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포2025-04-01 16:53:20
방황은 여행이 되고, 그 끝에는 사랑이 있었다.
<행복의 노란 손수건> 스포있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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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은 여행이 되고, 그 끝에는 사랑이 있었다.
스포있는 <행복의 노란 손수건> 리뷰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했습니다.
‘제1회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7개 부문을 수상하고,
일본 역대 흥행 베스트에 등재된 영화
이런 수식어가 붙어 있는 영화를 보고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일본 영화를 즐겨봤었기에 이전의 일본 영화가 궁금했다. 어떤 부분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비평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지 보고 싶었다. 그렇게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러갔다.
원작이 있는 영화
영화는 유명한 원작을 기반으로 한다. 1970년대 뉴욕 포스트에 실렸던 ‘피트 해밀’의 단편소설을 기반으로 한다. 영화 시작 원작자 이름으로 피트 해밀이 뜨는 걸 볼 수 있다. 여행을 떠나는 남녀와 석방 후 집을 향하는 남자.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용서를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면 노란 손수건을 나무에 달아주라는 약속을 기다리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용서와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1973년 팝송으로 만들어지며 더 유명해졌다.
영화를 보면서 찾아보려고 한 것은 이 유명한 이야기를 어떻게 일본의 배경으로 풀어냈을지, 결말이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를 두고 1시간 48분간 끌었을지였다.
원작을 변형해 일본의 시대를 담다
영화 줄거리는 원작을 따라가면서 영화의 길이와 일본에 맞게 변화했다. 영화 시작은 좋아하던 여자에게 차이고, 직장도 잃은 ‘긴야’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가진 돈을 모아 새 차를 사고, 홋카이도로 떠난다. 새로운 여자를 만날 것이라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추파를 던진다. 그러다 남자 친구에게 큰 상처를 입고 실연한 ‘아케미’를 만나 함께 여행을 떠난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유사쿠’에게 부탁하며 이 여행의 마지막 동료가 합류한다. 방황하며 떠난 3명의 인물은 여행을 통해 부딪히고, 소통하며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그러다 ‘긴야’의 복통으로 ‘유사쿠’가 운전을 하게 되었는데 경찰의 검문에 면허가 없던 ‘유사쿠’가 걸리게 된다. ‘유사쿠’가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였던 사실을 알게 된 ‘긴야’와 ‘아케미’는 ‘유사쿠’의 사연을 들어보려고 한다. ‘유사쿠’의 사연을 들은 둘은 ‘유사쿠’에게 집으로 향하자고 권한다. 그렇게 ‘유사쿠’의 결말을 향해 어설픈 3명이 차츰 다가간다.
원작과 달라진 점은 배경과 인물들이다. 여러 쌍의 연인은 ‘긴야’와 ‘아케미’로 바뀌었다. 뉴욕에서 감옥살이하던 남자는 살인을 저지른 ‘유사쿠’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플로리다 해변을 향하는 여행은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그려졌다. 일본을 배경으로 만들면서 홋카이도의 여름 풍경을 담았다. 당시의 풍경들이 아름답게 담기면서 영화의 매력이 올라갔다. 게다를 신고 다니는 ‘긴야’의 모습이나 기차 승무원을 하는 ‘아케미’ 등 당시 일본의 일상적인 모습들을 담아냈다. 이런 모습들로 당시 일본 관객들에게 공감대로 다가갔을 것 같다.
방황에서 정착으로
3명의 인물은 방황하러 나왔다가 결국 정착할 곳을 찾는다. ‘긴야’와 ‘아케미’는 실연으로 상처 난 마음을 회복하고자, ‘유사쿠’는 부끄러운 죄에 아내를 다시 마주할 용기가 잃어서 돌아다닌다. 우연한 3명의 만남은 서로를 위한 행운이었다. 진심 부족한 ‘긴야’는 ‘유사쿠’에게 혼이 나며, 그의 삶을 보면서 진심을 되찾는다. 자신의 실패에 후회하던 ‘아케미’는 여행 중 실수와 실패를 해도 울면서 이겨낸다. 나중에는 용기가 부족한 ‘유사쿠’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인물이 되기도 한다. ‘유사쿠’는 둘 만큼 어설픈 사람이다. 하지만 어른으로서 둘과 함께하며 책임감과 용기를 되찾는다. 3명 모두 여행처럼 어설프지만 함께 나아가며 어딘가 도착한다. 이러한 결말은 그 시대 청춘과 어른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과 단점은 같다. 오래된 영화라는 점이다. 과거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연출, 카메라 무빙, 편집이 인상적이다. 흔들리는 카메라나 코미디 연출은 더 이전 흑백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오디오도 과거 그대로다. 누군가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킬 요소이고, 누군가에게 색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과거의 영화를 체험해 보고 싶다면 추천한다.
