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9-17 22:28:23
[SICFF 데일리] 독립 사건을 독립 사건으로
영화 <벼랑 위의 남매>
SYNOPSIS.
여동생과 함께 산 정상으로 소를 몰아야 하는 소년. 아름다운 자연과 동물들, 귀여운 남매가 어우러진 모험이야기
PROGRAM NOTE.
부모님이 마을에 간 사이 에브라힘과 그의 여동생 일마는 산에서 소들을 돌본다. 에브라힘이 다리를 다쳐 바위벽 위로 올라올 수 없게 되자 일마는 혼자서 모든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녀는 씩씩하게 임무를 수행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일마는 점점 불안해진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 어린 남매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더구나 남매가 심각한 상황에 빠질수록 남매의 대화는 코믹하게 흘러간다. 팽팽한 긴장감과 무해한 웃음을 오가며 보는 이를 쥐락펴락하는 연출과 남매의 생동감 넘치는 연기가 매력적이다. 귀여운 남매의 일화에 소박한 가족의 애정과 신뢰가 깊이 스며있는 영화. 가족관객에게 추천하고 싶다. (함유선)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그 말을 증명하듯, 이 영화는 헬리캠으로 찍은 원경에서 시작한다. 아이들이 사는 세상, 초원과 염소 소리, 황금빛 햇살까지 담아내면서. 그 안에 아이들은 그림의 일부처럼 존재한다. 엄마와 아들, 딸과 아빠, 뛰고 손을 씻고 아빠의 입맞춤을 받고, 풍경의 일부로.
가족이 사는 방식은 더없이 검박하고 단출하여 아름답다.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노동을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나누어 한다. 모처럼 마을로 나가는 부모님의 '쇼핑 리스트'도 네 식구가 나란히 앉아 적는다. 이제 막 철자를 배우고 있는 듯한 막둥이, 딸 일마(Ilma)가 알쏭달쏭 헷갈려 하며 글자를 써 가면서. 얼핏 퉁명스러운 것 같아도 아이들이 원하는 건 또 하나씩 다 사주는, 화목한 가정이다. 남매도 적당히 남매답게 투닥투닥하며 사이가 좋은 것이 귀엽기만 하다.
부모님이 마을로 먼 길을 떠난 날, 에브라힘(Ebrahim)과 일마 두 사람은 부모님이 남겨주신 미션을 차곡차곡 수행한다. 양을 돌볼 것, 도토리를 말려둘 생각이니 양이 먹지 않도록 주의할 것, 피스타치오 열매를 좀 따둘 것. 동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오빠 에브라힘에게는 "일마도 이제 다 커서 알 건 다 안다"는 말도 남겨둔다. 두 아이는 제법 능숙한 솜씨로 양을 친다. 둘러멘 가방 속 라디오에서는 '이란 국민 여러분' 어쩌고 하는 말이 흘러나오지만, 이들은 어느 나라의 국민보다는 그냥 이 땅의 일부로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다 일마가 벌을 발견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벌이 있다는 건 꿀도 있다는 뜻. 아빠가 분명 가지 말라고 했던 절벽 가에 매달려 꿀을 확인한 에브라힘은, 갑자기 등이 간지러워 손을 놓치면서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 발목을 다쳐 올라올 수 없는 에브라힘과, 그 위에서 엉엉 울기 시작한 일마, 두 사람의 하루는 뜻밖의 점입가경으로 갈수록 고달파진다. 이 영화는 두 남매가 절벽에서 보낸 하루를 꼬박 담은 영화다.

#전통, 기대거나 혹은 반하거나
두 아이는 일단 재난영화의 법칙을 어겼다. 가지 말라는 금기가 있는 곳에는 가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가버린 이상, 일이 벌어진 이상 두 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이었을까? 어린 시절 각자가 배운 내용을 들추어 보자.
나는 엄마에게 "길을 잃어버리면 반드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것"이라고 배웠다. 그리고 혹시라도 (예를 들어 낯선 사람이 쫓아와 유괴의 위험이 있다던가 하는) 위험 상황에 처하면 아무 가게나 들어가 도움을 요청하라고 배웠다. 어느 가게를 들어가도 가게 주인과 부모님이 다 알음알음 아는 사이일 법한 작은 지역 사회였고, 20년쯤 전이니 지금과는 다른 가르침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이들이 했어야 하는 제1의 행동은, 에브라힘으로서는 가만히 있는 것, 일마가 달려가서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두 아이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어른들을 불러오겠다는 일마를, 에브라힘이 말린다. 사유는 여자 혼자 다니다가 낯선 사람을 마주쳤을 때 실추될 "명예". 10살도 채 되지 않은 일마, 가축을 돌볼 때는 너무 어려서 돌보기 귀찮은 동생으로 여겨지는 일마가 바깥에 나가면 여자로 인식되어야 하는 현실을 말한다.
그밖에도 두 아이가 내린 선택 중에는 전통에 기대느라 '오... 저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싶은 것들이 더 많이 있었다. 일마의 머리를 가리는 데 쓰는 스카프가 벼랑 아래로 내려가 에브라힘의 부어오른 발목을 감았다가, '혹시라도 낯선 사람을 마주칠 가능성' 때문에 다시 벼랑 위로 올려보내는 순간도 그렇고. 자칼이 다가왔을 때 여차하면 도망칠 수 있게 신발을 단단히 신는 대신 혹시나 하는 미신을 따르기 위해 신발을 거꾸로 신는 일마의 선택도 그렇고.
그러나 두 아이가 마음 기대는 곳 또한 전통이다. 불사조 깃털을 태우면 불사조가 도와주러 온다는 설화를 생각하며 불사조 깃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설화 속 인물이 태우지 않은 깃털이 지금 어디에 있을까 궁금해 하는 오색찬란한 상상력은 아이들이 그 하루를 버틸 힘이 되어준다. 상태가 좋지 않아 나오다 끊겼다 하며 사건의 긴장감을 더하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서른 마리 새' 시무르 설화 또한 그렇다. 잠깐이지만 두 아이를 미소짓게 한 일마의 노래 또한 입에서 입으로 배운 방식일 것이다.
