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두codu2025-03-10 20:20:08
브래디 코베의 정육면체는 무엇을 말하는가
브래디 코베 감독 <브루탈리스트>(2025)
전쟁과 홀로코스트로 인해 국경을 넘지 못했던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은 먼저 미국 땅에 당도해 있던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가 한창 작업 중인 ‘마가렛 밴 뷰런 인스티튜트’의 도면을 보며 말한다. “당신을 보고 있어.” 라즐로와 오랜 기간 마음을 주고받았을 에르제벳은 헝가리에서 타국으로 건너와 생활하고 있던 남편 라즐로의 속내를 건축 도면에서 읽는다. 건축가이자 남편인 라즐로 토스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걸 에르제벳은 알고 있다. 에르제벳은 라즐로를 이해하는 만큼 마음과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 동반자다. 에르제벳이 라즐로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터전을 잃은 유대인 건축가가 사라지지 않을 건축물이자 자기 자신을 건설하려는 이야기다.
<브루탈리스트>에서 중요한 것은 이민자의 역사나 자본의 폭력성보다 한 예술가의 집착에 가까운 신념이다. 라즐로는 직접 정육면체를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라즐로는 건축, 즉 자신의 예술품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예술적 신념을 굽히지 않는 건축가에게 3,4미터의 높이나 대리석의 종류와 색은 절대로 사소한 부분이 아니다. 자신의 급여를 내놓아서라도 지켜내야만 한다.
라즐로가 건축을 택한 이유는 그 ‘영속성’에 있다. 시간과 침식 속에서도 견고한 본질을 잃지 않는 것. 파시즘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유린당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춰 해석되더라도 침식되지 않을 건축이야말로 라즐로의 삶이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조피아는 ‘마가렛 리 밴 뷰런 인스티튜트’와 수용소의 유사성을 근거로 홀로코스트의 잔학성과 숭고한 유대주의를 기린다. ‘과정보다 목적지가 중요하다’는 라즐로의 말은 어느새 유대인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변모한다. 라즐로의 건축물은 영원히 남겠지만 그에 덧붙여지는 메시지는 언제고 달라질 수 있음을 내포한다.
인터미션을 제외하고 4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진 <브루탈리스트>에서 에필로그는 불필요해 보인다. 1980년 제1회 건축 비엔날레에는 ‘라즐로 토스: 현재 속의 과거’라는 이름의 회고전이 진행되고 있고 휠체어에 탄 라즐로를 뒤로 한 채 조피아가 연설을 맡는다. 이 연설은 자못 유대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읽힌다. 영화의 서막에 등장했던 조피아의 심문 시퀀스가 다시 펼쳐짐으로써 유대인 박해의 부당함과 유대주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듯하다. 그러나 에필로그 속에서 라즐로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조피아의 딸이 젊은 조피아를 연기한 라피 캐시디라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서막에서 조피아는 자신의 정체성과 신분을 심문받는다. 에필로그의 라피 캐시디는 또 한 번 유대주의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앞의 시험대에 서서 정체성을 증명해야만 하는 시험을 받고 있다. 무력하게 앉아 침묵하는 라즐로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이 아니다. 그의 건축물에 유대인을 기리는 특별한 의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라즐로와 조피아가 향하는 목적지가 다름에도 침식되지 않고 영원히 남는 건축물을 꿈꾸는 예술가를 보며 현대를 살아가는 몇몇 관객의 앞에는 처참히 부서진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브래디 코베 감독은 라즐로가 어떤 건물을 지었는지, 이민자가 결국 어떻게 정착을 이뤄냈는지보다 자본과 이데올로기에 유린당하는 예술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이탈리아의 카라라 대리석의 아름다움을 탐미하던 해리슨(가이 피어스)은 술과 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라즐로를 강간한다. 에르제벳은 밴 뷰런 가족의 식사시간에 해리슨의 행동을 폭로한다. 해리슨은 식사 자리에서 사라져 행방이 묘연해진다. 가족과 일꾼들은 해리슨을 찾기 위해 ‘마가렛 밴 뷰런 인스티튜트’를 훑는다. 그리고 마침내 이탈리아의 아름답고 거대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제단 위로 십자가의 달빛이 뒤집혀 떨어진다. 거대 자본에 유린당하는 숭고한 예술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이 신은 감독이 영화를 통해 그려내고자 한 목적지에 가까운 장면이다. 브래디 코베 감독이 선보인 <브루탈리스트>라는 정육면체는 많은 이야를 품고 있지만 빛은 단연코 그 장면을 비추고 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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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SF영화
많은 기억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저장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떤 기억들은 저장해 두고 시간이 될 때마다 그 기억을 꺼내 떠올린다. 마치 영상이 재생되듯이 그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에는 그때 느꼈던 감정, 촉감에 집중한다. 어떤 기억은 아주 행복하고 어떤 기억은 아주 고통스럽다. 이렇게 기억들은 상황에 따라 선별적으로 저장된다. 의식적으로 이 기억을 저장하고 싶다고 해서 모두 저장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순간들은 어느 순간 지나고 보면 잘 기억이 나지 않기도 한다. 모든 경험 중 아주 특별한 기억들만 남아 오랜 시간 저장된다.
이렇게 저장된 기억들은 모여서 기억 속 과거가 된다. 종종 과거를 떠올리고 그 순간을 다시 돌아본다. 과거를 돌아보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누구나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과거의 특정한 기억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기도 한다. 때론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좋은 길잡이가 되지만 현재의 삶을 방해하기도 한다. 특히나 과거의 행복한 순간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순간부터 현재는 불행해지고 살아가야 할 동력이 줄어든다.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현재보다는 과거의 영광을 생각하며 현재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현재는 불행해지고, 과거에의 집착은 더욱 심해진다.
과거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 <레미니센스>
영화 <레미니센스>는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 속 레미니센스는 과거의 특정 기억을 떠올려 그때의 감정이나 촉감을 좀 더 디테일하게 느끼게 해주는 기계다. 일종의 과거로의 여행을 하게 도와주는 기계라고 할 수 있다. 이 과거로의 여행을 돕는 인물은 닉(휴 잭맨)이다. 닉은 이 기계에 들어간 의뢰자들을 음성으로 안내하여 안전하게 과거를 느낄 수 있게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닉은 동료인 와츠(탠디 뉴튼)와 함께 그 가게를 운영하면서 생계를 해결하고 있다. 그가 가게를 운영하며 만나는 고객들은 대부분 과거의 행복한 기억에 반복해서 머무르려 한다. 꽤 다양한 사람들이 그 과거에 접속하는 모습은 꽤 흥미롭게 느껴진다.
초반에 보이는 닉은 꽤 이성적이지만 공감능력이 있는 인물이다. 고객들이 과거에 너무 빠지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주거나 우려점을 충분히 전달해주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고객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 금전적인 할인도 해준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고객으로 등장하는 메이(레베카 퍼거슨)를 만난 이후 그는 새롭게 만난 메이와 많은 공감과 감정을 공유한다. 과거 행복한 기억이 별로 없는 듯 보였던 닉은 메이를 만난 이후 그만의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간다. 그가 그렇게 현재의 좋은 기억들을 과거로 쌓아둘 수 있었던 것은 과거보다는 현재에 좀 더 집중했기 때문이다. 현재 눈앞에 있는 메이라는 여인에게 집중하고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는 과거에 함몰된 영화 초반의 다른 등장인물들과는 다르게 보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 메이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중반 이후 닉도 점점 과거에 집착하게 된다. 메이와의 순간들을 다시 느끼기 위해 기계에 스스로 접속하고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자신의 연인이 떠나간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 그래서 아주 이성적으로 보였던 닉은 점점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현재보다는 과거에 머무르며 그 행복한 순간들을 다시 경험한다. 다만 사라진 연인이 왜 말도 없이 떠났는지에 대한 미스터리를 찾는 것이 주요 목적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아있긴 하다.
