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글다2025-02-23 02:17:08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성장영화의 ‘백 점짜리 정답지’
영화 <원더>
<원더>는 설정 하나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속 가족은 중산층 이상의 가정환경과 좋은 학군지에 살고 있는 백인 핵가족이다. 화목하고 유머러스한 가족 분위기는 물론이고, 주인공인 어기도 수술실과 집에서 어린 시절을 지냈음에도 굉장히 밝은 성격을 보여준다. 진행을 위한 부분들을 제외하고, 현실에서는 굉장히 이질감이 들 완벽한 가족을 영화 속에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완벽한 통제 속에서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 진행을 보여준다.
배우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원더>에서는 <귀여운 여인>, <노팅 힐> 등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많은 사랑을 받은 줄리아 로버츠와 최근 디즈니+ 드라마 <로키>의 모비우스 역으로 친근한 오언 윌슨의 부모로서 한 발짝 뒤에서 보여주는 연기를 볼 수 있다. 많은 영화의 중심에서 활약한 두 배우의 노련하고 안정적인 연기는 어린 어기와 비아 뒤에서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주었고, 영화 전반적으로 가족, 성장이라는 장르에 맞는 톤을 유지해 준다. 거기에다가 어기 풀먼 역 제이콥 트렘블레이는 얼굴 전체를 덮는 특수분장을 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유쾌하면서도 섬세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중 졸업여행에서 같은 반 남자아이들과 진정한 친구가 되었을 때 강을 바라보며 울컥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데, 그 장면을 보고 있자면 일렁이는 강물처럼 먹먹한 감정이 밀려온다.
크고 작은 갈등, 힘겨울 때 꼭 옆에 존재하는 조력자, 그리고 이후 짜여진 듯이 술술 해결되는 문제들까지, 필연적으로 성장영화는 다르면서도 유사한 양상을 따르게 된다. 수학 문제처럼 주인공에겐 성장을, 관객들에겐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원더>도 다른 외모로 인해 고통받지만, 내적으로 성장하는 ‘어기’부터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엄마 ‘이자벨’까지 주어진 공식 내에서 모든 것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이처럼 특정한 수식으로 시작해 해피엔딩이라는 답을 내는 다양한 풀이 과정 사이에서, <원더>는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성장영화의 ‘백 점짜리 정답지’라 부르고 싶다. 혹자는 완벽한 정답지는 지겹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로는 새로운 것을 찾기보단 완벽한 정답지에서 오는 편안함을 즐기는 것은 어떤가. <원더>에서 오는 편안함은 보고 난 직후, 더 나아가 당신의 남은 날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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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진실이 사랑했던 두 사람, 결별 이후 남자는 이탈리아 유학에 오르게 된다.
어느날 우연히 이탈리아에서 전애인을 발견한 남자는 그 여자에게 연락을 취해 다시 만나게 되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녀의 행복을 위해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일본에 와서도 계속 생각나는 그녀, 남자는 용기를 내 그녀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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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일본 특유의 감성이 나랑 맞지 않는달까.
90년대 ~00년대 초반까지의 일본 영화 특유의 필름질감과 분위기는 그 어떤 다른나라 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어서 좋지만서도,
영화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들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선과 행동 그리고 혐오때문에 가끔은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 영화도 그렇다.
겉으로는 아름다운 피렌체와 밀라노를 보여주지만,
막상 그 속을 들여다 보면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다.
'주인공들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들만의 고고한 사랑을 위해 다른사람의 사랑과 진심 그리고 인격까지 무시하는 연출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함을 조성한다.
여주인공이 현재의 남자친구를 대하는 방식도 옳지 않지만,
나는 남주인공 준세이가 자신의 여자친구 메미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싫었다.
위에서 나는 '여자친구'라고 언급하였지만,
그녀가 그의 여자친구가 맞긴 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녀는 그에게 그저 성적대상일뿐 제대로 된 인격체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는 그녀의 열렬한 사랑에 제대로 된 대답조차 하지않으면서 그녀와 같이 살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는 그에게 그저 성적욕구해소를 위한 도구가 아니었을까?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내가 너무 공격적이고 과하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 극중 준세이는 그런 사람이다.
