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10-04 21:07:44
조커: 폴리 아 되 | 형에게 맞서는 이란성 쌍둥이
<조커: 폴리 아 되>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상을 뒤흔든 고담시의 아이콘, 조커로 거듭난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그는 아캄 수용소에 갇힌 채 재판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간수 '재키'(브렌던 글리슨)의 권유로 참석하게 된 음악 치료에서 그는 운명의 그녀, '리 퀸젤'(레이디 가가)을 만난다. 짧은 대화만으로도 수많은 공통점을 찾아낸 두 남녀. 아서는 사랑을 속삭이는 그녀 덕분에 마음 한 편에 잠들어 있던 조커를 다시 한번 깨운다.
리와 함께 하는 삶을 위해 조커로서 당당히 재판에 출석한 아서. 변호인을 해임한 뒤 스스로를 변호하며 그는 법정을 자신의 코미디 쇼로 뒤바꾸려 한다. 그러나 조커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조커가 아닌 아서 플렉의 본모습을 알려주는 증언을 들으면서 조커로서의 삶이 과연 옳은지 고민에 빠진 것. 그렇게 그는 평범한 시민 아서 플렉으로 되돌아갈지, 아니면 고담시의 빌런 조커가 될지 선택의 기로에 선다.
5년 전, 우리가 좋아했던 <조커>
조커.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 중 하나다. 잭 니콜슨, 히스 레저, 자레드 레토 같이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열연에 힘입어 마피아, 무정부주의 테러리스트, 로맨티시스트 갱스터와 같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왔다. 그래서일까? 5년 전, 토드 필립스 감독과 호아킨 피닉스가 만든 조커의 영향력은 새삼 놀라웠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을 정도로 연기를 잘했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할 만큼 반향이 거셌기 때문.
이유는 캐릭터의 해석과 작품의 구성에 있었다. 그는 단순한 가상의 캐릭터나 빌런이 아니었다. 사회 시스템과 체제의 부산물이었다. 정신질환자 아서 플렉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었고, 계속해서 이어진 재수 없는 사건들에 의해 조커로 거듭났다. 양극화 문제가 심화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시스템이 붕괴되면 언제든 등장할 것 같은 현실감이 물씬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여기에 기존 히어로 영화의 문법이 더해지자 예상 못한 파급력이 터져 나왔다. 조커가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 위치에 서자, 선악의 구도가 전복되어 버렸다. 살인, 파괴, 혼돈의 악은 정당한 분노의 분출로 변모했다. 처벌과 질서의 선은 차별적인 사회의 불합리한 시스템을 상징하는 악으로 의미가 뒤틀렸다. 그 결과 <조커>의 엔딩은 기존의 상식, 질서, 금기를 부정하는 묘한 쾌감(혹은 불쾌감)으로 가득했다.
이 기묘한 고양 상태는 조커와 관객 사이에 독특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대부분의 관객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일상에서 아서 플렉을 곤경에 빠트린 경제 불황, 빈부격차,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느끼며 살아간다. 조커로 변해가는 아서 플렉의 사연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조커의 광기에 감정이입할 수에 없는 이유다. 이는 그의 탄생 배경을 오독한 인셀 논란, 모방 범죄에 대한 우려 같은 사회적 논쟁을 촉발시킨 힘이기도 하다.
아서 플렉과 조커, 조커와 아서 플렉
빌런과 관객 사이에 생긴 유대감과 정서적 고양 상태. 이는 5년 만에 나온 속편 <조커: 폴리 아 되>에게 주어진 과제이기도 했다. 속편인 만큼, 어떤 방향으로든 이 호랑이 위에 올라타야만 했으니까.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 과제에 전편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다. 1편이 아서 플렉의 시점에서 조커의 탄생을 보여줬듯이, 조커의 다음 이야기가 아니라 조커라는 상징의 후광에 대처하는 아서 플렉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이 접근법은 오프닝에서 천언된다. 전편 후반부를 압축한 듯한 짤막한 애니메이션에 조커 분장을 한 아서와 그에게 딸린 그림자가 등장한다. 아서는 옷과 분장을 훔치려는 그림자와 격하게 싸우지만, 끝내 그림자에게 모두 강탈당한다. 토크쇼에 출연한 그림자는 자기 멋대로 '머레이 프랭클린'을 죽이고, 경찰이 오자 그 죄를 아서에게 뒤집어 씌운다. 경찰에게 구타당하면서도 농담을 건네는 아서를 비추며 애니메이션은 끝난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오프닝을 통해 다음 질문을 던진다. "아서 플렉과 조커는 동일인인가?" 영화의 구조와 구성도 이 질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전편의 연장선에서 이야기를 펼치는 것 같다가도 전편의 그림자와 싸우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새로운 캐릭터의 모습으로 등장한 전혀 다른 두 이야기가 서로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며 긴장감을 산처럼 쌓는다.
단지 캐릭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장르적으로도 로직이 전혀 다른 뮤지컬과 법정 영화를 오가며 오프닝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그 끝은 전편과 사뭇 다른 방향처럼 보이는 결말로 귀결된다. 그렇기에 <조커: 폴리 아 되>는 속편인데도 동생보다는 이란성 쌍둥이 같다. 같은 유전자(접근법)를 가졌지만, 전혀 다른 외양(결말)으로 귀결되니까.
