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5-01-27 11:11:28
쿠데타와 재즈의 역학
영화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
하비에르 마리스칼과 페르난도 트루에바의 첫 번째 협업 영화인 〈치코와 리타〉(2010)에서도, 정치는 넘실대는 낭만의 뒤편에 분명하게 도사라고 있었다. 이 영화는 1950년대의 쿠바 아바나와 뉴욕이라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연인이자 음악가인 치코와 리타의 상승과 하강을 그려낸다. 혁명을 앞둔 쿠바와 인종차별이 횡행하지만 아메리칸드림 역시 가능하던 시절의 뉴욕, 두 공간 사이에서 샘솟는 긴장은 진득한 재즈 선율과 함께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두 사람을 향한 애잔한 마음을 샘솟게 해주는 하나의 그럴듯한 무대가 되어주었다. 모든 것이 좌절된 후 쿠바로 돌아왔으나 혁명 이후 재즈가 ‘제국주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억압받는 장면 역시 별 관계가 없어 보이던 정치와 음악의 연결점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두 사람의 두 번째 협업 영화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에서, 정치와 음악이라는 문제의식은 더한층 분명하게 도드라진다. 영화는 한 기자가 브라질의 보사노바를 취재하러 가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재즈와 삼바를 혼합해 1960년대에 태동한 보사노바는 음악사에 있어 영화의 누벨바그라 불릴 정도로 혁신과 변화의 중심에 선 흐름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를 경험한 한 뮤지션이 자랑스레 회고하듯, 그 시대 사람들은 극장에서는 누벨바그의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의 〈쥴 앤 짐〉을 봤지만 바와 클럽에서는 보사노바를 즐겼다. 기자가 만난 또 다른 취재원은 만약 보사노바가 맥없이 단절되지 않았더라면 브라질 음악이 세계 음악의 중심이 되었으리라 아쉬워한다. 그렇다면, 왜? 왜 보사노바는 어느 날 갑자기 위기를 맞은 걸까?
남미를 휩쓴 쿠데타 때문이다. 1963년 브라질, 1973년 칠레(그 유명한 피노체트의 쿠데타), 1976년 아르헨티나……. 1960~70년대의 남미는 쿠데타의 시기였다. 민주적으로 집권한 좌파 세력이 남미를 장악할 것을 우려한 미국의 묵인하에 군부 세력이 불안에 떠는 우파의 구원자로 등장했고, 남미는 쑥대밭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그 후과에 시달리고 있다. 쿠데타 이후 남미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이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불쑥 체포되었고, 체포당한 자는 고문에 시달리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실종 상태로 처리되었다. 국가가 주도한 테러였다. 자유롭고 즉흥적인 애드리브를 핵심으로 하는 재즈가 인간의 정신과 사상을 검열하는 체제와 화목하게 공존하기는 어려웠다. 개인의 정체 성향 문제가 아니다. 그저 재즈와 독재의 본질적인 성향이 극단적으로 달라서다. 보사노바는 이렇게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테노리우 주니오르가 있다. 재능을 인정받은 천재적 재즈 피아니스트였으나 단 한 장의 정식 앨범만 남기고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사람. 샌드위치, 혹은 담배를 사 오겠다는 메모를 남기고는 영영 돌아오지 못한 사람. 네 아이의 아버지이자 곧 다섯 번째 아이의 아버지가 될 사람이었던 테노리우 주니오르는 영영 사라져버렸다.
보사노바 취재기를 엮어 책으로 낼 계획이던 기자는 점점 테노리우의 이야기에 마음이 쏠리고, 어느새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과 흔적을 찾는 데 몰두한다. 동료 음악가, 가족, 연인을 만나며 그는 점차 재즈 피아니스트 테노리우에 관한 음악적, 인간적 퍼즐을 맞춰나간다. 기자는 결국 테노리우의 최후를 확인한다. 아르헨티나 투어 중 납치되어 고문당하다 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사살된 후 버려졌다는 것. 이 사건에는 단지 촉망받던 장르의 천재 한 명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죽었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후 브라질 음악이 독재 세력과 대기업에 의해 주도된 것은 재즈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다. 3분이라는 시간적 제약과 틀에 박힌 형식은 재즈 뮤지션들의 역량과 지향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테노리우의 죽음은 브라질 음악의 죽음에 대한 메타포였다.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는 〈치코와 리타〉는 다채로운 색감과 귀를 간질이는 재즈 선율로 인한 감각의 즐거운 자극, 그리고 그로부터 인상적인 이야기를 빚어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음악과 정치를 버무려 낭만과 폭력의 시대를 통과하는 누군가의 이야기 말이다. 다만 전작이 멜로드라마풍의 끈적거리는 판타지 로맨스라면, 이번 작품은 씁쓸함을 자아내는 다큐멘터리라는 점이 다르다. 〈치코와 리타〉가 좋았다면, 혹은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가 괜찮다면 같은 듯 다른 전작 혹은 최신작을 함께 감상하며 재즈와 함께 부풀어 오르다 의기소침해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경험일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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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단을 지연하여 도달하는 곳
이탈리아 영화감독 루카 구아다니노는 서사를 부분적으로 감추거나, 결정적인 장면에서 카메라를 돌리고, 포커스를 맞추지 않으면서 사건 자체보다 사건이 인물에게 실어나르는 감정에 주목한다. 일례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청년이 소년에게 숨겨져 있던 성 정체성을 끌어올리는 동안, 소년의 부모는 둘의 사랑을 방해할 생각은커녕 그들의 사이를 관조하거나 응원한다. 더욱이 이 영화는 청년에게 시선을 할애하지 않아, 관객에게 성 정체성에 의해 고민하고 지연되는 갈등보다 소년의 마음이 움직이는 궤도를 동행하게 만든다. 성 정체성을 다루면서도 그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보다는 미학적 완성도에 더 깊게 몰두하는 것을 두고, 미국 평론가 조너선 롬니는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세계는 너무나 빛나고 완벽해서, 이건 인생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영화처럼 보인다.”(장영엽, 「씨네21」 2018-03-21 재인용)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런 비판에도 구아다니노는 자신의 영화적 관심사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왓챠를 통해 독점 공개된 HBO 드라마 <위 아 후 위 아>(2020)에서는 한술 더 떠 ‘다름’을 평범하게 제시하며 ‘구분’ 자체를 흐리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소년 프레이져(잭 딜런 그레이저)가 군인인 두 엄마를 따라 이탈리아에 있는 미군 주둔지로 오면서 시작한다. 프레이져는 손톱에 색을 칠하고, 미성년자임에도 맥주를 손에 쥐고, 지휘관의 아들에게는 걸맞지 않은 화려한 옷차림으로 주둔지를 활보한다. 그런데 두 엄마는 프레이저의 기행을 오히려 비범하다고 여기고, 특히 친모인 사라(클로에 세비니)는 미육군 대령이자 부대의 지휘관이지만 집에서는 아들에게 뺨을 맞기도 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인다. 