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08-29 09:04:57
한국이 싫어서 | 철 지난 신조어를 생생하게 되살리다
<한국이 싫어서>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한 20대 후반 '계나'(고아성). 필사적으로 일해서 학자금 대출도 다 갚고, 남자친구 '지명'(김우겸)과의 미래도 계획 중이던 그녀에게 고민이 하나 생겼다. 바로 한국이 싫다는 것. 회사에서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고,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더 큰 꿈을 꾸지 못하는 그녀는 결국 결단을 내린다. 한국을 탈출하기로.
뉴질랜드로 건너 가 대학원 생활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계나. 어딘가 이상하면서도 믿음직한 친구 '재인'(주종혁)도 만나고, 자유롭게 연애도 하며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한국을 떠나 마침내 낙원에 도착한 듯 보이는 그녀.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 편은 여전히 헛헛하다. 이에 그녀는 또 한 번 여행길에 오른다.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
스크린 위에 펼쳐진 스토리텔링 저널리즘
스토리텔링 저널리즘. 근래 몇 년간 해외 언론에서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기사다. 주요 정보를 중요도 순서로 나열한 스트레이트 형식에서 벗어나 독자가 사건에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정보의 홍수인 21세기에 정보 전달만으로는 언론사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의 산물이기도 하다.
스토리텔링 기사의 핵심은 '보여주기'다. 사건을 장기간 관찰한 후 생동감 있는 글로써 보여주는 데에 집중한다. 당사자, 전문가 인터뷰만 따는 게 아니라 취재원의 일상을 같이 따라다니며 그 일상을 소설처럼 긴 흐름에 담는다. 독자 스스로 사건에 대해 판단할 수 있도록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즉, 글로 만드는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다. 자연히 분량이 상당하다. 뉴욕타임스의 스토리텔링 기사는 A4 30페이지를 훌쩍 넘는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자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한국이 싫어서>는 스토리텔링 기사 한 편을 스크린에 띄운 것 같은 작품이다. 소재는 새롭지 않다. '헬조선'이라는 말 자체가 2010년대 후반 이후로는 잘 안 쓰일뿐더러, 2030 청년의 고통은 여러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였으니까. 그런데도 <한국이 싫어서>는 흡입력이 강하다. 뻔하지만, 107분이 지루하지는 않다. 그 이유는 '생생함'에서 찾을 수 있다.
철저한 보여주기
사실 <한국이 싫어서>의 첫인상은 좋지 않다.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이 싫고, 한국에서는 못 살겠어서 한국을 떠난다는 계나의 첫 내레이션만 들어도 직설적이고, 상투적이기 때문. 인천에서 강남까지 출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까지만 보면 한국의 흔한 사회 고발 영화를 보는 듯하다. 한국이 서열, 계급 사회라고 비판하는 대목처럼 전체적인 분위기에 맞지 않게 튀어 나가는 순간도 종종 있다.
하지만 장건재 감독은 충실히 '보여주면서' 단점을 상쇄한다. 계나가 한국에서 버터내야 했던 일상의 여러 단면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다. 혜나와 엄마는 멸치 똥을 따면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를 나눈다. 참고 견디면 보상이 올 테 결혼해서 안정적인 삶을 꾸리라는 엄마. 미래에 보상이 있을 거라는 희망 자체가 없는 계나. 중간중간 멸치를 집어 먹는 현실적인 대화를 보다 보면 이 모녀의 충돌을 그저 남 일 취급할 수가 없다.
그 외에도 2030 세대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겪었을 에피소드가 쏟아진다. 매뉴얼대로 일하는 계나와 그녀가 융통성이 없다며 혼내는 직장 상사. 부유한 남자친구 가족과의 식사 후 서러움과 분노 때문에 눈물을 터뜨리는 계나. <한국이 싫어서>는 그녀의 삶을 다각도로 비추며 관객과의 교집합을 가능한 많이 만든다. 근래 한국 영화 중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장강명 작가가 기자 출신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오르기도 한다.
한국은 싫지만, 여전히 한국인이다
균형 감각도 인상적이다. 단순히 한국 사회를 비판하거나 헬조선과 탈한국을 긍정하며 사회 담론을 일차원적이고 단편적으로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더 넓은 시점에서 헬조선이라는 현상을 조망한다. 어휘 너머에 있는 현실을 포착하려 애쓴다. 일례로 영화는 계나의 선택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지 않는다. 뉴질랜드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 사례를 거듭 보여준다.
계나의 정착을 도운 일가족은 정작 본인들이 뉴질랜드에 적응하지 못한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낙원 같아 보이던 오클랜드에는 갑자기 지진이 발생한다. 인종차별을 비롯해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도 계나를 덮친다. 이처럼 카메라는 한국만 떠나면 행복할 것 같지만, 마냥 달콤하지는 않은 탈한국의 현실을 놓치지 않는다. 즉, 한국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발버둥 치는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 셈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서울 시퀀스가 무채색톤인 반면, 뉴질랜드 시퀀스는 더 포근하고, 따뜻하다. 그저 버티기 바쁜 서울과 달리, 뉴질랜드에서는 자기 삶을 돌아볼 여유가 있다. 따라서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이 싫지만, 한국인이라는 소속감을 놓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어디에도 닻을 내리지 못한 소속감이 어떤 의미인지를 반추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한국이 싫어서>는 주인공의 얼굴을 정면으로 자주 담는다. 대화를 나눌 때도, 영상 통화를 할 때도 인물의 표정과 인상을 보여주려 한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막걸리를 같이 마실 관계가 있는 반면, 타지에서는 아무리 행복해도 무언가를 놓친 그 얼굴을 대조하려고 노력한다. 이 지점에서 고아성은 유달리 빛난다. 그녀가 2030 세대 중 누군가의 삶을 자기 얼굴에 모두 녹여낸 것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진짜 탈한국과 행복
그 과정에서 <한국이 싫어서>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특히 한국을 떠났지만, 뉴질랜드에 끝내 정박하지 못한 계나를 통해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묻는다. 다른 한국인들처럼 대학원 학위를 딴 뒤 취업해서 영주권을 얻을 계획인 계나. 영화는 그 선택조차 정답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지명만 하더라도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대학원을 포기한다. 대신 아르바이트 중 흥미를 붙인 요리를 배워 셰프가 되기로 결정한다.