어쩔 수 없는 단점은 시간이 지나 시대와 맞지 않다는 것이다. 메인 스토리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그때와 지금 달라졌다. 특히 관계를 강요하는 장면에서는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다. 그 장면보다도 더 놀라운 건 인물들의 반응이다.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가 오늘날과는 다르다. 이런 부분을 감수하기 어렵다면 아쉽게도 추천하기 어려울 것 같다.
시대 이외에 아쉬운 점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조금 덜 풀렸다는 것이다. 영화는 여행 중 인물들의 과거를 잠깐 회상하는 형태로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짧게 들어간 컷으로는 인물의 이야기를 다 파악하기 어렵다. 특히, ‘유사쿠’의 과거 컷 중에는 동료들과 탄광에서 나와서 기자들에게 조명을 받는 부분이 있다. 탄광일을 했다는 것과 어려운 일도 있었다는 것이 예상되지만 이후 과거 이야기를 풀어갈 때 이어지는 부분이 없다. 또 ‘유사쿠’가 경찰 서장에게 신뢰를 받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에 대해서 예측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적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이전 시대를 알아갈 수 있는 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삶과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삶과 사랑이라는 주제는 낡지 않는다. 1970년대든 2020년대든 사람이 겪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두르고 있는 것들이 조금 낡을 수밖에 없다. 영화가 표현하는 방식은 이 시대에는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차이가 영화의 매력이 되기도 한다. 옛 영화와 지금 시대의 차이 그사이를 느껴보고 싶은 사람과 그 시절 홋카이도의 풍경이 궁금하다면 영화를 추천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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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립 투 그리스: 두 남자의 인생 오디세이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아 참석한 영화 <트립 투 그리스>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같이 코로나19가 극성인 시대에는 여행을 떠나기도 좀처럼 쉽지 않다. 국내 여행은 어찌 어찌 간다손 치더라도, 해외 여행은 웬만해서는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세계 여행을 하지 못하던 그 옛날 쇄국의 시대로 돌아간 것만 같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방랑에 대한 욕망이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방랑욕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두 중년 코미디 배우의 여행을 다룬 이 영화, <트립 투 그리스>는 그에 대한 좋은 해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래에서는 필자가 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몇 가지 관람 포인트를 짚어볼까 한다.
1. 논픽션 같은 픽션
소위 영국 영화판 "알쓸신잡"이라고도 불리는 이 영화는 유쾌함과 재치, 그리고 드라마까지 모두 잡았다. 실제 배우의 이름과 성향을 따와 캐릭터를 만든 만큼 픽션과 논픽션을 자유롭게 넘나드는데, 이 점이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한다. 실제로 이 영화는 두 인물 뿐만 아니라,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거나 피서지에서 휴가를 즐기는 관광객들의 모습, 요리사들이 요리하거나 직원이 서빙하는 모습 등을 다큐멘터리의 방식으로 포착해낸다. 그래서 더욱 실감난다.
2. 영국판 알쓸신잡
주인공인 스티브와 롭은 그리스로마 신화 속 영웅인 오디세우스의 여정, 오디세이에 따라 그리스 곳곳을 누빈다. '트로이'에서부터 '이타카'까지! 그들은 각각의 명승지를 들러 훌륭한 요리를 먹고 재치있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이때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의 깊이가 남다르다. 그저 헛소리라고만 치부하기엔 그 내용이 훌륭하다는 소리다. 두 배우는 오디세이 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 성경, 그리고 20세기~21세기 유럽과 헐리우드 영화 속의 다양한 인물들의 일화를 소개하거나 패러디하며 각 여행지에서 해 보면 좋을 법한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그들의 유머는 때로는 시니컬하고, 때로는 심오하다. 다분히 영국적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영국식 유머를 꽤나 좋아한다!
