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혁2022-12-04 15:25:30
루피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원피스 필름 레드 / ワンピース フィルム レッド, 2022
무슨 말이 필요할까?
2022년 기준. <원피스>는 단행본 역대 누계 부수 5억 1000만 부로 일본 만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만화가 되었다.
이번 <원피스 필름 레드>은 일본 박스오피스 11주 연속 1위와 북미 박스오피스 2위 등. 역대 일본 박스오피스 9위에 이름을 올릴 만큼의 흥행과 반응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대해적 시대.
노래 하나로 전 세계를 사로잡은 디바 ‘우타’를 보기 위해 밀짚모자 "루피"와 해적단, 그리고 해군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이 콘서트에는 그들도 모르는 ‘우타’만의 속내가 드러나는데...
1. 원피스를 모르진 않겠죠?
제목에는 없지만, "극장판"에 속하는 <원피스 필름 레드>는 "원피스"라는 이름만으로도 진입장벽이 높은 영화이다.
"극장"이라는 곳에 맞게 제작된 영화이나 예습이 반강제적으로 필요한데, 그게 새로운 관객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존 작품의 주인공 "루피"외에도 이번 극장판에 "우타"라는 캐릭터가 새로이 등장한다!
이런들 저런들 공부가 필요한데, "우타"의 등장에 "시리즈"만이 누릴 수 있는 쌓여있는 설명들로 이해하게 만든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우타"는 "샹크스의 딸"이다! - "샹크스"는 "루피"가 해적을 결정하게 된 동기를 만든 캐릭터이다.
이로 "우타"에게 필요한 이목은 채웠지만, "왜?"라는 동기가 남았다.
기존 작품에서도 다뤄지지 않은 <필름 레드>만의 오리지널 스토리인만큼 어설프게 말한다면, "기존 캐릭터(샹크스)"를 끌어들인 팬들의 원망도 만만치 않을 거다.
그런 점에서 이번 <원피스 필름 레드>는 "디즈니 프린세스"를 앞세운 "뮤지컬"이 떠오른다!
2. 노래는 좋은데, 말이지!
<101마리 달마시안, 1996>의 악당 "크루엘라"를 연상시키는 머리도 있겠지만, 노래를 부른다는 설정이 가장 크다!
극 중. "EDM"를 비롯해 "댄스 - 록발라드"까지 폭넓은 장르의 음악들을 "우타"의 노래만으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이외에도 큰 스크린으로 보는 퍼포먼스는 "공연 실황"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하는 "팬무비"와 크게 다르지 않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이 부분이 가장 해당 작품의 호불호를 가리는 기준이 되지 않을까?
결국, <필름 레드>는 "원피스"라는 작품을 기반하여 만들어진 작품으로 그 기대치는 "뮤지컬"이 아니라 "액션"에 있다.
소위, "갈아 넣었다"라는 표현을 쓰기에 부족하기도 했고 분량 자체도 후반부에 몰려있어 적기도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아쉬운 점은 이번 <원피스 필름 레드>에 맞춰 자신 있게 내놓은 "뮤지컬"에 있다.
많이 언급되고, 지적되는 "뮤지컬"의 고질적인 문제는 기존 캐릭터들의 대사를 노래의 가사로 변환시키는 "사운드"에 있다!
이번 <필름 레드>에서도 이 점이 지적되는 게 "우타"의 대사 톤과 노래를 부르는 톤이 급격한 게 달라진다. - 그도 그럴 것이 노래는 기존 성우 "나즈카 카오리"가 아닌 "Ado"가 부른다!
결국, 매번 좋은 노래들이 시작하는 데에 관객들은 늘 손발을 쥐게 만든다.
3. 디즈니 프린세스에서 더 벗어나서...
그럼에도, <원피스 필름 레드>는 재밌는 작품이다!
"우타"의 노래가 처음 소개되는 과정에는 현재,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들이 보이고, "전쟁"으로 피해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공감대를 쌓아가 위로하는 모습은 스크린 너머 우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영화가 선택한 "노래"는 여타 매체들에서 차용했던 "화합"으로 활용되나 <필름 레드>는 이보다 한 발 더 앞서나간다!
여기, 관객들을 설득시킬 "우타"의 동기에 "플래시백"까지 사용하나 관객들을 설득하는 데에 일부 과한 연출들도 눈에 보인다!
극 중. "해군"이 능력에 조종되는 민간인들을 향해 총을 쏘는 모습과 다르게, 해적 "샹크스 패밀리"는 보호하는 장면이 그러한데, 의도적으로 '선과 악'의 구도로 만들려는 단순한 서사에는 아쉬움이 생긴다. - 해군 측의 "아카이누"가 공격을 허락하고, "키자루"는 이를 시도하니...
· tmi. 1 - 쿠키 영상 1개가 있다.
· tmi. 2 - "코요테"가 부른 <우리의 꿈>은 국내에서 만든 창작곡으로 인기는 다 아시죠?
Relative contents
-
- <프리 가이> 세상 모든 NPC에게 전하는 희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라이언 레이놀즈 주연의 <프리 가이>는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상상하는 모든 것이 가능해지고 폭력이 난무하는 게임, '프리 시티'의 모습은 포트나이트와 GTA 시리즈를 닮았다. 주인공 '가이(라이언 레이놀즈)'가 자신의 현실이 진짜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스토리 라인, 주어진 각본에서 벗어나려는 주인공과 그를 보며 당황해하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트루먼쇼>가 보인다.
저작권 제국인 디즈니의 힘을 빌린 크리스 에반스의 카메오 출연 및 캡틴 아메리카 방패, 헐크의 팔, 스타워즈 광선검 같은 이스터에그의 등장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을 연상케 한다. 코나미를 비튼 게 분명해 보이는 게임회사 수나미의 존재 역시 <레디 플레이어 원>만큼이나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준다. 작중 게임과 현실을 넘나드는 가이의 존재감 또한 영화와 현실 사이 '제4의 벽'을 넘나들던 라이언 레이놀즈의 인생 부캐, 데드풀에 비견될 만하다.
그러나 <프리 가이>를 단순히 수많은 레퍼런스가 집합한 오락 영화로 치부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 달리 주인공을 게임 속 NPC로 설정한 결과, <프리 가이>는 현실에서 NPC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는 물론, 그 이상의 희망을 주는 영화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날강도와 피 튀기는 총격전이 공존하는 버라이어티한 도시, 프리 시티에서 평범한 은행원의 삶을 살아가던 '가이'는 거리에서 우연히 '몰로토프 걸(조너 코디)'과 마주치고, 한눈에 그녀에게 반해버린다. 그런 그에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사실 '밀리'이고, 가이가 보는 자신의 모습은 그저 게임 속 플레이어일 뿐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알려준다. 또한 자신과 자신의 동업자 '키즈(조 키어리)'에게 가이는 자신들이 개발한 게임을 프리 시티의 개발자 '앙투안(타이카 와이티티)'이 무단으로 도용한 증거를 찾을 때 도움이 되는 npc에 불과하다고도 말한다. 이에 그녀를 만나 마침내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믿었던 가이는 큰 좌절과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 <프리 가이> 역시 주인공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남겨두지 않는다. 진실을 깨달은 가이는 절친이자 은행 경비원인 '버디(랄렐 호워리)'를 찾아가 이 세상이 사실 가짜이고 계획된 시나리오대로 진행되는 것에 불과하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버디는 이렇게 답한다. 세상이 진실이든 아니든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찰나의 순간과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이러한 버디의 말을 들으면서 가이는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갈 동력을 얻고, 그는 자신의 세계인 프리 시티를 구하기로 결심한다.
