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2025-05-18 23:38:48
경계가 무너진 세계에서
<소년의 시간>을 보고
2010년대부터 스마트폰의 이용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며, 인류의 삶은 예전과 달라졌다. 이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고화질의 사진과 영상을 찍히고, 보호자는 자신들이 아이에게 눈길을 주지 못하는 시간엔 패드를 쥐어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만의 스마트폰을 가지는 이들. 직전 세대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시대를 경유한 세대라면,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 태어난 알파 세대의 인생에 있어 스마트폰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다.
<소년의 시간>은 13살 소년 제이미를 주인공으로 삼는 시리즈이다. 마시멜로우가 들어간 핫초콜릿을 좋아하는 소년은 동급생 여자 아이 케이티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용의자이기도 하다. 4편의 리미티드 시리즈로 제작된 작품은 범인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긴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다. CCTV에는 명백한 물증이 남았고, 제이미는 사건의 범인임이 틀림없다. 누가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가는 이미 밝혀진 바, 이제 질문은 ‘왜’ 제이미가 살인을 저질렀는가이다.
살인의 동기를 파악하기 위해 관계자들은 제이미와 케이티가 맺어온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10대의 소년 소녀가 맺어온 관계는 기존의 문법과는 다르다. 둘 사이에 있어 오프라인 상의 교류는 쉽게 찾아볼 수 없으나, 온라인 상의 SNS에는 두 사람이 나눈 소통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들에게 SNS란 무엇인가. 알파세대에게 있어 SNS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학창시절부터 스마트폰을 이용해온 앞세대로서 SNS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할 수 있을 것 같다.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까지. 친구들이 사용하는 SNS의 계정을 자연스레 만들었다. 일상을 담은 사진을 올리고, 온갖 생각들을 기록했다. 친구들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고, 친구들에게 좋아요를 받기도 했다.
성인이 되었다. 페이스북의 시대는 어느새 저물어갔고, 인스타그램은 대세가 되었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사진을 찍고, 친구들을 태그하고, 태그당한 스토리를 리그램한다. 인스타그램은 하나의 연락처가 되기도 한다. 지인들과 번호 대신 계정을 교환하는 일도 왕왕 있다. 카톡은 하지 않아도 댓글을 달고 dm을 나누는 사이도 있다. 현시대에 SNS를 이용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를 넘어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의 관계자들은 이같은 문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CCTV에 남은 물증을 제외하면, 두 사람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인스타그램의 댓글뿐인 상황에서 이들의 분석은 끝없이 현실과 어긋난다. 첫 번째 면담의 시간, 경찰은 케이티가 제이미의 게시물에 댓글을 달았다는 이유로 두 사람을 친구라고 유추한다. 임상 심리학자도 SNS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녀는 제이미가 인스타그램 계정을 가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 물으며, 여럿이 찍어 올린 사진 속 태그의 의미에 대해 묻기도 한다. 디지털 네이티브에겐 그저 일상에 불과한 일들이 기성 세대에겐 의문이 되고, 제이미와의 소통은 끝없이 실패한다.
태어나자마자 디지털과 연결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는 흐릿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오프라인에서 배제된 이들의 삶에 있어서는 온라인의 삶이 더욱더 선명한 삶일 수도 있다. 케이티에게 ‘인셀’로 칭해지고, 또래 집단에서 따돌림을 받았던 제이미의 삶이 그랬을 것이다. 제이미는 인스타그램의 세계에서 노출이 심한 여성 모델들의 사진을 리포스트하고 댓글을 남겼다. 스냅챗을 통해서는 남학생들과 함께 케이티를 비롯한 같은 학년 여자애들의 반나체 사진을 돌려보기도 했다. 그는 이같은 디지털 성폭력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모두 동참한 일이라며 자신의 잘못을 흐리고, 사진을 유출한 동급생은 안쓰러워한다. 한 번 사진을 유출했으니, 신뢰를 잃어 다시는 그런 사진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게 그 이유다.
온라인 세계에서 그가 습득한 여성의 모습은 편향적이기 그지없다. 성인 여성들은 과도하게 성적 대상화된 이미지로 비춰지며, 또래 여자를 바라보는 모습 또한 인셀의 논리와 맞닿아있다. 그는 자신이 인셀이 아니라 주장하나, 여성을 일부 남자만 얻을 수 있는 ‘트로피’ 같은 것으로 여긴다. 그런 그에게 연애와 살인은 게임 같은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케이티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진이 유포된 뒤 마음이 약해졌을 그녀를 얻을 ‘영리한 전략’을 세웠으나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러자 홧김에 그녀를 죽인 것이다. 명백한 물증에도 무죄를 주장하는 제이미. 여성을 소유물이자 트로피 정도로 생각하는 그는 실제로 자신의 행동이 큰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라 해야할까. 결말부에 이르면 제이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어떤 과정을 거쳤기에 그가 유죄를 인정하게 되었는지 작품은 보여주지 않는다. 변한 것은 현실세계와 분리되어 스마트폰을 잃은 채 몇 달을 보냈다는 것 정도일테다. 어쩌면 그는 스마트폰이라는 ‘연결된 신체’를 벗어나, 비로소 오롯한 자신으로 사유하게 되었을 때 죄를 인정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문화비평가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 메시지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미디어가 다루는 내용이 메시지로 기능하는 것은 사실이나, 내용을 담는 그릇인 미디어 자체도 메시지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언제나 손에 쥐고 있는, 어쩌면 신체의 일부라 보아도 무방한 스마트폰을 켜면 여성혐오적인 메시지는 시청각적으로 체화된다. 그렇게 소년들은 자연스레 여성혐오를 배운다. 그리고 이는 온라인 세계를 넘어 오프라인 세계에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소년의 시간>은 단순한 픽션이라 보기엔 현실과 닮아있는 작품이다. 오늘도 수없이 많은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있다.
