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비2025-04-02 03:14:24
그리움의 색을 칠해가는
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 리뷰




Relative contents
-
- 영춘권의 고수 견자단 이번엔 핵주먹 타이슨과 대결 엽문3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엽문3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의 사용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
- 블랙 위도우, 가족의 의미에 대한 화두를 던지며 퇴장! 안녕!
블랙위도우가 지난 주 개봉했어요.
나탸사 로마노프의 마지막 영화인데요. 옐레나 라는 동생이 등장하고 엄마와 아빠까지 등장을 하죠.
사실은 어린 시절 3년 동안 같이 보냈던 가짜 가족입니다.
그들과의 인연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의 중심에 있습니다.
나타샤는 어벤져스 멤버들과 사이가 틀어진 상황이죠.
그래서 나타샤가 생각하는 가족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라가는 영화에요.
꽤 멋진 액션 장면들이 있구요. 격투 액션이 적은게 아쉽긴 하지만..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하세요!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
- 넷플릭스 <새콤달콤> 공식 예고편
[2021년 6월 4일, 넷플릭스 공개]
눈에서 머러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 한 커플이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달콤했던 그들의 연애가 점점 쓴맛으로 변해가는 느낌.
아무리 애써봐도 소용없는 걸까?
-
- 영화 <모아나 2> 스페셜 예고편
"소리 지를 준비됐어?"😏 길잡이가 되어 돌아온 모아나🌺 새로운 선원들과 떠나는 모험에선 과연 어떤 일이? [모아나 2] 스페셜 예고편 공개!
-
- <제8일의 밤> 불교 엑소시즘의 성취와 한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북산 암자의 ‘하정 스님(이얼)'은 부처가 봉인한 악귀 ‘붉은 눈’과 ‘검은 눈’ 중 '붉은 눈'이 풀려났고, 자신의 반쪽을 찾으러 올 것임을 직감한다. 이에 그는 2년째 묵언수행 중인 제자 ‘청석(남다름)'을 귀신을 천도해야 한다는 숙명과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는 ‘박진수’(이성민)에게 보낸다. 청석은 정체모를 소녀 ‘애란(김유정)'을 만나 '검은 눈'이 들어있는 사리함을 잃어버리는 등의 낭패 끝에 진수를 찾는 데 성공하고, 자초지종을 들은 진수는 애란이 ‘붉은 눈’이 거쳐야 할 7개의 징검다리 중 하나라고 확신하며 그녀를 찾아 길을 나선다. 한편, 괴이한 모습으로 죽은 시체들이 매일같이 발견되자 강력계 형사 ‘김호태’(박해준)와 후배 ‘박동진’(김동영)은 시체들 간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수사를 이어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제8일의 밤>은 낯설다. 단지 엑소시즘을 소재로 한 오컬트 영화라서가 아니다. 이미 <검은 사제들>을 필두로 <사바하>, <사자>, <변신>, <곡성> 등 많은 오컬트 작품들은 대중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도 <제8일의 밤>은 낯설다. 우선 십자가, 사제나 목사, 신과 악마, 라틴어 대신 염주와 도끼를 들고 산스크리트어를 외는 승려가 전면에 등장한 그림부터가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낯선 것은 그간 한국 오컬트 영화들의 배경이었던 기독교적 세계관 대신 불교적 주제의식에 근간을 둔 이야기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업(業)'과 '유식(唯識)'이라는 개념을 통해 악의 존재와 퇴치 방식을 오롯이 개인에게 돌리는 퇴마록이 낯설다.
<제8일의 밤>의 불교적 세계관은 제목에서부터 암시된다. 여덟 번째 밤은 봉인에서 풀려난 ‘붉은 눈’이 자신의 반쪽, ‘검은 눈’을 찾아가 하나가 되어 온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해지는 날을 말한다. 이러한 제목은 불교에서 중생이 받는 고통과 수행해야 할 계율을 주로 8가지로 나눈다는 점을 연상시킨다. 무엇보다도 붉은 눈이 반드시 7개의 징검다리를 밟아야만 완전체가 될 수 있다는 설정은 특히 흥미롭다. 이 설정이 사람의 모든 행위가 필연적으로 원인에서 결과, 결과에서 또 다른 원인이 되며 사람들은 일련의 과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업'을 시각화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는 누군가의 행위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악귀에게 사로잡히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일례로 한 여고생이 숱하게 가출을 반복한다는 이유로 경찰은 그녀의 실종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 결과 붉은 눈은 그녀를 손쉽게 징검다리로 삼을 수 있다.
또한 영화를 지탱하는 두 쌍의 주인공들에게서도 서로의 행위가 원인과 결과로 얽혀 업보로 되돌아오는 관계성을 찾아볼 수 있다. 겉보기에는 등 뒤에 천도해야 할 영혼들이 가득한 진수와 사탕을 먹고 새 운동화를 신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청석 간의 접점은 없다. 그러나 서로의 가족과 관련된 과거의 불상사를 모두 알고 있는 진수는 청석을 보는 것만으로도 분노에 사로잡힌다. 호태와 동진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경찰로 일하기 힘들어 보이는 동진을 보면서 호태는 스스로를 책망하고. 그런 그를 보면서 동진은 부적을 자그마한 선물로 건넨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떠한 행위의 원인과 결과가 되기를 반복하면서 그들은 번민에 빠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주인공들이 자신의 업으로서 따라온 번뇌와 번민을 다스리지 못할 때, 그들은 좀처럼 악귀를 제압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진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붉은 눈에게 농락당하고, 호태는 연이은 살인 사건의 실체에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각자의 행동이 틀렸다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며 번민과 번뇌에 사로잡힌 상태에서의 행위는 거듭 악을 돕고 만들어 낸다. 결국 <제8일의 밤>에서 악은 사람의 밖에 존재하며 그의 약점이나 콤플렉스가 반영하는 존재가 아니라 애초에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존재인 것이다. 이는 시작할 때만 해도 단순한 악귀로 설명한 붉은 눈과 검은 눈에게 영화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각각 번뇌와 번민이라고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이유다.
그래서 붉은 눈의 모습으로 나타낸 악귀를 퇴치하는 이야기로 보이던 <제8일의 밤>는 개개인의 업과 업보로써 악의 기원과 존재를 설명한 이상 진수와 호태가 자신의 과오를 씻어내는 이야기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다. 이때 영화는 스스로의 잘못을 깨우칠 도구로 '유식'이라는 해답을 제시한다. 불교의 관점에서 물리적 현상 세계는 상대적 관계인 연기에 의해서 잠시 생겨나고 보였다가 없어지는 세계이고,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실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객체라고 착각하는 것들은 대상을 인식하는 정신의 주체이자 마음의 작용인 '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는 세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내면 작용, 마음에서 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살펴보는 실천을 필요로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에 담긴 교훈이기도 하다.
식의 존재와 중요성은 똑같이 자신의 파트너를 쫓아 북산 암자로 향한 호태와 진수가 사뭇 다른 결말을 맞이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경찰로서 확실한 사실과 팩트, 변하지 않은 원인을 쫓던 호태는 연이은 살인사건 그 이면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동진과 얽힌 과거사를 온전히 풀어내지 못한 채 급작스럽게 퇴장한다. 반대로 진수는 자신과 청석의 가족 사이에 있었던 악연과 그로부터 비롯된 번뇌가 악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직시하며 스스로와 청석을 결과적으로 구제하는 데 성공한다. 진수는 애란을 죽여야만 악귀를 막을 수 있다는 자신의 확신이 오히려 악귀가 마지막 징검다리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음을 알게 되는데, 그로부터 그가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을 맹신하는 대신 그 이면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진정으로 얻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악의 기원, 악과의 대면, 악과의 싸움과 퇴치에 이르는 과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성하는 <제8일의 밤>의 시도는 귀를 맴도는 낯선 문구로 축약할 수도 있다. 진수는 악귀와 대치할 때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gate gate pāragate pārasaṁgate bodhi svāhā)"라는 산스크리트어 주문을 반복해서 외운다. 한자로 음차하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라는 꽤 익숙한 문구가 되는 이 주문은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이다. 영어로는 "gone gone, everyone gone to the other shore, awakening, svaha"인 이 문구는 '이미 이 세상에 온, 세상에 있는 진리를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했으니 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자'는 격려의 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눈앞에 보이는 악귀에게 저주를 걸거나 그를 옥죄는 대신 자신의 마음속 어딘가에 있을 깨달음을 먼저 찾자고 외는 진수의 모습은 일반적인 퇴마와는 사뭇 다른 모양새고, 그렇기에 영화의 메시지와 주제의식을 한 데 요약한 대사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제8일의 밤>은 기존의 한국 오컬트 영화들의 문법 대신 불교적 맥락 안에서 세계관과 캐릭터를 구축했고, 이는 그 자체로 유의미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와 동시에 이 작품이 과연 선택한 소재의 잠재력을 온전히 끌어내고 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우선 <제8일의 밤>은 퇴마록, 엑소시즘의 구성을 빌려 결국 한 개인이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드라마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드라마는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인식 및 기대와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
당장 대승 불교를 받아들인 한국 불교에서 붓다와 보살 같은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고, 그들이 악귀를 물리치면서 일반 중생을 구제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이 대목은 붉은 눈과 검은 눈을 제압하는 부처가 등장하는 오프닝 애니메이션처럼 불교적 세계관과 초월적인 존재의 힘을 빌리는 엑소시즘 영화의 장르적 지향, 관습을 일치시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오프닝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괴리감을 낳고 이는 강력한 호불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승려와 무당을 주요 인물로 등장시킨 것에 비해 불교와 무속 신앙의 관계와 그 안에 담긴 잠재적인 이야기를 온전히 다 살리지 못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될 당시 무속 신앙에서 명당으로 여기는 장소마다 절을 세운 것, 그래서 유달리 승려가 용을 내쫓고 그 자리에 절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많은 것처럼 역사적으로도 둘은 떼 놓을 수 없는 관계다. 그러나 작중 처녀 무당은 단지 주인공들의 숨겨진 과거를 줄줄이 늘어놓는 도구로 소비되는 데 그쳐 버린다. 그래서 나무에 방울과 깃발들을 달아두어 마치 소도를 연상케 하는 처녀 무당의 점집과 같은 장치 역시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사뭇 아쉬움이 남는다. 소도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성역이라는 점, 그리고 주인공이 경찰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국가 권력과 종교 간의 관계에 대해 더 밀도 있는 이야기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소재를 담아내는 그릇을 잘못 만들었다는 문제도 있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보니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작중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부재한 것이 대표적이다. 애란은 등장한 순간부터 나름의 반전을 위한 캐릭터임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청석과의 첫 만남부터 헤어짐, 재회에 이르기까지 전부 우연으로 가득하다 보니 아무리 불교적 교리를 차용한 전개라고 해도 그녀의 서사는 좀처럼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전개를 비틀기 위해 등장시킨 동진이 호태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개연성을 갖추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는 인물들의 과거사와 관계를 부각해 그들 중 누가 붉은 눈의 징검다리가 될지 여부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려는 시도가 무의미해지는 이유다.