폴리 아 되, 광란의 뮤지컬
실제로도 <조커: 폴리 아 되>는 중반까지 전편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중심에는 리 퀸젤이 있다. 의사 아버지를 두고 대학원까지 다닌 엘리트 여성. 하지만 조커의 광기에 매료된 그녀는 단지 그를 만나기 위해 아캄 수용소에 입원한다. 첫눈에 반한 조커와 함께 하는 삶을 꾸리기 위해서 아서 플렉을 계속 부추긴다. 그와 조커가 별개의 인격이 아니며, 조커야말로 그의 진정한 인격이고, 자신은 조커와 사랑에 빠졌다고 속삭이면서.
이 대목에서 등장한 뮤지컬은 1편 속 코미디쇼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코미디쇼는 차별당하고 주류에서 배제된 아서의 삶을 보여줬다. 뮤지컬은 그런 삶이 사랑을 찾아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들려준다. 병동에서 리를 만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조커로서 그녀와 함께하는 삶을 꿈꾸는 상상을 멜로디와 가사에 응축해 보여준다.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는 조커의 읊조림과 레이디 가가의 가창력이 만나 노래의 울림은 더 극대화된다.
그렇기에 그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는 '폴리 아 되', 곧 '공유정신병적 장애'라는 부제만큼 적절한 단어도 없다. 아서가 만들어낸 조커에 매료된 리. 그런 리의 희망과 상상을 토대로 더 커진 아서의 망상. 어느 한 사람에게 먼저 증상이 나타난 뒤 가까운 관계를 맺은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는 병의 증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따라서 개봉 전 우려와 달리 뮤지컬 시퀀스는 되려 전편의 조커를 볼 수 있는 귀중한 순간이다. 그들이 수용소에 불을 지른 후 함께 노래하며 철문에 매달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법정에서 증인 심문을 듣던 조커의 갑작스러운 망상도 같은 맥락에서 충격적이다. 그를 심문하는 검사 '하비 덴트'(해리 로티)와 판사를 모두 때려죽이고, 법정을 점거한 뒤 노래하며 춤추는 그의 모습은 전편 결말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법정에서 벗겨진 조커의 분장
하지만 법정에서의 분량이 늘어나면서 <조커: 폴리 아 되>는 점차 예상을 벗어난다. 법정의 쟁점은 오프닝 애니메이션과 다르지 않다. 하비 덴트는 아서와 조커가 동일인이라며 유죄를 주장한다. 반면에 변호인은 조커라는 별도의 인격이 모든 범죄를 저질렀으니 아서는 무죄라고 주장한다. 법정이라는 일종의 거울 안에서 아서는 본래 본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객관적으로 마주할 기회를 잡는다.
재판 초반에는 변호인의 전략에 순응하던 아서. 하지만 환상 속에서 리 퀸젤과 펼친 뮤지컬 공연이 분기점이다. 뮤지컬 안에서 그는 처음으로 의미가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토록 갈구했던 사랑과 관심을 마침내 찾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서는 리의 말을 따라, 그녀가 원하는 조커로서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조커와 아서를 분리하려는 변호인을 해임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번째 분기점이 주어진다. 왜소증을 앓는 '개리'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괴롭힐 때 오직 아서만 자신을 동등하게 대했다고 증언한다. 그 증언을 들으면서 아서는 깨닫는다. 설령 조커가 되지 않아도 사랑을 받고, 나눠주고, 의미를 지닌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또 수용소에서 조커를 지지하던 환자가 간수에게 구타당해 사망하자 그는 조커라는 또 다른 자아의 의미에 관해 회의를 품는다.
마침내 아서는 답을 내린다. 조커는 허상이라고. 사랑과 관심을 갈구한 자신이 만든 존재일 뿐이라고. 따라서 6명을 죽인 자신은 유죄라고. 이 결정의 대가로 아서는 사랑도, 목숨도 잃는다. 아서가 아닌 조커를 사랑했던 리는 그를 떠나고, 병동에 있던 또 다른 조커의 지지자는 배신감을 이기지 못해 아서를 살해한다. 이러한 전개를 보면 <조커> 2부작이 사실은 <아서 플렉>이라는 한 작품을 구성한 게 아닌가 싶다.
조커는 죽지 않았다
그런데 조커와 아서 플렉을 분리시킨 <조커: 폴리 아 되>의 선택에는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더 있다. 결말을 곱씹다 보면 아서와 달리 조커는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조커를 포기한 아서를 대하는 주변인의 태도가 그 방증이다. 리는 그의 고백을 거절한 뒤 떠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조커 역할을 할 다른 누군가를 찾으면 그만이다. 세상이 조커에게 열광하는 가운데, 꼭 아서가 조커여야 할 필요는 없다.
아서 살해범도 마찬가지다. 조커의 열렬한 지지자인 그에게 아서와 조커는 동일인이 아니다. 오히려 아서가 세상에서 사라져야 그들이 원하는 조커가 생명력을 유지한다. 그 둘이 별개라면 아서의 결심과는 무관하게 조커가 존재할 수 있으니까. 조커라는 불이 이미 붙은 상황에서 아서라는 불쏘시개는 더 이상 가치가 없는 셈이다. 아서가 없는 세상에서는 누군가가 조커를 자칭하며 배트맨과 싸울지도 모를 일이니까.
