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2023-02-26 16:27:36
사랑이란 명목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더 웨일>
2023 오스카 남우주연상 수상 유력 후보 브렌든 프레이저
오스카 시상식을 앞두고 남우주연상 유력후보로 거론되는 브렌든 프레이저의 <더 웨일>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연출은 공간이용과 동선이다. 여기서 눈에 띈다는 말은 연극이라 하면 자연스러운데 영화라고 보니 눈에 익숙하지 않았던 연출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알았지만 <더 웨일>은 동명의 연극을 기반으로 제작한 영화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어떻게 보여졌고, 어떤 기능을 할 수 있었는지 얘기해보려 한다. 영화는 주 무대를 찰리의 집으로 한정하고 있다. 그 외라 하면 피자를 받으러 가는 현관 또는 현관에서 주차장을 바라보는 시선 정도가 될 수 있겠다. 이는 연극에서는 공간적 제약이었을지라도 영화에서는 앞서 말했듯 집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통제된 삶을 살고 있는 찰리의 답답함 또는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적합한 연출처럼 보여진다. 또한 이로 인해 찰리 외의 인물들은 모두 집 현관문을 왔다 갔다 하며 ‘찰리의 공간’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연출이 된다. 덕분에 인물들은 더욱 찰리의 공간에서 함께 오고 가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다른 연극적 연출을 말하자면 인물의 동선이다. 거실과 (명확히 분리되지 않은) 주방을 오고 갈 때, 특히 찰리와 상대 인물이 움직이며 대화를 할 때, 기존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인물이 한 프레임의 중심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프레임의 반대를 향해 나간다던지 두 인물이 겹쳐지기보다는 겹쳐지지 않도록 보이는 동선이 많았다는 점이다. 이 또한 찰리와, 찰리의 어긋나는 사랑의 방향을 말한다면 이런 익숙하지 않은 동선은 찰리와 인물 간의 불편함을 보여주기에 적합했다고 볼 수 있다.

브렌든 프레이저가 오스카뿐만 아니라 다수의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으로 수상 또는 후보로 지명된 데에는 브렌든의 연기력뿐만 아니라 영화계에서의 그의 삶 또한 조금의 영향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밖의 일은 차치하고, <더 웨일>에서 보여준 브렌든 프레이저의 연기는 ‘찰리'를 실존하는 인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옆의 눈물을 흘리는 관객 사이에서 나는 찰리에게 동의할 수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찰리는 계속해서 한 방향의 사랑을 한다. 사랑이 언제나 양방향은 아니다. 하지만 찰리의 경우, 문제는 한쪽 때문에 다른 한쪽이 상처받는다는 점이다. 과거에도 찰리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아내와 딸 엘리를 떠난다. 영화에서의 현재 또한 찰리는 자신의 사랑인 엘리를 위해 자신을 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불륜 또한 다른 방식이지만 결국 자신의 사랑을 위해 자신을 향한 사랑을 신경 쓰지 않고 상처 주는 것이라고 해석하겠다. 전에 한 가수가 모든 사람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랑을 누구라도 사랑을 받거나 사랑을 하는 입장에 놓여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관객은 찰리의 입장을 이해할까? 찰리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의 입장에 이입할까? 나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떠나보내며 그 사람이 나를 떠난 만큼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인 적 있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그 사람이 아프거나 불행하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그만큼 더 미워졌던 경험이 있었기에 찰리보다는 엘리와 리즈에게 더 이입이 되었다. 그렇기에 찰리가 새에게 과일을 주기 위해 창가에 놓아둔 접시가 깨진 것을 보며 내가 엘리였다면 ‘저 새에게 줄 저 작은 사랑을 나에게 조금도 줄 수는 없었나'하며 접시를 깼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찰리는 좋은 에세이를 쓰는 방법에 대해 얘기한다. 시작장면에서는 카메라를 끝 채 영상수업에서 학생들을 향해 계속 다듬을수록 좋은 글이 된다고 말하지만 영화가 끝나갈 때쯤에는 졸업을 위한 에세이를 써야 하는 엘리를 향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는 것이 자신의 진짜 에세이'라고 말한다. 삶을 글로 풀어낸 것이 에세이라면 자신의 삶을 잘 사는 방법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는 것이라고 에세이에 비유해 넌지시 말하는 듯하다. 결국 찰리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의 삶을 응원할 수는 없었다. 결론적으로는 응원하고 싶지 않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영화였다. ‘응원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그 인물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공감하고 이해할 수 없었다는 말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는 말은 브렌든 프레이저의 연기 덕에 분명 찰리는 존재하는 인물로 느껴졌다는 말이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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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억 2천만불짜리 특색없는 SF 가족영화
굿 한 번 해야 하나! <어벤져스> 시리즈의 루소 형제와 넷플릭스와 궁합이 너무 안 좋다. 전작 <그레이 맨>도, 이번 작품인 <일렉트릭 스테이트>도 하나같이 이들이 연출한게 맞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특히 3억 2천만불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번 영화는 더더욱 그렇다.
1990년대 미국에서 내전이 벌어진다. 남과 북이냐고? 인간 vs 로봇이다. 인간을 위해 봉사하던 로봇이 자유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킨 것. 하지만 전쟁의 승자는 인간이 되고, 패한 로봇은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추방 구역 ‘일렉트릭 스테이트’에 모여 산다. 한편, 교통사고로 부모와 남동생을 잃은 미셸(밀리 보비 브라운)은 목적없이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러다 동그란 얼굴의 노란 로봇 ‘코즈모’가 그녀를 찾아온다. 인간 세계에서 로봇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법범행위. 본의 아니게 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동행하게 되고, 괴짜 밀수업자 키츠(크리스 프랫)와 로봇 동료 허먼과 함께 일렉트릭 스테이트로 들어가게 된다.
<일렉트릭 스테이트>는 시몬 스톨렌하그의 동명의 그래픽노블을 영상화 했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사이버펑크 장르인 원작의 세계관은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소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우울하고 공허한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작은 로봇과의 여정을 통해 이 작품이 보여주는 건 첨단 기술 사회가 무너진 황폐한 모습이다. 전쟁 이후 방치된 로봇 잔해, TV 대신 가상현실 기술인 뉴로캐스터에 의존하는 사람들 등 어쩌면 우리의 가까운 미래가 될 지 모르는 모습을 그린다.
루소 형제에게 이 원작 세계관은 흥미로웠을 터. 감독은 기본 원형과 주요 소재는 가져오되, 영화적 재미를 위해 새로운 이야기와 인물들을 대거 투입한다. 무엇보다 너무나 무거운 분위기를 살짝 업 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하는데, CG와 모션캡쳐로 구현한 다양한 종류의 로봇들과 흡사 만담군처럼 보이는 키츠와 허먼 콤비가 그 요소다. 과거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레트로 로봇들의 향연 그 자체로 시선을 모으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통해 증명한 크리스 프랫의 실없는 농담은 어느 정도 들을만 하다.
하지만 이런 장점은 오래가지 못한다. 극 중 세계관은 매력적이지만 새롭지는 않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SF 장르 영화에서 숱하게 봤던 요소들이 자꾸 겹치는 건 물론, 인간 캐릭터들의 매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미셸과 키츠는 물론 빌런 들도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라 너무나 예상 가능한 모습으로 나온다.