이성적인 닉이 과거에 집착하게 되기까지
옆에서 그를 돕는 와츠 역시 과거에 접속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아예 자신의 과거를 차단하고 있는 인물이다.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와츠는 과거의 기억을 완전히 단절시킴으로써 현재를 억지로 살아가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가 살아가는 현재는 꽤 공허해 보이고, 그가 들이키는 술은 그 공허함을 달래는 도구로 보인다. 그는 과거의 미스터리를 푸는 닉을 돕지만 그가 다시 현재를 살아가길 설득한다. 하지만 과거를 단절한 본인의 현재가 공허함을 잘 알기 때문에 그 설득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실 영화가 풀어가는 메이의 미스터리는 꽤 흥미롭다. 닉과 같은 시선으로 메이를 바라봤던 관객들은 그가 왜 사라졌는지,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를 동일한 감정으로 따라가게 한다. 하지만 그렇게 발생하는 미스터리는 영화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영화는 메이에 대한 약간의 반전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어서 다소 맥이 풀리게 한다. 또한 영화의 말미에 닉이 선택하는 어떤 모습은 그가 현재를 살아가지 않고 과거에 머무르는 것인데, 이런 닉의 선택 또한 초반에 그가 보여준 모습과 반대되는 모습이어서 영화가 가진 전체적인 주제와도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전반적으로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며 걸어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마지막 닉의 모습은 과거에만 함몰된 것처럼 보여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온전히 현재를 살아갈 기회를 얻은 인물은 와츠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부패한 경찰이나 재벌, 심지어 주인공 닉까지 모두 현재를 살아갈 기회를 얻지 못했거나 스스로 포기한다. 하지만 와츠는 단절했던 과거를 다시 회복할 기회를 스스로 만들었고, 그가 스스로 만든 현재에도 동료인 닉을 끝까지 보살핀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영화의 주제를 대변하는 인물은 닉 보다는 와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설정에 몇 가지 흥미로운 요소가 있다. 영화의 배경은 미래의 플로리다다. 도시의 일부가 바닷속에 잠기면서 도심지의 건물들의 저층은 대부분 물속에 잠겨있고, 일부 잠기지 않은 길은 차가 다니지만 대부분은 작은 보트로 이동을 한다. 또한 해가 진 이후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낮과 밤이 바뀐 도시처럼 보인다. 도시 건물의 저층 대부분이 물에 잠겨있는 모습은 이전에 보아왔던 완전히 물에 잠긴 도시의 모습과는 차별화되고 그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를 보여주며 시선을 끈다. 과거를 시각적으로 영상화하여 제삼자가 볼 수 있다는 점도 새로운 설정이다. 과거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기억을 화면으로 터치하여 보는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레미니센스>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만들어진다. 과거의 모습이 3차원으로 구현되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기억을 하고 있는 본인이다. 즉,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레미니센스라는 기계 안에 연결되어 있어야만 영상으로 구현과 저장이 가능하다.
신선한 세계관 속에 영화의 주제의식과 모순되는 캐릭터의 선택
영화 <레미니센스>는 꽤 신선한 설정과 세계 관위에 구축된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우리가 이미 많이 보아온 SF의 세계관을 살짝 비틀어 조금 색다른 배경을 보여주고 있고, 영화 안에서 보여주는 과거 구현 기술도 좀 더 디테일하게 파고들어 그 기술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담고 있다. 그러니까 SF 영화답게 미스터리와 액션, 시각적 화면 그리고 철학적인 주제가 복합적으로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담고 있는 마이애미의 모습은 꽤 아름답고 닉과 메이, 와츠 같은 주요 등장인물들도 꽤 매력적이다. 또한 영화의 주제를 담아낼 수 있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 적절하게 캐릭터를 만들어냈다고 보인다.
이렇게 잘 구현된 세계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시종일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다른 방향으로 캐릭터가 소비되면서 그 주제의식이 희미해지고 말았다. 이 영화의 세계관을 구상한 리사 조이 감독은 유명한 SF 드라마 <웨스트 월드>의 세계관을 매력적으로 구성한 경험이 있다. 그는 <웨스트 월드>의 감독, 각본까지 담당하면서 꽤 훌륭한 주제의식과 세계관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었다. 이번 첫 장편 연출작인 <레미니센스>에서도 그가 가진 뛰어난 구상 능력을 확인할 수 있지만, 영화 주제를 이야기하는 측면에서의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리사 조이 감독은 앞으로 다양한 스튜디오들과 함께 더 많은 SF영화나 드라마를 연출할 예정이어서 그가 만들어갈 세계관으로 어떤 이야기를 보여 줄지 기대하게 만든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 영화가 해피엔딩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닉은 메이에게 행복한 이야기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해피엔딩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더 슬프다는 이야기도 한다. 그 이야기에 메이는 그럼 중간까지만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어쩌면 닉은 메이의 부탁과 마찬가지로 그 중간까지로 자신의 이야기를 끊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과거에 집착하면 현재가 어떤 식으로 망가지는지를 계속 이야기했다. 그 주제 의식 아래서는 닉의 마지막 모습은 배드 엔딩일 것이다. 하지만 닉과 메이의 관점에서 본다면 적어도 그들에게는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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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발한 설정을 진지하게 끝까지 밀어붙이다
무언가에 집중하다 보면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잊을 때가 있다. 무언가 이루고 싶다는 의지와 집념은 그것에 몰입하게 만들지만 그 사이에 나라는 자아는 잠시 감춰진다. 어쩌면 그건 몰입이 선사하는 멋진 선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그것에 심취하다 보면 자기 자신을 잃게 되기도 한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 속에서 그래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만드는 건, 그렇게 강한 의지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지키고, 또 무언가가 되고 싶어 그것을 이루기 위한 무언가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그 의지는 굉장히 중요하다. 의지와 집념, 그리고 자기 자신이 모두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원하는 곳이 보이기 시작한다.
영화 <유체이탈자>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그 위치를 잊은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한 남자가 망가진 차 옆에서 깨면서 시작한다. 자신이 누군지 왜 그렇게 부상을 당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한 곳으로 향하고 이름을 확인하지만 밤 12시가 되자 다른 사람의 몸에서 다시 깨어난다. 그리고 그 남자는 다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작은 단서들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맨 처음 깨어났을 때 옆에 있던 노숙자(박지환)가 그 첫 단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강이안(윤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문진아(임지연)라는 여자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잃어버린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의 이야기, <유체이탈자>
강이안은 12시간마다 다른 사람의 몸에서 깨어난다. 영화는 그의 정신이 왜 이렇게 다른 사람 사이에서 옮겨 다니는지는 영화 후반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또한 강이안이 어떤 인물인지, 도대체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이렇게 정보를 제한적으로 제시하면서 관객들이 영화 속 주인공과 똑같은 시점으로 영화를 따라가게 만든다. 가장 처음 알게 되는 건, 주인공의 의지다. 그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좀처럼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으려 노력한다. 영화의 첫 목격자인 노숙자를 중심에 놓고 자신이 알아놓은 정보를 저장하고 반복해서 따라가는 등, 그 의지를 놓지 않는다. 그가 가진 의지는 이 영화를 이끄는 가장 큰 힘이자 동력이다.
