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산2024-08-03 09:10:32
천재감독의 고민을 엿보는 영화 <공드리의 솔루션북>
<공드리의 솔루션북>
씨네랩의 영화크리에이터로 <공드리의 솔루션북(The Book of Solutions)>의 시사회에 초대받았다. 영화는 프랑스 영화감독 미셀 공드리가 실제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아카데미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터널 선샤인: 짐 캐리, 케이트 윈슬렛 출연>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 공드리 감독의 영화답게 창의성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의 전개는 감독과 제작자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으로 시작한다. 마크는 제작자가 스토리가 없다고 비난하는 말에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를 찍으면 나온다고 응수한다. 비용을 중시하며 시간을 돈으로 여기고 일정기간 내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제작자들은 감독의 말에 좌절한다. 제작자가 내놓은 솔루션은 감독을 영화에서 아예 배제시키고 찍어놓은 영화를 적당히 편집하여 빠른 시간 내에 극장에 올리는 거다.
마크의 솔루션인 플랜 B도 극단적이다. 제작자들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자신의 아이디어와 예술적 터치가 담긴 영화를 고수하기 위해 자료를 통째로 들고 탈출한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는 ‘솔루션북’을 찾아 자신의 아이디어를 적어가며 하나씩 실행한다.
마크의 좌충우돌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유머코드. 세상이 인정하는 천재 감독도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가까운 사람이 보기에도 무슨 일을 벌일지 종잡을 수 없고 못 말리는 감독의 기행. 마크가 영화 제작 과정에서 겪는 제작자와의 갈등, 창작의 어려움, 관객의 평가 등을 어떻게 마주하고 해결하는지 보여주는 드라마 요소. 유머와 드라마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선사한다. 함께 영화를 본 아내는 스필버그의 영화 <파벨만스>의 프랑스판 느낌이라고 했다.
작품을 공개하여 관객들에게 환영받지 못할까 극도로 두려워하는 마크의 마음에서 공드리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감독이 겪는 불안을 엿볼 수 있다. 영화와 감독을 사랑하는 팬이라면 놓쳐서는 안 되는 작품인 이유다. 한 편의 영화가 나오기까지 감독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면 그들의 창작물을 더 따뜻한 시선으로 보게 될 터이다.
시원한 극장이 그리운 무더운 날씨. 파리 올림픽 시즌에 맞추어 프랑스에서 만든 영화를 보며 즐기는 일도 꽤 괜찮게 여름을 보내는 방법이리라.
Relative contents
-
- 집착병에 걸린 인물들의 허무한 결말
누군가를 무척 좋아하고 의지할 때가 있다. 나를 도와준 사람이거나 나에게 도움이 될 사람일 수도 있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좋아하는 마음은 그 마음의 크기만큼 진심을 다해 상대방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사람에게 긍정적인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의 반응을 살핀다. 이런 구도는 사랑을 하는 연인, 직장 생활의 인간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서로에게 감정적인 접점이 있다면 서로 기대하고 의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적정한 선을 넘어가면 그것은 집착이 된다. 상대방의 대단한 점을 보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 정도라면 괜찮지만, 그를 대단한 사람으로 보고 오로지 자신만의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그것은 그 상대방에게 만으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오로지 한 사람만 보고 가는 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을 줄인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그런 위험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좁아진 시야는 자신에게 불행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광적인 집착을 보여주는 영화
영화 <독전 2>는 많은 인물들이 한 인물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이야기다. 사실 몇 년 전 개봉한 <독전> 1편 속의 인물들도 이선생이라는 미스터리 한 인물에 집착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선생이 누구인지라는 미스터리를 관객에게 던지면서 등장하는 어떤 인물도 이선생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게 구성했었다. 마약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선생은 경찰에게는 소탕하고 싶은 갱단의 두목이고, 다른 범죄자들에게는 한 몫챙길 수 있는 기회를 줄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다. 이번 2편에서는 전편의 인물들이 대부분 재등장하면서 이선생을 향한 집착이 엄청난 광기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건 1편과 마찬가지로 형사 원호(조진웅)와 락(오승훈)이다. 여기에 브라이언(차승원)이 다시 등장하고, 큰 칼(한효주)이 새롭게 소개되면서 영화에 긴장을 불어넣으려 애쓴다. 이 중심인물 네 명의 공통점은 모두 이선생을 찾는다는 것이다. 사실 1편은 형사 원호의 수사로 시작되어 이선생은 누군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가는 이야기다. 다양한 인물들이 하나둘 등장하고 섞이면서 벌어지는 난장 같은 상황들이 영화 끝까지 시선을 끌었고, 약간 모호하게 끝나는 결말부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의미에서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번 속편은 1편의 클라이맥스가 정리되고 꽤 시간이 흘러 보이는 마지막 결말 장면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원호는 여전히 진짜 이선생을 찾고, 락과 브라이언 그리고 큰 칼까지 합류하면서 이선생을 찾는 모든 인물이 서로 속고 속이는 대결을 벌인다. 이 정도면 도대체 이선생이 뭐길래 그렇게 모든 인물들이 매달리는지 질문을 하게 된다. 전편에서는 집착이라는 느낌보다는 집요한 추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속편으로 이어지면서 각 인물들이 모두 이선생에 너무 집착한다는 인상을 준다.
이선생이 그렇게 전지전능한 인물일까. 원호가 이선생을 잡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또 다른 인물 락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이선생을 찾는다. 반면에 이 영화의 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브라이언과 큰 칼은 이선생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마약에 대한 사업권이나 부의 축적이라고 하기엔 그 동기가 너무 약하다. 게다가 여러 가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선생을 찾으려 애를 쓰는 인물들은 마치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썬생은 누구인가
영화는 진짜 이선생을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시킨다. 하지만 그에겐 특별한 무언가가 없었다. 영화는 그를 마치 특별한 인물인 것처럼 보여주려 하지만 그에겐 어떤 카리스마나 능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야기의 긴장이 가장 고조되어야 하는 부분에서 가장 긴장감이 떨어진다. 주요 인물인 락과 이선생의 대면은 분명 특별한 장면이겠지만 복수의 통쾌함이나 시원함을 느낄 수 없다. 이건 이선생을 추적하는 각 인물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각 인물들은 적당히 무능하고 과하게 집착한다.
