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01-05 07:42:57
〈메모리아〉, 새로운 감각과 연결감으로의 초대
〈메모리아〉 리뷰
7★/10★
‘쿵’. 침대에 누워 있던 제시카가 잠에서 깬다. 별다를 것 없는 일이다. 소리가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제시카는 자꾸 이 ‘쿵’ 소리가 신경 쓰인다. 그래서일까? ‘쿵’ 소리가 점점 더 자주 들려오는 것은.
문제는 이 소리가 제시카에게만 들린다는 점이다. 때문에 제시카는 이전과 같이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소리의 정체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음향 전문가에게 가서 자신이 들은 소리를 정확히 재현하고자 하고, 병원에 가서 의사와 상담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리의 정체는 여전히 미궁에 있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 나서는 제시카의 여정은 그녀가 숲에서 에르난이라는 남자를 만나며 변곡점을 맞는다. 에르난은 모든 걸 기억하는 남자다. 그의 기억은 길가의 돌에 남은 ‘진동’(소리는 파동이다)으로 그 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하고 세심하다. 에르난의 방식에서 제시카는 자기 머릿속의 소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단서를 획득한다. 에르난이 돌의 진동으로 또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연결되듯, 제시카 머릿속의 ‘쿵’ 소리도 그와 또 다른 누군가를 이어주는 소리, 즉 서로 떨어져 있는 존재들의 독특한 연결일 수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메모리아〉는 ‘쿵’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다만 그 소리가 ‘교감’의 한 방편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나아가 그 소리가 콜롬비아의 슬픈 역사에서 파생된 것일 수 있음을 또다시 암시한다. 한 인터뷰에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콜롬비아는 오랫동안 내전과 마약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영화를 찍기 몇 해 전 (정부와 반군 간) 평화협정이 체결됐지만, 여전히 누가, 어떻게 그간의 수많은 죽음을 책임질 것인지 등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억압과 폭력,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고,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 그게 이 나라의 역사였다.”*
즉 제시카가 끝내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그 근원을 궁금해하는 ‘쿵’ 소리는, 마찬가지로 그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콜롬비아인의 죽음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감각적’ 표현이다. 수면 도중 머릿속에서 폭발음이 들리는 ‘폭발성머리증후군’을 앓은 감독이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제시카 캐릭터를 떠올리고, “내가 겪은 이 증상이 콜롬비아가 지닌 기억에 대한 일종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인터뷰 역시 이를 방증한다.
요컨대 〈메모리아〉는 소리라는 감각으로 우리의 집단적 연결감을 확장하고자 하는 영화다. 영화가 명쾌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작고 미세한 감각으로 열리는 집단적 연결감은 결코 분명한 형태로 존재할 수 없다. 언제나 미지의 가능성의 형태로, 즉 늘 새로운 열림과 확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
〈메모리아〉가 소리라는 감각에서 출발하는 영화임에도 OST가 없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해석해볼 수 있다. 다소 긴 러닝타임(136분)의 이 영화는 지극히 느린 템포로 소리의 근원을 찾는 제시카의 여정(그리고 일상)을 좇는다. 영화의 시퀀스는 인과적‧유기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편집되지 않은(혹은 편집을 최소화한) 일상의 잔잔한 리듬은 역설적으로 ‘감각으로 연결되는 우리’라는 영화의 메시지를 더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기존 영화가 제공하는 자극적‧정합적 감각으로 인해 닫혀 있던 섬세한 감각을 조심스레 일깨워 관객을 제시카의 여정에 동참케 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감독의 인터뷰를 인용해보자. “영화의 줄거리에 대해 질문하지 말고, 그저 영화와 함께 존재해주세요. 그러면 시간여행을 하는 우주선에 탄 듯,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메모리아〉는 기존 영화가 제공하던 시공간에서 벗어나 미세하지만 사라질 수 없는 새로운 감각‧연결감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하는 영화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30414#home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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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둥의 신의 우당탕탕 자아 찾기 대모험
미친 거 아냐? 제주의 여름은 덥다 못해 뜨겁다. 7월 10일, 날씨가 드디어 정신을 놓아버렸다. 바람이 잘 드는 옷을 입었는데 거의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다. 원래 여름에 취약한 나.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더위에 금세 어디론가 도망쳐야 할 것 같다. 사실 집에서 책을 읽다 왔다. 선풍기 달달달 하는 소리에, 시원한 제로콜라까지 내 방이 역시 최고다. 그런데 사실 내 방에서만 인생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난 우리 엄마 아빠에게 효도하고 싶은 사람이고 소처럼 일해서 굉장히 잘 되고 싶은 사람이다. 당연히 나라는 사람에게 1인분의 숙제가 주어진다. 일 하는 것도 짜증나 머지않는데 날씨는 미친 듯이 더우니 그냥 격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그래서 그런지 극장에 가는 것이 영화 외적인 것에도 장점으로 작용한다. 빵빵한 에어컨에 공포영화던 뭐던 시각적 쾌감이 있는 영화를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날 것 같다. 근데 또 사계절 보편적으로 통하는 영화들도 있다. 작년 7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가 개봉했다. 극장에서 시원한 바람맞으며 이런 영화 보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무더운 여름은 액션 영화가 최고다. 그리고 그 액션 영화 중 인기가 많은 건 역시 마블이다. 나는 역시나 덕후인지라 마블의 신작을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딱 두 달을 기다려 신작이 나왔다. 타노스와의 일전을 끝낸 토르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손님과 빌런이 찾아왔다. 아스가르드로 바이킹을 타고 날아가 보자!
감탄고토
보기만 해도 뜨거운 사막. 한 남자는 딸과 함께 길을 걷고 있다. 뭔가 아파 보이는 남자와 딸.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다. 계속되는 배고픔에 힘겨워하는 부녀. 기댈 곳을 찾고 있는 것 같다. 털썩. 딸이 쓰러졌다. 딸은 이제 더 이상 일어날 힘이 없다는 말과 함께 남자의 품속에서 세상을 떠난다. 슬퍼하며 딸을 묻은 남자. 남자에게 한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하니 도착한 곳은 숲이었다. 숲의 개울가에 얼굴을 씻고 짚이는 과일을 먹는 남자. 남자가 도착한 곳에는 그가 섬긴 신 라푸가 있었다.
남자는 라푸가 고난을 겪은 자신을 위해 잔치를 연 줄 알고 있었다. 아니었다. 라푸가 이 잔치의 목적은 신을 죽일 수 있는 ‘네크로 소드’의 보유자를 처치하고 난 다음 스스로를 자축하기 위함이라고 답한다. 충격받은 남자. 라푸의 마지막 신자라고 믿었던 남자는 차가운 말을 듣는다. 라푸는 말했다. “너에게 보상이란 없다. 마지막 신자에게 영원한 보상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다.”라며 남자를 조롱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답. “네가 아니어도 나를 따르는 신자들은 많아!” 분노하는 남자. 화를 내는 남자의 목을 조르는 라푸. 그때, 어디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크로 소드는 남자에게 이 신을 죽이고 이터니티의 제단으로 가라며 남자의 용기를 북돋는다. 네크로 소드를 잡고 라푸를 사살한 남자. 네크로 소드의 계시를 들은 남자는 그렇게 신 하나, 둘 씩 사살해 이터너티에 도착해 딸을 살리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신 도살자 고르는 그렇게 탄생했다. 온갖 종류의 신을 죽이고 다니는 고르를 토르와 제인 포스터, 발키리가 힘을 합쳐 제지하려는 내용이 본작의 줄거리다.
그냥 적당히 재미있음
내가 기억하기엔 이 영화 마블의 페이즈 4에서 기대작 축에 속했다. 새로운 히어로들의 등장 <이터널스>와 <샹치 : 텐 링즈의 전설>과는 달리 어벤저스의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토르의 영화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이는 특별한 게스트가 있을 예정이었던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과는 궤가 달랐다.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오리지널 토르의 이야기를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분들이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봉 전주부터 시사회 평이 심상치 않더니 적지 않게 우려를 표하는 분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극장에 <탑건 : 메버릭>이 날개 달린 듯 입소문을 타고 있어서 이 영화에 대한 우려가 더 커졌던 감이 있다. 솔직히 나도 별로 기대를 안 하고 갔다. 마블의 최근 타율이 지지부진하다는 세간의 평가 때문은 아니다. 좀 얄미웠다. '이럴 거면 <헤어질 결심> 상영관 좀 늘려주지'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런 나와 많은 분들의 우려가 통한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냥 무난했다.
이 둘은 존재감부터가 달라
일단 이 영화에 있어 가장 먼저 호평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나탈리 포트만과 크리스찬 베일이다. 일단 '마이티 토르'로 컴백한 나탈리 포트만은 사실상 극을 이끌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마이티 토르 캐릭터는 물리학자지만 신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다. '물리학자'와 '신과 사랑에 빠짐'은 사실 살짝 모순이 되는 부분이 있다. 인간이 신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뭐 슈퍼히어로 영화에서나 자연스럽게 통하는 일이지 우리 일상 속에선 아무래도 앞 뒤가 안 맞는 일이다. 이 할리우드의 위대한 배우는 이 두 가지 지점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극을 이끈다.
