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 K2023-05-23 07:42:44
화려한 동시에 더럽고 추잡한 그 시대 영화판, 그럼에도 영화를 사랑한다고 외치고 울부짖는 (사랑보단 토로에 가까운) 고백
영화 <바빌론> 리뷰
위플래쉬, 라라랜드로 주목받은 감독 데이미언 셔젤의 최신작.
1920년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시기에 있는 영화계 인물들을 담는 이야기로, 말 그대로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판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면 뿐만 아니라, 더럽고 추잡한 똥과 오줌, 구토, 섹스가 난무하는 어두운 이면도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그렇기에 영화에 대한 고백은 맞지만, 사랑의 의미라기 보다 진실 토로의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정도 담겨있다.
영화가 어떻게 변하든, 영화 속 배우들과 제작자들이 떠나가든, 영화는 불멸하며 그러므로 영화에 관계된 모두는 불멸하며, 그에 대한 사랑도 불멸하다고 3시간 내내 강렬하게 호소하고 울부짖는 영화라 말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잊혀졌을 때 죽는 것" 이라는 원피스에서의 한 대사처럼, 영화 예술 또한 창작자들이 죽어도 그들의 예술은 불멸하기에 그들 또한 불멸한 것이다.
마지막 시퀀스는 영화의 정의와 본질을 아우르는 황홀한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라면 놓치면 안될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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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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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벤져스 1편 삭제씬 총정리
#산돌구름 #어벤져스1 #삭제씬
"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2021. 04. 08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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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인트로
00:34 마리아 힐 & 오프닝
01:35 외로운 캡틴
03:35 캡틴과 웨이트리스
04:37 경찰 비하인드
05:23 앤트맨 힌트
06:09 너무 오랜만에 찾아왔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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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행복의 나라> 2차 예고편
1979년 10월 26일, 상관의 명령에 의해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박태주’와 그의 변호를 맡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에 뛰어 든 변호사 ‘정인후’의 이야기 NEW는 영화, 음악, 드라마, 극장사업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의 분야를 아우르는 미디어 그룹입니다. NEW 영화사업부의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시고 NEW 영화 예고편, 미공개 독점 영상 등을 가장 먼저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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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리볼버> 공식 2차 예고편
"약속한 돈을 받는데 무슨 각오가 필요해” 꿈에 그리던 새 아파트 입주를 기다리던 경찰 수영은 뜻하지 않은 비리에 엮이면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면 큰 보상을 해준다는 제안을 받고 이를 받아들인다. 2년 후 수영의 출소일, 교도소 앞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윤선 뿐 수영은 일이 잘못되었다고 직감한다.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보상을 약속한 앤디를 찾아 나선 수영은 그 뒤에 있는 더 크고 위험한 세력을 마주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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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를 예열하는 탐정 느와르로 귀환하다
드디어 로버트 패티슨을 영화관에서 봤다. 사실 그의 작품을 해리포터 조연을 제외하고, 그가 주연으로 나온 작품을 단 한 개도 보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 <더 배트맨>에서 그가 연기하는 배트맨이 기대가 됐고, 그 기대는 옳았다. 배트맨 2년차의 브루스 웨인을 연기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찰떡이었다.
영화 <더 배트맨> 시놉시스
영웅이 될 것인가 악당이 될 것인가, 운명을 결정할 선택만이 남았다
지난 2년간 고담시의 어둠 속에서 범법자들을 응징하며 배트맨으로 살아온 브루스 웨인. 알프레드와 제임스 고든 경위의 도움 아래, 도시의 부패한 공직자들과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복수의 화신으로 활약한다. 고담의 시장 선거를 앞두고 고담의 엘리트 집단을 목표로 잔악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수수께끼 킬러 리들러가 나타나자, 최고의 탐정 브루스 웨인이 수사에 나서고 남겨진 단서를 풀어가며 캣우먼, 펭귄, 카마인 팔코네, 리들러를 차례대로 만난다. 사이코 범인의 미스터리를 수사하면서 그 모든 증거가 자신을 향한 의도적인 메시지였음을 깨닫고, 리들러에게 농락 당한 배트맨은 광기에 사로잡힌다. 범인의 무자비한 계획을 막고 오랫동안 고담시를 썩게 만든 권력 부패의 고리를 끊어야 하지만, 부모님의 죽음에 얽힌 진실이 밝혀지자 복수와 정의 사이에서 갈등한다.
* 해당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더 배트맨>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빛이 어디 있나요?
영화 <더 배트맨>을 다 보고 나서 영화관을 나오며 느낀 것은 ‘역시 빛은 좋은 것이다’, ‘사람은 빛 속에서 살아야 한다’였다. 영화 <더 배트맨>을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정말 형광등이든 자연광이든 빛 아래에 있는 씬이 거의 없다. 거의 모든 신이 밤거리에서 진행이 되기 때문에 어둠 그 자체의 모숨을 보여준다. 환경적으로도 거리의 어둠을 보여주면서 배트매느이 어두운 내면과 고담시의 어두운 환경이 합쳐지니 역대급으로 우울하고 침전하는 듯한 영화가 탄생했다. 어벤져스처럼 스펙타클하고 화려한 느낌을 기대한다면 그건 잘못 기대를 한 것이다. 덩말 우울, 침울의 끝판왕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나는 우울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럼에도 3시간 가량되는 이 영화를 다 볼 수 있었던 이유는 bgm이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 무거운 느낌이 강하게 들면서도 사람의 심장을 쪼이는 듯한 긴장감을 텐션감 높게 풀어내서 극도의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영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잘 풀어낸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공포를 예열하도록 하지...!