3. 캐릭터 간의 케미스트리
잘난척쟁이인 스티브와 까불거리는 롭은 매사에 툭탁거리지만, 그들은 썩 어울리는 콤비다. 그러지 않고서야 4번에 걸친 여행길에 나설 리가 있겠는가? (그리스로의 이번 여행은 4번째 여행이라고 한다. 다른 시리즈를 찾아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일 것이다.) 과시적이고 알은 체 하길 좋아하는 스티브는 좋은 설명가가 되고, 롭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그러한 역사에 대한 재치있는 반박을 제시한다. 관객은 그를 통해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철학, 개념에 대한 관념을 더 풍부하게 키울 수 있다. 만약 두 사람이 단순히 서로 가르치기를 좋아하기만 하거나, 혹은 그 누구도 남에게 자기가 아는 것을 떠벌리길 좋아하지 않았다면, 애당초 이 영화는 성립되지 못했을 거니와, 설령 성립되었다하더라도 관객들의 재미는 반감되었으리라.
4. 희비가 엇갈리는 두 남자의 오디세이
이 영화가 탁월한 점은 단순히 '걸어서 세계 속으로' 식으로 끝나지 않고 그 안에 일정한 서사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다른 헐리우드 영화처럼 스펙터클하지는 않다. 그들의 서사는 여행의 뒤편에 가려져 언뜻 보기에는 대단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여행의 과정을 트로이 전쟁 이후 방랑의 운명을 맞이 해야 했던 오디세우스와 아이네아스의 여정과 비교하면 두 사람의 서사는 좀 더 선명해진다.
영화 내내 스티브는 자신의 친구인 롭을 시종 깔본다. '너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나는 OO상을 7번이나 받았고...'라며 과시하는 그의 모습은 유치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나 대단했으므로, 옵저버 매거진의 화보 촬영에서 각각 희극과 비극을 상징하는 가면을 나눠 쓸 때조차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너는 코미디로 유명세를 얻었으니 희극 가면이나 써. 나는 정극 배우로 유명하니 이것(비극:찡그린 가면)을 쓰는 것이 좋겠어."(기억나는대로 썼다. 양해해달라!)라고.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각각의 결말도 그대로 났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분명 함께 여행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이기를 갈망하던 스티브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이타카에 다다르지 못했고, 그러지 않았던 롭은 이타카에서 아내와 재회한다. 마치 오디세우스처럼 말이다.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권선징악적인 이야기 구조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두 사람은 각각 얄미운 점도 있고, 재치있고 근사한 점도 있다. 그러니까, 악역을 상정하기 어렵다는 소리다. 우리는 오히려 두 사람에게서 우리의 인생 그 자체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역설의 연속이다. 그것은 이리저리 뒤엉킨 실타래와 같아서,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혹은 시기에 따라 희극이 되기도 하고, 비극이 되기도 한다. 상을 당한 후 이혼한 아내와 떨떠름하게 재회한 스티브의 결말은 과연 비극적이기만 한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극중 그의 운명이 '고향을 잃고 방황하게 되는' 트로이의 장수 아이네아스의 그것과 닮았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우리는 오히려 그의 인생이 '아이네아스'의 이야기처럼 언젠가 다시 희극적인 지점을 맞이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해볼 수 있다. 이 아이네아스는 훗날 이탈리아 남부에 정착해 로마의 선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아름다운 그리스의 마을들과 해안 풍경은 더할 나위 없는 볼 거리이다.
무더운 여름, 집안에만 있지 말고 극장에 나아가 이 여행기를 한번 관람해 보는 것은 어떨까?
두 중년 영국 남자의 재치있는 수다를 듣다보면 어느새 당신의 영혼은 훌쩍 오디세우스의 배에 승선해 있을지도 모른다.
+) 이 영화를 단순히 유쾌한 미식 오디세이...라고 생각하고 관람한다면 실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는 것 많은 아저씨들의 수다쇼를 보고 온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각각의 서사보다는 전체적인 구조에 주목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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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감을 불어넣어 줄 아티스트 다큐
15년 만에 화해한 오아시스 축하 기념
뮤직 아티스트 다큐 9선
아티스트의 깊은 내면과 음악을 만들어내는 과정,
사생활까지 풀어낸 레전드 다큐들을 소개합니다.
