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10-04 21:07:44
조커: 폴리 아 되 | 형에게 맞서는 이란성 쌍둥이
<조커: 폴리 아 되>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상을 뒤흔든 고담시의 아이콘, 조커로 거듭난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그는 아캄 수용소에 갇힌 채 재판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간수 '재키'(브렌던 글리슨)의 권유로 참석하게 된 음악 치료에서 그는 운명의 그녀, '리 퀸젤'(레이디 가가)을 만난다. 짧은 대화만으로도 수많은 공통점을 찾아낸 두 남녀. 아서는 사랑을 속삭이는 그녀 덕분에 마음 한 편에 잠들어 있던 조커를 다시 한번 깨운다.
리와 함께 하는 삶을 위해 조커로서 당당히 재판에 출석한 아서. 변호인을 해임한 뒤 스스로를 변호하며 그는 법정을 자신의 코미디 쇼로 뒤바꾸려 한다. 그러나 조커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조커가 아닌 아서 플렉의 본모습을 알려주는 증언을 들으면서 조커로서의 삶이 과연 옳은지 고민에 빠진 것. 그렇게 그는 평범한 시민 아서 플렉으로 되돌아갈지, 아니면 고담시의 빌런 조커가 될지 선택의 기로에 선다.
5년 전, 우리가 좋아했던 <조커>
조커.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 중 하나다. 잭 니콜슨, 히스 레저, 자레드 레토 같이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열연에 힘입어 마피아, 무정부주의 테러리스트, 로맨티시스트 갱스터와 같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왔다. 그래서일까? 5년 전, 토드 필립스 감독과 호아킨 피닉스가 만든 조커의 영향력은 새삼 놀라웠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을 정도로 연기를 잘했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할 만큼 반향이 거셌기 때문.
이유는 캐릭터의 해석과 작품의 구성에 있었다. 그는 단순한 가상의 캐릭터나 빌런이 아니었다. 사회 시스템과 체제의 부산물이었다. 정신질환자 아서 플렉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었고, 계속해서 이어진 재수 없는 사건들에 의해 조커로 거듭났다. 양극화 문제가 심화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시스템이 붕괴되면 언제든 등장할 것 같은 현실감이 물씬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여기에 기존 히어로 영화의 문법이 더해지자 예상 못한 파급력이 터져 나왔다. 조커가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 위치에 서자, 선악의 구도가 전복되어 버렸다. 살인, 파괴, 혼돈의 악은 정당한 분노의 분출로 변모했다. 처벌과 질서의 선은 차별적인 사회의 불합리한 시스템을 상징하는 악으로 의미가 뒤틀렸다. 그 결과 <조커>의 엔딩은 기존의 상식, 질서, 금기를 부정하는 묘한 쾌감(혹은 불쾌감)으로 가득했다.
이 기묘한 고양 상태는 조커와 관객 사이에 독특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대부분의 관객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일상에서 아서 플렉을 곤경에 빠트린 경제 불황, 빈부격차,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느끼며 살아간다. 조커로 변해가는 아서 플렉의 사연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조커의 광기에 감정이입할 수에 없는 이유다. 이는 그의 탄생 배경을 오독한 인셀 논란, 모방 범죄에 대한 우려 같은 사회적 논쟁을 촉발시킨 힘이기도 하다.
아서 플렉과 조커, 조커와 아서 플렉
빌런과 관객 사이에 생긴 유대감과 정서적 고양 상태. 이는 5년 만에 나온 속편 <조커: 폴리 아 되>에게 주어진 과제이기도 했다. 속편인 만큼, 어떤 방향으로든 이 호랑이 위에 올라타야만 했으니까.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 과제에 전편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다. 1편이 아서 플렉의 시점에서 조커의 탄생을 보여줬듯이, 조커의 다음 이야기가 아니라 조커라는 상징의 후광에 대처하는 아서 플렉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이 접근법은 오프닝에서 천언된다. 전편 후반부를 압축한 듯한 짤막한 애니메이션에 조커 분장을 한 아서와 그에게 딸린 그림자가 등장한다. 아서는 옷과 분장을 훔치려는 그림자와 격하게 싸우지만, 끝내 그림자에게 모두 강탈당한다. 토크쇼에 출연한 그림자는 자기 멋대로 '머레이 프랭클린'을 죽이고, 경찰이 오자 그 죄를 아서에게 뒤집어 씌운다. 경찰에게 구타당하면서도 농담을 건네는 아서를 비추며 애니메이션은 끝난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오프닝을 통해 다음 질문을 던진다. "아서 플렉과 조커는 동일인인가?" 영화의 구조와 구성도 이 질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전편의 연장선에서 이야기를 펼치는 것 같다가도 전편의 그림자와 싸우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새로운 캐릭터의 모습으로 등장한 전혀 다른 두 이야기가 서로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며 긴장감을 산처럼 쌓는다.
단지 캐릭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장르적으로도 로직이 전혀 다른 뮤지컬과 법정 영화를 오가며 오프닝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그 끝은 전편과 사뭇 다른 방향처럼 보이는 결말로 귀결된다. 그렇기에 <조커: 폴리 아 되>는 속편인데도 동생보다는 이란성 쌍둥이 같다. 같은 유전자(접근법)를 가졌지만, 전혀 다른 외양(결말)으로 귀결되니까.
폴리 아 되, 광란의 뮤지컬
실제로도 <조커: 폴리 아 되>는 중반까지 전편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중심에는 리 퀸젤이 있다. 의사 아버지를 두고 대학원까지 다닌 엘리트 여성. 하지만 조커의 광기에 매료된 그녀는 단지 그를 만나기 위해 아캄 수용소에 입원한다. 첫눈에 반한 조커와 함께 하는 삶을 꾸리기 위해서 아서 플렉을 계속 부추긴다. 그와 조커가 별개의 인격이 아니며, 조커야말로 그의 진정한 인격이고, 자신은 조커와 사랑에 빠졌다고 속삭이면서.
