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2-18 12:01:44
2월 4주 차, 최신 씨네 뉴스 1
크리스토퍼 놀란 <오디세이> 첫 모습 공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 역을 맡은 맷 데이먼의 첫 모습이 공개되었습니다.
공개된 모습으로 비추어 볼 때, 놀란은 현대적인 해석보다는 전통적인 그리스 배경을 선택한 것으로 예상됩니다.
<오디세이>는 2026년 7월 17일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통해 극장 개봉될 예정이며,
맷 데이먼, 톰 홀랜드, 앤 해서웨이, 젠데이아, 루피타 뇽오, 로버트 패틴슨, 샤를리즈 테론 등 유수의 많은 배우가 출연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배우 케이트 윈슬렛, 영화감독 데뷔 앞뒀다

수식어가 필요 없는 배우인 케이트 윈슬렛이 영화 <Goodbye June 굿바이 준>으로 감독 데뷔를 앞뒀습니다.
케이트 솔로몬과 윈슬렛이 공동제작하며, 워킹 타이틀이 총괄 제작자로 참여하는 <굿바이 준>은 윈슬렛의 아들 조 앤더슨이 각본을 썼고,
현재 영국을 배경으로 갑작스럽게 겪게 되는 힘든 현실을 계기로 함께 뭉치게 되는 붕괴된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다고 합니다.
토니 콜렛, 조니 플린과 더불어 윈슬렛 본인도 영화에 출연할 예정입니다.
폴 메스칼, 조쉬 오코너 주연 퀴어 영화 <역사의 소리> MUBI 판권 구매

연기력과 스타성을 인정받고 있는 신예 폴 메스칼과 조쉬 오코너가 출연하는 퀴어 영화 에 MUBI가 합류했습니다.
벤 샷턱이 쓴 단편 소설을 기반으로 한 이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리오넬(메스칼)과 데이비드(오코너)가
나라의 이야기와 노래를 녹음하며 사랑에 빠지는 역사적 로맨스 드라마로 알려졌으며, 2025년 칸 영화제에서 첫 상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배우 해리스 딕킨슨의 감독 데뷔작 <Urchin>

<베이비걸>, <슬픔의 삼각형> 등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는 배우 해리스 딕킨슨이 첫 장편영화 연출에 도전했습니다.
그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장편 영화 <Urchin 부랑아>는 베를린 유럽 필름 마켓(EFM)에서 판매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영화는 런던에서 자멸의 고리에 갇혀 자신의 삶을 바꾸려는 노숙자 마이크의 이야기를 다루며,
“거칠고 어처구니없으며, 우리를 다시 끌어당기는 이상한 패턴에 관한 이야기”라고 알려졌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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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영화 시사회 후기 - 외톨이의 유일한 친구들이 떠나간다면?
사야카에게 유일한 친구는 강아지인 루뿐이다. 둘은 넓은 들판이 있는 곳인 비밀 장소에 자주 간다. 사야카가 루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과 똑같은 외톨이라는 공통점에서 의미를 찾아 둘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사야카는 등에 있는 심각한 피부 질환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왕따였고 루는 주인에게 버려진 개였다. 하지만 루가 죽게 되자 사야카는 루를 잊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날 사야카는 루와 닮은 개인 루스를 보게 되고 따라가게 된다. 사야카가 도착한 곳은 레이디버드라는 선술집이었는데 루스의 주인이 후세라는 할아버지란 것을 알게 된다. 루스가 루와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야카와 후세는 친해진다. 사야카는 후세에게 기적과 하느님의 존재를 믿느냐라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후세의 아들인 고이치로가 죽었는지 물어보는데...
죽는다는 게 과연 무엇일까?
만약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존재가 떠난다면?
하니엘의 철학적인 생각
어린아이에게 소중했던 존재들이 사라진다는 건 얼마나 큰 슬픔일까?
어린아이가 바라보는 죽음이란?
레이디버드라는 선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후세는 고이치로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야뇨증으로 죽었다. 후세는 자신의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죽은 아들에 대한 집착이 컸고 사야카를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외톨이였던 사야카에게 유일한 친구란 루와 할아버지인 후세였다. 그러나 자신의 곁에 함께하던 소중한 사람들이 사라지면서 사야카는 많이 슬퍼한다. 어린아이에게 소중했던 존재들이 사라진다는 건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필자가 이 영화를 보기에는 내 곁을 아껴주는 사람들도 언젠가 모두 떠나간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기에 삶은 유한하다. 그리고 사야카가 떠나가 버린 후세와 루를 기억하지만 되돌아올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는 어린아이의 심정이란 게 얼마나 슬펐을지 공감이 된다. 마찬가지로 후세도 죽은 자신의 아들을 돌려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야카가 루를 잃었을 때처럼 큰 상실감을 갖는다. 그렇기에 우리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사라지기 전에라도 소중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지나가버린 열차도 잡을 수 없듯이 떠나간 사람도 붙잡을 수 없다. 그래서 사야카는 어린아이지만 자신의 유일한 친구들이었던 후세와 루가 언젠가 사라진다는 것을 일찍 안 것이다. 어린아이의 시점에서 바라본 친구들의 죽음이 이렇게나 안타까운 건지 나는 알게 되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떠나갈 것이고 그때가 되면 나는 어린 나이에 소중한 친구들을 잃은 사야카의 기분을 알게 될 것 같다.
일찍 외톨이가 되어버린 사야카의 심정을 알게 되었다.
