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2-09-13 18:43:00
느리지만 반드시 도착하는 진심.
영화 [시라노]리뷰
이 글은 영화 [시라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늘 자격을 요구한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과연 “어울릴”만한 사람인지 묻고 또 묻는다.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낸 이 끝없는 공방의 법정에 하루에도 몇천번을 출석해보지만.판결의 끝에 남는 것은 언제나 고개 숙인 한 죄인에게 내려지는 처참한 형벌일 뿐이다.
당대 최고의 검술가인 시라노에게도 이런 마음의 지옥은 존재했다.
록산.
시라노의 남루한 외모는 그녀를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그를 부끄럽게 했다.
마음을 담은 항변조차 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있는 시라노를,배심원인 조 라이트 감독은 구원하기로 마음 먹은 듯 하다.
이미 [어톤먼트]와 [오만과 편견]을 통해 사랑의 표현에 정통한 감독은 자신의 능력을 이번 영화 [시라노]에서도 마음껏 발산했다.
사랑을 닮은 음악으로 가득한 뮤지컬 영화에 도전하는 그의 시도에도 박수를 보낸다.
가면, 꼭두각시.;언제나 가짜는 매력이 없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가면을 쓴 꼭두각시 인형을 비춘다.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내용을 가장 압축해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남자들은 록산(헤일리 베넷)의 사랑을 위해 가면 쓰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크리스티앙(캘빈 해리스 주니어)은 시라노(피터 딘클리지)의 글 솜씨라는 가면을 빌려 쓰고.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의 외모를 통해 그녀에게 오랫동안 간직했던 마음을 전달한다.
자신을 좀 더 완벽하게, 혹은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게 해주는 가면이기에 두 남자는 이 가짜가 자신의 진짜 모습이기를. 그래서 록산의 사랑을 한 조각이라도 더 가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기대가 커질수록 자신의 본 모습은 더욱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록산은 가면 뒤의 진짜 모습을 원했다. 그녀는 편지에 빼곡히 적힌 자신을 향한 미문을 쓴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고. 그녀의 이 마음은 결국 크리스티앙의 사랑이 허울뿐임을. 시라노가 진심으로 써 내려간 대사를 읊는 것에 급급한 꼭두각시에 불과함을 알아챈다.
영화 속 크리스티앙의 존재감은 딱 거기까지다. 꼭두각시인데다 가면까지 쓴. 꼭두각시는 그렇게도 매력이 없기에, 그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들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거나 대사의 전달력이 가볍게 느껴진다. 이런 크리스티앙의 우스꽝스러움이 강조될 수록, 시라노의 눈빛과 마음을 담은 그의 진가는 더욱 잘 드러나며. 그 진가는 영화 내내 관객의 마음을 채우기 충분하다.
사랑 앞에선 결국 자신의 진짜 모습만이 필요하며 그것만이 전달되는 것임을.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조 라이트 감독에게 특기가 있다면?;상실과 단절에 대해 이야기하다.
모든 감독들마다 자신의 작품을 표현하는 데 있어 주특기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조 라이트 감독의 그것은 아마 상실과 단절, 혹은 닿을 수 없음에 대해 표현하는 능력일 것이다.
감독은 늘 건널 수 없는 사랑의 절벽 앞에서 절규하기보다 절제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담기를 선택했고. 이 모든 절제 미는 영화 속의 대사나 배우들의 눈빛(연기)에서 증폭된다. 영화의 장면들은 배우들이 결국은 내뱉지 못하고 억지로 삼켜야 하는 그 무언가로 인해 더 아름다워진다.
관객들은 배우의 눈빛을 보며 이 복잡하고 생략된 마음 덩어리를 풀어헤치기 위해 자신의 감정 그릇에 담긴 모두를 쏟아붓듯이 사용해야만 한다. 관객마저도 마음의 상실에 온전히 사로잡힌 그때. 영화는 다시 사랑의 애틋함과 아름다움으로 영원히 쓰라릴 것만 같던 마음을 꽉꽉 채운다.
영화 [시라노]가 뮤지컬 영화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춤이 승무(僧舞)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춤과 노래가 어우러지는 모든 장면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지만. 배우들의 춤사위는 사랑의 아픔으로 공허해진 인물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처연하다. 또한 자신도 모르게 숨길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사랑이 록산을 해할까 싶어, 허공을 통해 뻗는 손길들 마저도 조심스럽다. 이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아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려, 몇 번이고 이를 깨물어야만 했다.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이별 앞에 놓인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든 말과 행동들은 본능에 가깝고 날이 서 있기에. 영화 내내 마음의 모든 벽이 크고 작은 생채기로 가득해진다.
가슴에 담은 진심의 무게를 그 어떤 형태의 좌절 앞에서도 전달하려 안간힘을 다하는 연인들을 보고 있자면. 감독의 능력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게 된다.
편지의 역할.;진심을 전할 수 있는 자격.
영화 속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편지를 통해 전달된다.(실질적으로) 시라노가 록산에게 쓰는 편지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라는 말 외엔 그 어떤 합당한 말도 어울리지 않을 운명을 받아들이며 마지막 편지를 써야만 하는 병사들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편지를 쓰기 위해 마음속에 너무 오래 묵혀놓아 이끼가 끼어버린 진심을 돌아봐야 했다. 또한 자신의 마음을 담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종이를 채우기 위해. 숱한 단어들의 어깨를 툭툭 털어대며 마음속으로 골라내는 시간 역시 가져야 했다. 한참이고 고르고 또 고르다가. 상대를 생각하며 까맣게 타들어가 힘 없이 풀썩 내려앉은 감정의 숯검댕이들 중 하나를 겨우 손에 골라 쥐고서. 그들은 자신의 진심을 꾹꾹 써내렸다.
편지는 자신의 마음 전체를 폐허로 만들 만큼의 파급력을 지녔지만, 등장인물들 중 그 누구도 마다하지 않았다. 진심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전해야 할 진심이 단 하나임을 편지의 발신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크리스티앙만큼은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는 결국 감정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록산에게 단 한 통의 편지도 쓰지 않은 셈이다. 애초에 자신의 진심을 육성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한계를 가졌기에. 록산과 물리적으로 멀어져 전쟁터로 간 지금, 크리스티앙의 마음이 그녀에게 가닿을 리 만무하다. 단 한발로 크리스티앙을 영원히 잠들게 한 총성이 록산에게 더 잘 와닿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사실 영화에서 진심을 상징하는 편지가 달가웠던 이유는 따로 있다. 마치 감독의 전작 중 하나인 [어톤먼트]에서부터 닿지 않고 왜곡되었던 진실이. 이 영화에서만큼은 비록 영화의 말미이긴 하지만 와닿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라노가 록산에게 진실을 내뱉는 순간. 나는 마치 브라이오니(시얼샤 로넌)가 진실을 토해내는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사실은 이랬노라고.
결국 자신의 마음 바닥까지 뒤집어내 록산에게 바친 시라노는 눈을 감았지만. 나는. 그리고 시라노는. 어쩌면 감독까지도 고대했던 순간은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마저 드는 결말이었다.
마치면서
내게 이번 영화는 [어톤먼트]의 변주 정도로 느껴졌다. 이미 그의 영화에서는 공식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법한 장치들도 제법 보인다. (물론 원작을 읽은 자의 슈퍼 오지랖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시라노]는 마치 감독이 호스트가 된 티타임과 같았다. 도란 도란 담소를 나누는 내내 마음 안에서 감독이 직접 고른 차가 천천히 향과 색을 내며 짙어져 갔다. 차를 기다리며 나눈 이야기는 모두 즐거웠고. 호스트가 내어온 모든 장면들은 내 마음을 울렸다.
그가 정성껏 우려준 차 한 잔은 집으로 가는 추운 날씨에 홀짝이기에 딱 알맞았으니. 다음 티타임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이 글의 TMI]
1. 피터 딘클리지의 연기는 이 영화의 알파이자 오메가임.
2. 그의 연기를 거론하기도 입 아파서 뺀 것임.
3. 원작도 재미있음.
4. 리뷰 잘 안 써져서 여섯 번 갈아엎음.
카카오뷰도 있어요+_+
#시라노 #조라이트 #피터딘클리지 #헤일리베넷 #켈빈해리슨주니어 #영화리뷰 #최신영화 #영화추천 #네이버인플루언서 #브런치작가 #영화리뷰어 #내일은파란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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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바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스르고 접붙여
6★/10★
87년 동안 물질을 해온 현순직 해녀와 이제 막 해녀 일을 시작한 30대의 채지애 해녀. 〈물꽃의 전설〉은 두 해녀 사이에 놓인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스르고, 접붙인다. 해녀 일에 대한 현순직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녀는 물질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았고, 그곳에서 항상 능력을 인정받았다. 현순직은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종종 바다로 나가 지난날을 회상한다. 이미 중년이 된 막내아들은 혹시나 어머니가 또 바닷속에 들어갈까 걱정되어 전화로 신신당부하고, 현순직은 속내를 들켰다는 듯 웃는다. 현순직에게 바다는 삶 그 자체다.
채지애 해녀는 사회생활을 해녀 일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채지애의 어머니는 대학을 나오고 직장에 다니던 딸이 해녀 일을 하겠다는 게 영 마뜩잖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해녀 일은 “낭만적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고된 노동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채지애의 어머니는 아기 우윳값이라도 벌겠다는 절박함으로 수십 년간 물질을 해왔다. 제주의 해녀라면 눈 내리는 바다에서 물질한 후 외로이 숨비 소리를 낼 때의 고독함과 친해져야만 한다. 그러나 동시에, 딸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그녀 물질의 목표였던 딸과 같은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지난 삶에 대한 딸의 이해와 공감이라는 형태로 돌아왔음에 대한, 즉 그녀의 노동이 소외되지 않았음에 대한 떳떳함의 발로일 것이다.
해녀가 경력이 쌓이고 능력을 인정받으면 ‘상군 해녀’라 불린다. 현순직은 상군 중의 상군인 ‘대상군 해녀’였다. 대상군 해녀는 구전되어 내려오는 바닷속 지도와 지형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해녀에게만 허락된 이름이다. 현순직은 지금도 그 풍경이 눈에 훤하다는 듯 바다별 특징과 그곳에서 잡을 수 있는 해양 생물을 줄줄이 읊는다.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황홀한 바닷속 ‘들물여’로 채지애와 함께 향한다.