최근 호주에서는 16세 미만의 아동, 청소년에게 SNS 이용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과연 이같은 조치가 무엇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 이들은 우회하는 경로를 발견하거나,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특정 연령이 지나면 SNS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즉, 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나아가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라고 할지언정, 미디어는 진공상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제이미 이전에 직간접적으로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해온 가부장적인 제이미의 아버지가 있었고, 여성 임상심리학자를 낮잡아보는 남성 경비원이 있었다. 미디어는 사회가 이야기하는 메시지를 품고 발화한다. 기성 세대가 새로운 세대의 관계의 문법을 넘어, 삶의 문법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노력만으로는 우리는 함께할 수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여성혐오적인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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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이트 클럽 / Fight Club
< 줄거리 >
매일 똑같은 루틴의 생활과 목표의식 없는 삶에 지쳐있던 주인공.
주인공은 그런 삶에서 느끼는 공허와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질병소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과 똑같이 매일 모든 모임에 참석하는
수상한 여자 말라를 만난다.
그녀에게 더이상 마주치지 말자며 말하고 떠나는 주인공.
그리고 몇일 후 집에 돌아오는 비행기 옆자리에서
비누판매원 타일러를 만나게 된다.
집에 돌아온 주인공은 자신의 집이 불타는 것을 보고
한 번 보고 말 사이라고 생각했던 타일러에게 전화를 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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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파이트 클럽 얼굴 담당. 이름도 엔젤 페이스임.
< 느낀점 >
삶의 공허함과 무너져 버린 자아의식을 회복하기위한
그들만의 다소 과격한 방법
YELM
현대사회에서 모든 인간들은 자신에 대한 회의감과 공허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주인공이 택했던
첫번째 방법은 가구 쇼핑
두번째 방법은 질병소모임
그리고 그가 택한 가장 좋은 방법인
세번째 방법은 파이트 클럽이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폭력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것이
비단 남성들만의 일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입장을 대입해서 생각해봐도,
화가나거나 무언가에 억눌려 있을 때
배게를 세게 치던지, 허공에 소리를 지르던지,
아무도 없는 빈방에 홀로 서서 평소하지도 않던 욕을 마음껏 외쳤을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화' 가 풀리지 않았던가?
폭력이 아니더라도 진짜 억제된 본능에 충실했을때
그제서야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는 현세대의 고통을 진짜 '본능'에 의존하여
해소하는 가장 폭력적인 방법을 제시해 준 것 같다.
인간은 인간다울 때 비로소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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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주인공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도 분명히 마음 속 깊숙이 어딘가에
타일러 더슨을 숨겨 놓고 있을 것이다.
이 마지막 엔딩씬은 뭔가 곱씹을수록 마음이 아려온다.
저 무너져 내려가는 건물들은 자신을 억눌러온 사회에 대한 반항을 의미하지만,
타일러를 없애 버린 주인공의 행동은 결국 본능과 자유보다는
사회에 자신을 맞춰가겠다는 의미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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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엄청 기대했던 영화여서 그런지
보고나서 약간의 실망을 하긴 했지만,
영화를 다보고 리뷰글을 적다보니 다시 보고 싶어졌다.
이 영화는 2번이상 보았을 때 그 진가를 알아본다던데
그 말이 틀린말이 아닌 것 같다.
반전은 솔직히 쫌 흔한 클리셰여서 딱히 놀라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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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은 ‘계몽’될 수 있을까
주변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소년의 시간〉에 관한 요란한 상찬이 이어졌다. 원래 인기 있는 드라마는 나중에(심지어는 몇 년 후에) 시차를 두고 보는 걸 좋아하는 터라 버텼다. 그러나 도저히 미룰 수 없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느낌에 뒤늦게 그 대열에 합류했다. 작품에 쏟아진 엄청난 반응에 과장이나 부풀림은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화제가 된 글 〈내 아들을 극우 유튜버에서 구출해왔다〉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작품이었다. 전 세계가 청소년 남성의 극우화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듯하다.
총 4회로 구성된 이 작품은 모든 회차가 원테이크로 촬영되었다. 실제 원테이크로 촬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렇다. 원테이크의 강점은 화면 속 인물들의 경험을 시청자가 ‘실시간’으로 접해 몰입감을 높인다는 점이다. 축약된 시간을 수동적으로 전달받는 게 아니라 주인공들과 ‘함께’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 듯한 효과를 내는 것이다. 청(소)년 남성의 극우화라는 시급한 주제에 걸맞는 연출 기법이다.
