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4-17 09:44:33
당신이 사랑하는 스웨덴 영화
스웨덴영화
❣️[Cinelab Curation]❣️
씨네랩에서 진행되고 있는 챌린지 [스크린 너머 세계속으로…]는 스웨덴편을 진행 중인데요!
이를 기념해 특별 큐레이션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긴 스웨덴 영화들을 모아 봤어요❣️
소개해 드린 영화 외에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스웨덴 영화는 무엇이 있나요?
씨네랩과 함께 나눠주세요!🧡
아직 챌린지에 참가하지 않은 분들은 하단 링크를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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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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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_#3] 철학과 영화 사이 (with. 정태완 감독)
🎙️ Episode 3. 촬영감독 정태완 00:00 자기소개 06:27 철학과 이야기 14:59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 18:18 [날 좋은 날]이야기 19:47 홍상수 감독을 오마주한 [날 좋은 날] 23:20 다시 [날 좋은 날] 이야기 28:13 ‘공감’에 관한 이야기 34:11 영화를 계속해서 연출하지 못한 이유 36:50 종교에 관하여 41:59 촬영 감독으로서의 정태완 43:11 [풀 메탈 브레인] 이야기 & XR 이야기1 45:22 [풀 메탈 브레인]의 연출적인 이야기 47:23 한예종과 XR 이야기2 53:09 앞으로 계획 57:18 마무리 & 쑥스러움에 관한 이야기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는 단편 영화 감독을 만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팟캐스트입니다. 영화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영화란 무엇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 정태완 📍instagram @xowanc 📍사이트 https://j30n9.myportfolio.com/work ◾️ 따옴표 필름 📍 instagram @ddaompyo.film 📍 YouTube @ddaompyofilm 📍 ddaompyofil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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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워 오브 도그] 끝장리뷰(ENG) | 씻지 않는 형, 청결한 동생 | 말과 차 | 기타와 자동피아노 | 수색자 오마주 | 동성애자 형, 이성애자 동생 | 제목 의미
#BenedictCumberbatch #베네딕트컴버배치 #파워오브도그
[파워 오브 도그](2021)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과거 vs 현재(feat. 수색자)
Chapter 2 필의 동성애, 피터의 살인
00:00 은사자상 수상
02:02 대결 구도들
04:44 수색자 오마주
05:59 기타와 자동피아노
06:37 꽃을 태운 이유
07:44 필의 동성애
09:31 피터의 아버지 살해
12:19 별점 및 한 줄 평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파워오브도그 #파워오브도그리뷰 #파워오브도그해석 #영화파워오브도그 #thePoweroftheDog #thePoweroftheDogMOVIE #파워오브도그넷플릭스 #thePoweroftheDognetflix #제인캠피온 #JaneCampion #BenedictCumberbatch #베네딕트컴버배치 #코디스밋맥피 #KodiSmitMcP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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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 메인 예고편
“늦었지만 이제는 해야할 일을 하려고 합니다”
반성 없는 세상을 향해, 그의 복수가 시작된다!1980년 5월의 광주를 잊지 못하고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던 ‘오채근’(안성기)은
소중한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반성 없이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광주 출신의 ‘진희’(윤유선)를 만나며 더욱 결심을 굳히게 된 그는
당시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박기준’(박근형)에게 접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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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푸른 호수> 메인 예고편
내 이름은 안토니오 르블랑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돼 ‘안토니오 르블랑'이라는 이름을 얻은 한 남자.
그에게는 누구보다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 ‘캐시'와 사랑스런 딸 ‘제시’,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가 전부다.
“나는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닙니다.”
어느 날, 억울한 상황에 휘말려 경찰에 붙잡힌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이민단속국으로 넘겨지고,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을 난생처음 알게된 그는 강제추방 위기에 처하는데…
가족을 지키고 싶은 그의 뜨거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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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쑤저우강> 리뷰 - 다층적 해석의 거미줄에 걸린 지독한 사랑 이야기
어릴 적 물고기를 잡기 위해 세차게 흐르는 흙탕물에 발을 담가 본 적이 있다. 사전에 수심이 얕은 곳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탁류에 들어가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이었다. 혹시나 물살에 휩쓸려 자빠지면 현세의 흙탕물이 순식간에 황천길로 바뀔 판이니 당연했다. 양발을 하상(河床)에 안정적으로 고정했다는 안도감이 들고 나서야 제멋대로 흘러가는 거대한 물줄기를 응시할 수 있었다. 흐르는 시간의 힘을 시각적으로 절감했던 순간이었다. 10대 중반이었지만 모든 것은 변화하고 종내 사라진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느꼈을까?
러우예(로예) 감독의 영화 <쑤저우강>은 흙탕물이 흐르는 중국 상하이의 쑤저우강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청춘들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다. 과감한 1인칭 시점 숏, 때로는 불편할 정도로 흔들리는 핸드헬드 촬영,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데 필수적인 주인공의 내레이션 등 내용과 형식 면에서 왕가위(왕자웨이)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가 적지 않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영화의 핵심적 이야기 줄기를 바탕으로 영화의 내적 의미만을 고려한다면 <쑤저우강>은 인어공주 동화를 변주한 비극적 사랑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만 해석하기에는 영화가 관객에게 마련해 준 해석의 공간이 너무 드넓다. 기묘한 액자식 구성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내레이션만 하고 얼굴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 남자 비디오 촬영기사가 도대체 누구인지, 배우 저우쉰이 1인 2역으로 연기한 여자 주인공 메이메이와 무단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마다와 무단의 전설적인 사랑이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 관객은 의심과 혼란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하게 된다. 러우예 감독은 <쑤저우강>을 명쾌한 해석이 불가능한 영화로 만든 것이다.
<쑤저우강>은 '다층적 해석의 거미줄에 걸린 영화'라는 생각을 하며 정성일 평론가가 진행한 라이브러리 톡에 참가했다. 장장 2시간 반 동안 진행된 라이브러리 톡에서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의 내적 구성 요소만으로는 <쑤저우강>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러우예 감독이 직접 경험했던 현대 중국의 비극적 역사를 <쑤저우강>에 겹쳐 놓고 보아야 흙탕물처럼 속이 보이지 않는 감독의 연출 의도가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영화의 안과 밖을 두루 살펴야 영화의 진짜 얼굴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정성일 평론가의 영화에 대한 열정, 고민의 폭과 깊이가 정말 대단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자리를 지킨 관객들에게 따듯한 유대감을 느끼면서 집으로 향했다. (끝)
* 씨네랩의 초청으로 10월 16일 CGV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진행된 <쑤저우강> 상영회와 라이브러리 톡에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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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주 차, 최신 씨네 뉴스
할리우드 파업, 업계 최대 규모의 동반 파업으로진화
미국 작가조합은 임금인상과 근무 조건 개선을 요구, 미국 배우조합은 스트리밍 대기업을 향해 더 공정한 수익 분배와 더 나은 근무 조건을 요구, 인공지능과 컴퓨터로 만든 얼굴과 음성으로 배우를 대체하지 않도록 보장을 요구하고 있는데요.