프레이져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성장에 불편함을 주지 않는 듯 보이는데, 일례로 생리를 시작한 다른 주인공 케이틀린(조던 크리스틴 시먼)이 탐폰의 사용법을 몰라 혼자 애를 먹는 반면에, 프레이져는 엄마 매기(앨리스 브라가)를 통해 면도하는 법을 배운다. 케이틀린과 그의 가정도 평범과는 거리가 있다. 미국인 아빠, 나이지리아인 엄마, 친부가 따로 있는 이복오빠와 함께 사는 케이틀린은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중이다. 그는 아빠 포이트리스(스콧 메스쿠디)가 자신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에 서운해하고, ‘하퍼’라는 이름으로 남장을 하고 주둔지 밖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드라마가 ‘원래 다들 이렇지 않아?’라고 시치미를 떼듯 어딘가 어색한 인물들을 대수롭지 않게 담아낸다는 것이다. 구아다니노는 전작들에서 그랬듯, <위 아 후 위 아>에서도 평범하지 않은 두 가정의 사연을 서사의 진행에 필요한 부분만 꺼내 보여준다. 레즈비언인 매기와 사라가 사랑에 빠지게 된 계기, 프레이져의 친부에 대한 정보, 그가 왜 임신한 사라와 헤어졌는지도 시청자는 알 수 없다. 케이틀린의 오빠인 대니(스펜스 무어)의 친부 또한 드라마 내부에서 존재를 확인할 수 없고, 남편과 이별한 후에 제니(페이스 알라비)가 어떻게 미군 포이트리스의 만나게 되었는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드라마는 서사 바깥에 있는 과거의 이야기를 극 안으로 가져오지 않아, 인물들의 특별한 사연이 극적으로 보이지 않게 한다.
드라마가 ‘다름’과 ‘구분’에 관해 말을 아끼는 동안, 프레이져와 케이틀린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도 두 아이가 서로를 지탱하며 큰 문제 없이 유려하게 흐른다. 그러다 6화에서 포이트리스가 두 아이를 떼어놓기 위해 직접 학교 앞으로 찾아온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의미를 알기 힘든 인서트씬이 막간처럼 틈입한다. 프레이져와 케이틀린은 열정적으로 춤추고 노래하지만, 식당에 있는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무관심하다. 심지어 두 아이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기까지 한다. 흥겨운 음악과 유쾌한 운동감이 있지만 서사와는 큰 연관이 없다는 점에서 이 씬은 레오 까락스의 영화 <홀리모터스>(2012)에서 드니 라방이 성당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퍼레이드를 벌이는 장면과 닮아있다. 영화비평가 허문영은 <홀리모터스>의 이 장면을 두고 “이 장면에 넋을 잃게 되는 이유는 연주와 음악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의 위치에 있다. 비루하고 잔혹하며 고단한 가면 놀이의 틈에서 우리를 향해 이처럼 벼락같이 쏟아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음악을 그토록 사랑할 수 있었을까.”(허문영, 「진실은 막간에 있다」)라고 평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장면이 가진 장력은 배치에 있다는 것이다. <위 아 후 위 아>의 유사한 장면도 구분이 개입하는 순간을 정확히 짚어내어 위치한다. 이 장면은 프레이져 때문에 케이틀린이 어긋나고 상처받을까 걱정하는 포이트리스가 물리적으로 두 아이를 가로막는 순간이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다름과 올바름의 경계에서 처음으로 인물 간에 갈등이 발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드라마는 작위적인 장면의 의도적 배치를 통해 다름에 관한 판단을 영리한 방법으로 지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드라마가 판단을 지연하려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드라마 중간중간 미디어에서 언급되는 트럼프와 관계있어 보인다. 드라마는 트럼프의 당선 소식(6화 결말)을 기점으로 앞선 회차들을 전복시키며 지연했던 판단을 하나둘 건져낸다. 크레이그(코리 나이트)의 죽음 이후 학생들은 토론을 벌이며 상대의 의견을 거부하고, 그 과정에서 프레이져의 솔직함은 눈치 없음으로 바뀐다. 또한, 흠모하던 조나단(톰 메르시에)의 집을 방문한 프레이져는 속옷만 입고 춤을 추는 조나단의 여자친구와 조나단 사이에 서게 되는데, 갑자기 도망치듯 뛰쳐나온다. 두 엄마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차이와 조화 확인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남들과는 다른 성적 지향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을까. 프레이져는 집으로 돌아가 두 엄마에게 이제껏 찾은 적 없던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다. 4화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성기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쓰고, 먹다 남은 음식물을 아무렇게나 던져놔도 아무런 제약이 없던 러시아인의 저택에도 일탈이 주는 해방감과 역동성이 거둬진다. 술과 마약은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게 만들고, 대니와 아이들은 물건을 부수고 폭력을 행사한다. 일탈이 비행으로 바뀌면서 아이들만의 공간으로 어른인 매기와 사라가 찾아오게 된다.
특히 크레이그의 죽음에 대한 사라의 태도가 눈에 띈다. 사라는 모니터에 비친 희생자들의 시신 앞에서 “여기 군인밖에 없잖아”라고 말하며 나체를 드러내고, 추모식에선 ‘평화를 위한 대가’라며 그들의 죽음을 군인으로서 숭고한 희생이라고 포장한다. 이는 그들의 죽음을 미국을 위해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며, 드라마 내내 자신과 대립각을 세우던 포이트리스가 미군들이 이탈리아 피자 가게 파손시킨 사건을 “미국을 모욕했겠죠”라며 미국을 위한 폭력을 정당화한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이 장면에서도 트럼프 관련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즉 7화에선 이전 회차까지 선명한 구분이 없던 성 역할, 어른/아이, 군인/민간인, 미국/타국이 하나로 모이거나 둘로 나뉘며 그 경계가 선명해지는데, 이 갈등 양상은 트럼프 시대가 가져온 분리 정책과 미국 사회의 분열과 겹쳐진다. 드라마가 6회까지 미뤄뒀던 갈등을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아 7화에 일순 화면 위로 길어 올린다고 본다면, 드라마가 판단을 지연한 목적은 트럼프 시대의 사회 분열을 겨냥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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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딜레마, 혹은 계급 간 사랑의 불/가능성
〈사랑의 탐구〉는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이 불화해 고민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격하게 공감할 사랑의 딜레마 혹은 ‘계급 간 사랑은 가능한가’라는 짓궂은 질문을 다루는 영화다. 철학 강사 소피아는 ‘사랑’을 강의한다. 플라톤, 쇼펜하우어, 스피노자, 장켈레비치, 벨 훅스 등의 사랑 이론 등등. 그녀는 10년간 만나온 지식인 파트너 자비에와 안정적인 관계를 누리는 중이기도 하다. 그러나 둘 사이에 섹스는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소피아는 자비에와 함께 구매한 별장에서 인테리어 업자 실뱅을 만난다. 별장을 둘러본 실뱅이 참 손댈 곳이 많다고 말하자 소피아는 눈물을 흘린다. 이는 소피아가 현학적 담론에는 익숙하지만 삶의 구체적 문제에 대응할 능력은 갖추지 못한, 실생활과는 동떨어진 지식인의 전형임을 암시한다. 당연하게도, 소피아는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갖춘 실뱅에게 빠져들고,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사랑의 황홀을 경험한다.
