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yun2023-11-13 22:49:47
고독정식보단 시끌시끌 투게더지
영화 '더 마블스' 리뷰
쓸쓸한 고독정식을 먹는 것보단 시끌시끌하지만 투게더가 더 보기 좋다는 걸까. 솔로보다 팀이 낫다고 '더 마블스'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너무 재미없고 유치하게 풀어낸다는 게 아쉽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페이즈 5의 3번째 영화이자 캡틴 마블의 두 번째 실사영화인 '더 마블스'는 우주를 지키는 최강 히어로 캡틴 마블 캐럴 댄버스(브리 라슨)가 초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모니카 램보(티요나 팰리스), 미즈 마블 카말라 칸(이만 벨라니)과 위치가 바뀌게 되면서 의도치 않게 새로운 팀플레이를 펼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사실 캡틴 마블 캐릭터 설정이 다른 캐릭터들보다 압도적인 능력치를 지닌 '먼치킨'에 가깝기 때문에 재밌게 구성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크리족 리더이자 빌런인 다르-벤(자웨 애쉬튼)이 자신의 나라 할라를 구원하기 위해 사용하는 아이템 퀀텀 뱅글과 그로 파생된 점프 포인트 여파로 캡틴 마블, 모니카 램보, 그리고 미즈 마블이 서로 엮이게 되는 스토리로 밸런스를 맞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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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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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영화 문법에서 약간의 변주를 주다
전쟁영화는 잘 챙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고수, 신하균, 이제훈이 나온다기에 팬심으로 보기 시작한 영화 <고지전>. 전쟁영화인만큼 잔인한 장면이 꽤나 있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전쟁영화보다는 나름 담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고지전> 시놉시스
1951년, 우리가 알고 있던 전쟁은 끝났다 이제 모든 전선은 ‘고지전’으로 돌입한다!
1953년 2월, 휴전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는 가운데 교착전이 한창인 동부전선 최전방 애록고지에서 전사한 중대장의 시신에서 아군의 총알이 발견된다. 상부에서는 이번 사건을 적과의 내통과 관련되어 있음을 의심하고 방첩대 중위 강은표에게 동부전선으로 가 조사하라는 임무를 내린다. 애록고지로 향한 은표는 그 곳에서 죽은 줄 알았던 친구 김수혁을 만나게 된다. 유약한 학생이었던 ‘수혁’은 2년 사이에 이등병에서 중위로 특진해 악어중대의 실질적 리더가 되어 있고, 그가 함께하는 악어중대는 명성과 달리 춥다고 북한 군복을 덧입는 모습을 보이고 갓 스무살이 된 어린 청년이 대위로 부대를 이끄는 등 뭔가 미심쩍다. 살아 돌아온 친구, 의심스러운 악어중대. 이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은표는 오직 병사들의 목숨으로만 지켜낼 수 있는 최후의 격전지 애록고지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고지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지옥같은 2년을 그리다
전쟁 영화를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들이라 하면 6.25 초반 치열했던 전투를 그리는 경우가 많았었다. 하지만 6.25전쟁에게 가장 많은 피해와 소모전이 있었던 시기는 초반이 아닌 전선이 고착화되고 난 후반의 시기다. 이때의 역사를 잘 표현한 작품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고지전은 그 제목 그대로 소모전의 양상과 전선 고착 지역에서의 뺏고 뺏기는 싸움을 잘 표현해낸 것 같다.
그리고 전투 장면만 담는 것이 아니라 전투 직후, 전투가 벌어지지 않을 때의 모습도 간간이 보여서 전쟁에는 전투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보여줘서 인상적이었다.
무엇을 위해 싸웠을까?
영화 <고지전>에서 인상적인 대사를 꼽아보자면 마지막 장면의 대사다. 북한군 장교였던 류승룡이 하는 말이었다. 분명히 왜 전쟁을 시작했는지 알았는데 이제 그 이유를 모르겠다며 마지막 숨을 쉬는 장면이었다.
전쟁의 이유도 알지 못하고 국가가 전쟁을 일으켜서 끌려온 사람들이 살기 위해, 집에 돌아가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전쟁의 비윤리성을 바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 부분이 영화 <1917>과 통하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쟁을 끝낼 수도 있ㅇㅆ지만 마지막 사람이 죽을 때까지, 마지막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는 전쟁의 부조리함이 잘 느껴졌다.
그래도 편안한 장면들이 곳곳에 있어 좋았던 작품
다른 전쟁영화들보다 영화 <고지전>을 조금은 편하게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전투의 요소에 집중했다기 보다는 전쟁 속에서 북한군과 남한군의 개인적 교류에도 어느정도 할애를 했기 때문이다. 국가의 동원에 의해 전쟁에 참여하지만 그 이데올로기가 전면에 나온다기 보다는 개인적 감정에 방점을 찍으면서 그 요소를 북한군과 남한군이 애록고지에서 소통을 하는 부분으로 등장시킨다.