싸우지마요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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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같은 8살 소녀의 이별 이야기<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영화 리뷰
일본의 고즈넉한 풍경 중에서도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이미지는 바로 시민들이 지나다니는 거리 사이에 놓인 기찻길 건널목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과 이와이 슈운지의 <러브 레터>를 비롯해 수많은 일본의 고요하고 따스한 영화들이 일본 고유의 이 풍경을 활용하곤 했다. 조금은 다르지만 기차역을 배경으로 한 <철도원>과 같은 영화들도 일본의 기찻길을 떠오르게 만들며 최근에는 <가족의 색깔>이나 한국영화 <윤희에게> 또한 일본 철도가 주는 소박하고 포근한 풍경에 꽤나 빚을 졌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또한 기차 건널목에서 시작하는 영화다. 여덟 살의 소녀 사야카(니쓰 지세)는 그곳을 지나가다 문득 반년 전의 기억을 생각한다. 반려견이었던 루와 함께 이곳을 걸었던 사야카.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년 전에 사야카는 작은 동물들을 분양하는 펫샵 앞에서도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강아지 루를 발견했다. 데려가는 사람이 없으면 가게 사장이 이 아이를 곧 내쫓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사야카는 부모님을 졸라 루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사야카는 학교에서는 친구 없이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지만, 루와 함께면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 전혀 외롭지 않다.
어느 날, 함께 동네를 걷던 도중 갑자기 루가 조그만 구멍 틈으로 넘어가고, 루를 따라 힘겹게 몸을 구기고 구멍을 통과한 사야카는 그곳에서 아무도 없이 푸른 들판이 펼쳐진 세상과 만난다. 그들은 매일 이곳에 놀러와 자신들만의 세계를 꾸린다. 소풍 온 듯 맛있는 걸 먹기도 하고, 달리기를 하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만끽한다. 어느 날, 킁킁거리며 땅을 파던 루를 따라 사야카 또한 들판의 아래쪽을 캐다 보니 단단한 기찻길을 발견하게 된다. 과연 이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나오키상을 수상한 소설가 이주인 시즈카의 소설이 원작이다. 반려동물과 소녀의 우정을 그리면서 삶과 죽음, 관계라는 것을 따뜻하게 탐구하는 영화로, 사야카 외에도 사야카의 할아버지, 그리고 카페를 운영하는 후세 아저씨(오이다 요시)의 역할을 더해 사야카가 점차 인생의 진실을 깨닫고 성장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루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야카는 주변의 사려깊은 조언과 판타지와 같은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악나다. 동물과 인간의 유대감을 그린 영화는 아주 많았지만,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일본 특유의 단촐하고 소박한 감성을 통해, 그리고 소녀의 시선을 통해 동물과 인간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인생의 진실을 포착한다.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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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치곤 심심하게 격려하는 '꿈은 이루어진다'
성덕될 뻔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할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아샤다. 씩씩한 아샤. 아샤는 로사스에 살고 있다. 로샤스는 마법의 왕국이다. 이 왕국의 왕은 매그니피토다. 매그니피토는 1년에 한 번씩 지역 주민들의 소원을 이뤄주는 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런 매그니피토를 마음속으로 깊게 존경하고 있는 아샤. 할아버지의 꿈을 이루고 ‘성덕’이 되기 위해 왕의 수습생이 되기 위한 면접을 신청한다. 두근두근 설레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면접 당일날이 됐다. 친구들의 응원을 받고 면접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샤의 꿈이 깨졌다. 매그니피토에게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는 아샤. 아샤는 매그니피토의 꿈을 제지하기 위해 또 다른 소망을 키우기 시작한다.
소원을 빌어
이 영화의 핵심은 꿈이다. 사실 꿈이라는 소재를 예고와 포스터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에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위시>는 꿈을 단순히 소재로만 쓰지 않았다. 플롯의 핵심으로 가져온 것이다. 대표적으로 문제의 발생과 해결방식에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 영화가 상정한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조명하고 싶었던 건 소원의 낭만적인 속성이다. ‘내가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났으면 좋겠어!’라고 바라는 것처럼 사람마다 갖고 있는 막연한 희망을 다룬 것이다. 이 영화의 인물들도 이런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다. 또 이 희망을 이뤄줄 누군가를 찾고 있다. 이 영화의 위기상황은 ‘이 희망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다룰 때 발생한다. 일의 마무리는 글쓴이가 위에 적었던 다른 꿈의 속성에 근거해서 끝난다.
