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10-09 12:06:19
[BIFF 데일리] 다시 오지 않을 시절에게
영화 <우리들의 교복 시절> 리뷰
DIRECTOR. 촹칭션(CHUANG Ching-Shen)
CAST. 천옌페이(Yan-fei CHEN), 항첩여(Chloe XIANG), 치우이타이(Yitai CHIU) 외
PROGRAM NOTE.
1997년. 제1여고 입학시험에 실패한 아이는 엄마의 강압에 못 이겨, 제1여고의 야간 학생이 된다. 같은 교복을 입지만 명찰의 색이 다른 주야간의 학생들은 교실을 공유하는데, 아이는 주간 학생 민과 책상을 나눠쓰게 되면서 단짝 친구가 된다. 민과 함께 민의 교복을 입고 주간 학생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던 아이는 어느 날, 루커를 만나 미묘한 설렘을 느끼게 된다. 아련한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학업 성취도에 따른 계급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했던 그 시절의 학교를 배경으로, <우리들의 교복 시절>은 십 대들의 사랑과 우정, 좌절과 성장의 스토리를 담백하고 솜씨 좋게 풀어 간다. <침묵의 숲>(2020)으로 금마장 신인배우상을 수상한 진연비(천앤페이)를 비롯한 대만의 연기파 신인배우들이 주연을 맡아 풋풋한 성장 드라마를 완성했다. (박선영)

생각해 보면 조금은 이상한 시절이었다. 모두 똑같이 소중하다는 말이 교과서 속 혹은 박물관의 유리벽 속에나 존재하던 시절. 모두 똑같이 소중한 제일여고 학생이라면서 주간반과 야간반 학생들의 명찰 색깔을 다르게 하고, 거기에 굳이 태양과 달이라는 의미까지 부여해 달이 발광체인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 것이 정말로 "똑같은" 것일 리 없다. 역시나 주간반과 야간반에게는 입학 첫 날부터 사뭇 다른 공지사항이 주어진다.
입시를 대하는 1997년 대만 풍경은 한국 사람들에게도 꽤나 익숙하다. 구체적 양상은 조금씩 달라도 큼직한 정서만큼은 같다.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에게 한 "여자는 사범대가 제일이야" 같은 말, 당시 훨씬 어린 나이였던 나조차 심심찮게 들었던 말이니까. 어른이 되고, 그 시절 그 분들이 진심으로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 것임을 이따금 실감할 때조차, 내가 아이의 나이가 될 때까지 쭉 이어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느꼈던 갑갑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자꾸 사춘기의 아이들을 채근한다. 어른들의 마음도 이해는 간다. 당시 입시의 중요성이란,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기회로 보였을 테니까. 인생의 가치를 서열화하고, 그 계단에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 올라,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 추후의 노력으로 뒤집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 요즘은 많이 무너지고 있다지만 90년대와 그 이후 꽤 오랜 시간, 학벌은 그런 의미로 많이 받아들여졌으니까.
대입도 아니고 고입 시험에서부터 그런 소외감을 느껴버린 아이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 거짓을 쌓는다. 그런 아이를 누가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동경하는 친구 민, 자꾸 설레는 대상 루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발돋움을 해보려는 마음이었을 뿐인데. 그러나 이런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거짓은 거짓이라, 결국 거짓들은 핑퐁핑퐁 튀어오르고, 누구도 못되게 굴지 않은 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제각각의 상처를 받는다.

흔히 '친한 두 (여성) 친구가 동일한 한 남성을 좋아하게 된다'는 설정을 중심에 두는 구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정과 사랑이 서로 경합을 벌여야 하는 게 싫고, 그 과정에서 더 소중한 감정들이 배척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런 설정을 사용하면서도 과하게 중심에 두지 않는다. 우정과 사랑이 서로 경합을 벌이는 대신, 불평등한 현실의 감각과 퉁 부딪힌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나눠듣고 탁구를 치며 90년대 청춘을 아름답게 회상하는 동시에, 그 아름다움보다 평등하지 못하다는 감각이 앞서는 슬픔을 보여주는 식이다.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청춘이 드러난다. 사실 아름답기만 한 청춘이 어디 있나.

우리가 대만 청춘영화에 기대하는 풋풋하고 싱그러운 정서들을 충분히 가진 영화다. 동시에 성인의 시각에서 청소년기를 산뜻하게만 그리며 얄팍해지는 대신, 내면에서 끊임없이 재난 경보가 울리는 시기라는 점도 명확히 짚는다.
"다 너희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말을 긍정할 수 있게 된 후에도, 나는 그 시절 내가 느꼈던 갑갑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춘기가 그런 시기 아닌가. 나도 아직 나를 잘 모르겠는데 남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여야 할지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혼란스러움, 할 일은 많지만 지금 하고 싶은 일은 그게 아닌 것 같은 따분함, 마음의 가장 연약한 속살을 마주할 때마다 남들의 껍질은 참 단단해 보이기만 해서 계속 느끼는 초라함과 질투, 나 스스로도 내가 너무 어리고 서툴러 가끔은 나 자신을 견디는 게 벅차서 폭발할 것 같은 마음들까지.
이 영화는 그 나이의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다시 오지 않을 시절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듯이. 재난만 있던 시절도 아니고, 아련함만 있는 시절도 아닌 그 시절에게. 때로는 거짓으로 위로 받은 마음조차 거짓은 아니었다고 끌어안으며, 영화에 나온 대사를 축복처럼 건넨다. May the Force be with you!
10/05 20: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 (상영코드 202)
10/06 12: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 (상영코드 264)
10/08 17:00 영화의전당 중극장 (상영코드 370)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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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돌아가는 혐오, 옹호, 풍자의 트라이앵글
서브스턴스 (THE SUBSTANCE, 2024)
거침없이 돌아가는 혐오, 옹호, 풍자의 트라이앵글
개봉일 : 2024.12.11.
