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브2021-05-11 11:14:52
범죄자에게 서사는 필요없다. [넷플릭스] 더 서펀트
[The Serpent] [영국 드라마 _ 실화 기반]
1970년대 동양으로 여행을 온 서양인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강도와 살인을 서슴없이 저질렀던 찰스 소브라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드.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청소년 관람불가 임에도 피해자의 가족들을 고려해서인지 지나치게 자극적인 장면은 거의 없다. 실화의 무게를 실어주기 위해서 살인과 강도를 일삼는 주인공을 미화하거나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런 특징들이 개인적으론 더 서펀트의 몰입도를 높였다.
사람을 도구로 생각하는 주인공 찰스 소브라즈는 심리조종에도 탁월한데, 외로움이나 일탈 혹은 사랑하는 마음까지도 도구로 이용해서 상대방을 무너뜨린다.
그는 자신 만으로는 사람들을 유혹하기 부족하다는 생각에 캐나다 퀘백 출신의 아름다운 여성을 자신의 범죄에 끌어들이고 조종한다. 작품을 보는 내내 여배우의 미모에, 실제로도 저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다면 여행자의 마음의 경계를 허물고, 유혹할 수 있었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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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모네이드의 씁쓸한 맛은 왜 그녀의 몫이 되었나.
여러 시선이 모여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면 우리는 어느 곳을 봐야 할까. 당연하게도 여러 시선이 모인 한 방향을 봐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소한 진실로 인해 발버둥 치듯 현실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레모네이드를 소개하려고 한다. 영화의 끝맛이 쓸지 달지는 보는 관점에 달렸다. 루마니아에서 온 마라는 미국인과 결혼하여 아메리칸드림을 꿈꾸고 있다. 다니엘과 함께하며 안정을 찾고 싶은 마라는 사랑해 마지않는 아들도 만났고 이제 영주권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왠지 모를 두려움에 둘러싸인 마라는 여러 문제가 얽혀 있어서 더욱 불안해진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으로 인해 그 상황을 견디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미국인이 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지만 그를 대가로 하는 현실을 맞닥뜨린다. 나아갈 수도 없고 뒷걸음칠 수도 없는 마라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디즈니랜드는 아니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나아가는 수많은 사람은 마라를 통해 비친다.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책임지고 동시에 잔혹해지며 거짓이 섞인 진실을 타협해야만 했다. 그것이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현실이자 현재였으니까. 이질감과 이분화된 개념들이 소외감을 불러일으켜 버겁게 느껴지지만 그런데도 나아가는 마라의 뒷모습이 인상적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우직해서 이 사랑 섞인 환상이 환상이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특정인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닌 만큼 영화가 내어주는 분위기가 굉장히 힘들게 느껴졌다. 상황을 전달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표현하는지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영화는 끊임없이 자기 세계로 빨아들이려는 사람들로 인해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깨닫는 방식이 아프게 느껴졌다. 타인의 약점 앞에 선 인간은 한없이 잔혹해지는 것 같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헤쳐 나가는 마라가 무사히 살아가길 바라며 이 영화의 달콤씁쓸한 맛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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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 코드명 포춘>가이 리치에게 기대치 않은 무언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전 세계를 파괴할 만한 위력을 지닌 무기 '핸들'이 도난당한다. 이에 영국 정보부는 '네이선'(캐리 엘위스)에게 '핸들' 회수를 의뢰한다.
경쟁자 '마이크'보다 먼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네이선은 최고의 팀원을 소집한다. 업계 최고의 스파이 '포춘'(제이슨 스타뎀), IT 전문가 '사라'(오브리 플라자), 만능 요원 'JJ'(벅지 말론)까지.
그들은 '핸들'의 거래를 담당하기로 알려진 세계적인 무기상 '그렉'(휴 그랜트)에게 접근하기로 결정하고, 그렉이 가장 좋아하는 할리우드 스타 '대니'(조쉬 하트넷)를 포섭해 임무에 나선다.
첩보 영화의 과거와 현재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장르가 없지만, 첩보 영화는 유난히 시대적 흐름에 민감하다. 첩보물은 국가의 역할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 스파이 영화의 핵심은 이해관계다. 첩보원, 기관, 국가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서스펜스는 극대화된다. 따라서 변화하는 국가의 역할, 이익을 반영하기에는 첩보물만 한 장르가 없다.
예를 들어 냉전이 한창일 때 미국, 영국 첩보 영화에서는 소련이 주요 적국이었다. 냉전이 끝나갈 때쯤에는 북한 같은 공산권 국가가 표적이었다. 9.11 테러를 기점으로는 이슬람 테러 조직이 자주 등장했다. '테러와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자성의 물결이 일었다. <본> 시리즈처럼 국가의 폭력으로 인한 희생자와 피해자의 역공을 다뤘다. 즉, 첩보 영화는 각 시대마다 시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을 보여줬다.
그다음은 뭘까? 관객과 시민은 어떤 적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까? <스파이 코드명 포춘>은 나름대로 답을 내놓는다. 가이 리치의 첩보 영화는 국가의 영역에서 벗어나 국가의 기능을 잠식해 가는 적을 겨냥한다.
'진짜와 가짜'에 주목하라
보통 가이 리치 영화는 화려한 편집과 연출 스타일을 즐기는 오락 영화로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스파이 코드명 포춘>은 기대와 다르다. 의외로 깊은 스토리와 플롯이 먼저 눈길을 끈다. 그 중심에는 '진짜와 가짜'라는 모티브가 있다.
IT 재벌 빌런은 전 세계 금을 전부 매입한다. 고차원 AI인 '핸들'을 이용해 디지털 금융 세계를 유명무실화 하는 게 그들의 목적이다. 계좌 상 숫자는 사라질 수 있는 약속에 불과하고, 오직 금만 실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노린다. 비슷한 뉘앙스의 대사도 반복된다. 작전이 막힐 때마다 포춘은 사라에게 직접 현장에서 부딪히라고 말한다. IT 전문가라고 의자에만 앉으면 안 된다면서.
