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2023-01-04 15:57:16
지니의 존재와 질문, <3000년의 기다림>
이 영화를 보고 난 당신의 세 가지 소원은?
세상 모든 이야기에 통달한 서사학자 알리테아(틸다 스윈튼)가 우연히 소원을 이뤄주는 정령 지니(이드리스 엘바)를 깨워낸다. 그녀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세 번.
영화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때때로 매우 철학적이고 심리적인 내용을 전할 때 이야기를 통해 전달한다. 영화 또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야기가 내용 전달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 서술자는 익숙한 내용을 재밌게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생기기도 한다.

<3000년의 기다림>은 알리테아와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가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통해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지니는 표면적으로 알리테아의 ‘소원’을 묻지만 이를 통해 상대방의 ‘갈망'을 알아낼 수 있다. 반대로 알리테아는 지니의 이야기들을 통해 지니의 갈망을 느낀다. 알리테아는 사랑을 위해 자신의 갈망을 포기했던 지니의 이야기에 사랑과 갈망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또한 사랑으로 자신의 갈망 덮었던 알리테아는 사랑으로 인해 상대방의 갈망을 지켜주는 선택을 한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스웨덴의 공포영화 <렛 미 인>이 떠오른다. 알리테아는 마법과 같이 정령 지니를 만나게 되지만 이는 판타지 영화가 아니라 상상력이 풍부한 알리테아가 들려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알리테아는 지니를 처음 만나고 자신의 상상친구였던 한 소년의 이야기를 들려줬던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세상 모든 이야기에 통달했지만 또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알리테아에게 지니가 들려주는 3000년의 이야기는 이미 알리테아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의 재구성 또는 재기억이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결국 알리테아는 지니와의 대담을 통해 자신의 사랑, 갈망, 삶, 죽음 그리고 시간에 대한 질문을 하고 답을 알아가는 과정을 가졌다고도 해석해볼 수 있다.

세 가지 소원, 예전부터 많이 들어온 소재이지만 영화를 보기 전 떠올렸던 세 가지 소원과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세 가지 소원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이 영화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오랜만에 잔뜩 기대를 했고 그 기대에 한 치의 부족함 없이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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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無心)하게 성의(誠意) 있게!
바둑을 몰라도 조훈현, 이창호의 이름은 안다. 두 국수, 아니 두 천재는 기원 단골 어르신만 아는 아이돌이 아니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이들은 바둑판이라는 작은 세상에서 오로지 돌 하나로 싸우는 정중동의 파이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대결은 그 자체로 화제가 됐다. <승부>는 이들의 대결에 집중하면서 바둑이란 스포츠의 매력을 선보이는 것은 물론, 인생에서도 빗어지는 승부의 세계의 잔혹함, 그리고 이를 딛고 일어서서 진일보하는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것도 무심하게 성의 있게.
최고의 자리에 오른 조훈현(이병헌)은 우연히 당돌한 천재 소년 이창호(김강훈)의 재능을 보고 집으로 들여 제자로 키운다. 창호는 훈현과 함께 생활하면서 바둑을 연마하고, 승부의 세계가 얼마나 냉정한 것인지 알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기풍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 자신만의 것을 창조한 어른 창호(유아인)는 국내 대회에서 결승전에서 스승인 훈현과 격돌한다. 그리고 스승에게 패배를 안긴다. 호랑이 새끼를 키운 것이나 다름없는 훈현은 그 이후 승부의 세계가 냉혹하다는 걸 재차 깨닫고, 자기 삶이 크게 흔들린다.
<승부>는 실존하는 전설적인 두 바둑기사 전투의 신 조훈현, 계산의 신 이창호의 실제 이야기를 각색해 만든 영화다. 실제 한 집에서 생활하며 사제지간으로서 지냈던 일들은 물론, 스승이 제자에게 패하는 이야기, 서로 다른 바둑 스타일 등 주요한 부분들을 중심으로 극적 전개를 위해 픽션을 가미했는데, 영화가 집중적으로 다룬 건 묘한 이들의 관계다.
한솥밥을 먹는 사이로서 사제지간이면서 부자지간처럼 보이는 이들은 바둑판이란 승부의 세계에서 승자와 패자가 된다. 제자에게 진 스승(또는 아들에게 진 아버지), 스승을 이긴 제자(또는 아버지를 이긴 아들)는 그 자체로 누구에게나 환호와 위로를 건넬 수 없다. 오랜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은 이 관계를 뒤흔드는 건 바로 승부, 다시 말해 승부가 가진 냉혹함이다.
오롯이 바둑판에서는 승자와 패자만 있고, 이 부분을 알고 있음에도 이를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감독은 바둑판에 놓인 돌들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이 둘의 관계와 감정선을 잘 잡아 천재 혹은 승부사라 불리는 이들 또한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일 뿐이라고 말한다. 특히 말이 청출어람이지, 제자에게 지는 스승의 마음은 뭉그러질 터. “상대가 누구든 이기는 게 프로의 의무야”라고 말하는 그지만, 자신이 세운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지만, 그 허망함과 공허함을 내색할 수 없는 그 순간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인물이 한 발짝 다가가게 만든다. 그리고 바닥까지 떨어진 그가 재기에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영화는 둘의 이야기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조훈현의 이야기에 포커싱을 맞춘다. 인생에 있어 최정상에 있다 고꾸라진 한 남자가 절치부심해 다시 정상을 노린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데, 그 주체가 조훈현이라는 점을 부각한 영화는 그 재미를 더한다. 특히 과거 자신의 스승에게 받은 바둑판에 쓰인 ‘바둑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글귀를 보며 마음을 다잡고, 도전자로서 이창호와 결승에 나서는 모습은 뭉클함을 전한다. 자신이 가둔 그 격식과 고정관념을 깨는 파격의 모습은 시시각각 변하는 인생이란 싸움터에서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걸 아는 이들이라면 한 수 한 수 격하게 다가온다.
