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ofilm2022-10-31 14:25:38
캐릭터에 의존한 나태함의 끝
공조2: 인터내셔날 (2022)
* <공조2: 인터내셔날>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공조2: 인터내셔날 (2022)
감독: 이석훈
출연: 현빈, 유해진, 임윤아, 다니엘 헤니, 진선규
장르: 액션, 코미디
상영시간: 129분
개봉일: 2022.09.07
<공조2>는 780만 관객을 동원한 1편의 성공 덕분에 성사된 후속작으로 국내에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주요 인물들이 후속작에 전부 합류했다. 작품의 중심을 잡는 투톱 주연 ‘현빈’과 ‘유해진’은 물론 맛깔나는 감초 연기로 호평을 받은 ‘임윤아’와 그 외 조연 캐릭터가 모두 합류해 전편과의 높은 연계성을 이룬 것만으로도 긍정적이다. 명절 특수를 제대로 받은 2편마저 690만 관객을 동원하며 대박을 기록했으니 재회의 목적은 확실히 달성했다.
1편의 성공을 계기로 만들어진 후속작은 필히 규모도 커져야 하고, 스토리 면에서도 차별화를 둘 필요성이 요구된다. <공조2>는 ‘인터내셔날’로 범위를 확대하는 방법을 택했다. ‘현빈’ 못지 않은 눈부신 비주얼을 자랑하는 ‘다니엘 헤니’를 주연으로 합류 시켜 남한과 북한 사이에 미국이라는 국가를 더했고, ‘삼각 공조’로 사건에 다이내믹함을 구현해 보고자 했다. ‘다니엘 헤니’의 캐스팅 효과를 톡톡히 보기는 했다. 전작에서는 ‘유해진’과 ‘현빈’의 구도만으로 뻔한 그림이 형성했던 반면 ‘현빈’과 시종일관 신경전을 벌이고, 잘생긴 얼굴과 마초적인 매력으로 ‘윤아’의 혼을 쏙 빼놓는 ‘잭’은 케미스트리의 다양화만으로도 제 몫을 해냈다.
하지만 단지 그 뿐이다. 주연 캐릭터의 수를 늘리고, 남한과 북한 형사 사이에 미국 FBI 요원이 합류한 설정을 제외하면 스토리의 전개 방식과 유머 코드는 전편을 그대로 답습한다. ‘철령(현빈)’과 ‘강태(유해진)’, 그리고 ‘잭(다니엘 헤니)’이 같은 목표를 갖고 공조를 벌이는 것 같으면서도 각 국가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의심하는 구도는 전작에서 끝없이 티격태격 하고 서로를 쉽게 믿지 못했던 주인공들의 모습과 일치한다. ‘강태’의 가족들이 두 이방인에게 밥을 해 먹이고, 함께 정을 쌓고, 결말부에 가족들이 위험에 처하자 다 함께 이들을 구출한다는 전개 방식 역시 전편과 소름 돋을 정도로 똑같다. 1편에서 성공적으로 구축된 캐릭터성에 의존한 채 나태한 이야기가 흐름을 주도할 뿐이다.
주인공들의 ‘멋’을 최대한 강조하고 싶은 탓에 액션 연출은 더욱 허술해졌다. 아낌없이 총알과 폭탄을 사용하지만 주인공들은 절대 타격을 입지 않고, 관객 역시 그들이 한 발도 맞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액션신마다 마치 초능력자 같은 모습을 발휘하는 캐릭터들은 총격전이 형성해야 할 긴장감을 반감시키며 반복되는 슬로우 모션과 클로즈업 샷은 몰입도마저 떨어뜨린다. 이 영화에서 액션은 마치 주인공의 외모와 매력을 더욱 빛나게 하는 액세서리 정도로만 여겨진다. 1편보다 커진 스케일 하나에 만족이라도 하라는 듯 액션 연출과 각본에 대해 고민을 한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공조1>이 호평을 받은 요인 중에는 극악무도한 카리스마로 임팩트를 안긴 빌런 ‘차기성(김주혁)’의 활약이 있었다. 작중 그의 역할을 이어 받은 ‘장명준(진선규)’은 가차 없이 사람들을 죽이는 잔혹함을 그대로 가져 왔지만 존재감은 ‘차기성’에게 훨씬 미치지 못한다. 냉혹한 ‘진선규’의 연기에서 <범죄도시>가 연상되기는 하지만 배우의 역량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탓에 악역만의 위압감도, 특유의 사이코 같은 면모도 드러나지 않는다. 공중에서 펼쳐지는 최종 액션신 역시 스릴감 없이 싱겁게 끝나지 않던가.
‘철령’은 한 번의 공조를 통해 ‘강태’와 친분을 쌓았기 때문에 전편처럼 군인으로서 각 잡힌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인간적이고 허술한 면모를 많이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웃음을 유도하려고 하지만 ‘강태’와 함께 선보이는 철 지난 유머코드는 실소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오로지 전편에서 적은 분량만으로도 코믹함을 선보였던 ‘임윤아’만이 코미디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각인 시켜준다. 푼수 뷰티 유튜버라는 성격을 제대로 살려 공조 작전에 ‘민영’ 캐릭터를 양념처럼 활용한 것은 호평할 만한 부분이다. ‘잭’과 ‘철령’을 두고 알아서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민영’의 모습은 작중 유일하게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요소다.
전반적으로 성의 없는 구성의 속편이다. 연출과 스토리, 그리고 캐릭터마저 전작을 답습함으로써 나태함의 끝을 보여주었다. 명절에 어떤 연령대의 가족과도 편하게 볼 수 있는 오락영화의 틀을 찍어내는 공장에서 만든 작품 같다고 할까. 액션도, 코미디도, 서스펜스도 모두 어정쩡하게 만들 바에는 ‘코미디’라는 한 장르에 제대로 집중한 <극한직업>, <육사오>처럼 한 가지 큰 방향성을 택하는 것도 좋았을 것이다. ‘이렇게 찍으면 멋있어 보이겠지?’, ‘이 때 이런 대사를 날리면 웃음보가 터지겠지?’라는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대사와 장면들은 제 역할을 해내기는 커녕 맥없이 지나갈 뿐이고 눈요깃거리만이 겨우 작품을 채운다. 하지만 이렇게 전부 나열하기도 힘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흥행을 일궈낸 현실에 JK필름의 다음 작품도 개선되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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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란한 스포트라이트 뒤의 어둠, <아네트>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아 참석한 영화 <아네트>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브라운관과 무대, 모니터 너머의 세계는 언제나 동경과 열광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대중은 언제나 자신을 환호하게 하는 대상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스크린 너머에서 살아가는 '스타'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곤 한다. 스타는 그로 말미암아 부와 명성을 얻고, 대중은 그들로 말미암아 대리만족적인 쾌감을 느낀다.
예술가와 그의 예술을 향유하는 자들의 관계가 언제나 이러한 '윈-윈' 관계였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것이 꼭 그렇지는 않다. 어느 연극의 무대 위를 떠올려 보라. 강렬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면 그 여남은 곳에는 짙은 어둠이 내리 깔린다. 대중은 스타들의 '선별된' 찬란함에 환호하지만, 그 이면에는 기괴하게 일그러진 현실이 존재하곤 한다.
영화 <아네트>는 이에 대한 이야기다.
1. 죽는 여자와 죽여 주는 남자
헐리우드의 스텐드업 코미디언인 헨리 맥헨리는 특유의 '죽여주는' 입담으로 명성을 떨친다. 비관적이고 조소적인 그의 유머와 퍼포먼스는 순식간에 관객을 매료한다. 비참과 죽음에 대한 유머는 무겁고 우울하지만, 관객들은 그의 말와 퍼포먼스에 시종 웃음을 터트린다. 그것이 헨리가 이 무대에서 맡은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 죽었을지도 모르는' 퍼포먼스가 펼쳐졌을 때도 관중은 웃는다. 관중을 웃게 하는 것이 헨리의 역할이고, 관중은 그들이 헨리에게 기대하는 바 이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헨리, 왜 코미디언이 되었나요?'
그러나 헨리가 그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재차 그에게 묻는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그들의 물음에서 중요한 것은 헨리 맥헨리라는 개인이 아니라, '관객의 기대를 충족하는 코미디언인 헨리 맥헨리'이므로. 그가 온갖 혐오적 발언들을 유머라는 이유로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낼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모두의 사랑을 받는' 오페라 가수인 '안'과 사랑에 빠진 것은 그야말로, 희대의 스캔들이다. 우울한 악동과 천사같은 오페라 스타의 만남은 너무나 이질적이고, 세간의 이목을 끌만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어둡게 내리 깔린 맥헨리의 짙푸름은 타오르는 태양처럼 선명한 붉음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마치 닿지 말아야 할 것이 닿아 버린 것처럼. 이 두사람은 너무나 달라 보인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한가?