핵심은 섹스를 통한 감각의 확장이다. 노동 계급의 강인한 육체를 가진 실뱅은 지식인 자비에가 결코 선사하지 못한 방식으로 소피아에게 육체적 쾌감을 전해준다. 자비에의 권유로 담배를 멀리하던 소피아는 실뱅의 권유에는 오랫동안 담배를 피워왔다는 듯 행동하는데, 그녀가 실뱅의 욕망에 맞춰 기꺼이 육체의 모험을 감행할 것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결국 소피아는 자비에를 버리고 실뱅에게 간다.
그러나 사랑은 육체의 감각을 ‘초월’해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소피아는 주로 하층 계급인 실뱅 가족들과의 첫 저녁 식사에서 불편함, 이질감을 느낀다. ‘세련된’ 문화 자본을 갖춘 소피아의 친구들을 만난 실뱅도 마찬가지다. 소피는 ‘극우 인종차별주의자’이자 거친 언어를 사용하는 실뱅에게 놀라기를 반복하고, 실뱅은 소피아가 자신을 무시하는 언어를 사용한다며 분개한다. 그사이, 소피아는 다시금 자비에와 만나기도 하지만 그와의 섹스는 형편없을 만큼 지루하다. 정신과 육체, 지식인과 노동 계급. 두 범주의 중첩 속에서 소피아의 혼란은 깊어만 간다.
흥미로운 건 각각 지식인과 노동 계급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개인’으로서는 사랑하지만 ‘계급’, ‘계층’으로서는 그러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여곡절 끝에 실뱅은 소피아에게 청혼하고, 비혼주의자인 소피아는 이를 수락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알고 있다. 두 사람 사이의 차이가 사랑만으로 돌파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는 것을. 결국 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손가락의 반지를 빼고, 실뱅은 그런 소피아를 두고 홀로 떠난다. 사랑은 개인의 감정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권력관계의 산물이기도 하다.
대개 사랑 영화는 넘을 수 없는 간극(신분, 계급, 가문, 민족, 가치관 등)을 해소함으로써 사랑의 위대함을 설파하는데, 이 영화는 정 반대, 즉 사랑도 넘지 못하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정신과 육체, 계급 간 이분법에 관한 통념을 그대로 차용한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계급, 계층 간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지금 멜로 영화의 전통을 벗어난 소피아와 실뱅의 혼란은 꽤 그럴듯하다. 진지한 멜로 영화인데도 종종 코미디 영화를 보는 듯한 독특한 카메라 연출도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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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빛난 독창성, 영화 <그대 너머에>
[감독: 박홍민 | 출연: 김권후, 윤혜리, 오민애 외 | 제작/배급: 농부영화사 | 러닝타임: 119분 | 개봉: 2021년 9월 9일]
불가항력의 재난 상황으로 작년부터 맞이하게 된 극장가의 침체기는 해가 갈수록 악화 일로를 걷는 느낌이다. 특히 영화 제작 자체가 난항을 겪으면서 올해 개봉한 영화들 중 눈에 띄는 작품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영화 <그대 너머에>는 독창적인 독립영화 감상에 목마른 씨네필이 주목할만한 올해 가장 독보적인 스타일의 작품이다.
개미를 초밀착 접사로 촬영한 화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이내 영화감독 '경호'와 의문의 여자 '지연'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경호'는 집필 중인 시나리오가 친한 영화사 대표와 이전에 작업을 같이 했던 작가 모두에 거절당하고 답답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소녀가 자신의 딸이라고 주장하며 나타나니 당황스럽다. 게다가 그 근거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자신의 엄마가 남긴 글. '경호'는 이 상황이 의아하지만 '지연'을 따라 기억의 미로 속으로 이끌린다.
'지연'의 엄마는 '경호'의 첫사랑 '인숙'이다. '인숙'은 자신의 딸 '지연'은 알아보지 못하고 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20년만에 만난 첫사랑 '경호'는 곧잘 알아보며 올 줄 알았다는 말을 남긴다. 영화가 재밌는 점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가 기억의 혼란에 빠진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며 낯선 세계관으로의 여행을 안내하는 기능을 한다.
내용에서의 독창적이고 도발적인 특성은 형식에서도 드러난다. 영화의 전반부는 ‘경호’의 이야기가 모든 즉흥적 가능성이 열려 있는 야외의 공원(장충단공원)에서 시작되어 그의 집 안에서 종결된다. 그리고 ‘경호’가 집에서 나와 암흑의 결절점을 지나며 다시 공원으로 이어지는 후반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후반부는 전반부가 변형된 이야기인데 이는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을 영화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나름의 자신감을 갖고 있지만 사실 완벽하게 과거를 떠올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감독이 전제한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관객들 역시 전반부를 기억해내면서 후반부의 이야기의 어떤 부분이 달라졌는지 비교하게 한다.
촬영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기억의 미로를 헤매는 ‘경호’와 ‘지연’이 좁고 복잡한 골목을 헤매는 장면을 움직이는 롱테이크 촬영을 통해 담아낸 것이 인상적이다. 골목 사이사이를 뛰어다니는 주인공을 트래킹하는 롱테이크 촬영은 관객의 몰입을 높임과 동시에 고난이도 촬영의 성취에 감탄을 자아낸다. 사전에 약속된 움직임 안에서 인물들의 감정 연기가 오롯이 담긴 롱테이크 촬영은 미적 아름다움과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 모두를 가능하게 한 영화의 백미다.
