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6-06 13:46:54
오징어게임 말고 젊은남자 '이정재'
청춘의 이정재가 담긴 영화들
<오징어 게임> 성기훈의 <젊은 남자>시절?
📺 오겜3 보기 전에,
에디터가 고른 “청춘 이정재” 대표작 5편
담아두고 같이 정주행해요 📂
에디터 픽🎯
<젊은 남자>, <태양은 없다>, <시월애>, <하녀>, <도둑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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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소행성을 찾아떠난 이유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영화 <울야는 못말려>. 어떤 작품이기에 개막작으로 선정이 됐을까 굉장히 궁금했었는데, 어린이의 모험심과 이를 둘러싼 어른들의 관심, 그리고 우정에 대해서 잘 풀어내서 개막작으로서 멋지게 SICFF를 열어준 작품이었다.
영화 <울야는 못말려> 시놉시스
삶의 이유인 천문학 연구에 방해를 받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 열두 살 울야는, 동급생이 운전하는 훔친 영구차를 타고 동유럽을 가로질러 소행성의 충돌을 보러 간다. 이 여정을 통해 울야는 그녀를 뒤쫓는 이들뿐 아니라 그녀가 가족과 우정에 대해 가졌던 실리적인 생각도 떨쳐 버려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법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울야는 못말려>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동네가 필요하다
천재소녀 울야는 종교를 맹신하는 할머니로 인해서 더이상 집에서 천문학 연구를 할 수 없게 되자, 운전을 할 수 있는 헨크와 함께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의 추락을 직접 확인하러 국경을 넘어 파츠루크로 향한다. 12살 어린 아이들이 자신의 집에서 1,000km나 떨어진 곳을 직접 가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자신을 믿어주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믿어준 키르시프 교수님 덕분에 울야는 1차적으로 그 먼거리를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자신의 부모님이 어떻게든 자신을 찾아낼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그렇게 무모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부모님 몰래 국경을 넘는 가출을 감행한 울야를 찾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한 데 모여 울야와 행크 찾기에 나선다. 없어진 성모마리아상을 찾기 위한 타락한 목사와 성가대 대회로 출발할 것이라고 착각한 다른 마을 주민들, 그리고 울야를 찾기 위한 울야의 부모님까지. 초반 그 목적은 달랐지만 결국에는 울야와 행크를 찾는 것으로 그 방향이 모아지면서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한 아이를 지켜내고 성장시키기는 데에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출한 울야를 쫓는 동네 사람들의 추격신을 통해 잘 풀어내고 있었다.
관심이 필요한 아이들
그렇다면 울야와 행크는 왜 가출을 한 것일까? 표면적으로 울야는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서였고, 행크는 자신이 운전을 해주면 울야가 4주동안 숙제를 대신해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내면을 조금만 살펴보면, 그들의 가출은 어른들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울야는 겉보기에는 할머니, 엄마, 아빠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른들은 울야가 원하는 것이 아닌 어른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들의 방식으로 울야를 사랑하고 있었다. 울야가 얼마나 천문학에 관심이 많고 이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행크 역시 마찬가지다. 행크는 굉장히 자유로워보이는 엄마 아빠 밑에서 자라서 천방지축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누구보다 엄마와 아빠의 관심에 목마른 아이였다. 그래서 울야와 함께 떠나는 와중에도 부모님께 ‘나 어디게?’, ‘오늘 집에 안들어가’와 같은 식의 문자를 남기지만 부모는 이에 큰 반응을 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부모의 전화를 기다리지만 행크의 부모는 전화 한 통을 주지 않는다.