계나도 마찬가지다. 회계학 학위를 딴 그녀는 뉴질랜드를 떠난다. 뉴질랜드에서 계획한 삶조차도 행복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을 떠나서도 방황을 거듭하는 두 청년을 보다 보면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의 진의가 얼핏 보이기도 한다. '한국이 싫다'는 말은 길이 잘못됐다고 느꼈을 때, 선택한 길 위에서 행복할 수 없다고 직감했을 때, 길을 자유롭게 바꾸지 못하는 '한국이 싫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계나의 대학 동기인 '경윤'(박승현)이 오리지널 캐릭터로 추가된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 어찌 보면 그는 가장 한국적인 20대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 특히 계나가 공무원 시험 N수생인 경윤과 꿈속에서 나누는 대화가 가슴에 꽂힌다. 학원가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난 계나와 경윤. 그는 모두가 불안해하는 이곳에서 벗어나 전망이 탁 트인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한다. 이번 시험이 마지막 기회라고도 덧붙인다.
그런데 계나가 꿈속에서 그를 만날 때 그는 거듭된 불합격 때문에 이미 목숨을 끊은 상태다. 그는 한 번 선택한 경로가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쉽사리 돌리지 못하는 현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계나가 뉴질랜드에 정착하는 대신 떠나기로 선택한 것도 꿈속에서나마 그와 나눈 대화를 기억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칫 한없이 비관적으로 흐를 수 있는 현실 인식을 영화적으로나마 치유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위화감이 없다는 씁쓸함
사실 <한국이 싫어서>는 끝맛이 씁쓸한 영화다. 만듦새가 마냥 매끈하지는 않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은 일장일단이 있다. 계나의 일상을 극적으로 변모시키지만, 한편으로는 불친절하다. 정확한 시간대를 알려주다가 점차 건너뛰는 대목이 많아지기 때문. 벌린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이 싫어서>의 끝맛이 씁쓸한 진정한 이유는 완성도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영화의 원작이 10년 전이라는 사실 자체가 씁쓸하다. 이 작품은 시간대가 상당히 모호하다. 그나마 계나와 뉴질랜드에서 만나 친구가 트럼프와 김정은에 관해 대화한다는 점에서 2018년이나 19년 언저리로 추정할 수는 있다.
그런데 2024년이 배경이라 해도 영화 내용은 위화감이 없다. 굳이 '헬조선'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10년 전이나,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청년들이 체감하는 문제점과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2024년인데도 10년 전 신조어와 이야기에 공감하는 아이러니만으로도 씁쓸함이 혀끝까지 가득 맴돈다.
Acceptable 무난함
10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다는 비극을 마주하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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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럿 | '조정석'만 남은 어설픈 젠더 역전 코미디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숱한 대형 항공사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실력파 파일럿 '한정우'(조정석). 그는 유명 TV 예능에 게스트로 출연하고 각종 강연에 초청될 정도로 뜨거운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회식 자리에서 범한 한순간의 잘못 때문에 한정우는 해고당해 빚더미에 나앉고, 설상가상으로 아내와도 이혼한다.
항공사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도 불가능한 상황. 이에 한정우는 여동생 '한정미'(한선화)를 돌파구로 삼는다. 뷰티 크리에이터로 활동 중인 정미의 도움을 받아 여장을 하고, 한정미 신분으로 각종 서류를 위조해 파일럿으로 취업한 것. 하지만 그는 이내 또 한 번 난관에 부딪히고 만다. 동료 '윤슬기'(이주명)와는 친분을, 선배 '서현석'(신승호)과는 악연을 쌓는 사이 여장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질 위기에 빠진다.
면죄부를 놓친 코미디
코미디라는 장르는 면죄부를 하나 갖는다. 웃기면 그만이라는 것. 장르의 목적 자체가 기존 상식을 의도적으로 뒤틀어서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기 때문. 그래서 코미디 영화는 개연성이 중요하지 않다. 복선을 회수하지 못해도, 스토리텔링이 매끄럽지 않아도 충분히 웃기면 호평받는다. 2019년 <극한직업>을 시작으로 최근 개봉한 <핸섬가이즈>까지 웃음에만 집중한 코미디 영화가 사랑받은 트레드가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면죄부는 한순간 독이 든 성배로 바뀌기도 한다. 웃음이 나오지 않으면 유머 뒤에 숨은 단점들이 한순간 튀어나오기 때문. 관객들이 선웃음 후감동이라는 한국 코미디 영화 공식을 갈수록 외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장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도 공식을 답습한 <드림>으로는 100만 관객을 간신히 돌파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가장 보통의 연애>의 김한결 감독이 스웨덴 영화 <Cockpit>(2012)를 리메이크한 <파일럿>은 면죄부를 받기 어렵다. 이유는 명확하다. 코미디와 스토리가 따로 놀면서 웃겨야 할 부분이 안 웃기다. 특히 젠더 이슈를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는 깊이가 너무 얕은 나머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2024년 여름을 책임질 롯데 엔터테인먼트의 텐트폴 영화라기에는 실망스러운 지점이 많다.