관람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 스릴러, 고어
러닝타임 : 141분
감독 : 코랄리 파르쟈
출연 : 데미 무어, 마가렛 퀄리, 데니스 퀘이드
개인적인 평점 : 3.5 / 5
쿠키 영상 : 없음
보통 예리한 칼을 다룰 땐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다르다. <서브스턴스>는 여성을 향한 혐오(일부 남성의 눈으로 담아낸 불쾌한 장면들이 있음)와 옹호, 사회 풍자라는 세 개의 날카로운 칼을 손에 쥐고 정말 거침없이 휘둘러댄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심장을 자극하는 음악과 눈 돌릴 틈을 주지 않는 화면, 귀를 지나 손끝까지 생생히 촉감을 전달하는 음향. 이제 끝인가 싶을 때 한걸음 더 나아가는 파격적인 흐름. ‘이만하면 뭘 말하는지 지나가는 강아지도 다 알아듣겠어!’싶은데.. 그럼에도 이 영화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 아니 탱크처럼 미친 듯이 밀고 나간다.
<서브스턴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한때 아카데미상을 2번이나 받고 명예의 거리에 입성할 만큼 사랑받는 대스타였다. 별 안에 박힌 ‘엘리자베스 스파클’이라는 이름. 엘리자베스는 별, 스타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은 빛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대중들의 관심이 줄어들고 그는 이제 영화 속 캐릭터가 아닌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만 간간이 카메라에 얼굴을 비치는 신세로 전락한다.
엘리자베스가 50살이 되던 날, 그는 쇼의 프로듀서 하비에게 해고 통보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 사고까지 당한다. 꽃다발, 케이크 하나 없이 가볍게 흩어지는 초라한 생일 축하로도 모자라 50살이 되었다는 이유로 해고까지 되다니. 최악의 생일이다. 엘리자베스는 환자복을 입은 채 눈물을 터트린다. 그때 그를 지켜보던 젊은 남성 간호사가 엘리자베스에게 인생을 바꿔줄 약물을 권유하고 엘리자베스는 그 약물을 통해 아름답고 젊은 여성 ‘수’의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
<서브스턴스>는 아름다움과 사랑이라는 목줄에 묶인 중년 여성 엘리자베스와 당연하게 그 목줄을 쥐고 있는 남성들. 그리고 그 남성들을 움직이는 유일한 존재, 생생하고 아름다운 여성 수(SUE)의 기묘하고 질긴 관계성을 그린다. 엘리자베스는 남성에 의해 스타가 되었다가 남성에 의해 버림받고 수가 되어 다시 남성들의 위로 올라탄다. 엘리자베스는 언젠가는 그들에게 버림받고 다시 추락할 거란 걸, 자신이 망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 위험한 기회를 놓지 못한다.
영화는 서서히 깨지며 분열하는 엘리자베스의 삶을 속도감 있게 담아낸다. 카메라에 담긴 조각난 엘리자베스와 수의 모습은 매혹적이면서 역겹고 눈물겹다. 금이 가버린 별과 그 위로 쏟아지는 수많은 오물들. 나에겐 그것들을 자연히 받아들일 무던함이 모자라다.
새우처럼 탈피하는 엘리자베스와 새우를 게걸스레 먹는 하비
여성의 삶을 좀먹는 남성들
50살이 된 엘리자베스는 남성들이 원하는 사회적인 여성성을 모두 잃은 사람이다. 촬영을 마친 엘리자베스가 긴 복도를 따라 화장실로 향하는 장면, 엘리자베스가 들어가려던 여성 화장실에 사용 불가 안내문이 붙어있다. 그는 눈치를 보고 남성 화장실로 향한다. 사용 불가가 된 여성 화장실은 남성들의 눈엔 더 이상 소비할 여성성이 남아있지 않은 엘리자베스의 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어쩔 수 없이 들어간 남성 화장실, 엘리자베스는 충격적인 하비의 통화 내용을 듣는다. 여자는 어려야 해, 섹시해야 해, 25세부터 임신 가능성이 줄어든대, 새로운 애 구해! 온갖 더러운 말을 쏟아내는 하비의 뒤에서 엘리자베스는 숨죽인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엘리자베스는 여배우, 여성으로서의 인생이 끝났음을 실감한다. 이제 그가 받을 수 있는 꽃다발은 프로그램에서 정리되었음을 알리는 꽃다발뿐이고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은 콜레스테롤 수치가 장난 아닌 중년의 남성이 됐다. 반짝반짝했던 명예의 거리 속 별 모양 타일은 금이 갔고 다시는 촬영장의 조명을 맛볼 일은 없을 것 같다. 이제 남은 건 늙어가는 것뿐인, 다시는 주목받지 못할 공허한 중년의 인생. 엘리자베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헛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USB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건다. 약물을 받아온 엘리자베스는 욕실에 서서 활성제를 주사한다. 이내 바닥에 쓰러져 고통을 호소하던 그는 몸을 구부린 채 움직임을 멈춘다. 이후 그의 척추를 따라 피부가 갈라지며 새로운 여성 수가 나타난다.
이는 새우의 탈피를 떠올리게 만든다. 새우는 성장하며 낡은 껍데기를 벗고 새 갑각으로 탈피하는데, 엘리자베스는 성장하는 새우처럼 낡은 중년 여성의 껍데기를 벗고 새로운 갑각인 젊은 여성의 몸으로 탈피한다.
엘리자베스는 수가 되어 거실에서 스트레칭을 한다. 엘리자베스의 오래된 액자가 보이고 몸을 숙였던 수의 상체가 올라오며 액자 위에 겹쳐진다. 이때 컴퓨터의 부팅 소리 같은 효과음이 삽입되며 엘리자베스의 인생이 새롭게 재부팅됐음을 알린다.
하지만 이 탈피를 마친 생생한 새우를 노리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극 중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 캐릭터다. 대표적인 인물은 에어로빅쇼의 프로듀서 ‘하비’.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자리에서 나이 든 여성에 대해 말하며 게걸스레 새우를 먹어치운다. 하비가 떠난 자리에 남은 수많은 새우 껍질들은 그가 남성으로서 얼마나 많은 여성의 삶을 뜯어먹었을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이 외에도 하비는 자신의 여성 비서 이사벨라의 이름을 신디로 바꾸면서 이게 더 부르기 편하다고 우기고 아무렇지 않게 쇼에 출연했던 여성들의 액자를 싹 갈아치우면서 자신의 권력을 자랑한다.