하니엘의 주관적인 영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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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달까지 가는 롤러코스터
DIRECTOR. 안드레스 후라도
CAST. 안토니오 자르코
SYNOPSIS. 냉전의 긴장 속, 콜롬비아와 파나마의 국경 지대 다리엔(Darién)에서 길을 잃은 우주 비행사들이 원주민들 때문에 놀라 깊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들이 목이 잘리거나 야생 식인종에게 잡아먹히게 될 거라고 예상했을까? <외계 우주 정복자 환영>은 열대 생존 훈련에 사용된 프로파간다 아카이브와 관련 영화들을 재조립해 우주 정복이라는 미션에 새겨진 식민주의적 내러티브에 도전한다.
이 영화를 보고 느낀 첫 감정은, 역사 속에서 갈기갈기 찢긴 상처의 조각들을 퀼트처럼 엮은 영화 같다는 것이었다. 파나마의 정글에서 생존 훈련을 받는 우주 비행사들에 대한 뉴스 풋티지 영상을 보여준 다음 "원주민의 콜럼버스 발견은 그들에게 재앙이었다"는 텍스트를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의 방향성을 명확히 해 준다. 이 영화를 거칠게 요약하면, 달과 우주에 대한 인간의 야심을 식민지 혹은 제3세계 착취에 대한 야심과 대구를 이루도록 병치시켜, 조각조각 자르고 붙인 작품이다.
우선 콜럼버스라는 이름을 어원으로 하는 국가명, 콜롬비아의 역사를 조금 살펴보자. 많은 남미 국가들이 그렇듯, 콜롬비아 또한 원주민들이 고유의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땅이었다. 천문학과 금 세공에 능했던 무이스카족의 이야기는 훗날 서양에 '엘도라도' 황금 도시의 전설로 전해진다. 그리고 15세기 말에서 16세기 무렵, 스페인이 무이스카 왕국을 정복하고 오늘날까지 수도인 보고타를 설립하면서 길고 긴 식민지배의 날들이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주민 인구가 급감할 만큼 잔혹한 학살이 있었다. 게다가 현지 주민들은 유럽인들에게 묻어 온 천연두, 홍역 등의 질병에 면역이 없었으므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스페인은 당시 식민지에서 엔코미엔다라는 시스템을 쓰고 있었다. 이는 해당 지역에 파견한 통치자에게 토지와 주민 통치권을 위임하는 것인데, 통치자는 노동력과 세금을 징발할 수 있었고 여기에는 보호와 기독교 개종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사실상 국가로서는 방임이었고, 통치자 입장에서는 현지 주민들을 쥐고 짜서 나오는 만큼 가질 수 있는 조건이었다. 착취적인 강제 노동과 폭력으로, 사실상 노예노동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괴롭고 지난한 역사 끝에 마침내 19세기, 뜨거운 심장을 가졌던 시몬 볼리바르가 이끄는 독립군을 주축으로, 콜롬비아 사람들은 독립을 이룩한다.
하지만 독립국이 되었다고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이제는 미국과의 관계가 협력과 갈등 사이를 미묘하게 오락가락하는 20세기가 시작된다. 파나마는 콜롬비아의 영토였는데, 파나마 운하 건설을 원했던 미국이 파나마의 독립을 지원해 버린다. 추후 보상금을 지급하고, 군사와 외교 문제로 미국과 협력은 깊어진다. 남미에서 콜롬비아는 미국의 주요한 "반공" 동맹이었다. 그 결과 영화에서도 "더 나은 세계"를 위해 미국과 콜롬비아가 협력한다는 내용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
우주를 향한 야욕은 패권에 대한 야욕의 다른 표현일 뿐이었으므로, 닐 암스트롱을 비롯한 우주 영웅들이 콜롬비아를 방문했을 때 온 국가가 그들을 환영하면서도 동시에 질문이 나온다. 저개발 제3세계 국가로서, 우주에 수백만 달러를 태운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우주비행사들은 "달에서 돈을 찾은 사람은 없다."는 식의 정보값 0인 문장으로 대답한다. 할 말이 없었겠지.
그러나 달에서 돈을 찾은 사람은 정말 없는가? 애초에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에 충격을 받고 이룩한 성과로, 달 착륙은 철저하게 정치경제적 계산이 깔린 프로젝트였다. 물론 우리가 달에서 무슨 광물을 캐다 사는 건 아니니까 "향후 몇 년간 인류가 얻는 것은 정보일 것"이라는 닐 암스트롱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라지만, 수많은 산업이 창출되고 국방 전략 자산화를 했던 것, 소프트파워를 과시한 것을 고려하면 다양한 유무형 자산을 얻은 건 사실이다. 뭐랄까, 1945년에 일본인들이 살던 집을 내버려두고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다고 해서 그들이 식민지배로 '돈'을 얻지 않은 건 아니니까.
식민지에 대한 착취는 언제나 다방면으로 이루어진다. 보고 있노라면 '달을 정복'하겠다던 옛 유럽인들의 상상도는 식민지를 향한 제국주의의 탐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래 전 유럽이 상상한 '달 정복'의 풍경은 이렇다. '야만인'과 '유인원'의 중간쯤 되는 존재들이 날아다니고 있고, 꽃잎 위에 여성이 자고 있으며 (와중에 망원경까지 쓰고 보고 있다), 낯선 동물들과 새들이 많다. 이들은 큰 범선을 타고 달에 날아가, '야만인'들의 목에 밧줄을 두르고 채찍질을 하고, 동물들을 사냥해 배에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오는 꿈을 꾼다. 나비 요정 같은 저 여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도에서조차,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겠지. 하긴 우주비행사들도 '여성 우주인'이 있어서 안고 자면 좋겠다는 소리나 하고 있다.