그녀가 울면서 나를 사랑하긴하는거냐고 소리칠 때, 그는 꿈쩍도 안하고 자기는 아오이를 더 사랑한다며 떠날때, 준세이가 정말 끔찍해보였다.
메미를 단 한번도 존중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고, 준세이와 아오이의 '사랑' 이야기를 보니 달갑지 않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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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내가 이 영화에 대해 하고 싶은 말 전부이다.
이 영화의 인상 깊은 부분은,
아오이와 준세이의 예의 없는 사랑과
극중 배경인 피렌체와 밀라노의 아름다움
그리고 사운드트랙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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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소설 원작인데 왜 불편하다고 중얼됨?"
이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일본 소설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더 물으신다면...
할 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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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유일하게 좋았던 점은
영화보면서 피렌체, 밀라노 여행갔던게 생각나서 좋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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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으로 빚어진 비극과 희극 그리고 단절감에 대한 무력함
시놉시스
피에트로는 12살 무렵 브루노를 처음 만났다. 둘은 금세 친해졌지만 피에트로가 토리노로 가게 되면서 사이는 멀어진다. 10년의 시간이 흐르고 브루노는 벽돌공이 되어있었고 대학생이 된 피에트로와 만나지만 인사는 하지 않는다.
한편 피에트로의 아버지와 피에트로의 사이가 멀어진다. 진정한 친구인 브루노와 함께 있었던 시절이 좋았던 걸까? 피에트로는 자신의 아버지와 마음을 굳게 닫힌 채 살아간다. 하지만 피에트로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고 31살이 된 피에트로는 브루노와 다시 만나게 되는데...
과연 어떤 모습이 변해있을까?
브루노는 삼촌과 낙농업을 하며 살고 있었다. 왜냐하면 브루노의 아버지는 벽돌공이었고 술주정뱅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고 했지만 브루노는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과 닮아가게 된다.
반면에 피에트로는 자신의 아버지가 공장의 엔지니어이면서 친구가 없다는 걸 알게 되고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고 대들며 자신이 택했던 전공을 포기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피에트로는 12살에 아버지와 함께 친구인 브루노를 데리고 빙하와 산을 올라갔다.
고산병이 있었던 피에트로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자신을 산에 데리고 갔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리고 성인이 되고 난 후 자신이 이룬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브루노를 다시 만나면서 집을 같이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부탁을 받은 후에 피에트로는 벽돌에 시멘트를 발라 집을 만드는 걸 배우게 되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작가의 일을 하기 시작한다.
만약 피에트로에게 브루노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친구의 우정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이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친구가 있으면 서로 조언도 해주고 덕담도 오갈 수 있다.
그렇지만 친구 사이에도 희극과 비극이 존재한다. 피에트로는 먼저 직장을 가지고 비전이 있는 브루노를 동경했지만 브루노도 실패를 경험하면서 오히려 장기적으로 더 성공한 피에트로를 동경하게 된다..
브루노는 우연히 피에트로의 친구들 중에 라라와 인연을 맺지만 낙농업을 준비하다가 빚만 늘어나서 허덕이게 된다. 결국 가정도 파멸하게 되어 산에서 홀로 살아간다. 그러고는 처참한 비극의 주인공이 돼버린다.
피에트로도 친구를 잃은 아픔을 꽤 오래 기억할 것이라고 영화는 말해준다. 사실은 피에트로가 네팔 여행을 하면서 히말라야 산도 가보고 네팔에서 거주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여덟 개의 산이라는 네팔인들의 세계관을 보고 어이가 없어하지만
진정 자신이 깨닫게 된 건
브루노와의 단절이 자신에게 큰 단절로 되돌아온 것이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영화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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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 속에서 감출 수 없는 실망감
해리포터 세계관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를 꼽아보자면 하면 뉴트 스캐맨더! 그 이유는 해리포터 기숙사 테스트에서 후플푸프로 나왔고, 이 세계관에서 가장 유명한 후플푸프 출신은 뉴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갖 기대를 하고 보러 갔으나 그 기대 때문인지 실망을 금치 못했던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재미는 있었지만 작품에 대한 안타까움이 너무 컸던 작품이었다.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시놉시스가장 위험한 마법에 맞선, 세상을 구할 전쟁이 시작된다!
