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4-04-12 17:42:15
곰은 정말 없다. 이게 영화이듯이, <노 베어스>
카메라의 위치는 우리가 인식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있다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 베어스> No Bears, 2022, 이란, 드라마
감독: 자파르 파나히
고백하건대 곰은 정말 없다. 이게 영화이듯이, <노 베어스>
박티아르(남편)가 가게에서 일하는 자라(아내)를 급히 불러낸다. 그는 아내에게 훔친 여권을 건네며 먼저 프랑스로 떠나라고 사정한다. 자라는 남편이 없는 삶은 의미 없다며 그의 호소를 단호히 거절한다. 아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괴로워하던 남편은 행인과 시비가 붙고, 격한 감정을 토해낸다. 그 순간 카메라가 쭉 멀어지면서 화면 안으로 조감독 레자가 등장한다. 카메라는 멈추지 않고 계속 멀어지고, 마침내 노트북으로 화상 연결 중인 파나히 감독이 모습을 드러낸다. 박티아르와 자라는 감독이 찍는 작품의 주인공으로, 연기 중인 배우들이었다.
그는 현재 국경 인근의 작은 마을에 숨어있다. 촌장님의 소개로 간바라(집주인)의 방을 빌렸고, 인터넷이 끊기기 전까지 방 안에서 일주일 내내 영화 촬영만 진행했다. 사실상 촬영 말고는 와이파이가 설치되지 않은 마을에서 다른 할 일이 없던 그는 예비부부의 발 씻기 행사에 간다는 간바라에게 카메라를 건네며 녹화를 부탁하고, 자신도 카메라를 들고 옥상으로 나간다. 아랫집 입장에선 안방 천장인 옥상에서 감독은 훗날 엄청난 폭풍의 씨앗이 될 사진을 찍는다.

그날 밤, 간바라는 오전에 들고 갔던 카메라를 감독에게 돌려준다. 녹화 영상 안엔 감독을 향한 마을 사람들의 신랄한 평가가 들어있었고, 대부분 감독을 의심하고 있었다. 감독은 국경을 넘으려고 숨어 들어온 사람이며, 마을의 골칫거리가 될 운명이었다. 뒷담화 영상에 당황하는 간바라와 달리 감독은 별다른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영상을 보고 또 볼뿐이다.
빛 한 점 없는 밤, 레자가 촬영본이 든 하드 디스크를 갖고 감독을 몰래 찾아온다. 감독은 레자의 설득에 밀수업자들만 이용하는 도로를 지나 국경경비대가 지키고 있는 언덕에 올라간다. 그들이 선 곳은 이란과 튀르키예의 국경이었고, 감독은 그 사실을 안 순간 조감독의 손을 뿌리치고 마을로 돌아간다. 자국(이란)의 출국금지와 영화 제작 금지 명령을 받은 감독이 국경을 넘지도 않을 거면서 굳이 국경 마을에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명료하다. 마을이 영화 촬영지(튀르키예)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영화 내내 유지된다. 오직 ‘촬영’만이 감독을 동요하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그 누구도, 어떤 사건도 그를 흔들지 못한다. 이는 마을의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려는 마을 사람들의 집요한 행동 방식과도 연결되며, 관객을 향한 <노 베어스>의 일관된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젊은 여자를 시작으로 감독은 마을 사람들이 예견한 미래에 빠르게 도달한다. 간바라의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감독을 찾아와 젊은 남녀의 사진을 찍었냐고 묻는다. 촌장은 마을에서 갖는 자신의 위신을 언급하며 노골적으로 사진을 달라고 한다. 감독은 젊은 남녀의 사진을 찍은 적 없다고 짧고 굵게 대답한다. 그의 세계에선 “컷!”이면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가 있는 곳은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미래의 남편 이름으로 탯줄을 자르는 전통을 목숨처럼 여기는 마을이다. 스스로를 선량하고 착한 사람이라 주장하며, 어떠한 위협도 용납하지 않는 자들을 그가 무슨 수로 좌지우지할 수 있을까. 간바라의 빠른 눈치로 국경에 몰래 갔다 온 일은 숨겼지만, 관습으로 엮인 남녀가 아닌 진짜 사랑으로 맺어진 연인을 기록한 행위는 모른 척 묻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감독은 저항할 힘을 갖고 있어도 쓸 수 없는 무력한 이방인과 달랐다. 스스로를 그렇게 굳게 믿었기에 마을 사람들과의 입씨름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사태가 점점 난폭해지고 심각해지자, 촌장은 감독에게 맹세의 방에 가서 사진은 없다고 선언할 것을 요구한다. 촌장에겐 마을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문제를 반드시 해결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장 여권을 구하는 부부의 상황’과 ‘국경 인근 마을에 숨어 영화 작업 중인 감독의 환경’은 <노 베어스>의 주축이 되는 이야기들로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수시로 전환되며 진행됐다. 전자는 감독이 창작한 허구, 후자는 실제 상황이었으며 서로의 사건에 관여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별 탈 없이 쭉 이어졌다. 대본대로 알맞게 연기하던 주인공들이 갑자기 감독에게 말을 걸고 분노를 표출하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없었다. 박티아르와 자라의 생존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들은 약혼식을 촬영한 간바라와 맹세의 방에서 ‘맹세하는 나’를 담기 위해 카메라를 설치한 감독처럼, 자기들의 삶이 영화화되는 것을 허락했다. 해피엔딩은 없었다. 박티아르의 여권은 가짜였고, 자라는 끝나지 않는 절망과 참을 수 없는 괴로움에, 바다에 뛰어들었다. 맹세하는 것조차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겠다고 우긴 감독은 마을의 전통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다, 기어이 평화로운 마을을 폭력과 의심으로 얼룩지게 했다. 두 이야기의 마침표는 철저하게 ‘감독이 촬영한다는’ 전제하에 고려된 결괏값이었다.