이런 영화의 생명력을 불어넣은 건 이병헌, 유아인의 연기다. 실존 인물과 비교해 봤을 때 이들의 얼굴 생김새와 모습은 그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은 점점 우리가 알고 있는 조훈현과 이창호로 보인다. 그 자체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배우들이 이 역할을 어떻게 접근했는지 모르겠지만, 관객으로서 이들의 연기는 무심(無心)하게 성의(誠意) 있게 노력한 결과로 보인다. 무심(마음을 비우고), 성의(정성스러운 자세)는 영화 결말부에 두 인물이 대국을 앞두고 말하는 마음가짐인데, 배우들도 마음을 비우고 정성스러운 자세로 캐릭터를 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메시지가 오롯이 배우에 가닿았다고나 할까. 이런 점에서 영화의 핵심과 배우들의 연기가 시너지 효과를 냈다고 볼 수 있다.
연출과 각본을 맡은 김형주 감독은 “바둑들 모르는 분들도 영화를 보는 데 방해가 없어야 한다는 토대 위에서 작품을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를 실천하듯 영화는 바둑을 몰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다. 더불어 바둑이 정적인 스포츠라는 약점을 메우기 위해 바둑돌을 놓는 손이나 바둑돌이 금이 가는 모습, 정적을 깨는 동적인 요소를 잘 활용하면서 긴장감을 부여하는 점도 보는 재미를 더한다.
우린 아직 미생이라 말했던 <미생>처럼 <승부> 또한 바둑을 통한 인생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가 마음에 든다면 미생이자 답을 찾지 못한 이들일 공산이 크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극 중 조훈현은 바둑을 이렇게 말한다.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게 바둑이다”. 어쩌면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게 인생이지 않을까! 오늘도 무심하게 성의 있게 인생을 살아간다.
사진 제공: 바이포엠스튜디오
평점: 3.5 / 5.0
한줄평: 바둑을 보며, 인생을 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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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두둥실 휘감은 무지개 너머, 영화 <오즈의 마법사>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유명한 작품일수록 잘 읽어보지 않게 된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대충은 아니까? 다른 고전도 유명한 문구만 알면 '뭐. 전혀 모르는 건 아니니까'하면서 넘기듯이. 책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얕고 넓은 교양으로만 관심이 있어서 그럴 거다. 오즈의 마법사도 비슷하다. 아, 오즈의 마법사? 알지 알지. 도로시,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 나오는 그 이야기. 아, 그리고 영화 OST에는 좋아하는 <Somewhere over the Rainbow>도 나오고. 주디 갈랜드가 도로시로 나오잖아. 윈드오케스트라에서 벌써 두 번이나 OST를 연주하기도 했어. 하지만 내용을 더 깊이 물어본다면 하다못해 오즈가 어떤 인물인지조차 잘 모르는 게 들통날 것이다. 그러다 드디어 읽어볼 마음이, 기회가 생겼다. 오랜만에 할 일 없는 일요일 저녁. 넷플릭스도 왓챠도 동하지 않는 저녁, 책장에 꽂힌 <오즈의 마법사> 책을 꺼내 들게 된 것이다.
네 다음 1939년생(!)
아차 싶었다. 선물 받아놓고 너무 고이 모셔놔 버렸네. 동화니까 술술 읽힐 테니 부담 없이 펼쳤다. 책 표지와 군데군데 들어가 있는 일러스트도 소담하니 반가웠다. 책이 좋아지는데 일러스트도 크게 한몫했다. 정말 동화 같았으니까. 얼마 되지 않아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책만 읽으니 아쉬워 영화도 같이 보았다. 그래, '그' 주디 갈랜드가 도로시로 나오는 그 영화 <오즈의 마법사>. 1939년에 이만한 작품을 만들었으니 문화유산에 기재될 만하다. 우리가 일제강점기일 때 어느 곳에선 이런 판타지 영화가 제작되었다니! 물론 지금 CG를 생각하면 이게 무슨 대수냐 싶겠지만 다시 눈을 비비고 제작연도를 생각해보자. 1939년. 지금 어떻게 영화가 제작되는지 보다 그때 어떻게 찍었을지가 더 궁금할 지경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그녀를 아프게 했는가
물론 문화유산이 된 것은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함께다. 도로시를 통해 희망을 노래하는 이야기지만 실제론 도로시에게 주어진 건 괴롭힘과 약물, 다이어트를 강요한 어두운 현실. 주디 갈랜드는 이 영화에 출연한 것을 후회했을까? 성공은 역시 독이 묻은 행운이었을까? 그녀의 입장은 알 수 없지만 영화는 그녀가 출연하지 않았으면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예상치 못하게 초반부터 나오는 그녀의 <Somewhere over the Rainbow>, 얌전한 버전의 스칼렛 오하라를 보는 듯한 당돌하면서 귀여운 모습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모른다. 슬픈 얘기를 많이 듣고서 봐서 그런가 간혹 투덜거리면서 봤다. 아니, 얼굴이 어때서, 체구가 어때서! 왜 못생기고 살이 쪘다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는지! 좋기만 한데. 그냥 좋은 게 아니라 대체 불가능하게 좋은데! 카메라가 문제였을까, 사람들의 눈이 문제였을까? 심지어 그녀의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충분한데. 우리에게 수많은 웃음과 행복을 주고 본인은 불행했을 주디 갈랜드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영화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면, 그 와중에 어딘가 찜찜했다면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와 책의 기본적인 구성은 거의 비슷하다. 도로시는 강아지 토토와 함께 토네이도로 집째(!) 날아와 버렸다. 도로시는 고향인 캔자스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친구 3인방 허수아비는 뇌를, 양철 나무꾼은 심장을, 겁쟁이 사자는 용기를 갖고 싶어서 함께 오즈를 찾아가게 된다. 오즈는 소원을 들어줄 테니 서쪽의 마법사를 없애라는 조건을 달았고 약속을 지켰더니 알고 보니 위대한 마법사는커녕 도로시와 집이 멀지 않은 서커스 극단 마술사. 오즈의 실체는 실망스러웠으나 모두들 원하던 것을 가지고 도로시는 토토랑 같이 집에 돌아온다. 참으로 행복한 이야기.