영화 <울야는 못말려>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관심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지 풀어내고 있었다. 행크의 부모처럼 너무 무관심해서도, 울야의 부모처럼 아이에 대한 배려 없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관심과 애정을 쏟아서도 안된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상호존중과 배려가 바탕에 있는 관심이 아이들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함께 가는 여정의 즐거움을 알다
행크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 울야는 굉장히 독단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이것은 내 여행이니까 내 말을 따라야 돼’, ‘내가 하자는 대로 해야 돼’라고 말하면서 행크의 의견을 묵살하거나 자신의 위치를 모조리 알려버리는 행크를 굉장히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을 직접 관찰하기 위해 지금까지 함께 운전해 온 행크를 버리고 혼자 파츠루크로 향하는 모습에서 행크라는 존재를 도구적으로 이용한 것처럼 보이기 까지 해서, 자신의 지성을 믿고 친구를 저렇게 이용만 해도 되는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결국 울야는 자신이 소행성을 발견한 뒤 직접 파츠루크로 올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행크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추켜세우는 기자들 앞에서 행크를 자신의 가장 큰 조력자라고 밝히면서 인생에 있어서 ‘우정’이라는 요소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함께 였기에 그 먼길을 재밌게 올 수 있었고, 난관을 해결했다는 사실을 울야는 비로소 깨달은 것 같았다.
천재소녀와 자유로운 소년의 국경을 넘은 가출기를 담은 영화 <울야는 못말려>. 카툰의 요소와 함께 명랑하고도 쾌활하게 그 여정을 잘 풀어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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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하게 일상을 담는 카메라
남자 친구가 생기지 않아 고민이던 박강아름은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를 만들었다. 촬영 중 성만과 인연이 닿아 부부로서의 삶을 약속하기에 이른다. 아름은 프랑스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리고 싶었고 성만은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줬다. 하지만 프랑스에 적응한 아름과 다르게 성만은 낯선 타지에 적응하지 못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고 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은 가사 노동뿐이었다. 결국 주부 우울증이 생긴 성만을 위해 아름은 집에서 운영하는 ‘외길식당’을 제안한다. 외길식당을 찾은 사람들과의 소통은 아름에게 결혼과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게 했고 자신의 삶 속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금 카메라를 든다.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싱글을 졸업한 박강아름 감독이 가족으로서 새 출발을 담고 있다. 설레는 마음과 함께 시작한 새 출발이지만 매번 즐거운 일만 있을 순 없다. 특히 사적 다큐멘터리를 다루는만큼 박 감독의 작품은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자 한다.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까지 카메라의 담는 그녀의 모습에서 영화는 솔직함을 넘어선 진실함을 느끼게 된다.
박강아름 감독은 <박강아름 결혼하다>로 30대의 자신을 보였으며, 이후에도 계속해서 변화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담을 예정이다. 자녀 보리와 반려견 슈슈의 이야기인 ‘슈슈와 보리’라는 차기작 또한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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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고 일어났는데 코 끝이 시큰하다. (안녕, 나의 조제)
자고 일어났는데 코 끝이 시큰하다.
안녕, 나의 조제
울고 싶다.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어두컴컴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잘 보지 못하는 (혹은 알고 있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하는, 혹은 보고 싶지 않아하는) 사회의 이면들을 비추며 시작된다. 걸을 수 없는 빈민층의 조제가 추운 날 자신의 다리나 다름 없는 휠체어에서 넘어졌을 때, 주위에 아무도 도움 줄 사람이 없었을 때, 얼마나 세상은 그녀에게 차가웠을까. 아니 어쩌면, 차가울 거라고 느끼는 건 관객인 나의 몫일지도. 내가 겪어 본 적 없는 불행 아니던가. 그녀의 마음은 이미 혼자인 세상 속을 유영하고 책들에게서 나온 상상의 나래 속에서 충분히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 견고한 유리 구슬 속 세상을 깬 것은 대학생 영석이다.
조제는 말한다. 누가 뒤에서 덥석 가슴을 만지려고 해서 피하다가 넘어졌다고. 장애인 여성을 범하려는 사람들은 추잡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건드리는 악인들은 어느 사회 뒷골목에나 존재할 터. 원작인 일본판에서의 조제는 영석 역의 츠네오를 연모하던 여대생에게 외친다. '이게 그 사람을 잡는 무기 같다면 너도 차라리 다리를 분질러 버려!' 라고. 한국의 조제는 조금 다르게 자신을 지킨다. 조금 더 삐뚤어진 듯한, 조금 더 어두컴컴한 세상 속에 갇힌 듯한, 조금 더 많이 현실 보다는 허구의 세상 속에 있는 그녀다. 신체가 자유롭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시선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조차 '정신과 다녀'라는 손가락질로 대하는 사람들인데, 원치 않았던 이유로 걷지 못하는 정신이 말짱하고 건강한 사람은. 어느 쪽도 불행하겠지.