'진짜와 가짜'라는 모티브에 주목하면 어색한 장면이 필요한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사실 작중 휴 그랜트와 조쉬 하트넷은 이상할 정도로 높은 비중과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나마 그렉은 '핸들'의 거래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할리우드 스타 대니는 대체 왜 필요한지 의문이다. 아무리 그렉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라고 해도.
하지만 대니의 서사를 뜯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의 이야기는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진짜를 찾아가는 여정이나 다름없다. 일례로 그는 포춘의 협박 때문에 작전에 참여한다. 포춘은 그에게 자기 자신을 연기하면 된다고 조언한다. 이를 기점으로 그는 달라진다. 꺼져가던 연기에 대한 불씨를 다시 키우기로 마음먹는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다. 촬영장에서 스턴트 연기를 하던 그는 자기가 촬영 때 탔던 소품 차를 몰면서 진짜 카 체이싱을 펼친다. 다음 작품에서 억만장자 백역을 연기할 때는 억만장자가 썼던 진짜 대사와 제스처를 고스란히 따라 한다. 이처럼 그는 진짜와 가짜 중 전자를 찾아가는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첩보원이 아닌데도 첩보 영화에서 비중이 큰 이유다.
진짜 적을 찾아서
이에 더해 '진짜와 가짜'는 첩보 영화의 현재를 엿볼 수 있는 모티브라서 중요하다. 이 영화 속 빌런은 철저히 모습을 숨긴 상태로 진행된다. 보이는 적이 있고, 진짜 적이 따로 있다. 이를 빌런의 존재와 결합하면 꽤 의미심장하다. IT 기업가, PMC를 연상시키는 프리랜서 첩보 집단, 무기 거래상은 손을 잡고 있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영역을 대신하고 있는 주체들이 흑화해서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한다.
이는 <위기의 국가>에서 바우만과 보르도니가 지적한 바와 같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는 초국가적 자본, 기술, 조직에게 권력을 내줬다. 사회 갈등을 해결하는 중재자, 경제 규제의 주체, 안전의 보장자라고 보기 어렵다. 이처럼 국가의 영역을 벗어나서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 그들이 내포한 위협을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스파이 코드명 포춘>은 바로 이 대목을 겨냥하는 영화다.
그러다 보니 인공지능이 등장해도 <미션 임파서블 7>과는 결이 다르다. <미션 임파서블 7>에서는 인공지능이 빌런이었다. 하지만 <스파이 코드명 포춘>에서는 AI를 어떻게 활용할지가 문제다. 달리 말해 인공지능은 그저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마지막 장면까지 등장하지만, 미묘하게 이야기의 핵심은 아니다. 마치 <미션 임파서블 3>의 토끼발 같은 맥거핀이다. 이조차도 '진짜와 가짜' 놀이 안에 있는 셈이다.
오락 영화라는 변명 혹은 핑계
그런데 <스파이 코드명 포춘>은 여기서 멈춘다. 문제의식의 핵심은 건들지 않는다. 영화 속 스파이 묘사가 대표적이다. 작중 첩보원은 프리랜서다. 스포츠 스타나 다름없다. 스카우트할 수도 있고, 이적할 수도 있다. 그들에게 임무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고, 커리어를 쌓는 일이다. 국가의 대리인으로서 고뇌하던 이전까지의 스파이와는 다르다. 제임스 본드, 제이슨 본, 이단 헌트, 심지어 킹스맨과도 다르다.
역으로 그렇기에 그들의 존재는 더 섬뜩하다. 그들에게는 사명이나 책임감이 없다. 내적 갈등도 없다. 돈만 준다면, 조건만 맞춰주면 그들은 언제든 영화가 지목한 잠재적인 적이 될 수도 있다. 마이크와 네이선의 경쟁 구도처럼. 네이선이 포춘을 애국자라서 고용한다는 말이 단순한 농담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영화는 묘한 경계선을 이용하지 않는다. 국가의 영역이 상업화되는 세태를 다룰 듯하다가 이내 잊는다. 아군도 적도 될 수 있다는 양면성은 유머의 소재로 휘발된다. 이번에는 어디로 휴가를 갈지, 어떤 와인을 마실지 고민하는 이들 앞에서 주제 의식은 무의미하다. <007> 시리즈 같은 첩보 영화와 비교하면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이다. <007> 시리즈도 엄연히 오락 영화이고 상업 영화라는 걸 고려하면 더 그렇다.
장르에 충실해서 문제다
또 다른 문제도 파생된다. 상술했듯이 <스파이 코드명 포춘>의 스토리텔링은 첩보 영화치고 얕다. 그런데 반대로 연출이나 편집은 지나치게 첩보 영화스럽다. 그래서 영화 자체의 매력이 약하다. 언뜻 듣기에는 이상한 말이다. 장르에 충실해서 문제라니? 하지만 감독이 가이 리치라면 말이 된다. 가이 리치 영화는 장르적 쾌감 못지않게 독특한 스타일이 빛날 때 호평받기 때문. 안타깝게도 <스파이 코드명 포춘>은 해당되지 않는다.
가이 리치 스타일은 독보적이다. 그는 템포를 가지고 논다. 쉬어갈 때는 확실하게 분위기를 잡다가, 필요한 순간에는 빠른 편집과 의도적인 급전개로 관객을 현혹한다. 특히 편집이 인상적이다. 한 편의 영화를 서로 다른 시점과 시간대로 분해한 후 짜 맞추는데 능하다. 전작인 <캐시 트럭>도 현재 시점, 6개월 전, 5개월 전 3개의 파트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전체 퍼즐을 맞춰가는 재미가 있다.
<스파이 코드명 포춘>에는 그 맛이 없다. 시간 순서를 뒤집고 화려한 화면 분할을 활용하는 장면은 팬서비스처럼 스쳐 지나간다. 제이슨 스타뎀이 '핸들'을 훔쳐간 테러리스트 거처에 침입했다가 빠져나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캐릭터나 정보량이 많아서 기존 스타일을 고집하면 영화가 난잡해질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하지만 직전 작품인 <젠틀맨>과 <캐시 트럭>이 워낙 색깔을 잘 보여줬기에 아쉬움이 크다.