그 외에도 8일로 나눠서 사건을 진행시키는 구성 역시 부자연스럽다. 사건의 발단을 알리는 첫째 날과 대부분의 진상이 밝혀지는 여덟 번째 날을 제외하면 남은 6일은 붉은 눈의 이동 과정을 보여주는 것 말고 사실상 하는 역할이 없기 때문이다. 비주얼적인 측면에서도 악귀와 진수가 대치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검은 연기와 북산 암자가 위치한 절벽의 모습 등에서 몰입을 방해하는 어색한 CG의 흔적을 손쉽게 볼 수 있다. 그 결과 신비로운 분위기 안에서 나름대로 깊이 고민해볼 메시지를 던지지만, 정작 그 메시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제8일의 밤>은 결국 자신의 낯섦을 신선함과 새로움이 아닌 애매모호함으로 귀결시키고 만다.
P(Poor, 형편없음)
선구안이 좋다고 훌륭한 타자가 되지는 않는다
-
- "나머지 99%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방금 카페에 들어와서 노트북을 켰다. 늘 먹던 딥초코라떼를 주문했다. 그리고 뚜벅뚜벅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뭐라고 쓰지? 고민했다. 갑자기 지갑과 휴대전화가 어디 있지? 생각했다. 에어팟으로 음악은 나오는 거 보면 분명히 전화기는 근처에 있다. 주머니를 뒤졌다. 여긴 없다. 내가 지금 앉은 책상이 유리로 된 책상이 있고 아래에 투명한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 손을 슬쩍 넣었다. 역시 없다. 뭐지? 갑자기 오싹해졌다. 가방에 있나? 가방에 손을 슬쩍 넣었더니 여기에도 없다. 순간 당황했다. 어쩌지. 근처의 가방을 다른 의자로 가져다 놓으려고 할 때 전화기와 지갑이 보였다. 노트북을 열어놨고, 그 기계에 가려져서 못 찾는 것이었다.
늘 있는 일인 것 같아 별로 놀랍지는 않지만 갑자기 상상에 빠졌다. 만약 누가 훔쳐간 거라면? 지금 앉아있는 자리 위치상 제일 구석에 있기 때문에 나를 굳이 찾아오는 게 아닌 한 내 걸 가져가기는 어렵다. 그래도 만약에 어린, 한 7살쯤 되는 애가 내 걸 훔쳐갔다고 하면 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전 파리에 여행을 갔을 때 생각난다. 소매치기 같은 범죄가 어리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나는 '역시 나쁜 놈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있구먼'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난 경찰서에 가지 않을까? 그리고 어리다고 봐주고 이런 것 없이 처벌받게 했을 것 같다. 그게 그 애한테도 좋은 거고. 나 자신한테도 좋을 테니까. 당연하지. 나는 저 애의 도둑질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니까. 이런 나의 마음가짐은 평소에 뉴스를 볼 때에도 이어진다. 내가 강박장애가 있어도 돈을 훔치고 싶은 강박에 시달렸던 적은 없다. 비슷한 느낌으로 '저 사람을 칼로 찌르지 않으면 불안할 것 같다'라고 생각한 적 역시 없다. 난 다른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이 소년이라고 봐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년원 제도가 그렇게 옳은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도덕관념과 나이는 별개의 문제니까. 이런 나에게, 또 비슷한 생각을 가진 많은 이들에게 넷플릭스가 드라마 한 편을 가져왔다. 과연 소년범죄의 해답이 강한 처벌에만 있을까. 넷플릭스로 가보자.
1. 어떤 것에 대한 드라마인가요?
한 판사가 있다. 이 판사는 소년범죄에서 일하는 판사다. 판사는 연화 지방법원이란 곳에 발령받는다. 판사는 자기의 후임을 확인한다. 마음 따뜻해 보이는 남자 판사와 아래 직원들이 있다. 근무 첫날. 소년범죄 전과자들과 함께 식사하러 간 자리에서 식당의 손님이 지갑을 분실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판사는 전부터 표현하고 있던 소년범죄자들에 대한 혐오를 분출하며, 일행이었던 한 여자아이에게 책임을 묻는다. 적당히 타이르고 이해해주고 이런 거 없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자아이의 도둑질을 들춰내 망신을 준다. 주인공 심은석 판사는 그런 사람이다. 온정도, 따뜻함도 없는 그런 법관이다.
드라마는 이 심 판사에 대한 인물 제시를 베이스로 소년범죄자들에 대한 판결 과정을 보여준다. 드라마의 핵심 소재는 이 것이다. 토막살인사건, 고등학교 시험지 유출 사건, 집단성폭행 등을 다루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은 소년범죄의 이면을 다룬다. 아. 드라마에서 다루는 세부 소재는 하나 더 있다. 바로 소년범들을 수용하는 소년범센터도 드라마에 담겨있다. 그러니까 소년범죄자들이 벌이는 범죄자가 얼마나 잔혹하냐가 소재가 아니라는 뜻이다(물론 폭력 수위 묘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수적인 것일 뿐). 소년범죄가 어떻게 일어나고, 왜 노출될 수밖에 없으며 처분 이후 어떤 과정을 통해 사회로 나서는지도 묘사한다. 이 드라마는 그런 드라마다.
2. 어떤 드라마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나 역시 소년범을 싫어한 것 같다. 강박장애가 있어도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은 하나도 없었다. 이들이 정신질환이 있다는 묘사 하나만으로도 무슨 병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드는 살인귀가 된다는 식의 인식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몇몇 병이 그런 폭력적인 수위로 분출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런 폭력성과 내면의 아픔이 무조건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이 어리다고, 정신질환자라고 봐주고 이런 게 좀 맘에 안 들었다. 나 역시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고 생각이 어느 정도 바뀌었다. 가령 나 역시 '시험지 유출 범죄'에 노출될 뻔했던 사실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런 일은 공정을 해치는 일이라 절대적으로 일어나선 안 되는 게 맞고 피해자는 엄벌에 처해져야만 한다. 그런데, 나는 서울대를 위시한 명문대 지상주의를 만든 쪽에 기여한 사람일 수도 있다. 아이들의 범죄에 기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내가 뭘 바꿀 수 있었을까 생각도 든다. 그런데 아쉽다. 나 역시 학벌에 지배당하고 있던 사람일까 봐. 그런 마음이 하나둘씩 쌓여서 지금의 10대가 고통받는 세상을 만든 건 아닐까 싶어서. 이런 미친 세상에 1인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지를 강요한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소년심판은 이런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그것에 대한 응당한 처벌만을 핵심 키워드로 삼지 않는다. 나름의 균형 있는 시각으로 이 드라마를 보고 있는 어른들을 두세 번 생각하게 만든다.
3. 소년법을 소재로 다뤘습니다. 소년범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나요?
폭력의 수위를 미화해 무조건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절한 처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소년범 센터를 다룬 에피소드가 있다. 에피소드 중간에 센터장과 10대 아이들의 진술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1) 아이들이 먼저 심한 말과 함께 밥을 안 먹겠다고 했다 2) 센터장의 폭언과 푸대접 때문에 먹지 않았다가 대립하는데, 이 경우를 둘 다 상황 극화시켜 제시한다. 난 이게 분명한 감독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연출자가 일단 누군가의 편을 들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두 번째. 이 두 가지 논쟁에서 '어느 게 옳은가'를 강조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난 실제로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나서 좀 화가 났다. 이렇게 한쪽의 시선만을 제시하는 연출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후반부에 집단성 범죄를 다루는 에피소드가 있다. 여기서 성범죄 용의자가 피해자 아버지와 대화하는 신이 있는데, 아이패드에다 침을 뱉고 싶었다. 그러니까 범죄자들의 악성을 묘사하는 데는 가감이 없었고 이들의 범죄행각에 처벌이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필연성을 제시했다는 뜻이다. 무조건 미화하는 듯한 태도를 걱정하시는 분들은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된다.
4. 폭력의 수위는 어떠한가요?
성범죄 묘사가 있다. 또 학교폭력 묘사가 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아는 10대 범죄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에 여기서 일어날 수 있는 범죄 묘사는 다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근데 쓸데없이 외설적이고 잔인하고 이러지는 않다. 적당히 화나고 적당히 거부감이 있다.
5. 이 드라마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3번에서 쓴 부분이 드라마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균형감각이다. 드라마는 쉽게 편을 들지 않는다. 즉 무작정 소년들을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쓰지 않았다. 이와 반대급부로 무조건적인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고도 말한다. 왜 소년범죄가 일어나는지. 일어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지. 이들에게 과연 실질적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교화의 효과가 어떤 긍정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를 섬세하게 녹아내리며 탄탄한 극본의 힘을 보여준다.
다른 장점은 떠나간 이들에 대한 예우다. 소년범죄로 인해 세상을 떠난 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 마음이 너무나도 아프고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도 화가 여전히 날만한 일이다. 이 드라마는 이 피해자들과 유족에 대해서 사려 깊은 묘사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쓸데없이 잔인하지도 않고 외설적이지도 않다. 적당히 거부감이 들어 화가 나는 묘사였다고 생각한다. 또 떠난 이들에게 억지 신파를 주입시키지 않고도 감정이입을 하게 해 주니 난 이 정도면 좋은 시각으로 이들을 대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입체적인 인물들이다. 주인공 심은석의 입체성은 어느 정도 생각하기 쉬웠지만 차태석-나근희-강원중 캐릭터는 이제까지 본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인물들이라고 생각한다. 클리셰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이 분들도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단적으로 극을 위해 희생당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의 존재 이유만으로도 청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이 외에도 배우들의 연기가 탁월하다. 속사정을 가지고 있는 심은석 역은 김혜수 배우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 같다. 또 입에 욕을 달지 않고 연기를 하는 김무열 배우도 연기가 좋았다고 생각한다. 신선했다. 또 이성민 배우는 찐 50대 가장의 잔소리 톤이 나와서 놀랐다. 그중 최고의 퍼포먼스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이정은 배우다. 이정은 배우는 연기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냥 그분의 다른 특성에 그런 모습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다른 조연진에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나온다. 아마 한국 독립영화를 많이 보셨으면 알 염혜란-이상희-이석형-유재명-이봄-심 달기 등 짱짱한 배우들이 드라마의 재미를 덧붙인다.
6. 이해가 어려운 작품은 아닌가요?
아니오. 이해가 어렵지는 않다.
7.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나요?
없다. 무난하게 볼 수 있다.
8. 왜 추천하고 싶나요?
