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지2024-11-20 12:54:50
내가 그렇게 미쳤나요?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
<해시태그 시그네>의 시그네를 지켜보는 것은 불편하다. 시그네의 행동이 때로는 혐오스럽고, 나 같아서 수치스럽다가도 ‘나는 저렇게까지는 안 하지’라며 안도한다. 그러다 때때로 일상의 어느 지점에서 난데없이 시그네를 떠올리곤 한다. 어느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아서, 인정받지 못해서, 나 빼고 다들 잘만 사는 것 같을 때 나는 스스로를 시그네와 동일시한다. 심지어 시그네의 기행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시그네를 설명하자면 어떤 자리에서든 주목받지 못하는 평범함, 유머 감각은 형편없고, 예술가로 주목받는 남자친구를 질투하며, 남자친구에게 향하는 주목을 곧바로 자신에게 돌리고자 견과류 알레르기까지 지어내는 나르시시스트. 이쯤이면 귀엽게 봐줄 만도 하지만 시그네는 관심받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는 위험까지 무릅쓴다. 피부병을 일으키는 불법 약물을 오남용해 주위의 걱정과 관심을 사려는 계획이다. 붉은 발진으로 얼굴이 뒤덮이고 괴사가 진행됐지만 시그네는 만족스럽다. 붕대를 칭칭 감은 모습은 셀카를 찍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다.
이제 시그네는 새로운 관객을 찾는다. SNS에 셀카를 올리고, 기자인 친구 마르떼에게 원인 불명의 병에 걸렸다는 거짓말로 인터뷰 기회를 얻어낸다. 시그네는 가짜 불행을 극복한 서사를 통해 인플루언서가 되는 꿈에 부풀었다. 동시에 시그네는 평소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사람들을 단죄하는 상상을 한다. 그 대상은 이혼 이후로 줄곧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아버지와 병문안을 오지 않았던 친구, 그리고 토마스다. 시그네의 상상 속에서 그들은 유명해진 시그네에게 거절당하고, 애원하고, 사과한다. 나는 시그네의 진짜 욕망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면 주변 사람들도 날 좀 다르게 쳐다봐 줄까? 내 고통에 귀 기울여줄까? 내 가치를 인정해 줄까? 나는 환대받을 수 있을까?
한편 여성 청년의 고립과 그 사회적 맥락을 살핀 책 <이렇게 누워만 있어도 괜찮을까>의 저자는 기존의 ‘은둔’에만 한정되었던 고립 청년의 정의를 확장해 다양한 고립의 양상을 드러낸다. 현실의 고립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외출을 하더라도, 가족과 함께 살아도, 일을 하면서도 고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 고립뿐만 아니라 배제와 차별, 소외의 경험 또한 일상에서 겪는 고립이다. 시그네의 기행이 그저 미친 짓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은 시그네의 삶에서 고립을 봤기 때문이다. 그는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지만 일터에서 열정을 느끼지도 유의미한 관계를 맺지도 못한다. 성장 과정 내내 아버지는 무관심했고, 어머니와는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한다. 친구들에게는 공감을 받지 못하고 가장 가까운 토마스 또한 자기 커리어 띄우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토마스는 절도한 가구를 전시하는 행위 예술가로 주목받는데, 항상 시그네의 도움을 받아 절도를 했지만 영광은 혼자 차지하며 예술계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시그네를 여자 친구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토마스의 곁에서 그림자 같은 존재인 시그네가 인정에 목마른 것은 당연해 보인다. 어디서든 소외된 시그네가 관심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뿐이었다. 자기 자신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 나쁜가, 타인을 도구처럼 이용하며 자신을 아티스트로 포장하는 토마스가 더 나쁜가. 물론 시그네 또한 거짓말을 반복하며 타인을 기만한다. 그러나 시그네의 주변인들 모두 정도만 다를 뿐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도구로 타인을 조금씩 이용하는 건 마찬가지다. 마르떼가 기자의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시그네를 인터뷰한 것은 화제성 있는 기사를 씀으로써 커리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고, 또 다른 고립 청년인 스티안이 시그네에게 불법 약물을 구해다 준은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시그네와 소통하고 싶기 때문이다. 신체 다양성을 강조한 의류 브랜드는 시그네를 모델로 기용하는데, 이 역시 시그네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수준’의 질병과 외모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유효하다. 그들은 시그네가 가진 질병의 이미지만을 차용할 뿐이다.
시그네가 그렇게 미쳤나? 내가 나를 해하지 않은 것은 시그네보다 삶의 안전망을 아주 조금 더 가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을 보살펴주는 가족이나, 열정을 쏟을 만한 일, 건강한 식단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이 될 수도 있다. 토마스의 경우처럼 (포장된 것일지라도) 우연히 가진 재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을 지탱해 주는 안전망은 누구에게나 가변적이다. 누구든 시그네보다 덜 미쳤다면 단지 시그네보다 운이 조금 더 좋았기 때문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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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 아는 당신의 정체는
난 MBTI를 좀 신뢰한다. 솔직히 신기하다. 난 INFJ인데, 나 통찰력이 뛰어난 거 맞는 것 같다. 또 심리학에 관심 있는 것도 맞다. 그래서 어제 은행에서 내 순번을 기다리다가 심리학 책을 읽었다. 또 목적과 의미가 있는 데에 열정적이라는 것도 완전 나에 대한 설명이다. 근데 사실 내가 만나는, 그러니까 좋아하는 누군가가 어떤 유형인지는 관심 없다. 내가 무슨 예언가도 아니고 내 주변 사람들 어떤 쪽인지 맞추는 게 그게 조금만 어렵나? 일단 다른 유형의 MBTI를 일일이 다 외우는 게 아니니까 사전 지식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이유는 '복잡해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스타그램 둘러보기를 쳐다보다 보면 N과 S 유형이 다른 것부터 시작해서 F와 J도 다르고 뭐 가지각색으로 특색이 있다고 한다. 여러분도 이거 다 외우고 다니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지금 컴활 2급이라도 따서 졸업 조건을 맞추는 것도 급한데 이 말이지. 어쩌면 이기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사실 나 편하라고 나의 유형만 외우고 다닌다.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 자신이 내가 추구하는 나만의 개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딱 그거 아니면 MBTI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그거 외에는 이것에 대해 별로 신경을 안 쓰기 때문이다. 타인은 보통 좋은 사람이거나 적당히 좋거나 그저 그렇거나 안 좋은 인간이거나 뭐 그렇다.
분명 나만 이러지는 않겠지. 이런 걸 보면 MBTI과 과연 뭐를 위해서 만들어졌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가벼운 질답일 수도 있다. 당연히 자아성찰이지.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성향인걸 이해하면 미래에 배우자를 찾거나 직업을 가질 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 스스로를 이해하기 쉬우라고 만들어진 MBTI도 사실 반론을 만들라면 충분히 있다. 마치 '혈액형 성격 테스트'와 유사할 것 같은데, 모두에게 있는 대략적인 특성을 예쁜 말로 포장했다고 하면 할 말이 없을지도 모른다. 통찰력이 있거나 목적과 의미가 있는 일에 진심인 사람들은 나 말고도 한 트럭이 있을 테니까. 어딘가에 분류되고 싶은 사람들의 특성을 이용했다고 하면 뭐라 다른 말을 할 수 있을까? 나 역시 그런 욕구를 가진 사람이니 나는 어쩌면 나를 속임으로써 나 자신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다. 에이. MBTI를 욕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우리 모두 사람이라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이해받고 싶어 하는 사람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이 유행의 이면에는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웃긴 마음이 이면에 깔려 있어서가 아닐까 싶기도. 다들 자기가 이렇다는 걸 아니까 세상이 말하는 다른 수작(?)에 넘어가고 싶지 않은 거지. 내가 가는 길이 옳다고 생각하고 싶으니까. 이 심리테스트가 유행처럼 번졌던 2022년 2월의 대한민국에서 1940년대 미국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주인공은 1970년대의 MBTI 매운맛인 '독심술'이다. 그럴듯한 말로 타인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속여 돈과 명예를 가지려 한 남자 스탠튼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1. 어떤 것에 대한 작품인가요?
