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6-05 12:04:42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넋을 기리며
현충일
❣️Cinelab Curation❣️
6/6(금)은 현충일입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며,
오늘은 영화를 통해 그들의 희생과 헌신의 순간을 돌아보려 해요.
어떤 순간들은 미디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했을 때 더욱 마음 깊이 느껴지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도 영화와 함께 마음 깊이 추모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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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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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의 삶으로 '인간 대우'에 대해 돌아보다
모두의 삶에 적용되는 말이겠지만 난 성매매와 노출될 일이 없다. 당연히 평범한 일반인들이 성매매를 할 일이 없지만 이건 나의 개인적 에피소드와도 관련이 있다. 어느 길거리를 걸어가다 어떤 할머니가 '학생! 여자 있어!'라고 한 걸 듣고 갑자기 겁이 나서 와다다 도망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성매매에 노출될 일이 없다기 보단 그때의 기괴했던 사건을 생각하면 가까이하기 싫은 게 정답이다.
그래서 성매매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당연히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기 때문이다. 그 대신 영화나 책에서 포르노 배우에 대한 묘사를 몇 번 보긴 했다. 당연히 이들도 사람이다. 뭐 인스타그램에 노출이 있는 사진을 올린다고 해서 이상한 일들을 겪어야 한다는 자격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보라고 올린 것 맞는데, 그걸 입 밖에 실제로 꺼내서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또 다른 차원 아닌가? 이는 사실 외국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많은 유명 셀럽들은 매력 있는 남자, 여자라는 이유로 성희롱을 당한다. 당장 네이버에 'dm 성희롱'이라 검색하면 기사가 몇 개 보인다. '무언가를 선택해서(유명해져서) 나쁜 일을 겪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건 좀 잔인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들도 선택지를 고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인도에 한 여성 정치인이 이와 관련해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고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컨텐츠로 가보자.
실제로 있었다고 하는 몇몇 사건들
1960년대 인도다. 변호사 아버지 아래에서 유복하게 자랐던 강가. 강가는 남자친구 한 명이 있다.. 영화배우가 꿈이었던 강가. 강가는 애인의 제안에 뭄바이로 향하게 된다. 근데 그것은 뭄바이로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애인을 사창가로 팔아넘겼던 강가의 남자친구. 한 순간에 모든 게 사라졌다. 꿈과 목적까지 잃어버린 강가. 유곽에서 하고 싶지도 않았던 일을 하며 남자를 대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어쩔 때는 두들겨 맞기도 하는 강가. 그녀에겐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돌아갈 길 같은 건 없다. 이미 돌아가도 가족들에게 손가락질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멍투성이의 얼굴과 함께 지역 마피아에게 향한다. 복수를 원하는 강가. 복수는 보기 좋게 성공한다. 강가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이 지역의 짱이 되겠다는 다짐을 아로새긴다. 많은 돈을 모으고, 같은 편의 사람들을 영입하며 점점 성장하는 강가. 영화는 강가라는 이름이 강구 바이가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한 여인의 성장과정을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해가 되는 소재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야한 장면 안 나온다. 영화의 후반부에 특정 인물의 연설 장면을 말하기 위해서 불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사람과 사람을 때리는 장면은 몇 번 나온다. 이 외에는 잘 짜인 스릴러라고 생각이 들었다. 인도라는 낯선 소재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전개가 잘 감겨서 촘촘했다. 그런데 앞에서 적었던 영화의 하이라이트 신이 굳이 필요했나?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며 들 수 있는 생각은 연대와 주체성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두 요소들을 낯설 수도 있는 인물을 통해서 무언가 뭉클하게 전달한다. 잘했다. 각본이나 디렉팅을 맡았던 제작진 분들은 좋은 선택을 골랐다. 그런데 굳이 그런 요소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지가 전부였을까? 싶다. 얼핏 보면 그녀를 그렇게 만든 세상을 합리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녀가 매력적인 정치인이고, 또 자기와 같은 피해자들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만 묘사해도 영화는 충분했다. 그런데 굳이 하이라이트 신에서 자극적인 단어가 나온다. 솔직히 불필요했다. 품위와 존엄성은 이 영화가 19금 코드를 적당히 묘사했다는 점에서 충분하다고 느낀다. 성적으로 자극적이지 않으니 나름의 품위가 생기는 것이다. 영화의 이야기 전개 상으로 후반부 한 10분은 컷 하거나 적당히 줄였다면 극을 보는데 깔끔했을 것 같다.
눈치 보며 춤추기
인도 영화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세 얼간이>이다. 알 이즈 웰! 잘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로 웃고 춤췄던 인도 영화. 그냥 뮤지컬 영화니까 이런 거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일부만 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인도 영화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부분이 개연성 없이 마구 난사된다는 것들을 몇 번 읽었다. 인도 영화라는 넷플릭스의 분류 등급을 읽기 이전에 염려부터 했다. 마피아 퀸이라는 부제만 봐도 이 영화는 범죄/스릴러인데 갑자기 춤추고 노래할까 무서웠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잘 만들었다. 이런 요소들을 아예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있을 때 들어갔고, 없을 때 없다. 그러니까 극을 볼 때 나 같은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각본을 쓴 사람이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본 티가 난다.
밝은 건 밝고 어두운 건 어둡게
또한 이 영화하면 생각나는 강점은 색감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와는 대조되는 흰 옷은 곳곳에 자주 쓰인다. 정치인으로 연설할 때, 최후 반부 엔딩신, 유곽에 잡혀온 애들을 해방해줄 때 등등 뭔가 감독이 인물들을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라고 생각이 들 때 흰 옷이 나온다. 감독이 인물의 의상으로 처지를 비유한 부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뒷배경에서 탁한 세트장을 고른 점이나 촬영했던 카메라 렌즈까지 색채 대비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연대로 함께 나아가다
앞에서도 썼듯 영화의 주요 소재는 연대다. 그리고 부제는 '마피아 퀸'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주인공 강구 바이는 마피아와 연대를 한다. 이 마피아는 주로 남자로 묘사된다. 만약 마피아까지 여성으로 묘사됐다면 이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설득력이 떨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 마피아들의 성격이 나름 합리적인 부분이 있는 점이나 선한 남성 캐릭터도 출연했다는 부분은 감독이 단순히 여성 서사만을 중심으로 극본을 짜지 않았다는 것이 충분하다. 뭐 성매매 피해자들에 대한 묘사를 중심으로 쓰는 게 주요 플롯인 것은 맞다. 그러나 영화는 절대 이 사람들과의 연대가 현재 사회가 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전부 다 해결할 것이라고 믿지 않고 있다. 보시면 안다.
좋은 퍼포먼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인도 배우다. 인도 여배우를 다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처음 봤다.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당차고 씩씩하게 여러 관문들을 격파하고 성장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몰입이 되게 탁월한 묘사가 돋보였다. 만약 인도에도 영화 시상식이 있다면 상을 받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엔딩의 눈빛 연기에선 뭉클함도 있다. 또 주조연으로 출연했던 다른 배우들도 당시 인도에 대한 묘사가 강점으로 잘 발휘되어 나름의 역할을 수행한다. 또 영화 자체가 1960년대 인도 묘사를 적절히 잘해놔서 그냥 무난하게 보기 좋은 영화다. <오징어 게임>이 성공한 것처럼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이 있으니 다른 나라의 창작물들을 보게 되니 이런 건 참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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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뒤섞인 난맥상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법정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승패를 가리는 장소라고 믿으며 각종 꼼수와 편법에 능통한 변호사 '정인후'(조정석). 그는 감옥에서 암에 걸린 아버지의 가석방을 약속받자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태주'(이선균) 대령의 변호를 맡기로 결정한다.
군인 신분 때문에 재판 기회가 한 번 밖에 없는 박태주. 하지만 그는 변호인에게 쉽사리 협조하지 않는다. 원칙주의자인 그의 눈에 정인후는 양아치니까. 그가 내란을 사전에 공모했는지, 아니면 위압에 의해 명령을 따랐는지가 재판의 쟁점인 가운데 박태주는 거짓 혹은 편법 증언을 요구하는 정인후와 거듭 부딪힌다.