열세 살 난 청년 제이미가 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긴급 체포되고 경찰 조사를 받는다(1화). CCTV 등은 확보되었지만 범죄에 쓰인 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사건의 동기가 오리무중이다. 이 앳된 얼굴의 남자아이가 도대체 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담당 형사가 단서를 찾기 위해 제이미의 학교로 가서 그와 피해자 케이티의 친구들을 만난다(2화). 드라마가 학교를 그려내는 방식을 눈여겨보자. 학교는 처참하고 황량하며 절망적이다. 학교에서는 구토, 양배추, 정액 냄새가 난다. 학생들은 통제 불능이다. 선생님은 그런 학생을 윽박지르거나 어수룩하게 끌려다니기만 한다. 지옥이다. 학교는 “카오스”고, “동물 우리”다. 정말 학교가 저런 곳이었나? 드라마는 자극적인 뉴스로만 접하던 학교 현장을 ‘증명’한다. (다른 시공간에 사는) 내 학생 시절의 기억과 경험이 붕괴되는 듯했다.
학생들을 어찌할 줄 모르는 건 선생님뿐만이 아니다. 경찰, 부모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학생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독해할 능력이 없다. 참다못한 경찰의 아들이 몰래 그를 찾아온다(그는 ‘유능한’ 경찰인 아빠에게 “아빠는 애들이 뭐 하는지 못 읽어”라고 말한다). 경찰의 아들을 통해 인스타그램에서 제이미와 케이티가 주고받은 댓글과 게시물이 남성성에 관한 잔혹한 조롱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그들 또래의 세계관에서는 80퍼센트의 여성이 20퍼센트의 남성을 좋아하는데, 제이미는 그 20퍼센트에 들지 못했다. 케이티를 포함한 많은 또래 학생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제이미를 조롱했다는 것도 밝혀진다. 고작 열세 살짜리 남자애가 여자를 ‘갖지’ 못하는 상황에 절망했고, 그 절망이 조롱당하자 사람을 죽였다. 능력주의 경쟁 사회에서 학교는 지옥이고, 어른은 무능하며, 학생들은 능력주의에 연동된 젠더 질서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서로를 혐오한다. 이것이 ‘교육’ 현장 학교의 모습이다. 2화의 마지막, 부감 숏으로 학교를 비추던 카메라가 케이티가 살해당한 곳으로 추정되는 주차장으로 클로즈업된다. 그곳에는 죽은 케이티를 추모하는 꽃다발이 놓여 있다. 너무 늦은 ‘클로즈업’은 아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어느 ‘유능한’ 형사의 무력감을 대변한다.
얼마 후 심리 전문가가 보호 시설에 수감된 제이미를 면담한다(3화). 전문직 여성인 그녀는 노동 계급에서 태어나 자신을 ‘무시’한 또래 여성을 살해한 제이미와 정반대에 있는 인물이다. 두 사람의 숨 막히는 공방이 이어진다. 제이미는 자신을 ‘파악’하려 드는 전문가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를 궁금해한다(‘전문직’과 ‘노동 계급’ 사이의 긴장은 상담사와 보호 시설의 경비원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제이미는 다른 성별인 그녀가 자신의 범행 동기를 ‘이해’할 수 있을지 우려하기도 한다. 당신이 남자의 박탈감을 아느냐는 것이다. 면담이 진행되며, 제이미의 마음속 깊은 곳에 노동 계급 남성성을 갖춘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가 들어 있다는 점이 점차 드러난다. 다르게 말하면 ‘루저 남성성’이다. 제이미는 계급, 지위, 연령 등 여러 측면에서 여성 전문가와 대등하게 맞설 수가 없는데, 그는 특유의 영민함과 살인을 저지른 남성이라는 데서 오는 공격적 남성성으로 종종 상황을 반전시키기도 한다.
제이미는 이 대화가 불편하면서도 즐겁다. 대화를 이후에도 계속 이어가고 싶다. 그가 지금껏 해보지 못한 진솔하고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이해’받는 느낌을 얻고, ‘전문직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루저 남성성의 결핍을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는 몇 번의 긴장감 넘치는 밀도 높은 대화로 자기 일을 끝낸다. 그래서 더는 제이미를 만날 필요가 없다. 그녀는 면담을 마친 후 힘든 과제를 마쳤다는 듯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다시 제이미를 마주할 필요는 없다. 제이미는 폭주한다.