이 대목에서 등장한 뮤지컬은 1편 속 코미디쇼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코미디쇼는 차별당하고 주류에서 배제된 아서의 삶을 보여줬다. 뮤지컬은 그런 삶이 사랑을 찾아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들려준다. 병동에서 리를 만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조커로서 그녀와 함께하는 삶을 꿈꾸는 상상을 멜로디와 가사에 응축해 보여준다.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는 조커의 읊조림과 레이디 가가의 가창력이 만나 노래의 울림은 더 극대화된다.
그렇기에 그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는 '폴리 아 되', 곧 '공유정신병적 장애'라는 부제만큼 적절한 단어도 없다. 아서가 만들어낸 조커에 매료된 리. 그런 리의 희망과 상상을 토대로 더 커진 아서의 망상. 어느 한 사람에게 먼저 증상이 나타난 뒤 가까운 관계를 맺은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는 병의 증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따라서 개봉 전 우려와 달리 뮤지컬 시퀀스는 되려 전편의 조커를 볼 수 있는 귀중한 순간이다. 그들이 수용소에 불을 지른 후 함께 노래하며 철문에 매달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법정에서 증인 심문을 듣던 조커의 갑작스러운 망상도 같은 맥락에서 충격적이다. 그를 심문하는 검사 '하비 덴트'(해리 로티)와 판사를 모두 때려죽이고, 법정을 점거한 뒤 노래하며 춤추는 그의 모습은 전편 결말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법정에서 벗겨진 조커의 분장
하지만 법정에서의 분량이 늘어나면서 <조커: 폴리 아 되>는 점차 예상을 벗어난다. 법정의 쟁점은 오프닝 애니메이션과 다르지 않다. 하비 덴트는 아서와 조커가 동일인이라며 유죄를 주장한다. 반면에 변호인은 조커라는 별도의 인격이 모든 범죄를 저질렀으니 아서는 무죄라고 주장한다. 법정이라는 일종의 거울 안에서 아서는 본래 본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객관적으로 마주할 기회를 잡는다.
재판 초반에는 변호인의 전략에 순응하던 아서. 하지만 환상 속에서 리 퀸젤과 펼친 뮤지컬 공연이 분기점이다. 뮤지컬 안에서 그는 처음으로 의미가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토록 갈구했던 사랑과 관심을 마침내 찾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서는 리의 말을 따라, 그녀가 원하는 조커로서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조커와 아서를 분리하려는 변호인을 해임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번째 분기점이 주어진다. 왜소증을 앓는 '개리'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괴롭힐 때 오직 아서만 자신을 동등하게 대했다고 증언한다. 그 증언을 들으면서 아서는 깨닫는다. 설령 조커가 되지 않아도 사랑을 받고, 나눠주고, 의미를 지닌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또 수용소에서 조커를 지지하던 환자가 간수에게 구타당해 사망하자 그는 조커라는 또 다른 자아의 의미에 관해 회의를 품는다.
마침내 아서는 답을 내린다. 조커는 허상이라고. 사랑과 관심을 갈구한 자신이 만든 존재일 뿐이라고. 따라서 6명을 죽인 자신은 유죄라고. 이 결정의 대가로 아서는 사랑도, 목숨도 잃는다. 아서가 아닌 조커를 사랑했던 리는 그를 떠나고, 병동에 있던 또 다른 조커의 지지자는 배신감을 이기지 못해 아서를 살해한다. 이러한 전개를 보면 <조커> 2부작이 사실은 <아서 플렉>이라는 한 작품을 구성한 게 아닌가 싶다.
조커는 죽지 않았다
그런데 조커와 아서 플렉을 분리시킨 <조커: 폴리 아 되>의 선택에는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더 있다. 결말을 곱씹다 보면 아서와 달리 조커는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조커를 포기한 아서를 대하는 주변인의 태도가 그 방증이다. 리는 그의 고백을 거절한 뒤 떠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조커 역할을 할 다른 누군가를 찾으면 그만이다. 세상이 조커에게 열광하는 가운데, 꼭 아서가 조커여야 할 필요는 없다.
아서 살해범도 마찬가지다. 조커의 열렬한 지지자인 그에게 아서와 조커는 동일인이 아니다. 오히려 아서가 세상에서 사라져야 그들이 원하는 조커가 생명력을 유지한다. 그 둘이 별개라면 아서의 결심과는 무관하게 조커가 존재할 수 있으니까. 조커라는 불이 이미 붙은 상황에서 아서라는 불쏘시개는 더 이상 가치가 없는 셈이다. 아서가 없는 세상에서는 누군가가 조커를 자칭하며 배트맨과 싸울지도 모를 일이니까.
즉, 조커라는 광기가 이미 아서의 손을 떠난 가운데 아서 플렉은 죽어도 조커라는 상징과 이미지는 그를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았다. 이 대목에서 부제 '폴리 아 되'는 이중적으로 읽힌다. 아서와 리의 관계뿐만 아니라, 조커와 조커의 지지자 간의 유대감을 설명하는 제목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아서 플렉이 조커를 포기하는 이야기인데도 <조커>라는 제목이 어색하지 않다.
동생이 아니라 쌍둥이였던 속편
물론 <조커: 폴리 아 되>는 실망스러워도 이상하지 않은 영화다. 예고편과 포스터를 비롯한 마케팅의 초점이 전부 빌런 '조커'와 '할리퀸'에게 맞췄으니 관객 입장에서는 속았다는 느낄 수 있다. 전편에서 탄생한 '조커'의 활약만 암시해 놓고, 정작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기를 거부하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보여줬으니 당연한 일이다.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뮤지컬 시퀀스도 과하게 삽입되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편을 부정하는 작품이라며 <조커: 폴리 아 되>를 비난하는 것도 적절하지는 않다. 비록 아서는 조커가 아닌 채로 죽었지만, 조커라는 상징이 지닌 의미만큼은 아서의 비참한 결말로부터 여전히 살아남아 있으니까.
