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5-21 14:30:50
명화를 오마주한 영화 9선
오마주한 장면은 다시 명장면으로 탄생한다
[오마주 | hommage]
프랑스어로 '존경'을 의미하는 단어
영화는 영화를 오마주하기도 하지만
명화에서 영감을 받거나 오마주 하기도 한답니다.
오마주한 장면은 다시 명장면으로 탄생하기도 하는데요.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 속 장면들
명화를 오마주한 영화 같이 만나보아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 코끼리
어바웃 슈미트 | 마라의 죽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넓은 지평선
더 셀 | 새벽
인히어런트 바이스 | 최후의 만찬
인셉션 | 올라가기와 내려가기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 어린 옥수수
문라이즈 킹덤 | to prince Edward island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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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툰 사랑을 알려줄 내 첫사랑
나만 그런가? 갑자기 아무 맥락도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가령 오늘 꿈의 내용은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에게 두들겨 맞은 것이다. 오늘 일을 하며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딱히 선생님에게 대들거나 한 적이 없어 맞을 일이 없었다. 그런 트라우마가 자체가 애초에 머릿속에 없었다. 또 꿈에서 맞은 정도의 수위는 거의 조선시대 곤장 때리기와 유사할 정도였다. 무슨 선생님의 부모님 욕을 한 게 아닌 한 그렇게 맞을 일 자체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맞은 이유도 '바닥에 오줌 싸서'였다. 난 바닥에 오줌을 싸 본 적이 없어서 역시 기억에 남지 않았다. 어째 꿈도 나같이 꾼다. 당연히 다들 그렇겠지만 내일 바닥에 오줌 싸서 곤장 맞는 꿈을 꿀 거라고 생각 못했다.
사실 이건 당연하다. 우리 보편적인 인류에게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란 없으니 필연적으로 앞날을 미리 내다볼 수 없다. 그래서 다들 '이랬으면 좋겠다' 식의 바람을 자주 남기곤 한다. 그런데 이거랑 미래를 예측해서 정확히 맞춘다는 건 완전 별개의 것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삶에 운명이라는 단어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렇게 다른 무언가가 한 교차로에서 만난다'라는 건 정말 아무리 봐도 놀랄 일이다. 학교생활 동안 크게 선생님들에게 대들지 않았던 내가 그런 꿈을 꾸는 것과 유사하다. 이렇게 좋은 사람과 기회가 나에게 오다니. 사실 올 만 해서 오는 건데 나를 지나가는 수많은 것들 사이에 그가 있는 게 너무나도 신기하게 보인다. 그런데 이런 특이한 경험이 사람의 인생에 딱 한 번만 오지 않는 것 같다. 난 오늘 그런 꿈을 꾸고 어느 날 느닷없이 교실 유리창을 망치로 두들기는 꿈을 꿀 수도 있다. 또 오늘 먹었던 자장면 vs볶음밥의 기로가 내일 모래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이게 된다고?'싶은 순간은 나이를 들면 들수록 더 많아지는 것 같다. 그럼 계속해서 고민해야 한다. 또 선택해야 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우리 중 한 명이 바닥에 오줌 쌀 확률과 유사한 사건이 일어난' 인간의 모습은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이 두 번 세 번 반복되는 딜레마에 관한 영화가 있다. 첫눈에 반한 한 남녀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첫사랑이 사라지고
여주인공 아사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길을 걷고 있었다. 쪼리 질질 끌며 길을 걷던 여름의 어느 날. 더벅머리의 한 남자가 물끄러미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낀다. 거짓말같이 시선이 이끌린 두 사람. 남자는 느닷없이 여자와 입을 맞춘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둘은 연인이 된다. 첫 번째 남자 친구의 이름은 바쿠다. 바쿠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자기 맘에 든다고 여자에게 입을 맞추는 게 뭐 보통 정적인 남자라면 불가능하긴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걸 떠나서 확실히 개성이 강한 영혼이었던 것 같다. 톡톡 튀는 매력으로 아사코의 마음을 훔친 바쿠. 사랑이 깊어진 둘은 한적한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사랑이 사라졌다. 아무 언질도 없이.
시간이 지났다. 아사코는 여전히 사랑의 상처가 남아있다. 그렇게 지난 일에 신음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 왠지 본 얼굴이다. 바쿠다. 일하다가 바쿠를 발견했다. 말을 걸어보는 아사코. 그런데 바쿠는 자기가 바쿠가 아니라고 한다. 바쿠를 똑 닮은 남자의 이름은 료헤이다. 얼굴은 똑같은데 아무튼 바쿠가 아니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바쿠와 료헤이는 얼굴만 똑같지 직업도 성격도 다르다. 그냥 바쿠가 다른 척한다기엔 360도 다른 사람이라 '아니구나' 싶기 충분하다. 그러나, 바쿠 닮은 사람을 봐서 안녕하고 끝나지 않는다. 아사코는 료헤이와도 사랑에 빠진다. 그러니까 여주인공은 얼굴은 같은데 성격과 직업은 딴판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때 겪는 아사코가 겪는 사랑이야기가 영화의 소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복을 반복하다
우리 인생은 사실 같은 순간의 반복이다. 4월의 어느 일요일에 이 글을 쓰는 나도 사실 저번 주의 반복이다. 또한 돈이 없는 지금 이 상황도 6개월 동안 반복되어 지금 7번째다. 이런 소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가지각색의 반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가 영화를 만든 것도 반복이다. 마스크 쓰고 돌아다니는 것도 반복의 일종이다.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반복되며 선택을 내려야 한다. <아사코>는 이 반복에 대해 다룬 영화다. 물론 정확하게 딱 딱 맞아떨어지는 반복인 건 아니다. 영화에서 조금씩만 변형된 채로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다. 극은 이 디테일을 굉장히 잘 살렸는데, 예를 들어 바쿠와의 데이트 장소였던 사진전이 료헤이와의 만남에서도 반복된다. 다른 것으로는 바쿠의 실종이다. 바쿠는 실종을 두 번 한다. 또 다음. 아사코도 연락을 끊고 료헤이와 거리를 둔다. 이것 역시 사랑에 실패하는 과정을 두 번 반복한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디테일을 꼼꼼히 구현해서 반복되는 인생의 과정을 묘사했다.