그러나 현순직의 기억과 지금 제주 바닷속 정경은 일치하지 않는다. 채지애는 현순직이 일러준 곳에 들어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물꽃을 찾아 헤매지만 끝내 실패한다. 바다가 예전 같지 않다는 채지애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내 들물여에 가면 물꽃을 볼 수 있다고 고집스레 자신만만해하던 현순직은 아쉬움에 탄식한다. 들물여뿐만이 아니다. 제주의 해녀들이 자주 물질을 나가는 바다도 공장에서 배출된 폐수로 시야가 뿌예지는 일이 잦다. 제주 바다는 해녀들에게 이전만큼 많은 것을 내줄 수 없다. 그만큼 병들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는 두 여성이 목격하고 기억하는 일터의 모습이 이토록 다르다. 이는 현순직과 채지애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현순직은 짙은 제주 사투리를 구사한다. 그래서 그녀의 말은 영화에서 자막과 함께 나온다. 섬이라는 제주의 지역성과 그녀가 일터에서 습득한 언어의 특성상 표준어를 쓰는 일반 대중이 매끄럽게 듣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채지애는 현순직의 말을 자막 없이도 알아듣고, 현순직과 능통하게 소통한다. 그런 그녀조차 현순직의 기억과 경험을 온전히 따라갈 수 없다는 데서, 영화는 아릿함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대체 해녀도, 제주도민도 아닌 사람들에게 현순직이 목격한 것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물꽃의 전설〉이 두 해녀를 함께 들물여로 보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두 해녀의 관계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을 들물여로 보낸다. 현순직이 가진 것이 채지애를 경유함으로써만, 즉 ‘번역’을 거쳐야만 전달할 수 있다고 판단해 다큐멘터리의 장르 특성을 고려했을 때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는 장면을 삽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언급했듯, 〈물꽃의 전설〉은, 채지애는 끝내 현순직의 기억 속 풍광에 접속하지 못한다. 제주 바다는 이 모든 실패에 별 관심이 없다는 듯, 혹은 실패의 아픔마저 보듬겠다는 듯 처연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이 영화가 자아내는 아릿함을 더한층 부각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현순직과 채지애 사이의 시간을 곱씹게 한다. 점점 오염되가는 제주 바다에서, 들물여의 뭋꽃은 현순직과 그 운명을 함께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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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살 차이 나는 커플의 사생활을 밝혀나가는 어느 배우의 탈선!
시놉시스
그레이시는 자신보다 23살 어린 남편 조와 결혼해 미국의 신문 1면에 공개된 적이 있다. 그런 과거를 알아보려고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의 가정에 찾아가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배우라서 그런지 자신의 영화에 쓰일 자료를 모으려고 그레이시와 조의 관계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한다. 그레이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엘리자베스를 반갑게 맞이하지만 점점 심해지는 그녀의 집착에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하는데...
엘리자베스 (나탈리 포트만)
엘리자베스는 줄리아드에 나온 배우이며 여러 영화들을 찍었다. 그리고 연출도 하고 있는데 그레이시에 대한 사생활을 그녀의 지인들에게 캐묻기 시작하고 많은 정보들을 알아낸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레이시의 남편인 조까지도 유혹한다. 조의 직장에 들어가서 그가 하는 일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친해지기 시작하는데 결국에는 성관계까지 맺는다.
천식이 있어 호흡기가 있어야 되며 부모가 너는 너무 똑똑한데 왜 배우를 하냐고까지 물어봤다고 한다. 또한 자신보다 내면이 여리고 어린 조와 불륜을 시작하면서 곤란하게 만드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레이시 (줄리안 무어)
그레이시는 자신보다 23살 어린 남자인 조와 결혼했다. 자신은 만난 남자도 별로 없으며 조와는 반대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집에 오자마자 큰 환영을 하지만 그런 엘리자베스의 집착에 싫증이 나고 자신을 전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레이시가 가족을 꾸리기 전에는 톰이라는 사람과 사귀었는데 톰은 변호사이며 범죄자들을 변호하는 역할만 해오다 그레이시에게 또 다른 남자인 조가 생기자마자 헤어진 것 같다.
조를 사랑하지만 그런 조를 가끔씩 미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총으로 동물 사냥하는 걸 즐기고 가족에게 헌신적이다.
조 (찰스 멜튼)
조는 내면이 불안하지만 여리고 자신의 아들인 찰리와 딸인 매리를 엄청 챙긴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맞는 찰리와 매리를 무척 아끼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자식들을 떠나보내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자신보다 23살 연상인 그레이시와 사귀었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 독립하지 못한 어른 아이가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은 한국 혼혈이며 집 안에서 나비 애벌레를 키우는데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나비가 되면 하늘에다 날려보내준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 모를 혼란을 겪고 있다.
<하니엘의 주관적인 해석>
이 영화는 불륜에 대해 다루고 있고 삼각관계를 미묘하게 영화에 녹여냈으나 안타깝게도 관객들이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은 것 같았다. 필자도 이해가 쉽지 않았는데 23살 차이가 나는 그레이시와 조의 관계에 끼어드는 엘리자베스를 보니 정말 자신의 연기에 이용하기 위해 둘의 관계에 대해 주변인들에게 캐묻고 그것에 대한 사생활을 이용한 것 같다.
그런데 그레이시와 조는 각자 내면의 상처가 있었고 그 아픔을 안고 사는 듯하다. 미묘한 둘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사람의 도덕 기준과 혼란스러운 심리를 다룬 영화라고 생각한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써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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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버스라는 늪에서 악전고투하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간여행을 통해 바네사를 되살리고 일상을 되찾은 '데드풀/웨이드 윌슨'(라이언 레이놀즈).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데드풀은 이제 어벤져스에 가입해 조금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어벤져스로부터 거절당하고, 그 좌절감을 이기지 못해 '바네사'(모레나 바카린)와도 이별한 후 '피터'(롭 딜레이니)의 도움을 받아 중고차 딜러 일을 하며 지낸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온다. '울버린'(휴 잭맨)의 죽음과 함께 엑스맨 유니버스가 소멸될 상황이 되자, TVA에서 데드풀을 MCU의 일원으로 캐스팅한 것. 데드풀은 '마블의 예수'가 될 것이라 들뜨지만, 흥분도 잠시. 그는 엑스맨 유니버스를 곧장 파괴하려는 '패러독스'(매튜 맥퍼딘)의 음모를 눈치채고, 자기 우주와 친구들을 구하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모든 면에서 상극이고, 자기 우주를 구하는 데 실패한 또 다른 '울버린'과 함께.
MCU의 예수는 되지 못하다
2024 슈퍼볼에서 처음 공개된 <데드풀과 울버린>의 티저 예고편. 2분 남짓한 영상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공개 24시간 만에 3억 6,50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기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하 <노 웨이 홈>)의 3억 5,550만 조회수를 뛰어넘었다. 특히 한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바로 마블의 예수님이야"라는 데드풀의 대사는 MCU와 멀티버스 사가에 신선한 피가 수혈될 거라는 기대감을 높였다.
기대가 너무 큰 탓일까? <데드풀과 울버린>은 안타깝게도 기대에 미치 못했다. 데드풀과 멀티버스 사가의 만남 자체는 인상적이다. 데드풀만의 특색과 입담을 살려 디즈니의 20세기 폭스 인수 사가를 작품 내에서 풀어냈다. 엑스맨 버전 <노 웨이 홈>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엑스맨>, <판타스틱 포>, <데어데블>, <블레이드> 등 2000년대 초중반을 수놓은 과거 마블 캐릭터들에게 명예로운 엔딩을 안겨 주었다.
다만 MCU 멀티버스 사가의 문제점은 여전하다. 멀티버스 캐릭터에게 내준 공간만큼 데드풀과 울버린의 자리가 줄었다. 그 결과 데드풀도, 울버린도 각자의 서사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 냉정히 말해 휴 잭맨이 복귀했다는 것 외에 의의가 없을 정도다. 프로모션 과정 내내 강조한 데드풀과 울버린의 버디 무비라는 개성도 덩달아 옅어진다. 결국 <데드풀과 울버린>이 MCU의 구세주냐는 질문에도 '아니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폭스의 <노 웨이 홈>
데드풀의 가장 큰 개성은 자유로움이었다. 그는 작품 내외를 오가며 히어로 영화의 금기를 전부 다 깨버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엑스맨 유니버스에 속하면서도 따로 노는 미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MCU는 이를 엑스맨 유니버스와 MCU의 가교로 삼았다. 데드풀의 입담과 액션을 활용해 작품 외적인 이유로 퇴장했던 캐릭터에게는 마지막 인사의 기회를 주고, 세계관 자체는 멀티버스 속에 남겨두며 미래를 기약한다.
당장 기본적인 스토리부터가 현실의 은유다. 데드풀이 자기 우주를 파괴하려는 TVA에 맞서는 것은 디즈니의 폭스 인수로 인해 종료된 엑스맨 유니버스의 상황을 보여준다. 자기 우주에서 엑스맨을 구하지 못한 울버린의 모습도 마치 엑스맨 유나버스의 종료를 막지 못한 현실의 울버린을 보는 듯하다. 그들이 과거 마블 영화 캐릭터를 지배하려는 카산드라 노바와 싸우는 것 또한 MCU에 병합돼야 할 엑스맨 유니버스의 현실을 은유한다.
그 덕분에 영화는 다시 못 볼 캐릭터로 가득하다. 촬영은 완료했으나 공개되지 못한 채닝 테이텀의 갬빗과 <로건> 속 로라를 비롯해 파이로, 토드, 아자젤, 저거너트 같은 조연이 재등장한다. 이에 더해 크리스 에반스의 휴먼 토치, 제니퍼 가너의 엘렉트라, 웨슬리 스나입스의 블레이드 등 과거의 영웅도 마지막 인사를 보낸다. 즉, <데드풀과 울버린>은 20세기 폭스 버전의 <노 웨이 홈>이다. 엑스맨 시리즈를 비롯한 예전 마블 영화의 추억을 지키려는 메타적 노력의 산물인 셈이다.
