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예슬2021-11-06 20:01:25
각자의 이삭을 주우며 살아가는 사람들
<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리뷰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밀레의 명화 <이삭줍는 여인들>을 보고 아녜스 바르다가 현대 사회의 모습까지 확장해서 영화를 진행 시킨 점이 특색 있었다.
이 그림을 보면 따뜻함, 평온함을 느꼈는데 아녜스 바르다는 이 그림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각자의 이유로 버려진 음식을 줍는 사람들, 우리 사회가 주목하지 하지 않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같은 그림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느낌을 떠올리고 그것을 영화로 제작했다는 점이 왜 아녜스 바르다가 누벨바그의 거장이라고 불리는지 깨달을 수 있었던 영화였다.
또 줍는다는 행위가 처음에는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이 하는 행위,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행위라는 이미지가 바로 떠오른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진행될수록 환경을 위해서, 예술을 위해서 줍는 사람들 등등 다양한 이유와 자신만의 신념을 위해 줍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래서 길에서 무언가를 줍는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영화를 보면서 바뀌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버려진 것들도 주인공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새로운 모습, 새로운 탄생 품이 되는 영화의 흐름이
처음엔 버려진 물건을 줍는 사람들과 왜 줍는지 이유에만 집중이 되었다면, 나중에는 버려진 물건들 에게도 시선이 갔다.
그리고 영화의 분위기는 일상적인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어 전체적으로 따뜻한 분위기였지만, 그 일상을 통해 현대 사회의 과소비와 대량 생산 등 현대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에 봤던 다큐멘터리와 달랐던 점은 어떠한 주제가 있으면 그 주제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인터뷰, 자료들, 주인공의 삶 위주로 나온다.
근데 이 영화는 타인의 일상을 찍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도 하고 자신의 손을 보여주고 직접 버려진 물건을 주워 오는 것을 찍는 등 감독님의 참여가 직접적으로 보였다. 그 점이 기존의 다큐멘터리와 다르고 마치 일기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가장 좋았던 장면은 곰팡이가 마치 추상화 같아서 좋아한다는 장면이다. 곰팡이를 보는 것조차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보는 아녜스 바르다의 시선이 특별했다. 액자 프레임 안에 곰팡이를 담으니까 정말 하나의 작품처럼 보였다. 또한 이 장면도 남들이 신경을 쓰지 않는 것, 더럽다고 생각하는 소재를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이 영화 주제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결말 부의 폭풍우 속에서 이삭 줍는 여인들의 그림이 인상 깊었다. 이 영화 처음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평온해 보이는 이삭 줍는 여인들의 그림이 나왔다. 이 영화가 끝난 후 누군가에게는 줍는다는 행위가 생존, 신념, 가치 있는 행위라고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결말에는 같은 이삭 줍는 여인들이지만, 폭풍 속에서 이삭을 줍고 있다. 누군가에겐 줍는다는 것이 폭풍우 같은 환경에서 버티며 줍는다는 것을 표현하였고, 이 영화의 흐름과 주제가 마지막 그림 한 장으로 정리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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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자단의 마지막 여정 엽문4 :더 파이널 [영화리뷰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엽문4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의 사용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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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 공식 예고편
함께라서 가능했던 생존.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놀라운 어느 실화를 바탕으로 한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의 영화, #안데스설원의생존자들. 2024년 Oscars® 국제영화상 부문 스페인 출품작으로 선정된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 일부 극장에서 12월, 그리고 넷플릭스에서 1월 4일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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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에 남아있는 감정
<애프터썬>은 어릴적 아버지와 갔던 튀르키예 여행을 했던 기억이 담긴 비디오를 재생하며 시작한다. 엄마가 캠코더를 들고 나의 어린 시절을 담았던 기억이 나에게도 있다. 그리고 내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이곳저곳을 찍으며 다녔던 영상이 남아있기도 하다. <애프터썬>을 보며 그런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좀 더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소피(딸)과 아빠는 사이가 좋다. 이건 튀르키예 여행을 내내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딘가 위태롭다. 소피는 이제 막 성인으로 가고자 하는 단계에 들어서 좀 더 성숙한 것들에 눈이 가기 시작했고, 이미 성인인 아빠는 어딘가 어두운 모습이다. 이들 부녀의 여행은 특별한 것 없이 평범한 여행이지만 그 안에서 나타나는 소피와 아빠의 감정은 너무나도 다르게 튀어나간다.
딸인 소피는 어리지만 이제는 더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취급되고 싶어 하는 아이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과는 놀고 싶지 않고 좀 더 성숙해 보이는 사람들과 놀기를 바라는 11살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알 수 없는 춤을 추고 있는 아빠의 모습은 어째서인지 쓸쓸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소피 앞에선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자신의 딸 앞에서는 자신의 어두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아빠의 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소피도 알고있다. 자신의 아빠가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이렇게 교차되는 감정 속에서 아버지와 딸은 서로를 끌어안고 춤을 춘다. 어른이 되고 싶은 딸의 마음과 이미 어른이지만 혼란 속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이 합쳐진 것이다.
어릴적 성인이 된다면 성숙해진다면 모든게 해결될 것만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 그 어렸을 때보다 더 혼란스러웠다고 한다면 그 어릴적 내가 믿지도 않을 것이다. 소피와 아빠도 마찬가지다. 아직 어린 소피와 이미 어른이 된 아빠는 절대 서로의 고민과 힘듦을 나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아끼기에 끌어안고 춤을 춘 것처럼 각자의 고민을 그러안고 받아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그런지 이 장면이 가장 인상깊었다.
이 영화에서 아쉬웠던 점은 소피와 아빠의 여행과 그에 따라 흘러가는 감정에 같이 이입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튀르키예의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나는 그저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지루함이 떠나가질 않았다. 하지만 이것 역시 나는 아쉬웠지만 다르게 보면 이 영화만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성인이 된 소피가 튼 캠코더 영상을 보는 것이다. 소피가 기억하는 과거를 되짚어보는 것이다. 이것들을 따라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소피는 이제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상황이 됐다. 소피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캠코더에 남겨진 추억을 되짚어보며 즐거웠던 과거를 기억하고 그때의 아빠를 공감할 것이다. 마지막에 나타난 소피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만큼 내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애프터썬> 시사회에서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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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록 무섭고도 기괴한 믿음
* <클럽 제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클럽 제로 (2023)
감독: 예시카 하우스너
출연: 미아 와시코브스카 외
장르: 스릴러, 미스터리
상영시간: 110분
국가: 오스트리아, 영국
영국의 한 명문 기숙학교, 일곱 명의 아이들은 학교에 새로 부임한 영양 교사 '노백(미아 와시코브스카)'가 진행하는 '의식적 식사법' 수업에 발을 들인다. 학생들은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기원도 알 수 없는 이 수업에 참여했다. 환경 보호, 체지방 관리, 자기 통제 등의 이유로, 혹은 장학금을 받기 위한 반강제적 선택으로.
