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1-03-26 00:00:00
올 봄은 대만 첫사랑 로맨스 <해길랍>과 함께!
출처: 네이버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나의 소녀시대> 등 풋풋하고 몽글몽글한 첫사랑 영화의 대명사로 잘 알려진 대만 로맨스 영화가 올 봄 다시 한번 국내 극장가를 찾는다. 첫 만남의 떨림과 첫 연애의 풋풋함, 그리고 첫 이별의 아픔까지 떨어지는 벚꽃과 함께 그 때 그 시절로 우리들을 소환할 영화 <해길랍>은 가슴 뛰는 첫사랑 '탕셩'과 '완팅'이 충격적인 사고로 이별하게 되고, 몇 년 후 '탕셩' 앞에 낯선 익숙함을 가진 '류팅'이 나타나며 벌어지는 특별한 로맨스다.
<해길랍>은 특히 대만 드라마 <상견니>로 단숨에 새로운 아시아 첫사랑에 등극한 '허광한'이 주연을 맡아 1020 여성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스타성은 물론 빛나는 비주얼과 출중한 연기력까지 모두 겸비해 범아시아적 인기를 끌고 있는 그는 이번 <해길랍>으로 첫사랑만 바라보는 순정 직진남의 모습부터, 전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섹시미까지 다채로운 매력을 선보인다.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의 마음을 훔칠 허광한은 일명 '첫사랑 재질'의 모습을 통해 대만 로맨스 사상 가장 완벽한 남자 주인공으로 만인의 이상형으로 등극할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한 <해길랍>은 국내 레전드 흥행 신드롬을 일으킨 <나의 소녀시대>와 <장난스런 키스>보다도 훨씬 더 폭발적인 반응으로 눈길을 끈다. 핑크빛 로맨스를 기다려온 관객들에게 '대만 로맨스의 봄 흥행 매직'을 다시 한 번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감이 앞서는 가운데, 이미 팬들 사이에서 <해길랍>은 절대 놓쳐선 안될 허광한의 최애 필모그래피로 꼽히고 있어 2020년 대한민국을 비롯해 대만,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전역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메가 히트 드라마 <상견니>의 뒤를 이을 흥행 돌풍이 예상된다.
다가오는 따사로운 봄, 누구에게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첫사랑의 기억과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을 다시금 불러 일으키며 우리 모두에게 잊지 못할 특별한 로맨스를 선물할 <해길랍>. 대만 영화 특유의 예쁜 색감과 감성으로 극장가에 핀 한 송이 따뜻한 봄 꽃 같은 작품이 되길 기대해 본다.
씨네랩 에디터 Jade.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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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남성과 나이든 여성 엠마 톰슨의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
60대의 은퇴한 종교 관련 학문을 가르쳐온 낸시는 평생 규칙을 따랐고, 스스로 검열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녀가 남편과 사별 후 어느 날 특별한 버킷리스트를 이루려 한다. 단 한 번도 섹스에 만족해 본 적 없었기에, ‘리오 그랜드’라는 젊은 남성의 퍼스널 서비스를 경험하며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대부분은 호텔 방 안에서 나이든 여성과 젊은 남성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스펙터클한 비주얼이라던지, 서스펜스의 긴장감이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들의 상황, 대화만으로도 묵직한 힘이 있는 영화다. 영화로 확인해야만 하는 내용을 제외하고, 그 밖에서 영화가 가진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싶다.
섹스 포지티브(Sex Positive)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상관없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젠더를 탐구하고 당당하게 이야기 나누는 삶의 태도를 뜻하는 용어
이 영화에서 가장 주된 키워드이자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궁금하고 해보고싶지만 누군가의 시선 그리고 스스로의 검열 속에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민망하게 여겨지던 것들에 대해, 당신을 평가하는 것, 당신을 감시하는 것 모두를 내려 놓으라 말하며 관계 대신 춤과 샴페인을 권하는 리오처럼 영화는 관객에게 성적 탐구와 호기심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를 꺼내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이 영화의 문법은 영상 언어로서 어떻게 작용할까?
1896년부터 2020년까지 175편 이상의 영화 클립을 분석한 니나 멘케스(Nina Menkes)는 2020년 2월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섹스와 권력: 억압의 시각적 언어(Sex and Power: The Visual Language of Oppression)’라는 주제로 할리우드의 영화 기법이 여성 혐오 문화를 강화하기 위해 어떻게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는지에 대해 강연한다. 니나 멘케스의 강연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줄곧 사용되어 여성을 대상화하는 카메라 기술은 크게 5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해당 영화와 관련된 부분만 간략하게 적용하겠다)
1. 시점샷(POV)-남성 주체와 여성 대상
2. 프레이밍-신체의 일부를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것
3. 카메라의 무빙-몸을 훑는 듯한 틸트, 패닝 그리고 슬로우 모션
4. 조명-3D로 비춰지는 남성과 2D 또는 판타지 조명으로 비춰지는 여성
5. 내러티브 포지션-서사의 흐름 밖 존재
사진 출처: <Brainwashed: Sex-Camera-Power> trailer
1번의 ‘시점샷' 같은 경우는 위 사진과 같이 시선의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 말한다. 영화들은 줄곧 ‘관객-카메라-남성(행위자: Subject)-여성(대상: Object)’의 주체-대상의 시선을 고수해왔다. 또한 젊은 여성의 신체를 보여줄 때는 얼굴이 함께 나오지도 않게 가슴, 엉덩이, 다리 등 신체 일부만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또한 대로는 패님, 틸트로 대상의 움직임보다는 누군가의 시선의 흐름을 따라가는 듯하다. 하지만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의 경우, 누군가의 몸을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지 않는다. 또한 은은하고 희미한 조명이 아닌 명확하고 또렷하게 낸시와 리오를 동일하게 담아낸다. 