일단 인간 제인 포스터의 측면이다. 제인 포스터는 물리학자다. <토르 : 다크 월드>에서 결별하고 난 후 나름의 성과를 내며 성장한 제인 포스터. 제인 포스터는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토르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거리감과 그 시간 동안 얻었던 명과 실을 묘사해야 한다. 이게 영화를 이끄는 주요 원동력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감정의 밀도가 떨어지면 안 된다. 긴 시간 동안 참아왔던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 토르와의 사랑이야기 둘 다 멜로 베테랑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스킬이 잘 나타났다. 극 중에서 토르와 제인의 연애사가 주마등처럼 샤삭 스쳐가는 부분이 있는데, 이때 솔직히 두 배우의 내공 차이가 너무 대놓고 드러났다. 나탈리 포트만이 웃는 신은 정말 그 사람이 사랑스러워 웃는 것 같은 느낌이라 마블 영화들이 아닌 다른 멜로를 보는 듯한 이질감이 확 느껴진다.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감정연기의 명확함을 보여주는 베테랑의 품격이었다.
또 제인 포스터는 마이티 토르이기도 하다. 슈퍼 히어로서의 사려 깊음이나 액션 연기도 동시에 보여줘야 했다. 이것 역시 굉장히 좋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일단 슈퍼 히어로서의 내면 연기는 나탈리 포트만이 잘하는 감정연기를 바탕으로 적절하게 소화한다. 이 사람은 눈빛, 행동 하나하나가 선한 느낌이 든다. 배우가 얼마나 마인드셋을 잘하고 영화에 임했는지를 알 수 있는 지점이었다. 또한 이 사람은 외유내강형 인물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점점 진행되며 내면이 변하게 된다. 이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만한 사람의 성격을 탄탄하게 드러내는 좋은 묘사가 돋보였다.
다음은 크리스찬 베일이다. 슈퍼히어로 권위자가 이번에는 빌런으로 돌아왔다. 유달리 뛰어난 이해도 때문인지 크리스찬 베일은 돋보일 때 돋보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적절하게 강약을 조절했다. 이 강약조절 덕에 영화에 힘을 줄 때 힘을 주는 부분이 돋보이는 효과가 있다. 우선 고르가 신 도살자가 되어 흑화하는 부분에서 목소리 톤이 변하는 방식은 왠지 익숙한 맛인 것 같지만 알면서 봐도 뛰어나다. 이후에 고르가 악당이 돼서 하는 악한 행동들을 보면 어쩔 때는 리액션의 연기를 하고 다른 때에는 주체적으로 상대방의 리액션을 끌어오는 연기를 한다. 마블 페이즈 4의 빌런들이 굉장히 뛰어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드라마 <팔콘 앤 윈터 솔저>에서 살짝 아쉬웠던 것 말고는 거의 다 극을 이끌어가는 존재감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신 도살자 고르는 '만다린-아가사-드레이크 장군-킹핀-시니스터 스트레인지 등'에 버금가는 강력한 존재감이었다. 마이티 토르와 함께 극을 이끄는 주요한 동력 중 하나였던 고르. 이 인물 구경하러 극장에 가도 티켓 값 중 9천 원은 한다.
캐릭터 연출 칭찬해, 하지만
또한 이 둘의 인물 연출은 왜 마블이 좋은 감독을 섭외하는가? 의 답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마이티 토르의 액션 연출은 이 인물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방식 중 하나였다. 열심히 벌크업 해 온 나탈리 포트만의 열연에 힘입어 묠니르를 활용한 액션 연출, 처지에 따른 조명 사용 방식 차이, 메이크업 형식, 머리색을 비롯한 코디까지 영화에서 토르와 비슷하면서도 확연하게 달랐던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데 타이가 와이티티의 역량이 그대로 드러났다. 특히 마이티 토르의 초중반부, 극후반부 액션신은 '이 영화의 강점은 액션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이는 단순히 배우의 연기력으로만 소화하는 것이 아니다. 연출 방식으로 최선을 이끌어내는 부분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도 썼듯 떨어져 있었던 연인의 과거가 얼마나 서로 외로웠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은 제인 포스터와 토르의 멜로 연기 디렉팅이 좋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고를 유심히 보면 신 도살자 고르의 색감 연출이 뭔가 다르다는 걸 볼 수 있다. 그렇다. 고르가 빌런으로서 악행을 벌이던 곳은 색이 없는 곳이다. 전체적으로 컬러풀한 영화의 색감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르에게 위압감을 부여한다. 뭐 감독이 각본까지 참여한 것으로 보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을 받는 게 어느 정도는 당연할지도 모르나, 각본 자체에서 '신 도살자 고르'는 뭔가 매가리가 없다. 대신 딱 연출자의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이 영화 자체의 러닝타임 동안 고르의 색을 활용한 분위기 드러내기는 효과적이었다. 비주얼적으로 눈 쪽에 분장을 덧붙이면서, 액션 연출할 때도 후반부에 토르가 썼던 무기와 네크로 소드가 부딪히는 방식의 묘사는 빌런의 악함이 관객의 머리에 흔적을 남기는 역할이다. 이는 곧 후반부의 하이라이트로 이어진다. 인물의 강점을 극을 이끄는 힘으로 치환시킨 감독의 연출력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또한 크리스 햄스워스의 액션 연기 역시 좋았다. 극에 이 배우의 나체가 나온다. 진짜 남자가 봐도 섹시한 햄스워스다. 그 섹시한 몸으로 액션 연기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왜 이 사람이 토르라는 슈퍼히어로에 찰떡인지를 잘 드러낸다. 개인적으로 마블 히어로들 중에 액션 연기가 가장 자연스러운 배우가 아닐까 싶다. 멜로 연기는 나탈리 포트만에게 좀 부족했다. 그러나 이 부족했던 액션 연기의 '간지와 멋'으로 제 값을 해낸다. 물론 뭔가 열정이 있는 배우인 것 같아서 더 진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크리스 햄스워스가 필모 보는 눈이 처참한 수준이던데 뭐랄까 터닝 포인트가 있으면 더 인기를 얻고 대단한 배우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발키리의 각본 상의 캐릭터 설정 자체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이 캐릭터가 없어도 영화의 이야기는 술술 전개된다. 그 대신 차후에 있을 영화들 이 발키리가 출연할 것이며 이를 위해 그녀의 성격을 묘사하는 대사가 몇 번 나온다. 이 지점에선 중요하지만 이 영화에선 사실 발키리의 역할을 로키가 나와서 맡아도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극에서 개성이 없다. 전적으로 테샤 톰슨의 매력으로만 극을 이끈다는 건 각본 성립에 있어 아쉬운 부분이다. 그 대신 이 인물에서도 타이카 와이티티의 연출력 자체는 날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기 충분하다. 이 인물 역시 액션 연기 및 연출이 좋았다. 극에서 마블의 차후 시리즈들을 위해 기능적으로 쓰였다는 페널티가 있음에도 발키리가 기억에 남는 건 연출 자체는 좋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 왓챠피디아를 보면 몇몇 사람들이 이 인물의 특정 속성에 할 말이 많은 것 같던데, 발키리는 애초에 지구인이 아니다. 외계인이다. 그래서 사실 발키리가 그런 특성을 갖고 있는 건 아무 문제가 없다. 뭐 지구인이었어도 문제가 없기야 하겠지만 외계인의 내면을 이해 못 할 거면 마블 영화 왜 보나? 싶다.
이 외에도 CG를 잘 사용한 영화이기도 했다. 러셀 크로우가 맡았던 특정 역할이 기억난다. 이 인물이 좀 존재 자체가 스포일러라서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는 없겠지만, 이 인물이 있는 신전 묘사는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가졌던 강점을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다. 굉장히 구체적이면서도, 우리가 예전에 봤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를 기반으로 한 공간 묘사가 탁월했다. 이 궁전뿐만 아니라 스톰브레이커의 활용법, 초반부 컴퓨터 그래픽을 통한 액션 연기, 후반부의 하이라이트 전투신까지 이거 분명히 CG로 작업했을 텐데 아마 이 것에 1년은 쓰지 않았을지 생각이 든다. 제작진의 노고가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봐도 무방한 이유가 CG 사용에도 있다고 본다.
코르그야 조용히 좀 있어라
또 이 영화에 있어 압도적으로 단점으로 작용하는 부분이 있다. 일단 모든 엔딩 크레딧을 보고 여러분이 이 이야기 방식에 대해 느끼는 점이 있다. 극의 핵심을 이끄는 데 있어 '..?' 싶으면 그게 맞을 것이다. 근데 이 부분에 대해 조금이라도 적으면 맥 빠질 것 같으니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쓰면 재미없을 단점을 지나 영화의 큰 단점은 코르그가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캐릭터가 적당히 유머를 보여주면 좋은데 너무 유머에 집착한 티가 난다. 아마 전작의 장점을 승계하려던 욕심이 아니었을까 싶다. 전작은 꽤 호평을 받았던 영화였다. 헬라의 강력함이 토르의 각성서사와 어울리며 보는 쾌감이 있었다. 이에 곁가지로 작동하는 유머가 제 값을 톡톡히 했다. <토르 : 라그나로크>가 호평받았던 이유가 굳이 유머에만 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근데 이를 잇고 싶었는지 재미없지도 않은데 그렇게 재미있지도 않은, 타율 낮은 루머를 좀 자주 해서 물리는 감이 있다. 코르그 캐릭터의 대사 1/2로 줄여도 이 영화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이 코르그가 하는 유머는 1절 못하고 2,3,4,5 절하는 주위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는 정도다.
