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08-16 14:01:55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뒤섞인 난맥상
<행복의 나라>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법정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승패를 가리는 장소라고 믿으며 각종 꼼수와 편법에 능통한 변호사 '정인후'(조정석). 그는 감옥에서 암에 걸린 아버지의 가석방을 약속받자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태주'(이선균) 대령의 변호를 맡기로 결정한다.
군인 신분 때문에 재판 기회가 한 번 밖에 없는 박태주. 하지만 그는 변호인에게 쉽사리 협조하지 않는다. 원칙주의자인 그의 눈에 정인후는 양아치니까. 그가 내란을 사전에 공모했는지, 아니면 위압에 의해 명령을 따랐는지가 재판의 쟁점인 가운데 박태주는 거짓 혹은 편법 증언을 요구하는 정인후와 거듭 부딪힌다.
한편, 10.26 사태를 계기로 박정희의 후계자가 되어 권력을 잡겠다는 야욕을 품은 합수부장 '전상두'(유재명). 박 대령 재판을 자기 발판으로 삼기로 결정한 그는 실시간으로 재판관에게 쪽지를 전달하고 재판을 도청 및 녹음하며 정인후의 노력을 물거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무위에 그친 역발상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경호원들은 박정희 대통령 외 5명을 사살했다. 이 사건의 재판을 다룬 <행복의 나라>는 시간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어중간하다. 사건의 전후사정이 이미 영화화돼 대성공을 거뒀기 때문. <남산의 부장들>은 김재규의 동기를, <서울의 봄>은 사건 이후 12.12 군사반란을 영화화했다. 심지어 둘은 장르도 달랐다. 전자는 누아르를, 후자는 전쟁 영화의 속성을 강조했다.
이에 <광해, 왕이 된 남자>와 <7년의 밤>을 연출한 추창민 감독은 역발상을 했다. 10.26 사태나 주동자인 김재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상대적으로 관심을 못 받은 공범 박흥주 육군 대령과 그를 변호한 태윤기 변호사에게 주목했다. 특히 그들의 인생사를 각색해 극명하게 반대되는 삶을 살아온 두 인물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하게 되는 과정을 법정물로 포장해 감동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행복의 나라>는 역발상의 힘을 스스로 포기했다. 신념과 규칙에 충실한 삶 대 생존을 위해 유연해야 하는 삶이라는 대립 구도를 깊게 파고드는 대신 쉬운 길을 간다. 무조건적인 악역 전두환을 전면에 내세워 스케일을 키우고 군사 정권과 민주 시민의 대립을 강조한다. 문제는 같은 이야기로 천만이 넘는 관객의 뇌리에 각인된 선배들이 있다는 것. 결국 노선을 바꾼 순간 <행복의 나라>는 자기 자리를 잃고 말았다.
거대한 사건 속 개인적인 이야기
장르만 놓고 보면 <행복의 나라>는 <변호인>과 비슷해 보인다. 둘 다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법정물이니까. 하지만 두 영화의 지향점은 전혀 다르다. <변호인>은 분노를 연료로 삼아 달리는 작품이었다. 무고한 피고인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군사정권의 무도함과 그에 맞서는 변호인의 투쟁. 이 명확한 선악 구도에 송강호라는 배우의 연기력을 더하니 마치 들끓는 불과도 같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행복의 나라>는 다르다. 선악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가운데,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 보고 있는 변호인과 피고인의 관계성이 핵심이다. 살인을 저지른 피고인의 행위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두 주인공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정인후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공을 꿈꾸며 판검사가 되려다가 실패한 변호사다. 법정은 옳고 그름을 가르는 곳이 아니라 이기고 지는 곳이라는 대사에는 그의 인생이 축약되어 있다.
그 반대편에는 박태주 대령이 앉아 있다. 그는 중앙정보부 비서실장인데도 판자촌에 집이 있을 정도로 청렴한 군인이다. 요직에 있지만 권력을 마다하고 최전방 전출을 거듭 요청한 참군인이기도 하다. 영화는 10.26 사태를 매개로 완전히 다른 두 삶을 충돌시킨다. 배경은 대한민국의 향배를 뒤바꾼 거대한 사건이지만, 정작 내용은 철저히 개인적인 이야기인 셈이다.
감독의 전작인 <광해, 왕이 된 남자>와도 유사하다. <광해>도 중심 사건은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한 정치극이었다. 하지만 정작 주된 내용은 개인적인 이야기였다. 충(忠)으로 무장한 유학자 '허균'(류승룡)이 광해군으로 위장한 광대 '하선'(이병헌)과 지내면서 자기 신념과 사상의 문제를 깨닫고 새 나라와 새로운 왕을 꿈꾸게 되는 티키타카야말로 천만 관객을 휘어잡은 원동력이었다. <행복의 나라>도 마찬가지다.
두 인생의 충돌로 빚은 법정극
전혀 다른 삶의 궤적과 신념을 지녔다 보니 정인후와 박태주의 첫 만남은 엉망이었다. 정인후는 철저한 원칙주의자 군인 박태주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관등성명, 상명하복이 권위주의의 발현에 불과하다며 비웃는 사람이니까. 박태주도 다르지 않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법정에서 온갖 편법을 써가며 승리를 추구하고, 정의가 아니라 돈과 이익을 위해 변호를 맡는 정인후는 단지 변호사일 뿐, 신뢰할만한 변호인이 아니다.
1차 공판만 해도 정인후는 자기 의도대로 재판에 임한다. 군인이니 군법에 따라 단심제 군사 재판을 받겠다는 박태주. 정인후는 그를 설득하는 대신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한다. 군사 재판은 받지만, 단심제는 3심제로 바꿔달라며 위헌심사요청을 한다. 위헌심사요청이 기각되자 재판관을 교체해 달라며 재판을 여론 싸움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2차 공판부터는 다르다. 정인후는 점차 피고인의 입장과 신념이 녹아든 전략을 수립한다. 군인에게 명령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저 명령을 따른 박태주의 책임을 부정하는 식이다. 대통령을 살해한 후 정보부가 아니라 육군본부로 가자는 의견을 박태주가 냈다는 진술에 착안해 내란죄 혐의를 부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태주도 정인후를 만나 변한다. 동료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재판을 포기하려던 그. 그는 군인이고 원칙주의자면 규칙대로 재판장에서 최선을 다해 싸워서 책임을 지라는 정인후의 일갈에 마음을 다잡는다.