드라마에서 이성민 배우가 맡은 강원중이 이런 대사를 한다. "중요한 건 법이 아냐. 시스템이지." 또 이정은 배우가 맡은 나근희 역이 이런 대사를 한다. "소년법은 스피드예요." 이 두 가지 대사는 상충한다. (드라마가 어떤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쓰지 않겠다) 법원이 범죄자들에게 사려 깊은 성찰 없이 교화 명령을 내리거나 강한 처벌을 했다고 해보자. 과연 그게 능사일까? 교화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은 사실 많은 것을 염두하지 않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극 중 한 인물의 대사처럼 다른 나라에서의 예를 들며 소년범죄의 강한 처벌이 모든 해결책이 아니라는 게 사실일 수도 있으니까. 또 징역 15년 받고 다시 사회에 나온 전과자가 다른 범죄를 일으킨다는 보장이 있나? 아닐 것이다. 실제로 이것에 대한 예시가 첫 번째와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묘사되기도 한다. 또한 폭력의 대물림과 범죄자들에게 냉담한 시선이 또 다른 범죄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내는 분노 이면에 깔려있는 사실일 것이다. 사실 소년범죄자는 가해자가 맞다. 그리고 피해자이기도 하다. 절대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끔찍한 폭력을 일으켜 당연히 처벌받아야 할 범죄자이기도 하고, 어리기 때문에 더 나은 인간이 될 교화의 기회를 받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있는 부모님이 없다고, 돈이 없다고, 적절한 교육이 없다고 누구는 범죄 저지르기가 쉽다면 그게 100% 그들의 탓이라고 볼 수 있을까. 드라마는 이 두 가지의 처지가 절대 충돌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제시한다. 설득력 있게. 말과 글로는 이렇게나 쉽지만 시각이 트이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는 탁월한 깊이로 관객들에게 도움을 준다.
뉴스로 접하는 강력범죄는 전체 소년 범죄 중 1% 정도라고 해요. 그런 나머지 99%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서,
심은석 역의 배우 김혜수
-
- 탄탄한 서스펜스로 빚은 올해 최고의 엔딩
외롭다. 씁쓸하다. 우울하다. 어쩔 수 없다. 이런 단어들은 글로 표현하기 참 어렵다. 그래서 그 어렵기 때문에 영화나 소설 같은 예술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술은 분명하게 딱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모호하니까 다방면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게 예술이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거 아니겠어?
스릴러라는 장르는 참 든든하다. 서스펜스라는 영화의 요소가 있다. 긴장감을 부여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쉬운 이 것. 참 어렵지만 장르적인 쾌감이라는 점에서 영화에 잘 넣으면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알든 모르든 참 재미있는 범죄/스릴러 영화. 나의 취향이 이거라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내가 이제까지 본 영화 중 한 60%은 차지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내가 사는 지역에는 상영관이 없어 짜증이 났었다. 근데 vod가 일찍 풀려서 빠르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암튼 이번 6월에도 잘 만든 스릴러 영화가 만들어졌다. 끊임없이 질주하다 달성한 탁월한 엔딩으로 많은 분들의 머릿속에 남을 수작이다. 탁구의 대명사가 될 영화 <실종>이다.
없어지니 보고 싶었던
어디론가 뛰어가는 주인공. 카에데는 어떤 연락을 받고 후다닥 달려가고 있다. 죄송합니다. 저희 아빠가 좀 모자라서요. 아버지가 또 사고를 쳤다. 화가 난 카에데. 여러모로 밉상인 아빠에게 한번 시원하게 짜증을 냈다. 그래도 둘은 부녀관계다. 아빠와 딸 아니랄까 봐, 둘은 친구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 아빠 하라다는 딸 카에데에게 말 한마디를 건넨다. "그런데, 나 누구 본 적 있는 것 같아." "누구?" "연쇄살인마. 그 요즘 현상수배 걸린 그놈."
탁구장을 운영했던 사토시 가족. 사업에 실패하고 여러모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탁구장을 재개하기 위해 드는 돈은 그 연쇄살인마의 현상금으로 충분했다. 신고하고 포상금을 타겠다는 하라다. 뭔 소린가 싶은 카에데. 그러나, 그다음 날에 일이 벌어졌다. 아빠 하라다가 사라졌다. 아무 흔적도 없이. 카에데는 사라진 아빠를 찾기 위해 추적에 나선다. 아버지가 일했던 공사장에 가 본 딸. 거기서 하라다가 봤다던 연쇄살인마 야마구치 테루미를 보게 된다. 처음엔 아닌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 남자는 살인마가 맞았다. 딸은 사라진 아빠의 행적을 찾기 위해 연쇄살인마를 쫓는다. 숨겨져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모른 채로.
정통파 스릴러
이 영화는 근본이 탄탄한 스릴러다. 범죄 수법 잔혹하고. 범인 캐릭터 확실하고. 추격극 서스펜스 꼼꼼하고. 정말 범죄/스릴러/미스터리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건 탄탄히 짜여있는 영화다. 일단 범죄 수법이다. 어디선가 본 범죄 방식일 수도 있다. 약간 애니메이션 코난 시리즈에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긴 한다. 근데 기시감이 들어도 그 방식이 특이하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중반부쯤에 굉장히 중요한 살인 장면이 있다. 이 살인 장면 자체의 수위가 그렇게까지 세진 않다. 근데 엄청 자극적이다. 순수 연출 방식으로 끌어낸 잔혹함이다. 아마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수많은 살인사건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은 살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 전후의 살인사건 수위는 세다. 근데 이 수위가 센 것만으로 이 영화의 서스펜스가 유지되지 않는다. 전반부의 추격전이 후반부의 어떤 갈등구조로 이어지는 방식은 이야기가 탄탄하기 때문에 이뤄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전반부의 추격전에는 인물의 특성을 경제적으로 활용한 느낌이다. 츤데레인 카에데. 겉으로는 아빠에게 툴툴대지만 아빠에게 의지하고 있다. 근데 여자 중학생쯤 되는 나이다. 여자 중학생이면 사춘기다. 이성에 눈을 뜬 시기다. 남자친구가 되고 싶어 스멀스멀 접근하는 동급생 친구와의 로맨스 코드가 재밌기도 하고 긴장감도 유발하며 극을 이끈다. 또 물리적으로 이 사람은 성인에게 이길 수 없다. 정면대결이 쉽지 않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여러 수를 둔다. 이 수를 둔 방식이 후반부에게도 작용하며 경제적인 효과를 낸다.
후반부는 잔혹한 살인극이 벌어진다. 악역의 시점에서 극을 이끈다. 이때 앞에서 썼던 살인 장면을 위시로 악역의 인물 설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중요하게 작용하는 건 당위성이다. 이 당위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적으면 스포일러다. 다만 확실한 건 전반부의 추격극과는 다른 방식의 정통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다. 추격하는 사람이 누구고, 당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바꾼 시점 전환은 탁월했다. 아직도 후반부의 장면이 기억난다. 과연 내가 어느 쪽을 응원하고 있는 걸까?라는 회의감이 들 정도로 몰입감이 뛰어나다.
이런 영화의 구성은 왠지 모르게 <셔터 아일랜드>와 <세븐>, <사이코>가 생각난다. 히치콕과 핀처, 스콜세지의 손맛이다. 물 흐르듯이 샤샤삭 지나가는 각본의 몰입감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다. 왠지 모르게 잘 안 보이는 것 같은 정통파 스릴러다. 근데 이 영화는 뭔가 잊히고 있는 것 같은 긴장감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부처 아저씨
이 사람을 예전에서 짤로 본 적 있다. 바로 사토 지로다. 시트콤에서 부처로 분장해서 웃기는 역할을 했었다. 이게 일본 특유의 유머 감성이 있다. 이 유머에 잘 어울리는 목소리 톤과 비주얼이다; 한국인인 나는 일본 영화를 그렇게 자주 볼 일이 없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던 나. 이 영화에서 아마 선명하게 이 캐릭터가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이 인물을 통해 던지는 질문은 '그렇게 보이지?'다. 사실 아닌 거 같지만 이 인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끊임없이 감독이 연출로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소화해야 하는 인물의 내면을 복사+붙여 넣기 하듯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저번 <큐어>에서 야쿠로 쇼지를 일본 송강호라고 했듯 이 아저씨는 과연 일본 최민식인 것 같은 느낌이다. 연쇄살인마 역을 맡은 배우보다 더 개성이 강한 역할을 보여주는 베테랑의 면모를 보여준다.
또 카에데 역을 맡은 배우도 귀여웠다. 초중반부에 이걸 코미디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신이 있다. 이때 은근슬쩍 넘어가는 영화의 연출을 살리는 좋은 표정연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내면 연기를 잘 소화했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과 잘 맞는 것 같았다. 또 액션부터 감정연기까지 폭발하는 연기를 잘 이행한다. 그리고, 엔딩 신에서 이 배우의 잠재력은 폭발한다.
어디서도 본 적 없던 엔딩
엔딩에 대한 해석을 어느 정도 써도 크게 문제가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관객들이 예상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단 글쓴이가 보고 나서 헉? 싶었다. 예상하지 못한 급부를 찔렀다. 그리고 설마 그게 아닐 거야 생각했다. 엔딩으로 신이 전환된다. 두 인물을 보여주고 엔딩으로 마무리짓는다.
이 엔딩을 묘사해보자면 텅 비었다. 이 텅 빈 의사표현을 이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으로 성사시켰다. 이 모든 이야기를 지나치면 지치다는 느낌이 든다. 다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치밀하게 쌓아 올린 이야기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현재 일본의 세태는 비어버린 영화의 정서를 느끼기 충분하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사람들. 다시 합치고 싶었던 가족. 가본 적은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두려움과 공포. 방법이 없는 일본 사회가 융합되어 웰메이드 스릴러의 저력이 느껴지는 수작이다. 아마 올해 개봉된 외국영화들 중에서 손 꼽힐 것 같다. 얼마 없던 상영관이 씁쓸하다.
-
- 단점으로 쏘아 올린 장점
이 글은 넷플릭스 작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리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mbc
장르물을 다루는데 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장면이나 설정들이 있다. 예를 들어 수사물에서는 발바닥에서 땀난다는 말 외엔 묘사할 방법이 없는 형사들의 고군분투가 그려진다던가. 주인공은 조사를 해야만 하는 세력과의 갈등을 겪으며 숨길 수밖에 없는 비밀을 가진 채 초조해한다던가. 흑막이라고 불리는 최후의 빌런이 나타났을 때 아니 네가!!라는 말이 나오는 반전이 숨겨져 있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장르마다의 특성은 대다수의 사람이 기대하는 점이면서도 식상함을 느끼기 쉬운 포인트이기에, 기본적인 규칙은 지키면서도 작품만의 변주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해야 하는 이중고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변주로 가득하다고 하기보다는 단점으로만 가득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화면은 어둡고 사건 전개는 느리며 수사물에서 볼 법한 장면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이런 단점을 뒤집어 모조리 장점으로 만들어버린다.
사진출처:mbc
12.3일 이후로 가르마 위치만 달랐지 우리나라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히틀러의 인기는 스포트라이트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두컴컴한 곳의 가장 정중앙에 우두커니 선 채로 그는 마치 자신만이 계시를 받은 듯 밝은 빛 아래에 존재했고. 모두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가운데 반짝반짝 홀로 빛나며 말빨 하나로 군중들을 홀라당 사로잡았다.(아 물론 누구는 그마저도 못해서 전 세계인의 욕만 홀라당 얻어먹었으니 그게 다른 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이렇듯 스포트라이트는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주지만 수사물에서는 그다지 각광받는 시점은 아니다. 그리고 이 포커싱을 위해서, 극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태수(한석규)의 집은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어두워야만 한다는 위험요소가 있었다.
그러나 이 단점을 완벽하게 커버하기 위해. 위대한 배우 한석규가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한석규는 허탈함을 표현해 낼 줄 아는 세상 몇 안 되는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의 진가가 모든 장면에서 발휘된다.