이에 더해 1편과 2편이 동떨어져 있다고 단정 짓기도 어렵다. 조커의 탄생을 아서의 시점에서 보여준 전편도, 아서의 몰락을 그려낸 속편도,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함으로부터 누구나 언제든 조커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 따라서 <조커: 폴리 아 되>는 형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생보다는, 형과 동생이 대등하게 겨루는 이란성 쌍둥이 속편에 가까워 보인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역할을 다 한 불쏘시개는 불 타 사라지기 마련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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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길거리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H
카를로스 파르도 로스|Carlos PARDO ROS
Spain|2022|68min|DCP|Color|Fiction|12|Asian Premiere
시놉시스
1969년 7월 12일, 산 페르민 축제의 황소 몰이 행사 도중 H는 황소에게 심장을 찔려 죽는다. 오늘, H의 유령들은 죽음을 앞둔 육신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바로 그 거리에서 웃고, 마시고, 춤을 춘다.
프로그램 노트
“이 영화는 머리가 아닌 뱃속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카를로스 파르도 로스 감독이 영화를 소개하며 언급한 말이다. 영화는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개최되는 산 페르민 축제를 배경으로 감독의 삼촌인 H가 황소 돌진으로 사망한 사건을 조사하는 내용이다. 가족 구성원이 사건을 추적하는 전형적인 다큐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전혀 다른 상황을 배치해 감독의 소개말이 사실로 증명됨을 보여준다. H는 기억의 공백을 채우는 영화이자,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교차하며 서로의 공간을 완성하는 미스터리에 대한 탐구이다. 다양한 스토리텔링과 영화의 형식이 쌓여 마침내 우리는 하나의 삶과 밤의 끝으로 향하는 진정한 탐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문성경)
우주 속을 부유하듯, 길거리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듯
H는 황소 몰이 행사 중 갑자기 돌진한 황소에게 심장을 찔려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런 H의 영혼을 찾아 축제의 현장으로, 취한 사람들이 잔뜩 있는 길거리로 나선다. 이 영화는 단순히 줄거리를 보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삼촌의 죽음에 대해 파헤치는 작품이 아니다.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우리는 주인공을 따라 우주 속을 부유하듯 조금은 붕 뜬 느낌으로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술 취한 사람들이 잔뜩 있는 축제 현장의 길거리를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 단순히 축제 속의 사람들을 지켜 보는 것을 넘어서서 관객인 '내'가 이 축제의 현장에 있는 느낌을 준다. 시각적인 것을 넘어서 체험적인 작품이다. 영화제에서 먼저 접할 수 있는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영화이다.
시놉시스에서는 H의 유령들이 죽음을 앞둔 육신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축제의 광란의 현장에서 웃고, 마시고, 춤을 춘다며 이 작품을 소개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폭력적이다. 왜냐면, 그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의 몸을 벗어나기 위한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H> 상영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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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응과 반항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자연인 되기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은 이런저런 사연으로 속세를 떠난 사람(대부분은 남자인)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자연인으로 살고 싶다는 로망을 가진 이들이 꽤 되는 것 같다.
자연인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프로그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자연인의 식사 장면이다. 무척 비위생적여 보여도 자연인들은 말 그대로 자연인이기에 속세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다. 집을 스스로 짓고 고칠 줄도 알아야 한다.
돈을 내면 밥을 주고, 돈을 내면 집이 지어져 있고, 문제가 생겼을 때도 돈을 내면 해결되는 곳이 도시다. 이 간단한 시스템 속에 우리는 옹기종기 붙어 산다.
수도권에 거주하는 인구는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 인구보다 많다. 가뜩이나 좁은 땅덩어리를 더 좁게 사용하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에 치이는 게 일이다. 아침 출근 시간에 9호선 급행열차를 타면 인간이 압축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실감한다. 어딜가나 사람이 쏟아진다.
나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하차 시 한무더기로 쏟아지는 사람들을 보며, 또 환승을 하기 위해 통로를 걷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그 무리의 일원이면서도 숨이 턱턱 막혔다. 강남역이든, 코엑스든, 홍대든, 서울 어디를 가도 사람이 가득하다. 군중 속에 섞이는 게 왠지 모르게 편안하면서도 불편하다.
그럴 때면 어디 조용한 데 숨어 있고 싶어진다. 도시에서 조용한 곳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카페에 가도, 도서관에 가도 사람이 가득하다. 자연 속에서 여유 있는 삶, 도시인의 마음에 작은 소망을 품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도시에 순응해서 살아간다.
자연 속에서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도시인들이 상상하는 자연은 인터넷이 되고, 전기가 들어오면서 차를 타고 나가면 멀지 않은 곳에 편의점이나 마트가 있고, 병원도 있고, 깨끗한 물이 나오는, 그러나 사람은 적고 조용한 곳에서의 삶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오지에도, 인터넷도, 전기도, 편의점도, 마트도 없는 곳에 사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한다. 마치 자연인처럼.
<여덟 개의 산>은 유럽판 '나는 자연인이다'를 떠올리게 한다.
순응과 반항
피에트로의 가족은 알프스 몬테로사에 집을 빌려 여름을 보낸다. 조용한 마을이다. 피에트로는 그곳에서 브루노를 만난다. 브루노는 마을에서 태어난 마지막 아이다.
원래는 몬테로사에도 아이들이 살았다. 그러나 도로가 뚫리면서, 인구가 유입되기는 커녕 죄다 도시로 나가버렸다. 브루노는 친척들과 함께 소젖을 짜고, 농사일을 돕는다. 학교를 다니지 않아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
피에트로는 브루노와 자연 속에서 뛰어 놀면서, 도시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한다. 도시에서 온 피에트로의 가족은 브루노를 도시에 데려가 공부시켰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물론 브루노의 친척들의 입장에서 브루노는 하나의 노동력이고, 브루노가 공부하러 가버리면 일 할 사람이 하나 없어지므로 반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브루노는 도시로 가고 싶어 한다. 처음으로 해 보는 반항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흔하다. 결국 개차반 부모에 의해 좌절되는 것또한.