(우에노 주리가 연기한 카나에가, 수경을 연기한 배우보다 좋았던 건 순전히, 그 전 부터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하고 잔망미 넘치지만 사랑 앞에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던 그녀의 모습이, 꼭 나의 20대 모습 같아서 좋았다. 곧 죽어도 직진하던 나는 어디에 있나)
이제와 생각해 보건데 내가 조제라는 영화를 참 좋아했던 이유는 지난 찬란한 사랑의 추억 속에서,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이었던 순간들을 남기고서, 그 안에서 자유롭게 고요히 살아갈 '바다'를 발견한 조제의 마지막 미소 때문이었다. 영석 역의 츠네오는 다시 만나지 못하고 안지 못할 조제를 떠올리며 울음짓지만, 좀 더 안락하고 편안한 현실로 도피했다. 조제의 세상으로 들어오려고 했던 그의 사랑은 그러나 거짓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츠네오가 조금 더 명민한 사람이었다면, 사랑이라는 감정과 조제에의 호기심어린 마음에 취해 그녀와 오랜 시간 함께 보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니까. 서로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이, 사랑에 어떻게 금을 그어버리는지, 서서히 어떻게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기는지 잔잔하게, 위트있게, 아름답게 그려낸 영화여서, 참 좋았다.
나는 그래서 한국판 '조제'에서도 그런 미소와 상큼한 이별을 기대했다. 러시아산 권총보다 글렌리벳 위스키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조제는, 좀 더 천천히 말하고, 좀 더 저온으로 사랑하는 듯한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고, 영화의 전반에 걸쳐 호랑이와 물고기를 만나는 과정들은 천천히 아주 느리게 간다. 밤 늦은 시간 두 사람이 데이트하는 유원지에서, 관람차에 처음 올라타는 조제는 방금 전까지 남아프리카에서 열기구를 탔다는 허영은 온데간데없고, 난생 처음 올라와 보는 상공에서 미세하게 떨며 영석에게 의지한다. 그런 그녀를 업고 관람차에서 내리려는 찰나, 직원의 실수로 문은 열리지 않고 다시 관람차는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조제를 업어올린 영석을 바라보는 직원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었다가 멀어져간다. 관객들은 영석과 조제를 바라본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 직원처럼, 그랬을까. 아렸을까, 아니면 아련했을까.
(관람차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시선은 시작점 부터 좀 다르다. 출처 포토뉴스. 관람차 안에서 조제를 업은 영석의 사진은 찾을 수 없었다.)
물고기 대신 커다란 돌고래를 만나러 간 수족관에서 조제는 이별을 직관한듯 영석의 손을 잡고 '나는 괜찮아' 라는 말을 조용히 읊조린다. 둘의 대화는 많지 않다. 많을 필요가 없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영석이 말하는 '어떻게 그래...'의 눈물은, 큰 울음보다 더 아프게 다가왔다. 한국 정서에서 더 당연하게 느껴지는,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부터 한국 사회에 이렇게 냉소적이 되었을까? 나부터도 신체 부자유한 사람들에게 관심 조차 없지 않았나? 당연히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불친절한 내가 아니었나 싶다. 일본의 조제는 좀 더 생기발랄했다. 한국의 조제도 선방했다. 배우 한지민이 영석에게 말하는 대사 '독이라도 탔을까봐' 라는 말을 듣자니, 그녀가 영화를 위해 쌓아올린 그녀의 세상이 조금은 느껴졌다.
스코틀랜드에서 촬영한 듯한 상상씬은 진짜 그랬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보기 좋았다. 그리고 한국판 조제의 당찬 마지막 모습도, 전혀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만의 방식대로 세상과 맞닥뜨리며, 영석을 만나기 전과 전혀 다른 조제의 마음으로 살아갈테니. 사랑과 성취의 경험이라는 건 그런 것 같다. 누군가를 많이 사랑했고 또 이해받고 행복했던 기억은, 내 마음 속에 고요히 작고 예쁜 성을 만들어 준다. 가끔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외로울 때, 슬며시 들여다 보고 추억할 수 있도록, 그렇게 힘을 주는 것 같다.
