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0932023-08-16 12:05:55
좀비 영화의 시작 | 영화 부산행
다시보고싶은 영화
영화 부산행 아시나요?!
저는 부산행 영화를 좀비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좀비 영화로 이렇게 흥행이 가능하다고?
만들면서 이때부터 좀비와 관련된 소재가 많이 등장하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고 있어요
그럼, 영화 부산행 리뷰 시작해 볼게요
기본 정보
장르 : 공포, 스릴러, 액션, 어드벤처, 느와르, 재난, 드라마, 좀비, 서바이벌
감독 : 연상호
각본 : 박주석
출연진 : 공유, 정유미, 마동석, 최우식, 안소희, 김의성, 김수안
개봉일 : 2016년 07월 20일
평점 : 8.60
스트리밍 : NETFLIX, Wavve
기획 의도
전대미문의 재난이 대한민국을 덮친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전국으로 확신되고
대한민국 긴급 재난 경보 발령이 선포된 가운데,
열차에 몸을 실은 사람들은 단 하나의 안전한 도시 부산까지
살아가기 위한 치열한 사투를 벌이게 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 442km
지키고 싶은, 지켜야만 하는 사람들의 극한의 사투
여담
영화 부산행은 한국 최초의 좀비 블록버스트로
1,000만 관객을 넘어 국내외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부산행은 개봉 전부터 큰 화재성을 입증하듯
역대 최고 오프닝 기록을 세우며 한국 영화 중 흥행 수익이
원탑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이후 부산행 후속작이 나왔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큰 법으로
우리들 추억 속으로 영화 부산행만 생각을 하고 있다.
후기 및 결말
영화 부산행 결말을 살펴보자면
모든 도시가 좀비에 감염되면서 도시에서
유일한 희망은 부산
달리는 기차 안에 좀비로 인해 서서히 감염되면서
용석(김의성)에게 선동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게 된다.
결국 상화(마동석)또한 감염되며 수안(김수안)과 성경(정유미)
석우와 함께 기장이 말한 앞머리 기차에 간신히 탄다.
앞머리 기차에 숨어있던 좀비와 대치하며
공유의 희생으로 성경과 수안만 유일한 생존자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부산행은 아직도 회자가 되는 띵작 좀비 영화로
지금 나온 신선한 좀비와 싸워도 아쉬울 게 없을 정도로
참 잘 만든 작품이다.
무엇보다. 영화를 보면서 좀비도 좀비지만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것을 한 번도 알려주는
영화 부산행 이였습니다
한줄평 : 이 새끼 감염됐어!!!
Relative contents
-
- 당신이 특별해 보이는 이유
한국영화 <너의 결혼식>을 리메이크한 <여름날 우리>는 굳이 리메이크까지 되었어야 했나 싶을 만큼 많은 대만 청춘영화를 떠오르게 하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특히 기시감이 들 만큼 서사 구조까지 비슷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2012년 작품으로 거의 10년여 전에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여름날 우리>는 그 시절부터 성인지 감수성을 비롯해 참신함까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서사의 진부함이나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 등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자체가 진부한 글이 될 만큼 아시아의 청춘 영화들은 <꽃보다 남자>의 큰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이 글이 진부해지기를 바라지는 않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제쳐두고 수많은 영화들이 첫사랑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흔히들 첫사랑은 특별하다고 이야기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사랑을 쉽게 잊어버리기도 하고 종국에는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가장 오랫동안 기억한다(그게 첫사랑일 수도 있다). <여름날 우리>를 위시한 수많은 청춘 멜로 영화들은 왜 첫사랑이라는 클리셰에 이토록 매달리는지, 관객들은 왜 알고도 당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또 왜 미디어에 등장하는 수많은 첫사랑들은 초등학생도 대학생도 아닌 고등학생 시기에 등장하는가(간혹 중학생 시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여학생에 비해 신체적 성숙이 늦는 남학생들은 중학생 시기까지도 성인보다는 어린이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곤 한다. 흔히 말하는 "남자애들은 고등학생 때 쑥쑥 커"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여학생들은 일반적으로 중학교를 마무리할 무렵 성장을 거의 마무리하는 반면 남학생들은 고등학교 즈음이 되어야 성장이 마무리된다(군대에 가서도 몇센치 커온다는 괴담 아닌 괴담도 들어봤다). 따라서 중학생 시기의 연애를 묘사하기엔 여학생은 성인같은데 남학생은 어린이같은 구도가 그려지게 된다. 사회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신체 나이가 많고 신장도 큰 경우를 더 자주 묘사하기 때문에 중학생 시기는 미디어 입맛에 맞는 시기가 아니다. 대학생은 온전히 성인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사실은 미성숙한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풋사랑을 그리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고등학생 시기는 여학생이나 남학생 모두 성인같지만 자유가 온전히 주어지지 않은 시점이다. 학교에 다니고 가족에게 귀속된 삶을 살면서도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어쩌면 연애뿐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미디어는 고등학생을 풋사랑을 그리기에 최적의 시점(?)으로 간주하고 첫사랑을 배치한다. 또 한가지 이유로는 30대가 넘어가는 시기까지 서사를 진행할 게 아니라면 20대 안팎의 배우들에게 10대부터 20대까지를 쭉 연기시킬 수도 있다. 이래저래 고등학생이 마치 첫사랑의 적기인 것처럼 그려지지만 사실은 미디어의 편의와 농간(?)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 만난 첫사랑과 연애해서 결혼까지 골인하는 케이스는 극히 드문데다 대부분은 초반의 순수한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지 못한다. 연애와는 달리 결혼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결혼 준비하다가 헤어지는 커플이 그렇게 많다며?). 그럼에도 <여름날 우리>에 등장하는 저우 샤오치(허광한 분)와 요우 용츠(장약남 분)는 마치 순수한 사랑만을 한 것처럼 그려진다. 비록 이들의 사랑이 영원토록 유지되지는 않지만 영화만 봐서는 싸운 적도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웬만한 판타지 영화보다도 비현실적인 이들의 사랑에는 당연히 온갖 고난이 함께하게 되는데 그 고난은 대부분 현실에서 기인한다. 용츠의 가족사, 샤오치의 진학 등 샤오치와 용츠가 만나지 못할 이유는 수두룩빽빽한데 그 고난들을 다 뚫고 만나 연애하는 이 커플은 사실상 기적에 가깝다. 