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펜2023-11-20 13:12:42
이번 주 넷플릭스 추천작 - <푸른 눈의 사무라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번 주 넷플릭스 추천작은, 지난 11월 초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푸른 눈의 사무라이>. 장편 영화 각본 작업과 시리즈 작업으로 국내에도 제법 알려진 마이클 그린과 앰버 노이즈미가 제작과 각본을 맡은 작품이다. (여담이지만 마이클 그린은 넷플릭스와 최근 전속 계약을 체결해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들을 작업 중이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제작된 작품이지만 그 배경은 일본을 소재로 하고 있고 사무라이 소재이기에, 성우진들은 랜달 파크, 마야 어스킨, 마시 오카 등의 아시안 계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총 8부작의 다소 짧은 호흡의 시리즈로, 제인 우를 비롯한 다섯 명의 감독이 번갈아가며 에피소드별로 연출을 맡았다.
일본의 에도 시대인 17세기, 혼혈 검사 '미즈'의 복수를 다룬다. 미즈는 일본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푸른 눈을 물려받았으나 눈빛의 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놀림과 차별을 당하고 '악마'라는 수식을 얻는다. 어머니와 일찍 헤어진 후, 야유를 피해 도망치다가 외딴 곳에 기거하는 한 맹인 도공과 함께 살며 검에 대한 기본기를 익힌다. 미즈의 목적은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 그러니까 자신이 태어날 시기 즈음 일본에서 머물렀던 백인 유럽 남성을 모두 죽이는 것이다.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미즈의 복수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일단락되는 지점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출생의 비밀과 복수가 가미된 로드 트립 등 일반적인 사무라이 물이나 소위 말하는 '찬바라'(검이 부딪히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 장르가 갖춰야 할 기본이 잘 녹아있다. <푸른 눈의 사무라이>의 첫 번째 화에서는 '미즈'라는 검객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설명하며 절대 권력 아래 제멋대로 흘러가는 가공된 에도 시대의 어두운 면을 다루는데, 이 이야기의 진짜 시작은 이 첫 번째 화가 끝나면서 비롯된다. 앞서 말했듯 일반적인 사무라이 장르인 듯하지만 주인공 미즈가 남장 여자라는 신분이 말미에 드러나고, 그 이후부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말하자면 뻔한 찬바라 장르가 주인공의 성별을 치환했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로 인해 '뻔하지 않은' 장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남성들이 군림하는 싸움의 세계에서 남장 여자라는 컨셉의 애니메이션은 <뮬란> 등을 통해 알려지고 전파된 바 있지만,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단지 그 소재를 적극적으로 캐릭터에 입히는 것에 그치지 않아 주목할 만하다. 백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 사이에 혼혈로 태어났고, 백인의 눈과 피부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어디서든 차별받는 사람이 되었으며, 자신에게 입혀진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검기를 익힌다는 설정이 자칫 평범해질 수 있는 캐릭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푸른 눈의 사무라이>의 두 제작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의 아이를 바라보며 <푸른 눈의 사무라이>가 시작되었다고 밝힌 그들은, 누구도 튀어보이고 싶지 않고 튀는 자를 억압하려 노력한 답답하고 절망적인 시대를 다뤄보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미즈를 비롯한 이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자신을 억압하고 정형화하는 굴레를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결국 그것을 스스로 이루게 된다. 갇힌 새장에서 날아가듯 자유를 찾아 각자의 사명과 신념을 향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캐릭터들의 매력이 매 에피소드마다 흘러 넘친다.
입체적이고 주체적인 캐릭터성도 장점이지만, 무엇보다 8부작 내내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동시에 갖가지 변주를 꾀하는 연출이 가장 인상적이다. 2D/3D 하이브리드 기술로 제작되어, 3D를 사용하더라도 2D의 수작업을 연상케하는 애니메이션의 제작 방식은 이런 화려하고 회화 같은 분위기의 연출을 기술적으로 충분히 뒷받침해준다. 특히 5화의 인형극의 형식으로 설명되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 플롯 연출은 압도적. 실화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전체 애니메이션 등급을 18세 이상으로 수위 상향을 꾀한 선택은 신의 한 수라고 할 만하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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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수록 좋다’의 늪에 빠진 24년만의 속편
시대는 바뀌었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콜로세움에서는 차세대 검투사가 등장, 보다 크고, 강하며 잔인한 적들과 한판 대결을 벌인다. 24년 만에 귀환한 <글래디에디터 2>는 웅장하고, 퇴폐미 가득하며, 스펙터클하다. 하지만 공허하다. 마치 극 중 배경인 칼리굴라 시대의 로마처럼 풍요 속 빈곤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24년이 지나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막시무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막시무스(러셀 크로우)가 전설이 된 지 20년이 흘렀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로마는 쌍둥이 황제 게타(조셉 퀸)와 카라칼라(프레드 헤킨저)라는 또 다른 폭군이 등장해 세상을 어지럽힌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군을 이끄는 아카시우스(페드로 파스칼) 장군은 왕들의 명을 받들어 전쟁을 계속한다. 그가 이끈 군대에 대패 후 노예로 전락한 루시우스(폴 메스칼)는 권력욕에 사무친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의 눈에 띄어 검투사의 길을 걷는다. 자신과 악연이 된 아카시우스의 목에 칼을 겨누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콜로세움에 입성, 쌍둥이 형제가 연 경기에 참여한다.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친 그는 출생의 과거와 자신이 진자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결전의 날을 맞이한다.
속편의 속성이 있다. 1편의 성공 사례를 밑바탕으로, 전편보다 크게 만들면 된다는 논리.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특히 긴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속편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글래디에이터 2>의 가장 아쉬운 지점은 ‘클수록 좋다’는 속편 논리에 너무 기댄 점이다. 1편의 대대적인 성공을 앞세워, 제작한 속편은 더 많은 인물, 더 커진 액션 시퀀스를 내세운다. 폭군은 전편보다 배가 되었고, 여기에 진짜 빌런인 마크리누스가 추가된다. 더불어 해상 전투를 시작으로 콜로세움 내에서 벌이는 해전 등 기존 1편의 액션보다 다르고, 더 커진 장면을 깔아놓는다.
이런 외형 구조를 키워 놓은 것만큼 새로운 인물과 서사가 함께 잘 따라가느냐가 중요한데,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인물이 너무 납작하다. 입체감이 너무 떨어진 나머지 특색이 없어 관객이 그들의 감정을 비집고 들어가 틈이 없다.
극 중 막시무스의 바통을 이어받은 루시우스의 매력은 극을 이끌고 갈 카리스마도, 큰 일을 해야 하는 당위성도 부족하다. 폴 메스칼의 연기 때문은 아니다. 막시무스의 그늘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캐릭터가 짊어져야 하는 분노가 너무 많다.
막시무스의 경우, 가족을 죽인 코모두스(호아킨 피닉스)를 향한 응어리진 분노를 갖고 끝까지 달렸다면, 루시우스는 아내를 죽인 원수인 아카시우스, 자신을 버린 줄 알았던 엄마 루실라(코니 닐슨), 그리고 세상을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마크리누스 등 분노의 대상이 너무 많다.