(한지민 인스타그램에서 나온 비하인드 컷이라고 한다. '때로는 너와 함께 아주 먼 곳까지 가고 싶었어'라던 조제의 대사가 귓가에 맴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건 거의 한 달 만인 것 같다. 그 한 달 동안 마음이 힘들었다. 내 마음을 자꾸 두드리는 사람이 있고, 나는 아직 지난 사랑과 이별이 만들어놓은 우울의 동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만 같고. 오늘 두 시간 정도 요가를 하면서 여전히 가슴을 펴는 동작에서는 잔기침이 나고,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욱하는 것들이 올라왔다. 비로소 내 안의 우울감 속에 편하게 오랫동안 있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나의 견고한 세계를 부수고 다시 사랑하고 싶다. 눈이 부시도록. 마음이 터지도록. 끝을 예상하며 도망치지 않으면서, 사랑하고 싶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아일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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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애 규범이 두 소년에게 남긴 상처
8★/10★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루카스 돈트 감독이 연출한 영화 〈클로즈〉는 제75회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이자 2023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 벨기에 대표 출품작이다. 2022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폐막작이기도 하다.사랑과 우정의 경계에 있는 두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이성애라는 규범이 폭력적으로 작동하는 방식과 그 폭력의 여파를 홀로 견뎌야 하는 자들의 슬픔을 놀랍도록 섬세하게 그려낸다.
시골 마을에 사는 두 소년 레미와 레오는 어릴 때부터 서로를 가장 친한 친구로 여기며 자랐다. 그러나 ‘친구’라는 호명은 둘의 관계를 온전히 대변하지 못한다. 한 침대에서 서로의 숨결을 가까이 느끼며 자는 게 익숙하고, 자연스레 둘이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는 둘은 이제 막 중학생이 된 두 소년이 그렇듯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친구일 수 있지만, 연인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른들의 시선 밖에서 자기 둘만이 구축한 관계를 만끽하는 두 소년은 기존의 언어로는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관계의 우주를 자유로이 탐색하는 중이다.
둘이 함께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변화가 생긴다. 학교는 공적 제도다. 아이들이 건실한 성인, 즉 ‘건전하고 착실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기관 말이다. 즉 학교는 공적 권위를 바탕으로 아이들의 몸에 정상성이라는 규범을 새긴다. 제도로서의 학교는 레미와 레오의 관계처럼 ‘애매모호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단지 선생님이 ‘동성애는 안 돼!’라고 겁박하는 차원이 아니다. 학교라는 기관에 관여하는 모든 주체가 기존 규범을 전파하고 재확립한다. 친구들은 늘 꼭 붙어 있는 레미와 레오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살갗을 맞댄 채 앉은 레미와 레오의 물리적‧정서적 가까움은 호기심/의심의 대상이다. 누군가는 그저 “너희들은 너무 딱 붙어 앉아”라고 웃으며 말할 뿐이지만, 누군가는 레미와 레오를 “호모”라고 부른다.
