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노라마 2021-11-07 22:13:39
겨울이 온다, 다들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붕어빵같은 영화쯤은 있잖아?!
나의 품에서 주섬주섬.
다코야끼 - 윤희에게.
파란색, 눈 특유의 시원한 향이 날 것 같고, 겨울 되면 아른아른하게 생각나던 첫사랑.
극장에 가서 못 본 게 한이 되어 지금까지 끙끙대고 있다. 겨우겨우 인디스페이스에서 12/18일에 상영해준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예매를 했다.(인디스페이스사랑한다 …) 윤희에게는 영화도 영화대로 정말 좋지만, 그 분위기자체를 사랑한다. 상상을 해보자, 코가 빨개질 정도로 차가운 바람을 막기 위해서 목도리를 하나 두르고, 그 향기를 맡으며 첫사랑을 보러가는 듯한 마음으로 윤희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시나리오북 마저 완벽하다! 바깥부분이 천으로 되있는 듯한 느낌으로 부들부들해서 쓰다듬고 있노라면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내가 소장하고 있던 책은, 여름방학 때 바다에 가서 휴가를 즐기며 읽던 것이라 묘하게 바다향기가 나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군고구마 - 트루먼쇼
-굿 모닝, 굿 에프터눈, 굿 이브닝, 앤 굿 나잇! 언제든 든든하고, 보면 힘이 난다! 힘이 나!
보면 힘이 난다. 어느 사람들은 보면 소름이 돋는다고도 하고, 그냥 슬프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보다보면 힘이 난다. 그가 나를 보고 전하는 인사는 힘이 된다. 굿 모닝, 굿 에프터눈, 굿 이브닝, 앤 굿 나잇.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의 하루는 굿! 하면 좋겠다고 나에게 전하는 느낌이 든다. 또한 주인공이 결국에는 밖으로 나가게 된다. 자신의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은 세상에 대해 실망을 할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탈출했던, 바로 그 순간을 기억하며 언제든 자신이 힘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게 나를 힘낼 수 있게 만든다.
붕어빵 - 시네마 천국
-알프레도가 전하는 말들 속에 달콤한 영화의 추억들, 슈붕이든 팥붕이든 달달하다.
겨울의 초반에 보면 좋을 영화. 살바로테와 알프레도가 영화를 보는 그 눈빛은, 정말로 사랑하는 것을 볼 때 그 느낌이다. 달달하다, 달달해. 이 영화는 가끔 좋아하는 것이 식어도, 돌아오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던. 마치 붕어빵 가게가 겨울 그 날씨에 가면 환하게 불을 켜둔 듯이. 딱 이런 느낌이 들었다. 내가 사랑했던 것은 다시 보면 뭔가 뭉클해지고 꿈틀대는 것들이 있다. 보다보면 눈물 젖은 달콤함이겠지만, 퍽퍽한 것도 가끔은 맛있다. 좋아하는 영화이니, 가끔 꺼내보자.
출처 . 씨네랩에디터_먼치킨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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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리듬 속에 담긴 블랙 스토리
[JIFF 데일리] 리듬 속에 담긴 블랙 스토리
영화 <웨스트 인디스> 리뷰감독] 메드 혼도
출연] Cyril AVENTURIN, Roland BERTIN, Gerard BLONCOURT, Fernand BERSET
시놉시스] 수모리타니 출신 감독 메드 혼도의 가슴을 울리는 영원한 걸작이다. <웨스트 인디스>는 카운터 시네마 양식을 채택한 뮤지컬 영화로 대서양 노예 무역의 역사와 유산을 추적하고 유럽의 식민지 제국주의에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감독은 전통적 콜 앤드 리스폰스(call and response) 음악의 리드미컬한 구조를 뮤지컬 형식으로 완벽하게 재창조했으며, 부패와 위선, 이기심으로 가득찬 교회/국가, 그리고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산발적 독립 혁명 세력 사이의 편향된 갈등을 폭로한다. 파리 외곽의 버려진 르노 공장에서 촬영된 작품으로, 인공적인 촬영 과정을 여과 없이 노출시킴으로써 프랑스 산업 부흥의 기반이 된 노예 제도에 대한 메타 비평 수단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영화 산업도 포함된다. 하버드필름아카이브(Harvard Film Archive)가 <웨스트 인디스>의 촬영감독 프랑수아 카토네와 협의하에 오리지널 35mm 프리프린트 필름을 바탕으로 복원했다.
#스포일러 주의#
청각보다 시각에 더욱 집중되었던 뮤지컬 영화뮤지컬 영화라는 사실만 알고 관람을 했기에 전형적인 뮤지컬 영화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오산이었다. 멜로디가 주를 이루는 일반적인 뮤지컬과 달리 영화 웨스트 인디스는 박자와 리듬감이 주를 이루는 작품이어서 인상적이었다. 물론 배우들이 넘버를 부르는 장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억에 남는 대부분의 장면들은 리드미컬한 젬베 사운드에 얹혀지는 캐릭터들의 나레이션이었다. 대부분의 넘버들 역시 다채로운 음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음을 사용하다보니 기존 뮤지컬 영화를 볼 때와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멜로디가 중심이 되는 뮤지컬 영화의 경우에는 솔직히 넘버의 가사보다는 멜로디의 유려함과 화려함에 압도되어서 영화의 분위기를 따라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영화 웨스트 인디스는 귀를 사로 잡을 만한 멜로디가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덕분에 이들이 지금 어떠한 상황인지 그 객관적인 정보에 관객들은 집중을 할 수 있었고, 흑인 노예들이 끌려갈 때부터 이주한 아메리카에서의 현대 모습까지 그들의 역사를 정보 위주로 따라가며 공감할 수 있다는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과연 박자와 리듬감이 주를 이루는 작품을 뮤지컬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지점에서 메드 혼도 감독은 화려한 군무를 영화 곳곳에 삽입하면서 이 작품이 일반적인 영화가 아닌 뮤지컬 영화임을 드러낸다. 반복되는 박자와 리듬감 속에서 처절한 군무를 선보이는 흑인 노예들, 앞으로의 또 다른 희망을 생각하며 화려한 파티를 여는 흑인들까지 역사적인 순간 마다 분위기에 맞는 군무를 선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화려하게 췄던 그들의 안무 동작은 생각나지만 그 배경에 깔렸던 음악은 기억에 없어서 뮤지컬 영화지만 굉장히 시각적인 정보에 강했던 작품이었다.