또 반대로 접근한 지점도 있다. 어떤 부분을 생략함으로써 오히려 삶의 반복을 구현반 부분도 있다. 구체적으로 바쿠와의 사랑이 빠지는 과정을 보면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보자마자 키스한다. 그냥 운명인 것이다. (사랑의 운명을 비유하듯 바쿠와 아사코가 오토바이 사고가 나는 신도 있다.) 반대로 료헤이와의 사랑은 썸을 타는 기간이 몇 번 있다.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근데 그 사랑에 빠졌던 근거가 뭐냐? 첫 번째 남자와 지금 두 번째가 비슷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수동적이었던 아사코의 연장선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계속해서 나라는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 때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를 조명한다. 이 과정에서 아사코가 조금씩 선택을 바꾸는데, 이 선택의 차이점에 대해 눈을 부릅뜨고 본다면 감상이 깊어질 것이다. 아마 극본을 쓴 감독도 이 부분에 대해 자기의 의견을 어느 정도 넣은 듯 보인다.
하마구치 류스케 월드
물론 하마구치 류스케의 필모그래피를 전부 다 본 건 아니다. 우리나라에 개봉했던 <해피 아워>, <드라이브 마이 카>, 또 이 <아사코>만 봤다. 그런데 이 세 작품을 보면 이 사람 취향이 느껴진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확실히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한다'급의 당연한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 감독의 접근법은 확실히 다르다. <해피 아워>에서는 제목에 해피가 있지만 318분 중 300분이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 인물들이 행복한 순간을 어떻게 꿈꾸냐? 에 대한 질문은 가장 마지막 대사에서 볼 수 있다. 불행한 건 너무 복잡해서 풀 수조차 없는데 행복감은 그 친구들끼리의 모임 하나로도 예상할 수 있다.
또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도 이런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제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드라이브 마이카>는 건조한 느낌이었다. 영화에서는 다카츠키, 미사키 둘과 가후쿠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하게 묘사된다. 같이 술도 먹고 차도 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미사키의 경우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미사키와의 관계성이 아예 안 나타나는 건 아니지만 극보다는 확실히 적다. 각색까지 하며 구상했던 하마구치 류스케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하마구치 류스케는 타인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왜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자아를 탐구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 내렸던 무언가가 나를 투영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실 중요한 건 '나 자신이 이 세상에 대해 어떻게 느끼느냐가 아닐까'라는 메시지가 세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다. 이 <아사코>에서도 아사코에서도 바쿠와의 사랑이 료헤이에게도 영향이 간다. <해피 아워>에서도 앞에서 썼듯 그냥 주인공들이 재밌어하는 일로 행복을 예상한다. <드라이브 마이카>는 그냥 대놓고 대사에도 나온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만 하고 마느냐? 아니다. 이걸 굉장히 신선하게 전개한다. <아사코> 역시 상상을 뛰어넘는 전개로 관계성과 자아에 대해 탐구하는 영화다.
영상미가 좋아요
이 영화 영상미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후반부에 강물을 비추는 신이 있는데 이때 그 무미건조한 카메라 렌즈와의 시너지가 기억에 남는다. 또 초반부 바쿠와 아사코의 사고 신에서도 넘어진 형태(?)를 잘 잡았다. 뭐 사실 영화 자체 비주얼도 괜찮았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신이라 할 수 있는 얼굴 클로즈업에서 전체적인 배경 색감이 괜찮았다. 촬영감독이 카메라 종류를 잘 고른 느낌이다. 뭐 단순히 미장센도 좋았지만 일단 두 남녀 주인공이 잘생겼다. 특히 카라타 에리카 진짜 미인이다.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가 여주인공의 미모였다. 수수하게 예쁜 사람 중 가장 최대치의 미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영화 밖에서 카라타 에리카와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너무 선남선녀라 좀 문제가 있긴 한 거 같지만 예쁜 건 예쁜 거다.(물론 남자 주인공 히가시데 마사히로도 잘생겼다.) 뭐 남자는 또 다른 문제가 있고 카라타 에리카는 복귀를 준비한다는 것 같은데 상처를 준 이들에게 충분히 뉘우쳤길 바란다. 좋은 작품으로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에도 관심이 많은 여배우로 알고 있는데 살짝 김이 새 버렸다. 데뷔작으로 칸에 입성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근데 이 배우의 잠재 가능성을 떠나서 연기는... ㅎㅎ..
어떤 걸 받아들일 것인가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는 2020년 4월이었다. 아직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던 과거. 더 큰일이 많았는데도 계속해서 머릿속을 웅웅 맴돌던 사건이 있었다. 난 어쩌면 성장하지 못한 걸까? 더 나은 선택지를 고르고 싶어서 내 자신을 더 성장시켜야 한다고 믿었는데, 이제까지의 일들이 다 허상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반문하던 때 이 영화를 봤다.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정말 뒤통수 한 대 후려치고 싶었던 과거의 나. 세상에서 내가 내 자신을 가장 싫어해야 면죄부가 생기는 것 같았다. 영화는 이런 나(내지는 우리)에게 단적으로 뾰족한 해결책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인생의 과정을 긍정한 느낌이다. 당신은 더 나아진 선택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막연하게 격려한 느낌이 들었다. 나같이 여러번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이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왓챠영화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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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요
어느덧 청춘이라고 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 내가 청춘을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고, 그냥 사람들이 ‘좋을 때네~’라고 말하는 그런 나이. 청춘이라는 단어에 걸맞다고 하는 그런 나이. 이게 청춘이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돈으로 살 수 없는 젊음을 갖고 있다는 생각에 괜스레 우쭐해지기도 한다. 아마 몇십 년이 지나 할머니의 나이가 되면, 목이 찢어져라 내 나이가 어때서를 열창하며 지금이 바로 청춘이라고 바득바득 우기고 있겠지. 청춘이 뭔지도 모르면서......
‘아프니까’ 청춘인 걸까? ‘아파야’ 청춘인 걸까?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나 자신을 보고 있자니 내게 있어 ‘청춘’은 너무나도 먼 나라 얘기 같다. 그리고 영화 ‘버닝’의 이창동 감독님은, 청년들의 삶에 ‘청춘’이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이기를 거부한다.