배우들의 연기 문제라기 보다는 가족 타깃 취향에 맞추다 보니 생긴 문제로 보인다. 액션 수위 조절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캐릭터와 로봇들의 이야기와 매력이 뻗어나가지 못하고 예상 가능한 지점까지만 간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후반부 대규모 액션도 그렇고 적절히 순화하다보니 이도 저도 아닌 결과물이 나온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결과적으로 제작비의 향방만 찾는 자신을 발견한다.
극 중 대사에도 나오지만 영화는 사람 사이의 인간적인 연결과 접촉이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 장애물이 뉴로캐스터로 나오는데, 영화 속 사람들은 집 밖을 나가지 않고 이 장비에 의존한채 살아간다. 두려움에 휩싸여 전자 기기에 의존하는 삶을 택한 사람들은 더 외롭고 고립되어 가는데, 이는 SNS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의 모습을 비판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더불어 로봇과 인간의 대결은 흑인과 백인, 이민자와 미국인의 대립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가족 영화 취향에 너무 맞춘 탓일지 이런 현실적인 메시지는 너무 가볍게만 담긴다.
<일렉트릭 스테이트>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루소 형제와 넷플릭스의 협업은 잠시 쉬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제작비를 최대한 적절히 배치하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마어마한 제작비는 너무 과해보인다. 부족한 완성도가 계속 눈에 밟힌다.사진제공: 넷플릭스
평점: 2.0 / 5.0
한줄평: 너무 과한 제작비, 너무 부족한 완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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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랑한 건 언젠가 날 울게 만들어
아마 이번 생은 역시 틀려먹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그런 것 말이다. 지금 내가 있는 카페도 아마 커플 두 분이 운영하는 곳인 거 같다. 앞에서 여자분이 남자분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는 모습이 기분이 좋았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 12시. 창가 앞에는 사람들이 몇 명 지나가고 있다. 매일 같은 것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 이 카페 사장님처럼 재미(?)를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취업만 잘하면 즐길 거 다 즐기고 살 수 있겠지만 난 역시 솔로로 태어나서 갈 운명인가 보다 싶다.
난 언제쯤 모두가 사는 세상에 끼어들 수 있을까? 청승맞은 주책을 부리며 노트북을 켜 글을 쓴다. 확실히 세상은 아름다운 게 맞는 것 같은데 말이지. 어떤 부침이 있어도 다들 잘 사는 거 보면 이 세상 60억 인구 모두가 행운아다. 전 세계 어디를 가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만 봐도 사람이라는 존재는 여러모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사람 덕분에 우리가 외롭지 않은 거고 공감하며 행복한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앉아있는 카페 창으로 보이는 저 귀여운 캐릭터도 역시 사람이 그렸으니 일상의 자그마한 귀여움과 즐거움도 다 그들 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뭔가를 창작하거나 그리는 일은 사람들과 소통한다는 점에서 참 다행인 것 같다. 마음속에서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 없을 때 이렇게 글을 쓰면 여러모로 효과가 좋았다. 되게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뭔가를 표현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에겐 이거 되게 중요하다. 이렇게 살지 못하면 외로워지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에 내면의 아픔을 그림으로 표현했던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극도로 우울한 현실 속에서 내면의 밝음을 표현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운명적인 로맨스를 기다려 온 한 화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딱 봐도 그림 잘 그리게 생긴 사람
루이스 웨인은 그냥 화가다. '그냥 화가다'라는 문장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다. 왜냐하면 그는 그림 빼고는 모든 게 서투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화가다. 잘생긴 것도 아니고, 말을 청산유수로 줄줄줄 하는 게 아니라서 그림 빼고는 사실 사람들의 기억에 잘 박히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근데 이 말은 즉슨 그림 하나는 귀엽게 잘 그린다는 뜻도 된다. 친구도 없고 애인은 당연하며 가족과도 사이가 그렇게까진 좋지 않았던 루이스. 갑자기 가족을 부양해야 할 사정이 되자 부랴부랴 일을 구하기 시작한다. 근데 루이스에게는 과제 하나가 더 있다. 바쁘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겠지? 조카들을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양반쯤 됐던 루이스. 어렵지 않게 가정교사 한 명을 구하게 된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였지만 대화가 잘 통하는 것 같다. 둘은 서로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내 결혼 이야기까지 오고 가는 관계가 된다. 세상의 따가운 시선이나 남매들의 압박이 있었지만 루이스 웨인은 아내와 함께하는 장밋빛 미래를 꿈꾼다. 영화는 이 루이스가 그려왔던 미래를 소재로 삼은 영화다. 이 인물이 어떤 상황을 겪어 행복감을 느꼈고, 그 행복감이 어떻게 그의 삶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조명한다.
사랑을 그리면서 우울함은 글로
이 영화를 보지 않으면 '귀여운 고양이들이 나오는 로코물'로 생각하기 쉽다. 그도 그럴 것이 포스터 색감이 세상 밝으며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라는 부제까지 있으니 그 생각이 막 뚱딴지같은 추론은 아닌 셈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실제 내용을 까 보면 완벽히 다르다.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상실이다. 주인공 루이스 웨인은 한 데 머무르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간이다. 뚜렷한 친구가 있었나? 그건 아니다. 영화 전체적으로 아내를 제외하고 루이스가 마음을 여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윽박지르기만 하는 여동생들이나. 노쇠해진 어머니를 보면 '이 사람이 가족에게도 위안받지 못했던 부분이 있다'라고 이해하기 충분하다. 또 이 사람은 영악하지는 못했다. 자기 걸 잘 챙겼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일상 속에서 페널티를 겪는 묘사가 몇 번 나온다. 이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안 그래도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현실에 주인공 루이스가 겪는 장애물들이 몇 개 더 있다. 영화는 이 굴곡진 루이스의 삶을 보여준다. 아마 여러분이 이 작품을 보기 전에 '아마 이럴 거야'라고 생각한 것 이상으로 떨어진다고 예상해 본다. 그러나 이렇게 아래로 수직 낙하하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엔딩부에서는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사진에는 전기가 없지만
영화 안에 루이스가 실제로 대사를 치는 부분이 있다. '사진에는 전기가 없다!'라는 말이다. 사진은 플래시를 터트려서 기록으로 남기는 매체다. 이 대사의 뜻이 실제 물리학적으로 전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진다는 뜻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의 '전기'는 다른 비유적인 표현으로 쓰이는데 이는 극의 주제의식과도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웨인이 비유한 이 '전기'에 대한 묘사가 괜찮았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찾을 때 짜릿한 느낌이 들곤 한다. 어쩔 땐 '와 이거다' 싶기도 할 것이고, 또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던가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근데 이 지점을 첫눈에 반한 사람처럼 굉장히 짜릿하고 특별한 순간으로만 연출했다면 좀 과헀을 것 같다. 영화는 이 지점을 피해 간다. 감독이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이스가 이에 기대는 것에 각본상의 허점이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인물 설정, 고압적인 자매들, 자식을 낳지 않았다는 것, 당시의 신분 격차로 인한 사회적 시선까지 불안정한 인물을 만들어내며 관객의 감정이입을 원활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몰입이 잘 되는 영화'라는 뜻이다. 마치 이 작품에서 전기가 통한 루이스 웨인처럼.