아직도 생각난다. 배트맨이 등장할 때마다 나오는 그 사운드. 둥두둥둥 둥두둥둥~ 의성어로 쓰니까 굉장히 하찮아 보이는데,,, 그렇지 않다. 영화 <더 배트맨>은 빠르지 않다. 배트맨이 배트카를 몰고 추격을 할 때도 빠른 박진감이라기 보다는 무거운 위압감이 더 잘 느껴지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빠르게 적을 공격한다는 느낌보다는 적에게 공포감을 최대한 실어주고 그 공포가 극한에 달했을 때 두둥~ 하고 나타나서 처단하는 타입이다.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bgm만 흘러나오는 그 공포, 그리고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는 들리는데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암흑에 대한 두려움을 너무나도 잘 활용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대사에도 나온다. “공포는 도구다.” 이 대사가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데 그 말을 너무나도 잘 이용하고, 두려움과 공포를 이용해서 무법자들을 처단하는 배트맨의 정의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암흑 속에 있는 배트맨의 감정을 나 혼자만 잘 구분을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영화 보다가 없던 야맹증 생기는 줄 알았다. 스크린이 아주 온통 시꺼멓다,,, 영화 <더 배트맨> 속 브루스 웨인은 우울과 부노 이 두 가지 감정만을 가진 사람처럼 비춰졌다. 평상시와 범죄자들을 처단할 때는 우울하면서도 침착한 상태로, 자신의 가문에 대한 비밀이 폭로될 때에는 분노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가문에 대한 비밀을 알고 좌절하면 무너지는 장면에서 조금 더 감정의 베리에이션을 줬더라면 왜 배트맨이 마지막에 스스로를 리벤저(복수)라고 일컫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희망이라고 말햇는지 더 설명이 잘 되지 안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복수가 곧 정의라고 믿으며 내가 바로 복수다라고 외쳤던 시그니처를 도시를 범죄로 물들인 자경단의 이비에서 똑같은 말을 듣자 나의 길이 잘못됐다는 허망함에 무너져서 정말 마지막 장면에서 누전되는 전깃줄을 자르면서 배트맨이 자살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벌떡 일어나서 조명탄을 터뜨리더니 사람들을 구하러 가는 모습을 보고,, 음,,? 나의 해석이 잘못된 것인가,, 다음 편에서 조금 더 감정의 변화와 그 폭이 다채로운 배트맨을 만날 수 있길 바란다. 우울에도 그 종류는 다채로우니 말이다.
영화 <더 배트맨>은 3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배트맨의 우울함에 함께 허우적대면서도 단 순간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작품이었다. 중간중간 번역이 왜 저렇게 됐을까? 늬앙스를 잘 살리지 못한 장면들이 곳곳에 있어서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충분히 역작이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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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영토, 그리고 사유의 영토를 넓히다
몇 년 전, 캐나다에 있을 때의 일이다. 페미니즘 모임의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What’s your pronouns?” 처음 들어보는 질문에 의미를 되물었다. 이는 자신의 젠더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묻는 질문이었고, 평생 자신을 여성으로 정의하고 살아온 나는 “She, her, hers”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오직 ‘시스 젠더 여성’으로만 정의될 수 있는 존재인가. 고민의 답은 사실 쉬웠다. 나는 생물학적 성별과 사회적 성별에 유리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읽고, 관련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도 누군가를 호명하는 법에 대해서 고민을 해본 적이 있던가. 결국 나는 사변적인 논의를 나눴을 뿐이었다. 어쩌면 두꺼운 책보다 나의 대명사를 고민하는 시간이 귀중했다. 나아가 타인의 대명사를 듣고, 그가 정의하는 그를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 또한 그랬다.
<장미의 행렬>은 1960년대 도쿄의 게이바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작품은 호스티스 중 하나인 에디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젊음과 아름다움으로 인기의 정점에 오른 에디는 바의 마담인 레다와 권력 다툼을 벌인다. 그들의 권력 다툼은 단순히 바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명의 남자를 두고 벌이는 치정극 또한 이 작품의 핵심 중 하나다.
