 문턱은 더 높다. 빈곤은 단순히 돈의 많고 적음 혹은 그 돈을 획득하기 위한 개인의 노력 정도로만 얄팍하게 재구성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에도, 이 사회의 천민 자본주의는 너무 쉽게 문턱 아래 있는 사람을 업신여긴다. 게다가 빈곤 문제만 엮여 있지도 않다. 번듯한 직장에서 돈 잘 버는 희서는 물론, 대출 자격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선우도 배우자의 존재를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어 이 문턱 앞에서 더욱 불리하다.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은행이 공짜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니, 일정한 자격이 필요하고 좋은 아파트 사는 게 잘못도 아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악의조차 없이, 타인에 의해 존재가 흐릿해지는 경험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파트를 중심으로 모인 이 영화 속 인물 다수가 그렇다. 명백한 성차별 혹은 업무상 클라이언트라는 이유로 갑을 관계처럼 대우하는 의사 앞에서 표정을 마음껏 굳히기도 어려운 희서, 배우자가 있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혀야 하는 사람들.
가진 자가 나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숱하게 부정당하는 순간들을 마주했던 인물이지만, 모르는 척 개인정보 유출이라도 해달라는 선우까지도 타인의 존재를 흐릿하게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사회 전체가 거대한 아파트처럼, 서열화되고 파편화되고 서로를 볼 수 없는 이 사회에서는, 우리 모두 알게 모르게 타인의 존재를 흐릿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다만 유독 중첩되어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도 떠오르게 만든다. 꼭 동성애 커플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기 때문에 질문은 자연스레 확장된다. 원가족과 연결되어 있지 않거나(혹은 그렇지 못하거나), 원가족이 찬성하지 않는 결혼으로 새 가정을 이루어 인정받지 못했거나, 1인 가정을 이루어가는 사람... 이 모두가 사후 장례나 청소조차 이루어지기 어려운 얄팍한 세상을 밟고 살아야 한다니. 최대한 모두를 촘촘히 보호할 망을 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들만 보호하는 법으로 남겨두기엔, 그 자격 부여받지 못하거나 걷어차고 나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이니까. 1인 가구가 갈수록 증가하고, 가족의 형태와 개념과 사회적 합의가 많이 변해 가는데, 언제까지 저출생 염불만 외고 있을 것인가. 이런 고민들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사랑: 남는 건 그저 소중하게 빛나는 마음뿐
사회의 자장에서 매우 투박하게 다뤄지며 변죽만 울리는 이 문제들을 영화는 섬세하게 담아낸다. 그리고 이 문제와, 그 안에서 심화되어 가는 인물들 간의 갈등이 뒤엉키며 영화는 점점 심란하게 흘러간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사람을 피로하게 혹은 절망하게 하지 않는다. 시의적절하게 작고 소소하게 기웃거리는 희망은 마지막에 뽀얀 빛을 발한다.

아무도 이 영화에서 법과 제도를 들어엎는 식의 해결을 기대하지는 않겠지만 (이 영화의 국적이 인도였다 해도, 요즘 인도 영화도 그 정도는 안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사랑과 희망의 이름을 빌려 우리에게 반짝반짝 빛나는 마음을 가득 안겨준다.
희망이나 연대는 아주 거대한 단어 같지만 이 영화는 아주 사소한 순간에서 그것들을 보게 한다. 거드는 말 한 마디, 지키는 말 한 마디, 공감의 감탄 하나. 사소한 이웃의 대화. 그런 말이 놓인 자리라면 거기야말로 럭키, 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랑. 언젠가는 우리 모두 죽고 스러져 결국 낡은 사진으로만 남을, 그러나 그 사진이 낡아가도록 바라보는 마음. 다친 데를 감싸 주며 사는 게 결국 사랑일 것이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말과 법도에 지치고 밀려 스스로 손톱을 뜯을 때, 손톱을 뜯은 사람을 타박하는 게 아니라 그 손톱을 뜯게 된 과정이 결국 타의에 의한 상처임을 함께 아파하며 감싸 주는 것.
상처는 언젠가 낫는다. 부상도 그렇다. 다만 남는 건 그저 사랑이다.
2024. 05. 02. 21:30 CGV전주고사 3관 (상영코드 157)
2024. 05. 04. 13:30 CGV전주고사 3관 (상영코드 323)
2024. 05. 09. 20:30 메가박스 전주객사 2관 (상영코드 840)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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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게 이런건가봐 기쁨이 줄어드는거”
어른들이 뭉클한 마음을 안고 나온다는 <인사이드 아웃 2>
<인사이드 아웃2>가 개봉 5일만에 200만 관객수를 돌파했습니다.
전편 <인사이드 아웃1> 기록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200만 명을
돌파하며 픽사 애니메이션 최고 속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북미 개봉 후 사흘간 2150억원의 티켓 수입을 기록하며
애니메이션 영화 중 두 번째로 높은 개봉 첫 주 수입을 기록했으며
픽사의 29년 역사상 2위에 올랐습니다.
쏟아지는 극찬 후기로 지난해 700만 관객을 넘게 모은
<엘리멘탈>까지 뛰어넘을것으로 보입니다.
�<인사이드 아웃1> 이후 9년만의 후속작
�주인공 라일리가 13살이 도고 사춘기에 접어들자 감정 컨트롤 본부에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 등장하면서 큰 변화를 겼는다.
'This film is dedicated to our kids. We love you just the way you are.'
-PIXAR-
<인사이드 아웃 2 > 줄거리
디즈니·픽사의 대표작 <인사이드 아웃> 새로운 감정과 함께 돌아오다!