이 여파로 인해 많은 영화,드라마들이 제작이 대부분 중단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이후 바람 잘 날 없는 영화계 여러분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 관객수 40만 명 기록
일본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한국을 찾는다고 합니다.
영화 <괴물>이 예술영화로는 드물게 누적 관객 수 40만 명을 돌파하면서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내한한다고 하는데요. 고레에다 일본 영화 중 국내 최고 흥행작은 2013년에 나온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였는데 이를
제치고 <괴물>이 최고 흥행작으로 올라섰습니다.
<비프> 고른글로브 3관왕
한국계 제작진과 배우가 뭉쳐 만든 넷플릭스 시리즈 <비프>가 올해 골든글로브 3관왕에 올랐습니다.
TV 미니시리즈 및 영화 부문 작품상에 호명된것은 물론 스티븐 연, 앨리 웡이 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두었습니다. 스티븐 연은 에미상 미니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오르면서 이번 골든글로브
수상으로 향후 에미상 수상 가능성도 커졌습니다.
외계+인 2부 박스오피스 1위
<외계 +인 2부>가 예매 관객수 10만명을 넘기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섰습니다. 전작 1부에서는
154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며 흥행에 실패했는데요. 1부에서 다소 복잡했던 서사의 타래가 2부에서
정리되면서 매듭을 잘 맺었다는 만족으러운 호평이 대체로 많은것과 1부가 OOT를 통해 재평가를 받으며
유입된 관객층을 기대하며 흥행을 기대해봐도 좋을것 같습니다.
티모시 샬라메 <웡카> 북미 박스오피스 1위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하며 총 세 차례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웡카>.
티모시 샬라메는 <웡카>를 통해 자체 최고 흥행작을 경신하며 연기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배우로 떠올랐습니다. 전 세계 달콤한 흥행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웡카>는 오는 31일 전국 극장으로
찾아온다고 합니다.
봉준호 신작 미키 17 개봉 연기
<외계 +인 2부>가 예매 관객수 10만명을 넘기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섰습니다. 전작 1부에서는 154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며 흥행에 실패했는데요. 1부에서 다소 복잡했던 서사의 타래가 2부에서 정리되면서 매듭을 잘 맺었다는 만족으러운 호평이 대체로 많은것과 1부가 OOT를 통해 재평가를 받으며 유입된 관객층을 기대하며 흥행을 기대해봐도 좋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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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일본이 같은 재료로 다르게 끓여낸 이 영화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라는 영화가 오픈했다. 제목만 보고 감이 왔는데, 이 영화는 일본에서 한 차례 개봉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내용이 같을 텐데, 한국판만 보면 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생각을 고쳐먹고 둘 다 봤다. 결론적으로 두 영화 모두 소재와 플롯 진행만 비슷하고 세부적인 것들은 판이하게 다르게 세팅되어 있는 극본이다. 하지만 두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같은데, 두 영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보자.
1. 등장인물의 배치가 같지만 역할이 다른
이 시나리오에는 공통적으로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사람이 있고, 그걸 줍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떨어뜨리는 사람 주변에 그를 사랑하는 애틋한 관계의 사람들이 더러 등장한다.
일본판에서는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것은 남자이고, 그걸 주운 범인은 떨어뜨린 당사자의 폰을 해킹하며 그의 여자친구를 노린다. 성적인 도착증이 있는 남자의 성범죄임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관계가 핸드폰을 떨어뜨린 마코토와 그의 여자친구 아사미의 굳건한 사랑이다. 아무리 해킹을 통해 범인이 이들을 교란시켜도 결국 이들을 구해내는 것은 이들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판으로 오면, 마코토와 아사미 vs 범인의 구도가 달라진다. 애초에 범인이 한 여성이 떨어뜨린 핸드폰을 줍는다. 하지만 피해를 당한 여성인 나미와 범인의 1:1 대결이 눈에 띈다. 일본판에서는 여성 혼자 범인을 상대하는 것은 힘이 드니 그를 지키는 남자가 필요한 것 같았다면 한국판에서는 그저 피해자와 범인의 한판 승부 같은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였을까 개인적으로는 남녀에 대한 구분 없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직접 대결이 돋보이는 만큼 한국판이 한층 더 빠르고 시원한 전개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일본판에서는 엄마의 학대로 인해 성적인 도착이 생긴 범인을 그렸다면, 한국판에서의 범인은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를 사회 안전망으로 이끌어줄 참된 어른이 없었음을 암시하긴 하지만 특별히 성적인 도착증이 보이진 않는다.
2. 범인은 추적해 내는 과정
일본판에서는 범인이 누구일지 추적하는 과정이 메인 플롯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가서야 범인이 누군지 등장하는 전통적인 추리 전개를 보여준다. 마지막에 범인이 밝혀지며 놀라움을 자아내게 되긴 하지만 그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몇 가지 무리수가 보이기도 한다.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해 내는 것이 영화를 보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중간에 범인일 법한 인물들을 낚시하기도 하는데, 그중 하나가 신입 경찰인 마나부이다. 그가 범인과 똑같이 여성의 긴 머리칼에 대한 집착이 있음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범인일까'하는 의심을 심어주는데, 그 모습이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어 오히려 범인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들게 한다. 엄마에게 학대를 당해 사랑받지 못한 유년에 대한 보상 심리로서 여성의 머리카락에 집착하는 모습을 가졌다는 범인과의 공통점으로 범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경찰이 있다는 설정이 영화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아사미가 범인을 인식하는 것은 납치되고 나서이기 때문에 아사미와 마코토는 경찰이 출동하기 전까지 그저 범인에게 당하기만 한다.
하지만 한국판에서는 처음부터 범인을 보여주고 시작한다. 그래서 범인이 어떻게 나미를 농락하는지 보여준다. 범인을 초반부터 의도적으로 보여주는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범인의 교활함과 잔인성이 부각된다. 한국판에서는 일본판과 다르게 몰카도 등장하는데, 범인은 철저히 사이버 범죄가 인간의 삶에 해할 수 있는 극단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이는 나미의 생활 전선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극단에 몰리자, 나미는 범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범인을 교란하기에 이른다. 일본판과는 달리 피해자가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상황을 반전시켜 보려고 발버둥 치는 부분이 매력적인 서사 포인트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나미를 각성시키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점에서 남녀 간의 사랑이 소재로 한 일본판과는 다르게 한국판에서는 가족 간의 사랑이 두드러진다.