불사조의 깃털은 전설 속에서 사람을 구해준다고 하지만, 사실 에브라힘의 등을 간질인 것부터가 깃털이었다. 전통과 관습은 절대 일면만 가질 수 없다. 사람을 따스하게 감싸고 기댈 곳이 되어주는 면과 갑갑하게 옥죄는 면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병존할 수 있다.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하게
따뜻한 면과 갑갑한 면을 동시에 품은, 전통과 관습이라는 세계. 그 안에서 아이들은 자라왔다. 그래서 현명하고, 그래서 다정하며, 그래서 용감하다. 동시에 이따금씩, 그래서 비합리적이고, 그래서 무정해 보이고, 그래서 겁을 낸다.
그러나 전통이 가진 엄정한 면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충분히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하다. 에브라힘은 하늘의 기색과 양들의 행동을 바탕으로 날씨를 예측하고, 일마에게 적절한 대처 방법을 일러준다. 떨어지면서 입은 부상에 아프고 당황스럽지만, 일마가 너무 겁 먹지 않도록 소리도 지르지 않고, 선의의 거짓말도 적당히 섞는다. 일마 또한 오빠가 시킨 일을 충실히 하고, 시키지 않은 다정한 일까지 고사리 손으로 바지런히 한다. 자기들이 지쳐가는 와중에도 새끼 염소가 지쳐가고 있다며 불쌍히 여기고, 심지어 자칼까지도 안쓰러워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가진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한 면이 가장 빛난 장면으라면, 나는 극악의 상황에서 일마를 달래던 에브라힘의 대사를 꼽고 싶다. 아빠 말대로 일마도 알 건 다 알 만큼 컸기에, 이 파국을 시간 순으로 배열한다면 가장 앞쪽에는 자신이 벌을 보고 오빠를 부른 일이 놓일 거라는 걸 안다. 아직 어린 일마에게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운, 패닉이 몇 번이나 찾아오는 상황 속에서도 일마는 엉엉 울면서 오빠에게 미안해 한다. 자기가 신에게 죄를 지어서 그런 것 같다는 말도 한다.
그런 일마를 에브라힘은 부드럽게 달랜다. "사랑해, 일마. 네가 뭘 잘못했어?" 더불어, 벌과 꿀을 발견한 것은 잘못이 아님을 명확히 한다. 일마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과 함께. "마을 세 개를 다 합쳐도 네가 가장 용감해."
두 아이의 나이를 합쳐도 스물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서른이 넘은 내가 너무 배우고 싶어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것을, 에브라힘은 이미 알고 있다. 그건 바로 독립 사건을 독립 사건으로 보는 능력이다.
시간 상 앞에 놓였다고 해서 반드시 인과 관계인 것은 아니다. 그 합리적 사고 방식을, 에브라힘은 알고 있다. 전통이 이따금 그들에게 묻힌 비합리적이고 무정해 보이고 겁 나는 마음과 태도 속에서도, 아이들은 자기만의 힘으로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한 것이다.

#Somewhere between the rocks
영화를 보면서 '아동 보호'라는 말을 많이 떠올리긴 했다. 안온한 보호가 부재한 상황을 통해 아동 보호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영화이기도 했으므로. 불사조의 깃털도 튼튼한 밧줄도 없는 아이들에게 목소리 높여 부를 호칭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묘하게 안심하게 하는, 그런 안전망이 모든 아이들에게 있길 바라게 만드는 영화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안전망은 어른들이기 이전에 아이들 자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에브라힘을 절벽에서 끌어올려 줄, 그래서 에브라힘에게 내일을 선사할 힘은 어른들에게 있겠지만, 아이들의 미래는 에브라힘과 함께 이 바위 틈 어딘가에 걸려 있다는 생각.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Somewhere between the rocks 바위 사이 어딘가'인데, 거기야말로 불사조의 깃털 같은 미래가 깃들어 있다는 생각 말이다.
이유는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한 아이들의 면면 그 자체. 자기 나름대로 사투를 벌인 하루가 꼬박 지나고 나서야, 에브라힘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부르고 일마는 멀리서 어른들을 모시고 달려온다. 비로소 문제의 해결점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이 등장한 것이다. 하루만큼 더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해진 아이들이, 이렇게 세상을 안전히 살아갈 방법을 또 하나 배운 아이들이 자라난다.
독립 사건을 독립 사건으로 볼 줄 아는 아이들의 시각으로 전통과 관습을 해석해 간다면, 전통와 관습이 사람을 옥죄는 면보다 따뜻하게 감싸주는 면이 더 강력하게 기능하지 않을까? 사실 여성이 머리카락을 스카프로 가리는 것과 여성(을 비롯한 가족)의 "명예 실추"는 각각 별도의 독립 사건이다. 여성이 혼자 걷다가 낯선 사람을 마주치는 것과, 그에게 해코지를 당하는 것 또한 논리적인 인과 관계가 없다. 범죄가 일어난다면 범죄와 인과 관계를 맺는 것은 가해자의 행위뿐일 테니까.
그러므로 에브라힘의, 그리고 그 에브라힘의 애정 어린 말로 위로를 받은 일마의 성장으로, 바위 틈 어딘가에 매달려 있는 미래는 점차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란에서 머리카락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 미래 또한. 모든 독립 사건이 독립 사건으로 존재하는, 지금보다 가뿐하고 산뜻한 미래를 꿈꿔 본다.
9월 15일 13:30-14:52 롯데시네마 은평 7관
9월 16일 10:00-11:22 롯데시네마 은평 3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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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안녕하세요, 씨네픽입니다! :)
9월 첫째 주도 잘 보내셨나요?추석 연휴 동안 편히 쉬셨길 바랍니다!씨네픽과 함께하는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과 한 주 동안 진행했던 씨네픽 예측 이벤트인<공조 2> 주말 박스오피스 스코어 예측'도 같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그럼 시작해 볼까요?...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1. <공조2: 인터내셔날> (NEW)▶ <공조 2>가 개봉과 동시에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개봉 주에 추석 연휴가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관객 수를 모았는데요.