분명 부부와 감독의 이야기는 진짜였다. 카메라의 빨간불에 노출된 채 아내의 시신을 마주한 남편과 국경을 넘다 총에 맞아 강가에 죽은 채로 발견된 연인(사진 속)의 모습이 이를 증명했다. 두 이야기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완성되었지만, 이러한 시각은 지극히 표면적이며 단편적일 뿐이다. <노 베어스>의 초점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일도 만들어진 이야기도 아닌, 이야기를 구성하는 ‘말과 행동’에 있다. 감독이 내놓은 결과물보다 그가 주인공으로서 행한 모든 방식이 더 중요하다. 초반에 일상 대화처럼 지나갔던 “자라, 감정을 절제해요.”란 감독의 한마디가 “곰은 없어요.”만큼이나 치명적이고 가혹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인물들이 전부 각자의 경계선을 지키기 위해 마음대로 타인의 선을 넘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 베어스>는 그 선의 실체를 관객에게 공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의 위치가 우리가 인식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는 모든 이야기의 끝, 마지막 장면 그 뒤에 있다. 경비대가 오기 전 서둘러 마을을 떠나던 감독이 죽은 연인을 보고 차를 세운 순간이다. 그는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감정적으로 동요한다. 국경을 넘지 않은 이유와 같은 걸까? 아니면, 인간으로서 갖는 죄책감 때문인가? 어찌 됐든 감독은 두 이야기를 비극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마을 사람들은 또 어떤가? 역시 같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감독은 부부의 세상을, 마을 사람들은 감독의 세상을 침범했다. 그들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젊은 연인의 사진이 영화 속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박티아르의 가짜 여권과 자라의 시신이 두 눈에 박힌 적이 없는 이유와 같다. 영화 속 감독은 어느 순간 멈춰 섰고, 이야기는 끝났다. 주인공이 카메라를 들지 못했기에 끝난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인물인 ‘그’ 역시 포기했다는 뜻인가? 혼란과 혼돈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들에게 <노 베어스>는 한 가지 팁을 건넨다.
역시나 집요하고 일관된 태도로, “곰은 없다”라고.
‘곰이 없다’라는 말은 ‘맹세의 방으로 향하는 길에 곰이 있다’는 말에서 왔다. 맹세의 방은 신성한 공간이다. 신성한 곳으로 향하는 길목엔 항상 악이 존재하고 그 악은 사람들이 생산하는 공포로 몸집을 부풀린다. 따라서 맹세의 방에서 고백하는 모든 말은 틀림없는 진실과 사실로 확정된다. 문제는, 마을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도를 넘은 탓에 본래의 의미가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은 평화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도 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맹세의 방을 정당화의 도구로 쓰고 있었다. 난제를 해결하는 최후의 수단이 고작 입만 움찔거리는 맹세라니. 맹세의 방으로 가던 감독을 불러 세워 두려움과 권력의 관계를 설명하며, 거짓말해도 아무 상관없다는 한 마을 주민의 말이 더욱더 수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다.

<노 베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파나히 감독의 뒤에 서서 지켜보게 한다. 그리고 관객에게 본 작품이 영화인지 아닌지 묻는다. 나아가 영화라면 어디까지 영화이고, 영화가 아니라면 어디까지 영화가 아닌지, 경계를 정해보라고 요구한다. 관객을 자꾸만 두리번거리게 하고, 카메라의 빨간불을 찾게 만든다. 빨간불이 계속 깜빡였으면 하는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의 충돌을 계속 부추긴다. 물론 본 작품이 주인공(파나히)과 똑같은 상황에 있는 자파르 파나히 감독만의, 자국의 탄압에 대한 저항 운동이란 사실은 변함없다. 앞으로도 그의 작품은,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관객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할듯싶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무력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 해야겠다는 강인한 의지 사이에 핀 <노 베어스>.
고백하건대 세상에 곰은 정말 없다, 이게 영화이듯이.
Relative contents
-
- <위시> | 지나치게 디즈니다워서 엉망인 100주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소원을 이뤄주는 마법사 '매그니피코 왕'(크리스 파인)이 다스리는 왕국 '로사스'. 100살이 된 할아버지의 소원이 이뤄지길 고대하는 소녀 '아샤'(아리아나 드보즈)는 매그니피코를 도우러 간 자리에서 우연히 그가 숨겨 온 어두운 진면목을 발견하고 혼란에 빠진다.
그런 아샤 앞에 무한한 힘을 지닌 특별한 '별'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별은 염소 '발렌티노'(앨런 튜딕)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별의 힘을 믿고 매그니피코의 음모를 막기로 결심한 아샤는 일곱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을 먼저 눈치챈 매그니피코는 야욕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폭주하기 시작하고, 아샤와 친구들은 예상 못한 난관에 부딪힌다.
