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08-16 14:01:55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뒤섞인 난맥상
<행복의 나라>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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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승패를 가리는 장소라고 믿으며 각종 꼼수와 편법에 능통한 변호사 '정인후'(조정석). 그는 감옥에서 암에 걸린 아버지의 가석방을 약속받자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태주'(이선균) 대령의 변호를 맡기로 결정한다.
군인 신분 때문에 재판 기회가 한 번 밖에 없는 박태주. 하지만 그는 변호인에게 쉽사리 협조하지 않는다. 원칙주의자인 그의 눈에 정인후는 양아치니까. 그가 내란을 사전에 공모했는지, 아니면 위압에 의해 명령을 따랐는지가 재판의 쟁점인 가운데 박태주는 거짓 혹은 편법 증언을 요구하는 정인후와 거듭 부딪힌다.
한편, 10.26 사태를 계기로 박정희의 후계자가 되어 권력을 잡겠다는 야욕을 품은 합수부장 '전상두'(유재명). 박 대령 재판을 자기 발판으로 삼기로 결정한 그는 실시간으로 재판관에게 쪽지를 전달하고 재판을 도청 및 녹음하며 정인후의 노력을 물거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무위에 그친 역발상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경호원들은 박정희 대통령 외 5명을 사살했다. 이 사건의 재판을 다룬 <행복의 나라>는 시간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어중간하다. 사건의 전후사정이 이미 영화화돼 대성공을 거뒀기 때문. <남산의 부장들>은 김재규의 동기를, <서울의 봄>은 사건 이후 12.12 군사반란을 영화화했다. 심지어 둘은 장르도 달랐다. 전자는 누아르를, 후자는 전쟁 영화의 속성을 강조했다.
이에 <광해, 왕이 된 남자>와 <7년의 밤>을 연출한 추창민 감독은 역발상을 했다. 10.26 사태나 주동자인 김재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상대적으로 관심을 못 받은 공범 박흥주 육군 대령과 그를 변호한 태윤기 변호사에게 주목했다. 특히 그들의 인생사를 각색해 극명하게 반대되는 삶을 살아온 두 인물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하게 되는 과정을 법정물로 포장해 감동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행복의 나라>는 역발상의 힘을 스스로 포기했다. 신념과 규칙에 충실한 삶 대 생존을 위해 유연해야 하는 삶이라는 대립 구도를 깊게 파고드는 대신 쉬운 길을 간다. 무조건적인 악역 전두환을 전면에 내세워 스케일을 키우고 군사 정권과 민주 시민의 대립을 강조한다. 문제는 같은 이야기로 천만이 넘는 관객의 뇌리에 각인된 선배들이 있다는 것. 결국 노선을 바꾼 순간 <행복의 나라>는 자기 자리를 잃고 말았다.
거대한 사건 속 개인적인 이야기
장르만 놓고 보면 <행복의 나라>는 <변호인>과 비슷해 보인다. 둘 다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법정물이니까. 하지만 두 영화의 지향점은 전혀 다르다. <변호인>은 분노를 연료로 삼아 달리는 작품이었다. 무고한 피고인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군사정권의 무도함과 그에 맞서는 변호인의 투쟁. 이 명확한 선악 구도에 송강호라는 배우의 연기력을 더하니 마치 들끓는 불과도 같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행복의 나라>는 다르다. 선악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가운데,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 보고 있는 변호인과 피고인의 관계성이 핵심이다. 살인을 저지른 피고인의 행위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두 주인공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정인후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공을 꿈꾸며 판검사가 되려다가 실패한 변호사다. 법정은 옳고 그름을 가르는 곳이 아니라 이기고 지는 곳이라는 대사에는 그의 인생이 축약되어 있다.
그 반대편에는 박태주 대령이 앉아 있다. 그는 중앙정보부 비서실장인데도 판자촌에 집이 있을 정도로 청렴한 군인이다. 요직에 있지만 권력을 마다하고 최전방 전출을 거듭 요청한 참군인이기도 하다. 영화는 10.26 사태를 매개로 완전히 다른 두 삶을 충돌시킨다. 배경은 대한민국의 향배를 뒤바꾼 거대한 사건이지만, 정작 내용은 철저히 개인적인 이야기인 셈이다.
감독의 전작인 <광해, 왕이 된 남자>와도 유사하다. <광해>도 중심 사건은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한 정치극이었다. 하지만 정작 주된 내용은 개인적인 이야기였다. 충(忠)으로 무장한 유학자 '허균'(류승룡)이 광해군으로 위장한 광대 '하선'(이병헌)과 지내면서 자기 신념과 사상의 문제를 깨닫고 새 나라와 새로운 왕을 꿈꾸게 되는 티키타카야말로 천만 관객을 휘어잡은 원동력이었다. <행복의 나라>도 마찬가지다.
두 인생의 충돌로 빚은 법정극
전혀 다른 삶의 궤적과 신념을 지녔다 보니 정인후와 박태주의 첫 만남은 엉망이었다. 정인후는 철저한 원칙주의자 군인 박태주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관등성명, 상명하복이 권위주의의 발현에 불과하다며 비웃는 사람이니까. 박태주도 다르지 않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법정에서 온갖 편법을 써가며 승리를 추구하고, 정의가 아니라 돈과 이익을 위해 변호를 맡는 정인후는 단지 변호사일 뿐, 신뢰할만한 변호인이 아니다.
1차 공판만 해도 정인후는 자기 의도대로 재판에 임한다. 군인이니 군법에 따라 단심제 군사 재판을 받겠다는 박태주. 정인후는 그를 설득하는 대신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한다. 군사 재판은 받지만, 단심제는 3심제로 바꿔달라며 위헌심사요청을 한다. 위헌심사요청이 기각되자 재판관을 교체해 달라며 재판을 여론 싸움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2차 공판부터는 다르다. 정인후는 점차 피고인의 입장과 신념이 녹아든 전략을 수립한다. 군인에게 명령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저 명령을 따른 박태주의 책임을 부정하는 식이다. 대통령을 살해한 후 정보부가 아니라 육군본부로 가자는 의견을 박태주가 냈다는 진술에 착안해 내란죄 혐의를 부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태주도 정인후를 만나 변한다. 동료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재판을 포기하려던 그. 그는 군인이고 원칙주의자면 규칙대로 재판장에서 최선을 다해 싸워서 책임을 지라는 정인후의 일갈에 마음을 다잡는다.