그러나 차이점이 명백히 존재한다. 갈등구조. 위기를 대처하는 방법. 그리고 그들이 원하던 소원. 책에는 특별한 갈등구조가 있지는 않으며, 장애물이 있다 해도 함께 노력해서 고비를 넘긴다. 이미 3인방은 뇌와 심장과 용기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왜 당신들만 몰라!) 뇌가 없는 허수아비가 고민의 순간 해결책을 찾아낸다거나,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이 발밑에 벌레를 다치게 할까 봐 안간힘을 쓰고, 용기가 없다는 사자가 깊은 물살을 점프해서 친구들을 데려다주고 위험할 땐 '크오와왕'하면서 위협도 할 줄 안다. 이쯤 되면 내 머리와 몸통과 내면에 있는 것은 뇌인가, 심장인가, 용기인가. 실제로 오즈가 서쪽 마녀를 없앤 대가로 준 것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이 밖에 서로에게 의지하며 위기를 헤쳐나갔다는 점, 그리고 각자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점 또한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 약간 잔인하기는 하다. 양철 나무꾼이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굳이 40번의 도끼질로 40마리의 늑대를 죽였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반면 영화는 갈등구조를 뚜렷하게 표현하기 위해 서쪽 마녀를 지속적으로 악역으로 입력시킨다. 책에서 읽을 땐 그저 오즈가 서쪽 마녀를 없애야지만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 일종의 '퀘스트'에 불과했는데 영화에선 처음부터 끝까지 종종 나와서 도로시와 3인방을 괴롭히고 염탐한다. 큰 위기는 외부의 도움을 받는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게 에메랄드 시로 가기 전에 양귀비꽃 들판 장면이다. 책에서는 도로시, 토토와 겁쟁이 사자가 양귀비 냄새에 취한 걸 보고 양철 나무꾼과 허수아비가 바쁘게 열 일 하고, 어쩌다 친구가 된 쥐 친구들의 도움을 보태 빠져나왔다. 영화에선 나무꾼과 허수아비는 그저 '어쩌지'를 반복하다가 북쪽 마녀가 뾰로롱 분홍색 비눗방울을 타고 와서 눈을 내려주면서 해결된다. 거 참, 예쁜 장면이긴 했지만 김 빠졌다. 4인방의 활약이 궁금했지, 북쪽 마녀님이 눈을 내리는 걸 기대하진 않았으니까.
"그럼 저한테 뇌를 못 주시나요?"
허수아비가 물었습니다.
"너는 뇌가 필요 없어. 매일 새로운 걸 배우고 있으니까. 아기들이 뇌가 있다고 많이 아는 건 아니잖아. 경험을 통해서만 무엇인가 배울 수 있단다. 세상을 오래 살수록 경험도 많이 쌓이는 법이야."
(중략)
"그러면 내 용기는요?"
사자가 걱정스레 물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넌 이미 용기 있는 사자야. 너에게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라 자신감이야. 생명이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 위험에 처하면 두려워하기 마련이지. 그런 두려움을 이기고 위험에 맞서는 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란다. 그런데 넌 그런 용기를 이미 많이 가지고 있잖아."
(중략)
그러자 양철 나무꾼이 물었습니다.
"내 심장은요?"
"글쎄, 그건 말이지. 네가 심장을 갖고 싶어 하는 게 오히려 잘못인 것 같아. 심장은 사람들을 대부분 불행하게 만들거든. 그 사실을 알면 심장이 없는 걸 행운으로 여길 텐데. "
- p. 234-236
<오즈의 마법사>의 핵심. 즐거운 소원 성취 시간이다. 오즈는 허수아비, 사자, 양철 나무꾼에게 "네가 원하는 건 이미 너에게 있거나 딱히 받을 필요가 없는 거야"라는 식의 답변을 한다. 뇌가 없어도, 용기가 없어도, 심장이 없어 보여도 이미 다 제 기능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소원을 들어주는 방식 역시 당사자에게 믿음을 더해주는 정도다. 허수아비에게는 왕겨와 핀, 바늘로 만들어진 뇌(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를 것)를 주고, 양철 나무꾼에게는 겉은 비단에 속은 톱밥인 심장을 넣어주고, 사자에겐 마치 초록색 병에 든 액체를 접시에 놓고 이걸 마시면 용기로 변한다고 하면서 만족스러운 선물을 준다. <어린 왕자> 뺨칠 설득력 아닌가. 자, 네가 원하는 뇌도, 심장도, 용기도 여기 있어.