어떤 의미로든 밋밋한 하위 호환
액션도 기대 이하다. 일반적으로 가이 리치는 액션을 평범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작전을 세우는 장면과 작전을 실행에 옮기는 장면을 대비한다. 계획대로 진행되면 세련된 액션을, 그렇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유머와 쾌감을 즐길 수 있다. <셜록 홈즈>에서 홈즈가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하거나 <킹 아서>에서 아서의 런던 침투 계획이 어그러진 장면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스파이 코드명 포춘>은 분량도 적지만, 개성도 없다. 볼만한 맨몸 액션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액션씬은 대부분 제이슨 스타뎀의 역량에 기댄다. 그 결과 다른 첩보 영화에 비해 눈을 사로잡을 만큼 차별화된 개성이나 매력을 느끼기는 어렵다. '가이 리치라면 달라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운 이유다.
그래도 특유의 유머 감각은 살아 있다. 서로 빠르게 주고받는 영국식 유머를 재치 있게 활용한다. 누구 한 명 빼놓지 않고 혀놀림이 화려하다 보니 유머 타율도 나쁘지 않다. 007을 비튼 대목도 재밌다. 마티니를 찾는 본드랑 달리 포춘은 최고급 와인만 고집한다. 이 티키타카만 즐겨도 영화는 충분히 흥미롭다.
종합하면 <스파이 코드명 포춘>은 인기 첩보 시리즈의 하위 호환이라는 인상이 짙다. 소재나 주제의식은 근래 <007> 시리즈에 미치지 못한다. 영화의 구성은 <미션 임파서블>을 연상시킨다. 팀업무비라는 점이나, 팀원들의 역할 분배가 겹친다. 유일한 차별화 방법도 놓쳤다. 가이 리치 감독의 스타일을 강조하는 대신 장르의 관습에 기댄다. 그 결과 <스파이 코드명 포춘>은 여러모로 가이 리치에게 기대하지 않은 결과물이 됐다.
Acceptable 무난함
'가이 리치'도, '첩보 영화'도 뽑다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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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시 그 외는 없는, <스텔라>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스텔라(Stella. A Life)., 2024
감독: 킬리안 리드호프
명시 그 외는 없는, <스텔라>
출처: 영화 <스텔라> 스틸컷(다음)
아름다운 별빛을 품은 금발의 미녀, 스텔라는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는 재능 있는 재즈 가수다. 미국에서 원 없이 노래하며 살고 싶은 열망은 그녀와 함께하는 밴드 친구들도 품고 있는 소망이기에, 이들은 자발적으로 현실을 등진 채 연습에 몰두한다. 고대하던 공연 당일, 스텔라는 관계자들의 눈을 사로잡고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친다. 관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밴드와 스텔라는 할리우드로 향하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았음을 자축한다. 이제 남은 건 미국으로 향하는 레드카펫뿐. 그러나 이들을 호위하던 재즈가 뚝 끊기고 고막을 찢는 공장 소음이 울려 퍼지면서,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잔뜩 더럽혀진 노동자 옷을 입고 강제 노역 중인 스텔라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실 그녀는 재즈 가수이기 이전에 1940년 독일, 나치 정부하에 살고 있는 유대인이었고, 밴드와 스텔라가 등진 현실은 제힘은 물론이고 모두의 힘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유대인이기에 공포뿐인 세상이었다.
그러나 스텔라는 어둠 속에서도 자기 빛을 뿜어내는 걸 멈추지 않는다. 나치의 유대인 탄압으로 게토에 있는 군수공장에 끌려가 유대인 배지를 달고 온종일 기계 부품을 만들며 언제 죽을지 모를 현실을 받아들인 동포들과 달랐다. 밤이 찾아오면 배지 대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거리로 나갔고, 유대인처럼 보이지 않는 금발과 푸른 눈은 그녀를 더 과감하게 만들었다.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이 아닌, 독일 시민 '같은' 외형(가면)은 스텔라에게 미국 진출 실패에 대한 보상이 될 순 없었지만, 지옥 속에서 그녀가 그녀답게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수단은 곧 그녀만이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됐고 공장 책임자에게도 영향을 줬다. 도망치라는 책임자의 신호 덕에 스텔라와 그녀의 부모는 수용소로 잡혀갈 뻔한 위기를 넘긴다.
출처: 영화 <스텔라> 스틸컷(다음)
스텔라는 더 과감해진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신분증 위조 브로커(롤프)의 연인이 되어 그와 함께 일한다. 그들은 독일 시민인 척 거리를 쏘다니며 동포에게 돈을 뜯어낸다. 제삼자였던 동포의 경계는 점차 그녀의 가장 친한 밴드 친구들에게까지 확장되고, 스텔라는 절친에게도 목숨을 담보로 돈을 갈취하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텔라는 불편한 마음을 외면하기로 한다. 본인이 느끼는 고통과 별개로 나치는 여전히 유대인을 색출했고, 그녀에겐 안전한 은신처와 생계를 위한 돈이 필요했으니까. 언제 빼앗길지 모를 자유를 향한 욕망도 분명 결정적인 역할을 했겠지. 하지만 스텔라는 알지 못했다. 그 결정이 훗날 자기 삶은 물론 인간상까지 송두리째 무너트릴 계기가 될 거란 사실을 말이다.