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의 이름은 스탠튼이다. 이 남자는 무언가를 불태우고 집 밖을 나섰다. 무작정 가출한 스탠튼. 그렇게 독립하면 뭐가 필요해? 당연히 돈이지. 뭐라도 하자 싶어서 서커스단에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지나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지나의 남편은 독심술 전문가다. 신비롭게 암호화되어있는 책이 궁금했던 스탠튼. 지나를 이용해 마음을 눈치채는 독심술을 터득하게 되고, 뉴욕으로 상경해 좋아하던 몰리와 함께 사람들의 부와 명성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영화는 이 스탠튼이라는 남자의 일대기를 다뤘다. 독심술을 어떻게 활용해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지를 묘사한다. 이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서커스단 내부의 치정이나 후반부 릴리스와의 대립이 영화의 주 소재다.
2. 어떤 영화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거짓말에 관한 영화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거짓말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타인을 향한 거짓말이다. 주인공 스탠튼은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철저히 사실에 근거해서 말한다. 예를 들어 난 방금 젤리를 먹어서 손에 달콤한 냄새가 난다. 만약 스탠튼이 내 옆에 있었으면 '이 사람은 군것질을 좋아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 어떻게 알았지' 싶을 것이다. 그리고 내 아빠를 만난다면 내가 사준 신발을 보고 '아들이 뒤늦은 바람이 들었었군요'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스니커즈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를 수도 있지만 나름 무난한 제품을 신고 다니기 때문이다. 스탠튼은 이렇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철저히 사실에 근거한 말을 한다. 그 근거를 통해 사람에 대해 유추하는 것이 적중률이 높은 것이다. 근데 그게 거짓말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를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의 신뢰를 사 돈을 벌고 또 죽은 사람을 이용하며 마치 신기가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철저히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달콤한 말로 타인을 속이는 자에 대한 이야기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다른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텐데, 이는 영화 안에서 확인하길 바란다. 인물들이 어떤 인물을 속이는지를 염두해서 보면 영화에 대한 감상이 넓어질 것 같다. 그게 이 영화를 통해서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인 것 같기도 하니까. 또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염두해야 할 한 키워드기도 한 것 같다.
3. 이 영화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미장센이다. 뭐랄까, 영화의 톤이 전체적으로 어둡다. 어두운 색감이 영화를 이끄는데 이걸 보는 재미도 충분하다. 솔직히 초중반부 영화 빌드업이 고루하다고 느낄 구석이 있다고는 생각하는데 이 화면 예쁜 즐거움이 극을 이끌어가는 부분도 있을 정도다. 원래 크리쳐 묘사 맛집이었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주장기가 빛을 본 셈이다. 특히 영화의 하이라이트 신에서 루니 마라가 눈밭에서 나타난 장면이 기억난다. 그런 청록색의 밤은 몇 시에서 찾을 수 있을까? 뭔가 태어나서 자주 본 적 없는듯한 뒷배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릴리스의 사무실과 어울리는 헤어-메이크업-코디, 검-빨을 활용했던 루니 마라까지 인물 코디 디자인도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꽤나 섬세한 사람일 것 같다.
두 번째. 엔딩이다. 이 글은 스포일러가 없는 글을 표방한지라 구체적으로 뭐라 적을 수는 없다. 또 영화를 보다 보면 예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어느 정도는 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뭘 생각했든 설마? 싶었을 것 같기에 엔딩은 참 곱씹어도 보기 괴로웠다. 치밀하게 설계된 영화의 내러티브가 일품인 작품이었다.
세 번째. 주인공 브래들리 쿠퍼다. 이렇게 한 사람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는 전에도 몇 번 있었다. <아이리시맨>이나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하우스 오브 구찌>까지 당장 생각나는 예시는 이 작품들이 있다. 그럼에도 앞 예시의 영화와 차별성을 갖는 이유는 주인공 때문인 것 같다. 보다 더 비극적이고, 괴로우며 세게 비꼬아야만 하는 작품을 이끌고 갔던 건 브래들리 쿠퍼의 비주얼과 퍼포먼스 때문인 것 같다.
4. 난이도가 있는 영화인가요?
네. 난 난이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용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살짝 잔잔한 구석이 있기도 하고, 얼핏 보기에 비주얼이 쉽지 않은 부분이 있으니 보는 분들은 커피와 박카스를 좀 마시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이 외에는 영화가 어렵지는 않다.
5. 배우들의 연기는 어떠한가요?
3번의 세 번째 문항에서 주인공 브래들리 쿠퍼에 대해 썼지만 다른 배우들도 연기가 좋다. 주인공 루니 마라가 연기한 몰리는 입체적인 사람이다. 오로지 사랑 하나만 보고 온 사람의 심경변화가 잘 드러나는 연기를 해야 한다. 좋은 배우답게 몰리 역을 잘 소화해낸다. 또 다른 좋은 퍼포먼스는 조연의 윌렘 데포다. 이 사람이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라이트하우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에도 출연했다는 사실이 놀라운 현실주의적 연기법이었다. 뭐 둘의 연기가 아니더라도 다른 배우들도 좋았다. 케이트 블란쳇이나 토니 콜렛은 사실 좀 보던 느낌이긴 했지만.
6.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나요?
없다. 굳이 원작을 보고 가지 않아도 될 듯?
7. 어떤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나요?
이 글을 쓰는 지금 2월 27일, 언제 여러분이 이 영화를 볼지는 모르겠다. <더 배트맨> 개봉이 3일 정도 남아서 극장 상영관이 부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배트맨>을 보기 전에 극장에 가고 싶은 분들이라면 강추한다. 또 감독의 전작 <판의 미로>처럼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취향인 분들에게도 추천한다. 어쩌면 동화와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잔혹하게 전개하는 맛이 일품이다. 또 아마 디즈니 플러스에도 올라올 것 같기 때문에 차후에 올라오는 영화를 OTT 유저들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 루니 마라 예쁘게 나온다. 그녀의 팬들은 필견 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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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주 차 개봉작, 공개 예정작 추천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기대작으로 많이 언급되고 있는 <비상선언>의 개봉부터
수많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주원 주연의 <카터>의 공개까지!!
그럼 8월 첫째 주에는 어떤 영화가 기다리고 있을지!
더 자세히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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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개봉 영화
비상선언
ⓒ 네이버 영화
개요: 드라마 | 한국 | 140분
감독: 한재림
출연: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등
개봉: 2022.08.03
배급: (주) 쇼박스
줄거리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재난 앞에 선 사람들 각각의 감정과 드라마를 담고 있다.
관전 포인트
대한민국 대표 배우들이 모두 출연하는 <비상선언>은 칸 영화제에서 호평 세례를 받은 작품이다.
영화에서 한재림 감독이 중점을 둔 건 바로 '사실감'이다. 이를 위해 360도 회전하는 비행기 세트를 구현하고,
짐벌을 이용해 움직임을 주며 촬영하는 등 사실적이게 찍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의 우주소전쟁 리틀스타워즈 2021
ⓒ 네이버 영화
개요: 애니메이션 | 일본 | 109분
감독: 야마구치 스스무
출연: 윤아영, 김정아, 이현주 등
개봉: 2022.08.03
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줄거리
여름방학 어느 날, 진구가 주운 작은 로켓 안에서 손바닥만 한 우주인 ‘파피’가 나타난다!
우주의 머나먼 곳에 있는 작은 별 ‘피리카’의 대통령인 그는 반란군에게서 도망쳐 지구에 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너무 작은 ‘파피’의 사이즈에 당황하던 도라에몽과 진구는 비밀도구 ‘스몰 라이트’로 작아져서함께 놀며 친구가 된다. 그러나 고래 형태의 우주전함이 ‘파피’를 붙잡기 위해 지구에 나타나 이들을 공격하고,
모두를 끌어들인 것에 책임감을 느낀 ‘파피’는 홀로 반란군에 맞서고자 하는데…관전 포인트
도라에몽의 41번째 시리즈인 <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의 우주소전쟁 리틀스타워즈>은
국내에서 공개하지 않은 도라에몽 시리즈 중 <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의 우주전쟁>을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어린이부터 어른이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영화이다.