'디즈니의 모든 것'이 문제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각자 고유한 특징을 갖는다. 예를 들어 픽사 애니메이션은 아동뿐만 아니라 성인 관객에게도 소구력이 있다. 예상 못한 뭉클함에 눈물 한 방울 흘리는 경험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도 마찬가지다. 특유의 이미지가 가장 공고한 제작사라고 볼 수도 있다. 디즈니만의 매력 두 가지는 백 년간 변하지 않았으니까. 바로 동화와 뮤지컬이다. 물론 디즈니도 <주토피아>, <모아나>, <겨울왕국>처럼 동화를 변주하기는 했다. 그러나 드림웍스처럼 동화를 파괴하고 재창조하지는 않았다. 또 설령 작품 평가가 부정적이어도, 디즈니의 음악만큼은 대체로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100주년 기념작 <위시>는 이러한 디즈니만의 이미지를 온전히 구현하려는 노력이 가득 담긴 선물 세트다. 지극히 동화적인 이야기에는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 <피터 팬> 같은 전설적인 애니메이션 작품의 오마주가 가득하다. 귀를 즐겁게 하는 뮤지컬 음악 사이로는 디즈니 특유의 교훈과 새로운 사회에 발맞추려는 변화가 깃들어 있다.
하지만 너무나도 디즈니스러운 만듦새는 끝내 <위시>의 발목을 잡는다. 지난 100년 간 쌓아 올린 디즈니의 유산을 한 데 모아놓고 보니, 그들끼리 충돌하면서 여러 모순을 드러내고 만다. 그로 인해 <위시>는 자기만의 매력도 좀처럼 찾지 못한다. 결국 디즈니의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것도, 즐길 것도 없어지고 말았다.
평범해도 괜찮아. 어차피 동화니까.
<위시>의 이야기는 평범하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형식만큼이나 전형적이다. 늘 그렇듯이 악의를 지닌 악역과 그로부터 고통받는 공주가 등장한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공주는 여러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예상대로 빌런을 꺾는 데 성공한다. 권선징악이라는 환상은 뛰어난 기술력과 아름다운 목소리 덕분에 더 빛난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평범한 이야기를 비판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위시>가 디즈니 100주년 기념작임을 고려하면 오히려 초심을 찾으려는 시도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상술했듯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본래 맛깔나게 동화를 들려주는 할머니나 유모 같은 존재였다. 관객에게 순수한 즐거움과 희망을 주는 것이 디즈니 작품의 목적이었고, 디즈니의 매력이었다.
<위시>의 그래픽과 음악만 봐도 초심을 강조하려는 듯한 흔적이 역력하다. 우선 기존 작품에 비해 단순하고 직관적인 그래픽이 눈에 띈다. 동물 털까지 세밀하게 만들어낼 줄 아는 최신 기술력을 좀처럼 뽐내지 않는다. 외려 직접 그리거나 손으로 나무를 파내 만든 판화로 찍어낸 듯한 느낌이 강하다. OST도 마찬가지다. 그 유명한 디즈니의 오프닝 음악을 변주한 선율이 가득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위시>는 지극히 동화답기에 오히려 신선하다. 지난 몇 년간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항상 변화를 쫓느라 바빴다. 동화가 아닌 소재를 찾거나, 동화를 변주하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시도는 관객을 매료하기도 했지만, 디즈니만의 개성을 잃고 픽사 작품을 닮아간다는 비판을 낳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위시>의 지극히 원형적인 이야기가 역으로 인상적일 여지가 분명히 존재한다.
형식과 내용의 충돌
문제는 <위시>의 동화적인 형식이 정작 내용과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시>는 제목대로 소원에 대한 동화다. 로사스 국민은 매그니피코 왕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소원을 맡긴다. 왕은 매달 로사스를 위협하지 않는 소박한 소원 하나만을 이뤄준다. 그는 로사스 사람들은 자기가 맡긴 소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왕에게 소원을 안전히 맡기는 데에 만족한 채로 살아간다.
아샤는 이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한다. 소원을 이뤄주는 기준을 자의적으로 정하고, 공익을 위해 개인의 소원을 희생하며, 소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자유와 가능성을 평생 뺏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그래서 아샤는 왕 대신 별에게 소원을 빈다. 로사스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소원을 되찾고, 소원을 이루기 위해 살도록 해달라고. 그러자 이 소원을 들은 별은 땅에 내려와 아샤와 함께 모든 소원을 되찾는 여정에 나선다.
<위시>는 이 과정을 통해 다음처럼 말한다. 소원을 이룰 개개인의 자유와 가능성은 별처럼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고, 구속될 수 없는 존재니까. 이 대목이 발단이다. <위시>의 교훈은 형식만큼이나 동화적이다. 그런데 그 교훈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은 동화로 포장될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다. 그 결과 <위시>는 동화와 현실, 형식과 내용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동화로 노래할 수 없는 현실
실제로 <위시>의 교훈은 익숙한 현실을 소환한다. 우리 모두 하나의 별이니 자존감을 갖고 전진하자는 말은 어디선가 많이 들은 이야기다. 이는 개개인에게 주어진 역량과 가능성을 살리고, 재능을 오롯이 발전시켜 최상의 결과를 만들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지난 수십 년 간 우리 사회를 지배한 미국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이고, 더 나아가 능력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발현인 셈이다.