이 드라마에서 3화가 제일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아들을 극우 유튜버에서 구출해왔다〉의 글쓴이와 3화의 전문가는 같은 입장을 취하고, 같은 정보를 전한다. 그들은 묻는다. 저 남자아이들이 도대체 왜 저러지? 대화 후 ‘이해’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거나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남자아이는 다시 외롭게 남는다. 기존의 분노와 박탈감은 더욱 커진다. 이 회차를 보고 나서, 수많은 글의 ‘분석 대상’이 되는 남자아이들이 왜 자신들을 ‘이해’하려 드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커다란 반감을 갖는지 ‘이해’가 됐다. 누군가가 세계를 이해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퍼즐 조각처럼 활용된다면, 나 역시 같은 기분을 느낄 것이다. 제이미의 분노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과 접속하고 대화하며 관계 맺을 필요성을 분명하게 환기한다. ‘계몽’의 의도를 내포한 접근이 아닌 그들의 생각과 마음에서 출발하는 내재적 접근, 즉 카메라의 방향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드라마는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4화). 아빠의 생일날, 누군가가 가족의 자동차에 ‘강간범’이라는 낙서를 남긴다. 제이미의 가족들은 평생을 살아온 곳에서 낙인과 손가락질을 받는다. 아빠는 비눗물로 이 낙서를 지우려다 실패하고, 결국 분노에 차 페인트를 통째로 낙서 위에 쏟아버린다. 깔끔하지 않게, 얼룩덜룩 지워져버린 낙서는 이 가족이 마주한 현재와 미래의 은유다. 자동차가 달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 저 차는 왜 저렇게 더럽냐며 수군거릴 것이다. 엔딩은 그래도 자동차가 ‘달릴 수 있다’는 데 더 초점을 둔다. 부모는 이 모든 게 자신의 책임이 아닐까 자책하고, 특히 아빠는 남성성의 ‘건전한’ 계승이 실패했다는 데 좌절한다. 그러나 그 자책과 좌절 속에서도 남은 가족이 어떻게 용기와 희망을 길어낼 수 있는지를 작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한다. 이렇게, 어느 청소년 루저 남성과 연관된 하나의 세계(학교, 가족, 남성성, 범죄)가 갈무리된다.
〈내 아들을 극우 유튜버에서 구출해왔다〉의 글쓴이는 아들을 ‘구출’했고, 〈소년의 시간〉에서 남은 가족은 아들과 떨어진 채로 힘겹게 자기 자신을 지탱한다. 현실과 드라마라는 각자의 무대에서, 계급적·문화적 자원의 차이로 서로 다른 결말을 맞이한 이 두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여러 물음과 과제를 남긴다. 내가 얻은 결론은 이렇다. 〈소년의 시간〉과 같은 드라마는 카메라의 방향을 바꾸어서, 즉 ‘루저 남성’이 그에게 박탈감을 주는 대상을 바라보는 방향으로도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이해’ 혹은 ‘공감’ 혹은 ‘계몽’이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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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 영화', 그 틀 밖의 작품
- 지인에게 이 영화를 추천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쓱 검색해보더니, "동물 나오는 영화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리고 서부 영화도 내 스타일 아니야."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척 봐도 서부 영화 같고, 게다가 제목이 <퍼스트 카우>인 이 영화는 놀랍게도 그런 영화가 아닙니다.반신반의하는 제 지인을 위해, 그리고 혹시나 같은 생각을 하실지도 모르는 여러분을 위해, 오늘 이 영화를 한 번 본격적으로 영업해보겠습니다.※ 10월 28일(목)에 진행된 <퍼스트 카우>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퍼스트 카우>는 2021년 11월 4일 국내 개봉했습니다.퍼스트 카우First Cow<퍼스트 카우>의 배경은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입니다. 미국이 기회의 땅으로 불렸던 때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서부 시대입니다. 그럼 이 영화도 결국 ‘서부 영화’ 아닌가요? ‘서부 영화’는 맞지만, ‘서부 영화’가 아니라고 해야 정확하겠습니다. 시대적 배경은 서부 시대가 맞지만, 장르로서는 서부 영화가 아니거든요.몰아치는 액션과 시끄러운 총소리로 버무려진 개척 정신과 약육강식. 영화의 한 장르로서 ‘서부 영화’는 이러한 전형성을 갖습니다. 화끈한 총격전은 필수, 매력적인 액션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총탄을 갈겨도 서부 영화는 그저 통쾌하기만 할 뿐,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개척 정신이라는 명목 하에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어쨌든 서로 죽고 죽이는, 살인과 폭력의 스토리니까요.그런데 <퍼스트 카우>는 유쾌합니다. 이 서부 영화는 그저 ‘서부 개척 시대의 두 남자가 돈을 벌기 위해 의기투합하여 소젖 서리를 하는 이야기’거든요. 총은 고사하고, 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습니다. 개척 시대에 소젖 서리라니, 영화의 줄거리를 텍스트로 옮겨놓으니 이 영화의 유쾌함이 더욱더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주인공 ‘쿠키’와 ‘킹 루’는 총을 잡는 대신 우유를 훔쳐 빵을 만들고, 그 빵을 팔아 돈을 법니다. 여느 서부 영화와 다를 바 없이 남성들이 주인공이지만, 이들은 어느 서부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는 남성들입니다. ‘쿠키’는 유대인, ‘킹 루’는 중국인입니다. 유대인과 동양인은 2세기가 흐른 지금도 여전히 비주류의 상징이죠. ‘킹 루’는 사업가적인 기질을 발휘해 총 대신 머리를 굴리며 개척 시대를 살아내는 인물이고, ‘쿠키’는 괴롭힘을 당하는 무리 내 약자이면서도 거처에 들꽃을 꺾어 꽂아둘 만큼 섬세한 성정을 가진 인물입니다. 