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5-01-29 22:23:14
절망과 죄책감, 그리고 후회가 만든 구원의 길
-<검은 수녀들>(2025)





우리는 누구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다. 처음엔 단순히 ‘불리기 위한 호칭’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이름에는 우리가 살아가며 겪게 될 모든 이야기와 감정이 고스란히 스며든다. 그렇기에 이름을 부르고, 또 불린다는 행위는 꽤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서로 다른 이름들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넌 누구인지’를 확인하며 관계를 맺는다. 이름이 없다면 나 자신을 정의하기도 어렵고, 타인에게 나를 제대로 각인시키기도 힘들다. 결국 이름이란, 우리 내면을 드러내고 서로를 구분 짓는 뿌리이자, 한 인간의 영혼을 상징하는 가장 기본적인 표시가 된다.
영화 <검은 수녀들>에서 우리는 유니아, 미카엘라, 바오로라는 ‘이름’을 지닌 세 인물을 만난다. 수녀이자 신부인 이들이 각각 품고 있는 절망, 죄책감, 후회는 그들의 이름 속 정체성을 흔들고 시험한다. 어둠에 사로잡힌 세계에서, 구마 의식을 둘러싼 제한과 의심 속에서,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이름에 걸린 책임과 소명을 다시금 떠올린다. 과연 절망이 오히려 힘이 될 수 있을까, 죄책감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 수도 있을까, 후회가 도움의 손길로 바뀔 수도 있을까? 다음부터 살펴볼 세 가지 감정은 이 영화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펼치는 출발점이다.
[첫 번째 감정] 유니아 수녀의 절망감

유니아 수녀의 과거가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과 태도, 그리고 반응하는 방식에서 그녀가 깊은 절망감 속에 머물러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조금은 외로운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유니아 수녀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돕고 구하려고 애쓴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녀의 절망감이 오히려 그녀를 움직이는 동력처럼 보인다.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마주할 때조차, 그녀는 흥분하거나 극단으로 치닫기보다 담담하게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한다.
이 태도가 영화 전체에서 중요한 이유는, 유니아 수녀가 어떤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칠 대로 지친 표정을 띠면서도, 막바지까지 타인을 위해 구마 의식에 나서는 모습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상징한다. 절망감은 흔히 사람을 고립시키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유니아 수녀는 그 절망 위에 일종의 ‘책임감’을 덧씌워, 오히려 자신의 신념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된다.
특이하게도 영화는 이 ‘절망감’이 유니아 수녀에게서 연민이나 연약함이 아닌, 더욱 단단한 ‘투쟁심’을 끌어낸다고 묘사한다. 실제로 그녀가 처한 환경은 녹록지 않다. 구마 의식은 허가받은 신부만이 거행할 수 있는데, 유니아 수녀는 이 제약을 뛰어넘을만한 권한도, 신분도 갖고 있지 않다. 영화에서는 그녀가 무당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거절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사람을 구하고, 악령을 막아내려 애쓰는 모습은, 절망을 극복하는 데 있어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두 번째 감정] 미카엘라 수녀의 죄책감

영화 곳곳을 살펴보면, 미카엘라 수녀가 어릴 적부터 죽은 이들을 보아왔다는 암시가 있다. 친구가 자살한 듯한 과거가 엿보이는데, 그녀는 그 환영을 지금도 계속 목격한다. 이상한 기운이나 귀신 같은 존재가 주변을 맴돌면, 미카엘라 수녀도 금방 눈치채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질병’으로 치부하고, 외면하려 든다.
아마도 친구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현재 그녀를 마비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 대신 살아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미묘한 부채감, 무엇인가 바꿀 수 있었을 텐데 바꾸지 못했다는 자책이 그녀를 무력하게 만든다. 미카엘라 수녀는 그러한 마음의 짐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려 하고, 수동적인 태도에 빠져 버린다. 그러나 유니아 수녀를 만나면서부터, 그녀는 조금씩 변화의 계기를 맞이한다.
죄책감은 사람의 행동을 옭아매는 강력한 감정이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처벌하려는 듯한 충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영화에서 미카엘라 수녀는 스스로를 속이는 방식으로 이 감정을 억누르려 하지만, 유니아 수녀를 통해 ‘죄책감이 나 때문에 생긴 감정’이라면, ‘내가 직접 해결해야 한다’는 자각을 얻는다. 그제야 그녀는 더 이상 뒤로 숨지 않고, 마주보려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미카엘라 수녀는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짐이, 사실은 새로운 결심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 번째 감정] 바오로 신부의 후회

바오로 신부는 영화 전반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는 인물임에도, 의외로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정신병 같은 건 의학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믿으며, 구마 의식 자체를 부정하는 쪽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갈등이 벌어질 때마다, 그는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영화에서 가장 취약해 보이는 존재가 바오로 신부다.
