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엘2022-09-30 00:38:51
김창열 화백의 삶 속에 떠있는 물방울 그림들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리뷰
감독:김오안,브리지트 부이오
출연진:김창열 화백
시놉시스
김창열 화백은 물방울을 다양하게 표현한 그림들로 유명하다. 50년간 물방울만 그려왔으며 달마대사와 노자의 도덕경을 자신의 신조로 삼아온 예술가이기도 하다. 1929년 맹산의 강가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6.25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고 큰 트라우마가 생겼다. 전쟁에서 나뒹구는 시체들은 탱크로 짓밟히고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았기에 김창열 화백은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물방울들을 그리며 지금까지 버텨왔다. 사실 그도 고향을 떠나 고독함 속에 예술을 해온지라 자신만의 확고한 그림 철학이 있는 것이다. 물방울을 다양한 관점에서 표현한 김창열 화백의 작품들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제주도의 미술 전시관에 자신이 그린 200점의 작품들을 기부하는데...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는 사람의 요구를 달마대사는 거절하자 그 사람은 자신의 한쪽 팔을 자르면서까지 달마대사의 제자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달마대사의 철학이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 그림에 녹아들었다
김창열 화백은 달마대사에 대해 공부하며 많은 것을 깨우치고 자연스레 자신의 물방울 그림에 스며들게 했다. 비록 고단한 삶을 살아온 그에게 물방울은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작품들이었고 삶의 전부였다. 비록 전쟁을 몸소 겪었고 고향도 떠났지만 철학적인 물방울 그림을 탄생 시키는데 좋은 원료가 된 만큼 그 자체가 예술이다. 또한 자신이 힘든 삶을 살아오며 지금의 화백이 된 것처럼 만약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맹산의 강가에서 살았을 것이고 미국으로 건너가거나 프랑스로 예술을 하러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김창열 화백은 지금의 거장이 되기까지 많은 시련을 겪었고 끔찍한 기억들도 있었지만 그런 경험들이 자신을 위해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게 된 게 아니었을까?
김창열 화백의 작품들은 앞으로도
그의 삶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의 주관적인 영화 리뷰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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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자 영역과 함께 사라진 시리즈의 매력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타노스로부터 우주를 구한 후 당당히 어벤져스의 일원이자 슈퍼 히어로가 된 '스콧 랭(폴 러드)'. 그는 앤트맨으로서의 업적을 책으로 써내는 등 화려한 셀러브리티의 삶을 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스콧은 가족 식사 자리에서 깜짝 놀랄 소식을 듣는다. 딸 '캐시 랭(캐서린 뉴트)'의 주도 하에 파트너 '호프 반 다인(에반젤린 릴리)', 그리고 은사인 '행크 핌(마이클 더글라스)'이 미지의 세계인 양자 영역에 신호를 보낼 수 있는 기계를 개발했다는 것.
하지만 스콧보다 더 놀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수십 년을 양자 영역에서 보냈다가 간신히 지구로 되돌아온 '재닛 반 다인(미셸 파이퍼)'. 그녀는 기계를 보자마자 당장 파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그녀도 기계가 오작동해 앤트맨 일행이 양자 영역에 빠지는 걸 막지는 못했고, 그들은 양자 영역을 돌아다니며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 그 사이, 양자 영역에 갇혀 있던 '정복자 캉(조나단 메이저스)'도 유배지에서 탈출할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면서 앤트맨 일행을 위기에 빠트린다.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소설, 드라마 등이 성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당연히 매력적인 캐릭터, 뛰어난 기술력, 탄탄한 시나리오 등 여러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는 '그럴듯함'이 있어야 한다. <스타워즈> 속 타투인이나 나부 같은 외계 행성이든, <반지의 제왕> 속 중간계든 그 공간이 실제로 존재하는 듯 느껴져야 한다. 이는 CG와 같은 시각적인 요소만 뜻하지 않는다. 영화가 디테일함으로 가득할 때, 비로소 실제로 주인공이 살아 숨 쉬는 시공간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빌뇌브 감독의 <듄>에서 주인공인 폴 아트레이스(티모시 샬라메)의 대련 장면을 보자. 이 장면 속 주인공들은 일반적인 액션과 달리 찌르거나 베려고 하는 순간 속도를 급격히 늦춘다. <듄>의 세계관에서 사람들은 일정 속도 이상이면 무조건 튕겨내는 방어막을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해리포터> 시리즈도 호그와트, 버로우, 다이애건 앨리, 마법 정부 등에서 마법사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행동하는지를 세밀히 보여주면서 숨겨져 있던 마법 세계의 매력을 각인시킨 바 있다.
즉, 사람들의 행동 하나, 말 하나에도 이유와 맥락을 불어넣을 때 관객들은 비로소 가상의 공간을 실제처럼 인식한다. 달리 말해 그 이유와 맥락을 보여주지 못하면, 아무리 화려한 그래픽과 특수 효과를 동원해 새롭고 다른 걸 보여준다고 해도 가상공간은 진짜가 될 수 없다. 이는 MCU 페이즈 5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 <앤트맨 앤 와스프: 퀀텀매니아>(이하 <앤트맨 3>)가 공허해 보이는 결정적인 이유다.
양자 영역을 배경으로 모험을 펼치는 <앤트맨 3>는 시리즈 중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다. 본래 <앤트맨> 시리즈는 아기자기한 하이스트 영화이자 유쾌한 가족 영화였다. 주인공인 스콧 랭의 특징 때문이다. 우선 스콧은 도둑이다. 애초에 행크 핌의 집에 강도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스콧은 앤트맨 슈트를 입을 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매 작품마다 앤트맨은 항상 어딘가에 침투하고, 무언가를 훔친다. 1편에서는 어벤져스 기지에 침투했다가 팔콘을 만난다. 옐로우 재킷과의 마지막 전투에서도 생각한 것보다 더 몸 크기를 줄여서 상대의 슈트에 침투해 문제를 해결한다. 2편에서는 양자 영역에 잠시 들어가 빌런이었던 고스트를 위한 치료 입자를 가져오기도 한다. <시빌 워>에서도 스파이더맨이 잠시 뺏은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다시 되찾아오기도 하고, <엔드게임>에서는 아예 시간을 강탈하자는 계획을 제안하기까지 한다.