이들은 싸움이 벌어져도 총을 들고 맞서기보다 그 자리를 조심스레 벗어나기를 택하곤 합니다. 개척 시대의 전형적인 남성성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들이죠. 총잡이들의 세상에서 총잡이로 살아가지 않는 비주류의 인물들. 이 영화가 서부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유쾌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영화는 꽤 오랜 시간을 할애해 두 인물의 특징과 성격을 느긋하게 설명합니다. 서부 시대를 살아가는 두 비주류의 이야기를 관객이 낯설어하지 않도록 말이죠. 당연히 서부 영화인 줄 알고 보러 왔는데, 총소리 한 번 듣지 못하고 극장을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한 발 정도의 총소리는 있었을지도 모릅니다만, 이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이 영화는 잔잔하게 흘러갑니다.주류의 역사만을 그려온 서부 영화에 등장한 비주류의 이야기. 낯섦은 유쾌함으로 바뀌고, 유쾌함은 곧 깨달음이 됩니다. 내가 주류의 그늘에 가려진 비주류의 이야기를 또 놓치고 있었구나. 훌륭한 영화 한 편 덕분에 오늘도 제 시야가 한층 더 넓어졌습니다.⊙ ⊙ ⊙가끔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도통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분명 되게 좋은 영화 같은데, 도대체 하려는 말이 뭐지? 관객에게 해석을 맡기는 건가? 나만 이해를 못 한 건가?’ 하며 혼란에 빠지곤 하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정말 친절하거든요. 시작부터 작품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상냥하게 알려줍니다. 바로 이 인용문을 통해서요.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man friendship.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인간에게는 우정.윌리엄 블레이크가 쓴 ‘지옥의 격언(Proverbs of Hell)’의 한 구절입니다. 영화는 이 시를 인용하며 우리가 풀어놓을 스토리가 다름 아닌 ‘우정’에 관한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퍼스트 카우>는 나란히 누워 숨진 두 사람의 시신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친절한 길잡이 덕분에 쉽게 유추할 수 있죠. 저 시신 2구가 우정을 나눈 친구일 것이며, 남은 러닝타임 동안 그것을 설명하리라는 걸요. 아무래도 앞서 소개해드렸던 영화 줄거리를 조금 보충해야겠습니다. 이 작품은 ‘서부 개척 시대의 두 남자가 돈을 벌기 위해 의기투합하여 소젖 서리를 하며 우유보다 진한 우정을 쌓는 이야기’입니다.왜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우연한 계기로 친구가 된 두 사람이 어떠한 사건(대부분 오해)으로 인해 사이가 멀어진다. 이후 끊임없이 대립하던 두 사람은 갑자기 위기의 상황에 놓이고, 어느 한 사람이 모종의 희생(목숨에 위협이 갈 정도로 심각하지만, 절대 죽지 않는다)을 통해 요란하게 우정을 증명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보고 이런 영화겠거니, 지레짐작한 것이 사실입니다.그러나 ‘쿠키’와 ‘킹 루’의 우정은 요란스러움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들은 참으로 차분하게 우정을 쌓아갑니다. ‘쿠키’는 위기에 빠진 ‘킹 루’를 구해주고, ‘킹 루’는 나중에 다시 만난 ‘쿠키’에게 거처를 제공하는 배려를 베풉니다. 그들은 개척 시대의 한복판에서 노닥노닥 서로의 고향과 각자의 꿈에 관한 대화를 나눕니다. 그저 고향에서 먹던 우유 넣은 빵이 먹고 싶을 뿐인 ‘쿠키’와 그렇게 만든 빵을 팔면 돈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킹 루’.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의기투합하여 마을에 하나뿐인 소젖을 훔칩니다. 훔친 우유로 만든 빵이라는 사실을 들켜 쫓기는 와중에도 둘의 우정은 탄탄합니다. 사소한 오해도, 야비한 배신도 없습니다. 이들의 우정은 그렇게 변곡점 하나 없이 끝까지 무탈하게 흘러가죠.흔하디흔한 배신, 탐욕, 오해가 없는 우정 이야기가 어찌나 낯설던지. 저도 모르게 세속에 너무 물들어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꼭 배신한 상대를 용서해야만, 탐욕을 억눌러야만, 오해를 풀어내야만 진정한 친구가 되는 건 아니죠. 진정성 있는 교감, 우정의 전제조건은 그것 하나면 충분합니다.⊙ ⊙ ⊙시사회장에서 제 옆자리에 앉아계시던 분은 자신이 예상했던 서부 영화가 아니었는지, 소젖 서리를 시작하기도 전에 극장을 나가시더군요. 참 안타깝습니다. 이 영화야말로 ‘서부 영화’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은 작품인데 말이죠. 장르의 전형성을 비트는 역작은 그것만으로 충분히 관람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과연 의구심을 품던 분들께 제 영업이 제대로 먹혔을지 궁금하네요. 혹시 이 리뷰를 읽으시고 영화를 감상하고픈 마음이 드셨다면, 영화 감상 후 댓글에 여러분의 느낀 점을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참, 어느새 낯설어져 버린 35mm의 필름의 투박한 종횡비에 적응하며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또 한 가지 묘미랍니다.Summary19세기 서부 개척 시대, 사냥꾼들의 식량을 담당하는 쿠키는 표적이 되어 쫓기는 킹 루를 구해준다. 몇 년 후 정착한 마을에서 재회한 이들은 마을의 유일한 젖소의 우유를 훔쳐 빵을 만들어 돈을 벌기로 하는데… “우리에게는 지금이 기회야” (출처: 씨네21)Cast감독: 켈리 라이카트 존출연: 존 마가로, 오리온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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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4주 차, 최신 씨네 뉴스 1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 역을 맡은 맷 데이먼의 첫 모습이 공개되었습니다.