태수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담은 숨결 한 번에. 시청자들은 마음 바닥까지 훑는 듯한 저릿함을 느끼기도 하고, 애처롭게 딸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쏟아지는 태수의 복잡한 심경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가가 파르르 떨리기도 한다.
극 중 분위기와 너무도 닮은 태수는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침착하고 냉철하며 묵직한 태도를 취하지만. 마치 혼자만 벚꽃을 뿌린 듯 샤랄라 빛나는 군도 속의 강동원처럼. 태수는 자신을 에워싼 어둠에 조금도 잠식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좋은 배우를 보는 카타르시스 자체가 스포트라이트가 되어 확실하게 태수를 비춘다.
사진출처:mbc
수사 장르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속도로 수사가 진행되려면 계엄에서 해제까지의 속도쯤은 되어야 할 텐데, 이 작품은 프로파일러라는 태수의 직업상, 수사의 진척이 마치 국민의 짐 때문에 탄핵이 자꾸 미뤄지는 것만큼 느릿느릿하고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각본의 거의 대부분을 태수와 딸 하빈(채원빈)에게 집중시키는 두 번째 스포트라이트를 씀으로써 흩어지는 이야기를 없애고 극 중에 덩그러니 두 사람만을 남겨둔다.
여러 용의자와 더불어 결국에는 밝혀질 최종 빌런을 이리저리 꼬아 놓으려면 주변에 대한 설명이 많아질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극을 따라가는 데 있어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과연 이 등장인물이 필요했는가?라는 물음이 생기기도 하고. 소위 말하는 떡밥이 완벽하게 설명되지 못해 물음표를 남기거나 실패한 수사물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외롭게 뻗은 두 가지 외에 모든 곁가지를 없앰으로써 극 전체는 긴장감을 잃지 않을 수 있게 되고. 딸과 아버지 사이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으로 시청자를 단단히 동여맨 채 수사의 방향과 속도를 받아들이게 한다.
사진출처:mbc
행여나 그 와중에도 이탈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었던 듯. 작품은 세 번째 트릭을 쓰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버릴 것 하나 없이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형사들의 냄새나는 양말도, 목에서 피맛이 느껴질 것 같은 추격전도. 흠씬 두들겨 맞아 정신이 혼미해지는 폭력 장면도 없다. 오로지 극의 분위기를 십분 닮은 태수의 집이 존재할 뿐이다. 그의 집은 과연 김건희의 도이치 모터스 주가 조작정도가 아니고서야 프로파일러의 월급으로 이 정도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아름답지만. 동시에 어딘가 비밀을 감춘 듯 모든 문이 닫혀 있으며 대척점을 이루는 부녀관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듯 그들은 늘 식탁의 끝과 끝에 존재한다.
장면들이 가진 아름다움과 선으로 구분한 상징들은(마치 영화 [기생충]처럼) 배우들과 어우러져 최종적인 장면을 구성한다.
분명 비어있거나 심심하다고 느낄 수 있는 위험요소를 이 마지막 트릭이 완벽하게 없애준다. 덕분에 배우들은 빛나고, 극의 진행 또한 매끄러우며, 비밀을 숨긴듯한 아름다움을 보면서 만족할 수 있는 드라마가 완성될 수 있었다.
마치면서 (좀 길다)
1. 한석규 베우는 나이에 맞는 역할을 언제나 따박따박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만큼 그의 나이와 시간과 때에 맞는 작품은 없다고 생각한다. 단 하나의 거짓 없이 진실과 진심만으로 뭉친 대배우를 보는 이 마음이 얼마나 감사하면서도 코끝이 찡한 건지 모르겠다.
2. 비질란테로 대변할 수 있는 "사이다"물이 아니지만. 가장 현실적인 마지막을 선사한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이런 결말은 한석규 배우가 있었기에 더 진실되었다고 생각한다.
3. 개인적으로는 제목조차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딸만 아버지를 배신한 줄 알았으나.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모든 관계의 인물들이 서로에게 비수를 꽂다 못해 더 이상 고통을 호소할 수 없을 때까지 서로를 괴롭힌다. 그들의 관계에서 오는 배신감 때문에 모든 장면이 아름답지만 동시에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다.
최근 누군가는 알량한 신뢰를 업고 온 국민을 배신했다.
이 배신이 가진 파급은 너무 커서 열흘이나 지난 지금도 일상에 온전히 발을 붙이지 못하고 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덕분에 불안장애 약을 안 빼먹고 자알 먹는다)
제목이 이 드라마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면.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라는 극 중 대사는 가르마 타는 거 외엔 그 어떤 관심도 없어 보이는 당신에게 선사하는 메시지 같기만 하다.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당신 혼자 빠진 그 망상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포트라이트를 이용했다는 히틀러처럼. 당신 또한 그의 말로를 따라갈 것이니. 그대의 최후가 오거든 단 한 번만이라도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그대로 보기를 바란다.
당신은 우리에겐 친밀하지는 않았을지언정 배신자였으며. 주지 않은 신뢰마저도 이용하려 했다는 것을. 앞에 펼쳐진 이 모든 처참함은 당신이 자처한 것임을.
[이 글의 TMI]
1. 도시락 싸놨는데 안 들고 옴
2. 나 잡혀가면 좌표 좀 찍어줘요.
3. 냄비밥 해놓고 깜빡해서 밥 다 쉬었음.ㅠㅠ
#넷플릭스 #영화리뷰 #OTT리뷰 #이토록친밀한배자 #munalogi #한석규 #신작리뷰
-
- 물렁하지만 유연하게
네오 소라의 <Happy End>는 제목 그대로 종국에 행복을 발견하는 영화다. 행복이 작은 불씨로 틔워진 채 영화는 막을 내리고, 관객은 아주 개운하지는 않는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소중한 불씨를 횃불로 키우기 위한 고민이 현실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영화는 끝이 있지만, 인류의 삶은 (멸망하지 않는 이상) 계속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이 되어 극장 바깥에서 다시 상영된다.
코우와 유타를 중심으로 한 다섯 명의 음악동아리원은 학교에서 유명한 사고뭉치다. 고3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듣기 위해 클럽을 드나들정도로 대담하며, 교장 선생님의 훈계에도 지지 않고 오히려 대들정도로 무모하다. 이들이 이토록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한 삶의 배경을 가졌기 때문이다. 재일한국인, 미국인, 중국계 일본인, 토종 일본인이 모인만큼, 고유한 개성이 섞여 마치 히피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존재감을 분출한다. 다양성은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지만, 의견을 모으는 데 큰 어려움이 생긴다는 단점이 있다. 코우와 유타 사이에서의 균열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이 히피클럽도 위기에 봉착한다.
클럽에 다녀온 새벽, 코우와 유타는 교장 선생님의 자동차를 세로로 세우는 기행을 저지른다. 교장 선생은 눈엣가시였던 히피클럽 무리를 불러 강하게 압박했고, 특히 재일 한국인인 코우에게 인간종의 차이를 운운하는 등 혐오 표현을 일삼으며 조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립이 계속되자, 동아리 방을 폐쇄하고 AI시스템 파놉티(Panopty)를 가동하여 카메라를 통해 학교 곳곳에서 학생들을 감시하고, 언행을 검열하도록 했다. 히피클럽원들은 동아리방이 폐쇄된 것에 분개하며 감시 시스템을 피해 클럽 앞으로 음악 장비를 옮기기 위해 의기투합한다. 코우는 힘을 보태면서도 교장의 모욕적인 언행에 큰 반항심을 느끼며 더 큰 움직임을 꾀한다.
코우의 반항심에 더 큰 불을 지핀 것은 총리의 긴급 담화문이었다. 수차례 울리는 지진 경보에 대국민 긴급사태조항을 발효하면서, 지진 때마다 불법 입국자와 범죄자들이 판을 쳤다는 기울어진 역사적 사실을 환기한다. 총리의 담화 이후로 교내 일본인과 비일본인을 분류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면서 비일본인 학생들의 자유가 위협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은 좌시하지 않고 행동한다. 교장실을 점거하고 농성하며 판옵티의 철거를 요구한다. 코우가 사회를 바꾸려는 움직임에 힘을 쏟는 동안 순수 일본인인 유타는 방황한다. 코우와 멀어진 것이 속상하면서도 사회 시스템에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비일본인 학생들의 농성이 성공하고, 교장은 강당에서 학생들에게 판옵티의 조건부 철회를 약속한다. 자동차 테러 주동자가 자수할 것. 교장의 발언을 두고 판옵티의 철회를 찬성하는 무리와 반대를 주장하는 무리가 갈라져 뒤엉킨 가운데, 유타는 본인의 혼자 저지른 소행이었음을 밝히고 퇴장한다. 이후 판옵티는 철거되고, 유타는 퇴학당한다. 코우와 유타는 졸업식을 마치고 화해하며 작은 화합을 만들어낸다.
-
<Happy End>는 하이틴 주인공이 등장하는 여느 학원물처럼 성장 영화의 외피를 하고 있지만, 인류의 과거와 현재를 환기시키는 역사,사회극의 내용을 담고 있다. AI 감시 시스템인 판옵티는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이 제시한 교도소 '판옵티콘'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며, 나아가 조지 오웰의 '1984' 빅브라더를 교내에 이식한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연결지을 수 있다. 또한 총리의 왜곡된 발언은 마치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려 학살을 자행했던 역사를 되풀이하는 방식과 비슷하며, 제국주의 시대 자국민 중심 정책을 펴는 독재자들을 연상케 한다. 먼미래 이른바 지구촌 사회가 도래하여 다인종이 하나의 국가에 공존하는 시대에, 획일화를 강조하며 폭력을 일삼는 현상은 반복됐다. 그러나 이들은 행동했고 자유를 쟁취했다. 더 기쁜 것은 인류의 미래인 학생들이 변화의 주인공이었다는 점이다.
지진 경보음은 위기감을 조성하면서 전국민을 미지의 공포로 밀어넣는다. 공동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한 데 모이게 함과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일본인과 비일본일을 구분하며 분열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 코우의 자백은 큰 의미를 가진다. 기득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순수 일본인이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내려놓고 공동선을 위한 행동을 한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판옵티 철회라는 작은 변화에 불과할 뿐이지만, 넓은 차원에서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향한 첫걸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 유타와 비일본인 코우의 화해가 이를 암시한다. 이 작은 화합으로부터 내진설계의 위대함을 발견한다. 대판 싸워도 우스운 장난으로 풀어내는 남학생들처럼, 불안하게 흔들리지만 중심만은 지키고 있는 내진설계는 전인류적 공포인 지진을 효과적으로 방어한다. 경직되지 않고 유연하게 흔들리는 이러한 태도는 다양성이 피어날 미래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유타와 코우가 일구어낸 작은 불씨를 마음 속에서 보살피며 우리의 횃불로 키워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사유하고 반추해야 한다.
딱딱한 것보다 물렁한 것이 더 잘 찌끄러지지만, 충격을 잘 흡수한다.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참석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
- 의심이 곧 믿음이다「콘클라베」
"내 믿음에 회의가 들어요.."