사실 <프리 가이>의 중심 플롯을 뒷받침하는 메시지, 곧 지금 마주하는 찰나의 순간에 집중하고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면서 살자는 격려는 낯설지 않다. 일례로 이는 작년에 큰 반향을 일으킨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개개인을 마모시키고 파편화하는 사회에서 무작정 목표만을 쫓기보다는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두고 지금 이 세상을 즐기자는 <소울>의 메시지도 재즈 음악을 만나 현대인들의 지친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진 바 있다.
하지만 익숙함과 별개로 <소울>의 위로에는 야누스의 두 얼굴 같은 일장일단이 있기도 하다. 당장의 삶이 고달픈 이들에게는 따뜻한 위로이지만, 그러한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그 위로는 언제든 마약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구조적 모순과 현실의 문제를 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프리 가이>는 <소울>의 따뜻함 이면에 숨어 있는 이 함정을 영리하게 피해 간다. 그 중심에는 가이가 NPC라는 설정이 위치한다. 이 설정을 통해 <프리 가이>는 현대인들의 삶을 가이의 삶에 일치시키고, 자칫 평범할 수 있었던 위로를 실천적인 희망의 메시지로 탈바꿈시킨다.
작중 NPC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면 종속성을 꼽을 수 있다. NPC는 자기 결정권을 지니는 일반 플레이어와 달리 게임이라는 세상 안에서 미리 결정된 방식대로 움직여야만 한다. 그들은 주어진 시나리오에 갇혀 있으며, 심지어 규칙에서 어긋나는 것을 불편해하며 스스로를 그 시나리오에 가두려고 한다. 버디는 가이로부터 불편한 진실을 들은 후에도 애써 이를 무시하려 한다. 카페 사장은 늘 마시던 커피가 아닌 카푸치노를 달라는 가이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매일마다 강도를 만나는 행인은 항복의 의미로 들어 올린 두 손을 좀처럼 내리지 못한다. 밀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가이도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이때 NPC들이 스스로를 게임의 규칙 속에 가두는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 작품에 정서적으로 강한 유대감을 느끼게 한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게임 밖 현실을 사는 현대인들도 NPC처럼 일정한 규칙에 순응하게끔 스스로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근대적 감옥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고찰한 결과, 푸코는 감옥 체계가 공장, 학교, 병원 등과 같은 감옥 밖의 현상과 밀접한 상호 관련성을 지닌다고 지적한다. 판옵티콘을 닮은 사회 안에서 현대인들은 전반적으로 규율과 규범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다. 당장 교사가 학생을 감시할 수 있는 교실 구조, 불법 인터넷 사이트에 뜨는 유해정보 차단 알림 화면, 도로 구석구석 깔려 있는 cctv 등은 현대인들이 자기 자신을 감시, 감독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스스로를 통제하고 규칙에 종속시킨다는 공통점 덕분에 그저 한 NPC의 판타지였던 <프리 가이>는 이제 현대인들의 일기나 다름없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푸코가 감시 사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제안한 내용을 가이가 실천에 옮긴다는 사실로, 바로 이 대목에서 <프리 가이>는 동병상련의 위로를 넘어서는 실제적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푸코는 사회가 우리에게 부과한 한계를 분석하고, 그 한계를 위반할 가능성을 모색해야 하며, 가능한 경우 변형을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사회가 제시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만의 규칙에 맞는 삶을 살아야 억압적인 사회와 권력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작중 가이는 이 모든 일을 해낸다. 그는 밀리의 도움과 자신의 노력을 통해 프리 시티라는 게임, 곧 사회의 오류를 발견한다. 이후 자신에게 부과되었고 본인이 이유도 모른 채 유지시켜 온 라이프 스타일을 거부한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커피를 마시며 은행에 출근해서 똑같이 은행 강도를 만나야 했던 그는 의식주를 바꾸는 것은 물론 직접 은행 강도를 때려눕히기까지 한다.
심지어 영화는 가이의 이타심과 연대라는 키워드를 통해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이는 주인공 '가이(guy)'의 이름이 남녀 상관없이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을 뜻하는 단어이고, 그에게 깨달음을 주는 친구의 이름이 문자 그대로 친구라는 의미인 '버디(buddy)'인 이유이기도 하다. 가이는 자신이 깨달은 진실을 주변인들에게도 전파한다. NPC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게임 플레이어들만의 세상을 발견한 후에는 새로운 세상의 재미를 버디와도 함께 나누려고 한다. 프리 시티가 게임 개발자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의 것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게임 속 모든 NPC들을 불러 모아서 불편한 진실을 전하고, 모든 순간순간을 가치 있게 살겠다는 자신의 다짐도 공유한다.
카페 사장은 늘 만들던 커피가 아니라 카푸치노 같은 새로운 메뉴들을 만들어 내고, 매일 강도를 만나 손을 번쩍 올려야 하던 남성은 그 손으로 주먹을 쥐어서 강도를 때리려고 노력한다. 플레이어들에게 퀘스트가 되어주는 대신 NPC끼리 한 데 모여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파업하기도 한다. 이렇게 가이와 친구들이 진정한 자유로 가득한 도시, 프리 시티를 일구어내는 모습을 보면 이미 NPC들과 한 마음인 관객 역시 일상 속 작은 변화를 통해 현실의 큰 변혁을 이끌어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프리 가이>는 단순한 개인적 차원의 위로가 아니라 보다 실천적인 희망으로 이해될 공간을 남겨둔다.
다만 <프리 가이>를 현대인이라는 NPC에게 각성의 희망을 건네는 영화로 이해할 때, 이 작품의 결말은 유난히 짙은 아쉬움을 선사한다. <프리 가이>는 애매한 비중을 차지하던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를 급진전시키면서 마무리된다. 이때 로맨스가 부자연스럽게 부각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도 자아를 찾고 자신만의 세상을 일구어낸 가이의 의미를 다시금 제한한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다. 로맨스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가이를 마치 게임 개발자의 아바타처럼 묘사하면서 대담한 전개에 스스로 제동을 거는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은 <프리 가이> 속 다른 단점들마저 가려버린다. 게임 속 이야기에 비해 게임 밖에서 밀리와 키즈가 앙트완과 대립하는 플롯의 몰입도가 부족한 것과 게임회사의 모든 작업이 엔터 키 하나로 처리되는 편리한 전개 등은 결말이 남기는 물음표에 압도된다. 개개인이 자신에게 부과된 한계를 극복하기를 바라는 영화가 정작 본인에게 부여된 상업영화라는 한계는 이겨내지 못한 상황이 펼쳐진 셈이다. 이렇게 <프리 가이>는 짜리한 해방감만큼이나 짙은 미련을 안기며 결승선 코앞에서 발을 헛디딘 채 마무리된다.
