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06-08 13:24:26
완성도 높은 영화가 완성되는 지점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리뷰
SYNOPSIS.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의 가족이 사는 그들만의 꿈의 왕국 아우슈비츠.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가 정성스럽게 가꾼 꽃이 만발한 정원에는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집. 과연 악마는 다른 세상을 사는가?
POINT.
✔️ 일단 이 영화를 보세요. 시놉시스만 아시는 상태로 그냥 다짜고짜 보시기를 권합니다.
음향이 중요하니 돌비(메가박스), 사운드X(CGV) 등 음향을 강조한 상영관에서 보시면 좋습니다.
✔️ 이외의 다른 모든 이야기는, 영화를 다 보신 후에 찾아보셔요. 이 글 같은 리뷰는 물론, 평론가 해설 또한 영화를 보신 후에! 찾아보시는 편을 추천합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꼭 영화를 이미 보신 분만 읽어주세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종이 한 장을 꺼내든다. 길지 않은 한 마디지만, 손을 떨면서 하는 말에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주연을 맡은 산드라 휠러 배우가 눈물을 흘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shorts/D0v0WRqqVso
"... All our choices were made to reflect and confront us in the present, not to say 'look what they did then!', rather 'look what we do now!'. Our film shows where de-humanization leads at its worst. It shaped all about past and present. Right now we stand here as men who refuse their jewishness and the Halocaust being hijacked by an occupation which has led to conflict for so many innocent people... (applause)
... whether the victims of October the 7th in Israel or the ongoing attack on Gaza all the victims of this de-humanization, how do we resist? (applause)
Alexandra Bystroń-Kołdziejczyk, the girl who glows in the film as she did in life chose to, I dedicate this to her memory and her resistance. Thank you.
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 우리 자신을 반영하고 대면하게 합니다 '그때 그들이 한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보라는 의미죠. 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으로 치닫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점령에 오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박수)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희생자든 가자 지구에서 자행 중인 학살의 희생자든...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박수)
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 클로지치크, 영화에서 만큼이나 실제도 빛났던 소녀의 삶과 저항 정신에 이 상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이 발언은 이 영화를 완성했다.
아니, 이 영화는 나의 마음에 닿아서 완성되는 영화일 것이다.

소리는 당신을 상상하게 한다
영화는 종합 예술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오감, 아니 육감 중 가장 큰 부분을 시각에 의지한다. 철저하게 계산되어 고증된 공간과 의상, 내면에 깊은 두레박을 수도 없이 드리워 완성하는 배우의 연기, 그 장면 그 순간을 위한 깊은 노력 대부분이 시각에 의존한다. 영화 음악은 많은 경우 그 '시각'이 주는 감정을 보조하기 위해, 그 감정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영화는 다르다. 이 영화는 청각으로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시각이 보조한다. 붉고 불길하게 타오르는 꽃잎의 모양은 그 의미를 생각하기 이전에, 청각이 전달하는 불길한 느낌, 구역질 나는 느낌을 보조한다. 이건 대체 뭐지. 관객은 충격에 빠진다.

소리가 잔인한 이유는 당신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시각이 아무리 충격적인 양상을 들이대도 당신의 상상보다 잔인할 수는 없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카피는 사실 불가능한 카피이다. 언제나 각자의 상상이 각자의 최대치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당신이 상상하는 가장 최악의 아우슈비츠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성립시킨다. 간혹 들리는 비명 소리, 구타가 아닐까 싶은 소리, 총... 같은 느낌이 드는 소리, 동시에 우리의 식민지적 경험이 주는 그 총소리에 대한 의문, (일본군은 당시 총알이 아깝다며 한국과 중국에서 총 아닌 다양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리거나 총검으로 찌르거나... 그 행위는 그들에게 유희처럼 여겨졌고, 사체의 일부분을 손에 든 채 히죽히죽 웃는 사진도 여러 장 남아 있다. 그러다 보니 내겐 ‘수용소에서 총 소리가 이렇게 자주 들리나?’ 하는 의문이 들면서, 우리 선조들이 한반도 전역과 731부대에서 겪은 일들에 대한 괴로움과, 서방에서 아우슈비츠가 갖는 의미 대비 그 괴로움이 서술된 위치를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서 오는 자괴감... 나의 직접/간접 경험이 주는 가장 끔찍한 지옥도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파고든, 보는 내내 궁금했던, 마치 기계가 작동되는 듯한 소리. 마침내 그 소리의 정체가 밝혀질 때에, 한편으로는 안심한다. 역사는 언제나 눈을 치켜뜨고 있다. 비록 소리가 상상하게 한 최악의 지옥도가 우리 마음에 펼쳐지지만, 그들은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나일 가능성은 없을까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16p)"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단순히 아이히만을 비롯한 나치 일원들이 그저 일상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뜻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바라보며 그에게서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 곧 판단의 무능성(20p)"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를 무너뜨려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21p)"고, "전쟁을 일상적인 인간의 삶의 한 측면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임으로써(42p)" 우리 모두는 아이히만이 된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뼈 아픈 부분이, 이 영화에서도 지적된다. 과연 나는 영화 속 헤스 부부를 보며 단순히 그들을 절대악으로 지정하고 마음 편하게 영화관을 벗어날 수 있는가? 없다. 아이히만은 내 안에 있고, 헤스 부부 또한 그렇다. 17살 때부터 꿈꿔 온 이 삶을 포기할 수 없다는 헤트비히의 말은... 과연 이 사회에서 자기의 안위를 위해 '각자도생'해야 함을 배운 우리의 말과 얼마나 다른가?