피에트로의 아버지는 알프스의 모든 산을 오르고 싶다. 아들과 함께라면 더 좋겠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산에 가고 싶지도 않다. 열심히 돈 버는 아버지 덕에 꿈만 좇아 살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반항한다.
사실 이 선언은 '너는 반드시 아버지처럼 살게 되어 있다'는 마법의 주문이다. 어떤 이야기에서건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뛰쳐 나가는 아들은 반드시 아버지의 뒤를 밟는다.
아버지는 피에트로의 방황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느날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아버지는 피에트로에게 몬테로사에 있는 집 한 채를 유산으로 남긴다. 당황스럽게도, 브루노만 알고 있다.
귀엽던 아역들이 이렇게 되었다.
산꼭대기, 아주 외진 자리에 지어진 집이다. 이미 다 부서져서 형태도 없다. 아버지는 그곳에 집을 짓고 살고 싶어 했다. 인간들과 모두 단절되어, 오직 자연 속에 파묻힐 수 있는 곳.
서른이 넘어 다시 만나게 된 브루노와 피에트로는 조금 어색하다. 어릴 때 친구란 그런 법이다. 두 사람은 같이 집을 짓는다. 브루노는 집 짓는 기술자이고 피에트로는 딱히 쓸모는 없다. 그런 면에서 브루노는 몹시도 어른 같다.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남자다. 반면 피에트로는 여전히 직업도 없고 꿈도 없는 한량이다.
이들의 거리는 피에트로가 데리고 온 친구 중 한 명의 여자가 브루노와 함께 시골살이를 하게 되면서 점점 벌어진다. 두 사람은 함께 소젖을 짜고 치즈를 만든다. 시간이 흘러 아이도 생긴다. 여전히 애 같은 피에트로는 아버지가 등반했던 길을 따라 가며, 아버지의 흔적을 만난다.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사는 동안, 아버지는 브루노와 함께 산을 다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산, 깨달음, 그렇다면 당연히 티베트가 나온다. 피에트로는 아버지처럼 산을 오르는 사람이 된다. 현지에서 여자친구도 사귄다.
피에트로가 쓴 여행 에세이가 대박이 나면서, 피에트로도 떳떳하게, 나름 금의환향 식으로 몬테로사로 돌아온다. 그러나 운명이란 엇갈림의 연속이다.
피에트로가 잘나가게 되자 브루노가 삐걱거린다. 브루노는 오직 산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돈 계산이라든가, 속세의 일은 모조리 아내에게 맡겨 둔다. 날로 늘어가는 빚을 감당할 수 없어 아내는 딸과 함께 친정으로 떠난다. 브루노는 혼자가 되었다. 브루노를 돕고 싶지만, 브루노가 원하지 않는다.
수미산 아래에는 여덟 개의 산(아홉 개라고도 한다)이 있다. 수미산은 불교 세계관에서 세계의 중심이다. 피에트로는 산을 떠도는 사람이며 브루노는 산에 머무는 사람이다. 산에 머무는 사람과 산 주변을 떠도는 사람 중 누가 더 산을 잘 볼 수 있는가. 영화 대사 중 그런 질문이 있다.
브루노는 산을 '자연'이라 부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에게 삶은 자연이 아니라 삶이다. '자연'이란 도시의 기준에서 대상화된 경우가 많다. 자연이라는 휴식, 여유, 평화 따위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실제로 브루노가 사는 자연은 완전히 다르다.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며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하는 마음과 실제로 자연에 들어가서 의식주를 해결하며 사는 삶의 괴리 정도.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 순응하고 만다.
<여덟 개의 산>은 2022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사실 깨달음과 자연, 티베트, 이런 이야기들이 썩 반갑지 않다. 왜 다들 깨달음은 티베트에 가서 얻는가. 왜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서만 삶을 발견하는가.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모든 걸 이해하고야 마는가.
서양인의 눈에 '깨달음의 장', '신묘한 힘'으로 표현되는 오리엔탈리즘도 이제 세대교체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자연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관계맺기에 지친 경우가 많다. 가족간의 문제, 사회에서의 문제, 기타 등등. 사람에 질려서 떠나고 만다. 브루노는 산 또는 자연과 관계맺기에는 능했으나 인간관계에서는 서툴렀다.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저럴 거면 결혼은 왜 하고, 애는 왜 낳았대?' 소리가 절로 나오는, 딱 그런 유형이다.
피에트로의 시점에서 브루노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자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이다. 과연 이들이 나눈 게 우정이었을까, 하면 그 역시 답하기 어렵다. 브루노는 피에트로가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고향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무뚝뚝하고 약간 무섭기까지 한 아버지를 대신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약간은 우상화된다.
우상이 무너지고 나서야 피에트로는 앞으로 나아간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아버지 죽이기>에서처럼, 아버지를 죽여야 어른이 된다. 그렇다고 실제로 아버지를 죽이면 안 되고.
그런 면에서 브루노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순응한다. 브루노와 피에트로의 순응과 반항이 뒤죽박죽 앞으로 나아가는 형국이다.
어떻게 보면 산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런 것 같다. 내가 저 산을 한번 조져보겠다! 하는 마음으로 올라가기 시작해서, 제가 잘못했어요, 하며 내려오는 게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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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매우 길다. 무려 147분이나 된다. 집중력이 부족한 나는 개인적으로 2시간 넘는 영화를 늘 적폐라고 생각해 왔다. 이 영화를 2시간 27분 동안 집중해서 볼 수 있었던 건, 이 역시 개인적으로 <브로크백 마운틴>의 모먼트를 살짝 기대했기 때문. 그런 거 좋아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너무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답할 수 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풍경이 참 아름다운 영화다.