영화는 이것이 사랑의 힘이에요! 라고 주장하지만 종국에는 현실을 인정하는 결말을 보여주고, 모두가 말하듯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명제에 힘을 실어준다. 신기할 정도로 용츠에게 매달리는 샤오치는 마지막까지도 용츠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진정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샤오치는 용츠에게 그토록 매달리는가. 샤오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녕 용츠였을까. 그걸 샤오치가 일찍 알았다면 용츠와 백년해로했을까.샤오치와 용츠가 잘 만나다가도 헤어지는 시점은 바로 이 현실이 샤오치에게 내리꽂을 때다. 안됐지만 사랑으로 인해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의 유통기한은 길어야 2~3년 정도다. 고3시절 처음 용츠를 만난 샤오치가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만날 때까지 용츠를 잊지 못한 건 용츠에 대한 사랑도 있겠지만 사실상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소유욕에 가깝다. 전교생의 흠모 대상이었던 용츠를 놓고 샤크와 대결한 샤오치는 수영 대결에서 지지만 용츠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러고도 정식 연인 사이가 아닌 용츠의 변장용(?) 연인으로 활동하던 샤오치는 급작스럽게 용츠와 헤어진다. 기실 용츠를 위해 수영하고, 용츠를 다시 만나기 위해 공부하는 샤오치의 모습은 심리적으로 건강한 연애상이 아니다. <팜 스프링스>의 세라가 말했듯 나는 너 없이도 잘 살겠지만 너와 함께라면 이 세상이 덜 지루할 거라는 연애관이 가장 건강한 연애관이다. 샤오치는 끊임없이 용츠를 얻고 용츠를 기뻐하게 해주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모두 용츠의 요구조건에 맞춰준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샤오치 자신의 삶의 목표가 생겨버렸다는 점이다. 얼떨결에 수영 대표가 된 샤오치는 이제 수영 챔피언을 꿈꾼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용츠로 인해 꿈을 잃게 된 샤오치는 심리적인 갈등을 겪는다. 평생의 사랑이 자신의 꿈을 꺾은 존재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샤오치는 용츠를 사랑하는 동시에 원망하게 된다.
하지만 샤오치는 이제 용츠를 미워할 수 없을 지경까지 자신의 삶을 용츠에게 맞추어 왔다. 이제와서 용츠를 미워하면 그간 용츠에게 맞춰온 자신의 삶이 모두 부정당하게 된다. 결국 샤오치는 용츠를 선택하지만 문제는 그런 샤오치의 마음을 용츠가 알아버렸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수영 챔피언이라는 꿈이 끼어들기 전까지 샤오치의 삶에는 용츠밖에 없었지만 용츠의 삶에는 샤오치가 아닌 다른 것들이 많이 있었다는 점이다. 용츠에게는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아버지가 있었고, 그래서 돌봐야 할 가정이 있었고 공부를 잘했기에 목표가 있었다. 일시적으로 좌절되었던 꿈이 샤오치를 만나면서 다시 삶의 목표가 되었지만 동시에 용츠는 샤오치에게 구속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탈리아 유학을 갈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 때문에 꿈이 좌절당한 샤오치를 2년이나 홀로 방치해야 한다. 샤오치의 챔피언 좌절은 샤오치 자신에게도 큰 상처였지만 용츠에게도 평생의 굴레로 작동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은 샤오치와 용츠를 엮어주는 동시에 어긋나게 만드는데 이는 샤오치와 용츠가 삶에서 연인과 꿈을 중요시하는 정도가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샤오치와 용츠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건 용츠가 각자 살아야 할 삶이 있다는 것을, 둘이 함께하는 한 그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샤오치가 용츠가 일찍이 깨달았던 이 삶의 진리를 깨달을 때쯤 다시 용츠를 만난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만큼 각자의 삶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샤오치와 용츠는 조금 다른 연애를 했을지 모른다. 샤오치는 용츠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수영했을 것이고 용츠는 샤오치에게 빚진 마음으로 연애하는 대신 진정 샤오치를 위하는 마음으로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샤오치와 용츠에게 중요했던 건 서로를 만났던 시점이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를 깨닫는 시점이었다. 샤오치가 마침내 용츠 없이 삶을 살아내고 새로운 삶에서 보람을 느끼며 목표를 찾는 순간 샤오치는 용츠를 보내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 그 시점에 다시 이들이 만났더라면 정말 백년해로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 아름다운 것이라는 명제를 지키기 위해 영화는 관객이 원하는 결말을 주지 않는다.
<여름날 우리>는 말했다시피 진부한 이야기지만 연애에 대한 관점을 다시 돌아볼 만한 영화이기도 하다. 당신의 삶에는 당신의 연인 말고도 다양한 것들이 있으며, 각각은 삶을 다채롭게 해준다. 연인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이 로맨틱할지는 몰라도 능사는 아니다. 미디어는 마치 평생의 연인을 찾고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기저에 은근히 당신의 삶을 살 것을 응원하기도 한다. 샤오치와 용츠는 평생 서로를 잊지는 못하겠지만 각자의 삶을 살아낼 것이며 서로의 삶을 응원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우정은 그들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풍부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제로콜라는 살 안 찐다며
이 글은 영화 [야당]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재주가 없는 자의 영화 리뷰 쓰는 법은 제법 처절하다. 영화 속에서 가장 말하고 싶은 것들 중 제일 큰 골자를 추려내야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해를 돕기 위한 모티프도 찾아내야 한다. 거기까지만으로도 이미 힘에 부치고도 남는데 그 두 가지를 엮어서 글을 쓰다 보면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엉엉.
그렇다고 모티브나 레퍼런스가 쉽게 찾아지는 영화가 편한 것도 아니다. 바꿔 말하면 뻔하다는 뜻이니 그 단조로움을 뚫고 무언가를 써내려야 하는 고통(?)도 만만치만은 않다. 이번에 리뷰를 쓸 영화인 [야당]은 후자의 경우였다. 영화 [베테랑]이나 [내부자들]과 닮아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으려 애쓰고. 익숙하다라던가 아는 맛이라는 표현들을 빼고 쓰려니 아주 고역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그래서 이 비루한 실력의 영화 리뷰어는 이 작품에 제로 콜라의 개념을 차용하기로 했다. 영화 자체도 빼야 할 것은 빼면서도, 기대하고 있는 어느 정도 수준의 쾌감은 주었으니까.