<독전 2>가 가장 실패한 부분은 새로운 악당인 큰 칼의 이미지다. 1편의 진하림(김주혁)이나 보령(진서연) 같은 강렬한 캐릭터를 추가하려 투입했지만, 큰 칼을 연기한 한효주의 이미지와 잘 맞지 않고 그저 이선생에 집착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캐릭터로 소비되고 만다. 그는 브라이언이나 락, 원호를 위협하긴 하지만 크게 능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허무하게 퇴장하고 만다. 이선생과 직접적인 연결점을 가지고 있는 빌런치고는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이썬생은 실제로 많은 사람을 돕는다. 새로운 마약을 만드는데 돈과 사람을 지원하면서 자신의 사업을 유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자신의 실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는 이선생은 그를 궁금하고 추종하는 수많은 범죄자들을 양산했다. 그들은 이선생을 사랑했고 존경했다. 그 마음은 손에 잡히지 않는 이선생의 뒤를 따라가 집착의 모습으로 변했다. <독전 2>는 그렇게 집착하다 망가져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는 영화다.
영화는 1편에서 어느 정도 열어두었던 결말을 완전히 닫는다.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이선생에 집착하던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그 수많은 희생을 했을까. 그들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말은 이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아무도 승리자가 되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러다 보니 뒷맛도 그렇게 좋지 않게 되어버렸다. 1편이 끝나고 나서 많은 살람들이 영화의 이야기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만들었고 여러 번 관람하면서 추가적인 흥행을 할 수 있었지만 이번 속편은 그렇지 못했다.
영화 <독전 2>는 1편의 박해영 감독 대신, 백종열 감독이 연출했다. 그는 1편을 보고 나서 채워지지 않은 이야기를 새롭게 채워 넣었지만 오히려 각 인물들을 모두 집착병에 걸린 사람들로 만들었다. 또한 실제 이선생을 공개하는 강수를 뒀지만 그마저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극적인 긴장감도 전편에 비해 많이 떨어지면서 스타일리시한 영상만이 유일한 장점이 되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적정한 선을 넘는다. 이선생을 애타게 찾던 인물들은 광적인 집착을 보여주면서 전편에서 보여줬던 매력을 대부분 잃는다. 무엇보다 1편의 락 역을 맡은 류준열이 오승훈으로 교체되면서 배우가 만들어냈던 특유의 아우라가 많이 사라져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보이는 점도 영화의 몰입을 방해한다. 유일하게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점은 이 영화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관객들의 반응이 좋지 않은 영화지만, 넷플릭스에 공개되어 큰 손실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1편의 성공을 생각하면 무척 아쉬운 결과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주간 영화이야기 뉴스레터!
구독하여 읽어보세요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제 뉴스레터를 구독하실 수 있어요.
https://contents.premium.naver.com/rabbitgumi/rabbitgumi2
https://taling.me/vod/view/53700
https://www.notion.so/a9ada82f547a4c6f84e664ba59eb5377?pvs=4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
- [SIWFF 데일리] 잡초처럼 뻗어나간 뿌리들
영화제에서는 미개봉할 것 같은 영화, 혹은 찾아보기 어려울 영화를 골라 보는 재미가 전부라 생각했다. 그런데 '언젠가 봐야지'하고 끝없이 미루기만 했던 영화를 보는 즐거움도 있음을 <미나리>를 통해 알았다. 주목받는 인물들 속 가려진 이야기를 찾는 재미도.
미나리
Minari
SYNOPSIS
낯선 미국, 아칸소로 떠나온 한국 가족. 가족에게 뭔가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아빠 제이콥은 자신만의 농장을 가꾸기 시작하고 엄마 모니카도 일자리를 찾는다. 아직 어린아이들을 위해 모니카의 엄마 순자가 함께 살기로 하고, 순자는 가방 가득 고춧가루, 한약, 미나리씨를 담아 찾아온다. 앤과 데이빗은 여느 '그랜마' 같지 않은 할머니가 영 못마땅하다.
감독
Lee Isaac CHUNG (정이삭)
출연
한예리, 스티븐 연, 윤여정, 앨런 김, 노엘 케이트 조
198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두고 있는 영화는 지극히 한국적이었다. 한국인과 동양계 미국인이 나와서, 혹은 한국어가 대사 대부분을 차지해서 등의 이유는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구조가 느껴졌다. 아빠 제이콥은 '가장'으로서의 자신의 명분과 위세를 분명히 하고자 사업을 벌였다. 캘리포니아에서의 삶을 모두 청산하고 시골 한구석에 들어와 한국 채소를 가꾸는 농장을 만들겠노라고.
어린아이가 둘이나 있는 집에서 한 사람이 일에만 집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없으니. 식사는, 땀에 절은 옷가지들은, 누가 처리해준단 말인가. 결국 이 모든 것을 받칠 사람이 있어야만 한다. 역할을 도맡은 건 엄마 모니카.
모니카는 남편의 꿈이 불안해 보이기만 한다. 아들 데이빗은 심장이 좋지 않아 병원 가까이 있어야 하는데, 학교는 커녕 아이들과 어울릴 다른 아이들도 거의 보이질 않고, 자신 또한 컨테이너의 네모난 공간 외엔 아무것도 없는 기분이 든다. 실은 그보다 더 작은지도 모르겠다. 병아리의 성별을 구분하여 살릴 것과 폐기할 것을 가르는, 그 작고 조악한 바구니가 하루의 전부인 것 같으니.
모니카와 제이콥은 자꾸 다툼만 늘어간다. 언성을 높이고, 아이들은 방에 들어가 둘의 싸움을 중재할 방법을 고안하고. 싸우지 말라는 바람은 종이비행기를 타고 날아갔지만 엄마 아빠 둘 중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다. 아이들은 할 수 있는 게 없는 셈이다.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싸움이 눈앞에서 들리는데 어떤 발언권도 없이 그저 관망하거나 외면하는 수밖에는.