OTT 공개 예정작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 네이버 영화
개요: 멜로 | 미국 | 120분
감독: 존 추
출연: 콘스탄스 우, 헨리 골딩, 양자경 등
공개: 2022.08.03
스트리밍: 넷플릭스
줄거리
뉴요커 레이첼은 남자친구 닉의 절친 결혼식이 열리는 싱가포르로 향한다. 처음으로 아시아를
방문한다는 설렘도 잠시, 닉의 가족을 만난다는 사실이 걱정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닉이
싱가포르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자 모두가 선망하는 결혼 후보 1순위 신랑감이었던 것.
레이첼은 사교계 명사들의 질투와 더불어 본인을 영 탐탁지 않아하는 닉의 어머니의 타겟이 되는데…
관전 포인트
<스텝 업> 시리즈, <나우 유 씨 미 2>, 그리고 최근 <인 더 하이츠>의 연출을 맡았던 존 추 감독의 작품. 제24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에서 코미디 영화상을 수상했으며, 로튼 토마토 신선도 지수 91%를 차지했다.
버즈 라이트이어
ⓒ 네이버 영화
개요: 애니메이션 | 미국 | 105분
감독: 앤거스 맥클레인
출연: 크리스 에반스, 타이카 와이티티 등
공개: 2022.08.03
스트리밍: 디즈니+
줄거리
미지의 행성에 고립된 인류를 탈출 시키기 위한 ‘버즈’와 그의 정예 부대 요원들의 운명을 건 미션 수행을 그린 작품
관전 포인트
<토이스토리>의 인기 캐릭터 '버즈 라이트이어'의 이야기를 담아냈고, '저그'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드러나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리고 크리스 에반스가 보이스 캐스트로 참여하여 기대감을 높였다.
카터
ⓒ 넷플릭스
개요: 액션 | 한국 | 133분
감독: 정병길
출연: 주원 등
공개: 2022.08.05
스트리밍: 넷플릭스
줄거리
의문의 작전에 투입된 `카터`가 주어진 시간 안에
자신을 되찾고 미션을 성공시켜야만 하는 리얼 타임 액션.관전 포인트
<악녀>의 정별길 감독이 새롭게 선보이는 영화 <카터>는 한층 더 커진 스케일로 화려한 볼거리와 액션을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주원 배우의 가장 강렬한 변신을 선보일 것으로 보여져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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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멸망했지만, 아이는 자란다
세상은 항상 변하고 있다. 28년 전과 지금을 나란히 놓고 보면, 전혀 다른 시대처럼 느껴진다. 기술이 바뀌고, 말투가 바뀌고, 사람들의 태도도 바뀌었다. 무엇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이 느끼는 감정의 결도 완전히 달라졌다. 변화란 겉으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감정도, 생각도, 그걸 담아내는 방식도 점점 다르게 진화해왔다.
영화 <28년 후>는 그런 변화의 끝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다. 28년 전 바이러스가 퍼졌던 영국은 아직도 멸망 직전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고, 어른이 된다. 12살 소년 스파이크(알피 윌리엄스)는 섬에서 자라며 사회의 끝자락을 살고 있다. 본토는 여전히 감염의 위험이 남아 있지만, 그곳으로 나아가는 건 일종의 성장 통과의례처럼 여겨진다. 밀물이 빠질 때 잠시 드러나는 길 하나를 통해 본토에 갈 수 있다. 영화는 그 위험한 여정의 시작과 함께, 스파이크가 처음으로 느끼는 ‘진짜 삶’의 감정들을 풀어낸다. 그것은 생존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성장을 둘러싼 아주 깊고 복잡한 감정의 이야기다.
[첫 번째 감정] 스파이크의 두려움
스파이크가 처음 본토로 나가는 장면은 단순한 탐험이 아니라 하나의 통과의례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발을 내딛는 그 길 위에서, 그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실감한다. 아직 어린 나이의 그는 좀비보다도 그 공기 자체를 무서워한다. 밀물이 빠져 생긴 좁은 길을 따라 도달한 본토는 텅 빈 폐허처럼 보이지만, 언제 어디서든 위험이 튀어나올 수 있는 불확실한 공간이다. 아버지는 그런 두려움에 익숙해지라고 말하지만, 익숙해진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스파이크는 실제로 좀비를 마주하고, 놀라고, 실수하고, 덜덜 떤다. 그 긴장은 그의 몸 전체를 휘감고, 카메라는 그 떨림을 아주 가까이에서 따라간다.
그러나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그 두려움이 단일하지 않다는 데 있다. 영화 후반부, 스파이크가 또다시 본토로 돌아가려는 이유는 단순한 모험심이 아니다. 이제는 병든 엄마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두려움’이 그를 이끈다. 그는 이제 안다. 세상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잔혹하고,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상실을 감당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다.
이렇게 두려움은 점점 형태를 바꾼다. 좀비에 대한 공포에서, 가족을 잃는 상실의 공포로. 그리고 결국 그 두려움은 스파이크를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게 한다. 그는 다시 본토로 향한다. 그건 누가 시킨 일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다. 아마도 그 순간, 우리는 스파이크가 더 이상 아이가 아님을 알게 된다.
[두 번째 감정] 엄마 아일라의 사랑
스파이크의 엄마 아일라(조디 코머)는 몸 어딘가가 아파서 늘 정신이 흐릿하다. 때로는 현실과 환상을 오가고, 어떤 순간엔 스파이크를 자신의 아버지로 착각하기도 한다. 이건 단순한 증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기억이 흐려져도 여전히 사랑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스파이크를 향한 진심이다. 아일라는 늘 말한다. 자기가 짐이 될까봐 두렵다고.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고.
영화 중반, 아일라는 스파이크와 함께 본토로 향한다. 아들 스파이크는 엄마를 치료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아나서는데, 아일라는 그곳에서 무언가를 되찾고 싶은 듯한 표정이다.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한 재회를, 환상 속에서는 잠시 이룰 수 있으니까. 어쩌면 아버지와의 재회를 꿈꿨을지 모른다. 늘 그리웠던 자신의 보호막이자 따뜻한 존재가 바로 아버지 였끼 때문이다. 마치 스파이크는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한듯이, 본토로 건너간 순간부터 엄마를 보호하는 어른이 된다. 아이가 부모를 지키려는 이야기는 언제나 마음속에 긴장을 만든다. 12살의 아이에게는 너무 가혹한, 그건 스파이크의 슬픈 성장일 것이다.
아일라의 마지막 선택은 너무도 조용해서 오히려 울림이 크다. 그녀는 스파이크에게 남겨지는 삶을 선물한다. 그것은 물리적인 보호를 넘어서, 감정의 자립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선물이다. 죽음 앞에서도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는다. 아일라는 그렇게 아들의 가슴에 살아남는 것을 택한다. 그건 스파이크에게 선사한 마지막 사랑일 것이다. 스파이크가 어떤 어른이 되든지, 늘 마음 한 켠에는 엄마가 살아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사랑은 세상에 남았다.
[세 번째 감정] 닥터 켈슨의 통찰
영화 후반, 스파이크는 닥터 이안 켈슨(랄프 파인즈)을 만난다. 그는 짧게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핵심 주제를 건네는 인물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모든 것을 망가뜨린 이 세상에서, 켈슨은 여전히 죽은 이들을 존중한다. 그는 '죽음은 끝이 아니며, 기억 속에선 살아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종교적이지도, 철학적이지도 않다. 그냥 삶을 오래 살아낸 이의 태도다.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다리 위에 선 듯한 인물.
켈슨은 스파이크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어린아이라고 해서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보다 성숙한 감정의 언어로 스파이크를 대한다. 이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스파이크의 성장에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멘토로 기능한다.