한편 그는 지극히 소시민적이다. 앤트맨 슈트를 벗은 그는 그저 캐시와 가족, 그리고 친구들을 신경 쓰는 평범한 사람이다. 감옥에서 출소한 그는 범죄에 손대지 않는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다시 도둑질을 한 것도 캐시를 만나기 위해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비록 도둑질을 하다가 행크 핌에게 붙잡히기는 했지만, 행크의 요구대로 앤트맨이 된 것도 다시 한번 범죄에서 손을 떼고 속죄하기 위해서였다. 즉, 기본적인 정의감은 지니고 있지만, 우선 가족부터 챙기고 지키려는 마음이 더 큰 바로 그 지점이 앤트맨이라는 히어로만의 매력인 셈이다. 그래서 <앤트맨> 시리즈는 항상 가족 영화로서의 분위기를 공유한다. 1편에서는 스콧과 캐시의 만남만큼이나 행크와 호프 부녀의 화해도 중요한 소재였다. 2편은 아예 행크의 아내이자 호프의 어머니인 재닛을 찾는 이야기가 중심 스토리였다.
그런데 <앤트맨 3>의 분위기는 이전 작품들과 다소 다르다. 유쾌함 대신 진지함이 가득하다. 막중한 임무를 맡은 까닭이다. 이번 작품은 <어벤져스: 캉 다이너스티>와 <어벤져스: 시크릿 워즈>로 나아갈 페이즈 5의 시작을 알리고, 타노스의 뒤를 이을 빌런 캉을 소개해야 한다. 그래서 <앤트맨 3>는 이전까지 맛보기로 등장했던 양자 영역을 활용해 본격적으로 스케일을 키운다. 작중 양자 영역의 묘사를 보면 이는 나름대로 흥미로운 설정이다. 비록 물리적으로 지구 외부에 있는 우주는 아니지만, 외우주에 못지않은 스케일과 다양성을 자랑하는 소우주로 양자 영역이 등장하니까. 닥터 스트레인지가 멀티버스의 문을 열었듯, 이제 앤트맨은 숨겨진 우주를 탐험하는 셈이다. 그렇기에 <앤트맨 3>는 가족 영화이기 이전에 새로운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다 보면 거대해진 스케일을 온전히 즐기기 어렵다. 규모는 커진 반면, 이 넓고 새로운 우주를 어떻게 채울 지 고민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자 영역이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주인공들이 펼치는 모험은 이미 다른 영화에서 본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재닛이 양자 영역의 원주민을 만나 탈 것을 빌리는 장면만 봐도 그렇다. 사막 같은 비주얼은 <스타워즈> 속 타투인 행성을, 헬멧을 쓰고 있는 유목민과 그들의 탈 것은 타투인에서 사는 '터스켄 약탈자'를 빼닮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캉의 군대는 스톰트루퍼를, 캉의 제국은 은하제국의 수도인 코러산트를 떠올리게 한다. 사막에 숨어 있는 저항군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눈에 띄는 몇몇 신선한 요소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양자 영역에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캐릭터가 등장한 것은 맞다. 해파리나 브로콜리를 변형한 듯 보이는 생명체가 여럿 눈에 띈다. '자유의 투사들'의 일원인 베브도 민달팽이처럼 생긴 독특한 생김새를 자랑한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면 이들은 이내 배경으로 밀려나고, '젠토라'나 '쿼즈'처럼 인간 형태의 조력자만 남아 분량과 비중을 차지한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의 로켓이나 그루트, <토르> 시리즈의 코르그와 미에크처럼 전향적으로 활용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베브와 살아 움직이는 건물들 정도가 임팩트를 남길뿐이다. 결국 <앤트맨 3>에서 양자 영역은 MCU의 지평을 한 차원 넓힐 공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저 정복자 캉이라는 새 빌런을 등장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될 뿐이다.
그 결과 <앤트맨 3>는 시리즈의 본래 개성과 지향점 사이에서 부유하는 듯 보인다. 스콧이 정복자 캉에게 저항하는 양자 영역의 원주민들, 곧 자유의 투사들을 돕는 전개만 봐도 문제점을 알 수 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자서전도 내고 사인회를 다니며 셀러브리티로서의 삶을 누리는 스콧. 그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대신, 마침내 되찾은 가족과 일상을 누리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양자 영역에 빠지거나 정복자 캉에 맞서 싸우는 이들을 만난 후에도 얼른 집에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스콧은 끝내 다시 히어로의 길을 외면하지 못한다. 캐시 때문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아빠를 설득한다. 스콧이 좀처럼 설득되지 않자 독단적으로 캉의 군대와 싸우기도 한다. 이에 스콧도 결국 자유의 투사들 옆에서 캉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스콧이 마음을 바꾼 이유를 시리즈 내내 강조되었던 그의 부성애로부터 찾는다. 확률 폭풍 안에서 캐시의 외침을 들은 스콧의 모든 가능성들이 힘을 합쳐 진짜 스콧을 도와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은 스콧이 모든 선택의 기로마다 언제나 캐시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기에 스콧은 이번에도 캐시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 이는 앞으로 어벤져스와 캉이 멀티버스 속에서 펼칠 싸움을 암시하는 대목이기에 더욱 인상적이기도 하다. 멀티버스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나'에게는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사실 중요한 건 가능성이 아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단 하나의 희망과 가치를 깨닫고, 이를 지켜내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스파이더맨, 닥터 스트레인지, 그리고 이제 앤트맨이 그러하듯이. 그렇지 못하면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나'는 절망하고 좌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캐시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스콧이 생판 남인 자유의 투사들을 돕는 이야기가 말이 되는 이유다.
그런데 정작 영화는 자유의 투사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정복자 캉에게 맞서 자유를 갈망한다는 언급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고 캉이 그들을 어떻게 억압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양자 영역에 대한 설명과 상상력이 부재한 만큼이나 이들에 대한 설정도 대사 몇 마디를 제외하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캐시 랭을 가교로 삼아 사람들이 마음을 합치는 모습에서는 당위성을 찾기 어렵다. 왜 앤트맨이 그들을 도와서 모험을 떠나야 하는지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캉이 죽고 자유를 찾아다며 기뻐하는 사람들의 카타르시스를 공유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덩달아 스캇 일행과 이들 간의 가교가 되어야 할 캐시의 역할도 애매해지고, 캐시를 따라 이들을 도와준 스콧의 이야기도 힘이 빠진다. 이처럼 양자 영역 안에서 <앤트맨> 시리즈는 본연의 매력과 개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심지어 스콧 랭만 양자 영역에서 길을 잃은 것도 아니다. 앞으로의 MCU를 지탱할 빌런 정복자 캉도 헤매기는 매한가지다. 작중 캉은 다른 변종 캉들이 보기에도 너무 위험하기에 외부의 시공간과 분리된 양자 영역에 갇혀버린 인물이다. 어찌나 위험한 사상과 힘을 가지고 있는지, 재닛 밴 다인이 가족과의 재회를 포기하면서까지 캉을 양자 영역에 가두기 위해 수십 년 간 노력했을 정도다. 그런데 정작 영화를 보고 나면 캉이 과연 타노스만큼 위협적인 빌런인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힘이나 능력이 인상적이지 않다. 개미 군단의 공격에 쩔쩔 매고, 앤트맨과 와스프에게 고전하기 때문이다. 인피니티 스톤 없이도 헐크를 무너뜨리던 타노스와 비교하면 더욱 평범해 보인다.