어디 보자, 자네에게 필요한 건 말일세
"당신이 약속한 양철 나무꾼의 심장은 어떻게 되는 거지? 또 약속한 겁쟁이 사자의 용기는? 허수아비의 뇌는?"
"누구나 뇌를 가질 순 있어. 그건 열등하고 소모적이야. 땅이나 바다에서 사는 모든 겁쟁이 하등 생물이 뇌를 가지지. 내가 있던 곳의 대학에선 모두가 위대한 사상가로 태어난다네. 그들이 졸업을 하면 네 것보다 나을 바 없는 뇌로 깊은 생각을 해낸단다. 네가 갖기 못한 건 졸업장이야. 따라서 나에게 갖춰진 지적인 권위와 '대학위원회의 공식적인 인정'에 따라 여기 당신에게 영예로운 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바이네."
"사자, 자네는 용기가 없어 도망간다는 망상에 빠져있지. 지혜와 용기를 착각하는 거야. 내가 있던 곳의 영웅을 얘기해주자면 해마다 그들은 도시 한복판에서 퍼레이드를 벌인다네. 그들은 자네와 다른 게 없어. 자네가 갖지 못한 것은 메달이야. 마녀에게 맞선 특출난 용맹과 뛰어난 공적으로 자네에게 훈장을 수여하네. 자넨 전설적인 용사임을 기억하게."
"양철 친구, 자넨 심장을 원하지. 심장이 없는 건 엄청난 행운이라네. 심장은 완벽히 만들어지지 않는 한 실용적일 수가 없다네 내가 있던 곳에 매일 선행만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네. 사람들은 그를 '선행자'라고 불렀지. 하지만 그가 큰 심장을 가진 건 아니었어. 자네가 갖지 못한 건 단지 표창장이야. 따라서 자네에게 친절에 대한 감사로 기꺼운 마음으로 존경과 애정의 선물을 주겠네. 그리고 기억하게, 감성적인 친구여. 심장은, 자네가 얼마나 사랑하느냐보단 얼마나 자네가 사랑받느냐가 중요하다네"
-영화 <오즈의 마법사> 中
영화에서는 당사자의 믿음과 안도를 위한 선물이라기보다 타인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는 증명용으로서 선물을 주었다. 허수아비에게 뇌라는 게 있는 건 쉽지만 '위대한 사상가의 똑똑한 뇌'를 주고자 박사학위를 주고, 사자에게도 보통 크고 작은 용기가 아닌 '영예로운 용기'를 뜻하는 메달을, 양철 나무꾼에게도 그냥 콩닥거리는 심장 말고 '착한 심장'을 가진 걸 보여주려고 심장 모양으로 똑딱거리는 시계를 표창장이라며 준다. 사실 저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실제 현실이라면 박사학위와 메달과 표창장에 껌뻑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여태까지 지켜오던 동화적인 이야기가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아 아쉬웠다. 박사학위와 메달, 표창장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걸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그럼 그들은 다시 뇌와 용기, 심장이 없는 존재란 말인가. 누구를 위해 증명해야 하는가. 게다가 저 박사학위는 잘못하면 학위 위조에 걸릴지도 모른다! 저 메달, 저 표창장 역시 공신력이 있는 것인가? 사기꾼 아니랄까 봐 선물도 사기로 준 건 좋은데 나중에 뒤탈이 있을 만한 선물이다. 오즈가 착한 사람이면서 나쁜 마술사라고 본인이 한 말이 맞는 말인가 보다. 마술사가 현실적이면 나쁜 마술사지, 안 그런가?
집이 천국입니다
우리의 도로시는? 도로시랑 토토는 정말 고생 많았다. 물론 우연찮게 못된 마녀를 제거해주는 대단한 일을 하고 왔지만 말이다. 다른 친구들이 선물을 받을 때 속으로 참 애간장을 많이도 태웠고. 애당초 책에선 은색 구두였고, 영화에서는 빨강 구두였던 마녀의 구두 사용법만 알았어도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아서 그녀는 구두를 구두의 용도로만 썼고 고생 끝에 집이 천국이라는 쉬운 결론을 얻었다. 영화가 더 김 빠지는 건 도로시가 짐작건대 아픈 와중에 꿈을 꾼 것처럼 표현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처음에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을 만났을 때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냐는 말을 하는데 그게 복선이었다니! 병문안 온 아저씨 삼인방이라나! 세상에, 이게 다 꿈이라니 너무 서운하지 않나. 진짜 갔다 왔는데! 하면서도 집이 천국이라는 도로시 얼굴은 보기 좋지만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면에서 책의 전개와 결말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영화는 책으론 느낄 수 없는 것들을 선사한다. 도로시의 집은 흑백이나 갈색이었던데 비해 오즈의 나라에서는 총천연색으로 비친다. 갑자기 모든 게 색깔이 생겼을 때의 그 아름다움이란! 또 도로시만큼이나 토토를 잘 부각해주었다. 강아지를 괴롭힐 때마다 도로시는 돌직구를 날리는 프로 강아지 사랑꾼이었고, 토토 역시 원작에는 없던 위기의 순간 도로시를 구하는데 크게 일조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저 작은 강아지 토토가 매우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어떻게 영화를 찍었을까 싶을 정도. <Somewhere over the rainbow>라는 언제 들어도 좋은 주디 갈랜드의 노랫소리에 깨알같이 손을 주는 토토의 귀여움까지 확인할 수 있고, 오즈의 세계를 예쁜 원색으로 꾸며놓고 노래와 춤이 가득한 축제로 만들어주었으니까. 마지막으로 <Ding-Dong, The Witch Is Dead>, <Follow the Yellow Brick Road>, <If I Only Had A Brain> <We're Off to See the Wizard>처럼 아기자기한 수록곡이 중독적으로 귀를 맴돈다.