웃기긴 하다
물론 <파일럿>이 전혀 안 웃기드면 거짓말이다. 여장한 한정우가 남자라는 사실을 들킬 뻔한 중반부는 더러 큰 웃음을 자아낸다. 엄마의 칠순잔치 전후로 한정우와 한정미 남매가 보여주는 티키타카가 대표적이다. 한정우가 서현석 면전에서 욕을 뱉거나, 클럽에서 진짜 여성인 줄 알고 집적대는 남자들을 제압하는 장면도 돋보인다. 코믹 연기와 트랜스젠더 연기 경험이 많은 조정석이라는 배우의 역량이 극대화된 결과물이다.
나름 근래 트렌드를 반영한 초반부의 빌드업도 꽤 안정적이다. 여장을 선택한 이유와 과정을 요즘 속도감으로 빠르게 밀어붙여서 몰입감을 높였다. 개연성이 부족하려는 순간에는 오히려 더 뻔뻔하게 코미디로 승부한다. 여동생으로 위장한 한정우가 면접장에서 궤변과 패기로 기어코 합격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성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할 때마다 장르적으로 먼저 선수를 치는 듯하다.
빠른 전개로 인한 빈틈도 열심히 채우려고 한다. <유 퀴즈 온 더 블럭> 같은 예능이나 다른 유튜브 크리에이터, 그리고 다른 가족들의 이야기를 덧붙여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그 덕분에 과장되거나 어색한 지점이 있어도 초중반부에는 적당히 수긍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일례로 한정우의 여장은 그다지 정교하지 않지만, 이 역시 코미디를 표방하는 시도로서 암묵적으로 용인되기에는 충분하다.
블랙 코미디로의 확장
이에 더해 한국 사회의 젠더 이슈를 다방면으로 비판하며 블랙 코미디 영역도 항로에 포함시킨다. 우선 <파일럿>은 여성의 관점에서 직장 내 성차별을 다룬다. '노정욱'(현봉식) 상무나 서현석 기장 등의 외모 품평이나 성희롱은 근무 중에도 프로페셔널한 영역을 벗어난 상황을 맞닥뜨리는 여성의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한정미가 된 한정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 역시 여성으로서 크고 작은 수모를 피하지 못한다.
그와 동시에 본질을 잃은 여성 우월주의나 페미니즘 마케팅도 풍자의 대상이다. 극 중 흑막으로 등장한 '노문영'(서재희) 이사는 회사 내 여성 파일럿 비중을 무조건 50%로 끌어올리는 역차별적 여성 할당제를 밀어붙인다. 또 직장 내 성희롱을 폭로한 제보자를 보호하는 대신 회사 이익을 위해 방패막이로 던져 버린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타인의 인권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방향성을 알 수 없는 풍자
하지만 <파일럿>은 블랙 코미디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추락하기 시작한다. 예민한 사회 이슈를 모호한 태도로 건드린 대가라고 볼 수도 있다. 한정우는 회식 자리에서 노정욱 상무의 성희롱적 발언을 적당히 무마하려다가 실언을 한다. '다들 본업에서 고생하는데도 이 정도 외모면 예쁜 편'이라는 뉘앙스의 말을 한 것. 회식에 참석했던 윤슬기가 이 발언을 녹음해 폭로하자 한정우는 노 상무와 함께 가해자로 몰려 해고된다.
문제는 한정우의 문제 발언에 대한 영화의 태도가 오락가락한다는 것. 일각에서는 그를 두둔하고 윤슬기의 행위를 비난하는 듯 보인다. 상황적 맥락을 고려하면 그의 발언은 성차별로 보기 어렵다거나 그가 감내해야 하는 대가가 너무 과하다는 식의 언급이 반복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오히려 윤슬기의 행동을 두둔한다. 한정우는 해당 발언을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윤슬기라는 캐릭터는 끝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즉, <파일럿>은 젠더 이슈에 대한 평가나 해석을 관객에게 떠맡기고 관망한다. 여장이라는 소재 특성상 젠더 이슈를 안 다룰 수는 없으니, 논란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셈이다. 하지만 이 선택은 역효과를 낸다. 블랙 코미디답지 않게 조심스러워하니 웃음 대신 도리어 이슈만 부각된다.
다른 블랙 코미디와 비교하면 <파일럿>의 실수는 더 명확하다. 일례로 애덤 맥케이 감독의 <바이스>나 <돈 룩 업>은 정치적으로 확실하게 한 쪽 입장을 정한 뒤에 예민한 주제를 다뤘다. 그 덕분에 관객은 영화의 관점에 동의하든 안 하든 코미디임을 인지한 채 마음 편히 웃을 수 있다. 하지만 웃음을 만들지 못한 <파일럿>의 '모두 까기'는 한국 사회 이슈를 용감하게 고발하는 풍자보다는 비겁한 회피 기동에 가까워 보인다.
도박수를 던질 배짱이 있었더라면
더 나아가 젠더 이슈를 다루는 방식 또한 아쉽다. '여자는 꽃이 아니다' 혹은 '왜 외모 칭찬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처럼 일차원적이고 교조적인 대사나 연출 때문에 흐름이 자주 깨진다. 분명 웃긴 한정우의 좌충우돌 에피소드가 단발적으로 불타올랐다가 꺼지기를 반복하는 이유다. 코미디와 풍자가 조화되지 않다 보니 역지사지로 여성들의 어려움에 공감한다는 한정우의 대사에도 힘이 실릴 수가 없다.
캐릭터 구축도 어설프다. 주인공 한정우를 제외하면 기억에 남을만한 캐릭터가 없다. 예를 들어 서현석은 운항 때마다 여성 파일럿에게 성적인 농담을 하고 집적대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아마 구시대적인 남성들의 인식을 과장해 꼬집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블랙 코미디적 요소가 유머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서현석이라는 인물은 부자연스럽고, 과하며, 불필요하다는 인상만 남긴다.