헨리가 '죽여주는 남자'라면 안은 '죽는 여자'다. 안은 무대 위에서 몇 번이고 죽는다. 칼에 찔리고, 피를 흘리면서. 그 기괴한 살해와 죽음의 광경에 관객은 열광한다! 그들이 '죽여주는 남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사랑스러운 안'과 '악동같은 헨리'는 본질적으로 대중에게, 대중이 원하는 방식으로 소비된다는 점에서 동질적이다. 대중은 그들이 '왜 죽거나 죽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비하고자 하는 것을 소비한다.
관객은 또한 그들이 왜 사랑에 빠졌는지 파악할 수 없다. 영화에서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크린 너머에서 그들은 숱하게 노래한다. '우린 사랑에 빠졌지만 그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어.'라고.
안과 헨리는 정말로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게 된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물론 정말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비하는 자'(대중)와 '소비 당하는 자'(스타)의 맥락에서 살펴본다면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은 순전히, 관객이 그 내밀한 속사정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 속의 숱한 기사들은 헨리와 안의 로맨스에 대해 떠들어대고, 그들의 화려한 삶을 조명하지만 '인간'인 안과 헨리의 삶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이는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극히 이기적이다!
그러한 로맨스의 결말은 어디에 다다르게 될까?
그렇다. 죽음이다. '죽여주는 남자'는 '죽이고', '죽는 여자'는 죽는다.
대중이 그토록 열광하던 비극의 내용과 같이!
2. 아기 아네트: 아버지와 대중의 꼭두각시
이러한 '상품화된 연인' 사이에서는 '상품화된 딸'이 태어난다. 그녀의 이름은 '아네트'다.
'아네트(annette)'란 '작은 안(anne)'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의 전철을 따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이름에서부터 보여준 셈이다. '아네트'는 그 이름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녀의 재능을 선보인다. 그녀가 어머니를 여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자, 그렇지 않아도 좋은 먹잇감이었을 아이는 이제 좀 더 본격적으로 대중의 스포트라이트 아래 난도질 당하게 되었다.
'아네트'는 다른 등장인물과는 다르게 '꼭두각시 인형'으로 등장한다. 그녀의 탄생부터 대중의 열광을 받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그녀는 '살아있는 인형'이다. 날 때부터 구경거리였던 아네트는 타블로이드지 따위에서 '사랑스러운 연인의 딸'에서, '어머니를 잃은 가련한 아기', 그리고 이윽고는 '믿을 수 없는 재능을 타고난 아기'로 이름을 떨친다. 그 안에서 '아네트' 개인에 대한 이해와 존중은 어디에도 없다.
아버지인 헨리 맥헨리는 '광대'인 자신의 딸이 저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을 우려했으나, 그랬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과 그의 아내를 팔았던 것과 같이 그의 딸인 아네트 역시 대중에게 팔아넘긴다. 그토록 목말라하던 돈과 명성 때문에.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라는 것은 술이나 마약과도 같아서, 지나치면 그것이 스스로를 망치는 것임을 알면서도 끊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극히 왜곡된 욕망에 휘둘리게 되는 셈이다.
대중의 사랑을 갈구하던 헨리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아네트를 '소비'한다. 아네트는 귀애의 대상이자 변명거리고, 돈벌이의 수단이다.
아네트의 주변에 상식적인 어른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아네트에게는 의지할 만한 '어른다운 어른'이 없었다. '안'의 반주자였고 나중에는 '지휘자'가 된 남자(이하 지휘자)가 어쩌면 비교적 상식적인 축에 속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지휘자라고 뾰족하게 다른 인간은 아니었다. 제 욕망을 좇기로는 지휘자도 마찬가지다. 아동착취임을 알았음에도 그 또한 아기 아네트 쇼에 동참하지 않았던가? 안의 지휘자가 되려 했던 욕망 때문에! 그가 안을 잃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이루었을 어떤 야망을 이루기 위해! 안을 잃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녀(안)의 옆에서 내로라하는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재능있고 사랑스러운 딸(아네트)의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기에!
그리고 부나방처럼 욕망만을 좇으며 나아가던 이들은 결국 '비극적 죽음'에 다다르고 마는 법이다.
3. 파멸과 재기의 이야기
헨리의 오른뺨에 있던 붉은 점은 점점 자라난다. 마치 그가 살인자임을 알려주는 것처럼, 마치 그의 뺨에 튀었던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것처럼. 대중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인기를 얻은 '죽여주는 남자'는 정말로 아내와 동료를 죽이고 자신의 아이를 착취하고, 끝내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죽이는' 자가 된다. 그로 인해 정말로 그 역시도 죽은 사람이 된다. 그의 쇼에서 그가 시니컬하게 외친 바와 같이.
그러고보면 파멸을 맞이하는 것은 헨리 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어떤 의미로든 죽음을 맞이한다.
'안'은 남편에게 살해당했고, '지휘자'는 사랑했던 여자의 남편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헨리는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죽였고, '아네트'는 자신의 빛나던 재능을 죽인다.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대중매체를 펼치면 흔히 보이는 연예인들의 스캔들, 예술가에 대한 미화, 그리고 아동착취적인 방송들이 도사리고 있는 현대 사회가 엿보이지는 않는가? 우리는 우리가 보고싶어하는 것만 보지는 않았나? 그 쇼와 텔레비전과 편집된 영상 너머의 어둠을 들여다보려고 한 적이 있는가? 누군가의 비극을 웃음거리로 삼지는 않았나?
영화 <아네트>의 관객은 스크린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영화적 연출로 말미암아 영화 밖의 관찰자였다가, 영화 안의 엑스트라였다가, 조연이었다가, 이윽고는 영화의 모든 사태를 자아낸 주역으로 변모한다. 감독은 이러한 연출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이기적인 대중과 스타들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단순히 '대중과 스타의 욕망'이 가져온 비극에 대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아네트는 분명히 그녀를 낳고 기른 환경을 원망하기는 하지만, 어쩐지 그녀는 앞으로 나아갈 것만 같기 때문이다.
아네트는 말한다. 나는 부모 두 사람 모두를 원망한다고. 어머니는 그녀에게 이런 재능을 주었고,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착취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녀를 착취한 장본인이다. 그러므로 아네트는 두 사람 모두를 용서할 수 없다.
아네트는 이제 영영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글쎄,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램프를 깨고, 콘서트장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고발하고, 노래를 부르지 않겠노라, 그를 사랑하지 않겠노라고(그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는 그녀는 '달라졌다.' 그녀는 더는 인형이 아니다. 하나의 살아 있는 사람이다. 헨리와 안, 그리고 우리 모두와 같이. 그녀는 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선언으로 자신의 부모로부터 '홀로 서기로' 마음 먹는다.
'나는 강해져야 해.'
그녀는 말한다.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너무나 가슴아픈 말이지만, 그럼에도 어쩌면, 희망적이다. 그녀는 더이상 아버지와 대중의 피아노줄에 따라 춤추거나 노래부르지 않고 그녀만의 삶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때론 우울하고 때론 좌절스러울테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강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나아갈테고, 그녀의 가슴 속에 간직한 흉터를 평생에 걸쳐 회복하게 되리라.
영화 <아네트>는 단순히 뮤지컬 영화로만 홍보되기엔 아까운 작품이다.
언뜻 보기에는 <라라랜드>의 우울한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청각적 연출과 미장센은 너무 감각적이라서 도리어 아프기까지 하다!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아르, 그리고 풍자적인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좋아할 것이라 확신한다. 처음과 끝까지 음악을 담고 있지만 어둡고 기괴한 사회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다소 불쾌해지는데, 그 불쾌해지는 이유를 잘 생각해보면 그걸 바라보는 '나'(관객) 또한 그러한 '불쾌함'을 자아내는 사람들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 있다. 관객은 스크린 안에서, 밖에서 수없이 영화 속 엑스트라였다가, 조연이었다가, 마침내는 이 영화에서 도무지 빼놓을 수 없는 주연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아주 수작이다. 기왕이면 큰 스크린에서 보기를 바란다. 내가 스크린의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헷갈릴 정도로 장황한 곳으로.