김동인의 <무지개>라는 소설에서는 무지개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존재다. 조금만 더 가보자고 하다가 눈 깜짝할 새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린 소년들이 넘쳐난다. 그 이야기 속 무지개가 위험하고 절대 만날 수 없는 존재였다면 오즈의 마법사 속 무지개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진짜 무지개였다. 위험하지도 않고 희망을 주는 좋은 무지개. 꿈이든, 꿈이 아니었든 어떤가. 영화 속 도로시에겐 자려고 하면 생각나는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마음이 둥실 휘감겨서 무지개 너머 도로시와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사자, 오즈와 함께 하는 기분인걸. 감사해야겠다. 무지개를 손에 움켜잡으려는 게 문제지, 무지개 너머를 꿈꾸는 건 아무 문제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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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윤여정의 시작 <화녀>, 50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오다!
영화 <화녀>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배우 윤여정이 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국내외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이로써 윤여정은 영화 <사요나라>(1957)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우메키 미요시에 이어 아시아인으로서는 64년 만에 두 번째 수상자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동료 후배 배우들의 수상 축하 물결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그녀가 수상소감으로 언급했던 故 김기영 감독과 함께한 그녀의 데뷔작 <화녀>가 50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알리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화녀>는 시골에서 상경해 부잣집에 취직한 가정부 명자(윤여정)가 주인집 남자의 아이를 낙태하면서 벌어지는 파격과 광기의 미스터리 드라마다. 1971년 개봉 이후, 50년 만의 스크린 재개봉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화녀>는 김기영 감독 연출, 윤여정 배우 주연의 작품으로 개봉 당시 신인 배우 윤여정에게 대종상, 청룡영화제,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등 각종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길 정도로 극찬을 불러모은 작품이다. 여기서 윤여정은 한 가정을 파멸로 몰고 가는 가정부 '명자'역할로 캐릭터의 독보적이고 파격적인 비주얼과 광기어린 모습을 보여주며 신인답지 않은 과감하면서도 탁월한 연기를 선보였다.
또한 윤여정 배우가 '천재적인 감독'이라 특별 언급할 정도로 감사를 표한 김기영 감독의 독창적인 연출력과 새로운 촬영 방식, 파격적인 서사는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으로 손꼽히며 5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신선한 충격을 전한다. 한국영화 사상 가장 독창적인 세계관을 가진 김기영 감독만의 획기적이고 감각적인 연출은 윤여정의 과감한 연기와 함께 우리에게 다채로운 볼거리를 선사할 예정이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미나리>의 감독, 스태프, 가족에 대한 감사 인사와 함께 마지막으로 자신이 첫 출연한 영화 <화녀>를 함께한 故 김기영 감독을 언급하며, "김기영 감독에게 감사하다. 저의 첫 영화를 함께 만드셨는데, 아주 천재적인 감독이셨고, 살아계셨다면 수상을 기뻐하셨을 것이다'라는 벅찬 수상 소감을 전했다. 이번 <화녀>의 재개봉 소식은 지금의 그녀를 있게 한 김기영 감독과의 첫 작품을 스크린으로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또한 배우 윤여정의 전성시대가 열린 지금, 그녀의 50년 연기 인생의 시작을 조명할 수 있어 더욱 반갑고 특별하게 다가온다.
누군가의 시작을 보는 것은 지금의 그 사람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누군가는 그녀의 인생을 두고 지금이 그녀의 전성기라 말하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최고의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배우. 매 순간 최선을 살아가는 '배우 윤여정'의 시작은 과연 어떠했을지 영화 <화녀>를 통해 함께 확인해 보자.
씨네랩 에디터 J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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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겁했기에 지킬 수 있던 이름들
<페르시아어 수업>은 한 사람이 살기 위해 순간적으로 내뱉은 거짓말로 인한 후폭풍을 겪어내는 이야기다. 영화는 시작부터 그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면 그에게도 똑같이 벌어졌을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형벌을 배경으로써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 이야기를 감정적으로 풀지 않을 거라는 암시처럼 느껴진다. '질'은 유대인이지만 나치군에 끌려가는 과정에서 물물교환으로 우연히 얻게 된 페르시아 책을 증거로 자신이 페르시아인이라 주장하며 목숨을 구한다. 한 장교가 페르시아어를 알려줄 페르시아인을 찾고 있다는 소식 때문에 목숨을 건사하게 된 질이 자신이 한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고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건 그다음 문제다.