개봉 주에 벌써 200만 관객을 돌파하였습니다.
주말 동안 (9월 9일- 9월 11일) 관객 수 208만 9,148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260만 1,674명을 돌파하였습니다.
| 줄거리남한으로 숨어든 글로벌 범죄 조직을 잡기 위해
새로운 공조 수사에 투입된 북한 형사 ‘림철령’(현빈).
수사 중의 실수로 사이버수사대로 전출됐던 남한 형사 ‘강진태’(유해진)는
광수대 복귀를 위해 모두가 기피하는 ‘철령’의 파트너를 자청한다.
이렇게 다시 공조하게 된 ‘철령’과 ‘진태’!
‘철령’과 재회한 ‘민영’(임윤아)의 마음도 불타오르는 가운데,
‘철령’과 ‘진태’는 여전히 서로의 속내를 의심하면서도 나름 그럴싸한 공조 수사를 펼친다.
드디어 범죄 조직 리더인 ‘장명준’(진선규)의 은신처를 찾아내려는 찰나,
미국에서 날아온 FBI 소속 ‘잭’(다니엘 헤니)이 그들 앞에 나타나는데…!2. <육사오> (▼1)▶ 지난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차지했던 <육사오>가 공조의 개봉으로 2위로 떨어졌습니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코미디 영화라 추석 연휴에 많은 관객이 찾은 것 같습니다.
주말 동안 (9월 9일- 9월 11일) 관객 수 30만 3,180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56만 6,664명을
돌파하였습니다.
3. <헌트> (▼1)▶ 개봉 이후 계속 1,2위를 차지했던 <헌트>가 9월 둘째 주에 3위로 하락하였습니다.
관객 수가 지난 주와 비교했을 때 약 2.5배 하락하였지만,
이번 주에 개봉하는 화제 작품이 없기에 비슷한 관객 수를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주말 동안 (9월 9일- 9월 11일) 관객 수 8만 5,806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426만 3,791명을 돌파하였습니다.
▶씨네픽의 이번 주 117회 예측 이벤트는 <공조2: 인터내셔날> 주말 스코어 예측 이벤트입니다.
씨네픽 참가자분들이 예측해주신 <공조2: 인터내셔날>의 스코어 예측 결과는 어땠는지 다 같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공조2: 인터내셔날>의 포털사이트 네이버가 제공하는 실제 관람객의 성별/나이별 관람 추이를 보겠습니다.
남성 46%, 여성 54%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령대 별로는 30대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고 그다음으로 20대, 40대, 50대, 10대 순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습니다.
▶한 주 동안 씨네픽 이벤트의 참가자분들 중 <공조2: 인터내셔날> 주말 관객 스코어에 가장 근접한 예측치를 보인 건
10대 후반 남성과(1,257,460명)과 30대 후반 여성(1,057,054명)이었습니다.
또한 <공조2: 인터내셔날> 주말 관객 수 스코어 예측의 정답자 비율은 (오차범위 +-10,000) 전체 참가자의 0%에 해당합니다.
추석 연휴가 변수가 되어 예측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공조2: 인터내셔날> 주말 스코어 예측 이벤트에 참여한 20/30대 비율은 아래 표와 같습니다.
4. <극장판 엄마 까투리: 도시로 간 까투리 가족> (NEW)▶ 추석 연휴에 영향으로 아이들을 겨냥한 애니메이션 영화 <극장판 엄마 까투리: 도시로 간 까투리 가족>이
4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박스오피스에서 4위를 차지했던 <탑건: 매버릭>과 비슷한 관객 수를 보이고 있습니다.
주말 동안 (9월 9일~9월 11일) 관객 수 5만 4,843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6만 1,233명을 돌파하였습니다.
5. <한산: 용의 출현> (▼2)▶ 한 달 넘게 박스오피스 TOP5를 유지한 <한산: 용의 출현>이 9월 둘째 주에 5위를 차지하였습니다.
<한산: 용의 출현> 역시 위에 말했던 것처럼 화제 작품이 없기에 5위를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주말 동안 (9월 9일- 9월 11일) 관객 수 4만 3,623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722만 5,885명을 돌파하였습니다.
북미 주말 박스 오피스
▶ 주말 동안(9월 9일- 9월 11일) <Barbarian>의 매출액은 10,000,000 (한화 약 138억)의
매출액을 달성했으며, 총 누적 매출액 역시 동일합니다.<북미 박스오피스 TOP 5> (2022년 9월 9일 ~ 2022년 9월 11일)1. <바바리안> 1000만 달러 (누적 1000만 달러)2. <브라흐마스트라 파트 원: 시바> 440만 달러 (누적 440만 달러)3. <불릿 트레인> 325만 달러 (누적 9254만 달러)4. <탑건: 매버릭> 317만 달러 (누적 7,056만 달러)5. <DC 리그 오브 슈퍼 펫> 283만 달러 (누적 8,542만 달러)...씨네픽의 9월 둘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이 시간에 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감사합니다!-!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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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을 마주 하는 태도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그림 같은 풍경’이란 말을 쉽게 쓰지만, 예전부터 그림은 아름 다운 풍경을 한 폭에 담기 위해, 자연을 보고 그린 것이니, 그 말은 조금 이상한 말일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면 ‘영화 같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어딘지 ‘그림 같은 풍경’ 이란 말만큼이나 기괴하게 느껴진다. 보통의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은 누군가의 상상보다는 결국 현실 세계의 누군가다.
실화 바탕의 영화는 대체로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영화 같은 사건’ 일 확률이 많고 그런 일엔 으레 피해자와 가해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실화 바탕의 영화를 볼 때마다 마음이 조마 조마해지는 것은 이 종합 예술이라는 작품이 만들어지고 선보이는 과정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2차 가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가 필요 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건 ‘도가니’ 때문이었다. (나는 줄거리만 읽고도 너무 많이 울어서, 아직도 보지 못했지만) 한국의 최초 사회고발물 영화였던 ‘도가니’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현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실제 사건은 영화 개봉 후인 2011년 9월 재수사가 시작되었고, 관련된 법을 제정하고 2012년 광주 인하 학교는 폐교되었다. 때로 용기를 내어 어렵게 만들어진 영화는 현실을 바꾸기도 하고, 잊혀지지 않아야 할 사건을 남겨 주기도 한다.