그런데 스크린 너머 관객의 현실에서 <위시>의 교훈은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소원을 지녀도 재능과 가능성을 찾을 수 없는 환경에 처했거나, 재능을 알더라도 계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도 소원을 이루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는 데 인색하기도 하다.
심지어 마이클 샌델 교수의 지적대로 운이 따라 성공한 사람들에게 모든 과실이 쏠리고, 실패한 이들과의 차이가 벌어지고, 패자들이 멸시받는 일이 많아지기도 했다. 즉, 스크린 너머의 현실에서는 능력주의에 대한 회의감, 기회의 평등에 대한 의문, 신자유주의 체제애 대한 불신이 나날이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소원을 이루자'는 <위시>의 교훈은 제목만큼이나 꿈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연히 <위시>의 메시지는 하늘에서 땅으로는 내려와도, 스크린 너머까지는 닿지 못한다. 오히려 현실을 동화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하는 순간 거부감을 키울 뿐이다. 동화로 포장할 수도 없고, 환상만으로 해결될 수도 없는 현실을 기만하는 것 같은 위선마저 느껴진다.
동화라서 보이는 구멍
물론 <위시>는 나름대로 형식과 내용, 메시지와 현실의 간극을 메우려고 애쓴다. 유머, 노래, 화려한 CG를 총동원한다. 하지만 끝내 동화라는 한계를 벗어나려 하지는 않으며, 결국 동화라는 이유로 생략된 수많은 현실은 수많은 구멍을 낳는다. 우선 동화라는 이유로 평범한 이야기를 옹호할 수 없다. 오히려 드라마는 너무 경직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겨울왕국> 감독인 크리스벅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캐릭터도 매력이 없다. 전형적인 동화의 주인공인 아샤와 그의 아버지는 흥미롭지 않다. 귀여움만 어필하는 염소도 <겨울왕국> 속 스벤에 비하면 존재감이 부족하다. 반전을 염두에 둔 '왕비'(안젤리크 카발)도 근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한 '주체적인 여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나마 매그니피코가 강렬하다. 행적은 뻔하지만, 과하게 무게 잡는 대신 유머로 잔뜩 무장한 악역이라서 차라리 새로워 보이기 때문.
이런 상황에서는 디즈니의 야심 찬 변화도 설득력을 잃는다. 아샤에게는 일곱 난쟁이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성별과 인종으로 이뤄진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다양성을 부각하려는 시도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인종별로 고정관념적인 외모를 활용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으니까. 당장 아샤의 가장 친한 친구 '달리아'(제니퍼 쿠미야마)만 해도 동아시아인임을 보여주기 위해 키가 작고, 통통하며, 안경을 쓴 여성으로 그려졌다.
이에 더해 동화의 근본적인 한계가 또 한 번 디즈니의 발목을 잡는다. 아무리 다양한 인종과 성별이 작품 내에 공존한다고 해도 다양성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저 병풍에 불과하다. 동화는 특정한 주인공 한 명의 이야기이고, 필연적으로 그의 특징만 부각될 수밖에 없으므로. 이처럼 디즈니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줘야 할 변화도 <위시>에서는 결국 모순으로 귀결된다.
엔딩 크레디트만 빛난다
그럴수록 <위시>에는 100주년을 기념하겠다는 강박만이 남는다. 물론 강박의 순기능도 있다. 모든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교집합 내지는 프리퀄 같은 오마주는 디즈니 작품을 보며 자란 관객에게 독특한 감동을 안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역사가 녹아 있는 엔딩 크레디트 역시 100주년에 걸맞은 인상적인 순간을 선사한다.
다만 이 모든 노력은 찰나의 기쁨일 뿐이다. 과거의 영광은 변화한 현실을 보지 못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니까. 할리우드에서도 꿈과 환상을 가장 오랫동안, 가장 잘 그려내기로 유명했던 디즈니의 100주년 기념작 치고는 중요한 미덕을 여럿 빼먹은 셈이다. 그러니 <위시>는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 안에 담긴 디즈니의 현재와 미래가 마냥 화려해 보이지는 않으므로.
Poor 형편없음
동화와 현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표류 중인 디즈니의 자화상
-
- 학교생활! - 정녕 실사화는 답이 없는 것인가
필자가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일본 만화가 있다. "학교생활!"이라는 일상물을 탈을 쓴(?) 좀비 아포칼립스 애니메이션인데, 개인적으로 상당히 흥미롭게 봤다. 귀엽고 예쁜 여자 캐릭터들이 몇몇은 죽고, 좀비 소굴 속에서 버틴다니. 그 뿐만 아니라 진중하고 상당히 암울한 스토리가 필자의 관심을 끌었다. 작품을 평가도 좋아서 애니메이션화도 됐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실사화까지 되었다. 일본 애니 실사화는 거의 일본 영화계의 적폐(?) 수준으로 평을 받다보니, 이것도 역시 그럴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이 영화를 제작년 BIFAN에서 스크린으로 소수의 관객들과 관람을 했다. 그 당시 든 생각은 이 영화는 여기서 안 보면 스크린으로는 볼 기회가 절대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좀비 영화를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고. 그런데 아뿔싸. 결론은 역시다. 이번에도 실사화의 저주는 계속 되었다.
