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Queer, 2025 / 137분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이미 늦어버린 나의 사랑, <퀴어>
주인공 ‘리(다니엘 크레이그)’의 사랑은 난해하고 희한하며 불안하고 때때로 위험하다. 그가 퀴어이자 마약 중독자여서가 아니다. 평생 갈구하는 사랑을, 그 자신조차 확실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모양이고 어떤 냄새가 나며, 어떤 촉감을 갖고, 어떤 단어들로 이뤄졌는지 도통 알 수 없다. 그저 끊임없이 원한다는, 반복적인 행위(중독) 말고는 누구도 리의 사랑을 명확한 형태로 느끼고 볼 수 없다. 오프닝을 수놓는, 그의 침대와 소파, 책상 위에 널브러진 책, 선글라스, 여권, 담배, 권총, 마약만 봐도 알 수 있다. 리가 하는 사랑이 얼마나 어지럽고 난잡하며 불길한지 말이다. 그러나 <퀴어>는 그의 사랑에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남성미 넘치는 패션과 멕시코시티 거리를 활보하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혼란스러운 사랑을 독특한 미장센으로 치환한다. 인물과 환경, 인물 간의 관계를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도록 했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같은 방식이다. 특별한 점은 아름답게 포장되었음에도 그의 사랑은 여전히 위태롭게 보인다는 점이다.
<퀴어>는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사는 리의 불안정한 삶을 3부작 형태로 나눈다. 1부엔 유진에게 갈구하는 리의 사랑을, 2부엔 완벽한 유진과의 합일을 꿈꾸는 리의 모험을, 마지막 3부엔 모험의 시작이 곧 끝이었음을 리 스스로 선언하는 선택을 담는다. 특히 외적으로 뿜어내는 아름다움과 내적으로 곪아가는 추함의 간극을 직접 보여주면서 이에 따른 고통도 (타인의 관점은 철저하게 배제된) 리만의 관점으로 구성해 전달한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영화적 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관객에게 ‘리’란 사람 자체를 보여주는 일 말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당연히 없다. 영화는 리의 대변인에 불과하다. 관객이 직접 <퀴어>를 통해 리를 해체하지 않는 이상, 어떠한 극적인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단 얘기다.
그렇다면 대체 그에게 사랑은 뭘까. 어떤 것을 정의하지 못해서, 영화 내내 한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할까. 바로 그의 혼란한 정체성이다.
리는 자신이 퀴어임을 인정하지만, 절대 퀴어라고 소리 내 밝히지 않는다. 본인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떼어내려 애쓰는 데, 이를 ‘난 퀴어가 아니야,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거야’라고 표출하며 혼돈을 제어하기는커녕 합리화한다. 그리곤 또 어쩔 수 없다는 듯, 하루살이처럼 여러 술집(바)을 돌아다니며 퀴어를 찾아 하룻밤을 보낸다. 그러다 다시 외로워지면 새 사랑을 갈구하기 위해 길거리를 떠돈다. 이 역시 중독이 분명하지만, 리는 중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독은 곧 이상이고, 현실로부터의 완전한 도피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 확립을 포기한 현실 속에서, 리의 자기 파괴적 행위는 자연스럽게 이상 세계와 연결되고, <퀴어>는 환영이 가미된 추상적 표현과 다양한 상징을 활용해, 직설적으로 전달한다. 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인물이란 진실을 말이다.
일생에 단 한 번 만날 수 있다는, 진정한 사랑(유진)을 발견했을 때도 그는 변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자기 파괴를 일삼으며 유진에게 다가간다. 그의 손길을 느끼기 위해서, 몸도 마음도 돈도 다 내어주고, 가문의 저주가 자신에게 변태적 성향을 주입한 거라며 자기 비하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리는 유진에게 쉽사리 사랑받지 못한다. 그와 사랑을 나누지만, 그가 퀴어인지, 아닌지 모르고 심지어 직접 묻지도 못한다. 유진도 자기 정체성을 결정 내리지 못한 듯, 모호한 태도를 보이지만, 리와는 다르다. 현실과 이상을 명확히 구분해 행동하는 유진과 그렇게 할 줄 모르는 리는 전혀 같은 인물이 아니니까.