레미는 남들의 시선을 괘념치 않는다. 레오와 오랫동안 구축해온 세계에 무한한 안정감과 절대적 신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오는 그렇지 않다. 레오는 둘의 관계를 ‘오해’하는 친구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레오는 둘만 있을 때도 친구들의 시비를 떠올린다. 규범은 이토록 위력적이다. 규범은 주체를 잠식해 자아를 검열하는 거울로 작동한다. 둘만의 역사가 새겨진 둘만의 장소에서도 레오는 레미를 멀리 한다. 같은 침대를 쓰기를 거부하고, 둘이 늘 함께 하던 전쟁놀이 중에도 “진짜로는 아무도 없다”며 김을 뺀다. “진짜로는 아무도 없다”는 레오의 말은 이성애만을 정답으로 간주하는 규범의 권위 앞에서 레오가 둘의 관계를 수치스러워하기 시작했음을, 둘이 구축한 세계가 허깨비처럼 사라져버릴 가능성을 레오가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레미는 레오를 기다려주고 더 기회를 준다. 하지만 레오는 점점 레미에게서 멀어지기만 한다. 아이스하키 동아리에 들어가 남자들의 놀이문화를 익히고, “생리하냐”라는 여성 비하적 농담을 습득한다. 결국 레미는 더는 레오와 이전처럼 지낼 수 없음을, 레오가 둘의 관계를 배반했음을 깨닫고 눈물 흘리며 레오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선생님이 말리는데도 레오에게 달려들기를 멈추지 않는 레미는 고작 친구들 말 몇 마디에 둘의 모든 것을 저버린 레오를 향한 분노, 자신들의 세계가 이토록 쉽게 무너졌다는 것에 대한 허탈함, 거대한 규범 앞에서 무력감 등을 느꼈을 것이다. 근래 본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었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전반부다. 후반부에서는 레오만이 주인공이다. 레미가 자살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친구들, 가족들이 모두 레미의 죽음을 슬퍼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애도를 진행한다. 하지만 레오는 내내 경직된 표정이다. 침대에 오줌을 싸고 화가 많아지는 등 레오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레오는 레미를 잃었다는 상실감과 슬픔이 버겁기도 하다. 레미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레오는 레미의 어머니에게 찾아가 “저 때문이에요. 제 잘못이에요”라고 눈물로 고백한다. 그러나 레오는 틀렸다. 레미는 레오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정상적 규범에 부합하지 못하는 자, 즉 동성에게 우정 이상의 친밀성을 느낀 레오가 수치심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규범은 이런 식으로 자기 바깥의 존재를 점령하고 포섭한다. 강압적 통치뿐 아니라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는 것이다.
레오에게 ‘네 탓이 아니다’라고 말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아이스하키 시합에서 팔이 부러진 레오가 깁스 처치를 받는 장면이 있다. 레오가 눈물을 흘리자 의사가 팔이 부러지면 아픈 게 당연하다고 레오를 달랜다. 그러나 레오는 팔이 아파서 우는 게 아니다. 레미를 잃은 슬픔 때문에, 마찬가지로 폭력의 희생자인 그가 잘못된 자책으로 괴로워하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 레오의 오인된 자책과 그런 레오를 향한 엉뚱한 위로. 이는 레미를 그리워할 레오가 평생 안고 가야 할 짐이다. 〈클로즈〉는 정상성과 규범 바깥의 존재가 마주하는 폭력의 여러 양상을 가슴 아프도록 생생하게 고발한다. 자신을 멋대로 재단한 사람들 때문에 잃어버린 것을 영화에 담아내고자 했다는 루카스 돈트 감독처럼, 레오가 언젠가 다른 답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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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 느끼는 상실감과 후회
시놉시스
예분은 손녀인 수정을 물가에서 사고로 잃게 되어 하루 종일 수색 탐지기로 죽은 손녀의 물건들을 건지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녀인 수정의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예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1년 동안이나 긴 세월을 물가에서만 맴돈다.
오늘은 예분이 손녀 수정의 장례식을 치르는 날인데 조문객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옥임이 찾아와 예분에게 말을 걸며 그 때 사건을 회상시키는데...
손녀인 수정은 강가에서 래프팅을 하다가 죽게 되었다. 그 사건을 목격한 예분에게는 자신한테 닥친 일이 큰 미스터리가 되어 수색 탐지기를 써서 사고 현장에서 손녀가 가졌던 물건을 찾기 위해 애쓴다.
아마도 가까운 지인이나 친척의 죽음을 목격하면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 것 같다. 죽음의 공포는 누구에게 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화에서는 강가에서 놀다 죽은 어린아이의 시체를 보며 슬퍼하는 부모의 모습이 예분에게 다시 큰 트라우마를 회상하게 만드는데 자신이 강가에서 수색 탐지기로 손녀인 수정의 물건을 찾다가 공사장 인부들과 시비가 붙고 경찰들한테도 이제 그만 잊으라는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손녀의 시신을 찾을 수도 없었고 유품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고 그런 죽은 손녀를 지키지 못한 한이 예분에게는 큰 미련으로 남겨졌을 것이다.