1930년대, 제2차 세계대전에 마법사들이 개입하게 되면서 강력한 어둠의 마법사 그린델왈드의 힘이 급속도로 커진다. 덤블도어는 뉴트 스캐맨더에게 위대한 마법사 가문 후손, 마법학교의 유능한 교사, 머글 등으로 이루어진 팀에게 임무를 맡긴다. 이에 뉴트와 친구들은 머글과의 전쟁을 선포한 그린델왈드와 추종자들, 그의 위험한 신비한 동물들에 맞서 세상을 구할 거대한 전쟁에 나선다. 한편 전쟁의 위기가 최고조로 달한 상황 속에서 덤블도어는 더 이상 방관자로 머물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고, 서서히 숨겨진 비밀이 드러난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그렇다, 그들은 귀여웠다
사실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를 보는 이유는 귀여운 동물들을 구경하는 일 아닐까? 실제 존재하지 않고 마법 세계에만 존재하는 동물들을 연구하고 찾아나서는 동물학자 뉴트와 동물들의 케미 기대하며 보는 팬들이 많을 것이다. 이번 신비한 동물과 덤블도어의 비밀에서도 그 귀여운 장면이 등장한다. 바로 지하 감옥에 있는 테시우스를 구하려 가는 장면에서 말이다. 도대체 그 빨간 아이들은 누구일까? 꽃게..? 랍스터? 어쨌든 수백마리의 꽃게들이 요새와 같은 지하감옥을 돌아다니며 죽은 사람들의 사체를 먹고 있었다. 테시우스를 구하러 간 뉴트는 이 아이들의 모방심리를 활용해서 이상한 포즈로 다같이 테시우스가 있는 곳까지 엉덩이를 씰룩씰룩 흔들며 찾아간다. 심지어 테시우스를 구하고 돌아갈 때도 다같이 씰룩이면서 가는데 정말 영화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빵 터졌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피켓과 태디가 뉴트의 지팡이와 함께 간수에게 맡겨진다. 뉴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피켓과 테디는 열심히 나름대로 간수를 속이려고 하던 찰나 졸던 간수가 깨어나면서 동망치는 그 장면 역시 굉장히 귀여웠다. 중간중간 귀여운 동물 친구들이 많이 나와서 어두웠던 영화의 분위기를 잘 살려주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도대체 신비한 동물이 왜 필요했을까?
사실 이번 작품이 차라리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에 초점을 맞추는 아예 별도의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것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신비한 동물드로가 덤블도어의 이야기를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 사이가 틀어지고 그린델왈드가 마법동물들을 악용하기 시작하면서 덤블도어는 이를 막고 마법세계과 머글세계를 동시에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컨셉으로 가야 이야기 자체도 심도 있고, 캐릭터 간의 서사도 더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비한 동물이 주가 되고 덤블도어가 끼어든 느낌이라 어떤 캐릭터도 그리 영화 속에서 인상적으로 잘 살리지 못했다. 그리고 크레덴스가 덤블도어의 가문이라는 사실까지 밝혀내면서 도통 동물들이 왜 등장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동물이라는 신비함과 그린델왈드의 음모가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잘 섞이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보는 내내 안타까웠다.
캐릭터 간의 합은 어디 있을까?
