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별2021-03-23 00:00:00
영화 <화양연화>, 시작점이 모호한 사랑에 대하여
굉장히 오래된 영화이지만 한 번도 본적이 없었기에 리마스터링 개봉이라는 소식을 듣고 영화관에서 봤던 영화 <화양연화>.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사랑이야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그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작품이 아니어서 놀랐고, 굉장히 잘 만들어진 작품이어서 두 번 놀랐던 작품이었다.
영화 화양연화 시놉시스
화양연화花樣年華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에 대해 다룬 작품으로, 영화는 같은 날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첸 부인과 차우의 서사를 보여준다. 이사 첫날부터 자주 마주치던 두 사람은 차우의 넥타이와 첸 부인의 가방이 각자 배우자의 것과 똑같음을 깨닫고 그들의 관계를 눈치챈다.
그 관계의 시작이 궁금해진 두 사람은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고 감정이 깊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서로에게 점점 빠져들기 시작한다.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
*본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조했습니다.
언제 시작했는지 모를 사랑에 대한 이야기
화양연화에 대한 내용을 아예 몰랐을 때 나는 이뤄지지 않은 첫사랑을 다룬 작품이라고 생각했었다. 유명한 대사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것은 없다”를 듣기만 하고 지나간 첫사랑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담은 내용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렇게 제목과 영화 사진 하나, 대사 하나 3가지 조합만으로 영화를 속단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 전반적으로 불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초반에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상대의 배우자들이 불륜을 하고 있으면서도 나름 담담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더불어 그들 역시 불륜과 비슷한 상황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표현했다고 느껴졌다.
내적으로는 참담하고 비참한 감정을 느꼈을 주인공들이 자신들 역시 똑같은 불륜을 저지르면서, 그리고 그 과정을 굉장히 가랑비 내리듯 감정을 발전시키다보니 언제 이 감정이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어느샌가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는 그 모호한 사랑의 시작에 대해 너무나도 잘 표현한 작품이었습니다.
비밀의 배우자들
영화 <화양연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연출은 상대 배우자들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첸부인과 차우는 각각 결혼을 해서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배우자들은 목소리와 뒷모습만 등장할 뿐 단 한 번도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 연출은 이렇게 둘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면서 첸부인과 차우의 시점에서 불륜을 일으킨 배우자들을 관찰자적인 마인드로 보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 둘이 어떻게 만나게 됐고, 어쩌다가 시작을 하게 됐는지 굉장히 궁금하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영화가 전개될수록 첸부인과 차우 역시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워가면서 저 둘 역시 첸부인과 차우처럼 우연한 계기로 만나 자신들도 모르게 감정이 커졌겠구나 싶었다. 일부러 첸부인과 차우의 모습만 보여준 연출은 아마 불륜의 시작점을 궁금하게 만들며서 그 시작은 알 수 없고 모호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bgm으로 영화를 제작하다
영화에서 음향의 효과는 굉장히 크다. 관객의 감정을 미리 끌어올리는 역할로 음향은 많이 사용되면서 영화에서는 다양한 bmg을 활용한다.
하지만 영화 <화양연화>에서는 그 다양한 bgm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유메지의 테마’와 ‘Quizas, Quizas, Quizas’ 두 곡을 가지고 영화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노래 자체가 임펙트가 강한 편이어서 이 두 곡만 활용하면 오히려 루즈해지지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하지만 이 두 가지 bgm만으로도 영화 자체를 꽉 채워줬다. 절망적일 때, 선을 넘고 싶을 때, 포기하고 싶을 때, 무료할 때, 행복할 때, 기대감이 가득 차있을 때 등 굉장히 다채로운 감정과 모두 어울리는 bgm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감정신들과 잘 어울렸고, 특히, bgm이 흘러나올 때의 미장센은 정말 아름다웠다. 더불어 청각적인 부분에서의 단순함을 첸부인 역을 맡은 장만옥의 화려한 치파오를 통해서 어느정도 채워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 명작이라고 하는지 너무나도 잘 느낄 수 있었던 작품 <화양연화>, 카메라 미장센부터 연출, 그리고 음향, 배우들의 연기까지 조합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던 영화였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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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아스포라들의 뿌리 내리기, <미나리>
※ 이 글은 영화 <미나리>의 내용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1. 국경을 넘어 씨를 뿌리는 자들
디아스포라(diaspora)란 '~넘어', '경유'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전치사 'dia'와 '씨를 뿌리다'라는 의미의 동사 'spora'가 합쳐져 생긴 말이다. 다시 말해, '국경을 넘어 씨를 뿌리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본래 이스라엘 밖을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자신의 태생지를 벗어나 다른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이주민, 난민, 이주노동자, 소수민족 공동체 등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디아스포라들이 만든 작품들을 두고 디아스포라 문학, 디아스포라 영화 등이라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아이작 정 리의 영화, <미나리>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는 이민 1세대들의 이야기를 그렸으니 디아스포라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은 이 영화가 단순히 '재미 디아스포라'들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영화 <미나리>에서 '한국'과 '한국적인' 것에만 초점을 둔다면, 우리는 이 영화가 전하는 많은 메시지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분명히 이 영화는 곳곳에서 한국적인 요소들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한국인들에게는 한국적인 공감을, 백인 중심의 할리우드 영화계에 있어서는 '보기 드문' 독자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면 <미나리>가 이토록 주목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감받지 못하는 영화는 그 생명력을 오래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나리>는 누구의 공감을 받았을까? 다름 아니라, 또 다른 '디아스포라'들이다.
그렇다. 디아스포라들의 땅인 미국에서, 이 영화가 각광받는 것은 이상할 일이 없다. 시기는 다르지만 그들은 저마다 고향 땅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에 씨를 뿌리고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다. 그 과정은 때론 희망적이고, 때론 처절하다. <미나리>의 가족들의 모습은 재미 동포들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지극히 미국 시민적인 모습이기도 하다는 소리다.
디아스포라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한다면, 이 이야기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나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2021년. 고향에서 평생을 사는 사람은 이제 그리 많지 않다. 누구나 한 번쯤은 혹독한 타향살이를 경험했고, <미나리>는 그때의 뼈아픈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보편적이다.
<미나리>가 '제이콥'이 낯선 아칸소에 한국 작물의 '씨를 뿌리는' 이야기라는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 이야기는 정말이지, 기가 막힌 디아스포라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새로운 땅에 뿌리내리기
자, 이제 본격적으로 <미나리>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 영화는 디아스포라들이 '씨를 뿌리고' '뿌리를 내리고자' 분투하는 이야기이자, 이성과 감성, 현대적 사고와 전통적 사고의 대립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화분을 분갈이해 본 적이 있는가? 아주 건강한 식물을 아무리 조심스럽게 옮겨도 식물은 본래 있던 화분에서 뿌리째 뽑혀 낯선 흙에 심기는 것을 버거워한다. 그들의 뿌리는 이질적인 흙에 적응하기 위해 분투한다. 잔뜩 움츠러든다. 어떨 때는 잎이 죄 시들기도 한다. 새로운 흙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그만큼 고달프다.
그것은 디아스포라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이고, <미나리>의 주인공, 제이콥 가족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바퀴 달린 집이다!"
그들의 바퀴 달린 집은 언제든지 토네이도에 휩쓸려갈지 모른다. 낯선 아칸소 땅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제이콥 가족의 심정과 마찬가지로.