윤슬기 역시 생동감 있는 캐릭터로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양성평등 교육자료에서 볼법한 교과서적인 대사를 주로 내뱉는다. 그 결과 분명 한정우와 함께 각본의 중심에 있는 캐릭터인데도 불구하고, 단지 한정우의 원맨쇼를 받아주는 역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결말에서 두 인물의 갈등이 해결되거나 관계가 정리되지도 않았기에 문제가 더 크다.
차라리 윤슬기와 한정우의 악연에 주목하면 어땠을까 싶다. 여성이 된 한정우는 윤슬기와 친구가 되면서 자기 말의 무게감을 실감하고, 윤슬기는 한정우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을 이해하는 식으로. 그 과정에서 여성이 마주한 현실적 난관도, 그 여성을 악용하는 이들도 같은 선상에 두고 비판했다면 <파일럿>의 모두 까기는 더 효과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남은 건 조정석뿐
그나마 주인공 한정우의 서사는 안정적이다. 자기 커리어에만 몰두하던 한 사람이 역경 속에서 역지사지를 깨닫는 이야기이라서 보편적인 감성을 지녔다. 파일럿이라는 꿈에만 열중한 채 자기 아내가 수술했는지, 엄마가 칠순인지, 아들이 발레리노를 꿈꾸는 지조차 모르던 한정우. 그는 실직과 이혼, 여장 생활을 거치면서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법을 배워나간다.
하지만 한정우의 이야기만 기억에 남는 것은 코미디 영화로서 만족할만한 귀결이 아니다. 코미디 영화가 장르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지점을 기존의 감동 코드로 감춘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 이는 시작부터 끝까지 오롯이 웃음으로 승부를 보는 최근 한국 코미디 영화 트렌드와는 다소 동떨어진 전개다. 또 젠더 이슈를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결말을 보다 보면 그의 이야기가 진정으로 해피엔딩인지 의문이기도 하다.
결국 <파일럿>은 여름 영화에 걸맞은 수준으로 시원한 웃음을 선사하지도 못하고,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풍자하지도 못했다. 대다수 관객이 공감할 법한 보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스토리텔링을 들려주지도 못했다. 결국 조정석의 원맨(?)쇼만 남은 셈이다. 좋은 개봉시기를 선점한 텐트폴 영화치고 <파일럿>을 향한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Poor 형편없음
논란을 우회하려다가 장르의 본질마저 피해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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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사랑을 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보고] 그래, 난 자기를 사랑해. 근데 사랑하지 않아
날씨가 쌀쌀해지면 항상 끌리는 장르가 있다. 바로 로맨스다.
여름이 끝나가는 요즘 어김없이 제목에 ‘사랑’이란 단어가 들어간 제목을 고르던 중 ‘사랑’과 ‘최악’ 두 모순적인 단어들의 조합에 매료돼 이를 저절로 재생하게 됐다.
주인공 ‘율리예’(Yulriye)는 충동적이고 즉흥적이며 본인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인물이다. 작품은 율리에를 중심으로 코믹(Comic) 작가 ‘악셀’(Axel)과 카페 직원 ‘에이빈드’(Abind) 간의 사랑과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의사나 사진작가 등 직업을 바꿔 나가며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율리에지만 사랑의 감정에선 쉽사리 그렇지 못한다. 나는 초반 율리에의 이러한 행동의 원인으로 자기애 부족을 떠올렸다. 진정 사랑을 하기 위해선 ‘자기애’라는 토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선 사랑을 향한 어떤 노력도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자기애란 누군가에게 받고 싶어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자기 자신에게 준다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평소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았으면 하고 꿈꿨던 사랑을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나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나를 다른 사람이 받아들이고 긍정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닌가.
‘세상 최악의 인간(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이란 원제에선 20대 후반 여성의 심리묘사와 함께 새로운 이성에게 본능적으로 끌리는 미묘함을 포착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란 우리나라 개봉판 제목을 보면 ‘누구’란 인칭 대명사 덕분에 최악의 사랑의 범인을 찾으려고 했다. 영화 속에서 율리에는 타인과 스스로에게 여러 번 질문을 받는다. ‘너는 뭐 하고 싶은데?’ 혹은 ‘너가 좋아하는 게 뭐야?’와 같은 질문들을 받는 율리에는 ‘모르겠다’라고 답한다. 영화 내내 율리에는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이 없다.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 의대에 진학하고 사진 찍는 게 좋아 사진도 찍어본다. 하지만 어떤 것에서도 확신을 느끼지 못한다. 늘 새로운 것을 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곧 바뀐다. 이런 율리에의 모습을 통해 이 영화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묻는다.
관객 모두가 율리에가 영화 속에서 하는 결정과 행동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저 율리에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대학 입시의 재도전으로 인해 1학년 삶을 못 누렸다는 왠지 모르는 억울함과 아쉬움 때문에 이번 1학기를 1년같은 6개월을 보내기로 다짐했다. 이후 내가 여태 해보고 싶었던 △기자△영화 제작△창업 등 여태 관심있던 분야를 경험해봤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나는 무엇이 돼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계속 하고 있다. 즉 나도 여전히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아마도 조금씩 방향을 바꿔나가며 평생 고민하지 않을까.
율리에의 선택이 충동적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가 선택한 길에 으늑히 충실했다. 고민의 선택에 있어서 분명히 실패와 후회의 불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고 곧바로 선택하고 경험한다. 율리에도 나도 조금은 과감한 방식으로 방향을 틀어나가지만 결국 많은 경험과 도전으로 쌓아올린 시간들이 모두 자아를 찾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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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CFF 데일리] 잊지 못할 어느 나바호의 여름날
감독: 빌리 루터 (나바호, 호피, 라구나 푸에블로 아메리칸 원주민, 감독 겸 제작자)
출연진: Kier TALLMAN, Charlie HOGAN, Sarah NATANI, Martin SENSMEIER, Kahara HODGES
시놉시스: 애착 인형 이름은 제프 브리지스, 애정하는 밴드는 플리트우드 맥. 감수성 넘치는 베니와 똘똘한 사촌 돈의 특별한 우정
혹시 그런 적 있는가?