한편, 10.26 사태를 계기로 박정희의 후계자가 되어 권력을 잡겠다는 야욕을 품은 합수부장 '전상두'(유재명). 박 대령 재판을 자기 발판으로 삼기로 결정한 그는 실시간으로 재판관에게 쪽지를 전달하고 재판을 도청 및 녹음하며 정인후의 노력을 물거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무위에 그친 역발상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경호원들은 박정희 대통령 외 5명을 사살했다. 이 사건의 재판을 다룬 <행복의 나라>는 시간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어중간하다. 사건의 전후사정이 이미 영화화돼 대성공을 거뒀기 때문. <남산의 부장들>은 김재규의 동기를, <서울의 봄>은 사건 이후 12.12 군사반란을 영화화했다. 심지어 둘은 장르도 달랐다. 전자는 누아르를, 후자는 전쟁 영화의 속성을 강조했다.
이에 <광해, 왕이 된 남자>와 <7년의 밤>을 연출한 추창민 감독은 역발상을 했다. 10.26 사태나 주동자인 김재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상대적으로 관심을 못 받은 공범 박흥주 육군 대령과 그를 변호한 태윤기 변호사에게 주목했다. 특히 그들의 인생사를 각색해 극명하게 반대되는 삶을 살아온 두 인물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하게 되는 과정을 법정물로 포장해 감동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행복의 나라>는 역발상의 힘을 스스로 포기했다. 신념과 규칙에 충실한 삶 대 생존을 위해 유연해야 하는 삶이라는 대립 구도를 깊게 파고드는 대신 쉬운 길을 간다. 무조건적인 악역 전두환을 전면에 내세워 스케일을 키우고 군사 정권과 민주 시민의 대립을 강조한다. 문제는 같은 이야기로 천만이 넘는 관객의 뇌리에 각인된 선배들이 있다는 것. 결국 노선을 바꾼 순간 <행복의 나라>는 자기 자리를 잃고 말았다.
거대한 사건 속 개인적인 이야기
장르만 놓고 보면 <행복의 나라>는 <변호인>과 비슷해 보인다. 둘 다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법정물이니까. 하지만 두 영화의 지향점은 전혀 다르다. <변호인>은 분노를 연료로 삼아 달리는 작품이었다. 무고한 피고인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군사정권의 무도함과 그에 맞서는 변호인의 투쟁. 이 명확한 선악 구도에 송강호라는 배우의 연기력을 더하니 마치 들끓는 불과도 같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행복의 나라>는 다르다. 선악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가운데,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 보고 있는 변호인과 피고인의 관계성이 핵심이다. 살인을 저지른 피고인의 행위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두 주인공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정인후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공을 꿈꾸며 판검사가 되려다가 실패한 변호사다. 법정은 옳고 그름을 가르는 곳이 아니라 이기고 지는 곳이라는 대사에는 그의 인생이 축약되어 있다.
그 반대편에는 박태주 대령이 앉아 있다. 그는 중앙정보부 비서실장인데도 판자촌에 집이 있을 정도로 청렴한 군인이다. 요직에 있지만 권력을 마다하고 최전방 전출을 거듭 요청한 참군인이기도 하다. 영화는 10.26 사태를 매개로 완전히 다른 두 삶을 충돌시킨다. 배경은 대한민국의 향배를 뒤바꾼 거대한 사건이지만, 정작 내용은 철저히 개인적인 이야기인 셈이다.
감독의 전작인 <광해, 왕이 된 남자>와도 유사하다. <광해>도 중심 사건은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한 정치극이었다. 하지만 정작 주된 내용은 개인적인 이야기였다. 충(忠)으로 무장한 유학자 '허균'(류승룡)이 광해군으로 위장한 광대 '하선'(이병헌)과 지내면서 자기 신념과 사상의 문제를 깨닫고 새 나라와 새로운 왕을 꿈꾸게 되는 티키타카야말로 천만 관객을 휘어잡은 원동력이었다. <행복의 나라>도 마찬가지다.
두 인생의 충돌로 빚은 법정극
전혀 다른 삶의 궤적과 신념을 지녔다 보니 정인후와 박태주의 첫 만남은 엉망이었다. 정인후는 철저한 원칙주의자 군인 박태주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관등성명, 상명하복이 권위주의의 발현에 불과하다며 비웃는 사람이니까. 박태주도 다르지 않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법정에서 온갖 편법을 써가며 승리를 추구하고, 정의가 아니라 돈과 이익을 위해 변호를 맡는 정인후는 단지 변호사일 뿐, 신뢰할만한 변호인이 아니다.
1차 공판만 해도 정인후는 자기 의도대로 재판에 임한다. 군인이니 군법에 따라 단심제 군사 재판을 받겠다는 박태주. 정인후는 그를 설득하는 대신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한다. 군사 재판은 받지만, 단심제는 3심제로 바꿔달라며 위헌심사요청을 한다. 위헌심사요청이 기각되자 재판관을 교체해 달라며 재판을 여론 싸움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2차 공판부터는 다르다. 정인후는 점차 피고인의 입장과 신념이 녹아든 전략을 수립한다. 군인에게 명령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저 명령을 따른 박태주의 책임을 부정하는 식이다. 대통령을 살해한 후 정보부가 아니라 육군본부로 가자는 의견을 박태주가 냈다는 진술에 착안해 내란죄 혐의를 부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태주도 정인후를 만나 변한다. 동료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재판을 포기하려던 그. 그는 군인이고 원칙주의자면 규칙대로 재판장에서 최선을 다해 싸워서 책임을 지라는 정인후의 일갈에 마음을 다잡는다.
이는 법정극 특유의 쾌감으로 이어진다. 감정 호소로 일관한 <변호인>과 달리 <행복의 나라> 속 재판씬은 판세가 거듭 뒤집히다 보니 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에 더해 흐름을 가져오려고 머리를 쥐어짜면서 변호인과 피고인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한 팀이 되는 이야기가 병행되니 복합적인 재미가 만들어진다. 진정한 인권변호사가 되어가는 정인후를 보면서 박 대령이 웃음과 하이파이브로 화답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익숙한 맛으로 돌파하는 고구마
정인후와 박태주가 한 팀이 되어가는 과정은 자칫 고구마일 수 있다. 비록 역사를 반영한 것이기는 하나, 박태주라는 캐릭터가 다소 과하게 올곧은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 자기는 죽고, 아내와 두 아이만 남아 험난하게 살아야 할 상황에서도 그는 자기 신념을 좀처럼 꺾지 못한다. 상관도 못 버리고, 명령에 충실한 군인이라는 자부심도 저버리지 못하고, 대통령을 살해했지만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도 내려놓지 못한다.
추창민 감독은 고구마를 익숙한 맛으로 뚫어버린다. 정인후의 아버지와 박 대령을 겹쳐 보이게 한다. 개척 교회 목사로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돕다가 수감되고, 가족을 돌보지 못한 아버지. 정인후는 자기 신념대로 살아야 하는 아버지를 머리로는 받아들이지 못해도 가슴으로 이해해 간다. 그리고 이 과정은 그가 박태주를 만나는 장면과 이어진다. 그 덕분에 자칫 답답할 뻔한 전개는 가족애로 변환되어 더 큰 감동을 자아낸다.
물론 다소 양식적인 스토리텔링이기는 하다. 사건과 무관한 인물을 통해 시대적 사건에 접근하면서 특히 감정선을 자극해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유발하는 전형적인 한국 영화의 화법이니까. 야매 변호사였다가 사건을 맡은 후 진정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성장 서사는 정인후나 <변호인>의 송우석이나 다를 바 없다. 또 정인후와 아버지의 관계성도 이러한 맥락에서는 신파를 의도한 구조 배치로 보일 수밖에 없다.