보고 있으면 "너네는 뭐가 그렇게 다 쉽냐?"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인디언'을 '발견'한지 20년 되었다고 그들의 '역사'를 쓰겠다더니, 그들은 '흥이 많고 호전적이다' 뭐 이런 소리나 하고 있다. '이우아나'라는 동물을 육상동물로 분류할지 수상동물로 분류할지 고민하다가 멋대로 어느 한쪽에 귀속시킨다. 이 동물은 훗날 생존 훈련을 받는 우주비행사들에게 먹이로 주어진다. 늘 이런 식이지. 신비화하는 동시에 그 신비를 쥐고 흔들고 싶어 하는 것.
이우아나를 보며 일제 강점기 때 숱하게 사라진 우리 개 '동경이'를 떠올렸고, 회사를 차려 금을 채취하는 장면을 보면서 구한말부터 우리도 겪은 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픈 사람들을 보낸 곳이 있다기에 병원이라도 지었나 했더니 거기서 '하이바나'를 했단다. 약초에서 기인하고,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부르게 만드는 것. '하이바나'가 샤먼이라는 의미임을 생각하면, 치료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 과정에서 식민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자화된다. '인간 사냥꾼', '금속을 좋아하는 사람들' 같은 식으로 신비화되고, 철저하게 세팅된 자리에서 우주비행사가 이들을 만나는 자리를 '크로스-컬처'한 경험이라고 한다. 어떤 문화도 넘나들지 않고, 자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자들이 이제는 언어까지 반지르르하게 넘본다. 대책 없는 착취. 상대를 지속 가능하게 두지 않는 착취. 그게 식민지의 본질이다.
이 모든 야만은 지난 세기의 것이어야만 한다고 선언하듯, 이 영화는 시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듯한 옛날식 노이즈로 덮여 있다. 오래 전의 풋티지뿐 아니라 모든 장면이 그렇다. 일정한 화면비 안에서 펼쳐지지도 않는다. 달 모양으로 둥근 화면만 한참 보여 주기도, 화면을 양분해 멜리에스의 영화 한 장면과 현실을 나란히 보이기도 한다.
각종 풋티지가 빠르게 전환되고 많은 부분이 텍스트 자막으로 처리되어 지나가다 보니, 배경 지식 없이 이해하는 게 쉽지는 않다. 느낌만으로 따라가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앞에서 뿌린 ("갑자기 왜 이구아나?") 내용이 뒤에서 대구를 이루며 거두어질 때, 그리고 거기서 야만성의 편린이 드러날 때 한 번씩 가슴이 철렁한다. 그래도 가장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은 역시 마지막 풋티지일 것이다. 광고 문구처럼 빠르고 현란하게 지구가 아프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 이 식민지배의 야만이 우리 모두의 것임이 피부로 와 닿기 때문이다. 조각조각 이어 붙여 매단 돛단배를 타고 달까지 도달한 순간, 내가 타고 있는 것이 롤러코스터임을 깨닫는다. 신기한 영화적 경험이었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2025.04.30-05.09) 상영일정]
2025.05.02 17:00 메가박스 전주객사 5관
2025.05.03 17:00 CGV전주고사 8관
2025.05.07 20:30 CGV전주고사 8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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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의심 앞에 한없이 무력하다
의심이라는 녀석은 인간에게 참으로 무서운 존재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굳건할 것 같은 사람의 마음을 쉽사리 뒤흔들고 현혹하는 간사한 존재다. 이 의심이라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는 종교 등에 의지해 신앙심을 키우고, 어떤 이들은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식으로 내재된 불안함을 다스린다.
그러나 쉽지 않다. 의심을 말끔히 떨쳐내기란 대단히 어려운 반면, 믿음이라는 장벽에 조금이라도 물 샐 틈이 보인다면 의심이 쥐도새도 모르게 새어 들어와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그리고 낚아버린다. 나홍진 감독이 만든 '곡성'도 이러한 사람의 특성 중 하나인 의심이라는 요소를 영리하게 사용했다.
장르 소개란에는 "미스터리, 스릴러, 드라마"라고 적혀 있다. 엑소시즘과 샤머니즘 소재가 나오기에 오컬트에도 포함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 의견에 동의한다. 이 영화는 정확하게 스릴러와 오컬트 요소가 아주 진한 색깔을 내기 때문이다.
156분 동안 진한 스릴러와 오컬트 향을 내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 장면에 음산한 배경과 함께 나오는 성경 구절 루카 복음서 24장 37~39절로 함축했다. 이 문구가 요약본이라는 것을 다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과 살은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으니라. -루카 복음서 24:37~39-
전라남도 곡성군 한 시골마을에서 부부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살인 현장에 출동한 종구(곽도원)와 경찰들은 수색하던 중 창고 깊숙한 곳에서 새 둥지와 비슷한 나뭇가지 뭉치와 촛불이 놓인 수상한 제단을 발견했다. 살인사건과 관련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후 정체불명의 외지인(쿠니무라 준)이 마을 사람들 눈에 띄었고, 그와 관련된 소문들이 돌았다. "요렇게 소문이 파다하면 무슨 이유가 있는 거야"라는 대사는 종구의 의심은 외지인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뜻이었고, 그에게서 해답을 찾겠다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공식수사에서 사건 발생 원인이 독버섯이 일으킨 환각작용이라고 밝혔음에도 종구와 마을 사람들은 이에 귀 기울이지 않고 외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미 의심에 현혹된 것이다.