너무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어느날 돌연 조부모님의 손에 떠맡겨지거나 하는 일 말이다. 이것은 필자 개인이라든가 한국에서만 공감을 얻는 국지적인 경험은 아닐 것이다.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어머니의 어머니에게 맡겨지는 경험은 인류가 가부장제를 따르기 이전 시절에서부터 오래도록 전해져 내려왔을 것이므로.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의 대리로 가장 적합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또다른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더듬어 올라가면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할머니 집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엄마 없는 그곳은 마냥 낯설기만 하고, 그들의 살뜰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겉도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그런 순간. 엄마는 나를 버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고립된 것만 같고 막연한 불안감이 휩싸였던 어린 나의 모습 같은 것들. 명절에나 가끔 보는 할머니는 가족이면서도 가족이 아닌 것 같고, 나의 닮았으면서도 닮지 않은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필자에게는 할머니집에 맡겨지던 그 때의 기억이 어렴풋하면서도 강렬한 한 장면으로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아주 개인적인 방식으로 나의 뿌리와 마주치게 되는, 일종의 문화 충격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구 반대편, 1990년의 어느 나바호 땅에서도 이와 그리 동떨어지지 않은 경험담이 펼쳐진다.
1. 나바호의 길 잃은 어린 양
나바호(아메리카 원주민 중 미국 남서부에 뿌리를 둔 한 부족)의 후예인 베니는 어느날 황량한 나바호 들판에 다다른다. 베니는 정말이지 그런 시골 구석에는 머물고 싶지 않았지만 이혼을 앞두고 정신 없을 엄마에게는 오래 전 떠나온 고향 말고는 달리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할머니와 황량한 들판의 어느 낡은 집. 이 집 자식들(그러니까 삼촌과 이모들)은 죄다 고향으로부터 도망쳤다는데 유일하게 하나 남아 자리를 지킨 삼촌은 심술맞기만 하고 가끔 오는 이모는 영 소문이 나쁘다. 양들을 가두는 울타리는 허구한 날 망가진다. 부모님의 이혼 소식은 자꾸만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데, 하필 수중에는 샌디에고로 돌아갈 39달러가 없다.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아오던 땅에서 소년은 자꾸만 겉돈다.
바로 그 즈음에, 동병상련의 처지인 소녀가 나바호 집에 도착한다. 그의 이름은 '새벽(Dawn)', 어쩐지 가족들 사이에서는 본명보다도 '빵떡 소녀'라는 애칭으로 잘 알려진 사촌이다.
빵떡 소녀는 여느 십대들과는 다르다. 교도소에 간 삼촌을 대신 할머니의 품에서 자라다시피한 그는 나바호의 전통을 할머니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나바호 방식으로 머리를 길러 묶고 영어를 할 줄 알면서도 나바호 말을 고집하는 그에게서는 백인들의 삶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은 할머니의 완고함이 묻어난다.
록밴드와 파우와우(아메리칸 인디언의 연례 축제 행사)만큼이나 다른 삶을 살아온 베니와 새벽은 한솥밥을 먹으며 그 황량한 시골땅의 유일한 친구가 된다. 양을 잃어버리고 삼촌 차를 훔쳐타고, 그 양을 다시 되찾아와 울타리를 제대로 고치는 법을 알게 되는 사이, 베니는 미처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고향, 조상들의 삶에 대해 배운다.
그는 여전히 나바호어는 모르지만 양 목장 울타리를 고칠 줄 알고, 엉터리지라지만 전통적인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출 줄도 안다. 백인의 샴푸가 아니라 나바호의 방식으로 머리를 감고 길게 기른 머리에 지혜가 흐른다는 것도 알게 된 베니는 그 여름날 나바호에 갓 발을 디디던 베니와는 사뭇 다른 사람이다. 소년의 눈에 드리우던 방황의 그림자는 가시고 얼굴에는 미소가 꽃핀다. 마침내 뿌리 뻗을 곳이 어디인지 깨달은 사람처럼.
2. 어떤 문화의 전승
이 영화는 한 어린 소년이 그의 방황과 상처를 딛고 일어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그러한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는 나바호라는 생소한 공간을 배경으로 함으로써 색다름을 선사한다. 실제로 나바호이자 호피, 그리고 푸에블로의 후예인 감독 빌리 루터는 그의 유년 시절을 이 영화에 담아내고자 했다고 하는데,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진솔하게 담아낸 장면과 장면들이 백인들의 사회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던 아메리카 원주민, 그 중 나바호의 후손들의 삶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영화 속의 나바호들은 어쩐지 위태로워 보인다. 베니의 삼촌과 이모, 엄마에게 나바호는 그리운 고향땅이면서 도망치고 싶은 가난의 터전이다. 원 주인을 몰아내고 백인들이 세운 자본주의의 제국에서 나바호의 방식은 이질적이고 '돈이 안 된다.' 그래서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아주 오래전부터 그 곳에 살아온 자들의 후예이면서 바로 그 땅을 떠나 배회하는 방랑자가 되고, 그들은 원주민이면서 이민자와 크게 다르지 않는 삶을 산다.
나바호 문화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만 같던 베니가 외할머니와 사촌, 그리고 다른 친척들을 만남으로써 나바호들의 삶을 배워가는 이 이야기는 그래서 더 뜻깊다. 나바호들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전승될테니까. 할머니의 양탄자와 그에 담긴 이야기들을 전수 받은 손주가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 시절 나바호에서 여름날을 보낸 '베니'는 필름을 베틀 삼아 그 옛날의 이야기를 새겨넣었지 않나. 나바호 할머니가 들려주는 어느 고집스럽고 지혜로운 전통의 단편은 스크린과 스피커 너머로 오래도록 이어지리라. 바다 건너, 나바호가 아닌 또다른 손주들의 입을 통해서.