다만 흥미로운 건, 바오로 신부가 어느 순간 결단을 내린 뒤의 모습이다. 영화는 그 과정 자체를 상세히 보여주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구마를 돕는 인물로 바뀐다. 바오로 신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구마 의식을 직접 행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위한 물품과 장소, 그리고 현실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후회’가 얼마나 강렬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진작 믿었다면, 아니, 적어도 무관심하지 않았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의 감정은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후회라는 감정은 이미 벌어진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람을 무력감에 빠뜨리지만, 동시에 그 무력감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게도 만든다. 바오로 신부가 보여주는 반전과 지원은, 여전히 죄의식과 후회를 품고 있음에도,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고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로 인해 유니아 수녀가 고립되지 않고 끝까지 악령에 맞설 수 있게 된다는 점은, 후회가 뒤늦은 도움일지언정 완전히 무의미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이야기 속 논쟁거리
정신병에 대한 평가는 사회적으로 여전히 논란거리다. 누군가는 의학적·과학적 치료가 최선이라고 주장하고, 또 누군가는 영적인 문제나 전통적 주술적 방식(무당, 굿 등)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이 영화 <검은 수녀들>은 구마 의식이라는 종교적 접근, 그리고 무당을 통한 민속적 접근, 의학적인 치료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시각에 따라 대처법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드러낸다. 현대사회에서도 정신적 문제나 질병을 두고 각기 다른 입장이 충돌하고 있는데, 영화가 그런 복합적인 관점들을 끌어모았다는 점은 꽤 흥미롭다.
물론 이야기 자체에 완벽하지 않은 구멍들이 보이긴 한다. 하지만 어느 한쪽 방식만이 옳다고 단정 짓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트라우마나 초자연적 현상에 접근하는 시도를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사회학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질병’ 혹은 ‘이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다원성을 반영하는 사례일 것이다. 사람마다, 혹은 문화권마다 시각이 다르고, 그 다름이 때로는 갈등을 낳지만, 동시에 새로운 해법을 모색하게도 만든다.

그래도 이 영화에서 던지는 메시지
영화 <검은 수녀들>은 제목만 보면 어두운 분위기의 공포·오컬트 장르로 느껴지지만, 정작 핵심은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한다. 유니아 수녀의 절망감, 미카엘라 수녀의 죄책감, 그리고 바오로 신부의 후회를 통해,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과 상처가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는지를 펼쳐 보인다. 우리는 종종 절망, 죄책감, 후회 같은 감정이 부정적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영화는 그 감정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그래도 앞을 향해 나아가는 힘’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분명 영화상에서 아쉬운 구석이 없진 않다. 마치 급작스럽게 변하는 바오로 신부의 태도나, 미카엘라 수녀가 어떤 식으로 죄책감에서 벗어나는지 좀 더 구체적인 과정이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뚜렷하다. ‘결국 인간을 흔드는 건 외부의 악령이 아니라, 우리가 내부에서 품고 있는 절망, 죄책감, 그리고 후회가 아닐까?’라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진득하게 남는 여운이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복합적인 감정을 어떻게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감독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전반적으로 큰 사건과 스펙터클에 집중하기보다는, 인물 간의 심리적 갈등과 변화를 다루는 데 공을 들인 영화라서, 한 편의 심리 드라마를 본 듯한 인상을 남긴다. 오컬트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타인을 구하기 위해 절망감을 이겨내고, 과거의 죄책감을 짊어진 채라도 한 발씩 나아가는 사람들. 어쩌면 이 영화 <검은 수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 일상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 결국 이름이라는 것은 나 자신이자, 내가 지닌 모든 감정의 집합체다. 그리고 그 감정들 사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순간, 우리는 자기만의 구원과 용서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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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년 만에 중국 개봉하는 한국 영화
한국 영화가 중국 시장에서 6년의 공백을 깨고 드디어 와이드 릴리징을 앞두고 있다고 합니다.
바로 12월 3일, 금요일에 중국 내 극장들이 2020년 9월, 국내에서 개봉되었던 영화 <오! 문희>를 상영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하였는데요. 나문희 배우와 이희준 배우가 열연을 펼친 영화 <오! 문희>는 기억이 깜빡깜빡하는 할머니가 그녀의 개와 함께 손녀의 뺑소니 사고의 유일한 목격자가 되고, 이에 아들 '두원'과 '문희'가 손녀를 의식불명에 빠뜨린 범인을 직접 찾아 나서는 코믹 드라마입니다.
중국은 지난 2016년, 한국의 사드(THAAD) 배치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그해부터 한국 연예인이 출연하는 영화, 드라마 및 미디어 방영을 금지하는 이른바 '한한령'을 내린 바 있는데요. 이에 따라, 국내 천만 관객을 달성했던 전지현, 이정재 주연의 <암살> 이후 중국 내에서 제대로 된 극장 개봉을 이뤄낸 한국 영화는 한 편도 없었습니다.
예외로, 2018 베이징 국제영화제에 홍상수 감독의 <클레어의 카메라>(Claire's Camera), <그 후>(The Day After)를 포함하여 총 7편의 한국 영화가 초청 및 상영되며 한한령 완화에 대해 긍정적인 전망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당시에는 위 상영이 한한령 해제로 이어지지 못하였지만, 드디어 2021년 12월 <오! 문희>의 개봉으로 한한령 해제까지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국 정부가 한 편일지라도 한국 영화의 공식 개봉을 승인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인데요. 이는 세계 최대 영화 시장으로 떠오른 중국 시장에 한국 영화가 다시 진입할 수 있게 됨을 뜻합니다.