수십 채나 되는 집을 소유하며 도시를 공허하게 만드는 사람들, '영끌'하는 자기만을 과하게 연민하며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법을 잊은 사람들, 소비로 존재를 대신하려는 사람들...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 재능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113p)"던 아이히만과 우리는 의외로 별로 다르지 않다. 이 영화 속, 아우슈비츠 코앞에서, 연기와 비명 소리와 (아마도 존재했을) 사람'이었던' 것들이 타는 냄새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꽃을 심고 집안을 가꾸는 헤스 부부... 내 집 마련의 꿈을 중요시하지만 사회의 모든 모순은 무시하는 우리와 과연 얼마나 다를까?
이 영화가 다른 홀로코스트 영화들과 다른 지점이 여기에 있다.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라는, 인류사에서 가장 끔찍하다고 평가되는 이 사건조차도, 단순히 그 사건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의 최대 희생자였던 유대인들은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어떤 행위를 가하고 있나. 그들 안에는 아이히만이 없는가?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따르면 힘러가, 즉 나치가 사용한 책략은 우리의 "동물적인 동정심"을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가, 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내 어깨에 놓인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 라고 살인자들은 말할 수 있게(174p)" 된 것이었다. 과연 작금의 유대인들은 여기서 얼마나 다른가. 자기 연민과 비뚤어진 자기애로 인류애를 대체하고, 타인의 상황에는 ‘누칼협’ 같은 소리나 들이대고 있는 우리는 또 얼마나 다른가.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게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님을, 그러므로 나와 무관하고 그냥 스크린 안에서만 일어나는 그런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나를 뒤집을 수밖에 없다. 시오니즘을 신봉하는 프로듀서 앞에서, 실제로 이후 그의 발언이 공식 입장과 무관하다고 선을 그은 프로듀서 앞에서, 다시 말해 커리어가 끊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손을 떨면서 1분 남짓의 짧은 말을 이어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나 아렌트가 같은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받으면서까지 아이히만의 이야기가 단순히 아이히만만의 문제가 아님을 지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 영화를 보고 그냥 '미학적으로 좋은 영화군...' 하고 단순하게 돌아설 수 없도록 나와 당신을 막는 힘 또한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어쩌면 그냥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그 갈망이 우리를 비인간적인 자리로 몰아넣을 수 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느니 배 부른 돼지가 되겠다는 결정이 얼마나 위험한가. 이 영화는 일상을 통해 보여준다. 밍크코트에 이어, 이미 죽었거나 그 근처에 이르렀을 여자의 립스틱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입술에 바르는 헤트비히의 모습에서도, 알고 지내던 유대인 여자가 끌려갔어도 그 커튼을 갖지 못한 것이나 아쉬워하는 대화에서도.
실제 헤트비히 헤스의 말에서 따왔다는 "너 같은 건 쥐도 새도 모르게 불에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과격한 대사를 빌려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좀 더 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형태의 '인간'이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를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이 영화는 소름 끼치게 보여준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기에
누군가는 시대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의외로 선택지가 있었다.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그걸 보여주는 존재는 한 소녀다. 감독에게 매우 의미 깊었던 듯한, 영화 속에도 열화상 카메라를 통해 의미심장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감독의 아카데미 소감에도 등장하는, 알렉산드라라는 인물이 있다. 알렉산드라 비스트론 콜로지치크. 그는 영화 속에서 유대인들을 위해, 유대인들이 일하는 곳을 밤에 몰래 찾아가 과일을 하나씩 박아 놓고 사라지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밤에 뛰어다니는 그곳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굳이 어설픈 직역을 하자면 "이득 지역"인데, "Interessengebiet"라는 독일어 단어를 그대로 옮긴 영어 단어이다. 나치가 아우슈비츠 인근을 부르던 단어로, 실제로 그들이 아우슈비츠 행정을 위해서라며 이득을 취하던 지역을 부르던 말이다. 1941년 나치는 폴란드 농민들의 땅을 빼앗고 이들을 몰아낸 다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동원하여 농사를 짓고 그 이득을 챙긴다. 그 과정에서 농민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교류를 막았음은 물론이다. 말발굽 아래 너무 쉽게 짓밟히던 과일을, 가방에 소중하게 담아 하나하나 배치해 두는 소녀의 존재는, 처음에는 '뭐지?' 싶게 낯선 이미지로 등장하지만 이내 그 존재 자체로 어둠 속의 빛임을 느낄 수 있다.

그토록 열심히 가꾸는 헤스 부부의 집에는 한 번도 직통으로 내리쬔 적 없는 햇살이, 소녀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집안으로는 부드럽고 강하게 들어온다. 실제로 알렉산드라가 2016년 9월 사망하기 직전까지 살았던 집에서 촬영했다는 장면에서, 소녀가 피아노로 연주한 곡은 실제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감자가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제목도 <햇살>. 심지어 옷과 자전거 또한 실제로 알렉산드라가 사용했던 물건이라니 그 의미가 한층 두텁게 느껴진다.