불안정한 균열의 틈 사이로 또 다른 엄마, 그러니까 모니카의 엄마인 순자가 들어선다. 이토록 밝은 얼굴의 모니카는 관객에게도 가족에게도 낯설기만 하다. 독특한 유머감각을 지닌 순자는 데이빗의 눈에도, 앤의 눈에도 이상했다. 할머니인데 할머니 같지 않은 어떤 노인. 데이빗은 경계하는 마음으로 모니카의 뒤에 숨기만 한다.
데이빗의 반응이 어떻든 모니카와 순자는 서로를 살뜰히 살핀다. 순자는 매콤한 고춧가루처럼 모니카에게 위로가 될 식재료, 그리고 약간 묵직한 돈 봉투를 내밀어 실질적으로 보탬이 될 만한 손길까지 내민다. 맞벌이하는 두 사람이 집을 비울 때 아이들과 함께해 줄 어른이 있다는 것 또한 모니카에겐 큰 힘이 된다. 완전히 농장 일에 빠진 제이콥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전보다는 모니카가 일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모니카는 순자가 데이빗을 위해 가져온 약재를 함께 달이고, 끼니를 챙기고, 집을 나설 때마다 걱정 담긴 인사를 건넨다. 순자 또한 엄마로서의 역할을 오래 해왔을 터. 자신이 아닌 남을 챙기고, 받치고, 때로는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일상이 익숙하다. 미나리는 모니카, 제이콥, 앤과 데이빗 네 가족이 힘겹게, 그러나 강인하게 뿌리내린 모습을 상징한다. 모니카와 순자처럼 가정의 기반이 된, 지난 세기의 모든 '어머니'들이 어디에서나 쑥쑥 뻗어나가는 확장성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들의 모성애를, 지고지순함을, 희생을 숭고하게 여기는 마음보다는 그들의 고생스러움이 피어낸 푸릇푸릇하고 질긴 줄기를 기억하고 싶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SIWFF
8/25(THU) ~ 9/1(THU)
2022-08-26 | 13:30 - 15:26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9관
2022-08-29 | 13:00 - 14:56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
- 이름을 부른다는 것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레이디 버드>의 스포일러가 불친절하게 마구잡이로 들어 있습니다.
짙은 녹색이 산마다 성큼성큼 내려앉던 여름 내내, 그 폭염 속에서 어쩐지 나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문득문득 떠올렸다. 내가 그 영화를 본 건 4월이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점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마음에 몇 달씩 이어지는 그림자를 남길 만큼 강렬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가득한 영화였다.
1983년 여름날, 이탈리아에 있는 별장에서 엘리오(티모시 살라메)는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다. 교수인 아버지, 여러 가지 언어를 섞어 말하는 가족들... 상당히 지적인 분위기에서 엘리오 또한 피아노도 치고 기타도 치고 수영도 하면서 나른한 여름을 하루하루 채우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를 도울 연구원으로 올리버(아미 해머)가 찾아오고, 한 계절 같은 두 사람의 사랑이 전개된다. 그러는 내내 등장하는 건물이며 호수, 햇살과 나무, 교수인 아버지 때문에 등장하는 슬라이드, 녹슨 유물들... 영화에 쓰인 소품이나 배경이 풍겨내는 아우라는 어마어마하게 우아하고 압도적이어서 보는 마음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아미 해머의 얼굴은 80년대 화보에서 튀어나왔다 싶을 만큼 아름다웠고, 티모시 살라메에게서는 옛 유럽 명화를 볼 때 들었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비단과 진주, 모피와 비싼 물감 재료 같은 것들이 오가는 곳에서 초연하게 앉아 있을 것 같은 귀족적인 분위기.
영화 분위기 자체가 그랬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 로맨스가 시작돼도 이상하지 않을 배경이었고, 다소 짓궂은 성적 묘사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고고해 보이게끔 하는 힘이 있었다. 영화가 여성 배우를 다루는 방식을 비롯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를 몇 개나 꼽을 수 있는 내 마음에조차, 아름다운 풍경과 선명한 상징들이 움푹 자국을 남기는 영화였다.
그러니 여름 한 철의 열매처럼 부드럽게 익었다가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릴 첫사랑의 조각이 내 마음도 스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계속 윙윙거리던 파리가 마지막까지 티모시 살라메의 몸에 들러붙어 있던 것처럼, 극중 엘리오의 마음만큼이나 내 마음에도 이 영화는 진득하게 윙윙거렸다. 영화에서 느껴지던 여름의 열기를 현실에서 느낄 때면, 그 여름 한가운데서 어느 책이든 책 한 권을 펼칠 때면 나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한 장면을 나도 모르게 떠올리곤 했다.
고요하지만 깊이 파고든 엔딩 장면만큼이나 마음을 건드린 부분은 영화 제목이기도 한 "네 이름으로 날 불러, 난 내 이름으로 널 부를게." 라는 대사였다. 엘리오와 올리버, 올리버와 엘리오. 어딘가 비슷한 음운이 많이 들어있는 두 이름이 부드럽게 섞이는 것도 좋았다. 이름이란 얼마나 그 사람을 다 담고 있는 것인가. 이름을 주는 것이 마치 다 주는 것처럼 여겨져서, 미성년자 건드린다고 언짢아하던 와중에도 그 대사에서만큼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름을 준다는 것에서 심장이 내려앉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분명 이름은 정체성을 드러내고, 반대로 정체성을 빚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시절 나는 할머니가 작명소에 돈 주고 지어 왔다는 내 이름이 정말 싫었다. 민지, 지혜, 유미 같은 이름들처럼 주변에 많이 보이면서 나긋나긋 예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유니크한 이름도 아니었다. 주류에 속하지도 홀로 고고하게 서 있지도 않는, 이도저도 아닌 모습이 정말로 나 같이 느껴져 더욱 싫었다. 내 이름을 받아들이고 좋아하게 된 건 내 나름대로 의미 부여를 한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내 이름 어딘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이름으로 대표되는 나의 세계 어딘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비단 과거의 나만은 아닐 것이다. 어디 가서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소시민적 삶을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서라면 거의 인류 보편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흔한 경험이다. 그리고 이 흔한 사춘기를, 흔한 경험을 반짝거리는 이야기로 묶어낸 이름이 <레이디 버드>다.