물리적으로 위협을 가하지 못하며 사상적으로라도 어벤져스의 적수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만, 그조차도 실패한다. 연출 상의 문제로 캉의 과거사나 그의 사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캉이 앤트맨에게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는 대목을 보자. 캉은 자기가 수없이 많은 어벤져스를 죽였다고 말한다. 이때 영화는 플래시백과 같은 연출 기법을 활용하는 대신 그저 캉의 설명을 고스란히 들려줄 뿐이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의 과거사를 설명한 대목을 떠올려 보면, 지나치게 정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재닛이 캉과 겪었던 일을 털어놓는 장면도 다르지 않다. 재닛, 행크, 호프는 한 테이블에 나란히 둘러앉아 있다. 재닛은 어떻게 캉을 만나고, 그의 우주선을 고쳤고, 그를 양자 영역에 가둔 이유를 몇 분에 걸쳐 설명한다. 나머지 둘은 그저 리액션을 할 뿐이다. 이처럼 설명을 위한 시퀀스가 계속되다 보니 자연히 영화는 지루해진다. 설명의 내용 역시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캉이 등장하는 쿠키 영상에서도 그들이 딱히 무섭지 않은 이유다. 그들의 목적이나 사상, 대립 구도가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복자 캉의 데뷔전은 어떤 의미로든 만족스럽지 않다.
사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MCU가 예전 같지 않다는 지적은 이제 새롭지 않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페이즈 4를 구성하는 영화와 드라마들이 줄줄이 혹평과 부진한 흥행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앤트맨 3>의 어깨는 무거웠다. 시들어가는 관객들의 관심을 다시 점화하고 멀티버스 사가에 몰입할 유인을 제공해야 했다. <앤트맨> 시리즈로서의 재미도 선사해야 했다.
하지만 <앤트맨 3>는 실패했다. <앤트맨> 시리즈의 연장선상이라고 보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확실하게 페이즈 5의 초석을 놨다고 하기도 어려운 결과물을 내놓고 말았다. 의문을 더 키우는 것은 덤이다. "시끄럽던 옆동네 DC 확장 유니버스가 전면 리부트를 선언한 가운데, 과연 마블의 멀티버스 사가는 평탄히 목적지까지 항해할 수 있을까?" 미래는 모를 일이나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마블에게 남은 기회가 이제는 정말 많지 않다는 것. 개봉까지 두 달여를 남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로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
P(Poor, 형편없음)
큰 그림도, 시리즈의 매력도, 빌런의 위압감도 양자 영역과 함께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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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아나 2 |뻔한 레시피, 쉬운 재료, 평범한 플레이팅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른 섬에 사는 부족들을 찾기 위해 꾸준히 항해에 나서던 '모아나'(아울리이 크러발리오). 그녀는 전설적인 항해자이자 길잡이를 뜻하는 '타우타이' 칭호를 받은 직후 고대의 조상이 등장하는 환영을 본다. 인간 세계의 이야기를 지우고자 하는 폭풍의 신 '날로'(토피카 페푸리이)가 숨긴 섬, '모투페투'를 찾아내어 바닷길을 열지 못하면 모아나의 부족이 고사하게 될 것이라는 예지를 받은 것.
이에 모아나는 발명가 '로토'(로즈 마타페오), 농부 '켈레'(데이비드 페인), 이야기꾼 '모니'(후알랄라이 청)와 함께 다시 바다로 향한다. 그러나 모아나 일행은 날로가 보낸 괴물들을 만나 위기에 처하고, 그녀는 타우타이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런 그녀 앞에 오랜 파트너이자 반신반인 영웅 '마우이'(드웨인 존슨)가 나타나고, 그의 격려에 힘입어 모아나는 다시 한번 모투페투를 찾는 여정에 나선다.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전 세계에서 6억 달러가 넘는 흥행 수익을 기록하며 디즈니 애니메이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모아나>. <모아나>의 매력은 신선함이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폴리네시아 신화는 이전까지의 디즈니 작품에서 보지 못한 볼거리였다. 족장의 '후계자'로서 생산 업무에 직접 관여하는 여자 주인공의 등장도 파격적이었다. <겨울왕국>의 엘사, 안나 자매만 해도 전통적인 공주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으니까.
반면에 8년 만에 돌아온 속편 <모아나 2>는 기대보다 걱정이 컸다. 개봉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은 디즈니의 2024년 1분기 실적 보고회에서 TV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중이던 속편이 돌연히 극장용으로 전환되었다는 발표가 있었기 때문. 전편의 OST를 맡았고, 현재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작곡가 린 마누엘 미란다가 제작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뉴스도 불안감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모아나 2>는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말았다. 전편을 답습하는 데 그친 전반적인 얼개와 스토리, 고막을 유혹하는 데 실패한 OST는 본래 TV용 작품이었던 초안의 방증이나 다름없었다. 예상치 못하게 흥미로운 특이점은 있지만, 그조차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본래 특징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결국 <모아나 2>도 완성도 측면에서는 <스트레인지 월드>와 <위시>로 이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부진을 끊어내지 못했다.
익숙한 이데올로기를 담은 환상
개봉 전에 <모아나 2>에서 보고 싶었던 장면을 하나만 꼽자면 카누를 타고 망망대해를 시원하게 가르는 모아나와 독수리로 변신해 그 위를 날아가는 마우이의 투샷일 것이다. 그런데 <모아나 2>는 이 장면에 예상치 못한, 하지만 디즈니라서 자연스러운 함의를 불어넣었다. 폭풍의 신 날로의 방해를 뚫고 모투페투 섬을 찾아서 자유로운 바닷길을 열어야 하는 모아나의 항해가 '항행의 자유 작전'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승전한 후 지금까지도 미 해군은 서방 진영의 항행의 자유를 보장했다. 국가 간 무역을 활성화해 시장 경제를 키우며 자국 중심 질서를 정립한 것. 근래 중국처럼 이를 방해하려는 세력이 나타나면 군사 작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를 고려하면 <모아나 2>는 놀라울 만큼 현실적인 작품이다. 모아나는 미 해군, 마우이와 동료들은 미국의 동맹국, 날로 신은 중국처럼 항행의 자유를 방해하는 국가에 정확히 대응되기 때문.