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찾아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간단하다. 루이스 웨인의 일대기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시점에 관한 작품이다.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그림의 속성과도 이어진다. 그림은 내가 본 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형태가 바뀌는 예술이다. 루이스 웨인은 재수 없는 동물의 상징이었던 고양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 아티스트다. 이는 곧 예술가가 자기 적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으나 난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원인이나 동기부여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건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고양이가 인물에게 어떤 방식으로 변해왔는지를 눈 딱 뜨고 보다 보면 단순히 한 가지의 의미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인물이 세상에게 건넸던 효과가 아니라,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묘사했다는 뜻이다. 이는 어쩌면 감독이 '네가 하고 싶은 걸 해'식의 동기부여를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아내 에밀리가 하는 대사와도 연결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비극적으로 반복되는 삶에도 아름다운 구석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그 아름다운 부분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외로웠던 루이스의 삶에서 그림같이 아름다운 몇몇 장면이 있던 이유는 그가 그의 전기를 따라가서 생긴 것들이다. 감독은 극의 주요 분기점마다 그림과 현실을 교차시키는 연출법으로 행복한 루이스의 모습을 기억에 남게 만들어준다.
아카데미 한 지 딱 2주
이 글을 쓰는 시간은 4월 10일이다. 아카데미가 3월 27일이었으니까 정확히 2주 지난 셈이다. 이때 남우주연상은 윌 스미스에게 돌아갔다. 난 <킹 리처드>를 안 봐서 그런가 내심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받았으면 했었다. 아카데미나 칸, 베니스가 뭐 우리 동네 시상식도 아니고 아무 때나 노미네이트 되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아마 또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요 시상식에 이름을 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20대부터 70대 노인까지 얼굴에 모든 곡절이 담겨있기는 쉽지 않을 텐데 비주얼적으로도 소화하는 멋진 모습을 선보였다. 또 섬세한 감졍묘사도 기억에 남는다. 극 중에서 반복되는 트라우마나 자매들을 만날 때의 표정 변화 같은 것이 이 인물 내면에 잠겨있는 깊이를 느껴지게 하는 훌륭한 연기였다. 그리고 이 영화의 후반부 하이라이트 신이라고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의 연기는 <파워 오브 도그>에서 코디 스핏 맥피와 담배를 피우는 신만큼이나 임팩트가 강했다. 장면의 설정상 배우의 화려한 연기법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이 부분을 보면 압도된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림 같은 영화
영화의 다른 장점으로는 미술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화가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보니 그림이 많이 나온다. 근데 이 그림들이 아무래도 실제 쓰였던 작품들을 갖고 왔을 텐데 루이스 웨인의 입장 변화에 달라지는 것을 잘 사용했다. 또 전반부에 이 극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엔딩에 다시 한번 반복되는데,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티켓 값 2/3은 한다고 본다. 내가 갔던 파리의 퐁텐 플로가 생각나는 연출이었다. 이 외에도 특정 질환에 대한 묘사가 거슬릴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도 이야기해 볼 법하다. 인물이 겪는 고통을 가볍게 쓰지 않고, 또 타인이 보는 시점도 적절히 넣었으며 병세 시각화가 좋아서 기괴하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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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다리 안쪽에서
-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빛을 품게 되는 단어들이 있다. 의미가 크게 변하지 않아도 사회 흐름 속에서 그 농도나 채도 어딘가가 달라지는 것이다. '자수성가'도 그렇다. 70년대와 지금의 느낌이 많이 달라져 있고, 앞으로도 더 달라질 단어가 아닐까 싶다. '자自'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조차 점차 불분명해지고 있다.
<화이트 타이거>의 발람을 보며 함께 떠오른 인물은 <힐빌리의 노래> 주인공 JD였다.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인데, 소설 <힐빌리의 노래>는 개인의 지극히 자전적인 소설임에도 트럼프 시대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어준다고 언론의 주목을 받던 책이다. 그 이유를 찾아 JD의 회고를 따라가 본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인턴 면접을 앞둔 시점, JD는 갑작스럽게 누나 린지의 전화를 받는다. 중요한 면접을 앞두고 있다고 항변해 보아도 어쩔 수 없어, 그는 먼 길을 달려 다시 고향으로 향한다. 영화는 그의 여정을 따라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비추어 보이며 가족 전체를 훑어내린다. 정장을 차려입고 고고하게 앉아있는 변호사 무리가 대놓고 무시하는, 켄터키 지역 노동자 계층이 그의 뿌리다.
다소 거친 이웃들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고성 오가는 싸움을 벌이는 이웃들. 그래도 영구차 앞에서 모자를 벗어 예를 갖추고, 문제가 있으면 인맥을 동원해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힘내라고 다정한 말을 건네지는 않지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툭 건네거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평범한 이웃들이다. 단지 사회의 어떤 시스템에 훌륭하게 안착하지 못했을 뿐이다. JD의 엄마 베브도 예외는 아니어서 민들레 홀씨처럼 붕붕 떠다니며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생활한다. 아들에게 자기 실수를 미안하다 인정하며 찡긋 웃는 모습은 분명 사랑스럽지만, 아이들보다 훨씬 불안정한 상태다.
오늘의 JD는 분명 이들과 다른 곳에 서 있다. 세상이 말하는 "좋은" 일에 더없이 다가서서, 고상하고 가진 것 많은 사람들과 자신의 뿌리 사이에 중간자 같은 자리에 서 있다. 소위 개천에서 난 용이지만 실은 불안한 자리다.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 옆의 자신이 황새 옆의 뱁새처럼 느껴지는 자리. 거기서 미끄러질까 불안한 자리. 자신이 뿌리 내리고 살아온 토양이 남들 눈엔 약점으로 비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당혹스러운 자리.
거기서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자기 뿌리를 끊어낼 수도 없고 답습할 수도 없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성장을 다하는 것. 어떤 출발점에서든 한 번에 한 발짝씩만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것. 김애란의 단편에 밑줄을 그으며 생각한 적 있다. 그런 작은 한 걸음들이 이어져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는 걸.
아무리 바빠도 음식을 플라스틱 용기가 아닌 접시에 담으려고 노력하는 건 내가 부모 세대와 반 발작 다르게 사는 법이다. 말은 반보라지만 실은 결정적으로 다르게 사는 방식. (...) 평소 재이에게도 음료를 병째 마시지 말고 컵에 따라 먹으라고 잔소리한다. 그렇게 작은 것들이 나중에 큰 걸 지켜주기도 한다고.
_<가리는 손>, 김애란.가끔 개천에서 나는 용의 소식들이 어디선가 들려오지만, 더러 누구에겐가 잭팟이 터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지만, 그 또한 실은 모든 한 걸음의 총합이리라는 것을. 하물며 이무기도 아니고 카지노에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보통 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한 발짝 두 발짝은 대단한 진전이라는 것을.
JD와 린지 또한 그렇게 한 발짝씩 엄마의 자리에서 걸어나왔다. 베브의 전철을 밟지는 않은 건 분명 그들의 노력이었다. 베브는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것, 받지 못한 것들에 대한 회한을 쏟아내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다. 그 회한도 부모 세대에게서 온 것이지만. 린지는 그런 엄마에게 품었던 모든 회환까지 끌어안으며 자기 삶을 받아들인다. JD도 마찬가지다. 끝내 가족을 놓치지 않으면서 가족의 회한에서는 한 발짝 멀어진다. 그 뒤에는 할머니의 존재가 있었다.