3. 궁극적인 두 영화의 공통점
두 영화 모두 현대 사회에서의 SNS로 다져진 사랑, 신뢰, 우정 등은 알량한 말에 불과하고 끝나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유야 어떻든 두 영화 속 범인들은 극단의 외로움에 지쳐 복수 심리로 자신처럼 나미도 철저한 외로움의 세계로 끌고 가려는 의도가 보이고 그 절망의 순간에서 사람을 죽이면서 자신만의 쾌락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결국 SNS의 얄팍한 관계성뿐만 아니라 진정성 있는 1:1 만남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SNS 속 관계도 인정받을 만한 관계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갈수록 위험해져 가는 사회의 안전망이 되어줄 정도인지 반문하게 되는 영화이다. 두 영화 모두 스마트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스마트폰의 분실이 생각한 것보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내 정보는 언제든 털릴 수 있는 세상이니까. 그가 마음만 먹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4. 총평
둘 중에 하나를 봐야 한다면 한국판만 봐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한국판이 가진 서스펜스가 더 밀도 있고 일본판 특유의 현대인의 삶을 설명하려는 구구절절한 대사가 없어서 빠르게 몰입할 수 있다. 전개와 결말이 완전히 다른 영화지만 결론적으로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기에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한국판을 추천한다. 아, 그리고 임시완 배우의 연기는 너무 잘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 맑은 눈이 살인자 연기에까지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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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문제 맛보기
호주에서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했다는 <드라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진실을 감추고 온전히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가뭄이라는 뜻의 제목 <드라이>에 맞게 영화는 오랜 기간 가뭄이 이어진 마을 키와라를 배경으로 해들러 일가족 사망 사건을 파헤쳐 나간다. 가물어져 바닥이 갈라지고 땅의 맨바닥이 드러나는 장면이 영화 곳곳에 배치되지만 진실은 갈라진 바닥에 숨어 도통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된 애런 포크(에릭 바나 분)는 그 진실을 찾아 마을을 샅샅이 뒤지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20년 전에 벌어진 엘리 디컨의 죽음에 사사건건 부딪히고 해들러 가족의 죽음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지만 갈라진 키와라의 땅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엘리 디컨은 죽었을 때 바지 주머니에 애런의 이름이 적힌 메모지를 넣은 채 발견되었는데 이로 인해 애런은 엘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여겨져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가물어질수록 작물은 말라가고 사람들도 함께 죽어가지만 애런은 도저히 진실을 찾을 수가 없다. 왜 <드라이>는 하필 가뭄이 든 마을을 배경으로 한 것일까?
엘리 디컨이 죽었을 때의 정황 중 특이점은 엘리가 강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사건이 말라가는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는 정 반대다. 또한 애런의 회상 신은 대부분이 강가를 배경으로 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친구인 루크, 그레첸, 엘리와 강가에서 놀곤 했던 애런은 엘리에게 짖궂은 장난
이라기엔 엘리가 죽을 뻔했지만을 치던 루크 해들러를 떠올리며 루크가 정말로 자신의 가족을 몰살하고 자살했을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하지만 루크의 부모님은 그럴 리 없다며 애런에게 수사를 부탁한다. 확실히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은 이상한 점이 많다. 막내딸인 갓난 아이만이 살아남았다는 점이나 사살에 사용된 탄약이 평소 루크가 사용하던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는 것 등이다. 강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던 엘리와는 달리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은 가물어진 마을 한복판인 집에서 벌어진다. 물을 배경으로 죽음을 맞이한 엘리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그 진실을 알려주지만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은 가물어질수록 증거가 하나씩 드러난다. <드라이>의 배경이 가물어진 마을을 배경이어야만 했던 이유는 건조한 날씨에 서로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가는 긴장감을 상징하는 동시에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에 관한 진실이 밝혀지는 배경으로서도 가뭄이 유용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한편 가뭄 이외에 영화는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지만 어느것 하나 깊이 들어가지 않고 맛보는 데 머문다. 엘리가 죽었을 때 애런은 루크와 사건 정황에 대해 입을 맞추는데 같이 다른 곳에서 토끼 사냥을 했다고 거짓말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회상장면이 지나가고 나면 성인이 된 그레첸(제네비브 오라일리 분)이 실제로 토끼 사냥을 하고 있다. 이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 밝혀지는 진실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죄없는 토끼가 날조에 이용되거나 마당에 숨어든다는 이유로 사살당해도 되는지 관객에게 의문을 품게 만드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고많은 야생동물 가운데 토끼가 사살 대상이 된 이유는 작고 연약한 동물인 동시에 빠르지 않아 쉽게 사살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는 20년 전 죽은 엘리 디컨에 대한 비유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엘리의 죽음은 엘리에 대한 애도보다 애런과 루크에 대한 혐오 면에서 더 크게 작동한다. 평소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소녀임에도 엘리가 죽자 마을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고 비난할 누군가를 찾는다.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알리바이가 딱히 있지도 않았던 애런과 루크는 엘리의 죽음에 책임을 지게 되고 결국 애런은 아버지와 함께 마을을 떠난다. 이 부분 또한 서로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진실 그 자체를 찾기보다는 그저 비난에 초점이 맞춰지는 사회현상을 가볍게 보여주지만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영화는 현상을 바라볼 뿐이다.
엘리의 죽음은 의문투성이인 동시에 관객은 애런이 20년 전에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혼란에 휩싸인다. 그렇다면 애런은 20년 전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을까? 애런이 사실대로 말했다면 애런은 엘리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음에도 책임을 져야 할 판이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거짓말은 용인되는 것인지, 혹은 애런이 무고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음에도 아버지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는 것이 당연한지 은연중에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도 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가 관객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지 궁금해하지만 수많은 질문 가운데 초점이 맞춰지는 질문은 없다. 이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20년 후 일가족의 몰살까지 이어지지만 사실 엘리 디컨의 죽음과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은 독립적인 사건임이 영화가 진행될수록 드러난다. 영화가 무심코 던져주는 질문들은 영화 진행을 위한 맥거핀으로 기능하며, 애런은 이 맥거핀을 충실히 따라가며 관객의 혼란을 유도하는 동시에 본인도 혼란 속으로 들어간다. 애런이 이 혼란을 벗어나는 것은 결국 윤리적인 질문을 피해 객관적인 증거를 다시 한번 살펴보는 순간이다. 사건에서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모두 걷어내고 객관적인 실체를 마주한 애런은 사건의 진상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가물어진 마을에서 얼마 안되는 숲에 불이 질러질 위험으로부터 마을을 구해내고 숲 또한 보전된다.