즉, 조커라는 광기가 이미 아서의 손을 떠난 가운데 아서 플렉은 죽어도 조커라는 상징과 이미지는 그를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았다. 이 대목에서 부제 '폴리 아 되'는 이중적으로 읽힌다. 아서와 리의 관계뿐만 아니라, 조커와 조커의 지지자 간의 유대감을 설명하는 제목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아서 플렉이 조커를 포기하는 이야기인데도 <조커>라는 제목이 어색하지 않다.
동생이 아니라 쌍둥이였던 속편
물론 <조커: 폴리 아 되>는 실망스러워도 이상하지 않은 영화다. 예고편과 포스터를 비롯한 마케팅의 초점이 전부 빌런 '조커'와 '할리퀸'에게 맞췄으니 관객 입장에서는 속았다는 느낄 수 있다. 전편에서 탄생한 '조커'의 활약만 암시해 놓고, 정작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기를 거부하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보여줬으니 당연한 일이다.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뮤지컬 시퀀스도 과하게 삽입되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편을 부정하는 작품이라며 <조커: 폴리 아 되>를 비난하는 것도 적절하지는 않다. 비록 아서는 조커가 아닌 채로 죽었지만, 조커라는 상징이 지닌 의미만큼은 아서의 비참한 결말로부터 여전히 살아남아 있으니까.
이에 더해 1편과 2편이 동떨어져 있다고 단정 짓기도 어렵다. 조커의 탄생을 아서의 시점에서 보여준 전편도, 아서의 몰락을 그려낸 속편도,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함으로부터 누구나 언제든 조커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 따라서 <조커: 폴리 아 되>는 형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생보다는, 형과 동생이 대등하게 겨루는 이란성 쌍둥이 속편에 가까워 보인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역할을 다 한 불쏘시개는 불 타 사라지기 마련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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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성보다는 감독의 고집이 더 중요했다
90년생들은 알 것이다. 정도에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지브리와 해리포터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그런 추억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브리의 신작이 나온다는 사실은 설레이게 하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지브리의 최근작들이 조금 주춤했던 적이 있긴 하지만 그 신작들도 거의 10년은 된 작품이니 새로운 지브리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그래서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고들 하던데 그 팬심 하나로 영화를 보러 갔다. 보고나니 느껴지던 것은 영화가 정말 관객의 눈치를 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관객이 어떤 것을 보여줘야 좋아할까를 고민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예술혼과 철학을 담는 데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가는 관객의 몫이지만 관객의 평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일념이 보여서 좋았다.
1. 인류애가 사라진 전쟁의 시기, 선택에 갈림길에 선 주인공
이 영화의 중요한 화두는 죽음이다. 죽음을 당한 사람도 있고, 죽음을 목도한 이들도 있고, 죽음을 방관한 이들도 있다. 전쟁의 시기에 들어서면, 여러가지의 방식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끝없이 생겨난다. 그런 시기를 살아내고 있는 마히토는 어느 날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괴기한 새의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면서 어떤 환상의 세계로 인도된다. 그 세계는 새 생명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니 태초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 같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연결된 세계인 것은 확실한데, 그 곳에서 마히토는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의 젊은 나날을 보게 된다. 미래에 화재로 죽게되는 그녀는 태초에 세계에서 불을 다루는 것을 보니 그녀의 삶에서 불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매개체인 것 같다. 이런 세계를 보고 있자면 인간의 운명은 어쩌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발버둥을 쳐도 결국 만나게 되는 어떤 매개체는 존재하는 것 같다. 내 삶에서는 그것이 글인 것 같은데, 글 쓰기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일은 직업으로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글로 먹고 살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아무말 대잔치 글을 써내고 있는 것을 보면 철자와는 뗄 수 없는 걸까 생각한다. 아니, 그냥 이과적 머리가 없는 인간의 변명일까.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의 운명은 결국 정해져 있는 걸까 싶다가도 다시 정신을 차리고 현재의 집중해야 한다고 다시 생각을 고쳐먹는다. 과거는 지나간 일이니 어떻게 할 수 없으나 현재, 미래는 결국 한 인간의 선택으로 결정되는데, 현재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나의 미래는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거지같은 과거에 얽매여 있을 것인지가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마히토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과거에 매여 있었다면 어머니를 죽였던 전쟁의 광기를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구축할 수 있는, 자신만의 균형을 찾을 수 있는 그 세계에 남아 있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히토는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거지같은 현실이라도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던 것 같다. 현실을 도피해 새로운 나만의 세계를 만드는 것 보다는 현실에 부딪혀 보고 싶었던 것 같다고 이해했다.
2. 다소 허무한 결말
영화가 전체적으로 친절하진 않다. 결말에 현실 세계로 돌아온 마히토는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등등 모험을끝내고 돌아온 그의 모습을 끝으로 뒷이야기를 보여주지 않아 엥? 스럽긴 하다. 뭐, 돌아오고 바로 끝나는 게 어딨어 라고 생각했는데, 곱씹어보니 약간 구운몽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던 걸까. 꿈에서 깨어난 마히토의 삶은 관객이 알아서 상상하라는 뜻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마히토는 그 곳에서의 경험들을 점점 잊어갈 것이지만 그의 무의식 속에 깊게 자리해 결국 그의 인생의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어머니의 죽음을 덜 떠올리게 될 것이고 새엄마와의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 생활에 적응해 나갈 것이다. 마치 불로 인해 죽게 되었어도 '널 낳았던 멋진 일'을 놓칠 수 없다는 마히토 엄마의 말을 곱씹고 있자면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살다보면 간헐적으로 좋은 일들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준다. 나의 과거가 거지같았을 지언정 이 거지같음이 영원하지 않고, 뜻밖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인생은 예상할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이 번갈아 오는 것이기에 한 번은 살아볼 만 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라고 내 나름의 결론을 내었다.
