려한2025-09-16 13:26:17
볼 수 없는 자의 진실
영화 <추락의 해부>(2023) 리뷰
“오직 경험한 일만 써야 하나요?” <추락의 해부> 오프닝에서 조에(카미유 루더퍼드)는 산드라(산드라 휠러)에게 묻는다. 산드라는 “내 모든 작품은 내 삶과도 이어진다.”라고 말하는 창작하기 위해 진짜가 필요한 작가이다. 첫 작품 소재는 모친의 죽음이었고, 두 번째는 부친과의 불화였으며, 세 번째는 아들의 사고였다. 이렇듯 글을 쓰기 위해서는 직접 봐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산드라가 직접 보지 못한 사뮈엘(사뮈엘 테이스)의 죽음을 해명해야 하는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이어서 첫 질문은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새로운 질문으로 변모한다. “경험하지 못한 일은 어떻게 쓸 수 있는가.” 쥐스틴 트리에 감독은 이 질문에 관객을 초대하며 영화의 일부가 되길 고대한다.
볼 수 없는 자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인간은 세상의 모든 일을 경험할 수는 없다. 카메라와 녹음 등 여타 기록 장치의 발전으로 인간의 감각망이 이전보다 훨씬 확장되었을지라도, 우리의 인식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적 한계는 극 중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너)의 뿌연 동공으로 묘사된다. <추락의 해부>는 이러한 인간의 존재적 한계를 부각하는 방법으로 사건의 여러 중요한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사뮈엘이 추락하기 전에 산드라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 산드라의 직접적인 알리바이가 될 수 있는 번역 일을 한 뒤 귀마개를 끼고 잠을 청하는 장면, 사뮈엘이 자살을 하기 위해 약을 먹고 구토했던 장면 등이다. 이러한 사건의 중요한 열쇠들을 탈락시켜 사건의 전말에 빈틈이 생기게 되고, 이는 제삼자가 사건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 여러 가지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진실의 필연적 주관성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본질적으로 볼 수 없는 자인 인간은 각자가 믿는 진실에 따라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의 진실은 결코 무결한 객관적 사실이 될 수는 없다. 그저 사실의 조각들에 기초한 개인적인 믿음의 총체에 불과하다. <추락의 해부>는 이러한 진실의 본질을 심도 있게 탐구한다. 영화는 인물들이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통해, 진실의 주관적 면모를 조명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사건 현장을 각자 재구성하려고 애쓰며, 서로 다른 시각에서 사건을 회상하고 자신의 진실을 말한다. 하지만 각각의 진술은 충돌하며 일관되지 못하고 모순된다. 이는 한 개인 안에서도 작용한다. 예를 들어, 다니엘이 기억하는 사고 직전의 산드라와 사뮈엘의 대화 소리를 재현하려는 씬에서 기억의 불확실성과 주관성을 엿볼 수 있다. 다니엘은 차양 기둥 테이프 덕에 열린 창문 바로 밑에서 들은 것이 확실하다고 진술했다. 다니엘의 진술 장면에서 고정된 카메라의 안정된 프레임은 이때까지의 다니엘이 스스로 신뢰하던 자신의 기억을 대변한다. 하지만, 다시 소리를 재현하는 현장에서 다니엘은 착각했다며 진술을 번복하게 된다. 카메라는 다니엘의 혼란스러운 심정을 대변하듯 이리저리 흔들리고 확신을 잃은 다니엘의 뒷모습만을 비춘다. 이윽고 다니엘의 얼굴에 비치는 미묘한 빛과 그림자는 그의 혼란스러운 내면과 갈등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재판 장면에서 영화는 증인 및 재판 방청객들의 얼굴과 반응을 교차 편집하여 보여준다. 이는 개인마다 한 사건의 진실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관객들에게 진실이란 각자의 경험과 관점에 의해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음을 전달한다. <추락의 해부>는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진실의 필연적 주관성과 불확실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관객은 진실이란 단순한 객관적 사실의 나열과 통합이 아니라, 불확실한 기억과 주관적 관점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극복은 귀를 기울이는 것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인간은 객관적 사실에 도달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하지만, 완전무결한 객관적 사실에 도달하기에는 불가능하다. 뿌연 안갯속에서 사실의 편린들만을 붙잡으려 애쓸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판단의 순간은 찾아오고, 불확실한 선택지들 앞에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더 현명한 결정을 위해서 다양한 관점을 종합하고 검증하여 각자의 믿음과 신념에 기반한 선택의 결정을 해야 한다.
볼 수 없는 자에게 사실이란 닿을 수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내 진실은 다니엘과 닮기를 바란다. 경험하지 못한 일을 파악할 수 없을 때는, 정황을 보며 ‘왜’에 의문을 품길 바란다. 그 과정이 지난한 수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란다. 결국 카메라가 부재하는 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극복은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다양한 해석을 포용하고 귀 기울이는 것, 이를 바탕으로 진실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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