첫째, 깊게 심호흡을 하고 눈앞의 음식에만 집중할 것. '노백'이 지도하는 '의식적 식사법'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배가 고프다', '먹고 싶다'라는 식의 잡념은 모두 떨쳐내고, 나 자신과 음식만을 생각하는 게 이 식사법의 핵심이다. 부드러운 말투 속 거부하기 힘든 카리스마가 내재된 '노백'의 가르침에 이끌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의 식사법을 의심 없이 따른다. 절반의 혹하는 마음,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의구심으로 채워져 있던 아이들의 태도는 점차 그를 향한 맹신으로 이어진다.
수업은 지속될수록 심화 과정에 치닫고, 이에 기이함을 느낀 소수의 이탈자가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노백'의 논리와 철학에 완전히 매료된 학생들은 선생을 향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소량의 음식을 먹도록 유도했던 그는 한 발자국씩 극단으로 향해 나아간다. 한 번에 한 가지 음식만을 먹도록 제안하더니 급기야 섭식을 하지 않아도 인간은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해괴한 주장을 펼친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의 주장에 휘둘리는 법이 없을 테지만, 이미 그에게 완벽하게 가스라이팅 된 학생들은 다 함께 음식을 끊고, 나날이 야위어가기 시작한다.
'음식을 먹지 않아도 인간은 삶을 영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고와 판단을 할 줄 아는 인간이라면, 이 주장의 오류가 엄청나다는 것을 아주 쉽게 인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아이들은 '노백'의 허황된 논리를 맹신하는 태도를 보인 걸까.
극의 배경은 아주 비싼 학비를 부담해야만 다닐 수 있는 영국의 명문 기숙 학교다. '노백'의 학생들 중 유일하게 상류층 자제가 아닌 '벤'이 전액 장학금을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것만 보더라도, 아무 학생이나 다닐 수 없는 엘리트 학교임을 알 수 있다. 즉, 아이들은 신임 영양 교사 한 명에게 인생을 좌지우지 당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고, 모두가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이다. (스포츠, 예술 쪽으로의 특기도 탁월하다.) 따라서 아이들이 잘못된 신념을 갖게 된 동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노백'이 아닌 이들의 가정 환경이나 성격적 요인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아이들 중 '노백'에게 가장 의지하며 '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내비친 '프레드'부터 살펴보자. 무용에 재능을 가진 그는 선천성 당뇨병을 앓고 있고, 일 때문에 부모와 멀리 떨어진 채로 지내고 있다. 누구보다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시기이지만, 부모는 아이를 학교에 맡긴 채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가족을 대신해 그를 포근하게 감싸준 건 '의식적 식사법'을 제안한 영양 교사다. 다정하게 고민을 들어주고, 힘이 들 때는 기꺼이 한 쪽 어깨를 내준다. 상처 입은 소년은 선생이 자신을 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감히 가질 수 없다. 그의 수업 방식을 따르다 죽을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한번 잡은 그의 손을 놓을 수 없게 된 건 단 한 번도 자신의 신의를 외면한 적이 없기 때문일 터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선수 생활을 위해 부모에게 체중 조절을 간섭받는 '라그나'는 일종의 반항심으로 '노백'의 수업에 적극적으로 임한다. 선생의 다정한 관심, 그리고 실수를 하더라도 믿고 지켜봐 주는 태도, '의식적 식사법'을 통해 얻게 된 자율성은 '라그나'가 무한 신뢰를 내비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처음부터 가장 맹신론자에 가까운 행태를 보였던 '엘사'는 완전한 자기 통제력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극한으로 내몬다. 그리고 이 수업에서 유일하게 겉돌던 '벤'은 전액 장학금을 받기 위해, 싱글맘인 어머니를 힘들게 하지 않기 위해 '노백'의 주장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음식을 거부하는 그의 교육 방식에는 탈자본주의적 성격이 깃들어 있기에 '벤'은 어머니를 착취한 대상을 자본주의로 인식하게 된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장학금을 받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테지만, 그가 '노백'의 말을 따르게 된 결정적 계기는 두 모자의 삶을 힘겹게 만든 자본주의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는 아이들에게 철저한 관심을 쏟는 '노백'의 일관된 태도, 그리고 '자유'와 '생존'이라는 단어들을 교묘하게 섞어가며 설득력을 발휘하는 화법이 도처에 깔려 있었고, 아이들은 전적으로 그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실 <클럽 제로> 속 '노백'이 주창하는 '의식적 식사법'은 극단적 사례이긴 하지만, 이를 현실 속 다른 예시로 적용해 본다면 충분한 현실감이 생긴다. 사건 혹은 지식에 대해 팩트를 검증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태도는 SNS나 인터넷에서 정보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의 태도와 꽤 많이 닮았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극중 그를 학교로 데려오는 데 일조한 어른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애초에 '노백'의 '의식적 식사법'에 혹해 그를 학교의 영양 교사로 추천한 것도 '라그나'의 아빠이고, 교장 역시 유행하는 식사법 같다며 수업을 검증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며 "말도 안 돼", "너무 극단적이다", "불쾌하다"라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유튜브의 가짜 뉴스를 보며 그릇된 정보에 혹하고, 잘못된 신념에 빠져 편향된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나. 제아무리 말도 안 되는 거짓일지라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달콤한 표현들을 장식처럼 더한다면 사실을 압도하는 무시무시한 힘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설파하는 영화인 셈이다. 죽은 낯빛에 얇은 몸뚱이로 자기만족에 취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며 올바른 진실이 빼앗긴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 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프라이빗 시사회에 참석해 작성한 리뷰입니다 *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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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과 불행으로 힘겹게 엮는 멜로
불행에 불행이 연이어 엮이면서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절한 지는 잘 알겠다. 그러나 불행 속에서 멜로를 피어나게 만드는 과정은 도통 이해하기 힘들다. '로기완'을 보고도 영 개운치 않은 게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은 삶의 마지막 희망을 안고 벨기에에 도착한 탈북자 기완(송중기)과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여자 이마리(최성은)가 서로에게 이끌리듯 빠져드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조해진 작가의 장편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에 등장하는 캐릭터 로기완만 차용해 새로운 내용으로 각색했다.
영화는 초반부에 로기완의 생존기를 구구절절하게 보여준다. 엄마 옥희(김성령)와 함께 북한에서 탈출해 중국 연길에서 생활하던 그가 어떤 사유로 벨기에까지 오게 됐는지를 설명하고 벨기에에서 하루하루 버텨내는 그의 삶을 최대한 처절하게 그려낸다. 다소 지리멸렬한 느낌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불행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인간의 삶을 전달하기엔 나쁘진 않았다.