09-17(일)20:00 - 21:29
롯데시네마 은평 7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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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마지막 주 영화 한줄평] <갈매기>, <우리, 둘>
7월의 마지막 주를 맞아 씨네랩 크리에이터가 말하는 영화 두 편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갈매기>와 <우리, 둘>의 한줄 리뷰, 함께 만나볼까요?
1. <갈매기>
* 조금 더 자세한 리뷰를 보고 싶다면?
RABBITGUMI님 리뷰 - http://www.cinelab.co.kr/youtube.html?y_id=323
우두미님 리뷰 - https://cinelab.co.kr/insight_sub_details.html?i_id=1022
고태호님 리뷰 - https://cinelab.co.kr/insight_sub_details.html?i_id=1014
영직남님 리뷰 - http://www.cinelab.co.kr/youtube.html?y_id=321
드플레님 리뷰 - https://cinelab.co.kr/insight_sub_details.html?i_id=1030
공상가님 리뷰 - https://cinelab.co.kr/insight_sub_details.html?i_id=1039
코댕이님 리뷰 - http://www.cinelab.co.kr/sns.html?in_id=509
* 낯설지만 신선한, 다큐멘터리 같은 날 것의 힘이 느껴지는 웰메이드 독립영화 <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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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 둘>
* 조금 더 자세한 리뷰를 보고 싶다면?
rewr님 리뷰 - https://cinelab.co.kr/insight_sub_details.html?i_id=1046
popofilm님 리뷰 - https://cinelab.co.kr/insight_sub_details.html?i_id=1049
드플레님 리뷰 - https://cinelab.co.kr/insight_sub_details.html?i_id=1048
이정원님 리뷰 - https://cinelab.co.kr/insight_sub_details.html?i_id=1042
* 그 어떤 로맨스보다 몽환적인, 독창적이면서도 독특한 활력을 지닌 레즈비언 로맨스 <우리,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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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의 원인은 어디에 누구에게 있는가?<레이디 맥베스>
* 본 리뷰는 영화의 반전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레이디 맥베스 Lady Macbeth, 2016
영국 | 드라마 | 2017.08.03 개봉 | 청소년 관람불가 | 89분
감독: 윌리엄 올드로이드
비극의 원인은 어디에, 누구에게 있는가? <레이디 맥베스>
경건하게 울리는 찬송가와 고풍이 흘러넘치는 교회 안. 그런데 어린 신부의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가득하다. 자신의 결혼식임에도 불구하고 눈치 보기 바쁜 신부 캐서린. 세상 모든 이에게 축하받아야 할 결혼식장에서는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4면이 돌로 세워진 교회 안에서 캐서린이 느낄 수 있는 건 차디찬 냉기와 어딘가 모르게 공포스러운 바람소리뿐이다. 그래서 캐서린은 자꾸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려 애쓴다. 두 눈을 열심히 굴려가며 상황을 관찰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아줄 이는 없다. 오히려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남편의 옆모습에 철저한 무관심을 느끼고, 아무 감정 없이 입을 벌려가며 찬송가를 부르는 시아버지와 목사에게서 어떠한 인간적인 면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결혼 생활 내내 자신의 숨통을 쥐고 흔들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만다.
이 단 한 장면에서 <레이디 맥베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결정되어 버린다. 인물들의 비열하고 저속한 속내는 어김없이 카메라 사각틀에 드러나고, 진행될 사건들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란 강한 확신과 함께. 따라서 한동안 허공을 맴돌던 신부의 시선이 최종적으로 남편에게로 향할 때, 우린 단번에 이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날 것임을 예상한다.
출처: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남편의 무관심은 결혼식 첫날밤을 기점으로 경멸과 조롱으로 얼룩진다. 한 침대에 몸을 뉘어 함께 자지만, 그들은 부부가 아닌 남으로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남편은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방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캐서린에게 그대로 자신의 분노를 지배로 치환해 행사한다. 캐서린과 함께 사는 이유는 딱 하니다. 아내를 아버지가 돈 주고 사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캐서린에게 바라는 것도 딱 하나다. 조용히 집 안에서 기생하면서 아내의 본분을 지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아내의 본분은 '본인 아버지가 말하는 아내의 본분'을 말한다. 결국 남편에게 캐서린은 처음부터 존재 가치가 없는 존재였으며, 버릴 수 없어 마지못해 세워두는 마네킹이었다.
집 안에서 하녀(애나)의 시중을 받으며, 완벽하게 외면을 치장하고, 보기 좋은 인형으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캐서린. 그런 그녀 앞에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세바스찬이 등장한다. 창고 안에서 애나를 위에 매달아 놓고 성추행을 일삼는 세바스찬을 보고 캐서린은 욕망을 가감 없이 분출하는 그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 몸에 잔뜩 묻은 흙도 꾀죄죄한 얼굴도 땀 냄새도 전부 비극적인 운명을 살아야 하는 그녀에겐 금기를 깨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으로 이용된다. 그것을 캐서린은 '진정한 사랑'이라 스스로 칭하며 세바스찬에게 "내 마음을 의심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억압과 무관심, 조롱에서 벗어나는 수단일 뿐이다.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 답답한 현실에서 탈출하는, 자유를 품은 아름다운 관계로 인식했을지 모르나, 사실 캐서린의 행위는 오직 피지배자를 향한 잔인한 지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출처: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레이디 맥베스>의 긴장감과 재미는 캐서린의 살인보다도 그들을 조용히 따르는 두 하인, 애나와 세바스찬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애나는 자신을 짐승 취급한 주인(캐서린의 시아버지)이 캐서린이 쓴 독으로 죽어가는 것을 방관한다. 명백한 살인임을 알면서도 두려움에 떨 뿐, 주인을 구하지 않는다. 사실 애나 역시 하인의 본분을 다하라는 주인의 강압적 명령에 세뇌된 사람이었고, 당연히 인간적 대접은 받아 본 적 없었으며 그 결과 쌓이는 울분을 한 번도 속 시원하게 털어내지 못했다. 마치, 캐서린처럼 말이다. 따라서 그녀는 이후 일어나는 2건의 살인사건의 범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한다. 주인이 죽은 충격으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충분히 증언할 수 있었음에도, 심지어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이었음에도 애나는 역시 침묵한다.