전쟁 영화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전쟁을 겪으며 느낀 개인적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서 그 정치색을 어느 정도 들어낸 것 같아서, 그리고 생각보다는 조금 드라이한 전쟁영화여서 개인적으로 거북하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전쟁영화 특유의 문법 때문에 전쟁영화를 보는 것에 지친 사람들에게 꽤나 만족스러운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영화 <고지전> 역시 그 특유의 문법을 따르고는 있지만 약간의 변주를 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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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배우진, 그 뒷편에는
AI가 현실에 도래한다면 어떨까. 챗지피티 같은 AI 기술이 도래한 현재를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AI 기술이 실체를 갖는다면 어떨지에 대한 이야기다. 인공지능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전 세계는 인공지능 로봇, 특히 인간과 유사한 모습을 가진 휴머노이드를 개발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상상해 보자. 과연 인간과 유사한 것을 넘어서, 인간과 ‘같은 모습'을 가진 인공지능과 우리가 공존할 수 있을까? 그런 순간이 현실화할 가능성을 점치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당도한다면 우리의 세계는 어떻게 변화할까.
독특한 관점에서 공상과학을 다루다
<귀신들>은 이러한 공상과학적 고민에서부터 출발한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곁을 떠난 가족, 사랑하는 이, 세상을 떠날 나 자신을 대체한 인공지능을 만나는 사람들을 포착한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풀어낸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에피소드마다 주인공과 등장인물, 서사가 나누어지고, 그에 맞춰 감독이 세운 가설이 여러 형태로 표현된다.
인지도 있는 배우들로 출연진을 채운 것은 분명 관객들의 선택에 영향을 준다. 다른 영화보다 보다 ‘인지도 있는' 배우들이 출연한다는 것은 관객들이 영화에 손을 내밀기 더 쉬운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배우 이요원, 강찬희, 정경호 등의 라인업 자체는 작품 자체에 이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옴니버스 세계관의 사용, 그 장단점은?
<귀신들>은 옴니버스 형태, 즉 한 작품에서 여러 주인공과 그들의 서사를 개별적으로 담아내는 방식을 채택했다. 강찬희 배우는 첫 에피소드, 이요원 배우는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별개의 서사를 다루는 옴니버스 형식은 그 방식 자체에서 장단점이 혼재한다.
장점으로는 관객의 집중력을 모으는 데 유리한 점이 있을 것으로 본다. 서사마다 그 길이가 짧게 치고 빠지기 때문에, 개별적인 완급조절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관객이 작품에서 이탈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에 꽤 이점이 있어 보인다. 긴 이야기에 적절한 환기는 필연적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특히 짧은 길이의 콘텐츠에 익숙해진 요즘 관객들에게 이러한 점은 플러스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역시 ‘어떻게 옴니버스를 사용하느냐'에 있다. 잘못된 활용에는 무수한 질문이 따르게 된다. 서사마다 다룰 수 있는 내용에 길이의 한계가 존재한다. 서사가 짧아질수록 담아내야 할 이야기는 더 간결하게, 분명하게 구성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옴니버스 화법을 택한 작품 속 설득력이 부족한 내러티브들은 더욱 신랄한 평가의 단두대에 놓인다. 자연스레 제작진, 특히 감독의 역량 문제로도 연결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서사 간의 연결성도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옴니버스 방식이라지만,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연속된다는 점은 제작에서 신경 써야 할 가치일 것이다.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은 만든 이야기를 관객에게 ‘설득'할 의무가 있다.
부족한 설득력, 서사의 아이러니
앞선 평가 점들을 토대로 바라본 <귀신들>은 어떨까. 우선 제목인 ‘귀신들'과 직접 이어지는 서사들의 연결점이 부족하다. 분명히 해보자면 첫 에피소드인 ‘보이즈피싱' 뿐일 것 같다. 이 영화는 ‘귀신'이라는 명칭에 관해 빈약한 상징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그 존재들이 설득력을 갖지 못한 채 공허하게 관객 앞에 떨어진다. 그렇게 되니 영화를 보면 볼수록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옴니버스 화법의 장점을 앞에서 기술했지만, 그 장점이 퇴색되어 버리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서사들이 가지는 힘이 부족하다. 각 에피소드가 갖는 철학적, 사회적 함의가 있음은 막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서사 속 메시지들이 갖는 힘이 약해 관객에게 분명히 전달되지 못한다. 이는 자연스레 서사 내부 요소들이 서로 매개되어 있지 않고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본다. 첫 에피소드부터 ‘아들(강찬희)’과 ‘노파(이주실' 간의 관계가 분명히 제시되지 않는다. 심지어 아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자꾸만 은폐하려 든다. 그 ‘은폐'를 통해 서스펜스를 만들어 스릴을 유발하고자 했던 것이겠지만, 그 방식이 1차원적인 것도 아니어서 이상한 모양새를 띤다. 말 그대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겠다.' 정도에서 그친다. 서사의 힘이 약하니 배우들의 열연도 우스워진다. 이야기가 설득되지 않고 구성이 약하니 관객이 연기에 집중할 틈새가 없는 것이다.