우선 영화는 이런 류의 작품에서 가장 관객을 해롭게 하는 설탕 같은 존재인 현실적인 참혹함이나 처참함을 덜어냈다. 덕분에 사회고발 성격을 띤 작품들을 보면서 느낄 수 있었던 무거움과 찝찝함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영화는 훨씬 유쾌하며 가벼웠지만, 자칫 잘못하면 펄럭거리면서 바람에 도망 다니기 바쁠 수도 있었던 흐름을 적당한 속도감으로 못 박아 고정시켰다. 이 덕에 영화는 매끄럽고 부드럽게 눈에 읽혀 들어가고, 관객들은 가벼운 마음과 자세로 영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제로 콜라임을 인지하고 마시는 것처럼. 영화에서도 관객들이 애초에 어느 정도 감안한 채 접고 들어가는 부분도 존재한다. 몇몇 등장인물들은 소모성에 가까울 것이라는 사실과, 반전의 힌트가 언제나 코앞에 있다는 사실이다. 적정 수준의 통쾌함은 보장받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 예상 앞에서 마냥 쾌재를 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부터 제로콜라의 안전성 혹은 의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우리는 콜라의 대안으로 제로음료를 찾는다. PH2 정도 되는 산도(Acidity)를 숨기기 위해 때려 넣은 무지막지한 설탕에서 오는 모든 성인병을 비롯한 그 외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러나 과연 제로 음료가 완벽한 대체제, 혹은 건강한 음료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정답은 당연히 아니오 혹은 대답을 유보하는 것에 가깝다.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제로 음료가 장내 미생물의 질서에 혼란을 주는 것은 물론. 일부 설탕 대체제들의 경우는 설탕만큼은 아니라 해도 그다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속속들이 발표되고 있다. (참고 1)
그리고 근원적으로. 제아무리 제로 음료라 할지라도 단맛이라는 감각에 대한 중독까지는 뿌리 뽑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 또한 여기에 있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모티프들을 그러모아 만들어진 이런 영화가 관객들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과연 이에 기대 만들어진 앞으로의 후속 작품들이 과연 한국 영화 자체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잘은 모르겠다. 는 답변을 내뱉지 않을 수 없다.
한때 우후죽순처럼 깡패 영화가 만들어질 때가 있었다. 그 시대를 거치며 얻은 결론이라고는 자가복제에 지쳐 씁쓸해진 관객들의 입맛뿐이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아는 맛은 이렇게 무섭고, 제로 콜라도 길고 넓게 보면 비만에 동조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참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설탕 대체제들과 함께 포함되어 있는 요소들도 혈당을 올릴 수 있음. 몇십 캔을 먹어야 설탕이랑 비슷하다는 둥의 말하지 마라. 애초에 가장 위험한 것은 단맛에 대한 중독성 그 자체임.
[이 글의 TMI]
1. 하이퍼 나이프 리뷰도 써야 하는데...
2. 보물섬 리뷰도 써야 하는데...
3. 회사 가기도 귀찮은 휴먼이 과연 해 낼 수 있을까...
#야당 #황병국 #강하늘 #유해진 #박해진 #한국영화 #범죄영화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리뷰어 #영화해석 #결말해석 #영화감상평 #개봉영화 #영화보고글쓰기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메가박스 #영화꼰대
-
- 무너지는 믿음과 가치들 속에서
스포일러 주의!
<브루탈리스트>는 홀로코스트의 상흔을 안고 미국으로 상륙한 라즐로 토스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라즐로는 자신의 사촌인 아틸라와 만나 함께 건축 일을 하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리 밴 뷰런 부자의 계약 파기로 인해 곧장 사업이 망해버리고 이에 배신감을 느낀 아틸라는 라즐로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그렇게 외로이 노동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어느 날, 과거에 자신을 나무랐던 해리슨 리 밴 뷰런이 라즐로를 찾아온다. 라즐로가 만든 서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그의 잠재력을 알아본 해리슨은 라즐로에게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브루탈리즘 건축물을 하나 만들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건축물을 만들면서 벌어지는 우여곡절의 이야기를 담은 브래디 코베 감독의 드라마 영화다.
<브루탈리스트>의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이라고 한다면 상영 시간이다. 자그마치 3시간 35분. 관객의 허리와 엉덩이를 고통스럽게 하는, 오히려 돈을 받고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극악무도한 시간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과연 215분을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일까? 내 대답은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렇게 3시간이 넘어가는 영화는 최대한 간추리고 간추린 3시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쓸데없이 상영 시간이 긴 영화를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있어서 <브루탈리스트>는 최대한 상영 시간을 줄여보려는 투쟁이 엿보인다. 라즐로가 홀로코스트를 통해 겪은 일들이나 가족사 같은 부분은 자세하게 다뤄지지 않고 대사 몇 줄로 간단하게 치고 넘어간다. 라즐로가 자신과 갈라진 아내와 조카를 미국으로 데려오는 과정도 변호사가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대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이런 빠른 진행이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지만 이와 동시에 <브루탈리스트>의 단점이 여기서 기인하기도 한다.
<브루탈리스트>는 기본적으로 라즐로 토스라는 주인공을 제외한 대부분의 캐릭터들을 도구처럼 다룬다. 1947년에서 1980년까지의 방대한 시간 속을 살아가는 라즐로를 비추기에도 버겁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러 문제들이 속출한다. 해리슨이 라즐로를 강간하는 장면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잠깐의 충격 이후 당혹감이 앞선다. 이후에 해리슨이 자신의 악행이 밝혀지자 어딘가로 도피하는 행적 역시 쉽게 이해하기 힘들고 왜 라즐로로 시작한 2부가 해리슨으로 마침표를 찍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에필로그에서 조카 소피아가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목적지였다."고 말하는 대사는 목적지를 쫓아야만 했던 이민자와 관객을 위로하는 부분이지만 이전까지 제대로 다뤄지지 못한 캐릭터였기 때문에 감정적인 울림이 생각보다 크지가 않다. 오히려 캐릭터가 하는 말이 아니라 캐릭터의 입을 빌린 감독의 말이라는 인상이 더 크다. 고든이라는 흑인 캐릭터 역시 탐구할 지점이 많은데도 개인의 서사나 라즐로와의 관계가 깊이 있게 그려지지 않고 그저 라즐로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이용된다. 긴 러닝타임에도 채워내지 못한 이런 공백들은 <브루탈리스트>를 아쉬워지게 만든다.