로기완과 이마리가 엮이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조금씩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좋지 못한 첫 만남을 가진 두 사람인데 왜 서로에게 빠져들게 됐는지 설명이나 서사의 빌드업이 생략됐다. "이끌리듯 빠져들었다"는 표현으로 넘어가기엔 이들의 감정선에 큰 구멍이 뚫려있다. 차라리 극한의 상황 속에서 견뎌낼 수 있는 연대나 응원을 전하는 휴머니즘이었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두 캐릭터의 멜로만큼 부족한 게 하나 더 있었으니 마리의 감정선이다. 사격 국가대표 출신인 그가 왜 아버지와 반목하게 됐고, 자기 자신을 타락시키면서까지 아버지에게 상처 주려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다 보니 마리 캐릭터에 몰입하는 게 큰 장벽과도 같았고, 기완과의 멜로 케미도 설익은 느낌이 강했다.
'로기완'을 연출한 김희진 감독의 연출력도 다소 애매했다. 이국적인 풍광을 배경으로 한 점은 분명 이색적으로 느껴지긴 했으나, 과거 8~90년대 작품을 보는 듯한 촌스러움도 같이 묻어난다.
'로기완'의 두 주연배우 송중기와 최성은은 자신이 맡은 배역에 성실하게 임하며 연기력을 펼친다. 하지만 작품 자체가 높은 완성도는 아니다 보니 '고군분투한다', '노력한다'에 그쳤다는 게 아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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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아무도 기억 하지 못한다면, 그건 나일까 아닐까
[JIFF데일리] 위드아웃 허 (Without Her)
아리안 바지다프타리 | Arian VAZIRDAFTARI
Iran |2022 |111min |DCP |Color |Fiction |15Asian Premiere
시놉시스
로야는 이란에서 덴마크로 이민을 떠나기 불과 2주 전, 길을 잃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한 어린 여자를 만난다. 로야는 여자를 집으로 데려가 있을 곳을 마련해 주고 자신의 남편, 가족, 친구들에게 소개한다. 로야는 이 여자가 점차 자신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다.
프로그램 노트
남편 바박의 강한 주장으로 2주일 후면 로야는 이란에서 덴마크로 이민을 떠난다. 집을 정리하고, 이삿짐을 싸는 등 경황없는 날들을 보내는 로야는 어느 날 길에서 말 없는 젊은 여성을 만난다. 그녀는 길을 잃어버렸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은 데다가 로야 앞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한다. 로야는 그녀를 돕기 위해 집으로 데려가고, 정신을 차리자 경찰서로 가서 신고하지만, 어떻게 해도 그녀의 신분은 조회되지 않는다. 한편 출국 서류 준비를 하던 로야는 친구 때문에 자신의 출국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젊은 여자는 로야 행세를 하며 로야의 정체성을 훔치기 시작한다. 남편 바박까지 도우면서 로야는 더 이상 로야가 아니고, 젊은 여자가 로야로 둔갑한다. 누군가가 내가 되고, 나는 또 다른 누군가가 된다고 상상해본다면 황당한 줄거리 같지만, 아리안 바지다프타리 감독은 스릴러의 형식을 빌어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로야 역을 맡은 타나즈 타바타바이의 연기도 뛰어나다. (전진수)
아무도 기억 하지 못한다면, 그건 나일까 아닐까
남편 바박과 함께 오랫동안 계획한 덴마크 이민을 위해, 시끌 벅적하게 퇴직 인사를 하고 집 앞에 선 로야.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비가 쏟아지는 정신 없이 스산한 밤이었고, 집 앞에서 비를 맞고 서 있던 젊은 여자는 로야의 눈 앞에서 쓰러진다. 기억을 잃은 것인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여자에게 로야는 ‘지바’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가족을 찾도록 돕는다.
‘지바의 비밀은 무엇일까?’ ‘왜 그녀는 로야의 삶을 훔치려고 하는 것일까?’ 영화가 한참 지날 때 까지도 관객은 지바의 사연을 좇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진실은 무엇인지, 누가 바박의 아내였는지, 그래서 ‘로야는 정말 로야인지’ ‘지바가 로야를 구해준 것이고, 로야가 착각한 것은 아닌지.’ 관객조차 헷갈리게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다다라야지만 누군가의 사연이나, 배신이나 함정이 아닌 여자의 대체가 통용되는 ‘단지 그런 세상’이라는 세계관에서 비롯된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자의 인생을 대체하는 것이 통용되는 세상엔 두가지 법칙만 있다. 순응하던가. 사라지던가.
말하는 법조차 잊어, 말을 하지 않던 지바가 말을 하기 시작하며, 로야의 삶에 깊숙이 들어오게 되고, 로야의 실종된 친구 엄마에게 찾아가 꿈 이야기를 듣던 어느 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나일까 아닐까’ 하고 말하던 장면에서 지바는 새로운 삶에 침묵으로 거부하다가, 순응하기로 결심했음을 보여준다. 가족은 자신의 장례를 치루어 자신을 지웠고, 아무도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는 인생은 살아있지 않은 것과 같은 삶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지바는 사라지는 것 대신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대체를 하는 쪽도, 대체를 당하는 쪽도 모두 마찬가지다. 순응하지 못하면 사라진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새로운 기억이 되는 수밖에.
눈을 가린 여자에게 행하는 ‘돌봄’이라는 이름의 가해
영화는 내내 흐릿하다. 이란에 저렇게 비가 많이 오나 싶을 만큼 세차게 내리는 비는 자주 사람들의 시야를 흐린다. 빗방울이 쉴 새 없이 흐르거나, 김이 서려 흐릿하게 보이는 유리창은 선명한 사실에서 자주 멀어지게 만들고, 로야가 라식 수술이 후 눈 앞이 깜깜해지는 경험을 하는 것은 위기의 절정이 된다.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은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게 되고,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가해를 저지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지… 이런 설정은 이란의 여성이 처해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시야를 가리고, 보호라는 이름으로 억압하며,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말도 안되는 일이 당연한 듯 벌어지고 있는 무서운 세상이 2023년, 이란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에디터 luna
영화 <위드아웃 허> 상영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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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대한 믿음 - 영화 <더 웨일>
이 영화는 사랑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브렌든 프레이저
희망 혹은 사랑의 밝은 느낌은 결코 찾기 어려운 포스터와 트레일러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다면, 우리는 분명
주인공 찰리 역을 연기한 브랜든 프레이저의 말처럼
이 영화가 사랑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스포주의
※ 해당 시사회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였습니다
주인공 찰리는 살아있지만, 사실은 죽어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보조기 없이는 쉽게 일어날 수 없고, 혼자 힘으로는 떨어트린 핸드폰과 열쇠도 줍지 못하며 천장에 달린 손잡이 없이는 침대에 눕기조차 쉽지 않다.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망가져 버린 몸과 마음은, 그를 세상과 단절시킨 채 작은 아파트먼트의 소파 위에 가두어버렸다.