이 한 순간만 무마하면 된다는 얄팍함
영화 웨스트 인디스는 유럽 제국주의로 인해 아프리카 대륙이 발견되고, 백인과 흑인이 조우하면서부터 발생한 다양한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풀어내고 있다. 당시 흑인들보다 압도적인 군사 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백인들은 자신들의 군사적 우위를 앞세워 아프리카를 점령했고, 그 과정에서 흑인 노예 제도가 만들어졌다. 나름의 체제를 유지하며 살았던 그들은 한 순간에 노예가 되어 유럽, 아메리카로 흩어졌고, 보다 원할한 플렌테이션을 위해 더위에 강한 흑인 노예를 달에 2,000명 씩이나 아메리카에 공급했다. 그저 그 한 순간의 돈을 더 벌기 위해 차후에 벌어질 일들은 생각하지 않고. 흑인들을 여기저기 실어 나른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공급은 과잉을 불러왔고, 전 세계에 전반적으로 안정이 찾아오면서 유럽 전역에서는 공금 과잉된 흑인들을 다시 내쫓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흑인들 때문에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서 백인 사회복지사는 이런 말을 한다. “이제 그냥 돌려보내면 안되나요? 이주를 시키는 것만이 답니다.” 이제까지 그들의 노동력을 열심히 이용만 하다가 더이상 필요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떠나온지 수백년도 더 된 사람들을, 사실 고향이 더이상 아프리카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아프리카로 보내버리려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제국주의 사상이 남아있던 근대에서도 지배층은 사회적인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기 보다는 그저 이 순간만을 무마하면 된다는 가장 단순하고도 얄팍한 수를 쓴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필요하다는 이유로 잡혀오고 ,이젠 더이상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내쳐지는 흑인들의 이주 역사를 보면서 유럽 제국주의의 폭력적인 모습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 웨스트 인디스는 독특한 구조의 뮤지컬 영화 속에서 흑인들의 이주 역사에 내재된 유럽 제국주의의 폭력을 잘 그려내고 있었던 작품이었다.
[상영시간표]
2023. 04. 30 14:00 CGV전주고사 3관 (324)
2023. 05. 02 14:30 CGV전주고사 3관 (514)
2023. 05. 05 17:00 CGV전주고사 2관 (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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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맨 앞에 있었으나 조명되지 않았던 예술가들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비프 올데이시네마 상영작
*시놉시스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 폴 매카트니, 피터 가브리엘 등 세계 최고 뮤지션들의 앨범 커버를 만든 디자인 스튜디오 ‘힙노시스’. 영감에 한계가 없던 두 천재 디자이너의 무모한 작업 스토리, 그리고 시대의 아이콘이 된 명반들의 탄생 뒷이야기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은 음악이 상품이 아닌 예술이던 시대, MTV가 도래하기 이전 음악이 메시지를 던질 수 있던 시대, 록 음악이 가장 대중적이던 시대를 살아간 예술가 이야기다. 그러나 뮤지션의 이야기는 아니다. 핑크 플로이드와 레드 제플린, 폴 매카트니가 협업하고 싶어 한 LP 커버 예술가 ‘힙노시스’의 이야기다.
스톰과 포 두 사람이 힙하고, 쿨하고, 지혜롭고, 현명하다는 단어의 글자 일부를 따서 설립한 힙노시스는 LP 커버 이미지를 전문으로 제작한 회사다. 더불어 당시 사람들이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던 LP 커버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회사다. 골방에 모여 수다를 떨고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던 이들이 예술가가 되던 시대, 스톰과 포 역시 이들과 같은 궤적을 따라 LP 커버의 세계로 진입했다. 영화는 힙노시스가 걸어온 파격적 예술의 궤적을 당사자, 그들과 협업한 뮤지션의 회고를 통해 복기한다. 앨범과 커버의 ‘의미’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지금, 음악과 커버로 메시지를 던지며 매 순간 혁신을 고민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매력적인 흡인력을 뿜는다. 커버 방향성을 놓고 비틀즈와 자존심을 건 신경전을 벌이는 대목은 스톰과 포가 어떤 태도로 커버 작업에 임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1968년부터 록의 시대가 저문 8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한 힙노시스는 록의 쇠락과 함께 커리어의 절정에서 수직 낙하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전과 같은 명성을 누리지 못했고 록 음악 팬들의 기억 속에서만 예술적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더는 힙하고, 쿨하고, 지혜롭고, 현명할 수 없었던 이들은 되돌릴 수 없는 실패로 예술의 역사에서 퇴장했다. 고급 예술품을 소장할 수 없는 ‘가난한 이의 미술 소장품’이자 앨범 정체성의 표현으로서의 LP/커버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누군가에게는 향수를, 누군가에게는 ‘이야기’가 된 지난 시절의 매력에 몰입시켜줄 영화다. 표지가 갖는 중요성이 점차 중요해지는 도서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음악과 LP 커버를 동등한 예술로서 존중하는 영화의 태도가 인상깊기도 했다.