공개된 모습으로 비추어 볼 때, 놀란은 현대적인 해석보다는 전통적인 그리스 배경을 선택한 것으로 예상됩니다.
<오디세이>는 2026년 7월 17일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통해 극장 개봉될 예정이며,맷 데이먼, 톰 홀랜드, 앤 해서웨이, 젠데이아, 루피타 뇽오, 로버트 패틴슨, 샤를리즈 테론 등 유수의 많은 배우가 출연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배우 케이트 윈슬렛, 영화감독 데뷔 앞뒀다
수식어가 필요 없는 배우인 케이트 윈슬렛이 영화 <Goodbye June 굿바이 준>으로 감독 데뷔를 앞뒀습니다.
케이트 솔로몬과 윈슬렛이 공동제작하며, 워킹 타이틀이 총괄 제작자로 참여하는 <굿바이 준>은 윈슬렛의 아들 조 앤더슨이 각본을 썼고,
현재 영국을 배경으로 갑작스럽게 겪게 되는 힘든 현실을 계기로 함께 뭉치게 되는 붕괴된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다고 합니다.
토니 콜렛, 조니 플린과 더불어 윈슬렛 본인도 영화에 출연할 예정입니다.
폴 메스칼, 조쉬 오코너 주연 퀴어 영화 <역사의 소리> MUBI 판권 구매
연기력과 스타성을 인정받고 있는 신예 폴 메스칼과 조쉬 오코너가 출연하는 퀴어 영화 에 MUBI가 합류했습니다.
벤 샷턱이 쓴 단편 소설을 기반으로 한 이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리오넬(메스칼)과 데이비드(오코너)가나라의 이야기와 노래를 녹음하며 사랑에 빠지는 역사적 로맨스 드라마로 알려졌으며, 2025년 칸 영화제에서 첫 상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배우 해리스 딕킨슨의 감독 데뷔작 <Urchin>
<베이비걸>, <슬픔의 삼각형> 등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는 배우 해리스 딕킨슨이 첫 장편영화 연출에 도전했습니다.
그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장편 영화 <Urchin 부랑아>는 베를린 유럽 필름 마켓(EFM)에서 판매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영화는 런던에서 자멸의 고리에 갇혀 자신의 삶을 바꾸려는 노숙자 마이크의 이야기를 다루며,“거칠고 어처구니없으며, 우리를 다시 끌어당기는 이상한 패턴에 관한 이야기”라고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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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달까지 가는 롤러코스터
DIRECTOR. 안드레스 후라도
CAST. 안토니오 자르코
SYNOPSIS. 냉전의 긴장 속, 콜롬비아와 파나마의 국경 지대 다리엔(Darién)에서 길을 잃은 우주 비행사들이 원주민들 때문에 놀라 깊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들이 목이 잘리거나 야생 식인종에게 잡아먹히게 될 거라고 예상했을까? <외계 우주 정복자 환영>은 열대 생존 훈련에 사용된 프로파간다 아카이브와 관련 영화들을 재조립해 우주 정복이라는 미션에 새겨진 식민주의적 내러티브에 도전한다.
이 영화를 보고 느낀 첫 감정은, 역사 속에서 갈기갈기 찢긴 상처의 조각들을 퀼트처럼 엮은 영화 같다는 것이었다. 파나마의 정글에서 생존 훈련을 받는 우주 비행사들에 대한 뉴스 풋티지 영상을 보여준 다음 "원주민의 콜럼버스 발견은 그들에게 재앙이었다"는 텍스트를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의 방향성을 명확히 해 준다. 이 영화를 거칠게 요약하면, 달과 우주에 대한 인간의 야심을 식민지 혹은 제3세계 착취에 대한 야심과 대구를 이루도록 병치시켜, 조각조각 자르고 붙인 작품이다.
우선 콜럼버스라는 이름을 어원으로 하는 국가명, 콜롬비아의 역사를 조금 살펴보자. 많은 남미 국가들이 그렇듯, 콜롬비아 또한 원주민들이 고유의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땅이었다. 천문학과 금 세공에 능했던 무이스카족의 이야기는 훗날 서양에 '엘도라도' 황금 도시의 전설로 전해진다. 그리고 15세기 말에서 16세기 무렵, 스페인이 무이스카 왕국을 정복하고 오늘날까지 수도인 보고타를 설립하면서 길고 긴 식민지배의 날들이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주민 인구가 급감할 만큼 잔혹한 학살이 있었다. 게다가 현지 주민들은 유럽인들에게 묻어 온 천연두, 홍역 등의 질병에 면역이 없었으므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스페인은 당시 식민지에서 엔코미엔다라는 시스템을 쓰고 있었다. 이는 해당 지역에 파견한 통치자에게 토지와 주민 통치권을 위임하는 것인데, 통치자는 노동력과 세금을 징발할 수 있었고 여기에는 보호와 기독교 개종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사실상 국가로서는 방임이었고, 통치자 입장에서는 현지 주민들을 쥐고 짜서 나오는 만큼 가질 수 있는 조건이었다. 착취적인 강제 노동과 폭력으로, 사실상 노예노동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괴롭고 지난한 역사 끝에 마침내 19세기, 뜨거운 심장을 가졌던 시몬 볼리바르가 이끄는 독립군을 주축으로, 콜롬비아 사람들은 독립을 이룩한다.