지금 젊은이들은 자기 부모세대보다 더 못살고 힘들어지는 최초의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세상은 발전해오고 앞으로 나갔지만, 더는 좋아질 것 같진 않죠. 이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힘들어지는 현실의 대상이 무엇인지 분명했다면, 지금은 무엇 때문에 자기 미래의 희망이 안 보이는지 찾기가 어렵죠. 그런 무력감과 분노를 품은 젊은이들이 일상에서 미스터리를 마주하는 내용입니다.- 이창동 감독
종수(유아인)의 마음이 너무나도 잘 이해돼 우울했다. 영화 속 현실이 지금의 현실과도 닮아있는 것 같아 괴로웠다. 형체가 없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갈망하는 불안한 젊은이들의 모습이 보였고, 그와 대비되어 미래가 보장된, 안락한 삶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이 둘의 차이로 인해 비참한 현실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종수의 말대로, 벤(스티븐 연)과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벌써부터 어린 나이에 좋은 차와, 좋은 집이 있을까. 종수는 삶을 살아가는 게 그렇게나 버거운데.
해미(전종서)는 아프리카에 갔다 온 얘기를 하며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냥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이후 해미는 세상 속에서 종적을 감춘다. 힘든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일까. 자신의 삶은, 아름다운 청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벤에게 있어 ‘비닐하우스 태우기’는 단순한 취미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은유를 내 식으로 해석해 보자면, 그 비닐하우스는 물질 그 자체라기보다는 ‘해미’였을 것이다. 해미로 대표되는 사람들. 벤이 그들에게 남긴 계층 의식에 의한 상처는, 그들을 울렸을 것이고 그렇게 그들이 세상 속에서 사라지도록 했을 것이다. 결국 종수는 벤을 살해하지만, 수많은 벤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영화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수수께끼와 같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감독의 의도와 비슷하게, 종수의 삶 역시 끝까지 수수께끼였을 것이라 생각하니 쓸쓸했다.
우리의 분노를 다 태우고 나면, 청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청춘’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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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을 바꾼 그 날의 기억 저 끝에 매듭진 모두의 역사
어떤 기억으로부터 멈춰버리는 시간이 있다. 누군가와 행복한 한때였거나, 숨어버리고 싶었던 부끄러운 감정, 슬프지만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한 다짐의 의지, 그 어떤 것이라도 좋다. 우리는 지워버릴 수 없을 감정과 경험을 모조리 쓸어 담아, 일 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는 숫자에 모아두었다. 여전히 시간은 흐른다. 두 개의 시간 사이 새롭게 만들어진 일들을 차곡히 보관해 둔 상자만이 이정표처럼 멈추어 서 있다. 그곳을 출발점 삼아 우리는 다시 숫자를 세고 기억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모두가 하나의 배만을 바라보던 그 날 우리는 또 하나의 상자를 만들었다. 4월에 멈춘 채 많은 일이 담기었던 기억의 날로부터 어느덧 7년이 지났다. 다큐멘터리 영화 〈당신의 사월〉은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세월호의 가족들로부터 시선을 돌려 이제 모두의 세월호가 된 기억에 관해 이야기한다. 아픔의 역사를 가장 개인적인 일상에서 끌어올린 영화는 모두가 경험한 서사의 얼개로 관객의 지난 7년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나 또한 누구도 피할 수 없던 7년 전 그날에 서 있던 자신을 다시 떠올려 보기로 했다.
4월 16일 인천항에서 제주로 가는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포털의 메인 뉴스가 나의 첫 기억이었다. 강의 내내 뉴스 페이지를 몇 번이고 새로 고치며 스마트폰만 들여다보았다. 동아리방의 친구들은 대부분 우려와 안타까움, 그리고 약간의 무관심을 첨가한 자신만의 기분을 안고 분 단위로 변하는 상황에 관해 몇 마디씩 거들었다. 방송사마다 특보를 내보냈고 같은 구도의 항공 사진과 실시간 영상을 틀어주었다. 한결같은 화면에도 은근히 달랐던 목소리 안에는 재난상황의 정확한 전달 대신 피해자의 보험료와 자극적인 인터뷰가 담겨있었다. 생긴 지 불과 3년밖에 안 된 종합편성채널의 존재는 여전히 적응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나를 더 무섭게 만들었던 건 전원 구조 자막을 띄운 지 몇 시간도 안 되어 그와 정반대의 소식을 접하고, 탑승자의 숫자가 늘어나고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그 어처구니없던 무지의 혼란, 그리고 점점 해가 지는데도 배 안에 사람들이 갇혀 있다는 뉴스가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SNS에서는 실시간 피드로 현 상황을 평가했고, 사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분노로 타임라인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배는 검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골든 타임, 민간 잠수부, 컨트롤 타워, 팽목항, 에어포켓. 낯선 단어들이 종일 눈과 귀를 맴돌았다. 누군가의 절규와 분노, 죽음의 절망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비현실적인 일상에 야속한 숫자 카운트만 늘어갔다. 악화일로에 치달은 현장을 바라보는 제삼자의 슬픔과 두려움은 어느새 분노와 무력감이 되었다. 국가와 정부는 신뢰를 잃었고 의심은 쌓여갔다. 죽어가는 이들 앞에서 애써 상황을 축소하고 몰아가려는 노골적인 행태에 평정심을 잃은 피해자들은 거리로 나왔다. 언론은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갔고, ‘피해자다움’이라는 가이드라인에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언제든지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국가가 손을 놓아버린 현실에 절박한 연대의 외침은 평범한 일상을 앗아간 이들을 반정부 종북 세력으로 몰아갔다. 이념적 갈등을 부추긴 이들은 세월호라는 단어에 수십 겹의 프레임을 덧씌웠고, 생존과 진실을 향한 필사적인 투쟁은 격화되었다. 누군가는 평범한 일상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다른 누군가는 가족을 잃고 불의한 사회에 저항하는 운동가가 되어 있었다. 그 악순환의 끝에는 곡기를 끊은 광화문광장의 부모를 향한 증오의 말과 폭식 투쟁. 정치적 공방에 휩쓸려 분열된 피해자들에 가해진 또 다른 상처가 있었다. 그때는 지겹다는 말이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터져 나온 혐오와 광기의 시대였다. 나는 누군가가 예상치 못한 비극으로 일상이 바뀌는 사회를 바라지 않는다. 삶의 이정표가 바뀌는 순간을 단지 우연과 운명으로 넘어가기에는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너무도 크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극과 전진은 너무도 자연스레 수레바퀴의 빗살처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불안과 공포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세월호 피해자의 공허한 외침을 들은 이 모두에게 앙금이 되었다. 시간은 지났고 누군가는 처벌을 받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치유가 아니란 사실은 자명했다. 분노는 곧 죄책감과 미안함이 되었고, 사람들은 광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국정농단 행위는 국가적 참사에서도 예외가 없었고 부당한 권력과 죽음을 끝내기 위해 시민들은 청와대로 향했다. 누구보다 큰 상처를 받았을 세월호 가족들은 시민들에게 도시락과 촛불을 건네며 감사와 응원을 보냈다. 비극으로 송두리째 바뀐 누군가의 삶을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이들은 함께 기억하고 싸우기로 했다. 100만 명이 모이고, 청와대가 움직였다. 거대하게 보였던 국가권력이 시민의 힘으로 끌려 내려진 순간이었다. 영화를 보며 2018년 추웠던 겨울 광장 앞을 다시 떠올렸다. 모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던 그 공간에는 시민들의 열기와 알 수 없는 해방감이 존재했다. 다 함께 같은 목소리를 냈던 그 연대를 떠올리면 외롭고 그리워졌다. 각자의 목소리가 얽혀 하나로 이어졌던 시간이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의 감정에서였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호의 오늘은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강력한 명령처럼 우리를 붙잡는다.