두 명의 주인공은 겉보기에는 ‘여성’으로 패싱되는 인물들이나, 그들은 자신을 ‘게이 보이’라고 호명한다. ‘게이’도 ‘드랙 퀸’도 ‘트렌스 젠더’도 아닌 ‘게이 보이’. 그들의 호칭은 다른 어떤 단어로도 대체되지 못한다. 분명한 자기 긍정이 느껴지는 말들에 이 작품은 예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느꼈다. 사회의 주변부에 속함에도, 자신을 긍정하는 인물들의 삶이 마냥 비극적일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다름을 증명하는 장면은 에디의 샤워 씬이었다. 자신의 미에 도취된 에디. 그에게는 어떤 고뇌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고, 탐닉한다. 시대적 배경에 기반하여 퀴어인 주인공들의 삶이 그저 비극적일 것이라고 여겼고, 작품의 서사가 그정도에 그칠 것이라고 유추한 것은 나의 상상력의 빈곤에 불과했다. 여느 이의 인생이 그렇듯, ’게이 보이‘들의 삶에도 희비극이 녹아있었다.
이 작품이 희극을 묘사하는 방식은 특기할만하다. ‘게이 보이’들은 자기 자신으로서 ‘시스 젠더 헤테로 여성’들과 경쟁한다. 그것은 만화적인 방식을 빌려 구현되며 웃음을 자아낸다. 나아가 다큐멘터리적 방법을 차용하여 배우들을 비롯한 다양한 ‘게이 보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방법론도 인상적이었다. 픽션과 다큐멘터리, 실험 영화의 경계를 오가며 ’게이 보이‘들의 삶은 입체적으로 구현된다.
씨네21의 송경원 편집장은 전위 영화를 영화의 영토를 넓히는 가장 적극적인 표현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다양한 형식을 오가며 하나의 장르로 정의할 수 없이 오가는 이 작품은 전위 영화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히 형식의 놀이에 치중된 ‘전위 영화’는 아니다. 타인을 어떻게 ’호명‘할 수 있을 것인가. 작품에 있어 타인에 대한 ’존중‘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감독은 정답이 아닌 성실한 고민을 담아냈다.
과거 나와 당신을 호명하는 방식을 고민했던 순간을 넘어 이 작품을 만났다. 어쩌면 이 작품의 존재 가치는 단순히 영화의 영토를 넓힌 것만은 아닐지 모른다. 더 험난한 과거를 살아냈을 당신들이 투쟁 속에 만들어낸 작품에 빚을 지고, 나의 세계의 영토는 조금이나마 넓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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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늘 삼각형 안에."
*본 게시물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월부터 그렇게 보고 싶었던 영화 <슬픔의 삼각형> ?
안그래도 높은 기대, 더욱 더 재밌게 보고 싶은 마음에 예고편과 줄거리도 모른 채 씨네랩 시사회에 갔다. 첫 시작부터 강렬했으며 결말을 보고선 이마 짚으면서 상영관을 나왔다는,, 이 영화를 개인적인 감상평과 함께 한 줄로 남기자면 "새롭진 않았지만 새롭다"!!
⭐삼각형, 슬픔의 삼각형
영화에서 "슬픔의 삼각형"이란 단어는 한 번밖에 안 나온다. 그러나 제목으로 대두되었을 만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 30여분으로 1부~3부를 포함하므로 개인에 따라 '길게' 다가올 수도 있다. 이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영화는 관객에게 늘 외치고 있다, "우리의 삼각형은 여전히 그대로야."라고. 여성과 남성 / 부와 가난 그리고 끊임없이 딸려오는 '신분'이라는 고정된 꼬리표. 2023년이 된 지금, 피상적으론 '평등'을 표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의 삼각형은 불변한다,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아픔을 1부부터 3부까지 우스꽝스럽고도 잔인하게 표현한 이야기 아닐까 싶다.
우리는 슬픔의 삼각형 안에서 살고 있다. 위로 가든, 밑으로 가든 어쨌든 삼각형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대체 무엇을 바라고 평등함을 표하는 동시에 서로를 이렇게 미워할까. 특정 인물들에 공감을 하기도, 혐오감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새로운 익숙함
사실 드라마 <석세션>부터 시작해서 부와 가난 등의 차별 등을 비꼬는 미디어 콘텐츠들을 수없이도 많이 봐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새로웠다. 이목을 집중시켰던 1부, 보는 내가 아찔했던 2부 그리고 무한한 불안감으로 끝내었던 3부. 개인적으로 3부 결말로 본 영화를 n차 돌 생각이 충분하지만...! 영화가 다소 길었다. '그들만의' 다큐멘터리를 조용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기분. 한 마디로, 무서사가 만들어낸 서사였다. 피식거리던 웃음은 곧 슬픔으로 바뀌었던 그 마지막 10분의 아찔함을 잊지 못 한다.
눈 앞에선 형체 모를 불꽃들이 남발했던 영화였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내가 그걸 즐기고 있었다. 익숙한 새로움에 빠지고 싶은가?
당신 안의 슬픔의 삼각형을 다시금 지각하고 싶은가? 지금 당장 <슬픔의 삼각형>을 보러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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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유와 울림이 있는 영화 <땅에 쓰는 시>
<땅에 쓰는 시>는 83세의 나이로 현역 조경가 정영선 님의 삶과 일상을 담은 다큐 영화다. 할아버지 과수원에서 사과 꽃 흩날리는 모습을 보고 자란 그녀는 학창 시절 남다른 글 솜씨로 모두가 시인이 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꽃과 자연에 대한 타고난 감수성으로 펜으로 시(詩)를 쓰는 대신 흙과 나무, 풀과 꽃들로 땅에 시를 쓰는 삶을 살아왔다.