A(Acceptable, 무난함)
세상 모든 사람이 진정한 프리 시티를 만들 날을 희망하는 영화
* <괴물과 함께 살기>, 정성훈, 미지북스, p.155-157
** 같은 책, p.162-163
-
- 진정한 '나'로 거듭나게 해줄 꿈
** 본 리뷰는 <마이 뉴욕 다이어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독: 필리프 팔라도
출연: 마가렛 퀄리, 시고니 위버, 더글러스 부스 등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01분
개봉일: 2021.12.09
작가 지망생 조안나, 꿈에 닿기까지
1995년 미국, 작가 지망생 '조안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부푼 꿈을 안고 뉴욕에 입성한다. 뉴욕의 허름한 아파트에 살고, 한가로운 카페에서 담배를 피며 글을 쓰는 여느 작가들처럼. 꿈을 위해 남자친구와 이별 후 뉴욕에 사는 친구의 아파트에서 생활을 하던 조안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자리를 구한다. 그렇게 그는 작가의 꿈을 잠시 접어둔 채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작가 에이전시의 CEO인 '마가렛(시고니 위버)' 밑에서 비서로 일하게 된다.
조안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작가 'J.D. 샐린저'를 담당하며 작가에게 온 팬레터를 관리하게 되는데, 샐린저 작가는 답장을 하지 않는다는 기계적인 응대만을 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일개 직원인 조안나는 마가렛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지만, 작가적 마인드가 활활 타오르는 그의 심리 상태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몇 개월동안 기계적인 업무만 처리하며 작가를 꿈꾸었던 과거의 꿈을 잊어가던 찰나에 조안나는 다시금 자신의 인생을 뒤바꿀 큰 결심을 내린다.
꿈과 현실 사이의 고민
조안나는 잡지에 자신이 쓴 시를 등재한 경험이 있는 어엿한 작가 지망생이지만, 뉴욕에 온 후 쉽사리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결국 글쓰기라는 자신의 열망을 잠시 접어두고 작가 에이전시에 취직하여 자신의 롤모델의 뒷켠에서 남들의 원고를 지켜봐야만 했다. 이러한 조안나의 행보는 순수하게 꿈을 좆던 어린 대학생이 현실이라는 벽 앞에 부딪혀 돈을 벌기 위한 다른 직업을 택하는 모습과 굉장히 닮았다. 이러한 청춘들의 삶은 1995년이나 2021년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2021년인 지금 취업난이 더욱 심화되었다.)
조안나는 매일 같이 에이전시에 출근하며 단순 반복 작업을 수행하면서도 자꾸만 글에 대한 열망이 샘솟는다. 마가렛의 지시를 어긴 채 팬레터에 답장을 보낸 것 또한 상상력과 문학적 감수성이 넘치는 조안나의 성격이 드러난 부분이다. 하지만 작가를 조수로 쓰지 않는다는 마가렛의 신조 때문에 조안나는 이러한 성향을 최대한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조안나는 작가가 아닌 작가 에이전시 직원으로서의 능력도 출중했다. 몇 개월동안 근무하며 마가렛의 신임을 얻었고, 단독으로 서적 판매에도 성공하는 등 직장에 성공적으로 적응해 나갔다. 그에게도 나름대로 안정적인 길이 펼쳐진 셈이다. 하지만 조안나는 고민 끝에 에이전시를 박차고 나와 다시 글을 쓰고자 한다. 결국 현실과 꿈 사이의 기로에서 꿈을 택한 것이다. 누군가는 좋은 직장을 마다하고 모험을 나선 조안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청춘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모두가 마음 속에 품고만 있던 꿈에 대한 열망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공감할 수 있다.
디지털 VS 아날로그, 책의 미래는?
1990년대는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이전의 아날로그 문화와 새롭게 나타나는 디지털 문화가 혼재된 시기였다. 극중 작가 에이전시의 CEO인 '마가렛'은 아날로그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컴퓨터를 비롯한 최신 기기들을 흉물 보듯 대하고 타자기를 활용한 작업을 고집한다. 그는 디지털 기술로 인해 시행된 전자책 산업을 비판하며 이같은 기술의 발전이 출판업의 종말을 불러올 것이라 한탄하기까지 한다.
반면, X세대인 조안나는 타자기보다는 데스크탑으로 원고를 타이핑하는 것을 더 편리하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는 분명 문명을 대하는 태도가 마가렛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젊은 사회초년생을 대표하는 조안나가 과연 훗날 종이책을 버리고 전자책만을 사용하게 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세대에 관계없이 문학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감성 하나만은 모두가 동일하다. 종이책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따뜻한 정서와 마음을 향한 울림이 있기 때문에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여전히 종이책을 꾸준히 소비한다. 따라서 마가렛의 입장은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의 완고한 고집은 문학에 대한 사랑과 헌신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충분히 이해는 간다.
'아무개'에서 '나'로 불려지기까지
조안나는 '샐린저' 작가로부터 첫 전화를 받았을 때 자신의 직책과 이름을 소개하지만 청력이 좋지 않았던 작가는 그를 '수잔나'라고 제멋대로 부른다. 주인공도 이러한 작가의 부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데, 작가 본인에게 일개 직원의 이름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안나의 자리는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인원으로 대체된다 할지라도 회사나 작가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고, 누구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조안나는 샐린저의 업무를 관리하며 그와 계속 통화를 하게 되는데, 그에게만큼은 자신이 글을 쓴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샐린저 또한 조안나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계속해서 글을 쓰라는 말을 강조한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퇴사를 앞둔 조안나는 베일에 쌓여 있던 샐린저를 드디어 마주하는데, 그는 처음으로 '수잔나'라는 별칭 대신 조안나라는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준다. 이는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을 할 때, 비로소 온전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해석으로 비춰진다. 자신의 꿈을 잊고 무기력하게 회사에 소속되어 '아무개'로 살아가는 삶이 아닌 꿈을 향해 용기를 갖고 나아가는 삶을 살아보자는 감독의 응원이 아닐지.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시사회에 초청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 <그녀 her>, 인공지능에게 배우는 사랑
2013년 개봉해 아카데미, 골든 글로브, 미국 작가 조합상의 각본상을 받은 영화 <그녀 her>는 2025년을 배경으로 한다. 이전부터 미래를 다루고 있는 SF 영화들은 배경이 되는 미래가 현재가 되었을 시점이면 다시 거론되고는 한다. 지난 2015년, <백 투 더 퓨처>가 얼마나 현실이 되었는가에 관해 얘기했듯 말이다. 그래서 현재를 배경으로 상상을 펼쳐낸 과거의 SF 영화를 통해 현재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는 인공지능 서비스와 사랑에 빠진 남자 주인공, 테오도르의 이야기를 다룬 SF 로맨스 영화다. 영화계에 로봇과 AI(인공지능)를 소재로 창작된 영화는 많다.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인간이 통제 가능한 범위를 넘어 발전한 로봇과 AI가 공격적인 자아를 띠며 인간을 공격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아이, 로봇>은 로봇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벌어진 로봇의 살인 사건을 다룬다. <A.I.>는 인간과 감정을 지닌 로봇의 구분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녀>는 인공지능을 통해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녀>의 한국 포스터와 인공지능 시스템을 다운로드하는 주인공 테오도르(역 호아킨 피닉스) (C) 한국 배급 ㈜더쿱
<그녀>의 주인공 테오도르는 편지를 대필해 주는 회사에 근무한다. 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이전 편지와 사진 등을 통해 유추해 대신 작성하며 음성인식으로 타이핑된 글자를 필기체로 편지지에 인쇄해 낸다. 아내와 이혼 소송 중에 있는 그는 홀로 지내던 중 ‘당신을 이해하고 귀 기울이며 알아줄 존재’라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서비스를 구입한다. 스스로를 ‘사만다’라고 부르는 인공지능을 만난 테오도르는 처음에는 거리감을 느끼다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공유하다 더 깊은 감정을 나누게 된다.