이는 법정극 특유의 쾌감으로 이어진다. 감정 호소로 일관한 <변호인>과 달리 <행복의 나라> 속 재판씬은 판세가 거듭 뒤집히다 보니 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에 더해 흐름을 가져오려고 머리를 쥐어짜면서 변호인과 피고인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한 팀이 되는 이야기가 병행되니 복합적인 재미가 만들어진다. 진정한 인권변호사가 되어가는 정인후를 보면서 박 대령이 웃음과 하이파이브로 화답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익숙한 맛으로 돌파하는 고구마
정인후와 박태주가 한 팀이 되어가는 과정은 자칫 고구마일 수 있다. 비록 역사를 반영한 것이기는 하나, 박태주라는 캐릭터가 다소 과하게 올곧은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 자기는 죽고, 아내와 두 아이만 남아 험난하게 살아야 할 상황에서도 그는 자기 신념을 좀처럼 꺾지 못한다. 상관도 못 버리고, 명령에 충실한 군인이라는 자부심도 저버리지 못하고, 대통령을 살해했지만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도 내려놓지 못한다.
추창민 감독은 고구마를 익숙한 맛으로 뚫어버린다. 정인후의 아버지와 박 대령을 겹쳐 보이게 한다. 개척 교회 목사로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돕다가 수감되고, 가족을 돌보지 못한 아버지. 정인후는 자기 신념대로 살아야 하는 아버지를 머리로는 받아들이지 못해도 가슴으로 이해해 간다. 그리고 이 과정은 그가 박태주를 만나는 장면과 이어진다. 그 덕분에 자칫 답답할 뻔한 전개는 가족애로 변환되어 더 큰 감동을 자아낸다.
물론 다소 양식적인 스토리텔링이기는 하다. 사건과 무관한 인물을 통해 시대적 사건에 접근하면서 특히 감정선을 자극해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유발하는 전형적인 한국 영화의 화법이니까. 야매 변호사였다가 사건을 맡은 후 진정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성장 서사는 정인후나 <변호인>의 송우석이나 다를 바 없다. 또 정인후와 아버지의 관계성도 이러한 맥락에서는 신파를 의도한 구조 배치로 보일 수밖에 없다.
과욕과 함께 무너지다
하지만 과욕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행복의 나라>는 이내 본연의 색을 잃는다. 의외로 초중반부까지 이 작품은 10.26 사태의 배경이나 실체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부마 민주 항쟁이 대학살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김재규의 결단 정도로 언급할 뿐이다. 애초에 핵심 플롯 자체가 정인후와 박태주 둘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이는 의도적인 공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12.12 군사반란을 필두로 실제 사건에 가까워진다. 그러니 역사적 맥락의 공백이 서서히 두드러지면서 영화의 만듦새도 무너진다. 배경이어야 할 사건이 돌연 주인공이 되다 보니 묻어 두었던 의문점이 한 번에 터져 나오기 때문. 일례로 중반부까지만 해도 매력적이었던 입체적인 인물상은 중심점을 잃고 흩어진다. 정인후의 경우 단지 박태주를 살리려는지 민주주의 투사가 되려는지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박태주도 명령에 의한 피해자인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투사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가 청렴한 군인이고 신념에 맞는 명령을 따랐으니 민주주의 투사로 여겨야 하는지, 군사 정권에 협력한 군인을 살리는 게 과연 민주주의를 위한 항거인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10.26 사태의 본질과 맥락을 외면한 채로 시작한 미시적인 이야기를 무리하게 거시적으로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모양새다.
이에 더해 장르적으로도 균형을 잃는다. 12.12 군사반란이 시작되는 순간부터는 <서울의 봄>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서울의 봄>처럼 쿠데타 과정을 자세하거나 긴장감 넘치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결국 10.26 사태는 지우고 12.12 군사 반란을 부각한 선택은 법정극이라는 장점도 희석시키고, <행복의 나라>만의 개성을 깎아먹는 악수가 되고 만다.
전두환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마지막으로는 극 중 전상두, 곧 전두환을 다루는 방식도 <서울의 봄>과 비교를 피할 수 없다. 황정민의 전두광과는 달리 유재명의 전상두는 상대적으로 일차원적이다. 전자는 들끓는 성공욕,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보스 기질, 위기 때마다 빛나는 간교함이 어우러진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였다. 반면에 전상두는 그저 권력을 잡기 위해 살인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절대악으로만 묘사된다.
그 결과 전상두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영화는 편의적으로 느껴진다. 전두환이 의문의 여지없는 악역이기는 하나, 그를 덮어두고 비난하면 메시지가 뻔해지고 재미도 덜해지기 때문. 정인후가 전상두 면전에서 욕을 하는 골프장 시퀀스가 통쾌하거나 희열이 느껴지는 대신 지루하고 늘어진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슈퍼맨처럼 압도적인 힘을 지닌 히어로를 잘못 활용해 액션의 긴장감과 쾌감을 모두 놓친 <저스티스 리그>와 비슷하다.
그렇기에 <행복의 나라>가 전두환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포기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유독 짙다. 악명 높은 한 인물 대신 비교적 덜 알려진 이들의 서사에 우직하게 집중했다면 한국 현대사를 다룬 이전 시대극들과는 또 다른 한 편의 드라마가 탄생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조정석과 이선균,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두 주연의 연기도 함께 빛이 바래기에 더욱 안타깝다.
Acceptable 무난함
시대의 그림자에 가려진 개인을 비추기에는 조명이 너무 약하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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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을 위한 애니메이션 영화 모음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어느새 완연한 봄날씨가 찾아왔는데요, 주말에는 비도 오고 기온도 떨어진다고 하니 감기 들지 않게 조심하셔야겠습니다.
바쁜 한 주의 끄트머리, 오늘도 씨네랩은 여러분의 주말을 책임질 재미있는 영화추천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애들은 가라! 오늘은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영화 일곱 편을 소개해드리려고 해요.
색감천재로 불리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영화 <개들의 섬>부터
여러 할리우드 영화 연출에 영향을 끼친 콘 사토시 감독의 <퍼펙트 블루>까지!
다양한 소재와 독특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국내외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지금 바로 만나보실까요?
개들의 섬(2018)
Isle of Dogs
ⓒ 네이버 영화
감독: 웨스 앤더슨
출연: 브라이언 크랜스톤, 코유 랜킨, 에드워드 노튼, 빌 머레이, 틸다 스윈튼 등
장르: 모험, 코미디
등급: 12세 관람가
러닝타임: 101분
인류를 위협하는 개 독감이 퍼지자, 세상의 모든 개들은 쓰레기 섬으로 추방되고, 자신이 사랑하던 개를 잃은 소년은 개를 찾아 홀로 섬으로 떠난다. 소년은 그곳에서 다섯 마리의 특별한 개들을 만나게 되고, 함께 사라진 개를 찾아가는 그들 앞에 기상천외한 모험이 펼쳐지는데… 개를 사랑한 소년, 소년을 사랑한 개 남다른 개들의 색다른 어드벤처가 시작된다!
걘 겨우 12살이니까.
우린 애들을 좋아하잖아.