여기서 종구는 사람들이 전하는 여러 가지 소문만 듣고 일본인 외지인을 만났다. 소문 덕분에 그 외지인이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일상으로 적용한다면, 외지인을 향한 종구의 생각이나 마음처럼 무언가에 의심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 혹은 일상서 벌어지는 현상 등을 이해할 수 없다. "쟤는 아마도 그럴 거야" 같은 사실에서 기반한 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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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하는 방법
그러니까, 안 가면 안돼? 웃는 얼굴에 농담투로 말했지만 사실 진심이 한 9할쯤 담겼다. 그러니까 며칠 전의 나는 여자 친구가 생겨도 안 할법한 짓을 하고 있었다. 이것뿐일까? 난 갑자기 내 자랑을 늘어놓았다. 내가 이런 말도 듣고 저런 말도 들었어. 아무 맥락도 없이 나는 내 장점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이 말의 이면에는 지질함이 배어있다. 너도 나랑 멀어지면 후회할걸?이라는 마음이 내 말 안에 담겨있는 것이다. 다 불안감 때문이다. 얘는 정말 오래오래 보고 싶었다. 친분이 있던 사람들 그 누구보다 얘는 잘해주고 싶은 사람에 가까웠다. 항상 여동생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기준에도 부합했다. 갑자기 문득 정신이 들어왔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안돼. 이러다간 내 장점도 다 가려질 만큼 추해질 것 같다고. 나는 내 체면을 내려놓을 만큼 나는 얘가 맘에 들었나 보다. 항상 이런 사람이 내 주위에 있길 바랬다. 왠지 이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 난 아무 말이나 막 질렀다. 있던 일들이 생각났다. 오래간만에 일러스트도 켰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즐거웠다. 이 기간 동안 있던 일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기분이 복잡했다. 3달이 금방 갔다.
3달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런 시간이었다. 다시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안 하던 짓도 하게 되는 게 사람이구만. 한 200번째 느낀 교훈이지만 오늘은 더 선명히 머릿속에 남을 것 같다. 추한 내 모습을 지우려 또 다른 깊은 생각에 빠진다. 뇌 비우고 잘해주기만 하고 싶은 사람을 참 오랜만에 만났다. 이게 처음은 아니다. 그분을 처음 봤을 땐 내가 그때 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이 선택은 옳았다. 근데 난 이것 빼고 나머지의 모든 걸 다 후회한다. 어렸던 시간이 자랑스럽다면 그건 소시오패스에 가까울 것이다. 난 더 행복할 수 있었다.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다. 그런데 난 자의건 타의건 그걸 고르지 못해 더 나은 내가 되지 않았다. 이것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 이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 고맙다. 돌아오지 않는 화양연화를 한번 더 만들고 싶었던 게 원인이 되어 즐거운 추억이 또 생겼으니 말이다. 이 기억은 나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화양연화>는 시간에 대한 영화다. 2000년대 가장 위대한 영화 손 들어보세요! 하면 대표적으로 뽑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덕인지 코로나19로 인한 왕가위 특별전이 기회가 되어 이 작품을 처음 보게 되었다. 감독 특별전이 나올 만큼 왕가위라는 이름은 어마어마하게 유명하다. 난 홍콩과 단 1도 관련이 없는 사람임에도 왕가위라는 이름은 알았으니 말이다. 이 덕인지 기대를 잔뜩 하고 극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난 꾸벅꾸벅 졸았다. '왕가위 하면 미장센'이라는 말도 사실 잘 체감하지 못했다. 이런 심심함에는 영화의 내용도 한몫한다. 서로 이어져선 안 되는 남녀 둘이 만나 잊힐 수 없는 추억을 만든다. 이게 끝이다. 결말 부도 이 영화의 도입부만 봐도 사실 예측 가능하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왓챠피디아에 들어가 '화양연화' 탭에 들어가면 '다들 위대하다고 칭찬하는 영화인데 나는 못 느낀다'라고 답한 글이 베스트 댓글에 올라가 있다. 이 영화는 심심한 영화가 맞다. 왕가위는 다른 영화보다들보다 진중한 화법으로 과묵하게 관객들에게 접근한다. 과연 <화양연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관객에게 물으면서.
이 질문의 답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예시를 들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해피 투게더>를 예로 들어보자. 이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 감독이 생각하는 '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우선 이 작품과 <화양연화>는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 이 <해피 투게더>를 한 20번 가까이 돌려보며 느낀 게 있다. 조금 과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점이다. 가령 엔딩신의 이름 모를 후련함은 극장에서 보지 않으면 잘 못 느낄 것 같다. 또 폭포라는 공간 설정 때문에 작은 화면에서만 보면 실감이 잘 안 날 것 같다. 이건 공간 설정의 측면을 벗어나서도 말이 된다. 시각적으로도 폭포 엔딩신의 색이 진한 느낌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큰 패드나 모니터로 보면 이 느낌이 오롯이 전해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큰 스크린에 압도되는 기분이 무엇인지 OTT로 보는 사람들은 잘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뜻이다. 이 왕가위 영화 감상 포인트의 중요 지점인 '왜 극장에서 봐야 할까'는 그의 작품을 볼 때 굉장히 중요하다. 극장의 큰 미장센이 영화에 몰입하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런 쉬운 몰입은 왕가위가 잘 다루는 외로움이란 감정과도 닿아있다. 이 감독이 다루는 주요 정서는 단연 외로움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해피 투게더>에서는 군데군데 낡은 식당 조리실에서 춤만 춰도 이 감정이 잘 드러난다. 아무것도 없는 부엌에서 하는 행동이니 덩그러니 있는 모습이 잘 부각되어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극장에서 보면 보다 큰 화면으로 보는 것이니 감정의 전달이 더 잘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해피 투게더>처럼 오직 영화만 쓸 수 있는 방식으로 서서히 쌓아 올린 감정을 마지막 지하철 엔딩으로 터트릴 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동요되는 부분이 있었다. <타락천사>에서 감정을 표현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감독이 적절한 선을 탄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아비정전>을 보면 발 없는 새라는 모티프가 영화 내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날개도 아니고 발이 없는 새는 가만히 서 있을 수 없다. 이게 영화의 엔딩부를 비롯해 주인공 아비의 행동으로 이어지며 결말부와 시너지를 낸다.