플롯의 핵심이 아니더라도 꿈을 소재로 다룬 방식도 흥미롭다. 인물의 내면과 꿈의 관계를 연결시키고 있기도 하고 상징화된 무언가를 캐릭터로 등장시키기도 한다. 이 두 요소는 영화를 상큼 발랄하게 만드는 중요한 소재기도 하다. 우선 인물과 꿈의 관계도 영화가 생동감이 생기는 요소기도 한다. 인물들이 꿈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꿈에 대해서 어떤 리액션을 보여주고 있을까? 이 두 질문에서 읽을 수 있는 이 캐릭터들의 모습은 우리가 어렸을 때 봤던 디즈니의 동화책에서도 읽을 수 있는 모습이었다. 또 영화 캐릭터에 ‘별’과 ‘마법’이 등장하는 이유도 꿈이 핵심 소재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둘은 영화에서 특별히 힘을 줬다. 꿈의 속성만 강조하는 선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중요하게 강조한 것이다.
동화책을 읽듯
이 영화를 보다 보면 기획한 의도가 무엇인지 체감이 된다. 글쓴이는 디즈니가 우리가 알고 있는 디즈니 100년 역사를 이 <위시>를 통해 핵심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위시>의 핵심은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격려다. 사실 이 격려가 영화의 소재로 쉽게 전달할 수 있어서 설정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디즈니 만화의 주인공들이 이 전제조건을 아래에 두고 이야기를 끌고 간다. <인어공주>도 ‘인어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소망을 비는 것으로 시작한다. <피터팬>도, <백설공주>도, 심지어 <소울>와 <엘리멘탈>, <주토피아>도 꿈을 이루고 싶어 하는 캐릭터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디즈니 100년간의 필모그래피를 한 번에 요약할 수 있는 문장을 <위시>의 핵심으로 보여준 것이다.
또 이 영화는 전적으로 동화처럼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비판을 많이 받음과 동시에 기획의도를 잘 살렸다고 볼 수도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더 풀어쓰자면 이 영화 플롯의 연결고리들이 왠지 불안정하다. 인물이 다른 인물들과 상호작용하는 느낌이 없는 것이다. 알기 쉽게 설명해 보자면, 글쓴이가 지금 앉아있는 카페 사장님에게 A라는 메뉴를 시켰다고 하자. 그런데 사장님은 느닷없이 ‘A는 별로니까 그냥 B 드세요!’라며 새로운 음료를 가져온다. 이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일어날 확률이 적다. 사장님은 글쓴이와 소통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플롯은 앞 문장에서 적었던 예시 사례 같은 느낌이다. 어떤 캐릭터가 있으면 이 영화의 특정 사건이 일어날 일이 없다. 그런데 캐릭터 각자 자기 개성은 강해서 이질감이 든다. 또 주인공이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근거가 부족해 다른 캐릭터들이 수습하기 바쁜 형태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존재가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기 쉽다. 또 어떤 관점에서는 인물들이 상호 간의 작용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룰 하에 행동한다. 주인공 아샤의 친구들이 그 근거다. 이런 것들이 이 영화를 상투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요소다. 문제 해결까지 개성 있게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내 납작한 채로 뭉특한 것이다.