이는 법정극 특유의 쾌감으로 이어진다. 감정 호소로 일관한 <변호인>과 달리 <행복의 나라> 속 재판씬은 판세가 거듭 뒤집히다 보니 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에 더해 흐름을 가져오려고 머리를 쥐어짜면서 변호인과 피고인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한 팀이 되는 이야기가 병행되니 복합적인 재미가 만들어진다. 진정한 인권변호사가 되어가는 정인후를 보면서 박 대령이 웃음과 하이파이브로 화답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익숙한 맛으로 돌파하는 고구마
정인후와 박태주가 한 팀이 되어가는 과정은 자칫 고구마일 수 있다. 비록 역사를 반영한 것이기는 하나, 박태주라는 캐릭터가 다소 과하게 올곧은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 자기는 죽고, 아내와 두 아이만 남아 험난하게 살아야 할 상황에서도 그는 자기 신념을 좀처럼 꺾지 못한다. 상관도 못 버리고, 명령에 충실한 군인이라는 자부심도 저버리지 못하고, 대통령을 살해했지만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도 내려놓지 못한다.
추창민 감독은 고구마를 익숙한 맛으로 뚫어버린다. 정인후의 아버지와 박 대령을 겹쳐 보이게 한다. 개척 교회 목사로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돕다가 수감되고, 가족을 돌보지 못한 아버지. 정인후는 자기 신념대로 살아야 하는 아버지를 머리로는 받아들이지 못해도 가슴으로 이해해 간다. 그리고 이 과정은 그가 박태주를 만나는 장면과 이어진다. 그 덕분에 자칫 답답할 뻔한 전개는 가족애로 변환되어 더 큰 감동을 자아낸다.
물론 다소 양식적인 스토리텔링이기는 하다. 사건과 무관한 인물을 통해 시대적 사건에 접근하면서 특히 감정선을 자극해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유발하는 전형적인 한국 영화의 화법이니까. 야매 변호사였다가 사건을 맡은 후 진정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성장 서사는 정인후나 <변호인>의 송우석이나 다를 바 없다. 또 정인후와 아버지의 관계성도 이러한 맥락에서는 신파를 의도한 구조 배치로 보일 수밖에 없다.
과욕과 함께 무너지다
하지만 과욕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행복의 나라>는 이내 본연의 색을 잃는다. 의외로 초중반부까지 이 작품은 10.26 사태의 배경이나 실체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부마 민주 항쟁이 대학살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김재규의 결단 정도로 언급할 뿐이다. 애초에 핵심 플롯 자체가 정인후와 박태주 둘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이는 의도적인 공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12.12 군사반란을 필두로 실제 사건에 가까워진다. 그러니 역사적 맥락의 공백이 서서히 두드러지면서 영화의 만듦새도 무너진다. 배경이어야 할 사건이 돌연 주인공이 되다 보니 묻어 두었던 의문점이 한 번에 터져 나오기 때문. 일례로 중반부까지만 해도 매력적이었던 입체적인 인물상은 중심점을 잃고 흩어진다. 정인후의 경우 단지 박태주를 살리려는지 민주주의 투사가 되려는지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박태주도 명령에 의한 피해자인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투사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가 청렴한 군인이고 신념에 맞는 명령을 따랐으니 민주주의 투사로 여겨야 하는지, 군사 정권에 협력한 군인을 살리는 게 과연 민주주의를 위한 항거인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10.26 사태의 본질과 맥락을 외면한 채로 시작한 미시적인 이야기를 무리하게 거시적으로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모양새다.
이에 더해 장르적으로도 균형을 잃는다. 12.12 군사반란이 시작되는 순간부터는 <서울의 봄>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서울의 봄>처럼 쿠데타 과정을 자세하거나 긴장감 넘치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결국 10.26 사태는 지우고 12.12 군사 반란을 부각한 선택은 법정극이라는 장점도 희석시키고, <행복의 나라>만의 개성을 깎아먹는 악수가 되고 만다.
전두환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마지막으로는 극 중 전상두, 곧 전두환을 다루는 방식도 <서울의 봄>과 비교를 피할 수 없다. 황정민의 전두광과는 달리 유재명의 전상두는 상대적으로 일차원적이다. 전자는 들끓는 성공욕,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보스 기질, 위기 때마다 빛나는 간교함이 어우러진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였다. 반면에 전상두는 그저 권력을 잡기 위해 살인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절대악으로만 묘사된다.
그 결과 전상두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영화는 편의적으로 느껴진다. 전두환이 의문의 여지없는 악역이기는 하나, 그를 덮어두고 비난하면 메시지가 뻔해지고 재미도 덜해지기 때문. 정인후가 전상두 면전에서 욕을 하는 골프장 시퀀스가 통쾌하거나 희열이 느껴지는 대신 지루하고 늘어진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슈퍼맨처럼 압도적인 힘을 지닌 히어로를 잘못 활용해 액션의 긴장감과 쾌감을 모두 놓친 <저스티스 리그>와 비슷하다.
그렇기에 <행복의 나라>가 전두환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포기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유독 짙다. 악명 높은 한 인물 대신 비교적 덜 알려진 이들의 서사에 우직하게 집중했다면 한국 현대사를 다룬 이전 시대극들과는 또 다른 한 편의 드라마가 탄생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조정석과 이선균,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두 주연의 연기도 함께 빛이 바래기에 더욱 안타깝다.
Acceptable 무난함
시대의 그림자에 가려진 개인을 비추기에는 조명이 너무 약하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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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즈데이 2 | 우리네 민낯을 들추는 팀 버튼의 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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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웬즈데이>는 한국에서 인기가 없을까?
넷플릭스에는 '빅3'라 불리는 시리즈가 있다. <오징어 게임>, <기묘한 이야기>, 그리고 <웬즈데이>다. 세 작품은 올해 일제히 새 시즌을 공개했거나 공개할 예정이다. 이 중 2번 타자인 <웬즈데이>는 기대한 성적을 내고 있다. 공개 첫 주에 전 세계 93개국 넷플릭스 TOP 10에 진입했으며, 이 중 92개국에서 TV 시리즈 부문 1위를 차지했다. 딱 한 국가, 한국만 빼고.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예상 못 한 결과는 아니다. 시즌 1도 한국에서의 최고 순위는 3위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실망스러우면서도 흥미로운 결과인 것도 사실이다. 팀 버튼 감독, 제나 오르테가, 엠마 마이어스가 방한해 수많은 유튜브 채널에 모습을 비춘 노력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여러 요인이 이유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폭군의 셰프> 같은 경쟁자의 등장도 주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애초에 팀 버튼 감독 영화가 한국에서 크게 흥행하지 못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 그의 수많은 명작은 단 한 번도 300만 관객을 넘기지 못했다.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만이 200만 명을 넘겼을 뿐이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도 130만 명을 동원하는 데서 그쳤다. <웬즈데이>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팀 버튼이 별종을 사랑하는 이유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 팀 버튼의 영화는 대중적으로 흥행하지 못할까? 영화 내적으로 이유를 찾아보자면, 팀 버튼이 유달리 별종에게 애정이 많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은 대체로 기괴하다. 두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가위가 있거나, 겉모습은 멀쩡해 보여도 괴상한 실험을 일삼는 초콜릿 공장 주인이거나, 이상한 화장을 한 채로 정신이 반쯤 나간 모자 장수인 식이다.