또한 토르 역시 말이 너무 많다. 이 역시 전작 3편에서의 장점을 어설프계 승계하려다가 만들어진 단점인 것 같다. 동생도 잃고 아버지도 잃고 한 눈도 잃을 뻔하고 거의 모든 걸 잃을 뻔했던 가련한 삶의 토르. 뭐 이렇다고 해서 매일 똥 씹으며 살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근데 좀 진중해야 할 때 진중해질 필요는 있다. 이 적당한 선이 없이 불필요하게 말이 너무 많다. 아이언맨도 익살스러울 땐 익살스럽다가 외로운 내면 연기를 해야 할 땐 선을 지켰다. 토르는 그게 없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만큼의 어마어마한 능력자도 아닌 탓에 이런 단점이 더더욱 도드라진다.
근데 티켓값은 해
단점을 쭉 이야기했지만 영화관에서 또 못 볼 영화는 아니다. 난 재밌었다. 몇몇 단점이 눈에 띈 것도 맞다. 그러나 은근히 웃긴 유머와 마이티 토르/신 도살자 고르/발키리/토르 네 인물의 간지, 또 건즈 앤 로지스를 위시로 한 빵빵한 BGM 선택은 '역시 마블이다'라고 생각하기 충분하다. 그러니까, 영화는 대중성 있는 소재를 골랐고 사실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단점이 돋보이는 이유는 기존에 이런 소재들을 골랐던 영화에서 더 발전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앞에서 쓴 액션 영화로서의 장점도 분명하고 두 캐릭터의 사랑이야기를 보여줬다는 부분에서도 나름의 이야기 전개가 확실하니 극장에서 보지 말아야 할 영화는 또 아닌 것 같다. 시사회 평도 별로고 CGV 에그 지수도 별로라 '헐' 싶은 분들도 있겠지만 친구, 연인들과 함께 시원한 극장에서 즐거운 데이트를 하기에는 역시 충분하다. 엄청 잘 만든 수작도 아니고 망작도 아닌 극장에서 보기 좋은 영화다. 그냥 우리가 영화관에 가서 좋은 시간 보내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개봉 전에 <탑건 : 메버릭>과 <헤어질 결심>, 이, 2주 있다가 <외계+인>이라는 안 좋은 대진표가 있다 하더라도 극장 한번 더 가시는 건 그렇게 안 좋은 선택이 아닐 것이다.
쿠키는 보고 가셔요
사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영화 끝까지 봐야 한다. 이 영화의 주요 소재 중 하나는 역시 마블 히어로 중 한 캐릭터의 주요 챕터라는 점이다. 이 것은 후의 마블 영화와 드라마에서 적지 않게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쿠키가 굉장히 중요할 것으로 예상이 된다. 일단 첫 번째 쿠키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이 인물이 원작 상으로는 선역으로 보인다. 그러나 윈터 솔저처럼 후에 반동 인물로 활약할 가능성이 있으니 이 인물이 왜 등장할까? 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도 영화의 감상 포인트중 하나다. 두 번째 쿠키는 사실 생각해보면 '굳이?' 싶다. 그러나 글쓴이의 생각은 현재 페이즈 4가 이어가고 있는 주요 키워드를 보여주기 위해 이 장면을 넣은 게 아닐까 싶다. 둘 다 앞으로의 MCU에 중요하게 작용할 이야기니 극장에 가신 분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시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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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마블이 오답노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최근 마블 스튜디오 성적이 부진했던 것, 특히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개봉하는 작품들 거의 모두 마블을 좋아하는 팬들에게도, 영화를 좋아하는 씨네필들에게도, 평단에게도 실망감을 선사한 것은 통계적으로도 볼 수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억지스러운 PC주의, PC주의가 들어간 영화는 무조건 실패한다.'와 같은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 물론 마블이 새로운 장을 열면서 전과는 또다른, 조금 더 깊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그 과정에서 PC주의를 영화 속에 넣은 것으로 추측되나, 의도가 어찌되었든 모든 이들에게 실망감을 사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마블의 이러한 연이은 실패의 이유에 PC주의에 대한 무분별한 탓, 무조건적인 비난은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마블이 지금처럼 부진한 성적을 받고 있는 데엔 '설득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한다. 단순 우주에서 다중 우주로 뻗어져나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설득 못 시켜서, 세대 교체를 하는 과정에서 관객들에게 새로운 배우, 새로운 캐릭터가 필요했던 이유에 대해서 설득하지 못해서, 영화팬들에게 영화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OTT 서비스를 사용해서 자신들의 이야기 템포를 따라와줄 것을 설득시키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마치 마블의 지난 시간들을 반성하고, 오답노트를 작성하면서 본인들의 과오를 하나씩 수정해나가는 영화로 보인다. 설득력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그 점을 보완하고, OTT 서비스를 무조건적으로 강요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하고 싶게 만드는, 마치 마블의 영광스러웠던 시대의 희망 의 뿌리를 보는 것 같은 작품이었다.
영화의 이야기는 물론 마블 시리즈의 한 작품이기 때문에 당연히 전작들의 이야기에서 이어지고, 디즈니 플러스 시리즈 작품들에서도 이어진다. 마블 스튜디오 또한 영화 <아이언맨1> 개봉 이후 1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그동안 쌓여왔던 작품들이 꽤 많고, 또 그만큼 이야기가 매우 깊어졌다. 이에 더해, 디즈니 플러스 시리즈가 가세해 마블 스튜디오의 전반적인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있어 그 양은 갈 수록 비대해졌다. 그렇기에 최근 많은 이들이 마블 영화가 개봉한다고 하면 설레는 기대보다 "전작들 못 봤는데, 못 따라가면 어떡하지? 돈 낭비하는 거 아니야?"라는 우려 섞인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 점을 과소평가했던 것인지, 실제로 최근 마블 스튜디오는 이런 점에서 날 선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를 드디어 깨달은 것인지,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작품 내에 전작들의 설정들을 친절하고, 설득력있게 제시했고, 전작들을 보지 않았던 관객들에게도, 전작들을 모두 섭렵한 관객들에게도 꽤나 만족스러운 작품을 제시했다. 또한 이전 작품들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매력까지도 불어 넣어, 이전 작품들에 대한 반성문만이 아닌 개선과 포부가 담긴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 액션 영화에 비법 양념을 더해 마블만의 맛을 내다.
장르가 액션인 영화에서 가장 실망스러울 때는 바로 액션마저 별로일 때이다. 액션 장르 영화에서 이야기가 아무리 엉망이어도 액션이 수준급이라면, 최악은 면할 수 있는 것이 액션 장르의 힘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전에 먹어봤던 맛있는 맛의 액션에 새로운 맛을 한 숟갈 더한다. 작품 속 등장하는 주인공 "캡틴 아메리카"는 이전 작품들의 "스티브 로저스"의 캡틴이 아니라 "팔콘"의 캡틴이기 때문에, 전작들의 시원하고 파워풀한 액션씬보다는 윙슈트를 이용한 화려한 곡예비행과 날개 및 기타 파츠들을 이용한 볼거리 많은 액션을 보여준다. 또한 빌런으로서 2008년 작품,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에 등장한 "사무엘 스턴스"와 "썬더볼트 로스"이자 "레드 헐크"를 등장시키는데, "캡틴 아메리카"의 아쉬운 파워풀한 액션을 "레드 헐크"가 채워준다는 데에서 빌런과 히어로이지만 작품의 깊이감을 위해 상보적인 존재로서 장면들을 만들어간다. 또한 '서펀트 소사이어티'라는 새로운 집단을 등장시키면서 "캡틴 아메리카"의 액션을 선보이기 위한 발사대로서 꽤 좋은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는 또한 영화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스파이물, 추리물과 같은 장르적 특징을 띄기도 한다.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억울한 이의 누명을 벗겨주어야 한다는 "캡틴 아메리카"의 사명감과 친구와의 의리로 임무를 수행하는데, 여느 스파이 장르 영화가 그렇듯 정부와의 갈등을 보여주게 된다. 또한 단순 빌런과 입체적인 면을 지닌 빌런을 공존시키고, 빌런의 등장을 지속적으로 암시하면서 극의 긴장감을 더해갔다. 이 과정에서 "캡틴 아메리카"가 슈트를 입지 않은 채 맨몸 액션을 선보이는데, 별다른 초능력은 없지만, 영웅으로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강력한 악당들에게 맡서는 한 인간의 의로운 모습을 영화는 강조한다.
마블 시리즈 내에서 하늘을 날 수 있는 인물들은 많지만 실제로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액션을 펼치고, 임무를 수행했던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영화는 그동안 못했던 한을 푸는 것인지, 고공 액션을 굉장히 훌륭하게 선보이고, 그의 슈트를 최대한 활용한 액션씬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마블의 창의력 또한 엿볼 수 있었다. 액션의 화려함, 그 창의성을 더욱 돋보이기 위해 중간 슬로우 모션을 활용하였는데, 이 또한 멋있으면서 재밌게 다가왔고, 이를 남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충분히 활용할 가치가 있었다 보여진다.