영화가 친절하지 않으면 보는 동안에는 당황을 하게 되는데, 오히려 곱씹게 되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 나름의 정답을 찾으면 그걸로 영화 한 편 다 본 게 아닐까. 그러다보니 오히려 영화의 메시지가 정확하다 못해 관객을 가르치려고 하는 영화들이 더 비호감을 느껴질 때가 있다. 이번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은 관객에게 메시지를 정확하게 구현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여기저기 숨겨놓은 듯하다. 그리고 마무리조차 정확하게 짓지 않았다. 관객에게 불친절한 영화이긴 한데, 모든 해석의 자유를 관객에게 넘긴 것 같다. 혹자는 그걸 무책임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혹자는 어떻게든 의도를 찾아내고자 기를 쓸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답을 찾아 합리화를 할 수도 있다.
그 결론이 뭐든 미야자키 하야오는 관객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저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는, 어떻게 보면 지독히도 예술가스러운 그의 기질이 느껴져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 계속 타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영화로 돈을 버는 사람이지만 뚝심이 없는 것만큼 멋없는 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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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와 불의의 싸움
줄거리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조선은 한양을 빼앗기며 위기에 놓인다.
왜군은 전주와 한산도를 동시에 공격하여 명으로 가는 길목을 열겠다는 작전을 짠다.
이순신 장군은 이를 꿰뚫어 보고 바다 위에 성을 지어 왜군의 바닷길을 막기로 한다.
감상 포인트
1. 거북선이 등장하는 전투 장면에서 웅장이 가슴해지며 벅참을 느낄 수 있다.
2. 다만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여러 인물을 거치며 전개되기 때문에 집중하지 않으면 흐름을 놓칠 수도 있다.
3. 의와 불의의 싸움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감상평
한산을 보고 나오면 딱 명량이 보고 싶어진다. 그땐 어떻게 영화를 보여줬는지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이 영화가 명량을 뛰어넘는 영화라는 점? 명량은 몇몇 인물에게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전체적인 상황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해 아쉬움을 많이 낳았고, 그 점 때문에 논란도 많이 일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전체적인 흐름에 충실하여 한산도대첩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하나의 영화 속에 온전히 녹여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싸움은 의와 불의의 싸움이다."
이순신에게 패한 준사가 이 싸움은 어떤 싸움이냐 묻자, 이순신이 답한다. 이 말에 관객들은 다른 생각을 모두 지우고 영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 대사는 영화의 전체적인 메시지다. 대놓고 말을 하지만, 그래서 더 이해가 된다. 임진왜란은 대륙 침략을 위해 조선을 공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준사가 직접 의병들과 전주성에서 싸우는 장면들도 인상 깊었다. 영화 내에서 준사를 보여준 방식은 단순히 일본 사람이 한국 사람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불의에서 벗어나 의로 향하는 마음, 방향을 틀어 의의 마음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의와 불의는 단순히 입장 차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장수들의 정치 싸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일본군 내부에서는 심각한 분열이 일어난다. 극을 이끌어가는 와키자카를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을 잡고 싶은 인물들이 가토의 군대를 처치하고 배를 빼앗는 장면에서는 와키자카라는 인물에 대한 비열함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이기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화합이나 의리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 장수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균 장군은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려고 하고 이순신에게 묘한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학익진을 제때 펼치지 못해 위기의 상황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노장인 어영담이 대신 미끼가 되어 위기에 처하자 이운룡이 도우러 가고, 적진에게 붙잡힌 원균이 학익진의 날개로 들어올 수 있도록 구선을 등장시키는 등, 이순신은 절대 낙오된 자를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의’를 가졌느냐, 가지지 못한 ‘불의’냐의 싸움이기도 한 것이다.
더불어 이순신 장군이 학익진의 어떤 위치에 어떤 장군을 배치할 것인지 깊이 고민하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이 장면에서 굉장히 지략가적인 면모를 잘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이순신 장군이 그저 전술만 잘 짰다면 이토록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장군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임진왜란이란 혼돈 속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있던 조선을 꺼내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던 한산도대첩. 이순신은 단순히 '이기기 위해서' 학익진을 펼친 것이 아니라, '누가 어디에 있을 때 이길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학익진을 펼친 것이다.
아쉬웠던 점은 이순신이 상대방에게 어떤 정보를 주었고, 어떤 정보를 숨겼는가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장수 와키자카의 조카인 사헤에는 중으로 변장해 이들의 학익진을 전부 지켜본다. 전투 연습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가는 것도 모자라 거북선의 도면마저 훔쳐 간다. 이순신은 이걸 노린 걸까? 그런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났다면 좋았을걸, 싶다.
이 영화는 한산도대첩이 '정보전'이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순신 측에 왜군의 정보와 상황을 알리는 임준영(옥택연)과 와키자카의 기생 노릇을 하며 첩자를 지키는 정보름(김향기)이 있듯이 왜군에도 첩자가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정보를 내주고, 어떤 정보를 취하는지에 대한 부분들이 부각되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굵직하고 커다란 것들로 축소했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고 깔끔한 처리를 위해서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2선에서 무너지면 여긴 끝장이야!"