실제 알렉산드라는 1940년 나치가 폴란드에 침공하면서 아버지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두는 비극을 겪었고, 친구들과 함께 아우슈비츠 내부와 접점을 가지고 음식을 나르는 일을 했다고 한다. 1941년부터는 무장투쟁연맹의 일원으로 연락망을 담당하고, 1943년에는 나치에 의해 노역을 하면서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아우슈비츠에 음식을 전하는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헤스 작전'으로 소개된, 헝가리의 유대인을 '소거'하는 작전을 앞두고, 전출되었던 자리에서 다시 아우슈비츠에 돌아갈 수 있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통화하는 부부의 전화로 끝을 맺다시피 한다. 원하는 모든 바가 다 이루어졌지만 내려오면서 어쩐지 구토의 심경을 느끼는 루돌프의 모습이 영화의 사실상 마지막 장면인데, 이 장면은 매우 역겹다.
구토하지 못하면서도 구토 비슷한 것을 느끼는 그 모습이, 마치 가해자가 되어야만 했던 자신을 연민하는 액션처럼 느껴져서,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을 일으키는 것(178p)"이었다는 아이히만의 사고와 동일하게 느껴져서. 가스실을 만들고, "효율적인" 시체 처리법을 고안한 것이 "업적"이었던 그들의 사고방식. 자신의 알량한 삶을 위해 타인을 사지로 몰아넣고도, 그 방식과 체계와 행정이나 고민하고 있었던, 무뎌지고 마비되었던 두뇌들. 구토하지도 못하면서 어설픈 구토로 자신이 인간인 것처럼 호소하던, '비인간화'의 결과물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소개된, 매우 예외적인, 그래서 독특한 이야기 하나를 나눈다. 이 영화의 ‘헤스 작전' 회의 장면에서도 언급되듯 나치에 진작 동의했던 헝가리 정부와 달리, 끝까지 나치의 유대인 소탕에 반대한 나라가 있었다.
덴마크 국왕은 자신이 자진해서 유대인의 별을 달겠다고 했으며, (왕이 그렇게 말했는데도 굳이) 대신들은 혹시라도 왕이 반유대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자진 사퇴하겠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안전하게 운송'되었으며, 그 과정에 필요한 자금은 덴마크 부유층이 댔다. 결국 덴마크 출신의 유대인들 중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은 상대적으로 극소수였고, 이들은 대부분 순순히 문을 열어줄 만큼... 노쇠하였거나 가난에 치이느라 현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다시 말해 사회적 최약자들이었다. 이들을 위해 덴마크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란'을 피웠고, 그 결과 이들은 수용소에서도 남다른 지위를 누렸다고 한다.
읽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던 거짓말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럴 수 있었던 거였다. 이럴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도 있었다는 것. 어쩌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아우슈비츠와 '악의 평범성'을 타자의 위치에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아이히만이 가리키는 지점을 묻고, 그 지점과 싸울 의지가 있는지 묻는 것과도 같다. 이미 시체마저 썩어버린 과거의 나치에게 섀도복싱을 하는 대신, 진짜 내가 싸워야 할 상대에 맞설 마음이 있는지 묻는다. 우리 시대의 나치는 무엇이며, 그 앞에서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질문에 무거운 마음을 답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 답이 있는 곳이, 완성도 높은 이 영화가 완성되는 지점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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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3주 차, 최신 씨네 뉴스
<블루 재스민>, <캐롤> 등 자신만의 연기를 펼치며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연기를 그만둘 생각을 진지하게 하고 있다”고 밝혀, 전 세계 팬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가족들은 눈을 굴리지만,저는 정말 진심이에요. 제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많거든요”라고 설명했습니다.
현재 그는 후반 작업 중인 영화 두 편 외에 예정된 프로젝트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넷플릭스 영화 <올드 가드 2> 7월 3일 공개
2020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던 샤를리즈 테론 주연의 <올드 가드> 후속편이 드디어 공개일을 확정했습니다.
앞서 2022년 8월에 촬영을 마쳤지만, 자취를 감춰 궁금증을 자아냈던 <올드 가드 2>는오는 7월 3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공개될 예정이며 “강렬한 폭력 장면과 일부 언어 사용”으로
미국영화협회(MPA)로부터 청소년 관람불가(R)등급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지난해 샤를리즈 테론은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넷플릭스 내부의 경영진 교체로 인해 후반 작업이 갑작스럽게 중단됐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1편의 감독이었던 지나 프린스-바이스우드가 하자하고, 빅토리아 마호니 감독이 새롭게 메가폰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드라마 <무빙> 시즌 2 연출 바뀐다, <킹덤> 김성훈 감독 낙점
<킹덤>, <끝까지 간다> 등을 연출한 김성훈 감독이 디즈니+ 국내 최대 흥행작이었던 <무빙>의 새로운 시즌 연출자로 낙점되었습니다.