물론 지나치게 미국 중심적 해석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바닷길의 중요성은 미국만의 가치가 아니며, 바다를 통한 소통과 교류는 역사를 발전시키는 핵심 원동력이었으니까. 명나라가 정화의 원정 이후 돌연 바닷길을 포기한 이후 서구 열강이 중국의 국력을 추월한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따라서 바닷길을 끊어서 인간 세계를 암흑 속에 빠트리려는 날로의 존재는 인류 문명 공통의 공포이자 두려움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모아나 2>는 어디까지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디즈니는 대공황 이후부터 미국 사회가 추구하고 유지할 가치와 윤리를 충족시키는 환상 속에서 재미와 쾌감을 추구한 스튜디오였으니까. 자연히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미국식 이데올로기를 은연중에 관객에게 심어주는 역할을 맡아 왔다. 그렇기에 <모아나 2>가 보여주는 모험과 항해를 미국 중심적 시각에서 이해해도 무리는 아니다.
신화로 가린 이데올로기
다만 미국 패권에 대한 은유는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다. <모아나 2>가 전편의 미덕을 본받아 인간 영웅이라는 신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 대다수 신화는 초자연적 존재를 조력자나 대적자로, 인간 영웅을 주인공으로 묘사하는 공통의 작법을 공유한다. 대체로 신적 존재는 아무리 강해도 여러 제약이 있다. 그렇기에 금기로부터 자유로운 인간만이 신과 인간 세계 양쪽을 넘나들면서 모험을 펼치고, 운명을 성취한다.
<모아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다'와 같은 강대한 존재도 세계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모아나를 영웅으로 낙점하고, 그녀가 좌절하거나 포기하려 할 때마다 간접적으로 도울 뿐이었다. 남태평양 섬의 원주민들이 공통적으로 숭배하는 영웅, 마우이로부터 항해술을 배우도록 난파된 모아나의 배를 그의 섬으로 이끌어주는 식이었다. 모험을 계속할지 말 지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모아나의 몫이었다.
<모아나 2>도 마찬가지다. 전편이 반신반인이 아닌 인간의 모험이라는 콘셉트를 제시했다면, 속편은 이를 구체화한다. 날로와 전투를 펼치는 클리아맥스가 대표적이다.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는 가운데, 모아나는 자신과 마우이의 역할을 바꾼다. 날로가 능력이 더 뛰어난 반신이 아니라 오직 인간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 이는 뻔할 수 있었던 후반부를 변주시키며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원동력이 된다.
아는 맛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
안타깝게도 <모아나 2>의 장점은 여기까지다. 우선 전반적인 스토리라인은 전편을 답습했다. 고향 모투누이 섬에 위기가 닥치는 환영을 본 모아나. 선조들이 발견하지 못한 전설 속의 섬을 찾아내지 못하면 부족 사람들이 모투누이에서 고립된 채 고사할 것이라는 예지를 받자 그녀는 다시 한번 항해에 나선다. 이는 모투누이에 찾아온 재앙을 풀기 위해 항해를 떠난 전편과 다를 게 없다.
발단 이후의 전개도 전편과 거의 동일하다. 서로 떨어져 있던 모아나와 마우이는 항해 도중에 합류해서 다시금 한 팀을 이룬다. 최종 빌런을 마주하기 전에 한 차례 실패를 겪는 것도, 좌절한 일방을 다른 일방이 위로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도 유사하다. 단지 전편에서는 모아나가 마우이를, 속편에서는 마우이가 모아나를 일으켜 주는 게 다를 뿐이다.
물론 기시감을 옅게 만들려는 시도는 있다. 돼지 '푸아'와 닭 '헤이헤이'에 더해 모아나의 여동생 '시메아', 동료 선원 모니와 로토 등에게 적잖은 분량을 부여하고, OST에서도 로토에게 래퍼 역할을 맡기는 식이다. 하지만 이 선택은 부작용을 동반한다. 모아나와 마우이의 분량이 줄면서 도리어 그들의 캐릭터성이 평면적으로 변한다. 일례로 전설적인 길잡이의 칭호까지 받은 모아나의 내적 갈등은 스케치 수준으로 스쳐 지나간다.
귀가 허전해
마지막으로는 음악의 쾌감도 전편에 미치지 못한다. 더 이상의 검증이 불필요한 린 마누엘 미란다의 공백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진다. 그는 모아나가 항해에 나서기로 결심을 굳힐 때 부르는 노래인 'How Far I'll Go'를 작사, 작곡하면서 <모아나>의 흥행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은 바 있었다. 엘사가 부른 'Let It Go'가 <겨울왕국>을 상징하듯이, 'How Far I'll Go' <모아나>하면 떠오르는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했으니까.
린 마누엘 미란다가 제작에 불참한 <모아나 2>는 'How Far I'll Go'와 같이 뇌리에 각인될 만한 OST를 들려주지 못했다. 두 번째 모험의 시작을 알리는 'Beyond'가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하지만, 이전 곡과 같은 임팩트를 주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물론 노래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편에서 모아나가 항해에 나서기까지 겪은 역경만큼 극적인 전개를 속편이 고안해내지 못한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에 가깝다.
귀가 허전한 아쉬움을 비주얼로 만회하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 클라이맥스 전투 시퀀스는 확실히 눈을 즐겁게 한다. 특히 모아나의 카누가 거대한 파도를 빗겨 타는 순간을 4d로 본다면 마치 서핑을 하는 듯한 쾌감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음악의 아쉬움을 온전히 대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클라이맥스 외의 장면에서는 특별히 놀랄 만한 장면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모아나 2>는 쿠키 영상에서 예고하는 3편을 위한 징검다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듯 싶다. 그와 동시에 과연 <모아나 2>가 징검다리 역할을 온전히 해냈는지는 끝나는 순간까지도 의문이다. 세 번째 애니메이션보다는 약 1년 반 뒤에 개봉할 <모아나> 실사 영화가 더 궁금해지니까.
Acceptable 무난함
디즈니가 디즈니한 무색무취한 속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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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처스 라운지> | 학교에 비친 사회를 보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도난 사건이 빈번한 학교에 부임한 신임 교사 ‘카를라’(레오니 베네쉬). 그녀는 이민자 출신 학생이 범인으로 몰리자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교무실에서 예상치 못한 일에 휘말린다. 노트북 카메라를 켜 둔 채 지갑을 옷에 두고 수업에 들어갔다 온 사이, 돈을 가져간 사람의 블라우스가 카메라에 찍힌 것.