이렇게 왕가위는 연출 지점과 플롯, 내고자 하는 분위기를 잘 어우러지게 연출한 감독이었다. 전작을 통한 감독의 말하기 방식은 미니멀하기보단 극대화의 화법이었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감동을 줬다. <화양연화>는 이 지점에서의 화려함이 좀 덜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절제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다. 영화는 양조위와 장만옥이 연기한 두 캐릭터를 틀에 가둔다. 누군가와 통화할 때나 친구와 대화할 때 항상 주위에 뭔가가 있다. 피사체가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다. 혼자의 모습이 세상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건 무언가를 참고 있다는 뜻과도 닮아있다. 이는 주인공들은 욕망을 스스로 표현할 수 없고 항상 타인이 규정한 무언가 때문에 자기 혼자서 오롯이 서있지 못하다는 뜻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연출에 의한 두 사람의 처지를 암시하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이 과정 역시 좀 심심하게 보일 수 있다. 좁은 틈으로 서로 걸어 다니는 모습. 참깨죽을 먹고 싶어 한다는 남자의 말. 왜 오늘은 전화하지 않았냐는 애정 어린 투정까지. 이런 소소한 장면 하나하나를 왕가위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으로 그렸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목은 <화양연화>다. 이 과정이 주인공들의 생에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라는 뜻이다. 또 엔딩부에 자막으로 처리되듯 남자는 이 시간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두 주인공의 들끓는 감정에 비해서 인생을 관통하는 아름다운 순간이 오히려 소박했다는 뜻이 된다. 이 두 가지 연출법은 결국 '화양연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이 되기도 한다. 두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이뤄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됐던 사랑이었다. 이런 처지를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자신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런 아이러니함이 누군가를 깊게 생각해봤다는 아름다운 순간을 만든 것이다. 이 뿐일까? 지나간 사랑을 기억하는 것도 사실 둘의 이루어지지 못했던 사랑의 연장선상이기도 하다. 돌이켜본다고 하는 건 거의 대부분 소망이 소망으로 그칠 때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성공했으면 그냥 현재를 즐기면 되니까 굳이 과거를 회상할 필요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화양연화는 이 상황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왕가위의 <화양연화>는 두 주인공이 서로를 추억하는 모든 순간까지 포함한다는 뜻이다.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지만 결코 입 밖에 내서는 안될 비밀이 됐고, 또 과거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이 행복이 다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럼에도 이 시간들이 나에게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웃기는 일이다.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에 생에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라니.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그러면 행복해진다. 이것이 생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인간이라서 모든 걸 다 잃기보다는 그런 소소한 무언가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왜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이 오냐고? 근본적으로 이뤄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아쉬워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어차피 무엇이든 행복한 엔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랑의 끝은 좋게 끝나야 <라라랜드>였고, 초극한으로 나쁘게 끝나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었다. 이건 사랑으로 국한 지을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매사가 그렇다. 근데 우리는 이걸 뻔히 다 알면서도 하루하루를 맞이한다. 그러면 어때.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게 뭐 어때. 우리는 즐거웠기 때문에 이뤄질 수 없었고, 이것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는걸 모두 다 알고 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평생 동안 그리워한다. 근본적으로 절대 완벽하게 준비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기억에 오래오래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자학하며 살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마저 없다면 우린 진짜 별게 아닐지도 모르거든. 다른 화양연화가 찾아오지 못할 수도 있거든. 비밀이라고 치부하기에 우리 인생 각자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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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욱신욱신하는 모든 이의 이름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우리의 의학발전은 인정하기 싫게도 과거 사람들에게 행해진 생체실험 덕분이라는 말이었다. 그래, 인정하기 싫게도, 맞는 것도 같다. 수많은 이에게 규칙적으로 바닷물 주사를 투여하지 않았다면 비브리오 패혈증의 존재는 보다 늦게 알려졌을 것이다. 바닷물이 혈액을 대신 할 수 있다는 거짓으로 판명된 가설 대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지금은 인간에겐 하진 않고 실험용 동물을 쓴다. 매정하게 말하자면 과정은 비인간적이었으나 결과는 인간을 위하는 것일 때도 있다. 그 판단을 어떤 사람도, 어떤 시대도 쉽게 내릴 수는 없다. 우리는 시대 아래서 자유롭지 못하다. 시대가 펼쳐놓은 판에, 말이 되어 이리저리 움직인다. 시대가 만약 신이라면 참 체계적인 큰 손이 아닐까. 때맞춰 부딪히는 이념을 널어두고, 갈등을 만들어내면서 사람을 시험한다. 우리는 시험당하고 시험하는 존재이다. 태어날 때도 내 원이 아니었건만 사는 것도 내 원이 아닌 바에야 이게 대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소용'은 애당초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쓸모가 있고 득이 되는 것. 살아가는 것은 쓸모와 득으로는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영화 <동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그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말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윤동주와 송몽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윤동주는 당대에는 빛을 발하지 못했으나 그의 시는 대대손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오래오래 남아있다. 송몽규는 일제강점기에서 열심히 앞장서 싸웠으나 결국 이름 하나 남기지 못했던 사람이라고. 이준익 감독 또한 윤동주는 과정은 좋지 않지만 결과가 좋았고, 송몽규는 결과는 없지만 과정은 훌륭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윤동주의 아름다운 결과와 함께 과정이 아름다웠던 송몽규를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고.