정영선 님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보고도 감탄하며 그들과 대화를 즐긴다. ‘잘 잤니?’라고 묻고, 집을 나설 때는 ‘잘 다녀올게.’하고 인사한다. 그녀가 정원을 조성할 때 마음에 두는 말이 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백제의 건축을 두고 이야기한 검이불루(檢而不陋)와 조선의 창업을 도운 정도전이 경복궁을 가리켜 말한 화이불치(華而不侈)다. 소박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말이다. 이조 백자로 연상되는 한국의 미적 감각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정영선 조경가의 손을 거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정원 모습은 눈을 뗄 수 없는 벅참을 가져다준다.
선유도 공원
영화는 어린아이가 뛰어노는 선유도공원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겸재 정선은 선유도에서 아름다운 한강의 풍경을 그렸다고 한다. 정영선 님은 폐정수장이 방치된 선유도를 생태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폐허의 흔적 위에 녹색의 생명력을 더하여 찾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는 공간이 되었다.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
정영선 님은 여의도 샛강을 메워 대형 주차장과 축구장 시설을 만들겠다는 한강관리사업소의 계획을 듣고 기겁을 했다. 김수영의 시, ‘풀’을 읊으며 멋진 생태공원을 만들고자 관계자를 설득했다. 그렇게 서울 한복판에서 화초와 물고기, 철새가 사는 야생의 자연을 온몸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생태공원이 탄생했다.
서울아산병원 신관 정원
병원은 기본적으로 콘크리트 건물이다. 환자는 물론 의료진에게도 삭막한 분위기다. 병원은 마음이 힘든 사람이 오는 곳인데 이런 환경에서 어찌 위로를 받을 수 있겠는가. 환자가 나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쉴 수 있고, 병실에 누운 환자들이 창 너머로 계절의 변화와 생명력을 느낄 수 있고, 그리고 간호하는 가족들이 소리 내어 울거나 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병원에 그럴만한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정영선 조경가는 과감히 병원 지하주차장 위에 거대한 인공 숲을 조성하여 힘든 사람들을 품으며 위로하는 정원을 만들었다.
러닝타임 2시간 남짓의 영화를 본 후 정영선 조경가의 손길이 닿은 곳의 탐방리스트를 적어본다. 선유도 공원, 여의도샛강 생태공원, 서울아산병원 신관 정원, 폐철도선을 활용한 경의선숲길, 용인 호암미술관 희원, 남양주시 다산생태공원, 설화수 북촌 플래그십 스토어, 아모레퍼시픽 용산 사옥, 크리스천 디올 성수 스토어, 제주 오설록 이니스프리...... 시집을 읽는 마음으로 한국의 미를 담은 정원들을 하나씩 찾아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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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자도생이 된 야쿠자
〈야쿠자와 가족〉
감독 | 후지이 미치히토
출연 | 아야노 고, 타치 히로시, 오노 마치코
아버지는 마약에 손을 댔다가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 가족이라고는 없었다. 가족이라고는 혼자였다.
내 이름은 겐지(아야노 고)다. 어느 날 친구들과 식당에 갔다가 야쿠자 조직 시바자키구미의 두목 히로시(타치 히로시)의 목숨을 구했다. 며칠 뒤 나는 다른 야쿠자 조직에게 끌려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그때 주머니에서 히로시의 명함이 나왔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갈 데는 있냐. 꼬맹이 겐”
얻어터져 찌그러진 얼굴의 나를 보며 히로시가 말했다. 나는 엉엉 울 뿐이었다. 갈 곳도 없고 살 궁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따뜻함이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야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에게는 야쿠자가 ‘진짜 가족’이었다. 내 나이 열아홉이었고 1999년이었다.
6년이 지났다. 스물다섯 살인 나는 중간 보스가 되었다. 경제가 회복하며 경기가 호황을 이룬다는 뉴스가 나온다. 술집 관리도 순탄하다. 클럽에서 알게 된 호스티스 유카(오노 마치코)와는 계속 만나고 싶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했던가. 세력다툼을 하는 야쿠자 조직에게 동생 조직원이 살해되었다. 나는 조직을 위해, 가족을 위해 결단을 내렸다.
2019년이 되었다. 머리카락이 조금 희끗해진 나는 14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다. 높은 빌딩을 지나 도착한 시바자키구미의 건물은 그대로다. 조직원들은 대부분 떠났고 원로 몇몇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고 놀랐다. 핸드폰을 주는 조직원 막내에게 핸드폰 정도는 나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살 순 있긴 한데요. 조례 때문에 핸드폰 하나 사기도 지금은 좀 불편해졌어요.” 그리고 덧붙이는 한 마디. “야쿠자라서요.”
야쿠자라는 이유로 은행계좌를 만들 수도 없고 보험에 들 수도 없으며 신용카드를 만들 수도 없다고 한다. 야쿠자 출신이라는 게 알려지면 취업도 안 된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했다.