<그대 너머에>는 기억과 자아에 대한 믿음에 질문을 던지며 관객 저마다 지적 자극을 선사하지만 결국 사랑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를 건넨다. 주인공 ‘경호’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애쓰는 첫사랑 ‘인숙’을 만나며 비로소 잊고 지냈던 과거의 자신을 마주한다. 그렇게 답답하고 아픈 마음의 ‘경호’는 죽고 마음의 결심과 함께 시나리오를 쓰는 ‘경호’가 남는다. 그리고 ‘인숙’은 자신의 딸 ‘지연’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애타게 딸을 찾는다. 하지만 ‘지연’은 그런 엄마 ‘인숙’을 매일같이 찾으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기억이 사랑의 충분조건이 되지는 않음을,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따뜻한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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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더맨 : 노웨이홈>,멀티버스가 열려야 하는 이유
<스파이더맨 : 노웨이홈>은 마블이 만들어 갈 새로운 신화의 서막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작품이었다.
'멀티버스'라는 전제 하에, 예전 소니에서 탄생한 두 명의 다른 스파이더맨들까지 총출동하여, 스파이더맨을 사랑하는 팬들에게 '종합 선물세트' 같은 작품이 되었다.
한 공간에 모이게 된 세 명의 스파이더맨
엄청난 감동을 안겨준 최고의 작품이라는 찬사와 함께, 이번 작품 속 주인공 스파이더맨(톰 홀랜드)은 '역대급 민폐 캐릭터'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저 놈만 아녔어도.... 이 대환장파티가 안 열렸을 텐데.."라는 이야기가 많이 쏟아져 나온다.
스파이더맨의 민폐력(?)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를 멀티버스 전쟁으로 이어진다.(<닥터 스트레인지> 2로 연결될 멀티버스 전쟁...)
멀티버스 전쟁의 새로운 시작을 열게 되는 '스파이더맨'과 '닥터 스트레인지'
얼굴이 알려진 스파이더맨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피터(톰 홀랜드)는 자기 때문에 친구들이 피해를 입자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피터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 마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자기 입맛대로 몇몇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남아 있고 싶던 피터의 욕심 때문에 마법이 흔들리고, 시공간이 뒤틀리면서 멀티버스가 열린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인물, 바로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 = 아이언맨
스스로 자기 가면을 벗어버리고, 당당히 세계 앞에 "내가 아이언맨이다"라고 말한 유일한 히어로.
스파이더맨과 DC의 배트맨, 모두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상처 받는 것이 두려워 자기 가면을 철저히 지키고자 한 히어로들이다.
반면, 토니 스타크는 스스로 가면을 벗어버리고 만천하에 선포한다. "내가 바로 아이언맨이다!"
토니 스타크는 토니 스타크의 삶과 아이언맨의 삶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그 대가도 만만치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은 늘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결국 그는 사랑하는 가정도 지키고, 인류도 지켜냈다!)
피터 파커는 피터 파커의 삶과 스파이더맨의 삶을 분리하고자 하였다.
두 개의 다른 삶을 동시에 가지고자 했던 그 분열된 마음이, 멀티버스를 열게 만든 핵심 요인이 된다.
닥터 스트레인지도 그 점을 꼬집는다. 피터가 두 개의 다른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그렇다면 길은 두 가지이다.
두 개의 삶 중 하나는 철저히 포기하거나, 두 개의 삶을 통합시키거나!
이번 영화에서 스파이더맨은 '하나의 삶은 철저히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앞으로 3편의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더 나온다고 하니, 그 과정에서 어떠한 변화가 생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스파이더맨을 역대급 민폐 캐릭터처럼 보이게 만든 <스파이더맨 : 노웨이홈>.
왜 스파이더맨이 그렇게 행동해야만 했는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행동이었는지, 그래서 뭘 얻었는지,
멀티버스는 왜 열려야 했는지......
그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고 싶었다.
<스파이더맨 : 노웨이홈> 작품 하나만으로는 충분한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드라마 <로키>와 연결되었을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멀티버스' 개념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드라마 <로키>
드라마 <로키>에 의하면, '1차 멀티버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남아 있는 자'에 의해 전쟁이 종식되었으며, '신성한 시간선'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간의 어벤저스 시리즈는 이 '신성한 시간선'이 유지되는 가운데 진행된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신성한 시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변종들, 변이들, 차원과 차원을 넘나드는 모든 행위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바로 TVA라는 조직에 의해.
<로키>의 결말 부분에서는 이 '신성한 시간선'이 노출되면서 모든 차원이 다시 뒤섞이는, 2차 멀티버스 전쟁의 서막이 열린다.
'신성한 시간선'이 노출되는 그 순간, '남아 있는 자'는 뭔가 바깥세상에서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어났음을 감지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드라마 <로키>의 '남아 있는 자'
"우린 방금 문지방(threshold)을 넘었어!"
<로키>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순간 '남아 있는 자'가 감지한 '바깥세상의 심상치 않은 변화'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일 가능성이 높다.(이 부분이 <닥터 스트레인지 2>와 연결될 것으로 예상된다.)
스파이더맨의 부탁으로 시작한 마법은 어렵사리 유지되어 오던 '신성한 시간선'을 노출시킨다.
<로키>와 <스파이더맨 : 노웨이홈> (+<닥터 스트레인지 2>) 이후, 이제 '신성한 시간선'은 사라진다.
신성한 시간선이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멀티버스가 열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신성한 시간선은 무엇을 상징했나.
<로키>의 '남아 있는 자'는 자신을 죽이러 온 두 로키의 변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억압하는 질서(신성한 시간선을 지키는 일)냐, 격변하는 혼돈(멀티버스)이냐!
너희는 독재자(신성한 시간선)가 싫겠지만 그를 없애면 훨씬 더 나쁜 게 그 빈자리를 채울 거다....
'신성한 시간선'은 이를테면 다른 시간선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지켜져 왔다.
다른 시간선에서 끼어 들어오지도 못하고, 다른 시간선으로 잠깐 나가지도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철저히 방어하고 억제하고 감시하며 지켜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희생이 뒤따랐다.
(신성한 시간선을 위협하는, 조금의 변이도 인정하지 않기 위한 철저한 억압과 감시!)