보통 이러한 모에 계열 만화(좀비 아포칼립스라고는 소개했지만 모에 요소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를 실사화하는 경우에는 만화와 실사의 괴리감이 심한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문제점이 본 작품에도 존재한다. 심해도 너무 심하다. 이 중 심각한건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도 어설퍼서, 정상적으로 관객이 집중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그리고 좀비 영화에서 보기 힘든 12세 관람가라는 등급은 보기 전부터 불안감을 선사했는데, 그에 보답하듯 좀비와의 전투씬은 심심하기 짝이 없다. 피도 볼 수 없고, 잔혹한 현장도 없다. 그나마 원작의 전개를 영화화 하기 위해 바꾼 스토리는 볼만하지만, 실사화의 치명적인 단점으로 인해 볼만한 스토리도 못볼게 되버리고 말았다.
코스프레로 끝나고 만다는 일본 애니 실사화의 단점을 피하기 위해 배우들의 헤어 컬러를 염색하지 않는 등의 새로운 시도는 참신해보였지만, 그 외의 단점들은 여전히 존재할 뿐더러 더 부각된 부분들도 있다. 만화 실사화의 반면교사들 중 하나. 이 영화는 역시 수입사 측에서도 흥행성이 없다고 평가 되었는지 꼼수 개봉 후 VOD 직행되었다. 혹시 원작을 좋아하거나, 실사화 애니가 어떤지 궁금하다면 한번 봐봐도 좋다. 부디 나를 탓하진 말아달라.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
- 나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낼 수 있다는 것
무비채널에서 영화리뷰를 보다가 티저 영상에 박형식이 “싫어여!!! 모르게쒀여~~” 이 대사를 치는 부분이 너무 귀여어서 저것은 봐야한다 생각했던 영화 <배심원들>. 귀여웠던 티저에 반해 내용은 법정물이어서, 게다가 다루는 범죄는 살인죄여서 무겁게 흘러갈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법에 대한 무거움과 스릴, 재미라는 선을 잘 탄 작품이었다.
영화 <배심원들> 시놉시스2008년 대한민국 첫 국민참여재판 모두에게 그날은 처음이었다!
국민이 참여하는 역사상 최초의 재판이 열리는 날.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나이도 직업도 제각각인 8명의 보통 사람들이 배심원단으로 선정된다. 대한민국 첫 배심원이 된 그들 앞에 놓인 사건은 증거, 증언, 자백도 확실한 살해 사건. 양형 결정만 남아있던 재판이었지만 피고인이 갑자기 혐의를 부인하며 배심원들은 예정에 없던 유무죄를 다투게 된다.
생애 처음 누군가의 죄를 심판해야 하는 배심원들과 사상 처음으로 일반인들과 재판을 함께해야 하는 재판부. 모두가 난감한 상황 속 원칙주의자인 재판장 ‘준겸’(문소리)은 정확하고 신속하게 재판을 끌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끈질기게 질문과 문제 제기를 일삼는 8번 배심원 ‘남우’(박형식)를 비롯한 배심원들의 돌발 행동에 재판은 점점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처음이라 더 잘하고 싶었던 보통 사람들의 가장 특별한 재판이 시작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르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배심원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그렇다,, 박형식은 귀여웠다,,
귀여운 박형식을 보고 싶어서 보기 시작한 영화였는데 영화 <배심원들>은 그 매력을 아주 다채롭게 풀어낸다. “싫어요!!! 모르겠어요!!” 이 대사를 직접 들으니 정말 답답한데 귀여웠다. 하지말라는 짓은 꼭하고, 그 행동 덕분에 피고인을 만나고 무죄의 가능성을 생각해내고 약간 또라이 같은 기질이 있어서 보는 내내 피식피식 웃을 수 있었다. 박형식에게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입은 듯 연기가 뜨지 않았고 꽤나 잘해서 보는 내내 부담이 없었던 작품이었다.
법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 위해 있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법이란 굉장히 강제적이고 규율이 심한, 처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역사 속 지도자들은 법을 이용해 공포정치를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배심원들을 뽑는 면접 자리에서 재판장 김준겸은 “법은 사람을 처벌하기 않기 위해 있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이 대사를 듣는 순간 머리 한 대를 맞은 듯 ‘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저 말은 그저 처벌을 내리려고 했던 김준겸이 배심원들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을 바꾸게 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저 기계적으로 재판을 진행하다가 올바른 판사로 돌아오게끔 움직이는 대사여서 영화 <배심원들>을 관통하는 대사가 아니었나 싶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배심원들은 초반 박형식을 제외화고 대부분 재판부의 뜻대로 움직인다. 자신들이 아는 것이 없다는 이유로, 잘 모른다는 이유로, 처음이라는 이유로 재판부가 넌지시 제시하는 흐름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타협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비서실장 최영재다. 그룹의 비서실장이기에 얼른 이 배심원을 끝내고 회장님을 모시러 가야한다는 생각뿐이다. 그래서 자꾸 상황 진행에 태클을 거는 권남우(박형식)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 따위는 없다며 세상의 생각이, 자기 윗사람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이라 최면을 걸며 살아가지만 결국에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의견을 재판장에게 제시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낸다.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를 꼽으라면 비서실장을 꼽을 것 같다. 가장 입체적으로 보였고, 본인 인생을 살기 급급한 일반적인 사람들을 대표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2008년에 있었던 첫 국민참여재판을 다룬 영화 <배심원들>. 국민참여재판을 활용해 자신의 목소리를 누군가에게 당당히 낼 수 있다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영화였다.