야쿠자를 가족으로 여기며 산 남자의 쓸쓸한 인생
이렇게 불쌍하고 처량한 야쿠자가 어디 있을까. 폭력집단인 야쿠자의 선악을 떠나 한 인간이 갑작스럽게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걸 본다는 게 개운치는 않다.
<야쿠자와 가족>의 야쿠자들은 얼마나 자신들이 세고 악랄한 지 경쟁하지 않는다. 조직 내 승진에는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친한 사람을 챙겨주고 나이가 차기 전에 여자를 만나는 게 어떠냐고 물어봐 준다. 어쩌면 겉으로는 냉혹해 보이는 이 집단은 우리의 가족보다 더 따뜻함이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질문을 받는다. 조직과 가족을 위해 야쿠자로 헌신한 겐지가 야쿠자를 억제하는 규제와 세간의 눈초리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산다. 조직폭력단이므로 삶이 망가져도 괜찮을까, 아니면 국가가 적극적으로 이들의 갱생할 기회를 줘야 할까.
전작 <신문기자>에서 미디어를 통제하고 댓글로 여론을 조작하려는 정부를 비판하는 영화를 만든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은 <야쿠자와 가족>에선 쇠퇴하는 야쿠자 조직을 관찰자의 시선에서 사회문제로 끄집어낸다. 정부에서 폭력조직을 억제하기 위해 조례를 신설해 야쿠자가 먹고 살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진짜 있는 이야기다.
일본의 버블 경제가 무너진 1999년과 경제 힘차게 뛰는 2005년, 그리고 야쿠자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2019년 야쿠자인 한 남자의 일대기를 야쿠자 출신 작가의 고증을 통해 스크린에 담았다.
19살과 25살, 39살의 겐지를 연기하는 아야노 고 덕택에 영화는 액션과 멜로, 드라마를 모두 아우른다. 두툼한 겨울잠바를 입고 노란 머리로 염색한 채 울분에 찬 눈빛으로 깡다구를 표현하다가도 쓸쓸하고 공허함이 무엇인지 표정과 몸짓으로 말할 줄 안다. 그의 깊은 연기에 관객은 긴장했다가, 마음이 풀렸다가 결국은 안타까움이 몰려올 것이다.
“야쿠자는 의리와 인정을 중시하고 남자의 심을 갈고닦아 남자의 길을 고집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야쿠자는 뭘 하느냐는 질문에 1999년의 한 조직원은 이렇게 답한다. 20년이 지난 시바사키구미는 각자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언제나 든든할 줄만 알았던 의리와 인정이 배고픔 앞에서는 무너져버린 한 가족이 있었다. 청소년 관람불가. 1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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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 앞에서 인간의 태도를 묻는 영화
❣️[Cinelab Curation]❣️
아직 4월임에도 낮 기온이 20도가 훌쩍 넘어가는 요즘,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이번 여름은 얼마나 더울지 벌써 걱정입니다…🥲
어제는 지구의 날이었죠.
오프라인에서는 건물 소등 캠페인을 하고, 온라인에서는 메일 삭제 운동을 하는 등 지구의 날을 맞아 여러 가지 행사를 진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요!
그리고 이번에 내한한 콜드플레이 콘서트에서는 자이로밴드를 회수하고, 페트병에 담긴 물의 반입을 금지하는 등 친환경적인 공연을 위해 노력한다는 소식이 있었어요.
이렇듯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이 취해야 할 행동을 고민하고, 그 방법을 찾아나가는 일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이번 큐레이션을 통해 자연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고민해 보면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건강한 미래를 그려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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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벤져스 1편 삭제씬 총정리
#산돌구름 #어벤져스1 #삭제씬
"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2021. 04. 08 영상입니다.
유튜브 채널 구독하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6jj...
마블쟁이 인스타그램: @marvel_jeng2* 영상에 사용된 모든 음악은 Epidemicsound 의 정식 라이센스 음원입니다.
https://www.epidemicsound.com/*영상 타임라인*
00:00 인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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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5 캡틴과 웨이트리스
04:37 경찰 비하인드
05:23 앤트맨 힌트
06:09 너무 오랜만에 찾아왔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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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행복의 나라> 2차 예고편
1979년 10월 26일, 상관의 명령에 의해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박태주’와 그의 변호를 맡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에 뛰어 든 변호사 ‘정인후’의 이야기 NEW는 영화, 음악, 드라마, 극장사업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의 분야를 아우르는 미디어 그룹입니다. NEW 영화사업부의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시고 NEW 영화 예고편, 미공개 독점 영상 등을 가장 먼저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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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리볼버> 공식 2차 예고편
"약속한 돈을 받는데 무슨 각오가 필요해” 꿈에 그리던 새 아파트 입주를 기다리던 경찰 수영은 뜻하지 않은 비리에 엮이면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면 큰 보상을 해준다는 제안을 받고 이를 받아들인다. 2년 후 수영의 출소일, 교도소 앞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윤선 뿐 수영은 일이 잘못되었다고 직감한다.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보상을 약속한 앤디를 찾아 나선 수영은 그 뒤에 있는 더 크고 위험한 세력을 마주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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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를 예열하는 탐정 느와르로 귀환하다
드디어 로버트 패티슨을 영화관에서 봤다. 사실 그의 작품을 해리포터 조연을 제외하고, 그가 주연으로 나온 작품을 단 한 개도 보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 <더 배트맨>에서 그가 연기하는 배트맨이 기대가 됐고, 그 기대는 옳았다. 배트맨 2년차의 브루스 웨인을 연기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찰떡이었다.