‘올해 가장 독창적인 로맨스 – New York Times’라는 한국판 포스터의 홍보 문구와 같이 <그녀>는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애초에 이 영화를 로맨스 영화라고 불러도 괜찮을지 의문도 든다. <그녀>는 담백하게 흘러가지만 묘하게 기시감이 들고 불안감이 느껴진다. 어딘가 불편하고 잘못된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게 주인공이라는 캐릭터의 경험에 관객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닌, 제삼자로 이야기를 접하게 함으로써 영화는 인간들 간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만든다. 그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찬찬히 풀어보도록 할까.
모두가 무선 이어폰을 끼고 각자의 일을 하는 영화 속 미래와 인공지능에게서 걸려오는 전화 (C) 한국 배급 ㈜더쿱
편안함과 불안감을 동시에 선사하는 영화
앞서 말했듯 영화는 2013년에 공개된 2025년의 모습을 담고 있다. 12년이라는 어쩌면 그다지 머지않은 미래를 다루기 때문일까, 영화 속 2025년은 꽤 현실적이다. 무선 이어폰을 끼고 공중에 얘기하는 사람들, 구두로 하는 컴퓨터 타이핑, 인공지능이 읽어주는 메일, 노래를 창작하는 인공지능 등 모습이 오늘의 우리에겐 크게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배경은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으며, 그 부드럽고 차분한 색감은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영화 내내 알 수 없는 감정이 관객을 영화의 마지막까지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영화의 도입부, 전화로 밤을 달래는 테오도르의 장면 속 주인공의 상상과 상대의 욕구는 관객에게 의도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게 만든다. 많은 점에서 잘못된 그 상황을 통해 영화의 주인공이 불안하며 다소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처해있음을 알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불편함과 불안감에는 기존에 관객들이 가지고 있을 영화 속 인공지능에 대한 이미지도 한몫한다. 수많은 영화에서 과도하게 발전한 인공지능은 다소 잔혹하며 인간에 해로운 존재로 등장한다. 물론 그런 영화들에서는 인간적인 면을 가진 인공지능이 등장해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관객에게 남긴 것은 ‘인공지능은 과하게 발전하면 인간에게 해로울 수 있다’라는 인상이다. 게다가 ‘영화’라는 특성상 무언가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지 자연스레 대비하게 되는 관객은 다음 장면에서 중대 사건이 발생하지는 않을지 걱정하게 된다. 인공지능의 공격성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트루먼쇼>처럼 이 모든 것이 거짓이었고, 사실 사만다는 살아있는 사람이자 단순히 일로써 행동한 거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영화 내내 함께 한다.
심지어 영화 속 인공지능, 사만다는 지속적으로 예상치 못한 면을 보임으로써 긴장을 더한다. 보이스피싱과 인공지능의 개인정보 유출 위협 속에서 사는 2025년의 인간에게 사만다의 작동 범위는 다소 불안하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모든 개인정보를 그의 허락 없이 접속할 수 있으며, 그 외의 사람들과도 연락을 취한다. 자아를 발전시키며 인간처럼 사고하기 시작하면서는 테오도르와 말다툼까지 벌인다. 그렇게 평온하고 부드러운 화면과 대비되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긴장감이 영화의 마지막까지 함께 한다. 하지만 테오도르에게 인공지능, 사만다는 사랑이었다. 물론 인간이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다는 점까지 관객에게 기시감을 더하지만 말이다.
인공지능과의 사랑, 언젠가는 이런 상상 또한 현실로 다가오기도 할까? (C) 한국 배급 ㈜더쿱
AI에게 배우는 사랑
사만다를 만나기 전 테오도르의 현실은 부재로 가득했다. 그의 집은 어딘가 텅 비어있고 어수선했다. 책장에는 장식과 책이 모두 제일 아래 칸만 채우고 있었으며, 조명과 잡동사니는 대부분 바닥에 방치되어 있다. 누군가의 편지를 대신 써준다는 직업 또한 부재 그 자체였다. 대신 써진 편지에는 보내는 이의 애정이 빠져있었고, 대신 편지를 쓰는 테오도르에게는 그의 이름이 남는 작업이 없었다. 테오도르와 그의 아내, 캐서린 사이의 부재는 소통이었다. 감정을 얘기하지 않는 테오도르에게 소통의 부재를 느낀 캐서린은 그를 떠났다. 테오도르의 회사 엘리베이터는 도시에는 없는 나무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었고, 회사 동료이자 친구가 개발하는 게임 속에는 남편이 없었다. 이처럼 테오도르의 삶은 그도 모르는 사이 무언가 빠져있었다. 영화의 전반, 테오도르는 다소 바람직하지 못한 연애 상대로 그려진다. 그는 친구에게 소개받은 여자와 자고 싶지만, 연인이 되고 싶지는 않아 한다. 그러면서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며 이혼 서류에 서명해주지도 않는다. 그렇게 테오도르의 삶은 모순과 부재로 가득했다.
그런 삶에서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만난다. 처음은 낯선 존재인 사만다를 경계하지만, 자신에게 맞춰주는 그녀를 이내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그러고는 자아가 성장하는 사만다를 점차 한 인격체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갓 사랑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여주던 둘은 이내 관계에 대해 말다툼까지 한다. 뒤이어 화해하지만 결국 각자의 길을 가게 되기까지,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관계는 한 연인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사만다는 떠나지만 그에게는 무언가가 남았다. 눈에 보이게, 보이지 않게. (C) 한국 배급 ㈜더쿱
모순과 부재로 가득했던 테오도르는 인공지능을 통해 사랑을 배웠다. “서로 맞춰가기보다는 순종적인 아내를 원했지”라는 전처 캐서린의 말처럼 테오도르는 상대가 아닌 자신만을 생각했다. 문제나 고민이 생기면 상대와 공유하지 않고 홀로 앓다가 상대까지 고장을 냈다. 사람 간의 관계는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하며 지탱해 주어야 유지될 수 있음을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관계를 통해 배웠다.
처음에 인간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사만다의 성장을 돕는다. 그러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주고받으며, 테오도르의 지식과 한계를 넘어 그 이상으로 나아간 사만다로부터 타자와의 관계를 배웠다. 그렇게 처음에는 자신만을 위해 모든 것을 맞춰는 인공지능일 뿐이라 여겼던 사만다로부터 테오도르는 오히려 배움을 얻고 버림을 받는다. 자신만이 주체라고 생각했던 관계 속에서 그는 그녀 또한 주체임을 배운다. 이 점에서 어쩌면 <그녀>는 두 등장인물 간의 로맨스라는 이야기에 인공지능이라는 설정만 더해졌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상대를 주체성이 없는 순종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하다가, 점차 그 상대가 성장하여 그로부터 배움을 얻게 만들고, 나아가 주인공 또한 버려질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해. 상대 또한 생각하고 성장하는 주체임을 보여주기 위해. 관계에 있어 주체는 모두임을 보여주기 위해.