다만 일반 관객 입장에서는 MCU 멀티버스 사가 중 진입장벽이 가장 높다. 일단 엑스맨 유니버스를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고, <판타스틱 포>, <블레이드>, <데어데블> 시리즈를 보지 않았다면 등장인물조차 알 수 없다. 또 <로키> 시즌 1을 보지 않으면 TVA, 보이드, 알리오스와 신성한 시간대 같은 설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갬빗의 경우에는 디즈니-폭스 인수 사가와 관련된 뒷이야기까지 꿰고 있어야 한다.
스파이더맨이 되지 못한 울버린
그러나 <데드풀과 울버린>의 완성도는 <노 웨이 홈>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 핵심적인 전제 하나를 놓친 까닭이다. <노 웨이 홈>의 힘은 과거의 두 스파이더맨에서 비롯했다. 그들이 과거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모습이 시간을 뛰어넘는 감동의 원천이었다. 토비 맥과이어의 피터가 그린 고블린을 치료하고, 앤드류 가필드의 피터 파커가 추락하는 MJ를 구해내는 모습은 팬들의 상상과 염원을 스크린에 펼쳐 보이는 순간이었다.
<데드풀과 울버린>도 비슷한 방식으로 울버린을 활용하려 한다. 엑스맨을 구하지 못한 멀티버스의 로건을 기존의 엑스맨 유니버스로 불러와서 그가 다시 히어로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문제는 이 울버린이 지난 20여 년간 엑스맨 시리즈에서 활약한 울버린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예전 스파이더맨과는 달리 이번 울버린은 관객과 감정적으로 공감하고 교류할 길이 없다.
불친절한 전개는 문제를 더 키운다. 멀티버스의 울버린이 좌절한 이유나 정황은 실감하기 어렵다. 흔한 플래시백 하나 없이 대사로만 제시되기 때문. 그가 엑스맨으로 나서기를 주저하는 이유도 알기 어렵고, 로라가 멀티버스의 로건에게 그의 본성과 영웅성을 일깨우는 대화도 임팩트가 부족하다. <노 웨이 홈>에서 과거의 스파이더맨이 MCU의 스파이더맨에게 조언을 건네는 장면과 비교하면 차이가 명백하다.
이 괴리감은 오프닝 장면에서부터 암시된다. 데드풀은 영화 시작과 동시에 <로건>에서 묻힌 울버린의 무덤을 파헤친다. 그러고는 울버린의 아다만티움 뼈를 이용해서 자신을 뒤쫓아온 TVA 요원들을 때려잡는다. 물론 분위기나 연출 자체는 데드풀답게 유쾌하고, 데드풀도 관객에게 사과를 건넨다. 하지만 <로건>의 결말을 기억하는 입장에서는 마냥 즐기기 어렵고, 이번 울버린과의 거리감이 더 멀어지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울버린과 함께 무너지는 데드풀
이에 더해 <데드풀> 영화인데도 데드풀의 서사를 살려내지 못했다. <데드풀> 시리즈의 매력은 평범한 주제나 메시지를 데드풀스럽게 풀어낸다는 점에 있다. 1편은 로맨스 영화를, 2편은 가족 영화를 B급 유머로 범벅해 흥미롭게 풀어낸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데드풀과 울버린>은 친구와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된 2편 이후로 무언가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데드풀. 그는 MCU의 어벤져스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어벤져스로부터 거절당한 후 크게 좌절했고, 평범한 일상에 적응하지 못한 채 헤맸다. TVA에서는 마침내 MCU의 예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종국에는 그 꿈도 포기한다. 친구들과 그들의 일상을 지켜내는 것, 그리고 새롭게 만난 친구인 울버린을 지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분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영화는 울버린과 다른 캐릭터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 결과 데드풀의 서사는 직접적인 묘사 대신 상황 설명 대사로 자주 대체된다. 일례로 데드풀의 우주가 위험하다는 상황 설명도 패러독스의 대사로만 언급되니 실감하기 어렵다. 결국 <데드풀과 울버린>의 끝에는 데드풀다운 유머만 남는다. 시작과 끝을 장식한 내레이션 없이는 데드풀만의 서사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데드풀도, 울버린도 없는 버디 무비
전반적인 만듦새도 덩달아 미흡해진다. 두 주연 개개인의 서사가 부족하니 버디 무비인데도 둘의 호흡은 매끄럽지 않다. 예를 들어 울버린은 갈수록 데드풀에게 끌려다니는 듯하다. 새로운 울버린에게 마음을 주기 어려운 가운데 시리즈 내내 데드풀을 봐온 관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 시퀀스와 시퀀스의 연결도 부자연스럽다. 꼭 보여줘야 할 멀티버스 이벤트를 먼저 설계한 뒤, 데드풀과 울버린의 행적을 짜 맞춘 듯 보인다.
그래서 클라이맥스가 뒤바뀐 듯 보이기도 한다. 중반부 보이드에서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는 작중 가장 뛰어난 퀄리티를 자랑한다. 여러 돌연변이와 히어로들이 뒤엉켜서 각자의 능력을 뽐내는 이 장면은 마치 <엑스맨: 최후의 전쟁> 속 알카트라즈 시퀀스를 보는 듯하다. 과거 시리즈와 캐릭터들에 대한 헌사가 가득하기에 뭉클하기까지 하다.
그에 반해 데드풀과 울버린이 데드풀 군단을 마주하는 시퀀스는 임팩트가 부족하다. 물론 <올드보이>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를 연상시키는 액션 자체의 쾌감은 나름 인상적이고, MCU의 멀티버스 설정을 비꼬는 대사는 유쾌하다. 하지만 데드풀과 울버린의 서사가 부족하다 보니 단순한 팬서비스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시퀀스를 들어내더라도 스토리 전개에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악역의 존재감이 확실했다면 상술한 문제는 다소 가려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산드라 노바'(엠마 코린)는 능력에 비해 존재감이 약하다. 그녀는 '보이드'로 떨어진 모든 캐릭터를 지배하고, 그러기 위해 모든 시간선을 붕괴시키려 한다. 이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역의 클리셰를 비튼 것에 불과하다. 그녀의 개인사마저 명확하지 않다 보니 그녀가 울버린의 이야기에 공감하거나 마음을 바꾸는 전개 또한 다소 급작스럽다.
MCU의 고질병이 또 도지다
결국 <데드풀과 울버린>은 MCU의 고질병을 피하지 못했다. 이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나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등이 줄곧 노출한 문제점의 연장선이다. 이번에도 세계관 정리에는 성공했다. 꼬여버린 엑스맨 유니버스에게 깔끔한 엔딩을 선사하고, 이전 마블 영화와 MCU의 관계를 정리했다. 추후 MCU가 선보일 <엑스맨>과 <판타스틱 4>, <블레이드>, <데어데블> 등을 위한 길은 닦은 셈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독립적인 작품으로서의 매력은 잃어버렸다. 더 나아가서는 데드풀이나 울버린이 MCU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그 가능성도 제시하지 못했다. 즉, 지반을 정리하고 기초 공사까지는 완료했지만, 정작 그 부지 위에 무슨 건물을 올릴지 조감도조차 못 보여줬다. 그러니 MCU의 구세주라고 부르기에는 <데드풀과 울버린>이 남긴 아쉬움이 너무나도 크다.
Acceptable 무난함
데드풀과 울버린도 빠져나오지 못한 멀티버스의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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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이 아닌 곳으로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건 서사일까. 물론 이야기의 기승전결 뼈대는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서사를 통해서도 감정을 실어나르는 쪽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사뿐 아니라 미술, 음악, 카메라 등 모든 요소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협업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서사 없는 영화는 있어도 감정 없는 영화는 없다고도 느낀다. <아네트>도 그렇다. 서사는 자못 단순하지만 그 안의 감정은 깊다.
감독 본인이 초반에 등장해 이제 시작하자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사람은 딸이다.), 배우들이 차례차례 등장하는 영화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가 현실이 아니라 극임을 똑똑히 못박는다. 이제 이 선을 넘어 현실이 아닌 곳으로 들어가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잠시 현실에서 눈을 돌려 몰입할 이 세계는 나에게 어떤 감정을 안길 것인가.
기대하는 관객 앞에, 이 영화를 함께 제작한 밴드 스팍스에 이어 배우들이 노래하며 차례차례 등장한다.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야르, 사이먼 헬버그까지 나란히 서서 노래할 때, "So may we start? 이제 시작할까요?" 하고 물을 때, <라라랜드>의 오프닝 시퀀스 생각도 나고 뮤지컬 시작할 때 같은 기분도 든다.
영화는 앤(마리옹 꼬띠야르)과 헨리(아담 드라이버)의 사랑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두 사람 다 무대에 오르는 직업이지만 양상은 많이 다르다. 오페라 가수인 앤은 드레스를 입고 무대보다 더 높은 무대로 올라가 장렬한 죽음을 맞는 반면, 스탠딩 코미디언인 헨리는 속옷 하나에 복서들처럼 로브 차림으로 직접 문을 열고 나와 마이크 줄을 채찍처럼 휘두른다. 어딜 가든 사과를 깨물고 있는 앤, 담배와 바나나를 들고 몸을 푸는 헨리. 관객을 죽여주는 헨리와 관객을 위해 죽어줌으로써 그들을 구원하는 앤. 두 사람이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둘을 보는 시선까지도 모두 다르다.
두 사람의 노래는 "We love each other so much 우리는 서로를 정말 사랑해"라는 가사를 반복한다. 둘을 둘러싼 세간의 시선을 잘 알고 있고,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푹 빠져있지만, 그 한 마디만 반복하는 사랑은 어쩐지 불안하다. 숲을 지나, 세상과 떨어진 곳에 두 사람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둘은 이내 결혼식을 올린다. 각자의 예술, 함께 부르는 노래, 중간중간 삽입된 기자들의 대사나 뉴스 보도를 통해, 사랑의 서사는 단순하게 쌓인다.