그러나 '남아 있는 자'는 그 희생은 실리를 따지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 '억압하는 질서(자유의지억압)'vs.'격변하는 혼돈(자유의지사수)'
<스파이더맨 : 노웨이홈>에서, 피터는 진작에 다른 차원의 우주에서 넘어온 빌런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메이 숙모의 가르침과 타고난 피터의 성품 등이 결합하면서, 피터는 다른 우주에서 넘어온 빌런들을 원래 우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새로운 우주에서의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다른 우주에서 넘어온 빌런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라고 가르친 메이 숙모는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그 빌런, 그린 고블린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피터는 그린 고블린을 마침내 마주하고, 직접 죽이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1기 스파이더맨(토비)의 방해(?)로 피터는 살인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뭔 일? 1기 스파이더맨도 그린 고블린에게 당한다.(죽지 않을 정도로.) 그린 고블린은 자신을 살려준 인물들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죽이고 찌른다. 그런데도...
스파이더맨은 다른 시간선에서 넘어온 나쁜 놈들에게 왜 계속 기회를 주는가. 나쁜 놈들을 살려주어서 정작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피해를 입는데, 그런데도 이 스파이더맨들은 이 악당들을 계속 살려주고, 기회를 주려고 한다. 자기들이 자꾸 당해도...
이것이 설령 '다정한 이웃' 스파이더맨의 핵심 정체성이라 할지라도, "스파이더맨들은 왜 저래"라는 답답함이 생긴다. 진작에 다른 시간선으로 되돌려 보냈으면 되는 일이었는데...왜 그들을 제거하지 않았나...
왜 그는 다른 차원의 존재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였나....
굳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스파이더맨은 '신성한 시간선'을 지키지 않았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신성한 시간선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러한 스파이더맨의 선택은 그의 '민폐력'을 증가시키는 데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드라마 <로키>의 한 장면을 같이 살펴볼 만하다.
'신성한 시간선'을 관리하는 TVA의 두 관료, '재판장'과 '모비우스'의 대화가 의미심장하다.
'재판장'과 '모비우스'
재판장 : (신성한 시간선에서 벗어난) 시간선 제거 안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모비우스 : 어떤데요?
재판장 : 혼동, 죽음...
모비우스 : 자유의지는요?
재판장 : 그건 한 사람에게만 있어요. 책임자에게만.
다른 차원으로 넘어오거나 넘어가는 인물들을 가차 없이 제거하는 TVA의 재판장.
그녀는 자신들이 그렇게 '잘못된' 시간선을 제거했기에, 혼동과 죽음을 방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모비우스가 되묻는다. 제거된 사람들의 자유의지는?
이 자유의지의 문제는 다시 '남아 있는 자'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설령 개인의 '자유의지'를 억압하게 되더라도, 질서 정연한 '신성한 시간선'을 지키느냐, 아니면, 격변하고 혼돈하는 세상이 되더라도 '자유의지를 지키는 길'을 선택하느냐.
<스파이더맨 : 노웨이홈>의 스파이더맨은 결과적으로 '억압된 질서'를 통해 '신성한 시간선'을 지키기보다는, '격변하는 혼돈'이 찾아오더라도 '자유의지를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실리에는 어긋난다 하더라도, 끝까지 지키고 싶은 '개개인의 자유의지 수호'에 대한 의지가 멀티버스를 열고야 만다.
예견된 혼동이며, 죽음이고 고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지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혼동과 고통 끝에 어떤 결말이 따르게 될지...
# 사라진 '신성한 시간선', 여정을 통해 바뀌지 않으면 끝까지 못 간다.
이제 '신성한 시간선'은 사라졌다.
본격적인 멀티버스 전쟁은 시작된다.
멀티버스 전쟁의 종식을 위한 스파이더맨만의 역할이 분명 있겠지!
드라마 <로키>에서 '남아 있는 자'가 로키에게 날린 대사가 인상 깊다.
"여정을 통해 바뀌지 않으면 끝까지 못 간다."
(you know you can't get to the end until you've been changed by the journey)
비단 로키에게만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스파이더맨의 진정한 성장도, 다시 시작될 세 편의 스파이더맨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겠지!
개인적으로는, 스파이더맨의 영원한 스승 '아이언맨'처럼,
스파이더맨 또한 두 개의 삶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어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길 희망한다.
가면을 벗어던져도 여전히 그 가면의 무게를 견디고 감당할 수 있는 그런 히어로로 성장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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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왈로우 (Swallow, 2019) - '그녀가 피를 토해내며 삼켰던 것들'
스왈로우 (Swallow, 2019)
감독 : 카를로 미라벨라 데이비스
출연 : 헤일리 베넷, 오스틴 스토웰, 데니스 오헤어, 엘리자베스 마벨
‘그녀가 피를 토해내며 삼켰던 것들’
2020 CGV CAV 전을 통해 선공개 된 후, 최근 왓챠에 공개된 영화 <스왈로우>. 여름에 그렇게 봐야지 봐야지~ 했지만 상황과 우선순위에 밀려 결국 보지 못하고 넘겼던 작품이었는데, 드디어 왓챠에 공개되었다.
<스왈로우>의 장르는 스릴러로 분리되어 있다. 근데, 이 영화의 공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스릴러와는 조금 다르다. 신체에 상해를 입히는 장면이 나오거나, 폭력적이거나 자극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간혹 몸에 난 상처와 혈흔을 보여주긴 하지만 눈을 찡그릴 만큼 무서운 장면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의 서스펜스는 밖으로 터져 나오는 피가 아닌, 억지로 삼키며 토해낸 몇 방울의 피로 만들어진다.
널찍하고 예쁜 집, 최연소 상무이사가 된 남편, 새로 잉태한 생명. 넉넉한 집안과 충분한 능력을 가진 남편 리처드를 만난 주인공 헌터는 이제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닌 꿈을 좇을 수 있는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남편이 출근한 후 커다란 집에 남겨진 그녀는 집안일을 하고, 남는 시간엔 푹신한 소파에 앉아 그림을 그린다. 드넓게 펼쳐진 숲과 맑은 하늘. 헌터는 그림을 그리다가 이내 북북 지워낸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헌터는 여유로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편이 출근한 사이 집안일을 하고, 남는 시간엔 삽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무엇보다 일을 하지 않고도 돈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일명 ‘사모님’의 삶인 것이다. 헌터도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입버릇처럼 말한다. 나는 운이 좋았고, 행복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가짜 행복은 천천히 헌터를 옥죄고 있었다. 그녀는 리처드와 결혼한 순간부터 남편의 가족들 덕에 행복해진 사람이 된다. 그래서 그들 앞에선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그저 습관처럼, 주문처럼 ”행복하다“고 말할 뿐이다. 그 외에 다른 말은 쓸모없는 말이다. 헌터는 서슬 퍼런 눈빛들 앞에서 새빨간 말들을 속으로 삼킨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그녀를 물들인다.