처음엔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오디션에 찾아간 수는 스케줄 따위는 상관없이 너를 원한다는 둥.. 하비에게 온갖 칭송을 받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결국은 하비가 만들어준 ‘새해 전야쇼’라는 목표에 휘둘리며 무너져가는 몸에 다시 활성제를 주사한다.
하비 외에도 극 중엔 여러 추한 남성 캐릭터와 그들의 시선을 암시하는 연출이 나온다. 이름보다 신체, 나이를 먼저 물어보며 이상한 품평을 하는 쇼의 심사위원들, 스파클 씨인 줄 알았다며 문을 쾅쾅 두드리다가 수를 보자마자 추파를 던지는 이웃, 수에겐 친절하고 엘리자베스에겐 위협을 가하던 트로이(수가 파티에서 데려온 남성), 새해 전야쇼에서 헐벗은 여성 댄서들을 반기는 하비와 백발의 남성들. 그리고 수의 가슴과 엉덩이만을 찍으며 열심히 화각을 조정하는 펌프 잇 업 쇼의 카메라 렌즈 움직임은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는 사람의 동공을, 수의 몸을 탐내는 남성들의 시선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나마 동창 ‘프레드’는 극 중에서 가장 친절한 남성으로 표현되긴 하지만 그가 처음 엘리자베스를 만났을 때 한 칭찬마저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구나.”라는 점에서 그의 친절이 진심으로 따뜻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수의 생생한 빛깔을 따라할 수 없었던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가 수를 놓지 못했던 이유
엘리자베스가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다.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다. 영화는 이 슬픈 욕망 중 일부인 ‘남성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을 매우 확대해 보여준다.
7일, 7일. 이 밸런스가 무너진 건 수가 첫 쇼를 녹화한 후 파티장에서 트로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수는 남성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몸 교체를 미룬다. 수의 남성을 향한 욕망은 ‘7일마다 교체 예외 없음’이라는 문장에서 ‘예외’라는 단어에 집중하게 만들고 그는 정해진 양 이상의 안정제를 뽑아낸다. 다시 안정을 찾고 돌아온 수의 엉덩이를 감싸는 트로이의 손길이 화면 가득 채운다. 그것은 악마의 손길처럼 압도적이고 위협적으로 느껴지며 그 손길 한 번의 대가는 고스란히 엘리자베스의 손가락으로 돌아온다.
깨어난 엘리자베스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리필을 받으러 창고로 향한다. 그리고 무언가에 쫓기며 들어간 카페에서 자신에게 약을 권한 젊은 간호사의 원래 몸을 만나면서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고민한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오래된 물건’ 박스를 엎어 오래된 엘리자베스의 몸으로 받았던 프레드의 쪽지를 찾는다. 흙탕물로 오염된 너저분한 쪽지.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가슴에 폭 안으며 안도한다.
엘리자베스는 어떻게든 수가 아닌 엘리자베스가 사랑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는 갈라진 척추의 상처를 다시 봉합하듯이 척추를 따라 이어지는 원피스의 지퍼를 올리며 프레드를 만나러 갈 준비를 한다. 그런데 준비를 모두 마치고 수가 누워있는 욕실 벽을 닫고 나가려는 찰나, 생기 가득한 분홍빛 수의 입술이, 아름다운 수의 가슴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아름다운 분홍빛의 수의 입술과 새빨갛게 칠해진 텁텁해 보이는 엘리자베스의 입술. 분홍 바디 슈트 사이로 보이는 탄력 있는 수의 가슴과 빨간 원피스 아래 크게 눈길이 가지 않는 엘리자베스의 가슴. 엘리자베스는 다시 거울 앞에 서서 치크와 립글로스로 생기를 덧칠하고 스카프를 덮으며 가슴을 가린다. 과도한 화장으로 얼굴은 점점 부자연스러워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운 젊은이의 분홍빛을 아무리 따라 해보려 해도 진한 붉은빛을 가진 중년은 그 빛깔을 따라갈 재간이 없다.
엘리자베스는 생생한 여성이 되어 사랑받고 싶다. “They are going to love you. 모두가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수에게 배달된 꽃다발 속 한마디. 그는 종료 주사를 손에 들고도 그 한마디에 흔들려 수를 죽이지 못한다.
욕심이 늘어가며 분리되는 두 사람
척추에서 안정제를 뽑는 이유
7일, 7일. 이 밸런스가 깨지기 전 엘리자베스와 수는 한 사람 같았다. 처음 쇼 오디션을 보러 갈 땐 엘리자베스가 수의 몸으로 하비에게 복수를 하러 가는 느낌이었고, 수는 엘리자베스의 또 다른 슈트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밸런스가 깨지고 점점 욕심이 늘어갈수록 원형인 엘리자베스는 수에게 잡아먹히게 된다. 카페에서 만난 남성 간호사의 원형은 엘리자베스에게 묻는다. “그쪽도 시작했나요? 당신을 먹어치우는 것.”
앞서 엘리자베스-수의 변화를 새우의 탈피에 비유했었다. 이 탈피 이후 엘리자베스의 척추를 따라 남은 검은 흉터는 새우 등에 있는 검은 내장과 비슷해 보인다. 수는 자신의 원형이 되는 엘리자베스의 척추, 즉 그의 내장에 주사기를 꽂고 한도 끝도 없이 안정제를 뽑아낸다. 속부터 점점 망가지기 시작한 엘리자베스의 몸은 조금씩 썩고 굽어간다.
굽은 몸으로 TV를 보던 엘리자베스는 당장이라도 부서질듯한 다리를 겨우 펴고 하비가 준 퇴사 선물을 꺼내본다. “시간 보내기 딱 좋은 걸 샀어요.” 하비의 목소리와 함께 프랑스 요리책이 모습을 드러낸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요리를 한다. 네 바람대로 빨리 시간을 보내고 남성들에게, 수에게 복수를 하러 가겠다는 듯이.