<이런 사람에게 추천합니다>
우리 사회의 어둠을 한없이 들여다보고 싶으신 분
우리 사회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짙은 어둠 너머에 반짝이는 옅은 희망을 엿보고 싶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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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일의 밤> 불교 엑소시즘의 성취와 한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북산 암자의 ‘하정 스님(이얼)'은 부처가 봉인한 악귀 ‘붉은 눈’과 ‘검은 눈’ 중 '붉은 눈'이 풀려났고, 자신의 반쪽을 찾으러 올 것임을 직감한다. 이에 그는 2년째 묵언수행 중인 제자 ‘청석(남다름)'을 귀신을 천도해야 한다는 숙명과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는 ‘박진수’(이성민)에게 보낸다. 청석은 정체모를 소녀 ‘애란(김유정)'을 만나 '검은 눈'이 들어있는 사리함을 잃어버리는 등의 낭패 끝에 진수를 찾는 데 성공하고, 자초지종을 들은 진수는 애란이 ‘붉은 눈’이 거쳐야 할 7개의 징검다리 중 하나라고 확신하며 그녀를 찾아 길을 나선다. 한편, 괴이한 모습으로 죽은 시체들이 매일같이 발견되자 강력계 형사 ‘김호태’(박해준)와 후배 ‘박동진’(김동영)은 시체들 간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수사를 이어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제8일의 밤>은 낯설다. 단지 엑소시즘을 소재로 한 오컬트 영화라서가 아니다. 이미 <검은 사제들>을 필두로 <사바하>, <사자>, <변신>, <곡성> 등 많은 오컬트 작품들은 대중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도 <제8일의 밤>은 낯설다. 우선 십자가, 사제나 목사, 신과 악마, 라틴어 대신 염주와 도끼를 들고 산스크리트어를 외는 승려가 전면에 등장한 그림부터가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낯선 것은 그간 한국 오컬트 영화들의 배경이었던 기독교적 세계관 대신 불교적 주제의식에 근간을 둔 이야기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업(業)'과 '유식(唯識)'이라는 개념을 통해 악의 존재와 퇴치 방식을 오롯이 개인에게 돌리는 퇴마록이 낯설다.
<제8일의 밤>의 불교적 세계관은 제목에서부터 암시된다. 여덟 번째 밤은 봉인에서 풀려난 ‘붉은 눈’이 자신의 반쪽, ‘검은 눈’을 찾아가 하나가 되어 온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해지는 날을 말한다. 이러한 제목은 불교에서 중생이 받는 고통과 수행해야 할 계율을 주로 8가지로 나눈다는 점을 연상시킨다. 무엇보다도 붉은 눈이 반드시 7개의 징검다리를 밟아야만 완전체가 될 수 있다는 설정은 특히 흥미롭다. 이 설정이 사람의 모든 행위가 필연적으로 원인에서 결과, 결과에서 또 다른 원인이 되며 사람들은 일련의 과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업'을 시각화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는 누군가의 행위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악귀에게 사로잡히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일례로 한 여고생이 숱하게 가출을 반복한다는 이유로 경찰은 그녀의 실종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 결과 붉은 눈은 그녀를 손쉽게 징검다리로 삼을 수 있다.
또한 영화를 지탱하는 두 쌍의 주인공들에게서도 서로의 행위가 원인과 결과로 얽혀 업보로 되돌아오는 관계성을 찾아볼 수 있다. 겉보기에는 등 뒤에 천도해야 할 영혼들이 가득한 진수와 사탕을 먹고 새 운동화를 신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청석 간의 접점은 없다. 그러나 서로의 가족과 관련된 과거의 불상사를 모두 알고 있는 진수는 청석을 보는 것만으로도 분노에 사로잡힌다. 호태와 동진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경찰로 일하기 힘들어 보이는 동진을 보면서 호태는 스스로를 책망하고. 그런 그를 보면서 동진은 부적을 자그마한 선물로 건넨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떠한 행위의 원인과 결과가 되기를 반복하면서 그들은 번민에 빠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주인공들이 자신의 업으로서 따라온 번뇌와 번민을 다스리지 못할 때, 그들은 좀처럼 악귀를 제압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진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붉은 눈에게 농락당하고, 호태는 연이은 살인 사건의 실체에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각자의 행동이 틀렸다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며 번민과 번뇌에 사로잡힌 상태에서의 행위는 거듭 악을 돕고 만들어 낸다. 결국 <제8일의 밤>에서 악은 사람의 밖에 존재하며 그의 약점이나 콤플렉스가 반영하는 존재가 아니라 애초에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존재인 것이다. 이는 시작할 때만 해도 단순한 악귀로 설명한 붉은 눈과 검은 눈에게 영화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각각 번뇌와 번민이라고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이유다.
그래서 붉은 눈의 모습으로 나타낸 악귀를 퇴치하는 이야기로 보이던 <제8일의 밤>는 개개인의 업과 업보로써 악의 기원과 존재를 설명한 이상 진수와 호태가 자신의 과오를 씻어내는 이야기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다. 이때 영화는 스스로의 잘못을 깨우칠 도구로 '유식'이라는 해답을 제시한다. 불교의 관점에서 물리적 현상 세계는 상대적 관계인 연기에 의해서 잠시 생겨나고 보였다가 없어지는 세계이고,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실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객체라고 착각하는 것들은 대상을 인식하는 정신의 주체이자 마음의 작용인 '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는 세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내면 작용, 마음에서 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살펴보는 실천을 필요로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에 담긴 교훈이기도 하다.
식의 존재와 중요성은 똑같이 자신의 파트너를 쫓아 북산 암자로 향한 호태와 진수가 사뭇 다른 결말을 맞이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경찰로서 확실한 사실과 팩트, 변하지 않은 원인을 쫓던 호태는 연이은 살인사건 그 이면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동진과 얽힌 과거사를 온전히 풀어내지 못한 채 급작스럽게 퇴장한다. 반대로 진수는 자신과 청석의 가족 사이에 있었던 악연과 그로부터 비롯된 번뇌가 악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직시하며 스스로와 청석을 결과적으로 구제하는 데 성공한다. 진수는 애란을 죽여야만 악귀를 막을 수 있다는 자신의 확신이 오히려 악귀가 마지막 징검다리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음을 알게 되는데, 그로부터 그가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을 맹신하는 대신 그 이면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진정으로 얻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악의 기원, 악과의 대면, 악과의 싸움과 퇴치에 이르는 과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성하는 <제8일의 밤>의 시도는 귀를 맴도는 낯선 문구로 축약할 수도 있다. 진수는 악귀와 대치할 때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gate gate pāragate pārasaṁgate bodhi svāhā)"라는 산스크리트어 주문을 반복해서 외운다. 한자로 음차하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라는 꽤 익숙한 문구가 되는 이 주문은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이다. 영어로는 "gone gone, everyone gone to the other shore, awakening, svaha"인 이 문구는 '이미 이 세상에 온, 세상에 있는 진리를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했으니 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자'는 격려의 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눈앞에 보이는 악귀에게 저주를 걸거나 그를 옥죄는 대신 자신의 마음속 어딘가에 있을 깨달음을 먼저 찾자고 외는 진수의 모습은 일반적인 퇴마와는 사뭇 다른 모양새고, 그렇기에 영화의 메시지와 주제의식을 한 데 요약한 대사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제8일의 밤>은 기존의 한국 오컬트 영화들의 문법 대신 불교적 맥락 안에서 세계관과 캐릭터를 구축했고, 이는 그 자체로 유의미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와 동시에 이 작품이 과연 선택한 소재의 잠재력을 온전히 끌어내고 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우선 <제8일의 밤>은 퇴마록, 엑소시즘의 구성을 빌려 결국 한 개인이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드라마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드라마는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인식 및 기대와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
당장 대승 불교를 받아들인 한국 불교에서 붓다와 보살 같은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고, 그들이 악귀를 물리치면서 일반 중생을 구제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이 대목은 붉은 눈과 검은 눈을 제압하는 부처가 등장하는 오프닝 애니메이션처럼 불교적 세계관과 초월적인 존재의 힘을 빌리는 엑소시즘 영화의 장르적 지향, 관습을 일치시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오프닝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괴리감을 낳고 이는 강력한 호불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승려와 무당을 주요 인물로 등장시킨 것에 비해 불교와 무속 신앙의 관계와 그 안에 담긴 잠재적인 이야기를 온전히 다 살리지 못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될 당시 무속 신앙에서 명당으로 여기는 장소마다 절을 세운 것, 그래서 유달리 승려가 용을 내쫓고 그 자리에 절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많은 것처럼 역사적으로도 둘은 떼 놓을 수 없는 관계다. 그러나 작중 처녀 무당은 단지 주인공들의 숨겨진 과거를 줄줄이 늘어놓는 도구로 소비되는 데 그쳐 버린다. 그래서 나무에 방울과 깃발들을 달아두어 마치 소도를 연상케 하는 처녀 무당의 점집과 같은 장치 역시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사뭇 아쉬움이 남는다. 소도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성역이라는 점, 그리고 주인공이 경찰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국가 권력과 종교 간의 관계에 대해 더 밀도 있는 이야기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소재를 담아내는 그릇을 잘못 만들었다는 문제도 있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보니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작중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부재한 것이 대표적이다. 애란은 등장한 순간부터 나름의 반전을 위한 캐릭터임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청석과의 첫 만남부터 헤어짐, 재회에 이르기까지 전부 우연으로 가득하다 보니 아무리 불교적 교리를 차용한 전개라고 해도 그녀의 서사는 좀처럼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전개를 비틀기 위해 등장시킨 동진이 호태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개연성을 갖추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는 인물들의 과거사와 관계를 부각해 그들 중 누가 붉은 눈의 징검다리가 될지 여부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려는 시도가 무의미해지는 이유다.