사회가 규정한 여성의 역할과 비밀을 숨기고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은 헌터를 더욱 강하게 비튼다. 이러한 강박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헌터의 행동을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만큼 이 영화를 보는 것이 더 아플지도 모르겠다.
스왈로우 시놉시스
완벽한 남편과 함께 그림 같은 집에 사는 사랑스러운 아내 ‘헌터’. 그러던 그녀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먹어서는 안 될 금지된 것을 삼키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되는데…
"우리 아들 만나서 신세폈네"
회사를 운영하는 시부모님과 최연소 상무이사가 된 남편 리처드. 시부모님이 사준 집엔 넓은 마당과 수영장, 아름다운 풍경, 고급 가구가 그득하다. 누가 봐도 부잣집이다. 헌터는 그 집안의 며느리가 된다. 리처드와 결혼하기 전 욕실용품을 판매하던 그녀는 이제 진짜 꿈인 삽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을 그릴 시간도 얻었고,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리처드가 출근하고 나면 이런저런 집안일을 하고, 휴대폰 게임을 한다. 그리고 리처드가 오기 전에 저녁을 준비하고 그와 행복한 저녁식사를 하면 된다. 여유로운 일상이다. 하지만 헌터의 마음은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하고 있다.
헌터를 집으로 부른 시어머니는 헌터에게 "우리 아들 만나서 신세폈네"라고 말한다. 어쩌면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헌터는 리처드를 만나면서 자유시간을 얻었고, 든든한 경제적 지원군이 생겼으니 말이다. 헌터는 습관처럼 나는 행복하고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리처드의 가족을 만나며 행복을 얻었다고 말이다. 근데, 이 행복은 그들과 진정한 가족이 되었을 때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헌터는 리처드의 가족이 아니다. 이건 영화를 오래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리처드의 상무이사 취임을 축하하는 저녁 자리, 리처드는 헌터를 언급하며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아내라고 칭하고, 시어머니는 임신을 한 헌터에게 기쁨을 얻는 재능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선물한다. 리처드 가족에게 헌터는 헌신적인 아내이자 타인(리처드 가족)에게서 행복을 얻어내는 재능을 가진 사람일 뿐이다.
리처드는 헌터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넥타이를 잘못 다리는 사소한 실수에 화를 내고, 정성껏 차린 저녁 식탁 앞에서 헌터가 아닌 휴대폰을 바라본다. 헌터의 임신을 축하하는 저녁 자리에서조차 그녀는 완전히 배제된다. 인사치레처럼 나누는 아기에 대한 몇 마디 대화가 지나가고, 리처드의 부탁으로 시작된 헌터의 이야기는 순식간에 잘려버린다. 리처드 가족에겐 헌터의 말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저 헌신적이고 남편이 좋아하는 긴 머리를 가져야 하는 아내일 뿐이다.
"매일 새로운 것을 시도해라"
임신을 했지만 행복하지만은 않다. 헌터의 시간은 매일 의미 없이 흘러간다. 아내로서의 의미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준 '기쁨을 얻는 재능'을 읽는다. 그 책엔 기쁨을 얻기 위해선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 한다고 적혀있다. 헌터는 책을 읽고 구슬을 먹는다. 그리고 내가 삼켰던 그 동그랗고 매끈한 것이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온 걸 본 순간, 기쁨을 느낀다.
헌터의 이식증 증상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매끈한 구슬을 시작으로 뾰족한 핀, 배터리, 매트리스 충전재, 못, 반지, 여러 금속들. 몸의 작은 곳들에서 피가 비치고 고통이 찾아오지만, 헌터는 작은 물건들을 다시 만났을 때의 기쁨을 느끼며 고통을 잊는다.
"내가 괴물이라 미안해"
헌터는 리처드에게 자신이 괴물이라 미안하다고 말한다. 헌터에게 직접적으로 괴물이라 칭한 사람은 없었지만 헌터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헌터를 괴물이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터는 강간 피해자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아이다. 어머니는 새로운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했고, 헌터에겐 배다른 동생들이 있다. 상담사 앨리스는 헌터에게 여러 번 어머니와 가족에 대해 묻지만 헌터는 "평범한 가족이다"라는 말만 반복한다. 그러다 홧김에 뱉어버린 어머니와 문제가 있다는 말을 시작으로 헌터는 앨리스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리처드도 몰랐던 깊은 상처와 고민들. 괴물 같던 범죄자 아버지 아래서 태어난 자신. 헌터는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가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녀의 눈빛엔 생기가 없다.
범죄로 인해 태어난 아이. 세상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헌터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 리처드를 만나 드디어 행복한 삶을 살아보나 했는데, 헌터는 여전히 행복할 수 없다. 무신경한 남편과 며느리를 아이의 엄마 정도로만 생각하는 시부모님. 리처드의 아버지는 임신했다는 헌터를 만나자마자 "미래의 CEO가 여기 있다"라고 말할 뿐, 헌터에 대한 축하와 존중의 말은 하지 않는다.
헌터는 여전히 외로운 사람이다. 리처드 가족 사이에 불편하게 끼인 듯 앉아있는 그녀는 온전하고 따듯한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헌터는 그저 안정적인 삶 속에서 행복하다고 반복해 말하고 있는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일 뿐이었다. 영화 속에서 헌터에게 위로가 되는 인물은 남편도 그의 부모님도, 헌터의 어머니도 아닌, 헌터와 똑같이 외로움을 느끼는 인물들뿐이다.
리처드가 야밤에 직장 동료들을 데리고 집에 왔던 날. 혈흔을 지우는 헌터를 발견한 건 리처드가 아닌, 그의 직장동료 에런이었다. 에런은 헌터에게 외로우니 포옹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헌터는 에런을 안아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살짝 묻어본다. 포옹을 끝내고 헌터는 에런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어째 부탁한 사람과 부탁을 들어준 사람의 입장이 바뀐 것 같기도 하지만.. 아마 헌터가 외롭다고 말하는 에런을 안아주는 순간, 외면하고 있던 자신의 외로움을 다시 느끼게 된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헌터에게 위로가 된 또 다른 사람은 간병인 루아이다. 헌터의 이식증을 알게 된 리처드 가족은 아직 몸이 안 좋은 헌터를 위해 고용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 간병인을 루아이를 집에 상주시킨다. 루아이는 고용인 리처드를 위해 헌터를 감시하지만, 고통에 몸부림치는 헌터를 보며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그는 침대 밑으로 들어간 헌터의 옆에 따라 들어가 "여긴 안전해요"라고 말하며 그녀의 어깨를 천천히 토닥인다. 그리고 헌터가 정신병원에 입소하기로 한 날, 헌터의 도망을 돕는다.