13살이 된 라일리의 행복을 위해 매일 바쁘게 머릿속 감정 컨트롤 본부를 운영하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그러던 어느 날, 낯선 감정인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가 본
부에 등장하고,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며 제멋대로인 ‘불안’이와 기존 감정들은 계속 충돌한다.
결국 새로운 감정들에 의해 본부에서 쫓겨나게 된 기존 감정들은 다시 본부로 돌아가기 위해 위험천만한
모험을 시작하는데… 2024년, 전 세계를 공감으로 물들인 유쾌한 상상이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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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스름한 운명의 결박을 뒤흔드는 관능과 냉소의 퀘스트
※영화 〈그린 나이트〉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상을 한번 해 보자. 소위 명망가의 집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으레 가족 중에는 속을 썩이는 아픈 손가락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다들 명석하고 현명해 가업을 이을 인재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들이 하는 대로 당장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하는 인물로 커나가지 않을 수도 있다. 천덕꾸러기 역할을 하는 사고뭉치가 없으란 법은 없다. 자식이 그런 역할일 때 부모는,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대충은 짐작이 가나 굳이 대답을 듣기도 싫고, 딱히 뭐가 되어야겠다는 목표도 없어 보이는 저 아이를 어떻게 교화시킬지 고민이 많아진다. 그럴 때 몇 년이라도 더 살아 본 이웃과 주변인들은 자식을 키워 본 경험들을 이야기한다. 누구나 각자의 방식대로 기회가 찾아오듯 지금은 답답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리를 잡고 제 구실을 할 것이라 위로한다. 하지만 그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기 위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를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걸 알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 거대한 녹색의 형체에 도끼를 들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지는 않을까.
왜 기사가 되고 싶은가?
영화가 켜켜이 쌓은 은유와 상징은 여러 갈래로 해석할 통로를 만들어준다. 문학의 뿌리이자 시초를 선택해 새로운 변형을 가한 데이빗 로워리는 전환기의 문제작을 선택해 낯설지 않고도 예측할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중세를 지탱하는 정신이었던 기사도는 접근할 수 없는 흠모의 대상인 귀부인을 향해 미혼의 기사가 펼치는 거세된 욕망의 궁정식 사랑으로 유지된다. 중세 귀족 중심의 남성연대를 유지하는 기능을 했던 이 논리에 따르면 기사는 꿈에도 넘볼 수 없는 성주의 ‘소유물’인 귀부인에게 플라토닉 사랑을 표출한다. 조금이라도 성적 욕망을 드러낸다면 궁정식 사랑의 가치와 논리는 파괴된다. 여성은 욕망을 표출하는 대신 기사의 임무를 부여하는 대상으로만, 마치 게임 속 퀘스트를 전달하는 NPC로 존재한다. 당대의 기사는 원하는 목표인 전설과 명예를 차지하여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는 여정의 복잡성을 귀부인이라는 도구적 존재로 스스로 만들어낸다. 외부적 상황에 따라 애초에 불가능한 귀부인과의 감정적 욕망은 시작도 하기 전에 미리 장벽을 세워놓는 셈이다. 실패가 예고된 관계인 가질 수 없는 여성의 사랑은 그 자체로 남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충분하다. 그러나 〈그린 나이트〉의 원전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는 이러한 전통적 공식에서 벗어나 있다.
양난 이후 조선을 지탱하던 사대부 정신이나 봉건제 같은 가치관에는 근원적 동요가 일어난다. 문학에서도 이 흐름은 이어진다. 평민과 여성의 각성으로 사회비판과 현실주의적 특성이 두드러지는 산문 문학이 발전하여 새로운 사조가 들어선다. 국가적 혼돈은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며 전복의 계기를 마련한다. 14세기 말 유럽, 인간의 탐욕은 총포를 만들었고 백년전쟁은 전 영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뿐인가.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은 무자비한 속도로 인명을 앗아갔다. 환란의 시기에 사회를 지탱하던 봉건제와 교회는 힘을 잃는다. 기사도 정신이나 궁정의 예법은 여전히 존재했으나 예전 같은 강경함은 사라진다. 이후 기사의 도덕적 권위가 하락함과 동시에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문화예술도 예외는 없다. 14세기 말 쓰인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는 과거 아서왕 전설의 연장선상에서만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분명 서사의 진행은 기존의 문법인 궁정식 사랑과 기사의 영웅 서사를 따라간다. 그러나 본론으로 들어가면 인물의 태도와 분위기에서 확연한 변화가 엿보인다. 용기와 신의를 중시하던 원탁의 기사들은 녹색 기사의 게임 제안에 주저하고 서로 미룬다. 가웨인 역시 기사도의 덕목이라는 충성과 용맹, 겸허와 거리가 멀다.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었다면 기사의 게임 이후 일 년의 유예기간이 주어졌을 때 철저한 자기 계발과 조력자의 훈련이 동반되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미 준비된 영웅이었다면 그런 과정은 필요하지도 않았을 터. 하지만 가웨인의 일 년은 별 언급도 없이 생략되어있다. 그렇다고 그가 기사로서 완벽한 인물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얼떨결에 거대한 여정에 차출된 것처럼 떠나는 데다가 손쉽게 욕망에 휘둘린다. 이렇게 중세의 기사들이 유약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여성 인물들의 태도는 과감하고 적극적이다. 현명하고 냉철한 판단으로 상황을 이해하며 능숙한 계략을 선보이기도 한다. 모르간 르 페이는 가웨인의 전 여정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주동자이며, 레이디는 자신의 욕망을 서슴지 않고 드러내는 시선의 주체가 된다. 가웨인과 레이디의 뒤집힌 구도는 새로운 해방의 지점을 부여하며 관습을 거부하는 시대적 변화를 나타낸다. 남성 중심의 봉건 사회를 꼬집고 비판하는 수백 년 전 작품의 길을 2021년의 영화는 성실히 따라가면서도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색깔을 마음껏 드러낸다.