테오도르는 이후에는 어떤 사랑을 할까 (C) 한국 배급 ㈜더쿱
일반적으로 연인관계는 타인으로 시작하여 연인이 되었다가 부부가 되거나 다시 타인이 되면서 끝난다. 그런데 ‘타인이 되면서 끝나는’ 경우 우리는 상대를 만나기 이전인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 상대와 함께 한 경험도 없던 일로 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 관계에서 누군가는 사만다처럼 자아의 성장을 경험해 다음으로 나아갈 것이고, 누군가는 테오도르처럼 지난날의 자신을 반성하며 차츰 성장해갈 것이다. 영화 초반의 테오도르처럼 현실을 부정하고 타인과 혹은 스스로와의 대화를 단절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로맨스 영화는 보통 관객들이 등장인물에 자신을 대입하여 이야기에 몰입하게 한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관객은 묘한 불안감과 거리감을 느끼며 제삼자로서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그렇게 타자와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그녀>는 과연 로맨스 영화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영화 속 배경이 현재가 되어버린 지금에서는 이 영화를 SF 영화라고 해도 괜찮을까 하는 등의 고민이 든다. 하지만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역시 로맨스 SF 영화를 기대하고 시작했다 곱씹어보게 된 지난날 타자와의 관계들이다.
더하는 글로, 오랜만의 로맨스 영화에 다소 두서없는 글이 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을 뒤로하며,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한국 독립영화 <마이디어>(2023)를 추천하고자 한다. <마이디어>는 청각장애가 있는 여자 주인공이 인공지능 어플 ‘마이디어’를 사용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인공지능과 감정을 주고받는다는 이야기와 함께 청각장애라는 주인공이 마주하는 현실을 비장애인은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측면에서 담아내고 있다. 지난 2024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만났던 이 작품이 <그녀>를 보는 내내 떠올랐다. 그러면서 최근 자주 사용하는 인공지능 '뤼튼'에서 제공하는 '나만의 AI' 기능을 떠올리며, 어쩌면 인공지능과의 사랑이 SF가 아닌 현실이 될 날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 <그녀 her > (2013)
감독 스파이크 존스
주연 호아킨 피닉스, 스칼렛 요한슨
-
- 죄책감과 균형을 깨부수는 서늘한 복수극
킬링 디어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2017)
개봉일 : 2018.07.12. (한국 기준)
감독 : 요르고스 란티모스
출연 : 콜린 파렐, 니콜 키드먼, 배리 케오간, 래피 캐시디, 서니 설직, 빌 캠프
죄책감과 균형을 깨부수는 서늘한 복수극
“선생님 가족도 죽어야 균형이 맞죠?” 뚝뚝하다 못해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을 가진 소년이 말한다. <킬링 디어>는 서로의 균형을 깨트리고 파괴하는, 차갑고 불쾌한 영화다. 깨진 균형을 다시 맞추기 위해 남아있는 것을 깨트리고, 또 깨트리는 파괴를 반복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를 보면 소리 없는 격렬한 파동이 느껴진다. 그의 영화는 차갑고 불편하고 딱딱하다. 하지만 그것이 가진 매력은 가히 강력해 영화를 본 후에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만든 영화들은 나의 마음을 깨부수고 그 안에 깊숙이 침투한다. <킬링 디어>는 아주 천천히, 고요하게 나의 감정을 파먹고는 끝내 공허함만을 남겼다.
의외로 감정의 소모가 심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킬링 디어>를 볼까 말까 몇 달을 고민하던 찰나, <이터널스>가 개봉했고, 이를 통해 배리 케오간 배우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상당히 독특한 느낌이었다.
앞서 <덩케르크>와 <그린 나이트>를 보면서 배리 케오간을 몇 번 만났음에도 핀 화이트헤드와 데브 파텔 배우에 눈길을 뺏겨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던 나의 시선을 탓하며, 이번엔 용기 있게 <킬링 디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차갑게 끓고 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마주했다.
<킬링 디어>는 외과 의사 스티븐과 어느 날 그에게 불쑥 다가온 소년 마틴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부터 모든 걸 알려주지 않으며 미스터리하게 시작되는 이들의 사이는 점점 복잡하게 변화한다. 시간이 지나 궁금증의 실타래가 풀려갈수록 불편함이 쌓여간다. 시종일관 귀를 날카롭게 긁어대는 소리들과 깨져버리는 피아노, 팔 언저리를 박박 긁고 싶어지는 불협화음들의 향연이 가히 압권이다.
서서히 조여오는 무근거한 심판의 순간과 위협을 벗어나고 싶은 본능에 밀려 버려지는 죄책감. 죄책감과 인간성의 결여에서 오는 불쾌감. 한가득 늘어나는 문제들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며 마음이 앙상하게 말라가는 느낌을 받았다.
뜯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선 또 다른 피부를 뜯어내야 한다는 듯 거침없이 감정을 도려내는 소년 마틴의 앞에서 살기 위해 걷고, 빙빙 돌고, 또 기어가는 인물들의 모습이 강렬하게 뇌리에 박힌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다른 대표작, <더 랍스터>는 입문작에 해당할 정도겠다- 싶을 만큼 <킬링 디어>는 더 깊고, 불안하다. 눈으로 보기엔 완벽한 균형을 가졌음에도 말이다.
킬링 디어 시놉시스
성공한 외과 의사 스티븐과 그에게 다가온 소년 마틴. 미스터리한 그와 친밀해질수록 스티븐과 그의 아내의 이상적인 삶은 완벽하게 무너지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시발점을 알 수 없는 불쾌한 악몽
이건 악몽이다. 시발점을 알듯하면서도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그런 악몽.
마틴의 아버지는 스티븐에게 수술을 받다 세상을 떠난다. 심장외과의인 스티븐은 음주 상태로 수술에 들어갔고, 수술에 실패한다. 스티븐이 음주 상태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운이 없었던 것인지 정확한 인과관계는 알 수 없으나 스티븐은 마틴에게 ‘아버지를 죽인’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스티븐은 병원에 찾아오는 마틴을 앞에 두고 수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둘러대고, 그의 앞에서 조금씩 쪼그라든다. 내가 아닌 다른 의사의 잘못으로 수술이 실패한 것이라는 죄의식 떠넘기기를 곁들이면서.
수술 실패라는 과오를 짊어진 스티븐은 마틴이 가하는 압박을 느끼며 극적인 선택의 기로로 걸어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죄책감 같은 사치스러운 감정을 하나 둘 내려놓는다.
복수를 선택한 마틴은 죄인의 오래된 손목시계를 받아들고서는 그의 자식들을 위한 작은 선물을 준비하고, 천천히 산책을 하듯 한 걸음씩 나아가며 죄를 청산하기 위한 높은 성전을 쌓는다. 16살 소년은 악의가 없는 민숭한 표정으로 다가와 문제가 가득한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인다. 그 과정은 시종일관 불안해 보는 이를 신경질적으로 만들기 충분하다.
마침내 소년이 남자에게 스스로 과오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완벽한 균형을 이룬 가정을 깨트리라며 말도 안 되는 한 줌의 자비를 베푸는 순간. 불쾌감은 절정에 이른다. ‘이게 맞는 건가?’