할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그를 강단 있게 가르친다. 먼저 싸우지 말되, 누군가 싸움을 걸어오면 꼭 그 싸움을 끝내라고. 어떻게든 가족이 도와줄 거라고 안정감을 전해주는 동시에, JD가 이 자리에 만족하고 멈추지도 않게 만든다. 계속 공부하고 노력하게 손주를 독려하고, 삐뚤어질 틈을 주지 않는다. 힘든 상황에서도 기준을 잃지 않게 가르치면서 동시에 엄마와의 끈이 끊어지지도 않게 하는 존재다.
할머니는 노력해도 안되는 일 투성이인 세상에서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고 JD를 호되게 가르친다. 그런 할머니의 가르침 덕분에 JD는 '한 발짝'의 차이를 가질 수 있었다. 등딱지에 상처 입은 거북을 보고 떼어버리자는 친구와 달리, 곧 나을 거라고 제대로 된 곳에 놓아주는 마음을. 힐빌리의 남성들에게서 흘러내리는 폭력이 불량한 십대들에게서도 터쳐 나올 때 그들과 끝까지 함께하지 않는 선택을. 훗날 성인이 된 JD가 아이들과 여자의 목소리 앞에서 감정 분출을 멈추었을 때, 실은 문 뒤에 숨어있던 더 큰 폭력도 함께 멈춘 것처럼. 아주 작은 것에서 작은 것으로, 그렇게 변해가고 나아지는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입지전을 이뤄낸 인물의 '감동 실화'로 많이 평가받는다. 노력의 힘을 가르치는 할머니와 그 말을 따른 끝에 성공한 손주라는, 그럭저럭 좋은 그림을 만들어냈으니까.
자기 자신이 싫어지고, 다 남 탓을 하고 싶어지고, 그래도 조금씩 계속 성장하기를 선택하는 것. 물론 중요하다. 옛날 같으면 모두에게 '감동 실화'였을 이런 이야기는 이제 반쪽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이는 공허한 울림이 되어 버렸다.
이 영화에는 노력의 뿌듯한 성과 못지않게,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면들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깨닫게 하는 면면이 담겨 있다. 이는 불평등과 역차별을 외치는 백인 남성들에게는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없는, 이를테면 <화이트 타이거>의 발람 같은 이들에게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꿔볼 것들이다.
JD가 사는 세계에는 아동보호에 민감한 시스템이 있다. 도움을 요청하며 이웃집에 뛰어들어가면 상대가 아이의 부모라 해도 곧장 신고를 하고, 경찰이 금방 온다. "너에겐 일상일지 몰라도 이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사회에 있다. 물론 그런 어른들조차 닿을 수 없는 세계가 가족이지만, 최소선의 유무는 누군가의 생명을 가르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어렵기는 해도 JD가 노력으로 뭔가 바꿔볼 여지가 있었다는 점, 노력이 성과로 이어질 거란 믿음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것 또한 큰 차이다. 노력과 성과에 일정한 비례 관계가 있다고 믿는 사회에서 JD의 할머니는 무료 음식 지원을 받을 수 있고, 그 모습을 보며 JD는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돕는다. 지원이라곤 없는 나라, 노력의 의미가 내팽개쳐지기 십상인 나라에서라면 다른 모습을 보였을지 모른다. 발람의 할머니가 발람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절로 떠올리게 된다.
노력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JD과 린지가 한 발짝씩 나아간 것도 결국은 그들의 노력이었다. 용서하겠다는, 나아가겠다는 노력. 그러나 노력이란 단어의 빛이 점차 바래가는 느낌을 부정할 수 없다. JD는 분명 선량한 인물이고 <힐빌리의 노래>는 그만하면 제법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힐빌리의 노래>를 위시하는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그 때문이다. 특권의 존재를 감춘 채 노력만 언급하는 자들의 방패막이로 휘둘렀다는 점.
세상에서 더 이상 정공법은 성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가끔 불안과 함께 불쑥불쑥 올라온다. 불로소득이 노동소득을 이긴 지 오래되었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층이 생겨 서로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극도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해져 버렸고, 어딘가 뒤틀려 있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뿐이다.
"아니, 우리는 누군가를 따라잡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밤이나 낮이나, 동료 인간들과 함께, 모든 인간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 행렬이 앞뒤로 너무 길어지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뒤에 선 사람들이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더 이상 서로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점점 더 드물게 만나고, 점점 더 드물게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위의 구절을 외웠던 기억이 난다. 두리토에게 누구의 말이냐고 물었더니, 아마 파농인 것 같다고 했다.
_<A가 X에게>, 존 버거.그러나 이 또한 오늘날의 인류에게 떨어진 과제일 뿐이다. 우리는 화평과 고통을, 미와 추를 함께 물려받는다. 힐빌리뿐 아니라, 화이트 타이거뿐 아니라 우리 모두. 누군가에겐 기회가 적게 열려 있고, 누군가에겐 그나마도 차단되어 있는 이 세상을 우리는 계속 인지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끌어안으면서. 바톤 터치를 하면서. 눈 부릅뜨고 반 발짝씩 어제의 우리와 멀어지면서. 좁은 문을 열어가면서. 다음 사람을 위해 그 문을 잡아주면서. 서로를 위해 기꺼이 밤을 새우는 이들과 이야기하면서. 마음 아파하면서. 포기하지도 않되 누군가를 경멸하지도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렇게 서로 만나면서.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선이정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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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주 차, 최신 씨네 뉴스
모두가 우려했던 <원피스> 실사판이 공개되자마자 전세계에서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요!
걱정이 무색하게 82개국에서 1위에 올라서며 저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위기속에 있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소식들 지금 같이 만나보시죠!
송강호,주윤발 부산국제 영화제 참석, 28회 BIFF 위기 극복 가능할까?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가 10월 4일부터 13일까지 열흘간 진행됩니다. 집행위원장, 운영위원장이 사퇴하고, 이사장까지 자리에서 물러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데 공식 초청작이 지난해 354편에서 269편으로 축소되어 영화제가 진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배우 송강호가 영화제 개막식 호스트가 되었고,주윤발, 윤여정, 판빙빙 등 전세계 영화인들이 영화제를 찾는다고합니다.
이선균, 정유미 <잠>, <오펜하이머> 제치고 1위
배우 정유미, 이선균 주연 영화 <잠>이 공개 첫 날 8만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끌어모으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습니다.
영화 <잠>은 잠에들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현수를 보며 수진은 매일 잠드는 순간 공포감을 느끼는데 점점 현수의 이상 행동이 수위가 높아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설리 유작 <페르소나> 하반기 공개 확정
<페르소나: 설리>가 하반기 공개를 확정과 함께 메인 포스터도 함께 공개되었습니다. <페르소나: 설리?는 설리가 주연한 단편 극영화 '4: 클린 아일랜드'와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진리에게'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 중 '진리에게'는 내달 4일 시작하는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섹션의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부문에 초청받아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될 예정입니다.