제이콥 가족은 이미 미국에 이민 온 지 10년이 지났다. 그들은 저마다 스스로를 증명해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제이콥은 그들의 '에덴 정원'을 일구어 성공을 이루어내야 한다. 10년 동안 유능한 병아리 감별사로 일했으나 뾰족하게 가계를 성장시키지 못한 그에게 농장은 마지막 보루이다. 모니카는 심장이 약한 데이빗이 늘 걱정이다. 아칸소의 병원은 집에서 너무 멀리 있고, 그것은 언제 닥칠지 모를 아이의 위험에 대비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아이의 안전과 가정의 안정을 지키는 것이 그녀의 사명이자 목표다. 앤은 매일 같이 싸우는 부모님과 아픈 남동생을 둔 장녀이다. 그렇기에 그녀 역시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또래보다 먼저 성숙해야 한다는 마음의 굴레를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데이빗은 심장에 구멍이 나 있다. 그는 언제나 연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여겨진다. 아이답게 한창 뛰어 놀 나이지만 그러지 못한다. 아이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연약한 아이'라는 말을 멍에처럼 쓰고서.
수평아리는 쓸모가 없어. 그래서 폐기되는 거야.
그러니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병아리 감별소에서 제이콥은 데이빗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처지는 병아리 감별소의 병아리들과 다를 것이 없다. 쓸모가 있으면 살아남지만, 쓸모가 없으면 '폐기된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절실해진다. 살아남고 싶기 때문이다. 잘 살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3. 우물 찾기의 여정
"나는 여기에 가든을 하나 만들 거야"
제이콥은 절실한 만큼 자수성가의 꿈을 키워나간다. 이렇다 할 밑천도 없이 빛으로 시작한 농사일이었지만 그는 이 일에 꽤 자신이 있었다. 해마다 한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들만 3만여 명이라고 하니, 한국 농작물을 파는 일은 썩 전망이 좋은 일이었다. 그는 '멍청한 미국 놈들'이나 '약삭빠르고 제 잇속만 챙기는 도시에 사는 한인들'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없는 들을 일구고 우물을 판다. 그는 아들에게 말한다.
한국 사람은 말야,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거야.
그의 이런 생각은 꽤 그럴싸해 보인다. 이웃의 폴은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기독교에 심취해 있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찾아간 교회에서는 무지가 낳은 인종차별 발언을 쉽사리 내뱉는다. 우물을 찾아달라고 사람을 불렀더니 나뭇가지로 물을 찾겠단다. 명석한 제이콥으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그러나 삶은 뛰어난 머리 계산만으로 꾸려 나가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뿌리 없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제이콥의 가정에는 혼란과 평화의 올리브 가지를 물고 날아올 사람이 필요했고, 그것은 다름 아니라 모니카의 어머니, '순자'다.
4.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 순자
어린 데이빗이 보기에 순자는 할머니답지 않은 할머니다. 맛있는 쿠키를 굽기는커녕, 요리는 통 할 줄 모르고,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화투 치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남자아이인 자기를 '프리티 보이'라고 하질 않나, 밤새 오줌을 좀 쌌기로서니 고추가 망가졌다고 '딩동 브로큰'이라고 하질 않나. 그녀가 그에게 건네는 것은 달콤한 케이크가 아니라 쓰고 고약하기 짝이 없는 한약이다.
데이빗은 생각한다. 이런 할머니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정도의 차이가 좀 있을 뿐이지, 그 사정은 앤도 마찬가지다. 미국에 자란 두 아이에게 지극히 한국적인 '순자'는 너무나 낯설다. 이 할머니라는 존재는 당최 납득이 안 간다. 그래서 처절하게 저항한다. 나는 할머니가 싫어요!
"아팠을 텐데도 잘 참아냈구나. 스트롱 보이네, 스트롱 보이!"
앤과 데이빗에게 순자는 '틀'을 깨는 사람이다. 미국 할머니라면 하지 않을 법한 일을 스스럼없이 하고, 엄마(모니카)라면 하지 말라고 했을 일을 해도 좋다고 한다. 합리적이지 않다. 전통적이며 감성적이다. 머리로 생각하는 일에 익숙한 그들에게 순자의 모든 행각은 낯설고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순자에게 물들어 간다.
순자는 '아이들은 원래 아프면서 크는 거'라며 심장이 아픈 데이빗에게 뛰어도 좋다고 말한다. 만약 뛰기 힘들다면 걸어가자고 한다. 다친 아이에게 너는 연약하고 아픈 아이라고 하지 않고, 그 아픔을 이겨냈으니 강한 아이라고 한다. 그녀에게 데이빗은 언제든 죽을지 모르는, '쓸모없는' 아이가 아니라, 더없이 착하고 강한 아이다.
그녀가 보내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는 이성과 합리로는 이해될 수 없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녀의 비합리적인 믿음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견고해진다. '스트롱 보이'이라는 순자의 말은 주술처럼 힘을 입어 데이빗을 강하게 만든다.
제이콥 가족은 순자의 등장을 시작으로 서서히 깨달아 나간다. 현대적인/도시적인 합리주의에 대한 그들의 견고한 믿음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느 땅에든 사람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광신도처럼 보이는 폴에게서 숭고한 지지를 얻고, 안 맞는 옷 같던 교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 제이콥은 농작물 판매처를 찾았고, 데이빗은 심장 건강이 더 좋아졌다. 이대로만 간다면 그들의 삶은 좋을 것만 같다.
4. 인생은 새옹지마라
운명의 장난일까. 제이콥 가족이 꿈에 그리던 '온전한 자립'에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운명의 주사위는 그들을 두 발짝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같다. 그렇게나 열심히 살았는데 세상은 야속하기만 하다. 데이빗의 몸이 좋아졌는데 순자는 뇌졸중에 걸려 몸을 가누지 못한다. 농작물이 훌륭히 자랐으나 부부간의 감정의 골도 자라났다. 기껏 한국 농작물을 팔 거래처를 찾았는데, 바로 그날, 자식같이 기른 농작물들은 한 번의 화재로 불 타 사라진다.
영화는 단순한 해피엔딩을 보여주지 않는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생기고, 나쁜 일이 있으면 그 너머에는 다시 좋은 일이 있다. 흔히 아메리칸드림하면 떠올리는 성공 신화와는 썩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파도치는 삶의 곡선 속에서 관객들은 제이콥 가족의 삶이 마냥 불행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불행의 순간은 언제나 닥쳐오지만 그 너머에는 다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므로.
뱀이 나온다는 수풀 사이에 발견한 샘에서는 순자가 한국 땅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앗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밭을 이루었다. 제이콥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 미나리. 그토록 근사하게 자란 농작물들이 불타 사라진 후 남은 것도 바로 그 미나리였다. 제이콥이 데이빗과 미나리를 캐러 가며 '할머니가 참 좋은 자리를 찾으셨네.'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가 그간 품고 있던 고집을 버리고 그가 '비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한 세계를 수용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한 발짝 더 성장할 것임을 알게 해 준다.
5. 시련의 극복을 통한 성장 서사
다시 말하자면 이 한 편의 영화는 지독한 시련을 통해 성장통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동시에 구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련은 뼈 아프나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 혹은, 성장을 확인하게 한다. 제이콥은 애지중지 기른 작물들이 모두 불타는 그 헛간에서 비로소 모니카를 구한다. 자식 부부의 한 해 수확을 모두 불타게 한 자신을 자책하여 물가로 향하는 순자를 불러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앤과 데이빗이다. '할머니 가지 마세요. 우리랑 같이 집에 가요.' 심장이 아파 뛰지 못하던 데이빗은 할머니를 향해 달려간다. 손을 내민다. 심장이 아파 뛰지 못한다던 자신에게 할머니 순자가 기꺼이 손을 내밀어줬던 것처럼.
이러한 일련의 서사들을 통해 '쓸모를 증명하고자' 했던 제이콥 가족은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으며', '쓸모 있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배운다.
그들의 뿌리내리기는 여전히 때론 즐겁고, 때론 고달플 것이다. 그러나 예전만큼 처절하거나 고독하지는 않으리라.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 남은 희망처럼 그들의 삶 속에는 푸른 미나리가 밭을 이루고 있을 것이므로.
+) 알면 재미있는 기독교적 관람 포인트
1. 제이콥은 히브리어로는 '야곱'이다. 약삭빠른 야곱은 신의 사자와 씨름을 하여 신의 인도와 번영된 삶(땅)을 약속받았다.