한편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 비프의 올데이시네마에서 이 영화가 상영된 후, 호밀밭 출판사 장현정 대표의 사회로 장정일 작가와의 대담이 진행되었다. 대담에서 장정일 작가는 자신이 록과 팝을 거쳐 재즈에 입문하게 된 과정을 영화와 연계해 들려주었다. 그는 80년대가 민중 문화의 시대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가공된 현실일 뿐이라 일갈했다. 대학 운동권은 ‘탈춤’과 ‘김민기’를 시대의 문화로 제시했지만, 정작 ‘민중’들은 고고장에서 춤을 추었고 나훈아와 이미자를 들었다. 록과 팝은 대학에서 드러낼 수 없는 ‘죄스러운’ 취향이었다. ‘의식’이 부재하다는 가혹한 비판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때문에 장정일 작가는 자신이 대학을 경유해 팝과 록을 듣지 않은 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고 회고한다. 대학에 진학했다면 ‘민족 문화’의 세례에 굴절된 상태로 팝과 록을 뒤에서만 몰래 즐길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후 영국의 풍요와 반항을 대변하는 음악이 한국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감상되었나에 관한 장정일의 설명은 그 문화를 향유했거나 사후적으로 회고하는 모두에게 문화의 수용에 둘러싼 물음을 촉발한다. 장정일의 해설은 낭만적 흡인력의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에 ‘제3세계’를 둘러싼 권력관계를 더해 낭만 이면의 다층적 맥락에 주목하게 한다.
*영화 매체 〈씨네랩〉 초청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참석 후 작성한 글입니다.
*커뮤니티 비프 관련 정보는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biff.kr/kor/addon/10000001/page.asp?page_num=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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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포장지, 그렇지 못한 내용물
4★/10★
각본가의 자질과 연출가의 자질은 얼마나 같고 다를까? 영화 〈살수〉를 보고 든 생각이다.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곽정덕 감독은 〈백두산〉의 각본을 쓰고, 〈끝까지 간다〉를 각색한 인물이다. 이 두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갈릴 수 있다. 하지만 두 영화를 높게 평가하지 않더라도, 각각 상업성과 작품성 등의 측면에서 평가받은 지점이 있는 영화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살수〉는 조금 이상하다. 〈백두산〉은 상업영화의 스펙터클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획이었고, 〈끝까지 간다〉는 탄탄한 구성으로 장르적 완성도를 높인 영화였다. 그런데 〈살수〉에는 둘 중 그 무엇도 없다.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로 화려한 액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액션의 헐거움을 메울 탄탄한 스토리를 갖추지도 못했다. 몇몇 배우들이 연기력으로 고군분투하며 영화를 지탱할 뿐이다.
조선 최고의 살수 이난은 몸이 망가져 더는 격한 무공을 사용하지 말라는 조언을 듣는다. 그러던 중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초를 찾아 한 마을에 들렀다가, 자그만 주막을 운영하는 모자母子를 만나, 그들을 도우며 잠시 그 집에 머문다. 이 마을은 산적이 기승을 부리고, 고을의 행정 업무를 맡아 산적을 토벌해야 할 이방은 정작 산적과 내통하는 문제가 많은 마을이었다. 어쩌다 이들의 관계에 끼게 된 이난은 산적과 이방의 위협에 맞서 위기를 극복하고 받은 만큼 돌려주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이어간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살수〉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적어도 한 측면에서는 관객을 사로잡을 수도 있었을 영화다. 화려한 사극 액션, 코믹 요소, 전개의 탄탄함……. 고루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중 하나만 확실히 잘했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 것 같다. 지금처럼 여기저기에 발을 애매하게 걸치다 스스로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란 소리다. 이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인 연기로 영화를 끌고 가는 몇몇 배우에게는 기꺼이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포장에 비해 즐길 만한 요소가 너무도 부족한 영화라는 점은 못내 아쉽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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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패는 어떻게 완성되는가?
(2024년에 쓴 글을 포스팅한 것이다.)
12.12 사태에 대해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을 봤다. 한국 역사를 다룬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아파서 보기를 망설이곤 했지만, 그럼에도 극장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어떤 분노는 기억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재미있다.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하고, 연출은 더 말할 것도 없다. 2시간 반이나 되는 짧지 않은 러닝 타임 동안 긴장감을 늦추지 않으면서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탁월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를 감상할 때면 언제나 '역사를 왜곡하거나 악인을 지나치게 미화하지는 않을까?'하는 우려를 하곤 하는데, 적어도 이 영화에 한해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불필요한 자극 없이 그 당시의 무력함과 분노를 충분히 끌어내는 힘도 있다. <서울의 봄>의 탁월한 점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나는 영화 속에서 '전두환'(극 중 이름은 '전두광')이 묘사된 방식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1. 부패는 어디서 싹트는가?
전두환과 같은 독재자에 대해 다룰 때, 우리는 부패에 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부패란, '정치, 사상, 의식 따위가 타락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타락이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빠지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을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할까? 흔히 사람들은 타락이 아주 거창한 계기에 의한 것이라고 상상하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타락은 대개 아주 사소한 이기심에서 자란다. 내 것, 내 밥그릇, 내 사람을 챙기고자 남의 희생에 눈감는, 그런 종류의 욕심 말이다.