피순대, 칠면조, 송아지 뇌 조림… 의미심장한 요리들이 지나가고 TV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이라는 타이틀을 단 수의 모습이 나온다. 분노한 엘리자베스는 수의 말들을 하나하나 비난하며 거칠게 칠면조 내장을 손질한다. 이때 영화는 칠면조와 수의 신체 부위를 번갈아 보여주는 편집을 통해 엘리자베스의 분노를 살벌하게 표현한다. 엘리자베스가 당장이라도 수의 내장을 뜯어 죽일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외부가 아닌 내부로 향한 분노
누군가에겐 케첩과 다르지 않을 엘리자베스의 피
하나였던 엘리자베스와 수는 서서히 분열되며 서로를 죽이기에 이른다. 엘리자베스와 수를 망친 건 그들을 ‘남성에게 사랑받는 여성’이라는 상품으로 길들인 남성들의 권력이지만 엘리자베스와 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 사태의 책임을 남성이 아닌 서로에게 돌린다.
엘리자베스는 수가 자신의 시간과 생명을 뺏어가는 게 싫고 수는 굳어가는 엘리자베스가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죽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서로를 타인처럼 지칭하며 비난한다. 이들의 갈등은 동일인의 내면의 갈등이 아닌 타인 간의 갈등, 세대 갈등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엘리자베스는 생명을 뺏어가는 수에게, 수는 종료 주사를 꽂으려 하는 엘리자베스에게 위협을 느낀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하나라는 충고를 잊고 서로를 죽이려 달려든다. 수는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수도 엘리자베스가 죽은 후 서서히 망가진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수는 다시 한번 몸에 활성제를 투여해 엘리자베스와 수가 합쳐진 몬스트로 수로 부활한다. 그는 한껏 치장한 채 새해 전야쇼에 서지만 남성들은 그를 죽이려 한다. 이 세계에서 아름답지 않은 여성을 사랑해 줄 남성은 없다.
아름다웠던 여성의 절규와 피가 전방위로 뿌려진다. 그리고 더 이상 스튜디오에 설 수 없는, 스타로서의 생명을 다한 왕년의 대스타는 길거리에서 산산조각 나버린다. 마지막까지 남은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별 타일 위에 안착한다. 그리고 별이 가득한 하늘에 닿지 못한 3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녹아내린다.
엘리자베스가 남긴 피는 영화의 초반부, 누군가 떨어트린 햄버거의 케첩과 비슷하게 표현되고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청소차에 의해 닦인다. 이는 사랑받기 위해 모든 걸 다 바친 여배우의 역겹고 눈물겨운 마지막 흔적이지만 하비와 같은 누군가에겐 길바닥에 엎어진 빨간 케첩과 다를 바 없는 더러운 오염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영화도 누군가에겐 새로운 충격이 누군가에겐 그저 뜻 모를 B급 호러 무비 정도로 평가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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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하! 우리 안의 특별함을 깨닫는 신호
뉴저지주 패터슨에 살고 있는 패터슨(애덤 드라이브)은 어김없이 오전 6시 눈을 뜬다.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고 직장인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직장으로 향하는 도중엔 아침에 본 성냥갑에서 받은 영감으로 시를 구상한다. 사실 패터슨은 버스기사이자 시인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 중에 그가 시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내인 로라(골시프테 파라하니)뿐이다. 로라는 패터슨이 언젠간 위대한 시인이 될 거라 굳게 믿지만 자신을 드러내기 꺼리는 남편의 모습에 답답해한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내고야 마는 로라의 성격으론 이해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오늘도 반려견인 마빈과 밤 산책을 마친 후 돌아온 패터슨은 다음 날을 준비하며 잠자리에 든다.
<패터슨>은 참 굴곡이 없는 영화다. 그도 그럴 것이 패터슨이라는 평범한 개인의 하루가 7번이나 반복돼서 나열되니 굴곡이라는 것이 없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루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다. 짐 자무시는 같은 인물의 하루를 극한으로 파고들어 간다. 한 우물만 파는 것만큼 지겨운 것은 없고 영화에서 지겨움만큼 힘겨운 적(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면 자무시 감독이 남겨 놓은 평범한 개인의 삶에 담긴 ‘특별함’을 만날 수 있다.
흔히 우리는 특별함이란 TV나 유튜브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정작 자신은 평범하다고 주장한다. 패터슨의 본업은 평범한(?) 버스기사다. 하지만 그의 비밀 노트엔 여느 시인들에 못지않은 아름다운 시들로 가득하다. 아내인 로라만이 패터슨의 특별함을 알고 끊임없이 격려한다. 하지만 패터슨은 아내의 칭찬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 또한 아내의 꿈에 진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로라의 꿈은 일주일 동안 여러 번 바뀐다. 컵케이크 집 사장에 기타리스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인테리어 업자까지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매번 바뀌는 로라의 산만한 모습에 패터슨은 언제나 의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지만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하지만 그의 의심이 무색하게 행동의 결과를 내는 것은 언제나 로라다.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기타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자신이 맛없어 남긴 컵케이크는 대박이 났다. 패터슨은 영화 속에서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지만 로라를 향한 그의 표정에서는 시기와 질투가 보인다.
분출되지 못하는 패터슨의 감정은 반려견 마빈을 통해 드러난다. 패터슨과 마빈은 사이가 안 좋다. 산책을 가도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은 기본이고 집 안에선 자리를 놓고 보이지 않는 수많은 갈등이 펼쳐진다. 이는 이성과 본능의 충돌을 패터슨과 마빈의 모습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양분된 패터슨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장면은 세탁소에서 노래 연습을 하는 래퍼를 만났을 때다. 노랫소리를 따라간 세탁소에서 패터슨은 문 뒤에 숨어 조용히 노래를 듣지만 마빈은 래퍼 앞에서 대놓고 자신을 드러낸다. 장소에 상관없이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는 래퍼를 향한 두 캐릭터의 상반된 태도를 통해 이성과 본능을 재치 있게 표현하고 있다.