데이빗 로워리가 펼쳐낸 가웨인(데브 파텔)의 여정은 오늘날 젊은 세대의 불안과 역경을 담아낸다. 아직 기사 작위가 없는 젊은 가웨인은 다른 기사들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당당히 내세울 멋진 전설 하나쯤 가지고 있기를 바란다. 아서 왕(숀 해리스)의 이복남매인 모르간(새리타 커드허리)의 아들로 태어나 원탁의 중심에 앉을 수 있는 혜택과 기회를 지닌 ‘은수저’지만 딱히 내놓을 에피소드는 마땅치 않다. 크리스마스에 모두 모인 자리에서 삼촌 아서 왕은 굳이 그를 옆자리에 부른 뒤 장광설을 펼친다. 기사들이 겪은 무용담을 즐기는 아서 왕과 기네비어 왕비(케이트 디키)는 가웨인에게 너도 저런 모험담 하나쯤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를 은근히 압박한다. 명절마다 만나는 친척들의 달갑지 않은 질문 세례와 긴 조언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때마침 불청객인 녹색 기사(랠프 아이네슨)가 찾아와 ‘목 자르기 게임’을 제안하고, 가웨인은 떠밀리듯 플레이어가 되어 그의 머리를 자르지만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 녹색 기사는 일 년 후 등가교환에 따라 ‘목을 잘리러 오라’는 통보를 한 뒤 방을 나선다. 준비도 안 된 가웨인의 갑작스러운 여정은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낯선 사회에 발을 내디뎌야 하는 청년들의 고민과 불안을 내포한다. 기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모험은 삶의 첫 시련에 던져진 미숙한 인간이 어떻게 고난을 겪고 성장하는가를 보여준다.
기사가 스스로 차단한 욕망의 허들은 기존의 궁정식 사랑을 변용한 장르에서 종종 귀부인과 위험한 관계를 노출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킨다. 도달할 수 없는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 남성의 페티시즘을 충족하는 방식으로 여성을 이용하는 방식은 현대의 누아르와 로맨스로 구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웨인과 에셀/레이디(알리시아 비칸데르)의 관계에서 기사의 거세된 남성성은 여성의 욕망과 결합해 전복된 구도를 만든다. 사랑에 소극적이며 선택을 주저하는 가웨인에 비해 에셀은 자신의 감정과 소망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나약한 남성이 홀로 유혹의 시험을 치르는 동안 카메라는 집요하게 그를 훑으며 욕망을 표출한다. 이 과정에서 가웨인을 향한 성적인 긴장은 레이디의 유혹에서 절정에 이른다. 우리는 원작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카메라가 모르간의 시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가웨인을 향한 성적인 함의가 농밀한 이 작품에 모르간의 존재는 곳곳에 드러난다. 영화 초반 녹색 기사의 행동과 교차하는 모르간의 의식은 모종의 계획을 암시한다. 처음 기사가 찾아왔을 때 아서 왕은 멀린을 쳐다본다. 잠깐의 붉은빛이 그에게 비춰오고, 왕을 향해 고개를 가로젓는다. 왕의 마법사조차도 당해 낼 수 없는 힘, 혹은 이 아이를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 안 모종의 거래가 의심되기도 하는 이 장면의 질문들 속 변하지 않는 사실은 모르간의 존재감이다. 버틸락의 성에서 가웨인 눈에만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눈먼 할머니와 눈을 가린 모르간, 그리고 한밤중 녹색 기사의 얼굴에 비치는 여러 얼굴 속 모르간처럼. 그렇다면 이 여정은 독립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한량 아들 가웨인을 험준한 사회로 내보내는 어머니 모르간의 시험이다. 스캐빈저와 성 윈프레드, 버틸락과 레이디의 내기 모두 모르간의 큰 그림 안에 포함된다. 원전에도 나오는 인형극의 인형처럼 가웨인의 모험은 퍼펫 마스터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가웨인은 왜 길을 떠났나?
혈육의 갱생 프로젝트치고는 상당히 과격한 여정을 가웨인은 왜 떠나야 했을까. 죽음을 담보로 한 게임에 머나먼 녹색 성당까지 가는 머나먼 길에는 매 순간 목숨이 위태롭다. 그뿐인가. 이해할 수 없는 마법과 말하는 여우, 귀신과 거인, 중세와 어울리지 않는 사진 기법까지 등장하는 이 혼돈의 세계는 문명과 대비되는, 태초의 인간에게 익숙했던 녹색의 자연을 상징한다. 인간은 문명을 만들어 자연을 지배하려 했지만, 숭고한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은 남아있었다. 동물성을 억압한 인간의 본성은 불확실과 혼돈을 넘나드는 설정으로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특히 ‘교환’의 상징이 어긋나는 지점은 흥미로운데, 영화 속 어디에도 ‘공정하고 평등한’ 규칙은 없다는 점이 그러하다. 크리스마스 아침의 게임부터 그러했다. 상대인 녹색 기사는 목을 날려도 일어나는 미지의 존재지만, 우리의 불쌍한 가웨인은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이 확실하다. 처음부터 불평등한 위치에서 일어나는 관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스캐빈저(배리 케오간)에게 길을 물어보는 대가로 동전을 쥐여주면 우리는 서로의 거래가 끝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캐빈저가 알려 준 실제 성당의 위치도 거짓인 데다 가웨인이 지닌 모든 것을 빼앗기고 거래는 끝난다. 영주 버틸락(조엘 에저튼)과 레이디 사이의 ‘획득물 교환 게임’에서도 가웨인은 버틸락에게 레이디와의 관계 그대로를 돌려주지 않는다. 그나마 대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윈프레드(에린 켈리먼)과의 거래도 일대일로 연결 짓기에 뭔가 석연치 않다. 이렇게 모험 내내 계속되는 비합리적인 교환의 연속은 영화에서 재신화화된 자연이 가진 혼돈과 대립, 거기에 나약한 인간을 대하는 냉정함마저 보여준다.