이번 작품의 문제점이라고 하자면 캐릭터 간의 합이 없다. 각자 각개전투를 한다. 분명히 머글, 동물학자, 위대한 마법사 집안, 오러 국장, 교술, 뉴능한 조수 이렇게 다양한 존재들이 모여 있고 그린델왈드와의 전쟁을 준비하는데 사태의 심각성이 와닿지 않는다. 모두가 비밀을 감춘 채 장막 뒤에 있는 느낌이었고, 심지어 그렇다면 결말에서 그간의 비밀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퍼즐이 맞춰지는 카타르시스라도 전해져야 할텐데 그렇지 않다. 밍숭맹숭 끝난 느낌에다가 전략이 "무계획이 계획이다. 다중계획이다."였는데 그래도 이게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인지할 수 있도록 해야되는데 도대체 뭘 하려는지 알 수가 없으니 집중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자꾸 감추려고만 하고 이에 한 서사도 제대로 풀어내지 않아서 밀도감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은 작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이 돈 아까울 정도 못 만든 작품은 아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웠을 뿐 재밌는 작품이긴 하다. 그저 더 잘 만들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보니 쓴소리를 더 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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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로만 폴란스키 감독 작품. 폴란드 유대인 슈필만의 생존기를 다룬 영화이면서 독일군이 유대인을 얼마나 잔인하게 학살했는가를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 있던 유대인의 수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혹독했던 것이 사실이고, 그들 가운데 수십만 명이 독일군이 운영하는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사건 또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지금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일본의 이익을 위해 거짓 논문을 써내는 램지어 같은 인간과 같은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유대인 학살 문제는 매우 신중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역사적 사건으로, 비유대인 유럽인들은 독일의 만행에 대한 공분과 함께 비유대인으로서의 도의적 책임감을 느끼는 태도를 보인다. 즉, 자기들(독일인이 아닌 비유대인 유럽인)은 유대인 학살에 직접 책임은 없으나 유대인을 적극적으로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히틀러와 독일사회민주당과 결별하면서 독일의 역사적 과오를 철저하게 반성하고 피해자인 유대인에게 사죄한 바 있다. 또한 앞으로 히틀러의 나찌즘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극우 정당의 출현, 극우 집단의 발호를 근본에서 막는 장치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는 물론 다큐멘터리, 자서전 등 다양한 형태의 기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헐리우드의 영화자본을 쥐고 흔드는 유대인 집단은 헐리우드에서 유대인이 박해당하는 내용의 영화를 주기적으로 생산하도록 힘을 실어주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박해받던 유대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곧바로 '이스라엘'을 건립했고, 미국의 지원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폭력으로 차지하고, 자기들이 당한 것 이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탄압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과 과거 유대인 박해를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건 옳지 않다. 유대인 박해 사건은 그 자체로 심각한 전쟁범죄이며, 보편적 인류의 자유, 평등, 존중의 정신을 말살한 최악의 사태였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현재 '이스라엘'은 그렇게 박해당한 경험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유대인의 의지로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어떤 명분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독일이 저지른 것보다 더 잔인한 행위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독일군에 의한 유대인 박해, 집단 살해 사건을 상업영화로 만들거나 다큐멘터리, 자서전, 역사책 등으로 만들어 꾸준히 알리는 것은 유대인의 권리다. 하지만 그 권리를 남용하면서 마구 휘두르면 그건 더 이상 권리가 아니라 폭력이 된다.
우리(한국인)는 유대인을 바라볼 때, 양가 감정을 갖는다. 유대인과 한국인은 역사적 피해자라는 사실에서는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하지만 유대인은 가해자인 독일이 진심으로 참회하고, 공식적, 역사적으로 사죄했으며,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다.
반면 한국인을 가해한 일본은 전쟁에서 패한 이후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코스프레를 하며 피해국과 그 국민들에게 사죄를 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일본은 헌법을 바꿔 침략전쟁을 할 수 있도록 시도하고 있는데, 일본은 패전 이후 지금까지 극우집단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며, 피해국에 사죄도, 배상도 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나라이기도 하다.