송스루 뮤지컬이란 참 특이한 장르다. 모든 대사가 노래로 표현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영화에서라면 인물의 표정과 입 모양으로 단박에 구분될 대사와 독백, 방백이 따로 없이 모두 노래로 흘러나온다. 그러다 보니 기묘하게 현실에서 들뜬 느낌, 현실과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레오 카락스 감독 특유의 독특한 스타일은 한층 더 새로운 감각들을 이끌어낸다.
무대에 오르는 일을 업으로 삼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고, 한 사람은 승승장구를 한 사람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감정의 골이 쌓이고... 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단순한 이야기에 스타일을 부여하면서, 기묘하게 현실에서 반쯤 떠오른 느낌을 준다. 인물들이 입는 원색 옷과 계속 등장하는 소품의 색깔조차 꾸며진 세계의 느낌을 더한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아빠의 농담과 엄마의 웃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아네트는 작은 목각인형으로 표현된다. 불쾌한 골짜기에 걸친, 그러니까 애매하게 사람을 닮다 말아서 더 기묘한 기분이 드는 모양새다. 이런 불쾌한 골짜기에 놓인 물체들은 어쩐지 자꾸 눈을 의심하면서 계속 바라보게 만든다. 징그러워 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그것을 계속 바라본다. 왜일까. 내가 바라보게 되는 건 어떤 지점일까.
아마도 죽음과 가까운 어딘가. 이 영화는 그곳을 심연(abyss)으로 부른다. 엔딩 크레디트의 스페셜 땡스투에 에드거 앨런 포가 있어 의아했는데,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토대로 쓴 곡이 있다고 감독이 밝힌다. "바다 위의 절벽에 매달린 상태로 바다를 쳐다보면 떨어져서 죽을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계속 쳐다본다. 멈출 수가 없는 거다. 그게 바로 심연에 대한 마음이다. 죽고자 하는 마음과 같은 것." (GQ코리아 인터뷰 <레오 카락스의 선명한 세계> 중에서)
극중 인물들은 모두 죽을 걸 알고도 뛰어드는 사람들처럼 존재한다. 생사를 의식하지 않는 인물들의 생사. 생에 아득바득하지 않는, 오히려 그 심연을 바라보는 인물들. 어쩌면 그 점이 이 영화의 모든 인물들을 무대 위 존재로 보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넓게 보면 아네트뿐 아니라 모두가 목각인형처럼 움직이고 있다. 인물들은 마지막 장면에서야 내게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래서였을까. 엔딩 장면을 보는 내내 이유 모를 눈물이 줄줄 났다.
인간은 왜 심연을 바라보게 되는가. 아니 심연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무엇을 응시하고 있었는가. 무엇에서 눈을 떼고 심연으로 시선이 이동하게 되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헨리의 삶으로 영화는 대답한다. 감독이 자랑스럽게 또 사랑스럽게 언급하는 그 딸의 존재를 비롯하여, 헨리에게서는 레오 카락스 감독의 냄새가 난다. 감독의 개인사는 물론 감독이 스스로에게 갖는 감정들이 반영된 캐릭터로 보인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만들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하는,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는 엔딩 장면은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말이 들어있다. 심연을 바라보지 말라는 말은 다시 말하자면 심연을 바라보기 전까지 응시하던 것들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는 뜻으로 치환해도 괜찮지 않을까. 사랑과 예술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던, 고된 것 같아도 자부심으로 빛나던 얼굴을 잃지 않고 삶에 발 디딘 채 살라는 말로.
극중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그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불쾌한 골짜기 너머 심연의 존재를 인식하며, 화려하고 그로테스크한 것들이 온통 엉켜 있는 영화 바깥으로 나온다. 아주 어쩌면, 영화 산업의 빛과 어둠을 하나로 뭉치면 이 영화와 같은 색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영화라는 세계로 들어갔다 나오는 기분을 이토록 선명하게 느끼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막이 오르면 세상은 무대가 되고, 막이 내리면 우리는 영화 바깥으로 다시 정중하게 퇴장을 요구받는다. 엔딩 크레디트 다음에 나오는, 인물들이 등을 들고 걸어가면서 부르는 노래는 "좋았다면 친구에게 이야기하세요. 친구가 없다면 모르는 사람한테라도 이야기하세요."라는 가사가 귀엽기까지 하다. 순순히 시키는 대로 안녕히 돌아오면서, 등 뒤로 막이 내리고 문이 닫힌 것 같은 착각마저 느낀다. 심연 대신 삶을 응시하며 걸어간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GQ코리아의 레오 카락스 인터뷰 <레오 카락스의 선명한 세계>를 참고하고 인용하였습니다.
https://www.gqkorea.co.kr/2021/10/19/%EB%A0%88%EC%98%A4-%EC%B9%B4%EB%9D%BD%EC%8A%A4%EC%9D%98-%EC%84%A0%EB%AA%85%ED%95%9C-%EC%84%B8%EA%B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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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숙해서 더 찬란했던 우리의 초록 시절
* 이 글은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 참석한 시사회를 보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교복을 입어 본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벌써 십 수 년은 되었으니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교복하면 또 소위 학창시절이라 불리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그때라고 하면 대한민국을 비롯한 모든 동북아시아 청소년들이 공유하는 트라우마적 기억, 입시 공부가 자동으로 연상된다. 시험을 잘 봐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던 시절, '그때로 돌아갈테면 그러겠느냐?'는 말에는 선뜻 예, 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인생 최대의 경쟁에 뛰어들어 이른바 보이지 않는 계급차를 경험한 최초의 시기가 바로 그때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예나 지금이나 경쟁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때 그 시절이 끔찍하기만 했냐면 그건 아니다. 내겐 좋은 친구들이 있었고, 우린 서로가 가장 힘들 때 위로를 건네는 상담가였으며, 때때로 '노는 토요일'에 배달 음식을 시켜먹기, 야자 째고 나가 닭꼬치 사 오기, 선생님 몰래 교실 뒤편에서 화투치기 같은 소소한 일탈을 즐길 동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시절이 마냥 우울하지 않았다. 참 어렸지. 참 바보 같았지. 하고 웃으며 회상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소리다.
이러한 학창 시절의 정서는 꽤나 보편적이다. 적어도 입시제도가 있는 나라에서라면 어느 나라든 그럴 것이다. 특히 동북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처럼 입시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이 지속되어 온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대만 영화 <우리들의 교복 시절>은 한국에 사는 우리가 추억하는 그 옛날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영화다.
1. 내 나이 17세, 인생 참 쉽지 않다!
1999년 9월, 17세 펑원아이(이하 '아이')는 인생이 참 어렵다. '야간반이어도 좋으니 제일여고에 입학하라'는 엄마 성화에 못 이겨 제일여고 야간반에 입학하긴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열심히 공부해 사범대에 들어가'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어쩐지 와닿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쳐 오던 탁구는 이제 공부를 해야 하니 그만두란다. 여동생은 틈만 나면 언니 일을 일러바치기 일쑤다. 하여간 마음처럼 되는 일이 없다.
아이는 자기 교복이 신경 쓰인다. 옆집 언니에게 물려 받은 초록 교복엔 은색 학번이 수놓여 있고, 아이는 그것이 야간반을 상징한다는 걸 안다. 주간반 학생의 찬란한 금색 이름표 옆에 서면 그게 얼마나 초라해 보일지도. 몇몇 사람들에게 '짝퉁' 취급을 받는 그 야간반 신세를 3년 동안 감당할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하다.
2. 교복만 바꿔 입었을 뿐인데.
제일여고에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그건 한 책상을 쓰는 주간반, 야간반 학생들끼리 서로 짝꿍이 되는 것. 아이는 운이 좋았다. 공부도 잘하고, 예쁘고, 쿨하기까지 한 민과 짝이 되었으니 말이다. 주간반 애들은 잘난척쟁이에 깍쟁이이기만 할 것 같았는데, 민은 성격도 좋은데다가 놀 줄도 안다. 이것이 주간반 멋쟁이의 여유인걸까? 아이는 민의 삶이 근사해 보인다. 민이 하자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고 싶을 정도로.
우연한 계기로 민과 바꿔 입은 교복은 아이를 들뜨게 한다. 교복 하나 바꿔 입었을 뿐인데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 것 같고, 초라하기만 하던 내가 뭔가 특별해진 것 같다. 민을 따라 주간반 행세를 하면서 아이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멋있는 밴드 음악도 듣고, 잘나가는 애들이 다닌다는 수학학원도 다니고, 탁구장에서 만났던 잘생긴 제일고 남자애(루커)와도 썸을 타게 된다. 아이는 민이 짝사랑 상대가 루커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거부할 수 없다.
아이는 민의 주간반 교복을 더 오래 입고 싶다. 그걸 위해서는 그만큼의 땡땡이와 거짓말을 늘어놓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3. 이러려던 게 아닌데.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민은 아이와 루커의 관계를 알아차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의 폭로로 말미암아 루커도 아이의 정체를 알아버리고 만다. 오랫동안 쌓아온 거짓말의 탑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아이는 그 동안 외면해 왔던 주간반과 야간반 사이의 벽을 다시금 확인한다. 민과 루커의 곁에 아이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어 보이고, 아이는 더는 주간반 행세를 하지 않기로 한다. 주간반은 양, 야간반은 음이라던 선생님의 말씀처럼, 영원한 짝퉁, 은색 명찰의 세계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시련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엄마는 놀러다니느라 아이의 망한 성적표를 발견하고, 그 일을 계기로 아이와 엄마 사이의 냉전이 시작된다. 단골 탁구장은 문을 닫는다. 새 마음 새 뜻으로 공부를 다시 시작했지만 무엇 하나 예전 같지 않다.
4. 우리 세상이 온통 흔들렸어.
그러던 어느날, 세상이 온통 흔들렸다. 1999년 9월 21일. 갑작스레 닥친 대지진은 건물이 무너뜨리고, 수 천 명이 죽였다. 그 생사의 갈림길, 모두가 공유한 어떤 공통된 시련을 통해 아이는 오랜 시간 자존심과 부끄러움에 가리웠던 소중한 것을 깨닫는다. 원망할지언정 마냥 미워할 수 없는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을 말이다! 아이는 엄마의 억척스러움에서 딸들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민과의 재회를 통해 둘 사이에서 정말로 중요한 건 주간반과 야간반의 차이가 아니라, 둘이 나누었던 진실된 우정이었음을 알아차린다.