이를 놓고 보면 마빈이 패터슨의 비밀 노트를 찢어버린 것은 어느 정도 그의 의지가 반영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패터슨은 복사본을 원하지 않았다. “번역본을 만드는 것은 우비를 입고 샤워를 하는 기분”이라고 말한 일본 시인의 말에 공감하는 패터슨의 모습으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패터슨은 스스로 시인보다는 버스기사라고 생각한다. 버스기사는 시인이 될 수 없다고 믿은 것이다. 하지만 일본 시인과의 대화를 통해 위대한 예술가들은 현재 기억되는 것과 다른 과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본 시인이 반복하는 ‘아하!’는 평범함에 빠져 확신을 갖지 못하던 패터슨에게 자신이 지닌 특별함을 상기시켜주는 신호인 것이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도 한 번쯤은 자신을 평범하다고 소개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중국집에서 짜장면으로 통일하지 않고 홀로 짬뽕을 시키는 것조차 튀는 행동으로 간주되는 한국 사회에서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범함이 지나치면 참된 자신의 모습은 점점 잊혀지기 마련이다. 스스로 평범함의 늪에 빠져 자신을 잃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짐 자무시 감독은 <패터슨>으로 꺼지지 않는 열정이 있다면 누구나 특별하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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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정을 넘어선 완벽의 강박.
익숙한 공간에서 낯설고 축축한 공간으로 이어지는 한 사람의 시선은 한 곳에 머문다. 최고가 되기 위한 되뇜은 왠지 모를 집착처럼 느껴지며 여유로움보다는 강박에 가깝다. 자신의 목표가 아닌 타인을 바라보며 열정을 조각조각 채워간다. 최고가 되기 위한 몸부림에도 타고난 것 앞에서 일정한 한계를 맞닥뜨리며 자기 파괴가 극으로 달하는 순간까지 도달한다. 알렉스는 무엇을 위해 열정을 쏟아 내는 걸까.
알렉스의 강박은 ‘최고’라는 이름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중함’, ‘노력’에 의해 지속되어 왔다.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일에 도전하여 목표한 바는 어떻게든 이루어 내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내고야 마는 알렉스는 고통으로 빠뜨려서라도 목표에 도달하려 한다. 그러한 방식은 가혹하기까지 한데, 주변인의 만류에도 꼿꼿하게 자신이 갈 길만 바라본다. 한계에 다 달았음에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불안은 내부로 스며들어 알렉스를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들을 갉아먹는다. 정해진 목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던 알렉스의 욕망은 이루어 냈다는 생각이 들고나서야 멈춘다.
팀의 화합이 무엇보다 중요한 조정과 타인과의 교감이 중요한 사랑을 하는 알렉스에게서 이질감을 느꼈다. 타인을 배제하고 타인이 배제하며 자신의 욕망, 감정에 충실한 알렉스에겐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주변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완전한 변화를 아우르지는 못하는 알렉스의 내면은 상처가 휩쓸고 간 멍투성이었다. 뒤늦게 조정과 사랑에 대한 사랑을 깨달았지만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이루어낸 결과는 끊임없이 이어질 어떤 것을 조명한다. 알렉스만이 홀로 남아 배 위를 유영하고 있었다.
영화 <위플래쉬>와 영화 <블랙스완>이 생각나기도 했지만 타인의 관계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과는 조금 다른 영화 <더 노비스>는 자기 파괴적인 성격이 강했다. 영화의 공간은 로런 해더웨이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시작되어 더 숨 막히는 듯하다. 다른 스포츠 영화와는 결이 다르지만 미묘함이 열정을 이루는 이야기가 잔잔함에도 강렬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목표에 다다를수록 점점 피폐해져 가는 알렉스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면 '더 노비스'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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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객전도가 낳은 형보다 못한 동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런던에서 헤이그까지 킬러 ‘다리우스(사무엘 L. 잭슨)’의 경호를 맡은 이후로 보디가드 자격증을 박탈당하고 매일 밤 그의 악몽에 시달리는 ‘마이클(라이언 레이놀즈)'. 그는 당분간 휴식을 취해보는 건 어떻겠냐는 정신과 의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탈리아에서 안식년을 즐기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휴가 첫날 그의 앞에 다리우스의 아내 ‘소니아(셀마 헤이액)’가 등장하면서 그의 평화는 산산조각 난다. 그녀와 함께 납치된 다리우스를 얼떨결에 구해낸 마이클은 뒤이어 인터폴 요원 '바비(프랭크 그릴로)'의 강요 같은 의뢰를 받아 그리스의 갑부 테러리스트 '아리스토텔레스(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유럽 전역을 표적으로 계획 중인 테러를 막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속편의 저주'는 영화계에서 흔히 통용되는 표현 중 하나다. 센세이셔널한 평가를 받거나 좋은 흥행 성적을 기록한 작품들이 시리즈화될 때, 본연의 매력과 신선함을 잃어가면서 이전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경우를 지칭한다. 이처럼 많은 속편이 저주에 시달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주객전도를 빼놓을 수는 없다. 전편에서 관객들에게 어필했던 매력을 강화하기보다는 규모를 키우거나 새로운 캐릭터를 투입하는 등의 변화를 추구한 결과 본연의 정체성을 잃고, 결국 관객들의 기대치와 만족도 또한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트랜스포머> 시리즈가 가장 대표적인 예시다. '차들이 로봇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실사로 보여주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트랜스포머> 시리즈이지만, 1편 이후 로봇의 변신이라는 핵심 테마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인간 캐릭터나 미군들의 무용담만을 늘어놓은 결과 실패를 맛봤다.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도 2편에서 신비한 동물들의 비중과 분량을 줄인 결과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고, 허당처럼 보이지만 실상 냉혹하고 천재적인 해적 잭 스패로우를 단순한 개그 캐릭터로 변질시킨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도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1편의 주역인 라이언 레이놀즈와 사무엘 L. 잭슨이 건재하고, 모건 프리먼과 프랭크 그릴로가 합류해 덩치를 불린 <킬러의 보디가드 2> 역시 실패한 속편의 전철을 착실히 따른다.