특이한 경험을 그려낸 영화를 낮잡아보자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세상 어딜 가도 두 번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독특한 사건이란 극보다 더 극적이어서 그 사건 자체만으로도 쉬이 눈길을 끌 수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이야기를 묶으면서도 사랑스럽고 눈에 띄게 그려낼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재능이 아닐까? 훌륭한 배우, 훌륭한 극작가에 이어 훌륭한 감독으로도 이름을 올린 그레타 거윅은 본인 경험과 배경을 상당수 녹여내면서도 인류 중 상당 비율이 공감할 수 있을 법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시얼샤 로넌이 분하는 "레이디 버드"는 누가 봐도 절대 본명이 아니다. 크리스틴이라는 멀쩡한 (그리고 아마 어른들이 "분별 있는 이름"이라 하실 법한) 이름을 두고 스스로의 이름을 만든다. 실제로 레이디 버드가 재조립하고자 했던 건 이름뿐 아니라 그 이름 뒤에 있는 생활 그 자체였다. 자신이 사는 동네, 가족의 자산 규모, 학교에서 자신의 위치, 어머니나 친구나 다양한 주변인들과의 관계... 영화는 레이디 버드라는 단 한 사람의 주인공을 세우고, 주변인과 그 동네를 촘촘하게 보여주면서 레이디 버드의 세계에서 우리의 10대를 끌어낸다.
지루한 고향을 떠나 어딘가로 떠나기를 동경하는 삶,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어지는 순간. 빚부터 직업까지 수많은 역할들로 짓눌려 있는 엄마의 삶을 볼 때마다, 도저히 저렇게는 되고 싶지 않다 생각하는 오빠의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이 다니는 가톨릭계 학교의 면면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하이틴 로맨스 주인공과 친구처럼은 도저히 보이지 않는 자신과 친구를 볼 때마다, 레이디 버드는 격렬하게 반응한다.
차에서 뛰어내리고, 이름을 지어내고, 머리를 빨갛게 물들이고, 여러 가지 거짓말을 타래로 엮어가며 자기 눈에 반짝거리는 것들로 자신을 만들어간다. 자신만의 성(城)을 쌓아 올리는 소녀의 모습은 분명 허영에 가깝지만 딱히 얄미울 것도 심각해질 것도 없다.
왜냐하면 딱히 심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레이디 버드는 0으로 수렴하는 수학 점수를 받으면서 수학 경시대회에 나가겠다고 한다든지, 온통 수녀님뿐인 선생님 차를 신혼여행 떠나는 웨딩카처럼 장식한다든지, 의외로 보기보다 대담하게 사고를 계속 쳐대면서 도저히 이 곳을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10대의 학교에 선생님으로 계신 수녀님의 눈에는 보인다. 레이디 버드가 실은 새크라멘토를 꽤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물론 레이디 버드 본인도 아직은 모르는 일이다.
시얼샤 로넌, 그레타 거윅영화의 배경인 새크라멘토가 그레타 거윅 본인의 고향인 데다가 레이디 버드의 본명인 크리스틴은 그 어머니의 이름이라고 하니, 그레타 거윅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니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레타 거윅은 본인과 본인의 고향을 참고해서 만들었을 뿐 자전적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했다. (나와 친구는 나오면서 "그냥 창피해서 그렇게 말한 거 아니야? 본인 얘기 맞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분명 레이디 버드가 하는 행동들은 보편적인 누구의 경험이라기엔 좀 특이하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들은 인간 보편적이기 때문일 것 같다.
결국 다른 우리 모두처럼, 즉 어른이 된 과거의 소녀들처럼 레이디 버드 또한 벗어나려던 모든 것들을 하나씩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프롬 파티에 함께 갈 멋진 남자친구와 학교에서 제일 "쿨한" 친구 대신, 파티 날 집에서 울적하게 앉아있던 친구와 만나 자기들만의 방법으로 파티를 즐긴다. 집을 떠나 멀리까지 대학을 가지만 결국 그곳에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본 후에 전화를 거는 곳은 집이고, 전화해서 하는 첫 마디는 "나 크리스틴이야"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는 것이다.
끊임없이 벗어나고자 하는 이유 중에는 자기의 것들이 지루하고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지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벗어나려는 자신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주는 끈을 촘촘히 확인하려는 마음도 있다. 너무 사랑하고 또 너무 가까운 이들과 나 사이에는 그런 원심력과 구심력이 공존한다. 엄마에게 쾅쾅 소리를 치다가도 어느 순간 조용히, 지금 이 모습이 나의 베스트라고 해도 나를 사랑할 거냐고 빤히 묻는 레이디 버드의 눈에는 그 마음이 정직하게 어려 있다.
원심력과 구심력은 힘의 크기가 같아서, 어느 하나가 이기는 일이 없다. 우리 모두와 사춘기와 마찬가지로 레이디 버드의 사춘기도 그렇게 팽팽한 원을 그리며 지나가지만 그런 날도 언젠가는 느슨하게 풀어진다. 조수석에서 짜증을 내다 차에서 뛰어내리던 레이디 버드가 운전석에 올라보고서야, 엄마가 운전할 때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풍경을 바라보았을지 톺아보듯이. 그렇게 새크라멘토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운전하는, 꼭 닮아 있는 엄마와 딸의 얼굴이 나란히 스크린 위에 그려지듯이.