5. 청춘의 이름으로 현실 깨부수기
이 영화는 펑원아이와 친구들의 우정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함과 동시에, 학벌주의와 계급주의가 만연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직관적인 비판을 드러낸다.
동북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좋은 성적은 좋은 대학을 담보하고, 좋은 대학은 좋은 직장을 높은 확률로 보장하며, 좋은 직장을 가진다는 것은 곧 많은 돈을 벌게 되는 것이므로 계급 상승의 가장 손쉬운 수단이 된다. 이것을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동북아의 많은 청소년들은 돈을 잘 벌기 위해 공부하는 셈이다. 그러나 소위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는 소위 '잘 사는' 사람들이 자식들에게 더 좋은 교육을 제공하고, 더 좋은 교육을 받은 아이는 더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이 높다. 이러한 환경에서 입시를 준비한다는 것은, 결국 그 이른 나이부터 돈과 학벌 따위로 야기된 새로운 계급적 장벽을 마주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경쟁, 비난, 폄하를 수반한다. 펑원아이의 야간반이 '짝퉁' 취급을 받아온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신 계급주의와 학벌주의는 결국 정형화된 이상을 강요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 '좋다고(돈을 많이 번다고)' 알려진 직업을 가지라고 속삭인다. 이러한 사회를 사는 사람은 사회가 주입한 이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후천적 완벽주의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세상에 정말로 완벽한 사람은 없는 바, 사람들은 완벽을 가장하기 시작하는데, 펑원아이의 '주간반 노릇'이 그렇고, 민의 '재수생 시절'과 루커의 '부모님 불화' 따위 그렇다. 결국 아이들의 미숙함은 아이들 그 자체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몸담고 있는 일그러진 사회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러한 정형화된 틀 속에서 개인의 꿈과 욕망은 쉽게 거세당한다. 그리고 꿈을 잃은 사람은 어떻게 되냐고? 무료하고, 무력해진다.
펑원아이, 민, 루커를 비롯한 청춘들은 바로 이러한 사회에 반기를 든다. 크고 작은 일탈을 감행하면서, 서로 실수하고, 상처 주고, 다시 화해하면서, 그들이 놓칠 수도 있었던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바로 보고, 어른들이 쌓아놓은 '보이지 않는 벽'을 기꺼이 허문다.
민은 주야간반과 상관 없이 기꺼이 펑원아이에게 손을 내밀었고, 루커는 펑원아이와 같은 눈높이에서 경쟁하기 위해 올림피아드라는 쉬운(?) 대학 입학 기회를 떠나보내고 대입 시험에 임한다. 그리고 펑원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하게 된다. 관객으로서는 그가 어느 대학의 어떤 전공을 택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른 채 어른들의 기준에 휩쓸리기만 하던' 펑원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길을 스스로 찾아 그 길로 나아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작은 혁명의 길을 지난 사람에게 주간반과 야간반의 교복 중 무엇이 더 노란빛을 띠고 푸른빛을 띠는지, 왼쪽 가슴의 명찰이 금색인지 은색인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으리라.
아이와 친구들은 저마다 원하는 대학에 붙고, 그들은 주간반, 야간반 상관없이 둘러 앉아 꿈을 논한다. 꽉 닫힌 해피엔딩이며, 가장 부드러운 혁명이 성공을 거둔 순간이다.
펑원아이와 친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친구일까? 어느쪽이든 나는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혁명과 혁신을 거듭하면서 삶을 개척해 나갈 것 같다. 그 언젠가 초록 교복시절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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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로의 또 다른 시도'라는 말도 이제 식상해
동상이몽
멀지 않은 미래의 대한민국. 현재 인류는 위기 속에 있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올라간 해수면. 인류는 우주를 뒤져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다. 인류가 그곳에 붙인 이름은 ‘쉘터’다. 80여 개의 쉘터를 만든 인류. 시간을 들여 사람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그 쉘터 중 8,12,13가 스스로를 ‘아드리안’이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전쟁을 벌이는 인류. 지구에 남은 사람들은 이 아드리안과 인류의 전쟁을 위해 자원을 생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와 지구. 전설적인 군인 윤정이가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로봇 병사들이 떼거지로 몰려오고 있다. 힘든 싸움을 펼치는 정이. 부수고 뜯었다. 로봇들을 두들겨 패는 정이. 그런데 갑자기 정이가 정지됐다. 다른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알고 보니 정이는 AI였다. 인류는 실존인물이었던 정이를 AI로 개발하고 있었다. 이 인간만 아니었어도 마지막 작전이 성공했어. 투정하는 과학자들. AI인 정이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 인류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려 한다. 한 사람만 다르다. 과학자 중 서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혼자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 인물이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익숙한 연상호 유니버스
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싶으면 맞다. 이 영화는 연상호 감독의 작품 세계의 연장선상같이 보인다. 우선 영화의 근본적인 장르 설정 두 개는 ‘디스토피아’와 ‘그 세계관 아래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행동’이다. 디스토피아적 세팅은 <반도>에서 봤었다. 좀비가 인류의 일상을 파괴시켰다가 영화에서 가장 기본적인 세팅이었던 <반도>. 많은 분들이 감독의 전작 <부산행>에서 봤던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뭔가 나사가 빠진 좀비들에게 실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글쓴이는 좀비가 들어가는 장르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냥 소설 보는 셈 치고 봤다. 그런 것 때문인지 그냥 아무 무리 없이 봤던 기억이 있다. 이때 극에서 시각적인 효과를 나름 탄탄하게 잘 묘사했던 기억이 있다. 이 디스토피아적인 묘사는 살짝 다르지만 비슷한 결이었던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과도 이어진다. 사실 <지옥>의 공간적 배경인 곳은 완전 현대적인 대한민국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드라마의 설득력에 있어 가장 중요했을 ‘그것’ 묘사가 좋았다. 처형하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이 덕에 많은 분들이 연상호 감독의 최고작 중 하나로 <지옥>을 뽑기도 한다. 애니메이션 제작하던 경험치는 역시 어디 가지 않는다.
‘세계관 아래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행동’ 역시 많이 봐 온 것의 연장선상이다. 우선 <지옥>에서 이 특성이 가장 두드러졌다. 이 드라마를 생각해 보면 인물들의 이야기가 단순히 소개되는 선에스 끝난다. 극 중 범죄집단인 화살촉이 해체 위기를 겪긴 하지만 짠하고 사라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인류는 왜 ‘그것’이 등장하는지 증명할 수 없다. 이는 곧 영화에서 중요한 것이 이 세게관 아래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서울역>이나 <부산행>에서도 극단적인 세팅 아래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핵심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이 그 예시로 들 수 있다.
이렇게 연상호 감독은 이런 작품세계의 연장선상을 이 <정이>에도 끌고 왔다. 영화에서 디스토피아를 묘사하는 방식을 보면 이 미장센의 힘을 잘 활용했다고 생각한다. 뭔가 축축하고 처지는 색감을 바탕으로 로봇들을 묘사하는 방식은 이야기에 몰입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게끔 보여준다. 역시 이런 SF 장르는 좀 있어 보여야 한다. 영화에서 주요한 활동반경이 되는 장소는 또 선명하지만 익숙한 맛으로 잘 만들어냈다.
보고 또 보고
영화에서 느껴졌던 가장 첫 번째 단점은 이걸 또 봐?라는 점이다. 글쓴이가 연상호의 영화를 이 것 하나만 봤다면 ‘볼만했다’라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연상호의 작품 세계를 몇 작품 봤다. 이런 입장에서 그의 <정이>가 신선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정이> 이거 <부산행>이랑 <반도> 합친 것 아닌가? 이야기 형식은 <지옥>을 빌렸다. 어떤 점에서 공통점을 가질까? 바로 주인공들이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그 아래에서 인물들이 나름대로 살아가는 것을 묘사한다는 점이 그 근거가 될 수 있겠다. 이 과정에서 품고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을 공략한다는 점이 두 작품의 공통점이다. 뭐 같은 말을 하더라도 좀 신선하게 전달하면 색다르게 느꼈을 것 같다. 그런데 너무 기존 작들이랑 비슷하니 영화에서 신선하다고 느껴지지가 않았다.
뭐 이렇게 배경이 인물들과 딱딱 맞아떨어지게 설정이 꼭 되라는 법은 없다. 단순히 전작 <지옥>만 봐도 그런 세팅 아래에서 하고 싶은 것들 다 할 수 있다. 그만큼 이야기를 잘 짜면 기획의도에 대한 설득력이 생기지 않을까? 그런데 영화가 굉장히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은 줄거리를 전개하는 방식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윤정이가 로봇들과 싸우는 액션 신이다. 이 액션 신은 정이가 AI라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신이다. 그런데 이 이후의 장면들이 좀 매가리가 없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인물들이 품고 있는 속사정이 극에서 이야기의 키포인트로 묘사된다. 이걸 처음부터 전개했어도 큰 무리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이야기를 전개할 때 에피소드처럼 삽입되는 장면들이 맥이 끊긴다. 이는 어떤 인물의 존재감이 큰 원인이 된다. 안 그래도 본 연상호의 세계관에 균열까지 가는 연출이 들어간 것이다.
초 치는 캐릭터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는 류경수 배우가 맡은 상현 역이다. 이 상현 역은 초반부부터 계속 나오면서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야기의 행동대장격 악역 정도로 극에서 포지션을 잡았다. 이 인물의 작중 행적이 너무 작위적으로 짜였다는 것은 둘째로 둔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너무 외적으로 보이는 것에 신경 썼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 인물이 (나름 자기 딴에는) 웃긴 대사를 하는 장면이 몇몇 있다, 일부러 불쾌한 골짜기를 유도했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하나도 안 재미있다. 또 말이 너무 많다. 극에서 서현의 감정선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 사람 때문에 신경 쓰여서 집중이 안 된다. 이 재미없는 유머는 후에 어떤 인물의 특성을 설명하는데 키포인트가 된다. 그런데 이 키포인트가 영화의 내적 논리에서 생략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냥 영화에서 '내가 그렇게 했다' 이 한 마디만 해도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떡밥 수거로 연출적인 쾌감을 주고 싶었던 걸까?