리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가장 친한 ‘조’는 하룻밤 상대들이 자기 물건을 도둑질하는 걸 알면서도, 호텔이 아닌 집에서 계속 데이트를 즐긴다. 그들이 아무리 내 것을 훔쳐 달아난다고 해도, 나의 자아와 신념, 삶은 결코 앗아갈 수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퀴어 커뮤니티(그린랜턴)를 이끄는 ‘두메’ 또한 본인 삶의 방식을 긍정한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퀴어임을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리만이 경계가 불명확하다. 그를 제외한 모두가 자기를 ‘무엇’이라 창하며 정의할 때, 리는 끝까지 침묵한다. 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절대 귀로 들을 수 없다는 듯 집요하기까지 하다. 그 결과, 리는 혼재된 두 세계에 갇힌 채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한다. 유진을 원하는 갈망에 영혼까지 분리되지만 그를 만질 수 없고, 팔다리가 잘린 여성에게 툭하면 정체성을 고발당하고, 마약이 주는 황홀함 없이는 현실에서의 기다림을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서로를 돕고 함께 하며 삶을 견뎌야 한다는, 어릴 적에 만난 현명한 퀴어의 가르침이 무색할 정도로, 리는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심각하게 자기중심적이다.
결국, 리는 유진을 데리고, 텔레파시를 가능하게 한다는 미지의 식물(야헤)을 찾아 나선다. 정글에서 야헤를 연구한다는 식물학자에게 생필품으로 환심을 사고, 마침내 야헤를 접한다. 자기 심장을 토해내면서 시작된 환각은 리는 물론이고 유진의 존재론적 의구심과 정체성에 대한 불확실성에 불을 붙인다. 강렬한 환각으로 자신이 구분한 세계에서 길을 잃은 유진은 리에게 고백한다. 자신도 퀴어가 아니며,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자라고. 텔레파시를 통해, 유진과 완전하고 안전한 사랑을 꿈꿨던 리는, 결정적인 순간 또다시 포기한다. 떠나는 유진을 잡지도, 완전히 보내주지도 못하는 악순환에, 제 발로 들어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리가 다시 멕시코시티로 돌아온다. 조는 리의 등장에 기뻐하지만, 여전히 똑같은 친구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 리에게 남은 거라곤 아무리 후회해도 절대 바뀌지 않는 현실과 숱한 후회로 만들어진 환각에 속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허우적대는 일뿐이니까.
<퀴어>는 리가 마지막까지 머뭇거릴 걸 확신했다. 그가 겪는 고독함, 외로움, 절망도 필연적이기에, 현실과 이상의 혼재도 변함없을 거라 장담했다. 야헤의 진실을 미리 경고해 준 직원의 말처럼, 야헤(사랑)는 그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약물도, 텔레파시 능력을 주는 선물도 아닌, 이미 망가진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었으니까. 아름다움 위로 보이는 추함의 균열이, 거울 속에도 이토록 선명히 존재하는데 어떻게 모른 체 할 수 있겠는가.
이야기 끝에 선, 리는 혼돈 속에서 유진을 계속 그리워하다, 결국 자기 손으로 그를 총으로 쏴 죽여버린다. 유진이 죽기 직전, 눈물을 흘리며 자기 꼬리를 문 뱀(우로보로스)이 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 한 장면으로 <퀴어>는 그간의 혼란스러웠던 리를 단번에 설명한다. 죽은 유진은 그의 사랑이기 이전에, 리가 자기 정체성을 깨달은 순간 외면한 자아이다. 즉 유진을 죽인 건, 늙은 리의 육체지만 사실은 한참 과거의 젊은 리의 정신이란 점이다. 어지러운 사랑도, 중독 증상에 대한 합리화도, 그가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물론 리는 그저 온전히 이해받고 싶었을 거다. 본인이 없애버린 사랑은 전혀 모른 채, 난해하고 복잡한, 그래서 자신조차 외면한 나를 사랑으로 꽉 채워줬으면 했겠지. 그러나 후회하기엔 이미 늦어버린(놓쳐버린) 사랑이고, 무슨 수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나의 비극이다.
혼자가 된 노년의 리가 쓸쓸히 침대 위에 눕는다. 눈을 감고 유진을 떠올리자, 어느새 나타나 리의 다리 위에 자기 다리를 살포시 올린다. 유진의 사랑일까, 그가 다시 불러온 이상인가. 그렇다면 그의 사랑은 긴 기다림 끝에 비로소 자기 형태를 보이게 되었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고 <퀴어>의 의도는 변함없다. 리가 원한 게 마음 가득한 대화뿐이라고 하더라도.
어른 버전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기대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퀴어>는 잊을 수 없는 첫사랑으로 자기 정체성을 깨닫게 된, 아름답고 따뜻한 영화는 절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