영화 속에서 강이안의 얼굴은 사실 중요하다. 다른 사람의 몸에서 정신을 차린 그가 제일 먼저 확인하는 건 자신의 얼굴이다. 얼굴을 보며 자신이 어느 위치의 사람에게 들어왔는지를 확인하고 주변을 살핀다. 그가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처럼 그 몸의 인물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렇게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나 당황스러운 모습은 영화 초반을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이다. 그래서 꽤 세세하게 그가 몸과 얼굴을 확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대부분은 강이안의 모습으로 영화가 진행되지만 거울 속의 모습이나 간간히 강이안이 들어간 몸의 모습도 비친다. 어찌 보면 자신의 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영화 속 강이안은 자신의 모습을 모르지만 관객은 그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강이안의 기억을 찾는데 핵심 역할을 하는 문진아는 과거에 강이안과 가까운 사이로 보이는 인물이지만 실제로 기억을 찾는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강이안이 끝까지 의지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찾게 만드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리고 노숙자는 사실 초반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강이안을 돕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후반부에는 노숙자와 강이안의 버디 무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노숙자는 영화 속에서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름이 없는 사람과 몸이 없는 사람이 같이 힘을 합쳐 자기 자신을 찾는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주연을 맡은 배우 윤계상은 혼란스러워하는 강이안의 모습을 잘 담아냈고, 그가 가진 액션 능력을 이 영화에서 한껏 보여주고 있다. 좁은 곳에서 벌어지는 근거리 격투나 권총 액션은 꽤 현란하고 박진감이 넘친다. 다양한 인물들과 벌이는 근접 액션 장면이 영화 마지막까지 이어지면서 끝까지 영화적 긴장을 유지한다. 또한 문진아 역을 맡은 배우 임지연도 꽤 과격하고 빠른 액션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총 7명의 인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과 표정을 연기에 반영했다. 실제로 촬영 시 다른 배우들과 한 달 넘게 사소한 행동까지 맞추기 위한 노력을 하기도 했다.
단점을 상쇄하는 흥미로운 설정과 박진감 넘치는 액션
영화에서 빌런 박실장(박용우) 역을 맡은 배우 박용우도 인상적이다. 박 실장은 사실 초반에는 진짜 모습을 감추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비치는 그의 모습은 누아르나 액션 영화에 등장하는 빌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너무 전형적으로 많이 보아왔던 악당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다소 아쉬움은 있지만 영화적 긴장감을 높이는 역할로는 충분하다. 그가 웃음을 짓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은 그의 다음 행동이 어디까지 갈지 한계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는 영화에 긴장감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한다.
영화 속 강이안은 자신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의지로 자신의 몸과 기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과거에 해왔던 모든 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었지만 과거에 가지고 있던 의지만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 결국 그것이 강이안을 끝까지 버티게 만들고 7명의 인물들의 몸속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게 만든다. 어쩌면 그 의지가 누군가에게는 그가 강이안이라는 것을 알아채게 만드는 것일지 모른다. 그가 가진 의지는 영화 초반에 아무런 정보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마리를 하나씩 찾게 만들고 조각조각 모은 퍼즐 같은 단서들을 조합하여 결국에는 그 일의 원인과 자신을 찾게 만든다.
영화 <유체이탈자>는 꽤 신선한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영화다. 유체를 이탈한 자가 다른 사람의 몸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다는 설정은 그동안 보아왔던 기억상실증 서사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더 붙인 것이다. 아주 단순하고 결말이 예상되는 영화지만 진행되는 영화적 공간과 인물을 한정적으로 제시하고 그들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관객과 퍼즐을 맞춰 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흥미로운 액션 스릴러다. 영화에는 총기 액션, 격투액션, 카 체이싱 등 다양한 액션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어 다양한 볼거리를 포함하고 있다. 특히나 강이안의 몸이 바뀔 때, 주변 환경이 바뀌는 모습은 모션 컨트롤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되었는데 꽤 색다른 장면을 보여준다.
<유체이탈자>는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좋은 아이디어를 기반하고 있지만 인물들 간에 이동하며 벌어지는 상황들이 다소 작위적이고, 새로운 인물로 이동될 때마다 벌어지는 일들이 반복되면서 다소 루즈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또한 주인공이 단서를 알게 되는 순간마다 운이 많이 따르기도 해 설득력이 떨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최근에 등장한 한국 액션 스릴러 영화 중에서 꽤 신선하고 긴장감의 밀도도 높다. 또한 신선한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주인공 강이안의 뒤를 끝까지 따라가게 만든다. 영화는 다양한 액션과 함께 이야기의 반전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극장에서 관람할 때 몰입감을 주게 된다.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라면 극장에서 관람 시 만족도가 높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유체이탈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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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심과 욕심의 차이 - <놉>
2022년의 개봉영화들 중, "영화"라는 단어에 가장 적합했던 <놉>
러닝 타임 내내 온전하게 영화 속에만 들어가있었다.
이 영화를 총 9회차를 뛰었기에 개인적으로 느끼고 깨달은 바가 많았다.
오늘은 <놉>에서 나에게 깊이 와닿은 요소들을 함께 말하고자 한다.
1. 당신에게 하늘이란?
영화 <날씨의 아이>에서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하늘은 바다보다 훨씬 깊은, 미지의 세계". 이 말이 본 영화에서 굉장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기존 <죠스> <언더워터> 등처럼 바다 밑의 괴물(상어)과 싸움으로써 오는 공포감을 조성한 영화들에 익숙해져있다. 그러므로 보통 "바다"를 떠올릴 때 물론 시원하다는 긍정적 이미지도 존재하지만 '쓰나미, 미스테리한 죽음, 상어' 등의 두려움도 선사한다. 이러한 공포감은 우리가 바다를 늘 '미지'의 공간으로 여겼던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놉>은 그 "배경"을 정반대로 바꾸어 오히려 사람들이 아무 생각도 지니지 않았던 '하늘'에 대한 긴장감을 일으켰다.
알 수 없는 하늘을 늘 바라보며 서있던, 커다란 사막과도 같았던 들판.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인 '부드러운 거침'을 몸소 느끼게 해주었다.
2. 고디와 진 자켓: 주프의 꿈
UFO와 침팬지, 이들은 미디어 속 혹은 실제 우리의 삶에서 자주 접하는 존재들이다. 본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생명체는 바로 침팬지 '고디'와 하늘의 외계생명체인 '진 자켓'이었다. 먼저 침팬지 고디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주프'라는 인물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주인공 남매인 오제이&에메랄드보다 주프가 본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주프(배우 스티븐 연)는 현재 테마파크 운영자로 과거 유명한 시트콤의 아역배우로 출연했지만 방송 중, 같이 출연했던 침팬지가 날뛰어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처참하게 살인해버린 사고를 겪게 된다. 신기하게도, 당시 침팬지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해를 가했지만 테이블 밑에 숨어있던 주프에게는 친근한 주먹인사를 하게 된다. 바로 주프의 안 좋은 어린 시절 기억은 아이러니하게 그 소년에겐 이 희망을 심어줬다, '친근함을 길들이기'.