과욕과 함께 무너지다
하지만 과욕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행복의 나라>는 이내 본연의 색을 잃는다. 의외로 초중반부까지 이 작품은 10.26 사태의 배경이나 실체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부마 민주 항쟁이 대학살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김재규의 결단 정도로 언급할 뿐이다. 애초에 핵심 플롯 자체가 정인후와 박태주 둘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이는 의도적인 공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12.12 군사반란을 필두로 실제 사건에 가까워진다. 그러니 역사적 맥락의 공백이 서서히 두드러지면서 영화의 만듦새도 무너진다. 배경이어야 할 사건이 돌연 주인공이 되다 보니 묻어 두었던 의문점이 한 번에 터져 나오기 때문. 일례로 중반부까지만 해도 매력적이었던 입체적인 인물상은 중심점을 잃고 흩어진다. 정인후의 경우 단지 박태주를 살리려는지 민주주의 투사가 되려는지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박태주도 명령에 의한 피해자인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투사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가 청렴한 군인이고 신념에 맞는 명령을 따랐으니 민주주의 투사로 여겨야 하는지, 군사 정권에 협력한 군인을 살리는 게 과연 민주주의를 위한 항거인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10.26 사태의 본질과 맥락을 외면한 채로 시작한 미시적인 이야기를 무리하게 거시적으로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모양새다.
이에 더해 장르적으로도 균형을 잃는다. 12.12 군사반란이 시작되는 순간부터는 <서울의 봄>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서울의 봄>처럼 쿠데타 과정을 자세하거나 긴장감 넘치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결국 10.26 사태는 지우고 12.12 군사 반란을 부각한 선택은 법정극이라는 장점도 희석시키고, <행복의 나라>만의 개성을 깎아먹는 악수가 되고 만다.
전두환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마지막으로는 극 중 전상두, 곧 전두환을 다루는 방식도 <서울의 봄>과 비교를 피할 수 없다. 황정민의 전두광과는 달리 유재명의 전상두는 상대적으로 일차원적이다. 전자는 들끓는 성공욕,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보스 기질, 위기 때마다 빛나는 간교함이 어우러진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였다. 반면에 전상두는 그저 권력을 잡기 위해 살인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절대악으로만 묘사된다.
그 결과 전상두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영화는 편의적으로 느껴진다. 전두환이 의문의 여지없는 악역이기는 하나, 그를 덮어두고 비난하면 메시지가 뻔해지고 재미도 덜해지기 때문. 정인후가 전상두 면전에서 욕을 하는 골프장 시퀀스가 통쾌하거나 희열이 느껴지는 대신 지루하고 늘어진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슈퍼맨처럼 압도적인 힘을 지닌 히어로를 잘못 활용해 액션의 긴장감과 쾌감을 모두 놓친 <저스티스 리그>와 비슷하다.
그렇기에 <행복의 나라>가 전두환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포기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유독 짙다. 악명 높은 한 인물 대신 비교적 덜 알려진 이들의 서사에 우직하게 집중했다면 한국 현대사를 다룬 이전 시대극들과는 또 다른 한 편의 드라마가 탄생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조정석과 이선균,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두 주연의 연기도 함께 빛이 바래기에 더욱 안타깝다.
Acceptable 무난함
시대의 그림자에 가려진 개인을 비추기에는 조명이 너무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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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와 로봇이 알려주는 우리 사랑의 모든 것
늦여름의 외로움과 초가을의 즐거움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혼자 사는 개 도그다. 외로운 주인공. 일 하고 나서 집에 돌아오는 길이 적적하다. 유일하게 하는 거라곤 집에 앉아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일이다. 혼자 노는 것도 이젠 지쳤다. 느닷없이 옆집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옆 집의 동물들이 보인다. 안 그래도 외로운데 옆집의 동물들은 둘이서 잘들 살고 있다. 쓸쓸함이 깊어진다. 그때, 도그는 특별한 광고 하나를 보게 된다. 그 광고의 내용은 간단했다. 바로 구매자들의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주는 인공지능형 AI를 판다는 것이었다. 로봇을 주문하는 주인공. 로봇이 배송된 날에 바로 언박싱을 하며 기계를 만들어본다. 기계에 불빛이 들어온다. 그렇게 개와 또 다른 주인공 로봇과의 첫 만남이 이뤄졌다. 둘도 없는 친구가 생긴 도그. 도그는 그동안 혼자 사느라 못해왔던 것들을 로봇과 함께 해보기로 한다. 늦여름과 초가을이 시작되는 9월, 풋풋한 사랑이 시작된다.
소리가 왜 필요해
이 영화에 대해 가장 먼저 이야기할 수 있는 점은 대사다. 글쓴이가 생각했을 때 이 영화가 가진 '대사가 없다'는 무성영화스러운 특징은 영화의 호불호를 가로지를 요소다. 당연히 대사라는 건 현대의 영화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사랑 영화는 누군가에게 인물의 마음을 전달하는 영화다. 그럼 낭만적인 대사를 쓰는 게 영화의 승부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명장면들이 생각난다. <이터널 선샤인>의 엔딩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Okay"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중경삼림>에서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내 기한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라는 문장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 <로봇 드림>은 위의 두 영화가 고른 선택지를 과감하게 포기하는 전략을 골랐다. 캐릭터들의 대사를 깡그리 없앤 것이다.
왜? 이 영화가 고른 몇 가지 선택 때문이다. 우선 첫째.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 있다. 음악을 활용한 장면인데 이 영화가 사랑의 속성을 활용했다는 측면에서 사운드의 유무는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가 사랑에 빠졌던 무언가와의 히스토리를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의 카톡 메시지를 기다리며 들었던 ‘스토커’가 있다고 해보자. 그럼 당연히 그 ‘스토커’에 애착이 가지 않을까? 이와 유사하게 사랑이 가진 마법을 음악이 가진 힘과 결합시킨 것이다. 둘째. 이 영화가 묘사하는 이미지의 힘은 이 영화가 가진 연출의 특성을 반영하는 듯하다. 영화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비현실적인 느낌이 좀 있다. 친절한 이야기 중에서 제일 불친절한 편(?)에 속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미지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해 관객으로 하여금 파편화된 사랑의 기억을 떠올린다는 점에서 연출의 성취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억'을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OST 후렴구 첫 구절이 근거가 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고른 선택지는 다양성이다. 이 영화는 동물들을 캐릭터로 내세웠다. 강아지, 코끼리, 고양이 등등 다양한 동물들이 맨해튼 거리에서 마을을 이뤄 살아가고 있다. 근데 이런 세팅 하에 동물들이 영어를 쓰거나 불어를 쓰면 이상하잖아? 동물들만 있는 세상에 인간의 언어가 나오면 이질감이 굉장히 클 듯하다. ‘인간중심적인 서사’라고 비판받기 딱 좋은 설정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인간의 언어를 쓰면 굳이 동물들이 주인공일 필요가 없다. 이 영화의 장점 중 하나가 귀여운 그림체인데 그 매력 하나를 영화 스스로 급감시키는 단점을 초래하는 것이다.
과거에게 바침
글쓴이가 <로봇 드림>을 보면서 흥미로웠던 것 중 하나는 과거 로맨스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가 곳곳에 보였다는 점이다. 영화의 공간적인 배경에 해당하는 '맨해튼'은 실제 영화 <맨해튼>에 대한 오마주로 보인다. 그 벤치에서 두 사람이 앉아있는 장면이 연상되는 숏이 <로봇 드림>에도 있었다. 플롯의 핵심인 '로봇과의 사랑'이라는 것은 와킨 피닉스가 주연이었던 <그녀(HER)>가 연상된다. 또 AI를 둘러싼 주인공의 리액션을 다룬다는 점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A.I>를 연상케 한다. 단순히 이야기에서 두 영화와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녀>에서 주인공이 한참 사랑에 빠진 장면, <A.I.>에서 로봇이 보여주는 리액션은 <로봇 드림>에서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원스>를 인상 깊게 봐서 그런지 두 주인공이 걷는 장면만 보면 그 영화가 떠올랐다.