영화 「다우트」의 마지막 즈음에, 돌처럼 굳건하고 단단한 믿음으로 일관하던 수녀 알로이시스는 눈물을 흘리며 얘기한다. 교구 신부의 성추문을 파헤치고 난 직후였다. 그 제목부터가 의심(doubt)인 「다우트」를 위시해, 종교를 다룬 수많은 이야기들의 실질적 주제는 대부분 '의심'이다. '종교'는 그 의미상 '믿음'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를 만들자면 필연적으로 '의심'이라는 키워드가 녹아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로맨스 영화에서 남녀 간의 다툼을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따라서 에드워드 버거의 「콘클라베」가 종교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의 의심을 적극적으로 다룬 것은 특별하지 않다. 다만 「콘클라베」의 미덕은 영화에서 그 '의심'이 드러나는 형태가 매우 세련됐다는 것이다.
세 가지 의심
우선 소재부터 흥미롭다. 「콘클라베」는 교황은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영화를 시작하고, 랄프 파인즈가 연기한 '로렌스' 추기경이 죽은 교황의 거처를 돌아다니면서 상황을 수습하는 씬으로 본격적인 포문(?)을 연다. 이때 로렌스 추기경은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캐릭터를 만나면서 관객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데, 그 상황에서 교황 선출 의식인 '콘클라베'를 집전하는 일종의 진행자 역할을 떠맡게 된다.
이는 전형적인 추리 영화의 도입부와 유사하다. 어떤 사건이나 캐릭터에 관련된 충분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빠른 호흡으로 전개되는 상황들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인데, 영화는 시종일관 철저한 '로렌스' 추기경의 관점으로만 진행되기에 영화 내내 관객들은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다.
다만 「콘클라베」에서 '로렌스'가 쫓는 것은 범인이 아니라 일종의 '신앙'이다. 콘클라베의 집행관으로서 그의 역할은 미국 법정의 판사와 유사하다. 판결 자체에는 딱히 권한이 없지만 투표를 진행하는 과정에 있어 (특정 후보에 대한) 어떤 정보를 열고 닫을 수 있다. 그래서 영화 내내 로렌스는 정보/첩보의 바닷속에서 어떤 인물이 '교황에 적합한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가톨릭 문화에서 교황이란 신과 인간의 중간쯤에 위치한 (인간이라기보단) 강력한 종교적 상징이라는 점에서, 로렌스가 고민하는 '누가 교황에 적합한가'에 대한 고민은 사실 신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로렌스에게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의 진위를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그는 '진실'을 가려내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극의 중반부에 이르면 안 그래도 복잡한 진실게임에 숨겨진 한 층위의 베일이 더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건 바로 '로렌스' 저 자신의 욕망이다.
로렌스는 진보 진영 유력 후보인 '벨리니'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사실 로렌스 속엔 어떤 욕망이 있다. 로렌스가 "양이 있으면 목장을 관리하는 사람도 있어야 된다"라는 선대 교황의 애정 어린 조언을 반복해서 되뇌는 건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내심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콘클라베에 시작하기 앞서 짧은 연설을 하던 로렌스가 너무 존재감을 드러내버린 바람에 진보 진영의 표가 갈라져버리는데, "그렇게 야망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라며 비아냥거리는 '벨리니'추기경에게 로렌스는 (고의가 아니었다고) 분노를 표출한다. 그러나 극의 중후반부 결국 자기 자신에게 투표를 하는 로렌스의 행동을 봤을 때, 공격적인 연설은 로렌스의 무의식적인 욕망이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처럼 「콘클라베」가 의심을 드러내는 형식은 입체 / 다층적이다.
정보에 대한 의심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
신앙 자체에 대한 의심
세 가지의 의심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만들어내는 어떤 긴장감은 위엄 있는 종교 의식이라는 느리고 지루한 소재 속에서 충분한 장력을 뽑아낸다.
인간에서 상징으로, 콘클라베
「콘클라베」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바로 장대한 인서트(Inserts) 컷과 인물 클로즈업의 반복적인 대비다. 특히 거대한 종교화를 비추거나 특정한 성물을 제법 긴 시간 동안 비추는 등 인서트 컷을 일종의 종교적 상징처럼 사용하는데, 이는 로렌스의 시각에서 바라본 신성성의 모습이다. 선대 교황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지지하는 후보인 '벨리니'나 '베니테스'에게 순결의 프레임을 씌우는 등 로렌스에게 신앙이란 완전무결의 무엇인 셈이다. 이에 반해 감독의 카메라가 인물을 비출 땐 섬세한 표정이 드러나는 클로즈업을 선택한다. 결국 신앙을 체화하여야 할 인간은 로렌스가 기대하는 순결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며, 그것은 클로즈업 속에서 끝없이 흔들리는 캐릭터들의 표정으로 드러난다.
극의 후반부 원인 모를 폭탄 테러 직후 이와 같은 도식은 살짝 뒤틀리는데, 투표장이 아닌 작은 강당에 모여 속에 있던 진솔한 이야기들을 꺼내는 추기경들을 비추는 카메라는 지금껏 종교화를 비추던 그 롱숏으로 추기경들을 비춘다. 이때 처음으로 극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지금껏 조용히 있던 '베니테스'다. 마지막 남은 유력한 보수 후보 '테데스코'에게 정면으로 맞서며 순식간에 콘클라베의 중심으로 떠오른 '베니테스'를 비추는 카메라는 지금껏 인물들을 비추던 방식과는 다른 형태의 연출을 보인다. 역시도 베니테스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한 로렌스의 연장일 것이다.
정리하자며 「콘클라베」는 일종의 추리 스릴러의 형태를 띤 로렌스의 내면 탐구(?)인 셈이다. 사실 소재가 콘클라베일 뿐 기독교의 교리나 개념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기 때문에 영화에서 '종교'가 있는 자리에 각자의 '믿음'을 넣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이 독해할 수 있을 테다.
결국 영화에서 중요한 건 내가 믿는 어떤 순수성, 내가 믿는 성역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일 텐데, 극의 마지막 나름의 반전으로 기능하는 '최종적 진실'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의심해 보아야 할 문제를 제시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의심을 품지 않는 확신"이라는 작중 로렌스의 대사는 결국 영화가 말하고 싶은 최종적인 잠언이다.
-
- 영춘권의 고수 견자단 이번엔 핵주먹 타이슨과 대결 엽문3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엽문3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의 사용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
- 블랙 위도우, 가족의 의미에 대한 화두를 던지며 퇴장! 안녕!
블랙위도우가 지난 주 개봉했어요.
나탸사 로마노프의 마지막 영화인데요. 옐레나 라는 동생이 등장하고 엄마와 아빠까지 등장을 하죠.
사실은 어린 시절 3년 동안 같이 보냈던 가짜 가족입니다.
그들과의 인연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의 중심에 있습니다.
나타샤는 어벤져스 멤버들과 사이가 틀어진 상황이죠.
그래서 나타샤가 생각하는 가족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라가는 영화에요.
꽤 멋진 액션 장면들이 있구요. 격투 액션이 적은게 아쉽긴 하지만..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하세요!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
- 넷플릭스 <새콤달콤> 공식 예고편
[2021년 6월 4일, 넷플릭스 공개]
눈에서 머러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 한 커플이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달콤했던 그들의 연애가 점점 쓴맛으로 변해가는 느낌.
아무리 애써봐도 소용없는 걸까?
-
- 영화 <모아나 2> 스페셜 예고편
"소리 지를 준비됐어?"😏 길잡이가 되어 돌아온 모아나🌺 새로운 선원들과 떠나는 모험에선 과연 어떤 일이? [모아나 2] 스페셜 예고편 공개!
-
- <제8일의 밤> 불교 엑소시즘의 성취와 한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북산 암자의 ‘하정 스님(이얼)'은 부처가 봉인한 악귀 ‘붉은 눈’과 ‘검은 눈’ 중 '붉은 눈'이 풀려났고, 자신의 반쪽을 찾으러 올 것임을 직감한다. 이에 그는 2년째 묵언수행 중인 제자 ‘청석(남다름)'을 귀신을 천도해야 한다는 숙명과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는 ‘박진수’(이성민)에게 보낸다. 청석은 정체모를 소녀 ‘애란(김유정)'을 만나 '검은 눈'이 들어있는 사리함을 잃어버리는 등의 낭패 끝에 진수를 찾는 데 성공하고, 자초지종을 들은 진수는 애란이 ‘붉은 눈’이 거쳐야 할 7개의 징검다리 중 하나라고 확신하며 그녀를 찾아 길을 나선다. 한편, 괴이한 모습으로 죽은 시체들이 매일같이 발견되자 강력계 형사 ‘김호태’(박해준)와 후배 ‘박동진’(김동영)은 시체들 간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수사를 이어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제8일의 밤>은 낯설다. 단지 엑소시즘을 소재로 한 오컬트 영화라서가 아니다. 이미 <검은 사제들>을 필두로 <사바하>, <사자>, <변신>, <곡성> 등 많은 오컬트 작품들은 대중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도 <제8일의 밤>은 낯설다. 우선 십자가, 사제나 목사, 신과 악마, 라틴어 대신 염주와 도끼를 들고 산스크리트어를 외는 승려가 전면에 등장한 그림부터가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낯선 것은 그간 한국 오컬트 영화들의 배경이었던 기독교적 세계관 대신 불교적 주제의식에 근간을 둔 이야기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업(業)'과 '유식(唯識)'이라는 개념을 통해 악의 존재와 퇴치 방식을 오롯이 개인에게 돌리는 퇴마록이 낯설다.
<제8일의 밤>의 불교적 세계관은 제목에서부터 암시된다. 여덟 번째 밤은 봉인에서 풀려난 ‘붉은 눈’이 자신의 반쪽, ‘검은 눈’을 찾아가 하나가 되어 온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해지는 날을 말한다. 이러한 제목은 불교에서 중생이 받는 고통과 수행해야 할 계율을 주로 8가지로 나눈다는 점을 연상시킨다. 무엇보다도 붉은 눈이 반드시 7개의 징검다리를 밟아야만 완전체가 될 수 있다는 설정은 특히 흥미롭다. 이 설정이 사람의 모든 행위가 필연적으로 원인에서 결과, 결과에서 또 다른 원인이 되며 사람들은 일련의 과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업'을 시각화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는 누군가의 행위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악귀에게 사로잡히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일례로 한 여고생이 숱하게 가출을 반복한다는 이유로 경찰은 그녀의 실종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 결과 붉은 눈은 그녀를 손쉽게 징검다리로 삼을 수 있다.
또한 영화를 지탱하는 두 쌍의 주인공들에게서도 서로의 행위가 원인과 결과로 얽혀 업보로 되돌아오는 관계성을 찾아볼 수 있다. 겉보기에는 등 뒤에 천도해야 할 영혼들이 가득한 진수와 사탕을 먹고 새 운동화를 신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청석 간의 접점은 없다. 그러나 서로의 가족과 관련된 과거의 불상사를 모두 알고 있는 진수는 청석을 보는 것만으로도 분노에 사로잡힌다. 호태와 동진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경찰로 일하기 힘들어 보이는 동진을 보면서 호태는 스스로를 책망하고. 그런 그를 보면서 동진은 부적을 자그마한 선물로 건넨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떠한 행위의 원인과 결과가 되기를 반복하면서 그들은 번민에 빠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주인공들이 자신의 업으로서 따라온 번뇌와 번민을 다스리지 못할 때, 그들은 좀처럼 악귀를 제압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진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붉은 눈에게 농락당하고, 호태는 연이은 살인 사건의 실체에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각자의 행동이 틀렸다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며 번민과 번뇌에 사로잡힌 상태에서의 행위는 거듭 악을 돕고 만들어 낸다. 결국 <제8일의 밤>에서 악은 사람의 밖에 존재하며 그의 약점이나 콤플렉스가 반영하는 존재가 아니라 애초에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존재인 것이다. 이는 시작할 때만 해도 단순한 악귀로 설명한 붉은 눈과 검은 눈에게 영화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각각 번뇌와 번민이라고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이유다.