영화 <도가니>가 한국 사회에 해당 사건이 직접적으로 진행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면 (물론 실제 사건은 더 충격적이어서,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완화 했다고는 하지만) 영화 <스포트라이트> 그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팀을 중심으로 사건을 취재하며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3대 일간지 중 하나인 보스턴 글로브 내 ‘스포트라이트’ 팀은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취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더욱 굳건히 벽을 쌓고 있는 권력 때문에 진실을 마주하기가 어렵다. 언론도 정치인도 교장도 학교도 모두 종교와 연결되어 숨겼던 사건.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은 대교구.
“교회가 수세기 동안 막아 온 일입니다. ‘글로브’지가 버텨낼 힘이 있을까요?”
하지만 사건을 파헤쳐 조사하면 할수록 엄청난 규모에 기자들은 더욱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인생을 함께한 종교적인 믿음에 균열이 생기고, 내 가족과 공동체가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진실’에 다가가려 한다.
영화는 충격적인 사건을 파헤치면서도 취재 과정에 집중한다. 머리가 띵 할 만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때도 기자들은 이성적이고 담담하게 그리고 묵묵히 취재해 나간다. 자극적인 연출 웅장한 음악은 없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누구보다 진심으로 진정성있게 대하고 있음이 연출에서도 드러난다. 회의 하는 장면이나 취재 장면을 롱테이크로 보여주어 마치 현장에서 함께 회의에 참여 하고, 취재 결과를 직접 보고 받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다. 취재하는 과정에서 기자들이 겪는 어려움 그리고 진실을 향한 단호함 그리고 무엇보다 취재의 과정에서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며 언론인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게 이성적으로 취재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따듯함을 잃지 않는 태도는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런 태도들은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나처럼 감정적인 인간이, 눈물 콧물 쏟게 오열하도록 만들지 않으면서도 사건의 심각성을 크게 전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언론의 책임의식, 언론의 윤리의식, 기자정신을 잘 보여주는 영화라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영화가 ‘실화’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지만 끝까지 집요하게 파헤치고, 그 과정에서 그 어떤 누구도 상처 입지 않도록 따듯함을 가진 마음으로, 그리하여 실제 사건이 영화화 되었을 때 누군가에게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는 그런 영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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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되기 위한 세 번째 조건
작가란 누구일까? 작가가 되려면 우선 글을 써야 한다. 작가란 글로 무언가를 짓는(作) 사람이다. 작가의 첫 번째 조건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작가가 될 수 있다. 그냥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수많은 사람이 글을 씀에도 그들이 모두 작가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작가로 인정하려면, 그에게 독자가 있어야 한다. 독자는 작가의 두 번째 조건이다. 우리는 혼자만 읽는 글을 쓰는 사람을 작가라 부르지 않는다. 많든 적든 그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글쓴이는 비로소 작가라는 호칭에 어울리는 사람일 수 있다.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 영화가 말하는 작가의 세 번째 조건은 바로 독자와의 상호성이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조안나 래코프의 책 《My Salinger Year》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작가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J. D. 샐린저(J. D. Salinger)다. 샐린저는 지독할 정도로 대중 앞에 서는 걸 꺼린 것으로 유명한 작가다. 명성에 비해 발표한 작품의 숫자도 적은데 그마저도 철저하고 까다로운 저작권 관리를 받아 접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는 작가 에이전시에 취직해 샐린저를 담당하게 된 조안나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그녀는 은둔자적 삶을 이어가는 샐린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관해 철저히 교육받는다. 제일 중요한 업무는 샐린저에게 온 독자 편지에 응대하는 일인데, 샐린저가 독자의 편지를 받아보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조안나가 적당한 형식에 맞춰 답을 써야 했다. 샐린저에게 오는 편지는 이미 에이전시가 유형화해놓았을 정도로 다양하다. 소설에 감동했다는 독자, 자기 문제에 조언을 요청하는 독자, 인터뷰를 요청하는 언론 등등. 조안나는 샐린저에게 온 수많은 편지를 분류하고 매뉴얼대로 답장해나간다.
그런데 점점 의문이 생긴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수많은 독자의 내면을 강렬히 사로잡았기에 샐린저에게 온 편지도 대부분 절절한 이야기다. 그들은 모두 갈급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인 홀튼 콜필드를 창조해낸 샐린저에게 자기 내면의 혼란을 털어놓으며 교감을 추구한다. 조안나의 고민은 여기서 생긴다. 진정성 가득한 편지에 기계적으로 답변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샐린저의 태도가 적절한지를 고민하는 조안나 역시 샐린저와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안나가 뉴욕으로 온 후, 고향에 있는 그의 남자친구는 연락 없는 그녀에게 계속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조안나는 이를 읽지 않고, 읽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답장도 하지 않는다. 연락이 끊긴 채 멀어져버린 연인에게 쓴 편지의 애절함이 샐린저에게 쏟아진 편지에 담긴 감정에 뒤처질 리 없다. 조안나는 샐린저의 처신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정작 자기 역시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닫는다.
사실 조안나는 작가 지망생이다. ‘지망생’이란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이미 《파리 리뷰》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안나는 그 이후 별 다른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작가’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작가 에이전시에 취업한 것도 이 일이 그녀의 꿈을 본격적으로 펼치는 데 보탬이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에서였다.