이 모든 분노를 동력 삼아 달려가기엔 루시우스가 너무 벅차보인다. 과거 막시무스의 죽음 이후, 한순간 도망자 신세가 되어야 할 인생의 굴곡, 울분 등도 플래시백으로 보이지만, 관객이 그의 감정을 이해하기엔 너무 제한적이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막시무스가 열어놓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이어 나가기 위해 등장한 인물로만 보인다. 그나마 입체적으로 보이는 건 마크리누스다. 그는 악마적인 책략가로서의 이중성, 그리고 그가 왜 그런 야망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전사가 나오면서 그 행동에 당위성이 부여된다.
이렇다 보니 어느새 영화의 주인공은 막시무스가 된다. 극 중 인물들의 입에서 나오는 전설이 된 그의 이름, 콜로세움 지하에 놓인 그의 물건들이 나올 때 마치 막시무스가 살아 돌아온 느낌을 받는다.
이렇듯 영화는 막시무스의 자장 안에 머문다. 최고의 검투사이자 영웅의 유산을 적절히 활용하고, 이를 도약 발판으로 삼아 새로운 이야기로 나아가야 하지만, 정작 영화는 머무는 길을 택한다. 1편과의 유사성은 둘째 치고,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 시간이 갈수록 흥미는 떨어진다. 이럴 거면 막시무스가 환생해 나오는 게 더 나을 뻔했다.
그럼에도 리들리 스콧 감독이 펼치는 웅장한 스펙터클은 이 영화를 간신히 끌어올린다. 전편과 다른 해상 전쟁, 유혈 낭자한 콜로세움 결투, 로마 시대를 구현한 미술 등 볼거리는 충족시킨다. 마치 이런 영화는 큰 스크린에서 봐야한다는 감독의 말을 전하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1편보다 강렬함을 덜하지만 그럼에도 볼거리는 충족한다.
전편을 넘는 속편이 나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게 리들리 스콧 감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24년 만에 돌아온 검투사 이야기가 반갑기는 하지만, 그냥 전설은 전설로 남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냥 보리밭을 손으로 느끼며 걸어간 막시무스 데시무스 메리디우스가 그립기만 하다.
덧붙이는말: IMAX 시사회로 관람했는데, 비율 자체가 IMAX 화면에 꽉 차지는 않아서 아쉬움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돌비시네마 또는 스크린X로 관람하는 걸 추천한다.
사진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평점: 2.5 / 5.0
한줄평: 막시무스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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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가지 위에 남은 두터운 온기
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스스로 가지를 끊어내는 잎새, 마사.
- 마사를 통해 죽음을 알아가는 잉그리드
- 잉그리드가 남긴 온기
- 엔딩 결말 해석
룸 넥스트 도어 (The Room Next Door, 2024)
빈 가지 위에 남은 두터운 온기
개봉일 : 2024.10.23.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러닝타임 : 107분
감독 : 페드로 알모도바르
출연 : 틸다 스윈튼, 줄리안 무어, 존 터투로, 알렉산드로 니볼라
개인적인 평점 : 4 / 5
쿠키 영상 : 없음
유명 작가인 잉그리드는 친구를 통해 젊은 시절 잡지사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 마사의 암 투병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간다. 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젊은 시절엔 상상할 수 없었던 삶과 죽음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사의 병은 점점 깊어지고,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죽음의 순간을 함께 해달라’고 부탁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젊은 시절엔 주로 사랑, 예술을 향한 도발적이고 뜨거운 욕망과 파격적인 여성의 삶을 그리는 감독이었다. 그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오며 욕망, 삶의 뿌리가 되는 어머니와 예술, 고통으로 이야기의 범위를 넓고 깊게 확장해왔다. 이젠 노년의 나이가 된 그가 만든 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야기하는 영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부당함과 남성 권력이 넘치는 삶 속에서도 자신만의 싸움을 이어가는 한 여성과 그의 곁을 지킨 따스한 여성에게 바치는 헌시이기도 하다.
이별, 고통 속에서도 다시 삶의 불씨를 찾아냈던 전작들에 비해 <룸 넥스트 도어>는 강렬한 붉은빛과 치열함을 조금 덜어낸 미적지근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로 흘러간다. 영화의 끝에서 고요하게 마지막을 담아내고 그 뒤에 남겨진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알모도바르 감독의 눈은 여느 때보다 영별하고 다정하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스로 가지를 끊어내는 잎새, 마사
의학의 발전, 안정된 사회 등의 이유로 기대수명과 평균 수명 모두 80세가 넘어가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노화와 죽음을 피해 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아직 정확히 정의되진 않았지만 우리의 몸은 보통 25세~30세쯤이 되면 노화가 시작된다고 한다. 자라나는 건 길어야 30년, 늙어가는 건 50년. 게다가 낡은 몸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도 버릴 수도 없다니. 살아간다는 건 참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이다.
마사는 이 부당함을 거부한다. 대부분의 사회는 환자에게 스스로 죽을 권리를 주지 않고 심장 또한 주인의 마음에 맞춰 멈춰주지 않는다. 모두가 마사가 죽기보단 병과 싸워 이겨내길 최선을 다하길 바라고 그의 심장은 지나치게 열심히 뛰고 있다. 마사는 암 환자에겐 ‘암과 싸워 이기면 대단한 것, 지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회의 시선이 따라온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시선과 튼튼한 심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 삶을 마감할 계획을 세운다.
마사는 열려있던 빨간 문을 닫은 후 초록 선베드에 누운 채 스스로 삶을 마무리한다. 그는 가지에서 떨어질 날만을 기다리는 시든 잎새가 되는 것 대신 스스로 몸을 털며 가지를 벗어나는 생생한 잎새가 되길 선택한다. 마사는 원색인 노란색 옷을 차려 입고 스스로 생을 마무리한다. 그 어떤 색을 섞어도 흉내 낼 수 없는, 더 분해하려 해도 분해되지 않는 고유한 샛노란 색의 옷을 입고 말이다. 이 노란색 옷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마사의 확고한 삶과 죽음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평생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전쟁에 뛰어들며 치열하게 살아온 여성 마사는 투병이라는 전쟁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싸우고 병이 할 일을 빼앗으며 끝내 승리를 거머쥔다.
마사를 통해 죽음을 알아가는 잉그리드
처음 카메라에 담긴 마사의 얼굴엔 밝은 빛과 그늘이 반반 공존하고 있다. 마사를 만나러 온 잉그리드는 햇빛 반, 그늘 반으로 구성된 병원 로비로 들어오고 직원의 안내를 따라 그늘진 복도 방향으로 걸어간다. 항상 인생의 밝은 면. ‘삶’만을 생각하며 살던 잉그리드는 그늘 진 복도의 끝에서 삶과 죽음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는 마사를 만나고 그의 죽음을 지켜보며 지금껏 미지의 영역이었던 죽음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간다.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죽어가고 있기도 하다. 투명한 유리를 사이에 두고 죽어가는 이인 마사와 집 밖에서 자라나는 푸른 풀이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삶과 죽음도 딱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생명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기 전까진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종군 기자로 일하며 수많은 죽음을 봐온 마사와 다르게 지금껏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적이 없는 잉그리드는 여전히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회피하고 싶어 한다.