그래서 붉은 눈의 모습으로 나타낸 악귀를 퇴치하는 이야기로 보이던 <제8일의 밤>는 개개인의 업과 업보로써 악의 기원과 존재를 설명한 이상 진수와 호태가 자신의 과오를 씻어내는 이야기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다. 이때 영화는 스스로의 잘못을 깨우칠 도구로 '유식'이라는 해답을 제시한다. 불교의 관점에서 물리적 현상 세계는 상대적 관계인 연기에 의해서 잠시 생겨나고 보였다가 없어지는 세계이고,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실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객체라고 착각하는 것들은 대상을 인식하는 정신의 주체이자 마음의 작용인 '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는 세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내면 작용, 마음에서 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살펴보는 실천을 필요로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에 담긴 교훈이기도 하다.
식의 존재와 중요성은 똑같이 자신의 파트너를 쫓아 북산 암자로 향한 호태와 진수가 사뭇 다른 결말을 맞이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경찰로서 확실한 사실과 팩트, 변하지 않은 원인을 쫓던 호태는 연이은 살인사건 그 이면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동진과 얽힌 과거사를 온전히 풀어내지 못한 채 급작스럽게 퇴장한다. 반대로 진수는 자신과 청석의 가족 사이에 있었던 악연과 그로부터 비롯된 번뇌가 악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직시하며 스스로와 청석을 결과적으로 구제하는 데 성공한다. 진수는 애란을 죽여야만 악귀를 막을 수 있다는 자신의 확신이 오히려 악귀가 마지막 징검다리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음을 알게 되는데, 그로부터 그가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을 맹신하는 대신 그 이면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진정으로 얻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악의 기원, 악과의 대면, 악과의 싸움과 퇴치에 이르는 과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성하는 <제8일의 밤>의 시도는 귀를 맴도는 낯선 문구로 축약할 수도 있다. 진수는 악귀와 대치할 때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gate gate pāragate pārasaṁgate bodhi svāhā)"라는 산스크리트어 주문을 반복해서 외운다. 한자로 음차하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라는 꽤 익숙한 문구가 되는 이 주문은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이다. 영어로는 "gone gone, everyone gone to the other shore, awakening, svaha"인 이 문구는 '이미 이 세상에 온, 세상에 있는 진리를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했으니 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자'는 격려의 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눈앞에 보이는 악귀에게 저주를 걸거나 그를 옥죄는 대신 자신의 마음속 어딘가에 있을 깨달음을 먼저 찾자고 외는 진수의 모습은 일반적인 퇴마와는 사뭇 다른 모양새고, 그렇기에 영화의 메시지와 주제의식을 한 데 요약한 대사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제8일의 밤>은 기존의 한국 오컬트 영화들의 문법 대신 불교적 맥락 안에서 세계관과 캐릭터를 구축했고, 이는 그 자체로 유의미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와 동시에 이 작품이 과연 선택한 소재의 잠재력을 온전히 끌어내고 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우선 <제8일의 밤>은 퇴마록, 엑소시즘의 구성을 빌려 결국 한 개인이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드라마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드라마는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인식 및 기대와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
당장 대승 불교를 받아들인 한국 불교에서 붓다와 보살 같은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고, 그들이 악귀를 물리치면서 일반 중생을 구제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이 대목은 붉은 눈과 검은 눈을 제압하는 부처가 등장하는 오프닝 애니메이션처럼 불교적 세계관과 초월적인 존재의 힘을 빌리는 엑소시즘 영화의 장르적 지향, 관습을 일치시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오프닝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괴리감을 낳고 이는 강력한 호불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승려와 무당을 주요 인물로 등장시킨 것에 비해 불교와 무속 신앙의 관계와 그 안에 담긴 잠재적인 이야기를 온전히 다 살리지 못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될 당시 무속 신앙에서 명당으로 여기는 장소마다 절을 세운 것, 그래서 유달리 승려가 용을 내쫓고 그 자리에 절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많은 것처럼 역사적으로도 둘은 떼 놓을 수 없는 관계다. 그러나 작중 처녀 무당은 단지 주인공들의 숨겨진 과거를 줄줄이 늘어놓는 도구로 소비되는 데 그쳐 버린다. 그래서 나무에 방울과 깃발들을 달아두어 마치 소도를 연상케 하는 처녀 무당의 점집과 같은 장치 역시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사뭇 아쉬움이 남는다. 소도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성역이라는 점, 그리고 주인공이 경찰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국가 권력과 종교 간의 관계에 대해 더 밀도 있는 이야기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소재를 담아내는 그릇을 잘못 만들었다는 문제도 있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보니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작중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부재한 것이 대표적이다. 애란은 등장한 순간부터 나름의 반전을 위한 캐릭터임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청석과의 첫 만남부터 헤어짐, 재회에 이르기까지 전부 우연으로 가득하다 보니 아무리 불교적 교리를 차용한 전개라고 해도 그녀의 서사는 좀처럼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전개를 비틀기 위해 등장시킨 동진이 호태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개연성을 갖추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는 인물들의 과거사와 관계를 부각해 그들 중 누가 붉은 눈의 징검다리가 될지 여부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려는 시도가 무의미해지는 이유다.
그 외에도 8일로 나눠서 사건을 진행시키는 구성 역시 부자연스럽다. 사건의 발단을 알리는 첫째 날과 대부분의 진상이 밝혀지는 여덟 번째 날을 제외하면 남은 6일은 붉은 눈의 이동 과정을 보여주는 것 말고 사실상 하는 역할이 없기 때문이다. 비주얼적인 측면에서도 악귀와 진수가 대치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검은 연기와 북산 암자가 위치한 절벽의 모습 등에서 몰입을 방해하는 어색한 CG의 흔적을 손쉽게 볼 수 있다. 그 결과 신비로운 분위기 안에서 나름대로 깊이 고민해볼 메시지를 던지지만, 정작 그 메시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제8일의 밤>은 결국 자신의 낯섦을 신선함과 새로움이 아닌 애매모호함으로 귀결시키고 만다.
P(Poor, 형편없음)
선구안이 좋다고 훌륭한 타자가 되지는 않는다
-
- "나머지 99%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방금 카페에 들어와서 노트북을 켰다. 늘 먹던 딥초코라떼를 주문했다. 그리고 뚜벅뚜벅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뭐라고 쓰지? 고민했다. 갑자기 지갑과 휴대전화가 어디 있지? 생각했다. 에어팟으로 음악은 나오는 거 보면 분명히 전화기는 근처에 있다. 주머니를 뒤졌다. 여긴 없다. 내가 지금 앉은 책상이 유리로 된 책상이 있고 아래에 투명한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 손을 슬쩍 넣었다. 역시 없다. 뭐지? 갑자기 오싹해졌다. 가방에 있나? 가방에 손을 슬쩍 넣었더니 여기에도 없다. 순간 당황했다. 어쩌지. 근처의 가방을 다른 의자로 가져다 놓으려고 할 때 전화기와 지갑이 보였다. 노트북을 열어놨고, 그 기계에 가려져서 못 찾는 것이었다.
늘 있는 일인 것 같아 별로 놀랍지는 않지만 갑자기 상상에 빠졌다. 만약 누가 훔쳐간 거라면? 지금 앉아있는 자리 위치상 제일 구석에 있기 때문에 나를 굳이 찾아오는 게 아닌 한 내 걸 가져가기는 어렵다. 그래도 만약에 어린, 한 7살쯤 되는 애가 내 걸 훔쳐갔다고 하면 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전 파리에 여행을 갔을 때 생각난다. 소매치기 같은 범죄가 어리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나는 '역시 나쁜 놈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있구먼'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난 경찰서에 가지 않을까? 그리고 어리다고 봐주고 이런 것 없이 처벌받게 했을 것 같다. 그게 그 애한테도 좋은 거고. 나 자신한테도 좋을 테니까. 당연하지. 나는 저 애의 도둑질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니까. 이런 나의 마음가짐은 평소에 뉴스를 볼 때에도 이어진다. 내가 강박장애가 있어도 돈을 훔치고 싶은 강박에 시달렸던 적은 없다. 비슷한 느낌으로 '저 사람을 칼로 찌르지 않으면 불안할 것 같다'라고 생각한 적 역시 없다. 난 다른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이 소년이라고 봐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년원 제도가 그렇게 옳은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도덕관념과 나이는 별개의 문제니까. 이런 나에게, 또 비슷한 생각을 가진 많은 이들에게 넷플릭스가 드라마 한 편을 가져왔다. 과연 소년범죄의 해답이 강한 처벌에만 있을까. 넷플릭스로 가보자.
1. 어떤 것에 대한 드라마인가요?
한 판사가 있다. 이 판사는 소년범죄에서 일하는 판사다. 판사는 연화 지방법원이란 곳에 발령받는다. 판사는 자기의 후임을 확인한다. 마음 따뜻해 보이는 남자 판사와 아래 직원들이 있다. 근무 첫날. 소년범죄 전과자들과 함께 식사하러 간 자리에서 식당의 손님이 지갑을 분실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판사는 전부터 표현하고 있던 소년범죄자들에 대한 혐오를 분출하며, 일행이었던 한 여자아이에게 책임을 묻는다. 적당히 타이르고 이해해주고 이런 거 없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자아이의 도둑질을 들춰내 망신을 준다. 주인공 심은석 판사는 그런 사람이다. 온정도, 따뜻함도 없는 그런 법관이다.
드라마는 이 심 판사에 대한 인물 제시를 베이스로 소년범죄자들에 대한 판결 과정을 보여준다. 드라마의 핵심 소재는 이 것이다. 토막살인사건, 고등학교 시험지 유출 사건, 집단성폭행 등을 다루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은 소년범죄의 이면을 다룬다. 아. 드라마에서 다루는 세부 소재는 하나 더 있다. 바로 소년범들을 수용하는 소년범센터도 드라마에 담겨있다. 그러니까 소년범죄자들이 벌이는 범죄자가 얼마나 잔혹하냐가 소재가 아니라는 뜻이다(물론 폭력 수위 묘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수적인 것일 뿐). 소년범죄가 어떻게 일어나고, 왜 노출될 수밖에 없으며 처분 이후 어떤 과정을 통해 사회로 나서는지도 묘사한다. 이 드라마는 그런 드라마다.