카를라는 범인을 찾으러 나서고, 이내 용의자를 발견한다. 학교 직원 '쿤'(에바 로에보)'이 문제의 블라우스를 입은 것. 이에 학교는 쿤의 출근을 금지하고, 쿤의 아들이자 카를라의 학생인 '오스카'(레오나르드 슈테트니쉬)는 카를라에게 적개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 이후, 카를라는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큰 시련을 마주한다.
학교와 교사를 빌려 사회를 이야기하다
<티처스 라운지>는 '독일영화상'에서 최고의 영화상, 감독상, 시나리오상, 여우주연상 등 5관왕을 달성한 영화다. 화려한 수상경력과 교무실이라는 의미의 제목을 조합하면 이 작품의 소재를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교권이다.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갈등을 통해 교권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도 그렇다. 카를라는 어떻게든 교내 도난 사건을 해결하려 든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불똥이 튄다. 편견과 선입견, 오해가 겹치면서 학부모는 교사를 비난한다. 학교와 교사는 권위를 내세워 비난을 막으려 한다. 학생들도 교내 언론 같은 스피커를 활용해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게 학교는, 특히 교무실 안은 아수라장이 된다. 마치 최근 한국의 교실을 들여다보는 듯한 광경이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이 광경은 최근에 개봉한 영화 한 편을 연상시킨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괴물>이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두 작품은 우연히도 비슷한 사회적 갈등을 다룬다. 교내에서 발생한 사건을 두고 학생, 학부모, 교사의 관점이 엇갈리는 파국을 다룬다. 단순히 교권의 추락만 지적하는 게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질적인 원인, 사회 전체의 책임을 지적하는 점도 공통점이다.
단,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장르의 차이다. 괴물이 비극 섞인 판타지를 지향한다면, 티처스 라운지는 강렬한 스릴러로 나아간다. 이 차이는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두 작품의 끝도 상이하게 만든다. 그 덕분에 <티처스 라운지>는 <괴물>과 공유한 여러 공통점에서 불구하고, 차별화된 톤과 메시지로 관객을 휘어잡는다.
<괴물>을 닮았다
<티처스 라운지>와 <괴물>의 가장 큰 공통점은 교권 이슈를 불쏘시개로 쓴다는 점이다. 두 작품은 교권 이슈를 활용해 더 시급한 문제를 지적한다. 소통의 단절이다. 방식은 다르다. <괴물>은 관객을 현혹하는 방식을 택했다. 학부모, 교사의 시점에서 사건의 편린만 먼저 보여준 후에 학생의 관점에서 진상을 보여줬다. 학부모나 교사에게 동조한 관객 스스로가 편견과 선입견에 빠져 있었음을 자각하도록 만들면서 문제점을 체감시켰다.
반면에 <티처스 라운지>는 소통이 단절된 상황 속에 관객을 던져 놓는다. 핵심은 모두들 눈을 가린 채로 코끼리를 만지기 바쁘다는 것. 모든 주인공은 각자의 사실만 믿는다. 카를라는 블라우스의 문양에만 꽂혀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카를라의 인터뷰 중 입맛에 맞는 대목만 기사화한다. 학부모들은 카를라의 변명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갈등의 시발점인 카를라가 뒤늦게 진실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나 여의치 않다.
결국 <티처스 라운지>는 철저히 학교 내의 이야기만 다루는 것 같지만, 실상은 사회 전체를 다룬다.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관용의 부재, 그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견과 선입견의 존재. 이들이 교권 자체의 하락보다도 더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말에 정확히 부합하는 작품인 셈이다.
<괴물>과는 다른 학교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티처스 라운지>와 <괴물>의 공통점은 생각보다 눈에 잘 안 띈다. 포장 방법이 퍽 다르기 때문.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학교를 활용하는 방법에서 비롯된다. <괴물>에서 학교는 여러 배경 중 하나에 불과했다. 또 문제가 발생한 공간일 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을 어루만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일례로 미나토는 교장 선생에게 트롬본을 배우면서 위안을 찾았다.
<티처스 라운지>는 정반대다. 철저히 학교 안에서의 상황만 다룬다. 학교 내부를 보여주는 방식도 억압적이다. 1.31:1의 좁은 화면 비율을 활용해 학교를 꽤 폐쇄적인 공간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살렸다. 이에 더해 학부모, 교사, 학생의 시점을 교차한 <괴물>과 달리 <티처스 라운지>는 카를라에게만 집중한다. 그녀는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의 중심에 있고, 관객은 그녀의 시점에서 모든 사건을 본다.
그 덕분에 <티처스 라운지>는 스릴러 영화의 재미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다. 학생들은 서로 주먹을 휘두르고, 교사에게 욕을 한다. 교사들은 해결법을 두고 서로에게 고함을 질러댄다. 간담회에 참석한 부모들은 법적조치를 들먹이며 교사를 비난한다. 오해와 편견이 쌓이는 서스펜스, 갈등이 일제히 분출되는 폭발력은 좁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한층 강렬해진다. 여기에 신경을 자극하는 음악까지 더해지면 교내 갈등은 한 층 첨예해진다.
다른 학교, 다른 결론
스릴러의 미덕에 충실한 결과 <티처스 라운지>의 결론 역시 <괴물>에 비해 더 날카롭다. 사회적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비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 예를 들어 영화는 정체성 정치의 부작용을 자연스럽게 지적한다. 폴란드 출신이라는 카를라의 개인적 배경을 꼬투리잡거나, 교사들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가는 교내 언론의 행태는 단순히 학교 내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학교의 도난 사건 대응 역시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다. 학교를 일종의 감옥으로 묘사하면서 학교의 역할에 대해 다시 질문하기 때문. 학교는 학칙을 어겼다고 의심되는 학생을 처벌하고, 통제하고, 다른 피의자를 찾아내기 위해 학생들이 서로를 감시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교정, 감시, 처벌은 감옥의 생리와 다를 게 없다. 학교의 존재의의와 목적에 대해 다시금 고찰하게 만드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티처스 라운지>가 <괴물>과 전혀 다른 결로 마무리되는 이유다. 두 작품은 모두 '교권의 위기' 혹은 '소통과 관용의 부재'처럼 같은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괴물>은 그 끝을 비극적인 판타지로 마무리했다.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하기를 바라는 한 줌의 기대와 희망을 품어 관객에게 날려 보냈다. 반면에 <티처스 라운지>는 더 직접적이고 명확한 대안을 제시한다. 전자가 시라면, 후자는 에세이에 가깝다.
큐브에 새겨진 결론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티처스 라운지>의 결론은 카를라가 오스카에게 건넨 큐브에 담겨 있다. 학교는 오스카에게 강제 전학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그는 학교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한 채 교실에 계속 남아 있는다. 동료 교사들이 경찰을 부를지 고민하는 사이 카를라는 오스카 옆 책상에 앉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담임교사로서 그의 옆을 지킨다.