이런 의미들에서 낸시가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춰 바라보는 모습을 전신으로 담은 카메라는 여성이 주체가 되어 바라보고, 현란한 조명과 촬영 기술 없이 담아냈기에 ‘영상 언어'로서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내는 큰 역할을 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내러티브뿐만 아니라 카메라 또한 개인의 섹슈얼리티와 젠더를 또렷하게 바라본 덕분에 영화의 본질과 목적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힘을 가지고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라는 판에서 영상 언어만큼 중요한 것도 배우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2회를 수상한 엠마 톰슨은 연기 40년 차에 처음으로 노출 연기를 한다. “할리우드 남성 관계자들은 내가 노출 연기를 하는데 이상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며 “현실 속 대부분의 여배우는 비현실적으로 말랐고, 보정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몸을 보는 건 익숙하지 않다.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 미디어에서 진짜 몸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고 인터뷰에서 줄곧 말해온 엠마 톰슨은 이번 영화에 대해 “여성의 몸에 쏟아지는 사회의 기대 및 압박에 항상 맞서 왔다. 62 세의 나이에 옷을 벗고 촬영하는 건 힘들었지만, 자연스러운 내 몸을 보여줬다는 것은 이 영화의 성과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연기 경력에 상관없이, 나이에 상관없이 쉽지 않았을 결정에는 여성 감독과 여성 제작진으로 구성되어 충분한 대화를 나누며 장면들을 만들어냈기에 가능했을 거라 생각한다. 이에 대해 엠마 톰슨은 ”리허설을 하며 우리의 몸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내 몸과 서로의 몸에 대해 좋아하는 점, 싫어하는 점, 불안한 점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점점 편안해졌다.”라고 말했으며 감독 또한 “이야기의 본질적 특성상 노출 장면을 촬영하는 데 있어 서로 계속해서 소통하고 상의하고 실험하며 발전시켰다.”며 작업 과정에 대해 직접 말한 바 있다. 최근 많이 알려진 벡델 테스트 외에, 더 리프레임 프로젝트(The ReFrame Project)와 영화 전문 사이트인 IMDB Pro와 파트너쉽을 통해 데이터를 분석하여 제작진 중 절반 이상 여성을 고용한 프로젝트를 대상으로 수여하는 ‘리프레임 스탬프'는 이미 넷플릭스 시리즈 <브리저튼>,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 에머랄드 펜넬의 <프라미싱 영 우먼>등의 작품에게 제공된 바 있다.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또한 ‘리프레임 스탬프'를 획득하며 영화 산업계 전반에 걸쳐 카메라 안팎의 여성을 위한 기회를 확대하는데 큰 몫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나이든 남자와 젊은 여자를 보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나이든 여자와 젊은 남자가 함께 있는 모습에는 익숙하지 않다. 특별한 부류의 여성이 아니고, 젊고 비현실적인 몸매의 여성이 아니고, 자유롭게 성적 탐구를 할 것 같지 않은 평범한 여성에 대해 명확한 내러티브와 그에 맞는 또렷한 카메라의 시선이 함께 이루어졌기에 개인의 섹슈얼리티에 집중하고, 젠더에 대해 탐구해 가는 새로운 영상 언어의 역사를 쓰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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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대를 잃지 않기
SYNOPSIS.
2006년의 부탄 왕국. 마침내 지구상에서 가장 늦게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도착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민주주의다. 국왕이 자진해서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민주주의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정국가 부탄에서 역사상 첫 번째 선거가 시작될 예정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투표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당국은 모의 선거를 마련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파란당, 빨간당, 노란당 선거로 인해 서로 반목하기 시작한다. 이런 와중에 선거 감독관은 마을의 존경을 받는 큰 스님이 총을 구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는데...
POINT.
✔️ 건재한 왕이 직접 전제 왕권을 내려놓고 도입한 '위로부터의 민주주의' 실화. "투표가 뭔데요? 우린 폐하가 좋은데?" 상태의 국민들 실화. 거기서 스님이 갑자기 총을 찾는다? 부탄이기에 가능한 매력적 시놉시스
✔️ 도르지 감독에게는 부탄 관광청이 상 줘야 하지 않을까? (어쩐지 부탄은 안 줄 것 같지만) 아름답게 펼쳐지는 부탄의 풍광에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꼭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 이유.
✔️ 어쩌면 우리에게 너무 당연했던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묻는, 이 시국에 알맞은 작품
✔️ 중간중간 짤막하게 나오는 아이들이 그야말로 신스틸러.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 새해 당신의 마음을 맑게 해줄 작품. 1월 1일에 개봉했습니다!
행복한 부탄에 찾아온 변화
부탄은 인도와 티베트 사이에 위치한 아주 작은 나라다. 우리 나라에서는 보통 '국민행복지수'를 중요시하는 나라라고 오래 전 교과서 한귀퉁이에 소개된, 그래서 어쩐지 샴발라 같은 낙원의 이미지로 막연하게 그려질 만큼 잘 모르는 나라다. 나는 부탄 영화감독도 딱 한 명밖에 모른다. 이 영화의 감독이자 몇 년 전 <교실 안의 야크>로 우리를 찾아왔던 파오 초이닝 도르지 감독이다.
파오 초이닝 도르지 감독을 통해 우리에게 그려진 부탄은, 우리가 기존에 알던 부탄의 이미지처럼 맑고 청량했다. 루테인과 지아잔틴 섭취는 안 해도 될 것 같은, 보기만 해도 눈이 시원해지는 풍경과 거기 기대 사는 사람들의 면면을 부드럽게 그리기 때문이다. <교실 안의 야크>만 해도 야심만만하고 젊은 교사가 산간벽지 학교로 부임해 가면서 겪는 일들을 사랑스럽게 담았다. 그런데 차기작 제목에 총이 들어간다고요. 그것도 평화와 비폭력의 상징인 스님과 함께? 궁금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부탄은 거대한 변화의 기로에 놓여 있다.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당연스럽게 왕이 갖던 권력을 주민들이 직접 선출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과연 선출은 무엇이고 투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부터 정립해야 한다. 선거 사무원들은 전세계가 주목할 상황 앞에 그럴 듯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자 지역을 두루 다니며 사람들에게 선거의 개념을 알리고 모의 선거를 치르고자 한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넌센스한 상황들이 계속 펼쳐진다. 애초에 행정적인 이름과 생일이 중요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선거 명부를 작성하는 것부터가 일이다.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는 권력이 사람들을 크게 옭아맨다고 느끼지 않았기에, 그 권력을 억지로 쪼개 경쟁을 붙여야 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반대로 이 시간을 통해 무언가를 도모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고, 투표를 하거나 말거나 자기 뱃속을 불리는 게 중요한 사람도 있다.
민주주의가 뭔데요?