영화의 마지막, 조안나는 결국 작가가 되기 위한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다. 샐린저를 품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고, 연락을 끊었던 남자친구와도 만나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는다. 물론 샐린저는 위대한 작가다. 조안나는 그의 작품에 진정으로 감탄하며, 작가로 살아가는 태도와 방법에 관한 그의 조언에 감동한다. 그러나 조안나는 샐린저가 아니다. 샐린저가 독자와 엮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데 반해, 조안나는 고향의 남자친구가 편지 서문에 자신의 애칭을 부른 것만으로도 과거 기억이 떠올라 편지를 읽지 못할 정도로 섬세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다. 직장 상사가 상업적이고 딱딱한 태도로 작가를 대하는 걸 보며 마음 아파하는 장면도 조안나의 여린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
때문에 그녀가 스스로 작가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는 분명 샐린저와는 다른 작가가 될 것이다. 독자의 반응 하나하나에 설레거나 상처받으며, 이를 소중히 품은 채 다음 작품에 그들이 남긴 흔적을 반영할 것이다. 외골수처럼 자기만의 주제를 파고드는 작가도 좋지만, 독자와 함께 호흡하며 작가 주체성‧정체성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가도 좋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복잡한 문학이론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작가의 의미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꽤 흥미로운 영화다.
한편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작가론을 다루는 영화인 동시에 꿈꾸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내가 그랬듯, 많은 사람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조안나의 모습에 위로 받을 것이다. 샐린저의 궤적을 존중하면서도 자신만의 미래를 꿈꾸는 조안나가 만들어갈 미래를 상상하는 게 퍽 즐거웠다.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와 그녀가 선택한 미래를 비교해보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막 어떤 목표를 정하고 본격적으로 매진하려는 초심자에게, 〈마이 뉴욕 다이어리〉가 잔잔한 위로와 재미로 다가갈 것을 확신한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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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이해의 과정인 ‘다름’
디즈니플러스를 구독하고 가장 먼저 본 영화 <루카>. 이 작품을 영화관에서 보고싶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서 보질 못하고 엄청난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디즈니플러스 한국상륙을 고대하며 가장 먼저 봤던 작품이었다. 기대를 했던 만큼 만족스러웠던 작품이었고, 아주 감동의 눈물을 펑펑 쏟았던 영화였다.
영화 <루카> 시놉시스
바다 밖은 위험해?! 아니, 궁금해!
함께라서 행복한 여름, 우리들의 잊지 못할 모험이 시작된다!
이탈리아 리비에라의 아름다운 해변 마을, 바다 밖 세상이 궁금하지만, 두렵기도 한 호기심 많은 소년 루카. 자칭 인간세상 전문가 알베르토와 함께 모험을 감행하지만, 물만 닿으면 바다 괴물로 변신하는 비밀 때문에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새로운 친구 줄리아와 함께 젤라또와 파스타를 실컷 먹고 스쿠터 여행을 꿈꾸는 여름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과연 이들은 언제까지 비밀을 감출 수 있을까?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루카>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정말 물 속에 있는 듯한 느낌
영화 <루카>는 바다괴물 루카가 물고기들을 인도하면서 시작된다. 물고기를 보호하는 바다괴물이라니..! 너무 귀엽지 않나? 사람들에 의해 물고기들이 사냥 당하자 배와 사람들의 낚시바늘로부터 부호하기 위해 바다괴물과 물고기들은 정해진 수역에서만 활동을 한다. 어차피 시각적으로 바다 속에 있다는 것이 잘 보이기 때문에 청각적인 요소에는 어쩌면 신경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역시 디즈니~ 역시 픽사~ 아주 섬세하게 청각적 요소도 신경을 썼다. 물 속에 있을 때는 정말 사람들이 물속에서 이야기를 하면 웅웅웅~ 울리듯이 사운드를 조정해놨다. 이 섬세함에 박수를! 그리고 바다괴물이 물 밖으로 나올 때는 일반적인 소리로 다시 변환을 하는 등 그 차이를 통해 청각적으로도 물 속과 물 위를 구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린아이의 도화지 같은 흡수력을 볼 수 있었던 장면들
루카는 바다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도시, 육지에서의 인간의 삶에 대해서는 아지 못한다. 특히 하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루카에게 알베르토는 육지에서의 부모처럼 도시의 삶에 대해, 인간처럼 사는 방식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주기 시작한다. 하지만 알베르토 역시 인간들과 어울리며 자란 것은 아니기에 스스로 습득하며 조금은 잘못된 정보를 루카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잘못된 정보를 루카는 너무나도 신기하다는 듯이 의심하나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아이에게 부모의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 세상에 대해 모르는 아이에게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야 라고 알려주는 것이 그 아이에게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사실로 받아들여지다는 점에서 이런 아이들의 순수함에 처음부터 제대로된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는구나, 아니면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있게끔 옆에서 지켜봐주어야 하는구나 라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다름이라는 공포에 대하여
영화 <루카>의 전반적인 주제는 ‘다름’이다. 서로를 오해하면서 그 간극이 넓어진 바다괴물과 인간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숨기며 서로를 지켜보기만 한다. 나와 다른 것들에 대한 배제와 배척이 영화에서는 잘 드러나고 있었다. 서로이 입장을 들어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존재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주면서 불신과 통제가 인간과 바다괴물 사이에서 모두 등장한다.
하지만 존재의 다름에 상관없이 우정을 쌓은 줄리아는 루카와 알베르토가 변하는 모습에 조금은 놀라지만 그래도 그간 친구로 지내왔던 순간을 생각하며 다시 다가가고 그들을 옹호한다. 그렇게 마지막 경기에서 바다괴물로 변신한 루카와 알베르토는 바다괴물로서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우승을 인정해주고 바다괴물의 존재에 대한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면서 서로 어울릴 수 있게 된다. 그저 나와는 다르다는 것에서부터 생기는 공포, 물론 다르기에 조금은 경계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한 공포와 경계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생기는 동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내가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 그들의 대한 공포와 경계는 한꺼풀 걷어내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영화 <루카>는 루카와 알베르토의 우정에 대해, 그리고 다름에 대해 귀엽게 풀어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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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인기 많은 <오징어 게임>, 제가 한번 직접 봤습니다
난 드라마 잘 안 본다. <나의 아저씨>나 <DP>, <인간 수업>도 안 봤다. 가장 최근에 본 드라마가 뭐야?라고 묻는다면 장혁의 <추노>를 꼽을 것이다. 점점 살다 보니 TV가 있는 안방에 들어가지 않게 됐다. 나의 아저씨도 본다 본다 말은 했지만 한 10초 봤을 것이다. 나는 드라마에 진심이 아닌 편이다.