게다가 같은 날, GQ 잡지의 중국판 12월 호 표지를 한국 배우 '이동욱'이 장식할 것이라 밝혀 큰 화제가 되었는데요. 중국 내에서 K-컬쳐가 공식 수입된 적은 없을지라도, 수년 동안 한류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중국에서도 비공식 채널을 통해 많은 중국팬들을 끌어모아 왔습니다. 중국 내에서 "#Korean Films Released in the Mainland After 6 Years" 라는 해시태그가 1억 5천만 회 이상 조회되는 등 한국 문화가 다시 중국 본토에 수입될 수도 있다는 전망에 수많은 중국 팬들이 설렘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는데요. 많은 팬들이 드디어 한한령이 풀리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글을 게시하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고 전해집니다.
<오! 문희>의 개봉 발표는 실제 개봉을 불과 이틀 앞두고 나왔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홍보가 제대로 이루어질 시간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마오얀에서는 약 2,000만 명의 사람들이 영화에 관심을 표했으며, 개봉 당일 중국 내 257회의 상영이 계획되어 있다고 합니다.
알리바바의 자료에 따르면, 중국에서 역대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한국 영화 TOP 5는, 1위부터 <암살> (4,700만 위안), <명량> (2,700만 위안), <도둑들> (2,200만 위안), <7광구> (2,120만 위안), <해운대> (1,670만 위안)로, 국내 흥행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요.
과연, <오! 문희>가 흥행에 성공하여 한국 영화 극장 개봉의 활로를 터줄 수 있을지 지켜봐주시길 바라면서,
오늘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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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이온더월>_ 쇼날리보스
2년 만에 다시 찾은 부산국제영화제.
티켓 부스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 굿즈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사람들, 영화제 관계자 목걸이를 매고 돌아다니는 영화인들. 모든 순간들을 다시 보니 반가웠다. 그렇게 곳곳에 시선을 두며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을 담았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영화를 사랑하겠지만.
영화제에 와서 밤새 영화얘기를 하다가, 잠도 제대로 못 잔 채 아침 9시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에겐 어떤 공통된 마음이 있지 않을까. 내게도 그 마음이 있는 것 같다고 자부하며 아침 9시에 영화를 보러 갔다가 몇 번의 고비를 경험했다. 이게 바로 영화제 아니겠냐며, 이게 바로 씨네필 아니겠냐며 같은 영화관에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속감을 느끼다가 좋은 영화였어… 하고 둘째 날 첫 스케줄을 견딘(?) 기억이 생생하다. 짧은 일정 탓에 보고 싶은 영화를 모두 다 보진 못했지만 계획했던 일정대로 티켓팅에 성공했다. 매 순간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영화제를 즐겼다.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여서 더 즐거웠던 ,
2024 부산국제영화제. 몇몇 단상을 남긴다.
1. 플라이온더월 (감독_쇼날리보스)
치카 카파디아는 말기 암 4개월 시한부 진단을 받고 죽기로 결심한다. 스위스 취리히의 조력사 지원단체 ‘디그니타스’에 지원서를 넣고 종교적 의례처럼 일기를 써나가며 스위스로 이주를 한다. 그리고 가까운 친구인 쇼날리 보스 감독에게 자신의 죽음을 촬영해 주기를 청한다. 영화는 여기서 시작한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치카와 쇼날리가 함께한 마지막 2주는 생의 환희로 가득한 순간들로 채워진다. [강소원, 제29회 BIFF]
스위스 블루하우스에서의 조력 자살에 관한 이야기.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는 다큐멘터리이다. 일 년 전, 어떤 영화 하나를 보고 죽음을 다루는 이야기들에 관심이 생겼다. 죽음을 앞둔사람은 남은 생애 동안 어떤 마음을 안고 살아갈까. 그 마음이 궁금해 선택한 다큐.
다큐멘터리 속 조력자살을 선택한 감독님의 친구 ‘치카’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매 순간 생의 기쁨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죽음 앞에서 의연한 태도로 자신의 선택을 마주하는 그를 보며, 나도 죽음을 앞둔 순간에. 혹은 내게 죽음이 점점 다가왔을 때 그와 같은 모습일 수 있을까, 생각했다. 후회가 전혀 남지 않는 생은 없을 테니까, 후회가 덜 남는 생이어야 그와 같은 마음일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래서 그런 생을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영화는 죽음을 앞둔 치카가 쓴 일기를 요일이 바뀔 때마다 앞부분에 보여준다. ‘다시는’ 태양을 보지 못하고 ‘다시는’ 사랑할 수 없다고 쓴 부분을 읽으며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한 번 뿐이기에 더욱 값지지만 한 번만 주어지는 생이기에 죽음은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것이라고, 그래서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울음을 참으려 하지만 끝내 울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삶에는 꼭 배워야 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다 배우고 나면 자연스레 떠나게 되는 것이기에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감독님. 헤어짐은 언제나 버겁겠지만 이 다큐를 통해 죽음에 관한 새로운 시선과 앞으로의 슬픔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다음 글에서 <지옥 2>, <나 홀로 여행하기>, <고독한 미식가: 더 무비>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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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최초 힙합영화
- 줄거리
줄거리라고 할 게 있는지 사실 모르겠다.
- 느낀 점
학생의 입장으로서 걱정이 되었다. 실제로 힙합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고, 랩을 좋아하는 학생들도 다수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는 한 명은 부유한 집안 외동아들, 한 명은 가난한 집안이지만 양아치 무리 중 한 명으로 캐릭터를 잡았다.
이로 인해서 현실에서 랩을 좋아하는 학생들을 모두 안 좋은 이미지로 바라볼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영화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현재의 학생들을 잘 알지 못하거나 질이 안 좋은 학생들 말고 만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대사에 욕이 많이 나오는 부분 또한 랩하고 힙합 하는 애들은 다 그럴 것이라고 작가가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나 싶었다.