현재 <무빙> 시즌 2는 주요 배우들에게 진행 상황을 알리고,감독 교체 내용 전달 등 촬영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차례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강풀 작가는 현재 대본 작업에 몰두 중이며,오는 5월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가 2026년 3월 촬영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A24, 제시 아이젠버그 연출 신작 배급 예정
A24가 제시 아이젠버그의 세 번째 연출작의 배급 판권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2026년 극장 개봉 목표로 한 해당 영화는 뮤지컬 장르로, 줄리안 무어와 폴 지아마티가 주연을 맡았습니다.그 외 할리 베일리, 버나뎃 피터스, 몰릭 팬촐리 등이 출연 예정입니다.
전작인 <리얼 페인>과 마찬가지로 제시 아이젠버그도 작품에 출연하며, ‘지역 커뮤니티 극단’이라는 작은 무대를 배경으로,내성적인 여성이 예상치 못하게 오리지널 뮤지컬의 주연으로 캐스팅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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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포장지, 그렇지 못한 내용물
4★/10★
각본가의 자질과 연출가의 자질은 얼마나 같고 다를까? 영화 〈살수〉를 보고 든 생각이다.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곽정덕 감독은 〈백두산〉의 각본을 쓰고, 〈끝까지 간다〉를 각색한 인물이다. 이 두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갈릴 수 있다. 하지만 두 영화를 높게 평가하지 않더라도, 각각 상업성과 작품성 등의 측면에서 평가받은 지점이 있는 영화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살수〉는 조금 이상하다. 〈백두산〉은 상업영화의 스펙터클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획이었고, 〈끝까지 간다〉는 탄탄한 구성으로 장르적 완성도를 높인 영화였다. 그런데 〈살수〉에는 둘 중 그 무엇도 없다.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로 화려한 액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액션의 헐거움을 메울 탄탄한 스토리를 갖추지도 못했다. 몇몇 배우들이 연기력으로 고군분투하며 영화를 지탱할 뿐이다.
조선 최고의 살수 이난은 몸이 망가져 더는 격한 무공을 사용하지 말라는 조언을 듣는다. 그러던 중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초를 찾아 한 마을에 들렀다가, 자그만 주막을 운영하는 모자母子를 만나, 그들을 도우며 잠시 그 집에 머문다. 이 마을은 산적이 기승을 부리고, 고을의 행정 업무를 맡아 산적을 토벌해야 할 이방은 정작 산적과 내통하는 문제가 많은 마을이었다. 어쩌다 이들의 관계에 끼게 된 이난은 산적과 이방의 위협에 맞서 위기를 극복하고 받은 만큼 돌려주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이어간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살수〉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적어도 한 측면에서는 관객을 사로잡을 수도 있었을 영화다. 화려한 사극 액션, 코믹 요소, 전개의 탄탄함……. 고루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중 하나만 확실히 잘했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 것 같다. 지금처럼 여기저기에 발을 애매하게 걸치다 스스로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란 소리다. 이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인 연기로 영화를 끌고 가는 몇몇 배우에게는 기꺼이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포장에 비해 즐길 만한 요소가 너무도 부족한 영화라는 점은 못내 아쉽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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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이 기지개를 켜다 말고 갑자기 퇴근한다면
악이 도사리고 있을 때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형제 페드로(에지킬 로드리게스)와 지미(데미안 살로몬)이다. 살인사건을 추적하고 있던 형제. 맨 정신으로 볼 수 없는 시체가 여기저기서 보인다. 잔혹하게 살해된 시체에 경악하는 형제. 형제는 연이은 살인사건의 원인을 찾아보기로 한다. 멀리 가지 않아 도착한 결론. 마을 안에 악령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본거지로 찾아가 보기로 한다. 한 할머니의 집에 찾아간 형제. 노인은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악령에 씐 채로 썩어가고 있었다. 끔찍한 모습. 형제는 노인의 아들 우리엘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한다. 하지만 악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퇴장하지 않는다. 금기를 어기는 사람들 때문에 서서히 봉인이 풀린다. 서서히, 그리고 잔혹한 지옥도가 형제를 기다리고 있다.
진짜 도사리고 있을 때
이 영화에서 잔인한 장면을 활용하기 위해 사용된 연출방식은 흥미로웠다. 전면에 나타나는 것은 템포조절이었다. 구체적으로, 이 영화는 끔찍한 장면이 나타나는 데 있어 규칙이 없다. 카메라가 영화의 배경을 멀리서 찍는다. 시점쇼트로 형제의 관점이 영화의 카메라가 된다. 여기서 형제가 인식하는 대상을 보여주고 싶으면 사체를 그냥 카메라 안으로 들어오게 연출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래에서 위로 형제와 사체를 함께 보여준다. 이게 되게 별 거 아닌 연출 같아 보이지만 이 영화가 가진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 악을 대단하지 않게 묘사한다. 그런데 제목 그대로 인물들 근처에 도사리고 있다. 시선을 위에서 아래로 돌리기만 해도 악이 드러나고 있다는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영화가 처음으로 보여주는 비극에서도 이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초반부에 해당하는 장면인데, 카메라에 영화의 핵심인물 중 하나 루이스와 그의 아내, 그리고 동물이 있다. 동물을 살해하려는 루이스. 아내가 루이스를 만류한다. 이유는 금기를 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위 세 문장만 읽으면 영화가 ‘루이스가 금기를 어길 것인가’에 대한 서스펜스를 만들 거라고 예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예상을 세련되게 빗겨나가며 초장부터 기선을 제압한다. 구체적으로, 루이스가 선택하는 과정이 굉장히 짧았다. 그리고 그 이후 상황을 짧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테이크를 최소한으로 잡았다. 금기를 어길 것인가에 대한 딜레마가 영화 후반부에도 이어지는데 이것에 비하면 이 과정이 굉장히 짧다. 이 연출이 후반부의 서스펜스에 있어 ‘언제부턴가 도사린 악이 우리를 덮칠지도 모른다’라는 공포감을 주기 충분했다. 또 이 장면을 촬영하는 방식도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의 핵심인 ‘선을 넘는다’라는 점에 있어 거리를 두고 대상을 포착한 것이 종반부 다다르기에 충분한 초석이 됐다.