그 외에도 8일로 나눠서 사건을 진행시키는 구성 역시 부자연스럽다. 사건의 발단을 알리는 첫째 날과 대부분의 진상이 밝혀지는 여덟 번째 날을 제외하면 남은 6일은 붉은 눈의 이동 과정을 보여주는 것 말고 사실상 하는 역할이 없기 때문이다. 비주얼적인 측면에서도 악귀와 진수가 대치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검은 연기와 북산 암자가 위치한 절벽의 모습 등에서 몰입을 방해하는 어색한 CG의 흔적을 손쉽게 볼 수 있다. 그 결과 신비로운 분위기 안에서 나름대로 깊이 고민해볼 메시지를 던지지만, 정작 그 메시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제8일의 밤>은 결국 자신의 낯섦을 신선함과 새로움이 아닌 애매모호함으로 귀결시키고 만다.
P(Poor, 형편없음)
선구안이 좋다고 훌륭한 타자가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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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생각하면
수많은 영화 중에 떠오르는 영화가 있어요
바로,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인데
여기서 조정석의 코믹한 연기와 신민아의 러블리한 모습이 너무 잘 어울리며 더욱더 재미있게 봤던 영화인데요
그럼,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리뷰 시작해 볼게요
기본 정보
장르 : 로맨틱 코미디
감독 : 임찬상
각본 : 김지혜
출연진 : 조정석, 신민아
개봉일 : 2014년 10월 08일
평점 : 8.39
스트리밍 : NETFLIX
기획 의도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
정말 결혼하면 다 이래?!
4년의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한 대한민국 보통 커플, 마냥 행복할 줄만 알았던 달콤한 신혼생활도 잠시 사소한 오해와 마찰들이 생기며
'결혼의 꿈'은 하나둘씩 깨지기 시작하는데...
이 결혼, 과연 잘 한 걸까?
도대체 말이 안 통하는 철부지 남편 '영민' 사사건건 잔소리만 늘어나는 아내 '미영'
정말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상상하고 꿈꿔 온 결혼,
그 이상의 ' 속'깊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담
영화<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1990년 박중훈, 최진실 주연의 원작 영화를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최적화되어 있는
조정석의 믿고 보는 연기력과 신민아와의 러블리한 조합은 상상 이상으로 케미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후기 및 결말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결말
미영(신민아)와 4년차 연애 중인 영민(조정석)은
그녀에게 청혼을 하며 행복한 신혼의 맛을 본다.
알콜달콩만 할 줄 알았던 결혼 생활에서
영민은 시인이 되기 위해 더더욱 글쓰기에 매진하며 미영에게는 무뚝뚝해지기만 해진다.
미영은 배가 아파 응급실에 실려갔지만,
다행히 큰 병은 아니었지만 영민에게 화가 난 미영은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하고, 그러다 영민과 미영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서로 화해하며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풋풋하고 달콤한 이야기만 있어야 하는 신혼 생활에서 점점 시간이 갈수록 서로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는 것을 너무 현실 그대로 잘 반영하여 녹여낸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이다.
재미있게 울고 웃고 싶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찾는다면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추천하고 싶다.
8점 대의 높은 평점을 유지하고 있는 만큼
조정석의 능청스러운 초반 연기력에
영화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한줄평 : 사랑해 미영, 미안해 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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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최고의 크리스마스 영화!
올해 최고의 크리스마스 영화다! 진부하고, 광고성 카피처럼 느껴지겠지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표현할 적확한 문장은 없을 듯하다. 클레어 키건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영화는 주인공 빌의 이타적 행동을 통해 유독 춥고, 우울한 우리 사회에 잊고 지냈던 온기를 전한다. 그 온기를 전하기 위해서는 작지만 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1985년 아일랜드의 한 소도시. 빌(킬리언 머피)은 작은 석탄 가게를 운영하며 아내, 다섯 딸과 오붓하게 살고 있다. 힘든 세상 속에서도 그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유년 시절의 겪은 트라우마로 힘겹게 살아간다. 어느 날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갔다가 창고에 홀로 갇혀 있었던 소녀를 발견한 빌은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는 요청에 머뭇거린다. 결국, 그가 소녀를 데려다준 곳은 수녀원 내부. 이 도시는 수녀원의 권력 아래 돌아가는 곳이기에 빌 역시 원장 수녀의 말에 따르긴 한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 남긴 죄책감과 부채감에 시달린 그는 크리스마스 날 저녁 집이 아닌 수녀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관객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 너무나 힘든 세상 에서 타인을 도와줄 수 있는지에 대한 이 물음은 영화의 핵심이자, 관객을 이토록 사소한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요소다.
극 중 빌은 자기 가족을 지키는 것도 버거운 세상에서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수녀원에 감금당해 노동 착취를 당하는 소녀들을 위해 손 한번 쉽게 내밀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녀원의 눈 밖에 나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원장 수녀에게 잘못 걸리면, 그동안 쌓은 평화는 살얼음처럼 쉽게 깨져버린다. 하루아침에 일도 없어지고, 돈이 없어 생활도 못 하며, 아이들의 교육도 중지된다.(빌의 딸들은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를 알기에 빌의 고뇌를 아는 아내는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고, (소녀를 포함한 가난에 허덕이는 아이들) 그 아이들은 우리 자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내의 이런 말이 나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밑바닥부터 시작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며 이 가정을 꾸린 남편의 노고와 지금의 평화가 한순간 깨질 수 있다는 불안은 충분히 이해된다. 아내의 선택적 회피는 어쩌면 온 마을 사람들의 마음처럼 보인다. 추운 겨울, 자신이 어렵게 지킨 온기를 나눠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이런 심리를 조장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울리는 수녀원의 종소리는 명확하게 그리고 공포스럽게 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빌은 용기를 낸다. 그 이유는 자신도 어려운 환경에 놓였었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엄마가 죽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어른들이 보살펴 준 유년 시절의 기억은 자신과 비슷한 곤경에 처한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다. 마치 자신을 위로하듯 그의 시선은 어려운 이들로 향하고, 비록 석탄으로 얼룩졌지만 기꺼이 손을 내민다.영화는 빌의 용기를 담담하고 묵묵하게 그린다. 행복한 순간을 연료 삼아 자신의 마음에 불을 지펴도, 그 온기가 퍼질 때쯤 약속이나 한 듯 꺼져버리는 그의 공허함은 영화 전반에 깔린다. 다른 이들에게 석탄을 배달할지언정 정작 자신에겐 불쏘시개 하나 담지 못하는 그의 삶에 수녀원의 소녀는 자신을 구원할 횃불처럼 보인다. 어려운 이를 구하는 동시에 자신을 구하는 선택, 그리고 용기는 점점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현 사회에 큰 울림을 전한다.
앞서 소개했듯이 영화는 클레어 키컨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동명 소설의 중요 소재는 바로 아일랜드에서 벌어졌던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이다. 1922년부터 1996년까지 약 74년간 종교시설 내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 사건으로, 지난 2004년 <막달레나 시스터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바 있다. 영화는 제2의 <막달레나 시스터즈>보단 한 인물을 통해 이처럼 인권이 유린당하고 이를 타파할 기력조차 없는 세상 속에서 ‘용기’를 갖기가 얼마나 힘겨운지, 그만큼 우리 세상에 얼마나 소중한 빛인지를 알려준다. 이는 동명 소설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 참고로 영화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비유하자면 <화려한 휴가> 보단 <택시운전사>에 가깝다.
원작을 읽은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클레어 키건의 이 책은 한 번 잡으면 놓지를 못한다. 몇 번씩 읽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이 빼곡한 이 작품은 두께가 얇아서 쉽게 도전했다가 호되게 혼나는 책 중 하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기대를 모았던 건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에 놓인 여백 때문. 책을 읽었을 때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워졌던 이 부분을 영화는 영상으로 어떻게 표현했을까하는 궁금증이 든다. 원작을 읽은 이들에게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팀 밀란츠 감독은 영화적 특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차갑고 무거운 겨울 풍경과 온도로 분위기를 잡고, 수녀원 종소리 등 빌을 포함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줄 음향에 신경을 많이 쓴 듯하다. 여기에 창문을 소재로 각 공간과 그 안에 있는 이들의 성격과 감정을 잘 표현한다. 창을 통해 밖이 잘 보이는지, 피사체만 보이는지, 아예 보이지 않는지를 공간적으로 비교해 봐도 좋을 듯싶다.빌의 여정을 담은 영화이기에 이 인물을 연기한 킬리언 머피의 모습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게 된다. 이를 아는 듯 그는 대사보단 표정과 눈빛으로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내적 갈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수녀원 소녀를 도와주지 못한 일 이후, 초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일관하는 그의 모습은 죄책감은 물론, 가족을 위한 자기 합리화를 거쳐 그럼에도 참된 어른이 되지 못한 미안함이 느껴진다. 그의 연기는 책임감도 느껴지는데, 아일랜드 출신인 그는 자국의 아픔이자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을 알리고자 주연은 물론, 제작에도 참여했다.