중학생이라는 설정을 잡은 것 같은데 캐스팅된 배우들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았을 때 고등학생으로 설정을 했어야 알맞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들의 이미지 말고도 극 중에서 나오는 대사나 상황들을 보았을 때 중학교 3학년은 극에 이입하기에는 깨는 설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 운전을 한다, 칼을 들고 다닌다)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동아리와 함께 랩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송주는 갑자기 마이크 스탠드를 고치러 간다.
근데 이 전에는 송주가 마이크 스탠드 근처에 가거나 그쪽을 쳐다보는 장면이 없어서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서 스탠드를 고치는 게 진짜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왜 이 이야기가 들어갔는지, 왜 이 장면이 나온 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 영화감독이 하고 싶은 건 많고 담고 싶은 건 많은데 제대로 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다 감상하고 나서는 내가 뭘 본 건지도 모르겠고, 뭘 느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헷갈리고, 누구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는 저 등장인물이 왜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느껴졌고, 이 이야기는 왜 들어간 것이며 엔딩 또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영화의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면 불편하게 느껴졌던 장면들도 이해하고 넘어갔을 텐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 대체 그 부분들이 왜 들어간지도 몰라서 그냥 불편했다.
(+주연 와 송주가 햄버거를 만들 때 장난치면서 했던 대사들, 전체적으로 많은 욕, 오토바이 교통사고, 중3의 운전 등)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고 느꼈고, 시나리오가 좋아야 한다는 이유 또한 알게 되는 경험이 되었다.
파노라마_테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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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타임 결말 줄거리 등장인물 넷플릭스 | 아만다 사이프리드 주연
모든 비용이 '시간'으로
계산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급여가 시간으로 지급해 주고,
커피 한 잔, 음식값이 시간으로 된다면?
이런 상상을 영화로 만든 작품
'인타임'이 있습니다.
2011년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레전드
작품이라서 다시 한번 보고 왔습니다.
그럼, 시간이 중요한 영화 인타임 리뷰 시작해 보겠습니다.
기본 정보
장르 : 액션, SF, 스릴러
감독 / 각본 : 앤드류 니콜
출연진 : 아만다 사이프리드, 저스트 팀버레이크. 킬리언 머피
개봉일 : 2011년 10월 27일
평점 : 7.41
스트리밍 : NETFLIX, Wavve, Whatch
기획 의도
가까운 미래, 모든 인간은 25세가 되면
신체적인 노화가 멈추고 왼 손목에 새겨진
'카운트 바디 시계'에 1년의 유예 시간을
제공받는다. 이 시간으로 사람들은 음식을 사고,
버스를 타고, 집세를 내는 등,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시간으로 계산한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을 모두 소진하고 13자리의
시계가 0이 되는 순간, 그 즉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때문에 부자들은 몇 세대에 걸쳐
풍족한 시간을 갖고 인생을 누릴 수 있는 반면,
가난한 자들은 하루를 겨우 버틸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을 노동으로 사거나, 누군가에게 빌리거나,
아니면 훔쳐야만 한다.
살고 싶다면, 시간을 훔쳐라!
등장인물
윌 살라스 | 저스틴 팀브레이크
충분한 시간을 벌지 못하면
더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눈을 뜬다.
실비아 | 아만다 사이프리드
와이스 금융사의 회장 딸
여담
시간 = 화폐라는 소재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함으로 다가왔어요.
다만, 이런 신선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개연성과 미래에 대한 소품이 전혀
어울리지 않아 아쉬움이 한가득 남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시간'의 중요함을 잘 알려준 작품이라
아직도 회자되는 영화 인타임입니다.
후기 및 결말
경호원으로 위장한 윌은 실비아와 함께
회사에 찾아가 실비아의 아버지를 인질로 삼고
금고에 있는 시간을 훔쳐 나갑니다.
빈민가로 향한 윌과 실비아는
시간을 기부하다가 타임키퍼에게
잡힐 뻔하다가 위기를 극복합니다.
이들은 더 큰 규모의 은행을 털며
시간을 나눠주며 시스템을 붕괴하게
만들어주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 인타임은 정말 참신한 소재로
아쉬운 전개와 뻔한 스토리로
아쉬움이 정말 많이 남는 작품입니다.
참신한 소재 때문에 7점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영화 인타임 추천드립니다.
한줄평 : 팔씨름하다 골로갈 수 있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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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집 토토로>, 도덕적 이상에 대한 욕망
<이웃집 토토로>, 도덕적 이상에 대한 욕망
<이웃집 토토로>의 시작은 이상하게 불안하다.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가는 사츠키 가족의 트럭은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한다. 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이동을 편히 받아들이는 인간의 시지각적 특성을 고스란히 배반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캐러멜을 나눠먹는 화목한 가족처럼 보이는 그들에게 하나의 부재가 제시된다. 이 트럭엔 엄마가 없다. 그들의 엄마는 결핵에 걸려 병원에 입원 중이다. 그런 엄마의 병문안을 가기 위해 이들 가족이 단체로 자전거를 탈 때에도 동선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불안감 조성은 후반부 사츠키와 메이가 엄마에게 큰일이 생겼을지도 몰라 전전긍긍하는 두려움의 심리를 탁월하게 증폭시킨다.