마사와 잉그리드는 함께 숲속 집에 머물며 죽음을 준비하고 삶을 기대한다. 마사가 삶이라는 빨간 문을 스스로 닫을 준비를 하는 동안 잉그리드는 보색(반대색)인 녹색 스탠드. 즉 죽음을 머리맡에 두고 잠들며 죽음이 만든 그늘을 두려워하고 내일도 우리가 살아남길 바란다.
하지만 죽음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찾아오고 잉그리드는 마사의 죽음을 목격한다. 이후 경찰 조사를 마치고 마사의 딸 미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잉그리드는 2층에 올라간다. 삶만을 생각했던 자신이 머물던 1층이 아닌 삶과 죽음을 함께 생각했던 마사가 머물던 2층에. 그리고 그곳에 앉아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죽음과 마사를 생각한다.
다음 날 잉그리드는 미셸과 함께 선베드에 누워 마사가 죽음을 결심하며 읊었던 [죽은 사람들]의 구절을 변주하여 읊는다. “눈이 내린다. 네 딸과 내 위로.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그는 열려있는 문 너머와 마사와 똑닮은 젊은 생명인 미셸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자신도 언젠가 마사처럼 죽음에 가까워질 운명임을 받아들인다.
함께 고독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마음
죽음을 앞둔 마사는 고독하다. 치료를 중단한다고 했을 때 미셸은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무심한 반응을 보였고 남편이었던 프레드는 미셸이 어릴 때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남은 건 친구들뿐이다. 그래서 마사는 친구들에게 ‘죽음의 순간을 함께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자주 왕래했던 친구들은 모두 그의 부탁을 거절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남에 가까웠던 잉그리드만이 마사와 함께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잉그리드는 왜 자신이 마사의 부탁을 수락했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숲 속집에 머물면서도 매일 마사가 죽지 않길 바랐고 생판 모르는 트레이너 앞에서 죽어가는 친구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왜 부탁을 들어주었냐는 데이미언의 질문에 그럴싸한 답변을 하지도 못하고 스스로도 마사와 자신이 ‘죽음을 함께할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잉그리드는 아무 이유도 조건도 없이 마사의 손을 잡고 그의 옆자리에 누워 잠을 청한다. 마사는 옆자리에 누운 잉그리드의 기척을 느끼며 슬쩍 웃어 보인다. 아무 조건 없이 누군가의 고독을 함께 바라보고 그것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마음. 그 마음이 남기는 온기는 가히 두텁고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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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킹메이커> 빛과 그림자로 빚는 정치의 본뜻
수 차례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선만 거듭하던 정치인 ‘김운범(설경구)’. 어느날 그 앞에 약방을 운영 중이던 선거 전략가 ‘서창대(이선균)’가 찾아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도전하는 그의 뜻에 동참하고 싶다고 밝힌다. 고민 끝에 선거 캠프에 합류한 서창대는 객관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선거 전략을 펼치며 김운범에게 연이어 승리를 선사한다. 마침내 김운범을 강력한 경쟁자 '김영호(유재명)'까지 제치고 당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 자리에 올려놓는 데 성공한 서창대. 그러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동료이자 사제지간이라 할 수 있던 김운범과 서창대의 정치적 신념이 충돌하기 시작하고, 중앙정보부 '이 실장(조우진)'의 견제까지 더해지자 둘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변성현 감독의 신작 <킹메이커>는 1960-70년대 야당 국회의원 ‘김대중’ 전 대통령과 선거 전략가였던 ‘엄창록’의 이야기로부터 모티브를 얻어 제작된 작품이다. 엄창록은 공권 선거와 금권선거 반발해 당시 기준으로 획기적이고 전략적인 방식과 유권자 심리를 이용하는 선거 전략을 수립한 인물이다. 그는 상대편 후보 캠프 사람인 것처럼 꾸며 비호감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등의 교묘한 선거 전략을 실행에 옮겼고, 이러한 전략은 중앙정보부가 그를 눈여겨봤을 정도로 대단했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제목답게 엄창록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캐릭터인 서창대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이다. 이는 <킹메이커>가 단지 실제 사건을 영상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역사를 벗어나 새로운 영화로 태어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승리의 수단을 취우선으로 고민하는 한 선거 기획자의 딜레마를 통해 정치의 본질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이 수반된 승리만 의미가 있다고 믿는 ‘김운범’(설경구)'과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서창대의 갈등을 중심축으로 삼는다. 이때 두 주인공의 충돌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두 접근법의 차이를 함축하는 듯 보인다. 거칠게 말해 운범은 민주주의 정치에 규범적으로, 창대는 실증적으로 접근한다. 운범은 고전적인 이상을 지닌다. 그는 공공선을 추구하는 시민들이 선거를 통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 사회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반면에 창대는 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가 정당, 후보가 공공선을 추구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정당과 후보는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데에, 시민들도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 몰두한다. 그에게 선거는 철저히 권력 투쟁이 게임의 장일뿐이고, 이데올로기는 정보가 부족한 유권자가 표를 선택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지름길일 뿐이다.
두 주인공의 차이는 그들에게 국민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창대는 국민은 허상이라고 말한다. 그저 이익을 좇아 움직이는 존재이기에 자신과 같은 선거 기획자가 계획하는 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그에게 운범은 국민이야말로 정의를 이루고 사회를 움직여 나갈 주역들이라고 일갈한다. 영화는 이와 같은 장면을 다채롭게 변주해 러닝타임을 두 주인공의 대담으로 채워 나간다. 표를 얻는 것이나 돈을 버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는 창대에게 운범은 그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충고한다. 선거 전략에 있어서도 철저히 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정책에 접근하는 창대와 달리, 운범은 국민들의 진심과 열망을 정책에 녹여내야 한다며 맞선다.
이때 <킹메이커>는 빛과 그림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연출을 통해 정치의 의미에 대해 한 단계 더 깊이 숙고한다. 일견 빛과 그림자를 대비시키는 연출은 김운범의 방식이 옳고, 서창대의 방식은 틀렸다고 답을 내리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창대의 방식이 이전까지의 통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의 정의와 이상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정치의 냉혹하고도 불편한 현실을 전면에 내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는 서창대의 선거 운동을 철저히 그림자 속에 가두면서 다른 캐릭터들의 대사대로 그에게 협잡꾼의 이미지를 덧씌운다.
그러나 빛과 그림자의 표현에는 다른 의미도 숨어있다. 실과 바늘처럼 빛과 그림자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이고, 또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빛과 그림자가 대비된다는 이미지와 빛과 그림자는 함께 한다는 심상을 모두 영리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서창대와 김운범의 신념은 서로 상극이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둘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 될 수밖에 없다. "정치란 때로는 짐승이 되는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의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일"이라는 유시민 작가의 표현대로,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려는 운범과 짐승이 되는 비천함을 견딜 줄 아는 창대는 함께할 때 비로소 정치를 할 수 있다. 그래서 김운범은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믿으면서도 서창대를 멀리하지 못하며 선거 때만 되면 다시금 그를 불러올린다.