양가감정이 드네
글쓴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것과 아쉬운 것이 같다. 바로 별 캐릭터다. 이 영화에서 별은 사랑스러운 매력을 풍기며 중반부 이후를 이끈다. 별은 정말 귀엽다. 특히 '힝-' 하는 표정이 아주 인상 깊다. 이 영화가 윗 문단에서 썼듯 상투적인 느낌이 강한데, 이런 플롯에 별 캐릭터는 극에 생동감을 부여하며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인다. 사실 이 영화를 기대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 별 때문이라도 글쓴이는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쓴이는 주인공 아샤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이유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말이 있다. 글쓴이는 이 별의 존재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생각한다. 이 캐릭터가 할 수 있는 능력이 모호한데, 이 영화가 이를 악용하는 것이다. 이 별의 정체를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풀었다면 이야기에서 의문부호가 드는 지점이 확 줄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부분을 섬세하기 챙기지 못했다. 이러다 보니 이 캐릭터를 기획한 의도가 궁금해진다. 다른 캐릭터들은 디즈니의 기존 필모그래피를 연상케 하는 요소가 있지만 별에겐 부족하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별은 그냥 단순히 귀여우면서 일만 해결하라고 들어간 캐릭터인 걸까? 단순히 캐릭터가 귀여운 것이 영화의 많은 부분이 차지한다면 사실 그동안 봤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에 좀 못 미치는 것이 아닐까?
기억이 안 나요
이 영화의 장르 특성 중 하나는 뮤지컬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에 들어간 삽입곡이 별로 기억 안 난다. 최근작 <엘리멘탈>에서 Lauv가 불렀던 노래가 인기를 끌고, <겨울왕국>에서 ‘Let it go’가 전 세계적 인기를 끌었다는 것과는 영 정반대다. 그런데 영화에서 음악이 중요하게 들어간다. 플롯을 잇는 연결고리인 것이다. 이런 물리적인 분량과 디즈니의 필모그래피를 생각해 본다면 많이 아쉽다.
하지만 이 영화가 확실하게 성공하하고 있는 지점도 분명 있다. 바로 기존 디즈니 영화들을 오마주한 것이다. 영화 대사에서도 직접적으로 등장하고 몇 장면은 직접 비유하기도 한다. 또 이 영화 자체가 기본적으로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장면이 몇 있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디즈니의 팬들이라면 한 번쯤 관람을 고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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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노동운동가 전태일
- 태일이Chun Tae-il, 2020노동운동가 전태일. 그의 일대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영화의 초반부부터 눈물을 쏟고 말 것이다.앳된 얼굴의 태일은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학업을 포기한 채 어린 나이부터 재봉 일을 하고, 18세 때인 1966년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태일은 노동 시장의 참혹한 단면을 마주한다. 창문은 커녕 환풍기도, 제대로 된 조명도 없는 골방에서 섬유 먼지를 들이마시며 하루 14시간씩 노동을 하는 광경이 그곳에서는 당연했다. 좁은 공간에 다락을 만들어 다닥다닥 붙은 채로 일을 하는 열악한 상황이었으며, 노동자들은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특히 '시다'라고 불리던 보조원들은 13~17세의 어린 청소년들이었다. 태일은 시다들을 보며 어린 여동생을 떠올렸고, 배를 곯아가며 하루종일 일을 하는 이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차비를 아껴 풀빵을 사다 주거나 청소를 대신 해 주며 도움을 준다.그러던 중, 함께 일하던 재봉사가 결핵에 걸려 쓰러지게 되는데 공장에서는 해당 재봉사를 해고하고, 약값도 주지 않는다. 태일은 이에 부당함을 느끼고,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한자 사전을 찾아 가며 공부를 하게 된다. 평화시장의 근로장들은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곳들이 대부분이었고, 태일은 이를 조사하여 진정서를 여러 번 접수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여러 번의 노동 운동, 데모 등이 실패하자 태일은 스스로 분신을 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알리고자 한다.스물 두 살 청년이 사회에 던진 물음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많다. 50여 일이 넘도록 기본적인 권리만을 주장하며 단식 투쟁을 해도, 노동자를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부속품으로 생각하며 들은 체도 하지 않는 기업과, 하루가 다르게 과로사 소식이 들려오는 택배 노동자들, 마땅한 휴게실이 없어 화장실에서 휴식을 취하는 청소, 경비 노동자들...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부터 52년이 지난 2022년에도 근로기준법은 지켜지지 않는다. 근로기준법이 명시한 근로조건을 보장받지 못하고, 아파도 쉬지 못하며, 대체 인력이 없다는 이유로 마냥 기다리다 유산을 하고 만다. '일이 바빠서', '할당량을 채워야 해서' 초과 근무를 하지만, 초과 근무 수당은 받지 못한다. 1970년에 비해 노동 환경은 얼마나 더 나아졌는가.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기업은 과연 처벌을 받고 있는가. 법적 처벌이 너무도 미비해 소비자들의 사적 불매운동이 유일한 처벌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는가.