출처 | 다음 영화
7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진상규명은 진행 중이다. 세월호 가족들은 자신의 반대편에서 들었던 말을 고스란히 같은 쪽 사람들에게 듣고 있었다. 새로운 권력이 등장한 이후, 세월호 가족들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있던 자리에 이제는 공수가 바뀐 시민단체가 모여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뱉어내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민주주의는 태생적으로 모두에게 같은 크기의 힘을 쥐여준다. 그렇기에 타협과 관철의 시간은 길고 느리게 흘러간다. 변하는 듯 변하지 않는 현실을 직면한 그들에게 지난 4년은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아직 기억의 상자는 채워지고 있고, 그들의 삶도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에게 물었다. 때로는 뒤로 후퇴하고, 때로는 멈춰있는 진실과 시간 앞에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사회적 참사로 평범한 시민이 투사가 되었다.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우리는 촛불을 들었다. 모두의 마음에 깊이 들어온 아픈 사월은 자연스럽게 잊히고 있다. 고통을 망각하는 생물학적 반응을 이기는 해답은 끊임없이 기억하고 버티는 것이다. 광장에서 마이크를 잡았던 선생님은 매년 학교에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행사를 주최한다. 통인동이 열렸던 그 전율의 순간을 체감했던 카페 사장님은 손님에게 세월호 리본을 건네준다. 진도의 참극을 목전에서 바라본 어부는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텐트를 옮겨 놓았다. 각자의 방식대로 끈질기게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 당사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 사람의 아픔에 온전히 다다를 수 없다. 그래서 영화는 누구도 아닌 당신의 기억 속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모두의 기억이 된 사월의 세월호는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의 기억 속 매듭지어 놓은 세월호의 리본은 여전히 단단하게 묶여있을 것이다.
【7주기 기억추모행사】
* 온라인 행사 *
<4월의 기억마스크> 펀딩 : ~4/16
<사이버 추모관> 운영 : 4/5~4/30 (416remember.net)
<기억의 물결> SNS 프로필 '노란 리본' 달기 캠페인 : 4/1~4/30
* 오프라인 행사 *
<기억식> 안산+온라인 : 4/16
<세월호 기억관> 개관(광화문 광장) :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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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상실감을 극복하는 방법
가족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삶을 살아간다. 비록 조금 관점과 사상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대화와 이해심으로 그 방향을 맞춰나간다. 어쩌면 태어나면서 맺어지는 가족과의 관계는 끊어지기 어려운 관계이고 그런 점에서 좀 더 이해하려는 마음이 더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이에게 가족이 생기는 건 엄마의 뱃속에 자리한 순간부터다. 일방적으로 생성된 그 관계는 출산의 과정을 거쳐 현실 세계에서도 계속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삶을 이어나가다 보면 큰 상실감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 상실감은 가족 전체를 흔들고, 각자가 바라보는 방향을 흔들어 놓는다.
갑자기 찾아온 상실감은 어떤 경우에는 가족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그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게 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가족을 흩어놓기도 한다.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극복해 나가느냐가 그래서 중요하다. 갑자기 찾아온 상실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사실 정해져 있지 않다. 각자가 그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 직시하고, 또 어떤 방향으로 걸어 나갈지를 결정하고 나면 그 뒤에는 천천히 그 어려운 상황을 회복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은 더 단단해지고, 비록 다른 방향을 보았더라도 다른 곳에 서있던 가족을 이해하게 된다.
아이를 잃은 부부의 상실감과 회복에 대해 다루는 영화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출산 과정에서 아이를 잃은 부부와 그 주변 가족의 상실감과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특히 영화는 아내 마사(바네사 커비)와 남편 숀(샤이아 라보프)이 바라보는 길이 어떤 식으로 달라져가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초반 출산일이 임박한 마사와 숀의 관계는 매우 좋아 보인다. 출산에 대한 기대감과 아이를 빨리 보고 싶은 설레임으로 가득한 그들은 출산 신호가 오자 조산사를 집으로 부른다. 그들은 병원보다는 집에서 조산사와 가정 출산을 하기로 결정한 상태다. 그렇게 영화는 초반 30분 동안 그들이 진통과 출산하는 과정을 아주 세세하게 관객에게 전달한다.
출산의 과정은 대체적으로 안전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는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은 전문 인력이 있는 병원에서 출산을 한다. 개인적으로 출산을 하더라도 영화에서처럼 전문적인 조산사가 그 과정을 옆에서 돕는다. 출산의 과정에서 많은 부분은 부부가 원하는 부분이 반영된다. 영화 <그녀의 조각들> 속 마사와 숀도 병원보다는 집에서 출산하는 것을 선호했고 그 방법을 부부가 선택했다. 그들의 방법 선택부터 출산의 최종 단계까지 무언인가가 잘못된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는 그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한다.