<이처 사소한 것들>은 개봉 전 부터 평단의 사랑을 받았다.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고, 극 중 수녀원의 보스 메리 수녀 역을 맡은 에밀리 왓슨이 은곰상 조연상을 받았다. 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초청하고 지지한 건 1980년대나 지금이나 작품이 담고자 하는 그 용기가 절실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작든 크든 한 개인이 가진 선한 영향력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 어느 때보다 내적, 외적 강추위가 예상되는 이번 연말, 고용하고 거룩한 밤을 밝힐 작은 용기를 꺼내어 빛을 내어보자.
덧붙이는말: 쿠키는 없지만,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길 바란다. 엔딩크레딧이 시작되면 귀를 휘감는 수녀원의 종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우리가 봐왔던 빌의 여정을 소리로 들려준다. 그리고 다시 수녀원의 종소리가 들린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그의 용기를 마주한 관객이라면 처음들은 종소리와 마지막의 종소리가 다르게 들릴 것이다. 아니, 다르게 들렸으면 좋겠다. 그래야 빌의 용기가 빛을 내는 거니까 말이다.
사진 제공: 그린나래미디어
평점: 4.0 / 5.0
한줄평: 고요하고 거룩한 밤, 밝게 빛나는 선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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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릭터 소개서] '팀 버튼'의 캐릭터 소개서
- “어떤 영화를 사랑하게 하는 데에는 스토리, 대사, 연출 등 다양한 요소가 있다.그러나 그 중에서도 빼먹을 수 없는 것은 단연 캐릭터이다. 특히 매력적인 캐릭터 하나는 작품을 완전히 집어삼키기도 한다.좋은 감독과 좋은 배우가 만난다면 캐릭터는 영화 속에서 그 무엇보다 빛난다. 제대로 설정되기만 한다면,4개의 눈을 가지거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저 괴물들도 충분한 현실성과 설득력을 가진다. 그리고 이 캐릭터는 영원히 사랑받는다.[캐릭터 소개서]에서는 영화의 다양한 캐릭터들을 강한 애정을 담아 소개한다.뽀글거리는 머리와 아이 같은 눈을 가진 한 남자가 가방에서 오래된 갈색 노트를 꺼낸다. 노트를 펼치자 눈알 없는 해골들, 입에서 벌레를 내뿜는 유령과 같이 생전 처음보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남들이라면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노트를 얼른 덮어버리려고 하겠지만, 남자는 노트 속 그것들을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렇게 괴기스러운 캐릭터들을 창조한 남자는 누구일까?그는 바로 할리우드의 대표 괴짜 감독 ‘팀 버튼’이다. 그의 작품은 누가 봐도 팀 버튼의 작품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하고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배제하더라도 그의 캐릭터들은 정말 미친 듯이 아름다운 매력을 갖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팀 버튼의 노트를 펴고 그의 미(美)친 캐릭터들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보자.
‘첫 번째 캐릭터’<가위손/ 에드워드 시저헨드>팀 버튼 감독의 노트를 펼치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한 남자의 그림이다. 사람인지 유령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초췌한 표정.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 시저헨즈’, 가위손이다.- 영화 : 가위손 (1991)
- 감독 : 팀 버튼
- 출연진 : 조니 뎁, 위고나 라이더, 다이앤 위스트, 안소니 마이클 홀가위손이라 불리는 그는 인간이 아니고, 창조된 기계였다. 외로운 발명가였던 ‘빈센트’는 자신의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심장을 가진 기계인 에드워드 즉, 가위손을 창조한다.그러나 빈센트는 에드워드에게 인간과 같은 손을 만들어주지 못한 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결국, 에드워드는 자신의 가위손 때문에 빈센트와 함께 살던 성에서 외롭게 살아가게 된다.그런 그를 화장품 판매원 ‘펙’이 만나게 되고, 그를 마을로 데려와 함께 살게 된다. 마을로 내려온 에드워드는 펙의 딸, ‘킴’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에드워드는 마을에서 정원을 가꾸고 이발을 해주며 점차 적응하게 된다.그러나 킴의 남자친구 짐이 금고털이에 에드워드를 이용하려 하고, 마을 사람들이 차 사고의 범인으로 에드워드를 의심하는가 하는 등 에드워드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던 중, 짐이 킴을 찾아와 폭행을 하자 결국, 에드워드는 킴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가위손으로 짐을 살해하게 된다. 살인을 저지른 에드워드는 결국 쓸쓸히 성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수십년이 지나 사랑했던 킴의 모습을 얼음에 조각하는 에드워드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나게 된다.영화 속 에드워드는 감독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하기라도 하듯 기괴한 비주얼을 하고 있다. 새하얀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하며, 손에는 길고 날카로운 가위가 달려있다. 날카로운 가위를 가졌지만 병약하고 소심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관객들로 하여금, 에드워드에 대해 완전히 몰입하게 한다. 성에 사는 미스터리하고도 외톨이 같은 존재, 겉모습과는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진 캐릭터 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단연 동화 <미녀와 야수>일 것이다. 그러나 두 캐릭터는 다른 캐릭터성을 가진다. 먼저 미녀와 야수에서의 야수는 처음에는 야만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미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시련을 이겨내면서, 점점 따뜻하고 성숙한 모습을 보였고 미녀와 결혼하게 되는 행복한 결말까지 맞이한다.반면 가위손 속 에드워드는 순수함과 기대에서 시작해, 시련을 겪었으나 야수와 다르게 결국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포기와 초월이라는 정서로 끝나게 된다. 에드워드는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겉모습과는 정반대로 그는 마을의 누구보다도, 아니 그 어떤 누군가보다도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 에드워드가 가졌던 기대와 희망은 결말을 더욱 아프게 느껴지게 한다. 이는 동화와 다른 현실을 냉정하게 보여준 것이다.팀 버튼의 영원한 페르소나 ‘조니 뎁’이 감독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 바로 영화 가위손이다. 록 가수 출신이었던 조니 뎁은 당시에 영화를 몇 편 찍지 않은 신인 중에 신인이었다. 그러나 ‘게리 올드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톰 크루즈’ 등 당대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누르고 그는 가위손 역할로 낙점받았다. 팀 버튼을 빠져들게 한 그의 매력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의 눈빛이 아마 그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의 광대나 피부 등 조니 뎁만의 특징은 많지만, 특히 그의 눈빛은 그 누구와도 다르다. 체념과 희망, 공허함과 가득함을 동시에 담은 눈빛은 가위손하면 그 어떤 배우도 생각나지 않게 하는 무언가이다.가위손은 팀 버튼 감독이 어린 시절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그림 속 남자는 길쭉한 체형에 날카로운 날들이 손에 달려있었다.