그 죽음의 단서는 사실 죽은 수정의 친구였던 지윤에게 있었는데 지윤은 수정을 이끌고 래프팅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며 자신은 수영을 잘한 수정을 부러워했다. 지윤은 집에만 가면 보이는 환각과 환청 때문에 정신과 약을 복용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는데 자신의 아버지는 도박 빚으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자신을 키워주던 할머니인 옥임조차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 이후로 자신이 속한 수영부에서도 부진한 실력을 보여주게 된다.
과연 이 영화가 보여주는 메세지는 무엇일까? 아마도 필자가 보기에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생기는 상실감과 죄책감인 것 같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등장인물인 예분과 지윤은 소중한 걸 잃어본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둘의 상처는 자신의 내면을 파괴해버리기까지 한다.
결국 후회는 돌이킬 수가 없기에 집착으로 번져나간다.
이걸 막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기에 힘이 드는 것이다.
상실감은 커다란 죄책감을 만든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영화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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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년생 마라맛 베로니카
이 글은 영화 [안테벨룸], 도서 [82년생 김지영]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크게 두 종류의 면역체계를 가진다.
하나는 선천적, 다른 하나는 이미 백신으로 몇 년간 단련된 우리가 익히 알만한 후천적 면역체계가 그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섬세하게 말하는 학자들의 경우는 피부 역시도 면역체계에 포함하기도 한다. 피부가 벗겨진 우리를 상상해 본다면. 이보다 더 간단하면서도 오묘한 물리적 장벽이 없음은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실제로 물리적인 장벽의 역할 외에도 피부에는 많은 면역 체계가 포진되어 있으며. 우리가 문신을 했을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지는 이유도 피부 안에 있는 면역세포 중 한 종류 때문이기도 하다. (참고 1)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이 피부를 한낱 멜라닌의 분포 차이로 차별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시절은 겨우 몇백 년 전에 존재했으며 지금도 그 잔재들이 남아 차별로 인한 큰 사건 사고들을 뉴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전작 [겟 아웃]과 [어스]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차별에 대한 생각은 영화 [안테벨룸]에서도 이어진다. 제작진의 특기가 십분 발휘된 기발한 트릭 아래에서 그들이 고수하고자 하는 목소리에 얼마나 더 힘을 실을 수 있을 것인지 기대해 본다.
119도 구해낼 수 없는 차별 속의 사람들.;모든 것을 압축한 장면이 아닐까 한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는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인종차별이 예나 지금이나 버젓이 존재하고 있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200년 전 노예들은 직접적인 방법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폭언을 하고. 허락하기 전까지는 말도 할 수 없었으며, 자신의 이름조차도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다.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쥐고 흔드는 백인들을 흘겨보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 삶이었다.그러나 이런 차별은 현재로 무대를 옮기면서 아주 교묘하고 간접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눈빛과 대화 속의 단어로. 그리고 이 "상태"가 결국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듯한 태도로.
그것이 어떤 형태의 차별이든. 베로니카(자넬 모네)는 피할 수 없었고 이 차별의 폭격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죽음이 약속된 탈출을 감행한다. 들켰다가는 목숨을 기꺼이 지불해야만 하는 이 절체 절명의 순간에 베로니카가 911에 연락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주제를 가장 잘 보여준다.
삶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가장 먼저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수단인 911조차. 베로니카가 처한 이 "차별"이라는 상황에서는 그녀를 구해줄 수가 없다는 것.영화에서 차별은 그런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도와줄 수 있는 방법도. 어디에 연락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지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 개인을 죽을 만큼 힘들게 하고 있는 그 상태. 그렇기에 베로니카의 살려달라는 외침이. 안절부절을 넘어 위태롭기까지 한 그녀의 몸짓들이 더욱 마음 아프고 처절하게 다가온다.
말 위에서 울부짖으며 탈출하는 베로니카의 모습을 소 닭 보듯 쳐다보는 백인들의 모습을 보며. 고개로 베로니카를 쫓으며 사진기를 척 들이미는 그 모습을 보자. 문득 책 [82년생 김지영]의 결말이 겹쳤다. 백인들의 오만방자한 그 태도처럼.