'전두광'과 '노태건', 그리고 그들이 세운 '하나회'도 다르지 않다. 거창한 명분이 있을 것만 같지만, 그들이 그토록 활개를 쳤던 이유는 손 쉽게 힘과 지위, 명예를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소위 그 당시의 '엘리트'를 자처하면서, 비슷한 욕심을 가진 사람들끼리 손을 잡고 삼삼오오 모여다니면서. 질나쁜 깡패들이 그러했듯이. 그건 '정석적이고 도덕적인' 길보다 훨씬 쉽고 간편했을 것이고, 이것이 그들이 기꺼이 타락했던 이유이리라. 그들이라고 어디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몰랐으랴마는, 어쨌든 그들은 그 모든 불의에 눈을 감다 못해 그것을 직접 이끌어 나가길 택했다.
하나회라는 카르텔에 대한 충성심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 집단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떡고물'이 먹음직스러웠을테니까. 다가올 이익에 대한 어떤 기대 혹은 약속은 마치 마법처럼 소속된 사람을 홀리곤 한다. 나치당과 히틀러에 현혹된 옛 독일의 국민들처럼, '우리'를 챙기고 '남'을 배척하는 사이 사람은 도덕과 정의에 무감해지고, 잔혹해진다. 나와 내 가족, 내 친구를 챙기는 그들의 지극히 이기적인 이타심 속에 부패의 씨앗이 자라난 것이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된다는 말이 있듯, 부패의 씨앗은 쉬이 자란다. 부패는 그것에 눈감거나 당연시 여기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힘을 얻고, 빠르게 몸을 부풀린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다다라서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경지에 이르고 만다. 이 사소한 부패가 모이고 자란 결과가 바로 전두광과 하나회다.
부패와 불의에 대해 논한다면 정의에 대해서도 논해야 마땅할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를 말한다. 다시 말해, 정의는 개인 간의 관계와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른 길'을 말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이유들에 의해 사람들은 너무나 손쉽게 이 '바른 길'을 벗어나고 만다. 정의를 지키는 것이 어려운 건 이 때문이다.
극중 이태신은 이러한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을 지키고자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다. 부패는 너무나 하찮은 이유에 기인하고, 그래서 쉽게 눈감게 되니까.
2. 참, 멋없는 부패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탁월한 점은 '부패'의 멋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점이다. 그렇다. 우리는 많은 영화 속 '매력적인 악역'에 열광하곤 하지만, 실상 악당은 '멋있지 않다'. 그들은 치졸하고, 추악하고, 저열하다. 전두광은 그 모든 멋없음을 아주 탁월하게 표현한 캐릭터다.
극 중 전두광의 '쿠데타 계획'을 한번 살펴보자.
전두광은 자신의 부패에 가담하지 않은 육군참모총장을 제거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명분 없는 혁명은 결코 인정받을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그를 모함하기로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살해 공모자로 만듦으로써. 그러나 참모 총장은 그보다 지위가 높았고, 그를 체포하려면 더한 공권력이 행사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의 승인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또 대통령의 승인을 받으려면 일정한 절차를 통해 올려야 하므로 참모 총장이 그 사실을 모를 수 없게 되고, 그가 이 모든 일에 대비하게 되면 상황이 곤란해진다. 그래서 전두광이 선택한 것은, 그 모든 절차와 상식을 무시하고 참모 총장과 대통령 승인을 동시에 받는 것이었다. 자신과 하나회의 인맥과 군대를 활용해서! 그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우악스럽고, 폭력적인 발상이었다.
계획만으로도 기가 막히는데, 계획을 이행하는 과정도 엉망진창이다. 한밤중에 대통령을 세 번이나 찾아가 떼를 쓰지 않나, 강경하게 나오는 이태신의 작전에 일희일비하질 않나. 치밀하지 못하게 세워진 계획 위에 하나회는 우왕좌왕하고, 학연, 지연, 혈연 따위로 끌어모은 권력과 병력으로 뚫린 구멍을 땜질하기에 바쁘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게 '먹혔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망설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이 전두광의 길이 더 낫다고 생각하거나,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그 부패와 악의를 묵인한 대가는 처참했지만, 그때 그들은 그걸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알았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거나. 또 한편으로는 전두광의 악의가 너무나 비상식적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시민과 아군을 기꺼이 인질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상식적인 사람이 '사람'보다 '정의'를 우선시하지는 못하리란 것을 알았고,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모든 사건이 일단락되고,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었을 때, 전두광은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며 승리에 고취된다. 그것은 그가 벌인 그 모든 일이 그 개인의 '배설된 욕망'에 기인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추저분스러운 환희였다.
3. 오랫동안 곱씹을 수 있는 웰메이드 영화
영화는 노골적인 폭력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폭력의 위압과 위협을 보여준다. 우리는 인물의 대사와 상황, 미장센을 통해 '평화와 친선'을 가장한 씬들의 이면에 강압적이고 우악스러운 폭력이 자리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면서 그 폭력을 미화하지 않고, 하찮고 추악한 것임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심각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영화 곳곳에서 활약하는 재치있는 유머들도 눈에 띈다. 악당들의 하찮고 치졸한 면면들을 풍자하는 그 장면들은 단순히 웃기려고 넣은 것이 아니라, 상당히 고심해서 넣은 영화적 장치로 보인다.
몇몇 반복되는 대사들을 포착하는 것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 재미있는 방법일 것이다. 가령 아래 두 대사는 전두광과 이태신, 둘 모두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대사는 같지만 그것이 내뱉어지는 상황과 경위, 인물들의 생각이 달라 극적인 대비를 준다.
'니편 내편이 어디있습니까. 대한민국 육군은 모두 한 편입니다'
'가려거든 여기서 나를 쏘고 가라' / '쏠 거면 쏴라. 갈 길이 바쁘다.'