<여덟 개의 산>보다 <나는 자연인이다>를 더 많이 언급한 것 같다. 사실 좀, 알프스 버전 <나는 자연인이다> 극장판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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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개의 산 The Eight Mountains
개봉: 2023. 09. 20.
러닝타임: 147분
감독: 펠릭스 반 그뢰닝엔, 샤를로트 반더미르히
출연: 루카 마리넬리, 알레산드로 보르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에 초대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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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가감정이 들긴 하지만 다시 보고픈 아름다운 영화 <신데렐라>
신데렐라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지만 동화 속 이야기를 어떻게 실사화 했을지 궁금해서, 그리고 디즈니는 워낙 좋아하다보니 얼마나 화려할까 라는 기대감에 보기 시작한 영화 <신데렐라>. 그런데 정말 예뻤다. 현대 여성상에 대한 생각은 잠시 잊을 만큼 영상미가 굉장히 아름다웠던 작품이었다.
영화 <신데렐라> 시놉시스
“착한 마음과 용기를 가지렴. 꿈꾸던 일이 이루어질 거야.”
어렸을 적 어머니를 여읜 엘라는 아버지가 재혼한 미모의 새엄마와 그녀의 두 딸과 함께 살게 된다. 무역상인 엘라의 아버지마저 타지에서 돌아가시자 새엄마와 의붓언니들은 엘라에게 재투성이라는 뜻의 신데렐라라고 부르며 온갖 구박을 일삼는다.
착한 마음씨와 용기를 가지라는 엄마의 유언을 지켜나가던 엘라는 숲 속에서 왕궁의 견습생이라는 키트(왕자)를 만나 마침내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았다고 느끼게 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신데렐라>의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원작을 충실히 따르다
영화 <신데렐라>를 지금에야 봤을까? 후회가 됐던 순간이었다. 영화가 원작을 너무나도 잘 따라서 이렇게 불편해도 되나 싶으면서도 너무 예쁜 영상미에 넋을 놓고 보게 되는 이 모순된 양가감정이 영화를 보는 내내 들어서 굉장히 오묘했다.
차라리 이걸 개봉했던 2015년에 봤더라면, 아니 기술이 발전을 해서 초등학생 때 이 영화가 개봉했더라면 이 작품을 볼 때 불편한 감정이 없지 않았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신데렐라 이야기가 먹었던 장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재는 2021년이고 신데렐라의 컨셉은 잘못 다뤘다가가는 욕먹기 쉬상인 장르이기 때문에 이게 너무 예쁜데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현실에 안타까웠다.
다른 작품들은 원작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 해서 욕을 먹는데 신데렐라는 왜 하필 이런 때 실사화를 해서 원작을 충실히 따라도 답답한 감정을 들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정말 잘 만들었다. 이 양가감정 속에서도 신데렐라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것은 영화 자체는 정말 잘 만든 것이 틀림없다.
화려함으로 모든 것을 무마시키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 <신데렐라>를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읽으면서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을 정도로 구현을 너무나도 잘했기 때문이다. 디즈니가 작정이라도 한 듯이 2015년에 개봉을 하면서 원작을 충실히 따랐기에 현대 여성상과 너무나도 불합치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는지 그 지점들이 최대한 부각이 되지 않도록 화려함으로 관객들을 홀려놓았다.
사람이라면 저 신데렐라 드레스 한번쯤은 입어보고 싶다. 입혀주고 싶다 이 감정이 들게끔 표현을 해서 디즈니가 정말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면에 방점을 찍다
답답한 부분이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현대 사회에도 유효한 신데렐라의 감성이 있었다. 바로 내면을 가꿔야 한다는 것이다. 계모와 새언니, 신데렐라의 이항대립 구조 중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은 바로 외면과 내면 중 어디에 공을 들이느냐다. 아버지가 일을 하러 떠날 때 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계모와 새언니들은 자신의 외모를 치장할 소품들을 사와달라 부탁하지만 신데렐라는 첫 여행지에서 스치는 나뭇가지를 가져와달라 부탁한다. 그 나뭇가지를 들고 다니며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자신을 생각해달라 말한다.
이러한 신데렐라의 내면 가꾸기에 방점을 찍다보니 원작 신데렐라의 한계점이었던 백마 탄 왕자만을 기다리는 여성이라는 캐릭터에서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원작에서 도대체 왜 백마 탄 왕자는 많고 많은 여성 중에서 신데렐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나라는 질문에 명확히 답할 개연성이 부재했다면 영화 <신데렐라>에서는 내면 가꾸기에 포기를 하지 않았던 신데렐라의 심성을 보고 왕자가 그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사람은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 내면이 건강한 사람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영화 <신데렐라>가 수동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원작을 유지하면서도 현재에 시의성이 있는 주제로 방점을 찍으려 한 디즈니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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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소방관>이 개봉 2주 만에 1위를 탈환하며 예상외 선전을 펼쳐 화제입니다.
지난 주말인 13~15일, 개봉 첫 주말 관객 수(56만 명)보다 8만 7천여 명 증가한 65만 명을 불러들이며 1위를 기록했습니다. 누적 관객 수 170만 명을 달성한 <소방관>은 금주 내로 200만 명 관객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여러 기부 공약을 밝혀 화제가 된 <소방관>은 손익분기점 달성 시, 약 3억 원을 국립소방병원에 기부할 계획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과연 손익분기점인 250만 명까지 달성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한편, 북미에서는 <모아나 2>와 <위키드>가 굳건하게 순위를 지키며 순항 중인 가운데 스파이더맨의 숙적 크레이븐의 이야기를 다룬 <크레이븐 더 헌터>가 <글래디에이터 Ⅱ>를 밀어내고 3위에 올랐습니다.
애런 존슨 주연의 <크레이븐 더 헌터>는 소니의 스파이더맨 빌런 유니버스의 마지막 작품으로 주목받았지만, 1,1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다소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혹평을 받았던 소니의 <마담 웹>보다도 낮은 오프닝 스코어일 뿐만 아니라 1억 1,000만 달러의 제작비를 감안하면 대규모 손실이 예상됩니다.