-
- [BIFF 데일리] 마법 같은 기적을 불러 일으키는 색
* 이 글은 씨네랩 크리에이터 기자단으로 부산국제 영화제에 참석하여 작성한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스터>
<감독>
피에트로 마르첼로
<출연진>
Juliette JOUAN, Raphaël THIÉRY, Louis GARREL, Noémie LVOVSKY
<시놉시스>
<마틴 에덴>(2019)의 피에트로 마르첼로는 본인만의 서정적이고 낭만주의적인 필모그래피를 이어간다. 알렉산드르 그린의 러시아 콩트 <스칼렛 세일즈>(1923)를 각색한 영화는 1차 세계대전 직후에 노르망디의 어느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마을에서 배척받는 라파엘과(라파엘 띠에리) 그의 딸 줄리엣은(줄리엣 주앙) 외롭지만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한다. 어느 날 한 마법사가 훗날 줄리엣이 하늘을 나는 주홍 돛을 단 배에 납치될 거라는 예언을 하고, 줄리엣은 이 예언을 굳게 믿으면서 왕자를 기다린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노래하는 장면은 자크 드미의 <당나귀 가죽>(1970)에 대한 오마주다. 하지만 <스칼렛>에서 불굴의 용기와 상상력의 힘을 소유한 자는 왕자가 아닌 공주이며,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 왕자를 구하는 사람 역시 줄리엣이다. 피에트로 마르첼로는 황금빛 석양과 두꺼비가 사는 연못으로 시골의 마법을 포착하면서 올해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 영화 한 편을 완성했다. (서승희) (출처: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우리는 때론 고되고 잔인한 현실 속에서 마법과도 같은 일을 꿈꾸곤 한다. 누군가는 그것이 터무니 없는 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론, 당신이 간절히 염원한다면 삶은 당신에게 기꺼이 마법을 선물해줄 것이다. 이 마법의 다른 이름은, 다름아닌 '사랑'이다. 영화 <스칼렛>은 이러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1. ‘주홍색’의 마녀들
목공인 라파엘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죽은 아내의 집으로 돌아간다. 아내가 머문 곳은 어느 부랑자촌. 그곳에는 아들렌 부인이라는 '마녀'와 대장장이 가족, 그리고 홀로 남겨진 라파엘과 마리의 딸, '쥘리에트'가 있었다. 그들은 그 마을의 이방인이었고, 전후의 인심은 팍팍하기 그지 없어서, 언제나 핍박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팍팍한 인생 속에서 나름대로의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어느 일상의 틈에 마법이 깃들기를 염원하면서 말이다.
<스칼렛>이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연상된 것은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자>(Scarlet letter)였다. 이방인으로써 마을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 라파엘 가족들의 모습은 어쩐지 '주홍글자'가 쓰인 표식을 가슴에 달고 다니며 박해받던 헤스터 프린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인물들이 유난히 붉은 옷을 자주 입는 다는 점도 이러한 가설을 세우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주홍색'은 '낙인'의 이미지를 가지는 호손의 소설에서와는 다소 의미가 다른 것처럼 보인다. 딸인 쥘리에트와 아들렌 부인은 탁월한 언변과 재치로 라파엘의 일자리를 구해주는 등 어떤 고난의 상황을 타파해나갈 때마다 붉은 색을 입고 있는데,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여기서의 주홍색은 시련 그 자체를 의미하기보다는 시련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어떤 마법과도 같은 힘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마법! 단조로운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고, 잔잔한 마음에 격정을 불러 일으키며, 마침내는 간절히 염원하던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 이것을 달리 말하면, 어쩌면, 이 마법의 다른 이름은 사랑일지도 모른다.
라파엘이 자신이 사랑해 마지 않던 마리의 초상을 붉은 배경의 액자에 넣어두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달려가는 쥘리에트가 새빨간 원피스를 입은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숲속의 마녀가 예언한대로 '붉은 돛을 단 배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토록 기다리던 연인과 재회하던 날,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 곳곳에서는 마녀에 대한 비유를 발견할 수 있는데, 점을 보고 마녀의 노래를 부르는 아들렌 부인이 그렇고, 동물들과 벗하며 맨발로 숲을 드나드는 자유로운 여인인 쥘리에트와 그런 그에게 신비로운 조언을 해주는 숲속의 여인에게서 그러한 '마녀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주 노골적인 '마법'이 나타나지 않는데, 영화는 오히려 아주 절묘하게 색상과 상황의 변화를 활용하여 '마법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해낸다.