영화 <더 배트맨> 시놉시스
영웅이 될 것인가 악당이 될 것인가, 운명을 결정할 선택만이 남았다
지난 2년간 고담시의 어둠 속에서 범법자들을 응징하며 배트맨으로 살아온 브루스 웨인. 알프레드와 제임스 고든 경위의 도움 아래, 도시의 부패한 공직자들과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복수의 화신으로 활약한다. 고담의 시장 선거를 앞두고 고담의 엘리트 집단을 목표로 잔악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수수께끼 킬러 리들러가 나타나자, 최고의 탐정 브루스 웨인이 수사에 나서고 남겨진 단서를 풀어가며 캣우먼, 펭귄, 카마인 팔코네, 리들러를 차례대로 만난다. 사이코 범인의 미스터리를 수사하면서 그 모든 증거가 자신을 향한 의도적인 메시지였음을 깨닫고, 리들러에게 농락 당한 배트맨은 광기에 사로잡힌다. 범인의 무자비한 계획을 막고 오랫동안 고담시를 썩게 만든 권력 부패의 고리를 끊어야 하지만, 부모님의 죽음에 얽힌 진실이 밝혀지자 복수와 정의 사이에서 갈등한다.
* 해당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더 배트맨>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빛이 어디 있나요?
영화 <더 배트맨>을 다 보고 나서 영화관을 나오며 느낀 것은 ‘역시 빛은 좋은 것이다’, ‘사람은 빛 속에서 살아야 한다’였다. 영화 <더 배트맨>을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정말 형광등이든 자연광이든 빛 아래에 있는 씬이 거의 없다. 거의 모든 신이 밤거리에서 진행이 되기 때문에 어둠 그 자체의 모숨을 보여준다. 환경적으로도 거리의 어둠을 보여주면서 배트매느이 어두운 내면과 고담시의 어두운 환경이 합쳐지니 역대급으로 우울하고 침전하는 듯한 영화가 탄생했다. 어벤져스처럼 스펙타클하고 화려한 느낌을 기대한다면 그건 잘못 기대를 한 것이다. 덩말 우울, 침울의 끝판왕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나는 우울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럼에도 3시간 가량되는 이 영화를 다 볼 수 있었던 이유는 bgm이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 무거운 느낌이 강하게 들면서도 사람의 심장을 쪼이는 듯한 긴장감을 텐션감 높게 풀어내서 극도의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영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잘 풀어낸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공포를 예열하도록 하지...!
아직도 생각난다. 배트맨이 등장할 때마다 나오는 그 사운드. 둥두둥둥 둥두둥둥~ 의성어로 쓰니까 굉장히 하찮아 보이는데,,, 그렇지 않다. 영화 <더 배트맨>은 빠르지 않다. 배트맨이 배트카를 몰고 추격을 할 때도 빠른 박진감이라기 보다는 무거운 위압감이 더 잘 느껴지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빠르게 적을 공격한다는 느낌보다는 적에게 공포감을 최대한 실어주고 그 공포가 극한에 달했을 때 두둥~ 하고 나타나서 처단하는 타입이다.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bgm만 흘러나오는 그 공포, 그리고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는 들리는데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암흑에 대한 두려움을 너무나도 잘 활용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대사에도 나온다. “공포는 도구다.” 이 대사가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데 그 말을 너무나도 잘 이용하고, 두려움과 공포를 이용해서 무법자들을 처단하는 배트맨의 정의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암흑 속에 있는 배트맨의 감정을 나 혼자만 잘 구분을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영화 보다가 없던 야맹증 생기는 줄 알았다. 스크린이 아주 온통 시꺼멓다,,, 영화 <더 배트맨> 속 브루스 웨인은 우울과 부노 이 두 가지 감정만을 가진 사람처럼 비춰졌다. 평상시와 범죄자들을 처단할 때는 우울하면서도 침착한 상태로, 자신의 가문에 대한 비밀이 폭로될 때에는 분노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가문에 대한 비밀을 알고 좌절하면 무너지는 장면에서 조금 더 감정의 베리에이션을 줬더라면 왜 배트맨이 마지막에 스스로를 리벤저(복수)라고 일컫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희망이라고 말햇는지 더 설명이 잘 되지 안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복수가 곧 정의라고 믿으며 내가 바로 복수다라고 외쳤던 시그니처를 도시를 범죄로 물들인 자경단의 이비에서 똑같은 말을 듣자 나의 길이 잘못됐다는 허망함에 무너져서 정말 마지막 장면에서 누전되는 전깃줄을 자르면서 배트맨이 자살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벌떡 일어나서 조명탄을 터뜨리더니 사람들을 구하러 가는 모습을 보고,, 음,,? 나의 해석이 잘못된 것인가,, 다음 편에서 조금 더 감정의 변화와 그 폭이 다채로운 배트맨을 만날 수 있길 바란다. 우울에도 그 종류는 다채로우니 말이다.