2000억원 쓴 <원피스> 넷플릭스 84개국 1위
넷플릭스 시리즈 <원피스>는 지난달 31일 공개 이후 전 세계 시청자를 휘어잡고 있습니다. 지난 1일 59개 나라에서 시리즈 부문 1위에 오른 데 이어 2일과 3일엔 84개 나라에서 정상을 차지했습니다. 84개국 1위는 넷플릭스 최초 기록으로 앞서 <기묘한 이야기 시즌 4>, <웬즈데이>가 83개국 1위를 한적이 있습니다. ㄷ
덴젤워싱턴 주연 '더 이퀄라이저3' 북미 박스오피스 1위
배우 덴젤 워싱턴이 주연한 액션영화 '더 이퀄라이저3'가 개봉 첫 주말 북미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습니다. 작품은 2014년과 2018년에 나온 <더 이퀄라이저> 시리즈 세번째 영화이자 최종장으로 특수요원 ‘롭트 맥콜’이 이탈리아 마피아를 상대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최근 국내외 영화/OTT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해 보는 'LATEST CINE NEWS’였습니다! 재밌게 읽으셨다면 댓글과 좋아요 콕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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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라 에프론이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었을 때
노라 에프론이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었을 때
- 끝나지 않을 운명적 사랑에 대한 믿음
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기분에 따라, 날씨에 따라 뻔하지만 달달한 사랑 이야기를 보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럴 때면 늘 두 주인공이 티격태격하다 결국 사랑에 빠진다는 해피엔딩으로 이어지는 로맨틱 코미디를 찾아보게 된다. 그런데 그 플레이 리스트에는 왜 예전에 즐겨보던 작품들뿐이 없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저 재미있게 보고 기분 좋게 잠들 수 있게 해주었던 로맨틱 코미디만의 몽글몽글함이 이제는 장르적 쇠퇴를 맞이한 것일까?
할리우드 또한 시대별 로맨틱 코미디의 특징을 볼 수 있는데 1930년대 계급 차이를 극복하는 남녀 사이의 로맨스를 그린 스크루 볼 코미디를 시작으로, 50~60년대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를 앞세운 관습적인 역할을 지나 90~2000년대 전문직 여성까지 세상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변화한다. 변하지 않는 점도 있는데, 회사에서 인정받는 직업적 경력에도 언제나 실수를 남발하고 꼭 위기 상황에 남자 주인공이 구해주며, 사회적 성공과 반대로 연애의 부재로 사랑에 굶주려 있다는 점이다. 또한, 남자 취향을 맞춰주는 여자가 매력적이라는 관념을 내세우며 언제나 파트너의 행동에 맞춘 쿨한 매력을 겸비한다. 이런 비정상적이고 불공평한 관계를 이상적으로 그려나갔으니 양산형 영화가 쏟아지는 흐름에 갈피를 잃고, 정치적 올바름이라 부르는 PC 요소들의 대두되며 더욱 괴리감이 생겼으리라.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 사회에서 아날로그 감성으로 치부되는 사랑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일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지만, 아직 사랑과 운명을 믿고 싶다면 꼭 기억해 달라고 언급하고 싶은 한 사람이 있다. 뉴욕 타임스와 에스콰이어의 기자이자, 에디터로 활동했고 소설과 에세이를 출간한 작가이며 90년대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 노라 에프론이다. 인간의 소통에서 비롯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빠져들어 가는 두 사람의 운명적 이끌림을 통해 사랑의 힘을 전하며 관객의 감정적 동조를 일으킨다. 시대가 흐르며 여타 장르들과의 혼재를 통해 다양한 변주로 강렬한 감정을 끌어내는 로맨스가 유행되었지만, 그때 그녀의 작품을 보면 인간으로서 보편적으로 기대하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통해 이루어지는 판타지에서 만족감과 감동을 안긴다. 어쩌면 남녀 관계와 사랑에 대해 가벼워진 사회 분위기에 운명은 고리타분한 올드 스타일일지도 모르지만, 달콤하면서도 녹진한 로맨스 코미디를 만나보고 싶다면 그녀가 남긴 흔적을 따라 즐거운 무비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참 낭만적인 일일 것이다.
모든 것은 카피다(Everything is copy)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소재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자기 경험을 이야기로 이끌 수 있다는 평범한 삶을 바라보는 작가적 시점에 대해 노라 에프론이 남긴 한마디 ‘모든 것은 카피다(Everything is copy)’. 정확하게는 그녀의 어머니가 남긴 말이지만, 우스갯소리를 덧붙여 정작 본인의 카피는 언제쯤 나올지 몰랐던 것 같다. 대표작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나온 지 3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대중들에게 기억되는 특별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관객들 대부분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적어도 한 번 이상은 경험할 남녀의 만남에서 다가오는 설렘을 다루며 빠져들 수밖에 없는 멜로/로맨스를 선보였다. 특히, 말장난 섞인 가벼운 하위 장르로 여겨졌던 로맨틱 코미디에서 알면서도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인물 간의 관계나 감정을 통한 하나의 형식적 법칙으로 정립하며 시대를 대변하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파워우먼으로 꼽히게 된다.
대체로 뻔하고 명확한 형태로 다소 오글거릴 수 있는 과정에도 오히려 관객이 사랑하게 만드는 요소로 전환시키고, 밀고 당기는 연애의 매력을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를 통해 운명과도 같은 사랑을 표현한다. 이 같은 전개는 고전 로맨스 소설의 대가 제인 오스틴과도 같은 맥락을 보여주면서도, 기존의 장르적 관습을 비틀며 시대상을 반영한 노라 에프론식 로맨틱 코미디로 거듭난다. 운명에 대한 믿음을 유쾌하면서도 절절한 고백으로 이어가며 아직도 그녀의 작품을 영원히 지속되지 않아도 될 근사한 낭만으로 가득 찬 사랑의 기억을 머물게 만든다. 현실에 존재할지는 미지수일지라도, 적어도 지금까지 그녀를 최고의 로맨틱 코미디 감독으로 추앙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당연한 이유일 것이다.
① 1989년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1989년 발표된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는 우디 앨런 감독의 작품처럼 여겨지는 대화들이 즐비한 고전적이고 익숙한 스타일인 동시에 노라 에프론이라 각본가로서 현대적 로맨틱 코미디의 구조를 정립한 첫 히트작이다. 두 사람이 이어지기까지 12년의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고, 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마치 ‘제2의 연인’ 속 결혼 전을 보는 듯한 전개를 보인다. 1977년 봄 시카고 대학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졸업과 함께 직장이 있는 뉴욕으로 우연히 동행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없다’라는 결론이 날 수 없는 명제로 설전을 벌이고 서로를 별종이라 칭하며 헤어진다. 몇 년 뒤, 각자의 이별과 이혼을 통보받은 시기에 운명처럼 재회하고 급속도로 친해지게 된다. 우연을 가장한 운명은 늘 해리와 샐리 주변을 맴돌았고, 그저 서로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라는 선을 긋고 다가가는데, 두려움을 느낀다. 스킨쉽과 인간관계에 대한 두 사람의 첨예하고 장황한 설명은 지칠 법도 한데, 결국 헤어지기 싫다는 애증을 넘어서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인정하기까지의 과정이 보는 이들에게 현실적인 공감으로 즐거움을 준다.