하지만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창백한 얼굴, 주황색 폭탄 머리, 기이한 색의 렌즈를 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모자 장수'(조니 뎁)는 누가 봐도 미치광이다. 하지만 그의 과거를 알고 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는 붉은 여왕의 폭정에 의해서 소중한 이들을 잃어버린 뒤로 미치광이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즉, 모자 장수의 기괴한 겉모습에는 그를 '미쳤다'라고 규정하는 세상이야말로 미친 거라는 역설이 깃들어 있다.
'윌리 웡카'(조니 뎁)도 마찬가지다. 그는 거대한 초콜릿 공장 안에서 칩거하는 사회 부적응자다. 하지만 그의 괴팍함과 폐쇄성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보여준다. 엄격한 아버지가 꿈을 억압당했던 기억으로 인해 웡카는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잊어버린 외톨이로 자라난 셈이다. 즉, 윌리 웡카라는 별종은 사회적 관계에는 서툴러도 자기만의 세계를 열정적으로 지켜내는 예술가의 고독한 초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별종들도 다르지 않다. '에드워드 시저핸즈'는 가위로 된 손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안을 수 없었다. <유령 신부>의 '빅터'도 죽은 자들의 세계에 더 큰 편안함을 느낀다. 즉, 팀 버튼의 작품 세계에서 별종은 단순한 괴짜나 이방인이 아니다. 그들은 획일화된 사회의 폭력에 저항하고, 그 과정에서 생긴 상처를 극복해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팀 버튼의 별종은 다름의 미학을 현현하는 일종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별종을 별종답게
별종을 향한 팀 버튼의 사랑은 <웬즈데이 2>에서도 유효하다. 네버모어의 학풍만 봐도 알 수 있다. 네버모어는 별종들을 사회화하거나, 그들이 학교 밖 질서에 적응하도록 교육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의 능력을 억제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마음껏 사고 치도록 유도하기까지 한다. 철저히 별종이라는 점에 자부심을 품게 하는 게 이 학교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등장인물들이 특정 사건을 거친 뒤에 사회 질서에 알맞은 성인으로 거듭나는 일반적인 학원물의 전개는 <웬즈데이 2>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학기가 끝날 때마다 학생들은 더 별종다워진다. '웬즈데이'(제나 오르테가)만 하더라도 여전히 까칠하고 우울하고 독선적이다. 가족들과의 관계나 친구들과의 관계가 아주 살짝 유해졌을 뿐, 네버모어를 다니기 전이나 후나 그녀의 성격은 크게 차이가 없다.
'이니드'(엠마 마이어스)도 시즌 2 끄트머리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늑대인간의 정체성에 가까워진 모습이 된다. 웬즈데이를 동경하는 신입생 '아그네스'(이비 템플턴)도 다르지 않다. 그녀는 웬즈데이와 친해지려고 패션과 헤어 스타일을 따라 한다. 투명 인간 능력을 활용해 웬즈데이를 집요하게 쫓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웬즈데이는 아그네스를 그저 멸시한다. 마지막 화에서 그녀가 자기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전까지는.
반면에 별종이 안 되려고 발악하는 이들은 오히려 빌런으로 그려진다. 수십 년에 걸쳐 하이드 능력을 제거하려다가 비극을 맞이한 '아이작 나이트'(오웬 페인터)와 '프랑수아즈 갤핀'(프랜시스 오코너) 남매가 대표적이다. 시즌 1에서 가문의 유지를 이어 별종들을 몰살하는 계획을 꾸미고, 하이드인 '타일러'(헌터 두한)를 조종해 사람들을 살해한 '매릴린 손힐'(크리스티나 리치)이 빌런으로 등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별종을 배척하는 사회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 사회에서 별종은 구조적으로 배척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일종의 병목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조지프 피시킨에 따르면 병목 사회는 우리 인생의 고비마다 병목을 설치한 뒤 병목을 통과할 때 성적으로 사람들을 줄 세우는 사회다. 병목 사회에서는 병목을 통과하는 데 유리한 특정 능력만을 고평가하고, 해당 능력의 유무가 사회적 계급을 형성하고 부와 권력을 세습할 수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군과 직위, 원하는 삶의 방식과 추구하는 목표와 가치마저도 획일화되기 쉽다. 이는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자화상에 가깝다. 인생의 고비마다 좁은 병목을 통과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모난 별종은 깎여서 둥글어질 수밖에 없다. 그 길에서 벗어나면 실패자나 패배자로 여겨지며 아예 질서 밖으로 튕겨 나가기도 한다. 자연히 획일화된 사회가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별종을 배척할 수밖에 없다.
아이돌 산업의 특징에서도 병목 사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K팝 아이돌 그룹의 가장 큰 특징은 칼군무다. 모든 멤버가 조금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안무를 약 3분의 무대에서 펼쳐 보여야 한다. 움직임이 과하거나 박력이 부족한 멤버가 있으면 비판의 대상이 된다. 각 멤버의 개성은 통일감 있는 군무 안에서 꽃필 때만 유효하다. 누구 하나 튀지 않고 하나의 부품이 되기를 바라는 정서가 화려한 K팝 무대 위에도 녹아 있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시청자가 보기에 <웬즈데이 2>의 주인공들은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 말라는 일은 전부 다 하고, 좀비를 되살리는 등 온갖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말 그대로 별종들이니까. 그에 반해 별종들을 통제하고 개성을 깎아내려는 빌런들이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져도 이상하지는 않다. 한국인은 후자처럼 성장하고 생각해야 한다고 요구받아 왔으니까.
민낯을 보여주는 거울
물론 별종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시각은 <웬즈데이 2>의 흥행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한국인이 별종을 싫어하지 않을 수도 있고, 더 중요한 요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례로 애초에 한국에서는 <웬즈데이> 같은 기숙사 학원물 판타지의 위력이 크지 않다. <해리 포터> 시리즈 중 단 한 편도 관객 수 450만 명을 돌파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그 방증이다. 이는 <트랜스포머>,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록이다.