'진 자켓'은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하늘의 괴생명체를 부르는 명칭이다. 우리는 각종 소셜 미디어에서 UFO라는 단어를 종종 접한다. 이 때문일까, 미확인 외계생명체에 대해 '원반 모양'이라는 고정관념을 지니면서 나름의 내적 친밀감을 형성해있을지도 모른다. 진 자켓은 물리적으론 사람들의 통념에 기반한 원반 모양이지만 사실은 안에 외계인도 없는, 심지어 인간을 흡입하는 '괴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순히 '원반', 그 생김새에 반응하여 자신들이 기존에 알고 있었던 머릿속 알고리즘에 진 자켓을 넣어 해석한 것이다.
다시 주프의 꿈으로 돌아가보자, '친근함을 길들이기'. 본인이, 인간을 살해하는 침팬지와 친밀한 소통을 한 것으로부터 희망을 얻었던 소년 주프는 성인이 되어서 또 다른 타겟을 발견했다- 바로 '진 자켓'. 그는 본인이 지은 테마파크 내의 서프라이즈 쇼를 통해, 본인이 진 자켓을 조종할 수 있다는 우월감에서 돈과 명예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한편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알겠지만, 진 자켓에 의해 죽는다)) 그러므로 나에겐 주프가 아픈 손가락 중 하나로 다가왔다. 다만, 이 아픈 손가락은 절대 널리 알리고 싶지 않은, 오히려 숨기고 싶은 애매함이다. 물리적으로 우리가 보기에 그는 멀끔한 성인 남성이다. 그러나 테마파크 / 진 자켓 / 어린 시절의 모습을 담은 전시회 등의 영화 요소로 비추어 봤을 때, 주프는 여전히 고디와 주먹 악수를 했을 순간에 머물러 있다. 그는 그의 꿈을 미처 다 이루지 못 한 채, 어쩌면 '정당한' '합리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주프의 꿈은 이루어졌다. 후반부에 에메랄드는 테마파크에 달려있던, 주프가 그려진 거대한 헬륨 인형으로 진 자켓을 죽이는 데에 성공한다. 진 자켓이 헬륨 인형을 흡입할 때 쉴새없이 일그러지던 주프의 표정, 그렇지만 그의 표정은 늘 평면적으로, 웃고 있었다.
3. 인간의 본능과 카메라
이 영화에서 주프 못지 않게 핵심 역할을 하는 건 바로 카메라다. 에메랄드와 오제이는 외계생명체(진 자켓)를 카메라로 찍어 방송에 송출함으로써 본인들의 이익을 취하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라는 본인들의 이익이자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하늘을 바라본다. 이러한 면에서 인간의 관심은 곧 '돈'과도 직결되고, 이 더럽지만 고칠 수 없는 과정들을 잘 드러내는 요소가 바로 '카메라'라는 생각이다. (이 부분에서 사실 영화 <돈 룩 업>이 떠으로기도 했다)
그러나 본인의 탐욕을 카메라로,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순간- 다시 말해 땅의 눈동자와 하늘의 눈동자가 마주치는 순간 그들을 이끄는 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눈과 눈이 마주쳐 일으켰던 바람, 욕심과 욕심이 맞물려 일으켰던 바람처럼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왔던 존재들이 일으키는 강렬함은 공포 그 이상이다.
여러모로 조던필 감독이 영화 내에 배치해놨던 은유, 우리가 이 영화를 더욱더 즐길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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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로큰 | 사건도 캐릭터도 부서져 파편만 남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출소 후 '석창모'(정만식)의 조직을 떠난 '배민태'(하정우). 그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평범한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소식에 민태가 계획한 삶은 부서진다. 창모의 조직에 함께 속했던 하나뿐인 동생 '배석태'(박종환)가 돌연 시체로 발견되고, 동생의 아내 '차문영'(유다인)은 행방불명된 것. 이에 민태는 문영을 찾아 나선다. 부부관계가 좋지 않았던 만큼, 문영이 동생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러던 중 민태는 자신과 같은 흔적을 좇는 소설가 '강호령'(김남길)을 만난다. 그는 호령의 베스트셀러 '야행'의 모티브가 동생과 문영의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고, 문영과 호령 둘을 범인으로 의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은 물론 사건의 진상을 숨기고 싶은 창모까지 민태 앞길에 끼어들면서 그의 복수극은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
사건이 전부인 영화
영화의 시나리오는 크게 두 범주, 인물 중심과 사건 중심으로 나눌 수 있다. 둘의 균형이 맞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경향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중 후자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는 치명적인 단점을 떠안는다. 관객이 보기에 캐릭터가 플롯의 도구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것. 이 경우에는 사건이 그 자체로서 얼마나 흥미로운 지에 따라 영화의 완성도와 몰입도가 달라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이다. <인셉션>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비롯해 여러 스타 배우가 출연했지만, 그들이 맡은 캐릭터가 뇌리에 각인될 정도로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저 기억을 심는 작전에 필요한 역할과 기능을 의인화한 존재였다. 그렇지만 <인셉션>은 관객을 매료하는 데 성공했다. '꿈에 침투해서 기억을 훔치거나 심는다'라는 극 중 사건 자체의 독특함이 매력적이었으니까.
김진황 감독의 신작 <브로큰>은 큰 범주에서 봤을 때 인셉션과 같은 유형의 영화다. 캐릭터 자체는 한국의 조폭 스릴러에서 익히 봐 온 인물이라서 특별하거나 흥미로울 구석이 거의 없다. 그 대신 <브로큰>은 민태의 복수극의 발단이 되는 살인 사건 차제를 결정구로 선택한 듯 보인다. 문제는 살인 사건이 신선하지도 않고, 사용법도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 그 결과 <브로큰>은 사건, 캐릭터, 플롯 모두 부서진 채 파편으로 흩어진다.
소재 자체에 동력이 없다
<브로큰>이 결정구로 꺼내든 소재는 살인 사건, 그중에서도 '소설 내용대로 진행되는 살인 사건'이다. 그 중심에는 호령과 그가 집필한 베스트셀러 소설 '황야'가 있다. 호령의 소설에는 마약 중독자 남편과 살아가는 여성이 등장한다. 극심한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그녀는 남편을 죽이면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살인 계획을 실행에 옮긴 후 아무도 몰래 한국을 떠난다.
그런데 극 중 현실에서 '황야'의 내용과 유사한 사건이 발생한다. 조폭 조직원이자 마약 중독자인 석태가 돌연 사망한 채로 발견된 가운데, 그의 아내 문영이 행방불명된 것. 문영의 주변인을 탐문하던 중 호령이 그녀의 지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경찰은 소설 내용을 근거로 호령과 문영이 함께 석태를 살해했다고 의심한다. 동생의 복수를 위해 문영을 찾던 민태도 호령의 소설에 대해 알게 된 이후로 그의 뒤를 캐기 시작한다.
이러한 <브로큰>의 메인 플롯은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을 내재하고 있다. 우선 사건 자체의 흥미가 부족하다. 이미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미디어에서 숱하게 활용된 소재이다 보니 매력이 없다. 당장 판타지 영화인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에서도 '타이코 도도너스'라는 마법사가 남긴 '타이타니아의 예언'이라는 시의 내용과 똑같은 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는 식의 전개가 등장한 바 있다.