옴니버스 화법이 오히려 역풍을 가져온 것은 아닐까. 짧은 길이에 제대로 담기지 않은 이야기들은 물론이고, 단지 ‘같은 세계관의 다른 서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첫 에피소드와 그다음 에피소드 간의 연결점은 ‘같은 SF적 가상 세계'라는 것을 암시하는 몇 요소들에 불과하다. 서사가 설득력이 부족하다 보니, 에피소드들이 자칫 ‘전부 다른 서사의 파편'으로 치부되어 버린다. 분명 같은 대주제, 같은 핵심 요소들, 같은 영화의 서사라는 것을 인지해야 하는데, 다른 영화들을 죄다 모아놓은 부조화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스레 감독이 서사 전개 방식의 선정 이유에 의문이 떠오른다. 명징하게 납득이 되지 않으니 영화 자체에 질문들이 쏟아진다.
국내 영화에 한정 야박한 시선인가
인공지능을 소재로 한 SF 장르의 영화는 이제 많다. 이전에도 많았지만, 우리에게 당도한 시대상이 있으니, 앞으로도 많을 것으로 본다. <귀신들>이 그런 SF 장르 속 인공지능이라는 소재를 독특하게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한 인공지능이 도래한 세상이라니. 한 번쯤은 모두 생각해 볼 소재이긴 하나 영화적 상상으로 스크린에 담은 시도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소재를 강조한 마케팅과 홍보가 되는 것도 맞다. 그러나 너무 납작하고 개인적인 서사들이 많았다. 반복해서 서사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영상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촬영 기법 면에서나 녹음을 비롯한 음향에 관해서나 호평을 할 만한 것이 딱히 없었을 정도였다. 진부함을 떠나, 영화를 보는 듯한 감각을 거의 느끼지 못했을 정도다.
이전에 넷플릭스에서 공개했던 영화 <정이>를 보고 난 뒤에도 비슷한 감상을 한 적이 있다. 국내 영화이기에 아쉬운 점만 보이는 것인지 생각을 하게 됐다. 딱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소재가 좋다고 영화를 좋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고, 영상의 질이 좋다고 영화를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편적으로만 평가를 할 수는 없다. 영화가 신선한 소재를 다루었지만, 그 방식에 총체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지점이다. 대한민국에서 공상과학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계속해서 허점을 보인다. 이는 기술력의 문제보다 감독들의 고민이 꽤 깊지 않기에 벌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술력을 탓 하자기엔 <귀신들>은 컴퓨터그래픽이나 부차적인 기술적 요소에 힘을 주어 만든 작품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충분한 시사점과 더 정교한 스토리텔링이 있었다면 아쉬움이 지금처럼 깊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국내 영화가 여러 방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냉혹하게 말해서, 이러한 ‘B급'도 아닌 ‘C급' 그 이하의 영화들을 관객들이 치솟은 영화표 값을 지불하고 봐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영화가 관객에게 스토리를 설득하지 못하는데 소비는 설득할 수 있겠나. 출연진의 라인업은 관객을 설득할 수 있어도, 작품이 관객을 설득하지 못하는 형세다. 결국 작품이 남는 것이기 때문에 <귀신들>에 대한 아쉬움들이 더 무겁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초청된 시사회에 다녀온 뒤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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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이란 무엇인가
삶은 항상 고통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언젠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
인생이 버려지고 밟히고 피를 흘려도, 믿음을 덤덤하게 손에 쥐고 있는 사람에게 희망은 온다.
희망이 온다는 믿음, 그것이 희망이다.
<쇼생크 탈출>은 침대 맡에 걸어두고 싶은 바로 그런 영화다. 언제나 다시 봐도 질리지 않는, 보는 사람에게 희망을 건네주는 작품이니까. 담담한 무기징역 수감자 레드(모건 프리먼)의 목소리로 읽어주는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슨)은 절망이 가득한 쇼생크 감옥에 어울리지 않는 한줄기 희망이다. 그가 짙은 회색빛 감옥에 덧칠해 나가는 희망이 서린 일상들은 자신뿐 아니라 쇼생크 모두에게 작은 빛을 전해준다. 그 빛은 이 영화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비친다. 앤디가 탈옥 후에 갔다는 지와타네오가 어딘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곳을 희망한다. 그곳은 희망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절망과 희망은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빛이 난다. 하지만 때론 절망은 희망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무엇이 절망이고 무엇이 희망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이 영화는 희망의 두 얼굴을 보여주고 등장하는 숫자에 절망과 희망에 대한 상징을 담아서,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가도록 알려준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 번의 총알과 절망, 희망의 다른 얼굴
<쇼생크 탈출>에는 총알을 사용하는 세 번의 장면이 나온다. 총알은 곧 절망이다.
첫 번째는 앤디가 부인과 정남(情男)을 죽였다고 하는 총알이다. 하지만 장전하는 모습만 나올 뿐, 앤디가 그들을 죽였는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당시 앤디는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였고, 강에 버렸다고 하는 총도 나오지 않아 증거인멸로 죄가 가중되어 유죄가 된다. 앤디의 죄에 대한 이 모호한 설정은 영화 클라이맥스까지 계속된다. 앤디는 무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게 정말인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다. 사실 그에게서는 무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보단, 모든 걸 체념한 무기력한 사람만이 보인다. 쇼생크의 첫날 다른 죄수들은 억울하다며 울고 난리 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앤디는 억울해하지 않는다.