다양한 사람들의 반응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무래도 큰스님의 "총을 구해 오라"는 발언일 것이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결합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아무래도 시국이 시국이어서 그런가 우리는 좀더 세속적인 상상을 하게 되지만... 흠흠. 아무튼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영화 속 인물들이 보이는 각양각색의 반응은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피를 흘리며 민주주의를 여기까지 이루었고, 지금도 민주주의의 삼권 분립과 상호 견제의 원리를 통해 우리를 지키는 중인 한국 사회는 영화 속 부탄과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수많은 질문들이 우리에게도 유효타로 날아든다.
정치적인 의견 차이가 배신처럼 간주된다면, 거기서 우리는 어떻게 건강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제도를 들이는 과정에서 우리는 제도 그 이상으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다수가 원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남들이 목숨 걸고 갈구한 것이라면 여기서도 필요한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행복으로 가는 길은, 우리 손으로 어떻게 그려가야 할까?
자본주의도 통역이 되나요?
이 영화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묵직한 질문들을, 하필 민주주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는 이런 때에 숙고하고 있노라면... 이 영화가 민주주의만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민주주의의 좋은 짝, 자본주의다. 영화에는 총을 둘러싼 대화가 영어-부탄어 통역되는 순간들이 있는데, 이 문장들은 단순히 말뜻을 옮기는 그 이상의 기능을 한다. 통역자 '밴지'는 단순하게 말을 비슷한 단어로 옮기는 게 아니라, 표현과 그 의도까지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분칠을 해서 성실하고 매끄럽게 내어 놓는다.
자본주의를 최우선으로 하는 언어와 어찌 보면 그 대척점 비슷한 곳에 가 있는 언어를 옮기는 것은, 발화된 말 뒤에 있는 마음까지도 적절히 분칠을 해서 내어 놓아야만 하는 일이 된다. 밴지가 통역한 것은 영어와 부탄어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부탄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적절히 양념을 치고 거짓도 보태어, 화자와 청자 사이에 약간씩 괴리가 발생한다.
이 괴리는 작지만 흥미로웠는데, (이 영화에서는 작은 수준으로만 등장하지만) 이러한 괴리가 자라고 자라면 우리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일부 정치인들의 망언이 되는 거구나 싶어서였다. 이미 죽어 있는 마음의 시체 비슷한 것에 분칠을 해봤자 악취를 가릴 수 없다. 가치를 상실한 말은 언어의 거죽을 뒤집어써도 언어를 파괴할 뿐이다. 아무리 주절주절 단어를 끌어 모아 가려봐도 기표 뒤의 기의는 가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작지만 명확히 드러난다.
이 영화는 묻는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두 제도. 잘 발휘될 때의 장점과 잘못 발휘될 때의 해악도 명확한 이 제도 앞에서, 시스템 이면의 가치를 잊지는 않았는지, 잃지는 않았는지. 제도 이전에 우리 마음의 토대에 놓여야 할 것은 무엇인지, 마치 부처님의 미소처럼 순하고 부드러운 양상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영화의 결말에서는 어쩐지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이라는 백석의 시구가 떠올랐다. 우리 같이 쪼이고 싶은, 따뜻한 모닥불 같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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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다시 돌아올 그대라는 걸 알기에'
오늘은 공부하기가 싫었다. 외우던 단어책을 덮었다. 배고프다. 라면 끓일까? 아냐. 라면은 안 먹어도 될거같아. 그저께 <레 미제라블>을 봤었다. 오늘은 약속이 없다. 막학기를 맞은 대학생이란 이렇게나 심심하다. 올 봄 샀던 옷들을 입고 나가볼까. 여행을 못간다는건 이렇게 갑갑하다. 아예 그 맛을 안들었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야.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과 함께 신발을 신었다. 뭘 할지도 생각 안했다. 그냥 무턱대고 앉아있는거다. 이번달 통신사 무료 영화표가 있었다. 이번달에 보려고 계획했던 작품이 하나 더 있었다. 메가박스엔 상영관이 없다. 롯데시네마는 그냥 안간다. 딱 안성맞춤이었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내 계획이 순조롭게 지나갔다.
저벅저벅. 버스에서 내렸다. CGV가 있는 시청에 멍하니 서있었다. 돌아다니고 싶었다. 아무 약속도 없는 날이었다. 자주 가던 꽈배기집이 있었다. 저기 1000원치고 맛있었어.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삼삼오오 누구와 함께 가고 있었다. 누구는 연인이었고 누구는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익숙한 장소가 몇개 보였다. 아. 여기서 누가 알바했었는데. 누구는 또 무슨 일을 했었는데. 오랜만에 오는 시청이었다. 가까이 가기 싫은 곳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가보다. 많은 것들이 변했다. 영원한 건 없었다. 나도 변했고 세상도 많이 자랐다. 여기 근처 살던 형은 잘 사려나. 있을 때 잘할 걸 그랬나봐. 또 어떤 술집을 지나갔다. 친해지고 싶어 다가가는 걸 잘 못하는 나는 불필요한 오해도 만들어봤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생각났다. 세상에게 하고 싶었던, 속에 있는 말이 많았는데 말이지. 상영시간이 되자 다시 CGV로 돌아갔다. 영화가 시작 할 시간이었다.
<노매드랜드>는 돌아다니는 사람에 관한 영화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초반 도입부부터 아마존에서 근무하는 여자 주인공의 삶을 전면으로 내세운다. 그녀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을까. 고장나기 5분전인 밴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화장실은 차 안에 있는 페트병으로 해결한다. 하루 벌어서 하루 끼니 해결한다. 이렇게 고정적인 집이 없는 탓에 주위 사람들의 걱정도 많이 산다. 어떻게 사냐는 말에 어찌저찌 산다고 대답할 뿐인다. 사실 주인공 펀은 말이 좋아 유랑하는 사람이지 홈리스에 가깝다. 자그마한 밴에서 자다가 부지 관리인에게 들켜 쫓겨나기도 하는게 부지기수다. 펀은 어렸을때 부터 이런 삶을 살았을까? 아니다. 펀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남편과 사별하고 일하던 공장이 문을 닫자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이런 펀을 기다리는 공동체가 있었다. 같은 노매드들이었다. 영화는 이 공동체가 어떻게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갈등이나 화합의 장면이 없다. 그냥 단순히 보여줄 뿐이다. 설명해주지 않는다. 관객이 함께 같이 사는 것 같은 경험을 안겨준다.