위 대사는 전두광과 이태신 모두의 입에서 나왔지만 그것이 함의하는 바는 다르다. 전두광이 말하는 '우리(육군 등)'는 언제나 '나(전두광)'을 향해 있지만, 이태신의 '우리'는 그가 소속된 집단, 나라를 지키고 시민들을 보호하는 군 전체를 향한다. 같은 말을 해도 전두광은 과장되고 꾸며낸 거짓을 말하지만 이태신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이 두 인물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여러 의미에서 아주 잘 만든 영화다. 여러 번 곱씹으며 생각하게 된다. 내가 속한 곳에는 어떤 불의와 부정이 있을까? 나는 그것을 알고 있을까? 혹시라도 내가 그것에 동조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같은 것들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둘러보고, 더 바른 길을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날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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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키 17>: 돌아온 이야기꾼 봉테일.
지구 밖 낙원은 가능한가.
미키는 지구에서 티모와 영끌한 마카롱 사업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사채업자를 피해 지구를 뜬다. 파일럿 기술로 한자리 꿰차는 티모와 달리 미키는 아무런 기술이 없어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익스펜더블 프로그램을 신청한다. 이름부터 노골적이다. 익스펜더블, 소모품으로 우주 식민지 개척을 위한 실험체가 된다. 미키는 임상 실험체로서 쓰이고 지워지길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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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프린팅의 반복이다. 극 초반에는 미키의 내레이션 목소리 때문인지 봉준호의 연출 터치 때문인지 미키의 상황이 덜 비극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미키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굉장히 비인간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음이 확실하다. 빚쟁이를 피해 고향 지구를 떠났지만 우주에서는 임상 실험체로서 죽고 다시 태어나길 반복 인생이니까.
미키에게 우주는 새로운 공간이지만 이곳에서의 처지는 더 나빠졌지 좋아지진 않았다. 노동의 신성함은 허울 좋은 미끼에 불과하다. 미키에게 남겨진 것은 죽음뿐인 노동이다. 이는 현실과 연관 지어 생각할 포인트가 된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류의 노동을 줄여 준다고 하지만, 인간의 노동보다 더 비싼 비용이 필요한 순간에서 인간의 노동이 줄어들 수 있을까?
오히려 값싼 인건비를 이용해 로봇 대신 위험한 일에 계속 투입시키지 않을까. 외국인 노동자의 사례만 봐도 쉽게 이해 가능하다. 우주 방사선과 바이러스 확인을 위해 소모되는 미키를 보고 있자니, 로봇 유지 보수 비용보다 값싼 노동이 미래에도 끊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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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신성한 것이라는 말에 엿이나 먹으라고. 미키를 보라고, 값싼 노동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투입되는지 당신들은 모르지 않냐는 봉준호 감독의 생각이 살짝 묻어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프린팅되는 미키를 대하는 모습과 멀티플이라는 개념을 보고 있으면, 인간의 윤리와 법이 제대로 작동할지 의문이 생긴다.
죽고 나서 프린팅되는 미키 17을 보고, 그의 삶에 관심을 가지기보단 미키가 어떤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존재인지, 그는 죽음을 어떻게 느끼는지에만 관심을 가지니까. 대부분은 그의 죽음과 삶을 단순한 하나의 절차와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인식한다.(죽음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것이 본능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하나의 육체에 하나의 영혼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멀티플 현상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든다. 만약, 멀티플이 발생하게 되면 그 즉시 죽여서 삭제한다는 단서 조항도 만든다. 미키에게 행해지는 것과 모순적이다. 미키는 반복적으로 죽임을 당하고 재생당한다. 그러면서 동일한 기억이 심어진다. 자연의 섭리를 따지지만 인간을 프린팅 해서 자기들 입맛에 맛게 사용하고 죽이고 다시 살려내는 비인간적인 행위는 서슴지 않고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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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심어지는 것도 생각해 볼 포인트다. 누군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부 기억을 삭제한 뒤 심을 수 있는 기술적 환경이다. 기술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미키와 같은 처지의 사람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다. 코에 걸면 코 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격이다. 내로남불. 이런 상황이면, 법의 사각지대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지구에서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돌아가지만 제한된 자원과 극한의 환경인 우주에서는 어떤 사회 시스템이 작동할까?라는 의문도 생긴다. 우주형 자본주의가 새롭게 생겨나거나, 제한된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 전체주의가 들어설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신기술을 가진 새로운 기득권이 전체주의 독재를 펼치게 된다면 마샬이 집권하는 사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마당에 우주로 공간이 바뀐다 해서 인류가 파라다이스를 건설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오히려 인간의 비인간적인 잔혹성이 커질 수 있지 않을까. 미키의 서사와 세계관을 살펴보면 심각하게 생각해 볼만한 내용이 많다. 이런 포인트를 넣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만 함몰되지 않고 극의 재미를 이끌어 가는 봉준호의 터치는 매우 좋았다. 물론, 로버트 패틴슨과 다른 배우들의 연기가 없었다면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성장과 사랑
나샤와 미키 18의 등장으로 미키 17은 변화를 맞이한다. 죽음과 프린팅밖에 없는 일상에 사랑과 질투의 감정이 새로 스며든다. 미키 17은 18과 나샤를 두고 경쟁(?)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미키 18은 17보다 더 적극적이고 때론 공격적이다. 미키 18은 미키 17의 다른 자아이자 봉준호 감독 자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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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17은 지구에서부터 니플하임까지 오게 된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엄마와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눌렀던 빨간 버튼으로 인생을 망친 벌을 받고 있다고 말이다. 여기에 대고 봉준호 감독이 미키 18을 빌려, “네 잘못이 아냐”라고 말하며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서의 미키 17은 일반의 삶을 살아가는 모두를 의미한다 해도 무방하다.