이 "상태"는 형태만 바꿔 존재할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차별에 대처하는 방법. 문제없을까.;문제밖에 없어 보이는데.
사진 출처:다음 영화
사람들은 타인을 비난할 때 항상 자신에게 없는 "흠"을 좋은 변명으로 사용한다. 어떤 사람과 다투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지만 늘 뒤돌아서면 상대방을 향해 저러니까 이혼했지.라고 말해버리는 것처럼. 이런 열등감(혹은 자괴감)은 스스로가 기꺼이 떠안을 때도 있다. 어떤 사람과 다투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지만 늘 뒤돌아서면 스스로를 향해 쟤는 내가 이혼해서 무시하는 건가.라고 말해버리는 것처럼. 분명 영화 속에서 차별을 받는 존재들을 향한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차별이 있었던 것이 변하지 않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완벽하게 무너뜨리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이 차별을 다루는 영화 후반부의 태도에 있다.
호텔 직원이 식당 예약을 하려 했을 때 협조적이지 않았던 것은 전화를 먼저 받아야 한다는 매뉴얼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또한 백인인 친구의 방만 치워져 있는 것은 그것이 반드시 백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물론 베로니카의 방에 문제가 있었던 것을 관객들은 미리 알고 있긴 했지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에 대한 뉘앙스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일어나는 불행의 원인들을 모두 자신이 "흑인이기"때문에 그렇다.로 비약하는 모습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로 인해 영화는 훌륭했던 전반부의 묘사를 조금씩 말아먹는다. 더 이상 갉아먹을 것이 없어진 영화는 결국 후반부마저 말끔히 먹어치운다.
[안테벨룸]에서는 전작에서 느꼈던 세련됨이나 우아함을 느낄 수 없다. 안타깝게도 이번에 제작진이 선택한 방법은 열등감 쪽이었고. 영화 내내 내가 흑인이니까 그러는 거지?라고 동네방네 떠들어대는 통에 없던 선입견도 생길 지경이다. 스스로가 흑인의 반대는 백인이고, 나는 그것에 열등감을 갖고 있다고 선을 그어버린 셈이다.
분노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그 어떤 것도.
사진 출처:다음 영화
우리는 감독이 영화를 만들었음을 알고 있지만. 영화 속에서 그를 찾아볼 수 없다. 영화가 감독 개인을 노출시켰을 때는 이득을 보는 부분이 있거나, 혹은 분위기 환기가 필요할 때다. 마치 류승완 감독이나 장진 감독이 그러듯이.
그게 아니라면 감독은 크리스토퍼 놀런처럼 존재해야 한다. 그래 이 영화가 바로 이 감독의 영화구나.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도록. 감탄으로 입이 쩍 벌어질 때마다 감독들의 필모가 순식간에 머리를 스쳐가서 내가 이 감독의 영화에 쏟은 노력이 아깝지 않음을 스스로가 확인할 수 있도록.
그러나 [안테벨룸]에서는 감독의 입김이 느껴진다. 그것도 노골적이고 강렬하다는 느낌조차 벗어나 사적(Private)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뿜어지는 더운 공기를 담았다.
감독은 현실 세계에선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을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를. 마치 베로니카라는 인물을 통해 마음껏 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말미에 베로니카가 번쩍 든 횃불을 타오르게 한 것은. 뿌리 깊은 차별과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기 힘든 운명의 굴레라고 하기 보다. 감독의 마음속에 숨어있던 순수한 분노 덩어리라고 보는 것이 더 알맞을 듯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타오르다 못해 마구잡이로 백인을 죽여대는 것으로 분풀이를 해댄다.
그녀가 횃불을 든 모습도. 장엄한 척하며 그곳을 벗어나는 장면도. 전혀 멋있다거나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는다. 죽어 마땅한 백인들이 죽었는데도 전혀 시원하다거나 통쾌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응원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감독이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취해 만든 장면처럼 보인다. 문제는 관객도 함께 취할 수 없다는 점에 있겠지.
마치면서;너네 좀 그래.