마치 망망대해처럼 깊고 어두운 그 속에 말이다.
영화 속 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진짜 사람답게 '사는' 것과 겨우 '살아가지는' 것의 차이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마음 속 내적인 고통이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또한 말이다. 찰리는 자신의 집에 방문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역겹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는데, 사실상 이는 스스로에 대한 짙은 자기 혐오가 깔려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삶이 전부 타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 속에는 수많은 찰리 본인의 선택이 있었고, 그 속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혼란, 갈등은 그를 더욱 괴롭게 하는 부분이다. 사랑을 찾아 가족을 두고 떠났던 본인의 이기적인 선택에 대한 죄책감과 결국 자기 삶의 전부였던 파트너를 잃은 고통 속에서 그는 오랜 시간 헤엄치게 되었다.
온라인 강의를 업으로 삼는 찰리는, 학생들에게 작문에 대한 강의를 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에세이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성' 이라며 끊임없이 이를 강조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카메라가 망가졌다는 거짓말과 꺼진 검은 화면 아래 본인의 모습을 숨길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의 마음 속에는 본인이 강조하는 진실성과 정직함으로부터 비롯된 당당함이 아닌 세상과 스스로의 삶에 대한 분노와 슬픔만이 가득찼을 뿐이다. 그렇게 분노에 찬 마음으로 노트북을 내던지는 순간, 그는 바깥 세상과 자신을 잇던 유일한 끈을 잘라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분노에는 마치 친구가 될 수 있을 것만도 같았던 피자 배달부의 존재가 큰 트리거가 되었다. 배달부는 매일 비슷한 시각, 같은 피자를 시키지만 모습은 드러내지 않는 찰리에 대해 은근한 걱정과 관심을 주었다. 문 앞에 피자를 놓으며 찰리의 안부를 묻고, 짧은 대화와 더불어 심지어는 통성명까지 한다. 하지만 찰리의 모습을 마주한 그가 내뱉은 탄식 한 마디는 벼랑 끝에 있던 찰리를 마침내 무너뜨린 순간이 되버린다. 결국 자신의 모습을 거부하는 세상의 모습을, 찰리는 그 배달부를 통해 확신한 것이다.
영화는 찰리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리며 그들 간의 관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서로 간의 구원과 사랑, 삶과 죽음의 이야기가 있다.
찰리는 발작으로 인해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죽음의 문턱에 닿을 때마다 소설 <모비딕>을 주제로 삼은 한 에세이를 읊고, 또 듣기를 원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그 거대한 고래를 잡기 위해 삶을 다하는 것처럼, 어쩌면 찰리는 자기 삶의 고래를 찾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인생에서 잘 한 일이 단 하나라도 있음을 확인해야겠다고 절규하는 그의 대사는, 공허한 삶속에서 단 하나의 희망으로 삼아왔던 딸 엘리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을 보면, 찰리가 정말 자기 삶의 고래를 찾았는지, 마침내 구원을 얻게 되었는지는 어쩌면 확실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허나 확실한 건, 결국 삶에 대한 의지와 사랑에 대한 그의 믿음이 그를 다시 두 발로 일어서게 했다는 것이다. 온전히 그의 힘으로.
그의 재기를 알리는 작품이 등장했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고 배우로서 암흑기를 겪던 브렌던 프레이저가
이제는, 다시 두 발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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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퍼 탐정으로 돌아온 배트맨, 브루스 웨인
나의 최애 슈퍼히어로는 퍼니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마블 히어로들에 비해선 인지도가 떨어지는 영웅이라 많이들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퍼니셔는 중간이란 없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었다는 트라우마 때문에 그에 대한 분노를 범죄자들에게 푸는 인물이다. 여러모로 슈퍼히어로라고 보긴 어렵다. 원래 같으면 스파이더맨과 같이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개화시키는 게 다방면으로 선한 방식인데 퍼니셔에게 그런 건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런 내면의 폭력성을 후회와 트라우마로 분출시키는 내면의 에너지가 난 너무 멋있다. 데어데블과 킹핀이 MCU로 리턴함에 따라 퍼니셔 역시 합류가 유력하다는 링크가 뜨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나는 그의 복귀를 아~주 기다리고 있다. 그것도 존 번탈의 퍼니셔로.
최애도 마블. 제일 인상 깊었던 영화도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으로 마블이었다. 난 DC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슈퍼맨이나 아쿠아맨 같은 히어로들은 신이라서 감정이입이 안 된다. 퍼니셔같이 사람이어야지 공감이 돼서 보는 재미가 생기는 것이다. 이 근거로 남들 재밌다고 했던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도 그냥 그랬다. 그냥 취향에 안 맞았던 듯싶다. 그래서 그나마 좋아했던 작품이 <다크 나이트>와 <조커> 정도였다. 전자는 워낙 슈퍼히어로물의 교과서로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작품 아닌가. 후자는 스릴러 향을 첨가한 사회비판 영화로 극에서 표현하는 음울함에 사실 좀 공감하기도 했다. 두 작품 다 인물의 현실감이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브루스 웨인이 그냥 돈 많은 잘생긴 부자 1로만 묘사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이 전부 다 떠나가 마음에 구멍이 난 인물이었고(<다크 나이트>) 온 사회가 만든 상처에 빠져 괴물이 된(<조커>) 내면묘사는 우리 생활에서 볼 수 있어서 인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단순히 마블의 히어로들처럼 때려 부수는 것과는 다른 재미를 무의식 중에 바랬던 것이다. 이런 나는 2022년 3월 1일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관심조차 가지 않는 밴 애플렉의 배트맨과는 다른 히어로가 탄생할 것 같다는 생각에 두근두근 설렜다. 브루스 웨인이 10년 만의 솔로 무비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무력이 강해 기대고 싶은 배트맨은 아닌 것 같다. 이 <더 배트맨>은 우리 곁에 있을법한, 뇌가 섹시한 슈퍼히어로다.1. 