여기에 어머니라는 상징이 가진 자애로움마저 모든 것을 잃게 만든다. 가웨인의 방을 찾은 레이디는 그를 유혹하고, 이후 유사성행위를 암시하는 장면 이후 어머니가 짜 준 녹색 띠에 아들의 정액이 흩뿌려지는 장면의 결합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모든 과정이 어머니인 모르간의 의도와 설계에 의한 것이라면 관음의 시선인 카메라는 모르간의 것으로도 읽힌다. 거기에 레이디 역시 모르간의 휘하에 움직이는 존재라고 인지한다면 대상과 감시자 이상의 사회적 금기의 코드로 해석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법으로써 금지한 고대 시대 부족 내의 최초의 터부로 근친상간을 꼽았다. 특히 어머니와 아들의 근친상간은 태곳적 금기와 훈육의 산물로서 만들어낸 인위적 죄의식으로, 상징적 아버지에 의해 경계된 사랑의 범위이다. 다만 영화와 이론을 관통하는 이 도식화된 관계의 원천이 서양 중심의 문화적 코드라는 점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 아버지는 의도적으로 존재를 소거한 문명과 제도라면, 영화는 남성-문명에 칼을 겨누는 여성-자연이라는 거대한 세계에 들어선 인간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영화에 나오는 중심인물로 아시아인이라는 점은 동양과 신비로운 마법을 연결 짓는 오리엔탈리즘이면서 동시에 영화 속 유색인종인 가웨인이 유럽-백인 사회의 엘리트 중심 원에서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으로도 보인다.
그렇다면 모르간이 짜 놓은 거대한 계획의 마무리는 아들이자 한 청년의 고난 끝에 찾아오는 값진 성장이라는 해피엔딩일까. 감독은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영화 전반을 감싸는 비관적이며 냉소적인 시선은 몽환적인 사건들이 계속되며 한 청년의 불안에서 인간 전체의 죽음과 삶의 불안으로 이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부터 그 냉소적 기운은 이미 드러난다. 첫 장면에서 우리는 저 멀리 집안에서 창문 밖으로 커지는 불길이 보인다. 가축들이 뛰어노는 아래는 평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벽에 기대 누워있는-아마도 모종의 이유로 의식을 잃어 보이는- 사람과 덩그러니 서 있는 말이 있다. 이후 담 밖에서 남자와 여자가 들어서고 여자는 말을 타고 남자는 칼을 빼 든다. 무기를 집어 들고 바삐 움직이는 두 사람을 통해 어떠한 일이 일어났음을 예측해 볼 수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영화는 끝내 설명해 주지 않는다. 이는 영화의 전체 내용을 집약하면서도 결말을 예측할 수 있게 한다. 오프닝 시퀀스에 나타난 인간의 본성은 폭력과 욕망, 그리고 혼란이다.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예수가 태어난 날, 축복이 가득해야 할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처음 봐야 할 것은 그렇게 성스럽지는 않고, 축복도 없는 인간의 실태이다. 그렇다면 이 모두를 바라보는 모르간, 그린 나이트,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르는 ‘자연’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이 세상을 바라볼까. 아마 저 별 볼 일 없는 인간으로 인해 발생하는 탐욕과 파괴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웨인은 게임에서 살아남았을까?
크리스마스에 마을은 불타고, 범죄는 소리 없이 일어난다. 그런 세상에서 가웨인은 원탁 앞에서 모험담을 당당히 자랑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우리는 가웨인이 세 번 죽는 장면을 바라본다. 첫 번째는 여정을 떠나기 전 인형극에서, 두 번째는 스캐빈저 일당에게 묶여 백골이 된 채로, 마지막은 게임을 포기한 채 어머니가 준 녹색 허리띠를 평생 차며 죽음을 피하다 종말의 순간 스스로 허리띠를 풀어내는 때이다. 사실 영화 혹은 녹색 기사로 현현된 자연은 가웨인을 처음부터 살려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이미 그의 죽음을 겨울이 오기 전부터 보았고, 시작조차 하기 전에 백골이 되어 끝나는 가웨인의 운명도 바라보았다. 영화는 어디로 기준을 잡는가에 따라 이후 벌어질 모든 서사가 실은 일어나지 않은 환상이라는 허무 의식을 심어놓는다. 그게 숲에 들어가기 전이든, 용기 없이 도망간 후든 말이다.