난 이 영화의 이런 연출지점이 참 좋았다. 펀에게 동정심을 갖지 않는 연출은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영화는 펀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이 세상과 아예 멀어진 사람은 아니다. 그녀를 도와주려는 사람이 나오기는 하지만 큰 영향을 주진 않는다. 안좋은 일이 일어나느냐? 아니다. 좋은 일도 없지만 부정적인 사건이 영화에 나타나진 않는다. 펀과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줄 뿐이었다. 영화는 이런 평탄한 각본을 통해 '어떻게 살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꼭 좋은 일이나 나쁜일만 일어나야 삶인건 아니다. 감독은 연출을 통해 이런 메세지를 보내고 싶었던 것 같고, 나는 그렇게 이해해서 이 영화가 좋았다. 동정심을 갖지 않는 화법은 이런 이점만 갖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다른 특이점을 갖는다.
어울려 산다는 것. 영화는 삶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 지점에 관해 이야기한다. 다들 그렇겠지만 주변사람들과 허구한 날 싸우면서 살진 않는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좋은 사람들과 항상 무언가를 공유하며 산다. 이 영화처럼 말이다. 영화 안에선 별의 별 사람과 이에 알맞은 일상들을 보여준다. 먼저 떠난 아들을 기리기도 하고, 그릇을 깨먹기도 하고 또 신나게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한다. 이런 삶을 보여주다 마지막 클라이맥스 한 부분에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부분을 제외하곤 영화는 우리 일상에 있을 법한 소소한 일상을 보여준다. 난 감독이 이 연출지점을 통해 관객의 공감을 얻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 극적인 사건이 있다면 그 사건과 비슷한 일이 있던 사람이 공감할거다. 그런데 에피소드를 통해 이해를 돕는것이 아닌 일상을 보여주는 화법을 썼다. 이렇게 같이 소소한 일상을 보여준다는건 '그래. 나도 저렇게 좋은 주위사람들이 있었지'같은 동질감을 느끼게 하기 위함일거라고 생각한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만약 없다면 이 사람은 미래에 무슨 사건을 겪어 사연이 생길 예정일테지.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상처를 감당하고 이겨낸 후의 입장일거다. 영화는 이렇게 각자가 갖고 있는 삶의 공통점을 영리하게 활용한다. 시끄러운 속사정을 최소화하고 현재에 집중해 관객에게 '당신이 겪는 소소한 힐링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극적인 사건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영화 후반부의 명대사 '영원한 안녕이란 없다. 언젠가 꼭 만나게 될 테니까'란 대사도 주인공과 한 인물이 대화하다 나온 말이다. 이렇게 우리 삶의 대부분의 기쁨은 관계에서 온다. 영화는 이를 보여주기 위해 과거를 괄호치고 현재만 보여줘서 우리에게 어울려 산다는게 어떤 힘을 주는지를 말해준다. 신선한 화법이다. 거대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지 않고 '그래. 나도 저런 사람이 주위에 있지' 생각이 들게 하는거다. 그것만으로도 난 기분이 좋아졌다. 노매드랜드는 이런 특장점을 가지고 우리의 내면에 다가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세상에게 하고 싶던 말이 생각났다. 하지 못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우리는 주위에 누군가가 있어서 살 수 있다. 그것도 모르고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기억하고 싶은 사람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아직 작별인사를 하지는 못했다. 앞으로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영화가 이 생각에 힘을 보태줬다. 이 영화처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그 때 쯤이면 서로 웃으면서 볼 수 있겠지. 좋은 영화다. 아마 영화를 보는 사람들 모두 나처럼 함께 있거나 떠나보낸 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극찬하는 이유가 있는 작품이었다. 볼까말까 고민 많이 했었는데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어서 기분이 좋았다. 아마 메이저 시상식에서 적지 않게 상을 타게 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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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유리병 편지에 답장을
감독] 서아현
출연] 송강원, 서아현
시놉시스] 한국 사회에서 이성애자 여성이자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아현이 절친한 친구이자 동성애자 남성인 강원과 우정을 쌓는다. 영화는 서로 다른 성 정체성과 삶의 배경을 가진 이들이 크고 작은 다름과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공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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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편지를 받다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편지를 받았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출연자인 ‘강원’ 혹은 출연자이자 감독인 ‘아현’, 혹 다른 누군가일까요? 발신자를 알 수 없으니 이 편지를 유리병 편지라고 해 두겠습니다. 유리병 편지가 뭔지 아시나요? 편지를 유리병에 담아 봉해 바다에 띄워 보내는, 수신자와 발신자를 알 수 없는 편지입니다. 20세기의 낭만 같은 것이 묻어 있죠.
익명의 편지를 받고 또 누군가에게 답장을 건네는 심경으로 적어 봅니다. 일단 저에 대해 말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당신이 이 글을 읽을지, 이 영화를 볼 지 정할 수 있을 테니까. 저는 굳이 따지자면 이 영화의 아현처럼, ‘기독교인 이성애자 여성’이라는 축에 서 있습니다. 교회 품에서 자랐고, 지금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가장 따뜻한 말도, 가장 징그러운 말도 교회에서 들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동성애자를 대하는 태도에는 꽤 오래 의문을 품어 왔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인데, 왜 콕 집어 동성애자만 배척하는 걸까요? 왜 동성애자는 ‘용서받지 못할 죄’ 취급을 받는 걸까요? 음란과 탐욕도 함께 기록된 죄인데, 왜 거기에는 아무도 돌을 던지지 않는 걸까요?
비슷한 의문을 품어 보았다면, 아니 꼭 의문이 아니어도 호감 혹은 멸시 어떤 감정이라도 품어 보았다면, 무색무취가 아닌 다른 색깔이 당신 안에 있다면 한 번쯤 보시면 어떨까 권해 보고 싶습니다. 결혼과 연애, 종교와 사랑. 스스로를 동성애자라 부르든 기독교인이라 부르든,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가 아닌가요? 한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생각해 보아서 나쁠 건 없습니다.