특히 이러한 빛과 그림자의 관계는 서창대라는 그림자와 중앙정보부의 이 실장이라는 그림자가 대비되는 장면 덕분에 더욱 돋보이기도 한다. 오로지 표를 획득하는 데에만 몰두하는 이들이지만, 둘은 결정적인 차이를 지닌다. 창대는 승리를 통해 획득해야 할 김운범의 대의인 민주화라는 궁극적인 믿음과 낭만을 지니고 있지만, 이 실장에게는 승리 그 자체가 곧 목적이라는 차이가 있다. 같은 그림자이지만 둘은 빛이 있는 그림자와 어둠만이 가득한 그림자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는 김운범과 서창대가 외적으로는 대비되는 빛과 그림자 관계인데도 불구하고 동료 내지는 사제지간처럼 느껴지는 반면, 서창대와 이 실장은 같은 그림자인데도 정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영화는 빛과 그림자의 모티브와 연출을 단지 정치적 신념과 논쟁의 영역뿐만 아니라 정서적 경험으로 전환시킨다. 그 중심에는 서창대의 인생사가 위치한다. 그림자라는 별명을 본인도 싫어한다는 점에서 그의 내면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마음속에서 빛이 우선인지 그림자가 우선인지에 따라 영화의 감정선에는 또 다른 축인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축이 더해지고, 선거 기획자의 내적 딜레마가 전면에 나타난다.
창대는 목포에서 운범을 만나 그의 그림자가 될 기회를 잡는다. 이때 그들이 독대하는 방은 어둠으로 가득 하나, 순간적으로 밝은 빛이 들어왔다가 다시 그림자와 어둠으로 가득해진다. 이때 그 빛은 두 가지 의미로 보인다. 우선 자신이 믿는 대의를 위해 싸우고 함께 하고 싶다는 순수함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 빛이 순간적으로 있다 없어진다는 점에서는 보일 듯 말 듯 꽈리를 틀고 있는 욕망과 야심이 기회를 잡은 모습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서창대의 선거 전략 덕분에 빛이 강해질수록 순수한 대의는 공천에 대한 야심과 충돌하고,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마음속에서는 원망과 좌절이 차오른다.
더 나아가 창대의 내적 갈등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전달된다. 김운범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도 기념사진 속에 같이 서 있을 수 없는 아픔, 빛나는 김운범을 보면서 언제나 군중 속에 있어야 하는 씁쓸함, 혼자 있으면 빛나고 함께 있으면 기쁜 김운범과 달리 혼자 있으면 고독하고 함께 있으면 존재감 없어야 하는 그의 자격지심. 이 복합적인 감정들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설경구는 물론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김영호로 분한 유재명, 이실장 역을 맡은 조우진까지 배우들의 앙상블이 빛나는 가운데 이선균의 퍼포먼스는 유달리 돋보인다. 다른 캐릭터들이 러닝타임 내에 별다른 변화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준비가 되었는지 거듭 고민하는 서창대의 감정선이 영화 전반에 흐르는 것이다.
사실 <킹메이커>는 본래 작년 12월에 개봉하려 했으나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공개 일정이 미루어진 작품이다. 그러나 정치의 이상과 현실, 목적과 수단, 정치를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에 대해서 넓게 또 좁게 들여다보는 영화라는 점에서 <킹메이커>는 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더욱 뜻깊은 작품으로 느껴질 것으로 보인다. 단지 영화가 시작부터 자막을 통해 실화로부터 모티브를 얻어 재창작한 작품임을 강조하는 만큼, 주요 연도나 배경이 되는 도시와 장소 등에 대해 조금 더 과감하게 상상력을 발휘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변성현 감독의 또 다른 대표작이 될 <킹메이커>는 이러한 일말의 아쉬움만 제외하면 흠잡을 틈이 보이지 않는 품격 있는 대담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정치의 본질에 대한 빛과 그림자의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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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 형사와 함께 펑펑 터져볼래?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범죄도시 2>가 개봉했다! 1편이 거의 나의 취향저격이었기 때문에 2편이 제작된다는 소식을 듣고 목 빠지게 기대하고 있었다. 이 시리즈 1편이 처음 개봉할 때는 영화를 지금같이 딥(?)하게 파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알던 정도였다. 근데 분명하게 알던 건 마동석 배우 특유의 캐릭터였다. 2015년에 <부산행>과 2016년 <베테랑>이 개봉했다. 여기서 나왔던 마동석 배우는 모두들 알다시피 싸움 잘하는 아저씨였다. 근데 싸움만 잘하냐? 아니다. 그 마초스러운 이미지에 귀여운 애교까지 장착하기 시작했다. 외적으로는 이랬고 또 배우의 본업 내적으로도 성과가 좋았다.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부터 <부당거래>까지 든든한 조연으로 필모그래피를 하나, 둘 씩 쌓아놓고 있던 터라 그가 잘 되는 건 그냥 시간문제였다. 아무튼, 이 영화 <범죄도시>는 이 배우의 유명세에 기름을 부은 작품이 됐다. 나 역시 마동석표 액션이 재미있다. 이런 사람들의 기대치에 힘입어 이 작품은 대박이 났다. 이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나 하얼빈의 장첸이야!!!!'나 '어 싱글이야'같은 유행어들이 우리나라를 강타했다는 건 아마 모두들 기억하실 것 같다. 나도 영화가 한참 유행할 때 보진 않았음에도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중에서야 이 영화를 보게 된 나. 요즘에서야 책도 어느 정도 읽었고 영화도 보고 있지만 내가 나의 취향을 어림잡을 수 없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내가 한국 액션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저씨>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최애까진 아니더라도 '마음에 든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나이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시리즈의 후속작을 엄~청 기다렸고, 정식 개봉일인 19일보다 며칠 일찍 극장에 가게 되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K-슈퍼히어로였다! 2008년의 대한민국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 일이 있고 4년 후
장첸과의 한바탕이 있었던 4년 후. 금천구 강력반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서 경찰 업무를 하고 있다. 그렇게 공을 세웠는데도 뭔가 처우가 개선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이 금천구에 사건이 일어났다. 정신병동을 탈출한 남자가 여대생 하나와 가게 주인을 데리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었다. 홍석과 상훈, 동균은 상황에 어쩔 줄 모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석도의 행방을 찾는 금천구 강력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쿵쿵 걸으며 마석도가 등장했다. 흉기를 휘두르는 남자를 손쉽게 기절시킨다. 그런데 기절시키다 못해 일이 벌어졌다. 남자가 주먹 한방 맞고 전치 12주의 부상을 입은 것이다.