또 <웬즈데이 2>만의 특이점이 아닐지도 모른다. 북미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빅3'의 일원, <기묘한 이야기>도 국내에서는 반향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으니까. 그러나 한국에서의 <웬즈데이 2>의 부진을 그저 무시하기에는 그 함의가 너무나도 흥미롭다. 전 세계 주요 국가 중 다양성 포용도가 최하위권인 것으로 알려진 한국 사회의 특징과 문제점을 <웬즈데이 2>라는 거울이 날카롭게 비춰주는 듯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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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부 아래 숨겨진 본질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외모는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칠까?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하고 또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과 접촉하는 우리는 때때로, 혹은 자주 겉모습으로 타인을 판단한다. 성별, 외모, 옷차림 등은 한 사람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우리는 눈에 비친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외모가 내면, 즉 한 사람의 인격에 끼치는 영향은 어떨까? 외모와 신체가 변한다고 해서 과연 그 안의 인격까지 변할 수 있을까? 영화 <내가 사는 피부>는 파격적인 전개와 소재를 통해 피부 외부와 내부의 분열, 그리고 겉모습에 쉽게 현혹되어버리곤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저명한 성형외과의 ‘로베르트’는 수년 전 아내가 교통사고로 인한 심한 화상을 입고 숨진 후, 인공 피부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묘령의 여성 '베라'를 자신의 대저택에 감금해둔 채 24시간 카메라로 감시한다. 늘 피부와 유사한 모습의 전신 바디수트를 입은 채 생활하는 베라는 로베르트가 고안한 인공피부 이식 수술의 실험체다. 그녀는 로베르트가 만들어낸 일종의 피조물로, 그가 사랑했던 아내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다. 로베르트는 베라와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지만 아내를 닮은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며 욕망하고, 끝내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품는다.
하지만 영화는 12년 전 과거로 돌아가며 두 사람 사이의 숨겨진 비밀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뒤로 극심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딸 ‘노르마’와 함께 환자의 결혼식장에 방문한 그는 오랜만에 사람들과 어울리며 즐거워하는 딸의 모습에 기뻐하지만, 그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사라진 딸은 숲속에서 강간당한 채 발견된다. 트라우마 증상이 호전되는 듯했던 딸 노르마는 이 사건 이후 이전보다 더 심각한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다가 끝내 창밖에 몸을 던지고 만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모두 잃은 로베르트의 광기는 극에 달한다. 그는 딸을 강간한 남자 ‘비센테’를 납치해 강제로 성전환 수술을 진행하고, 그의 얼굴과 모든 신체를 바꿔 놓는다. 그리고 완전히 달라진 모습의 그에게 ‘베라’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피부는 인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외피 체계상 가장 큰 조직이다. 때문에 피부는 우리 몸에서 타인에게 가장 많이 ‘보여지는’ 곳이기도 하다. 피부는 일종의 껍데기, 말하자면 영혼이 장착한 의상으로서 세계에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이다. 어떤 이들은 다른 이의 피부를 뒤집어씀으로써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지만, 껍데기가 달라진다고 해서 그 아래에 담긴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피부는 그 아래에 본질적인 것—혈관, 피, 기관, 혹은 정신—을 숨기고 있으며, 동시에 육체와 세계를 가로지르는 경계선의 위치에 있다.
이렇듯 피부는 경계선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접촉의 장이기도 하다. 우리는 피부를 통해 타인과 세계를 접한다. 타인과의 불가피한 접촉과 과격한 충돌 속에서 피부는 벗겨지고, 뒤틀리고, 찢어지고, 절개된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피부는 끊임없이 재생을 반복하며 자아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고 또 재구성한다.
영화는 줄곧 피부를 ‘옷’에 비유하고 있다. 영화 속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양한 옷을 필요에 따라 입고 벗는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옷을 갈아입는다고 해서 옷을 입은 사람의 인격이 바뀌지는 않는다. 옷은 입은 사람의 자신감, 태도, 체감 온도나 활동성 등에 영향을 끼치긴 하지만 그 아래 존재하는 정신이나 영혼을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
영화 속 이전과 너무나 달라진 몸을 가지게 된 비센테가 갈기갈기 찢어버린 옷 조각들은 조각나고 뒤바뀐 자신의 피부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타의로 여성의 몸을 가지게 된 비센테는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지만, 점점 새로운 몸으로 살아가는 것에 순응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에게서 아내의 모습을 보는 로베르트의 마음을 사려고 노력하면서 ‘베라’로서의 삶과 타협해 보려고도 시도한다. 그러나 신문에 실린 단 한 장의 흑백 사진, 자신의 원래 모습이 담긴 그 작고 희미한 사진을 마주한 순간 그는 자신이 '비센테임'을 다시 상기해낼 수밖에 없다. 비록 이전과는 너무나 다른 겉모습일지언정 그 아래 존재하는 '비센테'가 '베라'로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다양한 색과 모양, 무늬를 가진 옷들만큼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역시 제각각 다양한 외형과 인격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음대로 입고 벗기가 가능한 옷과, 바꾸기 위해서는 외과적인 수술이 요구되는 피부는 다르다. 피부는 반半영구적인 것이기에 우리는 더 눈에 보이는 그 모습을 그대로 믿으려 들고 그것에 집착한다. 인간 삶에 있어 외부로 드러난 피부의 형상은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그것의 내면은 표면과 일치하지 않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와 세계를 가로지르는 이 피부의 의미와 본질은 무엇인지 고민해 볼 수밖에 없다. 과연 나와 네가 살아가는 피부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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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가족을 품고 사는 이들의 슬픔과 희망!
서서히 죽어가는 가족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슬프고 힘든 건 없다. 옆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은 물론, 언제까지 이 지난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그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디즈니 플러스 영화 <썬코스트>는 이런 양가적인 감정을 안고 사는 한 가족의 이야기로 삶의 한계에 다다른 이들의 민낯을 보여준다. 미안함, 죄책감, 답답함 등으로 얼버무려져 있는 이들의 복잡한 심경 사이로 명확히 보이는 건 슬픔, 현실, 그리고 작은 희망이다.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게 많은 10대 소녀 도리스(니코 파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오빠를 돌봐야 하고, 아들을 고통을 마주한지 오래되어 매사 신경이 곤두서있는 엄마(로라 리니)의 눈치도 봐야 한다. 호스피스 병원 ‘썬코스트’로 오빠를 옮긴 이후에도 팍팍한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건 파티가 일상인 학교 친구들, 썬코스트에서 만난 아저씨 폴(우디 해럴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오빠와의 이별의 시간은 다가온다.