어린 시절 외톨이었던 팀 버튼 감독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갔다."난 어떤 이유로 사람들이 날 그냥 혼자 두길 바라는 욕망 같은 것이 있었다. 정확히 왜 그랬는지는 알지 못한다."감독은 에드워드에게 날카로운 날을 달아주었다. 그러나 어린시절 타인과 멀리 떨어지면서도, 그 타인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에드워드에게서 겹쳐 보인다. 에드워드라는 캐릭터는 끊임없이 상실을 겪는다. 아버지 같던 빈센트를 잃는 데에서 시작해 마지막에는 킴을 포함한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를 잃게 된다.겉으로 보이는 것에 집중해 판단하고, 자신의 내집단과 외집단으로 나누는데 너무나 익숙한 우리. 동화처럼 아름다운 결말이 아니었음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영화관을 나가면 우리는 금세 감각기관이 판단하는 것을 제외한 것들은 외면할 것이다. 가위에 스쳐 조그만 생채기가 날까 한걸음 떨어지기 이전에, 나의 한걸음이 누군가에게 느껴질 수 있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두 번째 캐릭터’<잭 스켈링턴>다음으로 노트의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또 다른 그림이 보인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공허한 구멍만 있고, 길쭉한 팔다리를 가진 이것. 하얀 뼈와 검정 줄무늬 정장은 마치 한몸인 것처럼 붙어있다. 이 캐릭터의 이름은 ‘잭 스켈링턴’이다.- 영화 :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 (1993)
- 감독 : 헨리 셀릭
- 원안: 팀 버튼
- 출연진 : 크리스 서랜던(노래: 대니 엘프먼), 캐서린 오하라, 켄 페이지, 패트릭 스튜어트잭 스켈링턴은 할로윈 마을에 사는 인기스타이다. 그러나 그는 매번 같은 할로윈 준비를 하면서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방황을 하던 그는 우연히 크리스마스 마을에 가게 된다. 그는 크리스마스 마을을 보며 사라졌던 열정을 되찾고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게 된다. 잭은 자신이 산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 ‘락’, ‘쇼크’, ‘배럴’ 세 악동에게 원래의 산타를 조심히 데려오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악동들은 악명 높은 악당, ‘우기 부기’에게 말하지 말고 정중히 모시라는 잭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산타를 우기 부기에 넘기게 된다. 잭을 사랑하는 ‘샐리’는 크리스마스에 완전히 빠져 이성을 잃은 그을 막기 위해 안개를 만들면서까지 방해하지만, 잭은 뼈돌프(?) 애완견 제로의 도움으로 무사히 출발한다.그러나 자신의 입장에서만 크리스마스를 상상한 잭의 선물들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인형 대신 괴물이, 강아지 대신 구렁이가 들어있는 등 그는 크리스마스를 망쳐버렸다. 그 와중에 샐리는 산타를 구출하려다 오히려 우기 부기에게 잡히고 만다. 잭 역시, 잭의 행동을 크리스마스 테러로 느낀 사람들에 의해 대공포 공격을 당하고 격추당하게 된다. 잭은 떨어진 망가져버린 자신을 보며, 실수를 깨닫고 호박의 왕인 자신의 원래 모습을 다시 한번 느낀다. 잭은 마을로 돌아가 우기 부기와의 치열한 결투를 통해 샐리와 산타를 구출한다. 잭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받은 산타는 크리스마스를 우리가 기억하는 아름다운 날로 되돌린다. 산타는 할로윈 마을에 눈을 내려주고, 잭은 샐리와 함께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해골의 왕이라는 별칭처럼 잭 스켈링턴은 할로윈 마을 내 사교적이고 인기 많은 리더이다. 할로윈의 준비와 결정을 잭에게 검토받을 정도이다. 그렇게 잭과 작중에서 표면적인 갈등을 보이는 인물은 사실상 우기부기밖에 없을 정도로 그는 충분히 매력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오히려 완벽한 삶 때문일까? 잭은 내면의 공허함을 겪고 있는데, 우연한 계기로 크리스마스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공허함을 이겨내기 위해 충동적이지만, 추진력을 가지고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인다.잭의 크리스마스 계획은 결국 실패하지만, 잭은 거기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래 자신의 역할인 할로윈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된다. 즉, 크리스마스를 만드는 잭의 계획은 실패했지만, 이것이 트리거가 되어 잭을 성찰하게 하고, 성장시킨 것이다. 잭은 자신이 망친 크리스마스에 대한 책임감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바로 잡으려는 모습도 보인다. 이처럼 잭은 팀 버튼의 영화에서 보기 힘든 이상적이고 능력 있는 리더 캐릭터이다. 특히, 모난 점 없이 모두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이 해당 영화 전후의 팀 버튼의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캐릭터성이라고 할 수 있다.즉흥적이지만, 훌륭히 조직을 이끈다는 점에서 누군가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윌리 웡카’를 떠올릴 수는 있다. 그러나 잭은 가족과 관련된 내면의 아픔을 갖고 있으며 특정 순간마다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웡카와는 다르다. 잭의 구구절절한 과거 이야기나 상처 받고 괴로워하는 모습들을 영화에서 크게 다루지 않으면서, 시원하고 적극적인 캐릭터의 매력만이 훌륭하게 보여준다. 작중에서 관객은 잭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가게 되는데, 잭의 기다란 팔다리가 만들어가는 춤과 쾌활하고 능동적 성격은 우리에게 한편의 즐거운 뮤지컬을 보는듯한 느낌을 선사한다.잭의 비주얼로 돌아가 더 알아보자면 먼저 하얀 해골 모양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둥글고 큰 머리에는 코가 없고, 검은 구멍처럼 보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입은 길고 가로로 넓게 벌어져 있으며, 선처럼 가늘게 그어진 이빨이 보인다. 마치 이모티콘처럼 미니멀한 잭의 디자인은 그의 표정이 다양하고 생동감 있게 보여지도록 한다. 이 때문에 잭은 무서운 존재와 친근한 존재를 넘나들게 된다. 할로윈 마을의 인물들이 가진 작은 키와 대비되는 잭의 큰 키는 잭을 돋보이게 하며 그를 자연스럽게 리더로 여겨지게 한다. 또한, 앞서 언급한 그의 가늘고 긴 팔다리가 만든 몸짓 하나하나는 동작을 경쾌하게 보이게 하며, 그를 우아하고 고딕적으로 느껴지게 한다.해당 작품은 팀 버튼이 원안을 제공했을 뿐, 감독까지 맡지는 않은 작품이다. 그러나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성격이나 비주얼 등 인물의 캐릭터성을 만드는 데에는 팀 버튼의 아이디어가 강하게 반영되었다. 세심한 캐릭터 설정이 특징인 팀 버튼의 캐릭터답게, 잭이 고민을 통해 내면을 돌아보고 진정한 가치를 찾는 모습도 적절히 등장한다. 당신이 뛰어난 미장센에 주제의식이 숨겨지듯이 담긴 영화가 보고 싶다면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을 추천한다.
‘세 번째 캐릭터’
<빅터 프랑켄슈타인>
노트의 왼쪽 아래에는 한 소년이 그려져 있다. 커다란 눈과 언밸런스한 체형은 해당 인물 역시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앞서 본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의 잭과의 파격적인 비주얼과는 다르게, 해당 캐릭터는 비교적 깔끔하고 얌전해 보이기도 한다. 소년의 이름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지금부터 그가 어떤 캐릭터인지 알아보자.- 영화: 프랑켄위니 (2012)
- 감독: 팀 버튼
- 출연진: 캐서린 오하라, 마틴 쇼트, 마틴 란도우, 찰리 타핸‘빅터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에 관심이 많은 내성적인 소년이다. 그런 그에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친한 친구는 애완견 ‘스파키’이다. 그러던 어느 날, 스파키가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엄청난 슬픔에 잠긴 빅터는 과학의 힘으로 스파키를 살려내겠다는 결심을 한다. 빅터는 학교에서 배운 과학 지식과 그의 재능으로 번개 실험을 하게 되고 스파키를 되살린다. 그러나 스파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빅터의 친구들, 이웃들이 알게 된다. 다른 아이들도 빅터의 실험을 흉내 내면서 다양한 동물들이 괴물처럼 변하게 되자 결국, 마을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자신의 실험이 가져온 결과에 빅터는 책임을 지고 스파키와 함께 마을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 역시 실험으로 탄생한 고양이와 박쥐의 충격적인 결합체, ‘미스터 위스커스’는 마을을 혼란에 빠트리고 빅터의 소꿉친구, ‘엘사 반 헬싱’과 스파키의 여자친구, ‘페르사포네’를 풍차로 납치한다. 빅터와 스파키는 엘사와 페스사포네를 구하는 데 성공하지만 빅터는 탈출에 실패한다. 빅터를 구하고자 스파키는 ‘미스터 위스커스’와 다시 한번 대결을 펼치게 된다. 스파키는 대결에서 승리하지만, 풍차에 깔려 다시 한번 죽는다. 그러나 빅터가, 다시 한번 스파키를 살리고 빅터와 스파키가 다시 재회하며 영화는 끝나게 된다.<프랑켄위니>의 원작은 팀 버튼이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일하던 1984년 만든 동명의 실사 단편 영화이다. 1984년 단편 영화 <프랑켄위니>는 장편 애니메이션과 유사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 애완견 스파키를 잃은 빅터가 번개의 힘을 통해, 스파키를 살린다는 설정은 동일하다. 그러나 박쥐 고양이가 아닌 이웃들이 스파키를 괴물로 오해하며 혼란과 갈등이 생긴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팀 버튼 감독은 자신이 어렸을 적에 애완견과 이별한 아픔과, 흑백의 화면처럼 고전 공포 영화 시대의 느낌을 결합해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작품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작품은 1930년대 고전 공포 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해당 작품을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기획했으나 좋지 못한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팀 버튼은 세월이 지나 작품의 스토리를 확장하고 자신의 경험과 개성을 더해 2012년, 장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작품을 만들게 된다.팀 버튼의 특징인 자전적인 이야기 구성은 해당 작품에서도 잘 나타난다. 빅터에게는 과학이, 팀 버튼에게는 그림이라는 평생을 바칠만한 취미가 있었다. 또한, 그들에게는 자신만을 전적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닌 친구가 있었다. 우리가 강아지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면 아마 주인만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특성 때문은 아닐까 싶다. 밖에서 어떤 상처를 받고 어떤 일이 있었든지, 나라는 이유로 조건 없는 사랑을 하는 존재를 찾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작품을 보다 보면, 팀 버튼의 B급 유머를 통한 클리셰 비틀기가 적절히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과 자연, 작게 본다면 인간과 인간이 아닌 생명체의 대결구도는 우리에게 흔한 구도이다. 물론 <에이리언 시리즈>, <아바타 시리즈>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등의 작품에서도 보이듯이 인간을 욕심 많고 악한 존재로 묘사할 것인지, 아니면 재앙의 피해자로 묘사할 것인지의 차이는 존재하긴 하지만 말이다.그러나 감독은 작품의 빅터와 미스터 위스커스의 대결에서 빅터를 먼저 리타이어시키고 스파키와 미스터 위스커스를 대립시키면서 인간이 아닌 생명체끼리의 대결을 성사시킨다. 이러한 구도는 클리셰의 전환을 보여줬으며, 특히 뜨거운 논쟁의 대상인 강아지 vs 고양이의 대결이라는 점 역시 웃음을 유발한다. 작품의 결말 역시 진정한 죽음이니 뭐니 하면서, 스파키를 떠나보내며 작품을 끝내는 게 아니라 자동차 배터리로 살린다는 점 역시 팀 버튼답다는 느낌을 준다.