전일만은 금천구 강력반의 반장이다. 상관에게 불려 가서 와장창 깨졌다. 윗동네 어르신들에게 들었던 업무 지시사항을 마석도에게 전하게 된다. 그 지사사항은 '베트남에 가서 범죄자 하나를 인도해와라'였다. 듣자 하니 무슨 자수를 했다고 한다. 오케이. 그럼 휴가 쓰는 셈 치고 가지 뭐. 전일 만과 마석도는 더듬더듬 영어실력과 함께 베트남 비행기에 탑승한다. 어렵지 않게 베트남 영사관 쪽 담당자와 연결하고, 그 자수했다던 놈을 심문하기 시작하는 둘. 둘은 베트남에서도 진실의 방을 만들며 하나하나씩 정보를 얻기 시작한다. 뭔 베트남에서 베트남에서의 연쇄살인사건과 강해상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기 시작한다. 장첸과는 다른 부분으로 악랄한 강해상. 이 강해상은 극악무도한 범죄수법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베트남과 한국을 오가며 나쁜 놈을 때려잡는 마석도의 이야기가 영화의 내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익숙한데 익숙해서 웃겨
5년 만에 돌아온 시리즈의 신작이다! 그 이유인지 전작에 대한 오마주가 몇 개 보인다. 초반부 마석도가 등장하고 칼을 휘두르는 남자를 제압하는 장면의 구도만 봐도 1편를 차용한 느낌이 난다. 또 예고편에서 나왔던 장이수 캐릭터 활용법도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이다. 또 정인기 배우의 지역 경찰 계급 서장 캐릭터나 휘발유가 다시 등장하는 부분도 전 편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충분히 팬서비스 차원에서 만족할만하다. 엔딩부도 왠지 익숙한 느낌이 날 것 같다.
근데 이런 전편에 대한 오마주가 단순히 캐스팅에서 짠하고 끝나는 게 아니다. 사실 어찌 보면 뻔하다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알고 봐도 웃기다. 예고편에도 나오지 않나? "넌 뭐야?" "까불인데요" "까불고 있어"식의 말장난이 극에서 자주 나온다. 이런 유머 방식은 1편에서 많이 쓰였다. "혼자 왔니?" "어 싱글이야"가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겠지? 이런 유머 포인트가 1절 만하고 딱 끝나는 선이 아니라면 좀 식상해지기 쉽다. 그냥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같은 패턴의 유머를 반복해서 하는 사람을 보면 딱 느껴지지 않나. 진짜 재미없어서 말도 걸기 싫어진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다르다. 뭐 말장난식 유머만 재밌는 게 아니다. 초반부 반장의 존재 유무도 재미있다. 또 반장이 서툰 영어를 구사하는데, 이거 2007년에 <무한도전>에서도 봤던 유머인데도 웃긴다. 뻔뻔하게 재미있는 영화다. 배우들이 연기를 잘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근데 또 막상 웃기기만 한건 아냐
이 영화가 단순히 웃기고 재밌고 이런 것에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다른 강점 중 하나는 촬영이다. 이 영화의 가장 첫 번째 장면에서 영화는 베트남의 풍광을 묘사한다. 베트남에서의 이야기와 한국에서의 이야기는 무게감이 살짝 다른데, 어쩌면 난잡해질 수도 있는 영화의 톤을 나름의 영상미로 풀어내는 것이 인상 깊었다. 해외 로케이션을 경제적으로 활용한 셈이다. 타지의 모습과 범죄의 잔혹성이 매치가 잘 되니 연출의 승리였다. 그냥 자연스러운 풍광만 예쁜 것이 아니다. 베트남의 한 경찰서, 협소한 아파트, 봉고차 안, 식당까지 그냥 단순히 인물이 거기에 있어서가 아닌 소재를 활용하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적절한 촬영은 베트남에서만 적용되는 부분이 아니다. 가령 중후반부의 마석도 혼자 걸어가는 장면, 최후 반부의 특정 신은 감독이 이 장면에는 '관객이 이런 걸 느껴야 해!'를 생각했다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아. 촬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롱테이크 신이 있다. 이 부분은 그냥 직접 보시라. 아마 올해의 베스트 신 TOP 3 안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건 당연히 액션이다. 액션 연출이 좋았다. 초반부 마석도가 흉기를 든 남자를 제압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마석도기 주먹으로 때리는 장면을 보면 무슨 돌로 사람을 머리 찍는 소리가 난다. 난 이걸 처음 들을 때 솔직히 작위적이라고 생각한다. 뭐 내가 적응을 해서인지 이 사운드에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화가 전개될수록 맞은 인물들의 리액션이 나오는데, 이거랑 잘 맞는다. (이거 외엔 할 말이 없다. 극 중에서 마석도가 성장하는 느낌까지 들 정도다;;) 퍽 퍽 때리는데 역시 뛰어난 연출이 극의 생동감을 부여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사운드 연출이 아니더라도 맨몸 액션 자체가 확실히 보는 재미가 있었다. 초반부를 지나 한 30분쯤 됐을 때 마석도의 액션신이 나오는데, 뭐 사람 하나몇 대 연속해서 때리지 않아도 이 사람이 얼마나 센지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맨몸으로 두들겨 패기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다. 장소마다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는 모습까지 있으니 몰입에 도움이 된다. <이터널스>의 길가메시보다 인물 연출이 뛰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마석도 캐릭터만 액션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강해상 캐릭터의 액션 연출도 탁월했다. 강해상 (일당)은 민첩성이 좋다. 이 인물은 갑자기 튀어나와서 사람을 습격하는 방식의 캐릭터다. 앞에서 썼던 소리 연출이 여기서도 빛을 발했다. 조용하다가 쉭쉭 나타나서 공격하는데 그냥 간단하게 인물 액션만 보여주고서는 이런 디테일을 살릴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 인물 설정을 십분 발휘했던 액션신도 기억에 남는다. 이 <범죄도시> 시리즈의 주요 재미 포인트는 무서운 빌런이 한몫할 텐데, 장첸과는 다른 연기 역시 보는 맛이 있었다. 주인공과 악역 액션 설정만 좋았냐? 아니다. 예고에서도 나왔던 장이수의 카체이싱, 다른 경찰 캐릭터들의 액션까지 전작 1편에서 너무 마석도에게 집중되는듯한 분량을 인물의 적절한 활용을 통해 관객에게 재미를 주는 방식을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역시 이상용 감독이 인물에 대한 사려 깊은 고민을 한 흔적이 난다.
사실 손석구 배우 작품 처음 봅니다
요즘 <나의 해방 일지>인가? 손석구 배우의 인기가 엄청나다고 들었다. 드라마는 사실 손이 잘 안 가는 나. 그의 활약상을 잘 보지 못했다. 목소리도 아예 처음 들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좀 놀랐다. 이 배우가 엄청나게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 물론 지금도 충분히 잘 나가고 있는 배우지만 이 사람은 <베테랑>의 유아인처럼 여기서 폭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장첸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빌런이었다. 뭐 강해상 역시 감정을 참지 못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뭔가 절제하고 여유 있는 살인마였다. 이때의 강해상이 입에 품고 있는 미소 + 왠지 모를 자신감 + 꼼꼼한 성격까지 다방면의 특성을 가진 인물을 소화해냈다. 전작에서 윤계상-김성규-진선규 세 배우의 뛰어난 연기가 임팩트가 커서 아마 이 셋의 악역을 지울 수 있을까 싶은 분도 있을 텐데, 아마 이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셋의 존재감을 캐릭터 설정과 좋은 연기로 잘 틀어막았다.