하지 말라는 걸 하는 편
영화의 핵심 테마는 금기다. 금기라는 테마가 두 가지 맥락에서 작동하고 있다. 첫째. 플롯에서 금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가 플롯을 끌고 가는 방식은 과제를 연이어서 주는 것이다. 악령이 씐 우리델을 어떻게 처리할 지부터 시작한다. 이 우리델을 둘러싸고 있는 금기가 있다. 이 금기에 금기를 물어 서서히 영화가 이야기의 품을 넓힌다. 이것은 영화가 장르적인 문법을 그대로 승계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영화가 2부로 넘어가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인물을 둘러싼 형제의 개인적 일화가 특별하다. 살짝 작위적인 것 같지만 일반적인 선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밀도 있는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인물은 심지어 영화 내에 다른 금기를 제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누군가의 입을 통해 금기가 제시된다. 한 가지만 빼고 말하는데, 이 인물이 그 빼먹은 하나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금기를 다룬다는 테마를 충실하게 이행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시각적으로도 영화가 금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꼼꼼했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열광할 것 같으면서도 '이거 별로야' 싶은 것이 같다. 바로 폭력성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호러영화가 있다. <쏘우> 시리즈,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큐브> 같은 영화다. 이 영화(내지는 시리즈)들의 공통점. 다 큰 성인이 나온다는 점이다. 이건 할리우드 내지는 전 세계의 영화시장이 룰처럼 지킨 것이다. 사실 굳이 이 룰 외의 무언가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윤리적으로 '굳이 아이들까지 폭력에 노출시킬 필요가 있을까' 싶은 것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이 <악이 도사리고 있을 때>는 이 금기를 널뛰기한다. 이게 영화의 전체적인 톤과 이질적이면 굉장히 비겁해 보이기 쉽다. 단순히 자극적인 톤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라면 감독이 미학적으로 뭘 고려했는지 전혀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 이 영화는 후반부 폭주하는 이미지와 플롯을 보여주기 위해 전초를 잘 깔았다. 그리고 앞 문단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줄거리부터 금기를 다뤘기 때문에 소모적이지 않다. 글쓴이가 이렇게 써도 이 영화를 보고 싶은 여러분은 쉽게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외로, 나름 창의적인(?) 잔혹함을 보여준다.
변화무쌍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리듬감이다. 구체적으로 이 영화는 보여주고 싶은 것을 힘주어 보여주지 않는다. <스마일> 같은 영화가 있다고 해보자. <스마일>은 저주에 걸린 사람들을 힘 빡 줘서 보여준다. 점프 스케어를 통해 사운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기괴한 웃음으로 저주의 이미지를 강화한다. 아니면 <곡성>처럼 템포를 빠르게 전달하는 것도 호러영화의 문법과도 같았다. 이 영화는 반대다. 금기를 넘는다는 테마에 적합하게, 하지만 내내 빠르거나 느리지 않게 유효타를 적절하게 먹인다. 영화가 중후반부에서 템포가 루즈해지기 전까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끌고 갔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디에서 자극적인 게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인물들을 덮치는 것이다. 끝까지 이야기를 몰입시키는 힘이 영화의 장면을 기획하는 데 있다는 점이 '이 영화는 노작이다'라는 생각이 들기 충분하다.
편의적으로 기대다
이 영화에 대해 가장 아쉽다고 느끼는 것. 주인공이다. 주인공 페드로는 공포영화의 클리셰 그 자체인 인물이다. 다른 인물들은 금기를 넘니 마니 하는데 이 인물은 굉장히 안정적으로 편안하게 간다. 대표적으로 중반부. 이 인물이 공간을 두 번 옮긴다. 첫 번째로 공간을 옮길 때 이 인물이 누군가와 함께 동행한다. 이 일행을 구성하는 방식이 굉장히 안일하다. 이 선택은 영화의 톤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영리한 것이 핵심인 영화에 인물은 바보 같은 선택을 하기 때문에. 두 번째. 이 두 번째 공간 이동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다(그렇게 감독이 의도했다). 변화무쌍한 리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 것과는 정반대로 이 장면에서 인물들에 감정이입할 토대가 빈약하다. 서서히 집중했다가 후반부의 광기로 이어져야 하는데, 중반부까지 쌓아놓은 플롯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이렇게 상투적으로 대처할 거라면 동생이 누굴 짝사랑했고, 이 인물이 현실적으로 처한 상황이 뭐인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모티브를 내내 반복해서 보여주면 뭐 하나? 결과적으로 주인공이 그걸 거부했는데.