이 오마주라고 하는 것이 영화 핵심에 그대로 작동한다. 우선 접근법이다. <캐럴>에서 인물들의 시선으로 사랑을 묘사했던 방식이 <로봇 드림>에서도 이어진다. 이야기 중반부에 기점 찍고 도그가 이끄는 이야기를 보면 이 캐릭터는 타인을 바라봄으로써 영화가 말하는 사랑의 의미를 전달한다. 이 캐릭터의 시야에 뭐가 보이는가? 가 이야기를 이끄는 것이다. 또 로봇의 시선에서 어떤 것이 보이고, 또 무슨 장면을 관객에게 전달하는지도 영화가 사랑의 의미를 설명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사랑에 빠진 우리의 모습을 시선과 상상력으로 구현한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중반부 이후의 전개는 <라라랜드>와 <이터널 선샤인>이 우리를 사로잡았던 이유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게 단순히 오마주만 맥없이 따왔으면 의미가 바랠 것이다. 2024년 버전으로 리메이크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로봇 드림>은 그 나름의 핵심을 전달한다. 귀여운 그림체와 대사가 없다는 특성만으로도 폭넓은 감정선을 전달하는 연출의 밀도는 일반 관객을 충분히 사로잡을 것이다.
너 하나 기다렸어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최고 강점은 이야기 전개다. 이 <로봇 드림>의 이야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랑하며 느끼는 여러 순간들을 흐름에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부드럽게 연결시켰다는 강점이 있다. 가령 도그->로봇에게 이어지는 관계가 그렇다. 도그는 로봇을 구매했다. 도그가 로봇의 생명을 부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 문장이 영화 안의 판타지스러운 설정 같아 보이지만 사실 우리 사랑의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들 많이 하지 않나? "이 사람은 나 없으면 안 돼!"같은 것들 말이다. 어디 조직에서 일하는 회사생활부터 시작해 인간관계까지 이런 류의 말들은 흔히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은근슬쩍 숨기고 있는 마음이 있다. 바로 반대로 '난 이 사람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로봇 드림>은 이면에 깔려있는 무언가를 다뤘다. 그 순수한 마음이 어디로 도착하는지를 소재로 삼은 영화인 것이다.
물론 이 속성만 다루지 않았다. 이 영화는 첫사랑에 대해 다룬 영화기도 하다. 첫사랑과 결혼까지 골인한 경우도 적지 않지만(글쓴이 주변 사람들 중에서도 많다) 아닌 경우가 더 많다. 역시 글쓴이도 첫사랑에 대해 생각할 때 별 생각을 다 한다. 이 사람을 잊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도전하는 영화는 그동안 많았다. <노트북>같이 운명적인 사랑을 다루거나 <이터널 선샤인>처럼 재회를 다룬 작품도 우리 기억에 생생하다. 첫사랑이 피고 지는 영화였던 <꽃다밭같은 사랑을 했다> 같은 작품도 있다. 이 영화 역시 첫사랑의 역설에 도전하는 것과 동시에 그 나름의 의미를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운명처럼 만난 첫사랑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정해진 건 없다. 다만 우리 과거의 무언가에게 "잘했어"라고 격려할 수 있을 뿐. 이 영화는 지나간 사랑을 떠올리기 충분하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여러분은 15000원의 거금을 내고 영화관에 갈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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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만이 균열을 낸다
DIRECTOR. 러우예
CAST. 저우쉰, 자훙성 외
SYNOPSIS.
상하이를 가로지르는 쑤저우강. 비디오 촬영기사인 나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두 연인 마다와 무단의 목숨까지도 버리는 열렬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연인 메이메이가 있지만 그들과 같은 사랑을 하지는 않는다. 마다의 사랑이 꾸며낸 거짓이라고 믿었던 메이메이는 마다와 무단의 시체를 보고는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에게 마다와 같은 사랑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요구를 무시해 버린다.
POINT.
✔️ 미장센이 아름답고 감성이 세기말이에요. 이거 안 좋아하는 법 아시는 분?
✔️ 사랑은 역시 지난 세기의 사랑이 진짜다... 낭만주의적 장면
✔️ 그리고 거기 남아 있는 깊은 역사적 의미. (정성일 평론가가 알려주신 바에 따르면) 천안문 사태를 목도하고 카메라를 쥔 중국 6세대 감독이 무엇을 담았는지 바라보아야 할 영화.
✔️ 1인 2역을 소화하는 저우쉰의 연기 저력
영화 <쑤저우강>은 블랙아웃된 화면에서, 사랑을 시험하는 연인의 질문을 들려주며 시작한다. 이어 강과, 강을 둘러싼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더러 기울어지고 더러 초점이 맞지 않는, 강과 공사 현장과 배... 같은 모습이 점프컷을 통해 불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이내 내레이션을 이끌고 가는 사람은 카메라 촬영 기사로, 앵글이 1인칭 시점으로 움직인다. 카메라 촬영 기사는 동네 술집인 '해피 바' 사장에게 인어 분장을 하고 수조에 들어가 춤을 추는 여성을 촬영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인어 역할을 한 메이메이와 사랑에 빠진다.
가까이에서 연인을 보는 카메라는 이런 느낌이구나. 보이는 거라곤 상대 뿐이라, 사랑에 빠진 시선은 타이트해진다. 맹목적으로 상대를 본다. 그러나 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만으로 꽉 차지 못한다. 메이메이가 연인에게 던진, 사랑을 시험하는 질문 이야기로 한 겹 더 들어간다. 메이메이의 표현에 의하면 사랑을 잃어버리고 미쳐갔다는 남자 마다의 이야기로.
촬영 기사는 마다와 그의 연인 무단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부터 관객은 다소 혼란스러워지는데, 이야기가 피자치즈처럼 하나로 쭈욱 이어지는 게 아니라, 마치 페이스트리처럼 베어 물 때마다 후두둑 떨어지기 때문이다. 정황상 마다와 무단의 사랑 이야기는 메이메이가 촬영 기사에게 들려준 것인데, 이야기를 관객에게 서술하는 사람은 촬영 기사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궁금했던 건 "어디까지가 진짜일까?" 하는 것이었다. 0에서 100까지의 스펙트럼 전체가 가능성이었다. 마다와 무단이 실존인물일 가능성과 그냥 도시 전설일 가능성. 메이메이가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가능성. 메이메이의 이야기에서 촬영기사가 변형시켰을 가능성.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고, 마다와 무단 이야기의 진상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펼쳐지는 쑤저우 강의 흐름에 묶어서 나는 막연하게 느꼈다. 강은 아름답기만 한 곳도 아니고, 교과서적인 표현으로 '생명의 젖줄'이기만 한 곳도 아니다. 때로는 사람을 살리고 때로는 사람을 삼키는 강 위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묻어나고 흘러간다. 영화 초입에 보여주었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가, 강에 계속해서 누덕누덕 기워진다. 역사는, 인간사는 결국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따금 윤슬처럼 무언가 반짝 빛난다. 도저히 인어가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희뿌연 강에서 (애초에 강에 인어란 생물체도 없지만) 사람들은 반짝이는 인어의 환상을, 깨진 사랑의 이야기가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는 것을 본다. 공장 굴뚝 연기와 짓다 만 공사 현장의 투박한 사이로, 그런 이야기들이 반짝반짝 살아남아 흘러간다.
어디까지가 만든 이야기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짜인가. 그건 중요하지 않다. 강을 따라 흐르는, 누덕누덕 내려앉은 이야기 중에는 사랑도 이별도 망설임도 추억도 있다.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도 애틋한 도시 전설이 되어 흘러갈 뿐이다.