영화 <더 배트맨>은 3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배트맨의 우울함에 함께 허우적대면서도 단 순간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작품이었다. 중간중간 번역이 왜 저렇게 됐을까? 늬앙스를 잘 살리지 못한 장면들이 곳곳에 있어서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충분히 역작이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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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영토, 그리고 사유의 영토를 넓히다
몇 년 전, 캐나다에 있을 때의 일이다. 페미니즘 모임의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What’s your pronouns?” 처음 들어보는 질문에 의미를 되물었다. 이는 자신의 젠더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묻는 질문이었고, 평생 자신을 여성으로 정의하고 살아온 나는 “She, her, hers”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오직 ‘시스 젠더 여성’으로만 정의될 수 있는 존재인가. 고민의 답은 사실 쉬웠다. 나는 생물학적 성별과 사회적 성별에 유리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읽고, 관련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도 누군가를 호명하는 법에 대해서 고민을 해본 적이 있던가. 결국 나는 사변적인 논의를 나눴을 뿐이었다. 어쩌면 두꺼운 책보다 나의 대명사를 고민하는 시간이 귀중했다. 나아가 타인의 대명사를 듣고, 그가 정의하는 그를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 또한 그랬다.
<장미의 행렬>은 1960년대 도쿄의 게이바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작품은 호스티스 중 하나인 에디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젊음과 아름다움으로 인기의 정점에 오른 에디는 바의 마담인 레다와 권력 다툼을 벌인다. 그들의 권력 다툼은 단순히 바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명의 남자를 두고 벌이는 치정극 또한 이 작품의 핵심 중 하나다.
두 명의 주인공은 겉보기에는 ‘여성’으로 패싱되는 인물들이나, 그들은 자신을 ‘게이 보이’라고 호명한다. ‘게이’도 ‘드랙 퀸’도 ‘트렌스 젠더’도 아닌 ‘게이 보이’. 그들의 호칭은 다른 어떤 단어로도 대체되지 못한다. 분명한 자기 긍정이 느껴지는 말들에 이 작품은 예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느꼈다. 사회의 주변부에 속함에도, 자신을 긍정하는 인물들의 삶이 마냥 비극적일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다름을 증명하는 장면은 에디의 샤워 씬이었다. 자신의 미에 도취된 에디. 그에게는 어떤 고뇌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고, 탐닉한다. 시대적 배경에 기반하여 퀴어인 주인공들의 삶이 그저 비극적일 것이라고 여겼고, 작품의 서사가 그정도에 그칠 것이라고 유추한 것은 나의 상상력의 빈곤에 불과했다. 여느 이의 인생이 그렇듯, ’게이 보이‘들의 삶에도 희비극이 녹아있었다.
이 작품이 희극을 묘사하는 방식은 특기할만하다. ‘게이 보이’들은 자기 자신으로서 ‘시스 젠더 헤테로 여성’들과 경쟁한다. 그것은 만화적인 방식을 빌려 구현되며 웃음을 자아낸다. 나아가 다큐멘터리적 방법을 차용하여 배우들을 비롯한 다양한 ‘게이 보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방법론도 인상적이었다. 픽션과 다큐멘터리, 실험 영화의 경계를 오가며 ’게이 보이‘들의 삶은 입체적으로 구현된다.
씨네21의 송경원 편집장은 전위 영화를 영화의 영토를 넓히는 가장 적극적인 표현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다양한 형식을 오가며 하나의 장르로 정의할 수 없이 오가는 이 작품은 전위 영화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히 형식의 놀이에 치중된 ‘전위 영화’는 아니다. 타인을 어떻게 ’호명‘할 수 있을 것인가. 작품에 있어 타인에 대한 ’존중‘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감독은 정답이 아닌 성실한 고민을 담아냈다.
과거 나와 당신을 호명하는 방식을 고민했던 순간을 넘어 이 작품을 만났다. 어쩌면 이 작품의 존재 가치는 단순히 영화의 영토를 넓힌 것만은 아닐지 모른다. 더 험난한 과거를 살아냈을 당신들이 투쟁 속에 만들어낸 작품에 빚을 지고, 나의 세계의 영토는 조금이나마 넓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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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늘 삼각형 안에."
*본 게시물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월부터 그렇게 보고 싶었던 영화 <슬픔의 삼각형> ?
안그래도 높은 기대, 더욱 더 재밌게 보고 싶은 마음에 예고편과 줄거리도 모른 채 씨네랩 시사회에 갔다. 첫 시작부터 강렬했으며 결말을 보고선 이마 짚으면서 상영관을 나왔다는,, 이 영화를 개인적인 감상평과 함께 한 줄로 남기자면 "새롭진 않았지만 새롭다"!!