하지만 관객을 상대로 한 형식적 불안과는 달리 작중 인물들은 이러한 불안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 천진난만한 자매 사츠키와 메이는 새 집을 탐방하며 ‘마쿠로 쿠로스케’라 불리는 검댕 벌레를 목격하지만 전혀 겁먹지 않는다. 이때 그들의 아빠 쿠사카베는 “밝은 데서 갑자기 어두운 곳에 가면 마쿠로 쿠로스케가 보이는 거야.”라며 출몰 원인을 진단해주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말한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의미가 단순한 광량의 차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쿠로 쿠로스케는 이후 창문이 활짝 열린 2층 방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이때 밝은 곳과 어두운 곳에 함유된 의미는 단순한 광량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의 물질적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이사 온 시골집은 어두운 곳, 그전에 머물던 도시의 집은 밝은 곳으로 도식화된다. 그리고 마루코 쿠로스케는 물질적 감퇴의 징표이자 그 음울한 기운을 담은 불안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위에도 언급했듯 이러한 도식이 사츠키와 메이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썩은 나무도 웃음의 대상이 되고, 청소와 빨래도 즐거운 놀이가 되며, 시골집은 어두운 곳이 아니라 그저 호기심의 대상처럼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메이는 마쿠로 쿠로스케를 게임하듯 잡은 다음 언니에게 자랑하듯 뛰어간다. 이후, 그녀는 마쿠로 쿠로스케가 곧 사라질 거란 말에 “재미없어!”, “난 무섭지 않아.”라고 외치며 섭섭함까지 내비친다. 그렇다면 마쿠로 쿠로스케의 출몰 동기는 아이들의 눈높이가 아니라 쿠사카베 같은 어른의 사고에 맞춰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아내의 간병과 건강을 위해 도시에서 시골로 왔다는 사실을 이내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이전이 어른의 세계에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른에게는 부정적인 일이 아이들에게는 새로움이라는 긍정적 결과로 작용하는 아이러니. <이웃집 토토로>는 어른과 아이의 표면적인 충돌은 전무함에도 그들의 정신과 내면의 층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충돌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어른과 아이의 충돌 세계를 그리는 여타 영화들과 달리 쿠사카베는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어른과 아이의 충돌을 대중적인 화법으로 탁월하게 그렸던 스필버그와는 정반대의 노선인 셈이다. <미지와의 조우>, <E.T>, <에이아이>와 달리 이 영화에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 물리적 충돌뿐 아니라 정신적 긴장 관계의 시각적 표현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더욱이 사회나 환경과의 갈등도 전혀 없다. 그렇기에 <이웃집 토토로>의 서사는 지나칠 정도로 평평하고 평화롭다. 만일 당신이 프로듀서라면 질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이 이야기가 가능한가. 어떻게 90분 남짓의 상업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될 수 있는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야기를 성립할 최소한의 수수께끼를 제시한다. 다름 아닌 ‘토토로’라는 미지의 생명체. 그 친근하면서 동시에 기이한 존재를 향해 집중되는 단일한 미스터리. 그렇다면 토토로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존재는 왜 중요하게 다뤄지는가, 질문해 봐야 할 것이다.
토토로의 정체와 존재론
이사를 온 날 밤, 사츠키 가족이 다함께 목욕을 즐길 때 목욕탕 바깥에서는 불안을 상징하던 검댕 벌레가 비상하여 녹나무의 우듬지를 향해 올라간다. 마치 <모노노케 히메>에서 숲의 정령 ‘고다마’가 어느 나무를 향해 줄지어 걸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주인공 아시타카는 그 나무를 보며 “너희 엄마냐?”라고 묻고, 고다마는 마치 그렇다는 듯 딸깍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를 <이웃집 토토로>에 대입해 보면, 숲의 정령 토토로가 살고 있는 녹나무는 사실상 누군가의 엄마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누구의 엄마인가. 메이가 작은 크기의 토토로를 따라가다 녹나무의 구멍에 빠져 얼마간 굴러 떨어지는 장면에서, 그 긴 통로는 말할 것도 없이 여성의 자궁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 자궁에서 나온 인물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메이. 그렇다면 녹나무의 자식은 사츠키와 메이인 셈이며, 역으로 녹나무는 그들의 엄마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곳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사는 토토로는 누구인가. 사츠키와 메이의 엄마인 녹나무를 지키고, 그 안에서 포근히 쉬는 것을 즐기는 자. 즉각 떠오르는 이름은 너무 당연히 쿠사카베다. 숲의 정령 토토로가 숲을 지키며 그곳에서 쉬는 것처럼 쿠사카베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간병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녀의 쾌유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자이다.