<오징어 게임>은 스킵하는 장면 없이 나온 당일날 9시간 만에 정주행을 끝냈다. 이 작품이 엄청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건 진짜 초 쩌는 작품이다' 싶었던 <추격자>나 <곡성>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아마 <랑종>을 보고 극장에서 나온 다음과 비슷하달까? 적당히 잘 만든 작품 같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전해진다. 무려 <오티스>를 이겼다는 말이 들리니 말이다. 나 역시 이 드라마가 재미있었던 사람으로서 내가 느낀 소감을 이 브런치에 공유하고자 한다. 물론 아쉬운 지점은 있다. 흑막의 정체가 너무 쉽게 예상이 간다던지, 몇몇 인물의 개연성에 있어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던지, 베드신이 굳이 들어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5화의 다리 건너기에서 더 영리한 수를 쓸 수 있지 않은지 등등.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법한 의문점 역시 나도 갖고 있다. 근데 나는 단점을 제외하고 황동혁 감독이 어떤 걸 의도하고 만든 지 예상할 수 있었고 이를 공유하고자 한다. 전적으로 나의 의견이며 실제 이 드라마를 만든 제작자들이나 배우들의 의견은 당연히 다를 수 있다. 그냥 사람들이 제시하는 각기 다른 해석 중 하나로 읽어주신다면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 아래부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흑막은 왜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된 논리를 펼치는가?
죽은 줄 알았던 일남이 살아서 기훈에게 쪽지를 보냈다. 기훈은 놀란 눈빛으로 쪽지가 적어놓은 장소를 향해 걷는다. 기훈이 묻는다. "당신. 누굽니까." 일남이 대답한다. "저기. 저 남자 말이야. 술에 취했는지 몇 시간째 저러고 있어. 행색으로 봐선 노숙자 같은데. 저대로 놔둔다면 금방 얼어 죽을 텐데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자네라면 어쩌겠나. 가던 길 멈추고 저 냄새나는 인간쓰레기를 도와주겠나." 이 대사는 일남을 상징하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일남은 지나가는 사람을 '인간쓰레기'라고 규정한다. 다음의 일남의 대사도 굉장히 중요하다. "그 돈은 자네의 운과 노력의 대가야. 자네는 그 돈을 쓸 수 있어. 삶은 짦아." "자네,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거야. 내 고객 한 둘이 그러더군. 살면서 더 이상 즐거운 게 없다고." "자네가 잊은 게 있어. 난 아무에게도 게임을 강요한 적이 없어. 자네도 제 발로 다시 돌아왔잖아." 일남은 이 <오징어 게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결과를 판단하는 사람이다. 마치 시스템을 만든 조물주와도 같이.
일남은 이 '오징어 게임'을 만든 인물이다. 이 <오징어 게임>에서 프런트맨이 중요시하게 주장하는 원칙이 있다. 바로 평등과 소외된 이에 대한 수용이다. 전자는 111번 참가자가 스태프들과 결탁해 부정을 취한 게 드러날 때 말했던 논리다. 후자는 미녀가 깍두기처럼 남겼을 때 주장한 말이다. 프런트맨이 주장했다고 해서 일남과 무관하냐? 당연히 아니다. 프런트맨은 운영 스태프들을 총괄하는 입장임과 동시에 호스트의 분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프런트맨의 논리가 일남의 주장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곧 <오징어 게임> 전부를 관통하는 키워드라고 봐도 무방하다. 즉, 일남이 이 게임을 만들 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평등과 배려다. 나름대로는 '하류인생들에게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민주적인 방식에 따라 준 것이다. 근데, 이 <오징어 게임>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만한 문답이 있다. 그래서 결국 이 과정이 옳았는가? 아니다. 평등과 배려를 원칙으로 해 1명의 우승자를 찾는 이 <오징어 게임>은 죽는 사람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방식이다. 자세한 묘사를 찾을 필요도 없이 이 게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지옥도와도 같다. 앞서 쓴 바와 같이 사람이 죽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다른 측면을 본다고 해보자. 2화를 봤을 때, 과연 이 456명의 참가자들에게 있어 현실이 게임보다 낫다고 볼 수 있을까? 애초부터 게임을 재개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5대 5로 여론이 나뉘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현실에서 위기를 겪은 사람들이 다시 재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게임은 다르다. 누군가는 현실에서 연탄불에 생을 끝내려고도 하는데, 게임은 살아남기만 한다면 큰돈을 가질 수도 있다. 난 이 2화에서 각자 인물들이 처한 설정과 게임이 대비된다는 지점과 일남이 <오징어 게임>을 기획한 이유로 설명하는 것이 같은 공통점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애초부터 황동혁 감독은 이 설립 의도가 합리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지금 한국사회의 시스템을 만든 기득권층의 모순에 대해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지나가는 인간쓰레기'라고 정의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심지어 어떤 게임에서는 그가 실제 조물주와 비슷하게 쥐락펴락 갖고 놀았다. 우리 스스로에게 간단하게 물을 수 있다. 이 일남의 스탠스는 옳았나? 아니다. 일남과 프런트맨의 논리는 '겉으로는 평등과 원칙을 주장하지만 결과는 살인'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모순이다. 또 돈이 많다고 해서 누군가를 죽이거나 살릴 권한은 없다. 그것이 상금과도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기할 수 있는 도구를 준다고 해도 말이다. 이 과정이 실제로 평등과 배려를 깔았다 하더라도, 하위계층에 대한 거의 유일한 구제책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냥 아닌 건 아닌 거다. 우리는 이것들을 절대 모르지 않는다. 이미 수백 번도 넘게 사회정의에 대해 석학들이 논의했다. 근데 이 논의가 다 유의미했냐? 아니다. 그거 다 이뤄졌으면 모두가 다 살기 좋았다. 그러니까 이 대한민국 사회를 이루고 있는 시스템은 모순투성이인 셈이다. '하위 계층에게 올라갈 기회를 준다. 참여에 대한 강제 없이'가 서로를 죽이는 논리지만 우승자를 골랐던 이유가 '너랑 노는 게 재미있어서'인 것도 이에 대한 근거다. 두 질문은 '왜 게임의 승리자로 나를 설정했는가?'라는 질문에 '그냥'이라고 대답한 것과 같다. 애초부터 일남에게 누구를 살리는 데 있어 내적 논리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소외된 사람들은 살리고 패배자는 총으로 쏴버리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말을 못 지키는 것이다.