스텔라는 밴드 친구의 고발로 게슈타포(나치의 비밀 국가 경찰)에 붙잡히면서 반쪽짜리 자유마저 완전히 빼앗긴다. 갖은 고문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졌고, 수용소 수감을 피하고자 나치의 비밀 요원이 되기로 맹세한다. 비밀 요원 일은 딱 하나, 유대인 색출. 그동안 해왔던 브로커 일과 차원이 달랐다. 신분증 위조보다 더 예리하고 대담해야 했으며 재즈를 부르며 자아를 팽창하듯, 인간의 극한 이기심을 폭발시켜야 했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기에 어떠한 감정도 비밀 요원 일에 방해 돼선 안 됐다. 그로 인해 받는 정신적 압박과 심리적 불안 역시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불편한 마음’과 똑같았다. 브로커와 비밀 요원은 스텔라에게 행위만 다를 뿐 사실상 생존이란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일치된 생존 방식으로 정립됐다. 이전보다 더 냉혹해져야 했다. 유대인을 잡는 유대인은 스텔라 말고도 넘쳐났으니까. 업무 성과 미달로 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반드시 다른 요원보다 더 많은 동포를 고발해야 했다. 물론 다른 요원보다 더 많은 유대인을 색출했다고 해서,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낄 필요 없는 독일인이 될 순 없었다. 태생적으로 바꿀 수 없는 현실은 레드카펫도 자유도 아닌 '길이 하나뿐인 생존'을 위한 서바이벌장으로 변했고, 그렇게 스텔라는 동포를 잡는 동포가 아닌 ‘독재 국가를 위한’ 요원이 됐다. 매혹적인 금발과 푸른 눈이 만든 무기는 그 쓸모를 잃었으며, 마음 한쪽에 자리했던 죄책감과 죄의식은 본인이 처한 비극에 더 철저히 가려졌다.
출처: 영화 <스텔라> 스틸컷(다음)
스텔라에게 남은 건 스스로 만든, 무자비한 본인뿐이었다. 금발의 배신자는 친구들은 물론 얼굴만 아는 사람들까지 닥치는 대로 고발해 적게는 600명, 많게는 3,000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냈다. 그 덕에 강제수용소로 끝까지 끌려가지 않았지만, 종전 후 체포돼 전범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는다. 그러나 이미 이전 재판에서 선고받은 형기(10년)를 마쳤다는 이유로 처벌 없이 풀려난다. 재판 내내 부모님 역시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며 본인 역시 피해자임을 주장했던 스텔라였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작은 거울에 한 할머니가 비친다. 여전한 금발 머리와 푸른 눈 그리고 빨간 립스틱, 스텔라다. 악착같이 얻고자 했던 삶이 주는 압도적인 평온이 계속될 듯했는데, 돌연 스텔라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린다. 쿵 소리도, 사람들의 비명도, 그 외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스텔라> 끝난다.
<스텔라>는 실존 인물 '스텔라 골드쉬라크'의 일생을 다룬,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감독은 처음부터 스텔라의 일대기를 꼼꼼히 살펴, 이를 영화에 조금의 덧붙임 없이 담았다. 나치, 홀로코스트란 배경(환경)보다 그 안에 속한 인간, 스텔라(개인)에게 관객이 집중하길 바랐다. 따라서 그녀의 생과 사를 작품 안에 거짓 없이 담는 걸 최우선 목표로 삼고, 스텔라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되는 지점을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이야기 전개에서 스텔라가 느끼는 고통과 두려움은 철저히 '개인'의 내면으로만, 즉 안으로만 파고들었다. 밖으로 빠져나와 제삼자에게 감정이 전이시키는 과정은 없었다. 중요한 건 스텔라의 행위에서 파생되는 결과였지, 그 안에 소용돌이치는 '나'만의 감정 태풍 따위가 아니었다. 영화는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하루살이처럼 살았던 스텔라의 무수한 하루를 단순 기록했다. 사건 나열이 아닌 개인의 연속된 선택과 결과로 가중되는, 그다음의 선택과 결과에 무게를 뒀다. 스텔라 골드쉬라크가 해체되면 될수록 그녀의 개인사는 모두를 향한 이야기로 변형됐고, 이는 개인을 통해 전체와 역사를 바라보게 되는 길이 됐다. 영화는 스텔라란 인물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목도하는 일이야말로 끝나지 않는 비극의 역사를 제대로 마주하는 첫걸음이란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하면서, 끝에 다다라서는 최종 판단과 결정을 관객에게 넘기며 제 몫을 다 했다.
출처: 영화 <스텔라> 스틸컷(다음)
1980년 광주에서 의도치 않게 가해자가 된 '영호'(이창동, <박하사탕>(1999))와 1943년에 나치 친위대에 들어가 아우슈비츠 감시원으로 일했던 '한나 슈미츠'(스티븐 달드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도 스텔라와 같은 길을 걸었다. 세 사람 모두 국가적, 시대적 환경 안에 갇힌 인물로 피해자이자 가해자,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표현됐다. 죽음의 과정도 닮아있다. 영호는 그동안 저질렀던 자기 죄를 스스로 용서할 수 없어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기차 앞에 섰다. 유대인을 가스실에 넣어 죽인 일보다 문맹을 폭로 당하는 걸 더 수치스럽게 여겼던 한나는 수감 후 글을 읽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악마 같았던 자신을 마주하고, 스스로 목을 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던 시대'와 '마지막까지 이어진 자기 파괴적 결말', '이분법적으로 딱 잘라 정의할 수 없는 이야기'까지 영화가 각각 무엇을 더 강조하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 그 쓰임이 달랐을 뿐 모두 충실히 활용됐다.
영호는 누가 진짜 가해자이고 진짜 피해자인지를 질문했고, 한나는 사고하지 않은 복종으로 파생된 악의 평범성을 고심하게 했다. 타인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자기반성이 뚜렷하게 보였기에, 두 인물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관객에게 확실하게 전달했다. 여기서 자기반성은 다양한 방식과 절차가 존재하는데 자기혐오와 자기 파괴는 꼭 포함되어 있다. 자기반성이 참회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고, 용서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요점이다. 두 사람의 자기반성은 관객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했고, 결과적으로 마음을 울리는 경종을 외면하지 않게 했다.