가웨인은 게임에서 살아남아 기사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사실 잘못되었다. 가웨인은 애초에 기사가 될 수 없다. 그는 여정을 시작하자마자 스캐빈저에 모든 것을 빼앗긴다. 윈프레드의 요청에 보상만을 바랐고, 환상 같은 거인에게 겁을 먹고, 녹색 기사와의 리벤지 게임에도 수차례 움찔거리며 몸을 사린다. 그는 교환의 논리에만 매몰되었고, 용기라고는 없으며, 성적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 최소한 침대 위에서 레이디에게 굴복당한 이 장면을 기점으로도 전통적인 기준의 기사로서 가웨인은 실격이다. 그리하여 모험을 이겨내 기사가 되어 명예를 얻는다는 가부장적 남성성의 신화는 갈기갈기 찢긴다. 용기는 사라지고 욕망만 남은 가웨인의 도덕적 실패는, 남성연대 안에서만 통용될 모험담의 허상만 남아 인간-남성 사회의 나약함을 보여준다. 어머니와 세 여자 형제의 손에 의해 정성껏 만들어진, 여성의 헌신과 노력은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에게는 부적이나 전리품일 뿐이다. 마지막에 그 의미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다.
거기에 세상을 구원하러 온 예수와 가웨인이 오버랩되며 더 깊은 주제로 확장된다. 첫 시퀀스로 다시 돌아가,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카메라는 잠에 빠진 가웨인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냅다 물벼락을 맞는 그의 앞에 에셀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어요.” 막 잉태되어 흠뻑 젖은 인간을 연상케 하는 이 모습과 에셀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영화에 처음 등장한 가웨인의 모습을 겹쳐놓는다. 여러 고난을 거쳐 인간에서 신이 된 예수의 삶을 떠올릴 수 있다. 그의 연인인 에셀/레이디는 공교롭게도 한 배우가 연기한 1인 2역이다. 사창가의 창녀와 우아한 귀부인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연상하게 한다. 여성성의 이중구조를 투영해 남성의 페티시즘을 충족하는 존재로 취급되어 있지만 그의 진면모는 누구보다 현명하다. 에셀/레이디는 유혹과 회유를 거듭하고 질문과 정답을 말한다. 사랑에 용기 있게 대처하고, 자신의 명예를 지키며, 인간 앞의 거대한 자연을 향해 언제나 겸허하여지라는 메시지를 줄곧 던진다. 그러나 가웨인은 그 어떤 말도 대답하거나 수긍하지 않는다. 영화는 모르간과 에셀/레이디, 그리고 녹색 기사로 자연과 여성성, 즉 인간 문명과 신화에 객체로 존재했던 대상들을 앞으로 끌어낸다. 이들을 존중하지 않은 인간 사회의 최후는 ‘살아 있는’ 인간 중 가장 위대했던 그를 대표하는 것들의 몰락과 더불어 허위의식으로 꼿꼿한 인간의 목을 날려 버린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가장 강력한 인간의 상징을 내포한 존재도 결국 신화 속의 허상일 뿐이라는 도발적인 냉소를 자아낸다.
영화 후반부 가웨인이 맞닥뜨리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보고 누군가는 영웅의 성장을 만나겠지만 나는 뿌리 깊은 냉소를 본다. 어리석은 인간의 굴레는 끝나지 않을 것이며, 죽음을 기억하고 뒤늦게 깨달았다고 해도 여전히 목은 잘릴 것이다. 원작의 결말처럼 게임에서 살아남은 가웨인이 원탁 앞에서 녹색 띠를 두른 채 거대한 남성연대의 일원으로 들어갔을 때, 영화는 인간의 죄책감과 나약함이 만드는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라고 말한다. 모험의 고난은 살아남은 인간의 자양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여정의 끝에는 거대한 녹색 기사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죽음만이 기다린다. 느리지만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덧없는 명예와 영광에 사람들은 손을 뻗는다. 쿠키 영상 속 가웨인의 딸이 왕관을 집어 드는 모습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인간의 참을 수 없는 욕망의 감정에 관한 거대한 냉소주의적 시선이 읽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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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애프터썬' 리뷰
어린 시절의 질문들이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 그때의 나는 아빠한테 무슨 질문을 하던 아이였을까? 하늘은 왜 파랗냐, 롤러코스터는 언제부터 탈 수 있냐 내지는 이런 질문도 해본 적 있겠지. 아이는 어떻게 생겨요? 같은 짓궂은 질문들. 나는 어른들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은 알아서 자제하던 눈치 빠른 아이였을까? 아니면 그런 질문들만 골라서 물어보는 개구쟁이였을까? 아이와 어른의 관계는 무엇하나 선명하지가 않다.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질 때도 있고, 질문이 없는데 정답이 나올 때도 있는 법이다. 완성하지 못한 문답들이 넘쳐나는 관계는 명확할 수가 없다. 흐린 눈으로 봐야만 한다. 빠르게 철들어 시간을 건너뛴 아이에게서는 애잔함이 남아있다. 일찍 크면 그때의 질문들이 몸과 마음속에 남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흐린 눈으로 보아왔던 시간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진짜로 눈이 흐렸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땐 일부러 안경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뿌옇게 하고 지냈다. (당연하게도) 엄마는 항상 잔소리를 했다. 그렇게 뿌옇게 있으면 앞이 보이느냐고. '보이니까 이러고 다니지.' 대충 이런 대답을 했다. 한숨을 쉬면서도 엄마는 꼬박꼬박 주방세제로 안경을 닦아줬다. 그러면 안경이 좀 더 오래 선명했다. 수경도 마찬가지였다. 안경은 그렇게 닦는 게 싫었는데 이상하게도 수경은 세제로 하는 게 좋았다. 물속에서 볼 수 없는 상황을 싫어했다. 바닷가를 가서 바다수영을 할 때도 수경은 꼭 챙겨서 갔다. 언제부턴가 안경은 잔기스도 덜 났다. 긁히거나 상하는 일 없이 점점 두꺼워져 갔다. 그러면서 일부러 안경알을 문지르는 일은 그만두게 되었다. 안경이 선명해져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대충 그때부터 무릎도 덜 까지기 시작했다.