숲이 보전되었다는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더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혀낸 애런은 다시 마을을 떠날 채비를 하며 엘리를 기리는 마음으로 숲을 향한다. 엘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반대로 애런의 감정이 촉발한 행동에서 드러난다. 엘리와 시간을 보내곤 했던 장소에서 엘리에게 작별인사를 하려던 애런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결국 엘리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알게 된다. 엘리의 죽음에 진정으로 책임이 있는 자가 밝혀질 때 또다시 영화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가볍게 관객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이 역시 깊이 들어가지 않고 맛보기만 함으로써 관객은 다시금 어리둥절해진다. 영화는 이런 사회적 현상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 문제들을 단순히 몰입감을 위한 장치로서 소비할 뿐인가. <드라이>는 밀도 높은 서사를 가지고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영화지만 사회적 문제들을 맥거핀으로 소비한다는 측면에서는 아쉬운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가 끝나면 이제 관객은 현실로 돌아와 영화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을 맞닥뜨려야 한다. 영화가 묘사한 다양한 종류의 혐오들은 정당한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허용할 수 있는 거짓말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몰입도 높은 수사 서사를 가진 <드라이>가 모든 진실을 알려준 후에도 극장을 떠나는 관객의 뒷맛이 깔끔하지 않은 이유다.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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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고된만큼 아름답다,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인스타그램 매거진 ⓒ주간우두미 36호
밀리언 달러 베이비(Million Dollar Baby, 2004)
제작 : 미국,드라마 │ 감독 : 클린트 이스트우드
출연 : 클린트 이스트우드(프랭키), 힐러리 스웽크(매기), 모건 프리먼(에디)
등급 : 12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33분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복싱 영화이자, 휴머니즘 드라마이자, 어쩌면 존엄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존엄사에 대한 첨예한 찬반양론이 존재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존엄사, 말 그대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며 죽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됐다.
주인공 '매기'는 웨이트리스 출신의 아마추어 복서다. 서른한 살이라는, 복서로서는 아주 늦은 나이에 복싱을 시작한다. 그녀는 슬플 정도로 박복한 팔자에, 가진 거라곤 열정 하나뿐이다. 그런 그녀의 열정에 못 이겨 복싱 매니저이자 컷맨(상처에서 피가 멈추도록 도와주는 보조자)인 '프랭키'는 삼고초려 끝에 그녀를 거두어준다.
매기는 집념 하나로, 프랭키를 따르며 1년 반 만에 엄청난 실력자가 된다. 나는 권투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아마도 복서에게는 타이틀 전이라는 게 궁극적 목표인가 보다. 매기는 첫 라운드부터 KO승을 거두며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이 타이틀 전을 꿈꾸는데, 프랭키는 매기에게 타이틀 전을 시키는 것을 탐탁지 않아한다. 너무도 무서운 상대와 겨루어야 하는 타이틀 전에서, 친한 동료가 실명하고 평생을 힘들게 사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기의 고집으로 결국 프랭키는 타이틀전을 주선하게 되고, 종국엔 '밀리언 달러' 타이틀 전까지 출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줄곧 승승장구만 했던 매기의 암울한 그림자가 터지고야 만다. 전직 창녀 출신으로 비겁한 반칙들을 일삼기로 유명한 독일의 복서 '블루 베어'와 겨루다가, 매기가 그만 사고를 당하고 만 것. 매기는 1,2번 경추가 완전히 박살 나, 목 아래로는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그리고 이때, 별안간 전에 보았던 <미 비 포유>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얼굴도 잘생기고 유능하고 부유하던 남자가, 한 순간의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어 살아가던 내용의 영화. 그를 사랑하게 된 여주인공은, 그가 합법적 존엄사가 인정되는 스위스에 가서 존엄사를 꿈꾼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그의 선택을 바꾸려 안간힘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삶의 욕구를 불어넣어주려는 여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을 수 있겠죠, 하지만 내 인생은 아니에요. 난 (건강했던) 내 인생을 사랑했어요 진심으로요"라고 말하며 끝내 존엄사를 택했더랬다.
그때 그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남자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아니, 무슨 영화의 결말이 이래! 여자의 사랑이 이 남자의 선택을 바꿔 놨어야지! 살았어야지! 건강을 잃은 삶을 살아보지 못한 자의 섣부른 오만이었을까. <미 비 포유>에서나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나, 늘 목숨의 주인공보다, 다친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기를 쓰고 반대한다. 으스러진 삶을 감당해야 하는 당사자의 고통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자신의 고통을 먼저 헤아리기 때문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프랭키도 마찬가지였다. 딸처럼 여기며 복서로서의 성장을 도왔던 매기가, 전신마비를 고통스러워하며 죽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때, 프랭키는 거절한다. 상실감을 느낄 자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더 이상 복싱을 할 수도, 일어나 걸을 수도 없는 매기는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래서 혀를 깨물고 수차례 자살시도를 한다. 그리고 그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프랭키는 그제야 깨닫는다. 그녀를 도와줘야겠다고.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매기가 원하는 것은, 이 삶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건강하지 못한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무슨 연유로 딸과 멀어지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매번 딸에게 편지를 부치고도 반송이 되는 프랭키와, 면면이 쓰레기 같은 가족들을 둔 외톨이 매기. 매니저와 선수로서의 만남이었지만 둘 사이에는 거의 부녀지간에 가까운 애정이 존재했다. 그런 선수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프랭키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굳이 짐작해보지 않아도 그 무게를 알 것 같다.
하지만 그 무게는 프랭키뿐 아니라, 매기 역시 지고 있다. 자신이 사고를 당해, 프랭키가 엄청난 미안함과 부담감을 가지게 될 거란 걸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 매기의 마음은, 어쩌면 프랭키보다 더 무거웠을지 모른다. 하물며 자신이 목숨을 이어나간다고 해도, 그 돌봄과 죄책의 나날을 프랭키에게 지워야 한다는 건, 매기로선 정말 못 견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런 매기의 복잡다단한 마음을 완전히 이해했을 프랭키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매기의 산소호흡기를 떼고, 그녀가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주사를 놓아준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야 <미 비 포유>에서는 몰랐던 것을 느꼈다. 존엄사의 진정한 의미를. 당사자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것, 그게 삶이든 죽음이든, 내 상실감보다 그의 고통을, 그로 인한 그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것 또한 사랑이라는 걸.
매기의 죽음을 도와주며, 프랭키는 그녀에게 자신이 지어준 링네임 '모쿠슈라'의 뜻을 알려준다. 게일어인 모쿠슈라의 뜻은 "나의 소중한, 나의 혈육"이라는 뜻이다. 매기는 그런 프랭키의 마음을 마지막으로 간직하고 그렇게 존엄을 지키며 세상을 떠났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불의의 사고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도 그에게 마냥 살아달라고 요구할 수는, 아마 없을 것 같다. 그가 원하는 게 죽음이고 해방이라면, 결국에 그 뜻을 존중해주고 싶어 질 것만 같다. 누군가를 잃을 상실감에 앞서, 인간에게는 누구나 존엄할 권리가 분명히 있다고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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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 너머의 언어로
언어를 배운다는 건 단지 말의 외형만을 익히는 일이 아니라, 다른 층위의 세계관을 맛보는 일이 아닐까. 프랑스어를 배우면 자동차, 달, 바다는 여성이 되고 비행기, 해, 땅은 남성이 된다. 모국어가 한국어인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낯설게도, 사물에 성별을 붙여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배우기 이전과 이후의 관념은 은근하게 달라진다.
한편 일본어를 배우면 존댓말의 형태는 두 갈래로 번져간다. 자신을 낮추는 겸양어와 상대를 높이는 존경어. 우리말에서도 ‘나’를 ‘저’로 부르는 등 낮춤말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동사를 3개씩 외우는 일이 힘든 건 둘째치고 마음이 갑갑하다. 결재 도장까지 깍듯하게 상사 이름 쪽으로 기울여 찍는 문화를 얼핏 느낀다.