현실이라고 다를까? 우리는 내가 올라가면 누군가는 밑에 깔린다는 걸 알면서도 살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언젠가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남을 밟고 일어날 거라고 예상 못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이 원리원칙에 대해 하위계층이던 상위계층이던 사실 다 알고 있다. 내가 이기면 누군가가 진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럼에도 우린 이 <오징어 게임>에 강제가 아닌 철저히 본인의 의지로 스스로를 갈아 넣고 있다. 마음 한 구석에 총알 몇 방 맞아가며 말이다. 내 생각에 황동혁 감독은 이런 아이러니에 대해 표현하려고 일남과 프런트맨의 논리를 이렇게 설정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2. 감독은 현실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VIP의 구성과 플레이어들에 대해 알아보자. 다양하게 나눠진다. VIP는 전 세계에서 온 손님들이다. '한국의 게임이 이렇게 재밌다니'라고 말하는 거 보면 각국의 오징어 게임에 참여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또 동성애자도 있다. 이 부분은 드라마를 잘 본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이라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2번에서도 언급할 것과 같이 한국의 <오징어 게임>은 평등과 정의를 중요시한다. 또 약자에 대한 배려도 지킨다. 외적으로 보면 기득권층은 각계각층서 온 사람들에 심지어 동성애자까지 껴 있는 평등한 세상이다. 플레이어들에게 부조리가 일어나는 걸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람들이 추구하는 도덕성은 틀렸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도덕성은 지키면서 그 외적인 건 뭐가 일어나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난 이 인원 구성이 한국사회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내지는 이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소수가 중심이 되는 사회지만 이는 결국 기득권의 이해관계 아래 놓여 있을 뿐이다. 감독은 '이 드라마가 현실에 대한 은유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인원 구성부터 힌트를 준 것이다. 굳이 안 넣어도 됐을 탈북자와 외국인 노동자, 치매노인이라는 설정도 있으니 말이다.
3. 프런트맨과 29번 스태프는 왜 등장하는 것인가?
프런트 맨이 2화인가 3화 즈음에 대사를 치는 장면이 있다. 난 이것만 듣고도 담당 배우를 맞출 수 있었다. 음성변조를 넣기야 넣었는데 난이도는 쉽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또 지영 역(이유미 배우)이 새벽에게 모히또와 몰디브 어쩌고 하지 않나? 그것도 프런트맨의 정체에 대한 암시라고 생각한다. 감독의 전작이 <남한산성>이었다는 것도 복선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또 막상 가면을 벗을 때 솔직히 너무 멋있어서 깜짝 놀랐다. 에이 뻔하지 싶었는데 육성으로 '헉' 소리가 나온 것이다. 눈빛 연기가 대단했다.
아무튼,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일단 29번 스태프의 정체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9번 스태프는 잠입한 황준호다. 황준호는 실종된 형을 찾고 있다. 직업은 경찰이다. 물론 경찰이라는 직업으로 인해 가질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처음 잠입할 때 29번 스태프를 때려눕히고 변장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경찰이라는 직업적 특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영에도 능하고 총도 곧잘 쓰는 부분도 경찰이라는 장점이 작용했다. 그런데 경찰이라는 직업 본질적인 것에 대해 따져보자. 경찰은 사회 부정의를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이 직업적 특성은 황준호의 임무 2순위, 집단살인에 대한 진상규명의 동기부여로 작용한다. 그렇게 모험을 떠나 휴대전화로 이 <오징어 게임>의 전말을 대략적으로는 알리기는 성공할 것으로 보이는데,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프런트맨의 정체였다. 황준호의 형이자 전직 경찰관이었다. 정의를 추구해야 할 인물이 세상 가장 부조리한 곳의 수장이 되어있었다. 이 <오징어 게임>의 기득권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경찰이 집단살인이 난무하는 곳의 기득권이 되었다는 건 굉장한 아이러니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세태와도 닮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를 이루는 부조리함은 나쁜 사람들만 모였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까?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아는 정치인들. 금융인들. 기업인들. 나름대로의 선한 논리는 다 있을 것이다. 사회를 바꾸는 선택지가 정말 없었을까? 아니다. 우리에겐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쉽지 않을 뿐. 그냥 눈 뜨고 일어났는데 2021년에 이런 부조리한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프런트맨 역시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에 기생하는 선택지를 골랐으며 이 게임에 대해 폭로하고자 했던 인물(황준호)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형이라는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은 것이 결과로 제시되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감독은 시스템에서 사회정의를 건져 올릴 수 있는 자구책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차피 우리는 이해관계가 만든 판 아래에 놓일 수밖에 없다. 사회 부정의를 해소에 현실에 기여하는 방식 역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말하는 셈이다.