그럼에도 이순신의 학익진 배치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임진왜란이라는 침략에서 버티는 힘을 가질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이순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믿는 결연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내에서는 한산대첩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주성에서 의병들이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는 장면 역시 비중 있게 다룬다. 서로 보이지 않고 상황도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나라를 지키겠다는 한 마음으로 필사의 노력을 다 한 것이다.
이순신 위주의 영화가 아니라 이순신과 그 주변 인물들, 왜구의 침략을 타파하기 위한 많은 사람들을 조명한 영화라서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국뽕영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전작도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훨씬 더 나은 방향성으로 영화를 전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장에서 만난 영화라서 더 반가웠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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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은 죽도록 살고 싶었어요
한국 관객으로서 숱하게 봐온 봉준호 필모그래피의 장면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영화. <설국열차>로 이미 놀라움을 안긴 바 있지만 더 커다란 스케일, 행성 단위의 SF로 돌아온 봉준호 감독의 <미키17>에서는 순간 번뜩이는 장면 가운데서 봉준호 감독이 쌓아온 노하우의 정수가 돋보인다. 할리우드식 SF의 흥행 구도를 반영하는 플롯과 봉준호 감독의 개성이 섞여 ‘새로운 익숙함’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야심차게 시작했다가 망해버린 마카롱 가게, 이후 사채업자에게 당할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 지구를 떠나 개척지 ‘니플하임’ 행성으로 향한 미키. 그러나 번듯한 기술도 자격도 없는 그가 지원한 ‘익스펜더블’은 그가 두려워 도망친 죽음을 숱하게 반복하는 직업이었다.
뭐 어때, 다시 복제될 거잖아? 말 그대로 실험용 쥐가 되어 구르고 또 구르는 미키. 방사능, 유독 가스, 바이러스 실험에 이르기까지 복제인간이라는 명목 하나로 그는 죽고 또 죽는다. 니플하임 행성에서 단 한 명 있는 익스펜더블인 미키는 그 행성 가운데 유일하지만 누구보다 유일하지 않은 존재다.
삶이 고귀하고 살인이 금기시되는 이유는 누구나 한 번 꺼지면 되살릴 수 없는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삶의 연속성을 끊어버리는 살인 행위는 그 자체로 끔찍한 죄악이다. 그러나 죽음에서 벗어난 삶의 연속성을 가지는 자가 바로 익스펜더블이다. 그들은 고통을 느끼고 죽음을 맞이하지만 기억은 이어져 새로운 몸으로 프린트된다. 마치 인형을 찍어내는 공장처럼 프린트되는 미키. 그는 언제든 죽어도 상관없는 소모품이자 대체품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멀티플 사건은 반복되는 죽음에 나름 적응하며 체념하던 미키에게 다시금 살고자 하는 욕망을 일깨워준다. 죽은 목숨인 줄 알았으나 원주 생명체 ‘크리퍼’의 도움을 받아 생존한 미키. 그 사실을 모른 채 본부에서 18번째 미키가 복제되며 미키가 두 명이 되는 멀티플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또 다른 내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면서 미키는 ‘연속하는 나’가 아닌 ‘분리된 나’로서 변화된 속성을 띠게 된다. 즉 미키17 그 다음 미키18이 아닌, 미키17과 미키18이 된 것. 이들은 같은 기억을 공유하면서도 다른 태도와 행동을 보인다. 그러자 그들의 죽음은 단순한 대체품의 죽음이 아닌 고유한 한 사람으로서의 죽음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한다. 평소 같았다면 실험 약의 부작용 다음에는 그냥 죽여 달라고 했을 미키이지만, 숨을 헐떡이며 죽기 싫다고 외친다. 고유한 개체로서의 존엄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지도자 마샬은 누구보다도 그 대체품을 유용하게 소모하는 순혈주의자다. 그가 개척하고 싶어 하는 새로운 이상향은 과학 기술을 활용해 태어난 불량 식품 같은 인간이 아닌 순수한 ‘번식’을 통해 태어나는 인간이다. 저녁 식사에서 여성 캐릭터 카이를 향해 건강한 가임기 여성이라며 예찬하는 마샬 부부. 카이는 묻는다, 자신이 자궁으로 보이냐고.
결국 지도자 마샬 부부의 눈에 그들은 모두 먹음직스러운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한 번 음미한 후 먹어 치운 뒤 또다시 구매하면 그만일 뿐인 소스인 것이다. 익스펜더블의 목숨은 비싼 카페트보다 하찮고, 새로운 행성에서 인류의 정착을 위해 가임기 여성은 번식을 위해 힘써야 할 자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온갖 과학의 수혜는 누리면서도 그 과학으로 탄생한 복제인간은 혐오하고 순혈 인간을 유용한 장기로만 칭송하는 그들 지도자들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명백한 적대 세력이자 가장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난다.
반면 니플하임 행성에 거주하는 생명체 ‘크리퍼’는 작은 구성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로,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인간 공동체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집단이다. 극중 쉽게 쓰다 버려지는 미키와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작은 베이비 크리퍼 하나를 위해 온 구성원 전체가 그를 구하기 위해 응답한다. 인간의 이기로 인해 인질로 잡힌 베이비 크리퍼, 그리고 그 울음 소리에 하나로 모여 응집하는 크리퍼 무리는 자연스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속 오무의 행진을 연상케 하며 외형 또한 흡사하다.