그렇다면 <브루탈리스트>는 아쉬운 영화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러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브루탈리스트>는 상당히 뛰어난 수작이다. 가장 탁월한 부분은 오프닝이다.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수많은 인파를 뚫고 거꾸로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환호하는 라즐로. 캐릭터의 과거사와 이후에 펼쳐질 이야기에 대한 복선, 작품의 주제까지 한 번에 담아낸 명장면이다. 자유의 땅인 줄 알고 밟았으나 정작 뒤집혀 있는 자유의 여신상. 아니나 다를까 이 영화에서 라즐로의 믿음과 가치는 연이어 뒤집히고 비틀린다. 친구 이상의 존재처럼 보였던 아틸라는 자신의 사업이 망하자 라즐로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배신한다. 해리슨을 만나고 라즐로는 자신이 원하는 건축일을 시작하려 하지만 자본의 한계, 자신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사람들, 자신의 의견을 묵살하는 다른 건축가까지 가세하며 건축가로서도 위태로워진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은 영양실조를 겪어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고 틈만 나면 고통을 호소하며 비명을 내지른다. 상황이 이러니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지도 못해서 급기야 담배와 마약에 의존하고 만다. 심지어 이후에는 아예 해리슨에게 건축을 그만두라는 이야기를 들은 데 이어서 능욕까지 당한다. 라즐로는 러닝타임 내내 끝없이 무너진다.
이런 처지를 만든 <브루탈리스트>는 비틀리는 믿음과 가치가 자리한 땅에서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건설하고자 했던 한 인간을 비춘다. 브루탈리즘이 단순한 건축 양식 이상으로 사회의 억압과 차별에 대한 저항의식을 품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소재 선정부터가 다분히 의도적이다. 여기서 라즐로의 대척점에 있는 해리슨의 행적이 흥미롭다. 해리슨은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하는 탐욕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자신의 자본을 남용하고 라즐로에게 폭력을 저지르다가 이후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해당 악행이 밝혀지는 것으로 몰락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넘쳐나는 자본을 무분별하게 소비하고 베트남전에서의 전쟁범죄가 밝혀져 민심이 바닥을 기었던 5-60년대 미국을 보는 것 같다. 이런 면에서 보면 왜 해리슨이 저런 기행을 저질렀고 왜 도피하는 방식으로 행적이 마무리됐는지가 납득된다. 이런 점에서 <브루탈리스트>는 작중에서 미국으로 대표되는 억압과 차별에 맞서 우뚝 서고자 했던 브루탈리즘의 저항의식을 고스란히 부활시킨 영화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연이어 무너져 왔던 사람들에게 위로와 헌사를 보내기도 한다. 단순히 아메리칸드림의 현실을 마주한 이민자 개인의 이야기로 끝날 수도 있었으나, 시대를 뛰어넘어 현재에까지 무사히 안착한 보편적이면서 탁월한 드라마다.
<브루탈리스트>는 3시간 35분을 기꺼이 투자하여 볼만한 훌륭한 작품이다. 비록 충분히 다뤄지지 못한 캐릭터들과 다급하게 마침표를 찍으려는 결말부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지만 이 영화가 긴 시간에 걸쳐 기어이 내뱉으려는 진심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다. 혹시 자신이 무너진 것 같다거나, 목적지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고 느낀다면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위로와 뭉클함을 이 영화를 통해서 전해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별점: ★★★★
-
- <티처스 라운지> | 학교에 비친 사회를 보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도난 사건이 빈번한 학교에 부임한 신임 교사 ‘카를라’(레오니 베네쉬). 그녀는 이민자 출신 학생이 범인으로 몰리자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교무실에서 예상치 못한 일에 휘말린다. 노트북 카메라를 켜 둔 채 지갑을 옷에 두고 수업에 들어갔다 온 사이, 돈을 가져간 사람의 블라우스가 카메라에 찍힌 것.
카를라는 범인을 찾으러 나서고, 이내 용의자를 발견한다. 학교 직원 '쿤'(에바 로에보)'이 문제의 블라우스를 입은 것. 이에 학교는 쿤의 출근을 금지하고, 쿤의 아들이자 카를라의 학생인 '오스카'(레오나르드 슈테트니쉬)는 카를라에게 적개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 이후, 카를라는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큰 시련을 마주한다.
학교와 교사를 빌려 사회를 이야기하다
<티처스 라운지>는 '독일영화상'에서 최고의 영화상, 감독상, 시나리오상, 여우주연상 등 5관왕을 달성한 영화다. 화려한 수상경력과 교무실이라는 의미의 제목을 조합하면 이 작품의 소재를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교권이다.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갈등을 통해 교권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도 그렇다. 카를라는 어떻게든 교내 도난 사건을 해결하려 든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불똥이 튄다. 편견과 선입견, 오해가 겹치면서 학부모는 교사를 비난한다. 학교와 교사는 권위를 내세워 비난을 막으려 한다. 학생들도 교내 언론 같은 스피커를 활용해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게 학교는, 특히 교무실 안은 아수라장이 된다. 마치 최근 한국의 교실을 들여다보는 듯한 광경이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이 광경은 최근에 개봉한 영화 한 편을 연상시킨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괴물>이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두 작품은 우연히도 비슷한 사회적 갈등을 다룬다. 교내에서 발생한 사건을 두고 학생, 학부모, 교사의 관점이 엇갈리는 파국을 다룬다. 단순히 교권의 추락만 지적하는 게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질적인 원인, 사회 전체의 책임을 지적하는 점도 공통점이다.