2. 어떤 드라마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나 역시 소년범을 싫어한 것 같다. 강박장애가 있어도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은 하나도 없었다. 이들이 정신질환이 있다는 묘사 하나만으로도 무슨 병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드는 살인귀가 된다는 식의 인식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몇몇 병이 그런 폭력적인 수위로 분출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런 폭력성과 내면의 아픔이 무조건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이 어리다고, 정신질환자라고 봐주고 이런 게 좀 맘에 안 들었다. 나 역시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고 생각이 어느 정도 바뀌었다. 가령 나 역시 '시험지 유출 범죄'에 노출될 뻔했던 사실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런 일은 공정을 해치는 일이라 절대적으로 일어나선 안 되는 게 맞고 피해자는 엄벌에 처해져야만 한다. 그런데, 나는 서울대를 위시한 명문대 지상주의를 만든 쪽에 기여한 사람일 수도 있다. 아이들의 범죄에 기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내가 뭘 바꿀 수 있었을까 생각도 든다. 그런데 아쉽다. 나 역시 학벌에 지배당하고 있던 사람일까 봐. 그런 마음이 하나둘씩 쌓여서 지금의 10대가 고통받는 세상을 만든 건 아닐까 싶어서. 이런 미친 세상에 1인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지를 강요한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소년심판은 이런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그것에 대한 응당한 처벌만을 핵심 키워드로 삼지 않는다. 나름의 균형 있는 시각으로 이 드라마를 보고 있는 어른들을 두세 번 생각하게 만든다.
3. 소년법을 소재로 다뤘습니다. 소년범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나요?
폭력의 수위를 미화해 무조건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절한 처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소년범 센터를 다룬 에피소드가 있다. 에피소드 중간에 센터장과 10대 아이들의 진술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1) 아이들이 먼저 심한 말과 함께 밥을 안 먹겠다고 했다 2) 센터장의 폭언과 푸대접 때문에 먹지 않았다가 대립하는데, 이 경우를 둘 다 상황 극화시켜 제시한다. 난 이게 분명한 감독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연출자가 일단 누군가의 편을 들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두 번째. 이 두 가지 논쟁에서 '어느 게 옳은가'를 강조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난 실제로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나서 좀 화가 났다. 이렇게 한쪽의 시선만을 제시하는 연출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후반부에 집단성 범죄를 다루는 에피소드가 있다. 여기서 성범죄 용의자가 피해자 아버지와 대화하는 신이 있는데, 아이패드에다 침을 뱉고 싶었다. 그러니까 범죄자들의 악성을 묘사하는 데는 가감이 없었고 이들의 범죄행각에 처벌이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필연성을 제시했다는 뜻이다. 무조건 미화하는 듯한 태도를 걱정하시는 분들은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된다.
4. 폭력의 수위는 어떠한가요?
성범죄 묘사가 있다. 또 학교폭력 묘사가 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아는 10대 범죄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에 여기서 일어날 수 있는 범죄 묘사는 다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근데 쓸데없이 외설적이고 잔인하고 이러지는 않다. 적당히 화나고 적당히 거부감이 있다.
5. 이 드라마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3번에서 쓴 부분이 드라마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균형감각이다. 드라마는 쉽게 편을 들지 않는다. 즉 무작정 소년들을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쓰지 않았다. 이와 반대급부로 무조건적인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고도 말한다. 왜 소년범죄가 일어나는지. 일어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지. 이들에게 과연 실질적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교화의 효과가 어떤 긍정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를 섬세하게 녹아내리며 탄탄한 극본의 힘을 보여준다.
다른 장점은 떠나간 이들에 대한 예우다. 소년범죄로 인해 세상을 떠난 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 마음이 너무나도 아프고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도 화가 여전히 날만한 일이다. 이 드라마는 이 피해자들과 유족에 대해서 사려 깊은 묘사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쓸데없이 잔인하지도 않고 외설적이지도 않다. 적당히 거부감이 들어 화가 나는 묘사였다고 생각한다. 또 떠난 이들에게 억지 신파를 주입시키지 않고도 감정이입을 하게 해 주니 난 이 정도면 좋은 시각으로 이들을 대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입체적인 인물들이다. 주인공 심은석의 입체성은 어느 정도 생각하기 쉬웠지만 차태석-나근희-강원중 캐릭터는 이제까지 본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인물들이라고 생각한다. 클리셰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이 분들도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단적으로 극을 위해 희생당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의 존재 이유만으로도 청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이 외에도 배우들의 연기가 탁월하다. 속사정을 가지고 있는 심은석 역은 김혜수 배우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 같다. 또 입에 욕을 달지 않고 연기를 하는 김무열 배우도 연기가 좋았다고 생각한다. 신선했다. 또 이성민 배우는 찐 50대 가장의 잔소리 톤이 나와서 놀랐다. 그중 최고의 퍼포먼스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이정은 배우다. 이정은 배우는 연기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냥 그분의 다른 특성에 그런 모습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다른 조연진에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나온다. 아마 한국 독립영화를 많이 보셨으면 알 염혜란-이상희-이석형-유재명-이봄-심 달기 등 짱짱한 배우들이 드라마의 재미를 덧붙인다.
6. 이해가 어려운 작품은 아닌가요?
아니오. 이해가 어렵지는 않다.
7.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나요?
없다. 무난하게 볼 수 있다.
8. 왜 추천하고 싶나요?
드라마에서 이성민 배우가 맡은 강원중이 이런 대사를 한다. "중요한 건 법이 아냐. 시스템이지." 또 이정은 배우가 맡은 나근희 역이 이런 대사를 한다. "소년법은 스피드예요." 이 두 가지 대사는 상충한다. (드라마가 어떤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쓰지 않겠다) 법원이 범죄자들에게 사려 깊은 성찰 없이 교화 명령을 내리거나 강한 처벌을 했다고 해보자. 과연 그게 능사일까? 교화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은 사실 많은 것을 염두하지 않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극 중 한 인물의 대사처럼 다른 나라에서의 예를 들며 소년범죄의 강한 처벌이 모든 해결책이 아니라는 게 사실일 수도 있으니까. 또 징역 15년 받고 다시 사회에 나온 전과자가 다른 범죄를 일으킨다는 보장이 있나? 아닐 것이다. 실제로 이것에 대한 예시가 첫 번째와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묘사되기도 한다. 또한 폭력의 대물림과 범죄자들에게 냉담한 시선이 또 다른 범죄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내는 분노 이면에 깔려있는 사실일 것이다. 사실 소년범죄자는 가해자가 맞다. 그리고 피해자이기도 하다. 절대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끔찍한 폭력을 일으켜 당연히 처벌받아야 할 범죄자이기도 하고, 어리기 때문에 더 나은 인간이 될 교화의 기회를 받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있는 부모님이 없다고, 돈이 없다고, 적절한 교육이 없다고 누구는 범죄 저지르기가 쉽다면 그게 100% 그들의 탓이라고 볼 수 있을까. 드라마는 이 두 가지의 처지가 절대 충돌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제시한다. 설득력 있게. 말과 글로는 이렇게나 쉽지만 시각이 트이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는 탁월한 깊이로 관객들에게 도움을 준다.
뉴스로 접하는 강력범죄는 전체 소년 범죄 중 1% 정도라고 해요. 그런 나머지 99%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서,
심은석 역의 배우 김혜수
-
- 탄탄한 서스펜스로 빚은 올해 최고의 엔딩
외롭다. 씁쓸하다. 우울하다. 어쩔 수 없다. 이런 단어들은 글로 표현하기 참 어렵다. 그래서 그 어렵기 때문에 영화나 소설 같은 예술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술은 분명하게 딱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모호하니까 다방면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게 예술이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거 아니겠어?
스릴러라는 장르는 참 든든하다. 서스펜스라는 영화의 요소가 있다. 긴장감을 부여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쉬운 이 것. 참 어렵지만 장르적인 쾌감이라는 점에서 영화에 잘 넣으면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알든 모르든 참 재미있는 범죄/스릴러 영화. 나의 취향이 이거라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내가 이제까지 본 영화 중 한 60%은 차지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내가 사는 지역에는 상영관이 없어 짜증이 났었다. 근데 vod가 일찍 풀려서 빠르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암튼 이번 6월에도 잘 만든 스릴러 영화가 만들어졌다. 끊임없이 질주하다 달성한 탁월한 엔딩으로 많은 분들의 머릿속에 남을 수작이다. 탁구의 대명사가 될 영화 <실종>이다.
없어지니 보고 싶었던
어디론가 뛰어가는 주인공. 카에데는 어떤 연락을 받고 후다닥 달려가고 있다. 죄송합니다. 저희 아빠가 좀 모자라서요. 아버지가 또 사고를 쳤다. 화가 난 카에데. 여러모로 밉상인 아빠에게 한번 시원하게 짜증을 냈다. 그래도 둘은 부녀관계다. 아빠와 딸 아니랄까 봐, 둘은 친구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 아빠 하라다는 딸 카에데에게 말 한마디를 건넨다. "그런데, 나 누구 본 적 있는 것 같아." "누구?" "연쇄살인마. 그 요즘 현상수배 걸린 그놈."
탁구장을 운영했던 사토시 가족. 사업에 실패하고 여러모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탁구장을 재개하기 위해 드는 돈은 그 연쇄살인마의 현상금으로 충분했다. 신고하고 포상금을 타겠다는 하라다. 뭔 소린가 싶은 카에데. 그러나, 그다음 날에 일이 벌어졌다. 아빠 하라다가 사라졌다. 아무 흔적도 없이. 카에데는 사라진 아빠를 찾기 위해 추적에 나선다. 아버지가 일했던 공사장에 가 본 딸. 거기서 하라다가 봤다던 연쇄살인마 야마구치 테루미를 보게 된다. 처음엔 아닌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 남자는 살인마가 맞았다. 딸은 사라진 아빠의 행적을 찾기 위해 연쇄살인마를 쫓는다. 숨겨져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모른 채로.
정통파 스릴러
이 영화는 근본이 탄탄한 스릴러다. 범죄 수법 잔혹하고. 범인 캐릭터 확실하고. 추격극 서스펜스 꼼꼼하고. 정말 범죄/스릴러/미스터리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건 탄탄히 짜여있는 영화다. 일단 범죄 수법이다. 어디선가 본 범죄 방식일 수도 있다. 약간 애니메이션 코난 시리즈에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긴 한다. 근데 기시감이 들어도 그 방식이 특이하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중반부쯤에 굉장히 중요한 살인 장면이 있다. 이 살인 장면 자체의 수위가 그렇게까지 세진 않다. 근데 엄청 자극적이다. 순수 연출 방식으로 끌어낸 잔혹함이다. 아마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수많은 살인사건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은 살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 전후의 살인사건 수위는 세다. 근데 이 수위가 센 것만으로 이 영화의 서스펜스가 유지되지 않는다. 전반부의 추격전이 후반부의 어떤 갈등구조로 이어지는 방식은 이야기가 탄탄하기 때문에 이뤄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전반부의 추격전에는 인물의 특성을 경제적으로 활용한 느낌이다. 츤데레인 카에데. 겉으로는 아빠에게 툴툴대지만 아빠에게 의지하고 있다. 근데 여자 중학생쯤 되는 나이다. 여자 중학생이면 사춘기다. 이성에 눈을 뜬 시기다. 남자친구가 되고 싶어 스멀스멀 접근하는 동급생 친구와의 로맨스 코드가 재밌기도 하고 긴장감도 유발하며 극을 이끈다. 또 물리적으로 이 사람은 성인에게 이길 수 없다. 정면대결이 쉽지 않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여러 수를 둔다. 이 수를 둔 방식이 후반부에게도 작용하며 경제적인 효과를 낸다.