원하던 조산사는 아니지만 꽤 친절하고 전문적으로 보이는 다른 조산사가 왔고 단계별로 출산 과정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어 마사와 숀은 큰 어려움 없이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지 몇 분 되지 않아 아이는 숨을 쉬지 못했고 구급요원을 불렀지만 아이가 거둔 숨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영화가 이렇게 초반 30분 동안의 출산 과정을 아주 디테일하게 다루는 이유는 이것이 주인공 마사와 숀의 심리상태를 변화하게 하는 아주 큰 사건이기 때문이다. 30분의 그 과정을 보고 나면 사람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다를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그 일련의 출산 과정들에 대한 판단을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넘긴다.
비극적인 일 이후 서로 다른 대처 방식을 보이는 부부, 마사와 숀
출산 장면이 끝난 이후에야 영화 제목의 타이틀이 나오는데 영화를 보던 이들은 안타까움을 먼저 느낀다. 그리고 나서는 앞에서 본 사건에 대한 잔상을 통해 그것에 대해 판단하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전개되는 영화의 다음 이야기는 그 일의 원인 규명에 대한 일보다는 부부가 그 일이 벌어진 이후 대처하는 모습에 대한 것이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각기 다른 방향을 본다. 다르게 말하면 각자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이 달라진다. 먼저 마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출산 전 하던 활동을 이어간다. 사무실에 출근하고, 마트에서 장을 본다. 반면 남편 숀은 아이를 잃었다는 슬픔에 잠겨 울음을 터뜨리고, 그 일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 애쓴다. 그의 노력은 결국 그것이 누구 때문인지 책임을 돌리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두 사람이 대처하는 방식 중 어떤 것이 더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각자의 방법으로 그 일을 잊고 털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인데, 각자의 방식이 다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관계에도 이상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보고 혼자의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 마사는 아이의 사인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부검의의 말을 그저 말없이 듣고 있지만, 숀은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냐면서 화를 낸다. 마사는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며 조각들을 맞춰가는 반면, 숀은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여러 번 충돌한다. 그러면서 이 둘의 관계는 깨질 듯 말 듯 아주 위태로워 보인다.
영화 속에는 또 다른 시선이 등장한다. 바로 마사의 엄마 엘리자베스(엘런 버스틴)가 그녀의 딸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딸이 그 일의 책임이 마사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려 노력한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책임을 조산사의 실수로 돌리려 애쓴다. 주로 법적 투쟁을 통해 조산사를 처벌하려는 노력이다. 엘리자베스는 그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딸이 좀 더 편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숀과 함께 마사를 설득하려 애쓴다. 그의 이런 시선은 어쩌면 제 3자로서 자신이 지켜낸 소중한 딸의 아픔을 최대한 덜어내려는 엄마의 모습인지 모른다. 영화는 이런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엘리자베스와 마사의 충돌과 관계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마사의 심리를 정확히 전달하는 배우 바네사 커비의 연기
영화는 출산 장면을 길게 보여주는 것을 시작으로 중반에는 마사의 심리 상태와 주변 인물들의 심리를 보여준 후, 법정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마사는 긴 고민 끝에 그만의 해결방법을 찾는다. 그런 과정에서 어떤 관계는 깨지고 어떤 관계는 다시 더욱 단단해진다. 그가 여러 가지 일을 겪는 동안,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심리적인 변화 과정이 매우 설득력 있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을 전달하는 것은 바로 배우 바네사 커비의 연기력이다. 그저 액션 블럭버스터 영화의 주연 정도로만 생각했던 바네사 커비는 이 영화에서 뛰어난 연기력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눈물과 아픔을 억누르고 감정적인 반응을 내색하지 않으면서 그 상황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마사의 심리를 정확히 표현한 그는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연기가 훌륭했다는 사실을 증명받았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우울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이후에는 관객들도 회복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완전한 회복은 아닐지라도 그다음 발걸음을 옮겨갈 수 있을 정도의 기운을 영화가 전달하고 있다. 주인공 마사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사과향은 그에게 선물처럼 다가왔다가 아프게 떠났다. 하지만 그 사과향은 완전히 그를 떠나지 않는다. 그녀의 기억 속에, 그녀의 사진 속에 그리고 그녀의 엄마인 엘리자베스의 기억 속에도 자리하며 마사의 다음 발걸음을 가볍게 할 것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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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조각들 영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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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가 너무 크면 '쿵' 소리 납니다
-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평화로웠던 보금자리에 누군가가 돌을 던지면서 예상치 못한 파동이 생겨났다.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개구리'가 등장한다. 이들은 "왜 하필 나야?"라고 묻고, 돌을 던진 이는 "나는 그냥 내 길을 가고 있었고 그 길 위에 네들이 있었던 거지. 그러니 남탓하지 마"라고 답한다. 개구리의 삶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린다.넷플릭스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인물인 영하(김윤석), 상준(윤계상)에게 예고 없이 날아온 '살인'이라는 돌로 인해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이야기를 그린다.드라마는 2021년 펜션을 운영하는 영하와 2001년 레이크뷰 모텔을 운영하는 상준, 두 인물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면서 전개하는 이중플롯 구성을 선보인다. 두 이야기의 구분이 모호하고 불친절하게 설명하고 자잘 자잘하게 쪼개고 있지만, 두 사건을 맛깔나게 대비해서인지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한 두 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감정들이 대체적으로 비슷해 스토리를 따라가는 데 있어 많은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전반적인 분위기를 잡는 연출도 눈길을 끈다. 