4. 결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난 주인공 성기훈이 결국 패배했다고 생각한다. 딸을 주도적으로 키울 수 있었냐? 아니오. 돈 쓸 수 있었냐? 아니오. 만원도 못 써 은행 직원에게 돈을 빌린다. 상우 어머니에게 진상을 세세히 말할 수 있었냐? 아니오. 살리고 싶은 사람들 다 살리고 빠져나왔나? 아니오. 어머니를 살릴 수 있었냐? 아니오. 승리는 했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일남이 마지막 병원에서 했던 말이 이 인물에게 제일 중요하다. 이 사람이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건 그냥 재미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성기훈은 드라마의 끝까지 본인의 허술한 부분만 드러나다 끝난다. 검은 머리의 성기훈은 부조리가 벌어질 동안 손가락만 빨다가 끝난 셈이다. 근데 한 변곡점을 통해 머리 색이 바뀐다. 빨간색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 분기점을 상징하는 사건이 있다. 게임의 호스트 일남과의 내기다. 일남은 '자네는 아직도 사람을 믿는가?'라는 질문에 패배한 듯 보인다. 이 내기에서 이긴 이후에 염색을 한다. 머리색을 주인공의 각성이라는 상징으로 가정해보자. 빨간 머리로 염색한 장면은 '이 인물이 일반적인 방식이 아닌 특별한 해결방법으로 시스템의 대항마가 될 것'이라는 것의 암시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빨간색으로 염색 안 한다. 보통 그런 차림이면 눈에 띈다. 오징어 게임, 아니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파란 모자를 쓰고 검은색 머리 스타일에 대해 무난한 코디라고 받아들인다. 기훈은 머리의 염색을 통해 한풀 더 각성해 이들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하는 것 같다. 당연히 쉽진 않겠지. 맞은편 지하철에서 의문의 남자와 재회하는 장면을 보자. 다른 남자가 따귀를 맞고 있는걸 뻔히 보면서도 다른 <오징어 게임>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우의 어머니에게 돈을 주고 떠나거나 게임의 참여자가 되는 등 일반적인 관념을 깨는 입장이 되려고 노력한다. 황동혁 감독은 각본을 촘촘히 쓰면서 색상의 대비나 머리색이라는 상징으로 어떻게 이 성기훈이라는 인물이 <오징어 게임>을 받아들일 것인지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결말의 의미는 성기훈이 이제 우리 사회의 패배자가 아닌 맞서 싸우는 주체가 된다는 의미. 뭐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쓰다 보니 막 뱉어낸 것 같다. 전적으로 나의 생각이니 무조건 따른다거나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난 좋은 드라마를 본 것 같아 시간이 후딱 갔다고 생각한다. 시즌 2 계획 없다고 하던데 솔직히 그냥 하는 소리일 거라고 생각한다. 빠른 시일 내에 후속작을 볼 수 있길 바란다. 아. 정호연이란 탑 모델을 배우로 발굴해준 황동혁 감독님께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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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정과 강박 사이
I am over you.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주인공 알렉스 돌의 모습을 줌인하며 나오던 노래 가사이다. 강박적인 교육과 그에 어울리는 드럼 비트로 기억되는 영화 "위플래시 (2014) "의 음향 감독이던 로런 해더웨이의 감독 데뷔작이다. 어느 평론가는 그녀의 데뷔작인 이 영화의 편집이나 음향이 마치 한 편의 나이키 광고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모든 장면의 전환은 빠르고, 음악과 색채는 강렬한 데 반해, 여주인공 알렉스 돌과 그녀가 천착하는 조정이라는 경기 장면은 -특히 조정을 하는 강의 흐름과 색은 - 어둡다. 큰 대조 (contrast)를 이루는 편집 속에서 돋보이는 것은, '초심자'라는 뜻의 노비스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강렬한 욕망을 가진 알렉스의 이글거리는 두 눈동자이다.
꽤 오래전에, "오펀: 천사의 비밀 (2009)"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공포영화에 어울리는 배우라고 생각하는 베라 파미가도 좋았지만, 주인공인 에스더를 연기한 아역 배우 이자벨 퍼만의 얼굴은, 기억하는 분들이 꽤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녀가 자라서 돌아와, 모든 분야에서 쉴 틈 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는 강박을 가진 '알렉스 돌' 이란 여대생을 연기했다. 그녀는 극 중에서 대통령 장학금으로 생활비까지 모두 지원받고 좋은 대학에 온 수재이지만, 택한 전공은 자신이 제일 취약했던 물리학이다. 방과 활동조차 작은 체구의 그녀에게 불리한 '조정'이라는 종목을 채택한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이 어려움을 느끼는 분야를 파고들어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
그녀에게 눈엣가시처럼 느껴지는 라이벌은 모든 스포츠에 적합한 체구와 근기, 팀워크를 타고 난 제이미라는 학생이다. 알렉스가 모든 레슨을 기록하고, 타깃이 되는 기록을 성취할 전략을 나름 세우며 숫자에 연연할 때, 제이미는 보란 듯이 쉽게 기록들을 갈아치운다. 하지만 제이미는 알렉스가 가지지 못한 '절박함' 이 있다. 그녀는 반드시 조정 팀 1군에 발탁되어야만, 대학교 기숙사에 남을 수 있는 장학금과 특권을 거머쥘 수 있다.
알렉스의 강박적인 열정을 보며 제이미 또한 알렉스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느끼고, 그녀를 친구로 받아들여 협력하지만, 알렉스가 뛰어넘어야 할 것은 금전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안 제이미는 그녀와의 '협력'을 중단한다.
알렉스의 모습을 보면서 안쓰러운 경계선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남들보다 자신이 더 노력해야만,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의 전형이다. 자신의 강박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멈출 수 없고, 자해를 하면서도 가져야만 하는 건 - 어찌할 수 없는 도전 정신이라고 해야 할까. 물리학 조교와 교제를 시작하고 제이미와 잘 지내면서 사람들과 융화되려고 노력은 해 보지만, 여전히 경계에 놓여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때 우리 또한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알렉스와 같이 놓고 싶어도 놓지 못하는 굴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소름이 돋기도 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유려하게 흐르는 강물 위의 조정 씬과 교차되는 성교 장면. 그리고 욕실에서의 자해 장면과 누군가는, 어딘가 부서진 그녀를 붙잡아 주길 바라며 절규하는 알렉스의 모습. 해더웨이 감독은 강의 물 번짐, 혹은 강위의 까마귀 등을 통해 인물들의 감정 표현이나 복선 등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거기에 음악도 한 몫했다. 번개 치는 강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노를 놓지 않고 나아가는 알렉스의 모습은, 불안정한 성격을 지니고 세상에서 부유하는 그녀의 자아를 형상화한 모습 같기도 하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노를 쥐고 사람들 쪽으로 저어 오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은 그녀만의 선택이다.
마지막 장면의 노래 선택 역시 탁월했다.
I am over you.
그녀가 뛰어넘은 것은 제이미도, 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이었을 것이라 믿는다.
이자벨 퍼만은 이 영화로 제20회 트라이베카 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이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한 시사회를 바탕으로 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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