2. 고된 삶 속에서 푸른 희망을 찾는다는 것
또 인상 깊었던 것은 푸른 색의 절묘한 활용이다.-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므로 절대적으로 옳은 해석은 아님을 밝힌다!- 푸른 색은 붉은 색과 더불어 많은 장면에서 돋보였는데, 가령 귀로에 오른 라파엘의 군복, 성장하는 쥘리에트의 옷과 장성한 그의 머리에 달린 푸른 리본, 작업에 착수한 라파엘과 쥘리에트 부녀의 푸른 앞치마 등이 그렇다. 아, 라파엘과 아들렌의 푸른 눈이라든가, 사랑하는 이의 장례식에서 아들렌과 쥘리에트가 입은 짙푸른 의상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푸른색은 양가적인 의미를 가진 색이다. 그것은 때론 우울의 색이기도 하고, 희망의 색이기도 하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이'라든가, '피노키오'에서 피노키오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푸른 요정'의 이미지를 생각해보라!- 전후 죽은 아내가 머물던 곳으로 향하는 라파엘의 푸른색은 지치고 쓸쓸한 기운을 풍기는가 하면, 그의 장례식에서 보이는 푸른색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상실감을 적절히 나타내준다. 그러나 우울과 환희는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양면적인 법. 이 푸른색은 라파엘 가족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간직하고 그들의 삶을 꿋꿋이 이어나갈 때 빛을 발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노라 말하는 아들렌과,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을 본딴 선수상 제작에 매진하는 라파엘, 그리고 그런 라파엘의 유지를 이어 받아 푸른 앞치마를 입는 쥘리에트의 모습은, 사람을 비로소 살게하는 희망과 그것의 계승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화 <스칼렛>은 생생한 색의 대비를 통해 잔잔한 시골 마을에서 이방인으로써 살아가는 이 독특한 가족-소위 정상 가족의 범주를 벗어난-의 삶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그 안에는 사랑과 낭만이 있다.
3. 그 밖의 관람포인트!
그밖에 관심을 가지면 재밌을 듯한 관람 포인트는 아래와 같다.
첫째, 화면 연출. 이 영화는 특히 붉은 색감이 두드러진다. 비단 의상 뿐만 아니라, 붉은 노을과 붉은 얼굴 등 전반적인 화면의 색감이 붉게 연출되어 있는데, 이러한 붉은색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에 대해 상상해보며 감상하는 것도 즐거운 관람법이 되리라. 또 이 영화는 최근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약 4:3의 화면비를 채택했는데-필자는 숫자에 약하므로 정확하지는 않을 수 있다ㅎㅎ- 이 때문에 좀 더 고전적인 인상을 준다.
둘째, 다양한 아카이브 영상의 차용이다. 피에트로 감독은 영화감독이자 아카이비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세계1차대전 당시의 여러 영상들을 활용하여 좀더 생생한 장면을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음악이다.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또다른 점은 다름아닌 음악이다. 탄탄한 오리지널 사운드 트렉 뿐만 아니라 배우들이 직접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함으로서 뮤지컬 영화는 아니면서 마치 뮤지컬 영화를 보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실제로 배우인 라파엘과 쥘리에트-실제 배우와 배역의 이름이 동일하다-는 악기 연주에도 상당한 일가견이 있다고 한다.
자, 우리 인생이 너무나 팍팍하다면, 우리도 어떤 마법과도 힘을 가져다줄 주홍색을 찾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영화관에서 영화 <스칼렛>을 관람하는 것도 이런 마법같은 경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2022.10.08. 15:30 영화의 전당 하늘연극장
-
- 떠나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
프란시스와 레이디 버드
처음으로 <프란시스 하>를 본 건 입시 준비를 하던 여름이었다. 계속 이곳저곳을 방황하는 프란시스를 보는 게 정말 힘들었다. 같은 해, <레이디 버드>를 본 후에는 영화 말미에 대학에 들어가는 크리스틴이 참 부러웠다. 수능 성적이 좋은 것도, 방과 후에 연극을 하고, 줄리와 대니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고,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도 전부 대단해 보였다. 스물 한 살이 되어 당시에 느꼈던 무력감과 긴장감에서 한 발짝 물러나고, 새로운 고민이 생긴 후 두 작품을 다시 봤을 때 비로소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레이디 버드가 새크라멘토를 그리워하듯, 프란시스가 방황하던 시간을 지나 ‘자기만의 방’을 찾듯 그레타 거윅이 그린 성장은 단순히 귀감이 되기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지나온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We were in one parking lot and we went to another parking lot."
레이디 버드’는 고등학생인 크리스틴이 자신에게 직접 붙인 이름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크리스틴이라고 부르면 반드시 고쳐 부르게 하고, 명단에 쓰인 이름은 새로 쓴 후 밑줄까지 그어 둔다. 반듯하게 인쇄된 글자 아래 적힌 손글씨는 어디서든 '개인’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레이디 버드를 소개하는 듯하다. <레이디 버드>는 수십 벌의 예쁜 의상과 함께 밝은 미래를 노래하는 ‘하이틴’ 영화에서 벗어나 그 이미지를 보고 자란 소녀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깊이가 각기 다른 수많은 고민, 견뎌내야만 하는 상황, 결코 설명하지 못할 결정들, <레이디 버드>가 주인공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모녀의 이야기라는 점은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관객에게도 호소력을 지닌다.