이야기는 어쩐지 허무하게 끝나고, 페이스트리처럼 후두둑 떨어진 이야기 조각들을 보며 나는 슬퍼진다. 강에는 앞으로도 많은 이야기가 후두둑 떨어지고 또 누더기처럼 덧대어지며 흘러가겠지. 어찌 보면 허무하고 암담하지만, 나는 이야기를 계속 붙이는 주체를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계속해서 목소리를 들려주고 이야기를 끌어 가지만 이름도 얼굴도 나오지 않는 촬영 기사 같은 존재를 생각한다. 이야기를 남기고 재구성하는, 사람을 생각한다. 도도한 시간의 흐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건 결국, 인간의 기억과 기록 뿐이다.
왕가위 영화가 생각난다는 평이 많았는데, 내겐 그다지 왕가위 생각이 나는 영화가 아니었다. 그냥 이 영화 자체로 고유했고, 영화가 주는 에너지가 커서 좀더 곱씹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시작된 라이브러리톡에서 정성일 평론가가 들려준 이야기는 더욱 커서, 일부분만 요약해서 기록을 남겨두고 싶다.
정성일 평론가는 러우예라는 감독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했다. 러우예는 학생 시절이었던 1989년 천안문에서 민주화 항쟁과 광장에서의 학살을 목격했다. 그의 첫 영화 <주말정인weekend lovers>는 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순회했지만, 정작 중국 당국의 검열로 2년간 영화 촬영을 금지당했다. 그는 다음 영화를 찍기까지 5년 가량을 기다려야 했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쑤저우강>이다. 그는 이 영화로 또 다시 1년간 촬영을 금지당한다. 다음 영화 <자호접>은 1931년 반일 레지스탕스를 소재로 하면서 좀 체제 순응적인 것처럼 보였으나, 2006년 대놓고 1989년을 배경으로 한 <여름 궁전>을 내놓는다. 정성일 평론가의 표현을 빌자면 러우예의 "폭탄 같은" 영화였다. 결국 그는 또 다시 5년 동안 영화 촬영을 금지당한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러한 배경을 상세히 풀어내며, 그렇기에 이 영화를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만 보아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 영화는 천안문 이후의 절망과 실패, 좌절 등이 담겨 있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미 블랙리스트에 오른 감독이었기에 직접적인 알레고리를 사용할 수 없지만, 지극히 간접적인 알레고리를 넣었음에도 중국 공산당은 이를 느끼고 촬영을 금지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천안문 이후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개방, 정치적으로는 폐쇄를 지향하는 이중의 정책을 펼쳤고, 이 영화는 그 이후 중국 인민들의 정신과 마음 상태를 그려내고 있다. 혼탁한 진흙탕 같은 물. 간명하게 설명되지 않고 뚝뚝 끊어지는 서사. 마치 유리잔을 깨뜨려 파편을 사방으로 흩듯, 의도적으로 그렇게 찍은 영화라고 했다.
2000년 당시의 중국 상황과 끊어 이해할 수 없는 영화라고 하면서도, 정성일 평론가는 우리가 중국 내부인이 아니라는 한계를 명확히 언급했다. 검열을 당하는 국가에서 알레고리는 지극히 간접적이고 소극적일 수밖에 없으며, 외부자의 해석은 언제나 한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언제든 교정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 타는 열정으로 해석에 접근하는 능동적인 마음과,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외부자의 겸허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발언이라 인상 깊었다.
"왕가위의 아류"라는 흔한 해석 또한 정성일 평론가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런 해석은 왕가위도 납득하지 않을 거라는 말과 함께, 탁류 위를 흘러가는 배 같았던 당대의 중국 상황과, 길 잃은 듯 돌아다니던 <중경삼림> 시기의 홍콩 상황은 차이가 있음을 명확히 했다. 반환 앞에서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홍콩의 상황보다, 떠돌아다닐 수도 없이 수동적으로 흘러가야만 했던 당시 중국의 절망적 감정을 담은 것이다.
더불어, 왕가위의 점프컷은 세심하게 모두 쪼개어 이어붙인 느낌이지만, 러우예의 점프컷은 노골적인 NG컷까지 포함함으로써 찍은 풋티지를 모두 보여주는 느낌을 주고 있다는 차이점도 짚었다. 이는 영화의 서술자가 카메라 촬영 기사임을 생각할 때 더욱 절묘한데, 중국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게 익명의 누군가가 최선을 다해 찍은 것을 모두 보여주는 형태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이 1인칭 기법을 서방 세계의 미학적 해석으로만 바라볼 게 아니라, 당시 중국의 상황에서 관객과 영화를 이어주는 매개로 자리하고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설명이 마음을 울렸다. 언제든 중단될 수 있을 만큼 불안하게 흔들거리는 핸드헬드, 서사와 무관한 쇼트까지 포함한 느낌으로 의도된 편집 또한 그 느낌을 뒷받침했다.
정성일 평론가의 설명을 들으며, 아무리 제재와 검열이 아스팔트처럼 뒤덮어와도 예술은 한 평 땅의 흙처럼 숨 쉴 구멍의 역할을 하는구나 생각했다. 그가 지나가는 말처럼 일갈한, 최근 한국 독립영화의 '나(자신)만 불쌍'하게 보는 시각 또한 한편으로는 비판받을 지점이라 생각되면서도, 동시에 2024년의 한국 현실과 공명하는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사회를 배경으로 피어난다.
영화와 설명까지 모두 끝난 자리, 내겐 동일하게 한 문장이 남는다. 기록만이 균열을 낸다. 사회의 거대한 기조, 도도한 시간의 흐름, 괴로운 현실에... 이름도 얼굴도 남지 않는다 해도, 기록하는 손의 방향성만큼은 뚜렷하게 남아 균열을 낸다. 지금 우리는 무슨 균열을 낼 수 있는가. 사유하고 반응하고 싶은 마음으로 탁류를 응시한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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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불한당>,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거야
*<불한당>과 <무뢰한>의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고품격(?) 막장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두고 누군가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불륜이 선빵이면 그 정도는 해줄 수도 있지 않겠냐고 농담조로 말하자 상대방은 부부, 아니 인간관계에서 믿음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보여주는 드라마가 아니냐고 진지한 답을 내어놓았다. 동감하며 답했다. 맞다. 그런 메세지는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믿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인 짓인지를. 안 믿고 있다가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걸 확인하는 게, 믿었다가 못 믿을 놈이란 걸 확인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데 말이다. 그런 인생의 교훈을 일찍 깨달아서 도움이 되었겠다는 말에 웃으며 답했다. 아뇨, 알면서도 당했다고. 이번은 다르겠지. 이 사람은 다르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결국 결과가 똑같았다고. 알면서 당하면 진짜 바보인데. 안 그런가?
현수 曰 "(어휴) 촌스러워요"
<불한당>은 촌스러운 듯하면서 까리하다.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빨간 스포츠카 같은 영화다. 맛깔나는 대사나 장면도 많다. 다년간의 드라마와 영화 학습으로 쌓인 우리의 기대와 예지력을 조금씩 벗어난다. 처음부터 생선 눈이 무서워서 회를 못 먹는다는 둥, 사람 눈을 보면서 어떻게 사람을 죽이냐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최후의 만찬처럼 회를 사주고 머리에 총알을 박질 않나, 사람 죽이는 건 안 무서운데 여전히 생선 눈은 무섭다고 깻잎을 덮질 않나. 그러다간 또 푼수 떼기처럼 허세를 부리다가 삼촌에게 얻어맞고 차에 가서 훌쩍거린다. 그 눈물이 어찌나 새롭게 느껴지던지. 덩치가 작은 현수가 덩치 큰 수감자와 뺨 때리기를 하면서 주먹을 쓰는 반칙을 하면서도 당당하고, 재호는 그걸 보며 '혁신적인 또라이'라며 마음에 들어하기도 한다. 그런 현수에게 열광하는 당신도 두말할 것 없이 압도적인 또라이 아니겠어.