전편인 <킬러의 보디가드>를 돌이켜 보자. 이 작품은 본질적으로 버디영화다. 겉모습부터 상극인 두 주인공이 함께 여행을 떠나고, 갈등과 화해를 숱하게 반복하면서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서로의 개인사와 고충을 공유하고 또 해결하면서 같은 편으로 거듭나는 버디무비의 전형을 답습한다. 전반적인 내용만 놓고 보면 제91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그린 북> 같은 작품과도 하등 다를 게 없다. 단지 그 이야기를 화려함과 잔혹함 사이를 오가는 액션과 유쾌함과 저속함을 넘나드는 코미디, 그리고 데드풀 그 자체인 라이언 레이놀즈와 걸쭉한 입담이 시그니처인 사무엘 L. 잭슨이라는 배우들의 존재감으로 포장했을 따름이다.
이때 영화는 제목대로 두 주인공 중 보디가드인 마이클을 스토리텔링의 중심에 둔다. 마이클은 전 인터폴 요원인 전 여자친구의 부탁으로 악명 높은 킬러 다리우스의 경호를 부탁받았고, 실제로도 런던에서 헤이그까지 경호의 범주를 벗어난 일은 하지 않았다. 영화의 또 다른 축이자 악역인 벨라루스의 독재자 '블라디미르(게리 올드만)'의 음모를 알아내고 그를 심판하는 것은 모두 그와 악연이 있는 다리우스의 몫이었고, 이는 마이클의 서사에 종속된 하위 플롯에 불과했다.
흥미로운 것은 마이클을 철저히 보디가드의 본분인 경호에 충실하게 한 선택이 두 가지 측면에서 영화의 재미를 끌어올린다는 사실이다. 우선 보디가드인 주인공의 시점에서 액션신을 접하기 때문에 자연히 긴박함과 긴장감이 고조된다. 언제 어디서 공격당할지 모르는 와중에 어떻게든 다리우스를 지켜야 하는 의무감이 부각된 결과다. 그렇게 쉴 틈 없이 흘러나오는 액션은 강력한 몰입감을 선사하고, 액션 영화로서의 완성도는 높아진다. 또한 이는 코미디 영화라는 측면에서도 유용하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게 직업인 사람을 보호해야만 하는 아이러니가 영화의 기저에 깔려 있기에 불평불만이 가득한 마이클과 냉소적으로 받아치고 비꼬는 다리우스의 호흡이 단순한 말다툼을 넘어 공감 섞인 웃음으로 물 흐르듯 이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작 <킬러의 보디가드 2>에서 마이클이 더 이상 보디가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번 영화에서 마이클은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보디가드이지만, 실상은 납치된 다리우스를 구하고 유럽을 노리는 테러리스트와 그의 정보를 추적하는 등 인터폴에 고용된 첩보원에 가깝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쫓기는 입장이 아니라 전 유럽의 테러를 막기 위해 누군가를 쫓는 입장에 놓인 것이다. 피렌체에서의 카 레이싱 장면만 보더라도 그는 쫓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추격전 역시 테러리스트를 추적하다가 발각된 결과일 뿐이다. 누군가의 보디가드라는 전편과 동일한 형식의 제목을 달고 나왔지만, 내용적으로는 쉴 새 없는 입담과 허술한 듯 뛰어난 액션, 능청스러움을 한 데 묶어 마이클을 마이클 답게 만들어주는 '보디가드'라는 정체성에 급격한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분명 15세 관람가였던 전작보다 더 잔혹해졌고, 헬리콥터와 추격전을 펼치거나 호화로운 요트를 박살 내는 등 볼거리도 더 많아진 액션씬은 좀처럼 이목을 끌지 못한다.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도, 예상치 못한 습격을 경계하는 서스펜스도 없으니 좀처럼 집중이 되지도 않고, 긴장감도 없다. 세계 최고의 경호원과 킬러라고 추켜 세울만한 인물을 등장시키며 어떻게든 분위기를 고조시키려 해도 이미 전편에서 주인공들의 능력을 목격했기에 이러한 노력은 역부족이다. 이에 더해 코미디의 관점에서도 등장하는 횟수에 비해 유머가 터지는 타율이 극히 낮아진다. 마이클과 다리우스가 사소한 일로도 시종일관 말다툼을 벌이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소소한 다툼 하나하나가 웃음을 자아내던 전편의 매력은 찾아볼 수 없다. 킬러와 보디가드라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정체성을 지닌 채 살아온 두 사람 간의 간극과 아이러니라는 근간이 사라진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이렇듯 캐릭터, 플롯, 액션, 코미디가 모두 와해되자 <킬러의 보디가드 2>는 여러 시리즈의 속편들이 선택한 변화를 답습한다. 하지만 모든 변화는 악수로 귀결된다. 우선 악역의 스케일을 국가적 차원에서 대륙적 차원으로 확대시킨다. 전편의 악역인 블라디미르가 자국 내에서의 인권탄압 사실을 인멸하려는 독재자였던 것과 달리 새로운 빌런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전 유럽의 기반 시설을 파괴하는 테러를 준비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빈약하고 허황된 악역의 목적과 철학은 급격히 커진 스케일을 좀처럼 지탱하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를 제재하려는 EU의 경제정책이 그리스를 무시, 차별, 탄압하는 처사라면서 이에 대한 반대의 의미로 전 유럽을 겨냥한 테러를 계획한다. 그리스야말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유럽 문명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EU의 경제 제재는 그리스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이다. 코미디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인권탄압을 용인한 독재자라는 전편의 설정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념과 목적은 현실성과 극 내부의 논리 모두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 결과 존재감이 미약해진 빌런은 극 전체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평면적인 캐릭터 구축으로 인해 스페인 영화 <페인 앤 글로리>에서 극찬을 받은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역량을 온전히 끌어내지 못하는 것은 덤이다.