어떤 존재든 소모품으로 취급하며 짧은 생각으로 폭정을 일삼다 가장 하찮게 여기던 존재인 익스펜더블에게 죽임을 당하는 마샬, 그리고 작은 생명 하나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구해낸 원주 생명체 크리퍼. 그들 집단의 대립과 결말은 명확하고 알기 쉽게 두 갈림길로 나뉜다.
씁쓸한 뒷맛을 남기던 기존 필모그래피의 결말을 기대했다면 다소 의외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모든 것이 내 탓이오 하고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사실은 죽기 싫다고, 살고 싶다고 말하는 미키가 행복해질 기회를 얻는 꽉 닫힌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인력과 자본이 투입된 할리우드 영화에서 불가피하게 고려해야 했을 신중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키의 악몽 속 경고의 메시지를 통해 이 영화의 결말은 비로소 완성된다. 악몽 속 미키18의 희생이 무색하게 새롭게 프린트되고 있는 마샬. 영화는 주인공의 행복한 결말과 함께 엄중한 경고를 들이민다. 과학 기술과 마비된 윤리의식 아래 마샬과 같은 지도자는 프린트로 찍어내듯 지금도, 그다음에도 동일한 모습으로 반복해 출현할지도 모른다고. 공교롭게 영화를 관람하면서도 현실의 많은 사회적 이슈가 오버랩되는 만큼, <미키17>이 SF적 상상력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다름 아닌 휴머니즘이자 사회를 향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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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꼼꼼한 기만작전으로 전쟁을 막아라
한국사 공부를 하다 보면 수많은 전쟁들을 보게 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월남전 등등.. 우리나라는 전쟁을 많이 겪었다. 어렸을 때는 이 전쟁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냥 우리나라가 예전에 어떤 나라와 싸웠구나. 그냥 이 정도였다. 사건이기 때문에 암기하고 외워왔다. 이 생각은 나이가 먹을수록 바뀌기 시작한다. 죽음, 이별 이런 것들은 생각하면 할수록 무섭다. 내가 사랑했던 누군가가 갑자기 떠난다? 그것도 자기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라 윗동네 소수가 고른 멍청한 고른 것의 대가라면 참으로 갑갑하다. 나라를 위해 싸웠다. 말은 좋다. 근데 이 싸움을 일으키는 지도자들이 우리 모두를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떠난 많은 사람들의 희생은 어쩌면 멍청한 폭군들이 벌였던 결과물 중 하나다.
이 비극이 그냥 잠깐 쨘 하고 끝나면 다행일 텐데, 2022년 5월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지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전쟁 일어난 지 3개월. 분명 온 세계가 힘을 합쳐서 러시아에 보복을 했었던 것 같은데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화가 나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선택한 것도 아닌데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낼 위기에 쳐해 있다. 전쟁은 일어나선 안될 끔찍한 비극이다. 이는 우리의 역사가 여러 번 증명했던 사실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이 80년 전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나치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벌였던 전범국을 막기 위해 영국의 해군 정보장교가 묘안을 가지고 왔다. 세계 2차 대전이 발발 중이던 영국으로 가보자.
무의미한 싸움을 끝내기 위해
한 남자의 집에 파티가 열린다. 영국의 한 군인 이웬 몬태규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였다. 파티에서 놀라운 사실이 발표된다. 몬태규의 아내와 아이들이 미국으로 간다는 뜻이다. 세계 2차 대전은, 히틀러의 나치가 유대인의 피를 가진 사람이라면 죄다 탄압했던 시기였다. 영국 역시 반제국주의 연합 사이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위험이 들어닥칠지 예상할 수 없었다. 아내를 떠나보낸 이웬. 당연히 별로 기쁘지 않다.
이웬 몬태규는 현재 처해있는 상황에 집중하기로 한다. 지금 영국은 전쟁 중이다. 히틀러는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왠지 절망스러운 현재. 전쟁의 끝을 내기 위해 신묘한 한 수가 필요하다. 시칠리아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시칠리아에 매복 중인 독일군 23만 명을 따돌려야 한다. 이웬 몬태규는 그럴듯한 작전 하나를 선택한다. 그리고 실행에 옮긴다. 영국군과 20 위원회는 작전에 성공해 세계 2차 대전을 끝낼 수 있을까?
살짝 다른 전쟁영화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정말 피곤해서 내가 억지로 살고 있다! 싶은 분들은 영화관에서 보지 않는 걸 추천한다. 좋은 작품이라서 많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충분히 그런 위험부담에 대한 보상을 하는 작품이다. 예를 들어 내가 한 3주 전쯤에 본 <네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가 생각난다. 영화 자체가 몰입감은 있었다. 집중하고 볼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영화를 돌이켜보면 볼수록 그 학교폭력 가해 장면 빼곤 생각나는 게 없었다. 이 영화는 그것과는 다른 지점을 갖고 있다. 전쟁 신이 나오긴 하지만 극후 반부에만 잠깐 나온다. <1917>같이 멋있는 롱테이크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열심히 토론과 토의, 대화와 인간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은 앞에서도 썼듯 책략 설계다. 시칠리아에 있는 병력들을 그리스로 이전시키는 게 전략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이를 위해서 꼼꼼한 해결책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신분을 만드는 게 영화의 소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엥? 그럼 그게 전쟁영화야?’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영화는 긴장감이 있는 전쟁영화다. 일단 여기 있는 우리 모두 다 세계 2차 대전의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났는지 알고 있다. 결론을 알고 시작하는 영화. 그럼에도 어떤 작전을 위해 무언가를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아예 처음 들어본다. 그래서 이 작전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싶은 긴장감이 극을 이끈다. 또 긴장감 아래에 주인공이 갖고 있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가족의 문제, 그리고 본인의 문제다. 대사가 많아 눈 딱 뜨고 보지 않으면 루즈하다고 느낄 확률이 높긴 하지만 이야기가 어려운 건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은 쉬울 것이다.