우리는 닮아 있다
‘기독교인 이성애자 여성’이라는 점에서 아현과 비슷한 축에 서 있었다고 말했죠. 착잡한 표정의 아현 뒤로 그의 방을 보았습니다. 영화 <레토> 미니 포스터, 바다가 그려진 엽서, 세이브더칠드런 마크. 비슷한 결의 그림들이 제 방 벽에도 붙어 있습니다. 이전의 세상과 섞이지 못하는 착잡함 또한, 제가 최근 몇몇 기독교인 친구들과 말해왔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한편 강원을 보면서도 저와 비슷한 축에 서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습니다. 특히 “공동체community”를 계속 이야기하는 그가, 공동체의 힘을 믿는다는 말이, 상처받았을 때에도 공동체로 다시 돌아가던 그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배운 좋은 말 중에서도 손꼽아 좋아하는 말이 ‘공동체’거든요.
아현과 강원처럼, 우리 같이 친구 되어 고민하면 안 될까 하는 말랑말랑한 생각이 올라옵니다. 나와 다른 이들과 섞이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정말 두려운 건 섞이지 못하는 감각입니다. 돌이켜 보면 나와 다른 사람들과 서로 마음을 열고 섞이는 순간의 대화가 가장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많은 공통점이 있어도 차돌처럼 단단한 마음 앞에서는 결국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고요. 상대가 절 볼 때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래서 쓴 답장
모두가 모두의 친구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랬다면 여기가 천국이겠죠. 가끔 반목하거나 튕겨 나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순간도 있습니다. 상처받고 싶지 않고, 동시에 상처 주는 것조차 지긋지긋해서 도망치고 외면하는 마음도 알고 있잖아요. 그러나 그 최후의 순간까지는, 서로의 다양한 면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서로 반목하지 않아도, 자기 자신만으로도 이미 너무 어려우니까요. 각자 소용돌이를 안고 걸어가는 세상이니까요.
몇 년에 걸쳐 오랫동안 강원을 담은 영상들을 보며, 아현은 물론 강원 본인조차 자신에게 스스로 몰랐던 여러 가지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어떤 일면들은 카메라의 시선으로 찬찬히 담을 때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요. 이런 소중한 유리병 편지를 받게 되어 고마운 마음입니다. 웃고 울고 각양각색의 감정들을 오랜 시간 동안,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서 담아 준 두 사람에게 답장할 수 있다면… 짚어주어 고마운 지점이었다고 인사하고 싶습니다. 교회에서는 물론 퀴어 퍼레이드에서도 들리지 않을 ‘회색’의 이야기, 소중히 건네받았습니다.
추신. 이 영화를 꼭 같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다면,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기를.
*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2022. 08. 25 ~ 2022. 09. 01
영화 <퀴어 마이 프렌즈> 상영
2022. 08. 26. 20:00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2022. 08. 28. 13:00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8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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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홀도 우주의 일부란다.
이 글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 원스](이하 에에원)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출처를 반드시 표시해주세요.
온 가족의 금쪽이 탈출기;돌 굴러가는 걸로 울리면 어떻게 합니까.
사진출처:다음 메인
밥 잘 먹고. 차 조심하고. 전화세 나오니까 끊자.
김창옥 선생님의 무뚝뚝한 아버지는 늘 전화 통화를 하면 저 세 마디만 한다고 했다. 처음엔 저 말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도 세월이 지나 아버지가 되고 나니 그 말이 아버지가 전하는 사랑한다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오랜만에 본 딸에게 살쪘다는 돌직구를 던지는 에블린(양자경)을 보는 순간부터 눈물을 감출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에블린이 지금 딸에게 하는 말도 결국은 사랑을 전달하는 말이니까.
딸 조이도 알았을 것이다. 저 말을 가만히 해부해보면. 살이 찐 것(=변화)을 알아챌 만큼 엄마와 자신의 사이에 단절된 시간이 존재했으며. 세월의 길이만큼 농축된 그리움도 듬뿍 실은 채 던져진 직구라는 사실을.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이 버젓하게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을 저런 식으로 내뱉을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온 부모님에 대한 안타까움과, 엄마의 말은 조이의 마음에 박혀 상처를 내기에는 충분히 예리했기에. 딸은 매몰차게 엄마에게서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부모에 대한 미움 때문이기보다, 이런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이 사회에서 더 이상은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어 오는 괴리감과. 과연 그들의 사랑을 받을 만큼 나는 대단한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괴감 때문에. 우리는 절절한 부모의 사랑 고백에도 늘 매몰차게 회를 내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돌이 되어버려 그 어떤 면에서 보아도 부족해 보이는 상태라 할지라도. 부모는 그런 자식마저도 구하겠다는 태도로 절벽에서 몸을 던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도 온 우주의 에블린을 모두 모아서.
결국 엄마의 이런 태도는 모든 것을 외면하려던 조이의 마음도 녹인다. 비수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은 보고 싶은 딸이 생각날 때마다 갈아버려 예리해질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의 마음이었고, 결국 엄마의 마음이 그렇게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질 때까지 힘을 가했던 건 자신이었다는 것을 조이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이 포옹을 하는 장면을 쿵 하고 뭔가 부딪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흡사 큰 두 우주의 융합이 이뤄지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제각각의 우주, 혹은 행성으로 존재했던 구성원들이 드디어 가족이라는 우주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킥, 점프대에 대해서; 가보지 못한 길;내포하고 있는 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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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에서는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킥이라는 동작이 필요하다. [에에원]에서는 다른 우주의 나(Myself)를 현재 우주로 불러오기 위한 동작을 점프대를 찾는다고 말한다.(참고 1)
두 영화에서 모두 어딘가(물)에 뛰어든다는 개념을 살포시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다루는 방식이 정 반대에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나”의 존재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인셉션]에서의 물의 의미는 꿈속의 망령(?)을 씻어내고 하나밖에 없는 주체를 구별해내는 것(비빔면을 찬물에 헹궈서 면”만” 건져 내듯이)에 쓰이지만. [에에원]에서의 점프의 의미는 모든 우스꽝스러운 자신의 모습이 다 들어 있는 바다로의 다이빙을 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도 결국 그 수영을 채우는 물방울들 중 한 방울에 불과하기에 거기 뛰어드는 게 더 자연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렇기에 에블린이 현생에서 자신이 가보지 못한 수많은 길을 점프를 통해 걸어보는 모든 행동들은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것도 다른 에블린이 아닌 나, 지질한 에블린의 삶에서.(당연히 울었다)
또한 그 어떤 화려한 조명이 자신을 비추는 삶들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지금의 삶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굳건히 발을 현재의 삶에 뿌리내리는 모습은. 결국 반짝거리며 빛나는 별들도 가까이서 보면 뜨거운 가스 덩어리에 불과함을 말해준다. 모든 인생이 그러하듯 고난이나 블랙홀이 없는 삶은 어디에도 없고. 스스로의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인 “지금”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삶도. 결국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것처럼.