언어는 사회성과 역사성을 갖기에, 쓰는 사람들에 의해 규정되고 변형되기 마련이다. 언어의 층위는 그렇게 오랜 시간의 마디마디가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한 인물이 시간과 성별을 뛰어넘어 존재한 400년의 시간을 담아낸 영화 <올란도>는 그 모양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자못 간단한 구조로 보인다. 한 젊은 귀족 올란도가 여왕에게 찬사를 보낸 후, 여왕이 저택과 함께 내려준 ‘영원히 죽지도 늙지도 말라’는 말이 고스란히 이루어졌다. 영화에 담긴 400년의 시간은 연극 막처럼 명확한 텍스트 제목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타이틀은 올란도의 삶에서 주요 화두가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올란도를 둘러싼 세상의 언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보자.
영화가 시작되면 수직적인 관계를 고스란히 담아낸 언어들이 눈에 띈다. 여왕이 올란도의 아버지에게 “그대의 것은 이미 내 것이었다”라고 말할 때도 그렇지만, 올란도를 지칭하는 말은 모두 소유격이 도드라진다. “내 아들, 수족, 마스코트”이자 “나의 승리”. 변하지도, 병들지도, 늙지도 말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그래서였을까? 이 말은 단지 물리 법칙을 어겨서 이상해 보일 뿐, 말도 안 되는 명령들이 ‘까라면 까야지’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실과 그렇게 다르지도 않다.
이 수직성은 훗날 러시아 대사의 딸 사샤를 사랑하게 된 올란도에게서도 보인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너는 내 것”이라는 말에 사샤의 주권은 들어있지 않다. 사샤를 만나기 전 약혼했던 상대가 올란도의 “배신”을 탓할 때는 “남자는 자기 마음을 따를 줄 알아야 한다”라고 가뿐하게 넘겼으나, 얼음이 녹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분명하게 피력했던 사샤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여자a woman가 배신했다”라고 한다. 고유명사였던 사샤는 일반명사가, 수많은 여자 중 하나가 된다. 소유도 박탈도 올란도의 의지로만 이루어졌다.
훗날 올란도에게 청혼하는 해리와의 대화에서도 비슷한 대사가 재현된다. 여왕이 했던 “집을 주겠다”는 말이나 “내가 곧 영국이고 너는 내 것”이라는 말. 올란도가 했던 “I’m offering my hand”라는 말. 해리뿐이 아니다. 남성 귀족들의 대화는 허세와 과시, 권위로 꽉 차 의미나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다리가 아프다는 말을 들어도 공감과 위로는 없고, 과학이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저 성별에 비유한다. 폄하하고 재단하며,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수직적 우위를 점하고자 끊임없이 재배치를 꾀하는 대화다.
이러한 세상에서, 올란도는 소통의 가능성을 간직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과 공명할 수 있었다. 러시아어에서 프랑스어로,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언어를 바꾸며 사샤가 소통을 모색할 때 “그냥 영어를 더 크게 말했”던 대부분의 귀족과 달리, 올란도는 사샤와 프랑스어로 대화하며 둘만의 공간을 만든다. 사랑이 끝난 후 잠에 빠졌다가 새로운 챕터로 나아갈 때도 마찬가지다. 시를 탐구하고, 정치의 세계로 나아가 향한 오스만 제국에서도 아랍어 인사말을 익혀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올란도가 간직하고 있던 소통의 가능성은 전쟁을 겪으며 뜻밖에도 성별 전환이라는 방식으로 발아한다. 쓰러져 죽어가는 이를 “적”으로 규정하는 해리와 달리 올란도는 그냥 죽어가는 사람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은 균열의 조짐이다. 피아의 위치와 높이가 ‘명징하게 직조’되어 있는 세상의 균열. 아기 울음소리와 비명 같은 고통의 소리들 사이, 전쟁이 낸 균열 사이로 걸어가며, 올란도는 이제 또 다른 언어의 세계로 건너간다.
먼지가 축복처럼 빛나며 내리고, 물과 볕이 얼굴을 적시는 모습은 마치 세례라도 받는 모양 같다. 프랑스어로, 아랍어로 타인과 계속 대화를 시도해왔던 올란도는 이제 전쟁과 지배의 언어를 버렸다. 그때 여성이 되었다는 점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책 제목을 떠올리게 한다. 단지 성별만 다른, 여전히 같은 사람이다. 평소 큰일이 있었을 때처럼 7일 간 자고 일어난 점도 같다. 그러나 이제 사회가 그를 다르게 대한다. 올란도는 언어의 수직선에서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끊임없는 도전을 받는다. 그 도전을 피하는 길은 남편, 아들처럼 사회가 정한 우산 아래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종용을 받는다. 이에 올란도는 자기 자신으로 굳게 서는 방법으로 응전한다. 설령 자신과 닮아 있고 이해의 구석이 있는 셜머딘이 상대라 해도, 올란도는 타인의 일부가 되길 택하지 않는다.
그 무엇의 곁에도 머물지 않고, 올란도는 계속해서 박차고 달린다. 그가 박차고 달리는 것은 과거에 버리고 온, 전쟁과 지배의 언어다. 미로 같은 정원을, 안갯속 들판을 계속 달리며 그는 새로운 세상으로, 새로운 언어의 세계로 나아간다. 영화의 초입부터 불을 든 사람들의 반대 방향으로 걷고 뛰고 있었던 그는, 이제는 임신한 몸으로 전쟁의 포화 속을 달린다. 전쟁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시기의 힌트조차 주지 않는다. 이건 보통 전쟁이 사용하는 언어와는 반대 방식이다.
전쟁은 전쟁만을 명시한다. 보불 전쟁이라든지 펠로폰네소스 전쟁 같은 식으로 승자와 패자를 딱 잘라 명시하고, 뒤켠에 있던 민간인과 피해자들의 기록은 남기지 않는다. 그렇게 모두를 익명성에 가두고 만다. 이 영화는 넘어지면서도 포화를 뚫고 가는 올란도만을 오롯이 비추고, 역으로 전쟁을 익명성에 가둔다. 이는 올란도의 달리기와 나란한 방향이다.
그렇게 영화 <올란도>는 시간을 따라 촘촘히 배치한-사회성과 역사성을 가진- 지배의 언어를 역방향 달리기로 틀어버린다. 억압적인 층위 안에서 유린되어 온 언어의 사필귀정을 꾀하는 시도다. 동시에 이 시도는 자체로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점임을 명확히 한다. 출판사에 건넨 두툼한 원고 더미가, 딸의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가 그 방향성을 드러낸다.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소통의 수단으로만 기능하던 언어는 소통을 풍성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 예술의 경지로 나아간다. 거기서 생명은 피어난다. “더 이상 운명에 붙들리지 않”고, “삶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대사는 그래서 유의미하다.