단,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장르의 차이다. 괴물이 비극 섞인 판타지를 지향한다면, 티처스 라운지는 강렬한 스릴러로 나아간다. 이 차이는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두 작품의 끝도 상이하게 만든다. 그 덕분에 <티처스 라운지>는 <괴물>과 공유한 여러 공통점에서 불구하고, 차별화된 톤과 메시지로 관객을 휘어잡는다.
<괴물>을 닮았다
<티처스 라운지>와 <괴물>의 가장 큰 공통점은 교권 이슈를 불쏘시개로 쓴다는 점이다. 두 작품은 교권 이슈를 활용해 더 시급한 문제를 지적한다. 소통의 단절이다. 방식은 다르다. <괴물>은 관객을 현혹하는 방식을 택했다. 학부모, 교사의 시점에서 사건의 편린만 먼저 보여준 후에 학생의 관점에서 진상을 보여줬다. 학부모나 교사에게 동조한 관객 스스로가 편견과 선입견에 빠져 있었음을 자각하도록 만들면서 문제점을 체감시켰다.
반면에 <티처스 라운지>는 소통이 단절된 상황 속에 관객을 던져 놓는다. 핵심은 모두들 눈을 가린 채로 코끼리를 만지기 바쁘다는 것. 모든 주인공은 각자의 사실만 믿는다. 카를라는 블라우스의 문양에만 꽂혀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카를라의 인터뷰 중 입맛에 맞는 대목만 기사화한다. 학부모들은 카를라의 변명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갈등의 시발점인 카를라가 뒤늦게 진실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나 여의치 않다.
결국 <티처스 라운지>는 철저히 학교 내의 이야기만 다루는 것 같지만, 실상은 사회 전체를 다룬다.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관용의 부재, 그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견과 선입견의 존재. 이들이 교권 자체의 하락보다도 더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말에 정확히 부합하는 작품인 셈이다.
<괴물>과는 다른 학교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티처스 라운지>와 <괴물>의 공통점은 생각보다 눈에 잘 안 띈다. 포장 방법이 퍽 다르기 때문.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학교를 활용하는 방법에서 비롯된다. <괴물>에서 학교는 여러 배경 중 하나에 불과했다. 또 문제가 발생한 공간일 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을 어루만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일례로 미나토는 교장 선생에게 트롬본을 배우면서 위안을 찾았다.
<티처스 라운지>는 정반대다. 철저히 학교 안에서의 상황만 다룬다. 학교 내부를 보여주는 방식도 억압적이다. 1.31:1의 좁은 화면 비율을 활용해 학교를 꽤 폐쇄적인 공간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살렸다. 이에 더해 학부모, 교사, 학생의 시점을 교차한 <괴물>과 달리 <티처스 라운지>는 카를라에게만 집중한다. 그녀는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의 중심에 있고, 관객은 그녀의 시점에서 모든 사건을 본다.
그 덕분에 <티처스 라운지>는 스릴러 영화의 재미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다. 학생들은 서로 주먹을 휘두르고, 교사에게 욕을 한다. 교사들은 해결법을 두고 서로에게 고함을 질러댄다. 간담회에 참석한 부모들은 법적조치를 들먹이며 교사를 비난한다. 오해와 편견이 쌓이는 서스펜스, 갈등이 일제히 분출되는 폭발력은 좁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한층 강렬해진다. 여기에 신경을 자극하는 음악까지 더해지면 교내 갈등은 한 층 첨예해진다.
다른 학교, 다른 결론
스릴러의 미덕에 충실한 결과 <티처스 라운지>의 결론 역시 <괴물>에 비해 더 날카롭다. 사회적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비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 예를 들어 영화는 정체성 정치의 부작용을 자연스럽게 지적한다. 폴란드 출신이라는 카를라의 개인적 배경을 꼬투리잡거나, 교사들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가는 교내 언론의 행태는 단순히 학교 내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학교의 도난 사건 대응 역시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다. 학교를 일종의 감옥으로 묘사하면서 학교의 역할에 대해 다시 질문하기 때문. 학교는 학칙을 어겼다고 의심되는 학생을 처벌하고, 통제하고, 다른 피의자를 찾아내기 위해 학생들이 서로를 감시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교정, 감시, 처벌은 감옥의 생리와 다를 게 없다. 학교의 존재의의와 목적에 대해 다시금 고찰하게 만드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티처스 라운지>가 <괴물>과 전혀 다른 결로 마무리되는 이유다. 두 작품은 모두 '교권의 위기' 혹은 '소통과 관용의 부재'처럼 같은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괴물>은 그 끝을 비극적인 판타지로 마무리했다.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하기를 바라는 한 줌의 기대와 희망을 품어 관객에게 날려 보냈다. 반면에 <티처스 라운지>는 더 직접적이고 명확한 대안을 제시한다. 전자가 시라면, 후자는 에세이에 가깝다.
큐브에 새겨진 결론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티처스 라운지>의 결론은 카를라가 오스카에게 건넨 큐브에 담겨 있다. 학교는 오스카에게 강제 전학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그는 학교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한 채 교실에 계속 남아 있는다. 동료 교사들이 경찰을 부를지 고민하는 사이 카를라는 오스카 옆 책상에 앉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담임교사로서 그의 옆을 지킨다.
그러자 오스카는 카를라가 건넸던 큐브를 조용히 맞추기 시작한다. 오스카와 갈등을 빚기 시작할 때 그녀는 큐브를 건넸다. 알고리즘에 맞춰 순서대로 풀어내야 하는 큐브처럼 다른 문제들도 원칙을 따를 때만 풀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그들 사이에 숱한 오해와 편견이 쌓인다 해도, 차분하게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나란히 앉은 카를라와 오스카의 모습에서 그들이 99분 간 이어진 갈등의 탈출구를 마침내 찾은 듯 보이는 이유다.
물론 카를라는 이상적인 교사가 아니다. 학칙을 어겼고, 섣부른 추측으로 일을 키웠다. 하지만 그녀는 실수를 인정했고, 마지막까지 교사로서의 원칙을 지켰으며, 의무를 다했다. <티처스 라운지>를 단순한 스릴러 영화로 취급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추측과 선동이 난무하고 신뢰를 찾기 힘든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학교가 이렇게 폭발적인 공간이었나
-
- 세상 참 좁다, 그치?