딸 소피와 아빠 캘럼은 튀르키예로 여행을 왔다. 캘럼은 소피와 함께 이곳저곳 휘적휘적 돌아다닌다. 방학에 잠깐 시간을 낸 여행인지라 마냥 자유스럽지는 않다. 패키지 여행이기도 하고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으니까 돈을 쓰는 데 눈치도 보인다. 캘럼이 애써 감추려는 모습들은 티가 난다. 애써 '감추려'해서가 아니라 '애써' 감추려 해서 티가 난다. 행동이 미숙해서가 아니라 노력하고 있어서 보인다. 사춘기 소녀는 그 짧은 여행 기간 동안에도 자라난다. 의도치 않은 무심함과 조숙한 배려심이 부딪힌다. 두 세계는 충돌하면서 부서지고 충돌의 여파로 기억은 흐릿해진다. 단편적인 사실들은 먼지 구름이 되어 주관을 뒤덮는다. 기억을 반추하는 과정 속에서 간신히 건져 올리는 것들은 이제야 보이는 아빠의 이야기다.
캘럼은 잘 들어가지 않는 잠수복을 억지로 입기 위해서 몸을 구겨 넣는다. 요령이 없던 그는 청년의 도움을 받고 옷을 입는다. 계절마다 여행을 떠나던 청년은 아기와 함께 고향에 머무르게 되었다. 40살의 자신이 상상하기 어렵다는 청년을 보면서 캘럼은 몸을 구기느라 가쁜 숨을 몰아 내쉰다. 기나긴 한숨을 푸른 바다에 흘러 보낸다. 아빠는 차분하게 가라앉고 딸은 솟아오른다. 푸르른 대자연 속에서 캘럼은 꾸준하게 운동을 한다. 수련보다는 수양의 형태이다. 호텔방 TV 옆에는 태극권 비디오가 놓여있다. 명상과 태극권, 어린 소피는 아빠를 캠코더로 촬영하고 영상을 본다. 녹화하지 않은 채로 아빠에게 묻는다. '11살 때 아빠는 뭘 했나요.' 그리고, 이윽고 아빠의 대답이 이어진다.
다 큰 소피는 기억을 되짚어 아빠를 상상한다. 이제는 아빠의 상태를 대신 답할 수 있다. 정확하진 않겠지만 비슷한 상황이었겠거니 넘겨짚으면서 답을 고민한다. 마음속에만 넣어두고 있던 감상을 끄집어 올린다. 추억하는 일이 어려운 건 묵혀두었던 감정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주로 좋은 감정보다는 싫고 슬펐던 감정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추억은 언제나 즐거운 행위이기 마련이다. 오랜 친구들을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과거의 특정 시점과 사건들에 고정되어 있는 걸 떠올리면 명확하다. 영화는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상황을 판단하기엔 지나치게 함축적이거나 암시적이다. 상상과 추리의 영역에서 해석하면 영화는 더없이 무거워진다. 나풀나풀한 한여름에도 세계는 절망스럽게 무너져 내릴 수 있다.
그렇지마는 여름이 그나마 나은 편이다. 공평하니까. 추울 때는 껴입어야 하는데 더울 때는 벗으면 되니까. 여름은 돈이 많건 적건 티가 덜 난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니 그나마 여름이 낫다. 공평하게 견디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궁핍한 건 마음으로 족하다. 캘럼은 열심히 소피의 등에 선크림을 발라준다. 소피도 아빠에게 선크림을 발라준다. 소피는 아빠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소피는 의젓한 아이다. 아니, 세상에 선크림 바르는 걸 좋아하는 아이가 어디 있나. 끈적끈적한 피부는 다들 싫어한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는 건 소피가 충분히 아빠의 처지를 고려하고 있다는 말이다. 눈으로 보이는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게 아니다. 선크림처럼 그냥 스며들기를 바라는 거다. 덜 따갑고 덜 아프게끔. 두 사람은 서로를 정성껏 발라준다. 그저 여름을 견뎌내기 위한 손길이다. 그러니 이미 탄 피부에도 발라야 한다.
그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던 질문과 대답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하는 시점이 온다. 명확하지 않은 문답 속에는 사랑이 담겨있다. 다 이해하진 못해도 사랑의 흔적이었다는 건 알 수 있다. 사랑은 정확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흐린 눈으로도 볼 수 있다.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있다. 나는 어른이 되면서 어릴 때의 질문은 잃어버렸는데, 어렴풋하게나마 답은 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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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도 바깥으로
-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내가 인도에 살던 시절, 이웃에는 남루한 단칸방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저래 봬도 브라만 출신이라고 수군거렸다.
카스트에 대해 입밖에 낸 말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누가 실은 브라만이래,라고 웅성거릴 때가 아니면 들을 일이 없었다는 소리다.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 4계급이라고 학교 다닐 때 배웠지만... 그 얘기를 꺼내면 인도 사람들은 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제로는 수천 개의 계급이, 실은 직업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건 나중에 들었다. 사실인지 모르겠으나 인도 사람들끼리는 이름만 들으면 대충 알아본다는 얘기도.
돈이 또 하나의 카스트라는 씁쓸한 말도 그즈음 들었던 것 같다. 이건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단출한 생활을 하는 이웃집 할머니더러 '저래 봬도 브라만 출신'이라고 하는 것만 봐도, 돈과 명예를 가진 이들의 성공 신화에서는 낮은 카스트도 좋은 소재거리가 되어 있다는 것만 봐도.