하지만 독립국이 되었다고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이제는 미국과의 관계가 협력과 갈등 사이를 미묘하게 오락가락하는 20세기가 시작된다. 파나마는 콜롬비아의 영토였는데, 파나마 운하 건설을 원했던 미국이 파나마의 독립을 지원해 버린다. 추후 보상금을 지급하고, 군사와 외교 문제로 미국과 협력은 깊어진다. 남미에서 콜롬비아는 미국의 주요한 "반공" 동맹이었다. 그 결과 영화에서도 "더 나은 세계"를 위해 미국과 콜롬비아가 협력한다는 내용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
우주를 향한 야욕은 패권에 대한 야욕의 다른 표현일 뿐이었으므로, 닐 암스트롱을 비롯한 우주 영웅들이 콜롬비아를 방문했을 때 온 국가가 그들을 환영하면서도 동시에 질문이 나온다. 저개발 제3세계 국가로서, 우주에 수백만 달러를 태운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우주비행사들은 "달에서 돈을 찾은 사람은 없다."는 식의 정보값 0인 문장으로 대답한다. 할 말이 없었겠지.
그러나 달에서 돈을 찾은 사람은 정말 없는가? 애초에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에 충격을 받고 이룩한 성과로, 달 착륙은 철저하게 정치경제적 계산이 깔린 프로젝트였다. 물론 우리가 달에서 무슨 광물을 캐다 사는 건 아니니까 "향후 몇 년간 인류가 얻는 것은 정보일 것"이라는 닐 암스트롱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라지만, 수많은 산업이 창출되고 국방 전략 자산화를 했던 것, 소프트파워를 과시한 것을 고려하면 다양한 유무형 자산을 얻은 건 사실이다. 뭐랄까, 1945년에 일본인들이 살던 집을 내버려두고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다고 해서 그들이 식민지배로 '돈'을 얻지 않은 건 아니니까.
식민지에 대한 착취는 언제나 다방면으로 이루어진다. 보고 있노라면 '달을 정복'하겠다던 옛 유럽인들의 상상도는 식민지를 향한 제국주의의 탐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래 전 유럽이 상상한 '달 정복'의 풍경은 이렇다. '야만인'과 '유인원'의 중간쯤 되는 존재들이 날아다니고 있고, 꽃잎 위에 여성이 자고 있으며 (와중에 망원경까지 쓰고 보고 있다), 낯선 동물들과 새들이 많다. 이들은 큰 범선을 타고 달에 날아가, '야만인'들의 목에 밧줄을 두르고 채찍질을 하고, 동물들을 사냥해 배에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오는 꿈을 꾼다. 나비 요정 같은 저 여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도에서조차,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겠지. 하긴 우주비행사들도 '여성 우주인'이 있어서 안고 자면 좋겠다는 소리나 하고 있다.
보고 있으면 "너네는 뭐가 그렇게 다 쉽냐?"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인디언'을 '발견'한지 20년 되었다고 그들의 '역사'를 쓰겠다더니, 그들은 '흥이 많고 호전적이다' 뭐 이런 소리나 하고 있다. '이우아나'라는 동물을 육상동물로 분류할지 수상동물로 분류할지 고민하다가 멋대로 어느 한쪽에 귀속시킨다. 이 동물은 훗날 생존 훈련을 받는 우주비행사들에게 먹이로 주어진다. 늘 이런 식이지. 신비화하는 동시에 그 신비를 쥐고 흔들고 싶어 하는 것.
이우아나를 보며 일제 강점기 때 숱하게 사라진 우리 개 '동경이'를 떠올렸고, 회사를 차려 금을 채취하는 장면을 보면서 구한말부터 우리도 겪은 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픈 사람들을 보낸 곳이 있다기에 병원이라도 지었나 했더니 거기서 '하이바나'를 했단다. 약초에서 기인하고,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부르게 만드는 것. '하이바나'가 샤먼이라는 의미임을 생각하면, 치료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 과정에서 식민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자화된다. '인간 사냥꾼', '금속을 좋아하는 사람들' 같은 식으로 신비화되고, 철저하게 세팅된 자리에서 우주비행사가 이들을 만나는 자리를 '크로스-컬처'한 경험이라고 한다. 어떤 문화도 넘나들지 않고, 자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자들이 이제는 언어까지 반지르르하게 넘본다. 대책 없는 착취. 상대를 지속 가능하게 두지 않는 착취. 그게 식민지의 본질이다.
이 모든 야만은 지난 세기의 것이어야만 한다고 선언하듯, 이 영화는 시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듯한 옛날식 노이즈로 덮여 있다. 오래 전의 풋티지뿐 아니라 모든 장면이 그렇다. 일정한 화면비 안에서 펼쳐지지도 않는다. 달 모양으로 둥근 화면만 한참 보여 주기도, 화면을 양분해 멜리에스의 영화 한 장면과 현실을 나란히 보이기도 한다.