ⓒ 네이버 영화
영화 <개들의 섬>은 할리우드 최고의 비주얼리스트인 웨스 앤더슨 감독의 두 번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영화입니다. '견류 독감'의 영향으로 전국의 모든 개들을 쓰레기 섬으로 추방시킨 근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했으며, 2018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 개막작 및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은곰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폐막작으로 선정되기도 했었는데요, 영화는 사랑하는 개 '스파츠'를 찾아 나선 소년 '아타리'와 그를 돕는 다섯 마리의 개들을 주인공으로 했으며 독창적인 컬러감과 구도로 전 세계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던 웨스 앤더슨 감독이기에 개봉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답게 <개들의 섬>은 디테일에 있어서 엄청난 놀라움을 자아내는데요, 캐릭터들의 표정과 움직임, 배경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는 정교한 작업을 위해 3년이 넘는 기간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러닝타임 101분을 위해 무려 144,000개의 스틸을 이어 붙였으며, 1초에 24 프레임을 구현하는 기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on ones' 기법과 달리 움직임이 다소 딱딱하고 불온전한 느낌의 'on twos' 기법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고 하네요. 초밥을 만드는 장면 하나에 15주가 소요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비주얼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입체적인 캐릭터, 따뜻하면서도 감독 특유의 블랙 유머가 적절히 섞여 들어간 스토리텔링 또한 이 영화의 큰 매력입니다. 인간과 개의 교감을 섬세하게 다뤄 애견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가슴 찡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요. 웨스 앤더슨을 좋아하신다면 그의 또 다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영화인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 또한 추천드립니다.
퍼펙트 블루(1997)
Perfect Blue
ⓒ 네이버 영화
감독: 곤 사토시
출연: 이와오 준코, 마츠모토 리카, 치즈 신파치, 오쿠라 마사아키 등
장르: 미스터리, 스릴러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러닝타임: 81분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는 있지만 내리막길만 남아 있는 일본의 소녀 아이돌 그룹 ‘참’의 리더 격인 미마. 롱런을 위해 에이전시로부터 배우로의 전업을 권유받고 그룹을 탈퇴한다. 광적인 팬의 위협도 위협이지만 핑크빛 공주 의상을 입는 자신에 익숙했던 그녀에겐 갑자기 강간신을 찍는 성인 연기자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힘겨운 일. 시골에서 올라온 자연인으로서의 그녀가 진짜 그녀일까? 아니면 아이돌 스타로서의 그녀가 진짜 그녀일까? 혹은 누드사진을 찍는 그녀가 진짜일까?
1초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어째서 동일인이란 걸 안다고 생각해?
단지 기억의 연속성. 그것 만에 기대어
우리들은 일관된 자기 동일성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고 있어.
ⓒ 네이버 영화
영화 <퍼펙트 블루>는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곤 사토시 감독의 1997년작 애니메이션 영화입니다. 곤 사토시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데요, 아이돌 그룹 '참'의 멤버였던 '미마'가 아이돌 그룹을 탈퇴하고 배우로서 경력을 시작하며 벌어지는 사건들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어차피 저예산 영화였기 때문에 동화(動畵)를 많이 쓸 수 없으니 움직임이 아닌 미술과 연출로 승부를 걸자고 생각했다고 하며, 결과적으로 작화와 연출 면에서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거론되는 작품이 되어 애니메이션에서 연출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감독은 '상상과 일상의 융합'이라는 테마를 반복적으로 사용, 다양한 명작을 많이 배출해 냈습니다.
최근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더 웨일>이 개봉을 했는데요, 애러노프스키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팬인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만 그중에서도 특히 <퍼펙트 블루>를 종종 오마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영화들 중 <레퀴엠 포 어 드림>, <블랙 스완> 등에서 <퍼펙트 블루>와 거의 유사하게 연출된 장면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2001년에는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이 <퍼펙트 블루>의 리메이크 판권을 사려다 결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답니다.
파프리카(2007)
Paprika
ⓒ 네이버 영화
감독: 곤 사토시
출연: 하야시바라 메구미, 후루야 토루, 야마데라 코이치 등
장르: 미스터리, SF
등급: 15세 관람가
러닝타임: 90분
29살의 정신과 치료사 치바 아츠코에게는 또 하나의 자아가 있다. 바로 18살의 대담무쌍한 꿈 탐정 파프리카이다. 파프리카는 사람들의 꿈속에 들어가 그들의 무의식에 동조함으로써 환자의 불안과 신경증의 원인을 밝혀내고 치료한다. 어느 날, 치바의 연구소에서 개발 중이던 혁명적인 정신치료장치 DC-MINI의 프로토타입이 도난당하고 조수마저 실종된다. 장치를 찾아 나선 치바는 무서운 음모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지? 파프리카는 내 분신이잖아.
- 아츠코가 내 분신이라는 발상은 못 하나 봐?
ⓒ 네이버 영화
영화 <파프리카>는 위에서 소개해드린 <퍼펙트 블루>를 만들기도 했던 곤 사토시 감독의 유작입니다. 이 작품의 제작 이후 감독은 췌장암이 발병해 투병 생활을 하다 2010년 사망해 많은 팬들의 안타까움을 샀는데요, <파프리카> 역시 <퍼펙트 블루>와 마찬가지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파프리카>의 원작자이자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원작자이기도 한 츠츠이 야스타카 본인이 해당 작품을 사토시가 영화화해 주길 원했으며, 원작 소설보다 더 확장된 상상력과 감독의 독창적인 연출력이 더해져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이중인격의 인물, 악몽에 시달리는 현대인, 꿈의 영역까지 도달한 과학, 현실과 꿈의 뒤섞임 등 많은 것을 다루고 있는데요, SF와 미스터리, 스릴러와 액션 등 다양한 장르의 믹스에 여느 영화 못지않은 탄탄한 구조와 감독 특유의 탁월한 작화가 돋보이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물리적 경계가 없는 매체인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영화로, 화려한 색채와 독특한 화면구성이 관객의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합니다. 앞서 <퍼펙트 블루>를 오마주한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영화들을 언급드렸었데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과 <파프리카>의 기초 설정 및 장면들의 유사성 또한 영화팬들 사이에 꾸준히 회자되는 이야기랍니다.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2022)
Pinocchio
ⓒ 네이버 영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출연: 이완 맥그리거, 크리스토프 왈츠, 틸다 스윈튼, 케이트 블란쳇 등
장르: 뮤지컬, 애니메이션
등급: 전체 관람가
러닝타임: 117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목각 인형 피노키오의 마법 같은 모험. 오스카 수상 감독 기예르모 델토로의 손에서 고전 동화가 새롭게 재탄생했다. 생명을 얻은 목각 인형의 이야기가 놀라운 스톱모션 뮤지컬로 스크린에 펼쳐진다.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 생명을 불어넣는 강력한 사랑의 힘이 펼쳐진다.