그가 보여주는 존중은, 단지 타인을 향한 예의가 아니다. 감정, 상실, 죽음, 존재. 그 모든 것에 대한 태도다. 그걸 지켜보는 스파이크는 다시 한 번 선택을 하게 된다.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의미를, 이 인물을 통해 비로소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건 좀비 영화가 아니라, 성장 영화다
<28년 후>는 <28일 후>와 <28주 후>와 결을 완전히 달리하는 작품이다. 겉으로 보면 바이러스와 좀비가 등장하는 디스토피아 영화이지만, 정작 영화는 좀비 액션보다 인물들의 내면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래서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를 성장 드라마로 바라본다면, 그것만으로도 꽤 훌륭하다. 누군가의 감정은 이렇게 위험한 공간에서 피어난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영국만이 감염되었다는 설정은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을 떠올리게 한다. 혼자 살아남았지만 더 고립된 땅. 이런 설정은 꽤 매력적이며, 이후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보다 현실 정치와 맞닿는 이야기로 확장될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영국 내의 상황 뿐아니라 외부의 이야기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엄마 아일라를 연기한 조디 코머는 극 중에서 매우 복합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흐려진 정신 속에서도 아들을 향한 진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닥터 켈슨 역의 랄프 파인즈는 아주 짧은 등장만으로도 이 영화가 단지 생존기 이상의 것임을 증명한다. 그가 등장하는 순간 영화의 무게감이 달라진다. 그의 연기가 영화의 메시지를 진중하게 전달한다. 대니 보일 감독 특유의 빠른 편집과 강렬한 영상, 사운드의 조화는 여전히 살아있다. 스파이크의 감정 변화는 시선의 흔들림, 호흡의 깊이까지 섬세하게 따라가며 관객에게 감정적으로 밀착하게 되는데, 여기에 감독의 편집과 연출력, 사운드가 더욱 더 영화의 감정에 몰입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 거대한 화면과 소리에 의해 그들의 감정이 더욱 가깝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직 국내 개봉 후 호불호가 극단으로 갈렸기 때문에, 국내 흥행은 미지수지만, 시리즈 전체의 시작점으로서 <28년 후>는 글로벌 흥행성적만 놓고 보면 꽤 인상적인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영화 속 그 한 걸음이, 다음 세대를 향한 희망의 시작이기를 바란다. 영화가 끝난 이후, 시리즈의 다음편을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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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능성의 우주 속 현대인의 우울, 그리고 자기혐오
Ⅰ. 모든 것이 가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2022년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은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을 다중우주라는 SF적 요소를 통해 환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전세계에서 제작비의 4배가 넘는 1억 달러 이상을 벌어 들이면서, 명실상부 올해 ‘예술영화’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주·조연 배우 모두 동양인으로 가득 채운 신인 감독의, 난해하다면 다소 난해한 SF 영화가 이다지도 평론과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모든 것이 가능한’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가 겪는 멜랑콜리가 세대와 성별, 국적을 가로질러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관객의 마음을 관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차별이 철폐된 건 아니지만,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을 상정한다. 성별에 따라, 인종에 따라, 계급에 따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명확히 구분되었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들은 ‘노력과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있다. 하지만 이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이곤 한다. 이들에겐 세탁기 속 옷처럼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아줄 그 어떤 대책도, 계획도, 보호 장치도 없기 때문이다. 한병철 교수는 이러한 가능성의 사회를 ‘피로사회’ 규정하면서, 현대인들이 흔히 겪는 무력감, 자기 소진 등을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긍정의 세계는 부정의 변증법, 즉 적대성을 전제하지는 않지만, 대신 ‘내재성의 테러’라는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를 좀먹는 새로운 폭력을 양산한다. 달리 말해,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아무런 주권도 지니지 못한 채,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따라서,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존재하는 우울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웨이먼드를 따라가면 연을 끊겠다는 아버지의 불호령을 무시하고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온 지도 벌써 수십 년째건만, 오프닝 시퀀스 속 에블린의 삶은 여전히 고난의 연속이다. 철저히 관찰자 시점에서 카메라는 국세청 세무 조사를 위해 책상을 모두 덮을 만큼 쌓인 영수증과 자꾸 대화를 보채는 남편, 아픈 아버지와 여자친구를 데려온 딸, 세탁소 손님들의 각종 요구를 응대해야 하는 에블린의 일상을 훑는다. 각박한 에블린의 삶은 젊었을 적 꿈꿨던 아메리칸 드림과는 멀어도 한참 멀지만, 에블린은 아버지에게 조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애써 숨기고, 남편의 대화 요청을 무시하면서 꾸역꾸역 자신의 환상 속 정상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이미 삐걱거리는 에블린의 가족상은 에블린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다시 돌아가기’ 쉽지 않다. 이것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는 피로사회의 모습과도 닮아있지만, 동시에 ‘잔혹한 낙관주의’의 결과이기도 하다.
로랜 벌랜트는 “실현 불가능하여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거나, 혹은 너무나 가능하여 중독성 있는 타협된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애착 관계”를 ‘잔혹한 낙관주의’라 명명하면서 애착 대상이 “심지어 자신의 안녕을 위협할 때조차 대상의 상실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에서 잔혹하다”라고 설명한다. 에블린의 애착 대상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끊임없이 광고하는 신자유주의적 ‘아메리칸드림’이다. 에블린을 여태껏 버티게 한 이 환상은 아직 상실되지 않았지만, 상실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에블린의 삶 자체를 무너뜨릴 만한 강한 정동을 유발하기에 에블린은 ‘가능성’의 조건에 집착한다. 언젠가는 자신의 환상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현실의 고통을 인내하지만, 세상은 에블린이 원했던 성취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아메리칸드림 -그리고 정상 가족-에 대한 에블린의 집착은 남편과 대화를 거부하게 만들고, 딸의 여자친구를 아버지에게 소개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족의 균열을 심화시킬 뿐이다.
벌랜트는 잔혹한 낙관주의가 ‘정치적 우울’을 유발한다면서, 잔혹한 낙관주의로 인한 정치적 우울은 “다루기 힘든 세상의 난관에 대한 냉담, 냉소, 무관심 등의 정동적 판단 속에 집요하게 남아있다” 라고 설명한다. 영화의 초반부 에블린이 모든 사람에게 무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이는 것은 견디기 힘든 난관을 헤쳐나가는 에블린 나름의 방어 기제이자, 잔혹한 낙관주의가 유발하는 우울이 초래한 것이다. 우울증은 이렇듯 개인에게 부과되는 원칙적인 제약이 없을 때만 발병한다.
계급, 인종, 성별에 따라 차등적인 가능성을 부여받았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은 법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이러한 가능성을 다중우주라는 과학적 개념을 통해 극단적으로 확장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버스 점프’ 라는 기술을 이용해 다중우주, 그러니까 드넓은 ‘가능성’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데, 이 다중 우주는 수천, 수만 명의 에블린 중 최악의 삶을 사는 중인 우리의 에블린에겐 기회의 땅이지만, 조부 투파키에겐 긍정성의 과잉이 초래한 병리적 허무주의의 세계에 불과하다.
SF가 과학적 외삽을 통해 현재의 사회 규범을 재고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버스 점프 기술은 에블린의 삶을 중지시키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버스 점프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던 세무 조사를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그 누구보다 가깝다고 여겼던 가족과의 관계를, 더 나아가 나라는 사람이 현존하는 시공간 자체를 낯설게 만든다. 영화는 에블린의 시점 쇼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숏-역숏 기법을 사용할 때도 늘에블린의 뒷모습을 프레임에 넣으면서 관객이 에블린과 동일시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렇듯 버스 점프라는 기술이 촉발한 중지의 사유는 관객이 철저히 에블린의 삶을 ‘관찰’함으로써 관객자신의 일상에 ‘노붐 Novoum’을 가져오는 효과를 낳는다.