효과 만점 배경음악과 자연광을 100% 활용한 기가 막힌 미장센, 강렬한 비주얼의 살인마들의 등장신, 자극적인 살인까지 몰입도를 확 끌어당긴다. 극 흐름이 느리다는 단점을 상쇄시킨다.5회에 들어서면서부터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두 개의 시점이 하나로 이어지는 실마리가 등장한다. 이를 토대로 후반부에 의문이 플리면서 점점 극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초반부에 깔아 두던 미스터리함이 반감이 되고, 보는 이에 따라 후반부는 다소 황당하거나 허무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이는 진행될수록 빈약함을 드러난 서사의 한계점 때문일 것이다.'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은 서사의 단점을 충분히 메꾼다. 김윤석과 윤계상은 가해자가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가 되면서 느끼는 슬픔과 공포, 분노, 좌절 등의 감정을 현실적으로 표현했다. 이들의 깊은 감정선은 몰입감을 높였다.이번 작품에서 파격적으로 변신한 고민시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극에서 서스펜스를 담당한 그는 미스터리한 인물 성아를 매력적으로 소화했다. 과감한 의상과 진한 메이크업, 묘한 미소 사이 어딘가 모르게 소름 끼치는 얼굴이 보인다. 특히 후반부에 보여주는 광기 어린 모습이 잔상을 남긴다. 다만 성아 캐릭터의 기행을 받쳐줄 지지대가 약하다 보니 어떤 이들은 성아의 행동이 너무 뜬금없고,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공개 전 평론가들이 남긴 추천평처럼 장점이 도드라지는 부분이 있으나,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당신의 높아지는 기대치가 '쿵'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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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온한 공동체를 지탱하는 온기
불온한 공동체를 지탱하는 온기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느 가족>(2018) 비평
<앙: 단팥 인생 이야기>와 일련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에 출연하며 국내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배우 기키 키린이 2018년 9월 15일 향년 75세에 세상을 떠났다. 30대부터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며 할머니 역할을 도맡아왔던 그녀는 유작 <어느 가족>에서 부쩍 수척해진 얼굴로 등장한다. 영화에서 그녀는 “다들 고마웠어.”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실제 배우의 육체와 겹쳐 묘한 감상을 길어 올린다. 그러나 죽음을 암시하는 배우의 신체와는 별개로 시바타 하츠에의 죽음은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을 차근히 밟아온 나에겐 다소 의문스러운 죽음이다. 이전 히로카즈의 가족영화들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 사망한 가족의 자장을 좇거나, 결말부에 가족 구성원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담아왔다. <어느 가족>의 하츠에처럼 서사 중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은 그의 영화 목록에서는 이례적이다. 특히 그 대상이 그간 그의 가족들을 정신적으로 지탱해온 어머니라는 점에서 더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면 하츠에는 왜 영화 중간에 죽어야 했으며, 왜 하필 그녀가 죽어야 했는지 영화 전반을 둘러보며 그녀의 사인을 밝혀보자.
히로카즈 감독은 국내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본어로 ‘만비키’(万引き)라는 ‘shoplifters’는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라는 뜻과 동시에 ‘그들 자신이 여러 곳에서 도둑질을 당한 사람들’이라는 뜻도 있다.”(<씨네21>, 2018.5.30.)라고 밝혔다. 후자의 의미를 따르면, 원제 <万引き家族>은 ‘훔쳐진 가족’으로 번역된다. 그렇다면 누구에게서 훔쳐진 가족인가. 시바타 가족은 혈연이 아닌 사회 혹은 실제 가족에게서 버려진 구성원들로 이뤄진 유사 가족이다. 유리(사사키 미유)와 쇼타(죠 카이리)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노부요(안도 사쿠라)를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부르진 않지만, 가족 외부의 사람은 쇼타와 함께 거리를 지나가는 노부요를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가족의 형상을 충족하고 있다. 그러나 어설프게 형태만 충족한 이 가족은 사회 시스템 앞에서 철저히 무기력해진다. 사회는 영화 종반부에 그들을 프레임 속 각자 다른 자리에 불러 세우고 유사 가족의 무능을 지적하면서 시바타 가족을 해체한다. 즉, 사회는 혈연이 아니라는 명분으로 유사 가족을 훔쳐낸다. 그런데 그 역도 성립한다. 시바타 가족은 동기의 무고함을 차치하고 보면 진짜 가족에게서 구성원들을 훔쳐 온 가짜 가족이다. 오사무는 차에 방치된 쇼타를 주워오고, 노부요는 유리에게 폭력을 가하던 진짜 가족에게서 아이를 법적 절차 없이 입양한다. 하츠에 역시 아키(마츠오카 마유)가 전 남편의 손녀인 것을 알면서도 아키의 가족에게 묵인하고, 시바타 부부도 오사무가 노부요에게 폭력을 가하던 남편을 죽인 뒤 사회적 계약 없이 맺어진 관계다.
그런데 하츠에가 시바타 부부를 집으로 들인 사연은 불투명하다. 단지 하츠에가 그들을 선택했다는 대사만 주어질 뿐 구체적인 동기는 말해지지 않는다. 하츠에는 전 남편이 죽은 뒤에도 그가 재혼하여 낳은 아들을 찾아가 위자료를 받아내는 속물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연금을 목적으로 집에 얹혀살며 그녀의 돈을 노골적으로 노리는 시바타 부부를 가족으로 선택한 이유가 의뭉스럽다. 하츠에의 진짜 아들은 그녀에게 연락 한 통 없는 무심한 아들이고, 그녀는 보험을 들어서라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부고를 전하고 싶어 한다. 정황상 그녀는 자신의 노후를 함께 해줄 가족이 필요했던 인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가짜 가족에게는 '워크셰어(Workshare)'라는 공동의 규칙이 존재한다. 오사무가 쇼타에게 하는 “유리도 뭔가 도움이 되어야 같이 살기 편하지 않겠어?”라는 발언에서 시바타 가족은 암묵적으로 그 공모를 준거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연금으로 경제적 자족성을 갖춘 하츠에가 시바타 부부를 받아들인 이유는 시바타 가족의 속물적인 규칙과 어긋난다. 이 불균질을 감수하고서라도 히로카즈 감독이 그녀를 유사 가족 안에 편입시킨 이유가 뭘까.
하츠에는 이름의 존재에서도 다른 가족들과 궤를 달리한다. 하츠에를 제외하고 시바타 가족의 구성원들은 가족 외부에서 불렸던 이름과는 다른 가명을 하나씩 갖고 있다. 유리를 찾는 TV 뉴스를 보고 그녀를 몰래 키우기로 합의한 가족들은 유리에게 ‘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그녀를 숨긴다.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보다 전이지만, 친부모에게서 받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쇼타 역시 오사무로부터 그의 본명인 ‘쇼타’라는 이름을 이어받았다. 시바타 부부와 아키 역시 본명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쇼타-오사무, 유코-노부요, 사야카-아키. 숨겨야 하거나 숨기고 싶은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본명이 사회와 진짜 가족에게서 밀려났을 당시의 이름이라고 본다면, 그들은 가명을 지어 과거의 이름을 숨기려 한다(가족이 해체되는 취조실에서 사회로부터 숨겨진 이름이 끄집어내지는 귀결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이름은 하츠에로부터 이어진 ‘시바타’라는 성으로 묶인다. 즉, 과거의 이름들을 은닉하기 위해 지은 새로운 이름들은 하츠에의 성을 받아 온전한 이름으로 기능한다.