비로소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이고 가족과 주변을 돌아보는 레이디 버드처럼 나도 내 이름에 나름의 의미를 붙이고, 입 속의 혀처럼 너무 당연하던 주변을 새삼스럽게 바라보는 마음이 든 후에야 나를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영화를 보고 돌아와 일기에 다정하게 내 이름을 괜히 한 번 써보았다. 몇 글자 되지도 않는 이름 하나에는 나를 둘러싼 이들의 애정이 들어있고, 타자이면서도 나 자신 못지않게 가까운 위치에서 애정을 보내주는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내 자리를 찾아 헤맸던 어린 시절이 들어 있었으므로. 레이디 버드는 그렇게 우리 모두의 이름이다.
너를 사랑해, 레이디 버드.
-
- <알고 있지만>, 정성스런 섹스 장면의 비밀
<알고 있지만>을 보고 있자니, <브리저튼>이 떠올랐다.
우연히 고른 두 컷인데, 여자가 살짝 미소지으며 다른 곳을 응시하고, 남자가 바로 옆에서 뜨거운(?)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것도 비슷하다.
주인공들의 관계 구도, 캐릭터의 속성이 참 비슷한 것 같다.
사랑에 서툰 '유나비'와 '다프네'
<알고 있지만>의 유나비, <브리저튼>의 다프네
사랑에 너무 능숙한(?) '박재언'과 '사이먼'
<알고 있지만>의 박재언, <브리저튼>의 사이먼 x
두 작품의 핵심적 공통점,
두 사람 간의 '애정씬'에 엄청난 공을 들인다는 것!
섹스 장면을 아주 길~고 아름답게, 정성들여 보여준다는 것!
누구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는 것처럼 보이기만 했던 주인공들은,
사실 하나같이 자신의 진짜 소망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상태이다.
사랑에 서툴었던 이도, 사랑에 능숙했던 이도.
그들은 당당하고, 당차고,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그 자신감의 원천에는 '가짜 소망'이 자리잡고 있기 쉽다.(그래서 무너지기도 쉽다)
나 조차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나의 진짜 소망이 무엇인지 스스로 모르고 있거나, 속이고 있기 때문에.
위장된 가짜 소망을 진짜 소망이라고 우기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섹스' 장면은 더없이 중요하다!
두 작품 모두 19금이어야만 했던 이유!
두 작품 모두 정성스럽게 섹스 장면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이유!
<알고 있지만>, <브리저튼> 모두에서
주인공 간의 애정씬은 양쪽 모두에게 '진짜 자신의 소망'을 발견하게 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진짜 자기 자신을 탐색해 보는 시간!
'몸'의 반응은 '말'보다 솔직하다.
주인공들은 서로 '마음에 없는 말'을 내뱉는다.
진짜 자신의 소망은, 진짜 자신의 욕망은 교묘하게 감추고,
자신 조차 자신의 마음을 속이면서,
상대에게 진짜 마음을 들키기라도 하면 크게 패배라도 하는 것 마냥 두려워하면서,
포장하고 또 포장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감추고 감추는 과정에서, 나조차 내 진짜 마음을 모르게 된다.
결국 내가 내뱉은 말에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나 스스로 내 마음을 속이고 내뱉는 말들은, 되려 나를 공격하게 된다.
그것이 아이러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내세운 방패가 오히려 내 살을 짓누르게 된다는 것!
나를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감추려고 하면 할수록, 더 상처받고 발목을 잡히는 것은 나라는 것.
<알고 있지만> 속 애정씬
그러나 '몸'의 반응은 '말'보다 솔직하다.
순간의 떨림과 흥분, 설레임, 기쁨, 환희는 감출 수 없다.
나의 모든 방패가 내려지는 순간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의 소망을 제대로 탐색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진짜 소망이 무엇인지!
가짜 소망과 진짜 소망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며, 진짜 자신의 모습을 탐색하는 인물들!
'연애인듯, 연애아닌, 연애같은 관계', 가짜인듯 진짜같은, 애매모호 경계선에 놓인 인물들!
이 경계선을 무너지게 할 수 있는 강력한 한방, 꼭 필요했던 장치, 바로 섹스 장면!
'가짜 소망'이 아니라 '진짜 소망'에 기반한 '나만의 자신감'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계기!
이 중요한 계기를 나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변하는 것, 움직이는 것, 찰나'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변하지 않는 것, 고정된 것, 영원한 것에 대한 갈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마치 두 사람 간에 '키스'를 하면, 그 관계를 보다 고정시켜야만 하는 것 아닌가라고 기대하는 '유나비'처럼.
이러한 유나비에게 박재언은 말한다. "왜 꼭 그래야 해?"
변하는 것, 움직이는 것, 찰나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여기면,
나의 진짜 소망을 제대로 탐색하기 어렵다.
왜곡되기 쉽다. 위장되기 쉽다.
실상을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게 된다.
다프네와 사이먼은, '계약 관계' 를 거치면서 안전하게 자신들의 감춰진 진짜 소망을 발견하게 된다.
'진짜가 아닌 가짜 관계'가 이들에겐 꼭 필요했다! 안전하게 진짜를 탐색할 수 있는 가짜 판!
그러나 진짜를 발견하는 순간 가짜판은 더이상 가짜가 아니라 새로운 진짜가 된다!
유나비와 박재언도,
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관계'를 거치며, 그들의 진짜 소망을 꼭 발견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19금은 필수이겠지! 앞으로도 정말 공들여 만든, 정성스러운 애정씬이 기대된다!
-
- 12년 만에 다시 만난 기념비적 SF
잘생긴 사람이 부산 사투리로 어떤 말을 한다. 남자는 입담이 엄청 좋다. 이 남자의 이름은 '사이먼 도미닉', 이하 '쌈디'다. 굉장히 좋은 행보로 AOMG의 사장을 지나 현재 한국 힙합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이 남자. 이 사람의 언더신에서의 행보는 아주 훌륭하다. 여전히 그는 한국 힙합의 전설이 되어 좋은 음악을 발표하고 있다(글쓴이도 쌈디를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이렇든 저렇든 이름을 처음 알리게 된 계기는 MBC의 <아바타 소개팅>이다. 그렇게 잘생긴 사람이 말을 저렇게 재미있게 한다고? 그 프로그램 자체의 아이디어도 신박했다. 일단 누군가가 직접 보이지 않은 채로 타인을 대하면 민망한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차피 내 일 아니거든. 이 프로그램은 그 지점을 똑똑하게 활용하며 지금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몇몇 레전드 클립을 남겼다.