스스로의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인 “지금”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이 눈물을 뿌리며 파묻어 버리고 출발한 수많은 과거 행성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므로.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환상”은 언제나 현생을 괴롭히는 용도로 쓰일 뿐이다.
그래 멀티버스가 별거냐;거울나라의 앨리스 모티브+베이글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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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첫 장면은(혹은 인트로) 한 작품이 가진 메시지를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하다 했다.(FEAT. 이동진 평론가님) 이 영화의 가장 첫 장면은 거울 속에 비친 삶의 한 조각이고. 그 거울 속 삶이 현실의 삶으로 대변되는 순간은. 영화의 메인 메시지 중 하나를 말해주기도 한다 멀티버스에 대한 암시와 함께. 이 멀티버스를 모두 합쳐놓아야 온전한 사람 하나가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람을 일컬어 작은 우주라고 종종 부른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 어떤 모습의 나라고 해도(비록 손가락이 소시지라 해도!!) 모여 있어야만 우주라고 부를 수 있는 방대함이 갖춰지는 셈이고. 이를 멀티버스에 비교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베이글의 비유도 마음에 들었다. 보통 에브리씽 베이글은 가게에서 판매하는 거의 대부분의 토핑이 붙어 있는 것으로 총칭될 텐데. 가장 풍부한 맛을 즐길 수 있지만 동시에 싫어하는 것은 골라낼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마치 거의 모든 인간들의 우주(=삶)가 그렇듯 아쉽다고 생각하는 블랙홀 같은 부분을 뽕 빼놓고는 스스로의 인생을 말할 수 없듯이 말이다.
단지 조이의 블랙홀은 힘들었던 부분만 가득 넣어 만들었기에 유달리 검고, 씁쓸해 보이며 빨려 들면 큰일이 날 것처럼 보이는 것뿐.
우리 모두는 그 모든 인생의 갈림길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여러 이유들로 선택을 해야만 했고. 그 선택이 모여 현재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 모든 가지 못했던 길이 결국은 우리의 인생에 한가득 별로(as a star)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영화의 거의 대부분이 그렇듯. 아무리 초라한 삶이라 해도 에블린은 현재의 삶을 지키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인생에 특별히 탐나는 별이 있다 해도. 블랙홀이 있다 해도. 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며 포용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말이 거창해서 그렇지 결국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고 있는 이 제각각의 토핑이 묻은 베이글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보니. 그래 멀티버스가 뭐 별거인가 싶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마치면서
영화적인 장면들, 혹은 흐름을 봤을 때. 호불호라는 말을 벗어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멀티버스, 그리고 가족애(를 비롯한 삶에 대한 애정)라는 설정을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대해서가 더욱 그렇다. 분명히 새롭긴 하다. 보는 내내 어떻게 이미 정해진 결말로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영화가 끝으로 가 있음을 깨닫게 될 정도다.
그러나 방식이 새롭다는 말은 익숙해지기엔 조금 먼 상대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고. 그 방식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개인적인 선호도와 맞지 않는다고 하면 영화의 재미가 반감될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혼란스러움이 내게는 자신의 삶에 있어 존재했던 수많은 가능성(성공한다라는 뜻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지로 존재하는 가능성을 의미함)의 갈래에서 고민했던 모든 순간들을 합쳐놓은 것으로 보여 어느 정도는 납득 가능했다.
한 배우는 연기하는 데 있어 손이 못나지면 안 된다는 이유로 온 가족들이 자신에게 집안일을 일체 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투박하고 온 마디가 굵고 쭈글거리기까지 하는 양자경의 손이 더 아름답게 느껴져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개인적인 상황과 맞물려 영화가 담은 메시지가 영화가 가진 형식보다는 더 내 마음에는 강하고 진하게 남았다. 물론 형식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합격점을 줄 수 있었고.
나도 내가 살다 살다 돌 굴러가는 걸 보고 우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참고 1
매우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점프가 완료되었을 때의 모션이나 영화 속의 주제와 비교해 봤을 때 점프대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곧바로 다이빙대로 인식되었음. 그래서 물속으로 다이빙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서 인셉션과의 비교를 한 것임.
개인적으로는 토템을 돌리는 행동도 비교해보고 싶었으나. 너무 개인적으로 느낀 것 같기도 하고, 또, 리뷰가 3부작이 될 것 같아 접음. 요새 말이 많아져서 리뷰 짧게 쓰는 게 목표임. 네. 잘 안됩니다.
[이 글의 TMI]
1. 사랑니를 뽑았고. 매우 아팠으며 현재도 아픔.
2. 후유증이 너무 심해 스테로이드성 약 먹기로.
3. 거의 뭘 먹을 수 없어서 강제 다이어트 중.
4. 내 근손실은 멀티 유니버스의 내가 뭐 알아서 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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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결혼 이야기>,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결혼에 대해 꿈꾼 적은 없다. 굳이 따지면 한 번쯤은 해볼 만하지 않을까? 평생 흔들리지 않고 혼자 살 때보다 둘 이상일 때 조금 더 든든하지 않을까. 맛있는 것을 더 많이 나눠먹고 대화를 좀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찌감치 행복한 가족이나 행복한 결혼생활도 믿지 않았다. 결혼식이 해피엔딩으로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별로 공감이 되지 않았다. 둘이서 여행만 가도 한 번은 싸우는데 결혼이 그렇게 좋기만 할리가. 결혼을 계약처럼 연장하는 게 낫지 않겠나 싶기도 하다.
가족과 결혼에 대해 충격적이지만 슬픈 사실을 한 가지씩 깨달았다. 가족은 생각보다 그렇게 화목하고 평화롭지 않다. 잘 사는 집이든 못 사는 집이든 어느 집에나 속 썩이는 사람이 있고, 콩가루가 솔솔 날리는 듯한 분쟁이 있기 마련이다. 위안 아닌 위안이라면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다. 결혼에 대해 놀랐던 점은 그렇게 사랑하지 않아도 결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보다 결혼을 생각하는 그때 마침 가까이 있는 사람이 배우자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결혼에 수많은 조건이 있다면 사랑 역시 그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사이에 사랑이 있다면 좋고, 사랑이 없으면 정으로 산다고 하더라. 그래도 반평생을 함께 할 텐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어떻게 결혼을 해버리냐고? 막상 결혼의 압박이 들어오는 나이가 되니 이해는 된다. 결혼을 하라는 주변의 눈초리나 말소리는 지겹다. 그렇다고 혼자 살자니 혼자만 사는 삶은 자신이 없다. 해치워버리듯 해도 비난하지 못하겠다.