이 외에도 특별출연 정도로 등장한 한 캐릭터와 성적인 코드가 들어가는 방식은 도식적으로 뽑아냈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 인물이 좀 중요하게 나올 것 같이 하고 별 영양가가 없었다는 점이나 악랄한 내면을 묘사하기 위해 삽입된 장면은 불쾌한 골짜기만 두드러지고 영화에서 별로 기능하지 못한다. 그러나 상현 외의 캐릭터를 묘사하는 것 중 많은 분들이 그럴 것 같고, 또 글쓴이가 좋지 않게 생각한 것은 역시 ‘이 소재’다. 이 요소가 없으면 넷플릭스한테 투자를 못 받나? 그런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부산행>에서 이걸 넣었고 상업영화로서의 고점이 여기 있었으니 유사한 것을 넣고 싶었던 걸까? 그런데 <정이>가 이 요소에 임팩트를 주기엔 인물들과 배경이 큰 관계가 없다는 점이 역효과로 느껴진다. <지옥>은 감정적으로 과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선한 시도라는 말도 이제 식상해
<승리호>라는 작품이 공개되고 난 후의 반응이 생각난다. 아마 씨네 21이었나. 처음 발표되고 나서 긍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뤘다. 솔직히 기대했다. 뭐 한국영화에서 SF를 새롭게 시도해서라는, 뭔가 거창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뭔가 어색했다. 영화와는 맞지 않아 보였던 외국인 배우들이나 이상한 대사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후반부 신파극은 뭐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영화를 뭐 좋아하는 분도 있겠지만 글쓴이는 이런 이유로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SF 세계관을 설명하는 비주얼은 잘 뽑았지만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남매의 집>과 <짐승의 끝>으로 기본적인 연출력을 보여줬던 건 우연일까? 경험치가 있는데도 이런 결과물이 나온 것이 굉장히 아쉬웠다. 초반 평가가 좋게 나온 게 나만 몰카 찍는 줄 알았다.
이 감상은 2023년에도 이어진다. <지옥>의 연상호는 뭔가 달랐다. 다른 영화들에서 보여준 것과는 다르게 광기가 보였다. 오. 내가 아는 연상호의 연출력이 어디 가지 않았다. 이야기 전개도 처음엔 낯설었지만 식상하지 않고 오히려 신선했다. 유아인, 박정민 두 배우의 열연이 이에 힘입어 시너지를 냈다.
그러나 이 <정이>는 그를 상회할 정도의 단점만 느껴진다. 이제는 모녀간의 관계를 강조한 드라마를 좀 많이 본 듯하다. 인간사의 기본(?)과도 같은 모성애. 작년에 모든 것을 죄다 때려 박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있었다. 이것도 엄밀히 따지면 모성애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그런데 어떻게? 의 관점에서 다른 방식을 썼다는 것이 영화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이>는 sf 시각화 방식도 연상호 영화의 연장선상이고, 많이 상투적인 모성애 모티브까지 매크로 같은 작품이 탄생했다는 점에서 아쉽게 느껴진다. 혹자는 이 영화를 두고 '신선한 시도가 좋았다' 혹은 '외국에서 시청자들이 많았다'라는 말을 할 것 같다. 글쓴이는 좀 반대로 생각하고 싶다. 정말 이 시도가 신선할까? 심형래 감독의 <디 워>부터 들렸던 이야기가 보고 또 보고 반복되는 것이 이젠 좀 진부하게 느껴진다. 결정적으로 한국 영화에서 신선하다는 말이 그냥 일반 관객들에게 얼마나 유의미한지 의문점이 든다. 외국영화든 한국영화든 그냥 똑같은 영화기 때문이다. 신선한 시도는 김현주 배우만 한 듯 하다.
하늘의 별이 된 강수연 배우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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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바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스르고 접붙여
6★/10★
87년 동안 물질을 해온 현순직 해녀와 이제 막 해녀 일을 시작한 30대의 채지애 해녀. 〈물꽃의 전설〉은 두 해녀 사이에 놓인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스르고, 접붙인다. 해녀 일에 대한 현순직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녀는 물질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았고, 그곳에서 항상 능력을 인정받았다. 현순직은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종종 바다로 나가 지난날을 회상한다. 이미 중년이 된 막내아들은 혹시나 어머니가 또 바닷속에 들어갈까 걱정되어 전화로 신신당부하고, 현순직은 속내를 들켰다는 듯 웃는다. 현순직에게 바다는 삶 그 자체다.
채지애 해녀는 사회생활을 해녀 일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채지애의 어머니는 대학을 나오고 직장에 다니던 딸이 해녀 일을 하겠다는 게 영 마뜩잖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해녀 일은 “낭만적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고된 노동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채지애의 어머니는 아기 우윳값이라도 벌겠다는 절박함으로 수십 년간 물질을 해왔다. 제주의 해녀라면 눈 내리는 바다에서 물질한 후 외로이 숨비 소리를 낼 때의 고독함과 친해져야만 한다. 그러나 동시에, 딸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그녀 물질의 목표였던 딸과 같은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지난 삶에 대한 딸의 이해와 공감이라는 형태로 돌아왔음에 대한, 즉 그녀의 노동이 소외되지 않았음에 대한 떳떳함의 발로일 것이다.
해녀가 경력이 쌓이고 능력을 인정받으면 ‘상군 해녀’라 불린다. 현순직은 상군 중의 상군인 ‘대상군 해녀’였다. 대상군 해녀는 구전되어 내려오는 바닷속 지도와 지형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해녀에게만 허락된 이름이다. 현순직은 지금도 그 풍경이 눈에 훤하다는 듯 바다별 특징과 그곳에서 잡을 수 있는 해양 생물을 줄줄이 읊는다.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황홀한 바닷속 ‘들물여’로 채지애와 함께 향한다.
그러나 현순직의 기억과 지금 제주 바닷속 정경은 일치하지 않는다. 채지애는 현순직이 일러준 곳에 들어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물꽃을 찾아 헤매지만 끝내 실패한다. 바다가 예전 같지 않다는 채지애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내 들물여에 가면 물꽃을 볼 수 있다고 고집스레 자신만만해하던 현순직은 아쉬움에 탄식한다. 들물여뿐만이 아니다. 제주의 해녀들이 자주 물질을 나가는 바다도 공장에서 배출된 폐수로 시야가 뿌예지는 일이 잦다. 제주 바다는 해녀들에게 이전만큼 많은 것을 내줄 수 없다. 그만큼 병들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는 두 여성이 목격하고 기억하는 일터의 모습이 이토록 다르다. 이는 현순직과 채지애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현순직은 짙은 제주 사투리를 구사한다. 그래서 그녀의 말은 영화에서 자막과 함께 나온다. 섬이라는 제주의 지역성과 그녀가 일터에서 습득한 언어의 특성상 표준어를 쓰는 일반 대중이 매끄럽게 듣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채지애는 현순직의 말을 자막 없이도 알아듣고, 현순직과 능통하게 소통한다. 그런 그녀조차 현순직의 기억과 경험을 온전히 따라갈 수 없다는 데서, 영화는 아릿함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대체 해녀도, 제주도민도 아닌 사람들에게 현순직이 목격한 것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물꽃의 전설〉이 두 해녀를 함께 들물여로 보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두 해녀의 관계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을 들물여로 보낸다. 현순직이 가진 것이 채지애를 경유함으로써만, 즉 ‘번역’을 거쳐야만 전달할 수 있다고 판단해 다큐멘터리의 장르 특성을 고려했을 때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는 장면을 삽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언급했듯, 〈물꽃의 전설〉은, 채지애는 끝내 현순직의 기억 속 풍광에 접속하지 못한다. 제주 바다는 이 모든 실패에 별 관심이 없다는 듯, 혹은 실패의 아픔마저 보듬겠다는 듯 처연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이 영화가 자아내는 아릿함을 더한층 부각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현순직과 채지애 사이의 시간을 곱씹게 한다. 점점 오염되가는 제주 바다에서, 들물여의 뭋꽃은 현순직과 그 운명을 함께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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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살 차이 나는 커플의 사생활을 밝혀나가는 어느 배우의 탈선!
시놉시스
그레이시는 자신보다 23살 어린 남편 조와 결혼해 미국의 신문 1면에 공개된 적이 있다. 그런 과거를 알아보려고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의 가정에 찾아가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배우라서 그런지 자신의 영화에 쓰일 자료를 모으려고 그레이시와 조의 관계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한다. 그레이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엘리자베스를 반갑게 맞이하지만 점점 심해지는 그녀의 집착에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하는데...
엘리자베스 (나탈리 포트만)
엘리자베스는 줄리아드에 나온 배우이며 여러 영화들을 찍었다. 그리고 연출도 하고 있는데 그레이시에 대한 사생활을 그녀의 지인들에게 캐묻기 시작하고 많은 정보들을 알아낸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레이시의 남편인 조까지도 유혹한다. 조의 직장에 들어가서 그가 하는 일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친해지기 시작하는데 결국에는 성관계까지 맺는다.
천식이 있어 호흡기가 있어야 되며 부모가 너는 너무 똑똑한데 왜 배우를 하냐고까지 물어봤다고 한다. 또한 자신보다 내면이 여리고 어린 조와 불륜을 시작하면서 곤란하게 만드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레이시 (줄리안 무어)
그레이시는 자신보다 23살 어린 남자인 조와 결혼했다. 자신은 만난 남자도 별로 없으며 조와는 반대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집에 오자마자 큰 환영을 하지만 그런 엘리자베스의 집착에 싫증이 나고 자신을 전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레이시가 가족을 꾸리기 전에는 톰이라는 사람과 사귀었는데 톰은 변호사이며 범죄자들을 변호하는 역할만 해오다 그레이시에게 또 다른 남자인 조가 생기자마자 헤어진 것 같다.
조를 사랑하지만 그런 조를 가끔씩 미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총으로 동물 사냥하는 걸 즐기고 가족에게 헌신적이다.
조 (찰스 멜튼)
조는 내면이 불안하지만 여리고 자신의 아들인 찰리와 딸인 매리를 엄청 챙긴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맞는 찰리와 매리를 무척 아끼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자식들을 떠나보내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자신보다 23살 연상인 그레이시와 사귀었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 독립하지 못한 어른 아이가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은 한국 혼혈이며 집 안에서 나비 애벌레를 키우는데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나비가 되면 하늘에다 날려보내준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 모를 혼란을 겪고 있다.