어떤 영화가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건 대단한 일이다. 단순히 <범죄도시 2>에서 손석구 배우의 카리스마로 그가 스타덤에 오른 것도 굉장히 좋은 일이다. 일단 손석구 배우 개인에게도 좋은 일이니까. 그런데 어떤 영화가 TV 프로그램 몇 개 만들다 못해 '아바타'라는 개념 자체를 갖고 온 것이라면 그건 감독이 선견지명이 있다고 보는 게 당연하다. 아, 이 영화는 이 선견지명만 남기고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다.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SF 명작이 되어 그렇게 남아있다. 12년을 돌아 메타버스를 꿰뚫은 영화를 만나보자. 다음 주 수요일 리마스터링으로 재개봉하는 <아바타>다.
아주 먼 미래
2150년. 상이군인 제이크 설리는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가족도 없이 혼자서 사는 것 같다. 나라를 위해 투신했지만 보상이 노력한 만큼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세상에게 잊히고 있는 제이크. 어떤 술집에서 웬 부랑자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다. 정신을 차릴 즈음 누군가가 말을 건다. "이 자가 제이크야?" "맞는 것 같은데요." 남자 둘은 제이크를 끌고 어딘가로 향한다. 도착한 곳은 일종의 연구실이다. 여기가 뭐하는 데야? 처음 겪는 상황이다. 어리둥절한 제이크.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 그레이스 박스는 싹수가 없다. 아무튼 제이크에겐 임무가 주어진다. 1kg당 2천 달러나 하는 물질 언옵테늄을 채취하는 것. 이 언옵테늄이 있다면 가상의 행성 판도라를 개발해 인류의 평화로운 삶을 기약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대규모 부대를 판도라에 파견하는 인류. 판도라에는 원주민 나비족이 살고 있었다. 인류는 나비족과의 공존을 위해 가상으로 된 몸 '아바타'를 만들어 외계인과의 소통에 나선다.
아바타를 통해 외계인과 통신하는 제이크. 임무를 하던 도중이었다. 원래 판도라에서 살던 외계 동물에게 공격을 받고 무리에서 낙오된다. 절망스러운 상황. 헤매던 제이크를 오마티카야 부족의 여전사 네이티리가 발견하고 그를 구해준다. 묘하게 시작되는 인연. 사실 네이티리는 제이크에게 화살을 겨눴지만 사살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바로 지역의 수호신 같은 존재 에이와가 이를 제지한 것. 제이크에게 뭔가 다른 걸 느끼는 네이티리. 살고 있는 고향으로 데려간다. 술렁이는 부족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와의 계시를 받았다는 네이티리의 말에 제이크가 부족과 함께 동화되는 것을 허락한다. 제이크와 네이티리는 동상이몽인 채로 서로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힘을 합친다. 과연 아바타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을까?
기념비적이라고 할 수 있지
글쓴이는 97년이다. 이 영화의 개봉 연도는 2009년이다. 이때 <무한도전>이 인기가 많았다. <무한도전>의 팬이었던 나. 엄마는 많이 바빴기 때문에 주말이 아니면 극장에 갈 수 없었다. 토요일 저녁 6시 40분. 애매한 시간대에 표 예매를 잡았다. <무한도전>이 삶의 원동력이었기 때문에 극장 가기 직전까지 엉엉 울었다. "우리 아들. 왜 그래? <무한도전> 보고 싶어?" 지금 다시 생각하면 이마빡을 손바닥으로 쳐버리고 싶지만 아무튼 그땐 <무한도전>에 진심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 3시간 분량이 끝나고 난 뒤 뭔가 신세계가 열린 느낌이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SF였던 <아바타>. 메이플스토리를 필두로 한 아바타 게임은 적지 않았지만 그걸로 이런 서사를 짰다는 건 굉장히 신선한 시도였다.
13년이 지났다. 마블이 휘황찬란한 영화들을 발표하고 드니 빌뇌브가 <듄>을 발표했다. 긴 시간 동안 SF 장르에 햇살 같은 축복이 내렸다. 그런데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 <아바타>의 임팩트를 넘어선 SF가 없었다는 것에 쉽게 동의할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도 파란 피부에 신기하게 생긴 외계인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또 무슨 날개 달린 외계 생물체를 달고 비행하던 쾌감은 지금 봐도 신선하다. 어릴 때야 '그때 그거 쩔었지'라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분명하게 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영화가 가진 시각적 쾌감은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거장이 가진 연출력 덕택에 나왔다. 180분 동안 살짝 진부할 수도 있는 스토리를 매 번 다른 느낌으로 끌고 간 감독의 개인능력이 돋보인다. 괜히 기념비적인 SF가 아니다.
뭐가 있냐면
일단 시각화 수준이 대단하다. 이 영화는 SF영화다. SF영화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시각적인 게 중요할 것이다. 기존의 세계를 새로 만드는 게 이 영화의 주요 과제다. SF이니 만큼 기존에 없는 대신 설득력 있게 사실적으로 가상의 현실을 구현해야 한다. 이곳에서의 CG 연출은 우리를 설득하기 충분하다. 일단 나비족을 CG로 연출한 방식은 '적당히 신선하다'라는 말과 어울린다. 우리는 살면서 외계인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이 영화에서는 사람처럼 구성하되 외관만 살짝 빗겨 난 형식을 썼다. 또 부분적으로 근육질의 묘사도 인간의 것을 따온 것이 보인다. 다들 '불쾌한 골짜기 이론'에 대해 알 것이다. 기괴함과 신선함의 차이는 정말 간발의 차다. 그런데 이 영화가 초반부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유지하고 있었던 건 이 시각 연출의 힘이 크다. 또 판도라에 사는 외계동물 연출도 공룡을 연상케 하는 좋은 시각화였다. 우리 인류가 처음 탄생하기 이전에 공룡이 살았다. 그리고 판도라 역시 도시를 개발하기 이전이다. 이 점에서 '인류의 역사와도 닮으면서 신선함을 유지했던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이 공룡들을 활용한 액션도 이 영화의 강점 중 하나다. 타고 다니는 동물이 있다. 이 타고 다니는 동물을 가지고 하는 전투신이 이 영화에서 제시되는데, 실제로 이 동물들을 타고 싸우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장면을 구성했다는 이야기인데 운동의 디테일이 구석구석 살아있어 생동감을 더한다.