2. 데이빗은 히브리어로 '다윗'이다. 소년 다윗은 골리앗이라는 거인과 싸워 이겼고 이후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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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한 영화’는 ‘나쁜 영화’인가?
5★/10★
솔직하게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제라드 버틀러가 주연을 맡은 영화 〈분노의 추격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뻔하다. 줄거리는 이렇다. 별거와 이혼 위기를 겪는 부부가 아내의 고향집으로 향하던 중 아내가 사라졌다. 어떻게든 아내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은 남편은 다급한 마음에 경찰에 연락하지만 베테랑 수사관은 남편을 첫 번째 용의선상에 올린다. 아내에게도, 남편에게도 어딘가 구린 구석이 있는 듯 보이고 범죄 조직이 개입한 듯한 정황도 나온다. 남편과 경찰은 각자의 위치에서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진실을 좇고, 꽁꽁 감춰진 거대한 비밀은 영화가 끝날 때쯤 빗장 풀린 듯 쏟아져 모든 갈등을 해소한다.
사실 이런 유의 영화는 적당한 재미와 긴장을 선사하지만 전혀 새롭지는 않다. 〈300〉, 〈런던 해즈 폴른〉 〈지오스톰〉, 〈앤젤 해즈 폴른〉 등 극장에서든 영화 채널에서든 제라드 버틀러가 출연한 영화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새로움, 전위성 등 예술적 가치에 초점을 맞췄을 때, 이 영화는 분명 낙제점이다.
그러나 새로움과 전위성만이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익숙한 쾌락’이 더 끌릴 때가 있는 법이다. 만약 내가 이 영화를 돈을 내고 극장에서 봤다면 솔직히 짜증이 났을 것이다. TV와 OTT에서 얼마든지 대체재를 찾을 수 있는데 왜 굳이 비싼 돈을 주고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금요일 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맥주 한 잔 마시며 TV나 OTT에서 이 영화를 봤다면 꽤 만족했을 것이다. 새로움, 전위성을 가진 영화는 영화의 메시지와 기법을 직접 느끼고 소화하는 데 정신적‧신체적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익숙한 쾌감’을 제공하는 영화는 아무리 지친 상태라도 편안히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평론가들이 이런 유의 영화에 박한 것도, 관객들이 평론가들을 욕하며 영화와 자신의 감상 경험을 옹호하는 불만에도 모두 나름의 합리성이 있다. 이들은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이 다를 뿐이다. 영화를 보는 단 하나의 기준 따위는 없다.
〈분노의 추격자〉는 모든 장면이 익숙하다. 하지만 이 말은 〈분노의 추격자〉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능숙히 활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만듦새도 매끄럽다. 즉 ‘익숙하고 편안한 쾌감’을 원하는 관객에게 이 영화는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제라드 버틀러의 필모그래피의 관점에서 봤을 때도 흥미로운 점이 있다. 대체로 액션이나 스펙터클에 치중한 그의 전작과는 달리 이 영화는 심리 스릴러적인 요소가 제법 강하다(그렇다고 액션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아끼는 관객이라면 〈분노의 추격자〉 역시 충분히 ‘새로울’ 것이다. 이제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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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으며 다시 만날 그 내일까지, 잘 지내자 우리
너와 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경기도의 어느 동네에 사는 세미와 하은이다. 세미의 마음이 두근댄다. 내일 수학여행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 한 번 밖에 없는 날이다. 즐길 준비만 하면 된다. 하지만 세미의 수학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둘도 없는 친구 하은이다. 하은이도 가면 안 되나? 수학여행을 가려면 경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하은이의 집은 그렇게 지갑 형편이 충분하지 않다. 수학여행에 가지 않는 하은. 세미는 불안하다. 세미의 수학여행에 하은이가 없다면 재미가 절반으로 급감하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방법이 없을까?
세미가 꿈에서 깼다. 불안한 마음이 생긴다. 안 그래도 수학여행 안 갈까 불안한데 꿨던 꿈이 생각하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불안감이 불안감을 낳는다. 사실 오늘 하은이는 자전거에 치여서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만약 심하게 다친 거면 어떡해? 선생님에게 조르고 조른다. "직접 가보면 되잖아!" 가보기로 한다. 하은이게 가는 세미.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기 시작한다. 하지만 세미의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기엔 너무 어렵다. 하은아. 난 널 사랑해. 너와 나, 행복할 수는 없는 걸까?
간단하고 먹먹하게
글쓴이는 이 <너와 나>를 올해 최고의 한국영화라고 생각한다. 2023년이 두 달이나 남았지만 이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이 영화가 가진 최고의 미덕을 이야기할 때 사랑을 형상화하는 방식을 가장 먼저 써야 한다. 이 영화에서 오고 가는 마음은 빈 공간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예를 들어 세미의 성격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세미는 불안하다. 왜 불안할까? 영화를 보다 보면 이유가 너무 간단해서 알기 쉽다. 안 그래도 간단한 이유라 몰입하기 쉽다. 하지만 이 몰입하기 쉬운 공감대가 영화의 갈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갈등을 다루는 방식’이 영화의 핵심이 된다. 핵심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간단명료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간단명료해서 이야기가 와닿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갈등을 다루는 방식은 사실상 사랑의 속성을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사랑의 속성 중 하나는 존재와 부재의 차이를 돌이켜보면서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사라지면 아프다. 이 두 차이를 영화가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이 차이를 분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각본은 환상적이다. 어렵지 않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지켜야 할 선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소재가 있다. 한국의 현대사에 대한 부분인데, 이 소재를 구체적으로 적는다면 아마 스포일러가 될 것이다(그러나 조현철 배우가 2022년 백상예술대상 남우조연상 수상 후 수상소감에 언급한 걸 아는 분들은 걱정하지 마시라. 사소한 스포일러다). 이 영화는 이 소재를 다루면서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절한 선을 지키고 있다. 우선 이 영화가 이 소재를 다루는 건 합리적이다. 이 영화 자체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성을 탐구하면서 사랑의 빈자리를 주로 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서로가 있다 간 빈 공간을 묘사하는 데 있어 이 사건을 분기점으로 찍는다는 것에 효과적이다. 이야기 소재가 서사에 의미가 생겼다. 이 일이 단지 재미있게만 쓰이지는 않은 것이다. 또 이 영화가 대화하는 방식이 있다. 이 영화는 하은이가 세미에게, 또 세미가 하은이에게 하는 말에 관한 영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때 두 사람이 처한 입장을 생각해 본다면 이 영화의 핵심이 우리가 아는 이 사건의 한 부분과 본질적으로 어울린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 영화에 수많은 이미지들이 들어간다. 거울이나, 시선이나, 동물 같은 것들이 영화에서 상징이나 암시로 들어간다. 하지만 이 상징 중에 ‘들어갈 법 한데 없는 티조차 나지 않는’ 이미지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조현철 감독이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섬세한 관찰력이 돋보인다.
다른 관점에서 윤리적인 선을 지킨다는 점 역시 훌륭하다.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이 부분들이 군더더기가 되어 감정발화의 목적으로 쓰이지 않았다는 점이 탁월하다. 영화에서 억지 신파극이 없었다는 의미다. 만약 이 영화가 우리가 아는 신파극처럼 전개된다고 하면 작품의 진정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 후반부에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있던 일을 하나하나 돌이키다 문득 완벽히 혼자인 나를 발견하고 엉엉 운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관점에서는 그게 정말 슬플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그런 이야기 전개가 폭력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감정이입에서 오는 탄식이 아니라 상처받은 주인공을 보고 불쌍해서 울게 만드는 것이다. 후반부가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면 영화는 이 일을 단지 재미있으라고 사용한 셈이 된다. 영화가 후반부에 감정을 이입시키는 방식은 이 반대다. 사랑의 속성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인물들의 마음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껴진다.