타자의 이미지를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한다는 관점에서, 영화 속 거울 이미지는 라깡의 거울 단계를 떠올리게 한다. 거울 속 나의 이미지는 외형적으로 ‘나’와 닮았지만, 현존재로서 ‘나’와는 다르다.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 아이는 사실 타자적 이미지인 거울 이미지를 진정한 자신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첫 장면은 함께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는 에블린 가족의 거울 이미지로 시작한다. 에블린은 이 거울 이미지, 그러니까 정상 가족이라는 자신의 환상이 투사된 이미지를 현실이라고 믿지만, 불이 켜지고 반사된 이미지 속엔 가득 쌓인 영수증을 정리하는 고단한 에블린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내, 진짜 남편인 웨이먼드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불쑥 나타나 에블린을 부른다. 거울 이미지는 에블린의 현실이 아니라고, 그래서 이제는 잔혹한 낙관주의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그러므로 에블린과 관객 사이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미묘한 어긋남은 거울 이미지가 사실 환상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장치이다. 영화가 선사하는 중지의 미학은 ‘모든 것 everything’의 세상에서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관객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Ⅱ. 상실이 유발하는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
프로이트는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 또는 사랑하는 사람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무언가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한다. 흔히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우울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 심지어는 실존하지 않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잃었을 때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삶은 필연적으로 상실을 수반한다. 어쩌면 삶 자체가 무언가를 상실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모든 등장인 물은 무언가를 상실하고, 그래서 슬퍼한다. 커다란 모자 속에 너구리를 숨기고 함께 요리하던 요리사는 너구리를 뺏기고, 국세청 직원은 남편과 이혼하며, 손이 소시지로 변해버린 평행 우주 속 에블린은 연인과 이별한다. 가족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없는 조이는 정체성을, 그 모든 평행 우주 속 가능성 속에서 조부 투파키는 삶의 목적을 상실한다.
사람은 누구나 상실을 겪지만, 누구나 우울한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슬픔과 우울의 유일한 차이점을 자애심(自愛心)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슬픔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빈곤하고 공허해지지만,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는 “자아가 빈곤해지고 공허”해진다.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아. 그래서 “비난하고 처벌하고, 추방”해야 하는 자아. 영화속 등장인물들을 불안, 분노, 좌절과 같은 다른 부정적 감정이 아닌 ‘우울’로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 혐오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들은 “상실의 리비도를 자아에 통합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공격” 한다는 점에서 ‘우울’하다.
국세청 직원은 욕을 섞어가면서까지 자신이 받은 상을 과시하고, 과도할 정도로 깐깐하게 세무 조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과시는 결핍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떠들어대는 인물의 내면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가 자리한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비난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다. 4655번째 평행 우주에서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의 열렬한 신자로, 에블린을 찾아 죽이려고 한다. 그녀의 이마엔 방금 ‘진짜’ 에블린의 세상에서 영수증에 싸인 펜으로 그린 원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4655번째 평행 우주의 에블린을 때려눕힌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가 “사람들의 본질과 그들의 자존감(self worth)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알고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전지전능함 앞에서, 쓰러진 에블린 앞에 인질로 잡힌 직원들은 나약한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조부 투파키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 앞에서 한 개인의 무력함을, 자기 자신의 쓸모없음을 이해해 줄 단 한 명의 에블린을 찾아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다.
미친 사람처럼 우주를 누비며 학살을 일삼는 조부 투파키는 단순히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에블린에게 화가 난 것도, 이 세상에 절망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무인 세계로 돌아가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 파괴적 ‘열광’은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우울증 환자의 조증과도 같다. 조부 투파키는 마치 구원을 원하는 듯이 자신의 우울을 이해할 수 있는단 한 사람, 에블린을 애타게 찾아다닌다. 그리고는 마침내 찾은 ‘그’ 에블린에게 자기와 함께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자고 말한다. 세상을 호령할 수 있음에도 무의 세계로 자멸하려는 조부 투파키의 모습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무기력증에 빠지고 마는 현대인과 닮아있다. 그의 멜랑콜리는 평행 우주 속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무엇이든 ‘될’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진화 과정에서 인류의 손가락이 소시지가 될지언정, 어떤 평행 우주에서도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가능성의 우주에서조차 나는 ‘고작’ 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자기혐오. 조부 투파키는 자기의 삶이 거대한 세상 속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허무나 좌절의 외침이 아니다. “어디든 갈 수 있잖아. 그냥 가 버려. 딸이 ‘이것’보다는 더 나은 세계로.” 모든 것이 가능해서,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세상을 탓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비난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특별함은 엄마를 영웅으로, 딸을 빌런으로 내세운 줄거리에서 모성애의 아름다움이나 애증의 모녀 관계를 넘어, 현대인의 고질적인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를 그려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이것’보다는 딸을 찾아 떠나라고 외치는 조부 투파키의 멜랑콜리는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겹쳐 새로운 정동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버틀러는 젠더 이상과 현실적인 젠더 사이의 차이에서 젠더 규범을 전복할 수 있는 저항성을 찾아냈지만, 동시에 그런 저항은 우울증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상실의 내면화는 상실의 부인이 되고, 상실의 거부는 우울증이 된다. 만약 상실의 대상이 동성애라면, 동성애적 리비도 집중은 죄의식을 수반한다. 이렇듯 우울증적 주체는 상실의 대상이 무의식화되어 있으므로 드러내는 애도를 통해 상실을 ‘해소’할 수 없다.
할아버지에게 여자친구를 ‘좋은 친구’라고 설명하는 에블린에게 화가 난 조이는 차를 타고 세탁소를 떠나려고 한다. 에블린은 조이를 불러 세우지만, 옴싹달싹 움직인 입에서 내뱉은 말이라곤 ‘살 좀 빼’라는 핀잔뿐이다. 조이는 평생을 중국에서 살아온 할아버지에게 거리낌 없이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드러냄으로써 이성애 중심의 ‘정상 가족’에 끊임없이 저항한다. 그러나 버틀러의 지적처럼, 고착화된 젠더 규범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는 자기혐오적 멜랑콜리를 수반 한다. 에블린의 아버지에게 에블린은 늘 ‘무엇 하나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변변찮은 딸’이었 고, 따라서 퀴어라는 정체성은 에블린에게 있어 숨겨야만 하는, 수치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 다. “나르시시즘과 죄책감, 수치심”을 동반하는 자기혐오는 오랜 시간 “성적 타자로서 차별적 배제와 억압적 대우를 받은 결과”이다.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성적 타자로서 자기혐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와는 분명 다르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조이는 주체의 세계에서 배제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둘의 우울을 한 장면에 겹쳐 놓는다. 데칼코마니처럼 수미상관을 이루는 두 장면은 차 문을 열고 떠나려는 조이를 에블린이 붙잡는 구도로 촬영되었다. 파란 옷과 붉은 옷, 대낮과 한밤, 우울과 열광. 동전의 양면처럼 조부 투파키와 조이는 이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경험을 겪지 않고도 소외되고 차별받고 배제되는 타자에게 먼저 손내밀 수 있다. 그들이 느끼는 우울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우리도 충분히 느끼고 있으므로. 상대방이 우울하다는 사실, 그 자체를 온몸으로 맞이할 때, 비로소 타자를 향한 손짓이 시작될수 있다.
Ⅲ. 우연의 접촉이 만들어낸 정동의 이행
영화는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혐오적 우울에 찌들어 있다고.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현대인의 멜랑콜리를 드러내는 데 그쳤다면 이렇게 호평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3부 ‘올 앳 원스’는 모든 것, 모든 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는 찰나의 순간이 소중함을 설파하면서, 몸과 몸의 ‘접촉’을 통해 자기혐오로부터 타인을 구원하는 몸짓을 선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몸짓’은 언어로는 포착될 수 없다. ‘손가락이 소시 지인 인간이 발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라는 설명은 엽기 코믹 영화를 소개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이는 영화가 서사 매체로서 앞뒤 문맥에 따라 관객이 느끼는 감정적 반응과는 별개로, 언어적 묘사나 대사 사이를 빠져나가는 정동적 ‘잉여’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와 들뢰즈에서 기원한 정동은 세 가지 다른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전이 로서의, 그리고 우리가 휘말리게 되는 비인격적, 또는 전인격적(pre-personal) 힘의 운동으로, ‘인간이 인간 아닌 모든 것과 공유하는 것의 한계 표현, 즉 사물에 자신을 포함하도록 하는 것’으로서 정동이다. 두 번째는 좀 더 인격적인 정동으로, 정동적 강도들이 신경계로 들어와 종국에는 인지하게 되는, 즉 인격체의 표상으로서 정동이다. 세 번째로 정동은 “정동을 촉발하고, 정동이 촉발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때 정동은 끊임없는 변주 속에서 “전이”하며 고정된 상태가 아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정동은 무엇보다,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촉발되는 강도 또는 힘을 의미한다.