<하니엘의 주관적인 해석>
이 영화는 불륜에 대해 다루고 있고 삼각관계를 미묘하게 영화에 녹여냈으나 안타깝게도 관객들이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은 것 같았다. 필자도 이해가 쉽지 않았는데 23살 차이가 나는 그레이시와 조의 관계에 끼어드는 엘리자베스를 보니 정말 자신의 연기에 이용하기 위해 둘의 관계에 대해 주변인들에게 캐묻고 그것에 대한 사생활을 이용한 것 같다.
그런데 그레이시와 조는 각자 내면의 상처가 있었고 그 아픔을 안고 사는 듯하다. 미묘한 둘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사람의 도덕 기준과 혼란스러운 심리를 다룬 영화라고 생각한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써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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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버스라는 늪에서 악전고투하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간여행을 통해 바네사를 되살리고 일상을 되찾은 '데드풀/웨이드 윌슨'(라이언 레이놀즈).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데드풀은 이제 어벤져스에 가입해 조금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어벤져스로부터 거절당하고, 그 좌절감을 이기지 못해 '바네사'(모레나 바카린)와도 이별한 후 '피터'(롭 딜레이니)의 도움을 받아 중고차 딜러 일을 하며 지낸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온다. '울버린'(휴 잭맨)의 죽음과 함께 엑스맨 유니버스가 소멸될 상황이 되자, TVA에서 데드풀을 MCU의 일원으로 캐스팅한 것. 데드풀은 '마블의 예수'가 될 것이라 들뜨지만, 흥분도 잠시. 그는 엑스맨 유니버스를 곧장 파괴하려는 '패러독스'(매튜 맥퍼딘)의 음모를 눈치채고, 자기 우주와 친구들을 구하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모든 면에서 상극이고, 자기 우주를 구하는 데 실패한 또 다른 '울버린'과 함께.
MCU의 예수는 되지 못하다
2024 슈퍼볼에서 처음 공개된 <데드풀과 울버린>의 티저 예고편. 2분 남짓한 영상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공개 24시간 만에 3억 6,50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기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하 <노 웨이 홈>)의 3억 5,550만 조회수를 뛰어넘었다. 특히 한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바로 마블의 예수님이야"라는 데드풀의 대사는 MCU와 멀티버스 사가에 신선한 피가 수혈될 거라는 기대감을 높였다.
기대가 너무 큰 탓일까? <데드풀과 울버린>은 안타깝게도 기대에 미치 못했다. 데드풀과 멀티버스 사가의 만남 자체는 인상적이다. 데드풀만의 특색과 입담을 살려 디즈니의 20세기 폭스 인수 사가를 작품 내에서 풀어냈다. 엑스맨 버전 <노 웨이 홈>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엑스맨>, <판타스틱 포>, <데어데블>, <블레이드> 등 2000년대 초중반을 수놓은 과거 마블 캐릭터들에게 명예로운 엔딩을 안겨 주었다.
다만 MCU 멀티버스 사가의 문제점은 여전하다. 멀티버스 캐릭터에게 내준 공간만큼 데드풀과 울버린의 자리가 줄었다. 그 결과 데드풀도, 울버린도 각자의 서사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 냉정히 말해 휴 잭맨이 복귀했다는 것 외에 의의가 없을 정도다. 프로모션 과정 내내 강조한 데드풀과 울버린의 버디 무비라는 개성도 덩달아 옅어진다. 결국 <데드풀과 울버린>이 MCU의 구세주냐는 질문에도 '아니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폭스의 <노 웨이 홈>
데드풀의 가장 큰 개성은 자유로움이었다. 그는 작품 내외를 오가며 히어로 영화의 금기를 전부 다 깨버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엑스맨 유니버스에 속하면서도 따로 노는 미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MCU는 이를 엑스맨 유니버스와 MCU의 가교로 삼았다. 데드풀의 입담과 액션을 활용해 작품 외적인 이유로 퇴장했던 캐릭터에게는 마지막 인사의 기회를 주고, 세계관 자체는 멀티버스 속에 남겨두며 미래를 기약한다.
당장 기본적인 스토리부터가 현실의 은유다. 데드풀이 자기 우주를 파괴하려는 TVA에 맞서는 것은 디즈니의 폭스 인수로 인해 종료된 엑스맨 유니버스의 상황을 보여준다. 자기 우주에서 엑스맨을 구하지 못한 울버린의 모습도 마치 엑스맨 유나버스의 종료를 막지 못한 현실의 울버린을 보는 듯하다. 그들이 과거 마블 영화 캐릭터를 지배하려는 카산드라 노바와 싸우는 것 또한 MCU에 병합돼야 할 엑스맨 유니버스의 현실을 은유한다.
그 덕분에 영화는 다시 못 볼 캐릭터로 가득하다. 촬영은 완료했으나 공개되지 못한 채닝 테이텀의 갬빗과 <로건> 속 로라를 비롯해 파이로, 토드, 아자젤, 저거너트 같은 조연이 재등장한다. 이에 더해 크리스 에반스의 휴먼 토치, 제니퍼 가너의 엘렉트라, 웨슬리 스나입스의 블레이드 등 과거의 영웅도 마지막 인사를 보낸다. 즉, <데드풀과 울버린>은 20세기 폭스 버전의 <노 웨이 홈>이다. 엑스맨 시리즈를 비롯한 예전 마블 영화의 추억을 지키려는 메타적 노력의 산물인 셈이다.
다만 일반 관객 입장에서는 MCU 멀티버스 사가 중 진입장벽이 가장 높다. 일단 엑스맨 유니버스를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고, <판타스틱 포>, <블레이드>, <데어데블> 시리즈를 보지 않았다면 등장인물조차 알 수 없다. 또 <로키> 시즌 1을 보지 않으면 TVA, 보이드, 알리오스와 신성한 시간대 같은 설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갬빗의 경우에는 디즈니-폭스 인수 사가와 관련된 뒷이야기까지 꿰고 있어야 한다.
스파이더맨이 되지 못한 울버린
그러나 <데드풀과 울버린>의 완성도는 <노 웨이 홈>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 핵심적인 전제 하나를 놓친 까닭이다. <노 웨이 홈>의 힘은 과거의 두 스파이더맨에서 비롯했다. 그들이 과거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모습이 시간을 뛰어넘는 감동의 원천이었다. 토비 맥과이어의 피터가 그린 고블린을 치료하고, 앤드류 가필드의 피터 파커가 추락하는 MJ를 구해내는 모습은 팬들의 상상과 염원을 스크린에 펼쳐 보이는 순간이었다.
<데드풀과 울버린>도 비슷한 방식으로 울버린을 활용하려 한다. 엑스맨을 구하지 못한 멀티버스의 로건을 기존의 엑스맨 유니버스로 불러와서 그가 다시 히어로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문제는 이 울버린이 지난 20여 년간 엑스맨 시리즈에서 활약한 울버린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예전 스파이더맨과는 달리 이번 울버린은 관객과 감정적으로 공감하고 교류할 길이 없다.
불친절한 전개는 문제를 더 키운다. 멀티버스의 울버린이 좌절한 이유나 정황은 실감하기 어렵다. 흔한 플래시백 하나 없이 대사로만 제시되기 때문. 그가 엑스맨으로 나서기를 주저하는 이유도 알기 어렵고, 로라가 멀티버스의 로건에게 그의 본성과 영웅성을 일깨우는 대화도 임팩트가 부족하다. <노 웨이 홈>에서 과거의 스파이더맨이 MCU의 스파이더맨에게 조언을 건네는 장면과 비교하면 차이가 명백하다.
이 괴리감은 오프닝 장면에서부터 암시된다. 데드풀은 영화 시작과 동시에 <로건>에서 묻힌 울버린의 무덤을 파헤친다. 그러고는 울버린의 아다만티움 뼈를 이용해서 자신을 뒤쫓아온 TVA 요원들을 때려잡는다. 물론 분위기나 연출 자체는 데드풀답게 유쾌하고, 데드풀도 관객에게 사과를 건넨다. 하지만 <로건>의 결말을 기억하는 입장에서는 마냥 즐기기 어렵고, 이번 울버린과의 거리감이 더 멀어지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울버린과 함께 무너지는 데드풀
이에 더해 <데드풀> 영화인데도 데드풀의 서사를 살려내지 못했다. <데드풀> 시리즈의 매력은 평범한 주제나 메시지를 데드풀스럽게 풀어낸다는 점에 있다. 1편은 로맨스 영화를, 2편은 가족 영화를 B급 유머로 범벅해 흥미롭게 풀어낸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데드풀과 울버린>은 친구와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된 2편 이후로 무언가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데드풀. 그는 MCU의 어벤져스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어벤져스로부터 거절당한 후 크게 좌절했고, 평범한 일상에 적응하지 못한 채 헤맸다. TVA에서는 마침내 MCU의 예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종국에는 그 꿈도 포기한다. 친구들과 그들의 일상을 지켜내는 것, 그리고 새롭게 만난 친구인 울버린을 지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분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영화는 울버린과 다른 캐릭터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 결과 데드풀의 서사는 직접적인 묘사 대신 상황 설명 대사로 자주 대체된다. 일례로 데드풀의 우주가 위험하다는 상황 설명도 패러독스의 대사로만 언급되니 실감하기 어렵다. 결국 <데드풀과 울버린>의 끝에는 데드풀다운 유머만 남는다. 시작과 끝을 장식한 내레이션 없이는 데드풀만의 서사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데드풀도, 울버린도 없는 버디 무비
전반적인 만듦새도 덩달아 미흡해진다. 두 주연 개개인의 서사가 부족하니 버디 무비인데도 둘의 호흡은 매끄럽지 않다. 예를 들어 울버린은 갈수록 데드풀에게 끌려다니는 듯하다. 새로운 울버린에게 마음을 주기 어려운 가운데 시리즈 내내 데드풀을 봐온 관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 시퀀스와 시퀀스의 연결도 부자연스럽다. 꼭 보여줘야 할 멀티버스 이벤트를 먼저 설계한 뒤, 데드풀과 울버린의 행적을 짜 맞춘 듯 보인다.