또 이 영화에서 마무리 짓기 위해 마무리지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주인공의 가족과 관련된 부분이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이 주인공의 어머니는 다른 캐릭터들과는 다르게 이질적으로 행동한다. 가령 형제는 이 마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다. 어머니도 어렴풋이는 들었다. 그리고 예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악마의 존재에 알고 있을 것이다. 이걸 굳이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작위성을 덧붙이는 선택이었다. 뿐만 아니라 극후반부 이 인물의 행방을 보여주는 방식도 뒷심이 부족했다. 페드로가 굳이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데,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는 인과관계가 희미해서 대충 마무리지었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글쓴이가 한국 영화 팬이라는 것이 조금 얄궂게도 느껴졌다. 이 영화의 후반부는 특정 한국 영화에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국 팬들 입장에서는 이 영화의 후반부가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단점은 치명적이다. 아드레날린을 최대치로 분비하며 질주하던 플롯이 후반부가 되어 '에이 이거 그거 아닌가'로 끝나기 때문이다.
뭉뚱그린 악
전체적으로 흥미로웠지만 후반 마무리에서 힘이 빠졌다는 게 총평이다. 어떤 걸 생각하고 각본을 쓰고 이 영화를 위해 장르적인 문법을 어떻게 연구했는지 너무 잘 알 것 같다. 그리고 그걸 위해 파격적인 수위로 폭력을 묘사한 것도 나름 근거가 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후반부에 힘이 빠지다 못해 전면적으로 대치되는 선택을 해 중반부까지의 서스펜스가 얕아지는 선택지를 뒀다. 그래서 악이 도사린다는 게 설명하려다 말았다. 전지전능한 악의 존재가 중반부까지 계속 등장하다 갑자기 카메라를 반대편으로 돌렸으니 선택과 집중에 있어 실패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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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성애를 기댄 채 어긋나버린 디스토피아의 세계관
시대가 변할수록 더 극심해지는 혐오와 차별 역사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토착민의 삶을
디스토피아 세상에서 자신의 딸을 지키고자 하는 모성애를 통해
풀어간 SF 영화 나이트 레이더스 리뷰이자, 시사회 후기입니다.
실제 캐나다 토착민인 크리족 혼혈 다니스 고렛 감독의 첫 장편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토르 시리즈의 감독이자, 종종 배우로도 활동하는
뉴질랜드 출신의 타이카 와이티티가 제작으로 참여했습니다.
20세기 중반부터 모더니즘과 제국주의, 권위주의 등을 비판하는
여러 문화 콘텐츠 중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토착민들의 이야기는
꽤 많이 접할 수 있는 서사이지만, 감독 출신부터 알 수 있듯
지금 현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어두운 미래 사회에 빗대며
딸을 빼앗긴 엄마의 처절한 사투를 그립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나이트 레이더스 줄거리
하나의 국가, 하나의 언어, 하나의 국기
2043년 캐나다 북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세상을 지배하려는 독재국가 에머슨은
미성년 자녀들을 강제로 입교시켜 세뇌시키고 인간 병기로 길러내려
18세 미만의 자녀를 데리고 있으면 안 된다는 법까지 만듭니다.
니스카와 딸 와시즈는 도시 외곽의 우거진 숲에서 수시로 보내는 AI 드론의 정찰을 피해 살아가죠.
하지만, 식량을 구하던 중 와시즈가 덫에 걸려 큰 부상을 입게 되면서 이들의 상황도 바뀌게 됩니다.
당장 치료가 필요한 딸을 위해 도시에 함께 잠입하지만,
약을 구할 수 없음을 알게 된 니스카는 결국 자신의 딸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아카데미로 끌려가게 놔두는데...
예고편│ Trailer
원제 : Night Raiders│감독·각본 : 다니스 고렛│출연진 : 엘레 마이아 테일페데스, 브룩클린 르텍시에 하트, 알렉스 태런트 외 多
│장르 : SF, 드라마, 미스터리, 스릴러│상영 시간 : 101분│국가 : 캐나다, 뉴질랜드│등급 : 15세 관람가
│평점 : 로톤 토마토 신선도 84% 팝콘 47%, IMDB 5.1, 메타 스코어 63점│시청 가능 서비스 : 개봉일 2022년 3월 3일
# 나이트 레이더스 평점
모성애인가, 토착민의 비극인가
다른 나라를 침략해 땅을 점거하고 자신들의 법과 제도를 통해 원래 살아온 민족을 핍박하며
쫓아내는 제국주의의 모습이 에머슨이라는 국가를 통해 반영됩니다.
이는 인류가 반복해 온 하나의 역사로, 감독의 고향 캐나다뿐만 아니라 뉴질랜드, 호주, 남아메리카 등
모두 유사한 사건들이 이어져왔다 할 수 있고,
어쩌면 현재 우크라이나 사태 또한 이와 멀지 않음을 느낄 수 있죠.