이름을 훗날 길이길이 남기는 것은 누구나 꿈꾸는 일이다. 내 이름이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칭송을 받는다면야 그보다 좋을 일은 없다. 그러나 동주와 몽규가 그랬을까. 둘이 그 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해보았다. 동주와 몽규에게만은 적어도 과정과 결과, 그런 이분법을 두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의문이다. 그게 영화에서 불편하던 포인트였던 것 같다. 그건 마치 영화 구석구석 드러나던 선택지와 같다. 처음 영화 시작부터 나타났던 신앙과 공산주의에 대한 고민. 일본순사가 교실을 박차고 들어와 내밀던 개인주의냐 전체주의냐, 일본사람이냐 아니냐, 하던 불편한 선택지. 혹은 아버지가 내미는 진로선택의 일침과도 같았다. 이과냐, 문과냐. 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슨 쓸모냐 의사가 되어 사람을 구하는 것이 쓸모지. 마지막 자기 확신에 빠져 있는 일본 취조인의 이야기와도 같다. 야만이냐, 문명이냐. 국제법에 대강 끼워맞춰서 자발적인 듯 보이게 진술서를 받으면 문명이고, 그런 것조차 모르는 무지한 조선인은 야만이고. 이분법은 수많은 경우와 변수를, 이야기의 목을 댕강 잘라버린다. 마찬가지다. 과정과 결과는 그들이 원하지 않았을 이분법이다. 무엇이 과정이고, 무엇이 결과인가. 나에겐 동주와 몽규 모두 과정도 좋았고, 결과도 좋았다. 평생을 애써 자신이 뜻하는 바에 다가가려한 과정이 훌륭하다. 한스럽게 숨을 거뒀지만 이렇게 지금 다시 살아나 남은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게 하는 결과가 훌륭하지 않은가.
아주 확고하게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동주는 몽규의 그림자이자 2인자였다. 마지막엔 무려 동주가 절규하면서 몽규의 그림자인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동주가 수동적이며, 재능이 없고, 목적과 이유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동주는 몽규에 비해 수동적인 것처럼 보인다. 동주가 먼저 몽규를 부르지 않는데 비해 몽규는 영화 내내 '동주야'하면서 그를 부른다. 가장 귀에 많이 익은 대사이기도 하다. 동주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 여자에게 쭈뼛쭈뼛하면 몽규는 모르는 척 도와준다. 날 선 대화로 서로에게 흠집이 되는 말을 나눈 직후에도. 먼저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고 기뻐하기는 커녕 동주 상심하지 않게 말할 것을 먼저 고민하는 몽규다. 그는 당선되지 않아 시를 꽁꽁 매어두는 동주에게 직접 잡지를 만들어 시를 발표하자고 제안한다. 원하던 대학에 붙고도 동주가 붙지 않으면 바로 대안을 찾느라 바쁘다. 몽규는 기분이 상한 동주가 좋아하는 정지용, 백석의 시집을 가져다 주면 이윽고 동주가 자신과 눈을 맞추리란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몽규와 동주의 관계는 극단적으로 몽규의 일방적인 적극성과 헌신, 동주의 일방적인 소극성과 고집으로 이뤄진 것인가? 형만한 아우없다더니 역시 동주는 몽규같은 형을 만나 재능을 알아봐주고 뒤늦게 날개를 펴게 된 건가? 아니다. 몽규와 동주는 서로 다른 사람이다. 그 선을 넘지 않으면서 서로를 소중히 하려고 노력한다. 몽규는 시보단 산문의 힘을,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을 중요시하고 동주는 문학, 시 그 자체의 울림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중요시한다. 몽규는 다른 이를 말로 설득하고 총을 들고, 동주는 시를 계속 쓴다.
어느 순간 몽규에게 동주는 동주이면서. '윤 시인'이다. 동주말마따나 시집도 안내고 등단도 안했는데 왜 시인이라고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는걸까. 그건 영화 속에 나온 것처럼 동주가 그림자도 2인자도 아니며, 전혀 수동적인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을지언정 시에 대한 그의 뚝심은 영화 내내 흔들리지 않는다. 그가 존경하던 정지용 선생님이 시를 그만 쓰라고 하는데도 그는 꿋꿋하게 내내 우리말로 시를 쓰고 모아둔다.
다카마쓰 교수가 그에게 시를 써보는 게 어떻냐고 물었을 때 그의 기분은 어땠을까. 동주는 사실은 시를 쓰고 있다고 대답했다. 출판을 하지 않아 시인은 아니지만 시를 쓰고 있다고. 그 때 다카마쓰교수는 조선어로 된 시라서 출간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며 한 마디를 날렸다. 그가 쟁여두고 있어서 출간하지 않았던 이유보다도 더 큰 이유는 시대가 정해놓은 한계이기도 했다. 그것을 교수가 지적한 것이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 시대의 잘못이라고. 출간이 자유로웠다면 그는 아마 못이기는 척, 부끄러워하면서도 출간했을 것이다. 그가 부끄러운 것은 시를 줄곧 써서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숨어드는 것 같은 자책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자신있게 자신의 생각을 담은 그 시를 선뜻 낼 수 없는 시대때문이다. 다른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울리지 못하고 혼자만의 우물에서 울리는 파장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시대가 막아놓은 둑에서도 물 한방울씩을 알뜰히 모아두고 있었을 뿐인데.
영화에선 쿠미라는 일본인 학생의 도움으로 영어로 시집을 출판하려 했다. 겁이 없이 진행된 해외 출간. 수동적인 이미지의 동주라면 마지막까지 쿠미가 알아서 빨리 출간을 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엔 그 원고를 쿠미가 아니라 동주가 직접 보내겠다고 한다. 그 소심하고 겁많은 사람이. 그걸 하려고 그는 잡힐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몽규와 함께 가지 않고 하루를 꼬박 기다렸다. 그건 수동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다. 실제로 윤동주는 직접 한정판이나마 출판을 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고, 출판이 실패하고 다른 사람에게 원고를 넘겨두기도 했다. 동주는 학교의 필수적인 교련도 거부하고, 창씨개명도 최대한 늦게 하려한다. 그 거짓부렁이 진술서에도 서명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런 윤동주의 과정이 좋지 않고, 결과만 좋다고 할 수 있을까.