숨겨둔 카드를 빨리 보여준다. 아니, 벌써? 살짝 당황스럽지만 별로 걱정되진 않았다. 재호는 현수가 위장 경찰인 걸 일찌감치 알고 있고, 현수는 심지어 순진무구한 얼굴로 "형, 나 경찰이야"라고 자백을 한다. 이쯤 되면 누구나 알아차리게 된다. 무간도 같은 언더커버 전개가 아닐 거라는 것. 실제로 영화는 나쁜 놈인 건 둘째치고 등장인물들이 어지간히 또라이들이다. 이상하게 순정파 같은 또라이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실 재밌어서 도와준 거 같기도 하고
재호와 현수의 영화이다. 좀 더 치자면 재호와 현수, 병갑과 천 팀장이 남는다. 현수의 행동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차피 재호는 잘해야 미끼 혹은 돌다리다. 검거해야 할 타켓 중 일부에 불과했다. 어지간해선 칼을 가지고 재호를 얼마나 다치게 할 수 있을까 싶은데 기를 쓰고 그렇게 말리고선 대신 다친다. 재호를 구하지 않았어도, 다치지 않았어도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있진 않았을까. 목숨은 어머니 말씀처럼 박애주의적인 입장에서 구할 수도 있다 쳐도 교도소에서 남은 기간 동안 모든 힘을 다시 찾을 수 있게까지 해준 게 제법 과하게 느껴졌다. 목적을 위해 마음을 얻는 일이 이렇게 정성이 가득한 일이었나 싶었다. 재호에게 든든한 믿음을 얻으려는 전략이었을까, 그 사이에 진심이 있었던 걸까.
게임 끝나버렸는데요
재호가 왜 현수를 아까워하고 아꼈는지는 분명하다. 고아원부터 함께한 병갑과는 다르다. 병갑은 무조건적으로 재호를 좋아하고 무해하다. 하지만 그라고 뒤통수를 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재호는 늘 뒤통수를 조심하라고, 뒤를 돌아보며 살라 하지 않았나. 병갑이 현수를 꼬마 새끼, 짭새 새끼라며 부르며 질투하고, 회장 자리에 앉아보면서 히히덕거리는 순진한 힘에 대한 로망은 빤히 보이니까 괜찮다. 병갑이 정말 재호를 아끼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던 건 삼촌이 재호를 죽이려고 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놀라지 않았을 때였다. 별스럽지 않게 면회를 와선 뒤늦게 삼촌이 널 죽이려고 했다며 재호의 뒤통수에 대고 말하는 장면. 아, 이래서 병갑이와는 안 되겠구나 했다. 만약 재호가 잘못됐어도 지금처럼 침착할 수 있었을까. 훌쩍거리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현수가 재호의 뒤통수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병갑은 늘 한 박자 늦고 어딘가 빈틈이 있다. 재호는 병갑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야속하게도 마음이 수평을 이루는 사이는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병갑의 마음이 재호보다 훨씬 깊고 무거운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나 상황이냐, 앞통수냐 뒤통수냐
<불한당>은 내게 믿음에 관한 영화다. 그 안에 사랑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지만 <무뢰한> 이후에 믿음의 씁쓸한 얼굴이 떠오르는 영화다. 누구나 거짓말을 하고 누구나 뒤통수를 칠 수 있다. 신뢰가 필요하다는 말은 역으로 현재 세상의 기본값이 거짓말과 뒤통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뢰한>은 <불한당>과 비교하면 그나마 해피엔딩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비참한 삶을 살고 있지만 재곤과 해경은 살아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서로를 완전히 믿진 못했다. 재곤은 해경을 속일 힘과 집요함이 있었고 혜경은 속일 수는 있지만 끝까지 모질지 못했다. 그에게 칼을 꽂아도 치명상에 이르지 못한다. 재곤은 혜경을 찾아가 변명도 하고 믿음을 저버린 걸 나름의 방식대로 속죄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게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다. 해경의 복수는 바들바들 떨면서 그에게 칼을 꽂는 것이고, 재곤의 속죄는 그 칼을 그대로 맞고서도 그녀의 새해 복을 챙기는 것이다.
그러나 <불한당>은 다르다. 현수와 재호는 둘 다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다. 인정사정없이 칼을 꽂고 목을 조르고, 얼굴을 뭉개고 총을 쏜다. 재호의 배신은 순순히 넘어가기 힘들다. 다른 건 몰라도 부모님은 건드리는 게 아니지 않나. 재호가 현수를 감는 방법을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다. 하나뿐인 어머니를 아끼는 현수를 알고도 완전히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려면 어머니의 죽음쯤은 감수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오열하는 현수를 보던 재호의 얼떨떨한 표정이 인상 깊다. 마치 "그렇게까지 괴롭고 슬퍼할 일인가" 싶으면서 약간은 잘못했나 싶은 표정.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의 죽음으로 현수가 심지어 신분을 드러내는, 평생 재호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믿음을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비밀과 속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게, 가족을 그렇게 아낄 수 있다는 게 재호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재호의 마음도, 어깨도 무거워진다. 우리만 생각한 건 아니었겠지. 그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그 생각.
이렇게 어려운 건 현수 네가 처음이야
재호는 착실히 판을 짜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서 원하는 것들을 이뤘다. 수많은 사람들이 곁에 왔다 가면서 세워놓은 방법이었다. 이제 현수도 곁에 있고 고병철 회장도 사라졌다. 살기 위한 일이었을 뿐 지겹고 피로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현수에게는 마지막까지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수의 목소리가 여느 때와 다른 게 분명한데도, 주변의 공기도 날씨도 다른데도 함정에 걸어 들어갔다. 병갑을 직접 명패로 때려죽이면서도 현수가 복수를 하고 있구나, 내 손으로 복수를 하게 하는구나 했을 것이다.
묘하게 밉고 묘하게 미워할 수 없다
재호의 병 주고 약 주고(어머니는 돌아가시게 하곤 장례식 비용과 마무리는 도와주는) 식의 행동을 알게 된 후, 현수는 재호를 이상하게도 많이 배려해 준다. 일찌감치 어머니를 죽인 사실을 얘기해서 자신을 죽일 기회도 주고, 경찰들로부터 피할 수 있게 작전을 모조리 바꿔버린다. 재호 역시 자기 한 몸 지키기 바쁜 와중에도 현수가 곤경에 처하자 다가와서 도와주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재호를 천 팀장이 차로 받아버릴 때는 순간 이 영화의 악역이 천 팀장이었나 싶게 느껴질 정도다. 하긴, 천 팀장이 제일 못된 사람은 아니지만 제일 야멸찬 사람이긴 하다. 모든 걸 알고도 원하는 걸 위해서만 움직이는 사람. 죄책감 같은 건 스스로 괴롭기만 하고 당하는 놈이 바보라고 하더니 그럼 이제 누가 바보인가. 얼마나 악역인지는 재호의 웃음소리 뒤에 현수가 천 팀장에게 박아 넣은 총알 소리를 세어보자.
현수가 될 수도 있었지
재호와 현수를 보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안타까워진다. 재호가 현수의 어머니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아니 현수가 원하는 대로 감방으로 입학하지 않고 취직을 했다면, 재호가 오세안 무역 사람이 아니고 현수가 경찰이 아니었다면, 재호가 가족애라는 걸 공감하거나 현수가 좀 더 솔직하지 않았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 것이다. 현수가 바라던 대로 취직을 했다면 회를 먹으면서 영화 시작과 동시에 머리에 총알이 박혔을 것이고 오열하면서 홀로 남은 쪽은 어머니였을 수도 있다. 재호가 현수의 어머니를 알뜰히 챙겨줬다면 어머니를 핑계로 현수를 움직이게 했던 천 팀장이 무슨 짓을 했을지도 알 수 없다. 만약 뭔가 달라졌다고 해도 결과가 과연 안타깝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다.