앤디는 자책을 하고 있었다. 설령 자신의 기억대로 부인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부인이 바람피우다 죽은 것은 자신이 부인에게 외로움을 느끼게 해서였다고. 앤디는 부인과 정남을 죽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왔지만, 앤디는 스스로를 죄책감의 감옥에 가둔 셈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이 생기면 사람은 스스로를 절망의 감옥에 가둔다. 마음속에 있는 절망의 감옥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은 용서다. 자신을 묶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그것을 알면, 자신을 묶었던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두 번째 총알은 앤디의 무죄를 증언할 증인을 죽인 총알이다. 모든 것이 잘 풀릴 수도 있다고 확신한 순간, 그 총알은 앤디를 가장 깊은 절망에 빠트린다. 살다 보면 '아, 이제 희망이 이루어지겠구나'와 같은 날이 온다. 그러나 희망의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한 희망의 결과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종종 희망에 차올라서 모든 것을 망가트린다. 중요한 것은 희망이 오든 절망이 오든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은 절망의 얼굴로 바뀐다.
세 번째 총알은 교도소장의 권총 자살이다. 자신의 모든 비리가 밝혀졌을 때, 그리고 자신이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교도소장은 절망의 끝에서 총알을 선택했다. 모든 죄수들에게 끝없는 절망을 주며 군림하던 그가, 사실은 자신에게 오는 절망은 감당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만들고 뿌려놓은 절망의 씨앗들이, 모두 자신에게 돌아오는 기분이었을 테니. 진짜 절망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작은 절망도 감당하지 못한다. 그리고, 남에게 준 절망은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두 개의 밧줄과 구원, 절망에 길들여진다는 것
<쇼생크 탈출>에는 두 개의 밧줄이 있다. 밧줄은 구원이다.
처음 밧줄은 쇼생크에서 가장 나이 많은 브룩스의 구원을 도와주는 밧줄이다. 브룩스는 쇼생크에서 꼬부랑 노인이 될 때까지 갇혀있어서, 쇼생크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감옥에 길들여진' 죄수였다. 영화에 나오는 쇼생크의 가장 무서운 점은 폭력적인 간수도 비리투성이의 교도소장도 아닌, 그 절망에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절망 안에 오래 있다 보면 원래의 자신이 어떤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었는지 잊어버린 채 명령에 따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기르는 개에게 목줄을 채워 그 1미터의 절망으로 '길들이는'것처럼.
브룩스는 가석방을 받았지만 쇼생크에서 나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 지 알고 있었다. 동료에게 칼부림을 해서라도 절망 속에서 살고 싶어 했다. 절망에 길들여진 사람은 절망이 곧 희망이다. 세상으로 내던져진 브룩스는 희망과 자유라는 절망에 빠지고, 그 구원의 길로 밧줄로 목을 매는 것을 선택한다. 그는 자살함으로써 희망이라는 이름의 절망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한다.
두 번째 밧줄은 앤디의 밧줄이다. 앤디 역시 그 절망에서 구원해 줄 도구로 밧줄을 손에 든다. 그러나 앤디는 영화에서 내내 나오듯 쉽게 절망에 길들여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강한 사람이었고, 결국 절망에서 구원하는 길은 탈옥이라 마음먹는다. 밧줄은 탈옥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였다. 사실 구멍을 파놓은 지는 오래되었고, 단지 탈옥을 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스스로를 절망에서 구원하는 길은 마음먹기가 가장 힘든 법이다.
하지만 절망에 있을 때 언제 올지 모르는 희망을 꿈꾸며 절망에 저항하기보다는, 절망에 순응하고 길들여지는 게 심리적으로 안정이 된다. 현실에 대한 부정과 저항은 고통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지옥에 있으면 천국을 꿈꾸기보단 지옥에 적응하는 게 낫다고 여길수 있다. 그러나 절망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는 결과를 가져온다. 길들여지느냐, 길들여지지 않느냐. 그 마음가짐이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기도 하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도 한다. 영화에서 나오는 밧줄이 '절망'으로 구원하느냐 '희망'으로 구원하느냐의 두 얼굴을 가진 것처럼.
하나의 도구와 증거, 희망을 대하는 태도
<쇼생크 탈출>에는 단 하나의 탈옥도구와 증거가 나온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탈출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절망과 희망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앤디가 유죄를 선고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증거인멸이었다. 앤디가 강에 버렸다는 총이 발견되지 않아서. 총알을 발사하면 총알에 고유의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으로 사용된 총알과 비교할 수 있어 정말 앤디가 쏜 것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앤디는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총을 버리는 바람에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 줄 증거를 없애버린 셈이었고, 총이 발견되지 않자 증거인멸로 더 형을 무겁게 받는 원인이 되었다.
사람이 절망에 빠졌을 때, 그 절망에 취해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을 한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자신을 구원해주러 오는 손길을 스스로 내치고 더욱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작은 실수나 작은 잘못으로 끝날 수 있던 것을 스스로가 더 키워간다. 그래서 절망에 빠졌을 때는 자포자기의 행동을 하기보단, 희망을 알아볼 수 있도록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게 중요하다. 절망에 빠졌다고 느낀 그 순간이 진짜 절망이 아니다. 절망이라고 여기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이 진짜 절망이다. 희망도 마찬가지다. 희망이 보인다고 섣부르게 판단하고 기쁨에 겨워하는 순간 희망은 오기도 전에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 순간적인 감정의 흔들림으로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아야 한다.