유대인은 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국가'가 없었지만, 전쟁 끝나고 '국가'를 세웠다. 유럽과 다른 대륙을 떠돌던 유대인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물적 공간을 마련한 것이니 그들로서는 전쟁과 박해가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끔찍한 경험을 한 유대인들이 가까이 사는 다른 민족을 야만적으로 학살, 학대하기 시작한 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이 2차 세계대전에서 당한 박해와 학살을 세계에 널리 알리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이어나가고 있으니, 세계 사람들은 유대인을 보면서 인지부조화 상태에 놓이게 된다. 유대인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유대인 '개인'이 당한 경험과 서사는 비극이다. 하지만 집단으로써의 유대인이 저지르는 팔레스타인 사람에 대한 학살은 피해자 '개인'으로의 유대인까지 혐오하게 만드는 범죄이자 만행이다. 유대인 가운데도 노엄 촘스키처럼 시오니즘에 반대하는 비판적, 합리적 유대인도 많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주거지를 침략하며, 원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땅을 빼앗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서서히 말려죽이는 짓을 벌이고 있다는 것 역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 현재까지 이스라엘은 미국을 등에 업고 중동 지역에서 패권 국가로 행세하고 있다. 그들은 기고만장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즐거워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거주지를 파괴하고, 마치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자원을 수탈하고, 한국인을 학대하며, 농락했던 것과 똑같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대하고, 농락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이런 만행과 오만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 폭력으로 흥한 자는 폭력으로 망한다는 진리도 있듯이, 이스라엘은 폭력을 기반으로 서 있는 국가이고, 폭력을 휘두르면서 쾌락을 느끼고 있다. 그런 행동이 정신분석에서 '가해자와 동일시'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중동 인근 국가들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만들고, 멀리 떨어진 미국과 유럽의 몇 나라들-그들이 지금은 가장 폭력이 강한 나라이기 때문이겠지만-을 등에 업고 폭력을 휘두르는 건 마치 어린아이가 칼을 쥐고 휘두르는 것처럼 위험한 행동이다.
이 영화에서도 유대인들이 독일군의 폭력으로 서서히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몹시 안타까웠다. 독일군의 만행은 끔찍하고, 말할 수 없이 잔인하며, 악랄했다. 유대인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스실로 끌려가야 했고, 강제수용소에서 노동을 하며,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런 유대인의 비참함에 감정이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까닭은, 현재의 유대인 '이스라엘'이 어떤 짓을 하는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유대인 슈필만을 팔레스타인으로 바꾸고, 독일군을 이스라엘군으로 바꾸면 완벽하게 똑같은 그림이 나온다.
이미 너무 많은 '피해자 유대인'을 그린 영화가 나왔고, 앞으로도 나오겠지만, 이제 '피해자 유대인'을 다룬 영화는 더 이상 관심을 끌기 어려울 것이다. '피해자 유대인'은 이미 과거의 역사가 되었고, 지금은 '가해자 유대인'의 이미지가 뚜렷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그동안 저지른 학살과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하고, 배상하고, 팔레스타인의 회복을 돕지 않는 이상, 유대인은 전쟁 때의 '독일군'과 같은 이미지로 오래도록 남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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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KY 데일리] 악마에게라도 빌고 싶은
#제20회BIKY기획기사 (비키 유스 플러스)
영화 <악마의 연기 The Devil Smokes>
감독 에르네스토 마르티네즈 부치오
국가 97
제작년도 2025
상영시간 97분
관람등급 +15
프리미어 KP
시놉시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할머니와 함께 멕시코 시내에 남겨진 5남매는 ‘집 안의 악마’ 타령을 매일 같이 듣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공포스러운 분위기 가운데에도 서로를 위로하며 끈끈하게 버텨나간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며 사운드의 매력적인 활용 속에 어린 배우들의 순수한 연기를 통한 사회적 고립감이 곳곳에서 울림을 전한다.