빛과 카메라
영화는 전체적으로 꿈을 꾸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 아래에서 이뤄진다. 온갖 뮤직비디오와 브이로그, 드라마와 영화에서 몽환적인 분위기는 단골손님처럼 자주 사용됐다. 올해 초에 개봉했던 영화 중에서도 이를 찾을 수 있다. <가가린>은 영화가 주인공의 꿈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 연출법이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다. 영화의 핵심과 등장인물의 처지가 어울리기 때문에 작품의 잔상이 관객에게 오래 남는 것이다. 이 <너와 나>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이야기 내적으로 왜 몽환적인 분위기를 품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후반부에 설명한다. 이 ‘빛을 활용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든 이유’의 질의응답이 영화 내적에서 너무 간단하기 때문에 작품의 화법이 간단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이야기가 꿈처럼 느껴지는 것이 정서적으로, 이야기 상으로도 분명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인물을 담는 방식도 흥미롭다. 영화의 몇 장면을 보면 카메라는 불필요한 모습도 담는 것처럼 보인다. 거울과 관련한 장면이 그렇다. 영화의 두 번째 장면에서 카메라는 거울을 비춘다. 그런데 거울을 비추는 인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인물을 직접 찍지 않은 것이다. 또 이 영화의 카메라는 단순히 이야기 내에서 인물들끼리 움직이는 모습을 찍는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과 대화하는 세미와 하은이의 모습을 보여줄 때 그 누구를 비추지 않고 두 주인공을 비춘다던가, 세미의 시점을 보여주는 장면이 많았다는 점이 그렇다. 이 장면은 왜 인물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설명한다. ‘전지적 카메라 시점’이 되는 셈인데, 이 역시 영화에서 분명한 이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촬영과 연출의 강점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었다.
하은이와 세미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김시은, 박혜수 배우는 생동감이 넘치는 연기를 보여줬다. 하은이를 맡은 김시은 배우는 <다음 소희>에서의 연기보다 더 좋았다. 김시은 배우 입장에서 <다음 소희>에서의 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소희가 서서히 잠식된다는 연출은 이 실제 배우가 이런 경험이 없다면 구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너와 나>의 하은 역은 이 전제조건에서 더 나아가는 연기를 보여준다. 이 인물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이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선에서 활짝 피고 미끄러지는 연기를 보여준다. <다음 소희>에서 연기도 보이면서 그 작품에서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다 읽고 연기를 했을 텐데, 이 입장에서 보면 김시은 배우가 ‘어떤 마음이셨나요?’ 물어보고 싶어 진다.
다른 주인공인 박혜수 배우 역시 탁월하다. 세미의 연기는 감정적으로 깊었다. 세미의 캐릭터는 하은이에 비해 단순하다. 세미는 사랑에 진심이다. 사랑에 진심이면 당연히 서투르다. 서투르기 때문에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너무 드러났다. 이 인물 묘사를 다른 관객 분들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다. 박혜수 배우는 이 이기심일지도 모를 마음을 내내 분출한다. 하지만 밉지 않다. 이 ‘밉지 않다’라는 거리감은 영화의 감정이입과도 이어진다. 영화가 점층법처럼 사랑의 잔상을 서서히 밟아가기 때문에, 느슨해진다면 인물의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감정이입이 되야 보여주는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박혜수 배우는 이 영화에서 인물이 사랑에 빠진 순간이 가진 양면적인 특성을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를 거리감을 유지하며 보여준다. 이때 더 어떤 마음을 보여주면 관객이 ‘세미가 하은이를 사랑하고 있구나’ 느낀다는 걸 알고 연기하는 것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나 여타 드라마들에서 볼 수 없었던 배우의 섬세한 모습이었다. 아마 박혜수 배우가 이 작품을 계기로 더 좋은 평가를 받을 것 같다.
내 사랑아
사실 영화를 보면서 아쉽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긴 했다. 바로 이 영화의 카메오와 관련된 장면이다. 영화가 고등학생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또 유머를 넣으려고 했다는 것이 이야기에서 잘 느껴지는 편이다. 그래서 조현철 감독이 이 인물을 이렇게 묘사한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순간마저 이 인물이 이랬어야만 했을까?라는 데에는 의문이 있다. 관객의 입장에서 흐름이 약간 끊기는 듯했다. 인물이 중언부언하는 것이 이야기의 흐름을 흐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 장면이 두 개 있다. 후반부에 이 영화의 사건이 직접적으로 들어간 장면이 그랬고, 노래방에서의 장면이 그렇다. 두 장면 역시 글쓴이가 너무나도 좋아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을 이 장면들로 근거한다면 납득이 될 것 같다. 이렇게 이 영화는 약점 같은 부분이 없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글쓴이가 생각하는 올해 최고의 한국영화다. 사랑이 왔다간 자리를 돌아본다는 점에서, 그 사랑의 의미를 우리에게 묻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누구나 이 영화와 같은 일을 겪는다. 너무나도 당연한 문장이다. 하지만 이 당연한 문장 아래에 우리가 무시할 수도 있는 여러 가지의 아름다움이 있다. 너와 나의 관계, 사랑의 의미,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들, 예술이 사회에게 던지는 위로, 우리 반드시 내일 다시 만날 테니 잘 지내자는 약속까지. 그 모든 의미를 영화는 가로지르며 따스한 온기를 건넨다. 아마 글쓴이는 살아가다 이 영화와 관련한 무언가를 만나면 또 생각에 빠질 것이다(<헤어질 결심>처럼). 하지만 두렵지 않다. 이 영화와 꿨던 아름다운 꿈을 지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했고,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젠가 우리 꼭 다시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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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스타의 향긋함만이 머무른 자리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흐름에 따라 두근거리는 마음을 되새겨줄 한일 로맨스들이 차례로 개봉하고 있는 이번 달, 그중 바로 어제 극장가를 찾아온 영화 〈우리 사랑이 향기로 남을 때〉입니다. 자신감 제로로 연애도, 일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는 한 남자가 우연히 얻은 신비의 향수로 인해 삶이 바뀐다는 판타지를 다루고 있죠. 오래간만에 만나는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기대를 했었고, 시사회 초대를 받아서 하루 전날인 7일에 함께 초대받은 관객들과 감상했습니다. 포스터나 예고편에서 분위기가 좋았는데, 실관람은 어땠는지 나열해 보겠습니다. :)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인생에서 한 번쯤은 마법 같은 기회를 잡고 싶어”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창수, 그런 그에게도 하루에 한 번 행복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지각을 하더라도 같은 시간의 버스를 타며 스쳐지나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짝사랑하는 그녀를 만나는 일이었죠. 용기도, 자신감도 없던 그는 매일 마주쳐도 말 한번 건네지 못하지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죠.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앞에 이상한 일당들이 나타나고 그에게 의문의 향수를 하나 줍니다. 그리고 의심하면서도 짝사랑 그녀를 만나러 향수를 뿌리고 똑같이 출근하는 그의 앞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지는데...