'팔콘'의 "캡틴 아메리카"는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팔콘과 윈터솔져>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때부터 그가 "캡틴 아메리카"가 된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의 걱정거리였다. "갈수록 강력했지는 빌런들을 아무리 방패와 최첨단 윙슈트가 있다고 한들 한낱 인간에 불과한 영웅이 이길 수 있을까?" 영화는 이런 의문을 부정하거나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맞서 싸운다. 영화 속엔 '혈청 맞을걸'와 같은 대사가 빈번히 등장한다. 작품 내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스스로도 자신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아 그 한계에 아쉬움을 표하고, 영화 자체적으로도 그의 갈비뼈가 부려졌다는 대사를 빈번히 사용하거나, 팔에 깁스를 한 것을 보여주면서 히어로 영화에서 잘 볼 수 없었던 히어로의 신체적 아픔을 드러내는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을 히어로에 대한 응원과 공감으로 승화시키고, 힘이 강력해서 영웅인게 아니라 마음과 정신이 영웅이기 때문에 영웅인 인물에게 그를 기대하게 한다.
- 마블이 생각했던 '영웅이란', 소를 잃은 후에야 설득의 시간을 가지다.
앞서 이야기 했듯 영화는 "캡틴 아메리카"를 강력한 영웅일 때에는 멋지고, 힘쎈 인물처럼 묘사하지만, 슈트나 방패가 없을 때엔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점을 굉장히 의도적이고,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심지어 영화의 종반부 마지막 액션씬에선 "레드 헐크"에게 붙잡혀 날개를 뜯기는 "캡틴 아메리카"는 영웅에게 좀처럼 들기 힘든 감정인 '불쌍함'이 생각났다. 영화는 영웅의 어쩌면 나약해보일 수 있는 장면을 과감하게 보여주면서 단순히 힘이 세거나, 무술을 잘하거나, 최고의 기술력이 있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직접적으로 응한다. "스티브 로저스"의 캡틴 아메리카와 "팔콘"의 캡틴 아메리카를 비교하면서 앞선 이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희망을 주었다면, 그는 사람들이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는 대사를 통해, 본인들이 해석한 "캡틴 아메리카"를 관객들에게 설득시킨다. 또한 "캡틴 아메리카"의 불굴의 의지를 언급하면서 그가 영웅인 이유를 대사를 통해 설명하는데, 이 또한 관객들의 우려와 걱정을 아주 말끔하게 씻어내는 좋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마블은 앞선 작품들에서 관객들의 걱정과 우려를 어찌 보면 이해해줬으면 하는 식의 태도를 갖췄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은 만들고 싶은 세계관을 만들테니 이를 그저 관객들이 이해하고, 따라만 와줬으면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서 말이다. 하지만 본 작품을 통해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선 이해하는 게 아니라 관객들을 설득시키고, 그들의 손을 붙잡고 세계관을 안내시켜야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영화는 또한 이야기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의 플롯을 곁들였다. 영화 <이터널스> 이후 등장한 새로운 광물을 두고 세계 강국들이 이를 차지하기 위해 협의하고, 조약을 맺으려 하며, 광물 때문에 전쟁까지도 이어질 뻔했던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을 제시하는데, 이는 실제 강국들의 석유와 석탄을 두고 경쟁했던 시기를 다루는 것 같아 서사의 깊이감이 더해졌다. 그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의 눈치싸움, 비자금을 사용했다는 정황 등의 이야기들을 히어로 영화에 접목시켰으며, 이를 "캡틴 아메리카"가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직접 투입하여 몸을 던져 싸우기도 하면서 동시에 작중 빌런이자 누구보다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인물의 입체적인 면을 덧붙여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했다.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이 묘미는 단순히 나쁜 이가 세상을 어지럽히자 조국의 영웅이 무찔러 해결한다는 데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기본 바탕에 '친구', '가족', '스파이', '신념과 의지' 등을 붙인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본 작품은 "캡틴 아메리카"의 사이드킥을 통해 친구를, "썬더볼츠 로스"를 통해 가족과 최종 빌런의 묘략에도 조국에 대한 신념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늦은 것이다. 빨리 시작하길 바란다."라는 개그맨 박명수의 명언 모음집 중 하나가 생각난다. 어쩌면 마블은 정말 늦은 것일지 모른다. 너무 많은 팬들이 등을 돌렸고, 팬 유망주들 또한 너무 높은 진입장벽으로 인해 나서지 못하고 있고, 평단마저 더이상 마블 영화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필자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말을 달리 생각한다. 잃었더라도 똑같은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 외양간을 고치는 점에 위안을 보낸다는 입장이다.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가 완벽히 장점만을 지닌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 속도가 너무 빨랐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그 메시지들이 너무도 의도적이라 부담스러우면서 동시에 그 나머지 점들을 챙기지는 못했다는 장점이자 단점도 있었고, 영화의 종반부를 너무 성급하게 끝낸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럼에도 본 작품을 통해 그들이 드디어 외양간을 고치려는 의도를 볼 수 있었고, 스스로 오답노트를 작성하면서 곧 있을 최종장을 향해 열심히 해보겠다는 의지 또한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다시 필자는 마블에게 희망을 걸고, 그들의 행보에 기대를 걸어본다.
어느날 친구가 필자에게 아직도 마블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냐고 물어본 적 있다. 이에 필자는 아직 머리를 밀봉하기 전이라고 대답했다. 아직 필자는 머리를 밀봉하고 싶지 않다. 마블의 그간 행보가 맘에 들어서도, 그들의 연이은 악수를 무조건 응원해서도 아니다. 그저 마블 스튜디오 작품엔 필자의 어린 시절이 담겨있고, 함께 성장해나갔다는 생각에 메타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블은 이 점을 알아줬으면 한다. 아직 필자와 같은 팬들이 남아있음을 알아줬으면 한다. 그리고 이 팬들을 더이상 실망시키지 않아줬으면 한다. 그들의 행보를 꾸준히, 계속해서, 아직까지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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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거진에 담긴 따뜻한 인생 한 편,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 (The French Dispatch, 2021)
개봉일 : 2021.11.18. (한국 기준)
감독 : 웨스 앤더슨
출연 : 틸다 스윈튼, 프란시스 맥도맨드, 빌 머레이, 제프리 라이트, 애드리언 브로디, 베니시오 델 토로, 오웬 윌슨, 레아 세이두, 티모시 샬라메, 리나 쿠드리
매거진에 담긴 따뜻한 인생 한 편,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영화
국내에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가장 유명한 감독, 웨스 앤더슨. <개들의 섬> 이후 3년 만에 공개된 그의 신작 <프렌치 디스패치>는 이제껏 봐왔던 그의 작품 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가장 닮아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앞서 공개된 <프렌치 디스패치>의 배경 일러스트와 여러 스틸컷들을 보자마자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호텔과 색감이 자연스럽게 연관되어 떠올랐고, 이 영화는 ‘가장 웨스 앤더슨스러운 영화’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아주 행복할 만큼 착-맞아떨어졌다.
이 두 작품은 외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웨스 앤더슨 감독이 담아낸 작품 속 메시지 또한 서로 닮아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구스타브와 제로의 우정, 오랜 시간 한 장소를 지켜낸 그들의 인생에 대한 존중을 표하는 작품이라면 <프렌치 디스패치>는 가상의 매거진인 ‘프렌치 디스패치’를 운영했던 편집장 아서와 매거진에 글을 기고한 작가들. 즉 열정과 따뜻한 마음을 지닌 저널리스트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다.
글을 사랑하고, 글을 쓰는 사람을 존중하며 오랜 시간 ‘프렌치 디스패치’라는 주간지를 만들어온 편집장 아서와 저명한 필진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는 프렌치 디스패치의 마지막 발행을 앞두고 시작된다. ‘내가 죽으면 매거진도 발행을 중지한다.’라는 아서의 유언을 따라 프렌치 디스패치라는 매거진 또한 죽음(마지막 발행)을 준비하게 된다. 오래 이어져온 길고 긴 매거진의 역사가 끝나는 기념적인 마지막 발행본에 어떤 특종을 실을 것인가. 편집장실에 모인 저널리스트들은 각자의 특종을 이야기하며 고민한다.
웨스 앤더슨스러운 영화
‘웨스 앤더슨스럽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을 전부 다 보지 않고 아주 일부만 봤다 하더라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확 체감이 될 것이다. 이전까진 ‘웨스 앤더슨스러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두 가지만 추천한다면 <로얄 테넌바움>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이야기했는데,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고 나선 생각이 바뀌었다. <프렌치 디스패치>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그만큼 이 영화는 ‘웨스 앤더슨스러움’의 끝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감각이 엿보이는 색감과 이야기의 구성과 더불어 배우들의 열연과 매력 또한 이 영화의 ‘웨스 앤더슨스러움’을 가득 충전한다. 웨스 앤더슨 사단이라고도 불리는 빌 머레이, 애드리언 브로디, 오웬 윌슨, 틸다 스윈튼 배우와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통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의 색감에 완벽하게 물든 레아 세이두, 티모시 샬라메, 리나 쿠드리, 제프리 라이트 배우 등. 훌륭한 배우들이 웨스 앤더슨 감독이 그린 아름다운 세계를 가득 채운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는 매거진의 특성을 알맞게 살린 영화로, 각각의 주제를 가진 4개의 챕터로 이뤄진 옴니버스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저널리스트들이 준비한 에세이와 3가지 특종. 그리고 쇠락과 사망에 대한 챕터까지.