출처: 영화 <스텔라> 스틸컷(다음)
반면 스텔라의 자기반성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만 휘몰아쳤다. <스텔라>는 이마저도 의도적으로 희미하게 담았다. 스텔라가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장면보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행위적인 측면의) 장면을 더 길게 노출했다. 스텔라가 창문을 열고 투신하는 순간에도 카메라는 그녀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보여줬다. 스텔라가 화면에서 사라진 뒤에도 카메라는 공허한 바람 소리조차 허용하지 않고, 오직 창문이 열린 방 안에서 머물러있었다. 그녀가 대체 어떤 얼굴과 어떤 마음으로 그와 같은 선택을 했는지, 우린 확언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 자체도 관객이 뭘 알고 싶고, 또 뭘 회피하고 싶어 하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은 게 분명했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자기반성은, 공감이나 비난 심지어 반사적으로 가능한 일차원적 반응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무관심과 관심의 대결에서 당연히 후자가 패배한 줄 알았는데, 스텔라의 메시지는 영호와 한나처럼 뚜렷하게 전달됐다. 아니, 오히려 더 냉철하고 단호하게 관객에게 닿았다. 마치 추상적인 물음이 가장 구체적인 답이 된 것처럼, 최종 판단은 알아서 각자 해야 함을 꼭 명심하길 바라는 것처럼‥.
<스텔라>는 명시 외엔 다른 방법을 쓰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자신감도 분명히 보인다. 다하우 수용소에 새겨진 추모문 중 ‘죽은 사람에게는 애도를 표하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경고하기 위하여’란 구절이 <스텔라>를 관통해,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뚫고 지나갔음을 부정할 수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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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같이 잔혹한 인류의 폭력의 역사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매년 꾸준히 참석하는 영화제들중 하나이다.
거리가 가까워서도 크지만, 결정적으로 애니메이션에 큰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상영작 공개 이후 갑자기 추가된 상영작이 있었는데, 바로 <유니콘 전쟁>이다.
어떤 작품이길래 갑자기 초청까지 된걸까 생각이 들었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이렇게라도 소개되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해 보석같은 애니메이션 중 한 편이었다.
러브 군사캠프의 테디 베어들은 조상 대대로의 적수인 유니콘과 맞서싸우기 위해 훈련중이다.
그러다 유니콘의 근거지인 마법의 숲에서 부대가 실종되는 사고가 생기게 되고, 이들의 부대는 숲으로 투입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들의 욕망과 본능과 갈등이 폭발하게된다.
아기자기한 그림체를 보면 '마이 리틀 포니'를 연상시키는 아동용 애니메이션 같지만, 이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이다.
성기 노출, 신체 절단, 유혈, 마약 등 자극적인 요소들이 많으며 이러한 요소들은 아기자기한 그림체와 맞물려 괴리감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러한 괴리감은 단순히 쾌락적, 불쾌감을 주기위한 요소가 아니다.
테디 베어와 유니콘의 이야기는 비현실적인 판타지로 보이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욕망, 폭력, 본능은 인간에게 내재된것과도 동일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아동용 애니메이션 같은 작화에 담아낸 인간의 폭력에 대한 은유가 담긴 흥미로운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은 원글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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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또 다른 영화적 실험
넷플릭스 신작 <히트맨>이 화제를 모은 건 단연 글렌 파월이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스타 중 한 명인 그는 왜 자신이 수많은 제작사에서 러브콜을 받는지 이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작품이 글렌 파월만의 영화는 아니다. 메가폰을 잡은 이가 다름 아닌 <비포> 시리즈 <보이후드>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기 때문. 그의 필모그래피 중 대중성을 많이 고려한 영화임은 틀림없지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며, 전작에 이은 실존주의 실험을 진행하고 이를 증명한다.
| 실화, 그리고 <잠복근무>?
딱 봐도 평범한 대학 심리학 교수 게리(글렌 파월). 하지만 특별한 점이 하나 있으니 뉴올리언스 경찰서에서 히트맨(살인 청부업자)으로 활약한다는 점이다. 원래는 엔지니어로 이 작업에 참여한 그였지만, 우연히 히트맨 역을 맡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숨은 재능을 발견하고, 불법인 청부 살인을 의뢰한 이들을 잡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주위에서 잘한다고 하니 자신도 더 잘하고 싶어 청부 살인 의뢰자들의 SNS을 참고, 그에 맞게 매번 다른 히트맨을 연기한다. 그런 그가 단 한 번 삐끗한다. 가정 폭력에 시달려 남편을 죽여달라는 의뢰를 한 매디슨(아드리아 아르호나)를 만난 그는 첫눈에 반한다. 그리고 매디슨에게 살인 보다 이혼을 택하라 얘기한다. 임무 실패! 하지만 그 인연으로 개리는 매디슨과 연인으로 발전한다. 물론 게리가 아닌 히트맨 ‘론’으로 말이다. 그러나 거짓말은 언제나 들통나는 법. 그의 인생에 최대의 위기가 닥친다.
<히트맨>의 시작은 심리학 교수이자 오랜 시간 동안 60여 명을 체포하는 데 도움을 준 언더커버 경찰 게리 존슨의 이야기가 담긴 기사였다. 오디오, 비디오 장비 전문가이자, 새를 좋아하고 선불교 신자이기도 한 그는 영화처럼 사건에 맞춰 다른 인물이 되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접한 글렌 파월, 그리고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이 실화를 기반으로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느와르와 스크루볼 코미디의 요소를 접목한 <히트맨>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의뢰인과 사랑에 빠진 킬러의 이야기라고 축약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보고 1987년 작인 존 바담 연출, 리처드 드레이퍼스,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매들린 스토우 주연의 <잠복근무>가 생각났다. 교도소를 탈출한 흉악범을 잡기 위해 애인인 집 근처에서 잠복근무한 경찰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인 이 영화는 액션, 서스펜스, 로맨스, 코미디가 조화를 이뤄 흥행에 성공, 이후 속편까지 제작되었다.