가상의 국가 에머슨은 미성년자들을 강제로 입교시켜
“하나의 국가, 하나의 언어, 하나의 국기”라는 애국 강령을 반복해 외우게 하고,
외부와 철저히 격리시킨 채 이와 떨어진 사람들은 드론의 배급 식량 속 바이러스를 넣어
자신의 야욕을 채우려 합니다. 이것은 토착민들은 물론, 가족 간의 연결고리마저
배제한 채 하나의 역사로 통합하려는 독재국가의 모습을 띕니다.
다만 위에 언급한 주제의식을 끝까지 이어가기에는 인상적인 장르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크리족 출신이지만 그들과의 연결이 거의 전무한 상태로 예언을 기반해
별다른 갈등 없이 하나의 공동체를 생성하고
주 플롯은 딸을 찾기 위한 모성애를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는 극 중 등장인물 간의 관계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개연성이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또한 흐릿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감독이 과연 파괴된 공동체를 각기 다른 개인이 다시금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 의구심이 들게 합니다.
이 때문인지 마지막에 보여주는 와시즈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너무나 뜬금없게 다가왔죠.
그렇기에 제국주의나 독재에 의해 파괴되고 자본주의에 의해
무너지는 토착민 공동체의 미래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디스토피아 세상에서 딸을 지키려는 엄마의 사투인지
명확한 설정이 부족하다 느껴졌습니다.
현재에도 진행되는 문제점에 대한 새로운 시선, 그리고 의미를 확장하고
공유시키는 행위는 분명 의미가 있겠지만, 이를 전달함에 있어 명확함은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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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이 지워진 모두를 호명(號名)하는 영화 <갈매기>
[감독: 김미조 | 출연: 정애화, 이상희, 고서희, 김가빈, 김병춘 등 | 제작: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 제작지원: 롯데엔터테인먼트 | 배급/투자: ㈜영화사 진진 | 러닝타임: 74분 | 개봉: 2021년 7월 28일]
극의 초반부, 상견례장에 먼저 도착한 오복네 가족의 모습이 나온다. 그들이 앉아 있는 원형의 테이블은 가족을 떠나지 못하고 빙빙 맴돌아야만 하는 ‘오복’의 처지를 미리 일러두는 듯하다.
영화 <갈매기>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현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놀라운 성취를 거뒀다. 재개발에 반대하는 시장 상인 ‘오복’은 재개발 시위에 함께하는 사람들과 밤늦게 술을 마시다 성폭행을 당한다. 기묘하다. 흔히 재개발에 의해 삶의 터전이 빼앗길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약자로 도식화되는데 여기서는 그 안에서 또다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뉜다. 이는 젠더적 관점에서 보편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다. 여성은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착취와 젠더적 착취를 이중으로 겪는다. ‘오복’ 역시 영화에서 개발논리와 가부장제라는 이중의 착취구조를 온몸으로 견뎌내는데, 여성에게는 그의 삶이 보편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또한 <갈매기>가 성폭력 피해를 이야기하는 방식의 윤리성은 다른 영화와 차별화된 지점이다. 영화는 ‘오복’의 성폭력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10초도 되지 않는 블랙아웃 화면이 전부다. 관객은 블랙아웃 화면 이후의 전개를 통해서만 성폭력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오복’을 무기력한 피해자의 정형화된 모습으로 가두지 않는다. 평생을 가족에 헌신한 어머니 ‘오복’이 성폭력 피해를 당한 후 이를 오히려 자신을 돌보는 계기로 여기고 의연하게 결단을 하는 모습은 어머니 세대에 용기를 건넴과 동시에 성폭력 피해 경험자에 대한 보다 나은 영화적 묘사를 제시한다. 더욱이 가해자인 동료 상인 ‘기택’에게 별다른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다. 영화는 ‘기택’의 가해 행위와, 행위 이후 시장 상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오히려 기세등등한 모습만을 보여준다. 이는 그동안 성폭력 가해자에게 유독 너그러웠던 사회 인식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성범죄 이후를 바라보는 문제의식 역시 명확하다. ‘오복’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동료 상인들을 설득하고 회유한다. 그러나 증인으로 나서는 상인은 아무도 없고, 경찰도 ‘오복’에게 확실한 증거를 마련하라고 한다. 여기서 이상한 점을 느낀다. 다른 범죄의 경우 기소가 되면 가해자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유독 성범죄는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그렇게 수많은 성범죄 피해자들이 정당한 권리를 찾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의 삶까지 저버리지 않았던가. 또한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드러난다. 특히 남편이 “성범죄는 여자가 응해야만 성립된다. 그것이 진리다.”라는 말을 툭 뱉는데 이런 사회의 잘못된 인식이 그간 여성을 성범죄 피해로부터 가두는 역할을 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집을 나서는 첫째 딸에게 ‘오복’의 남편이 옥상에서 인사를 하는 장면. 탁 트인 꼭대기에서 웃으며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는 가장의 밑에는 사각형의 창문에 포획된 채 어두운 표정을 한 ‘오복’이 있다. 그리고 카메라는 첫째 딸의 시선으로 부모를 올려다보는데 이것은 종합적으로 가부장제 자체를 상징한다. 이밖에도 서늘하게 표현된 ‘오복’이 김치를 써는 장면. 롱테이크를 적극 활용하여 현실감을 높인 점 등 촬영에 공을 들인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은 ‘오복’이 가해자의 가게 앞에서 ‘나는 주오복 입니다’라고 적힌 호소문 피켓을 들고 1인시위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자신의 실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생각나는 엔딩이다. 삶의 한 축인 경제 공동체 ‘수산시장’과 그가 헌신으로 일군 ‘가족’이라는 운명 공동체 속에서 '오복'은 저마다의 필요에 의해 취해지고, 내팽개쳐졌다. 그러나 그는 이제 '나'를 챙기기 시작한다. 육지를 빙빙 돌던 갈매기 '오복'이 기어코 바다를 향하는 모습은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던 모두를 향한 생생한 호명(號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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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에 찾아온 낭만