둘의 연결성은 위에 서술한 바 있는 목욕탕 장면에서 보다 명료하게 증명된다. 이 장면에서 쿠사카베는 거센 바람에 집이 흔들려 사츠키와 메이가 불안에 빠지자 돌연 악당 고릴라처럼 “하하하!” 웃더니 보디빌더처럼 상체를 부풀리고 이내 욕조의 물을 내리친다. 순식간에 바닥은 물바다가 되고 물방울은 사방으로 튀어 마치 비가 내리는 듯 보인다. 이는 중반부 비 내리는 버스 정류장 장면과 연계된다. 억센 비가 쏟아지자 사츠키와 메이는 우산을 놓고 간 아빠를 마중 나간다. 하지만 아빠를 실은 버스는 한동안 도착하지 않고 메이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든다. 그러던 어느 순간, 고요히 빗소리로 가득했던 버스 정류장에 발소리가 들리고 이상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토토로의 등장. 사츠키는 쿠사카베에게 전달하기 위해 가져간 여분의 우산을 토토로에게 씌어준다(토토로는 이 우산을 돌려주지 않고 자신의 것인 양 가져간다). 우산을 매개로 쿠사카베와 토토로를 연결하는 것이다. 이후,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재미를 느낀 토토로는 목욕탕에서 쿠사카베가 그랬던 것처럼 큰소리를 내며 상체를 부풀려 점프를 한다. 일순 잎사귀에 맺힌 빗물이 소나기 쏟아지듯 떨어진다. 이윽고 토토로는 고양이 버스를 타고 퇴장하고, 곧이어 일반 버스를 타고 쿠사카베가 도착한다. 미야자키는 지금 명백히 둘을 연결시키고 있다.
토토로와 아빠, 녹나무와 엄마라는 도식은 미야자키가 즐겨 활용하는, 자연과 인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애니미즘적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에 머물지만 그것을 떠나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영혼의 실체. 토토로는 아빠의 신체에서 빠져나온 영적 존재이고, 녹나무는 엄마의 신체에서 빠져나온 영적 존재이다. 그들이 담당하는 역할은 일종의 돌봄 서비스다. 토토로는 어린 사츠키와 메이 옆에 보호자가 부재할 때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아이를 보호하려는 부모의 본성이 함축된 비인간의 모습은 이미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죽은 부모를 대신하여 그들의 딸 시타를 지키는 거대 경비 병정으로 구체화된 적 있지만, <이웃집 토토로>는 죽은 신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신체에서 영혼을 분리시킨다. 아직 현실 세계에서 버젓이 살고 있는 실존 인물의 영혼을 일종의 대리자로 소환하는 것이다. 다른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동일한 주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사츠키와 메이가 토토로를 볼 수 있는 순간은 위에도 잠시 언급했듯 쿠사카베가 직무나 간병 등의 노동을 수행하고 있을 때다. 일에 몰두하다 어느새 영혼이 사라지고, 시간 개념이 없어져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훌쩍 시간을 점프해본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었을 것이다. 노동의 순간은 결국 사적인 시간의 부재를 뜻하고, 이는 아이를 보호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병실에 있는 엄마는 그곳에서 하루 종일 치료와 회복이라는 노동을 하고 있다). 미야자키가 애니미즘을 필요로 한 건 부모 없이 남겨진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따뜻한 가족주의의 발현을 위해서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강의 신 ‘하쿠’는 신발을 주우려다 물에 빠지게 된 어린 소녀 치히로를 구해준다.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 강의 신체에 빠져버린 소녀를 강의 영혼이 구해주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애니미즘적 관점을 극단으로 밀어붙인다면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나우시카가 분노한 오무들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은 뒤 부활하는 장면을 나우시카의 신체와 영혼의 분리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토토로에게 나무 열매를 선물 받은 사츠키와 메이는 엄마에게 마당 정원에 씨앗을 심었는데 잘 자라지 않아 낙담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흐뭇하게 읽는 엄마의 얼굴이 드러난 다음 장면에서 싹이 나기 바라는 사츠키와 메이의 간절한 소망은 곧바로 실현된다. 토토로 가족이 의식을 치르고, 사츠키와 메이가 이에 동참하면 나무는 어느새 거대하게 자라난다. 이후, 토토로는 그들을 팽이에 태워 창공을 날아오른다. 이때 “우리가 바람이 된 거야.”라는 사츠키의 대사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자연을 파괴한 대가로 폐허가 될 위기에 처한 제국의 시민들과 나우시카가 바람이 불기를 간절히 바라던 반성적 태도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인간과 비인간, 인간과 자연의 동화를 황홀하게 각인시킨다. 나무초리에 앉은 사츠키와 메이는 그렇게 아빠와 엄마가 분한 영혼의 대리자들 곁에서 극진히 보살핌 받는다.
토토로는 실존하는가
꿈에서 깨어난 사츠키와 메이는 토토로와 함께 성장시킨 나무가 사라졌음을 확인한다. 혹자는 이 장면을 놓고 어쩌면 토토로를 그저 꿈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메이와 토토로의 첫 만남 시퀀스는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끝맺음되고, 버스 정류장에서의 만남은 그녀가 잠든 이후에 이뤄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초월적이고 허황된 꿈의 잔영이자 환상의 조각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영화는 토토로가 현실의 땅 위에 실존하는 존재라고 당당히 선언한다. 메이는 엄마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그녀의 병원을 찾아 헤맨다. 사츠키는 이웃 주민들과 함께 길 잃은 메이를 찾아 이곳저곳을 수소문한다. 하지만 끝내 그녀를 찾지 못하자, 사츠키는 토토로에게 가 메이를 찾아달라며 애원한다. 이 장면에는 트릭이 없다. 꿈이거나 환상일 가능성이 배제된, 그야말로 현실의 장면이다. 그렇다면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토토로는 어떻게 현실의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여기엔 두 가지 가설이 따른다. 하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의 결실이 토토로를 소환해 낸 것이라는 가설. 다른 하나는 초월적 존재가 실존하기를 바라는 미야자키의 소망 혹은 정말 그렇다고 여기는 강력한 믿음의 결과라는 가설(“이 신기한 생명체는 이제 더 이상 일본에 살지 않습니다. 아마도.”라고 적힌 <이웃집 토토로>의 포스터 문구를 보고 미야자키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이 신기한 생명체는 여전히 일본에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라고 바꾸라며 소리친 적 있다). 전자는 어른과 달리 아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어떤 특권적인 세계가 있으리라는 동심의 판타지를 품게 하고, 후자는 현실 세계에 긍정적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이상적 낙관을 상상해 보게 만든다.