후반부는 잔혹한 살인극이 벌어진다. 악역의 시점에서 극을 이끈다. 이때 앞에서 썼던 살인 장면을 위시로 악역의 인물 설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중요하게 작용하는 건 당위성이다. 이 당위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적으면 스포일러다. 다만 확실한 건 전반부의 추격극과는 다른 방식의 정통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다. 추격하는 사람이 누구고, 당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바꾼 시점 전환은 탁월했다. 아직도 후반부의 장면이 기억난다. 과연 내가 어느 쪽을 응원하고 있는 걸까?라는 회의감이 들 정도로 몰입감이 뛰어나다.
이런 영화의 구성은 왠지 모르게 <셔터 아일랜드>와 <세븐>, <사이코>가 생각난다. 히치콕과 핀처, 스콜세지의 손맛이다. 물 흐르듯이 샤샤삭 지나가는 각본의 몰입감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다. 왠지 모르게 잘 안 보이는 것 같은 정통파 스릴러다. 근데 이 영화는 뭔가 잊히고 있는 것 같은 긴장감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부처 아저씨
이 사람을 예전에서 짤로 본 적 있다. 바로 사토 지로다. 시트콤에서 부처로 분장해서 웃기는 역할을 했었다. 이게 일본 특유의 유머 감성이 있다. 이 유머에 잘 어울리는 목소리 톤과 비주얼이다; 한국인인 나는 일본 영화를 그렇게 자주 볼 일이 없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던 나. 이 영화에서 아마 선명하게 이 캐릭터가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이 인물을 통해 던지는 질문은 '그렇게 보이지?'다. 사실 아닌 거 같지만 이 인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끊임없이 감독이 연출로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소화해야 하는 인물의 내면을 복사+붙여 넣기 하듯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저번 <큐어>에서 야쿠로 쇼지를 일본 송강호라고 했듯 이 아저씨는 과연 일본 최민식인 것 같은 느낌이다. 연쇄살인마 역을 맡은 배우보다 더 개성이 강한 역할을 보여주는 베테랑의 면모를 보여준다.
또 카에데 역을 맡은 배우도 귀여웠다. 초중반부에 이걸 코미디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신이 있다. 이때 은근슬쩍 넘어가는 영화의 연출을 살리는 좋은 표정연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내면 연기를 잘 소화했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과 잘 맞는 것 같았다. 또 액션부터 감정연기까지 폭발하는 연기를 잘 이행한다. 그리고, 엔딩 신에서 이 배우의 잠재력은 폭발한다.
어디서도 본 적 없던 엔딩
엔딩에 대한 해석을 어느 정도 써도 크게 문제가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관객들이 예상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단 글쓴이가 보고 나서 헉? 싶었다. 예상하지 못한 급부를 찔렀다. 그리고 설마 그게 아닐 거야 생각했다. 엔딩으로 신이 전환된다. 두 인물을 보여주고 엔딩으로 마무리짓는다.
이 엔딩을 묘사해보자면 텅 비었다. 이 텅 빈 의사표현을 이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으로 성사시켰다. 이 모든 이야기를 지나치면 지치다는 느낌이 든다. 다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치밀하게 쌓아 올린 이야기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현재 일본의 세태는 비어버린 영화의 정서를 느끼기 충분하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사람들. 다시 합치고 싶었던 가족. 가본 적은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두려움과 공포. 방법이 없는 일본 사회가 융합되어 웰메이드 스릴러의 저력이 느껴지는 수작이다. 아마 올해 개봉된 외국영화들 중에서 손 꼽힐 것 같다. 얼마 없던 상영관이 씁쓸하다.
-
- 단점으로 쏘아 올린 장점
이 글은 넷플릭스 작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리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mbc
장르물을 다루는데 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장면이나 설정들이 있다. 예를 들어 수사물에서는 발바닥에서 땀난다는 말 외엔 묘사할 방법이 없는 형사들의 고군분투가 그려진다던가. 주인공은 조사를 해야만 하는 세력과의 갈등을 겪으며 숨길 수밖에 없는 비밀을 가진 채 초조해한다던가. 흑막이라고 불리는 최후의 빌런이 나타났을 때 아니 네가!!라는 말이 나오는 반전이 숨겨져 있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장르마다의 특성은 대다수의 사람이 기대하는 점이면서도 식상함을 느끼기 쉬운 포인트이기에, 기본적인 규칙은 지키면서도 작품만의 변주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해야 하는 이중고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변주로 가득하다고 하기보다는 단점으로만 가득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화면은 어둡고 사건 전개는 느리며 수사물에서 볼 법한 장면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이런 단점을 뒤집어 모조리 장점으로 만들어버린다.
사진출처:mbc
12.3일 이후로 가르마 위치만 달랐지 우리나라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히틀러의 인기는 스포트라이트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두컴컴한 곳의 가장 정중앙에 우두커니 선 채로 그는 마치 자신만이 계시를 받은 듯 밝은 빛 아래에 존재했고. 모두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가운데 반짝반짝 홀로 빛나며 말빨 하나로 군중들을 홀라당 사로잡았다.(아 물론 누구는 그마저도 못해서 전 세계인의 욕만 홀라당 얻어먹었으니 그게 다른 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이렇듯 스포트라이트는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주지만 수사물에서는 그다지 각광받는 시점은 아니다. 그리고 이 포커싱을 위해서, 극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태수(한석규)의 집은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어두워야만 한다는 위험요소가 있었다.
그러나 이 단점을 완벽하게 커버하기 위해. 위대한 배우 한석규가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한석규는 허탈함을 표현해 낼 줄 아는 세상 몇 안 되는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의 진가가 모든 장면에서 발휘된다.
태수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담은 숨결 한 번에. 시청자들은 마음 바닥까지 훑는 듯한 저릿함을 느끼기도 하고, 애처롭게 딸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쏟아지는 태수의 복잡한 심경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가가 파르르 떨리기도 한다.
극 중 분위기와 너무도 닮은 태수는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침착하고 냉철하며 묵직한 태도를 취하지만. 마치 혼자만 벚꽃을 뿌린 듯 샤랄라 빛나는 군도 속의 강동원처럼. 태수는 자신을 에워싼 어둠에 조금도 잠식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좋은 배우를 보는 카타르시스 자체가 스포트라이트가 되어 확실하게 태수를 비춘다.
사진출처:mbc
수사 장르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속도로 수사가 진행되려면 계엄에서 해제까지의 속도쯤은 되어야 할 텐데, 이 작품은 프로파일러라는 태수의 직업상, 수사의 진척이 마치 국민의 짐 때문에 탄핵이 자꾸 미뤄지는 것만큼 느릿느릿하고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각본의 거의 대부분을 태수와 딸 하빈(채원빈)에게 집중시키는 두 번째 스포트라이트를 씀으로써 흩어지는 이야기를 없애고 극 중에 덩그러니 두 사람만을 남겨둔다.
여러 용의자와 더불어 결국에는 밝혀질 최종 빌런을 이리저리 꼬아 놓으려면 주변에 대한 설명이 많아질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극을 따라가는 데 있어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과연 이 등장인물이 필요했는가?라는 물음이 생기기도 하고. 소위 말하는 떡밥이 완벽하게 설명되지 못해 물음표를 남기거나 실패한 수사물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외롭게 뻗은 두 가지 외에 모든 곁가지를 없앰으로써 극 전체는 긴장감을 잃지 않을 수 있게 되고. 딸과 아버지 사이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으로 시청자를 단단히 동여맨 채 수사의 방향과 속도를 받아들이게 한다.
사진출처:mbc
행여나 그 와중에도 이탈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었던 듯. 작품은 세 번째 트릭을 쓰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버릴 것 하나 없이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형사들의 냄새나는 양말도, 목에서 피맛이 느껴질 것 같은 추격전도. 흠씬 두들겨 맞아 정신이 혼미해지는 폭력 장면도 없다. 오로지 극의 분위기를 십분 닮은 태수의 집이 존재할 뿐이다. 그의 집은 과연 김건희의 도이치 모터스 주가 조작정도가 아니고서야 프로파일러의 월급으로 이 정도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아름답지만. 동시에 어딘가 비밀을 감춘 듯 모든 문이 닫혀 있으며 대척점을 이루는 부녀관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듯 그들은 늘 식탁의 끝과 끝에 존재한다.
장면들이 가진 아름다움과 선으로 구분한 상징들은(마치 영화 [기생충]처럼) 배우들과 어우러져 최종적인 장면을 구성한다.
분명 비어있거나 심심하다고 느낄 수 있는 위험요소를 이 마지막 트릭이 완벽하게 없애준다. 덕분에 배우들은 빛나고, 극의 진행 또한 매끄러우며, 비밀을 숨긴듯한 아름다움을 보면서 만족할 수 있는 드라마가 완성될 수 있었다.
마치면서 (좀 길다)
1. 한석규 베우는 나이에 맞는 역할을 언제나 따박따박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만큼 그의 나이와 시간과 때에 맞는 작품은 없다고 생각한다. 단 하나의 거짓 없이 진실과 진심만으로 뭉친 대배우를 보는 이 마음이 얼마나 감사하면서도 코끝이 찡한 건지 모르겠다.
2. 비질란테로 대변할 수 있는 "사이다"물이 아니지만. 가장 현실적인 마지막을 선사한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이런 결말은 한석규 배우가 있었기에 더 진실되었다고 생각한다.
3. 개인적으로는 제목조차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딸만 아버지를 배신한 줄 알았으나.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모든 관계의 인물들이 서로에게 비수를 꽂다 못해 더 이상 고통을 호소할 수 없을 때까지 서로를 괴롭힌다. 그들의 관계에서 오는 배신감 때문에 모든 장면이 아름답지만 동시에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다.
최근 누군가는 알량한 신뢰를 업고 온 국민을 배신했다.
이 배신이 가진 파급은 너무 커서 열흘이나 지난 지금도 일상에 온전히 발을 붙이지 못하고 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덕분에 불안장애 약을 안 빼먹고 자알 먹는다)
제목이 이 드라마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면.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라는 극 중 대사는 가르마 타는 거 외엔 그 어떤 관심도 없어 보이는 당신에게 선사하는 메시지 같기만 하다.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당신 혼자 빠진 그 망상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포트라이트를 이용했다는 히틀러처럼. 당신 또한 그의 말로를 따라갈 것이니. 그대의 최후가 오거든 단 한 번만이라도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그대로 보기를 바란다.
당신은 우리에겐 친밀하지는 않았을지언정 배신자였으며. 주지 않은 신뢰마저도 이용하려 했다는 것을. 앞에 펼쳐진 이 모든 처참함은 당신이 자처한 것임을.
[이 글의 TMI]
1. 도시락 싸놨는데 안 들고 옴
2. 나 잡혀가면 좌표 좀 찍어줘요.
3. 냄비밥 해놓고 깜빡해서 밥 다 쉬었음.ㅠㅠ
#넷플릭스 #영화리뷰 #OTT리뷰 #이토록친밀한배자 #munalogi #한석규 #신작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