<썬코스트>는 실제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오빠를 향한 로라 친 감독의 뒤늦은 연서이자, 자신의 성장담이다. 감독은 과거 10대 시절 가졌던 마음을 도리스에게 투영시켜, 오빠를 향한 슬픔과 미안함, 평범한 10대의 삶을 살고 싶었던 양가적인 마음을 드러낸다. 영화는 전자보단 후자에 무게 중심을 두는데, 그도 그럴 것이 도리스는 오빠로 인해 삶이 저당잡혔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도 시청 못 할 정도로 엄마의 압박에 시달리고, 언제나 아픈 오빠가 먼저고, 자신은 뒷전인 상황은 못마땅하다. 아픈 오빠를 위한 희생은 인지하고 있지만, 이를 당연시하는 엄마와 세상은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도리스의 딜레마는 썬코스트에 입원한 ‘테리 샤이보’ 사건으로 이어진다. 2005년 실제 있었던 이 일은 15년간 식물인간 상태로 있던 테리 샤이보라는 여성이 영양 공급 튜브를 제거하라는 법원의 판결에 따라 숨지게 된 사건이다. 테리 샤이보의 부모는 물론, 당시 존엄사를 반대한 이들과 달리, 법원은 그녀가 정상이었을 때 이런 식의 생명 유지는 원치 않는다는 말했었다며 영양 공급 튜브 제거를 청원한 남편의 손을 들어줬다. 윤리적 관점이나 남편의 좋지 않은 행실은 제외하고라도 이 사건은 아픈 가족을 품고 사는 이들이 겪는 현실적 고민과 다른 입장을 표방하는 사회의 목소리가 충돌한 계기로 비친다. 아마 도리스는 남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을 터.
그 마음을 대변하듯 영화는 윤리적, 도덕적 갈등을 떠나 이 비통한 상황을 아는 이는 가족이나 동일한 아픔을 가졌던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극 중 썬코스트 앞에서 테리 샤이보의 생존권을 주장하는 이들이나 학교에서 존엄사의 비윤리적 문제에 대해 논하는 선생님의 이야기보다 비록 테리 샤이보의 생존권 운동에 동참한 강성 생명윤리주의자이나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가진 폴에게 도리스가 마음의 문을 여는 건 이 때문이다.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건 성장이다. 감독은 외형이 아닌 내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며, 학교 졸업 파티가 아닌 유명을 달리한 오빠에게 진심을 전하는 그 순간에 집중한다. 뒤늦은 고백이자 마음이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 다음 발걸음을 뗄 수 있다고 덧붙인다. 더불어 아들의 가느다란 실과 같은 생명줄을 부여잡고 놓지 않으려는 엄마 또한 자식을 떠난 보낸 후 비로서 자신과 딸을 바라보며 또 다른 삶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이렇듯 <썬코스트>는 죽음을 앞둔 가족을 두고 모녀 간의 복잡한 관계와 성장 과정에 집중하지만, 그 깊이가 얕은 건 아쉬운 지점이다. 그동안 응어리졌던 모녀간 관계 해결 부분이 약하다 보니 관계 개선이 급작스럽게 되는 부분 등 작품이 지닌 단점을 메우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영화가 빛을 발하는 건 신예 니코 파커, 베테랑 로라 리니와 우디 해럴슨의 연기다. 니코 파커는 여느 10대 소녀의 말간 모습을 보여주는데, 연기 원숙도를 떠나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로라 리니, 우디 해럴슨은 베테랑으로서 감정의 진폭을 조율하며 극의 분위기를 살리는데 일조한다. 특히 니코 파커는 이 영화로 제40회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미국 드라마) 신인 연기상을 수상했다.
사진 제공: IMDB
평점: 2.5 / 5.0
한줄평: 걸출한 성장 서사는 아니지만 마음에 가닿는 상실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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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끼를 물어버린 최우식
이 글은 영화 [경관의 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 책에 따르면.
무언가를 결심해 새로 태어나는 주기는 꽤 자주 온다.
그것이 매주 월요일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달이 될 수도 있으며, 가끔은 벌써 시작한 지 2주 차에 접어든 새해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 어떤 계기만 있으면, 가까운 시일 내라도 다른 사람이 될 각오를 다지는 날은 온다는 것이다.
다짐의 내용은 사람마다 달라서 확답할 수는 없지만, 뭉뚱그려 말하자면 예전의 모습은 모두 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각오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과 며칠 전이지만 이미 잊고 싶은 과거가 되어버린 작년처럼. 마음속 인생의 암흑기를 품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인물이 영화 [경관의 피]에도 존재한다.
새해에는 외화에 밀리지 않고 박스오피스를 차지하겠다는 한국 영화의 목표까지도 이번 기회에 이룰 수 있을지 기대되는 시점이다.
전형적으로 소비되는 캐릭터들 ;그리고 대사를 먹어버리는 건 왜.
사진출처:다음 영화
딱 뷔페 빕스 같은 영화다.
다른 프랜차이즈 뷔페보다 조금 비싸지만 연어 외엔 머릿속에 남는 것이 없는. 주메뉴로 키워보려 용쓰는 스테이크마저도 가격에서도, 맛에서도 쉽게 대체품을 찾을 수 있는 애매한 위치에 있는 뷔페.
영화의 인물들은 그만큼 전형적이다. 또한 이미 정해진 영화 속 역할을 배우들이 빛나는 연기력을 십분 사용해 관객들의 머릿속에 쑤셔 넣을 뿐이다.
어느 정도 보장된 연기를 보인다는 점에서는 그만큼 편안하고 감사한 영화이지만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정해진 틀 안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기에, 영화는 인물들의 연기 외의 어떤 특이한 점도 기대할 수가 없다. 단 하나도.
분명 좋아하는 배우들이 단체로 나오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채워지지 않아 티켓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순간순간 마음을 스친다.
그리고 내가 영화를 봤던 영화관의 문제였는지. 아니면 몰입을 자꾸 방해하는 티켓값의 원혼 때문이었는지. 저음의 배우들 목소리가 파묻히는. 혹은 대사가 웅얼거리는 것처럼 뭉개지는 지점이 꽤 많이 존재했다. 조진웅의 이름을 서류에 적는 장면이 없었다면 영화의 끝까지 그의 이름을 제대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답답함 덕에,
영화에 대한 만족도는 점점 더 떨어져갔다. 안타깝게도.