<크레이븐 더 헌터>는 죽음의 문턱에서 맹수의 초인적인 힘을 얻고 살아 돌아온 크레이븐이 무자비한 복수의 길을 택하며 거침없는 사냥을 펼치는 액션 블록버스터이며, 국내에서는 2025년에 개봉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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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녀와 야수(1991) VS 미녀와 야수(2017)
정직한 실사화, 그리고 설득력을 주는 세세한 곁가지들
원작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실사화된 영화의 대부분은 원작과는 다소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부하다는 비평을 피하기 위해, 또는 현시대의 사회 통념에 부합하는 주제를 담기 위함 등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언제나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관객들은 시대상을 반영한 변질된 이야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저 과거의 아름다운 동화를 실사화했을 때의 결과물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이때 <미녀와 야수>는 의외로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를 변형하지 않고, 원본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사용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가진 큰 줄기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영화를 더 풍부하게 해 주는 곁가지들을 붙여나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예를 들어, 초반부에서는 세금을 낭비한다는 추가적인 설명과 이를 뒷받침하는 화려한 연회는 요정의 저주를 더 설득력 있게 만들어 줍니다. 또한 책을 좋아하는 벨이 책을 읽을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는, 세탁기를 발명해 사용하는 실사 영화만의 오리지널을 추가해 그녀의 직업과 성격을 훌륭하게 설명해 줍니다. 다만, 그 추가된 곁가지로 인해 영화의 러닝타임이 다소 증가하여 2시간 10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애니메이션이 실사 영화에 비해 부족한 건 절대 아닙니다. 실사화를 진행함에 있어 관객들이 시나리오에 어떠한 변경이 가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데에는 그 기본이 되는 스토리에 아쉬운 점은 있을지언정 부족한 부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진취적인 마인드를 가진 능동적인 여성의 이야기, 감초와 같은 시종들이 만들어 낸 여러 재밌는 이야기, 그리고 궁극적으로 괴물과 여성의 사랑에 빠진 이야기까지, 많은 이들이 재밌게 감상할 수 있고 몰입할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진 영화입니다. 이러한 애니메이션의 완성도 높은 이야기는 1시간 30분이란 짧은 시간 안에 담겨 있어 가볍게 즐기기에도 좋습니다. 괜히 디즈니 르네상스의 대표작 중 하나로 수없이 거론되는 애니메이션이 아닙니다!
관객들은 훌륭한 애니메이션을 그대로 실사화한 영화를 원할 뿐, 그리고 <미녀와 야수>는 그 요구를 충족시켰다
당찬 디즈니 프린세스의 시초, 그리고 캐릭터의 재해석은 이렇게 해야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는 근육질의 남성미 가득한 마초 개스톤은 벨을 제외한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하지만 작중의 행적을 보면 허세꾼에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데다가 비열하기까지 한,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꼴통마초입니다. 야수의 안티 테제로서 인간의 모습을 한 야수를 상징하는 캐릭터성은 잘 살렸을지언정 관객들의 호감은 사기 어려운 빌런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주인공 벨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항상 구원받아왔던 수동적인 존재에 벗어나 처음으로 상대방을 구원하는 최초의 여성입니다. 거기에 당차기까지 한, 디즈니의 여성 캐릭터가 적극적인 여성상으로 변하게 된 시조 격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등장인물입니다. 그리고 야수의 시종들, 르미에•콕스워스•미세스 팟과 같은 등장인물들은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과장된 표현을 무기로 가지고 있는 재치 있는 캐릭터성을 부여받았습니다. 거기에 각 캐릭터들이 변한 사물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적극 활용한 동작은 애니메이터들의 장인 정신을 느끼게끔 해 줍니다.
실사 영화는 애니메이션의 여러 등장인물들을 재해석하였습니다. 이때 원작의 노선을 그대로 따라간 실사 영화의 방향성에 알맞게 재해석된 캐릭터들은 과하게 변경되지 않았습니다. 과장된 표현들은 실사 영화에 알맞도록 적절하게 정적인 표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또한 캐릭터의 성격과,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된 데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데에 시간을 적절히 할애함으로써 캐릭터가 가진 매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재해석된 캐릭터들 중에서, 개스톤에 가해진 변화가 가장 인상 깊습니다. 루크 에반스가 연기한 개스톤은 마초적인 인상을 덜어내었고, 현실적인 잔인성을 추가하여 더 입체감 있는 빌런으로 재탄생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찌질함과 비호감 덩어리였던 르푸의 상당히 정상적인 인물로의 변화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 않는 새롭고 비중이 크지 않은 캐릭터에 PC를 적용하는 등의 변화를 시도하여 나쁘지 않은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애니메이션만이 표현 가능한 독특한 캐릭터들, 그리고 진정한 빌런으로 재탄생한 실사 영화의 개스톤
볼거리와 들을 거리, CG와 뮤지컬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야수와 벨이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씬이 있습니다. 크고 복잡한 샹들리에와 촛불의 빛들, 그리고 바닥에 반사되는 캐릭터들의 모습과 자연스러운 카메라 워킹까지, CG를 활용해 만들어 낸 명장면입니다. <미녀와 야수>는 CG의 역사에 족적을 남겼을뿐더러 이후 제작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적극적으로 CG를 도입하는 계기가 된 영화입니다. 그리고 뮤지컬 맛집인 디즈니답게, 수많은 명곡들을 탄생시킨 작품이기도 합니다. 'Belle', 'Gaston'과 같이 주인공들의 성격을 가사와 뮤지컬로 훌륭하게 그려낸 곡부터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를 관통하는 곡인 'Beauty and the Beast'까지 좋은 곡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은 64회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였으며, 더 나아가 'Beauty and the Beast'로 그 해 주제가상까지 수상하는 등 비평적으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실사 영화도 애니메이션 못지않게 기술적인 측면에 적지 않은 노력과 힘을 기울였습니다. 