밧줄에 묶인 채 짐승처럼 대저택에서 쫓겨나는 애나와 살려고 발버둥 치는 캐서린의 차이는 신분만 있지 않다. 그 신분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결정적 마음이 애나의 결말을 비극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본질까지 가장 낮은 신분으로 취급했다. 반항과 의심, 자기주장과 자기 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캐서린뿐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는 세바스찬 역시 다르지 않다. 그는 캐서린의 지위와 권력에 눈이 먼 하인일 뿐이다. 입어보지 못한 옷과 앉아보지 못한 의자와, 먹어보지 못한 음식에 흥분한 하인. 캐서린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자부했으나, 어림도 없었던 까닭이다. 그는 캐서린이 남편의 머리를 가차 없이 막대기로 내려친 후, 혼자 주인의 시신을 땅에 묻는다. 자기를 죽이려 했던 주인을, 사랑하는 애인이 대신 죽였을 때 느꼈던 희열과 평생 실종된 주인 자리에서 대신 부를 누리며 살 설렘에 사로잡힌 채 말이다. 살인을 방조하고, 오히려 범죄를 덮는 일을 도우면서, 죄책감과 죄의식에 괴로워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그도 자신을 하찮은 하인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주인의 명령에 복종해 따르는 일은 당연하다는 인식과 믿음이 본인의 순수하고도 귀한 인간성마저 훼손한 것이다. 영화는 애나와 세바스찬의 결정을, 캐서린의 결정과 붙여 의도적으로 더 대비해 보여준다. 마치, 무엇이 더 잔인하고 아픈지 결정하라는 듯, 세 사람의 결정이 담인 얼굴을 계속 클로즈업한다.
출처: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세바스찬의 설렘은 예상치 못한 변수의 등장으로 끝이 난다. 캐서린 남편의 혼외자(어린 아들)가 순식간에 대저택의 주인이 되자, 그는 자신이 누린 부가 원래 제 것이었던 것처럼 캐서린을 닦달한다. 닦달에서 끝나지 않고 사랑을 빌미로 그녀를 밀어낸다. 이에 캐서린은 자기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아이까지 죽여버리고 세바스찬과 사랑을 다시금 확인한다. 자, 그녀는 총 3번의 살인을 저질렀다. 자신을 억압하고 지배한 집 안에서, 자신을 억누를 위치에 있는 남성들의 목숨을 전부 단번에 끊었다. 첫 살인부터 계획적이었고, 일방적이었다. 애나는 첫 번째 살인을 함께했고 세바스찬은 나머지 2건의 살인을 동조했다. 그렇다면, 이 비극의 원인은 누구에게 있을까?
살인을 한 3명은 모두 살인 동기가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는 인물은 오직 캐서린뿐이다.
사랑을 확인했으나, 끝까지 자기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세바스찬은 캐서린과 함께 살인을 했음을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부에 선택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평생 누더기 옷을 입고, 괄시와 무시가 당연한 하인이었기에 세바스찬의 고백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고 지배자들의 발아래로 추락해 철저히 무시당한다. 잠시 잊고 있었던 캐서린의 지위가 불쑥 튀어나온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녀는 자기 지위가 가진 힘을 또 한 번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세바스찬의 배신에 악에 받친 눈으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애나와 세바스찬의 살인 공조로 사건을 종결 내버린다. 실어증에 걸린 애나에게서 어떠한 반전도 일어나지 않음을 확신한 채 말이다. 모두 시아버지와 남편이 말한 '가진 자의 본분'을 너무나 잘 습득한 덕이었다.
출처: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레이비 맥베스>의 희한한 매력은 영화 내내 캐서린만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는 점이다. 특히 애나와 세바스찬의 선택과 행동에 이상하리만큼 엄청난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 점은 꼭 생각해 봐야 한다. 세 사람은 모두 대저택 주인들에게서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오직 캐서린만 홀로 반항하고 반기를 들었고 살아남았다. 그녀만 비인간적인 상황들에 순응하지 않았고 깊은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가진 권력을 아주 요긴하게 사용했다. 그렇게 비극의 원인인 남성 우월주의 사회를 무너트렸다. 그것도 아주 소름 끼치고 잔인한 방식으로 말이다. 알몸으로 세워두고 홀로 잠을 자던 남편의 조롱과 사고파는 물건으로 취급했던 시아버지의 경멸적 태도가 캐서린을 끔찍한 괴물로 만들었고, 몰상식하고 비인간적인 상류층에게서 배운 괴기스럽고 소름 끼치는 지배력이, 그녀를 살인을 일삼아도 괜찮은 특권의식을 가진 괴물로 탄생시켰다.
<레이디 맥베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세 인물들이 전부 본인의 위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채 자기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나란 인간이 가진 고귀한 마음과 도덕적, 윤리적 아름다움이 사회에서 갖는 위치로 모두 파괴되는 순간을 맥없이 지켜보기만 했던 인물들. 따라서 소파에 앉아 가만히 관객을 응시하는 캐서린의 마지막 행보는 잊을 수 없다. 하인들마저 다 떠난 대저택에서 홀로 남아, 어떠한 후회도, 절망도 하고 있지 않음을 관객들에게까지 확인시키는 차갑고 매서운 그 표정.