예고편│ Trailer
영제: Love My Scent│감독: 임성용│각본: 윤정희
출연진: 윤시윤, 설인아, 노상현, 문지인, 이규복, 김영웅 외 多
장르: 멜로/로맨스, 코미디, 드라마│상영 시간: 108분
국가: 대한민국│등급: 15세 관람가
제작: (주)도깨비미디어 , (주)콘텐츠존│배급: (주)콘텐츠존, (주)다자인소프트
평점: 관람객 7.33, 네티즌 7.87, 평론가 4.0, 왓챠피디아 1.6
개봉일 2023년 2월 8일
“두 청춘스타의 상큼함”
윤시윤은 유 레이즈 미 업 에 이어 직장에서도, 짝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자신감이라곤 1도 찾아볼 수 없는 창수를 맡아 찌질남의 정석을 보여줍니다. 버섯이 떠오르는 파마머리부터 무릎이 헤진 정장 바지로 무장한 그는 초식남 그 자체의 모습이죠. 이런 순진하고 어설픈 설정은 전체적인 연출 분위기와 연결되어 과거 유사한 연기를 많이 했던 차태현 배우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아름다워를 떠올려보면 그런 순정남 계보를 이어가는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
설인아도 선택적 차도녀 스타일의 조아라를 맡아 드라마에 이어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케미를 완성시킵니다. 향수가 매개체였긴했지만 과감하게 직진하는 당돌함과 뒤늦게 이불킥하는 소심한 솔직함까지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죠. 캐릭터면에서 창수와 아라라는 청춘스타의 이미지가 잘 부합하면서 극의 풋풋함을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특별출연한 김수미, 윤정수, 윤다훈, 절친과 직장 동료로 나온 문지인, 이규복, 김영웅이 지지부진해지는 전개에 웃음 포인트를 남겨주었죠. 배역은 작지만 보이는 장면에서 톡톡히 제 역할을 해주는 배우들 덕분에 두 사람이 더욱 돋보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재밌는 게 없으니까 재미가 없는 거야”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연출적인 요소들이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쯤에 머무른 듯한 투박하고 올드 한 느낌이 물씬 납니다. 향수라는 매개체를 아예 코믹적인 요소로 카툰 형식을 빌려 과장시키거나 오버스러운 상황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면 선명하게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약간의 스토킹적 인물을 배치해 실험에 무게를 두면서 향긋한 설렘이 있던 로맨스가 나아가지도 머물지도 못하는 지진부진한 상황으로 끝맺게 되죠. 그래서인지 소소한 웃음도 있고, 청량한 청춘스타들의 케미도 좋았지만 그저 그런 로맨스로 기억될 것 같아 개인적으로 좀 많이 아쉬웠습니다. 아라의 대사처럼 말이죠. ;ㅅ;
한 줄 평 : 기화되는 향기처럼 사로잡지 못한 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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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과 외면 사이
<퀴어(Queer)>(루카 구아다니노, 2024)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 본문의 원작 인용들은 윌리엄 S. 버로스의 <퀴어> 2020년 번역본과 <정키> 2009년 번역본에서 가져옴 (모두 펭귄클래식 코리아 발행, 조동섭 옮김)
윌리엄 리와 윌리엄 리
안드레 예치먼이 <그해 여름, 손님>에서 엘리오 일인칭으로 서술하는 경험, 생각과 감정은 편견과 혐오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부모님도 완전한 안전지대는 아니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엘리오의 심리나 올리버의 퀴어쉐임 등을 모호한 비언어적 표현에 함축하고 나머지는 미화하는 각색을 택한다. 영화의 엔딩, 모닥불 앞에 있는 엘리오가 회상하는 기억을 재현함에 가까워 보인다.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화면에는 풍화된 그대로 아름다운, 그 여름 두 사람이 본 유물 사진이 흐른다. 리와 유진의 흔적이 남은 소품을 나열하는 오프닝을 연출하는 <퀴어>는 언뜻 그와 유사한 방향을 따르려는 듯하다. 허나 그 사이에는 -윌리엄 버로스가 리의 공포를 은유하는 상징으로 사용했던- 지네가 기어다닌다. 실제처럼 보이지만 대부분 미화된 기억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환상과 환각을 구현해 수면 아래의 모순된 상태와 정서를 드러내는 <퀴어>는 어쩌면 처음부터 나란히 두고 보기 어려운 영화들인지도 모른다.
“너 퀴어 아니지? You’re not queer, right?” 화면에 등장한 리가 가장 처음 뱉는 대사다. 이미 스스로 부정의 답을 짐작하는 의문문에 담긴 단어, “queer”, 영화 <퀴어>에 대해 말하려면 이 표현에 대해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퀴어> 속 “퀴어”는 일단 게이를 일컫는 당시 멸칭, ‘남성을 사랑하는 남성’보단 ‘남성과 늘 자고 싶어하는 (비정상적인)남성’에 가까운 뉘앙스의 말이다. 허나 모욕하고 공격하려는 의도로 밖에서 안으로 꽂히는 언어와, 내가 그렇다고 드러내기 위해 발화하는, 혹은 커뮤니티 내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아주 같지는 않을 테다. 남들이 아무리 ‘퀴어’가 무엇이라 떠들어도, 퀴어로 정체화했거나 해 나가는 과정에 있는 개인 각각의 경험은 다른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니 1950년대 멕시코시티에서 윌리엄 리와 그 친구들이 자신과 주변인을 일컫는 “퀴어”는, 말하자면 수치심, 혐오, 자기학대, 갈망와 미세한 자긍심의 꼭짓점을 이은, 회전하고 변형되는 비대칭의 도형 가운데에 놓인 복잡한 정체성의 언어다. 이를테면 조는 남성들과 맺은 관계를 거리낌없이 이야기하면서도 자꾸 상대방이 물건을 훔쳐가게 (사실상) 내버려두고, ‘그린랜턴’의 “screaming fags”(이러한 표현들은 오히려 원작의 것을 순화한 편이다.)를 낮잡아 이른다. <퀴어>는 이런 상태와 감정, 역사를 숨기지 않는다.
여기서 출발해 리를 이해해보자. 거의 모든 배경음악은 리의 심리를 반영한다. ‘이래서 퀴어와는 친구하기 어렵다’던 두 남자의 뒷말 후 늘어지던 음울한 음악은 곧 ‘Come As You Are’(Nirvana)로 이어진다. 이 강렬한 곡이 유진과 마주치기 이전부터 시작되는 까닭은, 그 찰나의 경험에서 발생한 에너지가 번져 리를 물들여서다. 유진과 함께 걷던 도중 흘러나오던 재즈(변주가 많은, 틀린 음은 없다는)는 리가 거실 전등을 켜자마자 뚝 끊겨버린다. 리가 테이블에 도구를 늘어놓고 익숙하게 약물을 준비하는 긴 숏에서 흐르는 것도 처음엔 정적이다. 약을 주사하면 들리는 것은 ‘Leave Me Alone’(New Order). (흥미롭게도 <본즈 앤 올>이 뉴 오더의 전신 조이 디비젼의 ‘Atmosphere’를 삽입한 것과는 사뭇 구별되는 쓰임이다.) 화면 사이드에 우울하게 머무르던 리의 얼굴이 컷된 후 뒤따르는 건 술병과 잡동사니가 널린 거실 전경. 인식의 중심에서 스스로를 밀어내는, 자신을 돌보기를 거부하는 상태. 리의 손이 늘 지저분한 건 단지 ‘중독자라서 물을 기피하는 탓’(-<정키>)만은 아니다. 그가 자주 장황한 스토리텔링을 전시하는 건 나르시시즘보단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행위로 보인다. 레스토랑에서 그가 뱉은 “homosexual”을 듣고 옆 테이블 여성이 기겁하는- 리는 그런 취급을 유도하며 자신을 공격한다. 한편으로 그는 교감을 바란다. 리가 ‘보보’를 인용한, “지식과 성실과 사랑으로 편견과 무지와 증오를 극복할 의무가 있다”는 말은 원작에서 보보의 끔찍한 죽음에 관한 묘사로 이어진다. 그 묘사를 잘라내고 인용하는 영화 <퀴어>가 다다르는 곳은 버로스의 자학적 ‘공연 무대’도 아니고 <네이키드 런치>(1991)가 같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이끄는 장소와도 다르다.