어떤 것에 대한 영화인가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배트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박쥐 가면 쓴 싸움 잘하는 남자. 뭐 그렇게들 많이 알 것 같다. 맞다. 이 영화는 박쥐 가면 쓴 슈퍼히어로가 주인공이다. 이 박쥐 가면 쓴 유사 자경단은 고담시의 부조리가 벌어지면 쨘하고 나타나서 불한당을 두드려 패 버린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다. 철저한 불살 주의답게 총기나 칼 같은 둔기류를 쓰지는 않는다. 적당히 두드려 패버리는 선에서 약자를 도와주는 배트맨. 이 영화의 인트로는 배트맨의 히어로 활동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이 배트맨 액션 신과 함께 내레이션을 보여준다. 난 과연 잘하고 있는가, 식의 회의감으로 가득한 배트맨. 배트맨이 된 지 2년밖에 안된 초보 슈퍼히어로라 그런지 그는 마음속의 숭고한 대의만으로도 내면을 채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연하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님을 나쁜 놈들에게 잃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에 복수로 가득 찼다. 이 때문에, 그는 잃었다는 화와 분노 때문에 악인을 보면 죄다 두드려 패버리는, 뒤틀린 슈퍼히어로가 돼버렸다. 당연히 그가 원하는 걸 얻을 수는 없다. 원래 무언가를 잃고 나서 하는 모든 행동은 공허하다. 당연하지. 그 잃은 대상이 돌아오지 않는데. 근데 그는 그렇게라도 해야 내면의 분노가 해소된다고 생각하나 보다. 이런 그에게,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고담 시장이 암살당한 것이다. 의문의 수수께끼와 함께 살해당했다. 시체 근처에는 'To batman'이라는 편지가 있다. 살인범은 자기를 리들러 라 칭하며 배트맨에게 메시지를 건넨다. 이 메시지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수수께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람이 죽은 이면에는 어떤 사건이 관련되어 있고, 이 <더 배트맨>은 배트맨이 경찰 고든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배트맨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내적 성장을 이루는 것 역시 핵심 소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어떤 영화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보통 배트맨 시리즈 영화를 장르적으로 표현하자면 '슈퍼히어로 영화'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다. 배트맨은 슈퍼히어로니까. 근데 이 영화는 사실 드라마적인 요소가 더 강한 쪽이라 생각한다. 무슨 말이냐면. 팀 버튼의 배트맨은 감독의 주 장기인 '시각화'가 십분 발휘된 시리즈였다고 생각한다. 펭귄에 대한 비주얼만 생각해도 감독의 인장이 쾅쾅 박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명품 트릴로지로 자주 회자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는 히어로의 탄생과 천재성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놀란은 <배트맨 비긴즈>에서도 라스 알 굴에게 싸움 배우며 내면의 분노를 어떻게 표출할 것인가에 대해 다뤘다. 이 뿐만 아니라 브루스 웨인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에 대해 직접적으로 조명한 것도 다른 배트맨과는 다른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또 약간 강박증(?)이 있는 놀란 답게 폭발이나 고딕 양식을 따온 듯한 건축물 디테일도 구현이 잘 됐다.
그런데 이 맷 리브스 표 <더 배트맨>은 다르다. 일단 배트맨의 기원 그런 것 없다. 레이철? 그런 거 없다. 캣우먼도 '캣우먼'이라는 이름으로는 언급되지 않는다. 유년시절에 대한 언급이 단 1도 없고 신참 배트맨의 모습 그대로를 먼저 제시한다. 실제로 영화는 처음부터 악인들 때려잡는 모습이 나온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초반부터 기존의 배트맨들과는 다른 지점을 보여준다. 이런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은 후반부에 이르러서도 느껴진다. 이렇게 다르게 시작했던 <더 배트맨>은 주인공 내지는 관객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게 만든다. '악인이 나온다 - 무력으로 두들겨 팬다 - 나쁜 놈이 착해진다'의 기존 문법에서 벗어나 꼼꼼하게 증거를 수집하고 이에 따라 '이 사람이 피해자가 될 것이다'라는 식의 추리물로 변한 것이다. 이는 원작 묘사에 철저했다는 뜻도 된다고 생각한다. 원래 DC의 뜻이 'Detective Comics'라고 한다. 이에 걸맞은 히어로 묘사가 된 것이다. 또 누아르 영화 느낌도 난다. 주요 정치인들이 살해되며 사건의 진상이 서서히 드러나는데, 이게 우리가 <세븐>이나 <조디악>에서 보던 느낌이다. 약간 슈퍼히어로 30% 첨가에 범죄 수사물 50%에 성장기 20%가 첨가된 느낌?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3. 또 어떤 부분에서 기존의 시리즈들과 다른 영화인가요?
내가 이 영화가 진정한 배트맨스러웠다고 생각한 지점은 이 부분이다. 이 근거로 영화의 색감이 어둡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얼마 전 <나이트메어 앨리>를 봤었는데 그 작품보다 더 어두웠던 것 같다. 배트맨의 내면이 깊고 어둡지 않나. 고담시의 묘사 역시 개판 오 분 전이다. 온갖 범죄가 판치고 마피아가 쌈 싸 먹은 게 고담시다. 이에 맞게 색감을 전체적으로 어둡게 뺐다. 난 이게 배트맨 시리즈다운 묘사라고 생각한다. 기존 시리즈들과 비교해봐도 큰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낮에 벌이는 일이 거의 없는 느낌? 사건이 대부분 밤에서만 일어난다. 일부러 사건의 시각 설정도 그런 부분을 염두해서 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낮이라는 소재가 들어가면 확실한 특징으로 꼽을 수 없어 팀 버튼과 놀란에게 비교당하기 쉬울 테니까.
또 슈퍼 히어로서의 비범함이 물리력이 센 쪽으로만 묘사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싸움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다는 뜻이다. 실상 액션신을 까 보면 많이 맞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트맨은 고담시의 악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이에 대한 연출이 사운드에서 나타나는데, 나만 그렇게 느낀 건지 모르겠는데 배트맨이 차를 쓸 때 부르릉하는 배기음이 난다. 내가 악당 입장이라면 배기음 이거 좀 무서울 것 같다. 소리가 무서운 사운드다. 또 배트맨이 악인들에게 나타날 때 빠르게 다다다 뛰지 않는다. 천천히 걷는다. 이게 무슨 의미겠어? 빠르게 고통스러운 거면 '순식간에 끝나니까' 그렇게 안 무서울 수도 있다. 그런데 배트맨이 천천히 걸어온다고 해보자. 악당들은 그가 걸어오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배트맨은 공포를 도구로서 활용한다. 이렇게 섬세한 연출 지점이 타 배트맨 시리즈와는 차이점을 갖게 한다.
4. 그래도 슈퍼히어로물에 액션이 빠지면 시체죠! 액션 연출에 대해 써보자면?