그러자 오스카는 카를라가 건넸던 큐브를 조용히 맞추기 시작한다. 오스카와 갈등을 빚기 시작할 때 그녀는 큐브를 건넸다. 알고리즘에 맞춰 순서대로 풀어내야 하는 큐브처럼 다른 문제들도 원칙을 따를 때만 풀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그들 사이에 숱한 오해와 편견이 쌓인다 해도, 차분하게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나란히 앉은 카를라와 오스카의 모습에서 그들이 99분 간 이어진 갈등의 탈출구를 마침내 찾은 듯 보이는 이유다.
물론 카를라는 이상적인 교사가 아니다. 학칙을 어겼고, 섣부른 추측으로 일을 키웠다. 하지만 그녀는 실수를 인정했고, 마지막까지 교사로서의 원칙을 지켰으며, 의무를 다했다. <티처스 라운지>를 단순한 스릴러 영화로 취급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추측과 선동이 난무하고 신뢰를 찾기 힘든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학교가 이렇게 폭발적인 공간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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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으로 둘러쌓인 세계에서 기대한 사랑
거짓으로 둘러쌓인 세계에서 기대한 사랑
영화 <무뢰한>
감독] 오승욱
출연] 전도연, 김남길, 박성웅
시놉시스] 범인을 잡기 위해선 어떤 수단이든 다 쓸 수 있는 형사 정재곤. 그는 사람을 죽이고 잠적한 박준길을 쫓고 있다. 그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는 박준길의 애인인 김혜경. 재곤은 정체를 숨긴 채 혜경이 일하고 있는 단란주점 마카오의 영업상무로 들어간다. 하지만, 재곤은 준길을 잡기 위해 혜경 곁에 머무는 사이 퇴폐적이고 강해 보이는 술집 여자의 외면 뒤에 자리한 혜경의 외로움과 눈물, 순수함을 느낀다. 오직 범인을 잡는다는 목표에 중독되어 있었던 그는 자기 감정의 정체도 모른 채 마음이 흔들린다. 그리고 언제 연락이 올 지도 모르는 준길을 기다리던 혜경은, 자기 옆에 있어주는 그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스포일러 유의#
느와르라는 장르를 선택한 멜로
언더커버, 살인, 경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영화 무뢰한이 느와르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본 이들 중에서 과연 무뢰한을 느와르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영화 느와르는 정재곤와 김혜경의 멜로를 위해 장르적으로 느와르라는 조미료를 조금 섞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살인마 박준길을 잡기 위해 혜경이 일하는 술집의 언더커버로 들어가면서 밤에 만나는 화려한 혜경이 아닌 모든 일이 끝나고 아침 해와 함께 평범한 여성으로 돌아가는 혜경을 목도하면서 그녀가 가진 삶의 무게와 상처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자신 역시 현재 자신의 상황이 범죄자와 형사의 갈림길에서 그 정체성을 스스로 의심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흔들리는 혜경을 보며 자신을 보는 것과 같은 측은함과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특히, 서로의 몸에 난 상처들을 공유하면서 그 상처가 전혀 아름다운 기억이 아님을 알게 되고 서로의 아픔을 말없이 이해해줄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그 둘은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재곤은 경찰로서 박준길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사살을 하게 되고, 이를 목격한 김혜경은 배신과 분노에 치를 떨며 다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간다. 그렇게 다시 조우한 정재곤과 김혜경. 재곤은 혜경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자신은 배신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런 그에게 혜경은 칼을 찌르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처럼 영화 무뢰한 정재곤과 김혜경이라는 캐릭터가 서로를 경계하다가 잠시 공감하고, 그리고 한 사건으로 인해 헤어지는 어찌보면 사랑과도 같은 그 이야기를 느와르라는 장르를 통해 표현을 해내고 있었다.
확답을 하지 않는 영화
많은 이들이 후기에서 이렇게 찝찝할 수가 없다며 영화평을 남기곤 했었다. 결말 부분만 봐도 김혜경의 칼에 찔린 정재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결론을 내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영화 속 두 남녀, 정재곤과 김혜경 사이에서도 그 관계를 정의하기 힘들 정도로 애매한 관계를 이어나간다. 이 둘이 과연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언더커버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그런 감정을 꾸며내는 것인지 처음봐서는 도통 알 수 없는 애매한 대사들로 영화는 진행된다. 이러한 애매함과 오묘함 때문에 감정선을 제대로 캐치하고 싶은 사람들은 결국 N차 관람을 이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를 반복해서 보다보면 대사에서 가려져 있던 캐릭터의 심리가 행동을 통해서 그리고 한 프레임에 잡히는 구도를 통해서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 캐릭터가 현재 어떤 상태이고 상대방이 던진 질문에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캐치할 수 있다. 재곤과 혜경의 첫만남 후 해장국 집에서 대화를 나누던 그들이 거리로 나왔을 때, 서로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을 때는 한 프레임 속에서도 여러 장치를 통해 둘 사이에 선을 그려놓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이들이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이 둘을 가르던 선은 점차 사라진다. 하지만 재곤의 배신 이후 다시 만난 곳에서는 재곤이 혜경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선이 등장하지 않지만, 혜경이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재곤을 선 밖에 두고 있다. 특히 칼을 들고 나가며 재곤과 조우할 때는 그림자 속에 있는 혜경과 빛 속에 있는 재곤과 같이 뚜렷한 구분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아마 혜경은 재곤의 행동을 배신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존재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지만 혜경을 알게된 순간부터 재곤은 자신은 일로써 해야할 행동을 했을 뿐 혜경에게만큼은 진심이었음을 알려주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나름의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둘은 순수한 사랑에 목말라 있었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두 주인공, 정재곤과 김혜경은 사랑에 목말라 있는 인물들이었다. 경찰로서 재곤은 다양한 범죄자를 만나며 그들의 거짓말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자신 역시 그들과 비슷해지진 않을까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아내와 이혼을 한 상태다. 그리고 김혜경 역시 마담으로서 웃음을 팔며 다양한 사람들의 거짓에 노출되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박준길이 자신으로 인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책감과 자신의 돈으로 도박을 하며 돈을 다 잃어버린 그에 대한 답답함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 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의 환경이 거짓으로 둘러쌓여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거짓 속에서 재곤과 혜경은 서로에게 비슷한 상처와 아픔이 있음을 알게 되고,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아닌 그저 인간 정재곤과 인간 김혜경으로서 순수하게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특히, 정재곤은 경찰이라는 직업적인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오히려 이영준이라는 새로운 인물로서 자신을 감추면서 이 변화가 오히려 정재곤에게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일깨우게 해준 것이 아닐까 싶다. 서로의 정체를 숨기고 그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며 친목을 다지는 가면무도회 속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렇게 자신 곁으로 온 혜경에게 재곤은 우리 함께 살까? 라며 혜경의 마음을 떠보자 해경은 ‘진심이야?’하면서 영화 속에 가장 행복한 미소와 기대감을 표현한다. 하지만 바로 재곤은 ‘그걸 믿냐’며 자신이 표현한 진심을 다시 쓸어담자 혜경은 활짝 열렸던 마음을 황급히 닫으며 그저 잡채를 먹을 뿐이었다. 이 장면에서만 봐도 혜경이 얼마나 순수하게 한 남자와의 사랑을 원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기대에 재곤은 형사로서 언더커버였음 밝힘으로써 져버리게 되고, 더욱 큰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혜경은 자신의 순수함을 짓밟은 재곤에게, 그리고 순수했던 자신에 대한 분노를 칼로 재곤의 배를 찌르며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칼에 맞은 재곤은 그녀를 향한 마음만은 진심이었기에 상처를 감추며 동료 경찰들에게 먼저들어가라는 손짓을 하고 마지막까지 그녀를 지켜준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 무뢰한은 남녀의 오묘한 감정선을 다룬 작품으로, 다시 볼 때마다 보지 못햇던 작은 요소들을 더 발견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다음에 다시 본다면 새롭게 발견한 요소들로 그 감정선을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남기는 수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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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가 아닌 ‘인생’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해당 리뷰는 ‘씨네랩’의 초대를 받아 시사회 감상 후 작성되었습니다.