윌리엄 버로스가 쓴 ‘대사’의 상당부분을 그대로 가져온 <퀴어>가 추측하거나 각색하는 중요한 지점은 리와 유진의 서로에 대한 감정이다. 먼저 버로스 자신은 리의 사랑을 의심했고 유진은 애초에 퀴어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는 1985년에 덧붙인 프롤로그에서 유진을 “유령 같은 존재”, 리가 고른 “실패할 대상”으로 묘사한다. “리가 앨러턴에게서 찾는 것은 다름 아닌 관객”, “앨러턴은 어쩔 수 없이 그 이야기들에 찬성하는 뮤즈의 역할을 떠안은 채 그 안에서 당연히 불편해한다.” 버로스는 리의 갈망은 사실 유진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적는다. “자신이 정말로 바라는 것은 성적 접촉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리는) 기꺼이 어떤 일이라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p.14~19)
<퀴어> 이전 리의 약물 중독을 다룬 <정키>에서 버로스는 동성애를 은근히 그리고 꾸준히 약물 중독과 동일선상에 놓는다. 하지만 ‘나를 포함하지 않는 무리’를 관찰하듯 서술된 이 경멸들은 반사돼 그 자신을 겨냥하는 것처럼 읽힌다. 영화 <퀴어>, 리의 어떤 환각에는 팔에 주사를 꽂은 여성의 나체 상반신이 등장한다. 리의 손이 몸을 쓰다듬자 그는 비웃으며 묻는다, “당신 퀴어 아니야?”, 리의 손은 답한다, “난 퀴어가 아니야, 그저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거지.just disembodied.” 자신을 퀴어라고 전시하는 리는 내심 성적인 이끌림을 “정신과 분리된” 육체적 욕구로 좁혀 인식하며 약물중독에 비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리는 사랑을 느끼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동시에 제 사랑을 의심하고 그것을 깎아내리는, 모순된 상태에 놓여 있다. 초반 영화는 펍에서 조의 이야기를 듣던 리가 홀로그램화되는 초현실적 연출을 넣은 바 있었다. 이 꾸준한 disembodiment의 감각에 숨은 심리는 버로스 자신의 글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정키>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약의 효과는 특별한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 어쩌면 나는 내가 마약과 대마초와 코카인에서 찾고 있었던 것을 야헤에서 찾을지도 모르겠다.”(<정키>, p.258) 구아다니노와 커리스케츠는 이 모호한 서술에 닿아 있는- 리의 동성애가 약물중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기성사회가 비정상으로 낙인찍은 자신을 달리 바라보려는 시도, 그리고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갈망의 발현 중 하나가 약물 사용이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다시 오프닝 크레딧으로 돌아가면, 그 마무리에 리가 쓴 글은 삼차원의 반투명한 결정으로 형상화된다. 평면 종이에 쓰인 소설 결말부에 위치한 입체적 미궁, 스스로도 ‘<퀴어>를 쓴 정확한 동기를 알 수 없다’는 버로스의 고백, 영화 <퀴어>는 그런 실마리들을 발견하고 풀어내, 리와 유진을 어쩌면 원작자가 의도한 바와는 사뭇 동떨어져 있으나 그의 무의식과는 포개질지도 모르는 새로운 인물들로 재구성하고 있다. ‘퀴토에서 산 단검을 갈러 가는 길에 눈물을 흘린’(p.23) 버로스의 경험을 영화는 나체 여성 이전에 배치된 꿈 안에 레퍼런스한다. 하지만 버로스가 유진을 바로 그 (리가 자신을 찌르는) 칼에 비유했던 반면, 영화에서 리의 꿈은 상징들을 경유해 유진의 얼굴로 수렴한다.
<퀴어>(2024)
윌리엄 리와 유진 앨러턴
<퀴어>의 베드신들은 리의 심리, 리와 유진의 관계 역학을 드러낸다. 전갈 목걸이를 한 젊은 남자는 리를 바라보며 옷을 벗지만, 리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옷을 벗는다. 섹스 후 남자가 ‘가봐야 한다’고 말하자 리는 주저하며 몰래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가 다시 넣는다. 남자는 인사를 건넨 후 망설임 없이 방을 나간다. 서로 원해서 보낸 하룻밤인데 리는 상대방과 자신이 동등하지 않다고 느낀다. 첫눈에 반한 유진을 대할 때도 이런 감각은 늘 자리한다. 리는 유진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면서도, '유진은 나와의 관계를 원치 않는다'고 어느 정도 단정한다. ‘유진을 어루만지는 상상의 손길’은 이미 일부 단념한 와중 어쩌지 못하는 이끌림을 시각화한다. 이들이 실제로 닿는, 유진이 리에게 기꺼이 응하는 섹스들은 유진이 술이나 잠에 취해 있을 때 이루어진다. 두 사람의 첫 베드신엔 이들의 관계 역학이 묻어난다. 리는 유진을 올려다보며 오럴 섹스를 해주는 반면, 유진은 리를 내려다보며 손으로 애무한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유진이 담배를 물자 리가 성냥을 긋고, 유진이 리의 바지 지퍼를 천천히 열면, 얼어 있던 리가 끝까지 탄 성냥을 서둘러 끈다. 리는 늘 어쩔 줄 모르고, 먼저 스킨십을 주도하더라도 유진의 눈치를 보며 불붙인 성냥을 쥔 듯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다른 장면에서 유진은 리가 키스하려 하자 초연하게 응한다.(“If you insist.”) 이들이 키스한 직후 영화는 행위의 묘사를 생략하고 리가 기다리는 가운데 유진이 이를 닦는 숏으로 넘어간다. 리와 키스했기 때문에 이를 닦는 듯한 편집, 이는 아마도 리의 관점이다. 여행중 관계 후 “너도 이 모든 걸 조금은 즐기는 거지?”라고 물으며 흐느끼는 리와 “그럼요, 물론이죠.”라고 답하며 몽롱하게 미소짓는 유진, 영화는 그들의 표정을 클로즈업해 맞닿은 시선을 확인시켜주지 않는다. 마주놓인 얼굴들은 어쩐지 어긋나 있는 것 같다. ‘사랑을 나눈’ 후에 리는 늘 유진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려 하지만 유진은 둘만의 공간을 기피하거나 리의 손을 걷어내곤 한다.
허면 리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유진 앨러턴은 무엇을 느끼는가. 앞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대부분 미화된 엘리오의 기억이라고 적었다. 허나 영화에는 그 ‘대부분’에 해당하지 않는, 엘리오의 시선 사각지대에 머무는 올리버의 순간들이 있다. 올리버, 그리고 <본즈 앤 올>의 리, 이들은 일인칭의 소설들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독립된 상대방의 자리를 얻는다. 약혼으로 인해 관계는 종료되지만 올리버는 엘리오의 기억으로 흡수되고, 자신의 요청으로 먹힌 리는 매런 안에 상징적으로 살아남는다. 리의 시야를 벗어나 사라지는 <퀴어>의 유진은 이들과도 구별되는 위치에 있다. 전지적 작가가 서술하는 원작의 유진은 리가 그 심리를 파악하는 자, 리의 반영이고 자기학대 수단이었던 반면, 영화 속 유진은 모를 존재다.