그레타 거윅이 공동 각본을 쓰고 주연을 맡은 <프란시스 하>는 꼭 <레이디 버드>의 다음 이야기처럼 보인다. 프란시스는 여러 모로 불안정하다. 현대무용가가 되고 싶어하고, 뉴욕에 살며, 함께 살던 친구가 떠나며 갈 곳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어진다. 영화는 색조차 빼앗아 가며 복잡한 감정과 걱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레이디 버드처럼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원동력을 절실히 원하는 캐릭터를 보여준다. 프란시스가 자신의 이름을 줄여 쓰지 않고 반 접어 우편함에 끼워 넣은 것처럼, <프란시스 하>는 때때로 한 발자국 물러나거나 타협하는 것이 결코 최악의 선택지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화려한 스토리와 미장센으로 감동을 주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프란시스 하>는 불완전한 삶과 끝나지 않은 성장으로 위로를 준다.
레이디 버드는 “우리 주차장에서 출발했는데 또 다른 주차장에 왔네.”라고 말한다. 주차장은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출발해야 하는 장소이다. 스치듯 읊조린 대사지만 <레이디 버드>와 <프란시스 하>의 정서를 모두 설명하는 것만 같다. 두 작품은 떠난 후에야 사랑하게 되는 것들, 다시 말해 과거의 경험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되기까지의 성장을 담았기에 특별하다.
그레타 거윅이 그린 여성의 성장
<레이디 버드>와 <프란시스 하>가 유독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두 이야기를 충분히 내면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디 버드, 프란시스와는 공통점보다 다른 점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집에서 먼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은 적도 없고 무대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며, 태어난 연도와 사용하는 언어조차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에서 위로를 받거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나를 위한 영화다’라고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레타 거윅의 캐릭터들이 여성으로 살아온 경험을 가로지르는 공통의 정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레이디 버드와 프란시스는 섹슈얼한 관계를 쟁취하지 않는다. 단지 자연스러운 욕망과 꼬이고 풀어지는 관계들, 보편적이고 사소한 고민을 보여준다. 현실적이고 솔직한 모녀 관계와 친구 관계 또한 위와 같은 감상에 큰 영향을 준다.
<굿 윌 헌팅>, <죽은 시인의 사회>, <길버트 그레이프>, <바스켓볼 다이어리> 등은 모두 다양한 감상과 감동을 주는 훌륭한 작품들이지만, 영화와 소통하고 온전히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자라면서 수도 없이 돌려 본 <금발이 너무해>, <클루리스>, <하이 스쿨 뮤지컬> 같은 작품들은 여성 제작자의 손을 거치거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것임에도 아름다우면서 유능한 캐릭터를 모델로 제시한다. 이러한 영화들을 수없이 본 경험 이후에 그레타 거윅이 참여한 작품들을 만나게 되었다.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 여성 제작자로서 그레타 거윅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는 단순히 그의 이야기와 연출이 좋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나 다른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내면화하고, 다시 새로운 경험으로 만드는 것이 개인의 삶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데에 있다.
-
- 10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설경구, 김희애, 장동건, 수현 등 베테랑 배우들의 앙상블로 주목받은 <보통의 가족>이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했습니다.
당초 10월 9일이었던 개봉 예정일을 10월 16일로 변경한 이유가 <대도시의 사랑법>, <조커: 폴리 아 되> 등 타 작품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추측이 많았는데요. 약 28만 명에 달하는 오프닝 스코어를 달성하며 좋은 선택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개봉 후 꾸준히 상위권을 지켜온 <베테랑 2>는 누적 관객 수 약 740만 명을 기록하며 여전히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관객 수 감소 추이가 눈에 띄고 있어, 천만 관객 돌파 여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와일드 로봇> 역시 안정적인 성적으로 3위를 유지하며 애니메이션 장르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유의 상상력과 감성적인 스토리로 가족 관객을 끌어들이며 꾸준히 관객 수를 확보하고 있어, 향후 몇 주간의 성적이 주목됩니다.
한편, 북미 박스오피스에서는 공포 스릴러 장르가 강세입니다.
국내에서도 개봉해 누적 관객 수 3만 명을 돌파한 <스마일 2>가 북미에서 1위를 기록하였고, 지난주 깜짝 1위에 올랐던 슬래셔 무비 <테리파이어 3>가 3위로 순위가 하락했지만, 여전히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와일드 로봇>은 북미에서도 2위를 지키며 글로벌한 흥행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국과 북미 모두 장르의 다양성이 돋보이는 박스오피스 흐름 속에서, 앞으로의 영화 시장 경쟁이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
- 스파이더맨 톰 홀랜드의 마블 스포일러 모음집!
-
"본 영상은 산돌구름에서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
2020. 04. 09 영상입니다.
유튜브 채널 구독하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6jj...
무비필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oviephileof...
무비필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marvelersst...
-
- 넷플릭스 신작 영화 "더 유니온" / 마크 월버그, 할리 베리 주연 / 코믹 첩보 액션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넷플릭스 영화 "더 유니온"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라기 보다는 엔드크레딧에 마크 월버그와 할리 베리의 오랜 추억의 사진이 나옵니다.
-
- 넷플릭스 <낙원의 밤>
《신세계》《마녀》박훈정 감독의
가장 섬세하고 우아한 감성 누아르낙원의 섬, 제주에 어둠이 내린다 《낙원의 밤》
4월 9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
-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 Volume 3> 30초 예고편
마침내 5월 3일! Team 가디언즈가 돌아온다! Are You Ready? 이 느낌 그대로, 다시 한번 볼륨 업!?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30초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