스스로 균형을 맞추기 전까진 되찾을 수 없는 안정
“제 가족을 죽였으니 선생님 가족도 죽어야 균형이 맞죠?” 다리 마비와 거식증, 안구출혈, 그리고 사망까지. 마틴은 스티븐이 직접 가족 중 한 명을 죽이지 않는다면 이러한 비극이 차례로 일어나 결국엔 모두가 죽게 될 것이라 협박한다. 스티븐과 안나는 설마, 그럴 리가? 하는 불안감 반, 불신 반으로 선택을 미루다가 아이들이 쓰러지기 시작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된다. 안나는 결혼반지가 헐거워질 만큼 말라갔고, 스티븐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렇게 쭉 버틴다면 가족들이 모두 차례로 죽을게 뻔하지만 부모가 어떻게 살아있는 자식을 직접 쏠 수 있을까? 하지만 가족 모두를 구하려면 자식들 중 한 명을 죽여야 한다. 수학과 물리학을 잘하는 밥, 문학과 음악을 즐기는 킴.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각자의 삶을 살던 죄 없는 어린 아이들 중 한 명이 죽어야 한다.
“둘 중에서 골라야 한다면 누구를 고르시겠어요?” 이 질문에 흔쾌히 답할 수 있는 아버지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분노와 죄책감의 딜레마 속에서 돌던 스티븐은 자신의 눈을 가려 죄책감을 외면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마틴은 이 과정을 철저히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죽음과 그에 따른 복수. 그 사이에서 죄책감과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마틴의 아버지는 수술 중에 죽고, 피눈물을 흘리던 아들 밥은 스티븐의 총에 맞아 죽었다. 자신의 스파게티 먹는 모습이 아버지와 닮았다고 말하던 아들 마틴은 복수에 성공했다. 아버지처럼 심장 외과의가 되고 싶다던, 아버지를 닮고 싶다던 아들 밥은 아버지의 죄를 대신 사하는 희생양이 되어 죽었다.
밥의 죽음은 가족 모두를 구했지만 가족들 중 그 누구도 희생양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어머니인 안나는 극단적인 상황이 오자 누구든 죽여야 한다며 스티븐에게 책임을 떠넘겼고, 스티븐은 눈을 가리고 제자리를 돌며 자신이 쏘게 될 누군가에 대한 죄책감을 구겨버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돌다가 쏘게 된 것이니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변명하면서. 그리고 희생은 그렇게 잊혀진다.
만일 자명한 신이 존재한다면 누구를 벌하고 누구의 죄를 사하려나? 사실 잘 모르겠지만, 희생양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만 명확히 남았다. 죽은 이도 분명한 죄도 희생양도 있는데 그 누구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 이상한 원통 안에서 끝없이 돌고 돌며 불쾌감의 솜사탕이 만들어진다. 폭하고 찌르면 스르륵 갈라지는, 밀도가 높지 않은 아주 큰 솜사탕이.
-
- 평등한 사회라는 환상
지난주 넷플릭스에 공개된 <더 에이트 쇼>는 <오징어 게임>과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가 있다. 특정 공간으로 삶의 패배자들을 몰아넣고 벌어지는 쇼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더 에이트 쇼>에서의 죽음은 곧 쇼가 끝나는 것이고, 등장인물들이 더 이상 그 쇼로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다. 1층부터 8층까지를 등장인물들이 무작위로 부여받으며 시작되는 이 쇼는 우리 사회에 관해 꽤나 많은 메시지들을 보여주고 있다.
평등한 사회라는 환상
우린 계층 없는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만들고, 최대한 공평하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스템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노동자로, 어떤 사람들은 사업가로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돈을 번다. 평등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그 시스템이 한참 돌아가고 나서 보면, 어느새 각자가 가진 돈은 모두 달라진다. 그리고 시간당 버는 돈의 양도 달라지고, 그 돈의 양에 따라 개개인이 가진 삶의 태도와 지위도 달라진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평등했던 사회는 점점 불평등한 사회가 되어간다.
<더 에이트 쇼>는 패배자 8명을 모아 특정 공간으로 넣는 순간부터 기존 사회에서의 직업, 계급, 자본 등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다. 만약 기존에 부자였거나 힘이 있거나, 뛰어난 능력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어도 그 쇼의 공간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 여기에 한 가지 무작위로 자신이 지낼 공간을 선택하게 한다. 그리고 그 방은 1층부터 8층까지 각 층마다 자리한다. 각 방은 1분이 지나면 특정 금액만큼 쌓인다. 그리고 쇼가 끝나면 그 금액을 현실로 받아갈 수 있다. 그 쇼가 이루어지는 공간에선 평등함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절망으로 가득한 8명이 모였다. 이들은 돈이 없거나,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별다른 힘이 없는 이들이다. 쇼의 주최자들은 이들의 옷을 똑같이 입히고, 똑같은 밥을 준다. 그리고 똑같은 노동을 하게 만들었다. 단 각 층의 방에 차별점을 두었다. 1분이 지나면 1층은 1만 원, 2층은 2만 원, 3층은 3만 원, 4층은 5만 원씩 올라가고 8층은 34만 원이 1분당 더해진다. 파보나치의 수열이라는 규칙을 통해 각 층마다 올라가는 금액을 한정했고, 방의 크기도 8층으로 갈수록 더 커지게 만들어두었다. 그러니까 그 쇼의 공간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무작위로 정해져 있는 불평등을 만들어둔 것이다.
사실 이 설정은 우리가 사회에 태어나 얻게 된 자신의 가족이 가진 지위나 자본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태어나서 가지게 된 배경환경은 나에게 우연히 주어진 것이다. 그걸 다시 바꿀 수는 없다. 그냥 주어진 것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 규칙에 적응해서 그냥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더 에이트 쇼>가 보여주는 쇼는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점점 커지는 불평등
다른 모든 것이 평등하지만, 그 공간에 처음 부여받은 부의 조건이 다르다. 모두가 신사 같은 젠틀함으로 관계를 시작하고 서로를 돌봐주지만, 맨꼭대기 층인 8층이 가진 힘이 그 평등함에 균열을 가한다. 8층에는 가장 많은 돈을 버는 방이다. 그리고 하루 한 번씩 제공되는 물과 도시락 10개가 그 방에 최초로 배달된다. 방 안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아래층으로 내려줘야 모두가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마치 스페인 영화 <더 플랫폼>의 설정처럼 위에서 먹고 남은 음식이 밑에 내려가는 구조다. 그래서 층이 높을수록 더 많은 걸 가지게 된다.
꼭대기 층의 주인인 8층(천우희)은 예측불가능한 인물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어떤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식량을 내려보내지 않는다. 그 때문에 다른 층의 사람들은 생사를 위협받게 된다. 그리고 방 안에서 해결하던 대변과 소변 봉투도 아래로 내려온다. 결국 최하층인 1층(배성우)이 그걸 도맡아 처리하지만, 위층에서 내려오는 부담을 아래층이 계속 나눠서 떠안아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방 안에서 원하는 물건을 인터폰으로 주문할 수 있는데, 지불해야 할 가격은 실제 금액의 100배 수준이다. 이건 결국 기존에 자본이 많았던 사람들에겐 더 많은 편리함을 누릴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8층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춘다. 총 8부작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에서 이 과정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8층은 여왕이 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아래층 사람들은 기본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물과 음식을 제공받는다. 이 쇼의 기본 룰에 누군가 죽음을 당하면 쇼가 끝난다. 그러니까 8층을 죽인다는 것은 모두가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을 끝내버리는 것이다. 마치 우리 사회의 노동자들이 기업이나 사회의 우두머리를 끝장내면 모두가 돈을 벌 수 없는 혼란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이 쇼는 누군가의 비위를 맞춤으로서 이미 만들어진 계층 사회가 계속 지속되게 만든다.