또한 후반부에 등장하는 반전에도 악영향을 준다. <브로큰>은 호령과 문영의 관계가 살인 사건의 동기인 것처럼 꾸민 뒤,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 창모가 개입한 살인 사건의 실상을 비로소 밝히면서 반전의 묘미를 살리려 한다. 그런데 정작 전반부의 스토리가 재미없으니 긴장감은 쌓이지도 않고, 반전도 인상적이지 않다. 미끼가 그럴싸하지 않으니, 숨겨진 진실이 따로 있다고 손쉽게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한 맥거핀
사용 방법도 문제다.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어설프다. 호령의 소설이 문제가 되는 과정이 거의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태나 경찰이 호령을 의심하게 되는 단계는 다음과 같다. 호령과 문영은 문화 센터 강좌에서 만난 후 연락을 주고받았다. 호령이 소설 집필 전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그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문영과 그녀의 주변인물과 유사한 상황에 처해있다. 따라서 호령이 의심스럽다.
하지만 그들의 추론 단계에는 논리적 비약이 많다. 소설 내용과 등장인물이 석태와 민영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호령을 의심할 합리적 단서가 없기 때문이다. 호령은 민영을 1년 간 만나지 않았다. 그가 살인 및 실종 사건에 연루된 적도 없다. 즉, 호령이 소설의 내용 때문에 유력한 용의자로 부각된다는 아이디어는 있으나 아이디어를 풀어내는 과정은 찾기 어렵다.
그렇다고 그의 존재가 극 전개에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확고하다. 민태다. 제목만 봐도 그렇다. '브로큰'은 출소 후 조직을 떠나려던 민태가 동생의 죽음 때문에 원래 계획을 부쉈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의 복수극에서 호령의 역할은 의미가 없다. 그는 동생 죽음의 주범도, 조력자도, 반동인물도 아니다. 사건의 진상을 잠시 가리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의 비중이 큰 전반부가 불친절하고 허세 가득한 이유다.
호령을 맥거핀으로 봐도 문제다. 맥거핀은 극의 발단을 그럴듯하게 보여준 후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게 사라져야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에 반해 호령은 맥거핀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복수극의 발단에는 영향을 못 끼치는 반면, 분량은 민태에 버금간다. 그러다 보니 퇴장한 후에도 그의 공백은 역으로 강조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에게 붙은 물음표가 안 떨어지기 때문이다. 즉, 호령이라는 캐릭터는 실패한 맥거핀이다.무의미한 맥거핀의 나비효과
효과가 없는 맥거핀은 다방면에 악영향을 끼친다. <브로큰>에서는 특히 캐릭터의 문제가 부각된다. 애초에 공감을 이끌어낼 수 없는 캐릭터로 도배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동생의 복수만을 추구하는 민태의 행적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창모에게 석태를 소개하고, 동생 대신 감옥을 갈 정도로 동생을 아낀다. 하지만 그 이유가 주어지지 않다 보니 막연한 형제애를 앞세운 복수극은 일견 올드하다.
비정상적인 석태의 캐릭터성 때문에 민태의 복수극은 설득력이 더욱 부족하다. 그는 형에게 기대어 살다가 조폭이 됐고, 그 후에는 마약 중독자로 지내다가 살인도 저지르고, 아내에게 가정폭력까지 행사했다. 그 어떤 연민도, 동정도 느끼기 어려운 캐릭터인 셈이다. 그 외의 등장인물도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문영이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없고, 경찰은 매번 뒷북을 칠 정도로 무능하고, 조폭들도 한국영화 클리셰에 충실하다.
만약 살인 사건의 미스터리나 반전이 강조될 수 있었다면 각 캐릭터의 문제는 덜 주목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호령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순간부터 캐릭터 구축 이슈는 역으로 강조된다. 공감하거나 이입할 여지 자체가 없는 캐릭터만 남아 버리니 그들의 결점이 부각되는 것. 그 결과 모두가 문영을 찾기 위해 열심히 달리지만, 왜 달리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사건, 플롯, 캐릭터가 모두 제각기 따로 노는 셈이다.
액션이라는 일말의 잠재력
그나마 액션 시퀀스 두 개는 눈길을 끈다. 영화 전체의 완성도를 끌어올리지는 못하지만, 나름의 재치와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 첫 번째는 중반부 골목길 액션 시퀀스에서 좁은 건물 틈 사이로 민태의 액션을 보여주는 컷이다. 앵글이 고정되어 있고, 이에 더해 시야 자체에 한계를 두었기 때문에 활동적인 이미지가 역으로 극대화되는 지점이다. 이는 일반적인 액션 연출의 흐름이나 리듬에서 벗어나면서 순간적으로 눈길을 잡아챈다.
이러한 촬영 방식은 클라이맥스에서 한 번 더 등장한다. 동생을 죽인 진짜 범인을 알게 된 민태는 창모를 찾아가고, 수산시장과 횟집에서 일 대 다의 구도로 창모의 부하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인다. 이때 민태가 싸우는 모습을 횟집 안에서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앞선 장면과 유사한 효과를, 더 증폭시켜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앵글은 고정된 가운데, 창문 아래쪽과 중앙부는 여러 도구 때문에 가려져 있다. 시야에 한계를 설정해서 인물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보여주지 않도록 건물 사이 틈과 같은 장치를 만들어낸 셈이다. 그 덕분에 민태의 액션은 역동성이 유달리 부각되고, 복수에 목마른 그의 심경도 더 거칠게 표출될 수 있다.
이러한 장점만 놓고 보면 <브로큰>에서도 나름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엿볼 수는 있다. 하지만 순식간에 지나가는 액션 연출만으로는 이미 파편화된 사건, 플롯, 캐릭터를 한 데 묶을 수 없다. 그 결과 <브로큰>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조차 알기 힘든 미완성 복수극으로 막을 내린다. 원래 제목이 <야행>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건 중심의 이야기를 무리하게 인물 중심으로 재포장하다가 벌어진 참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Dreadful 끔찍한
한 순간의 재치 외에는 다 따로 노는 파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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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귤과 보리수 사이
정신과에 처음 방문하면 으레 받게 되는 검사 중 MMPI-2라는 게 있다. 내담자가 약술형 문장의 빈칸을 채우게 한 뒤 완성된 문장을 보고 스트레스의 원인과 강도를 평가하는 대표적인 심리 측정 방법이다. 500개가 넘는 문항이 이어지던 검사지 후반부에 이런 항목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든 가족은 _____이다.”
돈 벌기 시작한 친구들이 너도나도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하던 즈음에, 가장 친했던 친구는 이 문장을 두고 “모든 가족은 화내는 아빠와 그걸 참아주는 나머지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대답했다고 말해주었다. 대체로 평화롭지만 어떤 순간들은 분명 위기였던 우리 집의 사정을 생각하면 일면 공감도 되지만, ‘모든’ 가족이 그렇다는 일반화가 가능한지 멈칫하게 돼서 즉각 동의를 표하진 못했다. 몇 년이 지나도 뇌리에 남은 그 문장을 여러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다녔다. 아는 이가 이런 말을 했었다고 하면 딸들은 모두 생각에 빠졌다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기 마련이었다. 다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 가족은 맞는 것 같아. 모든 집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 아빠는 그래.