영화 <메이 디셈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의 일부를 모아 만든 조악한 진실에 우리는 모두 상처받고 있다. 인간의 다면적이고 복잡한 내면과 세상의 진실을 타인이 포착할 수 있는지 묻는 영화들이 많아진 것은 그 때문일까. 오해와 어긋난 이해에 가려진 순수한 사랑을 그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과 부부의 몰락한 관계를 해부하는 <추락의 해부>에 이어 <메이 디셈버>도 관계와 내면의 진실을 묻는다. 자극적인 사건 사고에 대한 소식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멀리 많은 이들에게 퍼진다. 풍성한 사연을 가진 개인은 소비하기 쉬운 천편일률적인 캐릭터로 전락하고, 자극적인 정보만이 취사선택되어 이야기는 반복되고 잊히지 않는다.
36세 여성과 13세 소년의 불륜. 이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호기심이 일지 않을 사람은 없다. 1990년에 펫샵에서 근무하던 그레이시(줄리안 무어)는 함께 일하게 된 소년 조(찰스 멜튼)와 사랑에 빠진다. 가정도, 도덕도, 관습 그리고 법도 두 사람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레이시는 감옥에서 조의 아이를 낳았고, 이후 조와 함께 가정을 꾸려 세 아이의 부모가 된다. 타블로이드 신문을 연일 떠들썩하게 장식했던 이 사연은 20년 후 영화로 만들어지게 된다. 영화 속 그레이시 역할을 맡게 된 엘리자베스(나탈리 포트만)는 캐릭터 연구를 위해 부부의 집을 찾는다.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의 내면과 부부의 관계를 파고들수록 숨겨져 있던 균열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그레이시와 조의 사건에서 가해자는 명백히 그레이시다.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였고, 36세의 성인이었으며,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가정과 사회적 관습을 배반하고 그레이시가 선택한 것은 순수한 사랑이다. 그 원인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우울증, 양극성 장애 등으로 꼽는 것은 보는 이들의 자유지만 어찌 되었든 그레이시는 자신이 사랑을 선택했다고 믿는다. 사건의 앞뒤에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럴듯한 의견들이 들어갈 여지가 충분하다. 인생의 대부분을 어리고 불쌍한 피해자로 살아야 했던 조는 고등학교 졸업 후 독립을 앞둔 자식들을 보며 쓸쓸한 공허함을 느낀다.
그레이시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튼튼한 자아’는 조와의 사랑을 확신하며 자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레이시의 화사하고 밝은 아름다움은 그 순진하리만치 당당한 성격에서 기인한다. 그레이시는 예민하고 통제적이지만 어려서부터 오빠들의 과보호 아래 자란 순진하고 당당한 여성이며 조는 천식을 앓는 동생을 돌보며 철이 일찍 든 조용하고 강인한 남성이다. 엘리자베스는 영화에 출연할 조 역할의 어린 배우를 찾는데 고심한다. 조의 매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매력이 영화화에 크게 작용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비극적인 사랑에서 시작한 이 아름다운 커플에게 숨겨진 진실이 있으리라 기대한다. 도덕의 모호한 회색지대를 탐구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엘리자베스에게 그레이시와 조는 흥미를 자극하는 대상이다. 엘리자베스는 특유의 집요함으로 그들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질문하고, 그레이시의 전남편과 두 사람의 아들이자 조의 친구였던 조지를 만난다.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흡수하려는 것처럼 엘리자베스는 극이 진행될수록 그레이시와 닮아간다. 그레이시가 직접 자신의 화장품을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발라주고 거울을 향해 나란히 겹쳐 섰을 때, ‘인식론적 상대주의’와 ‘블루베리 파이 레시피’만큼 다른 두 사람은 비슷한 무언가가 되어 있다.
<메이 디셈버>는 엘리자베스의 시선으로 그레이시를 쫓다가 엘리자베스를 거쳐 조에 이르는 영화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그들을 한 사람씩 규정지으며 판단한다. 내내 당당하던 그레이시는 작은 일에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한 것처럼 부서질 듯 눈물을 흘린다.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의 편지를 읽은 후 드러내는 묘한 쾌감은 관객만이 볼 수 있다. 조가 혼자 TV를 보며 맥주를 마실 때 미지의 누군가(관객일 수도 있겠다)와 나누는 문자 메시지에서 우리는 그의 외로움을 엿본다. 그레이시의 오열을, 엘리자베스의 음흉함을, 조의 공허한 눈을 보며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게 된다.