입은 옷, 맞는 옷, 어울리는 옷;옷으로 보는 최우식의 성장기
사진출처:다음 영화
최우식 배우는 [기생충]이라는 전작의 무게를 이겨내는 것을 과정이라 생각하고 싶다고 했다. 전작이 흥행 정도를 벗어나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으니. 아마도 최우식은 강남 스타일을 히트시킨 싸이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했겠지.
아무리 정해진 역할이고 그 나물에 그 밥으로 나오는 영화라 해도. 조진웅이라는 배우의 벽은 너무도 높았다. 최우식 배우는 전작의 무게와 함께 투톱 영화에서 자신의 대척점에 서 있는 역할인 조진웅도 넘어야 했다. 그리고 결과는 처참한 쪽에 가까웠다.
아주 잠깐 스치는 과거의 파편들로는 아무리 모아봐도 최민재의 캐릭터를 완성하기엔 역부족이고, 영화에서 유일한 입체적인 인물인 주제에 정체성의 혼란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보다는 흡수되어버린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것도 주위에 떠밀리고 영향을 받아서.
캐릭터의 설명이 그다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최민재의 정체성은 옷으로 대변하는 것만 같다.
초반의 최민재는 누가 봐도 경찰, 혹은 (자신이 선이라고 부르는) 선에 가까운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박강윤(조진웅)을 만나면서부터 어색해 보이는 수트를 입게 된다. 자신에게 맞는 옷이 아니라는 말을 내뱉는 동안에는 그가 입은 양복은 딱 그만큼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점점 최우식은 그 어색하다고 생각했던 옷에 익숙해져 다른 경찰들과 차별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중간에 아주 잠시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편의 옷을 입게 되지만. 다시 돌아온다.
이것이 그의 확실한 정체성 시프트(Shift)와 함께 보였다면 좋았겠지만. 갈 곳 잃은 최우식은 얕은 고뇌의 연못에 빠져 익사해버리고 말았다. 멋있는 옷을 입은 채로.
선과 악은 과연 무엇인가. ;과연 박강윤은 행복할까?
사진출처:다음 영화
박강윤은 영화 내내 미끼에 불과한 삶을 산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그 삶에 진절머리가 난 덕분에, 그는 요트를 타고 낚시를 하는 여생을 꿈꾼다. 자신이 판을 짜고 자신이 낚을 수 있는 만큼만 낚아도 되는 삶.
현재 박강윤의 삶은 미끼인 주제에 카드 돌려 막기까지 하고 있는 꼴이다.
언제나 발등의 불만 겨우겨우 꺼뜨리며 제자리에서 동서남북으로 방방 뛰고 있다.
20년을 갚아나가야 겨우 자신의 것이 되는 요트의 값만큼이나. 그의 인생은 이 지긋지긋한 고리를 한 번에 끊거나 20년에 걸쳐 조금씩이라도 청산을 하지 않으면 계속 제자리인 셈일 것이다.
박강윤은 마지막에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준 사람이 생긴 것처럼 조금은 행복해하는 미소를 짓지만. 개인적으로는 행복한 결말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삶은 결국 비극으로 흐를 뻔한 그들의 인생에서 아주 잠깐 있는 빛나는 날들이다. 마치 박강윤의 집에 있던 그 많던 시계들과 넥타이들이 자신의 힘든 순간을 잠시 잊게 해주었던 것처럼. 결국 빛을 잃고 미끼로서의 매력이 다하면 낚싯줄을 잘라버리면 끝인 것처럼 말이다.
부디 그때가 최대한 늦게 오기를.
그리고 그때가 온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오래 빛났던 반짝이들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마치면서 ;올해 첫 영화
출연진만 보면 완벽한 영화다.
어떤 영화일지 이미 눈에 보이는데도 관객들은 믿고 보는, 혹은 어느 정도의 연기력은 보장될 것을 생각하며 영화관으로 향하기 좋다.
그리고 영화는 말마따나 기본만 하는 영화에서 발전하지 못한다. 섬세한 묘사를 지닌 책 내용을 영화로 옮기는 데 있어 많은 제한이 있었을 것이기도 하고.
뜬금없는 마지막 액션신도 눈에 거슬린다. 조금 더 다듬었다면 차라리 암수 살인이나 극비 수사에 가까운 영화가 되었을 법도 한데.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이 글의 TMI]
1. 새해 들어서 커피를 줄여보기로 했다.
2. 아아가 아닌 뜨아로 바꿨다.
3. 이렇게 졸린 세상을 살고 있었다니ㅠ
4. 대신 진짜 꿀잠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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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몰랐던 세계에 대한 깨달음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되었다. 좋아하는 영화제가 많지만, 부산은 많은 상영작과 가까운 동선으로영화를 많이 보기 최적의 코스인데다가 가을의 뜨거운 햇빛과 차가운 공기, 그리고 바다까지 즐길 수 있어 매해 기다리는 영화제가 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열흘 동안 4개 극장 25개 스크린에서 69개국 209편의 공식초청작과 커뮤니티비프 상영작 60편등 총 269편을 상영한다. 많은 영화들 중에서 과연 어떤 영화를 고를 것인지는 사람들마다 기준점이 다를 것이다.내가 영화를 고르는 기준 첫번째는 개봉하지 않을 것 같은 영화, 두번째는 영화제에서 최초 공개 되는 영화다. 그리고 세번째는 영화제를 맞아 특별상영하는 고전들이다.
첫번째 기준의 영화에 부합하는 영화들은 미국이나, 일본 보다는 유럽이나 아시아 영화가 많다. 제 3국이라는 말이 참 모호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아름 다운 이야기들로 잘 짜여진 상업영화도 즐겁게 보지만,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과거 때문인지…나는 조금 더 현실을 직시 할 수 있는 소재에 관심이 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영화들은 개봉이 어렵다. 극장에서 보고 싶지만, 그럴수 없으니 영화제에서 찾아서 볼 수 밖에.
예매 오픈일 전날, 영화 소개를 꼼꼼히 보며, 시간표를 짰다. 올해는 주말을 이용해 다녀올 생각이어서, 토요일에 최대한 많은 영화를 보려면 보고 싶은 영화의 러닝타임을 잘 계산하고 최적의 동선으로 움직여야 했다. 매진을 대비해 각 시간별로 1순위, 2순위로 영화를 배치하고, 메인 타임엔 3순위까지 영화를 정해 두었다. 오픈 시간인 오후 2시엔 외부일정이었지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모바일로 접속했다. 하나 하나, 차근 차근 예매를 시작했지만, 꼭 보고 싶었던 토요일 17시 <공드리의 솔루션북>은 거의 1-2분 컷으로 매진이 되어버렸다. 아…제일 먼저 예매했어야 했는데…혹시나 해서 아침 영화부터 순서대로 예매했던 것이 실수 였다. <공드리의 솔루션북>을 제외한 영화 4편의 예매를 마친 시간은 2시 5분. 올해 예매 대전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한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1순위로 보고 싶었던 영화로 예매했으니, 이만 하면 충분하다.