이름 외에도 아이들은 어른으로부터 무엇인가 유전된다. 쇼타와 유리는 각각 가족을 부양하려다 다친 오사무의 오른발과 가족으로부터 받은 노부요의 상처가 유전처럼 전해진 아이들이다. 오사무는 공사현장 텅 빈 공간에서 “다녀왔어” “어, 쇼타”라고 자문자답한다. 오사무의 본명이 쇼타라는 것을 뒤늦게 확인한 관객들은 그가 불이 꺼진 곳에서 자신을 반겨줄 누군가를 바라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빠라는 호칭에 집착하던 오사무는 버려진 아이를 어린 시절 외로웠던 자신의 분신으로 삼아 “어, 쇼타”라고 반겨줄 아버지가 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남편에게서 폭력을 당한 기억이 있는 노부요는 유리가 친부모에게서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다시 집으로 데려온다. 그녀는 욕실에서 자신의 상처와 닮은 유리의 상처를 보고 아이를 끌어안아 몸에 품는다. 어쩌면 시바타 부부는 아이들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비가역적인 가족력처럼 쇼타는 다시 고아가 되고 유리는 다시 폭력적인 가정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남은 하츠에로부터 아키에게는 무엇이 유전되었을까. 쇼타와 유리가 다시 시바타 가족이 되기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처럼 아키는 아무도 없는 하츠에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가 섹스 노동을 할 때 가명으로 동생의 이름을 쓰는 것으로 보아, 아키는 동생에게 악감정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녀는 하츠에가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금전적 원조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진짜 가족이 아닌 하츠에의 집에 다시 돌아올 정도로 실제 가족에게 감정의 골이 깊다. 그래서 그녀는 하츠에와 같이 실제 가족이 존재하면서도 그들과의 관계를 끊고 홀로 살아가려 한다. 애정결핍이 있고 속물적인 가족의 규칙에 반감을 표했던 아키는 하츠에에게서 집을 이어받아 새로운 대안 가족을 만들어 하츠에의 자리를 대신할 혐의가 있다. 즉, 집의 소유주이자 재개발을 넌지시 바라는 부동산 업자로부터 집을 사수하는 하츠에는 아키에게 다른 가짜 가족이 거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집을 물려준다.
<어느 가족>에서 버려질 법한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집의 풍경은 마치 버려진 시바타 가족의 은유처럼 보인다. 일본 가족영화의 뿌리인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다다미방처럼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집은 미학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가족은 그 단어의 피상적인 뜻처럼 집으로 묶인 집단이다. 따라서 사회 시스템 속 가족의 형성과 위기를 탐구해온 히로카즈의 영화적 관심사에서 집은 포기할 수 없는 무대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집은 사회의 공간과 대비하여 의미를 형성해왔다. <어느 가족>의 집도 사회와 시바타 가족을 구분하는 경계처럼 존재한다. 영화 초반부 집 내부는 가족의 형성이 주는 안온한 기운이 형형한 공간이다. 오사무의 자상한 얼굴과 노부요의 모성은 관객에게 시바타 가족 사이에 복류하던 도덕적 균열을 가리는 알리바이로 작용한다. 그들은 관계에서부터 사회의 윤리를 비껴가지만,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집 안에서는 문제없는 가족처럼 보인다.
과거를 숨기려는 이름들에 성을 주고 가족을 사회와 경계 지어주는 은닉처를 제공하는 하츠에는 시바타 가족 구성원들에겐 집과 같다. 그래서 집 밖의 공간인 해수욕장에서도 서로의 손을 잡으며 가족이 되려는 그들을 보면서 하츠에는 마치 임무를 완수한 것처럼 안녕을 고한다. 그 이후 집에 묻힌 하츠에는 시바타 가족이 사회로부터 해체되는 취조실 시퀀스 도중 그녀 역시 집에서 꺼내진다. 하츠에가 집이고 그 집이 사회로부터 시바타 가족을 지키는 울타리였다면, 하츠에의 죽음으로부터 가족이 사회에 노출되는 건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어느 가족>은 집 내부에 편재했던 따스한 온기를 결말까지 안일하게 이어가지 않는다. 영화는 하츠에의 죽음 이후, 피가 아닌 마음과 유대로 연결되었다고 말하던 가짜 가족들의 옆구리 바짝 서늘한 공기를 밀어 넣는다. 하츠에가 죽자 오사무와 노부요는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녀를 묻기 위해 욕실 바닥을 판다. 양심의 가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얼굴은 벽 너머로 할머니의 시체를 쓰다듬는 아키의 슬픈 손짓과 대비되어 섬뜩하다. 뒤이어 시바타 부부는 하츠에의 유산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한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이들을 방치한 어머니를 악인으로 비추지 않음으로써 사회 시스템의 부재를 지목했던 히로카즈 감독은, <어느 가족>에선 어른을 포함한 가족 안으로 카메라를 끌고 와 문제를 가족내부에서도 진단한다. 단순히 사회를 적으로 두고 투쟁하는 가족을 숭고하게 그리지 않고 가족 내에 산재한 위태로움을 기어코 들춰내는 이 영화는 가족의 실패를 사회 시스템만의 잘못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유사 가족의 나체는 아이 쇼타에 의해 드러난다. 늙은 하츠에가 불온한 가족을 지탱하는 온기였다면 어린 쇼타는 태만한 가족의 폐부를 찌를 냉기다. 홍수정 비평가의 “누군가는 가족 모두를 경찰 앞에 불러모으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영화가 한 세계의 문을 여는 방법이 진정 어린아이의 몸에 상처를 새기는 것뿐인가."(<씨네21>, 2018.08.16.)라는 의견에는 함께할 수 없다. 쇼타는 도덕적 규범에 게을렀던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가족 외부에 호기심을 피력하는 인물이다. 하츠에가 죽자 그녀가 가려주던 가족의 불온을 감지한 쇼타는 유리에게 도둑질의 전이를 한 차례 막아준 문방구 주인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래서 이제 아이는 두 어른의 도움 없이 스스로 나선다. 마트에서 유리의 도둑질은 들키지 않았지만, 쇼타는 양파를 들고 도망치며 주의를 끈다. 다시 말해, 쇼타는 유리가 걸릴 걸 두려워한 게 아니라 도둑질하는 행위 자체를 막기 위해 도망친다. 그는 길 위에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자문했을 것이다. 결국 아이는 가짜 가족의 집이 아닌 막다른 다리를 선택한다. 홍수정 비평가의 의문이 생긴 이유는 상처를 피해의 흔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쇼타의 상처가 시바타 가족이 편안하게 이어가던 잘못된 내력에서 절연하려는 결연한 성장통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가족을 예비할 어린아이 손에서 이뤄져야 한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쇼타의 환부다. 영화는 쇼타가 다리에서 떨어져 다친 발을 오사무의 다친 발과 같은 오른발로 슬며시 겹쳐둔다. 오사무의 발은 사회 서비스인 산재보험에 적용되지 않는다. 반면, 쇼타의 다친 발은 쇼타를 버리고 도망치려는 다른 가족들에 의해 방치된다. 그들의 환부는 부위만 같을 뿐 각각 사회와 대안 가족에 의해 곪아간다. 즉, 영화는 쇼타와 오사무의 환부에 외면하는 방관자를 다르게 지목한다. 이 뒤바뀐 진술 사이에 하츠에의 죽음이 있다. 사회 시스템의 부재가 가족의 내부결함으로 도치되는 경계에서 가족을 아슬아슬하게 이어주던 집으로서의 하츠에가 사라지는 건, <어느 가족>이 함께 지목하려 했던 두 의문을 스크린 위에 세우기 위한 서사적 결단인 셈이다.