재치 있는 각본과 별개로 뜨겁게 불타오르는 열정적인 로맨스는 아니지만, 빌리 크리스탈과 맥 라이언의 따뜻하고 포근한 케미스트리는 설렘이라는 로맨틱 코미디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를 견고히 하고, 사소한 단점 하나도 사랑하게 만드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성장은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결국 오랜 친구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연인이 된다는 뻔한 전개와 뻔한 결말에도 여전히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으로 인정받는 것은 우리가 아는 그 평범함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계가 5년 공백으로 이어지는 사이에 노부부(연기자들) 이야기들이 들어간 부분은 이런 삶의 진리를 전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언제 처음 만났고, 언제 다시 만나게 되었고,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 짧지도 길지도 않게 말해주며 각자의 사연들을 통해 해리와 샐리의 이야기에 진정성 있는 현실을 입힌다. 마치 해리와 샐리에게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거야라고 말해주는 느낌이랄까? 이런 인생의 평범함이 드러나는 부분에서 노라 에프론은 보편적인 삶 속의 전형성을 벗어나는 캐릭터들과 운명적인 상황들로 극적 케미스트리를 만들어 관객에게 영화를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이는 ‘카츠 델리’ 식당에서 맥 라이언의 ‘가짜 오르가슴’이라는 잊히지 않을 명장면은 이제 노장 반열에 접어들었지만, 당시 스티븐 킹 소설 원작의 ‘스탠 바이 미’로 명장 반열에 오른 로브 라이너의 창의적인 연출력과 ‘아리조나 유괴사건’, ‘빅’ 등의 촬영 감독을 거쳐 ‘아담스 패밀리’와 ‘맨 인 블랙’ 등 독특한 세계관을 펼친 베리 소넨필드가 의기투합해 빛났던 재능꾼들의 젊은 시절이리라 생각된다.
② 1993년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통해 할리우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로 인정받은 뒤 1992년 ‘행복찾기’로 감독까지 데뷔한 그녀는 현재까지 대중들에게 최고의 로맨틱 코미디 감독으로 자신을 각인시킨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를 발표한다. 극 중 여주인공 애니가 매일 밤 보며 대사까지 외우는 1957년 ‘러브 어페어’에서 영감을 받아 쓴 각본을 바탕으로, ‘첫눈에 반하는 운명적 사랑을 믿으시나요?’라는 근원적 질문에 대한 자기 생각을 풀어헤친다. 이후 ‘유브 갓 메일’에서도 빛나지만, 남녀 주인공을 연결해주는 커뮤니케이션 매개체에 대한 설정에 그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시대적 감성을 품고 있다. 지금은 앱으로 간소화까지 된 라디오 프로그램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듣는 것만으로 수천 마일이 떨어진 대륙 반대편에 있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희망적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아내와 사별한 뒤 실의 빠져있는 아버지 샘을 위로하려는 아들 조나의 발칙한 사연으로 시작된 운명의 장난은 매일 밤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진심이 담긴 그의 행복한 추억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애니의 마음을 강타해 공감 어린 눈물을 흘리게 하며 결혼을 앞둔 약혼자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누군가에게는 낭만이고 운명이라 여겨지는 순간이지만 다른 누군가에는 이별과 상처가 되는 순간이 교차하며 현실적인 선택을 강요받아도 이상하지 않지만, 해리와 샐리가 서로에 대해 고민한 많은 시간만큼 여기에서도 우연을 가장해 마주치는 세 번의 장면들로 에프론은 운명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하나의 암묵적인 룰 같은 장치는 마지막 엠파이어 빌딩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눈빛으로 감독의 확신에 찬 답변으로 보인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키워가는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을 바라보는 방식은 실제 마주하지 않기에 오롯이 배우들이 홀로 표현하는 감정선에 집중한 채 과거 50~60년대 로맨스 드라마처럼 다가오기도 하지만, 간접적인 소통으로 인한 아날로그적 감성이 애틋함을 더한다. 라디오라는 청각적인 요소를 통해 사연을 주고받고 편지로 마음을 전하고, 지금은 찾을 수 없는 느리고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낭만적이었던 과거의 향수들이 불현듯 찾아온 운명이 보내는 신호를 믿고 싶은 마음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운명의 사랑에 대한 답변을 나타내는 듯하다. 1990년 ‘볼케이노’에서 이미 호흡을 맞췄던 두 사람을 보고 캐스팅한 것이겠느냐는 궁금증이 생길 만큼, 서로에 대한 감정의 확신을 설득력 있게 전하는 연기는 마법과 같은 사랑을 향한 90년대를 관통하는 낭만을 짙게 한다. 셀린 디온과 클리브 그리핀이 듀엣으로 부른 ‘When I Fall In Love’, 태미 와이넷의 ‘Stand By Your Man’ 또한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감독의 따뜻하면서도 달콤한 감성 한 스푼을 더해준다.
③ 1998년 <유브 갓 메일>
전작에서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의 애틋함에 안타까웠던 것인지 두 사람의 사랑스러운 매력을 한 컷에 담아 1998년 ‘유브 갓 메일’(You've Got Mail)로 찾아온다. 지금 시대에 유행하는 독립서점처럼 보이는 길모퉁이 서점과 웹서핑 초기 시절의 이메일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서로의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빚어지는 사랑스러운 상황들로 러닝타임을 채운다. 문학과 뉴욕을 사랑하는 공통점을 가진 뉴요커 조와 캐슬린이 우연히 채팅룸에서 만나 친분을 쌓지만, 현실에서는 앙숙인 대형 체인 서점 폭스 북스의 사장과 길모퉁이 서점의 사장으로 빚어지는 갈등이 사랑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담는다. 동생 델리아와 함께 집필한 이번 작품에서 자매의 문학적 소양 차이를 두 캐릭터에 녹여낸 듯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비롯해 조지 버나드 쇼의 ‘캠벨 여사와의 서신 교환’, 영화 대부 등 자신들의 취향을 드러내는 문화적 언급을 통해 완전히 다른 성향과 성격임을 남녀 주인공에게 부여한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추억과 낭만을 간직한 작지만 예쁜 서점을 지키려는 감성적인 캐슬린과 따뜻한 마음에도 전형적인 비즈니스 마인드에 차갑게 비치는 조의 설정은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의 쫄깃한 밀당을 더욱 마음 졸이게 한다.