앤디는 쇼생크에서 사는 동안 찾아온 수많은 절망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한번, 무죄를 입증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손에 잡혔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실수를 저질렀다. 교도소장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그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되어, 희망을 더한 절망으로 빠트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군다나 그 행동으로 탈옥용 굴을 판 것을 들킬 뻔했다.
앤디는 희망으로 가는 길에서 다시는 실수하지 않았다. 철저한 계획을 세워서 흔들리지 않고 나아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이 탈옥했다는 증거를 경찰들이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래야 자신이 투고한 '쇼생크의 비리'에 진실함이 더해질 테니까. 희망이 완벽한 현실이 될 때까지 묵묵히 계획을 실행했다. 우리도 삶에서 그러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희망이 완벽한 현실이 될 때까지 섣불리 샴페인을 터트리지 않는 것 말이다.
실재하지 않는 여성, 희망의 모습
<쇼생크 탈출> 에는 여성이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곧 희망의 모습이다.
앤디의 부인은 사진조차 나오지 않는다. 또 가석방 심사원이나 숙소 관리인으로 여성이 나오지만 존재감이 없다. 하지만 '리타 헤이워드'는 다르다. 리타 헤이워드는 쇼생크 감옥 안 극장에서 매번 틀어주는 영화 <길다>의 히로인이다. 레드를 비롯한 수감자들은 리타 헤이워드가 머리를 휘날리며 등장하는 컷에 엄청난 환호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죄수들에겐 실제가 아닌 허상이다. 그러기에 쇼생크 수감자들에게 리타는 희망이다. 이 영화의 원작인 스티븐 킹의 소설 제목도 원래는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에서의 구원(Rita Hayworth and Shawshank Redemption)>이다.
물론 겉으로 보면 리타 헤이워드라는 허상은 감옥에서 외롭게 지내는 수감자들에게 조금이나마 허락되는 여흥에 불과하다. 그 작고 하찮은 여흥이 그나마 수감자들을 웃게 만든다. 하지만 그녀의 '포스터에 숨겨진 구멍'은 구원을 주는 희망의 길이었다. 교도소장이 포스터를 손가락으로 찌르자, 있을 리가 없는 포스터 속으로 팔이 빨려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교도소장에게 자신의 비밀을 훤히 드러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한 성적 비유로의 여성이 아니라, 앤디를 지켜주고 구원한 여신인 셈이다. 물론 포스터가 계속 바뀌어 나중에는 리타 헤이워드가 아니라 라켈 웰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비현실적인 구멍, 구원, 그리고 희망과 카타르시스는 모두 그 안에 있다.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단지 믿음으로써만 존재한다. 어쩌면 실제로 없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리타 헤이워드는 희망이 있다고 믿는 믿음에서 희망이 시작한다고 말해준다.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을 믿지 않는 자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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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옥에 성공한 앤디는, 친구 레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다.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쇼생크 수감자들은 '희망은 위험한 것'이라며 경계한다. 그런 희망이 더 절망에 빠지게 하고 괴롭게 만들다가 죽어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레드에게, 앤디는 희망을 말한다. 레드도 절망에 길들여져 절망이 희망이 되었기에, 자살이라는 절망의 여행을 희망처럼 꿈꿀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앤디가 희망에 대한 믿음을 레드에게 물들였기 때문이다. 앤디는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가슴속에 간직한 희망은 누구도 뺏어갈 수 없다.
삶에서 절망을 선택할 것인가, 희망을 선택할 것인가는 나에게 달렸다. 둘은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없이 절망과 마주하지만 희망을 가슴에 품고 있다면 앤디처럼, 레드처럼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다.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으니까. 레드가 국경을 넘으며, 간직했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는 문득 내가 아이처럼 흥분해 가만히 앉아있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끝을 알 수 없는 긴 여행을 시작하는 자유인만이 느낄 수 있는 흥분이리라.
나는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길 희망한다.
나는 내 친구를 만나 악수하기를 희망한다.
나는 태평양이 꿈에서 본 것처럼 푸르기를 희망한다.
나는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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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와 마블의 결합, 그 결과는?
꽤나 진입장벽이 높은 영화로 개봉 전부터 소개되었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 아주 다행이게도 유튜버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약 30분 전 완다 비전에 대한 압축 설명을 듣고 영화를 봐서 그런지 영화를 따라가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지만 만약 어떠한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이해하기 힘들었을 작품이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 시놉시스
지금껏 본 적 없는 마블의 극한 상상력! 광기의 멀티버스가 깨어난다. 끝없이 균열되는 차원과 뒤엉킨 시공간의 멀티버스가 열리며 오랜 동료들, 그리고 차원을 넘어 들어온 새로운 존재들을 맞닥뜨리게 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 속, 그는 예상치 못한 극한의 적과 맞서 싸워야만 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
멀티버스,, 그렇구나!