과거와 확연한 차이점은 요즘 결혼은 과거만큼의 인내심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지 않아도 된다. 헤어져도 된다. 이혼 역시 나쁜 것이 아니다. 의무감으로만 지속했던 결혼이야말로 나쁘다는 인식이 확고해졌다. 이혼하는 시기는 인내심이 어디까지 발현되었느냐 정도의 차이다. 아이가 성인이 되고 나서, 혹은 자리를 잡고 나서 황혼에 이혼하거나 졸혼을 하는 경우도 많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헤어질 수 있다. 나조차도 정말 밥맛 떨어질 때면 엄마는 아빠랑 왜 결혼했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러게 말이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엄마는 의외로 그래도 가장 중요한 순간 결정을 내릴 때는 아빠와 가치관이 비슷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래서인가. 정말 중요한 50%만 맞으면 나머지는 맞추면서(혹은 어차피 맞추지 못할 테니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살라던 말씀이. 그게 엄마의 결혼 철학이었는지도.
<결혼 이야기> 속 니콜과 찰리는 변호사 없이, 소송 없이 '둘만의 원만한 합의'로 이혼하기를 꿈꿨다. 바람대로 되면 좋았겠으나 애초부터 둘의 입장 차이는 너무나 명확했다. 나도 모르게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고 공감되는지 살펴보게 되었다. 둘의 감정이 극도에 치달았을 때 말다툼을 보고 확실해졌다. 찰리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그의 희생이 적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이 기울었다. 그래도 니콜은 찰리에게 저주를 퍼붓지는 않았다. 찰리의 말에 말문을 잃은 건 니콜만이 아니었다. 헨리만 괜찮다면 병에 걸리거나 차에 치여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니. 내가 당신을 더 사랑했다는 니콜의 말에 그게 LA에 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는 반응은 맥빠졌고, 같은 극단 메리 앤과의 외도에도 그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따졌다. 결혼 생각도 없고, 나에게 바라는 게 많은 당신 때문에 내가 수많은 유혹을 젊은 나이부터 얼마나 피하느라 힘들었는지, 당신이 나를 먼저 거부했으니 바람이 아니란다. 유혹에 관해서라면 니콜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찰리는 이기적이다. 본인이 아프다는 이유로 끝까지 가버린다. 총알이 살을 뚫고 나서도 회전을 하면서 몸속에 파편을 남기듯이. 후벼파는 것 이상의 말을 쉽게 하더라. 그가 말하고 나서 바로 후회하지 않았다면 고개를 저으면서 그를 선택했던 니콜을 처량하게 바라봤을 것이다. 누가 봐도 상처받은 눈이면서 미안하다며 찰리를 꼭 안아주는 그녀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게 사랑인 걸까. 내가 상처받아도 그 사람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는걸, 그 말을 하면서 본인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알고 안아줄 수 있는 게. 사랑을 하기엔 나 역시 너무 이기적일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영화를 봤다. 찰리를 정말 이해할 수 없을지 궁금했다. 물론 이해할 수 없어도 상관은 없다. 찰리는 내 남편이 아니니까. 다시 보니 한 가지가 눈에 띄었다. 그는 왜 뉴욕을 놓을 수 없었을까? 뉴욕이 집이고 자신의 가족은 '뉴욕'의 가족이라고 무척 강조한다. LA는 왜 안 되는 걸까. LA의 변호사와 그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공간도 넓고 살기 좋다는데도, 니콜의 가족을 좋아하면서도, LA에 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심지어 그가 사랑하고 상처 주고 싶지 않았던 니콜이 원하는데도. 뉴욕이 대체 그에게 뭐길래. 'LA'의 가족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뭐길래.
니콜이 변호사 노라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찰리는 이혼을 피할 수 있었다. 그가 니콜의 의사를 좀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말이다. 니콜은 LA에서 살고 싶었고 다양한 장르에 참여하는 배우이자 감독이 되고 싶었다. 지금처럼 '찰리의 극단'에서 '찰리가 가장 아끼는 배우'로 남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화나 드라마, 연극 등에서 종횡무진하고 싶었다. 남편의 외도에 상처받은 사이 마침 LA에서 하는 드라마가 기회처럼 찾아왔다. 찰리의 응원을 기대했건만 그는 쓴소리만 뱉었다. 그가 LA에 잠시라도 살려고 시도했다면, 그가 함께 극단에서 공동 감독을 맡아 공연을 준비했다면, 니콜에게 네 생각은 어떤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말을 했더라면. 수많은 가정법 중 하나라도 있었다면 니콜은 결혼을 유지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찰리의 이야기는? 니콜은 찰리와의 이혼을 피할 수 있었을까. 니콜이 '찰리의 아내'로 살기로 체념하는 것 말고, 찰리가 막무가내로 뉴욕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고, 그를 설득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영화를 살펴봐도 찰리의 이야기는 니콜의 이야기만큼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찰리도, 그의 변호사도 그런 이야기를 터놓지 않았다. 그러니 다만 추측할 뿐이다. 니콜이 찰리에 대한 장점에 썼던 것처럼 그는 아무것도 없이 뉴욕에 와서 자수성가했다. 누구보다 뉴요커 같다. 직업적인 명성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 집이 생겼다. 뉴욕은 그의 마음의 고향이다. 알콜중독에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와 좋은 기억이 없는 어머니와 태어난 고향은 뒤로했다. 그는 소중한 니콜과 아들 헨리, 인턴마저 가족 같은 극단 사람들을 만났다. 좁고 경적소리가 넘치는 뉴욕에 스스로 가족을 만들었다.