조부 투파키가 보여준 베이글과 마주한 에블린은 자신의 인생이 빙빙 도는 무의미한 하루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사소한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인생의 궤적은 어느 우주에서는 중요하게 느껴지지만, 다른 우주에서는 ‘바다에 휩쓸릴’ 모래 알갱이일 뿐이다. 에블린은 베이글이 촉발한 이 모든 우울과 공허함, 자기혐오의 감정을 타인에게 쏟아낸다. 모든 것이 무상한 세상에 서는 타인의 의견과 감정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에블린은 이혼 서류에 서명하고, 너구리를 고발하고, 웨이먼드를 유리 조각으로 찌르고, 세탁소를 부수고 결국엔 돌이 되기를 택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은 자의 첫 발걸음이 고작 타인을 향한 공격이라는 게? 인생의 경로를 마구잡이로 활주하는 조부 투파키와 달리, 우리가 고작 '이따위’로 살게 된 데엔 차마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전인격적 정동이 작용한다. 운명과도 같은 전인격적인 힘에 계속해서 부딪히면서, 인간은 또한 언어로 굳어진 감정을 인지한다. 아마 에블린은 베이글을 보면서 좌절과 혼란과 절망과 분노와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차마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이 영화처럼, 몸과 몸의 우연한 접촉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 힘의 연속체이기도 하다. 세탁소를 압류하러 찾아온 국세청 직원은 웨이먼드와 몇 마디 나눈 후, 난동을 피운 에블린을 풀어주라고 말한다. 에블린이 어떻게 했냐고 묻자, 웨이먼드는 그냥 얘기했을 뿐이라고 답한다. 조부 투파키는 갑작스러운 인생의 흐름이 단지 확률적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웨이먼드의 울음기 어린 눈망울에서, 지친 듯 떠나는 국세청 직원의 발걸음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에블린이 깨뜨린 유리 조각을 치우며 웨이먼드가 부르는 노래에서 에블린은 운명의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이, 곧 있으면 휩쓸릴 모래 알갱이에 불과한 찰나의 순간이 소중한 이유를 발견한다.
세상은 전례 없이 넓어졌다. 버스 점프라는 기술 없이도 누구든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삶을 엿볼 수 있게 되었고, 역경을 딛고 성공한 사람의 사례는 매일같이 SNS와 인터넷을 떠돈다. 에블린이 겪는 우울과 절망은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우리가 느끼는 우울과 절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싸우고, 욕한 뒤,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느낀다. “친절해야 한다”라는 웨이먼드의 외침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에블린을 부름으로써 촉발했던 중지의 사유가 관객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했던 것처럼, 내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남을 공격하는 이상한 작태를 성찰하게 한다. 그러나 이 ‘친절’은 표면적인 다정함이나 기계적인 배려를 의미하지 않는다. 웨이먼드의 친절은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적 우울까지 모두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자,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몸짓이다. 영화 속에서 웨이먼드가 국세청 직원에게 정확히 무슨 뭐라고 말했는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타인을 존중하는 웨이먼드의 태도가 잔혹한 낙관주의의 냉소를 끊어낼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이글을 마주한 조부 투파키와 그의 추종자, 그리고 에블린은 모두 우울의 정동에 속박되어 있다. 무엇을 상실했는지도 모른 채 욕망하기를 포기하고 자기 파괴의 충동으로 나아가는 조부 투파키는 이 모든 가능성 속에서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고 외친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하면 그 모든 가능성 속에서 우연히도 너와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마주하고 있음을 경탄하는 표현이다. ‘모든 가능성’은 행복을 줄 수 없다. 전지전능한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현재에 집중하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괴롭다는 이유로 타인을 공격하는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괴로워도 타인에게 다가설 줄 아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그게 웨이먼드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온 방식이다.
조부 투파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에블린은 웨이먼드에게 부와 명예, 권력을 주는 대신, 웨이먼드를 안아준다. 몸과 몸의 접촉. 그 사이를 흐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힘. 변주하고 흐르고 이행하는 정동의 물결. 혼란스럽고 무서운 세상에서 벗어나 차라리 돌이 되기를 택한 에블린처럼, 우연의 접촉이 행복을 향한 열쇠였음에도 우리는 꿋꿋하게 거리 두기를 고집해 온 것은 아닐까? 단지 포옹 한 번이면 해결될 일을 애써 말로, 문자로 표현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몸과 몸의 접촉만큼이나 타인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또 있을까. 에블린은 영화가 시작한 지 장장 두 시간 만에, 처음으로 미소 짓는다. 에블린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은, 조부 투파키가 그토록 갈구하던 삶의 의미는 타인과의 우연한 접촉에 있다.
조부 투파키는 그 접촉마저도 금방 사라질 것이라며 비웃는다. 에블린은 공격을 멈추고 ‘이 멍청한 세상에서도 언제나 사랑할 존재가 있다’라며 모든 우주의 국세청 직원을 껴안는다. 총알은 곧 철없는 남편이 세탁소 곳곳에 붙여 두던 눈알 스티커로 변하고, 에블린 자신의 이마와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에게 스티커를 쏜다. 생채기를 내거나 박히지 않고 찐득하게 들러붙는 스티커의 감촉은 웨이먼드의 친절함과 맞닿아 있다. 타인이 접촉을 거부하는 그 순간에도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접촉의 몸짓. 영화는 그제야 에블린의 시점에서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들을 훑는다. 그러나 이 시점은 에블린의 두 눈이 아닌 멍청함으로 가득한 찰나의 순간에도 사랑을 찾을 줄 아는 ‘스티커’의 시점이다.