이 글은 넷플릭스 [악연]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서울 경제
물론 원작을 감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넷플릭스로 무대를 옮긴 작품 [악연]의 레퍼런스가 정확히 어디서 왔는지는 단박에 추측이 가능하다. 바로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과 [PM11:14].
6부작이긴 하지만 한 사건을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입장을 듣다 보면 그다지 지루하지도, 답답하지도 않게 다음 편으로 가는 문턱을 넘어갈 수 있다. 매 편마다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리즈의 중앙에 턱 하고 자리 잡아서 '풀어낼 방법이 있기나 할까?'라는 생각마저 품게 하는 비밀의 매듭은 여전히 풀어질 생각조차 없다. 그 덕분에 시리즈의 말미로 갈 때까지도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긴장감을 놓지 않게 해주는 장점이 되어, 힐끔힐끔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월급 루팡이 될 수 있게 해 준다(?)
한 번에 동시간대, 혹은 동 시점의 이야기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메인 사건과 인물들이 너무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지만. 이 작품이 묘사하는 악연이 한 번에 사고처럼 쾅하고 생긴 것이 아닌, 아주 조금씩 삐걱이며 잘못되다 보니 이지경이 되었다. 의 표본이기에, 실 한가닥에서 다른 실 가닥으로 넘어가며 꼬인 부분을 들여다보는 충격도 찬찬히 들여다본 시간만큼이나 매우 커진다.
사진출처:KBS스타 연예
매듭을 꼬아놓은 솜씨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의 작품들에서 이 끊으래야 끊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악연의 계기에 덩그러니 돈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도 친숙하면서도 한 번쯤은 뒤통수를 맞아봤을 법한 학연, 지연, 혈연을 섞어 사건을 헝클어댄다.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유일하게 기댈 곳이면서 천연덕스럽게 배신하기도 가장 쉬운 관계 안에서 사건이 진행되는 덕에, 이 골치 아픈 매듭은 그 세계 안에서 고여버릴 대로 고이게 되고. 금세 쿰쿰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기 시작한다.
분명히 그 시궁창에서 나오거나 끝낼 기회가 존재했던 인물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물들은 그 세계가 풍기는 들큼한 썩은 내에 취해 그곳에 머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그들의 악연은 더 확실하게 얽히기 시작하고.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참고 1)이 되어 모든 악연의 실이 된 인물들에게 턱 하니 다가온다.
사진 출처:엘르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생각 나서였을까. 등장인물들의 최후가 마음에 들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알렉산더 대왕의 칼질 한 번에 난제에서 해답이 있는 문제로 탈바꿈했다. 엉킴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해도 위화감이 없을 거의 모든 인물들은 달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신들이 원하는 쾌락이나 선물의 기쁨을 누리지도 못한 채 최후를 맞이했다. 이 문제의 끝을 보기 위해 잘려나간 실타래에 불과한 인물들을 보며. 이토록 덤덤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최후는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말로 문제가 끝났는가?라는 물음에는 여전히 답을 내릴 수 없다는 생각이 크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극을 통틀어 남은 사람인 주연(신민아)과 정민(김남길) 때문이다.
처음 정민을 보았을 때는 이 극의 입장에서는 소모품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앞서 언급한 두 레퍼런스와 이 작품의 유사성을 눈치채자마자. 그의 "쓸모"가 훤히 보였고 아니나 다를까 그 예상의 끝에서 정민은 메스질을 하고 있었으니까.
사진출처:구글
그러나 주연의 옆에 그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주연은 유일하게 다른 인물들이 나오기 싫어했던 그 진흙탕 같은 세상 속에서 악착같이 기어 나와, 극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평온에 가장 다가간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모든 것을 몰아내듯 마지막 한숨을 뱉어내는 그녀의 발꿈치의 한 자락에 정민이라는 실 한 가닥이 걸려 있는 것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그러나 그녀 또한 다른 인물들과 다르지 않은 실수를 했기 때문에 여전히 그 악연에 매여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낱낱이 밝혀지는 진실로 인해 속절없이 잘리는 인물들 속에서. 주연은 오롯이 그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거부했다. 유일하게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 악연에 얽힌 그녀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악연을 다시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찼다. 또다시 이 매듭을 풀려면 그녀는 과연 얼마나 더 긴 자신의 인생을 바쳐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렉산더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칼로 잘라내며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 방식은 결국 그의 왕국이 조각조각나는 운명을 피하지 못하게 했다. [악연] 속 주연의 선택 역시 그와 닮아 있다. 그녀는 악연의 고리를 끊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 또 다른 실타래를 엮어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그녀가 선택한 길은 완전한 해방이 아닌, 새로운 얽힘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타인의 잘못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내딛은 발걸음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더욱 무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연이 맞이한 겨울이 더 이상 길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가 걸어온 길은 비록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 진흙탕 속에서 끝내 평온에 가까워지려 했던 노력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이야기가 악연의 매듭을 완전히 풀어내지는 못했을지라도, 적어도 그 매듭을 직면하고자 했던 그녀의 용기가 작은 희망의 실마리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참고 1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왕이 될 거임!이라고 했는데 알렉산더 대왕이 오 내가 할 거임. 하더니 얍 하고 칼을 휘둘러 매듭을 잘라버렸음. 그리고 정말로 제국을 호령했음.
[이 글의 TMI]
1. 탄핵 축하기념모임으로 비건 피자집에서 메뉴 다 박살냄.
2. 넷플릭스 공무원 박해수 최고.
3. 이번주엔 주 6일 운동하기!!