이런 시각화를 뒷받침하는 이야기 구성도 눈에 들어온다. 사실 이 영화 줄거리 별 것 없다. 자연을 개발하려는 인간과 원주민의 대립은 우리 역사책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소재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를 설정한 건 어느 정도 노림수가 있다. 우선 철학적인 이야기를 담고자 했던 것도 분명히 의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감독이 하고자 했던 메시지와도 관련이 있다. 그런데 글쓴이의 생각은 이야기를 통해 힘을 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시각화에 힘을 빡 주는 것이다. 이 영화는 '아바타'라는 매개체를 통해 외계 문명과 소통하는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럼 3자의 관점에서 영화의 강점으로 작용하는 게 뭘까? 외계인과의 신기한 소통 과정일 것이다. 그러면 이야기를 신선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시각화에 힘을 주는 것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가 조금 진부하더라도 액션과 CG에 힘을 주는 방식은 우리 요즘 할리우드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일단 올해 국내에서 800만 관객을 동원한 <탑건 : 메버릭>만 봐도 그렇다. 따지고 보면 베테랑 조종사 메버릭의 이야기가 서사의 전부다. 그럼에도 메버릭의 저세상 액션 하나만큼은 정말 끝장났다. 이렇게 이 영화가 후의 상업영화들에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건 그렇게 어려운 가정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외계인들과의 소통' 중 어떤 것을 소재로 삼았는지 생각해보면 이는 감독의 노림수가 꼼꼼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단 주인공 제이크의 인물 설정이 흥미롭다. 바로 하반신 마비라는 점이다. 이 하반신 마비라는 특성은 1) 초반부에 아바타를 연결하고 난 다음의 카타르시스 2) 아바타 프로젝트에 참여할만한 근거 제시 3) 후반부 인물의 선택지에 합리적인 근거 제시라는 점에서 꼼꼼하다. 또한 액션 신에서 탈것이 되어주는 동물과의 교감을 넣은 것, 후반부에 인류와의 대립이 있는 것, 네이티리의 전투신까지 '이걸 넣으면 영화의 시각적 요소가 풍부해질 것'을 고려한 티가 난다. 일단 아크란과의 교감과 비행은 극에서 중요한 위치도 차지하면서 불필요하게 삽입하지 않았다. 인류와의 대립 액션신은 핵심 인물들의 내적 변화를 꼼꼼히 만들었기 때문에 일반 관객들도 '그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나?'를 설득할 수 있다. 또한 네이티리의 맨몸액션은 초반부에 이 인물이 어떤 캐릭터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방식 중 하나다. 이 사람이 내적으로 강인하지만 그렇다고 빈틈이 아예 없는 인물은 아니라는 걸 경제적으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12년을 돌아 다시 직면하다
이 영화에서 주요하게 작동하는 테마 중 하나는 '인간의 것은 과연 무엇인가?'다. 대사에서도 언급된다. '모든 에너지의 것들은 잠시 빌린 것이며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라고. 이 영화가 개봉한 2009년 12월부터 세계는 다양한 사건을 맞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어도, 팬데믹 사태를 겪어도 변하지 않았던 뜨거운 감자는 사실 명확했다. 바로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지구 온난화 문제였다.
감독이자 각본가 제임스 카메론은 이 지구 온난화 문제에서 환경에 대한 소재만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한 것 같다. 이야기 전개는 어디서 봤다. 또 소재는 우리 책에서 많이 읽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익숙한 소재를 갖고 왔다고 해서 절대 깊이가 얕지 않다. 인류가 자기를 희생하기 위해 타자들을 어디까지 희생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과학의 진일보를 어디까지 바라볼 것인가, 복제인간은 과연 인간과 어떤 차이점을 갖는가, 미국의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논의, 대화와 소통 없는 의사소통 방식까지 영화는 다양한 층위로 이루어져 넓은 이야기를 한다. 과연 이게 2009년의 세계에만 국한되는 이야기일까? 아닐 것이다. 금세 우리는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생각난다. 팬데믹 사태를 불신했던 몇몇 정상들도 생각난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찾을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 인간을 대체하는 인형에 대한 논의는 뜨거운 감자였다. 이런 일에 대해 감독은 각각의 해결책도 제시하지만 결정적인 키워드로 어떤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뭐. 사람에 따라 고리타분하게 느낄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인 걸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0여 년을 지났지만 시대상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유효하다는 것은 제작자들의 인사이트가 탁월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단순히 눈요깃거리로 뛰어난 영화가 아닌, 우리 스스로의 삶에 대해 통찰해보면 좋은 영화가 <아바타>가 아닐까?
-
- 대단히 슬픈 결말, <프리가이>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리가이>의 결말은 대단히 슬프다. 이야기의 끄트머리까지도 유쾌함을 잃지 않다가 이토록 급하게 씁쓸함을 선사하는 영화도 흔치 않을 것이다.
<프리가이>의 결말이 왜 철저한 새드엔딩인지 설명하기에 앞서, 이 영화의 장점부터 언급해보고 싶다. <프리가이>는 유명 배우와 거대 자본이 투입된 영화치고 놀랍도록 매니악하고 젊은 언어로 만들어졌다. 나이 든 관객들을 완전히 배제해버렸을 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 중에서도 게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있다. ‘이 정도는 네가 이해할 것이라 믿어!’라는 듯이, 여러 게임의 설정, 아이템, 용어 등을 뒤섞어 놓으면서도 특별한 설명 없이 지나간다.