그래서 클라이맥스가 뒤바뀐 듯 보이기도 한다. 중반부 보이드에서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는 작중 가장 뛰어난 퀄리티를 자랑한다. 여러 돌연변이와 히어로들이 뒤엉켜서 각자의 능력을 뽐내는 이 장면은 마치 <엑스맨: 최후의 전쟁> 속 알카트라즈 시퀀스를 보는 듯하다. 과거 시리즈와 캐릭터들에 대한 헌사가 가득하기에 뭉클하기까지 하다.
그에 반해 데드풀과 울버린이 데드풀 군단을 마주하는 시퀀스는 임팩트가 부족하다. 물론 <올드보이>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를 연상시키는 액션 자체의 쾌감은 나름 인상적이고, MCU의 멀티버스 설정을 비꼬는 대사는 유쾌하다. 하지만 데드풀과 울버린의 서사가 부족하다 보니 단순한 팬서비스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시퀀스를 들어내더라도 스토리 전개에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악역의 존재감이 확실했다면 상술한 문제는 다소 가려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산드라 노바'(엠마 코린)는 능력에 비해 존재감이 약하다. 그녀는 '보이드'로 떨어진 모든 캐릭터를 지배하고, 그러기 위해 모든 시간선을 붕괴시키려 한다. 이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역의 클리셰를 비튼 것에 불과하다. 그녀의 개인사마저 명확하지 않다 보니 그녀가 울버린의 이야기에 공감하거나 마음을 바꾸는 전개 또한 다소 급작스럽다.
MCU의 고질병이 또 도지다
결국 <데드풀과 울버린>은 MCU의 고질병을 피하지 못했다. 이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나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등이 줄곧 노출한 문제점의 연장선이다. 이번에도 세계관 정리에는 성공했다. 꼬여버린 엑스맨 유니버스에게 깔끔한 엔딩을 선사하고, 이전 마블 영화와 MCU의 관계를 정리했다. 추후 MCU가 선보일 <엑스맨>과 <판타스틱 4>, <블레이드>, <데어데블> 등을 위한 길은 닦은 셈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독립적인 작품으로서의 매력은 잃어버렸다. 더 나아가서는 데드풀이나 울버린이 MCU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그 가능성도 제시하지 못했다. 즉, 지반을 정리하고 기초 공사까지는 완료했지만, 정작 그 부지 위에 무슨 건물을 올릴지 조감도조차 못 보여줬다. 그러니 MCU의 구세주라고 부르기에는 <데드풀과 울버린>이 남긴 아쉬움이 너무나도 크다.
Acceptable 무난함
데드풀과 울버린도 빠져나오지 못한 멀티버스의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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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이 아닌 곳으로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건 서사일까. 물론 이야기의 기승전결 뼈대는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서사를 통해서도 감정을 실어나르는 쪽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사뿐 아니라 미술, 음악, 카메라 등 모든 요소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협업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서사 없는 영화는 있어도 감정 없는 영화는 없다고도 느낀다. <아네트>도 그렇다. 서사는 자못 단순하지만 그 안의 감정은 깊다.
감독 본인이 초반에 등장해 이제 시작하자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사람은 딸이다.), 배우들이 차례차례 등장하는 영화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가 현실이 아니라 극임을 똑똑히 못박는다. 이제 이 선을 넘어 현실이 아닌 곳으로 들어가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잠시 현실에서 눈을 돌려 몰입할 이 세계는 나에게 어떤 감정을 안길 것인가.
기대하는 관객 앞에, 이 영화를 함께 제작한 밴드 스팍스에 이어 배우들이 노래하며 차례차례 등장한다.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야르, 사이먼 헬버그까지 나란히 서서 노래할 때, "So may we start? 이제 시작할까요?" 하고 물을 때, <라라랜드>의 오프닝 시퀀스 생각도 나고 뮤지컬 시작할 때 같은 기분도 든다.
영화는 앤(마리옹 꼬띠야르)과 헨리(아담 드라이버)의 사랑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두 사람 다 무대에 오르는 직업이지만 양상은 많이 다르다. 오페라 가수인 앤은 드레스를 입고 무대보다 더 높은 무대로 올라가 장렬한 죽음을 맞는 반면, 스탠딩 코미디언인 헨리는 속옷 하나에 복서들처럼 로브 차림으로 직접 문을 열고 나와 마이크 줄을 채찍처럼 휘두른다. 어딜 가든 사과를 깨물고 있는 앤, 담배와 바나나를 들고 몸을 푸는 헨리. 관객을 죽여주는 헨리와 관객을 위해 죽어줌으로써 그들을 구원하는 앤. 두 사람이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둘을 보는 시선까지도 모두 다르다.
두 사람의 노래는 "We love each other so much 우리는 서로를 정말 사랑해"라는 가사를 반복한다. 둘을 둘러싼 세간의 시선을 잘 알고 있고,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푹 빠져있지만, 그 한 마디만 반복하는 사랑은 어쩐지 불안하다. 숲을 지나, 세상과 떨어진 곳에 두 사람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둘은 이내 결혼식을 올린다. 각자의 예술, 함께 부르는 노래, 중간중간 삽입된 기자들의 대사나 뉴스 보도를 통해, 사랑의 서사는 단순하게 쌓인다.
송스루 뮤지컬이란 참 특이한 장르다. 모든 대사가 노래로 표현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영화에서라면 인물의 표정과 입 모양으로 단박에 구분될 대사와 독백, 방백이 따로 없이 모두 노래로 흘러나온다. 그러다 보니 기묘하게 현실에서 들뜬 느낌, 현실과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레오 카락스 감독 특유의 독특한 스타일은 한층 더 새로운 감각들을 이끌어낸다.
무대에 오르는 일을 업으로 삼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고, 한 사람은 승승장구를 한 사람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감정의 골이 쌓이고... 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단순한 이야기에 스타일을 부여하면서, 기묘하게 현실에서 반쯤 떠오른 느낌을 준다. 인물들이 입는 원색 옷과 계속 등장하는 소품의 색깔조차 꾸며진 세계의 느낌을 더한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아빠의 농담과 엄마의 웃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아네트는 작은 목각인형으로 표현된다. 불쾌한 골짜기에 걸친, 그러니까 애매하게 사람을 닮다 말아서 더 기묘한 기분이 드는 모양새다. 이런 불쾌한 골짜기에 놓인 물체들은 어쩐지 자꾸 눈을 의심하면서 계속 바라보게 만든다. 징그러워 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그것을 계속 바라본다. 왜일까. 내가 바라보게 되는 건 어떤 지점일까.
아마도 죽음과 가까운 어딘가. 이 영화는 그곳을 심연(abyss)으로 부른다. 엔딩 크레디트의 스페셜 땡스투에 에드거 앨런 포가 있어 의아했는데,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토대로 쓴 곡이 있다고 감독이 밝힌다. "바다 위의 절벽에 매달린 상태로 바다를 쳐다보면 떨어져서 죽을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계속 쳐다본다. 멈출 수가 없는 거다. 그게 바로 심연에 대한 마음이다. 죽고자 하는 마음과 같은 것." (GQ코리아 인터뷰 <레오 카락스의 선명한 세계> 중에서)
극중 인물들은 모두 죽을 걸 알고도 뛰어드는 사람들처럼 존재한다. 생사를 의식하지 않는 인물들의 생사. 생에 아득바득하지 않는, 오히려 그 심연을 바라보는 인물들. 어쩌면 그 점이 이 영화의 모든 인물들을 무대 위 존재로 보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넓게 보면 아네트뿐 아니라 모두가 목각인형처럼 움직이고 있다. 인물들은 마지막 장면에서야 내게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래서였을까. 엔딩 장면을 보는 내내 이유 모를 눈물이 줄줄 났다.
인간은 왜 심연을 바라보게 되는가. 아니 심연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무엇을 응시하고 있었는가. 무엇에서 눈을 떼고 심연으로 시선이 이동하게 되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헨리의 삶으로 영화는 대답한다. 감독이 자랑스럽게 또 사랑스럽게 언급하는 그 딸의 존재를 비롯하여, 헨리에게서는 레오 카락스 감독의 냄새가 난다. 감독의 개인사는 물론 감독이 스스로에게 갖는 감정들이 반영된 캐릭터로 보인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만들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하는,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는 엔딩 장면은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말이 들어있다. 심연을 바라보지 말라는 말은 다시 말하자면 심연을 바라보기 전까지 응시하던 것들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는 뜻으로 치환해도 괜찮지 않을까. 사랑과 예술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던, 고된 것 같아도 자부심으로 빛나던 얼굴을 잃지 않고 삶에 발 디딘 채 살라는 말로.
극중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그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불쾌한 골짜기 너머 심연의 존재를 인식하며, 화려하고 그로테스크한 것들이 온통 엉켜 있는 영화 바깥으로 나온다. 아주 어쩌면, 영화 산업의 빛과 어둠을 하나로 뭉치면 이 영화와 같은 색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영화라는 세계로 들어갔다 나오는 기분을 이토록 선명하게 느끼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막이 오르면 세상은 무대가 되고, 막이 내리면 우리는 영화 바깥으로 다시 정중하게 퇴장을 요구받는다. 엔딩 크레디트 다음에 나오는, 인물들이 등을 들고 걸어가면서 부르는 노래는 "좋았다면 친구에게 이야기하세요. 친구가 없다면 모르는 사람한테라도 이야기하세요."라는 가사가 귀엽기까지 하다. 순순히 시키는 대로 안녕히 돌아오면서, 등 뒤로 막이 내리고 문이 닫힌 것 같은 착각마저 느낀다. 심연 대신 삶을 응시하며 걸어간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GQ코리아의 레오 카락스 인터뷰 <레오 카락스의 선명한 세계>를 참고하고 인용하였습니다.
https://www.gqkorea.co.kr/2021/10/19/%EB%A0%88%EC%98%A4-%EC%B9%B4%EB%9D%BD%EC%8A%A4%EC%9D%98-%EC%84%A0%EB%AA%85%ED%95%9C-%EC%84%B8%EA%B3%84/