또한 새로운 캐릭터들을 투입해서 액션과 코미디 양쪽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마이클과 다리우스의 관계성을 변주한다. <킬러의 아내의 보디가드(Hitman's Wife's Bodyguard)>라는 영어 제목에 걸맞게 남편보다 입이 거칠고 두 주인공보다 망설임 없이 총을 쏘는 다리우스의 아내 소니아의 비중을 잔뜩 늘린 게 그 예시다. 프랭크 그릴로가 연기한 인터폴 형사 바비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세 주인공을 매정하게 배신할 수 있는 냉혈한으로 등장한다. 이에 더해 모건 프리먼이 연기한 마이클의 아버지는 마이클의 가슴 아픈 과거사를 소개하고 약간의 반전을 통해 긴장감을 더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 기대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주는 이는 없다. 소니아가 남발하는 19금 유머는 너무 직설적이라서 유머 같지가 않고, 오히려 그녀의 존재는 마이클과 다리우스의 케미스트리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액션 역시 더 과격하고 난폭해지는 것 외에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지 않는다. 바비는 세 주인공을 첩보 작전에 투입시키고, 주인공들이 직면한 임신과 보디가드 자격증 회복이라는 개인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장치로 소비되는 데 그친다. 마이클의 아버지가 선보이는 반전 역시 복선과 암시가 전무한 수준이라서 전개의 편의상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사실 <킬러의 보디가드 2>는 어디까지나 재밌게 즐기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킬링 타임 영화다. 결코 작품 내적인 완성도가 만족도와 직결되는 류의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지향점이 면죄부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같은 재미와 쾌감을 추구한 전편과 비교할 때 거의 모든 부분에서 퇴보했다는 사실이 명백하고, 이러한 퇴보의 내용은 팝콘 무비로서의 장점까지 앗아갔기 때문이다. 결국 <킬러의 보디가드 2>는 주객전도가 낳은 형보다 못한 아우에 그치고 만다.
D(Dreadful, 끔찍한)
클래식한 속편의 저주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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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 크로이처의 <코르사주>
본 글은 씨네랩을 통한 시사회 관람 후 리뷰를 요청받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이 쓴 <트라우마>에는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 관해 언급한다. 그는 강제 수용소에서 최악의 상태는 자살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최악의 상태는 아무런 능동적 행위 없이 수용소의 흡수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상태”에 관한 이야기다.
<코르사주>는 엘리자베트 황후에 대해서 다룬다. 영화 속에서도 등장하지만 엘리자베트가 프란츠 요제프에게 발탁(?) 된 까닭은 오로지 그녀의 외모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옆에서 인형처럼 서있기를 바랐다. 누구라도 황후에 대한 환상은 있겠지만, 알려진 것처럼 왕이나 왕비는 생각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서론에서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 대해 언급한 이유 중 하나가 신체적 자유에 대한 문제다.
물론 황후의 자리와 강제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을 비슷한 처지라고 볼 수는 없다.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만 보았을 때 그들은 저항해야 한다. 저항해야만 주체적 자리를 얻을 수 있다. 최근 여성 서사들은 주체성이 가장 큰 이슈처럼 보인다. <코르사주>도 어김없이 주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코르사주>가 여타 영화와 다른 점은 주체적 인간의 자리에 가는 방법을 죽음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관객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엘리자베트는 첫 번째로 낳은 딸이 세상을 떠났고, 시어머니와 깊은 갈등이 있었으며, 1889년 아들 황태자가 자살했고, 60세에 살해당한 비운의 황후로 알려져 있다. 다만 영화에서 그녀는 40살에 생을 마감했고, 그 이후의 삶은 그녀의 대리자가 이어간 것으로 그린다. 마리 크로이처 감독이 40살의 엘리자베트에게 주목한 이유는 그 시기부터 그녀가 자신의 삶을 위해 투쟁한 시기라고 느꼈다고 한다.
실제로도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녀는 정신병에 관심이 많았고, 영화 속에서 그려졌던 것처럼 축일 선물로 완벽한 시설을 갖춘 정신 병원을 원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디테일을 계속해서 쫓아가야 한다. 영화 속에서 정신 병원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아마 시기적으로도 히스테리가 주목을 받기 직전의 시기였을 것이고, 고증을 위한 설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죽음의 문턱으로 향하는 처절한 몸부림의 설정이다. 정신병원에 누워있는 두 여자 중 한 명은 간통으로 정신을 놓았고, 또 다른 여자는 아이를 잃었다. 엘리자베트는 두 여자가 각각 겪은 경험을 지금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일부러 말에서 떨어진다. 죽음에 대한 첫 몸부림. 그리고 그녀는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딸과 여행을 가겠다는 요청에서 딸을 데리고 가지 못하게 하자 창밖으로 투신한다. 죽음에 대한 두 번째 몸부림. 하지만 그녀는 미치지 않고 끝내 정신을 붙들고 있다. 히스테리란 무엇인가. 정서적 충격을 해소할 수 없을 때 우리의 몸이 그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증상을 발현하는 방어기재라고 프로이트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엘리자베트는 정서적 충격을 온전히 주체적 몸짓으로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매 순간 그런 방식으로 자살 시도를 하는 것은 충동적인 것이며 다분히 의도적이지만 전적으로 의식적인 행위라고 볼 수는 없다. 자신의 욕망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끊임없이 투쟁하여 행위 자체를 이성적 판단에 의해 끌어올렸을 때 우리는 주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우리가 이성적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윤리라고 한다.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자르고, 마약을 하는 것 또한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이런 비관적인 행동이 어떻게 주체성을 위한 과정이라고 묻는다면 영화가 대답해 줄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단발머리를 하고 마당에 앉아 다른 이들과 음악을 들을 때 그녀가 느끼는 해방감을 바람으로 표현한다. 그 바람은 그곳에 앉아있던 이들 중 엘리자베트에게만 향한다. 이 쇼트에서 느껴지는 해방감과 처연함은 그녀의 선택이 그녀의 몸을 파괴할지라도 그건 그녀의 권리라고 주장한다. 아니, 어쩌면 그 선택은 그녀에게는 의무라고 일컬어도 무방할지 모르겠다.
그녀의 세 번째 자살 시도는 성공으로 끝난다(고 생각 한다). 영화가 따라온 것은 그녀가 진정한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의해 몸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자살 시도는 충동적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 자살 시도에서는 황제이자 남편에게, 그리고 딸과의 작별 인사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건 직후에 시도하지 않는다. 편안하고, 우아하게 그녀는 “바다”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나면 그녀의 우아하고 자유로운 춤이 이어진다.