사람이 여럿 죽어나간다.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들이 아주 무참히 죽어나간다. 뭔가 실세계였다면 그 영웅들이 죽어나가는 데 있어서 그 서사가 필요했겠지만 멀티버스라는 세계관에서는 필요가 없었다. 강력한 완다에 의해서 휘리릭 날아가고 몸이 잘리고,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가 없다. 아마 본세계에서느 그대로 존재하는 캐릭터이기에 혹은 이미 죽은 캐릭터기에 쉽게 캐릭터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간의 마블 연대기를 따라와던 관객이라면 아마 죽었던 자비에 교수의 등장에 엄청난 반가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마블의 전체 흐름을 파악하지 않고 있었던 나로써는 그저 캐릭터를 소비하는 느낌으로밖에 다가오지 않아서 이 부분은 조금 아쉬웠다.
이 작품은 공포영화다
사실 마블과 호러가 결합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영웅 서사를 취하는 마블과 그로테스크한 공포라니.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꽤나 성공적인 조합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공포의 소재를 활용하기 위해서 아마 그토록 많은 캐릭터들을 출연시키고, 소비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닥터 스트레인지2에서는 완다가 최강의 빌런으로 등장하면서 완다를 막기 위한 비샨티의 책을 찾으러 가기 위해 멀티버스를 이동하며 가까스로 그 책의 행방을 알아낸다. 그런데 완다는 자신을 막으려는 닥터 스트레인지를 다크 홀드를 통해 집요하게 쫓아가 방해한다. 이렇게 집요하게 쫓아오는데 거의 무슨 살인마가 쫓아오는 줄 알았다. 마버사다 보니 여기저기서 막 등장하고, 다크홀드를 쓰다보니 종잡을 수 없는 등장 시점 덕분에 심장이 아주 고생을 했다. 아마 이것은 샘 레이미 감독의 고어한 성향이 잘 반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 <이블데드>를 셀프 오마주한 장면들도 많이 보이고, 좀비 스트레인지도 등장을 하질 않나 그와중에 B급 코미디도 군데군데 흩뿌려 놓아져 있어서 나름 재밌게 보았던 작품이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과하다기 보다는 마블도 이렇게 공포라는 장르와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증명해낸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이 공포라는 소재 때문에 위에서 언급했던 캐릭터의 소비문제도 이해가 갔으니 말이다.
앞으로의 마블은 어떨까?
영화 <블랙위도우> 이후부터 개봉한 마블들을 순차적으로 봤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 전 작품들은 아직 따라잡지 못한 사람으로서 작년까지만 해도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 시간을 들여 공부를 할 필요성이 없어서 좋았었다. 하지만 이번 닥스2가 나오면서 여실히 느낀 것은 이제 마블은 새로운 관객층을 유입한다기 보다는 이미 마블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확장된 세계관을 선보인다는 느낌이 강했다. 전작에 비해 너무나도 진입장벽이 높아졌다. 이번 작품을 위해 최소한 닥스1과 완디비전 9부작을 알고 있어야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친절한 유튜버 선생님들이 지속적으로 요약을 해주시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번 작품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달라진 마블의 모습을 잘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영화를 위한 사전지식이 필요함을 알려줌과 동시에 마블페이즈4를 이끌 닥터 스트레인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서 앞으로의 마블이 기대되긴 했던 것 같다. 그전에 일단 그간의 이야기를 빨리 따라잡아야 한다는 숙제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영화를 공부하면서 봐야한다는 것이 참으로 새롭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새로웠던 공포 장르와의 결합과 앞으로의 마블에 대한 기대감을 잘 풀어낸 나름 괜찮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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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대를 향유한다는 것은
※ 본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제작사 더액티비스트
배급사 (주)시네마달
감독 유수연
출연 조영숙, 박수빈, 황지영
개봉 2025년 03월 19일
"낯설고도 새로운 역사를 만나다"
산마이, 니마이, 가다끼… 한국의 역사 속에 존재했지만 어쩐지 낯설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처음 듣는 단어들. <여성국극: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사라질 듯 영원하다>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생각이다. 사실 필자는 공연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다. 1년에 한두 번쯤 좋아하는 밴드의 콘서트를 보러 가는 정도랄까.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공연 예술을 꾸준히 찾아다니는 마니아들도 있다. 특히 K-POP 산업이 성장하면서 아이돌 콘서트는 대중문화의 중심축이 되었다. 무대 위 반짝이는 스타, 객석을 가득 채운 함성. 서로가 주고받는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그 생생한 현장감은 사람들을 다시 공연장으로 이끈다. 그리고 과거에도 마찬가지로 지금의 아이돌처럼 강렬한 팬덤과 무대 위 마력으로 공연 예술계를 호령했던 이들이 있었다.
<왕자가 된 소녀들> 자료화면, <별하나>(1958) 김경수와 김진진, 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m/page/view.php?no=54326, 2025-03-20.
“1948년, 국악원에서 여성들만이 떨어져 나와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해방 이후 전통적 규범에서 벗어난 새로운 공연 예술이 탄생했으니, 그것이 바로 여성국극이다. 여성국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남녀 모든 배역을 여성 배우들이 도맡았으며, 남자 주인공을 니마이(二枚), 희극적인 감초 조연을 산마이(三枚, さんまい), 악역을 가다끼(敵, がたき)라 불렀다고 한다. 해방 직후에도 국극 용어는 한글로 정제되지 못한 채 일본어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겼다.