통통 튀는 조연들
이 영화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은 조연들이다. 물론 마동석의 마석도, 손석구의 강해상의 카리스마는 탁월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이 둘이 빛나기 위해 조연들이 배경을 깔아주다시피 했다. 인물들은 각각의 개성을 보여주며 이야기에서 적지 않은 위치를 차지하는데, 감독의 인물 설정을 알맞게 소화한 배우들의 연기가 빛났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면, 전작 1편에서 장이수 캐릭터가 살짝 허무했다고 생각한다. 흑룡파 3인방이 돋보여야 하기 때문에 캐릭터의 개성을 줄였다고 하면 사실할 말은 없다. 물론 극에서 장첸에게 한방 먹이기에는 성공하지만 이것 말고는 좀 끌려다니는 느낌이 강했다. 가리봉동의 대표 조폭 아니었나? 장첸의 카리스마에 찍소리도 못하는 게 사실 좀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장이수가 2편에서는 단순히 유머 소재로만 쓰이지 않는다. 이 인물이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쌓아놨던 성격과 서사가 극에서 경제적으로 잘 쓰인다. 이런 인물 설정은 다른 조연들에게도 적용된다. 전일만-오동균은 전편이나 지금이나 마석도의 응원단장 같은 느낌이다. 사실 당연할지도 모른다. 장첸이나 강해상이나 싸움 자체는 잘한다. 그래서 이 둘과 전면전을 붙으면 영화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각각의 특정 시점을 지나가면서 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앞에서도 언급했듯 홍석-상훈 둘에게 액션신을 준 것도 이 둘이 그냥 나이가 비교적 어리고 무력이 약하다고 해서 소모적으로 쓰이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둘은 다른 부분에서도 주체적으로 활약한다. 그리고 한 특정 인물에 대해 쓸 수는 없지만, 이 시리즈에서 기대할 수 없었던 입체적인 인물이 등장했다. 후반부는 거의 이 인물 덕에 극이 전개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리즈에서 생각할 수 없었던 캐릭터를 보고 싶다면 이 영화가 좋을 것이다.
그냥 재밌는데 어떡해
사실 길게 이 영화의 장점을 쓰지 않아도 된다. 이 영화는 그냥 재미있다. 한 줄 요약. 잘 만든 영화다. 코로나19 여파로 우리나라 기대작들이 개봉이 많이 밀렸다. 이제 6월이 되고 나서야 한국영화 기대작들이 하나, 둘씩 잡히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이 레이스의 좋은 스타트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친구들이랑 삼삼오오 놀러 가서 봄 극장 나들이 하기 딱 좋은, 그런 잘 만든 킬링타임 영화다. 부럽다! 안 본 사람이 있어서! 이 시리즈의 3,4편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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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래식은 이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전에 파묘를 리뷰했지만 사실 파묘가 더 일찍 개봉했음에도 불구하고, 듄을 먼저 보았다. 그만큼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대작이었다는 뜻이다. 그래놓고 이렇게 늦게 리뷰하는 것은 나의 게으름이라, 할말이 없지만.
그래도 기대한 보람이 있었다. 간만에 제대로된 클래식을 맛보았는데, 잘 다듬어진 클래식이라 두고두고 볼 것 같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면 이렇게 스케일이 큰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다시금 대단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런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자세란 어떤 것일까 다시금 되새긴다.
'듄 파트 1'의 내용은 영웅이 되기 전의 유약했던 시절의 고난을 다루었다면 '파트2'는 영웅이 될 조짐이 보이는 상황 속 주인공이 처한 딜레마와 고뇌를 담은 작품이다. 영화 속에서 그가 영웅이 될 지 안 될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영웅이 될 것은 자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영웅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가진 고뇌는 이렇게 고독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웅장함은 마치 성경에서 처음 출애굽기를 읽을 때의 상상 속 웅장함과 비슷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과거 많은 설화, 전설 등에서 레퍼런스를 찾을 수 있다. 어찌보면 흔한 서사라고 볼 수도 있어 서사 자체는 흥미롭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클래식은 영원하다고 했던가. 흔한 서사를 다룰 때에는 디테일이 중요한 것 같다. 이 영화는 웅장함을 지키는 게 중요했는데 그 웅장함의 정도가 과하면 유치해보이고, 약하면 이게 영웅인지 헷갈리게 된다. 이 적당한 웅장함을 유지하기 위한 디테일로는 폴 아트레이디스가 무아딥이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자아와 영웅이 될 운명 사이에서 고뇌하는 지점이 있다. 영웅이 될 사람은 태생부터 비범했으며 온 우주가 그의 영웅만들기에 혈안이 된 것만 같고 개인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많이 무시되는 과거의 클리셰와는 달리 듄의 폴 아트레이디스는 유약함을 가진 한 개인으로서의 면모도 보인다. 개인으로서의 삶과 사회를 위해 나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팔자 사이에서 그는 결국 영웅이 되기를 선택한다. 그걸 보면서 영웅 팔자는 일종의 가스라이팅 같기도 하면서 그 가스라이팅 마저도 그 팔자의 일부인 것 같기도 하다.
수많은 영웅 서사 중에서도 이 영화가 독특한 영웅 서사가 된 디테일에 대해 논한다면 누군가는 사막 배경이라는 척박한 환경을 논하고, 디테일 중에서 웅장함을 배가시키는 음악도 한몫 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인공 폴 아트레이디스의 고뇌를 얘기할 것 같다.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다면 관객은 그저 그 웅장함을 온전히 느끼기만 하면 된다. 이 영화의 장점은 클래식한 서사에 가장 현대적인 기술력을 덧붙여 클래식이 가야할 길을 보여줬다는 데에 있다.
클래식이 고플 때 나는 90년대 혹은 그 이전의 영화를 돌려보곤 한다. 현재까지 이용되는 서사의 대부분이 그 때 이미 등장했었기 때문에 가장 처음 만들어졌던 서사가 가장 자극적이고 재밌는 법이다. 그래서 현 시대는 편집의 시대라고 하지, 창조의 시대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기술력은 과거보다 압도적으로 달라졌기에 모두가 다 아는 출애굽기 조차 다시 이 기술력으로 묘사한다면 인간이 느낄 신적인 존재에 대한 위압감은 더 배가될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기술력이 가진 장점의 정점을 본 것만 같았다. 트랜스포머, 신과 함께 등 선진 기술력으로 마케팅했던 수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이 영화의 그런 기술력을 앞세운 영화의 가장 성공적인 만듦새의 표본을 보는 느낌이랄까. 돈을 쓰려면 이렇게 써야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관람했었다.