삶이 귀하고 의미 있는 건
그 삶이 짧기 때문이야.
ⓒ 네이버 영화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는 <판의 미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등을 연출했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영화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으며, 스트리밍에 앞서 사전 공개되었던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압도적인 호평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원작 동화 피노키오의 맥락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소재인 '전쟁'과의 연결고리가 자연스러워 감독만의 새로운 버전의 피노키오가 탄생했다는 점이 큰 호응을 얻었는데요, 영화 곳곳에 심어 둔 사회적인 풍자와 은유적인 메시지, 원작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인생의 교훈과 소중함이 버무려져 마냥 아름답지만 않으면서도 따뜻한 작품이라는 평입니다.
감독의 전작들을 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는 본래 몽환적이고 기괴한 분위기가 판타지적 세계관에 녹아들어 뛰어난 연출력을 선보이는 감독입니다. 피노키오를 만들면서도 행복한 분위기보다는 기괴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는데요, 원작 소설의 무서운 면에 더 이끌렸으며 자신만의 피노키오를 만들고자 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기예르모 델 토로만의 피노키오가 완성되어 아이와 어른 모두의 마음을 울리는 걸작이 탄생할 수 있었으며, 올해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치코와 리타(2010)
Chico & Rita
ⓒ 네이버 영화
감독: 하비에르 마리스칼, 페르난도 트루에바, 토노 에란도
출연: 에만 소르 오냐, 리마라 메니시스, 마리오 구에라 등
장르: 멜로/로맨스
등급: 15세 관람가
러닝타임: 93분
1948년 쿠바의 하바나, 야망에 찬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치코는 어느 날 밤 클럽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수 리타와 만난다. 젊음과 재능으로 빛나는 그들은 곧 사랑에 빠지지만 열정과 욕망, 질투와 오해가 뒤엉키며 안타까운 이별을 맞이한다. 그리고 네온사인 화려한 기회의 도시 뉴욕, 이제 막 그곳에 발을 디딘 치코는 스타로서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리타와 재회하게 되는데… 하바나에서 뉴욕 그리고 파리, 할리우드, 라스베이거스까지, 사랑과 꿈을 좇는 그들의 뜨거운 여정이 펼쳐진다.
나도 당신을 모르지만 내 평생
당신을 기다려 온 것 같은 느낌이야.
ⓒ 네이버 영화
영화 <치코와 리타>는 2012년에 개봉한 스페인 애니메이션 영화로, 1992년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페르난도 트루에바, 유명 일러스트레이터인 하비에르 마리스칼, 토노 에란도가 공동 연출했으며 쿠바의 재즈 피아니스트 베보 발데스가 음악을 맡은 작품입니다. 국내에서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소개되어 대상을 받기도 했는데요, 1950년대의 쿠바, 뉴욕, 라스베이거스 등의 장소를 오가며 펼쳐지는 아름다운 재즈 선율이 매력적인 영화입니다.
작화를 맡은 하비에르 마리스칼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마스코트 '코비'를 디자인한 천재 아티스트로, 투박하면서도 리드미컬한 일러스트에서 스페인 특유의 감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쿠바의 전설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베보 발데스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재즈 선율이 영화 내 흘러 귀를 즐겁게 하며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벤 웹스터, 냇 킹 콜 같은 재즈 명장들이 영화 속 캐릭터로 등장해 영화의 재미를 더했습니다. 재즈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음악을 사랑하는 어른의 연애를 감상하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해 드립니다!
돼지의 왕(2011)
The King of Pi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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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연상호
출연: 양익준, 오정세, 김혜나, 박희본 등
장르: 스릴러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러닝타임: 96분
회사 부도 후 충동적으로 아내를 살인한 ‘경민(목소리 오정세)’은 자신의 분노를 감추고 중학교 동창이었던 ‘종석(목소리 양익준)’을 찾아 나선다. 소설가가 되지 못해 자서전 대필작가로 근근이 먹고사는 종석은 15년 만에 찾아온 경민의 방문에 당황한다. 경민은 무시당하고 짓밟혀 지우고 싶었던 중학교 시절과 자신들의 우상이었던 '철이(목소리 김혜나)' 이야기를 종석에게 꺼낸다. 그리고 경민은 학창 시절의 교정으로 종석을 이끌어, 15년 전 그날의 충격적인 진실을 밝히려 하는데...
이곳은 얼음처럼 차가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나뒹구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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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돼지의 왕>은 대한민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잔혹 스릴러 장르를 표방한 성인 애니메이션 영화입니다. <부산행>, <정이> 등으로 국내를 넘어서 해외에서도 연출력을 인정받은 연상호 감독의 작품으로, 본격적으로 그를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다소 거칠고 현실적인 삽화체 그림이 특징이며 불편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애니메이션이기에 일부러 불편함을 느끼게끔 디자인한 그림체라고 합니다. 매우 잔혹하고 진지한 분위기의 애니메이션 영화로,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어린 학생들 간의 학교폭력과 독재권력에 대한 풍자, 사회적 부조리함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돼지의 왕>은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칸 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받았고, 에든버러 국제 영화제, 시드니 영화제, 파리 시네마 영화제, 몬트리올 판타지아 장르 영화제 등에 초청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2022년에는 해당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동명의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가 제작되었는데요, 김동욱, 김성규, 채정안 등이 출연하였으며 원작 이상의 잔혹한 수위와 묘사 때문에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린 학생들 간에 일어나는 잔인한 학교폭력과 이로 인해 상처받는 아이들, 모르쇠로 일관하는 어른들은 영화가 개봉한 지 1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보다 강력한 규제와 관심이 필요한 상황, 학교폭력으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파닥파닥(2012)
Pad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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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대희
출연: 시영준, 김현지, 안영미, 현경수 등
장르: 드라마
등급: 12세 관람가
러닝타임: 78분
자유롭게 바닷속을 가르던 바다 출신 고등어 '파닥파닥'. 어느 날, 그물에 잡혀 횟집 수족관에 들어가게 된다. 죽음이 예정된 그곳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올드 넙치'. 그는 자신만의 생존비법(?)으로 양어장 출신의 다른 물고기들의 신망을 받는 권력자다. 바다로 돌아갈 꿈을 버리지 않고 탈출을 시도하는 '파닥파닥'으로 인해 수족관의 평화는 깨지고, '올드 넙치'와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데... 바다를 향한 고등어 '파닥파닥'의 꿈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너희들은 이미 죽은 거야.