유사 가족의 무력함 이전에 가족 내에 떠돌던 생기를 목격했던 나로서는, 취조실의 조사관이 시바타 가족에게 묻는 “아이에게 도둑질을 시킨 게 양심에 걸리지 않았나요?” “아이에게는 부모가 필요해요.”와 같은 선명한 발언들이 시바타 가족에게 심정적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 같아 아쉽게 느껴진다. 그런데 조사관의 물음은 언젠가 시바타 가족이 스스로 물었어야 하는 지연된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오사무의 “가르칠 게 도둑질밖에 없었다.”와 노부요의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워왔을 뿐이다.”라는 답변이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오사무가 아버지로서의 해야 한다고 믿었던 역할이 오인된 착각이었고, 자신의 상처가 아이에게 이어지지 않게 하려던 노부요의 애처로운 자기방어였기 때문이다. 사회로부터 끝끝내 가족으로 불리지 못하고 다시 부모를 잃어버린 쇼타와 아파트 난간으로 내몰린 린의 얼굴로 마무리되는 영화는 가족의 형성과 해체만 보여줄 뿐 아이들은 시작과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이 막을 내린다.
<어느 가족>의 돌아온 결말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생략된 세계를 보여준다. 시바타 가족은 쇼타를 버리고 도주하려다 한 빛에 포착되는데, 조명을 든 주체가 등장하지 않아 마치 객석에서 뻗어 나온 것처럼 보인다. 마치 쇼타를 버리려는 시바타 가족의 이기심이 관객에게 들킨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에 이어서, 취조실 장면에서도 시바타 가족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그래서 흡사 그들이 관객에게 답변하는 듯 보인다. 사회와 유사 가족, 두 집단 모두의 불완전함을 전시하며 끝나는 영화는 막연한 낭만주의적인 희망을 품지 않는다. 다만, 영화의 시작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유리가 침묵으로 거부의 의사를 표하고 스스로 난간 밖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쇼타가 이제는 아빠를 추억하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유리를 구해줄 새로운 가족의 부재와 쇼타의 속삭임이 오사무에게 닿지 않았다는 점에서 완벽하진 않지만, 쇼타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고 유리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목격자로서 관객이 존재한다. 시바타 가족의 자기변호와 사회 시스템의 모순을 언급한 영화는 그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제 유리와 쇼타가 자라 오사무와 노부요가 될지도 모르는 심증만 남은 재판에서 유일한 증인인 관객이 발언할 차례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헤운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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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가 만든 23 아이덴티티
23 아이덴티티(Split) / 2016
- bgm
Money (feat. Celeste Collins) by Pold
http://bit.ly/2PrkqnxBack Home by Ghostrifter Official
http://bit.ly/2PuYB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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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크맨 후기 / 테이큰은 벌써 13년전 / 은퇴한 해병대의 멕시코 갱들 참교육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마크맨”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습니다~#액션영화, #로드무비, #리암니슨, #마약카르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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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식물카페, 온정> 메인 예고편
종군 사진기자로 일했던 주인공 ‘현재’는
파키스탄 전쟁 당시의 트라우마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된다.
퇴사 후 다시 찾은 할아버지의 수목원에서
어린 시절 느꼈던 식물과의 특별한 교감을 떠올린다.
식물로부터 살아갈 용기를 얻은 ‘현재’는
도심 속 <식물카페, 온정>을 운영하게 된다.
본인의 반려식물과 함께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카페를 찾은 손님들에게 ‘현재’는 병든 식물은 물론
병든 마음에 필요한 그만의 식물 처방전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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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토토리! 우리 둘만의 여름> 메인 예고편
아름다운 대자연으로 캠핑 여행을 떠난 ‘베가’와 ‘빌리’.
5살 나이에 딱 걸맞게 모든 게 신나기만 한 ‘빌리’와 달리,
9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베가’는
병원에 있는 엄마의 특명을 받아 아빠와 동생 챙기기에 바쁘다.
그런데 아뿔싸! 아빠가 강가 바위 틈으로 추락했다!
아빠를 구하기 위해 왔던 길을 거슬러 가보지만,
곧 드넓은 숲속에서 길을 잃고 만다.
모든걸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 떠오른 엄마의 한마디.
“포기할 거야? 아니면 슈퍼히어로가 될 거야?”
내 안의 슈퍼파워를 깨우는 마법의 주문!
다 함께 외쳐봐! 토~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