2022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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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가 자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개봉전 시사에서 영화 관람 후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살면서 가까운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상대방의 생각을 듣는다. 나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어 전달하고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가늠해 본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면서 감정을 나누고 문제를 해결한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상대방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시킨다. 어쩌면 인간은 평생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조금이나마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자식을 이해하려 애쓴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기가 무엇을 원해서 우는지 이해하려 애쓰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 내뱉는 말에 따라 아이가 원하는 것을 추측한다. 아이가 크면 더 이해하기가 쉽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이가 10대가 되면서는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서로 대화는 적어지고 그에 따라 서로의 관계는 점점 멀어져 간다. 부모는 아이를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대화의 시간을 가지기도 어렵고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자식을 이해하려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영화 <더 썬>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주인공 피터(휴 잭맨)는 전처인 케이트(로라 던)와 이혼 후 베스(바네사 커비)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케이트가 피터의 집에 찾아와 두 사람의 아들인 니콜라스(젠 맥그라스)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한다. 엄마인 케이트와 살고 있는 니콜라스는 학교에도 가지 않고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케이트는 자신이 니콜라스를 바로잡으려 애쓰다 잘 되지 않아 전남편인 피터를 찾아간 것이다.
자신을 찾아온 전아내를 보는 피터의 모습에는 당황스러움이 묻어난다. 마치 착한 아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러니까 초반에 등장한 피터와 케이트의 모습을 보면 케이트의 육아에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고, 피터는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피터는 자신의 집으로 아들 니콜라스를 데려와 생활하게 한다. 새로운 학교에 등록도 해주고 최선을 다해 새로운 집에 적응할 수 있도록 현재 아내인 베스를 설득하기도 한다.
피터가 아들을 위해 고민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가 아버지로서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실제로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모든 면에서 피터는 아들 니콜라스가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해 준다. 그리고 니콜라스도 그런 아버지의 노력에 따라 학교도 다시 다니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런 모습 속에서 니콜라스는 왠지 불안해 보인다. 그가 지금 정말 안정이 된 건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지를 영화는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이야기 내내 한편으로는 잘 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찝찝함을 준다. 그러니까 아버지 피터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무언가 해결된다는 느낌을 주지만, 니콜라스가 혼자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불확실한 느낌을 준다.
불안해 보이는 아들 옆 좋은 아버지
각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기억 중 가장 부정적인 일은 바로 피터와 케이트의 이혼일 것이다. 부모의 이혼을 직접적으로 겪은 아들 니콜라스도 그 과정에서 많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니콜라스는 아버지가 없을 때, 아버지와 재혼한 베스에게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을 전달하기도 한다. 부모의 입장이 아닌 제 3자의 입장에 가까운 베스에겐 그런 니콜라스의 모습에서 불안과 긴장을 느낀다. 이런 식으로 니콜라스는 아버지 피터 앞에서는 안정적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타인인 베스 앞에서는 조금씩 진짜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영화는 부모 피터와 케이트가 진짜 니콜라스를 이해하고 있는지 영화 내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영화는 아버지 피터를 중심인물로 내세우면서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의 위험함을 훌륭하게 화면에 담고 있다. 실제로 처음 케이트가 등장했을 때 그는 부모 노릇을 잘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아들의 입장에서 신뢰하기 어려운 보호자 같이 보였다. 하지만 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피터의 모습은 점점 케이트와 비슷해진다. 피터가 케이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피터는 감정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피터는 그 자신도 권위적이고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원망하며 성장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아들 니콜라스를 이해하고 지원해주려 하지만 생각처럼 잘되지 않는다. 그는 아들이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지금 어떤 감정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이성적으로 자신이 맞는다고 생각한 해결방법을 니콜라스에게 강요할 뿐이다. 니콜라스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가지고 있는 마음속 근원적인 상처는 하나도 치유되지 못한다.
피터는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자신이 받지 못했던 사랑을 아들에게 온전히 전달하려 애쓴다. 제 3자인 관객이 보기에 그는 다른 어떤 부모보다 좋은 아버지다. 단지 그가 전처와 사이가 멀어지고 이혼하는 과정에서 아이에게 상처를 준 과거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한순간의 상처를 좋은 아버지가, 좋은 어머니가 모두 치유해 줄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의 초반 니콜라스가 피터의 집으로 가게 되는 과정에서 영화는 케이트와 니콜라스, 피터의 얼굴을 클로즈업을 통해 교차로 보여준다. 세 사람의 얼굴에 담긴 고민은 하나에서 출발했지만 그것의 도착점은 모두 다르다. 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깊이와 생각은 영화 내내 하나로 합쳐지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든다.
영화 속 피터는 재혼 한 이후 갓 태어난 아들이 하나 더 있다. 그에게도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이지만 니콜라스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두 번째 아들과는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다. 너무나 좋은 아버지가 되려 노력하지만 오히려 결과는 반대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들을 이해하지 못한 아버지의 비극
우리는 니콜라스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그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처럼 느껴진다. 부모님 피터와 케이트는 니콜라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에 대한 표현도 하지만 니콜라스는 진짜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한다. 영화를 본 누군가는 그런 예측불가능한 니콜라스가 이해가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게 당장 필요한 건 부모의 사랑과 관심보다는 전문적인 치료가 아니었을까.
영화를 연출한 직전작인 <더 파더>에서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번 <더 썬>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주면서 자식을 이해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지, 사랑만으로 심리적인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아들이 치유될 수 있는지를 긴장감 있게 담고 있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무척 훌륭하다. 피터 역을 맡은 휴 잭맨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지만 의도하지 않게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게 가면서 아들을 이해할 기회를 놓쳐 무너지는 모습을 잘 표현해 냈다. 이미 무너진 어머니 케이트를 연기한 로라 던의 연기도 훌륭하고, 어떤 심리 상태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니콜라스 역의 젠 맥그라스의 연기가 특히 눈에 띈다.
영화 <더 썬>은 자식이 가진 트라우마를 부모가 완전히 회복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부모가 그런 자식을 잘 이해할 수 있을지 질문을 던진다. 부모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과연 진짜 좋은 부모가 무엇인지, 아이를 위한 좋은 육아가 정말 아이의 심리에 도움이 되는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많은 생각과 고민들을 던져준다는 측면에서 무척 훌륭하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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