총평
꼭 영화관에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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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길이라는 도시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느낌을 주는 곳이었어요.” <브레이킹 아이스> 안소니 첸 감독 인터뷰 (1)
오늘(6/4),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가 개봉했습니다. 추운 겨울 중국 국경 도시 연길을 배경으로 흔들리는 청춘의 모습을 담아낸 이 작품은 그 시절을 지나오고 있는, 이미 지나 온 모든 청춘의 얼어붙은 마음을 따듯하게 녹이며 공감과 위로를 전합니다. 지난 5월의 끝자락에, 영화에 담긴 마음만큼이나 따듯했던 안소니 첸 감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씨네랩 | 긴 여정에 앞서 우선 가벼운 질문부터 드리겠습니다.
주요 로케이션인 백두산의 도시, 연길은 매우 추운 도시인데요. 특히, 싱가포르 출신인 감독님께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혹시, 추운 날씨로 인해, 촬영에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관련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안소니 첸 | 그곳(연길) 사람들은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전혀 없어 보이더라고요. 뭔가 시작부터 굉장히 빠르게 움직이는 느낌이었습니다. 연길에서의 촬영은, 특히 야외에서의 촬영은 정말 빠르게 진행되었던 것 같아요. 정말 추웠기 때문이죠. 촬영 현장에는 항상 제 모니터와 텐트가 따로 설치되었고, 그 주변에 난방기도 많이 있었지만,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은 그런 게 없잖아요.
그래서 “테이크!” 하면 다들 바로 제 텐트로 달려와서 “으아아아~” 하면서 몸을 녹였죠. 사실 생각만큼 그렇게 힘든 환경은 아니었지만, 제가 그 상황에 완전한 준비가 안 되어 있었죠. 눈길을 대비한 부츠도 없었고, 적절한 방한 장비도 전혀 없었거든요. 제 인생에서 그렇게 온라인 쇼핑을 많이 해본 건 처음이었어요. 방한 부츠, 두꺼운 양말, 내복 같은 걸 다 새로 샀죠.
최근에 아시아로 돌아왔지만, 학창시절부터 런던에서 16년이나 살았거든요. 싱가포르에 비할 건 아니지만, 영국은 그렇게까지 춥지 않아요. 어떤 해는 눈도 전혀 안 오기도 하고요. 그런데 연길의 추위는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덕분에 제가 배운 건, 여러 겹을 껴입으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촬영이 아예 불가능하진 않았어요. 다만 백두산이나 장백산에서 촬영할 때는 눈이 너무 깊어서, 빨리 움직이려면 걷는 것보다 기어가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냥 네 발로 기어다니거나 넘어져서 굴러가는 게 훨씬 빠르더라고요.씨네랩 | 감독님께선 ‘불안한 청춘’, ‘이방인의 정서’를 전하기 위해, 한국과 중국의 문화가 어우러진 국경 도시 ‘연길’을 선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고려하셨던 후보 지역들이 있었는지, 연길이 더 특별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소니 첸 | 이전에 가본 중국 도시 중 가장 북쪽이 베이징이었고, 그 이상은 가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중국에서 가장 추운 곳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당시 떠올랐던 유일한 도시는 하얼빈이었죠. 그래서 처음에는 "하얼빈에서 촬영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연길이라는 도시를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런 느낌의 중국 도시는 처음이었어요. 분명히 중국에 있는 도시인데도, 마치 중국 같지 않게 느껴지더라고요. 거리 곳곳의 간판이 모두 한국어로 되어 있기도 했고, 그 공간에는 뭔가 몽환적인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마치 낯선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지만, 정확히 여기가 어딘지 감이 잘 안 오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저는 그런 국경 도시라는 개념이, 삶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정말 완벽하다고 생각했어요. 인생의 경계에 서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와 물리적인 ‘국경 도시’라는 설정이 아주 잘 어우러졌죠.씨네랩 | <브레이킹 아이스>는 특히 저희에게 익숙한 한국어가 들리는데도,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는 영화였습니다. 문득, 한국에서는 조선족이 미디어에서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매우 의미 있는 설정이었지만, 감독님께는 무척 새로웠을 것 같은데요. 해당 설정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이유와, 촬영 당시 어떤 점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안소니 첸 | 저는 연길이라는 도시에 정말 매료됐어요. 그 도시가 주는 색채가 굉장히 강렬하다고 느꼈거든요. 그 색채의 상당 부분은 한국 문화에서 비롯된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정말 옷을 잘 입고, 굉장히 세련된 패션을 하고 있었고, 다양한 즐길 거리와 먹거리가 가득했어요.씨네랩 | 익조틱(이국적)한 느낌이었나요?
음, “이국적”이라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사실 중국 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연길에 대해 약간 부정적이거나 편견 어린 시선을 가지고 있거든요. “가난한 도시”, “낙후된 도시”라는 인식이 있어요. 연길은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한 도시도 아니고, 상하이나 베이징 같은 대도시도 아니니까요.
제가 친구들에게 “연길에 간다”고 말하면 대부분 “어휴, 난 거기 안 가고 싶어”라고 해요. 그런데 막상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와, 정말 색다르더라”라고 말하죠.연길에는 조선족 인구가 많잖아요. 그분들이 한국에 나가서 일을 하고, 다시 돌아오면서 음악, 패션, 커피, 음식 등 한국의 문화 요소들을 많이 가져와요. 그래서 연길은 동북지방의 다른 도시들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죠.
중국 동북 지역은 대체로 회색빛이고, 낙후되고, 산업화만 되어 있고,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드는데요. 연길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굉장히 다채롭고 활기찬 에너지가 느껴지는 도시였어요.씨네랩 | 한국어가 많이 등장하다 보니 현장에서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소니 첸 | 현지인들과 한국 분들을 통해 배운 것 중 하나는, 연길에서 쓰이는 한국어가 우리가 아는 한국의 표준어와는 조금 다르다는 점이었어요. 글자도 말투도 좀 더 옛 한글에 가깝더라고요. 그래서 그분들이 “만약 이게 한국 드라마였다면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 거예요”라고 말해주곤 했어요.
그래서 현장에는 항상 한국어 대사를 도와줄 사람이 있었어요. 배우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언어니까요. 그 과정에서 한국어가 가지는 미묘한 특성을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게 어렵거나 힘들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오히려 재미있었죠.
그리고 이 도시(연길)에선 길거리 어디서든 한국어가 들려요. 조선족 인구가 많기 때문에, 거리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여기저기서 한국어가 흘러나오거든요. 저는 한국어를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한국을 여러 번 방문한 경험이 있고, 또 요즘엔 전 세계적으로 한국 문화가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인지, 언어는 잘 몰라도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또 낯설게 느껴지기도 해요. 분명히 한국어가 들리는데, 여기는 한국이 아닌 공간이고, 뭔가 “여기에 속한 듯하지만 완전히 속하지는 않은” 그런 이상하고 몽환적인 느낌이었어요. 제 말이 좀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연길이라는 도시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느낌을 주는 그런 도시였어요.
씨네랩 | 관련하여, 통번역가 분을 온전히 믿고 가는 작업 방식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불안 요소는 없었을까요?
안소니 첸 | 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요. 주동우 배우가 대사 두 줄 정도를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부분은 나중에 ADR(후시 녹음)을 해야 했죠.