마음의 방향키를 돌려
영화에서 주요하게 작동하는 모티브는 인지다. 일단 첫 번째로, 제일 중요한 소재 ‘기만작전’은 상대방의 인지에 오류를 만들고 싶어서 설계하는 것이다. 나치와 히틀러가 영국군의 행보를 예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 초반부에 주인공의 아내가 주인공에게 서러움을 표현한다. 역시 이는 ‘인지’라는 오해에서 온다. 그리고 극에서 로맨스가 있는데, 이 역시 상대방을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에서 온다. 두 사람 중 한 명이 이것에 대해 대사를 하기도 한다. 그다음 극의 중후반부를 넘어가서 제시되는 인물 간의 갈등이 있다. 이게 실제 인물들이 이런 문제가 있었는지는 (찾아본 결과) 모르겠지만 감독이 실제로 넣었다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모티브를 가지고 이야기를 철저하게 설계한 감독의 역량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난이도는 4.0
영화를 끝나고 이 작품의 번역을 누가 맡았을까? 찾아보고 싶었다. 크레디트를 쭉 보니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번역 황석희’, 아는 이름이기도 했지만 일단 이걸 어떻게 번역하지? 싶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대사량은 어마 장장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집중이 안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세계 2차 대전이 어떻게 결론이 났고, 응? 싶은 부분도 콜린 퍼스의 눈빛 연기로 설명이 되기 때문에 엄청나게 큰 장애물로 느껴지지 않기도 한다. 만약 이 영화가 <1917>이나 <이미테이션 게임>같이 멋진 전쟁영화를 기대하고 계셨다면 꾸벅꾸벅 졸 수도 있다. 마음을 비우고, 좋은 드라마를 본다고 생각하고 극장에 가시는 걸 추천한다!
매너가 연기를 만든다
이 배우들 중에서 아는 이름은 콜린 퍼스뿐이다. 그리고 콜린 퍼스 작품도 그렇게 많이 보진 않았다. 신기하게 할리우드 배우들 중에 연기 못하는 사람은 없는 느낌이다. 콜린 퍼스는 이 중간에 있는 인물이 아닐까? 주인공 이웬 몬태규는 외로운 내면이 있는 사람이다. 그게 초반부부터 나타난다. 아내와 소통이 그렇게까지 잘 되는 편은 아니었던 듯한 주인공. 이 외로운 내면은 극 끝까지 쭉 전개된다. 그 좀 생각 많아 보이고 무언가 결핍됐기 때문에 행동하는 인물의 성격 묘사를 콜린 퍼스의 덤덤함으로 잘 소화해 냈다. 절제해서 완성시킨 연기가 궁금하다면 극장으로 달려가서 예매하셔도 괜찮다!
떠나간 사람들을 추모하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엔딩에 대해 쓰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의 엔딩은 추모다. 이 사람이 전쟁 영웅으로서 얼마나 위대한지로 끝을 내지 않았다. 이는 영화가 갖고 있는 주요 소재와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 히틀러를 위시한 나치 지도부가 나쁜 거지, 그냥 징용된 독일군이 나쁜 걸까? 아닐 것이다. 물론 세계대전을 종결시킨 군인들은 위대하다. 그런데 막상 이 사람들 난 너무 칭찬하면 어느 정도의 형평성이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사람의 마음’이라는 주요 소재를 반영하듯 개인의 희생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를 관객에게 말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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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한 재미로 승부를 보다
이제 마블을 보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마블에 늦게 입덕한 자로서 영화 한 편 한 편이 개봉할 때마다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토르 1, 2편을 몰아보고, 3편은 볼 시간이 없어서 위대한 유튜버 선생님들의 요약본을 보면서 복습을 하고 영화관에 찾아갔다.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 시놉시스"신을 죽이는 자, 신이 상대한다!"
슈퍼 히어로 시절이여, 안녕! 이너피스를 위해 자아 찾기 여정을 떠난 천둥의 신 토르. 그러나 우주의 모든 신들을 몰살하려는 신 도살자 고르의 등장으로 토르의 안식년 계획은 산산조각 나버린다. ‘토르는 새로운 위협에 맞서기 위해, 킹 발키리, 코르그, 그리고 전 여자친구 제인과 재회한다. 그녀가 묠니르를 휘두르는 마이티 토르가 되어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한다. 이제, 팀 토르는 고르의 복수에 얽힌 미스터리를 밝히고 더 큰 전쟁을 막기 위한 전 우주적 스케일의 모험을 시작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 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에는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의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웃긴 영화영화 토르의 1, 2편을 보고 굉장히 진중한 컨셉에 조금 지루했었다. 3편은 요약편을 덕택에 이렇게까지 토르가 웃긴 캐릭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는데 이번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처음부터 끝까지 깔깔깔 웃다가 나왔다. 토르 3편에서 분위기가 확 바뀌다보니 3편을 본 사람들 중에서 그 재미가 전작만 못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3편을 요약본을 본 터라 굉장히 재밌게 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자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소비영화로서 2시간 깔끔하게 웃으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위험에 빠진 왕국들을 구하러 다니면서 보상으로 받은 염소 2마리,,, 한국의 고라니인가 싶을 정도로 비명을 지르는데,, 아주,, 재밌었다. 비명소리로 관객을 이렇게 웃길 것이라고 누가 생각을 했겠는가. 느슨해진 영화의 유머감에 한 순간에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신들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에서의 강력한 빌런 고르. 신 도살자인 고르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바로 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서 신 도살자로 거듭니다. 가뭄이 찾아오면서 사람들이 모두 죽어가고 자신과 딸 밖에 남지 않은 상황 속에서 자신이 섬기는 신을 만난 고르는 그 신에게서 자신은 필요 없고, 자신을 믿어주는 다른 이를 찾으면 된다는 말에 네크로소드를 가지고 신을 죽이기 시작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신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백성을 져버린 신과 다르게 아스가르드 백성이 있기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토르의 믿음이 대비되면서 신은 자신을 믿어주는 백성들의 신념 속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근데 사실 나는 무신론자여서 이러한 장면이 꼭 신에게만 적용된다기 보다는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자신의 권력과 권위는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지지하는 사람들의 신망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확장해서 받아들였다.