여기 들어온 이상 이미 죽은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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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추천드릴 작품 역시 국내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 영화인데요, 개봉 전부터 각종 영화제로부터 작품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제13회 전주국제영화제의 국제경쟁 부문에 진출한 유일한 한국 작품으로 주목받았던 영화 <파닥파닥>입니다. <파닥파닥>은 드라마와 뮤지컬이 결합된 일종의 뮤직드라마의 형식을 갖춘 애니메이션 영화로, 횟집 수족관에 갇혀버린 바다 출신 고등어 '파닥파닥'이 자유를 갈망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연예인이 아닌 전문 성우들이 더빙을 한 것이 특징인데요, 극 중 뮤지컬 부문에서도 성우들이 모든 노래를 직접 불렀으며 한국 독립 영화의 애니메이션에서 배우가 아닌 성우들이 캐스팅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네요.
영화의 배경이 되는 횟집 수족관은 마치 계급화와 서열화가 만연한 관료주의 인간사회를 축소해 놓은 듯한 공간으로 표현되며, 기회주의자, 냉소주의자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군상들이 물고기의 얼굴을 하고 등장합니다. 수족관의 보이지 않는 벽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현실에 안주하는 물고기들의 모습을 통해서는 꿈을 잊고 사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영화로, 꽤나 그로테스크하고 잔인한 연출과 음침한 분위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작품입니다. 12세 관람가로 책정되어 있으나 15세 이상 관람, 나아가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로 개봉했어도 납득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수준이라 발랄한 콘셉트의 마케팅에 낚인 것을 후회한 가족 관람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총 일곱 편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소개해 드렸는데, 어떠셨나요?
즐겁고 평안한 주말 보내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YUMI였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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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엄마 탓 아니야, 내 탓도 아니고
- 경아의 딸Gyeong-ah’s DaughterCast감독: 김정은출연: 김정영, 하윤경Synopsis홀로 살아가는 ‘경아’에게 힘이 되어 주는 유일한 존재인 딸 ‘연수’는 독립한 뒤로 얼굴조차 보기 어렵다. 그러던 어느 날, 헤어진 남자 친구가 유출한 동영상 하나에 ‘연수’의 평범한 일상이 무너져 버리고 이 사건은 잔잔했던 모녀의 삶에 걷잡을 수 없는 파동을 일으킨다. (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Review2022년 8월, 또 불법촬영물 유포자가 검찰에 기소됐습니다. 1만 개 이상의 불법촬영물을 유포했으며, 이는 올해 적발된 사례 중 가장 큰 규모라고 합니다. ‘또’라는 말도, ‘가장 큰 규모'라는 말도 화가 납니다. 이런 뉴스가 그리 놀랍지 않을 만큼 디지털 성범죄가 만연한 이 세상이 정말 두렵습니다.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감상한 영화 <경아의 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자행되는 대한민국의 디지털 성범죄 현실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언제쯤이면 이런 이야기가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에피소드로 남을까요? 씁쓸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경아의 딸>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았습니다.⊙ ⊙ ⊙존엄한 인간으로서 용기 있게 전진현실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법한 소재를 다룬 <경아의 딸>은 일면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한 다큐멘터리 같기도 합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 바로 직전에도 불법촬영물 유포에 관한 뉴스를 맞닥뜨렸으니까요. <경아의 딸>을 만든 김정은 감독은 GV를 통해 “영화가 충분히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 확신했다"고 밝혔습니다. 딸 ‘연수'의 전 애인이 유포한 불법촬영물을 엄마인 ‘경아’가 받은 것처럼, 가족에게 불법촬영물이 유포되는 경우를 자문 단계에서 다수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의 70%가 전 애인과 같이 친밀한 관계의 사람이라는 통계 자료는 이미 유명하고요.여성은 연애하는 것만으로 디지털 성범죄의 가능성에 노출됩니다. 사실 여성으로 태어날 때부터 여러 범죄의 가능성에 노출된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죠. 그런데도 사회는 익숙하게 피해자를 탓합니다. 극 중 ‘연수'는 경찰을 비롯한 여러 사람으로부터 “합의 하에 찍은 영상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질문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안은 여성을 향한 질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당사자의 동의 없이 영상을 유포한 것이 문제인데도, 사회는 여성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립니다. 엄마 ‘경아'마저 “왜 그런 남자를 만났느냐”며 ‘연수’를 탓하기만 하죠. 아주 작은 질타 거리만 있어도 여성은 애먼 공격을 받습니다. 논점을 오도하는 손가락질을 수없이 겪으며 자라왔기에, 러닝 타임 내내 마음속에 일렁이는 공감과 울분을 억눌러야 했습니다.<경아의 딸>은 디지털 성범죄를 소재로 하는 영화, 더 나아가 여성이 피해자로 등장하는 여러 영화와 분명한 차별점을 갖습니다. ‘연수'가 전형적인 피해자성을 탈피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피해자가 된 ‘연수’도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사회적 고립을 택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책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영화도 그녀가 괴로움에 몸부림치거나 오열하는 장면을 일부러 보여주지 않죠. <경아의 딸>이 피해자가 다시 '살아내는' 과정에 집중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김정은 감독은 <경아의 딸>이 “피해자가 아닌 한 사람의 존엄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감독의 말처럼 ‘연수'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매 순간 용기를 냅니다. 겨울 끝에 언제나 꽃 피는 봄이 오듯이 ‘연수'는 잠시 멈추었던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흘러가기를 택합니다. 봄을 향해 걸어가는 ‘연수’의 모습과 함께 흘러나오는 엔딩곡 ‘눈 오는 밤'은 성차별의 세상에서 또 한 번 살아낼 용기를 내는 현실의 ‘연수'들에게 위로를 전합니다.