준수한 외모에 노래와 춤은 물론이요 뛰어난 연기력까지. 여성국극단은 당대 최고의 올라운더들이 모인 집합소였다. 그중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은 단연 니마이(二枚)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연 예술이 대중성을 확보하려면 여성 팬층의 지지가 필수적인데, 여성국극은 니마이(二枚) 배우들의 인기를 기반으로 당대 공연 예술로서의 대중성과 입지를 굳혀 나갔다.
그러나 니마이 배우들의 인기는 단순한 외적 매력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당시 가부장적 남성상과는 결이 다른, 다정하면서도 책임감 있는 새로운 남성상을 제시하며 여성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성인 남성의 강직하고 무거운 이미지 대신, 섬세하면서도 강한 카리스마를 갖춘 인물로 무대 위에 존재했다. 특히, 검무와 격투 장면에서 보여 주는 신체적 퍼포먼스는 강인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부각하며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요소가 결합되면서 니마이 배우들은 단순한 스타를 넘어, 여성국극이 만들어 낸 독자적인 젠더적 판타지와 서사의 중심이 되었다.
여성국극과 티켓 파워: 과거와 현재
여성국극의 1세대 레전드로 불리는 조영숙 배우는 한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빠지면 공연장 바닥에는 팬들이 두고 간 선물들로 가득했다. 특히 스타킹 같은 생필품을 돈 주고 사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는 오늘날의 조공 문화와 유사하다. 무대 위 빛나는 스타를 위해 아낌없이 마음을 표현하는 팬들, 그리고 공연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 여성국극이 한때 현재의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문화 예술계에서 여성 관객의 강력한 티켓 파워가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지난 2021년 인터파크 데이터에 따르면, 공연 예매자의 75%가 여성이었으며, 20~30대 여성층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무대가 바뀌고 시간이 흘러도, 여성 관객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공연 예술을 지탱하고 있었다.
여성 관객들이 공연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은 단순히 볼거리를 넘어서, 작품과 정서적으로 교감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들은 감동적인 서사와 캐릭터에 몰입하며, 예술을 통해 감정을 확장하는 경험을 중시한다. 또한 작품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 단순한 오락보다는 의미 있는 작품에 강한 지지를 보낸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더 폴(The Fall): 디렉터스컷>의 흥행과도 맞닿아 있다. 여성 관객의 감수성은 문화적 유산처럼 계승된다고 볼 수도 있다. 여성국극이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전통과 예술을 지키는 사람들
여성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먹고 자란 여성국극의 전성기는 불꽃같았다. 1~2세대를 거치며 배우들의 헌신으로 찬란하게 타올랐지만, 그 불길은 너무나도 빠르게 꺼져버렸다. 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여성국극이 급격히 쇠락한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지만, 급변하는 사회 풍속과 보수적인 정책 기조 속에서 국가 지원에서 배제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로 인해 명맥은 단절의 위기를 맞았고, 한때 문전성시를 이뤘던 여성국극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국극을 되살리기 위해 사활을 걸고 계보를 잇는 이들이 있다. 꺼져가는 불씨를 다시 살리려는 그들의 노력 속에서, 여성국극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아 있다.
"누군가는 여성국극을 해야 하지 않겠어?"
여성국극의 찬란했던 전성기를 회고하는 것만큼, 그 현재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일도 필요하다. 다큐는 과거와 대조되는 여성국극이 직면한 현실을 조명한다. 소규모 지역 축제에서 공연을 올리는 배우들. 그러나 관객들은 흥미를 보이다가도 금세 등을 돌린다. 한때 여심을 뒤흔들었던 1~2세대 여성국극의 전성기를 떠올리면 격세지감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여성국극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누군가는 여성국극을 해야 하지 않겠어. 3년만 해보자.”
끊임없이 되묻는 질문들. 예인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라서, 작금의 배우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담보하여 고군분투한다. 생계와 예술 사이의 고민, 변하는 시대 속에서 여성국극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 그러나 이들이 그 시련을 견뎌내는 원동력 역시 ‘여성국극을 해야 한다’는 절박한 신념과 사랑이다. 그 절박함은 1세대, 2세대, 그리고 3세대를 잇는 ‘레전드 춘향전’을 탄생시켰고, “현재 여성국극제작소가 안산에 뿌리를 내리며 제도권 안에서 보호받을 기반을 마련했다.” 다큐 제작 기간 동안 3세대 배우 박수빈과 황지영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낸 성과이기도 하다. 여성국극은 더 이상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새로운 2막을 위한 그 시작점에 다시 섰다.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단처럼, 한국의 여성국극도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아 새로운 전성기를 써 나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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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We will find away. We always have)"
영화 '인터스텔라'의 명대사가 떠오르는 한 편이었다. 1편에 이어 이번 편에서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아 나선다. 8년 만에 후속편으로 돌아온 '모아나 2' 또한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내 무쇠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모아나 2'는 선조들로부터 예기치 못한 부름을 받은 모아나(아우이 크라발호)가 부족의 파괴를 막기 위해 반인반신 영웅 마우이(드웨인 존슨)와 새로운 선원들과 함께 숨겨진 고대 섬의 저주를 깨러 떠나는 위험천만한 모험을 그린다.