그러나 전자의 가설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은 토토로의 존재를 믿는 자가 사츠키와 메이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쿠사카베는 토토로를 만났다고 하소연하는 메이에게 “거짓말이라고 생각 안 한단다. 숲의 주인을 만났나 보다. 운이 좋은 거야. 근데 늘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란다.”라며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공표한다. 그런데도 그는 단 한 차례도 초월적 존재와 조우한 적이 없다. 사츠키, 메이와 쿠사카베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린 아이와 어른이라는 나이의 차이뿐이다. 그렇다면 이 가설에는 초월적 존재와의 만남이 어린 아이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사실이 첨언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두 가지 가설을 종합해보면, 미야자키는 어린 아이들만을 위한 초월적 존재가 실존하기를 바라거나, 정말 실존한다고 믿고 있다는 말이 된다.
플래시백의 부재
미야자키 하야오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간과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플래시백의 잦은 사용이다. <이웃집 토토로>는 그의 이전 작품들,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와 다르게 플래시백이 없는 최초의 영화다. 플래시백은 그의 세계에서 이후에도 <붉은 돼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주제 의식과 서사에 가장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었다. 그가 플래시백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그의 동경이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어린 시절과 그때 비롯된 모험심과 낭만. 그는 어린 시절의 한 시간이 어른의 십 년보다 더 중요하다고 얘기한 적 있다. 그런 연유로 그의 플래시백은 한 번도 긴 호흡으로 이어진 적이 없다. 파편적인 작은 기억. 하지만 그 작은 파편 하나가 어른의 십 년보다 더 큰 파급력을 가진다. 미야자키 세계에서 그 작은 기억의 파편은 주제의 핵심을 이루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단초가 된다. 그런데 그 핵심적인 플래시백이 <이웃집 토토로>에는 없다.
그 이유는 <이웃집 토토로>의 배경 자체가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의 플래시백이기 때문이다. 그는 앞선 세 작품에서 동경의 대상으로서 유럽을 배경 삼았던 것과 달리 1950년대 본인의 어린 시절, 심지어 자신이 살았던 실제 공간을 토대로 하여 <이웃집 토토로>를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그에게 그 자체로 동경의 대상이자 그가 평생 구현하고자 했던 유토피아의 가장 현실 가능성 높은 모델이다. 도덕적인 아이들과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영혼의 보호자들, 그리고 이타적인 이웃 주민들이 만들어 내는 협력 공동체. 더불어 이를 감싸는 포근하고 정겨운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 이 영화의 감동은 이러한 유토피아의 구축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감동의 이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웃집 토토로>의 감동은 유토피아와 같은 목가적 공동체의 일관된 도덕성에 있다. 이 세계에서는 일종의 안타고니스트로 기능했던, 사츠키와 메이 자매가 겪는 엄마의 부재와 그로 인한 불안을 전부 도덕적인 주변 인물들이 해소시켜 준다. 위에서 언급했듯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런 세계가 있다고 진짜 믿는 것 같다. 단순한 소망으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실재하는 세계. 그의 오랜 파트너이자 스튜디오 지브리의 메인 프로듀서인 스즈키 도시오가 사츠키 같은 착한 아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하자 미야자키가 화를 내며 한 대답 “있어, 그게 나란 말이야!”는 그런 그의 믿음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그는 스쳐 지나가는 인물, 배경, 동물들까지 모두 올바르고 이상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엄마의 병원을 찾아 나선 메이가 어느 골목에서 염소를 만나는 장면이다. 엄마에게 선물할 옥수수를 염소로부터 지켜내는 메이의 결연한 모습은 그 자체로 사랑스럽지만 우리는 느닷없이 튀어나온 염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염소를 언젠가 본 적 있다. 다름 아니라 미야자키의 극장 애니메이션 데뷔작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보았다. 소녀이자 공주인 후지코의 반지를 빼앗아 보물을 손에 넣으려는 탐욕스런 백작은 마침내 그녀의 반지를 압수하여 자신의 반지와 그녀의 반지를, 시계탑에 양각되어 있는 염소 조각의 두 눈에 꽂는다. 보물이 나올 것이라 기대했던 백작은, 그러나 한곳으로 모이는 시침과 초침에 끼어 압사 당한다. 이내 시계탑이 무너지고 수문이 열리면서 성이 호수의 물로 채워진다. 이로써 호수 밑에 가라앉아 있던 고대 로마 도시의 유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기의 괴도 ‘루팡’은 아름다운 로마의 유적들을 가리켜 “모든 인류를 위한 진정한 보물이네. 내 주머니에 넣기엔 너무 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염소는 탐욕의 제국을 멸망시키고 정화의 물을 뿌리게 함으로써 전 인류에게 회복의 희망을 전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염소가 뜬금없이 메이 앞에 등장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엄마의 부재 속에 그녀의 회복을 염원하는 한 어린 소녀의 마음을 이상한 방식으로 위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염소는 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해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위의 장면은 메이라는 하나의 인물을 넘어 그녀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현실의 모든 아이들에게 보내는 미야자키의 따스한 포옹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문득 의심이 든다. 이 영화의 감동이 정말 작중의 도덕적인 인물들과 미야자키의 선한 믿음에서만 기인하는 걸까. <이웃집 토토로>가 감동적인 가장 큰 이유는 도덕적인 인물들의 협력과 부모의 부재를 극복해 나가는 어린 아이들의 올곧은 간절함이 우리의 욕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이상적인 공동체 속에서 도덕적인 인간들과 협력하며 살고 싶기 때문에.