감독은 실화를 바탕으로 기존에 사랑받았던 장르적 외형을 가져와 믹싱하는 데 성공한다. 초반부터 따라가는 게 큰 무리 없었다면 이 공략이 제대로 먹힌 것. 본 게임은 이후부터다. <히트맨>의 장점은 장르 영화로서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독은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이 부분에 변주를 가한다. 그 예로 장르영화에서 마주했던 ‘킬러(또는 빌런)’의 이미지를 살짝 비튼다. 게리가 연기한 킬러의 모습은 우리가 영화에서 봤던 킬러의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한다. 게리는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크리스찬 베일), <자칼의 날>의 자칼(애드워드 폭스), <킬링 소프틀리>의 잭키(브래드 피트) 의 느낌으로 변하는데, ‘이 모습이 바로 킬러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 의뢰인은 게리의 이 모습에 신뢰하고 의뢰비를 준다. 이후 의뢰인들은 경찰에 수감된다. 마치 자신이 믿고 있는 이미지에만 현혹되어 실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을 비꼬는 느낌이랄까. 장르 영화임에도 이런 비트는 구석이 있는 걸 보면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선댄스 대표 감독이었다는 걸 상기시킨다.
| 세상은 변해도 나는 변하지 않는다!
감독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그동안 꾸준히 실험하고 증명했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또 한 번 내놓는다. 전작을 살펴보면 극 중 주인공들은 시간과 공간이 변함에도 인간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 왔다. 특히 영화 내외적으로 물리적인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에 따른 장소와 환경이 변했음에도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인물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비포 선라이즈>부터 <비포 선셋>까지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를 통해, 실제 12년 동안 촬영한 <보이 후드>의 메이슨(엘라 콜트레인)을 통해 잘 보여줬다.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고, 외형이 변해도, 삶의 환경이 달라져 생각이나 감정 표현이 달라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정체성은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것. 제시와 셀린의 변하지 않는 사랑처럼, 메이슨의 긍정적 삶의 태도처럼 말이다.
감독은 다양한 인물(혹은 정체성)을 연기하는 게리를 통해 그 역이 게리인가 아닌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극 중 메디슨이 사랑하는 인물은 게리가 아닌 게리가 연기한 론이다. 그럼 섹시미가 듬뿍 담긴 이 킬러를 좋아하는 메디슨은 너드미가 철철 넘치는 게리를 좋아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물음에 다다른다. 감독은 그가 바라는 자아를 쟁취했을 뿐, 그 주체가 게리인 것은 변함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의도에 편승하듯 메디슨 또한 시행착오를 겪지만 론을 연기한 게리를 사랑한다. 물론, 그가 사랑하는 건 론의 매력이 합쳐진 게리의 모습이긴 하지만 말이다.
감독은 실존주의에 입각해 각자의 현실은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누구를 만나냐에 따라 변화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바라는 자아를 쟁취하라고 강조한다. 마치 게리가 론의 캐릭터를 쟁취한 것처럼 말이다. 그에 맞춰 달라진 모습이 생경하다 하더라도 그 주체는 변함이 없으니까 걱정말라고.
| 글렌 파월의 연기에 흠뻑 빠지다!
감독의 이런 영화적 실험이 좀 더 흡입력 있게 다가올 수 있었던 건 글렌 파월의 팔색조 연기다. 왜 이제야 빛을 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이 영화에서 펄펄 난다. 직접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제작에도 참여한 그는 그동안 자신이 연기해 보고 싶었던 강렬한 캐릭터를 매번 바뀌는 히트맨 역할로 대신하는 느낌이다. 보는 눈이 즐겁다. 특히 여성 관객들에게는 선물과 같은 연기일 듯.
그와 호흡을 맞춘 아드리아 아르호나의 연기도 일품이다. 어리숙하면서도 섹시한 느낌을 전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가늠이 가지 않는 팜므파탈 연기를 능숙하게 해낸다. 특히 게일의 감춰진 자아인 론을 끄집어 내어 세상에 빛을 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남성 캐릭터를 돋보이는 여성 캐릭터로서 소비되지 않는다. <6 언더그라운드> <모비우스> 등 다수의 작품을 거처 이제야 자신의 연기를 잘 보여줄 수 있는 대표작을 만난 듯 보인다.
극 중 ’세상에 맛없는 파이는 없다’는 대사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이는 영화의 주제로도 활용되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새로운 파이(혹은 세상)를 마주했을 때 두려워 말고 도전하라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은 쉬이 사라지지 않으니 걱정 붙잡아 두라고. 어쩌면 이 말은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고 이 영화를 넷플릭스로 만날 전 세계 관람객들에게도.
사진제공: 넷플릭스
평점: 3.5 / 5.0
한줄평: ‘세상에 재미없는 영화는 없다’는 1960년생 감독의 의미 있는 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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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승-전까지 전력질주, 결에서는 경보 '베테랑 2'
선하게 생긴 막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베테랑 형사 서도철(황정민)이다. 말 그대로 베테랑인 서도철. 오늘도 범죄자들 잡기에 여념이 없다. 팀은 그대로다. 상관은 오재평(오달수). 동료는 봉윤주(장윤주), 왕동현(오대환), 윤시영(김시후)다. 네 명의 팀원끼리 주부 도박단을 해치운 서도철의 팀. 어느 날 대학 교수가 살해됐다는 뉴스를 본다. 앵커는 살해당 피해자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다. 이 사람은 과거에 제자를 성폭행한 전력이 있지만 의심만 남겨둔 채 무혐의로 풀려났다. 제자는 충격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공분을 샀던 교수. 하지만 교수는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적절한 처벌을 받지 못한 범죄자가 살해당한 것이다. 연쇄살인이라는 직감이 문득 드는 서도철. 이미 과거에 처벌을 적게 받은 범죄자들이 연이어 살해당한 바 있기 때문에 연쇄살인마일 거라는 추측이 어렵지 않았다. 이 연쇄살인마 '해치'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려고 했던 어느 날. 경찰 내부에서 전석우(정만식)가 출소할 거라는 말이 들린다. 전석우는 과거에 어떤 여성을 밀쳐 죽게 한 혐의가 있었다. 혐의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감옥에 있지 않았던 전석우. 한국사회가 들끓는다. 1편에도 나왔던 박승환/정의부장(신승환)이라는 유튜버는 온 사회에 미움을 뿌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화가 난 여론에 불을 붙이는 소셜 미디어와 유튜버들. 온 세상이 범죄자들에게 응당한 처벌을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어수선한 강력범죄수사대에 막내 형사 박선우(정해인)가 합류한다. 과연 서도철과 동료들은 '해치'를 잡을 수 있을까?