미키 18은 미키 17과 달리 인생이 꼬여버려 불행한 이유를 외부에서 찾는다. 지구에서 불의의 사고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자동차의 기계 결함이고, 니플하임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스스로의 벌이 아니라 마샬 때문이라고 말이다. 봉준호 감독은 전작에서, 구조적 문제에 봉착해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인물들을 그렸었다.
여기서는 문제의 원인을 바로잡고자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인물을 미키 18을 통해 보여준다. 설국열차에서 기차의 벽을 터뜨리는 남궁민수와 비슷하다. 종국에는 미키 17이 자신의 손으로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부숴버리며 당당히 극복하는 모습도 그려낸다. 미키 17에게 미키 18은 미키 스스로의 내적, 외적 성장을 촉진하는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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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극복의 과정에는 미키에 대한 나샤의 무조건적인 사랑도 한몫했음을 그려낸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바로, 나샤가 미키 17과 18에게 선택권을 부여하는 장면과 나샤와 카일이 미키 17과 18을 두고 경쟁하는 장면이다. 이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권력이 바뀌는 분기점이 된다. 결말로 향할수록 모계 사회에 대한 그림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짐작 가는 여러 장면이 더 있다. 멀티플 법안을 만드는 위원회에서 지구 측 발언자가 여성인 점. 독재 권력자인 마샬이 아내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나샤의 신분이 변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활용.
일부에서는 PC 주의를 버리지 못했다는 의견을 비추기도 한다.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구체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과거보다 현재 여성의 사회 진출은 늘었고 그에 따라 여성의 사회적 권력도 커졌다. 숫자는 적지만 여성 지도자를 배출한 국가도 있다. 앞으로도 인종과 성별에 따른 사회의 모습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실이 이러한데 영화의 배경은 우주다. 행성을 개척하려는 인류는 함선을 타고 이동하고 있다. 더불어 인간을 프린팅하고 기억을 심는 기술을 보유한 인류다.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극 중에서 인종과 출신 그리고 사회적 구조를 창의적으로 구성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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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오브 맨>의 주인공처럼, 베이비 크리퍼를 안고 살리기 위해 달려가는 나샤를 보면 나샤의 결말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니플하임에서 다음 세대를 책임지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어색하진 않다. 소설 원작의 작품이고 극중 인물과 사회적 배경에 대한 각색은 감독 고유의 권한이다. 무작정 PC가 점철된 영화라고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런 상황도 충분히 있을 수 있겠다는 자연스러운 전개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미키 17은 PC 요소를 적절히 활용한 영화라고 보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PC를 적절히 활용한 것과 그저 이용만 한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라서 구별하기 어렵다. 백설 공주와 인어공주 그리고 마블의 사례를 따져보자. 백설 공주와 인어공주 원작 주인공은 백인이다. 아주 오랜 시간 백인 주인공으로 모두의 뇌리에 박혀있는 점도 무시하기 어렵다. 이런 부분을 간과하고, 굳이 라틴계와 흑인 배우를 섭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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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원작과 팬들에 대한 각색을 터무니없는 방향으로 했다고 봐야 한다. 조선시대 장군이 백인으로 등장하거나 타 인종으로 등장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봐야 한다. 원작의 특징을 무시하고 PC를 잘못 활용하면 이렇게 된다. 마블에는 대표적으로 아이언하트가 있다. 아이언맨과 아이언하트 사이에는 어떠한 개연성이나 연관성이 없다. 아이언맨은 전형적이지만 완벽한 영웅 서사를 가졌다. 반면, 아이언 하트의 서사는 그 자체로 빈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 바운더리에 포함되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아이언맨 3에 등장했던, 차세대 아이언맨이 되지 않을까 모두의 기대를 받았던 캐릭터는 사라지고 뜬금없이 어린 흑인 배우가 아이언맨인 양 등장해서 PC 비판만 받았다. 차라리 캡틴 아메리카와 팔콘의 서사처럼 흘러갔다면 PC 비판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언 하트의 경우는, 서사를 무시하고 PC 요소를 잘못 활용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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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PC를 활용하는 방법이 구린 것이 문제다. 백설 공주와 인어공주 그리고 마블의 일부 영화는 이 부분에서 처참히 실패했다. PC 요소에 대한 비판보다는 이를 활용하는 방법의 적절성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정확한 지적이라 생각한다. 결론적으로는, 위의 영화들과 달리 미키 17은 PC 요소를 적절히 활용한 완성도 좋은 상업 영화다. PC를 덕지덕지 묻힌 영화라는 비난과 비판을 받기엔 서사의 완성도가 높고 비난 의견에 대한 근거는 빈약하다.
통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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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에서 등장했던 통역기가 여기서도 나왔다. 통역기 사용 전에는 미키와 나샤는 크리퍼가 미키를 살려준 것이라는 합리적 추측으로 결론짓는다. 마샬은 벌레의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다며 식민지 개척을 목표로 크리퍼 몰살을 계획한다. 모두 각자의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해 행동한다. 이 상황에서 통역기가 개발된다. 통역기를 통해 처음으로 크리퍼와 소통을 시도하는 인물이 미키다. 그는 왜 자신을 살려줬는지 크리퍼에게 물어본다. 프린팅 인간이라 맛이 없어서 그러냐고 말한다. 이때, 별것 아닌 크리퍼의 대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럼, 죽여?”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진 존재인지 돌아보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자신과는 다른 존재기 때문에 자신을 해하려고 하는 위협적인 존재라고 빠른 판단을 하는 것도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을. 영화를 보는 관객들조차 크리퍼가 위협적인 행동을 하진 않을까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고 이는 극 중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라고 깨닫게 해주는 대사였다. 백인의 미대륙 원주민 침략 역사를 반추하게 한다. 넓게는 인류의 침략 역사도 떠올려진다.