장교도, 그를 데려온 군인들도 그가 페르시아인이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군인들은 사례품을 받기 위해 그를 데려오긴 했지만 유대인의 외모를 가진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장교는 그에게 매일 페르시아어 수업을 들으면서도 그가 가짜인지 확인하기 위한 덫을 파둔다. 질은 장교의 앞에서 '레자'라는 이름의 완벽한 페르시아인이 되어야 한다. 페르시아어라고는 책을 받을 때 들은 '아빠'라는 단어 정도만 알기 때문에, 그는 필사적으로 가짜 페르시아어를 만들어낸다. 가까스로 전혀 다른 체계의 단어 조합을 만들어야 할 상황에 처할 때, 인간이라면 당연히 한계를 체감하게 되기 마련이다. 기록을 남길 수 없는 환경에서 질이 써오던 입으로 외우고 머리로 기억하는 방법은 결국 한계에 부딪힌다.
이때 질의 눈앞에 펼쳐지는 묘수는 질에게 주어지던 우연 혹은 행운의 연속으로 보이면서, 영화의 마지막을 생각한다면 필연처럼도 느껴진다. 어느 군인이 제 할 일을 하지 못해 못마땅해하던 코흐가 질에게 맡기는 '수감자 명단 작성' 업무를 질이 보란 듯이 해내는 것은 질이 유대인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상징적으로 느껴지는 면도 있다. 군인들은 장교에게 특별 대우를 받는 그가 못마땅해 함정을 파고 그가 거기에 빠지길 여러 차례 기다리지만, 질은 그들이 만든 난관들을 위태롭고도 무사히 통과하며 계속해서 살아남는다.
그곳, 수용소에서 계속해서 살아남는 것에는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곳을 거쳐가는 유대인들은 목숨을 잃고, 수용소는 그런 그들이 거쳐가는 경유지 중 일부다. 질은 이들과 같은 처지에 처해 있지만 가짜 페르시아어 수업을 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자신을 점점 부끄럽게 생각한다. 핍박의 체제를 만든 사람들을 원망하고, 그런 체제가 유지되는 현실을 한탄할 여유는 수용소 안에서 존재할 수 없다. 계속되는 유대인들의 죽음을 보기만 할 수밖에 없는 질이 가지는 감정은 반복되는 분노와 허탈감이다.
페르시아어 수업과 함께 질과 코흐의 관계가 진전될수록 질은 더 허망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영화에는 둘 사이의 미묘한 유대가 우정과도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여럿 존재하는데, 그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영화는 결국 두 사람 사이에는 넘지 못할 벽이 있음을 질의 울분에 찬 대화를 통해 보여준다. 자신도 떳떳하지 못하고, 코흐는 더 비겁한 사람이라는 그의 말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고백이면서, 코흐가 애써 보지 않던 현실을 보게 만들며 그를 찔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비겁했던 사람과 그보다 더 비겁했던 사람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라는 말은 살지 못한 자들의 눈에는 변명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건들을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겪어냈고, 다른 이유는 그 시작에 있지 않았다. 외웠던 수많은 단어들도, 자신이 페르시아인이라는 순간의 거짓말도, 그것을 은폐하기 위한 행동들도 마찬가지다. 이것들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펼쳐질 때, 아마도 당신은 2,840이라는 숫자가 주는 충격에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끄럽고 비겁했던 자가 자신을 위해 행했던 일이 모두를 위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목도하면서. 무엇보다도 그가 '살아있기에' 증명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더해져 영화의 마지막은 더욱 진한 여운을 남길 것이다.
*씨네랩으로부터 초대받아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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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뜻밖에 트럼프와 한목소리로 MAGA를 외쳐버린
6★/10★
거대한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차근히 조립된다. 땅과 수평으로 놓인 우주선은 이내 발사를 위해 세워진다erect. 그리고 분출하듯ejaculate 솟아오른다. 아폴로 11호에 진심인 발사 책임자 남성 콜의 곁에는 그를 보조하며 천문학적인 예산 확보에 혁혁한 공을 세운 마케팅 전문가 여성 켈리가 있다. 긴 칼, 높게 솟은 건물은 남성성(남성 성기)의 오랜 은유다. 우주선은 이 연장에 놓일 자격이 차고 넘친다. 그렇다. 〈플라이 미 투 더 문〉은 한 여성이 진심을 가졌으나 영 숙맥인 남성(그리고 미국)의 시든 성기를 완벽하게 북돋고 위무해 다시 부풀어 오르게 하는 이야기다.
아폴로 1호 발사 실패 후 쪼그라든 콜과 미국의 상징적 성기는 아폴로 11호의 성공으로 다시 거대하고 단단한 위세를 과시한다. 절대적 거대함뿐 아니라 상대적 거대함까지 갖췄기 때문이다. 미국인과 소련인 중 누가 먼저 달에 발을 디딜 것인지가 체제 경쟁의 핵심으로 여겨지던 때, 아폴로 11호의 성공은 미국의 상징적 남성 성기가 소련의 것보다 우월하다는 의미다.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한 남성성 경쟁에서의 완승이다.
콜은 자신의 책임으로 아폴로 1호가 실패해 사랑하는 동료 3명을 잃었다. 미국 역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론 악화와 상대적으로 앞서 있던 소련의 우주 기술로 위축된 상태다. 아폴로 11호의 성공은 이 모든 좌절을 한 번에 뒤엎는다. 그리고 영화가 보여주듯, 이 과정에서 어쩌면 NASA 엔지니어보다 더 큰 공을 세운 게 켈리다. 연이은 발사 실패로 시큰둥해진 대중의 관심을 다시 아폴로 11호에 불러 모으고, 여러 기업의 후원을 끌어오고, 예산 지원에 미온적인 정치인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 켈리는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한다. 켈리는 콜과 미국의 비아그라다.