<괴물>
글쓴이가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봉준호의 <괴물>이다. 그 이유는 <괴물>이 한강 대로변에 튀어나온 괴물만을 보여주려 했던 건 아니듯 <베테랑 2>도 서도철이 범죄자들을 잡는 것만이 핵심인 영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두 영화는 '어떻게'의 측면에서 공통점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들어간다. 위에서 쓴 바와 같이 글쓴이는 <괴물>처럼 <베테랑 2>가 세계의 구성요소를 그렸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바로 빌런 '해치'의 캐릭터 세팅과 미디어를 활용한 방식 때문이다.
이 영화의 메인빌런은 '해치'라는 연쇄살인마다. 해치는 쉽게 말해 자경단이다. 자경단의 뜻은 간단하다. 경찰이 아닌데도 타인에게 제재를 가하는 것 내지는 치안유지를 위해 시민들이 결성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해치는 이 단어의 정의에 따라 움직인다. 한국사회에서 악하지만 올바른 처벌을 받지 않았던 사람만 골라 살해하는 것이다. 이 자경단 연쇄살인마와 베테랑 형사 서도철의 대립이면 사실 '범죄도시'랑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 영화의 해치를 둘러싼 환경이 굉장히 중요한데, 이 환경이 이 영화가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것 그 자체다. 이 영화를 이끄는 질문 두 가지는 '해치가 과연 누구일까?'와 '해치가 언제 잡힐까?'라는 서스펜스라고 생각한다. 후자는 영화가 메인빌런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어렵지 않아 이해하기 쉬운데 전자를 놓치면 이 영화의 미덕을 잃기 쉽다. 이런 측면에서 영화가 해치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써 본다. 이 영화는 사실 거대한 속임수를 통해 해치를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의 모티브 중 하나는 자경단이 가진 딜레마인 판단이다. 판단이라는 게 뭘까? 어떤 인간이 타인 간의 사건에 대해 이거다!라고 의견을 내는 일이다. 우리 직업이 대법원장이 아닌 한 이건 실수하기 쉽다. '네가 뭔데 남을 판단해?'라는 말에는 '나 혹은 너의 판단이 매번 올바르지 않다'는 불확실성을 전제로 깔고 간다. 이 영화는 그 불확실성을 동력 삼아 질주한다. 어떤 인간이 나와서 누구를 판단한다. 그리고 그 판단에 따른 사건이 영화의 플롯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 판단에 깔린 감정이 한국사회를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본 작은 묘사 한다. 이렇게 <베테랑 2>가 영화 안에 빼곡한 정확한/부정확한 판단으로 구성된 것은 <괴물>이 당시 한국사회라는 괴물을 묘사한 것과 유사하다. 단순히 영화가 서도철의 추격극만 담은 것이 아니라 시대상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해치는 한 명이 아니다. 여러분도 눈 크게 뜨고 보시길 바란다.
그리고 영화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미디어를 표현한 방식도 흥미롭다. 정의부장이 이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글쓴이는 정의부장이 이 영화에서 구사하고 있는 논리가 영화의 통일성을 살리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이 부분은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중략한다). 이것에 연장선상에서 영화 안의 정보가 어떤 도구로 통제되고 있는지가 흥미로웠다. 이게 1차원적으로 무작정 나쁘다는 식의 묘사가 있었다면 영화가 가진 깊이를 더 얕게 만드는 수가 됐을 텐데 이걸 경제적으로 활용한 덕에 논리적인 접근법에는 여지가 없다. 이 영화가 구사하는 게임 중 하나는 '이게 정의라고 생각해?'다. 이 말은 곧 '저거도 정의고 이거도 정의 같은데?'라는 양자택일의 딜레마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점을 미디어를 통해 잘 살렸다. 영화가 기본적인 설계에 있어 성실했다는 의미다.
이질감이 크다고 생각할 것 같은
이 영화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캐릭터는 바로 주인공의 아들서우진(변홍준)이다. 해치의 자경단 활동을 막는 게 영화의 핵심인데, 아들 서우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인물 역시 영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고 말하고 싶다. 이 영화의 핵심 중 하나는 타인이 타인에 대해 쉽게 가하는 폭력이고, 이것이 온라인상에서 쉽게 유통된다는 것이 그렇다. 영화는 이 쉽게 유통되는 폭력을 우진이가 겪게 만든다. 사실 아버지 서도철은 이 문제를 근작에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형사 서도철은 직업인으로서의 자신에 취해서 이 문제를 깊게 이해하지 못했다. 이 부분은 중요하다. 이야기의 해결과정에 있어 꼭 필요하니까. 이게 단지 부자간의 관계만 1차원적으로 보이면 흔히 말하듯 '기능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적어도 류승완 감독이 진단한 한국사회의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더 들여다볼까? 아예 아버지 서도철의 입에서 나오는 몇 대사와 아들 서우진이 보여주는 행동을 보면 그 근원이 설정되어 있다. 이 부분은 영화가 시대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어쩌면 이게 원인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내면의 무언가를 이 영화에서 분명하게 강조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무리라는 측면에서도 아들 서우진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영화가 뭘까? 이 한국사회를 가로지르고 있는 수많은 분노에 대해 해부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진 역시 마찬가지로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분노를 내면에 갖고 있다. 이 인물을 둘러싼 두 가치가 충돌한다. 사회가 미디어를 통해 만든 분노 vs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지는 것의 충돌이다. 영화가 전자를 지배적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에 후자가 좀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물론 후술 하겠지만 영화가 실제로도 후반부를 갑자기 마무리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것에 대해, 그러니까 사회구조적으로 만들어진 분노에 대해 대비되는 가치로 서우진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온갖 오판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우리에게도 남아있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다.