그러니까 이건 말하자면 제주의 감귤나무 같은 이야기다. 너희 집에도 그거 있어? 하고 물으면 지역에 대한 편견이라고 짐짓 화를 내다가도 “다 그런 건 아닌데 우리 집엔 있어” 하게 되는 그런 거. 제멋대로 군림하는 아빠와 져주는 체 모르는 체 넘어가는 엄마와 결국 참다가 폭발하고 마는 딸들을 나는 너무 많이 보고 듣고 겪어왔다. 그래서 <신성한 나무의 씨앗> 속 극적이고 혼란스러운 매 에피소드가 그리 먼 나라의 사정 같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다.
영화는 땅에 발을 착 붙이고 시작했다가 그 땅을 말 그대로 뚫어버리는 그리스 비극 같은 마무리로 성큼 나아간다. 집 밖에서는 히잡을 쓰지 않은 22세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경찰에 끌려갔다 의문사한 실제 사건으로 촉발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만, 나즈메, 레즈반, 사나 네 가족의 집 안은 그만큼 위태롭지 않다. 2022년 히잡 시위의 면면은 이때까지만 해도 딸들이 나눠보는 영상 메시지, 뉴스 속 왜곡된 진상, 나즈메가 딸들을 데려다주며 목격한 도로 통제와 연기와 함성 등, 집의 단단한 벽 - 보호이자 철책 -에 접한 외피로만 존재한다.
20년을 현장직 수사관으로 일명 ‘도덕 경찰’처럼 일하다 드디어 ‘수사판사’로 승진했다는 아빠 이만은 야근 후 차를 챙겨주는 부인에게 “정말 고마운데,” 지금은 마시기 싫다며 제법 상냥하게 의사를 표할 줄 아는 남자다. 그간 이란, 시리아, 파키스탄 등 이슬람 국가의 영화가 다양한 스펙트럼의 톤으로 고발한 폭력적 남성성의 향연에 노출되어 온 관객이라면, 이정도 매너만 해도 그가 얼마나 다정한 가장인지 곧바로 직감할 터. 그는 자신을 추천했다며 생색내던 동료가 ‘검찰의 지시’라며 신법에 반기를 든 젊은이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라 전하자 “그럴 수는 없어. 20년간 정직하게 일해왔어”라며 저항하기도 하고, 딸들의 안위를 세심히 챙기고 걱정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는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한 보수주의자, 원칙주의자이면서도 천성은 다정하고 소심한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극의 중반까지 집안의 통치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는 오히려 엄마인 나즈메다. 러닝타임 1시간 20분이 지나 아빠가 총을 잃어버리는 극적 순간에 닿기까지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엄마’에 불과하지만, 그는 남편을 씻기고 돌보며 아이들을 통제하는 관리자 역할에 충실하다. 머리가 커버린 레즈반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벼려가는 사나가 종교적, 가부장적 규칙에 의문을 표할 때마다 나즈메는 아빠의 명예, 가족의 안위를 내세워 침묵과 순종의 태도를 종용한다. 그는 작중의 ‘눈’을 맡은 이, 다시 말해 실질적인 주인공이기도 하다. 딸들이 등교 직후 학생 시위대와 폭력 진압 중인 경찰 사이에 끼여 위험에 처할 때조차도, 그 딸들이 아닌 차 안에 놓인 엄마의 시점에서 로드뷰가 전개되는 것이다. 때문에 관객은 전반부 거의 모든 시퀀스에서 이만을 배경으로 밀어두고 나즈메의 긴장 가득한 감정선을 추체험할 수 있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딸들이 곧 겪을 게 뻔한 가정 내의 싸움은, 어딘지 헐렁한 아빠 이만보다도 “이런 문제는 엄마 담당”이라고 선포한 나즈메와의 언쟁에서 시작될 것만 같다.
전반부 이만과의 관계에서도 나즈메는 종보다는 주인에 가까운 듯 보인다. 판관으로 임명된 밤 이만이 귀가해 희소식을 전하자 곧장 “우리 더 큰집을 받을 수 있을까?”하고 묻거나, 사형 선고를 내리는 ‘일’을 하고 돌아와 넋이 나간 이만이 얌전히 나즈메의 손길에 따를 때 “이만, 졸린 거 아는데 식기세척기 사준다고 한 거 기억하지?”라고 되새기며 이만을 은근하게 조종하듯 달래듯 다루는 식이다. 이때 이만은 흐릿하게 화면의 가장자리로 치워지거나 비누거품이 발라지고 면도당하는 일종의 오브제, 완전히 대상화된 남성으로 그려지는 반면, 나즈메의 얼굴은 언제나 스크린 정중앙에 정면 클로즈업샷으로 잡혀 있어 막중한 위압감을 뽐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계속해서 핸드크림을 바르는 나즈메의 버릇 또한 가사로 지친 몸을 남편의 새 지위에 기대어 보상받고자 하는 욕망을 대변한다.
그러나 이 모든 오락적 착시는 집 밖의 현실이 딸들의 어깨에 기대어 집 안으로 밀려들어온 그 즉시 탈을 벗고 본색을 드러낸다. 날이 바짝 선 엄마의 경계란 기껏해야 대여한 권위의 표현이었을 뿐이고, 변덕도 성질도 부릴 수 있는 절대권력은 처음부터 아빠 쪽에 있었음을 명시하는 후반부로의 전환은 너무도 빠르고 우악스러워 거의 황당할 정도다.
딸들이 신권정치 반대 시위에서 다친 친구 사다프를 데려왔을 때 그애의 얼굴에 박힌 총알을 빼주자마자 냉정하게 밖으로 내보내는 사람은 역시 나즈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산탄총의 흔적을 물에 쓸어내리는 슬로우 모션을 기점으로, 나즈메의 내면에서 무언가 뒤바뀐다. 그간 이만은 양심과 책무 사이 갈등을 소화하기 위해 국가가 원하는 역할에 자아를 끼워맞추는 작업을 완료해버린다. 그는 “아무리 강직하고 신앙이 견고하다 해도 사형선고는 어려운 일”이라고 풀죽어 토로하던 인간적인 남편이었다가, “여기서 버텨서 입지를 다져야 한다”는 동료의 비겁한 충고를 완벽히 흡수하곤 “운도 더럽게 없지, 이 자리에 있을 때 시위가 터지다니”라고 툴툴대는 공무원으로 이행하고, 최종적으론 “우리가 다 치울 거야. 체제에서 단물 빨아먹고 반기 드는 애들 말이야”라며 권력자의 언어를 그대로 답습하는 하수인으로 순식간에 변모한다.
그래서 엄마아빠는 경찰에 끌려간 사다프의 행방을 알려달라는 아이들의 부탁에 이전까지의 대응과 180도 다른 태도를 보이게 된다. 폭력이 닿은 밑바닥의 끄트머리나마 제대로 목격한 나즈메는 일말의 죄의식과 책임감에 두려워하며 사다프를 찾아달라고 남편과 친구에게 부탁하고, 이미 위에서 무감하게 수단화된 폭력을 조감한지 오래인 이만은 ‘애들이 왜 그런 친구를 사귀었냐’며 일축하고 단속을 강화하게 되는 것이다. 부부가 침실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나 다름없는 이 반전의 순간에, 엄마는 “정말 아무것도 안했대”라고 딸들의 증언을 되풀이하고, 아빠는 “원래 피고인 가족은 다 그렇게 말해”라며 제 딸들을 불신의 영역으로 밀어내고 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가족들에게 가감없이 발휘된 강약약강의 분노조절장애, 편집증적 불신, 기어이 돌발적 폭행까지. 후반부 1시간 동안 이만이 보여준 ‘변화’는 아마 그의 안에 아주 오래전부터 내재된 불씨였을 것이다. 온순한 사람이었던 이만의 타락이랄까 전향을 두고 놀라워할 필요도 없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무언가가 ‘깨어난’ 것에 불과하다는 걸 우리 모두 아니까. 관 안에서 나는 수십년 간 같은 것을 보고 들은 여자들의 긴 한숨과 탄식을 몇 번이고 듣는다. 언젠가 한 여자가 말했듯이, “딸들만이 아는 아빠의 매캐함이 있죠”.