그러나 켈리가 비아그라여서는 안 된다. 축 처진 무언가를 바로 세워야 하지만 인위적, 인공적 힘이 개입해서는(혹은 개입한 것처럼 보여서는) 곤란하다. 누군가가 어르고 달래야만 딱딱해진다면, 그 강함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즉 ‘비아그라 발기’를 ‘자연 발기’로 바꿔야 한다. 능력 좋은 사기꾼이었던 켈리가 아폴로 11호를 향한 콜의 진심에 감화되어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그의 여정에 몰입하는 서사는 콜이 발기력을 회복하는 데서 켈리가 담당한 역할을 슬그머니 사라지게 하는 역할을 맡는다. 아폴로 11호가 임무에 실패할까 두려워 별도의 세트장을 꾸린 후 거짓 달 착륙 영상 송출을 기획한 백악관의 음모를 켈리가 끝내 거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효과를 낸다. 미국의 강함은 거짓 연출에 기댈 필요가 없다. 비아그라 없이 자연스럽게 우주선을 조립하고, 세우고erect, 발사ejaculate하면 된다.
개별 남성과 국가의 위축을 아폴로 11호라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고 상징적인 이벤트로 다시금 곧추세우는 이 영화는 아마도 의도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구호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와 공명한다. 유세 과정에서 총기 피습을 당한 후 푸른 하늘과 성조기를 배경으로 주먹을 치켜올리는 그의 사진은 아폴로 11호와 마찬가지로 전 세계인에게 하나의 잊지 못할 시대적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피습 후 곧바로 일어난 그가 수많은 다른 미국인의 마음속에 불꽃을 일으킨 것도 아폴로 11호와 닮았다. 차이가 있다면 분노, 좌절, 절망, 혐오를 동력으로 하며 이를 정치적 에너지로 폭발시키기 위해 가짜뉴스, 의회 폭거, 범죄 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트럼프가 〈플라이 미 투 더 문〉이 설파하려는 ‘진짜’ 미국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오히려 트럼프는 가짜 달 영상을 송출하자는 음모를 기획한 영화 속 인물에 가깝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는 아니다. 둘 다 쇠락한 남성/미국을 다시 발기시켜야 한다는 데는 똑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다만 ‘자연스럽게’, ‘진실되게’(즉 비아그라 없이) 할 것이냐 아니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냐의 방법론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의 질문은 이렇다. 자연 발기든, 비아그라든, 그 외 다른 방법이든 미국을 시든 남성 성기로 은유하고 여성을 이를 보드랍게 달래주는 타자로 활용하는 방식(사랑 앞에 눈물 흘리며 반성하는 켈리보다는 온갖 거짓말로 종횡무진 자본주의 한복판을 헤집는 초반부의 켈리가 훨씬 매력적이다), 그리고 이를 보며 개별 남성이 안도감을 얻을 수 있도록 사랑을 재현하는 방식이 ‘자연스러운’ 나라가 과연 진정 위대한가? 그들의 위대함은 어디를 향하는가? 애초에 그들이 위대한 적은 있었던가? 위대함의 은유와 계보에 대한 ‘대체 역사’ 구성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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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일 뿐, 이게 바로 나야.
MBTI별 특징을 읽으며 ‘어머 ! 정말 나랑 똑 같아.’ 하고 생각한다거나 점을 보러 갔을때 ‘걱정이 많고 생각이 많은 편’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며 맞장구를 쳐본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라도 해당 하는 보편적인 이야기일 때가 많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처럼 어떤 말이라도 내 이야기 처럼 믿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진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을 자신만의 특성으로 여기는 심리적 경향을 ‘바넘 효과’라고 한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했던 19세기 서커스 단장이었던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에서 생긴 말인데, 영화 <위대한 쇼맨>은 쇼비지니스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바로 그 바넘의 일대기에 관한 이야기를 뮤지컬로 보여 준다. 만들어 진지 7년이 넘었지만, 주인공 바넘을 연기한 ‘휴잭맨’의 매력에 대한 칭찬과 버릴게 하나도 없이 명곡으로 가득 찬 OST로 여전히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지상최대의 쇼의 단장이 꿈인 바넘은 가난한 양복집 아들이다. 상류층의 양복을 맞춰주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간 바넘은 오래전 부터 그 집안의 딸 채리티와 알고 지냈지만, 채리티 아버지는 바넘이 딸과 가까이 지내지 못하게 엄격하게 대한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바넘과 채리티는 가족의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하여 캐롤라인과 헬렌 두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바넘의 직장이 파산하면서 위기가 찾아온다. 걱정으로 가득한 날들에 어느밤 채리티와 딸들에게 조명쇼를 보여주다가 바넘은 잊고 지냈던 꿈을 떠올리게 된다.
지상 최대의 쇼를 만들겠다는 꿈.