작중의 빅터의 캐릭터를 살펴보면, 감독의 작품의 많은 인물이 보여주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와 아웃사이더의 성격을 전부 가지고 있다. 죽은 동물을 번개로 되살린다는 점 외에는, 감독의 다른 작품에 비해서는 비교적 현실성 있는 설정을 가진 만큼 빅터에 공감하기는 비교적 쉽다. ‘사랑하기 때문에 되살린다’라는 간단한 논리구조는 원작인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와는 다른 숭고한 목적이다. 팀 버튼 감독의 많은 캐릭터는 대부분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 앞서 본 ‘에드워드 시저헨드’와 ‘잭 스켈링턴’도 마찬가지이다. 빅터 역시 순수함을 가지고 있으며, 스파키에 대한 강한 연대를 보여준다. 특히,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에드워드 시저헨드와 잭 스켈링턴, 그리고 뒤에 나올 비틀쥬스와는 완전히 다르다. 어쩌면 팀 버튼의 무수한 캐틱터들 중 그의 정서를 가장 잘 대변하는 캐릭터는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이다.가족과 친구, 마을 사람들과도 교류가 적은 편이지만, 오직 한 존재 스파키와의 우정과강한 연대는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이끈다. 빅터는 스파키에 대한 강한 사랑과 애정으로 다른 것들을 애써 외면한다. 눈이 멀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해 본 적이 있던가. 순수함이 보여주는 투명한 아름다움과 따뜻함을 <프랑켄위니>를 통해 한번 느껴보자.
‘네 번째 캐릭터’
<비틀쥬스>어느덧 노트의 마지막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얼핏 보면 두 인물처럼 보이는데, 자세히 보니 세월이 지나 옷이 달라지고 주름만 생겼지, 똑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까맣게 칠해져있는 눈두덩이와 산발이 된 머리. 숨겨지지 않은 가벼움과 광기는 결코 감출 수가 없다. 마지막 그림의 캐릭터는 ‘비틀쥬스’이다.- 영화 : 비틀쥬스 (1988) / 비틀쥬스 비틀쥬스 (2024)
- 감독 : 팀 버튼
- 출연진 : [공동] 마이클 키튼, 위고나 라이더, 캐서린 오하라 [단독] 비틀쥬스: 알렉 볼드윈, 지나 데이비스/ 비틀쥬스, 비틀쥬스: 제나 오르테가, 저스틴 서로‘비틀쥬스’는 36년의 세월을 거쳐, 두 영화나 출연한 귀한 몸이다.먼저 1988년에 개봉한 <비틀쥬스>이다. 영화는 ‘아담’과 ‘바바라 메이틀랜드’ 부부가 차 사고로 사망하면서 시작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결국 알게 되고 유령들의 법에 따라, 자신들의 집에 머무는 유령이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집에 뉴욕 출신의 디츠 가족이 이사 오게 되고,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집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게 된다. 자신들의 집을 망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아담과 바바라는 자신들의 집을 지키기 위해 디츠 가족을 쫓아내려 하지만, 그들은 겁을 주는데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디츠 가족도 그를 보지 못한다.결국, 메이틀랜드 부부는 최후의 방법으로 바이오 엑소시스트 전문가(인간 퇴치사)인 ‘비틀쥬스’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비틀쥬스는 난폭하고 미치광이 같은 성격의 유령으로 이름을 세 번 부르면 나타나서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비틀쥬스는 디츠 가족 중에 유일하게 유령을 볼 수 있는 딸 ‘리디아’와 결혼해 세상으로 나가려는 다른 목적이 있던 유령이었다. 결국 비틀쥬스가 디츠 가족을 더욱 위험에 빠뜨리자, 메이틀랜드 부부와 리디아는 그를 막기 위해 힘을 합치게 된다. 결국, 리디아와 메이틀랜드 부부는 비틀쥬스를 물리친다. 메이틀랜드 부부는 자신들의 집에서 평화롭게 살게 되며, 디츠 가족도 그들과 조화롭게 공존하며 살게 된다.다음은 2024년 개봉한 <비틀쥬스 비틀쥬스>이다. 해당 작품은 어머니가 된 ‘리디아’를 중심으로 영화가 흘러간다. 리디아는 여행가였던 남편을 잃고, 1편에도 나왔던 새어머니 ‘딜리아’와 딸 ‘아스트리드’와 살고 있다. 전작에 등장한 메이틀랜드 부부는 떠났다는 설정이다. 그러던 중 새 사진을 찍으러 간 리디아의 아빠이자 딜리아의 남편인 찰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가족들은 찰스의 장례식을 위해 그들이 살던 윈터 리버로 돌아간다. 그렇게 찰스의 장례식을 마치고, 리디아와 남자친구 로리의 갑작스러운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가족들은 윈터리버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혼자 자전거를 타던 아스트리드는 나무에 부딪히고, 나무 위에서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 소년과 시간을 보내던 와중 소년은 자신이 유령이며, 아스트리드에게 아빠를 만날 수 있으니 함께 저승으로 가자고 제안한다. 소년을 믿는 아스트리드는 저승에 가지만, 사실 그 소년은 연쇄살인마 출신 유령으로 아스트리드를 제물로 바치고 자신이 다시 이승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을 알게 된 리디아는 딸을 위해 비틀쥬스를 소환하게 된다. 비틀쥬스의 도움으로 리디아는 아스트리드를 구하지만 이번에도 비틀쥬스는 리디아에게 결혼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아스트리드는 기지를 발휘해 계약이 무효임을 증명하고 또다시 뒤통수를 맞은 비틀쥬스가 저승으로 돌아가며 영화는 끝이 난다.‘마이클 키튼’의 미친 연기로 팀 버튼의 이름을 알리는데도 일조한 비틀쥬스는 정말 광인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1편과 달리 2편에서는 비틀쥬스의 캐릭터성이 악당에서 조력자로 전환되긴 했지만, 그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아기 비틀쥬스 출산 공격, 내장 내뿜기, 괴물 선물 등 온갖 방법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괴롭히는 비틀쥬스의 스킬은 정말 경이로울 지경이다. 비틀쥬스가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성격을 백분 활용할 수 있는 인간퇴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인 것 같다. 비틀쥬스가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이유나 비틀쥬스의 시시콜콜한 과거 이야기는 1편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36년이 지나, 2편이 되어서야 ‘델로레스’라는 새로운 캐릭터와 함께 그의 과거 이야기가 짧게나마 나온다. 비틀쥬스는 수백년 전, 흑사병이 창궐하던 중세시기, 델로라스라는 이름의 여성과 결혼하기로 했었다.그러나 사이비 종교의 교주였던 델로레스가 자신을 포도주로 독살하려는 것을 알게 되자, 델로레스의 머리를 토막내어 함께 저승에 간다. 하지만 2편에서 부활환 델로레스는 어쩐 일인가 비틀쥬스를 아직도 너무나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를 끊임없이 스토킹한다. 이러한 모습은 비틀쥬스에게 숨겨진 마초적인 매력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런 일방적인 사랑이 부담스러웠을까. 비틀쥬스는 델로레스에게 도망을 다니며 여전히 리디아에게만 결혼을 요구한다. 이처럼 마초적이면서도 순애보적인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비틀쥬스의 이중적인 캐릭터성은 “그게 비틀쥬스니까.”라는 말 한마디로 관객을 수긍하게 한다. 비틀쥬스는 한번 할 때는 제대로 하는 쿨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오래전, 자신을 뒤통수친 리디아가 다시 한번 자신을 소환하자 과거를 잊은 듯한 모습을 보이며, 연쇄살인마 유령을 정의구현하는데 물심양면 돕는다. 물론 그의 도움과 상관없이 이번에도 얼얼한 뒤통수를 맞긴 했지만 말이다.저승에서 보내는 수백 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도, 유연하고 성공적으로 적응했다는것도 비틀쥬스가 굉장히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1편에서 그는 변변치 않아보이던 인간퇴치사 즉, 개인사업자 신분이었다. 그러나 36년의 세월이 지나자, 밥을 포함해 많은 직원을 둔 어엿한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는 점도 그가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극 중에서 비틀쥬스는 야심을 갖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누군가는 그런 모습이 교활하다고 말하겠지만, 체계적인 계획으로 타인을 조종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도 사실 능력이다. 거의 썩은 듯한 푸석푸석한 피부, 녹색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기괴한 메이크업 그리고 과장된 리액션과 표정까지 비틀쥬스하면 생각나는 비주얼은 이와 같다. 그의 비주얼은 처음 봤을 때부터 그가 막무가내이고 충동적인 행동으로 작품에 큰 혼란을 유발할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비틀쥬스의 다양한 캐릭터성은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비틀쥬스>와 <비틀쥬스 비틀쥬스>는 사실 모두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큰 틀 안에 상실과 기억, 그리고 사랑을 담았다는 것이 <비틀쥬스 시리즈>가 공통으로 가진 주제의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가 다소 오글거리고 썩 내키지 않는다면, 비틀쥬스에만 집중해보는 것은 어떨까? 주제와 가치를 오염시키지 않는 선까지만 엇나가 자신만의 매력을 뽐내는 비틀쥬스. 그 존재만으로도 영화를 볼 이유가 충분하다.