무엇이 진실인지 감독은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마침내 영화 촬영 현장에서 그레이시를 연기하는 엘리자베스는 소파 위에 농염한 모습으로 누워 원피스의 한쪽 어깨끈을 늘어뜨린 채 손에 뱀을 감으며 조 역할의 소년을 보고 있다. 같은 대사, 비슷한 연기를 몇 차례 이어갈수록 엘리자베스의 연기는 점차 은밀하고 유혹적으로 변한다. 한 번만 더 하면 “진실에 닿을 것 같다”며 이어간 엘리자베스의 연기는 흡사 마녀의 유혹처럼 외설스럽다. 엘리자베스가 만들어낸 그레이시는 조각난 단면에 배우의 자의적 해석이 덧입혀진 전형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도덕적인 모호함과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스캔들 속에서 엘리자베스가 찾아낸 진실은 타블로이드 표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가까이서 보고, 겉모습을 베끼고, 질문을 던진다고 진실에 닿기는 힘들다. <메이 디셈버>의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색감은 아름다운 풍경 속 인물들을 한층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도덕적 진리를 묻기에는 가깝고, 내면의 진실을 파악하기에는 먼 카메라는 자극적인 사건을 소비하는 대중들의 시선과 일치한다. 진실이 담기기에는 파편적인 화면들 속에서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비극적 분위기에 지나지 않는다. <메이 디셈버>에서 ‘이야기’가 아닌 ‘인생’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서로를 이야기에 가둘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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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서브스턴스에서 가장 현실적인 공포는 엘리자베스가 데이트를 앞두고 계속 거울 앞으로 되돌아가는 장면이다. 외출 준비를 마쳤을 때는 꽤나 만족스러웠지만, 전광판 속 젊고 아름다운 수를 보자마자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결점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다시 립스틱을 바르고, 목주름을 감추고, 화장을 덧칠하지만 수정할 부분은 끝도 없이 보인다. 엘리자베스는 결국 거울이라는 자기혐오의 늪에서 얼굴을 뭉개버린다. 여성의 외모와 나이로 가치를 부여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도, 결코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없다. 엘리자베스가 스스로를 파괴하면서까지 서브스턴스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They are going to love you.’, 즉 사랑받을 것이라는 환상 때문이었다.
가부장제는 여성의 몸과 외모에 가치를 부여해 사랑을 주고, 다시 회수하는 방식으로 길들인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현실의 강화된 버전으로 이러한 시스템이 적나라하게 작동하는 곳이다. 특히나 엘리자베스가 진행하는 피트니스 쇼는 ‘자기 관리’라는 미명 하에 여성들이 더욱더 스스로에게 가혹해질 것을 요구한다. 이 쇼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제작자를 비롯해 모든 결정권자들은 남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운동복을 입은 출연자들은 남성들의 눈요깃거리가 되는 동시에 여성들에게 자신을 아껴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완벽한 몸‘이라는 환상을 판매하는데, 이때 여성들이 자신을 아껴주는 방법은 몸을 옥죄는 운동복을 입고 신체 부위를 성애화하는 모습으로 구현된다. 이 환상의 대리인은 쇼의 출연자들이며, 환상의 판매자는 여성의 몸과 외모에 가치를 부여하는 남성적 시선이다.
완벽한 외모와 몸을 자원으로 사랑받아 온 엘리자베스는 오랫동안 시스템의 보상에 길들여져 왔다. 아름다워질수록 자신을 향한 환호는 커졌을 것이다. “여자는 50 넘으면 끝”이라고 말하며 더 젊고 아름다운 인물을 찾는 제작자에 의해 엘리자베스는 가치가 떨어진 상품으로 전락한다. 더 젊고, 더 나은 자신을 향한 엘리자베스의 무자비한 욕망의 근원은 가부장제의 보상체계 안에서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는 어떻게 되는가.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의 모습은 마녀로, 패배자로 그려져 왔다. 아름다운 수에게 자기 자리를 뺏긴 후 엘리자베스는 코트로 몸을 감싸고 도망치듯 거리를 걷고, 젊은 남성에게 수모를 당하고, 혼자 있을 때조차도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 피폐해진 엘리자베스가 잠깐 생기를 찾을 때는 동창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승인해 줄 때뿐이다. 반면 사랑받는 여성은 권력을 얻는다. 그러나 이 권력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누가 승인하는 것인지를 영화는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에서 이 세계를 공고히 유지시키는 것은 제작자 하비와 남성 권력자들이며, 아름다움의 탄생에 찬사를 보내고 동조하는 언론과 대중의 시선 또한 공범으로 지목된다. 시스템 안에서 남성적 시선을 내면화한 엘리자베스와 수는 계속해서 탄생하며, 엘리자베스와 수로부터 변형되고 분절된 버전인 괴물, 즉 ‘몬스트로 엘리자수’ 또한 계속해서 탄생할 것이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던 보부아르의 말을 생각한다.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자신이 원해서 태어났나요? ‘더 젊고, 더 나은 나’에 대한 환상은 여성에게 유독하다. 마지막에 그 유독성 가득한 피를 무대에 난사할 때 해방감 섞인 쾌감을 느꼈던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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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 30초 예고편
일도 연애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스물아홉 ‘자영’(전종서).
전 남친과의 격한 이별 후 호기롭게 연애 은퇴를 선언했지만
참을 수 없는 외로움에 못 이겨 최후의 보루인 데이팅 어플로 상대를 검색한다.
일도 연애도 호구 잡히기 일쑤인 서른셋 ‘우리’(손석구).
뒤통수 제대로 맞은 연애의 아픔도 잠시
편집장으로부터 19금 칼럼을 떠맡게 되고 데이팅 어플에 반강제로 가입하게 된다.
그렇게 설 명절 아침!
이름, 이유, 마음 다 감추고 만난 ‘자영’과 ‘우리’.
1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1일 차부터 둘은 서로에게 급속도로 빠져들게 되고
연애인 듯 아닌 듯 미묘한 관계 속에 누구 하나 속마음을 쉽게 터놓지 못하는데...
이게 연애가 아니면 도대체 뭔데?
발 빼려다 푹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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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작은 방안의 소녀> 메인 예고편
친구의 괴롭힘에 못견딘 희주는 자퇴하고 집에서 히키코모리 생활을 한다. 그리고 인터넷 라이브 방송에서 만난 동하를 통해 자신감을 얻는 방법을 배운다. 동하는 펜둘럼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최면을 스스로 걸기를 알려준다. 그리고 채팅으로 만난 자신과 같은 히키코모리들을 격려한다. 1년동안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던 희주는 점점 자신감을 얻으면서 드디어 방을 탈출한다. 그리고 희주모와 화해도 하며 사회로 나갈 결심을 한다. 하지만 이때 1년전 희주를 괴롭혔던 해영은 그녀의 집주소를 찾아내서 찾아온다. 그리고 다시 괴롭힘이 시작된다. 희주는 사회에 복귀하려고 하지만 해영이라는 장애물을 만난다. 결국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기 싫은 희주는 동하에게 배운 펜둘럼을 통한 최면을 해영에게 이용할 결심을 한다. 그리고 해영을 스스로 자살하도록 최면을 걸고 자신은 사회에 온전하게 복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