영화 자체가 강인함이나 무력을 소재로 삼지 않았다고 해서 액션이 부실한 것은 아니다. 이것도 나름 탁월하다. 배트맨은 불살 주의 히어로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묘사는 안 나온다. 그런데 이게 실제 싸움으로 적용한다면 무슨 사고가 날 것 같다. 예를 들어, 격투 신에서도 퍽 퍽 하는 소리가 타격감이 있다. 때리는 것도 한번 퍽 치고 나는 게 아니라 행동불능이 돼도 몇 대 더 때리는 묘사가 나온다. 물론 3번에서 쓴 내용도 맞다. 자주 맞기도 하고 사실적으로 때리는 사람이다. 근데 이렇게 공-방이 자주 반복된다는 것이 액션신의 합을 잘 짰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5. <조디악>과 <세븐>, 둘 다 범인을 찾아가는 영화였습니다. 또 빌런 리들러는 수수께끼를 내는 빌런이지요. 이거, 우리가 꼭 수수께끼를 맞춰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오. 영화가 수수께끼를 해결하는데 시간을 쓰지도 않고, 일단 내가 그것들을 죄다 틀리기도 했다.(ㅋㅋ) 그래서 뭐 문제 못 맞혀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6. 러닝타임 176분, 거의 세 시간입니다! 지루하진 않나요?
난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러닝타임 세시 간인 거 1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액션으로서의 슈퍼히어로를 기대하고 가시는 분들에겐 좀 루주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세븐> 같은 영화 좋아하셨던 분들에겐 취향저격일 듯.
7. 다른 배우들의 연기는 어떠한가요?
펭귄을 맡은 콜린 파렐, 셀레나 카일을 맡은 조이 크래비츠 둘의 퍼포먼스도 좋았다. 또 제일 중요한 주인공 로버트 패틴슨은 사람의 내면과 어울리는 비주얼을 갖고 있지 않나. 완전 잘 맞는 캐스팅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에 대해 힘주어 이야기하고 싶다. 리들러 역의 폴 다노다. 초반부-중반부-중후반부 직전까지 극을 이어가는 카리스마에서는 이 인물에게 나왔다. 다른 배트맨 시리즈의 조커(히스 레저)는 개연성이 없는 사이코패스였다. 근데 그게 말이 돼야 한다.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광기가 보여야 이 사람의 개연성이 드러난다. 밑도 끝도 없이 은행 털고 강도들 죄다 총으로 쏴 죽여야 조커스러운 광기가 드러난다. 단순히 행동으로만 하면 그 사람의 광기가 느껴지나? 아니다. 히스 레저는 디테일한 감정 묘사로 진정한 광기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 광기는 배트맨이 해결해야 할 사건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조커는 이 영화의 베이스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히스 레저는 이렇게 어려운 캐릭터 설정을 소화해내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난 영화를 보고 나서 리들러가 이 조커와 비슷한 존재감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의 리들러는 비대면으로 악행을 중계하는 빌런이다. 무슨 말이냐? 우리가 볼 때 리들러 슈트와 가면만 볼 수 있어서 직접적으로 감정 전달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폴 다노는 목소리 톤과 눈빛만으로도 악성을 드러내야 한다. 역시 까다로운 조건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리들러는 살짝 보이는 광기만으로도 내면의 분노를 폭발시켜 관객을 내내 압도한다. 소리 지르는 연기. 셀프 카메라로 자기 자신을 찍는 연기. 후반부의 특정 신에서의 대사 하는 방식. 이게 세상 착하게 생긴 폴 다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이 모든 게 말이 되게 하는 배우의 퍼포먼스였다. 더 이상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구체적으로 쓸 수 없지만, 나는 폴 다노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영화의 값 충분히 한다고 생각한다. 압도적인 악역이었다. 여태까지 본 적 없는.
8. 왜 추천하고 싶나요?
단순하다. 재밌으니까! 배트맨 멋있으니까! 리들러 멋있으니까! 좋은 영화 보면서 행복하고 싶으니까!
나는 이 영화가 되게 영화의 속성 한 가지를 잘 보여줬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안 본 분들 부럽다. 얼른 달려가서 보시길 바란다.
아. 꼭 영화 끝까지 집중해서 보셔라. 굉장히 중요한 장면 하나 있다. 쿠키는 안 봐도 된다. 번역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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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자단의 마지막 여정 엽문4 :더 파이널 [영화리뷰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엽문4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의 사용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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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 공식 예고편
함께라서 가능했던 생존.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놀라운 어느 실화를 바탕으로 한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의 영화, #안데스설원의생존자들. 2024년 Oscars® 국제영화상 부문 스페인 출품작으로 선정된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 일부 극장에서 12월, 그리고 넷플릭스에서 1월 4일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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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에 남아있는 감정
<애프터썬>은 어릴적 아버지와 갔던 튀르키예 여행을 했던 기억이 담긴 비디오를 재생하며 시작한다. 엄마가 캠코더를 들고 나의 어린 시절을 담았던 기억이 나에게도 있다. 그리고 내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이곳저곳을 찍으며 다녔던 영상이 남아있기도 하다. <애프터썬>을 보며 그런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좀 더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소피(딸)과 아빠는 사이가 좋다. 이건 튀르키예 여행을 내내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딘가 위태롭다. 소피는 이제 막 성인으로 가고자 하는 단계에 들어서 좀 더 성숙한 것들에 눈이 가기 시작했고, 이미 성인인 아빠는 어딘가 어두운 모습이다. 이들 부녀의 여행은 특별한 것 없이 평범한 여행이지만 그 안에서 나타나는 소피와 아빠의 감정은 너무나도 다르게 튀어나간다.
딸인 소피는 어리지만 이제는 더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취급되고 싶어 하는 아이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과는 놀고 싶지 않고 좀 더 성숙해 보이는 사람들과 놀기를 바라는 11살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알 수 없는 춤을 추고 있는 아빠의 모습은 어째서인지 쓸쓸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소피 앞에선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자신의 딸 앞에서는 자신의 어두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아빠의 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소피도 알고있다. 자신의 아빠가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이렇게 교차되는 감정 속에서 아버지와 딸은 서로를 끌어안고 춤을 춘다. 어른이 되고 싶은 딸의 마음과 이미 어른이지만 혼란 속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이 합쳐진 것이다.
어릴적 성인이 된다면 성숙해진다면 모든게 해결될 것만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 그 어렸을 때보다 더 혼란스러웠다고 한다면 그 어릴적 내가 믿지도 않을 것이다. 소피와 아빠도 마찬가지다. 아직 어린 소피와 이미 어른이 된 아빠는 절대 서로의 고민과 힘듦을 나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아끼기에 끌어안고 춤을 춘 것처럼 각자의 고민을 그러안고 받아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그런지 이 장면이 가장 인상깊었다.