우상은 우상으로 남는 것이 좋다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에서 가장 놀랐던 점은 제우스가 너무 별로라는 점이다. 만화책에서 본 제우스는 저렇게 생기지 않았었다. 엄청난 위압감을 가진 신들의 신 제우스가 배불뚝이 아저씨로 나와서 순간적으로 엥?? 했던 장면이었다. 물론 외관으로 평가를 해서는 안되지만 상상했던 이미지와 너무 달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하는 행동들 역시 자신들의 왕국만 지키면 되고, 다른 신들이 죽는 것에서는 상관없어하는 천하의 안하무인적인 태도를 보면서 토르는 그동안 자신이 존경하고 흠모한 제우스가 이런 존재라는 사실에 실망한다. 누구나 자신이 존경하고 본받고 싶어하는 존재들이 있지만, 정작 그들의 실제 모습을 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상은 가까워지지 않고 자신이 상상으로 우상으로서 존재했을 때 더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비슷한 모습에 친근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제우스처럼 자신의 왕좌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면 엄청난 실망감이 몰려올테니 말이다.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는 마블 영화치고 그리 길지 않았던 러닝타임과 빵빵 터지는 유머요소가 있었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귀여운 만두신을 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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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친절로 난해한 <서스페리아>
무용단에서 벌어지는 일이 궁금
맨 처음에 나온 패트리샤 (클로이 모레츠) 관련 내용은 이해하기가 어려워 먼 내용임이라는 생각이 시작부터 나왔다.그러고 수지 역을 맡은 다코타 존슨이 등장하여 무용단에 대한 내용이 이어지는데 블랑 (틸다 스윈튼)과 수지가 어떠한 연결고리가 될지 점차 궁금해졌다. 그리고 무용단에 있었던 패트리샤에 관한 내용 또한 이어졌으나 중간에 나온 정치적? 내용이 사실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수지에 대한 내용이 꿈과 중간 어머니에 관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녀의 탄생 비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꿈을 통해 한 장면만 똭똭 팩트로 보여주어서 자세히 나오지 않아 그녀와 어머니가 어떠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끝까지 알 수 없었다.
이 무용단과 패트리샤의 노트를 통해 그녀들이 마녀라는 것을 알게 되어 수지도 같은 동급이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후반에 보여준 급 각성?은 생각지도 못했고 곰곰이 생각하면 그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이 부분은 통쾌감이 있어 좋았는데 그 뒤로 보여준 닥터 할아버지 이야기는 별로였다.
틸다 스윈튼이 1인 3역
생각해보니 틸다 스윈튼이 다 역했다고 하던데 그 다 역이 누구였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못 찾았다.
할아버지 목소리가 좀 특이했다고만 생각했지 틸다 스윈튼이라고 생각도 못 했고,3번째 인물은 후반에 나오는데 아마도 다들 못 찾지 않을까 싶다.
틸다 스윈튼은 1인 3역으로 전혀 다르게 나왔고 난 블랑 역이 독특했었고 그 중심으로 보여주었기에 제일 기억에 남은 것 같았다.
틸다 스윈튼에 이어 기억난 배우가 있었는데 수지 역을 맡은 다코타 존슨이었다.
꿈을 통해 보여준 그녀의 어머니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게 만들었지만 무용 장면과 숨소리가 뭐랄까 성적인 느낌이 들어서 묘하게 야한 느낌이 들었다. 나만 그런지 몰라도, 후반에 나온 공연 장면에서 숨소리와 시각적이 묘하게 다가왔다.깜툭튀 같은 공포가 아니라 묘하고 기괴하며 고어 같은 느낌인 영화였다.
그 속에서 보여준 상징, 은유가 있어 딱 보는 순간 해석이 어렵지만 내용 또한 불친절하기에 난해하여 호불호가 크다.
개인적으로 몰입해서 볼 수 있었지만 <마더>처럼 불쾌하지는 않았고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주면서 닥터 할아버지 이야기 보다 수지에 대한 이야기를 더 넣었더라면 이해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은데,<서스페리아> 보면서 아무래도 난해한 느낌은 들 수밖에 없었고 그 통쾌한 장면 이후에 보여준 내용은 길게 느껴지면서 지쳐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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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보면 후회하는 몰입도 최강의 공포영화 입니다.[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 트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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