(정보: BIKY)
교황과 악마
텔레비전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교황을 찬양하는 방송이 흘러 나온다. 거리마다 교황을 신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의 환호가 가득하다. 아이들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른들의 기도를 흉내내며, 마치 그 믿음이 자신의 것인 양 따라 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집안 분위기는 어딘가 다르다. 이상하게도 할머니는 외부에서 숭배하는 존재가 아닌, ‘집 안의 악마’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믿는다. 아이는 그 악마에게 조용히 소원을 빌고는 한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과거의 캠코더 영상은 아이들의 부모가 부재한 현실을 암시하며, 그때와는 사뭇 달라진 현재의 침울하고 무너진 가정 분위기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믿음과 불신, 축복과 저주의 이미지가 겹치며 과거와 현재의 가정 내부 온도 차이를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개의 죽음
집밖으로 나설 결심을 한 두 아이는, 할머니 방에서 열쇠를 훔쳐 몰래 집을 나갈 계획을 세운다. 드디어 현관문을 여는 순간, 언니에게 들키고 맞은 편에 사는 어른과 실랑이를 하던 도중에 여자 아이가 목줄을 잡고 있던 개를 놓치고 만다. 집 안을 지키던 개가 어른에게 달려들고, 당황한 어른은 개를 피하던 끝에 그 개를 죽이고 만다. 아이들에 비해 몸집이 크고 보호의 상징으로 존재하던 개의 죽음은 아이들에게 커다란 상실감과 두려움을 준다. 이 집의 여섯 가족을 보호해줄 생명체의 부재는, 더 이상 오남매가 함께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될 것이란 결말을 직감하게 한다.
악의 침입
누군가 집 안으로 몰래 침입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이들은 결국 경찰에게 신고해버린다. 결국, 이 집이 더 이상 아이들이 살만한 집이 아니란 사실이 외부에 노출되고, 보호 대상으로 찍히고 만다. 국가기관은 아동 보호 차원에서 조사를 나서고, 아이들은 조급한 마음으로 집 안을 감추던 신문지를 떼어내고 벽에는 급하게 페인트 칠을 하고 멀끔히 차려입은 채 맞을 준비를 한다. 그러나, 실상 집 안은 먹을 것도 물도 전기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상태이다. 아이들은 부모님이 출장을 갔다가 곧 돌아오실 거라고 거짓말로 입을 맞추었지만, 허점 많은 거짓말은 어른들의 질문 앞에 한없이 무너진다. 다섯 남매는 서로 뿔뿔히 흩어지게 될 운명을 직감하며, 가장 소중한 물건들을 가져와 태운다. 그리고, 아이는 마지막으로 악마에게 소원을 빈다. 우리가 헤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그 아이의 눈앞에선 교황은 무기력한 신이 되고, 악마는 오히려 현실의 절망을 통과할 유일한 희망처럼 보인다. 우리 가정을 파괴하는 악을 없애기 위해 악마에게 기도를 하는 역설적인 어린 아이, 그 아이의 시선에서 ‘보호자의 부재’와 쓰디쓴 ‘현실’을 환상적 소재인 악마로 풀어낸 영화이다.
상영일정
2025.07.10.(목) 17:40 하늘연극장
2025.07.12.(토) 13:20 CGV 센텀시티 6관
BIKY 2025. 07. 08. (화) ~ 2025. 07. 1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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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되기 위한 세 번째 조건
작가란 누구일까? 작가가 되려면 우선 글을 써야 한다. 작가란 글로 무언가를 짓는(作) 사람이다. 작가의 첫 번째 조건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작가가 될 수 있다. 그냥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수많은 사람이 글을 씀에도 그들이 모두 작가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작가로 인정하려면, 그에게 독자가 있어야 한다. 독자는 작가의 두 번째 조건이다. 우리는 혼자만 읽는 글을 쓰는 사람을 작가라 부르지 않는다. 많든 적든 그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글쓴이는 비로소 작가라는 호칭에 어울리는 사람일 수 있다.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 영화가 말하는 작가의 세 번째 조건은 바로 독자와의 상호성이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조안나 래코프의 책 《My Salinger Year》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작가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J. D. 샐린저(J. D. Salinger)다. 샐린저는 지독할 정도로 대중 앞에 서는 걸 꺼린 것으로 유명한 작가다. 명성에 비해 발표한 작품의 숫자도 적은데 그마저도 철저하고 까다로운 저작권 관리를 받아 접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는 작가 에이전시에 취직해 샐린저를 담당하게 된 조안나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그녀는 은둔자적 삶을 이어가는 샐린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관해 철저히 교육받는다. 제일 중요한 업무는 샐린저에게 온 독자 편지에 응대하는 일인데, 샐린저가 독자의 편지를 받아보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조안나가 적당한 형식에 맞춰 답을 써야 했다. 샐린저에게 오는 편지는 이미 에이전시가 유형화해놓았을 정도로 다양하다. 소설에 감동했다는 독자, 자기 문제에 조언을 요청하는 독자, 인터뷰를 요청하는 언론 등등. 조안나는 샐린저에게 온 수많은 편지를 분류하고 매뉴얼대로 답장해나간다.