몽규 역시 마찬가지다. 몽규는 결과가 없지만 과정이 좋은 사람인가. 과정과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다. 동주와 몽규 사이의 과정과 결과를 생각해보면 의미는 달라진다. 동주를 '대기는 만성이다'하면서 질투에 휩싸이게 할 정도로 이른 나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술가락'이 있다. 홀연히 독립군 활동을 하고 돌아오고 공부를 시작하곤 잡지 <문우>를 직접 발간했다. 거기엔 동주의 시도 있지만, 몽규의 우리말 뜻인 꿈별이라는 이름으로 쓰인 시 '밤' 이 있다. 조선일보에 실렸던 <하늘과 더불어>까지. 영화에 나오지 않았으나 영화를 보고 나면 동주의 시만큼 몽규의 작품도 좋고 궁금해져서 나눠본다.
< 술가락 >
- 송한범(송몽규 아명)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밤 >
- 꿈별(송몽규 필명)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 하늘과 더불어>
- 꿈별
하늘-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푸름이 깃들고
태양(太陽)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싶다
오오- 하늘아-
모-든것이
흘러 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사념(思念)들만 뿌려 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의욕(意欲)의 잔재(殘滓)만
쓰디쓴 추억(追憶)의 反(반)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연인(戀人)이 없어 고독(孤獨)스럽지 않아도
고향(故鄕)을 잃어 향수(鄕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의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맘속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
미풍(微風)이 웃는 아침을 기원(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 부르기를
가만히 기원(祈願)하련다.
몽규는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가 2등으로 졸업했다. 그 때 그는 분노할 때 분노하는 사람이었다. 2등 상이 어이없게도 대동아공영, 일본의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책이었고 받자마자 이따위 것을 상으로 준다며 집어 던져버렸다. 그것이 세상을 바꾸게 하지는 못했더라도, 그 자리에 있던 불편한 사람들의 마음은 아마 세상 속 시원하게 바꿔주었을 것이다. 동주와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날 땐 다시 교토제대에 합격했던 코스를 보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있었던 능력자였다. 다만 동주와 마찬가지로 시대가 관여하는 일, 독립군 활동, 일본 내 유학생을 규합하려던 사건 등은 일이 목적대로 이뤄지는 것이 쉽지 않았을 뿐이다. 몽규는 영화에서 동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딪히고, 싸우고, 도전하며 멋진 형이자 동반자로 등장했다. 끝까지 동주보다 먼저 태어나 조금 늦게 세상을 떠났으니 참 인연은 인연이다. 그의 좋은 결과는 간략하게 설명하려 한다.
이 쯤되면 영화의 제목이 왜 <동주>여야만 했는지는 의문이다. 영화의 포인트 상으론 몽규도 같이 담겼어야 할 텐데 말이다. 게다가 왜 영화는 흑백이었을까. 어느 한 순간도 빠짐없이. 하지만 알 것도 같다. 영화를 보고 나면 동주, 몽규, 이렇게 성을 떼고 부르게 된다. 멀리 있는 분들이 가깝게 느껴진다. 동주는 윤동주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주야, 하고 부르던 몽규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영화에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살아남아 동주의 시를 같이 고민하고, 동주의 시를 출간해준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동주는 대명사인 것이다. 마음의 색이 흑백으로 강제로 물들고, 모든 선택이 흑백같이 이분법으로 재단되던 시대에 좋은 과정을 보여주려 끊임없이 노력하고도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이들, 우리는 설사 모른다 하더라도 이토록 좋은 결과를 우리에게 이렇듯 감사하게 건네준 수많은 이들의 숨, 눈빛, 목소리, 마음이 담겨 있는 대명사. 들으면, 부르면 마음 한 켠이 욱신욱신해지는 그 모든 이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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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주차 신작 개봉 영화
2022년 5월 1주 개봉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Doctor Strange in the Multiverse of Madness , 2022
앞으로 벌쳐지는 마블 멀티버스 시대의 시작점!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광기의 멀티버스 속,
MCU 사상 최초로 끝없이 펼쳐지는 차원의 균열과 뒤엉킨 시공간을 그린 수퍼내추럴 스릴러 블록버 스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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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의 전작인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에서 실수로 멀티버스의 문을 열게 된 닥터 스트레인지가
그로 인해 우주 질서가 파괴되는 일이 벌어지자 이를 수습하기 나서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앞으로 나올 마블 영화의 기반이 되는 멀티버스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죠
코로나 거리두기가 끝나고 영화관을 다시 부활시킬 "닥터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입니다.
첫번째 추천영화 "닥터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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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 가이즈 The Bad Guys , 2022
드림웍스 최초의 범죄오락액션 탄생
영화 "배드 가이즈"는 자타공인 최고의 나쁜 녀석들이 사상 초유의 바른 생활 갓생 프로젝트에 휘말리게 되면서
펼쳐지는 드림웍스 최초의 범죄오락액션 블록버스터 영화 입니다.
그동안 드림웍스는 '슈렉', '쿵푸팬더' 시리즈를 비롯하여 '보스 베이비', '드래곤 길들이기' 시리즈 등
독특한 상상력을 발휘한 신선한 소재들과 귀여운 캐릭터들의 등장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이번 작품은 독보적인 차세대 드림웍스 크리에이터 ‘피에르 페리펠’ 감독이 연출을 맡아
혁신적이고 매력적인 프로덕션 디자인부터 조명, 음악까지 모든 면에서
다른 영화와는 다른 분위기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보여줄 것을 예고합니다.