작년에는 여성 인권과 난민에 관한 주제를 다룬 영화를 주로 보았는데… 올해 예매 내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점이 있다면, 무슬림과 아시아 여성인권 영화에서 아프리카 여성 인권에 관한 영화로,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아프리카 난민에 관한 이야기에서 폴란드로 들어오는 중동 난민에 대한 영화로 지역이 바뀌었을 뿐이다. 세계의 곳곳에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인간의 기본권 조차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뜻일 것이다.
‘소수’나 ‘다양성’으로 표현하지만, 사실 이런 영역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집단 대부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수적으로 적지 않지만, 세상에 목소리를 낼 자본이나 힘이 적은 것일뿐. 영화가 필요한 이유는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사람들이 실상을 알도록,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충격적이고 먹먹했던 작년의 영화들에 이어서 올해는 어떤 현실을 직면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그리하여 나의 세계는 얼마나 더 커지게 될지, 올해의 영화제도 기대된다.
<지극히 사적인 인권에 관한 영화 기대작>
1.신부 납치
우무트는 간호 조무사로 일하면서 정식 간호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건실하고 밝은 청년으로 어머니와 함께 서로를 의지 하며 산다. 에게멘은 고철을 훔쳐 생계를 이러가는데, 늙은 아버지와 둘이 사는 집에 누이들이 와서 살림을 대신 해준다. 이들은 날마다 에게멘에게 결혼 할 것을 종용하는데, 그에게는 숨겨둔 애인 메예림이 있다. 메예림은 납치당해 결혼했다가 딸을 데리고 이혼한 처지로, 에게멘은 가족들에게 메예림을 떳떳이 소개하지 못한다. 여전히 키르키스스탄에 만연한 신부 납치의 악습을 고발하는 이 영화는 충격적인 수 많은 실화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시종 건조한 시선으로 인물들과 사건을 관찰자의 위치에서 따라간다. 묵직하게 서사를 쌓아가는 힘과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에도 길을 잃지 않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이영화의 강점이다.
2. 푸른 장벽
2021년 하반기 벨라루스가 중동에서 흘러 들어온 난민들을 인접한 폴란드로 보내면서, 푸른 숲으로 우거진 국경 지대에서 양국의 군인들과 중간에 낀 난민들이 충돌하게 된다. 거장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최신작 <푸른 장벽> 은 철저한 조사에 기초해 다큐멘터리적 접근을 취함으로써, 때로는 현실이 픽션보다 참혹할 수 있음을 짐작케 한다.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영화를 만들지는 않지만 우리 세상 모든 면이 정치적”이라 했던 감독의 말처럼, 영화 속 모든 등장 인물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정치적 판단을 하게 된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새우등 터지는 난민, 그들을 도우려는 인권 단체, 그들을 두려워하면서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주민, 그들을 몰아내야 하는 국경 수비대의 다양한 시점을 통해 우리가 선택을 내리는 순간, 그 희미한 선악의 경계를 반추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 짧은 에필로그에 이르러, 불과 일 년 후 폴란드의 또 다른 국경에서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3. 10년; 미얀마
10년 뒤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옴니버스 영화 <10년>. 2015년 홍콩에서 처음 선보인 이후 일본, 대만, 태국을 거치며 국제적 연작이 된 <10년> 시리즈는 사회적 상상력과 영화적 상상력의 결합으로 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0 년: 미얀마>는 다섯 명의 감독이 다섯 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전 시리즈가 직관적이고 명쾌한 메시지를 그렸다면 미얀마 편은 보다 절제되어 있으며 관객에게 더 많은 상상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각 에피소드에서 연상되는 의문사, 정치범, 저항군, 폭력, 검열 등의 키워드는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미얀마의 엄혹하고 암울한 현실을 상기시킨다. 홍콩을 비롯한 이전 시리즈의 제작자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완성된 작품으로, 민주주의를 향한 아시아 국가들의 ‘밀크티 동맹’이 영화인의 연대로 재탄생하여 결실을 보았다.
4. 21주후
임신 21주 차인 여자는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금지된 낙태를 결정한다. 유산한 아이를 몰래 묻어주기 위해 도시의 이곳저곳을 떠돌지만, 그 어디에도 안전한 곳을 찾을 수 없다.
5. 꿈꾸는 청소부
슬럼가에서 딸 무니와 함께 사는 비르주와 쇼나 부부는 매일 아침 콜카타의 부촌을 돌며 손수레에 쓰레기를 수거한다. 쓰레기 가운데 쓸만한 물건들을 골라내 집으로 가져가고, 이 물건들은 매일 밤 딸에게 들려줄 이야기의 소재가 된다. 비르주는 관리자로부터 앞으로는 오토바이로 쓰레기를 수거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고, 오토바이를 몰 줄 모르는 그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전작을 통해 인도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선보여온 수만 고쉬 감독은 이 영화에서 쓰레기 수거일을 하는 부부의 일상에 근접해 들어가는 카메라를 통해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과 환영적 리얼리즘을 절묘하게 결합한다. 딸에게 들려주는 판타지가 비르주의 현실적 불안과 뒤섞이며 영화는 사회적 불평등과 빈부 격차를 언급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꿈꾸는 가족의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견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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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부당거래〉의 세계에 갇힌 류승완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류승완이 가진 위상을 고려했을 때, 〈베테랑2〉는 아쉬움을 남기는 영화다. 먼저 주제다. 〈베테랑2〉는 수년 전부터 범람하는 사적 제재물의 연장에 있다. 신자유주의 사회 이후 공동체 붕괴 속도는 가팔라졌고, 법과 공권력은 시민들의 법 감정을 충족하기에는 솜방망이처럼 가벼웠다. 단지 능력과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권력 친화적으로 뼛속까지 썩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적 제재 장르물은 법과 공권력은 만인에게 평등하게 집행된다는 믿음이 깨진 곳을 파고들었다. 〈베테랑2〉와 직접 비교되는 〈비질란테〉 시리즈가 아니더라도 하나하나 언급하기도 벅찰 정도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이 문제를 다루었다. 심지어 2022년 작 〈경관의 피〉는 법의 테두리에서 범인을 잡는 경찰과 수단과 방법을 가라지 않고 악인을 검거하는 경찰의 대립을 다뤘다는 점에서 〈베테랑2〉의 문제의식을 한참 앞서 선보인 바 있다. 대중의 원한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찰이 마주한 딜레마라는 〈베테랑2〉의 문제의식이 영화 초반부터 도드라졌을 때 실망스러웠던 이유다. 이미 익숙한, 심지어 자극적‧선정적으로 활용되다 소진된 소재에 왜 굳이 류승완까지 뛰어들었을까 싶어서다. 몇몇 인상적인 액션신과 배우들의 연기만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기시감을 내내 떨칠 수 없었다.