여자어와 남자어가 있듯이 사람과 사람끼리의 오해도 쉬운 세상이다. 오해가 켜켜이 쌓여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던가. 만약, 역사의 여러 부분에서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통역기가 있었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지금과 다른 방향으로 펼쳐지지 않았을까. 이는, 나샤가 언급하는 원주민의 역사와도 관련된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마샬처럼 원주민을 약탈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변했을까. 무기를 개발하는 것보다 좋은 통역기를 개발하는 게 시급하겠다 싶더라. 이런 게 봉준호식 스토리텔링이구나 감탄했다.
그 외 이야기들미키의 과거 서사가 부족했다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자동차 버튼을 눌러서 미키의 가족과 인생이 어떻게 변했고 이후로 이 사건이 미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키가 지구에서 사업도 말아먹고, 자신의 인생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과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크게 필요하진 않겠다 싶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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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에서도 기택 가족의 구체적인 서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인물들이 어떤 특징과 사연을 가졌었는지 대사로 짧게 설명하고 만다. 이번 영화에서도 미키17이 내레이션으로 자신의 서사를 간략하지만 충분히 설명한다. 이러한 이유로 미키의 서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미키 17과 18처럼, 생김새는 같지만 각자 이름을 가진 루코와 조코를 통해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름이 있고 가족이 있듯이 말이다. 인간이 얼마나 자신들의 세상만 생각하는지, 역지사지의 태도는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듯, 이들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마지막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배척하지 말라고.
복제인간을 다룬 영화는 많다. 대부분의 경우 주인공과 주인공 복제 인간이 대립하면서 한쪽이 죽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미키 17과 18은 살짝의 갈등이 있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지배받는 시스템을 향해 그들이 처한 문제의 원인을 돌린다. 전형적인 복제인간 서사를 살짝 틀었다고 생각은 들지만 2009년에 개봉한 영화 <MOON>의 서사와 굉장히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샤와 카일 그리고 티모와 일파까지 추가해 서사를 더 풍성하게 만든 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마크 러팔로의 케네스 마샬은 트럼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특정 정치인을 이야기했다고 말하긴 했다. 그리고 마크 러팔로가 트럼프가 양 팔을 허리 위로 들어 트위스트 비슷하게 두둠칫하는 춤사위를 따라 하는 장면도 나온다. 어느 장면에서는 마샬이 말할 때 실룩이는 입술 모양으로 트럼프를 묘사한 것 같았다.
또한, 트럼프가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질문을 받는 모습과도 유사한 장면이 있다. 더불어 One and Only가 적힌 빨간 모자와 카페 간판만 봐도 트럼프를 묘사했다는 게 명확하다. 트럼프가 총격을 당했었는데, 마샬 얼굴에 총알 스치는 장면이 나온다. 흥미로운 사실은 미키 17의 촬영은 2022년 12월에 끝났다고 한다. 트럼프가 등장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또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대통령직을 수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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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의 이름 자체가 권위주의적이다. 마샬이라는 영문 성은 군사적 지도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극 후반에는 사실상 군사적 지도자에 가까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마크 러팔로가 악역 연기에 처음 도전했다는 말이 있던데, 작년에 개봉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가여운 것들>에서 악역에 가까운 던컨 웨더번을 연기한 모습도 떠올랐다. 물론, 사악한 정도의 캐릭터는 아니긴 했지만.
일파는 왜 소스에 집착했을까? 아직까지 정확히 모르겠다. 굳이 엮어 보자면. 미키와 같은 노동 계급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손에 흙먼지 하나 묻히지 않고 쏘옥 빨아먹는 권력자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였다. 노동자들을 갈아 넣은 그들에겐 의미 있는 어떤 결과물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소스는 다채로운 맛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근데, 마샬 부부를 제외하면 함선의 사람들은 맛없는 밥만 조금씩 배식 받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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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은 넉넉한 음식들에 소스를 껴얹어 먹고. 이런 비교를 위해 설정한 부분 아닌가 싶기도 하다.(우주에서 향신료나 소스가 얼마나 귀하겠나.) 크리퍼의 꼬리를 자르고 갈아 마시는 행위와 미키 악몽에 등장하는 마샬 복제 장면을 연결 지어보면 복제 인간이 가능한 시기에는 장기 매매 같은 것도 성행하게 되리라는 상징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앞서 미키17 세계관을 먼저 설명해야 했지만 글의 마지막에서야 언급한다. 미키가 간 곳의 행성 이름은 니플하임이다. 이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세계 중 하나의 이름이라고 한다. 얼음과 안개의 세계. 실제 극에서 크레바스가 등장하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행성으로 그려진다. 니플하임은 죽음의 신인 헬이 통치하는 세계로 알려져 있다 한다. 죽은 자들이 가는 장소로도 여겨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지구에서 활용될 만큼 활용된 빈 껍데기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소모시키기 위한 장소라고 볼 수 있어 보인다.
봉테일의 귀환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미키가 화력발전소와 구의역에서 숨진 청년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미키가 우주에 나가서 시설을 정비하는 모습이나 사이클러 불구덩이로 미키의 시체가 던져지는 장면을 보면 봉준호 감독의 말이 쉽게 설득된다. 결과적으로, 미키에게는 죽음의 장소였지만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곳이다. 나샤라는 사랑도 만났잖나. 어둡게 생각하면 한계 없이 침울해질 영화지만, 동시에 아기자기한 희망이 담겨 있는 영화기도 하다.