오토바이 사이드카에 딸을 태우고,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저택에 유유히 걸어 들어서는 올란도의 모습. 그 걸음은 딱딱한 액자 프레임에 갇힌 초상화와는 달리 분명하게 살아있다. 초상화 바깥의 인간 올란도의 얼굴. 남자의 얼굴도 여자의 얼굴도 아닌, 천사의 노래 가사처럼 “인간의 얼굴”이었다. 딸이 손에 든 카메라 속의 천사. 400년을 살아온 이는 앞으로도 “영원히 죽지도 늙지도 않”을 테고, 언어도 그러할 것이다. 발화와 문자 그 너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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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_#3] 철학과 영화 사이 (with. 정태완 감독)
🎙️ Episode 3. 촬영감독 정태완 00:00 자기소개 06:27 철학과 이야기 14:59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 18:18 [날 좋은 날]이야기 19:47 홍상수 감독을 오마주한 [날 좋은 날] 23:20 다시 [날 좋은 날] 이야기 28:13 ‘공감’에 관한 이야기 34:11 영화를 계속해서 연출하지 못한 이유 36:50 종교에 관하여 41:59 촬영 감독으로서의 정태완 43:11 [풀 메탈 브레인] 이야기 & XR 이야기1 45:22 [풀 메탈 브레인]의 연출적인 이야기 47:23 한예종과 XR 이야기2 53:09 앞으로 계획 57:18 마무리 & 쑥스러움에 관한 이야기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는 단편 영화 감독을 만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팟캐스트입니다. 영화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영화란 무엇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 정태완 📍instagram @xowanc 📍사이트 https://j30n9.myportfolio.com/work ◾️ 따옴표 필름 📍 instagram @ddaompyo.film 📍 YouTube @ddaompyofilm 📍 ddaompyofil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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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워 오브 도그] 끝장리뷰(ENG) | 씻지 않는 형, 청결한 동생 | 말과 차 | 기타와 자동피아노 | 수색자 오마주 | 동성애자 형, 이성애자 동생 | 제목 의미
#BenedictCumberbatch #베네딕트컴버배치 #파워오브도그
[파워 오브 도그](2021)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과거 vs 현재(feat. 수색자)
Chapter 2 필의 동성애, 피터의 살인
00:00 은사자상 수상
02:02 대결 구도들
04:44 수색자 오마주
05:59 기타와 자동피아노
06:37 꽃을 태운 이유
07:44 필의 동성애
09:31 피터의 아버지 살해
12:19 별점 및 한 줄 평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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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 메인 예고편
“늦었지만 이제는 해야할 일을 하려고 합니다”
반성 없는 세상을 향해, 그의 복수가 시작된다!1980년 5월의 광주를 잊지 못하고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던 ‘오채근’(안성기)은
소중한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반성 없이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광주 출신의 ‘진희’(윤유선)를 만나며 더욱 결심을 굳히게 된 그는
당시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박기준’(박근형)에게 접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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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푸른 호수> 메인 예고편
내 이름은 안토니오 르블랑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돼 ‘안토니오 르블랑'이라는 이름을 얻은 한 남자.
그에게는 누구보다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 ‘캐시'와 사랑스런 딸 ‘제시’,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가 전부다.
“나는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닙니다.”
어느 날, 억울한 상황에 휘말려 경찰에 붙잡힌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이민단속국으로 넘겨지고,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을 난생처음 알게된 그는 강제추방 위기에 처하는데…
가족을 지키고 싶은 그의 뜨거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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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쑤저우강> 리뷰 - 다층적 해석의 거미줄에 걸린 지독한 사랑 이야기
어릴 적 물고기를 잡기 위해 세차게 흐르는 흙탕물에 발을 담가 본 적이 있다. 사전에 수심이 얕은 곳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탁류에 들어가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이었다. 혹시나 물살에 휩쓸려 자빠지면 현세의 흙탕물이 순식간에 황천길로 바뀔 판이니 당연했다. 양발을 하상(河床)에 안정적으로 고정했다는 안도감이 들고 나서야 제멋대로 흘러가는 거대한 물줄기를 응시할 수 있었다. 흐르는 시간의 힘을 시각적으로 절감했던 순간이었다. 10대 중반이었지만 모든 것은 변화하고 종내 사라진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느꼈을까?
러우예(로예) 감독의 영화 <쑤저우강>은 흙탕물이 흐르는 중국 상하이의 쑤저우강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청춘들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다. 과감한 1인칭 시점 숏, 때로는 불편할 정도로 흔들리는 핸드헬드 촬영,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데 필수적인 주인공의 내레이션 등 내용과 형식 면에서 왕가위(왕자웨이)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가 적지 않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영화의 핵심적 이야기 줄기를 바탕으로 영화의 내적 의미만을 고려한다면 <쑤저우강>은 인어공주 동화를 변주한 비극적 사랑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만 해석하기에는 영화가 관객에게 마련해 준 해석의 공간이 너무 드넓다. 기묘한 액자식 구성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내레이션만 하고 얼굴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 남자 비디오 촬영기사가 도대체 누구인지, 배우 저우쉰이 1인 2역으로 연기한 여자 주인공 메이메이와 무단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마다와 무단의 전설적인 사랑이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 관객은 의심과 혼란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하게 된다. 러우예 감독은 <쑤저우강>을 명쾌한 해석이 불가능한 영화로 만든 것이다.
<쑤저우강>은 '다층적 해석의 거미줄에 걸린 영화'라는 생각을 하며 정성일 평론가가 진행한 라이브러리 톡에 참가했다. 장장 2시간 반 동안 진행된 라이브러리 톡에서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의 내적 구성 요소만으로는 <쑤저우강>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러우예 감독이 직접 경험했던 현대 중국의 비극적 역사를 <쑤저우강>에 겹쳐 놓고 보아야 흙탕물처럼 속이 보이지 않는 감독의 연출 의도가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영화의 안과 밖을 두루 살펴야 영화의 진짜 얼굴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정성일 평론가의 영화에 대한 열정, 고민의 폭과 깊이가 정말 대단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자리를 지킨 관객들에게 따듯한 유대감을 느끼면서 집으로 향했다. (끝)
* 씨네랩의 초청으로 10월 16일 CGV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진행된 <쑤저우강> 상영회와 라이브러리 톡에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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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주 차, 최신 씨네 뉴스
할리우드 파업, 업계 최대 규모의 동반 파업으로진화
미국 작가조합은 임금인상과 근무 조건 개선을 요구, 미국 배우조합은 스트리밍 대기업을 향해 더 공정한 수익 분배와 더 나은 근무 조건을 요구, 인공지능과 컴퓨터로 만든 얼굴과 음성으로 배우를 대체하지 않도록 보장을 요구하고 있는데요.
이 여파로 인해 많은 영화,드라마들이 제작이 대부분 중단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이후 바람 잘 날 없는 영화계 여러분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 관객수 40만 명 기록
일본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한국을 찾는다고 합니다.