앞서 언급한 첫 베드신엔 다른 포착도 있다. 리는 유진이 침대 가에 놓아둔 안경을 저도모르게 떨어뜨리게 만드는 자다. 영화는 이렇듯 작은 언행들을 섬세하게 각색하고 추가하며 원작과 별개의 유진을 쉐이핑한다. 원작 속 여행 중에 찾은 해변에서 유진은 물에 들어가길 거부하지만, 영화에서 누워 있는 리를 물로 끌어들이는 건 유진이다. 원작에서 리가 춥지 않냐고 묻자 유진은 춥다고 답한 후 (자신도 추우므로, 마지못해) 곁으로 오라고 하지만, 영화에서 유진은 춥지 않음에도 리를 곁에 오게 해준다. 저절로 움직인 다리로 건드리는 안경, 미처 참지 못한 눈물 한 방울- 언어로 설명되지 않고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찰나들을 영화는 포착한다. 유진이 리를 만날 때 곧잘 느끼는, “기분이 나쁜데도 그 이유를 꼬집을 수 없는”(p.47) 상태를 영화는 리의 탓이 아니라고 재해석한다. 리에 대한 유진의 맞사랑을 증명하려는 것이라기보단, 유진이 계속해서 낯선 감각을 느끼면서도 부정하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육체이탈/불일치”로 투명해지는 느낌, 그것은 야헤를 흡입한 후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거울처럼 마주보는 리와 유진에게서도 관찰된다. 유진 역시 리에게 “Lee, I’m not queer, just disembodied.”라고 말한다. 이것은 리의 내면의 반사일까, 아니면 리가 겪은 것과 유사한- 유진의 모순된 심리일까. 시청각이 차단된 채 춤추는 그들을 담는 화면에는 다만 시각화된 촉각만이 남는다. 살이 엉겨붙고 유기체처럼 움직여, 이내 각자의 심장을 뱉어낸 두 사람은 심장 모양으로 웅크린 한 덩어리가 된다. 이 “talking without speaking”은 앞서 바다에 들어간 두 사람이 물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접촉해, 입을 열지 못하는 상태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이 직후 베드씬을 삽입했고, 그 다음으로는 유진이 리를 밀쳐내는 상황을 이은 바 있었다. 이 흐름처럼, 야헤에서 깨어난 리가 눈물을 흘리며 유진을 부르자 유진은 ‘자라’며 대화를 차단한다. 유진의 감은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리에게 닿지 못한다. 유진의 ‘목소리’가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장면은 그의 시점숏도, 텔레파시 고백도, 어쩌면 그들의 초현실적 댄스조차 아니다. “네가 어젯밤 널 봤어야 했는데”라며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는 닥터 코터의 시선을 받아내는 얼굴. 늘 여유로운 미소만 짓던 그가 불안과 경계심을 내비치는 순간. 이것이야말로 <퀴어>가 원작을 초월해 짐작한 유진의 솔직한 ‘목소리’다. 영화는 무방비한 유진을 잠깐 화면에 묶어두었다가 이내 놓아준다. 정글에서의 모호한 분리 이후 등장하는 유진 혹은 유진에 관한 말들은 실제의 유진이 아니다.
본인조차 스스로를 완전히 모르는 자이기에, 유진은 무언가의 투영이 아닌 온전한 상대방이다. 그는 리의 환상이 건축한 폐쇄된 공간에서 리가 쏜 총에 맞아 죽고 나서조차 증발한다. 허나 좀처럼 파악되지 않던 상대방이 건넨 실제의 터치 하나, 그것만은 리에게 남는다. <퀴어>가 주목하는, ‘리가 죽을 때까지 살아남는’ 촉각은 오히려 성적인 의도가 그다지 없는 접촉에 의한 것이다. 금단현상 탓에 덜덜 떨던 리의 가장 못난 찰나를 감쌌던 유진의 다리. 남성들과 맺는 관계를 일종의 ‘중독’과 연결지었던 리의, (애초에 분리돼 있지 않았던)‘정신’과 ‘육체’를 이어주는 매개가 그 사소한 접촉이었던 게 아닐까. 화면에서 사라진 유진 안에 어떤 감각이 살아남아 있을지, 그건 모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퀴어>의 엔딩은 리에게 있어서는 꼭 비극인 것만은 아니고, 유진에게는 열려 있다. “한 번 문을 열면 돌이킬 수 없어. 외면하는 수밖엔 없지. 그런데 그럴 이유가 있어?But why would you?”(-코터) 어떤 ‘인정’은 안락함에서 벗어나는, 불편함을 응시하는 행위다. 사랑과 욕망을 인지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꾸 괴롭히고 부정하게 되는 리와, 감정과 정체성을 외면하기에 편안하게 존재하는 동시에 ‘까닭없이 불편해지곤’ 하는 유진, 일치와 불일치 사이 간극에서 방황하는 두 인물을 탐구하는 <퀴어>는 사실 영원히 완결되지 않는 영화가 아닐까.
<퀴어>(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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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페달을 밟던 여름들
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걸어서는 닿을 수 없는 드랭블루아
- 같은 선에 서있는 앙토니와 아신. 같은 계층인 두 사람
- 앙토니의 짝눈, 외모 변화가 가지는 의미
- 아빠의 바이크, 자켓의 의미. 엔딩 해석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 (And Their Children After Them, 2024)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페달을 밟던 여름들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성장, 로맨스
러닝타임 : 145분
감독 : 뤼도릭 부케르마, 조란 부케르마
출연 : 폴 키르셰, 앙젤리나 워레스, 질 를르슈, 사이드 엘 알라미
개인적인 평점 : 4 / 5
쿠키 영상 : 없음
1992년 여름 동부 프랑스. 기어가는 벌레, 날아가는 파리 소리마저 크게 들릴 만큼 고요한 숲속 호수. 그 근처를 맴돌고 있던 15세 소년 앙토니는 지루함을 느낀다. “심심해 죽겠어.” 앙토니의 말 한마디가 정적을 깬다. 앙토니와 사촌은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보트를 훔쳐 강너머 누드비치로 향한다. 앙토니는 그곳에서 부유한 집안의 딸 스테파니를 만나 사랑을 느끼고 그의 세상에 편입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다.
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신인배우상 수상 소식 이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큰 관심을 받은 영화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은 다양한 계층 갈등과 소년의 사랑, 성장을 담고 있는 아름다우면서도 아릿한 이야기다.
한여름에 만난 첫사랑과 설렘, 일탈과 만취의 짜릿함, 무모한 걸 알면서도 내뻗어보는 주먹, 바이크를 타고 시원하게 내달려보는 숲길, 그 아래 흐르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록 음악. 이 영화엔 청춘의 치기와 여름의 낭만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것을 모두 전복시키는 무거운 현실의 불편함도 함께 담겨있다.
앙토니는 특별할 것 없는, 사실 평범하다기엔 조금 모자란 집안에서 자란 소년이다. 제철 공장에서 일했던 아빠는 술독에 빠져 폭력성을 드러내는 일이 잦아졌고 집안 경제를 함께 책임지고 있는 엄마는 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힘이 없는 두 부모는 바이크와 여행이라는 꿈을 접어두고 현실에 한껏 휘둘리고 있다.
아직 어린 앙토니는 이런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 고향을 떠나 텍사스로 가고 싶고 걸어서는 갈 수 없는 부촌인 드랭블루아에 사는 스테파니와 친해지고 싶다. 하지만 앙토니는 몇 번의 여름을 지나며 알게 된다. 타고난 운명을 벗어나 새로운 계층으로 편입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걸어서는 닿을 수 없는 드랭블루아
앙토니와 스테파니의 동네가 의미하는 것스테파니는 앙토니와 사촌을 드랭블루아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한다. 그런데 앙토니의 집에서 드랭블루아까지 가려면 꼭 바이크가 필요하다. 앙토니는 파티를 포기할까 고민하다가 아빠 몰래 바이크를 훔쳐 타고 파티에 가기로 결심한다. 바이크를 끌고 나오는 앙토니를 발견한 엄마는 앙토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아기곰, 인생이 언제나 재밌는 건 아냐.”
앙토니는 엄마가 대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엄마를 뒤로하고 사촌과 함께 바이크를 타고 파티로 향한다. 모르는 얼굴들 사이를 헤매던 앙토니는 스테파니와 친구들 앞에서 보란 듯 약을 한번 들이켜고는 아주 조금 그들의 세상에 녹아든다.
앙토니는 스테파니와 친해지고 싶다. 그런데 그 바람이 이루어지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앙토니는 파티에서 스테파니 무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약을 먹고 스테파니를 따라 수영장에 뛰어든다. 그리고 스테파니 무리가 무시하는 유색인종 아신에게 발을 걸기까지 하며 그들과 친해지려 한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앙토니가 붙여준 담배를 물고는 금방 파티 주최자 시몽과 함께 사라지고 앙토니가 한 발자국 다가가 키스를 시도하자 그를 밀쳐내며 거리를 벌린다. 앙토니는 나름 열심히 노력했지만 파티가 끝난 후 남은 건 도난당한 바이크의 빈자리뿐이다.