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에. <이웃집 토토로>의 탁월함은 사회의 무한 경쟁과 자본의 억압 속에 잠시 잊고 살았던 ‘도덕적 올바름’에 대한 욕망과 그것의 가치를 상기시키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우리의 도덕적 이상에 대한 욕망을 찍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위에 언급한 미야자키의 믿음과 우리의 욕망은 정확히 일치하는 셈이다). 서사를 추동하는 원동력은 촘촘히 설계된 영화의 플롯이 아니라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모두 생채기 하나 없이 이상적인 결말을 맞이했으면 하는 우리의 선한 욕망이다. 그 욕망을 투영하며 영화를 따라간 끝에 모두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엔딩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도덕적 이상에 대한 욕망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듯 곧바로 싱그러운 음악이 우릴 축복해준다. 마치 우리에게 앞으로도 계속 그 욕망을 실현시켜주기를 당부하는 것 같이. 그런 탓에 잠시 잊고 있던 도덕적 인간에 대한 욕망이 사츠키와 메이가 심었던 나무 열매의 씨앗처럼 땅을 뚫고 무럭무럭 피어날 것만 같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웃집 토토로>를 보면 적어도 선해지고 싶은 욕망이 우리 심연에 잠재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진다. 과연 한 편의 영화가 이 이상의 가치를 넘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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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 속의 썸머에서 현실의 어텀으로.
마크 웹의 '500일의 썸머'는 조셉 고든 레빗과 조인 데이셔넬을 중심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처음부터 너무 달랐던 그들이 언제나 그 계절에 머무를 수 없는 시간 같은 사랑을 담았다. 겹겹이 쌓였지만 조각조각 흩어진 500일의 시간은 어떤 계절을 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사랑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부분들과 그렇지 않은 부분들을 톰과 서머의 관계를 통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듯하다.
남자 주인공의 시점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같은 계절에 있지만 사뭇 다른 온도에 머무는 톰과 썸머의 모습을 보여준다. 썸머에게 운명을 느끼며 조금씩 다가가는 톰, 자신만의 신호를 알아채지 못하는 썸머에 좌절감을 느낀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지나가고 어떤 계기에 의해 관계가 진전되며 그들은 시작하게 된다. 온도는 다르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같아서 좋은 기억이든, 좋지 않은 기억이든 함께 할 수 있었다. 톰의 500일 중에 어떤 날도 썸머가 빠지지 않지만 함께할수록 환상이 조금씩 벗겨지며 현실로 바뀌며 그 운명은 조금씩 깨져간다. 하지만 그 운명이 깨지는 것을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엔 아직 어리석었기에 한참 후에 깨닫게 되었다. 운명은 없지만 우연은 언제든지 만들 수 있기에 계절이 바뀌면서 여름을 놓아주고 가을을 맞이한다. 링고 스타보다 건축이 더 잘 어울리는 계절로.
지극히 톰의 관점으로 비치는 이 영화는 서머를 나쁜 사람으로 규정한다 라기 보다는 그때 나이의 미숙했던 톰이 서머를 환상 속에 가두어놓고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특히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는 장면이 그를 뒷받침한다. 늘 나서지 않고 소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그렇고 가볍다고 생각했고 결핍을 채우기 위해 톰을 이용한다고 생각했지만 깊고 진했던 썸머의 사랑을 다 이해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썸머의 취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장면을 통해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진 자신에 취해있다는 것이 썸머의 시선에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만 남자 주인공의 시점으로 시작하는 만큼 그의 시선에 가려진 여자 주인공의 시점도 궁금해진다. '500일의 톰'을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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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스트 라이브즈 - 셀린 송 감독과 유태오 배우가 그리는 새로운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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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의 어느 날, '해성'의 인생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첫 사랑, '나영'. 12년 후, '나영'은 뉴욕에서 작가의 꿈을 안고 살아가다 SNS를 통해 우연히 어린시절 첫 사랑 '해성'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한 번의 12년 후, 인연의 끈을 붙잡기 위해 용기 내어 뉴욕을 찾은 '해성'. 수많은 "만약"의 순간들이 스쳐가며, 끊어질 듯 이어져온 감정들이 다시 교차하게 되는데… 우리는 서로에게 기억일까? 인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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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암살자들> 메인 예고편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피살당한다.
며칠 후 말레이시아 경찰은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국적의
두 명의 여성을 사건의 범인으로 전격 체포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몰래카메라 연기를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이 쇼를 기획한 일당은 완벽하게 종적을 감추었는데…
김정남 암살사건의 전말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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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마일> 티저 예고편
웃고 있지만 어딘가 소름끼치는 표정... 당신에게 섬뜩한 미소를 선사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