여전히 노동조합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저런 것들은 다 빨갱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 속 태일이 말했던 것처럼 법에 명시된 노동 시간을 보장받고, 부속품이 아닌 인간으로써 존중받으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일할 수 있다면. 그런 세상이라면, 본디 노동조합이 결성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대학생 친구가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태일의 말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설움과 무지로부터 오는 부담감이 와닿는다. 오늘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태일보다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지켜지지 않는 것들이 많다. 법을 알면서도 범법에 투쟁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더 나은 근로 환경을 위해 싸워야 하고, 세상을 수없이 바꿔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희생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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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와 애정의 관계에 관하여
영상 언어에서 등장 인물들의 입을 통해 사용되는 언어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봉준호 감독이 1인치의 자막을 넘어 다양한 영화에 접근해달라고 영어권 관객에게 부탁했을 만큼 귀에 들리는 언어가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을 막강하다. 때문에 영미권 관객과 시청자들은 자막을 선호하는 한국 관객과는 달리 더빙을 선호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헐리웃 영화와 영국 영화가 상대적으로 흥행하기 쉬운 이유는 유명한 배우들이 등장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똑같이 자막을 보더라도 상대적으로 귀에 익은 영어권 영화가 선호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번역가 황석희는 최근 관객들은 영어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편이기 때문에 잘못 번역하기라도 하면 항의가 들어오기도 쉽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이렇듯 영화에 등장하는 언어는 관객의 모국어, 그리고 구사 가능한 언어와 불가분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홀연히 등장한 <페르시아어 수업>은 국가조차 생소한 페르시아어를 다룬다. 물론 실제 페르시아어는 영화의 끝에 가서야 등장하고, 주로 사용되는 언어는 독일어와 약간의 프랑스어 그리고 질(혹은 레자 준/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분)이 만들어낸 가짜 페르시아어다.
유대인을 말살하던 시절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을 한 질은 페르시아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코흐 대위(라르스 아이딩어 분) 덕분에 총살당하지 않고 살아남는다. 이 때까지 관객은 질이 거짓말을 한 것인지 실제 페르시아어 구사가 가능한 인물인지 알기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절대 다수의 관객이 페르시아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가 선택한(놀랍게도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지만) 언어인 페르시아어는 지구상 관객의 절대 다수를 상대로 너무나 손쉽게 심리 게임을 시작한다. 영화 초반이 질이 실제 페르시아인인가 아닌가로 관객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면 이후부터는 질이 만들어내는 가짜 페르시아어가 서스펜스를 담당한다. 스스로 페르시아인이라고 지칭하지만 영화 내에도 페르시아어 구사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코흐 대위는 질의 페르시아어가 진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길이 없다. 때문에 질로부터 페르시아어를 배우면서도 의심하고, 질이 페르시아인이 아닌 걸 아는 병사들은 이를 증명하려 하지만 이들도 페르시아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증명할 길이 없다. 영화의 중반부에서 서스펜스가 최고조에 달하는 장면은 질이 실수로 같은 단어를 다른 두 의미에 갖다붙였을 때다. 이미 사용한 '라지'라는 단어를 '나무'에 재사용한 질은 코흐 대위로부터 의심을 사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기지로 살아남는다.
희한한 것은 질이 만들어낸 가짜 페르시아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질과 가짜 페르시아어로 대화하는 코흐 대위에게서 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질의 거짓말을 거의 잡아냈을 때 코흐 대위의 분노는 사기당한 자의 배신감보다는 애정을 거절당한 배신감에 가깝게 보일 정도다. 병사들에게 자신의 식량조차 잘 나눠주지 않을 만큼 차갑고 무뚝뚝한 코흐 대위는 유독 질에게만큼은 애정을 보인다. 겉으로는 페르시아어를 배워야 한다고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질에 대한 편애는 같은 병사들조차 이상하게 볼 정도다. 질이 전출되지 않도록 해서 계속 곁에 남겨두거나 귀한 고기 통조림을 나눠주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알아서 도망치려는 질을 쫓아가 붙잡아 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질과 코흐 대위의 가짜 페르시아어 대화는 마치 사랑의 밀어처럼 들린다. 코흐 대위는 독일어로는 결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지만 가짜 페르시아어로는 가족사를 털어놓는다. 질은 결코 의도적으로 코흐 대위를 조종하려 하지 않지만 그도 모르는 사이에 질에게 코흐 대위는 사랑의 인질이 된 셈이다.