사건들 사이에 연관성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구성을 다소 산만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 부분이 더 큰 장점으로 와닿았다. 필진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색다른 세상 이야기를 보며 여러 세계를 한곳에서 만나보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모든 이야기가 매력적이었고, 하나의 이야기를 볼 때마다 “아.. 저런 미학적 세계에서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 “내 시간을 저 세계에 넣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매번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저 세계에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고)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1회차 관람이 아닌 다회 관람을 추천한다. 1회차 관람 때는 초반부에 와르르 쏟아지는 정보량과 수많은 인물들, 눈을 깜빡이기 아까울 만큼 아름다운 요소들로 가득찬 화면에 정신이 혼미했는데, 여러 번 반복해 보면서 그제서야 각 캐릭터의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무심하게 ‘No Crying’ 던지던 아서 편집장의 작은 행동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며 영화의 엔딩을 더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 담긴 모든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 영화는 충분히 관람할 가치가 있다. 영화에 담긴 색감과 미술 장치들, 컷의 구성, 캐릭터들의 디테일 등을 눈에 담기만 하더라도 엄청난 영감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 언제 멈추든 상관없이 모든 순간이 작품이다.
프렌치 디스패치 시놉시스
20세기 초 프랑스에 위치한 오래된 가상의 도시 블라제 다양한 사건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미국 매거진 ‘프렌치 디스패치’ 어느 날, 갑작스러운 편집장의 죽음으로 최정예 저널리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마지막 발행본에 실을 4개의 특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당신을 매료시킬 마지막 기사가 지금 공개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도시의 성쇠, 희로애락. 모든 것을 함께 한 프렌치 디스패치
매거진 프렌치 디스패치는 아서의 편집장 부임과 함께 '피크닉' 대신 '프렌치 디스패치'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이 매거진은 아서와 함께 탄생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마지막을 맞이한다. 많은 사람들의 희로애락과 도시의 여러 이야기를 담은 프렌치 디스패치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준비를 시작한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도시의 성장과 함께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모아 한곳에 엮어낸다.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훑어보는 도시 여행기를 시작으로 정신 병동에 갇힌 천재 예술가의 비밀, 이 도시에 오랜 시간 이어져온 공화당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겁 없이 커다란 게임을 시작한 청년들의 도전기, 아주 오랜만에 현장으로 돌아온 경찰서장의 아들 납치 사건,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엮어낼 수 있도록 매거진을 만들어준 훌륭한 저널리스트 아서의 일대기까지. 프렌치 디스패치 매거진은 아서와 이 도시의 일대기이자 글을 쓰는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 준 버팀목이다.
알고 보면 다정한 편집장 아서와 그를 따르는 필진들
세 편의 특종과 부록에 해당하는 도시 에세이 한편으로 이뤄진 이야기가 착착 줄 맞춰 지나가고,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해당 호를 준비하며 필진들의 글을 읽는 아서의 모습이 함께 보인다
무심한 표정으로 'No Crying'을 강조하던 아서의 모습을 보면 다정함 같은 건 없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이만큼 따스한 마음을 가진 편집장이 또 없다. 그리고 필진들도 자연스레 아서의 말을 따른다.
아서는 원고의 양이 예상을 훌쩍 웃돈다는 이야기를 듣고 원고를 쳐내는 대신, 매거진 인쇄에 들어갈 용지의 부수를 늘리는 선택을 하고, 마감을 앞둔 채 문밖으로 나오지 않는 작가를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린다.
말없이 타자를 두드리고 있는 크레멘츠 옆에 쌓인 몇 장의 바삭한 토스트, 조심스레 들리던 아서의 노크 소리와 적당한 거리에 위치한 의자. 손짓을 한 번 한 후 불편한 기색 없이 타자기를 두드리는 크레멘츠. 다른 기자가 제안한 수정사항은 바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아서의 한마디는 바로 수긍하는 세저랙. 낯선 도시의 차가운 창살 안으로 건네진 입사 지원서와 한 권의 책. 매거진의 발행 중지와 함께 문제없을 만큼 챙겨주라는 보너스에 대한 언급까지. 편견 없이 따뜻한 편집장의 시선이 느껴지는 요소들이 영화 곳곳에 스며있다.
글과 함께한 일생
<프렌치 디스패치>는 도시의 수많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오랜 시간 같은 자리를 지켜온 친구 같은 매거진 '프렌치 디스패치'와 그를 지탱했던 저널리스트들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매거진의 탄생과 죽음을 모두 함께한 편집장 아서와 그를 따랐던 훌륭한 작가들. 아서의 죽음을 확인하고 한곳에 모인 작가들은 마지막 기사로 편집장의 부고문을 쓰기로 결정한다. 매거진이 만들어지기 전 그의 삶부터 프렌치 디스패치의 탄생과 편집장으로서의 행보까지. 각자가 보고 느껴온 아서의 이야기가 편집장실 안에 가득 차고, 탁탁-경쾌한 타자기의 소리와 함께 부고문이 조금씩 완성된다.
아서는 평생을 글을 읽고, 모으며 작가들과 함께 살아왔다. 글과 사람을 사랑하던 저널리스트의 죽음은 또 한편의 글이 되어 프렌치 디스패치에 실린다. 아서의 일대기는 발행이 중지된 매거진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그를 사랑하던 작가들이 써낸 글 속에서 말이다.
부고문이 실린 마지막 발행본을 함께 읽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프렌치 디스패치가 발행되는 저 가상의 도시에 살아봤다면 참 즐거웠을 텐데, 괜스레 마음이 찡해지는 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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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기지 않지만 현실로 다가올 수 있는 이야기 돈 룩 업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듣지 않으면 진실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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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발견은 위기의 발견이 됩니다.
지구에 큰 위기가 닥쳤고 그것을 처음 알아챈 과학자들은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명문대의 과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선거에 지장이 갈까 걱정하기 바쁜 정부를 뒤로하고 세상에 알려보지만 정치와 자극적인 이미지로 뒤덮인 세상은 실체적 진실이 눈 앞에 있는데도 '돈 룩 업'이라고 외칠 뿐이었죠.
그렇게 묻혀버린 진실은 눈깜짝할새없이 현실로 다가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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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을 넘는 우리의 행동력은 소수에서 다수로 옮겨가기까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이 세상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눈 앞의 이미지와 쇼의 즐거움만을 쫓고 지도자는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그런 세상이 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여서 더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아마 다른 지구가 있다고 해도 여기서 생존한 인간들이 있는 한 같은 세상이지 않을까요.
적어도 우린 '룩 업' 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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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인간 되는 힘, 상상력
SYNOPSIS.
“당신은 몇 번째 미키입니까?”
친구 ‘티모’와 함께 차린 마카롱 가게가 쫄딱 망해 거액의 빚을 지고 못 갚으면 죽이겠다는 사채업자를 피해 지구를 떠나야 하는 ‘미키’. 기술이 없는 그는, 정치인 ‘마셜’의 얼음행성 개척단에서 위험한 일을 도맡고,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는 익스펜더블로 지원한다. 4년의 항해와 얼음행성 니플하임에 도착한 뒤에도 늘 ‘미키’를 지켜준 여자친구 ‘나샤’. 그와 함께, ‘미키’는 반복되는 죽음과 출력의 사이클에도 익숙해진다. 그러나 ‘미키 17’이 얼음행성의 생명체인 ‘크리퍼’와 만난 후 죽을 위기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미키 18’이 프린트되어 있다. 행성 당 1명만 허용된 익스펜더블이 둘이 된 ‘멀티플’ 상황.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현실 속에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자알 죽고, 내일 만나”
POINT.
✔️ 봉준호 감독의 신작. 다른 말이 필요할까요?
✔️ 시작은 하이틴 스타였지만 어느새 모두가 믿고 보는 배우가 되어 있는 로버트 패틴슨. 그뿐 아니라 토니 콜레트, 마크 러팔로, 나오미 애키와 스티븐 연까지... 매력 있는 배우들이 가득 등장합니다.
✔️ 감독의 전작 중 <마더>나 <살인의 추억>보다는 <옥자>와 <설국열차>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
✔️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수많은 노동자 특히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청년들을 언급했는데요. 막상 뚜껑을 열어본 사람들은 노동자보다 독재자 쪽을 실재와 많이 연결하는 분위기...�
*<미키17>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후에 읽어주셔요.