⭐삼각형, 슬픔의 삼각형
영화에서 "슬픔의 삼각형"이란 단어는 한 번밖에 안 나온다. 그러나 제목으로 대두되었을 만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 30여분으로 1부~3부를 포함하므로 개인에 따라 '길게' 다가올 수도 있다. 이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영화는 관객에게 늘 외치고 있다, "우리의 삼각형은 여전히 그대로야."라고. 여성과 남성 / 부와 가난 그리고 끊임없이 딸려오는 '신분'이라는 고정된 꼬리표. 2023년이 된 지금, 피상적으론 '평등'을 표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의 삼각형은 불변한다,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아픔을 1부부터 3부까지 우스꽝스럽고도 잔인하게 표현한 이야기 아닐까 싶다.
우리는 슬픔의 삼각형 안에서 살고 있다. 위로 가든, 밑으로 가든 어쨌든 삼각형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대체 무엇을 바라고 평등함을 표하는 동시에 서로를 이렇게 미워할까. 특정 인물들에 공감을 하기도, 혐오감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새로운 익숙함
사실 드라마 <석세션>부터 시작해서 부와 가난 등의 차별 등을 비꼬는 미디어 콘텐츠들을 수없이도 많이 봐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새로웠다. 이목을 집중시켰던 1부, 보는 내가 아찔했던 2부 그리고 무한한 불안감으로 끝내었던 3부. 개인적으로 3부 결말로 본 영화를 n차 돌 생각이 충분하지만...! 영화가 다소 길었다. '그들만의' 다큐멘터리를 조용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기분. 한 마디로, 무서사가 만들어낸 서사였다. 피식거리던 웃음은 곧 슬픔으로 바뀌었던 그 마지막 10분의 아찔함을 잊지 못 한다.
눈 앞에선 형체 모를 불꽃들이 남발했던 영화였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내가 그걸 즐기고 있었다. 익숙한 새로움에 빠지고 싶은가?
당신 안의 슬픔의 삼각형을 다시금 지각하고 싶은가? 지금 당장 <슬픔의 삼각형>을 보러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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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유와 울림이 있는 영화 <땅에 쓰는 시>
<땅에 쓰는 시>는 83세의 나이로 현역 조경가 정영선 님의 삶과 일상을 담은 다큐 영화다. 할아버지 과수원에서 사과 꽃 흩날리는 모습을 보고 자란 그녀는 학창 시절 남다른 글 솜씨로 모두가 시인이 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꽃과 자연에 대한 타고난 감수성으로 펜으로 시(詩)를 쓰는 대신 흙과 나무, 풀과 꽃들로 땅에 시를 쓰는 삶을 살아왔다.
정영선 님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보고도 감탄하며 그들과 대화를 즐긴다. ‘잘 잤니?’라고 묻고, 집을 나설 때는 ‘잘 다녀올게.’하고 인사한다. 그녀가 정원을 조성할 때 마음에 두는 말이 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백제의 건축을 두고 이야기한 검이불루(檢而不陋)와 조선의 창업을 도운 정도전이 경복궁을 가리켜 말한 화이불치(華而不侈)다. 소박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말이다. 이조 백자로 연상되는 한국의 미적 감각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정영선 조경가의 손을 거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정원 모습은 눈을 뗄 수 없는 벅참을 가져다준다.
선유도 공원
영화는 어린아이가 뛰어노는 선유도공원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겸재 정선은 선유도에서 아름다운 한강의 풍경을 그렸다고 한다. 정영선 님은 폐정수장이 방치된 선유도를 생태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폐허의 흔적 위에 녹색의 생명력을 더하여 찾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는 공간이 되었다.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
정영선 님은 여의도 샛강을 메워 대형 주차장과 축구장 시설을 만들겠다는 한강관리사업소의 계획을 듣고 기겁을 했다. 김수영의 시, ‘풀’을 읊으며 멋진 생태공원을 만들고자 관계자를 설득했다. 그렇게 서울 한복판에서 화초와 물고기, 철새가 사는 야생의 자연을 온몸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생태공원이 탄생했다.
서울아산병원 신관 정원
병원은 기본적으로 콘크리트 건물이다. 환자는 물론 의료진에게도 삭막한 분위기다. 병원은 마음이 힘든 사람이 오는 곳인데 이런 환경에서 어찌 위로를 받을 수 있겠는가. 환자가 나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쉴 수 있고, 병실에 누운 환자들이 창 너머로 계절의 변화와 생명력을 느낄 수 있고, 그리고 간호하는 가족들이 소리 내어 울거나 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병원에 그럴만한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정영선 조경가는 과감히 병원 지하주차장 위에 거대한 인공 숲을 조성하여 힘든 사람들을 품으며 위로하는 정원을 만들었다.
러닝타임 2시간 남짓의 영화를 본 후 정영선 조경가의 손길이 닿은 곳의 탐방리스트를 적어본다. 선유도 공원, 여의도샛강 생태공원, 서울아산병원 신관 정원, 폐철도선을 활용한 경의선숲길, 용인 호암미술관 희원, 남양주시 다산생태공원, 설화수 북촌 플래그십 스토어, 아모레퍼시픽 용산 사옥, 크리스천 디올 성수 스토어, 제주 오설록 이니스프리...... 시집을 읽는 마음으로 한국의 미를 담은 정원들을 하나씩 찾아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