#악연 #넷플릭스 #이일형 #박해수 #신민아 #이희준 #웹툰원작영화 #범죄스릴러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리뷰어 #영화해석 #결말해석 #영화감상평 #개봉영화 #영화보고글쓰기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메가박스 #영화꼰대
-
- <파이트 클럽> - ‘세계의 끝에서 끈덕지게 주먹을 뻗다’
파이트 클럽 (Fight Club)
개봉일 : 1999.11.13 (한국 기준)
감독 : 데이빗 핀처
출연 : 브래드 피트, 에드워드 노튼, 헬레나 본햄 카터, 미트 로프, 자레드 레토
‘세계의 끝에서 끈덕지게 주먹을 뻗다’
1999년, 새로운 숫자 2로 시작되는 2000년이 도래하기 직전, 세기말에 발표된 영화 <파이트 클럽>. ‘반항’과 ‘주먹’이 하나의 멋으로 통하던 그 시절의 감성이 그대로 담겨 있는 이 영화엔 세기말 감성과 그 시절의 멋, 그리고 새롭게 시작되는 천년에 대한 기대와 그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여 있다. 실제로 2000년을 앞둔 시기에 ‘2000년이 오면 지구가 멸망할 거다’라는 식의 괴담이 떠돌았다고도 하니.. 새로 다가올 시대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새로운 세기가 도래하고 산업은 점점 빠르고 거대하게 발전한다. 우후죽순 생겨난 공장들은 정해진 틀에 찍어낸 물건들을 빠른 속도로 사람들에게 공급했고, 그것은 새로운 문화가 되어 우리의 생활을 바꿔놓았다. <파이트 클럽>은 이런 획일화된 사회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한 남자가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끈덕지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영화다.
공장에서 찍어져 나오는 물건들과 똑같은 구조로 지어지는 아파트. 그리고 비슷하게 생긴 빌딩 숲 안에서 똑같은 컴퓨터를 바라보며 주어진 일을 해내는 하루.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에 딱 어울리는 하루다. 자동차 리잭 심사관으로 일하고 있는 주인공 ‘잭’은 나름 괜찮은 수준의 월급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그는 열심히 모은 월급으로 번듯한 아파트를 샀고, 고급 가구들을 사 모으며 자신의 집을 채워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잭은 언제부턴가 이유 모를 답답함을 느낀다. 특별할 것 없는, 부드럽다 못해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하루의 끝엔 아무것도 없었다.
인생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던 잭의 앞에 갑작스러운 사고와 함께 야생동물 같은 매력을 가진 ‘테일러 더든’이 나타난다. 누군가와 싸우기보단 피하기를 선택하던 잭과는 상극인 마음가짐을 가진 남자. 피하기보단 주먹 한 번을 휘둘러봐야 나를 알게 된다고 말하는 남자. 잭은 테일러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주먹다짐을 하며 엄청난 해방감을 느낀다. 사회에선 금기 또는 피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행동을 통해 느끼는 쾌감. 그것은 한 남자의 일상을 확실하게 뒤엎어버린다.
정해진 사회 규칙에 반항하고 싶은 날. 그런 날을 한 번쯤은 겪어보지 않았는가. 큰 건 아니더라도 에스컬레이터 거꾸로 오르기라든가.. 정해진 출근시간이 아닌 더 여유로운 시간에 유유히 출근하기라든가! 가끔 세상에 반항하고 싶어질 때, 중2병을 겪던 그때처럼 욕망을 주체할 수 없을 때 <파이트 클럽>을 추천한다. 리즈시절의 빵오빠 비주얼을 감상하며 괜히 나도 그처럼 쿨하고 야성적인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보는 것도 나름 좋은 감상법이 될지도 모른다.
파이트 클럽 시놉시스
비싼 가구들로 집 안을 채우지만 삶에 강한 공허함을 느끼는 자동차 리잭 심사관 ‘잭’.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거친 남자 ‘테일러 더든’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싸워봐야 네 자신을 알게 된다”라는 테일러 더든의 말에 통쾌한 한 방을 날리는 잭. 두 사람은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파이트 클럽’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고, 폭력으로 세상에 저항하는 거대한 집단이 형성된다. 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커진 ‘파이트 클럽’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미가 변질되고, 잭과 테일러 더든 사이의 갈등도 점차 깊어져 가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모두 복사본의 복사본의 복사본 같다.”
똑같은 외관과 구조로 지어진 아파트. 똑같이 생긴 티비속에서 흘러나오는 똑같이 생긴 보급형 가구에 대한 광고. 잭은 가구 광고를 보고 있는 자신을 “이케아 제품으로 보금자리를 꾸미는 노예 대열에 합류했다.”고 표현한다. 똑같이 굴러가는 사회 속에서 자연스레 정해진 표준에 맞추기 위해 일을 하고, 집을 사고 집을 꾸민다. 하지만 잭은 공허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공허함 뒤에는 괴로운 불면증과 무기력함이 뒤따른다.
잭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병으로 인해 진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의 위로 모임에 참석한다. 잘빠진 가구가 아닌 커다란 사람의 품에 안겨 눈물을 토해내는 건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위로에 중독된 잭은 여러 모임을 전전했고, 그곳에서 또 다른 거짓말쟁이 말라 싱어를 만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고, 죽지 않는 것이 비극이라 외치며 도로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이상한 여자. 만약 그녀를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대에 만났다면 위로 모임을 나누는 사이가 아닌 아름다운 연인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하고 잠시 생각해보지만, 눈앞에 서 있는 까만 머리의 여자를 다시 보니 그건 절대 아닌 것 같다. 말라 싱어는 강하게 잭의 시선을 잡아끌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말라 싱어보다 더 흥미로운 존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잭이 테일러 더든을 만난 건 높은 하늘 위였다.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잭의 옆인 비상구 좌석에 앉아 안전카드를 읽고 있는 남자는 비상구 좌석 승객이 맡게 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며 표정을 구긴다. 뒤이어 테일러는 남들은 모두 따르겠다고 말하는 안전 수칙이 알고 보면 위험을 순응하게 만드는 규칙이라며 이상하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순응하는 것들을 다시 들춰내 의심하는 사람이라니. 잭은 그런 테일러를 매우 흥미롭게 바라본다. 비행기에서 잠시 만나는 일회용 친구치고는 꽤나 흥미로운 남자였다.
“소유물에 지배당하지 말라”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한 잭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소중한 그의 아파트가 불에 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망연자실한 상태로 홀린 듯 테일러에게 전화를 건다. 테일러는 흔쾌히 잭과 술 한 잔을 하고,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내도 된다고 말한다. 그 후 잭은 테일러를 따라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일탈을 하나씩 경험해나간다. 사회적 규범, 정상적인 범주, 남들과 같은 삶을 의미하는 잭의 아파트가 불에 타던 날, 잭은 테일러와 함께 틀을 벗어나게 된다.