봉준호가 '명징하게 직조'하는 세계
<미키17>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감독의 (영어 영화) 전작인 <옥자>와 <설국열차>를 떠올린다. 비록 입 안은 한강 <괴물> 쪽을 더 닮아 있긴 하지만 아무튼 옥자를 연상케 하는 친근한 외계 괴수가 등장하고, 망해가는 지구를 떠나 얼음으로 뒤덮인 행성을 '개척'하러 떠난 우주선 내부는 어쩐지 얼음으로 뒤덮인 지구의 어떤 기차를 떠오르게 하니까. 한국 사회의 어떤 지점을 송곳처럼 좁고 집요한 시각으로 후비는 대신, 가상의 세계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범세계적인 주제를 두루두루 두드리는 작품들이다. 봉준호 감독의 세계에서 <살인의 추억>이나 <마더> 계열의 영화들을 선호한다면, <미키17>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있다. 한결 독기가 빠진 느낌, 한결 초점이 여러 군데로 분산된 느낌에서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는 반응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이 마음에 들었다. 한국 사회에 사는 사람으로서 그가 후벼파는 세계는 너무 정확하고 그래서 너무 보기 괴로웠으므로 (이는 공포영화를 잘 못 보는 마음에 공감성 수치 비슷한 마음을 뒤섞은 것이다) 한결 넓게 두드리는 세계를 보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그가 '명징하게 직조'해낸 세계에서 다루는 주제 의식도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미키17>은 봉준호 감독 작품으로는 놀랍게도 사랑 영화다. 놀리는 거 아니고 진짜로 사랑 영화.
미키는 종이처럼 계속해서 재출력되는 '인간'이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SPC 계열사) 제빵 기계에" 사고를 당한 이들을 말하며 "나열한 사건의 그 자리에 또 다른 분들이 일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미키가 복제되는 것이 판타지 같지만 김군 뒤에 박군이, 그 뒤에 윤양이... 일자리는 유지되고 인간이 계속 교체되"는 현실을 이야기한 바 있다.
친구와 마카롱 가게를 냈다가 쫄딱 망한 미키의 이야기는, 숱하게 유행 따라 깔렸다가 사라지는 가게 종목들 (<기생충>의 대만 카스테라는 물론, 그 이전에는 커피 번이나 슈니발렌 과자, 그 이후에는 탕후루가 있다.)을 생각나게 하는 동시에, 4대 보험도 되지 않는 다양한 일자리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는 망한 자영업자이며, 플랫폼 노동자이고... 무엇보다 자신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고용주가 그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은 작업장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다.
미키1에서 미키15까지의 시간은 영화에서 매우 빠르게 처리되지만, 그래서 마치 우주선의 탐험 목적과 우주선이 부여받은 임무를 스케치하는 장면처럼 느껴질 정도지만, 그 과정에서 미키가 인간이라는 감각은 점점 희석된다. 망한 자영업자이자 4대 보험 안되는 노동자였던 그에게, 생체 실험 피해자라는 타이틀이 추가된다. 이쯤 되면 그의 일은 더 이상 노동법상 분류하는 노동에 속하지 않는다. 지구를 빠져나간 우주선에게 법을 들이대는 것도 우습지만,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되는... 근로기준법상 그렇다. 근로기준법 제2조 1항에서 "근로"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으나, 죽음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의 존재와 그의 노동 모두, 법 바깥의 무엇이 된다.
미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극중에서 많은 인물들이 미키에게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고 묻는다. 제니퍼를 생각해서 머뭇거리면서도 어렵게 말을 꺼내는 카이 정도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딱히 대답을 듣고 싶어서 물어본 질문이 아니다. 존재와 노동이 모두 법망 안에 있는 그들에게, 그 질문은 미키와 자신 사이의 선을 확인하는 질문이다. 다시 말해, 미키의 존재를 한 번 더 밀어내는 질문이다. 똑같은 우주선을 타고 있지만, 너는 여기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선포, 미키의 이름을 지워내는 명명(命名)이다.
여기서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상 (...) 타인의 환대 속에서만 자신의 사회적 성원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키17은 필연적으로 무력하다. 절대 다수가 그에게 성원권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정체성 투쟁의 핵심에는 모욕에 대한 저항이 있"고, 모독은 ,"그들을 사물로,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모독(mortification)의 어원에 죽음mort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죽는 건 어떤 느낌이냐는 모욕 앞에 미키는 저항할 수 없다. 그는 다만 짓눌려, 침묵으로 그 시간을 묵묵히 넘길 뿐이다. 이러한 폭력적 구조에 오랫동안 짓눌려온 미키는 크리퍼가 자신을 구해 주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한다. 구조에 억눌린 사람이 으레 그렇듯,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는다.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며, 사회적으로도 계속 밀어내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미키는 일종의 부관참시를 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 태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마셜과 일파 부부다. 사실 이들이 미키만을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은 (어쩐지 현실 곳곳에서 많이 본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름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잘 드러난다. 제니퍼의 사망 앞에서 그들이 보인 반응은 '제니퍼'라는 개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게 아니라 '자궁을 가진 가임기 여성'의 죽음을 아까워 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발견된 생명체에게는 '크리퍼'라는 집합명사를 붙인다. 그들에게는 자기들 두 사람 외 모든 인물들이 집합명사로 존재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유바바처럼, 이들은 우주선에서 타인의 이름을 들이마셔 때로는 지우고 때로는 악마화한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미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나샤 그리고 미키18이다. 미키1에서 미키17까지의 우주선의 탐험 역사와 과제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면서 관객이 이 모든 미키들을 한 사람으로 인지할 때, 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미키18이 등장한다. 마치 <서브스턴스>에서처럼 힘주어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다"라고 말해 주어야만 할 것 같은 색깔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와 수가 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미키17과 미키18 또한 한 사람이다. 체제에 순응해야 했고, 법 바깥의 존재인 자신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미키17과, 그런 미키17 안에 어딘가 쭈그러져 있었을 다른 마음이 전면에 나선 미키18이 있을 뿐.
그리고 그 모든 미키를 순정으로 끌어안은 나샤가 있다. 특히나 피에타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 정말 아름다워 울컥했다. 나샤에게 있어 미키의 존재가 법 안에 포용되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미키를 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계속 마주하는 것이 괴롭지 않았을 리 없음에도 그를 혼자 두지 않았다는 점이 너무 아름다운 순정이어서.
인간성이 메마른 지옥도에서 우리를 구하는 건 결국 사랑이다. 그것이 독점적 연애 관계든, 무어라 정의 내리기 이전에 상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든, 내가 나를 위하는 마음이든. 오늘의 내가 하루를 살아가기 전에, 나를 끌어안고 내 아픔을 애정과 안타까움 어린 시선으로 지켜본 사랑이 있고. 오늘의 내가 되기까지 잘 먹고 애쓰며 살아낸 과거의 내가 있다. 그리고 이런 내가 다가오기를 미래에서 (조금을 나를 답답해 하면서도) 기다리고 있을, 미래의 나도 있다. 이 모든 존재들의 사랑으로, 우리는 오늘을 산다.
인간이 인간 되는 힘, 상상력
하지만 모든 사람과 자기애 같은 혹은 연인에 대한 사랑 같은 깊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인간성의 최소선을 우리는 도로시에게서 볼 수 있다. 나 자신과 연인. 가장 가까운 인물들을 제외하고 미키의 목소리, 더 나아가 크리퍼의 목소리까지 들으며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일한 인물이자, 소통의 방식만 놓고 보면 마셜과 일파의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도로시는 크리퍼의 반응에서 그들이 대화를 시도할 가능성을 상상하는 인물이자, 미키를 인간으로 대하는 유일한 과학자다. 미키의 손이 잘려 나가도 '와 대박' 이러고 있는 다른 과학자들과 달리 (그들에게 미키의 신체는 사물화되어 있다), 미키의 수명이 10분인지 15분인지까지 살뜰하게 신경 쓰고 있는 유일한 과학자다. 타인을 사물화하지 않는다는 건, 타인의 입장을 상상해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로시가 과학자로서 가진 가장 큰 힘은 아마도 바로 이 상상력이 아닐까. 가능성을 상상하고,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며, 지금 없는 것들을 그려 볼 수 있는 능력. 돌아보면 영화에서 마셜과 일파가 만든 세계에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 인물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다. 철저하게 '소모품'으로 대우받고 죽어가는 미키와 함께하는 매일을 상상하는 나샤도, 독재자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미키18도.
결국 사랑도 소통도 그런 상상력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다 보면 제일 끔찍한 것도 제일 애틋한 것도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일 끔찍한 인간의 상태, 그저 인간성이 메말라 온 세상을 지옥도로 인지하는 상태를 벗어나려면, 소통이라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도 어디선가 다양한 의미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이런 상상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조코처럼 고함을 질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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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레의 차원을 넘어서라
인간은 몇 차원에 살고 있을까? 또한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는 얼만한 크기일까? 인간은 우주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SF소설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휴고상을 아시아 최초로 받은 류츠신의 <삼체>. 요새는 SF소재를 단순하게 미래에 대한 상상력, 혹은 판타지 수준에서 채용하는 소설과 영화들이 대부분이라면, <삼체>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영역, 차원을 계속해서 확장시켜 주고, 1,2,3부로 이어지면서 그 차원의 세계는 지수함수 그래프처럼 무한히 위로 올라가 버린다. 차원의 깊이가 우주만큼 깊고 넓어, 책을 다 읽고 다시 지구의 작은 집에 앉아있는 나를 인식하면 한없이 작아진 나를 느끼게 된다. <삼체>는 '삼체문제' 그 자체보다, 우주의 다차원을 다루며 차원과 차원사이에 일어나는 일, 고차원과 저차원의 인식, 차원끼리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삼체문제'는 그저 다차원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러면 <삼체>에서 보여주는 '삼체문제'란 무엇이며, 차원이란 무엇인가?