이 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헌터에게 진실된 위로와 사랑을 전하지 않는다. 리처드와 가족들은 리처드의 평범한 삶을 위해 헌터의 이식증을 고치려 했고, 리처드의 직장동료는 이식증 사실을 안다며 형식적인 응원과 위로를 전할 뿐이다. 상담을 진행했던 앨리스는 트라우마를 치료할 열쇠가 될 수도 있다며 헌터의 과거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고 관심 있는 척하지만 상담 시간 끝을 알리는 타이머가 울리자마자 상담을 정리해버린다. 집을 뛰쳐나와 갈 곳이 없어진 헌터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헌터의 어머니는 언제 와도 반갑다며 반겨주는듯하더니, 동생이 아이를 낳아야 해서 방이 없다며 딸의 방문을 거절한다.
"내가 당신을 닮았나요?"
헌터가 갈 곳은 이제 한 곳뿐이다. 남편도, 시부모님도, 어머니도 나를 외면했으니 남은 건 아버지의 집뿐이다. 어머니를 강간했던 남자이자 아버지인 윌리엄 어윈. 헌터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마주한다. 헌터는 묻는다. 내가 당신과 닮았냐고. 어윈은 답한다. 닮지 않은 것 같다고, 당신(헌터)은 내가 아니라고.
"당신은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아무 잘못도 없잖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헌터는 이 말을 듣고 싶어 어윈의 집에 찾아온 것이다. 범죄에 의해 태어난 존재. 그런 존재를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헌터는 자연스레 자신의 출생 비화를 숨겼고, 그렇게 평생 모든 것을 숨기며 살아왔다. 헌터는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한마디를 듣기 전까지, 범죄자 아버지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원망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신문에 난 아버지의 사진을 오려 지갑 속에 넣어둔 그녀는 그렇게 깊고 가깝게 자신의 존재를 미워하고 있었다.
"내가 있어서 행복해?"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한 아내로, 상류층 집안을 만나 자유로워진 며느리로, 어머니에게 사랑받으며 자란 딸로. 헌터는 리처드의 행복을 위해 살았고, 남편의 집안에 의해 행복해진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리처드의 집안은 그런 헌터의 존재를 괄시한다. 그들에게 헌터는 잘하는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내 애를 가진 여자였다. 헌터는 항상 불안과 공허함에 떨고 있었다. 반복해서 내가 있어 행복하냐고 묻고,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냐며 묻는다. 리처드는 당연하다는 듯 "넌 잘못하려 해도 못할 거야"라고 답한다.
이식증은 보통 만 1세에서 2세 사이에 나타난다고 한다. 흔히 아동들이 많이 겪는다고 하며 빈곤이나 아동학대, 가족의 혼란과 같은 상처들이 이 같은 증상을 일으킨다고 한다. 헌터는 위와 같은 상처들을 모두 겪은 어른이다. 그녀는 이식증 증세를 처음 겪는다고 말한다. 왜 어릴 적이 아닌 지금 이 증상이 나타난 걸까?
그건 아마도 헌터가 지금껏 자신의 모든 상처를 외면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그걸 인식할 여유조차 없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리처드와의 결혼, 시부모님의 압박, 그리고 임신 등 인생의 커다란 변화를 겪으며 지금껏 덮어두었던 상처가 곪기 시작한 건 아니었을까. 유년시절에 생긴 상처는 사라진 것이 아닌, 그 자리에 그대로 덮여있었을 뿐이었다.
결혼을 하고 리처드 가족들 사이에서 살아가며 헌터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다. 저녁식사를 하며 남편에게 말을 꺼내볼까-하면 리처드는 문자 답장을 하기에 바빴고, 리처드의 부모는 망설이며 시작한 헌터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버린다. 그녀의 말은 항상 쓸모없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들처럼 말이다. 그래서 헌터는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말들을 다시 목구멍으로 삼켜 넣는다. 그리고 쓸모없는 잡동사니들로 취급받는 것들도 함께 삼킨다. 고통을 주고, 혈흔을 남긴다 해도 그녀는 행복하기 위해 그것들을 다시 삼킨다.
음식이 아닌 차갑고 날카로운 속성을 가진 물건들이 헌터의 혀에 닿을 때, 헌터는 그 느낌이, 그것을 넘길 때 차오르는 자신감이 좋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리처드 집안에 들어온 여자가 아닌 나도 삼켰던 것을 다시 내뱉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생동감. 그것만이 유일하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헌터는 리처드의 집에서 도망치기 전까지, 온전한 나의 모습을 담은 거울을 본 적이 없다. 거울을 보는 리처드의 옆에 서있거나, 리처드와 동료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비치는 유리창을 바라보거나, 리처드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가 된 나를 보거나.
영화의 마지막, 화장실에서 약을 먹고 하혈을 한 헌터는 가방을 다시 메고 거울을 바라본다. 전보다 길어진 머리를 편하게 묶고, 여성스러운 원피스가 아닌 편안한 맨투맨과 청바지를 입고, 진한 눈 화장이 아닌 자연스러운 눈매를 가진 헌터의 모습. 온전한 나로서의 모습이 담긴 거울. 이제 그녀는 할 줄 아는 것 없는 누군가의 아내, 아이를 가진 엄마가 아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된다. 이제 여유로운 부잣집 사모님의 모습은 없지만 헌터는 한결 편안해 보인다.
헌터가 화장실에서 나가고, 수많은 여성들이 화장실에 들어오고 나간다. 여성들만이 들어오는 공간인 여자 화장실에서 이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헌터가 서있던 자리에서 거울을 보고, 같은 출구를 향해 나가는 수많은 여성들. 그들도 헌터와 같은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겠다는 생각이 든다.
상처를 가진 사람을 서슬 퍼런 눈빛으로 바라보던 세상 속에서 헌터는 말을 삼킨다. 모든 것은 비밀이 되어야 했고, 비밀과 함께 삼킨 물건들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올 때. 그녀는 작은 행복을 느낀다. 오래도록 자신을 괴롭히던 강박과 억압을 끊어내기까지 헌터는 목까지 차오르는 것을 수도 없이 삼켰고, 그것들은 혈흔이 되어 그녀의 창가에 들러붙는다. 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은 붉은빛으로 바뀌어 방을 가득 채운다. 그게 그녀가 바라보던 세상이었다.