이번 편 또한 메인 키워드가 '길'이다. 1편이 주인공 모아나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렸다면, 이번 편에선 부족의 미래를 짊어진 그녀가 아무도 모르는 모투페투로 향하는 길을 찾아 나서는 내용이 주된 스토리다.
속편으로 컴백한 만큼, 세계관을 확장시키면서 공동체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담아낸다. 스케일이 커지면서 인물이 많아졌다. 모아나는 고전 영웅 설화에서 접할 법한 여성 영웅으로서 남다른 사명감을 지닌 채 수많은 역경을 헤쳐 나가고, 특유의 모아나적 사고를 바탕으로 자신의 과업을 성취한다. 다만, 전작을 답습하는 듯 이야기 전개 구조가 유사하다. 2편 만의 새로움을 기대했다면 아쉬운 지점이다.
스토리 전개의 아쉬움을 시각적인 부분이 채워준다. '모아나' 시리즈가 바다와의 공존이 곧 삶인 폴리네시아 지역의 역사와 전설 등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기에 영화 속 주요 무대인 '바다'가 인상적이다. 투명하고 청량감 넘치는 태평양 바다를 표현하기 위해 색채설계와 시각효과는 1편보다 진화했고,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시각적 감성을 전달한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 물의 길'에서 느꼈던 황홀함과 비슷하다.
디즈니 애니메이션답게 '모아나 2'도 'Get Lost', 'Finding The Way', 'We Know The Way' 등의 곡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뮤지컬 형식을 갖췄다. 이번 편에선 'Beyond'가 1편의 주제곡 'How Far I'll Go'의 뒤를 잇는다. 가슴에 와닿는 꾸밈없는 가사와 원초적이고 웅장한 폴리네시아풍 사운드로 감동을 전한다.
'모아나' 1편에서 목소리로 호흡 맞췄던 아우이 크라발호, 드웨인 존슨의 합은 한층 더 끈끈하다. 때로는 웃음을 유발하는 티키타카 토킹을 하다가도, 때로는 더욱 애특한 동료애를 선보이며 극의 완성도를 높인다. 이들의 케미를 보고 있자니, 이후 총괄 프로듀서-배우로 참여할 동명 실사영화까지 기대하게 만든다.
한편, '모아나 2'는 3편으로 이어질 이야기의 확장을 염두에 두고 제작됐다. 그렇기에 3편을 예고하는 쿠키 영상을 보고 나면, 어떻게 마무리하게 될지 궁금증을 자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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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매리 연쇄살인사건 범인은?! - 라떼극장 EP.14
영화 흥신소 - 라떼극장 EP.14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영화 "차우"를 보며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려보자
범죄없는 마을로 공인(?)받은 곳 삼매리에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을 풀기위해 형사 경찰 포수 생태연구가 등 각계 전문가(?)들이 모이지만
문제 해결은 커녕 피해만 늘어난다.
삼매리는 다시 범죄없는 마을로 거듭날수 있을까?
괴수와의 사투를 벌이는 괴작 '차우(2009)'
신형사가 건강 챙긴다면 몰래챙긴 음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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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드풀, 원더우먼, 홉스 너네 모여서 뭐하니?
넷플릭스에 레드 노티스가 공개 되었어요!
라이언 레이놀즈, 갤 가돗과 드웨인 존슨이 주연을 맡아서 꽤 기대를 받았던 영화였는데요.
뚜껑을 열어보니 너무나 평범하고 예측가능한 액션 영화였습니다.
특히나 세 캐릭터 모두 그걸 맡은 배우들의 다른 캐릭터들을 떠올리게 하는 캐스팅이어서,
영화를 보다 보면 무슨 영화를 보고 있는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운 영화 레드 노티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제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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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레치드: 악령의 저주> 메인 예고편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살고 있는 소년 ‘벤’.
방학을 맞아 아버지 ‘리암’이 있는 한적한 바닷마을에 찾아간 그는
매일 밤 기이한 소리가 들리는 옆집을 주시한다.
어느 날 옆집 꼬마 ‘딜런’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게 되고
주변 사람들이 홀린 듯 기억을 잃은 사이, 아이들은 하나 둘씩 실종된다.
끊임없이 기이한 일이 발생하는 마을.
그리고 사건의 행방을 쫓는 ‘벤’의 눈 앞에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끔찍한 존재.
정체 모를 존재의 죽음의 손길을 느낀 ‘벤’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위협당하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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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모교> 메인 예고편
고교시절의 기억을 잃은 ‘은희(김서형)’는
모교에 교감으로 부임한 후부터
알 수 없는 환영과 환청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문제아로 내몰린 ‘하영(김현수)’은
홀리듯 들어간 학교의 폐쇄된 화장실에서 귀신 소리를 듣게 되고
그 곳에서 같은 아픔을 가진 ‘은희(김서형)’와 마주친다.
두 사람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이
화장실에 있는 존재와 연관됐음을 알게 되고,
곧 죽음의 공포와 마주하게 된다.
기억 속에 감춰진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