삼체문제
삼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세 물체를 말한다. '삼체문제'라는 것은 세 물체 간에 힘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그에 따라 세 물체는 어떤 궤도운동을 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인간은 삼체문제를 그다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즉 이체에 가까운 세상인 지구에 살고 있다. 태양계는 태양이 압도적인 질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궤도가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각각 행성의 위성들도 모성과 질량차이가 커서, 대부분 안정적으로 돌고 있다. 다만 지구의 위성인 달이 일반적인 위성보다 비정상적으로 커서 둘 궤도의 중심점이 지구 중심에서 좀 많이 비켜나 있기는 한데, 역시나 안정적이다. 태양계의 행성들은 평면적인 공전궤도면을 따라 비슷하게 움직이고 있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사는 태양계의 태양이 하나가 아니라 비슷한 크기 두 개인 쌍태양이라면, 행성들의 움직임은 이보다 더 복잡한 면을 그리게 될 것이다. 심지어 태양이 쌍성이 아니라 세 개여서 삼체가 된다면, 그 세 태양의 움직임은 계산이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이 이체세상에 살고 있다면, 삼체세상은 어떤 의미로는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세상인 셈이다. 더군다나 4체, 5체, 다체로 가게 되면 아예 궤도를 알아내기가 불가능하다. 양성자와 전자 한 개로 이루어진 가장 기초적인 원자인 수소 말고, 전자가 하나 더 늘어난 그 이후 원자부터는 궤도모델을 만들 수 없는 것도 그 이유다.
<삼체>에 나오는 삼체인들의 항성은 지구에서 대략 4광년 떨어진, 가장 가까운 항성들인 센타우르스의 알파성을 모티브로 했다. 알파성은 하나의 별인 줄 알았지만 관측결과 2개의 항성으로 된 쌍성계이고, 조금 더 태양과 가까운 프록시마 센타우리는 적색왜성이다. 이 세별은 서로 중력의 영향을 받는 삼연성계이다. 이 삼연성계에 생물이 사는 행성이 있다면, 거기에 사는 생명의 우주관은 우리와 아주 다를 것이다. 지구는 아주 오랫동안 일정하게 도는 달과 태양 때문에 하늘을 평면적인 둥근 천장이라고 생각하는 '천구'개념이 있었지만, 삼체운동을 하는 항성들이 하늘을 돌고 있다면 하늘을 처음부터 3차원 입체로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지구의 인간은 독특한 음양론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태양과 달의 크기가 우연히도 정확히 같아 보이기 때문에 생긴 철학이다. 이런 행성은 아마 삼체성계만큼 엄청나게 드물 것이다.
삼체의 궤도를 표현한 애니메이션. 너무 불규칙한 데다 항상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삼체문제가 아예 해가 없는 것은 아니고, 특수한 상황에서의 해는 밝혀졌다. 위는 동일한 질량, 각운동량이 없는 상황에서의 해 중 하나인 8자 모양의 해.
인식의 한계차원
1차원은 선, 2차원은 평면, 3차원은 입체. 우리는 흔히 인간은 3차원, 시간까지 더해서 4차원을 우리의 차원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건 인간이 우주에서 차지하고 있는 크기에 대한 제한적 차원이다. 우리는 인간세상이 입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주적인 위치에서 보면 거대한 지구라는 행성표면에 붙어살고 있는 2차원 생물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어떤 과학자들은 인간이 우주로 진출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차원을 진정한 3차원으로 한 단계 높여주는 행위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지구를 넘어서서 태양계도 하나의 점처럼 보이는 거대한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점도 벗어나지 못하는 0차원의 존재인 셈이다.
인간보다 거대한 차원이 아니라 작은 차원은 어떨까? '그래핀'은 탄소원자 한 겹의 배열로 이루어진 2차원 물질이다. 인간이 볼 때 그것은 2차원이다. 하지만 더 미시적 차원으로 들어가 보면 원자 속 에는 양성자와 전자가 존재하는 공간이 있다. 그보다 더 작게 들어가면 초끈이론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11차원이라고 하고, 여분의 차원은 작게 말려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우리보다 더 작은 차원들, 혹은 더 큰 차원들은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그저 우리는 지구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일 뿐이다.
차원에 대한 소설은 1884년 에드윈 A. 애보트의 <플랫랜드>가 가장 유명하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인 2차원 정사각형이 1차원과 3차원으로 갈 때의 묘사가 훌륭하다. <플랫 랜드>에 나온 바에 의하면, 2차원 생물은 상대방을 위에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원이든 사각형이든 삼각형이든 선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중간에 3차원 구가 나타나면, 선이 점점 커졌다가 작아지는 구의 단면만을 인식한다. 이 흥미로운 차원 간 세계의 설정은 <삼체> 전체에 깔려있다.
또한 인간이 지동설이 검증하는 과정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차원'에 대해 큰 교훈을 준다. 처음 지동설을 주장할 때, 교회에서는 무작정 천동설을 믿고 탄압한 게 아니다. 당시 신부들은 가장 머리가 좋은 엘리트 집단이었다. 지구가 태양의 궤도를 돈다면, 반대편에 있을 때 별들의 위치가 달라져서 연주시차가 나타나야 하지 않느냐는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인간의 관측기술로는 연주시차를 측정할 수 없었고, 별들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결국 지동설이 연주시차로 검증된 것은 19세기 들어서 망원경과 천체관측기구가 발달하고 나서다. 위에서 언급한 태양과 가장 가까운 항성계여서 연주시차가 가장 큰 센타우르스의 알파성 연주시차는 2/10000도이기 때문에, 맨눈으로는 전혀 관측할 수 없다.
최근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차원'에 대한 가장 큰 과학적 성과는 중력파의 검증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질량은 공간의 휘게 만드는데, 이것이 곧 중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질량에 변화가 생기면 그 시공간의 휘어짐이 빛의 속도로 파동처럼 전달되는데, 그것이 중력파다. 하지만 이 시공간의 휘어짐은 중력 변화에 비해 너무나도 작아서, 이 중력파를 검출하기 위한 장치 LIGO를 만들기 전까지 측정한다는 것은 꿈의 과학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시로 중력파를 검출하고 있고, 소설 <삼체>에는 나중에 중력파를 통신기술로 이용하는 장면도 나온다. 중력파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우리가 우주를 보는 눈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 한 차원 높은 우주를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우주에 대해서 너무나도 모른다. 우주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에 대해 아는 바는 전혀 없으며, 인간이 관측한 100년 남짓한 데이터로 우주의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긴 쉽지 않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과학들이 밑바닥부터 모두 허물어진다면, 우주의 별이 사실은 누군가 만들어놓은 스크린이어서 마음대로 깜빡일 수 있다면, 오늘부터 1+1이 2가 아니게 된다면, 인간은 벌레처럼 주저앉게 될 것이다. <삼체>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드라마 vs 소설
소설 <삼체>는 나왔을 때부터, 영상 매체로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다른 대하소설처럼 물량이 많고 이야기가 복잡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을 글로 풀어서 썼기 때문이다. 요즘 소설에 비하면 진행이 느리고 묘사가 많은 데다, 많은 부분을 이미 만들어진 클리셰를 거부하고 작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미래 세계를 새로 구축해 나간다. 요즘 SF작법으로 비유하자면 글 쓸 때 하지 말라는 짓은 다한 소설이나 다름없다. 만들기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 이걸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면 재미가 있긴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시즌1은 이런 부분에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엿보인다. 일단 중국인 위주로 흘러가는 1,2,3권의 주인공들을 '옥스퍼드 동기 과학자들'로 모두 한 곳에 모아놨다. 그중에도 주요 인물들은 중국인으로 유지하고, 3권의 주요 캐릭터인 토마스 웨이드가 다른 캐릭터들과 합쳐진 모습으로 등장해 매력을 뽐낸다. 게다가 소설대로 진행했으면 조금 느리고 지루할 수 있는 흐름을, 1,2,3부의 내용을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빠른 전개를 보여줬다. 그리고 일반인에게 어려울 수 있는 과학은 많이 간략화했다. 드라마는 소설보다 더 쉽고, 전개가 빠르며, 거기에 '영국 이민자들의 서사'를 추가로 부여해 더 글로벌한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너무 축약해 버려서, 인류 전체가 하는 다양한 고민들이나 캐릭터의 서사들은 많이 없어졌다. 특히 소설 2권의 주인공인 '뤄지'를 대체한 사울은 나중에도 굉장히 중요한 인물인데, 그의 가벼운 캐릭터가 많이 아쉽다. 원래 사울의 역할은 우주 사회학 교수로 극단적인 회의주의자에 가까운 인물이고, 상상력과 내면이 굉장히 강한 사람인데 그런 서사가 시즌 1 동안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다. 소설 3권의 주인공을 대체하는 진 청과 윌리엄 다우니의 서사만큼 쌓았으면 좋으련만.