이마 한가운데 눈알 스티커를 붙인 에블린은 자신을 공격하는 추종자들과의 신체적 접촉, 즉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긍정의 감정을 이행(移行, passage)한다. 이 장면에서 접촉은 그것이 키스이든, 골절된 뼈의 접합이든, 향수의 감각이든 간에 신체의 오감을 포함하는 감각의 이행으로 확장된다. 에블린과 접촉한 사람들은 싸우려는 의지를 잃고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지는데, 이때 그들이 느끼는 정동은 손으로 움켜쥔 모래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사이로 빠져나간다. 영화 속 등장인물만 에블린의 정동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영화를 단지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라는 비비안 섭책의 말처럼, 관객은 배우의 표정과 음악, 조명, 미쟝센, 촬영, 편집, 그리고 이 모든 게 뒤섞인 영화의 쇼트를 “자신의 몸을 통해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Ⅳ.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세탁기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옷가지와 영수증 위에 어지럽게 그려 놓은 동그라미, 그리고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까지. 1부 ‘모든 것 Everything’을 상징하는 ‘원’은 영화의 형식과 내용을 관통한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는 결말은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는 원과 같다. 잔혹한 낙관주의에 빠졌던 에블린은 여전히 낙관주의에 골몰한다. 그러나 에블린이 낙관적으로 붙잡고 있는 대상은 에블린이 손을 놓으면 언제든 깨져버릴 유약한 환상이 아니다. 에블린의 아빠는 “너는 내 딸이 아니”라며 에블린을 무시하지만, 에블린은 아빠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에블린 스스로 마침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조이가 자신처럼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빠가 했던 것처럼 조이를 에블린의 시선에서 재단하고 ‘정상’과 ‘행복’의 범주에 끼워 맞추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에블린은 자신의 전지전능한 힘 대신, ‘끌어안음’을 통해 조부 투파키를 베이글로부터 구원한다. 조부 투파키/조이는 이 마지막 접촉조차 거부하지만, 에블린은 그런 조부 투파 키/조이에게 다가가 조이에게 ‘살 좀 빼’라고 잔소리를 퍼붓는다. 에블린이 미치광이 같은 조부 투파키의 눈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는’ 외침을 읽은 것은 에블린 역시 똑같은 상처를 아버지에게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무한히 반복하는 우리의 일상처럼,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똑같아 보이는 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엔 울퉁불퉁한 굴곡이 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원에 티끌 같은 점이라 해도, 우연의 접촉이 낳은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는 특별하다. 에블린이 그 티끌 같은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말하자, 허무주의의 베이글 속에서 손을 뻗는다. 손과 손, 눈빛과 눈빛, 사과와 사과, 돌과 돌, 행성과 행성. 때로 몸과 몸의 접촉은 지옥과도 같은 끔찍한 형상이지만, 이 끔찍한 세상을 살아가게 해주는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삶의 조건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쌓여 있는 영수증을 제출해야 하며, 에블린은 잔소리를 퍼붓고, 조이는 여자친구를 사귄다. 원처럼 다시 돌아온 시작점에서 영화는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노래한다. 그것은 에블린의 잔소리처럼 쌉싸름하고, 웨이먼드와의 키스처럼 달콤하며, 국세청 직원의 핀잔처럼 짜다. 그 무언가는 모든 가능성의 확률을 뚫고 지금, 바로 여기에서 너와 내가 만났기에 가능한 기적이다. 붉은 옷 대신 푸른 옷을 입고 다시 돌아온 국세청 사무실에서, 에블린은 다시 한 번 묻는다. “죄송해요. 방금 뭐라고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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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2021)> 리뷰
《박강아름 결혼하다(2021)》는 정직한 이름표를 단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영화를 감상하기 전, 우리는 제목으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주인공이 박강아름이라는 사람이라는 것, 그가 결혼을 했다는 것, 이에 따라 다큐멘터리의 테마는 ‘결혼’이라는 점. 그런데 재미있는 건, 결혼 생활에서 나타나는 일을 기반으로 하하호호 예쁜 프랑스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3유로 커피를 사치라고 부르는) 적나라한 삶의 단편을 엮어낸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게 감독이자 출연진인 박강아름은 자신만의 방식과 시각으로 왜 자신이 결혼을 했는지를 추적해보고, 결혼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거대한 시놉시스가 있는 것은 아니나, 다큐멘터리의 특성상 매분 매 초를 관객이 관람하며 함께 겪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고작 몇 마디 문장으로 다큐멘터리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시도이겠으나, 짤막하게 소개하자면 영화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감독인 박강아름은 남편과 함께 프랑스에서 생활하며, 자신의 학업을 이어간다. 부부 중 불어에 더 능통한 사람인 그가 행정과 경제를 담당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남편인 정성만은 가사를 (그리고 훗날 육아가 추가된다) 맡는다. 성만에게 카메라가 돌아가고, 자기소개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나는 식모입니다, 식몬데 무슨 이름이 있어요, 정도로 대답하는 건 코믹하게 보이나 분명 유의미한 장면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앞날을 위해 프랑스 이주에 참여하였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성만의 세계는 자꾸만 좁아지며, 이것이 안쓰러운 아름은 그에게 일주일에 한 번 문을 여는 ‘외길 식당’ 운영을 제안한다. 이 외길 식당은 이사를 비롯한 기타 여러 사유로 인해 시즌제로 운영된지라 두 사람이 프랑스에 있는 내내 운영된 것은 아님에도, 성만에게 분명한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자, 이런 상황에서 아름은 임신한다. 아이가 생겼다. 보리는 귀여운 두 사람의 아이이지만 여전히 성만이 독박 가사와 독박 육아를 지속한다. 이따금 부침이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의 '평범한' 일상은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굳이 엄청난 통계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지금까지의 세상에서 보지 못했던 일들이 앞으로 펼쳐지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가부장적 제도 하에서 정상 가족이라 불렸던 시스템이 해체되고 있으며 가족 내 구성원의 권력구도가 기존과는 다르다는 걸, 그리고 이런 변화의 속도는 가속하리라는 것을. 예컨대 아름-성만 부부가 프랑스로 오게 된 것 역시 이주의 여성화(Feminization of Migration)에 부합하는 사회적 현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만, 감독이 보다 집중하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래. 결혼 말이다. 남들 다 한다는 결혼, 안 한 사람에겐 왜 안 하냐는 말이 쉽게 따라붙는 이 제도. 결혼은 대체 뭘까?
비혼을 외치는 청년층이 많아진다는 점, 정상가족의 해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외길 식당의 손님들처럼 결혼을 위한 이주 역시 발생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가족 가치관은 분명 예전과 다르다. 다만,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하긴 어렵고, ‘부분적으로 탈전통적으로 변화(최연주, 문정희, 안정신 (2020))’ 했다고 하는데, 아름과 남편 성만의 관계에서도 그러한 요소를 엿볼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기존 성별분업의 단순한 젠더 역전에 기인하고 있어, 기존 시스템의 젠더 관계를 완전히 해체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 성만은 자신을 ‘식모’로 규정하며 돌봄/가사 노동을 담당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돌봄/가사노동은 육아휴가 등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를 전통적인 ‘아버지’로 규정하기보단 ‘어머니’ 포지션으로 인식하는 듯 보인다.
반면 아름은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펀딩을 받는 등 경제적 책임을 이끌고, 프랑스인에게도 어려운 관공서 서류 제출 등을 신경 쓰는 역할을 맡는다. 또한 남편을 위해 외길 식당을 먼저 제안했음에도 좋은 식재료를 쓰는지라 늘 발생하는 적자를 떠올리고, 매 순간 가계부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며 성만과 싸우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인 보리가 태어난 후에도 지속된다. 물론 아름 역시 가사노동에 일부 참여하지만, 주 양육자 포지션에 위치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이러한 모습에서 나는 김경민(2021)이 인용한 러딕의 구절을 일부 반복하고 싶다. 그러니까,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자녀를 낳는 경험’을 선택적으로 할 수 있으나 ‘자녀 양육자로써 운명 지워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름은 그렇게 전통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답습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난한 일상 속에서 아름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결혼을 하려 했을까? ‘아버지’라는 위치에 더 가까운 – 그러니까 집안의 ‘가장’인 그는 거듭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왜 비혼주의자였던 성만과 결혼했고, 아이 계획을 세울 때 침묵한 성만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을까…….