영화 <괴물>이 예술영화로는 드물게 누적 관객 수 40만 명을 돌파하면서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내한한다고 하는데요. 고레에다 일본 영화 중 국내 최고 흥행작은 2013년에 나온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였는데 이를
제치고 <괴물>이 최고 흥행작으로 올라섰습니다.
<비프> 고른글로브 3관왕
한국계 제작진과 배우가 뭉쳐 만든 넷플릭스 시리즈 <비프>가 올해 골든글로브 3관왕에 올랐습니다.
TV 미니시리즈 및 영화 부문 작품상에 호명된것은 물론 스티븐 연, 앨리 웡이 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두었습니다. 스티븐 연은 에미상 미니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오르면서 이번 골든글로브
수상으로 향후 에미상 수상 가능성도 커졌습니다.
외계+인 2부 박스오피스 1위
<외계 +인 2부>가 예매 관객수 10만명을 넘기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섰습니다. 전작 1부에서는
154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며 흥행에 실패했는데요. 1부에서 다소 복잡했던 서사의 타래가 2부에서
정리되면서 매듭을 잘 맺었다는 만족으러운 호평이 대체로 많은것과 1부가 OOT를 통해 재평가를 받으며
유입된 관객층을 기대하며 흥행을 기대해봐도 좋을것 같습니다.
티모시 샬라메 <웡카> 북미 박스오피스 1위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하며 총 세 차례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웡카>.
티모시 샬라메는 <웡카>를 통해 자체 최고 흥행작을 경신하며 연기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배우로 떠올랐습니다. 전 세계 달콤한 흥행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웡카>는 오는 31일 전국 극장으로
찾아온다고 합니다.
봉준호 신작 미키 17 개봉 연기
<외계 +인 2부>가 예매 관객수 10만명을 넘기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섰습니다. 전작 1부에서는 154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며 흥행에 실패했는데요. 1부에서 다소 복잡했던 서사의 타래가 2부에서 정리되면서 매듭을 잘 맺었다는 만족으러운 호평이 대체로 많은것과 1부가 OOT를 통해 재평가를 받으며 유입된 관객층을 기대하며 흥행을 기대해봐도 좋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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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일본이 같은 재료로 다르게 끓여낸 이 영화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라는 영화가 오픈했다. 제목만 보고 감이 왔는데, 이 영화는 일본에서 한 차례 개봉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내용이 같을 텐데, 한국판만 보면 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생각을 고쳐먹고 둘 다 봤다. 결론적으로 두 영화 모두 소재와 플롯 진행만 비슷하고 세부적인 것들은 판이하게 다르게 세팅되어 있는 극본이다. 하지만 두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같은데, 두 영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보자.
1. 등장인물의 배치가 같지만 역할이 다른
이 시나리오에는 공통적으로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사람이 있고, 그걸 줍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떨어뜨리는 사람 주변에 그를 사랑하는 애틋한 관계의 사람들이 더러 등장한다.
일본판에서는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것은 남자이고, 그걸 주운 범인은 떨어뜨린 당사자의 폰을 해킹하며 그의 여자친구를 노린다. 성적인 도착증이 있는 남자의 성범죄임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관계가 핸드폰을 떨어뜨린 마코토와 그의 여자친구 아사미의 굳건한 사랑이다. 아무리 해킹을 통해 범인이 이들을 교란시켜도 결국 이들을 구해내는 것은 이들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판으로 오면, 마코토와 아사미 vs 범인의 구도가 달라진다. 애초에 범인이 한 여성이 떨어뜨린 핸드폰을 줍는다. 하지만 피해를 당한 여성인 나미와 범인의 1:1 대결이 눈에 띈다. 일본판에서는 여성 혼자 범인을 상대하는 것은 힘이 드니 그를 지키는 남자가 필요한 것 같았다면 한국판에서는 그저 피해자와 범인의 한판 승부 같은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였을까 개인적으로는 남녀에 대한 구분 없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직접 대결이 돋보이는 만큼 한국판이 한층 더 빠르고 시원한 전개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일본판에서는 엄마의 학대로 인해 성적인 도착이 생긴 범인을 그렸다면, 한국판에서의 범인은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를 사회 안전망으로 이끌어줄 참된 어른이 없었음을 암시하긴 하지만 특별히 성적인 도착증이 보이진 않는다.
2. 범인은 추적해 내는 과정
일본판에서는 범인이 누구일지 추적하는 과정이 메인 플롯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가서야 범인이 누군지 등장하는 전통적인 추리 전개를 보여준다. 마지막에 범인이 밝혀지며 놀라움을 자아내게 되긴 하지만 그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몇 가지 무리수가 보이기도 한다.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해 내는 것이 영화를 보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중간에 범인일 법한 인물들을 낚시하기도 하는데, 그중 하나가 신입 경찰인 마나부이다. 그가 범인과 똑같이 여성의 긴 머리칼에 대한 집착이 있음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범인일까'하는 의심을 심어주는데, 그 모습이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어 오히려 범인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들게 한다. 엄마에게 학대를 당해 사랑받지 못한 유년에 대한 보상 심리로서 여성의 머리카락에 집착하는 모습을 가졌다는 범인과의 공통점으로 범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경찰이 있다는 설정이 영화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아사미가 범인을 인식하는 것은 납치되고 나서이기 때문에 아사미와 마코토는 경찰이 출동하기 전까지 그저 범인에게 당하기만 한다.
하지만 한국판에서는 처음부터 범인을 보여주고 시작한다. 그래서 범인이 어떻게 나미를 농락하는지 보여준다. 범인을 초반부터 의도적으로 보여주는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범인의 교활함과 잔인성이 부각된다. 한국판에서는 일본판과 다르게 몰카도 등장하는데, 범인은 철저히 사이버 범죄가 인간의 삶에 해할 수 있는 극단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이는 나미의 생활 전선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극단에 몰리자, 나미는 범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범인을 교란하기에 이른다. 일본판과는 달리 피해자가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상황을 반전시켜 보려고 발버둥 치는 부분이 매력적인 서사 포인트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나미를 각성시키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점에서 남녀 간의 사랑이 소재로 한 일본판과는 다르게 한국판에서는 가족 간의 사랑이 두드러진다.