이 영화에서 아쉬웠던 점은 소피와 아빠의 여행과 그에 따라 흘러가는 감정에 같이 이입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튀르키예의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나는 그저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지루함이 떠나가질 않았다. 하지만 이것 역시 나는 아쉬웠지만 다르게 보면 이 영화만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성인이 된 소피가 튼 캠코더 영상을 보는 것이다. 소피가 기억하는 과거를 되짚어보는 것이다. 이것들을 따라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소피는 이제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상황이 됐다. 소피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캠코더에 남겨진 추억을 되짚어보며 즐거웠던 과거를 기억하고 그때의 아빠를 공감할 것이다. 마지막에 나타난 소피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만큼 내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애프터썬> 시사회에서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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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록 무섭고도 기괴한 믿음
* <클럽 제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클럽 제로 (2023)
감독: 예시카 하우스너
출연: 미아 와시코브스카 외
장르: 스릴러, 미스터리
상영시간: 110분
국가: 오스트리아, 영국
영국의 한 명문 기숙학교, 일곱 명의 아이들은 학교에 새로 부임한 영양 교사 '노백(미아 와시코브스카)'가 진행하는 '의식적 식사법' 수업에 발을 들인다. 학생들은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기원도 알 수 없는 이 수업에 참여했다. 환경 보호, 체지방 관리, 자기 통제 등의 이유로, 혹은 장학금을 받기 위한 반강제적 선택으로.
첫째, 깊게 심호흡을 하고 눈앞의 음식에만 집중할 것. '노백'이 지도하는 '의식적 식사법'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배가 고프다', '먹고 싶다'라는 식의 잡념은 모두 떨쳐내고, 나 자신과 음식만을 생각하는 게 이 식사법의 핵심이다. 부드러운 말투 속 거부하기 힘든 카리스마가 내재된 '노백'의 가르침에 이끌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의 식사법을 의심 없이 따른다. 절반의 혹하는 마음,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의구심으로 채워져 있던 아이들의 태도는 점차 그를 향한 맹신으로 이어진다.
수업은 지속될수록 심화 과정에 치닫고, 이에 기이함을 느낀 소수의 이탈자가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노백'의 논리와 철학에 완전히 매료된 학생들은 선생을 향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소량의 음식을 먹도록 유도했던 그는 한 발자국씩 극단으로 향해 나아간다. 한 번에 한 가지 음식만을 먹도록 제안하더니 급기야 섭식을 하지 않아도 인간은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해괴한 주장을 펼친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의 주장에 휘둘리는 법이 없을 테지만, 이미 그에게 완벽하게 가스라이팅 된 학생들은 다 함께 음식을 끊고, 나날이 야위어가기 시작한다.
'음식을 먹지 않아도 인간은 삶을 영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고와 판단을 할 줄 아는 인간이라면, 이 주장의 오류가 엄청나다는 것을 아주 쉽게 인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아이들은 '노백'의 허황된 논리를 맹신하는 태도를 보인 걸까.
극의 배경은 아주 비싼 학비를 부담해야만 다닐 수 있는 영국의 명문 기숙 학교다. '노백'의 학생들 중 유일하게 상류층 자제가 아닌 '벤'이 전액 장학금을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것만 보더라도, 아무 학생이나 다닐 수 없는 엘리트 학교임을 알 수 있다. 즉, 아이들은 신임 영양 교사 한 명에게 인생을 좌지우지 당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고, 모두가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이다. (스포츠, 예술 쪽으로의 특기도 탁월하다.) 따라서 아이들이 잘못된 신념을 갖게 된 동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노백'이 아닌 이들의 가정 환경이나 성격적 요인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아이들 중 '노백'에게 가장 의지하며 '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내비친 '프레드'부터 살펴보자. 무용에 재능을 가진 그는 선천성 당뇨병을 앓고 있고, 일 때문에 부모와 멀리 떨어진 채로 지내고 있다. 누구보다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시기이지만, 부모는 아이를 학교에 맡긴 채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가족을 대신해 그를 포근하게 감싸준 건 '의식적 식사법'을 제안한 영양 교사다. 다정하게 고민을 들어주고, 힘이 들 때는 기꺼이 한 쪽 어깨를 내준다. 상처 입은 소년은 선생이 자신을 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감히 가질 수 없다. 그의 수업 방식을 따르다 죽을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한번 잡은 그의 손을 놓을 수 없게 된 건 단 한 번도 자신의 신의를 외면한 적이 없기 때문일 터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선수 생활을 위해 부모에게 체중 조절을 간섭받는 '라그나'는 일종의 반항심으로 '노백'의 수업에 적극적으로 임한다. 선생의 다정한 관심, 그리고 실수를 하더라도 믿고 지켜봐 주는 태도, '의식적 식사법'을 통해 얻게 된 자율성은 '라그나'가 무한 신뢰를 내비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처음부터 가장 맹신론자에 가까운 행태를 보였던 '엘사'는 완전한 자기 통제력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극한으로 내몬다. 그리고 이 수업에서 유일하게 겉돌던 '벤'은 전액 장학금을 받기 위해, 싱글맘인 어머니를 힘들게 하지 않기 위해 '노백'의 주장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음식을 거부하는 그의 교육 방식에는 탈자본주의적 성격이 깃들어 있기에 '벤'은 어머니를 착취한 대상을 자본주의로 인식하게 된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장학금을 받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테지만, 그가 '노백'의 말을 따르게 된 결정적 계기는 두 모자의 삶을 힘겹게 만든 자본주의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는 아이들에게 철저한 관심을 쏟는 '노백'의 일관된 태도, 그리고 '자유'와 '생존'이라는 단어들을 교묘하게 섞어가며 설득력을 발휘하는 화법이 도처에 깔려 있었고, 아이들은 전적으로 그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실 <클럽 제로> 속 '노백'이 주창하는 '의식적 식사법'은 극단적 사례이긴 하지만, 이를 현실 속 다른 예시로 적용해 본다면 충분한 현실감이 생긴다. 사건 혹은 지식에 대해 팩트를 검증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태도는 SNS나 인터넷에서 정보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의 태도와 꽤 많이 닮았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극중 그를 학교로 데려오는 데 일조한 어른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애초에 '노백'의 '의식적 식사법'에 혹해 그를 학교의 영양 교사로 추천한 것도 '라그나'의 아빠이고, 교장 역시 유행하는 식사법 같다며 수업을 검증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며 "말도 안 돼", "너무 극단적이다", "불쾌하다"라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유튜브의 가짜 뉴스를 보며 그릇된 정보에 혹하고, 잘못된 신념에 빠져 편향된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나. 제아무리 말도 안 되는 거짓일지라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달콤한 표현들을 장식처럼 더한다면 사실을 압도하는 무시무시한 힘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설파하는 영화인 셈이다. 죽은 낯빛에 얇은 몸뚱이로 자기만족에 취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며 올바른 진실이 빼앗긴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 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프라이빗 시사회에 참석해 작성한 리뷰입니다 *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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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과 불행으로 힘겹게 엮는 멜로
불행에 불행이 연이어 엮이면서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절한 지는 잘 알겠다. 그러나 불행 속에서 멜로를 피어나게 만드는 과정은 도통 이해하기 힘들다. '로기완'을 보고도 영 개운치 않은 게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은 삶의 마지막 희망을 안고 벨기에에 도착한 탈북자 기완(송중기)과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여자 이마리(최성은)가 서로에게 이끌리듯 빠져드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조해진 작가의 장편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에 등장하는 캐릭터 로기완만 차용해 새로운 내용으로 각색했다.