그렇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을 힐끗대던, 두려움에 떠는 열일곱 소녀가 아니다.
앞으로도, 아닐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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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심한 밤, 다섯 대의 택시에서 벌어진 일
8★/10★
다섯 개의 도시 그리고 다섯 대의 택시. 야심한 밤, 각 택시에서는 특별한 일이 벌어지는 중이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어지는 영화 속 기묘한 사건들은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풍자적인 웃음을 자아낸다.
먼저 로스앤젤레스. 거친 느낌을 지닌 소녀 배우를 찾는 데 애를 먹고 있는 캐스팅 디렉터가 택시를 탄다. 캐스팅 문제로 여기저기 통화하며 골머리를 썩는 중, 내내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택시 기사가 보인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그녀는 제작자가 애타게 찾던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다. 캐스팅 디렉터는 드디어 적임자를 찾았단 안도감에 기사에게 캐스팅을 제안하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은 정비공이 되는 게 꿈이라며 이를 거절한다. 그리고 허탈한 웃음. 할리우드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는 대신 정비공의 꿈을 추구하는 게 누군가에게는 바보 같은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 택시 기사에게는 일확천금의 기회보다 자신의 꿈을 성실히 좇는 게 더 중요하다.
다음은 뉴욕이다. 택시가 잡히지 않아 애태우다 간신히 탑승한 택시 기사가 어딘가 이상하다. 영어도 할 줄 모르고, 심지어 운전도 제대로 할 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손님과 기사가 자리를 바꿔 목적지로 향한다. 승객은 동독에서 서커스 단원으로 일했다는 기사에게 친근감을 표하면서도 그를 다소 우습게 보는 듯한 기색도 보인다. 그러나 정작 마지막에 편안한 웃음을 짓는 건 영어도, 운전도 할 줄 모르는 뉴욕의 택시 기사다. 때로는 내면의 단단함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
매너가 엉망인 손님들을 태운 후 기분이 상한 상태인 파리의 택시 기사. 그의 택시에 시각장애인 여성이 탑승한다. 기사는 무지가 깃든 호기심으로 승객에게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할 수 없는지를 구체적으로 캐묻는다. 여자는 자신이 보지 못하는 대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의연하게 대답한다. 택시 기사는 믿지 못하는 눈치다. 그에게 시각장애인은 무언가를 ‘결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팡이에 의지해 안전하게 목적지로 걸어가는 그녀와 달리, 택시는 그녀를 내려준 후 곧바로 사고가 난다. 이제 보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네 번째 이야기는 장난스러운 수다쟁이가 주인공인데, 그는 로마에서 택시를 운전한다. 심심하던 차에 때마침 신부가 택시에 오른다. 택시 기사는 다짜고짜 고해성사를 하겠다며 자신이 호박에 자위한 일, 양과 수간했던 일, 동생의 아내와 부정한 일을 저질렀던 일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기사가 자기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끝없이 수다를 떠는 동안, 뒷자리의 신부는 약을 제때 먹지 못해 숨을 헐떡이다 이내 사망하고 만다. 수다스러운 택시 기사의 방정맞은 고해성사를 감당하지 못하는 신부. 보편적‧도덕적 권위의 담지자인 신부가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이 처연하면서도 우습다.
마지막 택시는 헬싱키에 있다. 만취한 친구를 포함한 세 명의 남자가 택시에 탄다. 그들은 술에 뻗은 친구에게 아주 딱한 일이 있었다며 기사에게 푸념을 늘어놓는다. 차가 망가지고,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딸이 임신하고, 아내에게 이혼 통보를 받아 술을 진탕 들이켠 후 쓰러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내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기사가 그 정도면 감당할 만한 슬픔이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승객들은 딸을 먼저 떠나보낸 기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울먹이고, 그의 고통과 자신의 현재를 견준 후 큰 위안을 얻는다. 정작 가장 큰 위로가 필요했던 남자는 내내 뻗어 있느라 아무 위로도 받지 못했지만 말이다. 마지막 이야기는 가장 필요한 이에게 가 닿지 못하는, 가장 필요한 이가 소외당하는 위로와 연대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영화 도입부에서 톰 웨이츠가 걸걸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Back in the good old world〉)의 가사처럼, 우리 삶은 기껏해야 무덤 위 꽃다발밖에 남기지 못한다. 덧없는 허무함으로 점철된 삶에도 기억할 만한 순간이 있다면, 아이러니와 따뜻함을 동시에 품어 엷은 미소를 자아내는 사건들, 즉 영화 〈지상의 밤〉이 보여주는 장면을 닮았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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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뛰어넘는 여우주연상 이 빛나는 우리의 엄마 [결말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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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포함/영화리뷰] "어퓨굿맨"(A Few Good Men, 1992)
"살아있을 때 봐야하는 영화들" : 명품영화 고품격 영화리뷰 시리즈각본: 아론 소킨
감독: 롭 라이너
출연: 톰 크루즈, 잭 니콜슨, 데미 무어, 케빈 베이컨#결말포함 #영화리뷰 #결말포함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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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고티> 메인 예고편
밑바닥부터 시작해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던 존 고티는 뉴욕 최고의 마피아 조직 감비노 패밀리 두목인 카를로 감비노의 조카를 유괴, 살해한 범인을 처리하며 정식 조직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점차 조직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던 그는 마침내 감비노 조직의 대부 자리에 오르며 미국 전역을 들썩이는 유명인사가 되지만, 자신뿐 아니라 조직과 가족들은 위험에 노출된다.
거대한 도시 뉴욕 위에서 군림한 절대권력의 마피아 대부
존 고티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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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댓글부대> 어그로 예고편
"기자님 기사 오보 아니었어요" "악플도 다 가짜예요" 손석구 X 김성철 X 김동휘 X 홍경 [댓글부대] 3월 27일 극장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