처음에는 현수 입장에서 재호를 원망했다. 하고많은 방법 중에 꼭 어머니를 죽이는 방법이었어야 했을까. 좀 더 솔직할 순 없었을까.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으면 너를 죽였어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 번도 누굴 믿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말이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나를 믿는다고 말할 때마다 괴로웠다고도. 천 팀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이야기했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을 입도 이해는 간다. 경찰인 걸 속이는 것과 어머니를 죽였다는 점을 속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말했다 하더라도 현수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재호가 밝히는 순간 현수는 세상에 홀로 버려지게 된다. 차라리 끝까지 몰랐으면 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영화를 보고 나선, 현수에게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과연 현수가 재호의 숨을 끊었을까 싶었다. 총도 맞고 차에도 치어 치여 움직이지도 못하는 재호의 고통을 줄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는 끈질기니까 살아남을 순 있겠지만 어차피 이젠 함께할 수가 없다. 현수와 재호는 정말 모든 걸 그만두고 버리고 떠날 용기는 없었다. 재호가 다시 감방에 잡아넣는다고 치면 지난날처럼 감방을 주무르며 지낼 수 있을까. 또 나온다 한들 다시 이 일에서 손을 뗄 수 있을까. 현수는 이 일을 계기로 경찰을 그만둘 수 있을까. 현수는 모든 것을 재호에게로 돌린다. 이 모든 상황도, 사람들도, 시간도. 사람들도 역시 상황을 믿을 테니까. 재호의 손에 쥐여준 그 총을 믿을 테니까.
마지막 장면의 현수의 표정은 춥다. 늦은 후회와 밀려오는 공포와 두려움에 허여멀건 하게 질려있다. 굳이 손으로 재호의 숨통을 막을 필요가 있었을까. 여태까지 잠입을 위해 때리고 죽였던 수많은 사람들과 재호는 다르다. 의미가 생기고 믿어버리게 됐다. 차라리 그가 알아서 고통받도록 그대로 두었다면 적어도 죽음은 현수의 탓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죽이고 믿음을 저버린 복수는 현수를 스스로 세상에 홀로 버려진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현수가 재호를 덮었던 손을 늦지 않게 놓아버리고 뒤도 돌아버리지 않고 걸어갔으면 어땠을까. 그 빨간 스포츠카가 비어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리고 들이마시는 재호의 숨은 인셉션의 팽이처럼 마지막 숨인지 계속되는 숨인지 알 수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영화는 불한당이고, 나쁜 놈들의 세상이다. 현수는 재호를 죽게 함으로써 불한당이 되고, 재호의 마음을 이해한 채로 살아가게 됐다.
여담이지만 <무뢰한>에서 목적을 위해 믿음을 뒤로했던 형사 재곤은 <열혈 사제>에 가서는 신부가 되어 "너에게 말한다. 77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역대급으로 성장한 인내심과 믿음을 보여주었다. <불한당>의 피와 눈물, 배신감과 불안, 슬픔과 두려움에 젖은 경찰 현수는 재호와의 사이에서 용서가 물 건너가 버린 게 마음 아프기도 하다. 인생이 그런 걸지도 모른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용서를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내 안에 살아있던 그 사람을 죽은 사람처럼 사라지게 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부정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것이다. 언제 봤다고 대뜸 자기라고 부를 때였는지, 처진 어깨로 등 뒤에 칼이 있는지도 모르고 감방 복도를 걸어갈 때였는지, 출세하기 한참 전에 낡아빠진 사무실에 데려가 사람을 믿지 못하는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때인지, 알면서도 자기가 불러들인 죽을 자리로 들어오는 초연함 때문인지, 혹은 언제든 총을 쏠 수 있던 사람이 자신 앞에서는 결국 총을 제대로 겨누지도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인지. 다만 현수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차마 총을 쏘지 못하고, 손을 떼지 못하는 그 순간에 여실히. 그 마음이 미안함 뿐만이 아니었다는 걸. 어둠 속에서 느낀 모든 것들이 날이 밝아오면서 밀려올 때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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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단하되 느린 '용들의 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적군에게 살해당한 후 마침내 내전 '용들의 춤'을 개시하기로 결심한 '라에니라 타르가르옌'(에마 다시). 하지만 그녀는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다. 남편 '다에몬'(맷 스미스)의 독단으로 인해 칠왕국의 비난이 그녀에게 쏠려 버린 것. 심지어 흑색파 가신들마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통치력과 리더십에 의문을 품고, 라에니라는 점점 곤경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전투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한다. 가장 든든한 조언자이자 타르가르옌 가문의 큰 어른인 '라에니스 타르가르옌'(이브 베스트)이 녹색파 최강의 드래곤 바가르와 그 기수 '아에몬드 타르가르옌'(이완 미첼)에게 공격당해 사망한 것. 이에 라에니라는 결단을 내린다. 그녀는 타르가르옌 가문의 모든 서자를 불러 모은다. 주인이 없는 드래곤에게 새 주인을 찾아주고, 단기간에 전력을 강화해 전세를 뒤바꾸기 위해서.
저조한 흥행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 후속작이자 프리퀄로 기획된 <하우스 오브 드래곤>. 시즌 1의 흥행은 놀라웠다. 첫 회부터 1000만 명 이상의 시청자를 기록했고, 평균 시청률도 회당 약 1,000만 명 이상을 유지했다. 시청률만 높은 것도 아니었다. 제80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TV 드라마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고,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에서도 9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2년 만에 돌아온 <하우스 오브 드래곤>의 두 번째 시즌은 실망스럽다. 당장 수치가 시즌 1에 못 미친다. 시즌 2의 첫 회는 약 780만 명의 시청자를 기록했다. 시즌 1 첫 방영 당시의 시청자 수보다 약 22% 감소한 수치다. 평균 시청률도 낮아졌다. 시즌 1의 마지막 화 시청률은 930만 명에 달했는데, 시즌 2 마지막 에피소드는 890만 명에 그쳤다.
재미와 완성도도 시즌 1에 미치지 못한다. 다음 시즌을 위한 징검다리라는 기획의 한계가 결정적인 이유로 보인다. 이번 시즌은 기존 인물들의 갈등을 일단락하고, 새 캐릭터를 소개하며 다가올 내전, '용들의 춤'을 위해 판을 까는 데 집중했다. 그 대가는 컸다. 캐릭터가 많다 보니 응집력이 약해졌고, 기승전결도 명확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하우스 오브 드래곤> 시즌 2는 시즌 1이 키운 기대감을 미처 이어가지 못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해
물론 <하오스 오브 드래곤> 제작진의 선택도 일견 이해는 된다. <왕좌의 게임> 본편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최선의 노력이었기 때문. <왕좌의 게임>은 시즌을 거듭할수록 혹평받았다. 캐릭터의 붕괴가 핵심 원인이었다. 외견상 <왕좌의 게임>은 판타지이나, 그 본질은 정치극 혹은 군상극에 가까웠다. 즉, 수많은 캐릭터가 자기 목표를 위해 이합집산하며 펼쳐지는 갈등과 대립,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재미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왕좌의 게임> 후반부는 스케일을 키우다가 각 캐릭터의 매력을 놓쳤다. 칠왕국의 내전, 밤의 왕과의 전쟁에만 초점을 맞출 뿐 각 캐릭터의 행적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 못했다. 마지막 시즌에서는 모든 캐릭터가 붕괴됐다는 평이 나올 정도로. '대너리스'(에밀리아 클라크)는 불과 한 회만에 타락해서 수많은 민간인을 살해했고, 예언 속 영웅인 '약속된 왕자'로 꾸준히 암시된 '존 스노우'(킷 해링턴)도 본인 역할을 잃었다.
그래서일까?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본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애쓴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각 인물의 서사를 어느 정도 마무리한다. 그 중심에는 흑색파의 리더인 라에니라와 녹색파의 기둥인 '알리센트'(올리비아 쿡)가 있다. 시즌 1에서 그들은 모성애라는 같은 이유 때문에 충돌했지만, 시즌 2에서는 같은 문제에 대처하는 상이한 방식 때문에 갈등을 빚는다.