그런데 점점 의문이 생긴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수많은 독자의 내면을 강렬히 사로잡았기에 샐린저에게 온 편지도 대부분 절절한 이야기다. 그들은 모두 갈급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인 홀튼 콜필드를 창조해낸 샐린저에게 자기 내면의 혼란을 털어놓으며 교감을 추구한다. 조안나의 고민은 여기서 생긴다. 진정성 가득한 편지에 기계적으로 답변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샐린저의 태도가 적절한지를 고민하는 조안나 역시 샐린저와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안나가 뉴욕으로 온 후, 고향에 있는 그의 남자친구는 연락 없는 그녀에게 계속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조안나는 이를 읽지 않고, 읽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답장도 하지 않는다. 연락이 끊긴 채 멀어져버린 연인에게 쓴 편지의 애절함이 샐린저에게 쏟아진 편지에 담긴 감정에 뒤처질 리 없다. 조안나는 샐린저의 처신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정작 자기 역시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닫는다.
사실 조안나는 작가 지망생이다. ‘지망생’이란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이미 《파리 리뷰》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안나는 그 이후 별 다른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작가’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작가 에이전시에 취업한 것도 이 일이 그녀의 꿈을 본격적으로 펼치는 데 보탬이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에서였다.
영화의 마지막, 조안나는 결국 작가가 되기 위한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다. 샐린저를 품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고, 연락을 끊었던 남자친구와도 만나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는다. 물론 샐린저는 위대한 작가다. 조안나는 그의 작품에 진정으로 감탄하며, 작가로 살아가는 태도와 방법에 관한 그의 조언에 감동한다. 그러나 조안나는 샐린저가 아니다. 샐린저가 독자와 엮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데 반해, 조안나는 고향의 남자친구가 편지 서문에 자신의 애칭을 부른 것만으로도 과거 기억이 떠올라 편지를 읽지 못할 정도로 섬세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다. 직장 상사가 상업적이고 딱딱한 태도로 작가를 대하는 걸 보며 마음 아파하는 장면도 조안나의 여린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
때문에 그녀가 스스로 작가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는 분명 샐린저와는 다른 작가가 될 것이다. 독자의 반응 하나하나에 설레거나 상처받으며, 이를 소중히 품은 채 다음 작품에 그들이 남긴 흔적을 반영할 것이다. 외골수처럼 자기만의 주제를 파고드는 작가도 좋지만, 독자와 함께 호흡하며 작가 주체성‧정체성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가도 좋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복잡한 문학이론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작가의 의미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꽤 흥미로운 영화다.
한편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작가론을 다루는 영화인 동시에 꿈꾸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내가 그랬듯, 많은 사람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조안나의 모습에 위로 받을 것이다. 샐린저의 궤적을 존중하면서도 자신만의 미래를 꿈꾸는 조안나가 만들어갈 미래를 상상하는 게 퍽 즐거웠다.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와 그녀가 선택한 미래를 비교해보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막 어떤 목표를 정하고 본격적으로 매진하려는 초심자에게, 〈마이 뉴욕 다이어리〉가 잔잔한 위로와 재미로 다가갈 것을 확신한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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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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