은행에서 담보대출을 받은 바넘은 건물을 사서 호기심 박물관을 차린다. 기상천외한 것들을 전시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차갑다. 그러다 바넘은 왜소증 남자인 찰스를 시작으로 얼굴에 수염이 난 여자, 공중곡예를 하는 흑인 남매, 전신에 문신을 한 남자, 온 몸에 짐승처럼 털이 난 남자, 아주 뚱뚱한 남자. 거인처럼 큰 남자, 알비노에 걸린 남자 등 기이한 사람을 모아 쇼를 하게 된다. 극 소수자, 소외되고 놀림 받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세운 쇼는 첫날 성황리에 공연되지만, 쇼를 지켜본 사람들 사이에는 호불호가 갈리게 된다. 하지만 이런 논쟁은 서커스 쇼를 더 유명하게 만들고, 수많은 관람객이 몰려 들어 바넘은 부자가 된다.
세월이 흘러 바넘이 첫째 딸 캐롤라인의 발레 무대를 관람하던 중 자신을 비웃는 상류층의 시선을 느끼게 된다. 딸 역시 친구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있었다. 천박하다며 비아냥을 듣던 바넘은 쇼에 변화를 주기로 한다. 연극작가 필립 칼라일을 찾아가 서커스의 전반적인 경영과 상류층도 좋아할 기획을 시작한다. 서커스를 반대하는 시위가 날이 갈수록 격해지고 있는 와중에, 필립을 통해 영국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공연하게 되고, 이 때 스웨덴 오페라 가수 제니 린드를 만나 미국에서의 공연을 제안한다. 서커스 관객이 줄어 예산이 적었지만, 바넘은 제니의 미국투어를 강행하고,한편 서커스공연장에서 반대시위자들과 단원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제니와 바넘은 불륜스캔들이 신문에 크게 보도된다.
채리티는 떠나고, 무리해서 진행한 투어 공연이 망하게 되어 전재산도 모두 은행에 넘어간다. 모든 것을 잃은 바넘 곁에 남은 것은 동료들이었다. 그동안 받아왔던 수익을 모아왔던 필립은 해안가 부두의 싼 땅을 사서 거대한 텐트를 치고 다시 서커스가 시작된다.
이 영화에 영감을 준 바넘은 현실에서는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수식어가 늘 붙어 다녔다. 흑인과 장애인 차별에 반대하면서도 서커스에서 장애인을 희화화 하여 대중의 관심을 끌어 돈을 모으는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선천적인 특징으로 소외받덤 사람들에게 주인공이 될 기회를 준 것일까? 그의 쇼가 천박한 사기인가. 피부색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온갖 다양한 사람들을 동등하게 무대에 세운 인간애를 가진 가진 사람인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그가 선인인가 악인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판단을 유보한다.관객의 마음이 닿는 곳에서 생각하길 바란 것처럼.
서커스는 예술이 아니라고 한 사람들에게 바넘은 ‘가장 고귀한 예술은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타인의 시선, 타인의 판단이 아닌 자신이 세운 기준으로 꿈을 이뤄가고, 소수자라 숨어 있던 단원들이 “This is me.” 라고 말하도록 용기를 준 사람. 내 마음이 닿은 곳은 그 곳이었다.
I am brave, I am bruised
난 용감해, 당당해
I am who I'm meant to be, this is me
난 내가 자랑스러워, 이게 나야
I'm not scared to be seen
남의 시선은 두렵지 않아
I make no apologies, this is me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아, 이게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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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못건드리는 양아치가 탄 버스에 하필 동석이형이 ㅋㅋㅋㅋ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원더풀 고스트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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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7] 물회와 함께 펼쳐지는 남녀의 느와르- 낙원의 밤
신세계, 마녀의 박훈정 감독이 신작 낙원의 밤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엄태구와 전여빈, 차승원 배우와 함께 돌아왔는데요.
극장 개봉을 하지 않고 넷플릭스에서 단독 공개가 되었어요.
박훈정 감독의 신작을 기대하시는 분들이 많았을텐데, 영화는 다소 아쉬움이 남습니다.
엄태구 배우나 전여빈 배우의 연기는 좋은데, 이야기를 보면서 관객들에게 주인공들의 감정들이 잘 전달되지 않았던 것 같고 중얼거리는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아 불편했어요.
느와르 장르의 색깔은 들어가 있지만 일단 어색하게 만나서 연대의 끈이 생기는 남녀의 드라마가 중점적으로 이어집니다.
영화에 대한 자세한 평은 영상을 참고하세요!^^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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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거룩한 밤: 데몬 헌터스> 메인 예고편
👊악마도 때려잡는 어둠의 해결사! [거룩한 밤: 데몬 헌터스] 메인 예고편 공개! 4월 30일 극장 대개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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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더 데이스> 공식 티저 예고편
- 총 8화로 구성된 본 작품은, 면밀한 조사에 기반해 대재앙이었던 사고를 세 개의 상이한 시점에서 충실히 포착한 다층적 드라마다. "그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 드라마는 정부, 기업 조직, 현장에서 목숨을 걸었던 이들의 시점에서 긴박했던 7일간 실제 있었던 사건을 중심으로 답을 추적해 간다. 기획과 제작은 《코드블루》 시리즈 등 대형 히트작을 만드는 한편, 《하얀 거탑》 시리즈, 《맨발의 겐》처럼 묵직한 사회파 드라마도 세상에 내놓았던 마스모토 준이 맡았다. 그리고 《코드블루》 시리즈의 감독으로 오랜 시간 마스모토와 호흡을 맞췄던 니시우라 마사키와 《링》시리즈를 만든 나카타 히데오가 공동 감독으로 참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