그가 방황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 일부분은 아름의 과거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최연주, 문정희, 안정신 (2020) 은 개인의 가족가치관은 개인 자신의 성장 경험에서 발생한다 말한 바 있다. 즉, 자라는 동안 매일 봐온 가족/부모의 가치관 등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하여 미래의 결혼 여부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아름 역시 이러한 부분을 설명하고자 함인지, 영화 내에서 자신의 성장과정을 짤막하게 언급한다. 남동생에게만 집중한 아버지, 아버지에게 관심을 끌고자 애썼던 어린 소녀에 대해서. 하지만 오로지 과거에서만 대답을 찾아야 할까? 어쩌면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의 빈자리를 보며 저도 모르게 안정적인 가정을 꿈꿔왔을지도 모르지만, 아름은 과거에서만 이유를 찾지 않는다. 그는 외길 식당 시즌 2를 계획하고 부족한 시간을 쪼개서 손님들에게 묻는다. 짧은 시간 동안 신선한 시각과 사유가 점차 흘러들어온다. 프랑스의 팍스(PACs)라는 새로운 개념도 그렇게 영화에 등장했다. 그러나 아름은 여전히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결혼이란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는 것이라지만 사회/문화적으로 결혼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포괄한다. 아름이 말했듯 입덧이란 미디어에서처럼 우아한 ‘우욱’ 정도가 아니었고 개인마다 다른 신체적 증상이었다. 마찬가지로 결혼 역시 미디어에서 비춰주는 양 매일매일 완벽하고 풍성한 생활을 담보하는 사회 시스템이 아니며 연애시절처럼 매양 낭만적일 순 없다. 주례에서도 알 수 있지만, 결혼을 통해 일상을 공유하게 된다는 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해야 한다는 뜻이다. 즐거울 때야 상관이 없겠다만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걸 이성적으로 이해한다 해도 어렵고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이런 시간이 연애 시절보다 늘어난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결혼의 단면일 것이고,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그런 과정을 미화하지 않았다.혼전 합의서를 통해서든 아니든, 합리적으로 가사를 분담하고 경제적 책임감을 공유하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젠더가 단순히 전복된 관계를 살고 있는 아름-성만 부부가 기실, 처음부터 끊임없이 합의하고 민주적인 가정을 이룩하고나 노력했을지라도 아마 이 과정은 어느 순간부터 중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시점은 보리가 태어난 이후일 확률이 높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이 풍부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키울 때엔 너/나를 가릴 시간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족의 공동체적 특성이 강조되고 가족 구성원 간의 자원 공유가 미덕으로 수용(나성은 (2014))’되는 동안, 가족 내의 권력관계는 쉽게 기울어지기 마련인데, '사랑'과 '협력'이 캐치 프레이즈로 내걸린 이상 구성원의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는 점차 미뤄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결혼(생활)은 그럼 무엇인가? 에 대한 내 대답은 '글쎄'이다. 몇 천년 전부터 인류는 이 물음에 대해 대답하려 했지만 여전히 질문을 하고 있는데, 내가 감히 이것이 정답입니다, 하고 무언가를 내놓을 자신은 없다. 정 안되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순 있겠다만, 다큐멘터리와 함께 고민하다 보면 관객은 관객 나름의 대답을 찾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너무 비관적인 이야기만 한 걸까? 아마 영화 내에서 아름이 자신이 겪는 결혼의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어떤 캐릭터성을 강조/축소하고, 일상을 편집한 측면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여튼 결혼에 대해 환상을 심어주는 멋진 드라마와 영화는 이미 많으니까, 그러한 미디어와(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를 마음속으로 떠올리고) 《박강아름 결혼하다》를 동시에 펼쳐 놓고 생각해보자. 결론적으로 결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 모든 것의 총체라고밖엔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 아웅다웅 삶을 일체화 시키며 추억을 쌓고, 헤어질 수 없는 사이로 변모하는 과정 말이다. 외길식당의 손님이 말했듯 자신의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원망하는 과정이 수반될 수밖에 없을지라도, 결혼이란, 관계의 한 자락에서 낭만에 취해 이런 선택이 있었기에 내가 네 곁에, 그리고 네가 내 곁에 있나보다 대화할 수 있는 삶의 한 양태가 아닐지.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 참고문헌
김경민 (2021).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의 ‘좋은 엄마’ 되기: ‘어머니됨(mothering)’ 인식과 실천에 대한 고찰. 비교문화연구, 27(1), 5-56.
나성은 (2014). 남성의 양육 참여와 평등한 부모 역할의 의미 구성. 페미니즘 연구,14(2), 71-112
최연주, 문정희, 안정신 (2020). 미혼 남녀의 가족건강성과 결혼의향의 관계 : 가족가치관의 매개효과. 한국지역사회생활과학회지, 31(4), 663-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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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릴러 미스터리 장르의 영화 추천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1:1 맞춤 영화 큐레이션 시간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늘의 큐레이션 주제는 바로 '스릴러와 미스터리 장르의' 영화입니다.
이 게시물 혹은 씨네픽 인스타그램에 올라간 동일 내용의 콘텐츠 게시물에
자신이 보고싶은 영화에 대해 적어주신다면 다음 콘텐츠를 올릴 때 여러분들의 댓글을 바탕으로
1:1 맞춤 영화 큐레이션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1:1 맞춤 영화 큐레이션 시작해볼까요?٩( ᐛ )و
올빼미
ⓒ 네이버 영화
synopsis
밤에만 앞이 보이는 맹인 침술사가 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후 진실을 밝히기 위해 벌이는
하룻밤의 사투를 그린 스릴러 영화.
cine pick!
오늘 오전 10시 기준으로 누적 관객 수 2,000,395명을 기록하며 200만 관객을 돌파한
<올빼미>는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잘 버무려 호평을 받은 영화이다.
런
ⓒ 네이버 영화
synopsis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었던 클로이는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녀는 사랑으로 돌봐주는
엄마 다이앤 덕에 긍정적으로 지내지만, 어느 날 장바구니에서 다이앤의 이름이 새겨진 약통을
발견한다.
cine pick!
개봉 후 30일이 넘도록 로튼 토마토 신선도 지수 100%를 유지하며 주목을 받은 <런>은 각종 해외
매체에서 호평이 쏟아지며 국내 관객의 기대감을 높이기도 했다. 다양한 장치를 영화 속에 녹여
영화의 몰입도를 높였다.
마녀
ⓒ 네이버 영화
synopsis
시설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은 의문의 사고, 그날 밤 홀로 탈출한 후 모든 기억을 잃고 살아온
고등학생 자윤 앞에 의문의 인물이 나타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액션 영화.
cine pick!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스피디하고 파괴력 있는 액션 스타일을 새롭게 구축하여 관객들의
이목을 끈 영화이다.
실종
ⓒ 네이버 영화
synopsis
연쇄살인마를 목격한 아빠가 갑자기 사라진 후, 일터에서 아빠의 이름을 쓰는 연쇄살인마를 본
딸이 진실을 추적하며 벌어지는 스릴러.
cine pick!
강렬한 스토리 속 빈틈없이 설계된 사건으로 최상의 몰입도를 선사한 영화 <실종>은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며 장르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도 한다.
겟 아웃
ⓒ 네이버 영화
synopsis
주말을 맞아 여자친구 로즈의 부모님 집을 방문한 크리스. 가족들의 과한 친절에 부담을 느끼지만
애써 외면하던 그는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집안의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다.
cine pick!
공개 6일 만에 메인 예고편 조회수 1,000만 뷰를 돌파한 <겟 아웃>은 북미 개봉 직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였다. 제작비의 42배 이상 흥행 수익을 달성할 정도로 흥행에 성공한 영화이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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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의 고스트 버스터즈 다시 출동!!!
1980년대 두 편이 개봉했던 고스트 버스터즈의 세 번째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2016년에 만들어진 여성 중심의 고스트 버스터즈가 있었지만 좀 실망스러웠는데요.
이번에 개봉하는 고스트 버스터즈 라이즈는 기존 시리즈를 정식으로 이어가는 영화입니다.
기존 시리즈의 감독인 이반 라이트만의 아들인 제이슨 라이트만이 감독을 맡아 기존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요.
먹깨비나 머쉬멜로우맨 같은 유령들도 그대로 등장합니다.
오리지널 멤버들도 등장하니 궁금하신 분들은 리뷰 영상을 봐주세요!! :)
제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Ghost Busters' third film, which was released in the 1980s, was released.
There was a women-centered Ghost Busters created in 2016, but it was a little disappointing.
Ghost Busters Afterlife, which will be released this time, is a film that officially continues the existing series.
Jason Reitman, the son of Ivan Reitman, the director of the existing series, is the director and captivates the hearts of existing fans.
Ghosts such as Muk-Kae-bi and Mushmallowman also appear as they are.
The original members are coming out, so if you're curious, please watch the review video! :)
Please subscribe to my Rabbitgumi channel and lik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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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나병의 영화정보 #12? ?영화 PPL?! 영화 성수기, 비성수기?!?
?씨나병의 영화정보 #12? ⠀ ?열두 번째 주제? ⠀ ? 영화 PPL?! 영화 성수기, 비성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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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댓글부대> 메인 예고편
'어디부터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가'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진실과 거짓 사이 임상진VS팀알렙, 진정한 승자는?!? [댓글부대] 메인 예고편 전격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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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탈주> 2차 예고편
올여름, 극장가 포문을 열 단 하나의 추격 액션! 절박한 질주 VS 긴박한 추격! [탈주] 2차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