익명에 숨긴 채 서로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행동과 매번 울리는 ‘You've Got Mail!’의 알림은 그들이 이미 서로를 알고 미워하지만 깨닫지 못했다는 상황을 재미있게 만드는 장치가 되고, 결말에 이르러 서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로 전환된다. 서로 간의 진정성 있는 대화들이 쌓여 그들이 마주한 혼란을 극복하고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는 감독의 운명론적 이야기는 컴퓨터를 켰을 때 설렘과 즐거움을 주었던 ‘You've Got Mail’ 알림음과 ‘당신이길 바랐어요’라는 마지막 한마디를 통해 다시 한번 감수성을 폭발시킨다. 소소한 일상, 누구나 해보는 고민들, 사람들 간의 따뜻한 대화들이 담긴 섬세한 묘사들은 서로의 생각과 마음이 통한다는 말이 그저 우스갯소리처럼 여겨질지 모르는 지금에는 이해할 수 없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 중간에 놓인 감독만의 감성을 품는다. 늦게 데뷔해 단숨에 최전성기에 오른 감독으로서 뉴욕을 향한 자신의 진심 어린 사랑을 가장 뉴욕다운 풍경으로 담아낸 실력, 할리우드 대표 배우로 자리매김한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의 더할 나위 없는 호흡, 꿈같은 사랑이 전하는 특유의 안락함은 이 작품을 최고는 아니더라도 명작으로 기억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운명과 뉴욕을 사랑한 뉴요커
우리가 사랑한 노라 에프론의 필모그래피에는 공통적으로 뉴욕이 배경에 꼭 들어간다는 것 외에도 몇 가지 특징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로 운명을 믿는 마음을 담아낸다. 조금 지나간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일명 ‘자만추’라는 정해진 소개팅이나 맞선이 아닌 남녀 주인공 모두 자연스러운 만남을 통한 연애를 추구한다. 지고지순한 순애보 끝에 다다른 일방적인 구애가 아닌 N, S로 분리된 자석의 양극처럼 서로에 대한 강렬한 이끌림을 말한다. 오랜 친구 사이에서도,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려서도 일어날 수 있는 남녀의 스파크를 캐치해 ‘저럴 수도 있겠다’라는 운명적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믿게 만든다. 여기서 우리는 운명을 믿고 무작정 기다리는 여주인공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과 스스로 사랑을 쟁취할 수 있는 주체적인 여성상을 내세우는 또 다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시나리오 데뷔작 ‘실크우드’에서는 진실과 권리를 되찾으려는 노조 대표를, ‘제2의 연인’에서는 자신이 경험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상처를 빗대어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커리어 우먼을, 첫 연출 데뷔작 ‘행복찾기’(1992)에서는 판타지 속 백마 탄 왕자님의 등장을 기다리던 공주가 아닌 세상과 타협하기보단 자신에 대한 믿음과 꿈을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으로 인해 변화되는 상황과 이에 얽힌 운명적 상대를 그린다. 보수적인 90년대의 분위기에서 억압되었던 여성의 지위와 사회적 행동의 제약을 깨부수며 신여성의 사랑이라는 새로운 시대상을 담아낸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바람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그녀가 만든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았던 맥 라이언의 등장이다. 초창기 두 작품의 시나리오로 연달아 만난 메릴 스트립도 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한 ‘제2의 연인’에서 주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앞서 언급한 ‘행복찾기’에서 싱글맘 코미디언을 연기한 줄리 카브너 역시 큰 전환점을 만들지만, 노라 에프론이란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연달아 흥행한 세 작품의 여주인공을 맡아 완벽한 페르소나로 거듭나며 배우와 감독으로서 두 사람 모두가 인생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 시절 맥 라이언은 지금도 정석이라 불리는 숏단발컷을 유행시켰고 헐렁한 오버사이즈의 놈코어 룩으로 편안함과 러블리함, 커리어 우먼의 세련미를 동시에 추구하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오죽했으면 ‘맥 라이언이 노라 에프론을 만났을 때’라는 제목 패러디가 생겼을 만큼 그저 귀엽기만 했던 한 여배우를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로 만들며 로맨틱 코미디의 황금시대를 스스로 열었다. 지금의 애인이 진정한 사랑일까라는 고민을 늘 품는 주인공에 어울리는 왠지 모를 나약함과 몽상적인 상상이 어색하지 않은 귀여움은 많은 이들을 판타지에만 존재할 것 같은 운명으로 초대했고 감독이 원하는 사랑은 인생이고, 인생은 판타지라는 꿈을 이루어낸 것이다.
또한, 고전 로맨스에 대한 적절하고 탁월한 활용은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카사블랑카’와 우디 앨런의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는 ‘러브 어페어’(An Affair To Remember)를 효과적으로 배치했으며, ‘유브 갓 메일’에서는 에른스트 루비치의 ‘모퉁이 가게’ 리메이크를 시도했다. 그러면서도 과거 일반적인 로맨스 장르에서 보이는 허영심에 비친 비현실적인 요소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짜이지만 있을법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펼쳐낸다. 첫 작품 ‘실크우드’에서는 기자였던 과거 시절처럼 냉정하게 사건을 파고들었고, 이혼 문제를 다룬 ‘제2의 연인’에서는 사회적인 시선과 문제에 대해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솔직히 토로한다. 남녀노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인간적인 공통분모를 찾아내 프레임을 씌우고 언제나 자신을 반영시킨 캐릭터를 통해 희망적 판타지의 결론을 통해 웃음과 설렘을 선사한 것이다. 남녀의 성격묘사에서 서로를 공격해 무너뜨리지 않는 선을 유지하면서도 행복한 사랑의 결말을 어색하지 않게 이끌어내는 묘미는 이러한 경험적 요인들이 작용해 관객이 수용할 수 있는 심리적인 부분을 파고든다. 그리고 감독에 이르러 공통적으로 내세운 운명이라는 주제에 대해 두 주인공의 만남에 마법 같은 느낌을 부여해 대중을 만족시키는 전형적이면서도 재미있고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라는 클래식 할리우드의 느낌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성했다.
로맨틱 코미디의 별은 영원히 반짝인다
어쩌면 로맨틱 코미디의 전성기는 지났어도 한참 지났을 요즘이다. 주인공 커플들이 재미를 선사하려고 온갖 멜랑꼴리한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대중들은 그들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애틋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브리짓 존스의 일기’,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 ‘10일 안에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법’, ‘로맨틱 홀리데이’, ‘500일의 썸머’, ‘비포 선라이즈’, ‘노트북’, ‘이터널 선샤인’과 같은 좋은 작품들도 많았지만, 정확히 로맨틱 코미디로 한정 지었을 때 2000년대 중반 이후 큰 성과가 없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최근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라스트 크리스마스’ 등이 다시 불길을 살리려 하지만, 지금 영화 업계에서 슈퍼히어로물이나 액션 영화 등 속편, 스핀오프, 리부트라는 명명하에 흥행하면 좋다는 식으로 찍어내는 제작사의 방식도 현실적 어려움을 더한다. 궁극적으로 볼만한 작품이 아니면 극장에 가지 않을 정도로 삭막해진 현실과 DM으로 고백과 이별을 전하는 세대들에게 있어 과거 로맨틱하고 희망적이며 사랑스러운 운명의 만남으로 관객의 애간장을 태우며 감정을 이입시켰던 전형적인 로맨스 방식은 이제 꿈에나 나올 법한 일이라 자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들이 옛 추억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날로그 감성과 레트로라는 문화를 이끌며 다양해진 OTT 서비스를 통해 고전 멜로/로맨스와 로맨틱 코미디를 접하며 변화하고 있다. 이 점에서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의 ‘그걸 전문용어로 개멋 부린다 그러지. 좀 더 고급진 말로는 낭만이라 그러고. 난 믿고 있어’라는 명대사처럼 시대가 변하며 뻔한 로맨스라 여겨지는 지금에도 많은 사람이 찾아보는 영화 목록에서 늘 빠지지 않고 저장되며 로맨스 하면 TOP 10에 꼽히는 건 희망적이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 등으로 대표되는 그녀의 로맨스를 보면서 주인공들의 마음에 공감하고 첫사랑처럼 다가온 운명의 두근거림과 가슴 뛰는 순간들을 경험하며 타고난 이야기꾼의 감성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시대적 분위기와 세대의 취향은 시시각각 바뀌어 갈지 몰라도 최소한 낭만은 계속 이어지고, 여전히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판타지와 또 다른 노라 에프론의 등장을 희망하며 사라지지 않을 로맨틱 코미디의 별을 기억하게 할 것이다. 언제고 다시 시작될지 모를 로맨틱 코미디의 전성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제가 좋아하는 감독에 대해 칼럼식으로 써봤습니다. 긴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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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심과 확신 그 사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콘클라베>는 일관적으로 ‘이방인’에 주목한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에서 알파벳 ‘I’만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엔딩 크레딧에서는 다양한 알파벳을 흰색으로 칠하나 각 이름마다 단 하나의 알파벳만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교황을 선출하는 마지막 투표 전, 하얀 우산을 쓴 추기경들의 행렬 쇼트를 자세히 살펴보자. 한 명의 추기경이 우산을 쓰고 있지 않다. 투표를 앞두고 추기경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의견을 공유하는 씬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너 명씩 모여 있는 추기경들과 달리 추기경 한 명이 혼자 의자에 앉아 있다.