지금까지 순수와 공포가 공존하는 팀 버튼 영화 속 캐릭터들에 대해 알아봤다. 부디 그의 캐릭터들과 함께 기괴하지만 아름다운 세계에 마음껏 빠져들고 싶어졌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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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리지 않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다, 영화 <코다>
지인의 적극적인 추천을 본 영화 <코다>. 라라랜드 감독 작품이라고 해서 기대반 우려반이었다. 솔직히 영화 <라라랜드>는 그렇게까지 나에게 엄청난 인상을 준 작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코다>는 내 기준으로 영화 <라라랜드>보다 훨씬 잘 만든 작품이었다.
영화 <코다> 시놉시스음악의 마법에 빠질 시간!
가장 조용한 세상에서 시작된 여름의 노래!
24/7 함께 시간을 보내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가족을 세상과 연결하는 코다 루비는 짝사랑하는 마일스를 따라간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기쁨과 숨겨진 재능을 알게 된다. 합창단 선생님의 도움으로 마일스와의 듀엣 콘서트와 버클리 음대 오디션의 기회까지 얻지만 자신 없이는 어려움을 겪게 될 가족과 노래를 향한 꿈 사이에서 루비는 망설인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코다>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코다의 의미를 알다사실 코다의 의미를 몰랐다. Children Of Deaf Audlt. 청각장애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비장애인 자녀들을 이르는 말이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코다가 뭘까? 주인공 이름이 코다인가? 아닌데,,, 하며 세상 무지함을 뽐내며 영화를 봤다. 주변에 청각장애인이 없어서 그들의 삶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번 영화를 통해 청각장애인의 삶과 그들을 부모로 둔 비장애인의 삶이 어떠한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되어서 정말 좋았다.
특히, 나는 비장애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비장애인인 루비에게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루비에게 너는 우리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부담을 주는 엄마를 보면서 답답한 마음이 들었고, 어떻게 자식에게 저렇게 부담을 안길까 솔직히 불편했는데 영화 후반부에서 청각장애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엄마의 입장에서 비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잘 표현해주고 있어서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조화와 공존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나름 생각할 수 있는 거리를 전해주고 있어서 좋았다.
음향연출이 너무 좋았던 순간
사실 청각장애와 음악영화 이 모순적인 조합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이 의아스러웠다. 음악의 지배적인 감각이 바로 청각이기 때문인다. 물론 음악을 소화하는 이는 비장애인인 루비이긴 햇지만 그 소재를 청각장애인 가족으로 활용한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요소 때문에 그리고 오히려 청각을 활용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감동이 몰려왔다. 바로 루비의 합창 발표회에서 듀엣으로 부르는 노래를 연출한 장면이었다.
초반부 노래를 들려주다 어느 순간 정적이 찾아온다. 관객 역시 청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상태로 그저 행복하게 공연하는 루비와 그런 루비의 목소리에 감동한 듯 쳐다보는 관객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잠깐이나마 모든 이가 듣지만 나는 들을 수 없는 상황이 마련되면서 음악영화지만 멜로디 하나 없이 감동을 줄 수 있는 연출을 한 그 짧은 순간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누구나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영화 <코다>의 주제는 자립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였다. 사실 비장애인인 루비가 태어나기 전까지 엄마와 아빠, 오빠는 청각장애인이었지만 나름대로 세상에서 자신의 일을 하며 잘 살아왔다. 하지만 비장애인인 루비가 태어나면서 세상과 더 활발한 소통을 할 수 있게 되며 루비에 대한 의존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루비 역시 가족에게 얽메이면서 스스로도 가족없이는 결정을 내려본적이 없는 양쪽 다 서로에게 의존적으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루비가 자신이 좋아하던 노래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대학이라는 꿈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그간 가족간에서 의존해왔던 자신의 모습과 가족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글렇게 영화 속에서는 의존적이었던 가족간의 관계에서 ‘의지’를 할 수 있는 관계로 점차 변화한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청각장애인인 가족들이 그동안 겉돌다 어떻게 사람들과 화합하기 시작했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그려주고 있지는 않다. 다만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수화를 배우게 하고 먼저 다가가는 등의 노력을 했다 정보만 보여줄 뿐이다. 혹자는 그 과정을 너무 아름답게 편집했다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장애인인 자신들끼리만 있기보다 세상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함으로써 의존적이지 않고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한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영화 <코다>는 음악영화답게 감미로운 노래들과 드라마, 그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조화, 마지막으로 존재의 자립이라는 주제까지 적절하게 버무린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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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넷 해석' 영화 속 과학 원리 해설 영상ㅣ테넷 엔트로피ㅣ테넷 리뷰ㅣ테넷 해석ㅣ테넷 해설ㅣ테넷 과학ㅣ테넷 설명ㅣ시간의 엔트로피
? '테넷' 영화리뷰 및 과학해설(*스포없음)
영화 보기 전 봐도 좋은 영상"이 영상 그대로 여사친에게 설명해주면
여친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근데...난 여사친조차 없넹......이게 나라냐!!!!!"
- 테넷 과학 리뷰 제작 후기 by 건데
- 테넷 스태프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제작: 크리스토퍼 놀란, 에마 토머스
각본: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존 데이비드 워싱턴, 로버트 패틴슨, 엘리자베스 데비키 외
장르: 액션, 스릴러, SF, 첩보[2]
제작사: 신카피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촬영 기간: 2019년 5월 19일 ~ 2019년 11월 12일
개봉일: 2020년 8월 26일
음악: 루드비히 고란손
주제곡: 트래비스 스캇 - The Plan
편집: 제니퍼 레임
촬영: 호이트 반 호이테마
개봉 포맷: 2D · 4DX (2.20:1)[A]
Dolby Cinema (2.20:1[A] Dolby Vision|Atmos)
IMAX (1.90:1 / 2.20:1) 용산 IMAX 레이저 로고 (1.43:1 / 2.20:1)
상영 시간: 150분
제작비: 2억 500만 달러-시놉시스
당신에게 줄 건 한 단어 ‘테넷’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시간의 흐름을 뒤집는 인버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세상을 파괴하려는 사토르(케네스 브래너)를 막기 위해 투입된 작전의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 인버전에 대한 정보를 가진 닐(로버트 패틴슨)과 미술품 감정사이자 사토르에 대한 복수심이 가득한 그의 아내 캣(엘리자베스 데비키)과 협력해 미래의 공격에 맞서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아야 한다!
#테넷리뷰 #테넷해석 #테넷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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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을 목격한 맹인 침술사가 등장하는 스릴러
?Rabbitgumi 입니다!
오랜만에 개봉한 웰메이드 사극 올빼미가 개봉했어요.
다들 요즘 볼만한 영화가 없다고 생각하고 계실텐데,
제 리뷰를 보시고 극장에서 이 영화를 관람해보세요!
배우들의 좋은 연기와 스릴로 가득찬 사극을 보실 수 있을 거에요.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영상에서 알려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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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공개 예정, 오직 넷플릭스에서. 에미상 수상에 빛나는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러브, 데스 + 로봇》이 제3부로 돌아왔다. 팀 밀러(《데드풀》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데이비드 핀처(《마인드헌터》 《맹크》)가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작품. 공포와 상상, 아름다움이 한데 섞인 새로운 9개의 에피소드에서 고대 악마를 발견한 사건부터 희극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의 종말까지, 특유의 재치와 독창적인 시각 효과가 돋보이는 판타지, 호러, SF 장르의 놀라운 단편들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