현실에 찾아온 낭만
영화 <어느 멋진 아침> 리뷰
감독] 미아 한센 로브
출연] 레아 세두, 파스칼 그레고리, 멜빌 푸포, 니콜 가르시아, 카밀 르방 마르탱
시놉시스] 여덟 살 난 딸, 투병 중인 아버지와 파리의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산드라는 어느 날 오랜 친구 클레망을 만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일과 가족, 사랑 사이에서 삶은 계속되고 때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하지만 아침은 여느 때와 같이 찬란하게 찾아온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영화 어느 멋진 아침에서 주인공 산드라의 직업이 산드라의 고단한 삶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산드라의 직업은 통역가다. 불어를 말하면 영어로, 영어를 말한면 불어로 양쪽이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창구를 열어주는 존재다. 현실 속에서도 산드라는 가족 사이에서 소통의 창구를 맡고 있다. 이혼한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서, 그리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버지와 학교를 다니는 딸 사이에서, 동생과 어머니 사이에서, 그리고 아버지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산드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기 보다는 다른 존재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이야기를 서로 전달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한다기 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그녀의 인생을 대변하듯 그녀의 직업도 통역가로 설정된 것이 인상 깊었다. 통역가 역시 자신의 의견이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말을 그대로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산드라는 본인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 혹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우연히 클레망이 다가오게 되고 클레망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사랑의 시작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클레망과의 첫 만남에서 자신의 인생에 자신의 감정보다 가족과의 관계에 더 중심을 두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로 인해 클레망과 더욱 가까워지면서 사랑이 시작된다.
낭만과 함께 맞는 어느 아침영화 어느 멋진 아침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인공 산드라의 의상이었다. 현실을 살아가는 산드라는 항상 청바지에 티를 입고 생활한다. 일적으로 중요할 때 정장을 입는 것을 빼고는 언제나 바지에 면티를 기본적으로 입고 있는데, 그런 그녀에게 클레망이 찾아오면서 그녀의 옷차림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그를 만나러 갈 때는 원색의 원피스나 치마를 입으며 현실과 다른 낭만을 즐기고 있음을 의상을 통해서 잘 보여준다. 여성으로서 클레망에게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산드라의 본능적인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영화 속에서 이를 완벽하게 구분함으로써 산드라의 고단한 현실과 클레망을 통해 만난 아름다운 낭만이 더욱 대치될 수 있도록 부각을 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 둘은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헤어지게 되고, 정리가 끝난 클레망은 다시 갑작스럽게 산드라를 찾아온다. 그렇게 산드라는 현실 속에서 클레망을 다시 만나게 되고, 이 때 거의 처음으로 클레망을 현실 속의 산드라 모습 그 자체로 만나러 가지 않았나 싶다. 평소의 청바지를 입고 클레망을 만난 산드라는 그렇게 현실 속에서 클레망을 만나면서 낭만과 현실이 조우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산드라는 자신의 딸과 사랑하는 클레망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현실과 낭만이 지속적으로 부딪히다가 그 낭만이 현실이 되어 찬란한 아침을 맞이하는 이 영화의 결말 덕분에 잔잔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 어느 멋진 아침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현실과 낭만이라는 이원적인 관계를 통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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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지만 청불입니다 / 로맨틱 청불 코미디 / 소프트한 19금 영화 / 박지현 최시원 성동일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동화지만 청불입니다"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 엔드크레딧 전에 1개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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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빅토리> 메인 예고편
응원력 만렙 (ง •̀_•́)ง 보기만 해도 에너지 충전되는 [빅토리] 메인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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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노매드랜드> 메인 예고편
전 세계가 동행한 가슴 벅찬 여정, 길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삶도 계속된다.
모든 것이 무너진 후에야 비로소 열리는 새로운 길 그리고 희망경제적 붕괴로 도시 전체가 무너진 후 홀로 남겨진 ‘펀’.(프란시스 맥도맨드)
추억이 깃든 도시를 떠나 작은 밴과 함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 위의 세상으로 떠난다.
그 곳에서 ‘펀’은 각자의 사연을 가진 노매드들을 만나게 되고,
광활한 자연과 길 위에서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그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다시 살아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