통치자가 별 볼일 없고, 자격 없고, 칠칠맞고, 불안해할수록 중간관리자가 더욱 날뛰어야 체제가 유지된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 집안에서 이만의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나즈메가 대신 나서 점점 더 유난스레 딸들을 단도리했다면, 국가 차원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독재 정권의 명분 없는 헤게모니를, 신권정치와 가부장제의 오래된 유착을 정당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뒷방에 숨은 권력 대신 온갖 유난을 떠는 건 이만과 동료들 같은 중간관리자-남성 기득권 집단이다. 먼 훗날 부당한 권세가 몰락하고 갈기갈기 찢긴다면 그들은 ‘몰라서 동원된’ 것에 불과하며 본질은 선량한 자신을 무죄라 칭하겠지만 아이히만 역시 그러했다. 남성 중심적 종교국가의 법적 강제력에 기대어, 유리한 카르텔에 쏙 들어가 히잡 쓰지 않을 자유를 마음껏 누리던 이들의 신앙과 도덕이란 얼마나 같잖고 이중적인가.
처음 이만의 공포는 동료들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서 시작했고 그러니 어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초조함에서 기인한다. 총을 분실한 그는 부인 앞에서만 불안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왜 내게 이런 시련이 닥쳤을까? 다들 날 무능하다 할 거야.” 기어이 자기 집 여자들을 심문(십중팔구 고문과 심리적 학대를 동반했을)에 특화된 동료 수사관 알리레자에게 데려간 이만은 그로써 자기 우선순위가 무엇에 있는지, 가족보다 중요한 준거집단이 어디인지 확실히 표명한 셈이다. 그러나 그가 ‘자리를 잡을’ 그 이너 서클이야말로 부패와 불공정의 온상과도 같은 곳이다.
사려깊고 현명한데다 인내심 있는 여자들을 셋이나 가족으로 둔 이만에겐 선택을 바로잡을 기회가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이만은 자신이 어느새 악취 나는 늪 한가운데에 서있게 됐다는 사실에서 애써 눈을 돌리고 딸들과 부인을 옛 고향 집에 가둔 후 ‘순종, 믿음, 절대복종’이라는 무슬림의 대원칙을 다시 한 번 상기한다. 22년 히잡 시위에서 레즈반과 사나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그에 맞서는 구호를 길거리에서 외쳤다: 여성, 삶, 자유 (Women, Life, Freedom). 그리고 그 수는 점점 더 불어나며 사회의 상층부를 압박한다.
그리하여 이만의 공포는 하찮은 수컷 무리 내의 인정욕구에서 실존적 위험으로 그 근간을 달리 하게 된다. 수사판사로서 신원이 노출된 후 귀갓길에서 차들이 죄다 자신을 공격하려 하는 건 아닌지 극도로 의심하게 된 이만의 모습은 그 자체로 훌륭한 미러링이자 블랙 코미디다. 멈춰선 옆 차에서 크게 노래를 틀고 히잡도 쓰지 않고 타투와 팔을 그대로 내어놓은 채 ‘감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젊은 여자를 마주치자, 이만은 그를 체포할 직업적 의무와 자격을 모두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깔고 여성의 반대편 차로로 황급히 도망친다. 그가 드디어 불경한 존재들이 모이면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드디어.
우여곡절 끝에 찾아온 결말의 추격전, 그리고 이옥섭의 <메기>를 연상케 하는 급작스러운 귀결은 안도감과 비애를 동시에 안긴다. ‘어느 집에나 다 있는 아빠’인 이만과의 결말은 정말 그것밖에 남지 않은 것일까? 우리에게 혹시 다른 해법이 있을까, 아빠?
<올파의 딸들>이나 아쉬가르 파라하디를 닮은 치료적 재연, 혹은 마지드 마지디와 자파르 파니히의 시적인 톤을 다소 빼고 노골적인 투쟁성을 더한 리얼리즘 드라마로 칭할 만한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일말의 희망을 남겨둔다. ‘영화적’으로 거의 완벽한 마무리 이후 구태여 삽입한 22년 실제 히잡 시위 푸티지 속 자유를 찾은 여자들의 얼굴이 바로 그 희망이다.
우리에겐 다음 세대가 있고 연대를 아는 약자들이 있다. 그리고 심지어 생득적 우위를 점한 이들 중에서조차 (앞선 감독들처럼) 믿는 대로 보지 않고 보는 것에 따라 믿음을 수정하는 이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아래에서 위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이 자유의 몸짓이 뿌리를 단단히 내릴 수 있을 때까지 버티는 것이 나의 몫, 우리의 몫.
※ 씨네랩 초청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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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래의 꼬리처럼 힘차게
PROGRAM NOTE.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은 여섯 살 클레오가 사랑하는 보모 글로리아를 떠나보내며 겪는 이별과 상실의 과정을 그린 작품.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글로리아와 마지막 여름 휴가를 보내며 인생의 한 단계로서 이별의 의미를 받아들이려는 클레오의 이야기가 뭉클하고 따스하게 그려진다.
(2023년 11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POINT.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쁘띠 마망>… 셀린 시아마를 좋아하세요? 셀린 시아마 감독의 모든 장편영화를 제작한 바로 그 제작사의 신작! 속속들이 아름다운 작품을 또 한 편 만나보세요
✔️ 안경을 쓰면서 바로 클레오로 변신했다는 놀라운 신인 배우, 루이스 모루아-팡자니! 클레오가 웃을 때마다 행복해졌어요
✔️ 겨울 코끝을 찡하게 만들어줄 따뜻한 작품. 생의 처음에 있던 것들을 헤아려보게 만드는 영화라서, 2024년 새해 첫 영화로도 좋을 것 같아요
✔️ 2023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 개막작, 2024 선댄스영화제 스포트라이트 부문 초청! 자꾸 시선이 가는 영화
✔️ 로튼 토마토 신선도 지수 100%! 받을 만 하지
✔️ 믿고 보는 조합, ‘그린나래미디어’ & ‘하이스트레인저’!