벨과 야수가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씬은 그동안의 기술 발전을 뽐내는 듯 더욱 화려하게 변경되어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하였습니다. 그리고 가구로 변해버린 야수의 시종들은 현실적인 모양새로 변하였으며, 이 때문에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그 현실성을 살리기 위한 섬세한 표현과 연출은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그 외에 실사 영화의 뮤지컬과 관련하여, 애니메이션의 뮤지컬에서 실사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였습니다. 그 대신 실사가 가진 장점을 살린 대규모 뮤지컬로 변환하는 등 적절한 각색을 통해 익숙한 맛과 새로운 맛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CG를 통한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그림과 아카데미 음악상과 주제가상을 동시에 수상한 명곡 대잔치, 그 뒤를 잇는 <미녀와 야수>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
<미녀와 야수>는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함에 있어 왕도를 걸어간 느낌입니다. 무리수를 던지지 않는 재해석, 쓸데없는 사족 없이 영화를 풍부하게 해 주는 부가적인 이야기들, 실사화를 통해 관객들이 원하는 시각적•청각적 쾌감의 선사 등등. 완벽한 영화라고는 할 수는 없을지라도 나쁘지 않은, 아름다운 영화라고 하기에는 손색없습니다. 실사화를 함에 있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미녀와 야수>만 따라가더라도 원작의 명성을 깎아먹지는 않을 텐데, 이후의 실사화 영화들의 만듦새를 보면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이후에 실사화된 영화들은 제발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하려 하지 말고, 원작의 이야기에만 충실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새로운 포대에 담아야 하는 법, 굳이 낡은 포대에 담으려다가 포대를 찢어먹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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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겨진 명작] 맞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밖에는 비가 내린다. 내가 앉은 카페 맞은편에는 '풍천장어 직판점'이 있다. 그리고 그 비가 오는 길거리에 한 남자 전화를 하며 걸어가고 있다. 저 사람은 누구와 통화하고 있을까? 조잘조잘 웃으며 환하게 웃는다. 마스크가 없는 얼굴에 미소가 더 잘 보인다. 왠지 사랑하는 사람과 통화하고 있을 것 같다. 그냥 친구랑 통화하는 거면 저렇게 환하게 웃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 카페에 앉아서 늘 먹는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내가 앉아 있는 자리의 또 옆에는 화분이 덩그러니 있다. 그 화분에 '사랑합니다'라는 문구가 써져있다.
으른들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초딩입맛인 나. 이 카페는 large 사이즈가 4천 원 언저리라서 부담 없이 오기 좋다. 사회복무요원의 신분 덕에 돈이 없어 경제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맞지만 여기는 내가 좋아하는 메뉴들을 크고 싸게 한다. 카페모카 류의 커피가 들어간 음료들도 비슷한 가격대지만 난 단 것만 판다. 딱 이런 것만 보면 청승맞은 이유가 있다. 적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와도 난 역시 단 게 좋고 군것질이 좋다. 내 연인이 마이구미를 좋아하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그걸 매일 먹으면 한 편으로 신기하다고 생각할 것 같다. 금세 비가 오는 밖의 모습이 보인다. 우산 한 개를 가지고 두 커플이 손 꼭 잡고 걸어가고 있다. 내 우산은 누가 갖다 줄까?라고 자신에게 반문한다. 확실한 건 뭔가 으-른의 취향을 가진 사람이 매력적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난 추적추적 비 맞으며 그냥 뛰어가야겠다. 2001년의 한국 어느 곳에서도 우산을 혼자 쓴 남자가 고민에 빠진 것 같다. 왓챠로 달려가 보자.
행복 회로 위이잉
우리의 주인공 봉수는 그냥 직장인이다. 작은 아파트 단지에서 직장을 다니는 주인공.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에 좀 질렸다. 어느덧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봉수. 봉수는 고민이 있다. 바로 결혼을 하는 친구들이다. 나는 왜 결혼을 못하는 걸까? 마음이 답답해진 봉수. 나 정도면 직장도 있고 성격도 괜찮아서 할 만하지 않나? 사실 아내는 고사하고 여자 친구도 없는 봉수지만 생각이 많아진다. 이러다 평생 혼자 사는 것 아닐까? 불안한 예감이 현실이 된다고 봉수의 불안은 점점 이뤄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우 이 끔찍한 이 기분.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데, 옆구리가 시린 느낌이 평소 때보다 더한 것 같다.
이 외로움을 친구에게 주절주절 터놓는 봉수. 어느 날 지하철을 탔는데 나만 빼고 사람들이 통화하는 꼴이 처량했다. 친구는 곧바로 답한다. “나한테 하지!” 눈치가 없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속을 몰라주는 것이 답답하다. 그래도 봉수의 삶에 다행인 것이 있다. 바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친구였다. 그래도 너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야. 내가 독신주의자인 너보다 먼저 할 테니까. 친구는 곧이어 대답한다. “너 민정이 알지? 걔 결혼한대.” “누구랑 해?” “나랑.” “그날 네가 사회 봐라” 알고 보니 기만자였다. 진짜 너무한다. 사회 보라는 말이 없었다면 비교적 덜 염장을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으아!!!!!! 나같이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왜 결혼을 못하는 거야? 세상은 역시 미스터리 투성이지만 그중 최고는 역시 결혼이거나 연애다. 나만 왜 못하는 걸까? 절규를 우아아아아악 내지르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봉수. 직장에 출근해서 일을 하는데, 한 여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해맑게 웃는 여자와 뭐든 해내는 남자의 사랑이야기
영화는 봉수와 원주의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한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우리가 아는 사랑 영화는 다양하게 있다. 사실 이 영화는 우리가 아는 맛이다. 귀여운 주인공들, 엇나가는 마음, 풋풋한 내면까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다. 근데 이 영화는 다른 작품들에 갖는 분명한 이점이 있다. 바로 타격감이다. 주인공들의 성격 묘사가 섬세한 느낌이다. 특정 장소 앞에서 내면을 털어놓는 장면, 형광등 가는 장면, 원주의 성격 묘사까지 영화는 파릇파릇한 장면으로 러닝타임을 채워놓았다. 그중 생각하는 최고의 풋풋함은 봉수가 마술을 배우는 장면이다. 현대 2022년으로 치면 MBTI쯤 될 마술. 사랑을 위해 마술을 배운다는 게 왠지 우리의 초등학생 시절이 떠올라 귀엽다. 근데 이런 자질구레한 소심함 설경구 배우가 캐릭터를 잘 살려서 귀여운 요소로 작용한다. 헤어스타일 + 코디 + 왠지 짠내 나는 성격 + 말투까지 실제로 이런 사람이 꽤나 많았을 것 같은 느낌이다.