테일러는 이렇게 말한다. 아파트와 고급 가구들은 소유물이고, 소유물은 사람을 지배한다고. 그는 있는 그대로 흘러가는 영사기 속 릴 테이프를 가만두지 못했고, 정해진 코스대로 흘러가는 고급 호텔의 음식에 테러를 저지른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다수에 의해 기본이라 정해진 것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따르지 않는 인물이다.
“싸우고 나선 모든 것의 소리가 작아지고, 모든걸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쾌감이 사람의 원초적 본능이란 것, 무의식중에 남들과 다른 것을 원한다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파이트 클럽’은 싸우면서 쾌감을 느끼고, 사회에서 규제한 금기를 어기며 색다른 클럽활동으로 추앙받는다. 잭과 테일러는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안정적인 것이 아닌 쾌감과 특별함이란 사실을 모아 ‘파이트 클럽’이라는 이름을 만들게 된다.파이트 클럽의 위치는 식당 밑 지하. 활동 시간은 손님들이 모두 나간 후 늦은 시간이다. 다른 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난 후, 땅밑에서 뒤늦게 열리는 파이트 클럽은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자 나의 밑바닥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테일러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잭의 손에 흉터를 남기며 “모든 걸 잃었을 때만 모든 걸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잭은 테일러가 남긴 상처를 통해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게 된다.
잭은 지원자들을 받아 군대를 양성하고 대혼돈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테일러와 잭이 동일 인물이란 것이 밝혀지기 전엔 ‘(상상 속)테일러의 군대’라고 표현되지만, 애초에 잭(진짜 테일러)이 소집한 군대다.) 잭은 지원자들에게 여러 가지의 테러 계획을 하달하며 도시를 휘저어 놓다가 고환암 환자 모임에서 만난 짝꿍 밥을 잃고 충격을 받는다. 큰 덩치로 잭을 폭 감싸 안아주던 눈물 동지의 죽음은 테일러를 만나기 전에 존재했던 본성을 불러온다. 잭은 뒤늦게 경찰서에 계획을 자수하러 가지만, 대혼돈 프로젝트 팀원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자신이 테일러 더든이라는 혼란함만 안은 채 경찰서를 빠져나온다.
“우린 같은 사람이니까.”
잭과 테일러는 같은 사람이다. 테일러는 삶을 바꾸고 싶어 하던 잭이 찾아낸 탈출구였고,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된 순간 영화의 릴이 교체되듯 한순간에 대혼돈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바뀌어버린다. 집에 불을 지른 것도, 말라와 사랑을 나눈 것도, 군대를 소집한 것도, 파이트 클럽을 만든 것도 모두 잭, 진짜 테일러 더든이었다. 영화 초반엔 잭이 테일러와 처음으로 주먹질을 하며 아드레날린을 느낀 것으로 표현되지만, 그것 또한 잭이 홀로 벌인 싸움이었다. 잭이 지부장의 사무실에 들어가 지부장에게 폭력을 당한 것처럼 혼자 싸움을 연출해내던 장면은 이 반전을 위한 복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난 눈뜨고 있어.”
잭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테일러의 모습이 환영이란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진짜 테일러는 자신이라는 것도. 잭은 테일러의 존재를 없애기 위해 자신에게 총을 발사한다. 건물은 계획대로 폭파되고, 잭은 말라와 손을 잡는다. 잭은 자신이 누군지, 어떠한 욕망으로 가상의 테일러 더든을 만들어냈는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깨닫게 된다.
정해진 사회규범 속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진짜 테일러 더든(잭)은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거친 테일러 더든을 만들고,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파이트 클럽을 만든다. 가상의 테일러 더든이 존재하고 ‘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그는 처음엔 테일러를 무조건적으로 따르며 그의 말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파이트 클럽 회원들 사이에서 ‘테일러 더든’이라는 이름이 전설처럼 떠돌기 시작하자 “나도 파이트 클럽의 창시자인데..”라며 자신도 절반쯤의 공이 있음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것은 더 이상 잭(진짜 테일러)이 가상의 테일러 더든에 기대는 것이 아닌 본체 자체의 삶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 커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잭은 대혼돈 프로젝트의 계획을 말해주지 않는 테일러에게 섭섭함을 나타내고, 이내 테일러가 집에서 사라진다. 더 이상 가상의 테일러 더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잭의 욕망이 커졌기 때문이다.
잭, 아니 진짜 테일러 더든은 자신이 가진 자아 중 한 가지인 ‘평범한 회사원 테일러 더든’의 모습으로 살아가다가 현실의 권태가 정점을 찍은 순간 숨겨놔야만 했던 자아 ‘파이트 클럽의 창시자가 될 테일러 더든’을 불러온다. 왜 이런 모습을 숨겨야 했냐고 묻는다면, 현 사회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고급스러운 물건을 사며 행복을 느껴야 하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다수가 정한 평범함에 물들어야만 했던 남자의 공허함이 끌어낸 또 다른 자아는 자신의 고통을 명확하게 비추는 거울이 된다. 건물이 무너지고 도시에 잠깐의 혼란이 찾아온다 해서 견고하게 조직된 사회가 흔들릴 거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라도 완전한 해방감을 누릴 수 있었다면 테일러의 ‘대혼돈 프로젝트’는 성공한 것이라 봐도 되겠다.
-
-
- 정말 잘만든 수작인데 빛을 보지못한 숨겨진 비운의 명작
안녕하세요 빛을보지못한 숨겨진 명작을 찾아서....첫번째 2007년작 영화:스카우트 입니다.
-
-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1차 예고편 - 고백 편
“시작은 막차였다”
집으로 가는 막차를 놓친 스물한 살 대학생 ’무기’와 ‘키누’는
첫차를 기다리며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좋아하는 책부터 영화, 신고 있는 신발까지 모든 게 꼭 닮은 두 사람은
수줍은 고백과 함께 연애를 시작하고 매일매일 행복한 시간을 쌓아간다.
“내 인생의 목표는 너와의 현상 유지야!”
하지만 대학 졸업과 함께 취업 준비에 나선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소원해지고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 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지기 시작하는데...
-
- 영화 <앤트맨과 와스프 : 퀀텀매니아> 티저 예고편
2023년 2월, 새로운 스케일의 양자 영역을 맞이하라!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티저 예고편 최초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