베니테즈 추기경은 이방인이다. 콘클라베를 주관하는 로렌스조차 알지 못하고 오직 선종한 교황만이 베니테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 신자가 거의 없는 카불의 대주교로 로마에 온 추기경이며 준비된 명단에 없던 인물이다. 이 이방인은 로렌스의 부탁으로 추기경들의 식사 전 기도를 맡는다. 그는 주신 음식에 대한 감사뿐 아니라 식사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는 소외된 이들에 대한 기도, 그리고 음식을 준비해준 수녀들에 대한 기도까지 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콘클라베를 운용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안락한 식사 자리가 일상이 아닌 이들을 떠올리고 있다.
여기서 수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수녀들은 콘클라베에 참여할 수 없다. 교황 선출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고 당연히 교황이 될 수도 없다. 수녀 또한 콘클라베에서의 이방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콘클라베 자체는 수녀들의 노동력 없이 열릴 수 없다. 영화는 이러한 수녀의 역할을 조명한다. 마지막 교황 투표를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씬에서 계단을 오르는 추기경들의 쇼트 뒤로 계단을 내려오는 수녀들의 쇼트가 나온다. 위에서 열리는 콘클라베를 아래서 뒷받침하는 수녀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로렌스는 트랑블레 추기경의 비리를 알리기 위해 추기경들에게 보여줄 기밀문서를 복사하고자 한다. 로렌스는 무려 콘클라베를 주관하는 단장이나 복사기는 사용할 줄 몰랐기에 아녜스 수녀의 도움을 받아 문서를 복사하게 된다. 이 기밀문서를 공개한 로렌스는 추기경들 사이에서 비난을 받는다. 이때 아녜스 수녀는 트랑블레가 아데예미 추기경을 곤경에 빠트리게 하기 위해 한 일을 증언하며 트랑블레가 교황이 될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이 시퀀스의 핵심은 교황이 될 유력 후보자였던 트랑블레의 몰락이다. 로렌스가 복사기를 사용할 줄 모른다는 사실은 트랑블레의 몰락을 묘사하는 데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과정 속에서 수녀의 역할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다시 베니테즈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남성인 동시에 여성인 존재다. 그의 성 정체성을 통해서도 그를 이방인이라 규정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성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첫 교황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마지막 투표를 앞두고 베니테즈는 테러를 벌이는 무슬림들을 상대로 종교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테데스코 추기경의 말에 반박한다. 우리의 적은 그들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며 가톨릭 교회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베니테즈의 모습은 성경 속의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요7:41) 영화는 베니테즈를 이 시대의 메시아로서 재해석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베니테즈가 말한 미래로 나아가는 교회는 어떤 교회를 의미하는가? 이 교회는 과연 신 앞에서 ‘옳은’ 교회인가?
교황은 선종 직전까지 가톨릭교회를 의심했다. 이 의심은 교황 자리를 향한 추기경들의 욕심과 각종 비리로 인한 교회 내부의 부패를 의미한다. 추기경들은 신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교황을 선출하는 데보다 세간의 평가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교황을 선출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진다. 전통주의자들은 로마의 전통을 강조하고 자유주의자들은 변화하는 현대사회에 발맞추어 교회 또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두 주장 모두 같은 성서를 근거로 하기에 양측 중 하나의 주장만이 옳다고 우리는 감히 판단할 수 없다.
베니테즈의 미래로 나아가는 교회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강조한다. 영화는 베니테즈의 교회를 양측을 모두 포용하는 옳은 방향의 교회로 그리며 베니테즈는 자신이 확신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영화가 로렌스를 통해 계속해서 강조하는 의심과 확신의 질문에 대한 베니테즈의 응답이기도 하다. 그러나 베니테즈의 입장 또한 끊임없는 의심보다는 확신에 가깝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소인배’이기에 어느 것이 옳은 방향의 신앙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입니다. 의심 없는 확신은 관용의 가장 치명적인 적입니다.” 로렌스는 첫 번째 투표를 앞두고 추기경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 예수의 12제자 중 의심하는 제자로 알려진 도마처럼 (토마스) 로렌스는 영화 내내 의심한다. 그는 교황이 될 유력 후보자들의 결점을 하나하나 의심하고 있으며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는 로렌스의 말에 비추어 우리는 그가 신의 존재까지 의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베니테즈를 교황으로서 가장 적합한 추기경이라 ‘확신’하는 순간 다시 의심이 찾아오기도 한다. 과연 간성(intersex)인을 교황으로 세워도 되는 걸까. 베니테즈의 성 정체성이 앞선 추기경들처럼 하나의 결점에 해당하진 않을까.
영화에는 거북이가 두 번 등장한다. 첫 투표가 끝난 날 밤, 거북이들을 보고 있는 베니테즈에게 로렌스는 전대 교황이 생전에 거북이들을 아꼈다며 자꾸 도망치려 하는 게 문제라고 이야기해준다. 교황이 선출된 뒤 베니테즈의 성 정체성을 알고 혼란스러운 로렌스는 성당 안까지 도망쳐온 거북이를 다시 마주친다. 로렌스는 거북이를 물가로 돌려보낸 뒤 미소 짓는데, 이 거북이는 마치 로렌스 그 자체 같다. 추기경들뿐 아니라 자신의 신앙까지 의심했던 로렌스는 길을 잃은 거북이, 물가로부터 도망치려는 거북이다. 콘클라베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로렌스는 죽은 교황의 뜻을 알 수 없어 괴로워하고 끊임없는 의심에 휩싸인다. 마침내 그는 베니테즈의 비밀을 받아들이고 베니테즈의 교황 선출이 신의 뜻임을 인정한다. 영화는 이를 물가로 돌아온 거북이와 그 앞에서 미소 짓는 로렌스로 표현한다.
영화 <콘클라베>는 성스럽고 경건한 의식 이면에 교차하는 인간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복잡성만을 다루지 않는다. 거기서 더 나아가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과 그 신앙의 형태를 깊이 고찰한다. 종교가 추구하는 진리는 불변하나 그 진리를 추구하는 삶의 과정은 단순히 확정될 수 없다. 끊임없이 의심하자. 의심 없는 확신을 멀리하자.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야 종교는 진리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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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코다> 파이널 예고편
24/7 함께 시간을 보내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가족을 세상과 연결하는 코다 '루비'는
짝사랑하는 '마일스'를 따라간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기쁨과 숨겨진 재능을 알게 된다.
합창단 선생님의 도움으로 마일스와의 듀엣 콘서트와 버클리 음대 오디션의 기회까지 얻지만
자신 없이는 어려움을 겪게 될 가족과 노래를 향한 꿈 사이에서 루비는 망설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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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서핑업> 예고편
카이트 서핑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빌리는 코치의 지원으로 꿈의 대회, 윈드보이저에 참여하게 된다.
그의 여자친구 사라는 제대로된 직장을 구하는 대신 서핑 대회로 떠나는 그가 탐탁치 않고, 결국 둘은 크게 싸우고 만다.
한편 대회로 길을 떠난 빌리는 도중 사연이 많은 스카이를 만나고 둘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른다.
마침내 도착한 서핑 대회에서 그는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 선발전에 나선다.
과연 빌리는 이 대회에서 서핑과 사랑, 둘 다 거머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