* 본 콘텐츠는 네이버 블로그 Kyung film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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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하고 무해한 로맨스를 그리려는 어설픈 강박
* <달짝지근해: 7510>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달짝지근해: 7510 (2023)
감독: 이한
출연: 유해진, 김희선, 차인표, 진선규, 한선화
각본: 이병헌
장르: 로맨틱 코미디
상영시간: 118분
제과회사 연구원 '치호(유해진)'는 집과 회사만을 오가는 규칙적인 일상 속에서 오로지 '과자' 하나만을 보고 살아간다. 회사에서는 가장 유능한 직원으로 통하지만 현실 감각은 제로에 가까워 얼핏 보면 바보처럼 비치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그는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어려워 하고, 오직 혼자만의 삶을 추구한다.
그런 '치호' 앞에 나타난 대책 없이 밝은 여자 '일영(김희선)'은 매사에 직진일 정도로 적극적이고, 거침 없이 솔직하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통통 튀는 매력의 그녀는 매일이 똑같았던 '치호'의 삶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다. 한번의 상처를 겪었던 '일영'은 순수함의 결정체와도 같은 '치호'에게 끌리고, 생애 처음으로 달짝지근한 감정에 빠진 '치호'의 심장도 조금씩 '일영'에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달짝지근해: 7510>은 촌스럽지만 귀엽고, 올드하지만 친숙한 중년들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다. 중년의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로맨스 작품들이 대개 불륜이나 치정을 밑바탕에 두고 있던 것과 달리 두 남녀 주인공의 순수한 멜로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약간의 새로움을 점하기도 했다. 사회비판적 이슈를 다룬 현실적이고 어두운 작품들이나 자극적인 범죄 액션물과 달리 가볍고 착한 이야기를 담았기에 현 영화 트렌드에 피로감을 느꼈을 관객들이라면 충분히 선호할 법한 작품이다.
귀엽고 어리숙한 '유해진', 사랑스러운 '김희선'의 매력은 평범한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슬랩스틱 코미디와 로맨스를 오가는 두 사람의 케미도 훌륭하다. 특히 '유해진'은 카메오로 등장하는 '염혜란', '임시완', '현봉식' 등 짧은 분량의 배우들과도 맛깔 난 티키타카를 선보이며 짧게 치고 빠지는 장면에서의 웃음 타율 또한 나쁘지 않다.
다만 배우들의 연기력에 기댄 채 뻔하고 낡은 이야기를 답습하고 있다는 건 여전히 아쉽다. 중년 로맨스를 주제로 한 작품이라 의도적으로 올드한 요소를 배치한 것일까? 특유의 '말 맛'으로 정평난 '이병헌' 감독의 매력이 각본에서 크게 두드러지지 않고, 아재개그랍시고 가미된 대사들은 고루할 지경이다.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치호'의 행동, '유해진'과 카메오 출연진들의 호흡 정도만이 제역할을 해낼 뿐 인물들의 대사가 가져다주는 재미는 부족하다. 특히 '차인표', '진선규', '한선화' 등 조연 캐릭터들은 철저히 주인공을 위한 도구로만 활용된다. '이병헌' 감독의 작품들에서는 조연 캐릭터의 쓰임이 한정적이지 않다고 느껴 왔는데, <달짝지근해>에서는 각본에만 참여한 탓인지 뛰어난 배우들을 한정적으로만 사용해 아쉬움이 컸다.
'유해진'이 연기하는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이라면 훨씬 더 재기발랄하고 유쾌한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착함'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강박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스토리를 제어하고 있는 듯한 안정감 때문에 각본의 매력이 반감된 듯하다. 그래도 계단에서 넘어지는 '일영'을 받아주지 않는 '치호'나 '일영'을 업고 가다 함께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는 신처럼 틀을 깨는 몇몇 장면들은 '이병헌'스러웠다.
물론 코미디 장르만을 표방한 작품은 아니기에 결과적으로 더 중요한 건 두 주인공의 사랑이 결실을 맺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달짝지근해>에 내재된 올드한 색깔은 '치호'와 '일영'의 로맨스에서도 유효하다. 마치 노골적으로 레트로를 지향한 것처럼 극에 등장하는 소품이나 배경들은 요즈음의 시내상과는 제법 거리가 있다. '치호'가 끌고 다니는 녹색 프라이드 자동차나 데이트 장소로 등장하는 '김밥천국', 어플로 송금을 하는 시대에 굳이 500원을 거슬러 주겠다는 행동까지. 그 흔한 SNS나 메신저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가 지금 2003년에 나온 영화를 보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로맨스 이야기의 구조도 클리셰를 그대로 따른다. 우연한 장소에서 만난 두 남녀가 예기치 못한 사건들로 계속 엮이고, 설렘이 몽글몽글한 썸을 타다가 연애에 골인. 그리고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물로 인해 눈물을 머금고 이별을 하지만,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재결합을 한다는 결말까지. 너무나 많이 보아 왔던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가장 감동적이어야 할 '치호'의 공개 고백 신은 기대만큼의 감정을 끌어올리지 못한다. '일영'은 그의 고백을 뒤늦게 접하게 되는데, 이때 발생한 시간 차가 감정선을 끊어버리는 역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꼭 '치호'는 경계성 지능 장애에 가까운 인물로, '일영'은 미혼모로 설정해야만 했을까. 40대라는 나이는 이미 쓰디쓴 인생에 한참을 데여 풋사랑을 시작하기에 늦은 시기라는 데는 동의한다. 이 때문인지 중년 남녀가 순수하고 착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결함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처럼 비쳐져 씁쓸했다. 극중 '치호'는 형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고, '일영' 역시 치근덕거리는 직장 상사나 쉬운 여자 취급하는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한다. 따뜻하고 다정한 '치호'와 편견 없고 당찬 '일영'이 서로에게 끌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각자의 아픔을 가진 남녀가 서로를 보듬어줌으로써 사랑을 꽃피우는 따뜻한 이야기이지만, 이게 매력적이거나 세련된 소재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로맨스와 코미디에만 집중하면 좋았을 텐데, 사회적 약자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의식을 확장하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스토리가 돼 버렸다.
중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자극할 정취가 깔려 있고, 올드한 유머 또한 특정 세대에게 먹힐 만한 여지가 있다. 스토리의 여러 흠결을 배제하더라도 '유해진'과 '김희선'의 캐릭터 소화력과 이름값이 충분히 드러나 영화의 단점이 일부 보완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지나칠 정도로 착하고 무해한 로맨스만을 강조하며 이를 위해 마치 짜 맞춰진 것처럼 움직이는 이야기와 캐릭터들은 그저 작위적으로 비친다. 새롭고 달짝지근한 맛의 영화라기엔 그저 오래되고 익숙한 맛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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