카스트는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각양각색의 차별은 더욱 은밀하고 촘촘하게 자라났다. 게다가 카스트 자체도 현실에서 폐지되지 않았다. 일상의 차별은 물론이고 공적 문서로 카스트 증명서 발급이 가능하니, 카스트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인도에서는 안 되는 일도 없고, 되는 일도 없다"는, 또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넷플릭스 영화 <화이트 타이거>를 보면서 떠오른 상념들이다. <화이트 타이거>의 길잡이가 되어줄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화이트 타이거>를 재질에 비유하자면 녹이 슬고 거친 양철 판 같다. 금방이라도 나를 쓱 베고는 파상풍을 안겨줄 것 같은 영화. 동시에 살짝만 손 대도 묻어나는 녹 가루처럼, 순식간에 확실한 흔적을 남기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발람이라는 인물과 함께, 가장 흡입력 있는 1인칭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발람은 인도에서는 신에게 찬양을 드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발리우드 영화들 초반에 '하레 크리슈나'처럼 힌두교 크리슈나 신을 찬양하는 노래가 나오거나 향을 피우는 장면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가 보다. 그러나 정작 발람의 청자는 인도에 방문하는 중국 총리 원자바오다. 매끈한 사업가의 외양을 하고 총리에게 메일을 쓰는 발람. 발람의 신은 돈과 권력일까.
발람의 회고를 따라간다. 그의 어린 시절에는 돈과 권력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다. 이따금씩 지주가 수금하러 오는 작은 시골 마을, 대가족의 둘째 아들로 자랐다. 발람은 학교에서 영어를 줄줄 읽고 "한 세대에 한 마리만 나오는 백호가 너다"라는 칭찬을 받을 만큼 똑똑하지만, 백호로 자랄 기회는 없다. 마을 찻집에서 석탄 깨는 일, 그것이 발람의 카스트이자 주어진 자리였다.
수금하러 오는 지주를 '황새'로, 그 큰아들을 '몽구스'라고 부르며 속으로 싫어한다. 그래도 앞에선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출세 기회도 없지만 그나마 있다면 지주들을 통해서 올 수밖에 없으니까. 구세대의 산물인 황새, 전형적인 깡패 느낌의 몽구스와 달리 미국 유학파인 둘째 아들 아쇽이 나타났을 때 발람은 기회를 찾았다고 느꼈다. 아쇽은 오랜 외국 생활로 아버지나 형에 비해 비교적 "하인"들의 인권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운전면허를 따서 지주의 운전기사가 되겠다는 손주를 할머니는 고깝게 본다. 집안의 모든 수입을 틀어쥐고 대가족을 관리하는 할머니에게는 아들도 손주도 대가족의 부품이다. 부품이란 기능에 맞게 기량을 발휘해야지, 무한한 꿈을 꾸거나 자리 바깥으로 나가선 안 되는 것이다. 할머니만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오래전부터 굴러온 시스템이 그렇다.
하지만 발람은 최선을 다해 그 자리를 따낸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 마침내 아쇽과 함께 델리로 가는 길에 기사로 동행하게 된다. 아쇽이 미국에서 만난 아내 핑키까지 모시게 되어, 충직한 하인의 자리에 걸맞게 행동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속으로는 아쇽을 어린양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이내 그가 어린양이 되기도 한다. 풀숲에 숨어 고개를 떨구는 초식동물.
델리에서 어떤 사건들을 보고 듣고 겪었기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그가 영화 초입에 보여주었던 단정한 사업가의 얼굴을 이뤄낸 것일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0에 가까운 전환이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 자꾸 그의 이야기를 뒤따라가게 된다. 중간쯤 발람이 "앞으로 자기 이야기가 더욱 어두워질 것"이라 경고해도 멈출 수 없다.
발람은 인도가 "빛의 인도"와 "어둠의 인도"로 나뉘어 있다고 말한다. 그 어둠의 인도 한가운데, 인도의 가장 찬란한 발명품인 "닭장"이 있다고. 눈앞에서 도살되는 다른 닭을 보면서도 닭장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하는, "하인" 계급 카스트의 하층민들을 일컫는 것이다. 발람의 표현대로라면 배부른 자와 굶주려 허리를 움켜쥔 자 중 후자. 이들은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저 더 잘 기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개인의 일탈이 가족 몰살로 이어질 수도 있어 조심스러운 것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대대로 굴러내려 오며 눈덩이처럼 커져버린 업(業)의 수레바퀴가 이들을 짓누르고 있다. 카스트에 충직하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내 역할을 어떻게든 다해야 한다. 반대로 내 역할만 다한다면 그밖에 자잘한 잘못이 있어도 죄과가 아니다. 만약 장사꾼의 업이 이득을 보는 것이라면, 그 과정에서 저울을 속이는 것은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충직한 하인들의 입말에서는 비릿한 냄새가 난다.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는 그토록 미워하는 지주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시라고 말하는 발람의 표정에도 그 비릿함이 묻어 있다.
자유민주주의에 익숙해진 아쇽 부부에게는 그 비릿함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불편한 감정만으로 거대한 카스트의 수레바퀴를 걷어내기엔, 마찬가지로 그 수레바퀴 아래 있는 이들에게도 역부족이다. 가족의 굴레는 발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쇽 부부의 대처방식은 더욱 나약하다. 아쇽은 싫다고 하면서도 아버지와 형 말대로 정치권에 뇌물을 성실하게 전달한다. 핑키는 발람에게 "열쇠를 찾아 헤맸겠지만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라고 말하는데, 그야말로 미국에서 살아온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과연 발람의 닭장 문이 활짝 열려 있었을까?