사진 출처: 이데일리/ 잘 봐. 언니들 싸움이다.
타이라 뱅크스는 자신의 토크쇼에 출연한 한국계 모델에게 백인처럼 보이기 위해 쌍꺼풀 수술을 받은 것을 인정하라며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자신은 백인처럼 보이기 위해 갈색 머리로 염색한 것을 숨기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에서 과연 그녀가 말하는 차별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인종 차별은 200년 전이건 지금이건 여전히 심각한 문제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감독이 취한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인종 차별에 대한 문제를 마치 커피숍 알바를 3년쯤 한 뒤 인간이라는 종자 자체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사람이 만든 것 같은 영화를 가져와 우리 앞에 툭 던졌다.
덕분에(?) 영화는 매우 직관적이며 두 번 세 번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화면에서 감독의 분노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무방비 상태로 얻어맞기만 하면 된다. 코코 샤넬이 말했다지.
항상 마지막에 걸친 액세서리를 덜어내야 완벽한 옷차림에 가깝다고.
영화를 관통하는 이 알 수 없는 증오나 분노는 마치 감독이 마지막에 추가한 요소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과해졌고. 훌륭했던 몇몇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가려버렸다.
카카오뷰도 있어요!!+_+
참고 1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몸에 있는 Physical barrier들이 immune system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임. 문신을 했을 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옅어지는 이유는 진피로 투입된 잉크를 대식세포(Macrophage)가 이 침입자들을 냅다 물어가기 때문임.
[이 글의 TMI]
1. 안경 새로 맞췄는데 진작 맞출 걸 그랬다.
2. 딸기 끝물일 때 딸기 청 만들어야지.
3. 좋은 영화 많이 개봉해서 너무 좋다ㅠ
4. 요가 덕에 드디어 붓기가 쭉쭉 없어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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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과 함께 추락하는 영화, 문폴
재난 영화 전문 감독인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신작 문폴이 공개되었습니다.
이번엔 달이 추락해 지구와 충돌하게 되는 재난을 담고 있죠.
재난 전문 감독의 영화답게 달이 지구와 가까워지면서 다양한 재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많은 재난 장면들이 이미 과거에 본 적이 있죠?
그래서 기시감이 많이 들고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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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궤도 이탈자들> 예고편
비정상 궤도를 달리는 사람들의 심리 스릴러 '궤도 이탈자들'
<눈을 감으면> :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건물 붕괴사고의 진상을 파헤치던 ‘미소’는 진실을 폭로하려다 죽임을 당한다.
몇 개월 뒤, 지상파 보도국 ‘박 기자’는 ‘미소’가 죽기 전 숨겨놓은 사건의 증거품을 찾으러 학교로 간다.
그곳엔 죽은 ‘미소’와 닮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우리가 밥을 먹을 때> : 네 명의 여대생이 저녁식사를 위해 모였다.
너무 평범해 아무 일 없을 것 같은 그 순간,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향한 말들이 쏟아진다.
밥 먹는 네 여자의 잡담. 하나의 사건, 수많은 진실. 진실에 관한 또 하나의 진실, 그리고 관계없는 이야기.
<양을 죽이다> : 여자친구 ‘소연’이 바라는 대로 여장을 하고 춤추는 ‘정수’.
아픈 엄마가 바라는 대로 아름다운 발레리나 ‘시우’가 되어 춤추는 ‘정수’.
진짜 ‘정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걸까.
: 여기 한 명의 화가가 있다.
그녀는 끝없이 그림을 그리지만, 어째선지 입술만큼은 완벽히 원하는 대로 그릴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우연히 자신이 꿈꾸던 바로 그 입술과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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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F20> 30초 예고편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아들을 둔 엄마 ‘애란’은
군 생활을 떠났던 아들 ‘도훈’에게
조현병이 발병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완벽했던 자신의 일상을 빼앗길까 두려운 ‘애란’은
아들의 병을 숨긴 채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그러나, 순조로울 것만 같았던 그녀의 삶에
유일한 비밀을 알고 있는 ‘경화’가 나타나자
‘애란’의 불안은 점점 광기로 변해가는데…
가장 날카롭고 충격적인 영화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