드라마가 아직 시즌1 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전개나 주제, 철학까지 다루기는 어렵다. 하지만 등장하는 몇 가지 과학기술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짚고 넘어갈 수는 있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입자 가속기/카미오칸데
베라 예는 옥스퍼드 입자가속기에서 일하고 있다가, 멍한 표정으로 질문을 하고 뒤돌아 나가는데 금색 구슬이 가득 있는 거대한 구 모양의 공간에서 떨어져 자살한다. 이건 여러모로 전혀 맞지 않는 연출인데, 베라 예가 떨어져 죽는 곳은 카미오칸데라고 하는 일본의 중성미자 검출장치이기 때문이다. 입자가속기는 입자를 고속으로 운동하게 만들어서 충돌시켜 중성미자 등 다양한 입자들을 검출해 연구하는 곳인데, 거대한 도넛처럼 생겼다. 카미오칸데는 일본에 있는 우주에서 날아오는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장치다. 그냥 두 개가 같이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중성미자를 만드는 장치와 우주에서 오는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장치가 같이 있는 건 사실 말이 안 된다. 그건 지하철 옆에 지진계를 설치한 것처럼 이상한 짓이다. 아마 제작진이 그냥 멋으로 넣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중에 유럽 입자물리연구소-세른이 나오는데 정문에 파괴의 신인 시바신 동상이 있는 것은 진짜다. 실제로는 선물 받은 것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 때문에 입자가속기가 블랙홀을 만들어 세상을 파괴할 것이라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유럽의 강입자가속기 CERN에 있는 시바신
입자 가속기는 입자를 충돌시켜 연구하는 곳인데, 유럽의 CERN처럼 도시만 한 것도 있지만 정말 다양한 크기의 입자가속기가 있다. 우리나라의 원자력병원에도 사이클로트론이라는 원형 입자가속기가 한국 최초의 입자 가속기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입자로 PET촬영을 했었다. 입자가속기로 다양한 입자의 성질과 발견을 해왔고 쿼크나 힉스입자의 발견 등 아주 중요한 연구와 발견을 하는 장치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오는 실험결과가 누가 장난친 것처럼 모두 틀어진다면, 인간은 지금까지 헛된 것을 했다는 의미가 된다. 마치,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먹이를 주는 주인을 본 칠면조가 지금까지의 논리로 '이 시간에 먹이를 주러 오는 사람'이라는 합리적 추론을 했는데, 어느 날 먹이를 주는 줄 알았던 주인이 칠면조를 잡아 죽였고 그날은 추수감사절이라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지자(智子, Sophon)
위에서 언급했듯, 초끈이론-M이론에서는 세상이 11차원으로 이뤄져 있다고 할 때 다른 차원들은 작게 말려있다. 그 차원을 2차원으로 모두 펼친 다음, 그곳을 컴퓨터로 만들어 넣고 다시 차원을 말아 넣어 양성자로 만든 것이 지자이다. 전자, 양성자와 같은 소립자가 지혜를 가졌다 해서 智(지혜 지) 자를 붙여 지자(智子)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영어이름인 sophon도 지혜를 뜻하는 sophia를 붙여 만든 이름이다. 고차원을 저차원에 펼치면 전개도가 되는데, 차원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면 전개도의 모양도 아주 복잡해지며 펼쳤을 때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는 이론으로 만들어진 소립자 컴퓨터다. 이런 저차원 펼침, 고차원 말림, 차원과 차원이 만나는 것, 고차원이 저차원을 해부하고 들여다보는 것은 <삼체>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주요 소재다. 특히 지자가 가상현실에서 자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주고 다시 펼쳐졌던 양성자를 축소시키는데 그건 칼라비-야우 다양체의 모습이다. 칼라비-야우 다양체란 M이론의 대가인 에드워드 위튼이 말한 여분의 6차원을 시각화 한 형상이다.
6차원을 말아서 구현한 칼라비-야우 다양체
또한 지자는 쌍으로 만들어져, 양자 얽힘을 이용해 거리에 관계없이 4광년이나 떨어진 삼체 본대와 소통할 수 있다고 나온다. 이 부분이 과학 매니아들에게서도 오해받는 부분인데,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양자 얽힘으로는 빛보다 빠른 통신을 할 수 없다. 얽혀있는 양자의 하나의 상태를 확인하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얽힌 다른 양자의 상태가 반대로 나오는 것이 양자 얽힘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양자의 상태를 바꾼다고 해서 나머지가 변하는 건 아니다. 그저 관찰을 시작할 때의 상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미래에 양자 얽힘으로 무언가 통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진 작가의 상상력이다.
어떻게 이 지자는 사람의 눈에 카운트다운을 새기고, 별을 깜빡이게 만들고, 전 세계의 통신을 장악할 수 있을까? 지자는 양성자의 크기이므로 양자역학이 적용된다. 즉 어느 한 곳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하는 게 가능하며 질량이 0에 가까우므로 광속에 가깝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러기에 순간적으로 인간의 망막에서 별빛을 사라지게 하는 게 가능하고, 카운트다운을 망막에 새기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과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지금까진 전기로 하는 통신장치(스피커)가 필요하다.
혹여나 양자역학이 현대 물리학을 깨는 게 아니냐고 오해할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서 덧붙이면, 양자역학은 인간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뿐이지, 수학적으로는 너무도 명확한 현대물리학이다. 현대 과학은 이미 양자역학을 아주 잘 이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원자와 원자가 결합해 분자를 만들 때, 전자를 공유하는데 그것도 양자역학이다.
나노 섬유
나노 섬유는 나노미터 굵기의 섬유를 말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연구되어 온 분야로, 지금은 탄소나 아라미드, 금속 등 다양한 소재로 나노 섬유를 만들고 연구하고 있다. 나노미터가 얼마나 가는 것인가 하면, DNA가 3 나노미터의 굵기이고 탄소 나노튜브는 1 나노미터이다. 현재 개발된 탄소 나노튜브등은 철의 100배의 강도를 가졌지만, 원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무언가를 자르기보단 전기전달효율이 높고 작은 곳에 배치해 만들 수 있어서 초소형 회로나 가볍고 강한 섬유를 만드는데 주력하는 물질이다. 강도가 강하면 다이아몬드도 자를 수 있지만, 잘 휘어지지 않아 끊어지기가 쉽다. 또 드라마 <삼체>의 하이라이트인 '나노 섬유로 적들을 동강내기'에 나오는 것처럼 쉽지만은 않다. 배가 잘릴 것인지 섬유를 묶은 기둥이 먼저 잘릴 것인지도 여러 계산과 연구가 필요하다.
탄소 나노튜브는 2차원 물질인 그래핀을 말아서 만든다.
이 부분은 나노 섬유에 대한 과학도 과학이지만, 1차원 물질에 가까운 나노 섬유가 3차원 물질과 닿아서 파괴해 버리는 '차원의 맞닿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3차원 생물을 4차원의 생물이 들여다본다면, 3차원 생물이 2차원 생물을 위에서 바라본 것처럼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것이다. 지구인보다 고차원의 세상 - 삼체성계를 가진 곳에서 더 높은 차원의 과학을 가진 삼체인이 보기에, 비록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벌레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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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삼체>는 소설의 긴 흐름을 흥미 있게 각색해 연출했지만, 그래도 시즌1이 다 가도록 외계인이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아 의아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직 지구가 멸망하려면 400년이나 남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삼체>의 길고 긴 여정의 시작일 뿐이다. 다른 여타 이야기가 인간끼리 벌이던 함대전쟁을 빗대어 '외계인과의 전쟁'을 묘사하는 게 대부분이라면, <삼체>는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의 차원으로 이야기가 뻗어나간다.
동양에서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순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도 석가모니는 우주가 팽창했다 수축하는 것을 반복한다고 말한다. 예원제는 그저 모든 것을 끝장내려는 억하심정으로 삼체인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류에게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또한, 삼체인 들은 자신들의 항성계를 떠나 지구에 살려고 오는 것이지만, 이들도 이들 나름대로의 절박한 사정이 있다. 악은 악이 아니고, 선은 선이 아니다. 절대선과 절대악은 없다.
아직까지는 꽤나 잘 각색했다 생각하고, 스케일이 너무 작아지지 않게, 동양철학을 놓치지 않고 다음 시즌을 잘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왕좌의 게임> OST를 만들었던 라민 자와디의 <삼체> 메인 테마를 들으며 삼체인들을 기다려볼까. <삼체> 답게 3박자에 화음을 엇갈리게 넣어놔서 삼체성계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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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를 번역할 때, 영어로 3-body라고 하지 않고 중국어 발음인 Santi를 그대로 썼다. 단체를 만든 예원제가 중국인이라 그런 것이겠지만, 공교롭게도 Santi는 산타클로스의 애칭인 santy와 발음이 같다. <삼체> 드라마에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 비유로 중간에 산타클로스가 등장한다.
*지자가 동양인에 사무라이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인 이유는 자신의 이름이 智子이기 때문이다. 智子는 토모코라는 일본 여자이름이기도 하다. (영어로도 Sophia는 여자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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