어머니로 남거나, 여왕으로 거듭나거나
자기 아들들을 지키기 위해 왕좌를 노렸지만, 전쟁만은 피하려던 알리센트와 라에니라. 내전이 시작된 후에도 두 여성은 비슷한 곤경에 처한다. 전례가 없는 여성 정치인의 통치에 자꾸 분란이 생기니까. 알리센트는 왕대비로서 정국을 주도하려다가 오히려 두 아들에게 권력을 빼앗긴다. 라에니라도 휘하 영주들을 통제하지 못한다. 전쟁에 나선 적도, 칼을 휘둘러 본 적도 없는 여왕의 지시에 그들이 끊임없이 반기를 들기 때문.
그러나 난관을 뚫는 방식은 대조적이다. 알리센트는 정치인이기 이전에 어머니다. 그래서 왕의 어머니라는 점을 내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 한다. 권력을 빼앗기고, 녹색파 내부의 갈등이 커져도 알리센트는 모성애와 가족애에 호소한다. 일례로 장남이자 왕인 '아에곤 2세'(톰 글린카니)와 차남이자 섭정인 아에몬드가 서로를 죽이려 할 때, 그녀는 정치적 거래를 이끌어 내지 않는다. 그저 어머니로서 두 아들의 싸움을 말리려 한다.
반면에 라에니라는 점차 여왕으로 거듭난다. 자기 권위와 권력이 타르가르옌 가문의 장녀라는 점에서 비롯함을 돌파구로 삼는다. 특히 타르가르옌 가문이 드래곤 혈통이라는 사실에 착안해 가문의 서자들, '드래곤의 씨'를 적극 활용한다. 장남 '자캐리스'(해리 콜렛)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드래곤을 길들인 이들을 선별해 전력을 강화한다. 또 자신이 타르가르옌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공표하는 도구로도 이용한다.
이 차이점은 드라마를 풍성하게 만든다. 작품 외적으로는 여성들이 현실의 역경에 맞서는 여러 방법과 겹쳐 보인다. 라에니라는 조금 더 현대적이고, 알리센트는 비교적 전통적인 여성이니까. 작품 내적으로는 그들의 선택을 옳고 그르다고 평가할 수 없어서 더욱 흥미롭다. 원작에서 두 여성은 자기 가치관과 반대되는 결말을 맞이해야 한다. 라에니라는 승전하고도 여왕이 되지 못하고, 알리센트는 모든 자식을 잃을 운명이니까.
확실한 교통정리
두 여성이 정해진 비극으로 나아갈 것이 정해졌듯이, 다른 캐릭터들의 서사도 전면전을 앞두고 방향성이 명확해진다. 일례로 녹색파의 이합집산이 본격화된다. 특히 아에곤 2세와 아에몬드의 갈등이 두드러진다. 섭정 자리에 만족하지 못한 아에몬드는 형을 죽여서라도 왕좌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그로 인해 위기에 처한 아에곤은 수도인 킹스랜딩을 떠날 준비를 하며 다음 시즌에서 녹색파가 처할 위기를 암시한다.
독보적인 사고뭉치인 다에몬의 서사도 마침내 정리가 된다. 그는 왕좌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한 인물이었다. 형이자 왕인 '비세리스 1세'의(패디 콘시딘) 명령을 거부하고 정복전쟁을 벌일 정도였다. 시즌 2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여왕이자 아내인 라에니라의 장악력이 흔들리자 왕이 되겠다는 야욕을 곧바로 드러낸다. 드라마는 욕망덩어리인 그가 어떻게 욕심을 버리고, 라에니라를 여왕으로 인정했는지를 인상적으로 펼쳐 보인다.
특히 이 부분은 본편과의 연결고리라서 더욱 눈에 띈다. 다에몬은 여러 환상과 암시를 본다. 본인은 물론 '용들의 춤'에 관여된 모두가 '얼음과 불의 노래'라는 서사시의 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라에니라가 왕좌에 올라야 이 서사시가 비로소 이어질 수 있음을 확신한다. 이는 <왕좌의 게임>이 '티리온'(피터 딘클리지)의 입을 빌려 이야기의 힘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식으로 마무리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이야기의 지평이 넓어지는 지점 또한 인상적이다. 시즌 1이 궁중 암투였다면, 시즌 2는 그 암투가 평민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같이 탐구한다. 그 중심에는 드래곤의 씨 세 명, '휴 해머'(키에론 존 뷰), '울프 화이트'(톰 베넷), '아담 벨라리온'(클린턴 리버티)이 있다. 그들은 전쟁 준비와 식량난 때문에 고통받느니 죽을 각오로 드래곤을 길들이는 데 도전한다. 이는 단순한 권력 투쟁처럼 보이던 '용들의 춤'에 현실감을 더한다.
애초에 가지가 너무 많아
문제는 캐릭터가 너무 많은 나머지 구심점이 약하다는 것. 전개 속도를 고의적으로 늦추면서 캐릭터를 깊이 개발하고 긴장감을 구축했지만, 녹색파와 흑색파 모두 사분오열하다 보니 전반적으로 난잡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다음 시즌을 앞두고 가지치기는 확실히 했는데, 애초에 가지가 너무 많다 보니 나무가 좀처럼 깔끔해지지 않은 셈이다.
무엇보다도 방점을 찍어줄 클라이맥스의 부재가 아쉽다. 물론 중간중간 등장한 드래곤들의 전투는 분명 놀라운 스펙터클이다. 본편에서는 드래곤이 일방적으로 군대를 학살하는 묘사가 대다수였고, 드래곤끼리 싸우는 장면은 마지막 시즌 한 에피소드에서만 잠시 등장했다. 그에 반해 이번 시즌은 거대한 드래곤 세 마리가 뒤엉키면서 싸우는, 그 자체로 전율이 이는 신선한 볼거리를 선사했다.
하지만 드래곤의 전투가 중반부에만 등장하다 보니 시즌을 끝맺었다는 느낌은 덜하다. 여러 캐릭터의 서사가 전쟁이라는 종착점으로 모였음을 시각적으로 각인시켜 주는 장면이 부족한 것. <왕좌의 게임>이 매 시즌 후반부마다 결정적인 전투 시퀀스를 배치해 시즌을 명확히 끝맺은 것과는 사뭇 다른 그림이다. 차라리 마지막 화에 전투씬을 짧게라도 보여주면서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게 어땠을까 싶다.
어쩌면 드라마 기획의 근본적인 한계와 과욕이 결합된 결과이기도 하다. 특히 원작 소설의 형식이 한계로 작용한 듯하다.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근본적으로 더하기의 미덕이 빛나야 하는 작품이다. 원작 자체가 역사서 형태로 쓰였기 때문에 드라마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오리지널 이야기를 삽입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각 캐릭터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려다가 군살이 다소 과하게 붙은 인상이다.
종합적으로 <하우스 오브 드래곤> 시즌 2는 단단하고 풍성한 이야기로 무장한 기초 공사, 시즌 3의 전초전에 그친다. 독립된 작품으로 본다면 시즌 1로 인해 높아진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못한 속편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향후 두 시즌의 만듦새에 따라 더 인상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어벤져스>를 위해 완성도를 희생한 <아이언맨 2>와 유사한 위치인 셈이다.
Acceptable 무난함
드래곤보다는 사람에게 주목한 '용들의 춤' 기초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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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레전드 뮤직 예고편
"역대 최고 훌륭한 뮤지컬 음악!" 감미로운 선율과 따뜻한 로맨스가 담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레전드 뮤직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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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키퍼스> 메인 예고편
고립된 섬에 나타난 시체와 금괴
그날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육지와 동떨어진 스코틀랜드의 작은 무인도.
이 섬의 등대를 관리하는 ‘토마스’, ‘제임스’, ‘도널드’는
난파된 보트에서 남자의 시신과 금괴가 든 나무상자를 발견한다.
시신을 없애고, 금괴를 나누어 가지기로 한 세 사람.
그러나 상자를 찾아 낯선 사람들이 섬에 나타나고,
사건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100년간 풀리지 않은 ‘그날’의 미스터리
숨겨진 진실이 밝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