✔️ 2024년 1월 3일 개봉
#최초의 세계
이 영화의 원제는 ‘아마 글로리아(Ama Gloria)’, 그저 정직하게 ‘보모 글로리아’이다. 안경점에서 시력 검사를 하는 클레오의 모습과 함께 보이는 글로리아를 통해, 우리는 금방 꽤나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다. 첫째, 그는 클레오의 어머니가 아니다. 둘째, 그는 클레오와 다른 뿌리를 갖고 태어났다. 셋째, 그럼에도 시력 검사 결과조차 도와주고 싶어할 만큼 그는 클레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보모. 사어(死語)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쩐지 빅토리아 시대 고전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느낌의 단어다. 실제로 요즘은 ‘베이비시터’ 같은 표현을 더 많이 쓰기도 하고. 하지만 보모라는 말에는 더 끈적하고 진득한 느낌이 배어 있다. 한자로 ‘모母’ 자를 쓰고 있어 그런지, 옛날에 더 많이 쓰던 단어라서 그런 건지. <클레오의 세계> 속 글로리아 또한 베이비시터보다는 보모라고 부르고 싶은 존재다. 그건 단순히 클레오의 아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오래 함께해왔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둘은 서로에게 온전히 기대는 존재다. 아이 얼굴의 밀가루를 털어주고, 놀이터에서 생긴 상처를 후 불어주는 사람. 걷고, 씻고 하는 모든 순간을 놀이와 웃음으로 채워주는 사람. 오래 전 읽은 소설 <봉순이 언니>의 문장이 떠올랐다.
그녀만이 우는 나를 달래주었고, 그녀만이 내 잠자리의 베개를 고쳐놓아 주었다. 그녀는 나와 마주친 최초의 세계였다.
클레오에게 글로리아는 최초의 세계다. 그렇기에 클레오는 글로리아를 작은 몸과 마음 다해 힘껏 사랑한다. 갑작스럽게 전화로 전해져 온, 글로리아 어머니의 부고 소식 앞에, 슬퍼하는 글로리아 옆에 조용히 앉아 통통한 뺨과 곱슬머리를 기대며 앉는다. 그렇게 클레오는 온 존재로, 글로리아의 슬픔에 고요히 귀를 기울인다. 때로는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하는 작은 아이는, 조용히 흐르는 슬픔을 감쌀 줄도 알 만큼, 그만큼 자신의 최초의 세계를 사랑했다. 자신을 키우는 존재의 콧노래, 그가 숨죽여 이불로 작은 몸을 덮어주는 순간의 기억, 이런 것들은 어린 시절의 어느 정도를 차지할까. 평소 크게 기억하지 않고 사는 어떤 기억들이 사실은 나를 지탱하게 하고 있음이, 영화에서 부드러운 색채로 그려진 애니메이션을 타고 관객에게로 흘러온다.
#세계는 깨어지고 확장된다
그러나 힘껏 자신을 다 기댄 클레오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별은 온다. 글로리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이제 글로리아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러야 하고, 어머니에게 ‘황혼 육아’로 맡겨두었던 자신의 진짜 아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뜻했으므로. 그렇게 글로리아로 가득하던 클레오의 세계는 최초의 균열을 맞이한다.
아이들도 알 건 다 안다. 그래서 그 균열의 순간은, 어둠 속에서 훌쩍훌쩍 우는 클레오의 모습. 떼쓰지도 조르지도 못하고 창틀만 꼭 붙잡은 클레오의 눈물 속에서 일방적 순간이 된다. 그러나 진짜 클레오가 균열을 감지하는 건, 오히려 방학을 맞아 글로리아의 고향 섬에 놀러 가서 작은 방에 몸을 뉘이는 순간이다. 가족들과 찍은 글로리아의 사진을 보며, 클레오는 처음으로 감지한다. 내 모든 것인 사람에게, 그에게는 내가 모든 것이 아님을 처음 깨닫는 순간.
그 순간, 머릿속에서 딱 클레오만했던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1학년 소풍 날이었고, 1학년이니까 보호자의 동행이 허락되었으며, 우리 엄마는 나뿐 아니라 동네 이웃집 아이와 동행하고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간호사로 근무하고 계셨던 아주머니는 미안한 얼굴로 아이를 챙겨달라고 연신 부탁했고, 그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엄마가 나 없이 다른 친구와 둘이서만 다정하게 앉아 이야기를 하거나 같은 프레임의 사진에 찍히는 걸 보는데, 기분이 상당히 묘했다.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조합을 목격했다는 생경한 기분이었으나 뭐라고 설명하지 못한 감정이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그때의 내 마음이 이해된 것이다.
굳이 <인사이드 아웃>에서 빙봉이 사라지는 슬픈 장면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성장은 언제나 상실을 동반한다. 내가 알던 세계가 조각나는 아픔을 거친다. 그러나 깨지고 다친 세계는 무너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틈으로 더욱 확장된다. 글로리아에게 자신이 모든 것이 아님을 깨닫는 클레오의 여정은 쉽지 않았지만, 이를 통해 글로리아는 물론 글로리아의 가족들과도 연결된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차츰 배우고, 중심이 아닌 채로도 건강한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른다. 영원히 애정의 중심에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글로리아뿐이었던 “클레오의 세계”는 이렇게 또 조금 확장되었다. (이 영화 제목 번안은 정말 멋지다.)
#그 후로도 우리는 자라겠지만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클레오의 세계”가 확장되는 아릿한 성장의 시간을 따뜻하고 다정하게 바라보는 동시에, 클레오를 둘러싼 사람들에게서도 사랑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주인공의 성장담을 서술하기에 벅차 허덕이는 영화가 아니라, 모든 인물의 성장은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담은 넉넉한 작품이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 대신 자신이 낳지 않은 누군가의 아이를 돌보고 사랑하며 사는 여성의 삶, 섬에 줄곧 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묘한 텃세를 받으며 그 거리감 안에서 다시 생활을 꾸려 가는 글로리아의 삶.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 조금은 떨떠름한 분노의 대상인 엄마를, 동생도 아닌 클레오와 공유해야 하는 세자르의 삶. 어쩌면 상실과 성장을 계속하는 건 클레오만이 아니다.
방학은 끝나고, 여정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막을 내린다. 이별은 필연적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애정 어린 돌봄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그 애정의 바깥으로 가지를 뻗어야만 성장할 수 있는 존재이다. 유년시절을 꼬박 메운 글로리아의 애정 바깥으로, 클레오는 나아가야만 한다.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의 꼬리처럼 힘차게. 때로는 힘껏 존재를 던지듯 다이빙하고, 또 때로는 다른 이의 손에 의지하여 뭍으로 올라오면서. 그러면서.
왜 이렇게 그 장면들마다 눈물이 났을까. 개인적인 기억의 편린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 인도에서 “돌보던” 아이들을 두고 비행기에 오르면, 불 꺼진 밤 비행기에서 조용히 줄줄 울던 날들이 떠올라서. 따로 떨어져 행복해져야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걸 잊지 않아야 하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아서. 집이라고 부르는 곳을 두 군데 이상 가져버린 사람들은 그리움이라는 감정과 떨어질 수 없다는 걸 배워 버려서. 그래서.
딱 클레오만한 나이였을 때의 나, 글로리아 같은 상황이었을 때의 나… 이 영화는 내 안의, 이제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을 톡톡 끌어올렸다. 이 영화는 이렇게 보편적인 정서를 통해, 우리 기억과 감정의 문을 두드린다. 누구에게나 처음으로 인지하는 ‘온 세상’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구나 그 사람의 애정 바깥으로 찢겨 나와 성장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누구나 이 영화에서 자신의 조각을 엿보게 될 것이다. 꼭 글로리아나 클레오와 같은 경험이 없더라도.
이 영화의 다정한 시선 속에서, 84분 동안 나는 또 무언가를 찢고 조금 자랐다. 이토록 부드러운 색채와 사랑스러운 감각 속에서 자랄 수 있다면, 상실도 두렵지 않다. 고래 꼬리처럼 이 영화를 품고, 또 열심히 발장구를 쳐본다. 생을 향해서.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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