⊙ ⊙ ⊙사랑하는 만큼 갑갑한 K-모녀 관계영화 제목이 <연수>가 아닌 <경아의 딸>인 것도 이 작품의 차별점입니다. 제목처럼 영화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중요하게 묘사합니다. 엄마 ‘경아'와 딸 ‘연수'는 꼭 어디엔가 존재할 것 같은 사실적인 모녀입니다. 이마트 장바구니에 바리바리 음식을 싸주는 엄마의 모습이나 엄마를 안심시키려고 영상 통화를 하며 자취방 구석구석을 보여주는 딸의 모습이 그렇죠. 아마 K-딸이라면 영화를 보면서 ‘아, 우리 엄마도 저러는데.’,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네.’ 싶은 장면들이 있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고요.‘연수'는 불법촬영물 유포 사건만으로도 버틸 수 없을 만큼 힘든데, 엄마는 ‘연수’에게 더 큰 짐을 지워줍니다. K-엄마의 고정적인 멘트를 내뱉으면서요. “다 내 탓이다. 내가 너를 잘못 키웠다.” 엄마의 자책이 딸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엄마들은 모를 겁니다. 아니, 어쩌면 엄마들은 알면서 저런 말을 뱉는지도 모릅니다. 자책은 딸에게 속상한 마음을 전하는 너무나 쉽고 간편한 방법이니까요.‘딸이 최고'라는 말, 한 번쯤은 들어보셨지요? 부모를 잘 챙기는 건 아들보다는 역시 섬세하고, 친근하고, 착한 딸이라면서요. 그렇기에 K-딸들은 착한 딸로 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자꾸만 비밀을 늘리면서도요. 그러니 '잘못 키웠다'는 말이 비수로 날아와 꽂힐 수밖에 없죠. 김정은 감독은 영화의 제작 배경을 설명하며 “내게 이런 사건이 벌어졌을 때 가장 두려울 것 같은 대상이 이상하게도 나를 가장 잘 이해해줄 것 같았던 엄마였다"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기묘하게도 엄마와 딸은 제일 가깝고도 먼 사이입니다.‘경아’도 과거 남편에게 부당한 성관계를 요구 받고, 동네 사람들의 입소문에 오르내리는 등 성차별로 인한 고통을 겪은 적이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관념에 잠식된 그녀는 언젠가 남편에게 들었던 “걸레 같은 년"이라는 말을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 딸에게 쏘아붙이고 말았죠. 그러나 ‘경아'와 ‘연수’는 결국 디지털 성범죄의 고통을 함께 겪으며, 애증의 모녀 관계를 해소할 첫 발걸음을 뗍니다. 자기 잘못을 참회한 '경아'가 '연수'에게 사과를 건넸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그런데 과연 딸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는 ‘경아'가 현실에도 존재할까요? 딸에게 용기 있게 사과를 건넨 ‘경아'가 엄마에게 단 한 번도 사과받지 못한 K-딸들의 마음속 응어리를 조금은 해소해주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이 세상의 모든 ‘경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저 나와 연대해주세요. 우리에겐 당신의 연대가 무엇보다 큰 힘이 됩니다.⊙ ⊙ ⊙<경아의 딸>은 불법촬영과 모녀 관계부터 성차별과 여성 노동까지 여성의 삶에 관한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익숙한 얼굴의 김정영 배우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하윤경 배우의 탁월한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언제든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영화, 그래서 더 공감이 가는 영화, <경아의 딸>이었습니다.Schedule in SIWFF2022.08.28(일)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6관 10:002022.08.30(화)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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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더 체스트넛 맨 [The Chestnut Man] 덴마크 드라마
형사물 / 다크 / 소설 원작 / 살인 / 몰입도 높음 / 덴마크 드라마 / 청소년 관람불가 / 넷플릭스 드라마 /
잔인하게 살해당한 시신 근처에서 밤과 나무로 만든 인형인 체스트넛맨이 발견된다. 범인은 누구고, 왜 이토록 잔인한 살인을 이어가는 걸까?
형사이자 싱글맘인 툴린은 사이버 범죄부로 옮기기 전 마지막으로 이 사건을 배당받는다. 인력이 늘 부족한 경찰에서 잘릴지 말지 애매한 포지션의 유랑자 헤스를 파트너로 삼게 된 툴린. 사회성은 없지만 실력만은 출중한 헤스의 능력으로 사건에 조금씩 근접해 간다.
더 체스트넛 맨 [The Chestnut Man]은 총 6회차로 호흡이 짧은 편인 드라마이지만, 높은 몰입도와 울림이 있는 드라마다. 잔잔하게 조여오는 심리 스릴러 분야에서 탁월한 덴마크 드라마의 결이 그대로 살아있다.
시종일관 어둡지만 잔잔하고, 잔인하지만 과장되지 않은 형사물이자 스릴러. 학대, 입양, 방치. 사회의 어두운면을 긁어내며 진행되는 이야기가 불편하지만 흡입력 높게 진행된다.
보통 드라마보다는 짧고, 영화보다는 호흡이 긴 작품이 보고 싶다면.
넷플릭스에서 더 체스트넛 맨 [The Chestnut Man]을 스트리밍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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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래디 코베의 정육면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쟁과 홀로코스트로 인해 국경을 넘지 못했던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은 먼저 미국 땅에 당도해 있던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가 한창 작업 중인 ‘마가렛 밴 뷰런 인스티튜트’의 도면을 보며 말한다. “당신을 보고 있어.” 라즐로와 오랜 기간 마음을 주고받았을 에르제벳은 헝가리에서 타국으로 건너와 생활하고 있던 남편 라즐로의 속내를 건축 도면에서 읽는다. 건축가이자 남편인 라즐로 토스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걸 에르제벳은 알고 있다. 에르제벳은 라즐로를 이해하는 만큼 마음과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 동반자다. 에르제벳이 라즐로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터전을 잃은 유대인 건축가가 사라지지 않을 건축물이자 자기 자신을 건설하려는 이야기다.
<브루탈리스트>에서 중요한 것은 이민자의 역사나 자본의 폭력성보다 한 예술가의 집착에 가까운 신념이다. 라즐로는 직접 정육면체를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라즐로는 건축, 즉 자신의 예술품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예술적 신념을 굽히지 않는 건축가에게 3,4미터의 높이나 대리석의 종류와 색은 절대로 사소한 부분이 아니다. 자신의 급여를 내놓아서라도 지켜내야만 한다.
라즐로가 건축을 택한 이유는 그 ‘영속성’에 있다. 시간과 침식 속에서도 견고한 본질을 잃지 않는 것. 파시즘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유린당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춰 해석되더라도 침식되지 않을 건축이야말로 라즐로의 삶이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조피아는 ‘마가렛 리 밴 뷰런 인스티튜트’와 수용소의 유사성을 근거로 홀로코스트의 잔학성과 숭고한 유대주의를 기린다. ‘과정보다 목적지가 중요하다’는 라즐로의 말은 어느새 유대인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변모한다. 라즐로의 건축물은 영원히 남겠지만 그에 덧붙여지는 메시지는 언제고 달라질 수 있음을 내포한다.