3. 궁극적인 두 영화의 공통점
두 영화 모두 현대 사회에서의 SNS로 다져진 사랑, 신뢰, 우정 등은 알량한 말에 불과하고 끝나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유야 어떻든 두 영화 속 범인들은 극단의 외로움에 지쳐 복수 심리로 자신처럼 나미도 철저한 외로움의 세계로 끌고 가려는 의도가 보이고 그 절망의 순간에서 사람을 죽이면서 자신만의 쾌락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결국 SNS의 얄팍한 관계성뿐만 아니라 진정성 있는 1:1 만남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SNS 속 관계도 인정받을 만한 관계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갈수록 위험해져 가는 사회의 안전망이 되어줄 정도인지 반문하게 되는 영화이다. 두 영화 모두 스마트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스마트폰의 분실이 생각한 것보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내 정보는 언제든 털릴 수 있는 세상이니까. 그가 마음만 먹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4. 총평
둘 중에 하나를 봐야 한다면 한국판만 봐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한국판이 가진 서스펜스가 더 밀도 있고 일본판 특유의 현대인의 삶을 설명하려는 구구절절한 대사가 없어서 빠르게 몰입할 수 있다. 전개와 결말이 완전히 다른 영화지만 결론적으로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기에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한국판을 추천한다. 아, 그리고 임시완 배우의 연기는 너무 잘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 맑은 눈이 살인자 연기에까지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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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문제 맛보기
호주에서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했다는 <드라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진실을 감추고 온전히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가뭄이라는 뜻의 제목 <드라이>에 맞게 영화는 오랜 기간 가뭄이 이어진 마을 키와라를 배경으로 해들러 일가족 사망 사건을 파헤쳐 나간다. 가물어져 바닥이 갈라지고 땅의 맨바닥이 드러나는 장면이 영화 곳곳에 배치되지만 진실은 갈라진 바닥에 숨어 도통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된 애런 포크(에릭 바나 분)는 그 진실을 찾아 마을을 샅샅이 뒤지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20년 전에 벌어진 엘리 디컨의 죽음에 사사건건 부딪히고 해들러 가족의 죽음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지만 갈라진 키와라의 땅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엘리 디컨은 죽었을 때 바지 주머니에 애런의 이름이 적힌 메모지를 넣은 채 발견되었는데 이로 인해 애런은 엘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여겨져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가물어질수록 작물은 말라가고 사람들도 함께 죽어가지만 애런은 도저히 진실을 찾을 수가 없다. 왜 <드라이>는 하필 가뭄이 든 마을을 배경으로 한 것일까?
엘리 디컨이 죽었을 때의 정황 중 특이점은 엘리가 강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사건이 말라가는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는 정 반대다. 또한 애런의 회상 신은 대부분이 강가를 배경으로 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친구인 루크, 그레첸, 엘리와 강가에서 놀곤 했던 애런은 엘리에게 짖궂은 장난
이라기엔 엘리가 죽을 뻔했지만을 치던 루크 해들러를 떠올리며 루크가 정말로 자신의 가족을 몰살하고 자살했을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하지만 루크의 부모님은 그럴 리 없다며 애런에게 수사를 부탁한다. 확실히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은 이상한 점이 많다. 막내딸인 갓난 아이만이 살아남았다는 점이나 사살에 사용된 탄약이 평소 루크가 사용하던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는 것 등이다. 강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던 엘리와는 달리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은 가물어진 마을 한복판인 집에서 벌어진다. 물을 배경으로 죽음을 맞이한 엘리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그 진실을 알려주지만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은 가물어질수록 증거가 하나씩 드러난다. <드라이>의 배경이 가물어진 마을을 배경이어야만 했던 이유는 건조한 날씨에 서로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가는 긴장감을 상징하는 동시에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에 관한 진실이 밝혀지는 배경으로서도 가뭄이 유용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한편 가뭄 이외에 영화는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지만 어느것 하나 깊이 들어가지 않고 맛보는 데 머문다. 엘리가 죽었을 때 애런은 루크와 사건 정황에 대해 입을 맞추는데 같이 다른 곳에서 토끼 사냥을 했다고 거짓말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회상장면이 지나가고 나면 성인이 된 그레첸(제네비브 오라일리 분)이 실제로 토끼 사냥을 하고 있다. 이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 밝혀지는 진실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죄없는 토끼가 날조에 이용되거나 마당에 숨어든다는 이유로 사살당해도 되는지 관객에게 의문을 품게 만드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고많은 야생동물 가운데 토끼가 사살 대상이 된 이유는 작고 연약한 동물인 동시에 빠르지 않아 쉽게 사살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는 20년 전 죽은 엘리 디컨에 대한 비유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엘리의 죽음은 엘리에 대한 애도보다 애런과 루크에 대한 혐오 면에서 더 크게 작동한다. 평소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소녀임에도 엘리가 죽자 마을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고 비난할 누군가를 찾는다.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알리바이가 딱히 있지도 않았던 애런과 루크는 엘리의 죽음에 책임을 지게 되고 결국 애런은 아버지와 함께 마을을 떠난다. 이 부분 또한 서로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진실 그 자체를 찾기보다는 그저 비난에 초점이 맞춰지는 사회현상을 가볍게 보여주지만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영화는 현상을 바라볼 뿐이다.
엘리의 죽음은 의문투성이인 동시에 관객은 애런이 20년 전에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혼란에 휩싸인다. 그렇다면 애런은 20년 전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을까? 애런이 사실대로 말했다면 애런은 엘리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음에도 책임을 져야 할 판이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거짓말은 용인되는 것인지, 혹은 애런이 무고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음에도 아버지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는 것이 당연한지 은연중에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도 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가 관객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지 궁금해하지만 수많은 질문 가운데 초점이 맞춰지는 질문은 없다. 이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20년 후 일가족의 몰살까지 이어지지만 사실 엘리 디컨의 죽음과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은 독립적인 사건임이 영화가 진행될수록 드러난다. 영화가 무심코 던져주는 질문들은 영화 진행을 위한 맥거핀으로 기능하며, 애런은 이 맥거핀을 충실히 따라가며 관객의 혼란을 유도하는 동시에 본인도 혼란 속으로 들어간다. 애런이 이 혼란을 벗어나는 것은 결국 윤리적인 질문을 피해 객관적인 증거를 다시 한번 살펴보는 순간이다. 사건에서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모두 걷어내고 객관적인 실체를 마주한 애런은 사건의 진상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가물어진 마을에서 얼마 안되는 숲에 불이 질러질 위험으로부터 마을을 구해내고 숲 또한 보전된다.
숲이 보전되었다는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더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혀낸 애런은 다시 마을을 떠날 채비를 하며 엘리를 기리는 마음으로 숲을 향한다. 엘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반대로 애런의 감정이 촉발한 행동에서 드러난다. 엘리와 시간을 보내곤 했던 장소에서 엘리에게 작별인사를 하려던 애런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결국 엘리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알게 된다. 엘리의 죽음에 진정으로 책임이 있는 자가 밝혀질 때 또다시 영화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가볍게 관객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이 역시 깊이 들어가지 않고 맛보기만 함으로써 관객은 다시금 어리둥절해진다. 영화는 이런 사회적 현상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 문제들을 단순히 몰입감을 위한 장치로서 소비할 뿐인가. <드라이>는 밀도 높은 서사를 가지고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영화지만 사회적 문제들을 맥거핀으로 소비한다는 측면에서는 아쉬운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가 끝나면 이제 관객은 현실로 돌아와 영화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을 맞닥뜨려야 한다. 영화가 묘사한 다양한 종류의 혐오들은 정당한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허용할 수 있는 거짓말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몰입도 높은 수사 서사를 가진 <드라이>가 모든 진실을 알려준 후에도 극장을 떠나는 관객의 뒷맛이 깔끔하지 않은 이유다.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