영화는 초반부에 로기완의 생존기를 구구절절하게 보여준다. 엄마 옥희(김성령)와 함께 북한에서 탈출해 중국 연길에서 생활하던 그가 어떤 사유로 벨기에까지 오게 됐는지를 설명하고 벨기에에서 하루하루 버텨내는 그의 삶을 최대한 처절하게 그려낸다. 다소 지리멸렬한 느낌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불행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인간의 삶을 전달하기엔 나쁘진 않았다.
로기완과 이마리가 엮이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조금씩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좋지 못한 첫 만남을 가진 두 사람인데 왜 서로에게 빠져들게 됐는지 설명이나 서사의 빌드업이 생략됐다. "이끌리듯 빠져들었다"는 표현으로 넘어가기엔 이들의 감정선에 큰 구멍이 뚫려있다. 차라리 극한의 상황 속에서 견뎌낼 수 있는 연대나 응원을 전하는 휴머니즘이었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두 캐릭터의 멜로만큼 부족한 게 하나 더 있었으니 마리의 감정선이다. 사격 국가대표 출신인 그가 왜 아버지와 반목하게 됐고, 자기 자신을 타락시키면서까지 아버지에게 상처 주려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다 보니 마리 캐릭터에 몰입하는 게 큰 장벽과도 같았고, 기완과의 멜로 케미도 설익은 느낌이 강했다.
'로기완'을 연출한 김희진 감독의 연출력도 다소 애매했다. 이국적인 풍광을 배경으로 한 점은 분명 이색적으로 느껴지긴 했으나, 과거 8~90년대 작품을 보는 듯한 촌스러움도 같이 묻어난다.
'로기완'의 두 주연배우 송중기와 최성은은 자신이 맡은 배역에 성실하게 임하며 연기력을 펼친다. 하지만 작품 자체가 높은 완성도는 아니다 보니 '고군분투한다', '노력한다'에 그쳤다는 게 아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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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아무도 기억 하지 못한다면, 그건 나일까 아닐까
[JIFF데일리] 위드아웃 허 (Without Her)
아리안 바지다프타리 | Arian VAZIRDAFTARI
Iran |2022 |111min |DCP |Color |Fiction |15Asian Premiere
시놉시스
로야는 이란에서 덴마크로 이민을 떠나기 불과 2주 전, 길을 잃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한 어린 여자를 만난다. 로야는 여자를 집으로 데려가 있을 곳을 마련해 주고 자신의 남편, 가족, 친구들에게 소개한다. 로야는 이 여자가 점차 자신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다.
프로그램 노트
남편 바박의 강한 주장으로 2주일 후면 로야는 이란에서 덴마크로 이민을 떠난다. 집을 정리하고, 이삿짐을 싸는 등 경황없는 날들을 보내는 로야는 어느 날 길에서 말 없는 젊은 여성을 만난다. 그녀는 길을 잃어버렸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은 데다가 로야 앞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한다. 로야는 그녀를 돕기 위해 집으로 데려가고, 정신을 차리자 경찰서로 가서 신고하지만, 어떻게 해도 그녀의 신분은 조회되지 않는다. 한편 출국 서류 준비를 하던 로야는 친구 때문에 자신의 출국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젊은 여자는 로야 행세를 하며 로야의 정체성을 훔치기 시작한다. 남편 바박까지 도우면서 로야는 더 이상 로야가 아니고, 젊은 여자가 로야로 둔갑한다. 누군가가 내가 되고, 나는 또 다른 누군가가 된다고 상상해본다면 황당한 줄거리 같지만, 아리안 바지다프타리 감독은 스릴러의 형식을 빌어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로야 역을 맡은 타나즈 타바타바이의 연기도 뛰어나다. (전진수)
아무도 기억 하지 못한다면, 그건 나일까 아닐까
남편 바박과 함께 오랫동안 계획한 덴마크 이민을 위해, 시끌 벅적하게 퇴직 인사를 하고 집 앞에 선 로야.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비가 쏟아지는 정신 없이 스산한 밤이었고, 집 앞에서 비를 맞고 서 있던 젊은 여자는 로야의 눈 앞에서 쓰러진다. 기억을 잃은 것인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여자에게 로야는 ‘지바’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가족을 찾도록 돕는다.
‘지바의 비밀은 무엇일까?’ ‘왜 그녀는 로야의 삶을 훔치려고 하는 것일까?’ 영화가 한참 지날 때 까지도 관객은 지바의 사연을 좇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진실은 무엇인지, 누가 바박의 아내였는지, 그래서 ‘로야는 정말 로야인지’ ‘지바가 로야를 구해준 것이고, 로야가 착각한 것은 아닌지.’ 관객조차 헷갈리게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다다라야지만 누군가의 사연이나, 배신이나 함정이 아닌 여자의 대체가 통용되는 ‘단지 그런 세상’이라는 세계관에서 비롯된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자의 인생을 대체하는 것이 통용되는 세상엔 두가지 법칙만 있다. 순응하던가. 사라지던가.
말하는 법조차 잊어, 말을 하지 않던 지바가 말을 하기 시작하며, 로야의 삶에 깊숙이 들어오게 되고, 로야의 실종된 친구 엄마에게 찾아가 꿈 이야기를 듣던 어느 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나일까 아닐까’ 하고 말하던 장면에서 지바는 새로운 삶에 침묵으로 거부하다가, 순응하기로 결심했음을 보여준다. 가족은 자신의 장례를 치루어 자신을 지웠고, 아무도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는 인생은 살아있지 않은 것과 같은 삶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지바는 사라지는 것 대신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대체를 하는 쪽도, 대체를 당하는 쪽도 모두 마찬가지다. 순응하지 못하면 사라진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새로운 기억이 되는 수밖에.
눈을 가린 여자에게 행하는 ‘돌봄’이라는 이름의 가해
영화는 내내 흐릿하다. 이란에 저렇게 비가 많이 오나 싶을 만큼 세차게 내리는 비는 자주 사람들의 시야를 흐린다. 빗방울이 쉴 새 없이 흐르거나, 김이 서려 흐릿하게 보이는 유리창은 선명한 사실에서 자주 멀어지게 만들고, 로야가 라식 수술이 후 눈 앞이 깜깜해지는 경험을 하는 것은 위기의 절정이 된다.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은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게 되고,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가해를 저지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지… 이런 설정은 이란의 여성이 처해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시야를 가리고, 보호라는 이름으로 억압하며,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말도 안되는 일이 당연한 듯 벌어지고 있는 무서운 세상이 2023년, 이란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에디터 luna
영화 <위드아웃 허> 상영시간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