또 다른 여주인공 원주의 캐릭터도 귀엽다. 원주는 보습 학교 선생님이다. 제법 따뜻한 선생님인 원주. 아이 한 명이 엉엉 울고 있어 ‘무슨 일이니’ 묻는다. 그리고 아이는 대답하다. “애들이 선생님 닮았다고 놀려요!" 예전에 기타리스트 조정치 님이 나와서 '같은 반 애들이 조정치 닮았다고 놀려요'라는 고민상담을 들어주던 짤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이 영화의 원주는 그것보단 유연하게 대처한다. 착한 원주. 우리가 아는 전도연 배우의 비주얼에 그런 캐릭터를 부여한 게 솔직히 납득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돌봐준다. 원주는 그렇게 내면이 깨끗한 사람이다. 영화는 이렇게 파릇파릇한 캐릭터들로 러닝타임을 끌고 간다.
풋풋한 이 느낌
두 주인공 설경구-전도연 배우의 이 작품 전작 <박하사탕>과 <해피엔드>가 생각난다. 광기가 폭발하던 <박하사탕>이나 불륜을 다뤘던 <해피엔드>까지 이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상큼 발랄한 모습이 보인다. 특히 전도연 배우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대척점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전도연이란 사람을 실제로 아는 건 아니지만 왠지 이 배우는 상상력으로만 연기를 하는 건 아닐 것 같다. 이런 상큼 발랄한 성격이 내면에 있을 것 같다. 근데 설경구 배우의 짠내 나는 모습은 정말 새롭다. <킹메이커>에서 보여준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나 <네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의 뒤틀린 내면까지 요즘 관객들은 모를법한 인물 연기가 재밌었다. 뭔가 왓챠라는 OTT의 순기능 같은 느낌?
있을 때 잘해라 인마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 얼굴에 또박또박 적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근데 그런 미래를 예지 하는 능력 따윈 없으니 사랑에 울고 웃는다. 이 울고 웃는 것에서 오는 난제는 역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일 것이다. 영화는 이 난제에 대한 묘사도 빼먹지 않았다. 막상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남자 주인공의 욕심은 사실 우리와 그렇게 차이가 있진 않다. 나도 주말마다 카페에서 궁상과 주접을 떨지만 '아무나랑 사귀어라'라고 하면 싫다. 좀 별 것 아닐 것 같은 상황과 처지지만 이런 구석구석 디테일한 인물 묘사는 강점으로 작용한다. 또 다른 미묘한 내면묘사는 '뒤돌아 본다'라는 행동이다. 내내 사랑스러운 톤과 분위기로 이끌어가지만 상실과 부재에 대한 인상적인 장면이 있으니 이 부분도 관객에게 강점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있을 때 잘해라. 그리고 현재의 네 삶을 사랑하라'라는 고루한 주제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떤 마음과 정서가 우리의 마음속에 남는 이유는 각본의 꼼꼼함 덕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장점은 엔딩이다. 두 주인공의 성격이 오롯이 담겨있는 이야기에 마음이 흐뭇해진다. 이래서 로맨스 영화를 보나 싶다.
깨알같이 담겨있어
어느 각도에서 보면 이 영화는 이야기 전개에 진전이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 잔잔하다!'라고 생각하실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소소한 디테일에서 오는 재미가 있다. 왠지 점점 이뻐지는 듯한 원주, 우산으로 시작한 첫 장면, 봉수의 찌질한 대사 톤까지 소박하고 순수한 사랑을 기대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이 영화가 좋은 대리만족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요즘 우리나라 영화에서 이런 작품들을 많이 못 본 것 같다. <연애 빠진 로맨스>같이 19금 코드가 적절히 들어있는 게 떠오르지 극장에서는 찾기 힘들었던 것 같다.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이제 안정세에 접어든 만큼 우리 한국영화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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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1] 사랑과 계급에 관한 이탈리아 영화 마틴 에덴 을 관람하고 왔어요!
이탈리아 영화 마틴 에덴 이 궁금하신 분들는 영상 참고 부탁드려요.
간단한 리뷰도 넣어두었습니다.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려요. ^~^
brunch.co.kr/@moviehouse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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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하이퍼나이프> 메인 예고편
“볼수록 닮았어요. 살짝 미친 것까지” 천재 뇌의학 교수 최덕희와 그에 의해 섀도우 닥터가 된 천재 제자 정세옥 디즈니+ 최초 오리지널 메디컬 스릴러 [하이퍼나이프] 3월 19일 단독 공개! 디즈니+를 월 4,950원으로 (연 59,400원) 1년 내내 무제한으로 즐겨보세요! (스탠다드 기준) (2025년 3월 31일 오후 3시 59분 할인 혜택 종료) #하이퍼나이프 #HyperKnife #박은빈 #설경구 #윤찬영 #박병은 #디즈니플러스 #DisneyPlu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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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안녕하세요> 메인 예고편
힐링 메이트가 전하는 특별한 마법? 김환희X유선X이순재 전 세대 마음 울릴 호연! [안녕하세요] 메인 예고편 대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