찰리 입장에서 LA는 어디까지나 니콜의 고향일 수밖에 없다. 찰리의 뉴욕은 흔들려도 이상할 것 없이 뿌리가 얕다. 10년을 넘게 산 니콜은 뉴욕보다 LA를 그리워하지만 찰리에겐 10여 년 된 뉴욕이 전부다. 그 뉴욕엔 편히 볼 수 있는 부모님, 형제 같은 혈연이 찰리에겐 없다. 은연중에 니콜과 그녀의 가족을 보면서 LA의 넓은 공간만큼이나 휑한 공허함을 느꼈을 것이다. LA에 있는 니콜과 헨리는 찰리가 없어도 자연스럽다. 헨리를 너무나 쉽게 LA에, 니콜의 손에 맡긴다면 그는 그의 부모님과 그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고 그는 그런 부모의 모습이 자신에게 남아있지 않을까 염려한다. 그가 힘들게 만든 가족이 무너졌을 때조차 그는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게 아무것도 없이 뉴욕에 와서 자수성가한 뉴요커가 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는 이기적이다. 그래서 솔직하지 못한 채 마음에 담아둔다. 대체로 진심과 좋은 말은 담아두었을 것이다. 니콜이 자신을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뉴욕을 떠나면 이 가족이 부서질 것 같은 걱정도, 그녀의 연기를 비평하지만 감동받았던 마음도.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을 거부하고, 사랑하는 배우가 자신을 떠나 LA로 난생처음 활동을 하러 간다니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 가 버려. 갈 테면 가. 그러고도 당신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당신은 누굴 만나도 불행할 거야. 그녀가 떠나가 버리기 전에 먼저 이혼하자고 하진 않았을까? 둘 중에 이혼을 먼저 이야기한 건 찰리였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이혼하자는 말을 먼저 꺼내도록 니콜을 몰아붙였든지. 초반에 이혼 준비로 성질을 내고 눈물을 보이는 니콜의 모습에 비해 침착한 찰리를 보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둘은 이혼했다. 남들 다 하는 것처럼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좋은 사람, 좋은 부모인지 시험받았다. 추억은 무능과 부도덕의 증거가 되었다. 찰리는 조금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니콜이 늘 잘라주던 머리는 이발소에 가서잘라야 하고, 빨래방에서 빨래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 그는 3800km를 날아 뉴욕에서 LA로 와야 헨리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양육권도 45:55의 비율로 손해를 봤다. 영화의 끝 무렵이 되어서야 그는 '살아있는 것(Being Alive)에 대해 노래를 불렀다. 나를 필요로 하고, 상처 주고,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혼자가 아니라.
이 싸움에서 결과적으로 니콜이 이긴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솔직했고 더 많이 사랑했고 그리고 이제는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고 있다. 하지만 니콜의 눈빛 역시 종종 촉촉해진다. 니콜이 읽지 못했던 편지를 찰리가 읽었을 때, 'I'll never stop loving him, even though it doesn't make any sense now'라는 문장을 들었을 때. 서로를 축하하고 싶지만 예전처럼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없을 때. 찰리가 UCLA 전임으로 오게 되어 한동안 여기 머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의 표정은 쓸쓸했다. 이혼하기 전엔 왜 그럴 수 없었을까 싶은 표정이었다.
변호사나 판사에게는 지지부진한 한 사건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결혼 이야기든 당사자에게는 며칠 밤낮을 해도 끝나지 않을 이야기다. 헨리라는 아들을 둔 찰리와 니콜 커플의 이야기는 그래도 사랑이 있는 결혼이었다. 보기 좋았다. 서로의 장점을 읊는 장면으로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이 반대라서 보완해주고 있어서 보기 좋았다. 진흙탕 싸움을 하지 말자던 사람들이 진흙탕에 빠져들어 이혼을 하는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뭘 모르고 어리석어서 진흙탕에 발을 담근 게 아니다. 서로 약점을 아는 사람들끼리 일부러 급소를 건드리면서 상처를 내는 다툼. 그 말이, 그 행동이 이렇게도 쓰인단 말인가? 놀라진 않았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건 그들이 너무나 가까웠기 때문이다.
마음은 칼질하듯 날카로운 단면으로 잘리지 않는다. 사람과 시간이, 사랑이 남아있다. 다만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함께 할 필요는 없다는 깨달음도 남았다. 당신을 사랑하는 수백 가지 이유가 있더라도 단 한 가지 감당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누구와도 헤어질 수 있다. 당신을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 원하는 삶에서 멀어질수록 마음 한 켠에서는 엉켜있는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새롭게 살고 싶은 마음이 우리를 부른다.
<결혼 이야기>를 보면 결혼에 대한 양가감정에 휩싸인다. 결혼은 이래서 해볼 만하고, 이래서 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이혼 역시 그래서 희망찬 행동이기도 하고 절망스러운 밑바닥이 될 수도 있다.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함께 할 수 없는 이유가 너무나 많다. 결혼은 사랑 하나만으론 충분하지 않은 이야기다. 아직도 절절한 둘의 눈빛과 별개로 그들은 이혼서류에 서명했다. 그들이 수많은 결혼의 위기를 넘겼음에도 이번에 정말 이혼을 했다는 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풀린 신발 끈은 묶어주지만 같은 방향을 볼 수 없고 나란히 걸을 수 없다. 잔잔한 오보에 소리에 서로에게 등진 채 자신이 갈 곳으로 걸어가는 찰리와 니콜을 보면서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이 떠올랐다. 둘에게 들려준다면 아마 눈이 빨개진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 노래를 찾을 때의 마음으로.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 버려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 김광석 <사랑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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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서핑업> 예고편
카이트 서핑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빌리는 코치의 지원으로 꿈의 대회, 윈드보이저에 참여하게 된다.
그의 여자친구 사라는 제대로된 직장을 구하는 대신 서핑 대회로 떠나는 그가 탐탁치 않고, 결국 둘은 크게 싸우고 만다.
한편 대회로 길을 떠난 빌리는 도중 사연이 많은 스카이를 만나고 둘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른다.
마침내 도착한 서핑 대회에서 그는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 선발전에 나선다.
과연 빌리는 이 대회에서 서핑과 사랑, 둘 다 거머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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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피에트로> 예고편
enna 지방의 칼라시베타라는 마을에서 목동으로 일하는 아버지를 돕던 어린 피에트로. 성인이 된 피에트로는 고향을 떠나 북부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한다. 전문 사진작가가 되어 어린 시절에 보았던 장소, 상점, 사람들을 기억하며 시칠리아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