허나 이렇게 선택과 집중을 확실하게 해 둔 덕으로, 영화는 매우 뚜렷한 컨셉을 얻게 되었다. 유머는 타율이 높고, 어색함 없는 CG와 빵빵한 사운드, 질척거리지 않는 전개로 지루해질 여지도 없이 오감만족을 선사한다. 확실히 재미있다.
<프리가이>를 보다 보면 이 영화가 단순히 재미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은근한 메시지까지 담으려 했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에는 얼핏 주연과 조연이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것. 누군가가 자신에게 수동적인 역할을 강요하더라도 언제나 주체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 진정 자유로운 존재가 되라는 것. 단순한 교훈이지만 생각해볼 만한 지점인 것도 맞다. 코미디에도 최소한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다만 그 메시지들이 이야기와 결정적으로 불협하고, 심지어 불쾌함까지 전해준다면 어떨까. 적절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리가이>는 여러 영화를 연상케 한다. 나열해보자면 <트루먼쇼>, <그녀>, <매트릭스>, <13층>, <주먹왕 랄프>, <레디 플레이어 원> 같은 작품들이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프리가이>를 <트루먼쇼>와 비교하는 사람이 아주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주인공이 의문스러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 본인도 모르는 새 수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존재라는 점. 중요하게 반복되는 대사가 있다는 점(“Don't have a good day! Have a Great day”,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사랑하는 여인이 조력자로 등장한다는 점, 클라이막스에 바다를 건넌다는 점, 목숨을 걸고 세계의 끝에 도달하여 탈출한다는 점 등. 공통점이 굉장히 많다.
그런데 왜 <트루먼쇼>가 진한 감동으로 남아있는 것과 달리 <프리가이>는 씁쓸한 결말의 영화가 되었을까.
두 영화의 결말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은 결국 주체적인 존재로서 자유를 얻지만, <프리가이>에서 ‘가이’는 진정한 자유를 얻지도, 주체적인 존재가 되지도 못한다. 만약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이 속편 <트루먼쇼2>를 통해 제2의 세트에서 다시 한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영화를 기쁘게 반길까? 이 세상이 세트이며,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트루먼이 다시 한번 관음의 대상으로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그 모습에서 감동할 수 있을까? 트루먼이 아무리 행복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가 목숨을 걸고 얻어낸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진정으로 믿는 관객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이’는 트루먼과 다르게 목숨을 건 도전 이후에도 ‘프리가이’가 되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게임 속 관찰의 대상이다. 자신의 사랑을 창조주에게 양보했다. 사랑을 잃고 친구와 재회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스스로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가이’는 정작 직업마저 잃은 백수 광대로 남게 되었다.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한량으로 사는 것이 그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이고, 행복일까? 적어도 나는 설득되지 않았다.
영화의 결말과 주제가 일치하려면, 가이는 누구의 간섭이나 관찰도 허용하지 않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 했다. 밀리와의 사랑 또한 이루어졌어야 했다. (어떤 방식으로 ai와 인간이 사랑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키스는 밀리와 동업자이자 좋은 친구로 자신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달려가야 했다. 마지막 커플의 키스신이 야동을 보다 들킨 것처럼 황급히 끝나버리는 이유는, 어긋난 결말을 깨달아버린 감독 자신의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빵이야 어떻게 만들었든 생크림을 잔뜩 발라놓으면 입에 넣고 씹을만하듯이 유쾌한 상상력의 오락영화 자체로 본다면 <프리가이>는 그럭저럭 탑승해볼 만한 어트랙션이다. 하지만 <프리가이>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했다면, 정교한 방식이라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이미 재미와 의미를 양손에 쥐고 가는, 좋은 영화들의 사례를 많이 만나왔다. 그런 면에서 <프리가이>는 재미는 잡았지만 의미는 잡지 못한 반쪽짜리 영화라고 평할 수밖에 없겠다. 프리도 되지 못하고 가이도 되지 못한 프리가이를 무어라 불러야 하나. 극장의 불이 켜질 때, 나에게 남은 것은 그 질문이었다.
-
-
- 레지던트 이블 라쿤시티, 액션은 줄고 좀비도 줄고 지루함은 늘어난 리부트!
콘솔 게임을 원작으로한 영화 레지던트 이블의 새로운 리부트 영화죠.
레지던트 이블 라쿤시티가 개봉했습니다.
사실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영화인데요.
주인공 클레어 역할로 카야 스코델라리오가 주연을 맡았어요.
아직까지는 레지던트 이블 하면,
과거 밀라 요보비치가 앨리스로 출연했던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가 더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스타일리쉬한 액션이 중심이되었던 이전 시리즈와는 달리 이번 리부트된 영화는 액션이 줄었는데요.
그럼 어떤 부분이 달라졌고, 영화는 어떨까요?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봐주세요! :)
제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ug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는 아래 링크에서! :)
-
- 영화 <해적 : 도깨비 깃발> 메인 예고편
사라진 보물! 찾는 자가 주인이다?☠️ 설 연휴, 극강의 재미와 스펙터클이 휘몰아친다!? ⚡[해적: 도깨비 깃발] 메인 예고편 공개⚡
-
- 영화 <방법: 재차의> 티저 예고편
되살아난 시체 '재차의'(在此矣)가 살인을 저질렀다!
살인사건 현장에서 피해자와 함께 용의자도 사체로 발견된다.
그러나 용의자의 시신은 이미 3개월 전 사망한 것으로 밝혀져 경찰은 혼란에 빠진다.
한편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기자 임진희는 라디오 출연 중
자신이 바로 그 살인사건의 진범이며 생방송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게 된다.
경찰과 네티즌은 임진희 기자의 온라인 생방송을 일제히 주목하고
인터뷰 당일 그 곳에 나타난 범인은 되살아난 시체 '재차의'에 의한 3번의 살인을 예고하는데…
첫 번째 살인이 예고된 날,
엄청난 수의 ‘재차의’ 군단이 나타나 무차별 습격을 시작하고
총력 방어에 나선 경찰 당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과연 이들을 조종하고 있는 배후는 누구일까?
이들을 막아낼 유일한 ‘방법'(謗法)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