재미있는 점은 가짜 페르시아어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질이 창조한 언어이기 때문에 그 어떤 관객도 뉘앙스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한할 만큼 가짜 페르시아어에서는 질에 대한 코흐 대위의 애정이 드러난다. 가짜 페르시아어는 오로지 의미만이 전달되는데도 전세계 모든 관객이 동등하게 즐길 수 있는 사랑의 밀어가 된다. 더 재미있는 점은 극중에서 가짜 페르시아어가 가짜라는 걸 모르는 건 코흐 대위뿐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질과 함께 잡힌 유대인들도 질이 페르시아인이 아니라는 것을 대다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병사들조차 질이 페르시아인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어한다. 심지어 진짜 페르시아인은 이 과정에서 조용히 사라지기까지 한다. 흔히들 사랑에 빠지면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고 하는데 코흐 대위는 그야말로 눈과 귀가 멀어 가짜 페르시아어로만 진실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상태다. 영화의 메인 언어인 독일어의 권력을 가졌어야 할 코흐 대위는 가짜 페르시아어라는 언어 하나로 권력의 위치를 잃지만 그걸 모르는 건 본인뿐이다.
질이 가짜 페르시아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은 언어의 자연발생 과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최초에는 적당히 단어들을 만들어 내던 질은 한계를 느끼고 단어의 소스를 찾아 헤매다가 유대인의 명단을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의 이름으로부터 수많은 단어를 생성하기 시작한다. 이름은 영화에서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맥거핀으로 작용하는데 질은 극중에서 본명이 아닌 페르시아식 가명 레자 준으로 훨씬 많이 불린다. 코흐 대위가 이 서사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질의 본명을 알지 못하고 가명으로만 부르는 데서 기인한다. 사물의 이름이 다양한 서사에서 갖는 함의를 생각해볼 때 누군가의 본명을 안다는 것은 강력한 힘을 가지는데 코흐 대위는 질로부터 가명과 가짜 언어밖에 선사받지 못하고 스러진다. 반면 질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한다. 단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외우고 명단이 부족해지자 마주치는 유대인마다 이름을 물어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름들로부터 단어를 생성해내 코흐 대위에게 전달한다. 텅 빈것만 같은 가짜 언어는 유대인인 질에게 나치 대위인 코흐를 상대하는 무시무시한 무기로 변환된다.
이름과 애정의 관계에 대해 영화가 암시하며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자신을 도와준, 말 못하는 유대인과 옷을 바꿔입은 질은 코흐 대위에게 붙잡혀 온다. 코흐 대위는 왜 이름도 없는 사람이 되려고 했냐고 묻는데 질은 이 우문에 현답으로 대답한다.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으니 이름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질의 현답은 사실은 영화 전체를 꿰뚫는 날카로운 답변이다. 질이 살아남은 이유는 코흐 대위에게는 애정이 없는 가명을 알려주는 대신 그 자신은 진짜 이름들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나치 장교들은 역사를 지우기 위해 명단부터 태워버리지만 그 명단이 누군가의 머릿속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질이 언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기억한 이름들은 생존의 수단이자 그 자체로 역사의 증거로 기능하며 관객에게 짜릿함을 선사한다.
코흐 대위는 영화 내내 질(레자)를 향한 애정공세를 퍼부었지만 그를 결코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코흐 대위의 애정은 집착에 가까웠으며 시혜적이었기에 패배할 수밖에 없는 서사다. 반면 질은 자신이 먹기에도 모자란 음식을 나누고 그 보답으로 생존을 돌려받는다. 그리고 지옥과도 같은 애증의 서사가 마무리될 때 진정으로 살아남은 건 진실한 애정을 갖고 이름을 기억했던 질이었다. <페르시아어 수업>은 관객과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가지고 서스펜스를 주고받고, 등장인물들과는 애증관계를 가지고 서스펜스를 만들어 내며 이름과 언어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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