충무로 액션 키드?
보통 류승완 감독하면 관객들이 바라는 건 액션 연출일 것이다. 우선 좋았던 것부터. 이 영화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박선우의 액션은 내내 호쾌했다. 이 인물은 이야기 전개상 액션이 굉장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사용하는 액션 장르(?)상 몸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면 유치해지기 쉽다. 정해인 배우는 합을 맞추기 이전에 동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고 구사한다. 장면을 짧게 잘라서 빠른 템포로 이어 붙인 연출이 아니라 그 장면을 찍기 위해서 여기선 이렇게 움직이고 어떤 인물은 저 방향으로 빠지는 식의 동선을 잘 정립한 티가 났다. 대표적으로 박선우와 서우진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 몇 있는데 이 시퀀스는 인물의 카리스마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좋은 선택이었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어떤 액션 장면은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여러분이 이 <베테랑 2>의 예고편이나 포스터를 보면 눈에 띄는 이미지가 있다. 바로 서도철과 박선우가 빗속에 있는 장면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생각나 류승완이라는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생각해 보면 잘 어울리는 장면인 듯하다. 물론 이 장면은 실제로 영화 안에서 처절하게 잘 구현됐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 장면 역시 이 영화가 핵심으로 다루고 있는 딜레마를 정통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지점은 영화가 통일성이 있다는 점에서 나름 류승완 감독이 공을 들인 티가 난다. 심지어 비가 누구한텐 안 내리고 또 특정인에겐 내리고 하는 게 아니잖아?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점에서 빗속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당위성도 가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 글쓴이는 액션의 핵심 중 하나가 전달력이라 생각한다. 누가 어떻게 뭘 때리고 받고 해야 액션의 박진감이 살아 숨 쉰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 영화에서 정해인, 황정민 두 배우가 보여주는 액션은 정말 온갖 고생 다 했다는 점에서 대단했지만 장르적인 특성을 잘 살린 선택이었는지는 미지수다. 화려해서 전달력이 좋은 것과 너절해서 복잡해 보이는 것이 한 영화에 다 들어가 있다.
경향성을 띈다고 봐도
언제부턴가 류승완 감독의 영화들이 올드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이 <베테랑 2>는 류승완의 올드화(?)가 두드러지는 영화였다. 아마 많은 분들이 지적할 것 같은 오프닝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모르겠다. 이 영화는 엄연히 전작이 있는 시리즈물이다. '조태오'라는 단어가 영화 전면에 등장하고, '내가 죄짓고 살지 말랬지?'라는 말이 본작에도 등장한다. 그래서 오프닝이 시리즈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등장한 것 같다. 선의로 해석하면 이렇고 사실 영화를 보고 느낀 그대로 써보자면 이게 아니어도 시리즈의 연결성은 파악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또, 액션 장면이 들어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게다가 장면이 영화 후반부까지 이어진다고 보기 어렵다. 더 나아가 오프닝이 자경단 부추기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단 조금도 생각이 들지 않는다. 기억에 남는 건 봉윤주(장윤주)가 이상한 자세로 누워있는 것뿐이다.
그리고 어느새부턴가 류승완의 영화들이 후반부가 엉성해지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정말 중요하다. 영화가 보여주려고 하는, '어떻게 악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에 집중한 연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상업영화다. '베테랑'이라는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다. 그렇다면 마무리에 있어 더 숙고했어야 했다. 사이다를 고르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더 정의의 의미에 탐구하고 싶었던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영화가 내적 논리를 지키기 위해 둔 선택이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후반부의 전개가 허점이 크다는 걸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 그 단점을 가리지 못했다는 게 패착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이렇게 해야만 해!'라는 판단이 느껴지기는 하나, 영화가 '이렇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데에는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군함도>에서 억지로 감정적인 울림을 유발했던 점이나 <밀수>에서 VFX가 엉성했던 것이 연상된다. 이 단점은 치명적이라 영화 전체적인 완성도에 태클이 들어올 수준이다. 영화가 내내 윤리 게임을 벌이다가 갑자기 대충 수습한 다음 '이거 보고 싶었지'하고 끝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
이 영화가 류승완 감독의 야심을 오롯이 담았다는 데에는 여지가 없다. 이 영화는 류승완 감독이 <부당거래>가 공권력의 그림자를 다루듯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가감없이 표현한 영화이기도 하고, <짝패>에서 다룬 처절한 액션을 구현한 영화이기도 하다. 또 황정민이라는 베테랑의 역량이 발휘된 영화이자 정해인의 여러 얼굴을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류승완이라는 예술가가 이젠 그의 거대한 천재성을 혼자서만 발휘하기는 어렵지 않나라는 우려가 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문제만 해결하면 장땡이라는 것, 그러니까 자경단의 속성으로 한국사회를 들여다보겠다는 야심은 눈에 들어오나, 그걸 잘 마무리했나?라는 관점에선 아니오라는 답이 딸려오는 영화가 <베테랑 2>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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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서복 후기 / 티빙 동시 개봉 / 공유, 박보검의 환상 케미 / 복제인간이 현실이 된다면...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서복”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복제인간, #박보검, #공유, #브로맨스, #티빙, #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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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원더우먼 1984>
지나친 풍요로움이 과잉이 되어 또 다시 위협받는 인류, 위태로운 세상에 오직 원더 우먼만이 희망이다! 그 어떤 적도 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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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모아나 2> 메인 예고편
전 세계를 감동시킨 모험이 다시 시작된다! 부족의 파괴를 막고, 고대 섬의 저주를 깨기 위해 길잡이로 다시 떠나는 새로운 여정🌩️ [모아나 2] 메인 예고편 공개!🌊⛵️ 올 연말 최고의 기대작 [모아나 2], 11월 27일 극장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