제작 기간은 총 6년, 423명의 스태프 참여,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4개국 참여한 드림웍스 범죄오락액션!
두번째 추천영화 "배드가이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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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판 엉덩이 탐정: 수플레 섬의 비밀
映画おしりたんてい スフーレ島のひみつ , Butt Detective the Movie: the Secret of Souffle Island , 2021
전 세계 1,000만부 베스트셀러 원작 ‘엉덩이 탐정’ 세 번째 극장판 컴백!
영화 "극장판 엉덩이 탐정: 수플레 섬의 비밀"은 ‘바람의 길잡이’를 노리는 괴도 유에 맞서 ‘수플레 섬’을 지키기 위한
엉덩이 탐정과 조수 브라운의 고공 추리 어드벤처로 도서와 TV 애니메이션 등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말괄량이 소녀 ‘루루’와 수플레 섬의 대등대를 지키는 바람의 수호자 등 새로운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기대를 높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악당 ‘괴도 유’의 기상천외한 활약과 신비로운 수플레 섬에서
하늘과 바다를 넘나드는 시원하고 역동적인 액션까지 짜릿함을 선사하며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예정인데요.
특히 하늘을 날기 위해 부르는 ‘바람의 노래’나 ‘루루’에게 숨겨진 비장의 무기 등 오직 극장에서만 만날 수 있는
버라이어티한 모험이 가득 펼쳐질 것으로 예비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추리와 재미가 함께하는 어린이날 최고의 선물!
세번째 추천영화 "극장판 엉덩이 탐정: 수플레 섬의 비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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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 블라썸 Seize Printemps , Spring Blossom , 2020
세계 유수 영화제의 찬사가 쏟아진 ‘수잔 랭동’ 감독의 데뷔작
영화 "스프링 블라썸"은 반복되는 일상에 염증을 느끼는 주인공 ‘수잔’이 우연히 광장에서 연극배우 ‘라파엘’을 발견하고,
그와 가까워지면서 겪게 되는 잊지 못할 첫 번째 봄을 그린 영화입니다.
각본과 감독, 그리고 주인공 ‘수잔’을 직접 연기한 수잔 랭동은 15세부터 매일 다이어리를 쓰듯 각본을 쓰기 시작했는데요.
50페이지 정도의 짧은 각본을 완성한 수잔 랭동 감독은 2018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년 동안 영화 제작을 위한 준비 과정을 가졌고
19세 생일을 맞이한 2019년 여름, 본격 장편 영화 제작에 돌입했습니다.
자신의 경험이 깃든 세계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수잔 랭동 감독은
‘청춘’의 시기에서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대범하게 표현하는 반면,
‘첫사랑’이나 ‘첫 만남’같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정서까지 아우르며 라이징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스무 살 감독의 앵글로 세대를 초월하는 감성을 담아낸
네번째 추천영화 "스프링 블라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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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상상 偶然と想像 , Wheel of Fortune and Fantasy , 2021
'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영화 "우연과 상상"은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돼 2등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마법 같은 스타일을 전 세계가 확인하게 한 영화입니다.
"우연과 상상"은 옴니버스로 구성된 세 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절친한 친구 츠구미가 마법처럼 만났다고 자랑하는 새로운 남자가 자신의 전 남자친구 카즈아키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2년 만에 그를 찾아가는 내용과
늦깎이 대학생 나오는 내연남 사사키의 부탁을 받고 교수 세가와를 유혹하려 하는 내용
그리고 '다시 한 번'은 첫사랑을 보고 싶어 여고 동창회를 찾은 중년 여인 나츠코의 발걸음을 따가는 내용으로
총 3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어떤 제약도 없이 오직 우연과 상상을 키워드로 펼쳐간 이야기들은 기발하고 때로는 발칙하며
끝내 관객들을 애틋하게까지 만들 것입니다.
우연과 상상을 키워드로 펼쳐간 마법 같은 세 편의 이야기!
다섯번째 추천영화 "우연과 상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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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블러드 브라더스 :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공식 예고편
20세기를 풍미한 두 아이콘의 놀랍고도 비극적인 우정을 담은 《블러드 브러더스: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복서 무하마드 알리, 그리고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 미국 흑인들의 지도자로서 엄청난 영향력과 카리스마를 보여준 맬컴 엑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우정을 나누기엔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었다. 올림픽 챔피언이었던 무하마드 알리는 언제나 거침없이 의견을 표현했고, 화려한 언변으로 백인 언론에 쉴 새 없이 오르내렸다. 맬컴 엑스는 전과가 있는 지식인에서 혁명적 지도자가 되었고, 백인들의 억압에 맞서 싸웠으며, 스포츠를 사소한 게임으로 치부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유대는 깊었고, 우정은 진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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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레오> 공식 예고편
배우 겸 코미디언 애덤 샌들러(《몬스터 호텔》 《웨딩 싱어》)가 전매특허의 웃음을 선사하는 애니메이션 뮤지컬 코미디. 초등학교 마지막 해를 보내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성장 스토리. 교실에서 키우는 반려동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반려동물 생활에 질릴 대로 질린 74세의 도마뱀(샌들러). 테라리엄을 공유하는 거북이(빌 버)와 함께 수십 년을 플로리다의 같은 교실에서 갇혀 지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어쩌다가 이제 살날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도마뱀은 바깥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탈출을 계획한다. 그런데 탈출은커녕 불안해하는 학생들의 여러 문제에 휘말리고 만다. 말도 안 되게 심술궂은 임시 교사도 그중 하나! 이 일은 결국 가장 이상하지만 또한 가장 보람찬 버킷 리스트가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