그리고 이건 중국 영화 시장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한데요. 아시다시피 중국에는 검열 시스템이 있잖아요. 그래서 영화가 검열을 통과하려면 특정 기준을 충족해야 해요. 특히 영화가 조선족 문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문가가 따로 들어오기도 했어요.
되게 흥미롭죠. 영화 속에 묘사된 요소들이 정확한지를 검증하는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런 절차가 꽤 인상 깊었어요. 그런데 이게 중국에선 일반적인 과정이에요.중국은 워낙 넓은 나라이고 다양한 민족과 방언이 존재하다 보니, 소수민족 문제에 굉장히 민감하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항상 ‘오해의 소지’나 ‘왜곡된 묘사’가 없도록 철저히 점검하더라고요. 민족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 같아요.
씨네랩 | 감독님께서는 다문화가 공존하는 싱가포르에서 성장하신 만큼, 중화권 문화에도 익숙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화권 배우들과 함께 협업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 일 것 같은데요. 협업 과정은 어땠는지, 새로운 문화적 경험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안소니 첸 | 저는 중국어를 읽고 쓰고 말할 줄 알기 때문에, 협업 자체는 수월했어요. 실제로 배우들이 끊임없이 저한테 물어보더라고요. “중국어를 왜 이렇게 잘하세요?”라고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싱가포르 사람들은 중국어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거든요. 그래서 배우들이 “외국인 아니셨어요? 근데 왜 이렇게 중국어를 잘하세요?”라고 자주 묻곤 했죠.
그 차이는 아마도 ‘남방’과 ‘북방’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제 조상들은 남중국 출신이에요. 아버지 쪽은 푸젠성, 어머니 쪽은 광저우 출신이죠. 실제로 싱가포르로 이주한 중국인 대부분이 남방 출신이에요.
하지만 이번 촬영은 북방에서 진행됐잖아요. 그래서 말투나 억양, 단어 선택 같은 게 많이 달랐죠.기억나는 게 있는데, 몇몇 배우들이 “감독님이 쓰신 대사나 문장이 대만스럽다”고 했어요. 남방식 표현이니까요. 북방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친구들이 직접 몇몇 문장을 다듬어주며, 좀 더 자연스럽게 들릴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씨네랩 | 더불어, 이후 영국에서도 학업을 이어가신 만큼 다양한 국가의 배우들과 일하는 것이 자연스러우실 것 같은데요. 각본 집필하실 때, 혹은 실제 현장에서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과, 그 차이를 줄여 나가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안소니 첸 |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고향이 아닌 곳에서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어요. 하나는 중국 본토에서 만든 첫 중국어 영화인 <브레이킹 아이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럽에서 만든 첫 영어 영화 <Drift>입니다.
제가 싱가포르에서 자란 것의 특별함은, 다양한 언어와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는 점이에요.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저는 기본적으로 영어를 쓰며 자랐고, 동시에 학교에서는 중국어도 배우고 사용했어요.
다언어, 다문화가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살아와서 적응력이 강해질수 있었죠. 덕분에 저는 어느 나라에서든 일할 수 있고, 음식도 전혀 문제가 안 돼요. 맵고 자극적인 음식도 잘 먹고, 유럽이든 중국 북쪽이든 어디서든 문제 없어요.저는 싱가포르라는 ‘문화적 용광로’에서 자란 덕분에, 낯선 환경에서도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사람들과 일할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촬영 과정에서 특별히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다만 중국에서 일할 때는 한 가지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죠. 바로 ‘검열’에 대한 민감성이에요. 중국 스태프들은 어떤 장면이 검열을 통과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고, 그 기준에 굉장히 익숙해 있어요.
그래서 촬영 도중에도 계속 “이 장면 진짜 촬영해도 괜찮은 거 맞아요?”라고 확인하더라고요.예를 들어, 배우들과 은밀한(감정적, 신체적) 장면을 촬영할 때 그 차이를 실감했어요. 주동우와 류호연 두 배우 모두 17살 때부터 연기를 시작한 베테랑들이지만, 그런 장면에서는 굉장히 수줍어하고 긴장하더라고요.
저는 “당신들이 찍은 영화가 제가 만든 영화보다 훨씬 많잖아요. 이 정도는 익숙하지 않나요?”라고 물었죠. 그런데 그들은 “중국에선 실제로 이런 장면을 거의 안 찍어요. 키스하면 바로 장면이 전환돼요. 베드신 같은 건 거의 안 찍어요”라고 하더라고요.그래서 그들도 한편으로는 흥미로워 했어요. 미국 영화나 유럽 영화에서는 그런 장면이 아주 감각적으로 보이니까요. 그런데 막상 촬영을 시작하니까 “이거 완전 지루하잖아요?” 하는 반응이었어요. 왜냐하면 실제로는 굉장히 기술적인 작업이거든요.
“몸을 이렇게 움직여야 카메라에 이 부분이 안 보이고, 이쪽으로 틀어야 조명이 맞고…” 이런 식으로 아주 세세하게 조정해야 하니까요.
결국, 그렇게 경험 많은 배우들도 그 장면에서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수줍어했고, 땀을 뻘뻘 흘려가며 여러 번 다시 찍어야 했죠. 저에게도 정말 흥미로운 경험이었죠. 결국, 문화적으로 ‘은밀함’이라는 것에 대한 접근 방식이 굉장히 다르다는 걸 실감했어요. 중국에서는 그런 장면이 거의 연출되지 않으니까요.(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에필로그)
안소니 첸 감독님과의 대화 중 연길에서의 한국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들으며, 한국 음식에 대한 에피소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연길의 ‘황우(노란 소)’에 대한 극찬이 이어졌는데요. 과연 어떤 맛일지 궁금해집니다. (웃음)
저는 정말 다양한 음식을 시도해봤어요. 특히 떡을 정말 많이 먹어봤죠. 아마 제가 평생 먹어본 떡보다 이번 촬영을 하며 더 많이 먹었을 거예요. 떡은 정말 어디에나 있었고, 그래서 저는 떡이 얼마나 한국적인지를 실감했어요. 그리고 국수도 많이 먹었는데, 보통 소고기가 들어간 국물이었어요. 사실, 연길에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소고기가 있어요. 그걸 황우라고 부르는데, 한국어로는 '노란 소'라는 뜻이에요. 연변 황우라고도 부르죠. 이 지역에서 나는 소고기인데, 정말 훌륭한 품질의 고기예요.
이 소고기 중 많은 양이 한국이나 미국으로 수출되고 있어요. 외관은 갈색을 띠는 소인데, 고기가 아주 맛있어요. 하지만 이 고기는 가격이 꽤 비싸요. 왜냐하면 고품질의 고기는 항상 비싸잖아요. 그리고 가장 좋은 고기들은 대부분 수출되기 때문에 현지에서도 쉽게 접하기 어렵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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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파일럿으로 변신한 조정석의 압도적 연기 / 빵빵 터지는 코미디 / 매력적인 이주명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파일럿"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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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넷플릭스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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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감춰졌던 킹스맨의 탄생을 목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