영화 초입에서부터 보여주었듯 발람은 번듯한 사업가가 되었으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긴 했다. 발람은 자신이 닭장을 탈출했다고 믿지만, 정말 그럴까?
발람이 겪은 모종의 사건들을 척척 엮어 보여주는 동안, 자연스럽게 인도 사회의 사다리가 눈앞에 드러난다. 마지막 시퀀스에서는 소름마저 오소소 돋는다. 발람이 닭장이라 믿은 공간은 실은 사다리의 한 층이었다. 사람과 사람과 사람을 수직으로 겹겹이 포개어 쌓아 낸 지옥도. 사다리 위층도 여전히 사다리 위다. 여느 성공 신화와 달리, 올라간 자리 또한 지옥이라는 것. 그렇게 이 영화는 끝까지 절망에 녹슨 채로 강렬하게 문을 닫는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선이정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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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부터 영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스파이더맨: 브랜뉴데이>의 촬영 현장 사진이 공개되어 큰 화제였죠!
2026년 7월 31일로 개봉일을 확정 짓고, 티저를 공개하며 팬들의 기대를 한층 끌어올린 후에 진행된 촬영이어서 그런지 그 열기가 더욱 대단했던 것 같은데요!
아직 개봉일은 멀었지만, 오늘부터 차근차근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복습해 나가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스파이더맨은 누군지 씨네랩에게만 알려주세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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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빵! 터지기 시작했다 통제 불가! 짜증 유발! 그럼에도 불구하고, HELP HIM, PLEASE!
램스
설원이 펼쳐진 아름답고 평화로운 아이슬란드의 시골 마을. 이 곳에 살고 있는 ‘키디’와 ‘구미’는 양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키워온 형제이지만 40년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낸 남다른 사연을 가진 사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개최된 우수 양 선발대회에서 ‘키디’의 양이 우승을 차지하며 ‘구미’의 질투가 폭발한 것도 잠시, 갑자기 마을에 양 전염병이 발생하여 키워온 양들을 모두 죽이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오매불망 양만 바라보며 살아온 형제는 양들을 살리기 위해 40년 만에 침묵을 깨고 비밀리에 의기투합하게 되는데...
더 헌트
이혼 후, 고향으로 내려온 유치원 교사 루카스는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며 아들 마커스와 함께 하는 행복한 삶을 꿈꾸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카스를 둘러 싼 한 소녀의 사소한 거짓말이 전염병처럼 마을로 퍼지고,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루카스는 마을 사람들의 불신과 집단적 폭력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의학을 공부하던 스물아홉 율리에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걸 찾아 세상으로 나온다. 파티에서 만난 만화가 악셀과 사랑에 빠진 율리에, 하지만 삶의 다른 단계에서 만난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걸 원했고 조금씩 어긋난다. “내 삶에서 조연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율리에는 인생의 다음 챕터로 달려나간다.
슬픔의 삼각형
호화 크루즈에 #협찬 으로 승선한 인플루언서 모델 커플. 각양각색의 부자들과 휴가를 즐기던 사이, 뜻밖의 사건으로 배가 전복되고 8명만이 간신히 무인도에 도착한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구조 대기뿐인 사람들… 이때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여기선 내가 캡틴입니다. 자, 내가 누구라고요?”
오베라는 남자
고집불통 까칠남 ‘오베’. 평생을 바친 직장에서 갑자기 정리해고를 당하고,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던 아내 ‘소냐’까지 세상을 떠난 이후, 그에게 남은 것은 ‘소냐’를 따라가는 것뿐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오베’. 마침내 계획을 실행할 결심을 하고, 마지막 순간을 앞둔 바로 그때! 그의 성질을 살살 긁으며 계획을 방해하기 시작한 누군가가 있었으니 바로!!!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이웃들! 그의 삶에 제멋대로 끼어든 사람들! 과연 ‘오베’ 인생 최악의 순간은 반전될 수 있을까?
이노센트
이다와 안나는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한 직후, 또래인 벤자민, 아이샤와 친구가 된다. 네 명의 아이들은 어른이 개입하지 않는 순간, 특별한 잠재력을 깨워나가기 시작하고 벤자민은 능력을 이용해 사람들을 조정할 수 있게 된다. 단순한 호기심과 장난으로 행해지던 어떤 일들이, 급기야 분노라는 감정과 이어지고 결국 친구들을 비롯해 주변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는 벤자민. 가장 순수하고, 본능적이었던, 그래서 더욱 파괴적이고 잔인할 수 있었던 잔혹한 동심의 세계가 펼쳐진다!
해시태그 시그네
카페 바리스타로 따분한 인생을 살던 '시그네'에겐 행위 예술가로 매거진 표지를 장식한 남자친구 '토마스'가 있다. 점점 유명해지는 '토마스' 옆에서 자꾸만 소외당하던 '시그네'는 인터넷에서 발견한 정체불명의 알약으로 남자친구의 사랑은 물론, 세상의 관심까지 독차지할 황당한 계획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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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정말 먼 곳>
자신만의 안식처를 찾은 진우,
그에게 뜻하지 않은 방문자가 도착하며
조용했던 날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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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로그북> 메인 예고편
경력 30년의 잠수사 황병주 해병대 출신 한재명 부산 사나이 백인탁 수중 장비를 챙긴 이들은 바다로 향한다.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바지선 오직 '상승'과 '하강' 소리만이 적막을 깨는 그 곳 잠수사들은 무너진 벽과 뒤엉킨 격실을 뚫고 마지막까지 희망의 실마리를 찾아 나서는데... 그 어디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이야기. '로그북' 그 첫 장을 세상에 펼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