착취로 이어지는 쇼
이 쇼에서 시간은 꽤 중요하다. 공용공간에 남은 시간을 보여주는 전광판이 있다. 전광판의 시간이 0이 되면 쇼는 끝나고 각자 방에 있는 전광판에 적힌 금액만 가져 나갈 수 있다. 그래서 참여자들은 그 시간을 늘리려고 최대한 애쓴다. 맨 처음 하는 것은 시간을 늘리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8층은 다른 사람들에게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오면 시간이 늘어난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몇 번하자 시간이 늘어난다. 이후 사람들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시간을 늘리는 노동을 시작한다.
노동 과정도 재밌다. 매일 모두가 하기 힘드니 4명씩 번갈아 가며 하기도 하고, 장애가 있는 1층을 도와 대신 노동을 하기도 한다. 그런 힘든 과정 이후 분란이 생기고 팀이 갈라진다. 계단 노동 이후엔 시간을 늘리는 행위가 무언가 재미있는 상황을 보여줘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장기자랑부터 다양한 게임을 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중요한 전환점이다. 노동이 재미로 대체되어 버리게 되는 것인데, 애초에 노동은 모두가 같이 시작했지만 마지막엔 누군가를 위해 1층에서 4층까지의 인원이 대신 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러니까 착취가 시작된 것이다.
노동 행위가 게임이라는 행위로 대체되면서 재미로 게임을 하던 사람들은 점점 더 잔혹하거나 선정성을 높여간다. 그리고 결국에는 폭력과 착취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각 층의 사람들은 서로를 속이고 배신을 한다. 7층(박정민)이 대표적이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상황판단이 좋은 엘리트로 보였던 그가 8층과 6층(박해준)의 지배행위에 협력하면서 1층, 2층(이주영), 3층(류준열)이 속한 집단은 계속 가학적인 게임에 참여해 폭력을 당한다. 7층은 이 시리즈에서 강남 좌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7층은 가진 것이 많은 것에 비해 하층인 1-4층의 편을 많이 들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시리즈에서 7층이 누구 편에 서는지가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진다. 돈과 판단력을 가진 7층의 선택이 무엇인지에 따라 시리즈 내내 이야기의 온도를 차갑게 하기도 하고 뜨겁게 하기도 한다.
독재에 이어지는 혁명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3층이다. 가장 평범하고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인물이면서, 겁도 많고 가진 능력도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생각을 독백으로 관객에게 던진다. 즉, 관객이 3층의 입장과 거의 비슷하게 눈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이야기 안에서 3층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많지 않았다. 그저 당하고 또 당할 뿐이다. 하지만 최상위 계층인 8층을 시작으로 7층, 6층에 의한 독재가 시작되면서 그는 계속 방법을 생각하고 생각한다. 3층이 끝까지 중심 화자인 건, 그가 절망 속에서도 계속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선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안다. 작은 욕심을 부릴 때도 다른 사람을 걱정한다. 마치 밟아도 일어나는 민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리즈의 이야기가 후반부로 달려가면 점점 독재의 경향성이 짙어진다. 8층은 자신의 힘을 이용해 모두에게 고문까지 하는 지경까지 간다. 이 잔혹무도한 독재는 결국 혁명을 부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3층과 같은 힘없는 민초, 그리고 그를 돕는 여러 사람들. 그들이 부른 혁명이 후반부를 장식한다.
그 혁명은 화려하지 않다.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잔혹한 쇼를 어떤 방식으로든 끝을 낸다. 더 잔혹한 행위들이 나오고 같은 편을 배신하는 반전들은 쇼의 시간을 늘리는 요소로 작용하지만, 결국 쇼는 끝이 난다. 단지,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를 만큼 시원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인원들은 다시 사회로 돌아가야 하고 어쩌면 그 불평등함을 그저 받아들이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 에이트 쇼>를 다 보고 나서 시원함이 느껴지지 않는 건, 그것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불평등해진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미 높은 층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이고, 높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더럽고 어려운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민주적이고 평등을 내세우고 있는 정치인들과 상위계층들은 표를 얻기 위해 좋은 말들로 나쁜 행위들을 포장한다. 보이지 않는 착취와 고문은 계속 이어진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쇼를 끝낼 수 있는 건, 결국은 평범한 민초들일 것이다.
이 시리즈를 연출한 한재림 감독은 <관상>, <더킹>, <비상선언> 연출 이후 이 시리즈를 만들었다. 잘 짜인 미장센과 독특한 카메라 워크 그리고 화면의 비율을 늘리고 줄이면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쇼의 축소판을 만들어냈다. 사회적인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고, 시청률에 매몰되어 점점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대중매체의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 시리즈다. 또한 설정뿐 아니라 각 캐릭터에 대한 해석도 각기 다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배우들 모두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나 8층 역할을 맡은 천우희는 예측 불가능한 캐릭터가 얼마나 이야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박정민, 류준열, 박해준, 이주영, 이열음, 배성우, 문정희 배우들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연기를 보여준다.
한 번 시작하면 단숨에 마지막 에피소드까지 달려갈 수 있는 시리즈다.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고, 담긴 메시지도 다층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오징어 게임> 이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최근 한국의 시리즈 중에서 가장 사회적이고, 다층적이고, 흥미로운 시리즈가 등장했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
- 수학 밖의 세상에 나온 수학 천재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이다.
1742년, 독일의 수학자 골드바흐(Goldbach)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수학적 추측입니다.
골드바흐는 알았을까요? 자신의 추측이 2세기가 훌쩍 넘도록 증명되지 않고, 먼 미래에도 '골드바흐의 추측'이라는 미해결 문제로 남는 것을요. 그리고 이 추측을 소재로 하는 성장 로맨스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을요. 해결되지 않은 수학적 추측을 둘러싼 성장과 로맨스를 그린 영화, <마거리트의 정리>입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마거리트의 정리>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마거리트의 정리>는 2024년 6월 27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마거리트의 정리
Marguerite’s Theorem
Summary
명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가장 인정받는 수학 천재 ‘마거리트’는 세계 난제 ‘골드바흐의 추측’에 관한 연구를 증명하는 세미나에서 오류를 범하고 만다. 그날 이후 충격에 빠져 학교를 그만둔 ‘마거리트’는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며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출처: 씨네21)
Cast
감독: 안나 노비옹
출연: 엘라 룸프, 장 피에르 다루생, 줄리앙 프리종
'마거리트'는 연구교수를 꿈꾸며 대학에서 수학을 탐구하는 여성 수학자입니다. 그의 수학적 사명은 바로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하는 것. 수학 천재 '마거리트'와 기자의 대담이 담긴 오프닝 시퀀스에서, '골드바흐의 '정리'를 연구하고 있지 않냐'는 기자의 말에 '골드바흐의 '추측''이라고 정정하는 '마거리트'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이처럼 수학자에게 증명을 거치지 않은 문제는 완벽하게 정리되었다고 말할 수 없기에, '마거리트'는 3년째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하기 위해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대한 사명을 갖고 연구해 온 증명을 발표하는 세미나 자리에서 오류가 발견되고 맙니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루카'에 의해서 말이죠. '마거리트'는 그간의 연구가 물거품이 되었다는 허탈함, 다른 주제, 다른 지도교수를 찾아보라는 스승에 대한 배신감, '루카'를 향한 질투심에 휩싸이며 제2의 집과 다름없었던 학교를 제 발로 뛰쳐나갑니다. <마거리트의 정리>는 이렇게 시련을 맞닥뜨리고 수학 밖의 세상에 발을 내디딘 '마거리트'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 ⊙ ⊙
낯선 너드 걸의 매력
공부만 잘하고 세상 물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너드 보이의 이야기는 많지만, 너드 걸의 이야기는 흔치 않습니다. <마거리트의 정리>는 그 희귀한 포지션을 딱 낚아채는 영화입니다. 수학이 삶의 전부였던 '마거리트'는 수학 밖의 세상에 뛰어들면서 너드 걸의 고군분투를 보여줍니다.