<기생충>과 비교하면 복부를 푹 찌르는 날카로운 느낌은 줄었지만, 그럼에도 봉준호의 영화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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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질 결심>, 또 다른 복수극
또 다른 복수극
처음에는 <헤어질 결심>을 멜로 드라마로만 받아들였다. 죽음을 통해 영원을 얻는 미결의 사랑. 그 아이러니가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곱씹어 생각할수록 이것은 박찬욱 감독의 또 다른 복수극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총 세 명―본인의 엄마, 남편, 철썩의 엄마―을 살해한 서래는 그녀의 독백처럼 “독한” 년이면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수수께끼 같은 표면 아래 슬픔이 계속 침전되어 쌓여가는 중이다. 이때 복기해야 할 것은 해준이 질곡동 사건의 범인 홍산오를 잡기 위해 그의 측근 이지구를 신문할 때, 그러니까 “잡혀서 감옥 가느니 경찰 몇 죽이고 자살할걸요?”라고 이지구가 토로할 때 난데없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서래의 모습이 삽입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결은 그녀와 홍산오를 연결시키면서 그녀의 내면에 자살 충동이 내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자기 파괴적 욕망과 함께 총 세 명을 죽인 살인자라는 사실은 그녀가 난폭한 동시에 용감한 인물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그녀가 호미산에서 해준에게 한 다음의 대사는 어떤 공포영화 대사보다 썸뜩하다.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돌이켜 보면, 마지막 시퀀스에서 서래와 연락이 끊긴 해준이 다짜고짜 그녀가 위험한 행동을 할 것이라 예단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해준은 그때부터 서래의 자살을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답은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인 서사라고 할 수 있는 질곡동 사건에 있다. 형사와 피의자 간의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서사와 질곡동 사건은 은밀히 내통한다기보다 차라리 평행하다. 왜 영화는 이 질곡동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일까. 해준은 이 사건에서 홍산오의 자살을 목격한다. 홍산오는 가인을 “죽을 만큼 좋아”해서 그녀에 대한 사랑을 현세에 남겨두고 떠난다. 그때 프레임 바깥에서 거의 절규하듯 소리치는 가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홍산오, 하지 마!" 해준은 이를 통해 두 가지를 배운다. 상대를 너무 사랑하면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남겨진 자는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아주 처절하게 괴로워한다는 것. 해준은 질곡동 사건에서의 교훈을 토대로 서래의 행동을 예측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는 서래를 잃을 수 없고, 그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없다.
홍산오와 서래의 자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홍산오는 자살 행위가 경찰에 잡히지 않고 사랑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었지만, 서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해준과 서래 사이의 어두운 거래가 담긴 핸드폰은 버리면 그만이며, 가장 큰 제약이었던 해준의 아내는 그와 결별하고 집을 떠났다. 이제 둘은 만나서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 이를 거부한다는 건 서래의 마음에 사랑보다 증오심이 더 커졌다는 방증이다. 해준이 그녀의 마음을 충만한 사랑에서 증오와 고독과 체념으로 변화시킨 흔적은 이포에서 벌어지는 영화의 중후반부에 계속 감지된다. 임호신이 살해당한 날 해준은 자신을 보기 위해 이포에 온 서래를 찾아가 "이러려고 이포에 왔어요?"라며 그녀를 범인으로 낙인찍는다. 사랑의 전제 조건이 믿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서래에게 이 말은 사실상 '배신'이다. 믿을 수 없다면 사랑은 끝난 것이다. 그러니 해준의 말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심지어 해준은 임호신의 살해범이 왼손잡이라고 직접 말하면서도 오른손잡이 서래를 의심한다. 그의 새로운 파트너 연수가 "저분(서래) 오른손잡인데요?"라고 의문을 표하면, 해준은 서래가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마침내 쐐기를 박는다. "그러니까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해서 저 여자가 범인인지." 부산에서 해준이 서래에 의해 붕괴되었다면, 이포에서는 서래가 해준에 의해 붕괴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순수하지 않다. 거기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증오와 혐오의 감정도 포함된다.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처럼 수시로 모습을 뒤집으며 위험천만하게 곡예를 탄다. 해준을 죽을 만큼 좋아한 서래는 이제 그를 파괴하려 한다. 그녀는 부산에서 그의 붕괴를 목격하면서, 그에게 직업윤리라는 가치가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해준은 서래를 만나기 전까지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이고 모범적인 형사였다. 그는 아내와 섹스를 하는 와중에도 사건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에게 직업윤리의 붕괴는 곧 삶의 붕괴를 뜻한다. 서래는 미결된 사건, 다시 말해 형사로서의 직업적 결함이 극심한 불면증의 원인이 되어 그를 허약하게 만든다는 사실까지 인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서래가 그간 저질렀던 살인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수장되기로 결심한 것은, 자신을 다시 사랑하기로 한 해준에게 그것의 불가능성을 선언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 해준의 형사로서의 무능력을 지적하는 것이다. 해준은 그녀의 연인으로서, 특히 형사로서 그녀를 찾을 때까지, 어쩌면 죽을 때까지 계속 고통받을 것이다. 서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준은 "참 불쌍한"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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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문나이트> 60초 예고편
MCU 사상 가장 압도적인 히어로! 강렬하고 초월적인 힘을 가진 ‘문나이트’를 만나기까지 D-20 디즈니+ 마블 오리지널 시리즈 [문나이트] 3월 30일 디즈니+에서 글로벌 동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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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진삼국무쌍> 티저 예고편
한나라 말기, 황건적의 난을 틈타 황궁을 장악한 동탁.
그의 폭정으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하고.
최강의 장수 여포까지 양아들로 들이며 그 세는 더욱 커진다.
한편 천하를 구하기 위해 영웅들은 뜻을 모으고
유비, 관우, 장비, 조조, 원소, 손견 등은
사상 최대 규모의 동맹군을 결성하는데…
영웅들이여, 최악의 적을 무너뜨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