인터미션을 제외하고 4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진 <브루탈리스트>에서 에필로그는 불필요해 보인다. 1980년 제1회 건축 비엔날레에는 ‘라즐로 토스: 현재 속의 과거’라는 이름의 회고전이 진행되고 있고 휠체어에 탄 라즐로를 뒤로 한 채 조피아가 연설을 맡는다. 이 연설은 자못 유대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읽힌다. 영화의 서막에 등장했던 조피아의 심문 시퀀스가 다시 펼쳐짐으로써 유대인 박해의 부당함과 유대주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듯하다. 그러나 에필로그 속에서 라즐로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조피아의 딸이 젊은 조피아를 연기한 라피 캐시디라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서막에서 조피아는 자신의 정체성과 신분을 심문받는다. 에필로그의 라피 캐시디는 또 한 번 유대주의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앞의 시험대에 서서 정체성을 증명해야만 하는 시험을 받고 있다. 무력하게 앉아 침묵하는 라즐로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이 아니다. 그의 건축물에 유대인을 기리는 특별한 의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라즐로와 조피아가 향하는 목적지가 다름에도 침식되지 않고 영원히 남는 건축물을 꿈꾸는 예술가를 보며 현대를 살아가는 몇몇 관객의 앞에는 처참히 부서진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브래디 코베 감독은 라즐로가 어떤 건물을 지었는지, 이민자가 결국 어떻게 정착을 이뤄냈는지보다 자본과 이데올로기에 유린당하는 예술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이탈리아의 카라라 대리석의 아름다움을 탐미하던 해리슨(가이 피어스)은 술과 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라즐로를 강간한다. 에르제벳은 밴 뷰런 가족의 식사시간에 해리슨의 행동을 폭로한다. 해리슨은 식사 자리에서 사라져 행방이 묘연해진다. 가족과 일꾼들은 해리슨을 찾기 위해 ‘마가렛 밴 뷰런 인스티튜트’를 훑는다. 그리고 마침내 이탈리아의 아름답고 거대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제단 위로 십자가의 달빛이 뒤집혀 떨어진다. 거대 자본에 유린당하는 숭고한 예술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이 신은 감독이 영화를 통해 그려내고자 한 목적지에 가까운 장면이다. 브래디 코베 감독이 선보인 <브루탈리스트>라는 정육면체는 많은 이야를 품고 있지만 빛은 단연코 그 장면을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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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파묘>가 주말 극장가를 휩쓸며 200만명을돌파했습니다. 개봉 사흘째에 누적 관객 수 100만명,
나흘째에 200만명을 각각 돌파하며 <서울의 봄>보다 높은 관객수 추이를 보이고 있는데요!
호러 영화지만 고전적인 방식이 아닌 잘 짜여진 각본과 독특한 분위기를 통해 압박하는 작품으로 영화계의 돌풍이 일고 있는 작품 <파묘>. 이번주 박스오피스 분석 시작합니다.[국내 박스오피스]
영화 <파묘>가 개봉 4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이는 2023 최고의 흥행작 <서울의 봄>이 개봉 6일째 200만 관객을 동원한 것보다 2일 더 빠른 속도며, <파묘>는 2024년 일일 최다 관객 수를 기록하며 한국 오컬트의 위력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2위로는 27만 명을 모은 <웡카>, 3위는 100만을 앞두고 있는 <건국전쟁>이 기록했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레게 음악의 전설을 그린 영화 <밥 말리 원 러브>가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했습니다. 오프닝 성적으로는 영화 <앨비스>와 <로켓맨>의 오프닝 성적을 뛰어넘었으며 <보헤미안 랩소디> 다음으로 높은 수익을 기록했습니다. 주인공 ‘밥 말리’를 연기한 킹슬리 벤-아디르는 디즈니+ 드라마 <시크릿 인베이전>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영국 출신의 배우로 최근 <바비>의 작품 출연으로 얼굴을 익혀온 배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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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브스턴스 | 미치는 대신 미친 척하는 바디 호러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걸 정도로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스타 배우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하지만 현재 그녀는 한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전락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서 프로그램에 임하던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소식이 전해진다. 50살 생일날, '프로듀서 하비'(데니스 퀘이드)가 “어리고 섹시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녀를 해고한 것.
충격에 빠진 엘리자베스는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한 뒤 병원에 실려간다. 그곳에서 그녀의 인생은 180도 달라진다. 한 젊은 남성 간호사로부터 젊고 완벽한 신체를 만들 수 있다는 약물, '서브스턴스'를 소개받은 것. 7일이라는 기간만 잘 지키면 원래 몸과 젊은 몸 모두 부작용이 없다는 말에 엘리자베스는 기꺼이 약물을 주사한다. 그렇게 탄생한 '수'(마가렛 퀄리)는 엘리자베스를 대신해 두 번째 인생을 누리기 시작한다.
샹그릴라 신드롬과 엔디미온
샹그릴라 신드롬. 제임스 힐턴의 1933년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평생 늙지 않고 영원한 젊음을 누릴 수 있는 가상의 지상낙원, '샹그릴라(Shangri-La)'의 이름을 본뜬 말이다.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늙지 않고 젊게 살고 싶은 욕구가 확산되는 사회적 현상을 의미한다. 이 신드롬은 21세기에도 유효하다. 인기 연예인의 관리 비법은 언제나 관심사다. 중장년의 전유물도 아니다. 최근에는 세대 막론하고 저속노화 열풍이 불고 있다.
젊음을 향한 열망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그리스에서는 달의 여신 셀레네와 목동 엔디미온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셀레네는 절세의 미남 엔디미온에게 반한 나머지 그가 잠들었을 때마다 그와 그의 양들을 지켜주었다. 사랑이 더 커진 셀레네는 그의 미모가 영원하기를 바랐다. 그녀는 제우스에게 부탁하여 그가 영원히 변함없이 깨어나지 않는 잠을 선사했고, 잠든 그와 관계를 가져 '메나에'라고 불리는 50명의 딸을 낳았다.
그런데 엔디미온 이야기는 샹그릴라 신드롬에 경종을 울리는 비극이기도 하다. 엔디미온은 영원한 젊음도, 가족도 전혀 알지 못하는 고통 속에 빠진 채 평생을 살았다. 태어나서 성장을 했다가 노화하여 안식, 즉 죽음에 이르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벗어난 대가인 셈이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서브스턴스>는 이 오래된 경고를 재해석한다. 신선한 연출, 파격적인 이미지, 달라진 시대상황을 곁들여서.
탁월한 시작
<서브스턴스>는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잘 나가는 할리우드 스타였던 엘리자베스가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전락한 과정을 보여주는 시퀀스만 봐도 영화에 압도된다. 일반적인, 예측가능한 형태를 완전히 빗겨나가기 때문. 익숙한 형태는 다음과 같다. 엘리자베스가 화려한 시상식에 초청받고, 정신없는 파티를 즐기는 컷이 연달아 나온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출연 제의가 끊기고, 어두운 방에서 좌절하는 그녀를 카메라가 비춘다.
<서브스턴스>의 카메라는 전혀 다른 광경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배치된 엘리자베스의 별을 바로 위에서 비춘다. 별이 처음 제작된 후에는 그 주변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화려하게 터지고 여러 행사가 개최된다. 그녀의 별을 보러 온 팬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상황이 달라진다. 별 현판에는 금이 가고, 사람들은 마구 밟고 다닌다. 그녀의 이름을 아예 모르는 행인들이 늘어나고, 심지어 먹던 햄버거를 떨어져서 소스가 묻어도 치우는 시늉만 하고 지나간다. 이 짧은 컷들의 조합만으로도 정상에서 서서히 내려온 엘리자베스의 현재 상황, 감정, 욕망, 결핍이 모두 전달된다. 직관적인 이해가 가능한 이 오프닝은 배우의 부재 덕분에 더욱 인상적이다.