정작 흥미로웠던 건, 이 영화가 류승완이 지향하는 세계를 드러내 보인다는 점이었다. 〈부당거래〉에서 그는 감히 손댈 수 없는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구축한 법 기술자의 문제를 다뤘다. 체념과 무력감을 자아내는, 우리가 어떤 세계를 살고 있는지에 대한 냉소적 조망이었다. 그러나 〈베테랑〉에서는 이를 통쾌함과 짜릿함이 깃든 분노로 전환했다. 조태오(유아인)라는 희대의 악역과 그를 때려잡는 평범한 경찰 서도철(황정민)의 이야기는 〈부당거래〉가 그려낸 세계와는 분명 달랐다.
〈베테랑〉에서 류승완이 ‘무엇’으로 〈부당거래〉의 닫힌 세계를 돌파했는지에 주목해보자. 서도철이 거악 조태오와 맞설 때 가진 무기는 몸과 깡뿐이었다. 대중문화 담론으로 영역을 확장해보자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착취와 경쟁 격화로 초토화된 기존의 남성 연대를 지탱해온 건 ‘의리’였다. 굳이 김보성 배우의 캐릭터로 자리 잡은 ‘의리’ 열풍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즈음의 한국영화는 구원을 갈구하며 고뇌하는 남성 캐릭터의 독무대였다. 우정, 민족, 돈, 정의, 여성을 매개로 한 남성 연대를 모색한 이 시기의 영화는 이른바 ‘두 글자 영화’, ‘세 글자 영화’ 등으로 불리며 범람했다. 그중에서도 류승완의 〈베테랑〉이 천착한 건 몸과 깡이었다. 조태오에 비해 모든 게 열세인 서도철이 이들을 무기로 끝내 승리하는 영화의 서사에서, 평범한 남자라면 ‘누구나’ 단련하거나 가질 수 있는 몸과 깡은 분명 길 잃은 채 좌절하는 남성 주체에게 짜릿하고 통쾌한 위무로 다가갔을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흘러 〈베테랑2〉가 나왔다. 서도철은 여전히 몸과 깡으로 싸운다. 그러나 류승완은 그에게 하나의 무기를 더 준다. 바로 소시민의 평범한 윤리다. 전작에서는 하나하나 규정을 지켜가며 수사해야 하는 상황에 서도철이 답답함을 느끼고 이를 은근슬쩍 위반하며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 심지어는 누군가의 규정 '악용'으로 서도철이 곤경에 몰리는 장면도 있었다. 그런 서도철이 이번에는 원칙과 상식의 수호자로 돌아왔다. 서도철은 법이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는 데 불만인 평범한 소시민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공권력의 일원으로서 이 조류에 휩쓸리기보다는 원칙에 입각한 직업윤리를 택한다. 공권력을 사적 제재의 수단으로 삼는 경찰(정해인)에 대적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부당거래〉의 검사들이 그러하듯 서도철이 기성 체제의 수호자로 둔갑하는 순간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부당거래〉의 검사들이 지키고자 한 건 자기 기득권이었지만 서도철은 법과 공권력에 담긴 상식을 옹호하고자 한다.
〈베테랑2〉는 이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유독 공을 들인다. 이 영화에서 범죄자보다 더 악질적인 존재로 제시되는 인물군은 자극적인 가짜뉴스만 유포하며 수익을 내는 유튜버, 마찬가지로 폭력적인 방식으로 범죄자를 사적으로 처벌하고자 하는 ‘의인’ 등이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그에 마땅한 죗값을 치르지 않는 건 문제지만, 그들을 합법적인 방식을 거치지 않고 처벌하려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소시민 서도철의 가족 이야기가 전편에 비해 더 자주 등장하고, 극의 서사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맡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전작에서 가족은 서도철이 현실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부수적 장치 정도로 활용됐지만, 이번에는 서도철이 지키고 보호해야 할 핵심 대상이라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서도철이 직업윤리를 배반하지 않으면서도 끝내 가족을 지켜내고 체제를 교란하는 악인을 검거하는 데서 직업적 상식을 지키는 일이 사회의 ‘근간’인 가족을 지키는 일로 확장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사건을 해결한 서도철이 냉랭하던 아들과 라면을 끓여 먹고, 그의 아내가 무심한 듯 부자父子에게 다가와 어우러지는 장면은 서도철이 고군분투 끝에 지켜낸 직업윤리가 가족을 지키는 일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강하게 환기한다. 불합리하더라도 자기 영역에서 직분에 맞는 윤리를 지키며 가정을 지키는 어느 소시민 남자의 윤리는 이렇게 몸과 깡 이후 서도철의 새로운 무기가 된다.
단순한 선악 구도에서 몸과 깡만을 무기로 강자를 들이받는 소시민의 이야기는 판타지일지언정 쾌감을 안겨준다(〈베테랑1〉). 하지만 칼로 무 자르듯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에서는 자기 윤리를 붙잡고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베테랑2〉). 그런 서도철에게 류승완은 소박한 정의로 소박한 삶을 지키는 남자야말로 가장 위대한 남자라는 위안을 건넨다. 일상의 작은 정의야말로 〈부당거래〉의 폐쇄적 세계와 〈베테랑〉의 판타지적 승리가 채워주지 못하는 허탈함을 온전히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영화가 치열하게 모색한 남성성의 길이 돌고 돌아 다시 도달한 곳이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가 평범한 남성 가장이 답으로 제시될 수 있는 시대인가? 〈부당거래〉의 부조리한 세계는 과연 그토록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도 감독이 전작 〈밀수〉에서 선보였듯 여성들의 억눌린 목소리와 가려진 노동이 이제 막 포괄적 사회 공론장에 진입한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류승완 감독이 그토록 돌파해내고자 한 〈부당거래〉의 세계는 〈베테랑2〉로 인해 출구 없는 세계임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서도철에게는(그리고 남성들에게는) 다른 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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