앙토니는 소외된 집안의 아들, 스테파니는 부유한 집안의 딸이다. 두 사람 사이엔 가난한 집안과 잘 사는 집안이라는 계층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어린 앙토니는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스테파니에게 사랑을 표현하지만 매번 다른 이유로 실패한다.
앙토니와 스테파니가 들판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 두 사람은 앙토니가 살고 있는 가난한 동네와 스테파니가 살고 있는 부유한 동네를 주제 삼아 이야기를 나눈다. 앙토니는 가난한 동네엔 나체족 집시들이 캠핑카에 모여 살고 있다고 운을 뗀다. 이때 스테파니는 자신도 어릴 때 할머니와 잠시 그 동네에 살았는데, 그때 스테파니의 아빠가 담장을 쳐서 들판에 있는 나체족을 안 보이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스테파니와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확실히 분리되어 있음을, 그 동네에 사는 앙토니와 스테파니 또한 가까워질 수 없음을 알려주는 말이다.
같은 선에 서있는 앙토니와 아신
앙토니와 아신은 파티에서 처음 만난다. 앙토니는 부잣집 백인 아이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아신에게 발을 걸며 자신은 그와 다른 계층의 사람임을 주장한다. 그런데 앙토니에겐 슬픈 일이지만 사실 앙토니와 아신은 ‘소외된 사람’이라는 같은 계층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계층은 두 사람의 아빠 세대부터 이어진다. 앙토니와 아신의 아빠는 제철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였고 노동자와 이민자로 상위층보단 하위층에 속한 삶을 살아왔다. 아빠들과 다른 시대를 살아온 앙토니와 아신은 이런 접점이 없어 일찍 친구가 되지 못하고 서로를 오해했을 뿐이지, 결국 두 사람의 삶은 비슷한 길로 흘러간다.
바이크 사건 이후 앙토니와 아신은 오해를 쌓아간다. 앙토니에게 앙심을 품은 아신은 바이크를 불태워 돌려주고 화난 아빠에게서 도망친 앙토니는 다른 바이크를 타고 그를 찾아가 총을 겨눈다. 겁먹은 아신은 오줌을 지리고 앙토니를 반드시 죽일 거라 다짐한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서있는 바닥을 보면 중앙에 그어진 선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보통 두 사람을 충돌시키거나 그들의 다름을 표현하는 경우엔 선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팽팽한 대립이 일어나는 신임에도 불구하고 앙토니와 아신을 같은 선 위에 나란히 세워놓는다. 앙토니와 아신이 같은 선 위에서, 같은 계층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연출은 이후 96년에 앙토니의 아빠 파트리크가 호수로 들어가 자살하는 장면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다.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실감한 파트리크는 삶을 끝내기 위해 스스로 호수로 걸어들어간다. 이때 위에 있는 달빛이 물에 반사되어 마치 파트리크가 그 달빛 위를 걸어가는 듯한 그림이 만들어진다. 아신은 그걸 지켜보다가 파트리크가 사라지자 그가 걸었던 달빛 방향을 그대로 따라 걸으며 그를 구하려 한다. 물이 깊어지자 뒤돌아 빠져나오긴 했지만 아신 또한 파트리크와 비슷한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암시하는 듯한 장면이다.
자신을 알아가는 앙토니앙토니의 짝눈, 외모 변화가 가지는 의미앙토니는 짝눈이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92년, 사촌은 “네 짝눈 때문에 여자들이 도망친다”라고 앙토니에게 장난 어린 디스를 한다. 앙토니는 그에 딱히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헛소리 말라는 듯 받아칠 뿐이다. 이때 앙토니는 앞머리를 길게 길러 자신의 짝눈을 반쯤 덮어두고 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며 앙토니에겐 외적인 변화가 생긴다. 사춘기를 상징하는 여드름의 흔적이 점점 옅어지고 머리는 점점 짧아진다. 그러면서 앙토니는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된다. 그는 마지막 여름이었던 의가사 제대 직후 스테파니에게 차였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짝눈을 제대로 의식하고 만져본다. 정말 짝눈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 건가? 생각하는 것처럼.
앙토니의 짝눈은 그의 외적인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가 가진 가난, 그의 계층을 상징하기도 한다. 짝눈을 머리카락으로 덮고 있던 92년의 앙토니는 자신의 가난과 집안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테파니에게 끝없이 사랑을 표현하고 도전하고, 아신과 같은 낮은 계층의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다.
94년 여름. 16세의 앙토니는 머리를 조금 짧게 자른다. 앙토니는 여전히 스테파니에게 구애를 하긴 하지만 스테파니가 받아주지 않자 이전에 자전거 앞을 막아세웠던 바네사를 찾아가 관계를 가진다. (바네사는 이웃사촌으로 앙토니와 같은 계층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도 이때의 앙토니는 자신을 쫓아오는 무언가에서 도망치거나 사랑하는 것을 쫓는 모습을 보여준다.
96년 여름. 18세가 된 앙토니는 군 입대를 위해 머리를 짧게 깎는다. 재회한 앙토니와 스테파니는 육체적 관계를 나누지만 구경꾼들에 의해 중단된다. 스테파니는 바로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고 앙토니는 헤드라이트를 따라 멀어지는 스테파니를 지켜보고만 있다.
98년 여름. 앙토니는 오랜만에 사회로 나와 사촌과 그의 아내, 아신, 스테파니를 만난다. 사촌은 부유한 뒤립씨 딸 클레망스가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이뤘고 아신도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있었다. 두 친구를 만난 후 앙토니는 아빠의 바이크를 훔쳐타고 드랭블루아에 가던 날처럼 아신의 바이크를 훔쳐타고 스테파니를 찾아간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우리의 사랑은 네 상상일 뿐이라며 단호하게 희망의 불을 꺼버린다. 계층을 넘기 위한 앙토니의 마지막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앙토니는 짝눈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계층, 현실을 확실히 인식한다. 그리고 지금껏 애써 품어온 희망을 포기하겠다는 듯이 훔친 아신의 바이크를 돌려주겠다는 연락을 남긴다.
아빠의 바이크, 자켓이 의미하는 것
앙토니는 바이크를 타고 달리며 자유로움과 희망을 느낀다. 시원한 바람과 그 뒤를 따라오는 새로운 삶을 향한 설렘. 그는 바이크를 타고 스테파니를 향해, 미래를 향해 달린다. 앙토니의 아빠도 언젠간 그런 삶을 살았을 것이다. 바이크를 타고 자유로움과 희망을 느끼던 삶.
하지만 아빠는 자신의 계층을 바꾸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아들은 아빠의 자켓을 입고 언젠가 아빠가 달렸을 그 숲길을 달린다. 그들(어른들)뒤에 남겨진 아이들은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세상이 변해 누드 비치는 누드 비치가 아니게 되었고 도시를 이끌었던 제철공장은 문을 닫는 변화가 생겼지만 사람들 간의 계층은 여전히 견고하다.
앙토니가 아빠의 바이크를 훔쳐 파티에 가던 날처럼 계층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즐거운 인생을 살면 좋을 텐데, 엄마의 말처럼 인생이란 언제까지나 즐거울 수 없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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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자단의 마지막 여정 엽문4 :더 파이널 [영화리뷰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엽문4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의 사용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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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푸른 호수> 메인 예고편
내 이름은 안토니오 르블랑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돼 ‘안토니오 르블랑'이라는 이름을 얻은 한 남자.
그에게는 누구보다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 ‘캐시'와 사랑스런 딸 ‘제시’,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가 전부다.
“나는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닙니다.”
어느 날, 억울한 상황에 휘말려 경찰에 붙잡힌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이민단속국으로 넘겨지고,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을 난생처음 알게된 그는 강제추방 위기에 처하는데…
가족을 지키고 싶은 그의 뜨거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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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엘리오> 2차 티저 예고편
지구의 대표 소년 우주에 가다!🌎💫 2025년 여름, 당신이 찾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엘리오] 2차 티저 예고편 대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