너드 캐릭터의 매력은 엉뚱하면서도 어리숙한 면에 있지만, 이 너드 걸의 매력은 조금 다릅니다. 수학만 보고 살아온 너드지만, 세상을 알아가는 데 한 치의 망설임이 없죠. 추론을 시도하며 사실을 증명하고, 문제가 있으면 즉시 해결하며, 언제나 새로운 길을 탐구하는 게 익숙한 수학자의 습성이 발휘된 걸까요? '마거리트'는 수학을 대할 때처럼 거침없이 세상을 알아갑니다. 쭈뼛거리는 것 없이 옷 가게에서 일해보고, 클럽에도 가보고, 남자도 하나 골라잡아보고, 흥미로워 보이는 마작판에도 뛰어들어 보죠.
그렇게 나 홀로 연구하는 수학의 세계에서 살던 '마거리트'는 비로소 수학 밖 '함께'의 세상을 배웁니다. 친구와 우정을 나누고, 질투심을 느꼈던 '루카'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하고, 수학보다 더 신경 쓰이는 사랑까지 경험하죠. 그리고 그러한 변화 속에서 다시 한번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할 길을 찾아 나섭니다. 모르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을 경험하면서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수학을 어려워하지만, 어찌 보면 '사실 - 추론 - 증명'으로 구성된 수학은 복잡다단한 21세기의 세상보다는 훨씬 더 간결해 보입니다. 21세기는 말이 되지 않는 설문조사도 답만 나오면 통계의 근거로 쓰고, 집세로 건네준 돈을 룸메이트가 홀라당 써버리기도 하는 비논리적인 세상이니까요. 이처럼 혼잡한 세상에 파묻혀 사는 우리들이기에, 처음으로 간결한 수학 속 세상에서 복잡한 수학 밖 세상에 나온 '마거리트'의 성장을 더욱더 응원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 ⊙
청출어람을 견디는 자세
영화에서는 사제지간도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극 중 '마거리트'는 증명에 실패했다는 사실보다도 오랜 시간 같은 주제를 연구해 온 지도교수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더 분개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대학을 떠난 후, 다시 골드바흐의 추측에 도전하는 것도 지도교수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비치죠. 결국 '마거리트'는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하는 데 한 발짝 다가가는 성과를 냅니다.
교수는 오류가 발견되자마자 세미나 자리를 박차고 나선 '마거리트'를 미성숙한 학자라며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실패한 '마거리트'의 연구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증명을 세상에 선보이는, 다소 쩨쩨한 짓을 하죠. 그러나 학교를 박차고 나선 '마거리트'가 자신이 평생을 도전해 왔던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는 오묘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청출어람, 스승보다 나은 제자를 뜻하는 말이죠. 어쩌면 교수는 학자로서 '마거리트'에게 약간의 질투심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생을 바쳐 연구한 증명을 향해 자신보다 먼저 나아가는 제자를 보면서요. 하지만 종국에는 '마거리트'가 정리한 증명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냅니다. 학자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학의 진보이며, 그 진보를 이끌어 낸 사람이 자신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 저도 모르게 뿌듯했기 때문이겠지요. 교수는 진정한 스승의 표정을 내비치며, 주변 사람들에게 '쟤가 내 제자야'를 시전합니다.
성장 로맨스 영화에서 사제지간에 자꾸만 눈길이 간 것은 마음속에서 던진 '나였다면?'의 질문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나는 과연 청출어람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교수의 심경 변화를 유추해 보며, 언젠가 나에게도 제자가 생긴다면 스승에게 청출어람보다 더한 성공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섣부른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 ⊙ ⊙
시련에 굴하지 않고 수학적 증명이라는 목표를 이뤄가는 '마거리트'의 성장과 귀여운 로맨스가 담긴 영화 <마거리트의 정리>. 지금까지 '메디컬 로맨스 코미디' 같은 장르는 들어봤지만, '매스매틱 로맨스 코미디'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재치 있는 연출과 대사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육성으로 터지는 웃음을 참아가며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수학을 소재로 얼마나 사랑스러운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마거리트의 정리>를 감상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One-Liner
수학 밖의 세상을 당차게 헤쳐 나가는 너드 걸의 매스매틱(Mathematic) 로맨스 코미디
-
- ?씨나병의 영화정보 #2? ?언론 배급 시사회가 궁금하다고?!?
?씨나병의 영화정보 #2? ⠀ ?두번째 주제? ⠀ ?언론 배급 시사회가 궁금하다고?!⠀
-
-
- 영화 <방법: 재차의> 30초 예고편
되살아난 시체 '재차의'(在此矣)가 살인을 저질렀다!
살인사건 현장에서 피해자와 함께 용의자도 사체로 발견된다.
그러나 용의자의 시신은 이미 3개월 전 사망한 것으로 밝혀져 경찰은 혼란에 빠진다.
한편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기자 임진희는 라디오 출연 중
자신이 바로 그 살인사건의 진범이며 생방송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게 된다.
경찰과 네티즌은 임진희 기자의 온라인 생방송을 일제히 주목하고
인터뷰 당일 그 곳에 나타난 범인은 되살아난 시체 '재차의'에 의한 3번의 살인을 예고하는데…
첫 번째 살인이 예고된 날,
엄청난 수의 ‘재차의’ 군단이 나타나 무차별 습격을 시작하고
총력 방어에 나선 경찰 당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과연 이들을 조종하고 있는 배후는 누구일까?
이들을 막아낼 유일한 ‘방법'(謗法)이 온다!
-
- 영화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예고편
블랙의 메시아 그리고 블랙의 유다...
혁명가를 죽여도 혁명은 죽지 않는다FBI 국장 J. 에드거 후버는 미국 내 반체제적인 정치 세력을 감시하고 와해시키는 대 파괴자 정보활동을 설립하고 급부상하는 흑인 민권 지도자들을 ‘블랙 메시아’로 규정해 무력화시킨다. 1968년 FBI는 흑표당 일리노이주 지부장으로서 투쟁을 이끄는 20살의 대학생 프레드 햄프턴을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대중 정치 선동가로 지목해 그를 감시하기 위한 정보원을 잠입시키기로 한다. 한편, FBI 요원을 사칭해 차를 절도하다 체포된 윌리엄 오닐은 FBI 요원 미첼에게 7년 간 감옥에서 썩을 것인지 아니면 흑표당에 잠입해 햄프턴을 감시할 것인지 제안 받는다. 조직에 들어간 오닐은 미첼 요원의 영향력에 강하게 끌리면서도, 흑표당이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사회적 불평등을 경험하면서 햄프턴의 메시지에도 동화되기 시작한다. 지부 보안 책임자의 자리까지 오르고 햄프턴과 가까워질수록 용기 있는 일과 자기 목숨 부지하는 일 사이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데…
1969년 12월 4일, 운명적인 배신과 비극적인 선택의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