각종 풋티지가 빠르게 전환되고 많은 부분이 텍스트 자막으로 처리되어 지나가다 보니, 배경 지식 없이 이해하는 게 쉽지는 않다. 느낌만으로 따라가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앞에서 뿌린 ("갑자기 왜 이구아나?") 내용이 뒤에서 대구를 이루며 거두어질 때, 그리고 거기서 야만성의 편린이 드러날 때 한 번씩 가슴이 철렁한다. 그래도 가장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은 역시 마지막 풋티지일 것이다. 광고 문구처럼 빠르고 현란하게 지구가 아프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 이 식민지배의 야만이 우리 모두의 것임이 피부로 와 닿기 때문이다. 조각조각 이어 붙여 매단 돛단배를 타고 달까지 도달한 순간, 내가 타고 있는 것이 롤러코스터임을 깨닫는다. 신기한 영화적 경험이었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2025.04.30-05.09) 상영일정]
2025.05.02 17:00 메가박스 전주객사 5관
2025.05.03 17:00 CGV전주고사 8관
2025.05.07 20:30 CGV전주고사 8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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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감정, 사랑일까 이기주의적 욕망일까
6★/10★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잘 나가는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일하는 료스케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는 류타. 둘은 게이라는 점을 빼고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다. 료스케는 좋은 집에 살고, 멋지고 세련된 옷을 입으며, 자신의 고민을 함께 나눌 게이 친구들이 있다. 반면 류타는 늘 돈에 쫓긴다. 생활비와 어머니 간병비를 벌 목적으로 다른 남성에게 몸을 팔기도 한다.
세대와 계급, 생활 양식 등 많은 것이 다른 둘. 그러나 친구의 소개로 수강생과 개인 운동 트레이너로 만난 둘은 서로에게 빠져들어 빠른 속도로 몸과 마음을 섞으며 조금씩 관계의 깊이를 더해 나간다. 료스케와 게이 친구들, 료스케‧류타의 베드신은 게이들이 우정을 나누고 사랑하는 방식을 현실감 있게 포착한다. 그 세계에 익숙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 금세 이입할 수 있을 만큼 게이 커뮤니티에 대한 영화의 묘사는 생동감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게이/퀴어 영화가 ‘아니다’. 영화 전반부에서 둘의 로맨스가 중점이었다면, 후반부는 어느 날 갑자기 홀로 남겨진 료스케가 류타의 어머니와 서로 의지하며 또 다른 가족을 형성하는 과정을 담는다. 료스케가 늘 화려한 옷을 입는 건 그 옷이 자신의 어릴 적 상처(게이에 대한 또래의 혐오, 어머니 상실)를 감춰주는 갑옷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류타와 류타 어머니와의 관계는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 그 자체였다.
이 때문일까? 얼핏 감동적으로 보이는 이들 관계에서 료스케는 종종 선을 넘는 듯 보인다. 료스케가 류타에게 자신이 용돈을 줄 테니 성매매를 그만두고 내 곁에 남으라고 요구하는 장면, 혼자가 된 류타 어머니에게 함께 살자고 말하는 장면을 보자. 료스케는 분명 ‘진심’이다. 하지만 무엇을 향한 진심일까? 료스케가 두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진심일까? 혹시 료스케의 제안은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었다는 데 대한, 치유된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는 욕망에 대한 진심은 아니었을까? 류타 모자에게 돈과 집을 제공하겠다는 료스케의 제안은 독립된 시민으로서 류타 모자가 갖는 자존감을 훼손할 가능성을 품는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모든 관계는 주고받는 호혜성에 토대를 둔다. 일방적인 증여는 호혜가 아닌 시혜이며, 이는 보통 서로 대등하지 않은 관계에서만 발생한다.
하지만 료스케는 거침이 없다. 그들이 자기 곁에 없을 때 다시 상처받은 상태로 되돌아갈까 두렵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 이들의 관계가 감동을 자아낸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료스케가 두 사람을 자신의 이기주의적 욕망에 포섭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료스케는 ‘에고이스트(이기주의자)’다.
영화가 감동과 이기심이라는 두 결의 서사를 펼쳐내는 방식이 흥미롭다. 두 서사는 다른 서사를 압도하지 않은 채 내내 불편한 긴장을 유지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어느 서사에도 승기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 ‘이기주의적 욕망의 표출’과 교묘히 섞여 있음을 보인다. 이외에도 게이 커뮤니티의 (돈을 매개한) 친밀성, 호혜와 시혜, 상실의 문제를 예측 불허한 방식으로 오고 가는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많다. 〈에고이스트〉가 던지는 생산적 질문은 숙고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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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어리지 않은 당신이 여름에 보면 좋을 영화
** 영화 우리집의 스포일러가 담긴 콘텐츠입니다.
대사로 알아보는 영화 두 번째 이야기는, 작년 여름에 개봉한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입니다.
영화 우리집은 아래 링크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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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엘비스> 1차 예고편
대중문화의 아이콘, 최고의 뮤지션 전 세계를 뒤흔든 청춘의 상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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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카브리올레> 공식 예고편
[이태원 클라쓰] 조광진 감독 작품 금새록 X 류경수 X 강영석이 보여줄 환장의 청춘 케미⚡️ [카브리올레] 공식 예고편 공개!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화제작🎞 [카브리올레] 6월 19일 극장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