놀라운 이미지의 향연
이미지 활용 능력도 탁월하다. 젊음과 탐욕이라는 두 키워드가 스크린에서 넘쳐흐르는 듯하다. 엘리자베스의 몸을 비집고 나온 수가 처음으로 자기 얼굴과 몸을 거울에 비춰보며 만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엘리자베스가 진행자였던 에어로빅 쇼의 새 출연자 오디션 장면도 마찬가지다. 수의 신체 곳곳을 비추는 대목은 마치 여성의 젊음과 육체미를 노골적으로 찬양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와 대비되는 음식의 이미지는 기괴한 만큼 소름 끼친다. 하비는 엘리자베스와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그녀의 해고 소식을 전한다. 더 젊고, 아름다운 신체를 지닌 진행자가 필요하다면서. 이 자리에서 하비는 새우를 게걸스럽게 까먹는다. 저작활동은 손과 입가가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엘리자베스의 심경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그의 욕망을 대신 보여주는 듯하다.
수가 유명해질수록 엘리자베스의 폭식증이 심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수가 음식을 광적으로 먹어치우는 모습뿐만 아니라, 그녀가 식사를 마친 후의 잔해가 더 눈에 띈다. 그녀가 먹어 치운 음식의 잔해는 앙상하고 피폐하다. 닭을 먹으면 기름이 흥건한 접시 위에 살점이 일부 붙은 뼈만 남긴다. 이 잔해더미는 수에게 생명력을 뺏긴 채 나날이 껍데기만 남고 생기를 잃어가는 엘리자베스의 모습과 같다.
개인이 아닌 시스템
독특한 오프닝과 이미지의 조합은 <서브스턴스>의 메시지가 극대화되는 환경을 마련해 준다. 겉보기에 <서브스턴스>의 메시지는 엔디미온과 셀레네의 사랑 이야기와 같다. 젊음을 욕망하다가 자기 인생을 파괴하는 주인공에 대한 비판이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애 과정을 부정하고 이를 벗어나려는 탐욕과 그 선택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서브스턴스>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젊음을 욕망하고,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개개인의 노력을 탓하지 않는다. 개인의 욕구를 부추기는 시스템을 최종적으로 비판한다. 그 중심에는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쇼 비즈니스가 있다. 즉, 영화나 TV 같은 미디어가 젊어지고 싶고, 젊음만이 좋은 것이라는 욕망을 끊임없이 주입한다는 것. 젊음을 유지하지 못한 사람은 가치가 없는 인물로 매도하는 시스템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말이다.
수가 밤에 거대한 광고판을 보는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자기 화보를 보던 그녀는 7일이 지났는데도 원래 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더 빨리 늙고 미라로 변해도, 젊은 몸을 유지하기로 결심한다. 그러지 않으면 수도 언제든 경쟁에서 밀려날 수 있으니까. 엘리자베스가 하루아침에 에어로빅 쇼에서 해고됐듯이. 즉, 지금과 같은 시스템 하에서 개인은 젊어지지 않아도, 젊어지려고 해도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에어로빅쇼 스튜디오 복도의 모습도 흥미롭다. 좁고 긴 복도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야 할 것 같은 갑갑함을 조성한다. 실제로 엘리자베스가 해고당할 것이라는 소식도 듣고, 자기 물품과 무성의한 선물을 받는 공간도 모두 이 복도다. 즉, 이 복도는 TV 쇼에서 살아남을 정도로 젊고 매력적이면 안 된다는 강박과 시스템의 원리를 시각화한 공간인 셈이다.
시스템을 향한 반란
클라이맥스는 충격적인 이미지로써 쇼 비즈니스 시스템의 내재적 문제를 직격한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뒤틀린 괴물의 생김새만 봐도 그렇다. 이 괴물은 코 대신 가슴이 얼굴에 달렸다. 여성 지원자들의 몸매를 품평하던 면접관들의 말 그대로다. 그들의 성희롱이 단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인 만큼, 엘리자베스라는 괴물은 영화가 지적한 모든 문제가 한 데 모여 형상화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극장 시퀀스도 호불호가 나뉠지언정 분명 의미심장하다. 괴물이 된 엘리자베스는 무대 위에 오른 뒤, 온몸으로 피를 내뿜는다. 무대와 관객석은 피바다로 변하고, 자리에 앉아 있던 관객들도 모두 피칠갑된다. 이는 호러라는 장르적 쾌감 못지않게 서사적으로도 중요한 갈무리다. 시스템의 피해자인 엘리자베스가 시스템에 종사한 모든 이들에게 복수하고, 그녀의 피에 그들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헝거게임>에서 캣니스가 화살을 날리는 장면을 연상할 수도 있다. 그녀는 매번 헝거게임이라는 시스템을 유지한 이들에게 활을 쐈다. 게임메이커에게, 스노우 대통령에게, 코인 대통령에게. 그렇게 그녀는 헝거게임 게임장을, 더 나아가서 판엠이라는 시스템 자체를 전복했다. 캣니스에게 활과 화살이 있었다면, 엘리자베스에게는 피가 있었던 셈이다. 차이점이라면, 캣니스는 성공했고 엘리자베스는 실패했다는 것 뿐이다.
파격이 빠진 반란
그런데 엘리자베스의 반란은 보이는 것에 비해 감정적으로는 그다지 놀랍지 않다. 물론 그녀의 반란 자체는 인상적이다. 군더더기 없는 전개 덕분에 그녀의 이야기는 세련됐고, 깔끔하다. 약물을 만든 흑막에 대해서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엘리자베스와 수 외의 인물은 최소한의 역할만 하고 빠진다. 자연히 엘리자베스와 수의 관계, 그들의 욕망이 낳은 비극에만 몰입할 수 있다.
다만, 큰 틀에서 보면 충격적인 이미지나 기교에 비해 내용물이 예측가능하다. 더 젊은 '나'가 무절제한 삶을 누리고, 무분별하게 젊음에 취해 살다가 본래 자기 자신과 함께 파멸한다는 이야기는 여러 SF 영화 등에서 익숙하다. 즉, 오프닝 시퀀스나 식사 장면, 그리고 엘리자베스 몸에서 수가 빠져나오는 장면에서의 발칙한 상상력이 서사적인 측면에서는 발휘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관통한 <서브스턴스>의 통찰은 중요성에 비해 충분히 날카롭지 않다. 시각적으로는 놀랍도록 기괴한 경험을 했지만, 이미지가 남긴 충격에 이야기의 메시지가 묻혀 버린다. 엘리자베스가 자기 별 현판 위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수미상관 결말이 오프닝만큼 뇌리에 각인되지는 않는 이유다. 결국 <서브스턴스>는 2%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우지 못한 채 막을 내린다.
Acceptable 무난함
선 넘은 이미지를 빛바래게 한 선을 지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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